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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1)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8년)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1)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8년)

대야발 2025. 3. 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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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이며, 언론인·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36년에 사망했다.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운동을 벌이며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항일을 고취하는 글과 역사서를 집필하면서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2년 이후에는 폭력을 통한 민중 직접혁명을 주장하여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28년 대만에서 체포, 여순 감옥에서 복역 중 순국했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였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사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 무애생(無涯生) · 열혈생(熱血生) · 한놈 · 검심(劍心) · 적심(赤心) · 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 · 변영만(卞榮晩) · 이장식(李章植) ·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 ·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 「서호문답(西湖問答)」 · 「영웅과 세계」 · 「학생계의 특색」 · 「한국자치제의 약사」 ·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 「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讀史新論)」 ·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 ·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少年)』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 · 『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 · 이동녕(李東寧) · 이회영(李會榮) · 이동휘(李東輝) ·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갑(李甲) · 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 · 안창호 · 최광옥(崔光玉) · 최남선 · 박중화(朴重華) · 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 · 이동휘 ·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 · 박은식(朴殷植) · 정인보(鄭寅普) · 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尹世茸) ·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 · 고구려 ·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신채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 · 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채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 · 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신채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 · 『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신채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 ·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 · 평등 · 폭력 · 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했으며, 최영 · 이순신 · 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 ·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채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신채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신채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 · 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학술서.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는 신채호의 역사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Hegel)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취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는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 역사학을 한다는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기자·삼한·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3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대단군조선과 불·신·말의 3조선설에는 문제가 많지만, 그가 이러한 체계를 위해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 무대를 중국 동북쪽 지역과 랴오시(遼西) 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 지역을 경영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 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 때문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일부에 국한되었다.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했던 식민주의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들에 반대하고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삼국 이전이요, 활동 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랴오시·발해만 유역·직예성·산둥·산시·화이허(淮河)·양쯔강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한사군의 반도내존재설에 반대하고, 한사군이 실재하지 않았거나 요하(遼河)지역에 존치(存置)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사관에서 고구려는 우리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 국가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고구려 900년설을 내세우면서 앞부분 200여 년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무제와 대결한 세력이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였다. 즉,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대외투쟁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경우 당(唐)세력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통설로서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김유신(金庾信)의 음모’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 책은 종래의 우리나라 고대사 인식과 다른 특이한 면을 제시했지만 문제점도 포함하고 있다. 교설적(敎說的)인 성격이 많이 나타나면서 민족주의 의식이 지나치게 투영되어 역사 서술과 그 가치 평가의 공정성을 감소시킨 것도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가 애써 강조한 실증성이 결여된 곳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2)

 

 

 

 

『황성신문』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치로 항일구국논설을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역사학자ㆍ언론인ㆍ독립운동가로서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조선의열단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은 불멸의 일제타도의 문건으로 평가되었다.

 

 
  신채호(1880-1936)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국치 직전인 1910년 봄에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포신문인 『해조신문』의 주필로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대종교의 중진 윤세복의 초청으로 1914년 서간도 봉천성 환인현 홍도천으로 가서 대종교와 인연을 맺는다.



망명 직전에 발표한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에서 '선교'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망명 이전부터 나철이나 대종교와 일정한 교유가 있었을 것 같다. 


 
신채호는 1914년 서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이미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서간도 봉천성 환인현 홍도천으로 가서 한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에도 대종교계통의 학교인 동창학교에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하는 한편,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 간행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당시 서간도로 망명할 때에도 대종교의 중진이었던 윤세복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신채호가 단군의 역사적 존재와 의의를 강조한 것도 일제의 강점지배라는 식민지 상황과 밀접한 조응을 갖거니와 김교헌ㆍ윤세복ㆍ김좌진ㆍ신규식ㆍ이시영ㆍ박찬익ㆍ김백연ㆍ조완구ㆍ조성환 등 망명지사들이 모두 대종교의 지지자들이었으며, 공통적으로 이 시기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활력과 결속을 위해서 대종교 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 6)


 
신채호가 가졌던 한국고대사의 주제어는 선교와 '낭가사상(郎家思想)'이다. 
 
국난기를 맞은 그에게 선교와 낭가사상은 외래 사상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이를 구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민족정신으로서의 고대 민족신앙인 선교와 전통적인 민족사상인 낭가사상의 이념을 「동국고대선교고」란 논설을 통해서 그 싹을 표출하게 된 것은 낭가사상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낭가와 낭가사상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여 국선ㆍ풍류도ㆍ풍월도가 갖는 의미가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즉 낭가사상의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도교의 '무위(無爲)'와 '불언(不言)'과는 판이하며, 낭가를 풍류라 함은 지나(중국)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킨 것이며 풍월(風月)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詠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신채호(뤼순감옥 투옥 중)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조선상고문화사』는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와 함께 문화사 부분의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신채호는 단군조선 전반기 1천년의 정치와 문화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고 하며, 중국을 비롯한 동양 각국 문화의 원류가 된 모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만일 후손들이 무력으로 그 문화를 보호하고 확장하였다면 조선이 진실로 동양문명사의 수좌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독점하였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신채호는 여기에서 단군시대의 종교로서 선교를 들고 있으며 화랑은 신라의 과거법이 아니라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흔이요, 국수의 중심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오행과 팔괘는 조선에서 수입해간 것이라 하여 한중관계를 문화우열의 관계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주석 7)(3)

주석
6> 김동환, 「기유중광의 민족사적 의의」, 『국학연구』 제1집, 111쪽, 한국정통문화연구회 국학연구소, 단기 4321.
7> 박걸순, 앞의 책, 290쪽.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역사스페셜] - 1부 / KBS 20010310 방송

https://youtu.be/Zmp5eoDNLLs

 

 

 

 

 

<자료출처>

 

(1) 신채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83

 

 

(3)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31회] 신채호가 가졌던 한국고대사의 주제어는 선교와 '낭가사상(郎家思想)'이다20.12.19 

 

 

<참고자료>

 

 

신채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상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헌·김득신·신채호 등 역사 속 충북 용띠들 (daum.net)  2024. 1. 3.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143주년 기념행사 (breaknews.com)2023/12/09 

 

 

[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9> 한국통사(韓國痛史)-박은식(1859~1925)·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신채호(1880~1936) (daum.net) 2023. 2. 10. 

 

 

김젬마 "이광수와 대척점에 있는 신채호의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철파엠) (daum.net) 2023. 9. 14. 

 

 

챗GPT 부럽지 않은 인간 컴퓨터의 사학 보물 (daum.net) 2023. 12. 10.

 

 

살아계신 분들, 내게도 국적을 주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서거 70년, 단재는 편히 잠들었을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데스크 시각>역사의 단절과 단재의 눈물 :: 문화일보 munhwa200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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