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창(文定昌)

출처; 문정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문정창(文定昌, 일본식 이름: 文山定昌, 1899년, 부산 ~ 1980년)은 일제강점기의 군수이며, 대한민국의 재야 역사학자이다.[1]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백당(柏堂)이다.

생애[편집]

1932년 문정창은 '조선 쇼와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을 지냈다.[2]

8·15 광복으로 황해도가 인민공화국 치하에 들어가자 월남하여 남한에서 한때 조선농회(朝鮮農會)총무부장에 있기도 하였으나 1947년 그만두고 저술활동을 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까지 한국 고대사에 관한 저서를 다수 집필하였다.[3]

그의 주장으로부터 일제가 20만 권의 역사책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이스라엘과 한민족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 등이 튀어나왔다. 그는 한족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황제가 동이족으로서 본래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정창은 '동이'의 개념을 광의로 사용하면서 중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동이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취급했으며, 이를 서량지나 임혜상과 같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이족인 소호족 일파가 서쪽으로 떠나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여 수메르 문명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한민족과 갖는 관련성에 대해서 문정찯은 "그 소위 '선민'을 영문으로 된 성서 《구약》역대기 상 16장 13절이 Chosen People(음대로 읽으면 조선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음을..."이라며 주장했다[4]

약력[편집]

사후[편집]

기타[편집]

그가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와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5]

저서[편집]

  • 《産業組合設立まで》, 1932 ~ 1933
  • 《조선의 시장 朝鮮の市場》, 조선총독부, 1941
  • 《조선농촌단체사 朝鮮農村團體史》, 조선총독부, 1942
  • 《백제사 》(百濟史), 백문당(柏文堂), 1964, 1975
    • 1988년에는 인간사에서 출간하였다.
  • 《군국일본 조선강점 삼십육년사》상.중.하, 1965 ~ 1967
  • 《단군조선사기연구 檀君朝鮮史記硏究》, 백문당, 1966
  •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 백문당, 1967
  •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 백문당, 1969
  • 《일본상고사 日本上古史》, 백문당, 1970
  • 《한국고대사 韓國古代史》상.하, 1971, 1979
  • 《고대일본사: 한국사의 연장》, 1973, 1989
  • 《한국고대사연구평》, 백문당, 1976
  •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 廣開土大王勳績碑文論》, 백문당, 1977
  • 《가야사 加耶史》, 백문당, 1978
  •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 (韓國∼슈메르)이스라엘의 歷史) , 백문당, 1979

 

출처; 문정창(文定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해방 이후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 · 「단군조선사연구」 · 「고조선사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이칭
이칭백당(柏堂), 文山定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899년(고종 36) 12월 12일
사망 연도1980년
본관남평(南平)
출생지부산
정의
해방 이후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 · 「단군조선사연구」 · 「고조선사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했다. 호는 백당백당(柏堂)이다. 부산의 동명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지내다가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행정강습소에 입학해 이듬해 3월 졸업했다. 경기도 수원군 속, 1927년 경상남도 울산군 속, 1928년 동래군 속, 1930년 경상남도 산업부 산업과 속(1930), 1932년 10월에는 조선 쇼와[昭和]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촌진흥과 속, 1941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속, 1942년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등을 거쳤다.

1943년 3월 군수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6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했다. 관직생활 중 조선총독부 간행의 조선조사자료총서인 『산업조합 설립까지(産業組合設立まで)』(1932),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1941), 『조선농촌단체사(朝鮮農村團體史)』(1942) 등을 저술했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냈으나, 1947년 개인 사업을 경영하며,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일제침략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을 진행했다.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近世日本의 朝鮮侵奪史)』(1964),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强占三十六年史)』(상·중·하, 1965~1967),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硏究)』(1968),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1969), 『일본상고사(日本上古史)』(1970),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상·하, 1971), 『백제사(百濟史)』(1976), 『가야사(加耶史)』(1978) 등 다수의 저작을 출판했다. 1976년 10월 8일 이유립(李裕岦)·안호상(安浩相)·유봉영(劉鳳榮)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해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사망했다.

 

 

안호상(安浩相)

출처;  안호상(安浩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장관,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민족사상연구가.
이칭
호한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1999년
본관탐진(耽津)
출생지경상남도 의령
정의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장관,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민족사상연구가.
 
