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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2)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 조선민족문화의 연구(朝鮮民族文化의 硏究, 1948년)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2)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 조선민족문화의 연구(朝鮮民族文化의 硏究, 1948년)

대야발 2025. 3. 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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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孫晋泰)(1900년 12월 28일~미상)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 · 역사학자, 교육 관료.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주요 저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조선민족사개론(상)』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는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남창 마을에서 손수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구포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는 큰어머니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1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부설 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다. 삼 년의 수학 과정을 마치고 1924년 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해 1927년에 졸업했다.

 

이어 제도(帝都) 도쿄에 거주하며 조선민속학의 전문가로 활약했다. 1932년 말에 세계 굴지의 동양학 전문도서관인 동양문고에 사서로 취임해 일 년 남짓 근무했다.

 

 

1934년 봄, 동양문고를 퇴직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했다. 다음 학기부터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문명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37년에 동교(同校)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도서관장을 맡았다.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1949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 1950년에 사범대 학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덧붙여, 1932년 연영화와 결혼해 슬하에 장남 손대인과 차녀 손경수를 두었다.

 

 

 

우선 도일(渡日) 직후의 문예 활동이 돋보인다.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시 동인지 『금성(金星)』의 핵심 멤버로 『어린이』와 『금성』에 ‘역사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 등을 다수 발표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과 함께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며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 · 산촌으로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수집한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였다. 이에 혼합민족설을 전제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한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와 같은 학술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귀국 직후의 창립 총회에서 손진태는 김태준,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조윤재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줄곧 회무(會務)를 관장한다.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조선민속학의 성과들을 매만져 단행본을 상재한다. 그리고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집성하고 역사 교과서를 저술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편수국장과 차관을 겸직하며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한다.

 
 
 

손진태의 학문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민속학과 광복 후의 신민족주의사학으로 대별된다. 전자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신가유편』(1930)과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18편의 주요 논문을 수정하고 첨삭한 것으로, 신민족주의의 세례로 거듭난 ‘민족문화학’의 성과로 주목된다. 손진태는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서문에서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추구한 민속학이란 학문의 명칭을 ‘민족문화학’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또 이 책에 수록한 주요한 18편의 저본(底本)을 동학들에게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과거의 논문은 전면적으로 일단 폐기하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한다.

 

 

후자의 대표적 성과는 『조선민족사개론(상)』(1948)과 『국사대요』(1949)이다. 제목과 같이 우리 민족사를 개설하고 국사의 대강령을 논술한 내용이다.

 

 

손진태를 둘러싼 사상적 쟁점은 위의 두 개설서에서 강조된 신민족주의의 정치성으로 수렴되는데 그 요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즉 반(反)식민주의 사관으로서의 신민족주의와 해방 공간의 중도적 정치 이념으로서 신민족주의, 이 양자의 당부(當否)가 핵심적인 논점이다.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일반화한 이 두 가지 통설에서 실증적인 고찰로 여러 이견(異見)이 제기된 바 있다. 가령 1920, 1930년대에 펼쳐진 손진태의 민족문화론을 일제 만선사학(滿鮮史學)과의 관계 속에서 재고함으로써 타율 사관을 추수해 버린 그의 부끄러운 과거가 광복 후 신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문화학’에서 어찌 조만동조론(朝滿同朝論)으로 소거되는지를 천착한 성과, 그리고 신민족주의를 좌우합작 계열이 아닌 정통 우파나 극우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성과 등이다.(1)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는 1948년 손진태가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자신의 주요 민속학 논문들을 매만져 상재한 학술서이다. 본문의 구성은 사회편과 종교편으로 나뉜다. 전자에는 주로 전통사회의 풍속 습관을 천착한 7편의 논문, 후자에는 한국과 중국의 민간 신앙을 고찰한 11편의 논문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손진태는 1920년대 중반 와세다 대학에서 역사학과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조선의 민속자료를 찾기 위해서 시골의 농 · 산촌을 중심으로 현지 조사에 나섰다. 동시에 세계 굴지(屈指)의, 동양학 도서관인 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 정리하고 그것을 분석 · 고찰하는 데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하였다.

 

 

이러한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을 섭렵하고, 현지 조사로 자료화한 민속 사상들을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조선과 중국의 민족문화에 관한 연구 성과를 일본과 조선의 여러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중 주요한 18편의 논문을 추려 첨삭과 보정을 가해 상재(上梓)한 책이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이다.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는 A5판이고 총 492면이며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문은 사회편과 종교편으로 나뉜다. 전자에는 주로 전통사회의 풍속 습관을 고찰한 7편의 논문이 들어 있다. 즉 고인돌을 비롯해 고대의 민가 형식, 온돌, 데릴사위 혼속, 과부 약탈혼, 석전(石戰)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그리고 감자의 전파 과정을 차례대로 천착(穿鑿)한 글이다. 후자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민간 신앙을 각각 거론하거나 비교한 논문, 혹은 민간신앙의 기원과 변천을 몽골과 만주 등지의 북방 지역과 관련지어 고찰한 논문이 11편 실려 있다.

 

 

가령 ‘서낭당[累石壇]’을 필두로 솟대, 장승, 산신(産神), 복화무(腹話巫), 맹인(盲人) 점복자(占卜者)인 맹격(盲覡), 광명 신앙과 태양 숭배, 그리고 중국의 웅계(雄鷄) 신앙, 혼에 관한 신앙과 학설 등을 분석한 글이다. 목차 뒤에는 관련 사진들이 22면이나 제시되어 1920 · 1930년대의 풍속 습관과 민간 신앙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또 본문 뒤에는 관련 정보를 제공한 ‘담화자’의 이름과 출신 색인, 인용한 서목(書目) 색인, 그리고 내용 색인을 덧붙여 학술서로서 충실을 기하고 있다.

 

 

 

조선의 민속자료와 관련 문헌 사료를 연계해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천착한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손진태가 추구한 조선 민속학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또한 본문에 수록된 18편의 논문은 관련 연구 분야나 주제의 초석(礎石)으로서 아직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함께 특기(特記)할 것은 서문이다. 그 이유는 들머리에서 ‘민속학은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과학’이라고 정언적(定言的)인 명제를 제시하고 그 명칭을 ‘민족문화학’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미에선 이 책에 수록한 주요한 18편의 저본(底本)을 동학들에게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과거의 논문들은 전면적으로 일단 폐기하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한다. 이렇게 ‘민속학’을 ‘민족문화학’으로 개칭(改稱)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과, 방법론의 변화에 가탁(假託)한, 과거 논문의 첨삭과 보정, 그리고 그와 연동하는 신민족주의의 자기 현시적(顯示的)인 주장과 그 정치성에 관해서는 일찍이 민속학계에서 비판적인 연구 성과가 제시되었다. 이는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반(反) 식민주의 사관으로 우상화한 신민족주의를 상대화하고, 해방 후 그 세례(洗禮)로 거듭난 ‘민족문화학’의 정치성을 해체한 것이다.(2)

 

 

 

남창은 친일시비는 거의 없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가 불문명한데다 그와 일종의 경쟁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두계(이병도) 사학"이 남한에서주류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남창사학"은 전통이 단절되다시피 했다.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과 남창(南滄) 손진태(孫晉泰.1900-1950?)가 현재까지 한국사회에서 끼치고 있는 영향력은 그들이 주된 활동을 벌인