개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한뫼.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안석제(安奭濟)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집안 어른인 홍문각 교리를 역임한 항일운동가 안효제(安孝濟)와 독립운동가이자 실업가인 안희제(安熙濟)의 뜻에 따라 신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9년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을 다니면서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 가서 독일국립동제대학(獨逸國立同濟大學)에 재학중 김구·안창호·신채호·이시영·전진한·조소앙·이동녕 등 민족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한인 유학생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독일 유학을 결행, 1929년에는 독일 국립 예나(Jena)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독일 국립 훔볼트학술재단의 연구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나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그에게 교수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1년에는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연구하였고, 1933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해 보성전문학교 이사장이었던 김성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조선어학회사건과 녹지연맹사건 등에 연루되는 등 연속되는 반일행위로 인해 관헌의 일급 수배자로 지목되었다.

집안문제와 지병으로 인한 휴직과 복직의 와중에서도 1942년『철학개론』을 출간하고 헤겔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1945년에는 가족들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숨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는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청년단 총본부 단장 자격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5년 한독협회 초대 회장, 1958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1960년 초대 국회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으로서 민족사상 연구에 힘썼으며, 1966년에는 독일 훔볼트학술재단 초청으로 세계일주 학술강연을 했고, 196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독일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을 방문하였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1969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1971년 UN봉사단 한국본부 단장, 1974년 국사찾기협회 회장, 1981년 한성대학교 재단이사장, 1992년 대종교 총전교, 1993년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개천절에는 민족통일을 위한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당함으로써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7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74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최고십자훈장, 1991년 세계한민족평화상, 1994년에는 대한민국무궁화훈장을 받았으며, 1999년 2월 숙환으로 별세하자 사직공원에서 사회장으로 추모되어 동작동 국립묘지 제일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백성(일민)주의의 본바탕』(1947), 『민주적 민족론』(1961), 『배달의 종교와 역사와 철학』(1964),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의 얼』(1967),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1979), 『민족정론』(1983), 『한웅과 단군과 화랑』(1985), 『겨레역사6천년』(1992) 등 28여 권이 있다.

 

 

출처;  안호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안호상(安浩相, 1902년 1월 23일 ~ 1999년 2월 21일)은 대한민국의 민족사학자, 철학자저술가대종교인, 정치가이다.

안호상은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어 홍익인간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이념을 토대로 한국교육의 방향을 설정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박종홍과 함께 참여하였다. 학술원 회원과 참의원, 한독(韓獨) 협회 회장, 국제문화총재단 이사장, 민족학회 총재, 배달문화원 총재, 대륙문화연구회 총재 등을 지냈다. 1992년에는 대종교의 최고지도자인 총전교에 올랐다.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호는 한뫼이며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안석제(安奭濟)와 김야동 부부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부모와 함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생애[편집]

학력[편집]

비학위 연수[편집]

경력[편집]

일제 강점기[편집]

해방 이후[편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사상 측면[편집]

안호상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에 토대한 방법을 이용해 유물론과 유심론을 종합하여 분석하고 비판하려고 시도했다.[16] "물질이 없이는 정신은 물질을 생산할 수 없고 정신 없이 물질은 정신을 생각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 안호상은 혈통에 근거한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그 근본에는 단군 신앙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단군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민주의를 강조했다.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한 안호상은 문교부 초대 장관으로서 민족종교에 근거한 민족국가를 형성하려 했다.[17]

저서[편집]

  • 《철학강론》, 1933
  • 《민주적 민족론》, 대한교과서, 1961
  • 《헤겔의 판단론》(독일어)
  • 《배달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 어문각, 1964
  • 《배달동이겨레는 동아문화의 개척자》, 배달문화연구원, 1972
  •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 사림원, 1979
  • 《겨레역사 6천년》, 학예사, 1983
  • 《대종교 한얼글》, 대종교출판사, 1992
  • 《안호상회고록》, 민족문화출판사, 1996
  • 《민족사상과 전통종교의 연구》, 민족문화출판사, 1996
  • 《사람을 크게 유익케하기의 본바탕과 가치》

등 30여 권 저술

 

최태영(崔泰永)

출처; 최태영 (법학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약력[편집]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증받은 뒤, 194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 겸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1947년 12월 16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겸 학장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8년까지는 청주대학 교수 겸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술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상사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술로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수표법》을 집필하였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77년에 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출처 필요1989년에는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이병도와 공저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정작 해당 책에는 이병도가 저술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90세 이상의 고령일 때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1>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2.28. 17:10:00
 

출처;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pressian.com)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사람이 1백세를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백세를 넘긴 나이에 연구와 저술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 그런 인물이 있다. 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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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2>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1. 08:36:00
 

출처; 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pressian.com)

 

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상경**13세때 서울에 와 영어시험을 치르고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언더우드가 세운 이 학교는 시설이 서울의 여느 학교보다 좋아서 학생 1인당 현미경이 한 대씩 있었고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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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3>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3. 09:25:00

출처; 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pressian.com)

 

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해방과 미 군정**일인들이 쫓겨가 이젠 일을 한국인 뜻대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둔한 미 군정은 한국인을 전혀 신임하지도 알지도 못했다. 패전 일인들한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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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4ㆍ끝>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4. 08:48:00
 

출처; 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pressian.com)

 

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초 박창암 장군을(박창암 장군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연재 '김지하 회고록 146회 참조: 편집자) 따라 세뱃길에 동행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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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李裕岦)

출처; 이유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이유립(李裕岦, 1907년 12월 18일 (1907년 음력 11월 14일)[1] ~ 1986년 4월 18일[2])은 한국의 종교인으로 태백교라고 하는 소수종교의 교주이자, 민족운동가로 알려져 있다.[3] 하지만 일각에서는 친일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4]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채영(采英)·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정산초인(靜山樵人)·단하산인(檀下山人)·호상포객(湖上逋客)·단학동인(檀鶴洞人)이다.

생애[편집]

고려말 문신인 이암(李嵒)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관집(李觀楫)[3], 어머니는 태인 백씨이다.[5]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히고, 1915년 9살에 오동진(吳東振)이 비밀로 가르치는 구한국군(舊韓國軍)의 노래와 행진연습을 하였다. 1919년에는 신안동(新安洞)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는 등 애국사상이 강하였다고 한다.[3] 하지만 이유립 및 아버지 이관집의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모두 이유립 본인이 쓴 책을 출처로 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 교차 검증되지 않는다.[6][4]

약력[편집]

  • 1907년 평안북도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단해(檀海) 이관집의 4남으로 출생.
  • 1921년 조선독립소년단(朝鮮獨立少年團) 조직활동에 참가해 단장이 됨.[3]
  • 1924년 ~ 1927년 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입학, 졸업
  • 1931년 7월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 '사회(寫懷)' 게재됨.
  • 1933년 8월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 '삭주(朔州) 을산촌(乙山村)' 게재됨
  • 1933년 안순환(安淳煥)이 설립한 명교학원(明敎學院: 조선유학회 또는 조선유교회) 입회
  • 1935년 삭주유교청년회지교부장(朔州儒敎靑年會支敎部長)[7], 《일월시보》(조선유학회 기관지) 주필
  • 1938년 동아일보 삭주지국장[8]
  • 1939년 신풍학원(新豊學院) 설립, 학감 겸 교사로 근무
  • 1945년 4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평안북도 삭주책을 맡음. 전봉천(全鳳天)의 「대동아전쟁거부론」 삐라살포사건에 관련되어 구령포 일본헌병대의 문초를 받음. 9월 9일 압록강국민학교 교장과 풍민조합장(豊民組合長), 대한근로국민회 문화부장 직에 피임. 10월 3일 천마산제전대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용담(李龍潭)의 주재로 결성된 단학회(檀學會)의 기관지 『태극(太極)』의 주간으로 피임[3]
  • 왕정복고를 주장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음
  • 1963년 단학회를 계승한 단단학회(檀檀學會)의 3대회장이 되어 기관지 《커발한》 발행
  • 1976년 박창암안호상유봉영문정창박시인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 조직
  • 1979년 환단고기 간행(100부 한정출판)

친일 의혹[편집]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 또는 민족운동가라고 알려져 있으나, 아래와 같은 행적으로 볼 때 친일파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

  •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를 투고하였는데, 시의 내용이 일제 하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내용이다.[9]
  • 친일 유교 단체인 조선유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당 단체에서 발행한 친일 성향의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을 역임하였고 산하 단체인 신풍학원을 설립하였다.[10]
  • 중일 전쟁 이후에 친일신문이 된 동아일보의 지국장을 역임하였다.[11]

한편 이유립은 《환단고기》의 전수자를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신이 직접 쓴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다.[12][4] 《환단고기》 역시 민족주의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내용상 친일적 요소가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이유립은 이러한 《환단고기》를 박창암 장군에게 전했는데, 박창암 장군은 환단고기 원문을 일본의 역사저술가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13] 가지마 노보루는 일선동조론과 같은 황국사학을 주장하는 극우 역사저술가로 그가 번역한 《환단고기》에는 “일선동조론의 증거가 되는 책을 전달해 주어서 이유립에게 감사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14] 이 대해 이유립은 자신이 전달하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며 허락 없이 책을 유출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종교 활동[편집]

이유립은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단학회나 태백교와 같은 민족단체 또는 민족종교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단학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단단학회(檀檀學會)나 태백교, 커발한 등은 일종의 소수종교로 분류되고 있으며 이유립은 그 교주로 알려져 있다. 《환단고기》에도 이유립이 교주로 있는 태백교의 교리가 서술된 부분이 많다[15]

저서[편집]

  • 《광개토 성릉 비문 역주》, 대동문화사, 1973년
  • 《커발한 문화사상사》1-2, 단단학회, 1976년
  •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년[16]
  •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천)》, 단단학회 편, 모음출판사 , 1983년[17]
  • 《대배달민족사》1-5, 고려가, 1987년

 

 

출처; 이유립(李裕岦)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시기,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조선유교회 전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전파한 유학자. 학자.
이칭
자채영(采英), 중정(中正)호한암당(寒闇堂), 정산초인(靜山樵人), 단하산인(檀下山人), 호상포객(湖上逋客), 단학동인(檀鶴洞人)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907년
사망 연도1986년 4월 18일
본관철성(鐵城)
출생지평안북도 삭주
내용 요약음성 재생

이유립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조선유교회 전교사(傳敎師)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전파한 유학자, 학자이다. 1930년대 삭주 지역에서 삼육사에서 계몽 활동, 조선유교회에서 유교 전파와 강연에 전념하였지만, 8·15광복 이후 1963년 단단학회, 1966년 단군숭봉민족통일협의회장을 지내며 계연수가 지었다고 주장하는 『환단고기』를 영인하였다.

키워드
정의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시기,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조선유교회 전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전파한 유학자. 학자.
인적 사항

이유립(李裕岦)은 1907년 평안북도 삭주 출생으로, 독립운동가 이관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채영(采英) · 중정(中正)이고 호는 한암당(寒闇堂)이다. 유년 시절 부친이 설립한 구성재(求誠齋)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오동진(吳東振)이 이관집과 계연수(桂延壽)가 광개토대왕릉비를 함께 답사할 때 자금을 댔고, 독립운동가 오봉록(吳鳳碌)과 이유립의 집안이 자주 교유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료적 근거는 부족하다. 또한, 1919년 단학회(檀學會)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계연수 · 최시흥(崔時興) · 오동진 등의 강의를 들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단학회와 배달의숙의 실체는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1924년 삭주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해 1927년 21세에 6년제를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

1930년 11월 15일 삭주군에 김석순(金碩淳) · 명재수(明在守)와 함께 ‘지덕체(智德體) 3육(育)을 본지로 하여 청년의 인격을 높이고 실력을 양성하며 그 향상 진보를 기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삼육사(三育社)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매주 일요일은 독서일, 월요일은 저금일, 토요일은 반성일로 정해서 활동하고,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지방 청년 문사의 명문옥고를 모아서 잡지를 발행하였지만, 적은 부수를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삭주군 구곡면의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유교의 기본 소양을 바탕으로 중등학교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함께 학습하고 제공하는 단체로 보이며, 여기에서 청년 계몽운동가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5월 삼육사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와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상황에 처하자 『동아일보』에 성금을 모금하였고, 같은 해 12월 19일에도 만주 동포 위문금 성금 모금 활동에 동참하였다.

1931년 1월 잡지 『신민』 64호에서 변호사 이인(李仁)이 공자와 유림, 종래의 관습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국 유림의 반발을 샀는데, 유림총본부에서 도마다 두 사람씩 모두 22명을 '모욕자성토실행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때 실행위원 중 1명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유림총본부 실행위원과 삭주군 개인으로서 두 차례의 성토문을 보냈다.

1932년 제2회 동아일보사 주관 브나로드주1 운동대원으로 참가 신청을 하였고, 같은 해 9월 25일 안순환(安淳煥)이 설립한 조선유교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4월 5일 개강한 산하 교육기관인 명교학원에 지원하여 9월 29일 우등생으로 수료하였다. 이후 삭주로 돌아가 조선유교회의 삭주 지역 전교사(傳敎師)주2로 활동하면서 유교를 전파하고 입교인을 늘리는 역할을 맡았다. 1933년 11월 30일 삭주전교실을 설치하고 예식을 지키는 데에도 힘써 1934년 명교학원 시절 스승 송기식(宋基植)과 유교 예배식에 관하여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6월 23일 삭주지교부를 설립하였다.

1935년에 삭주유교소년회와 삭주유교청년회를 설립하는 데 앞장서 유교의 확대와 공자 대동주의의 철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에 조선유교회의 기관지였던 『일월시보(日月時報)』의 2대 주필로 활동 중 조선유교회의 방향을 둘러싸고 내부 대립 끝에 같은 해 6월 10일 귀향하였다. 1938년 1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동아일보사 삭주지국장을 맡았고, 이후 교육 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이뤄진 삭주군 구곡면 소학교설립기성운동은 이유립의 아버지 이관집이 운영한 구성재 서당의 자산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1939년 이상유(李尙游)의 희사금으로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였다.

전시 체제기 조선유교회에 참여한 일제에 협력 성향이 강한 이유립 유림들은 경학원에 참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황도유학’과 연결되어 1939년 결성된 조선유교연합회에 참여하여 일제에 협력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1945년 4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삭주 지역 책임자를 맡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건국동맹의 삭주 지역 조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51년 왕정 복고를 목표로 ‘정치혁명민족협의회’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李垠)을 국가 수령으로 만들고자 기도하였지만, 이듬해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61년 대종교에 들어가 대전 시교당 전무로 근무하다가 1963년 대종교인들과 함께 단단학회(檀檀學會)를 조직하여 1965년 단단학회의 기관지인 『커발한』을 발행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회장에게 단군을 신화적 존재로만 취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는 견해가 있고, 대종교를 ‘커발한’이라고 명기하고 대종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66년 2월 26일 단군숭봉민족통일협의회(檀君崇奉民族統一協議會)의 이름으로 박성오(朴性五)와 함께 단군상 건립 진정 인사차 조선일보사를 내방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8일에도 단군숭봉민족통일협의회장 명의로 발족 인사차 조선일보사를 다시 한번 내방하기도 하였다.

1971년 펴낸 『환단휘기(桓檀彙記)』에서는 커발한은 ‘태백교’라고 주장함으로써 대종교와 거리를 두었다. 1975년 10월 8일 안호상 · 문정창 ·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1976년부터 국사찾기협의회의 기관지 『자유』에 여러 글을 실었다. 『자유』 1976년 8월호와 9월호에서는 「이병도 사관을 총비판한다」라는 글을 통해 이병도를 식민사학계의 대표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0월 22일 조선일보사 주필 선우휘(鮮于煇)와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국사를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이 신채호  정인보와 유사하고, 세계주의주3는 허울 좋은 이기주의이며 홍익사상주4이 곧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1911년 계연수가 『 환단고기』를 편찬하면서 1980년 세상에 공개하라고 유언하였다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1979년 해당 책을 영인하였다. 『환단고기』에 관해서는 계연수의 활동과 사상 등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위서(僞書)로 간주하고 있다.

1986년 4월 18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 사상

1930년대 조선유교회의 삭주 지역 전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교의 확대와 공자 대동주의의 철저화에 전념하여 1934년 삭주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제1회 대성절 기념축일 때 '공부자(孔夫子)주5의 철환천하주6의 재인식과 그 5교의 신통일 원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35년 8월 27일 조선유교회 삭주전교실에서 열린 제2회 대성절 기념식에서는 '공자를 신앙할 이유'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71년 『환단휘기』, 1973년 『광개토성릉비문역주(廣開土聖陵碑文譯註』 및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同源論)』을 펴내고, 1976년 『커발한문화사상사』(I · II)를 발간하였다. 1983년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하였고, 1986년 그동안 정리된 『대배달민족사』 5권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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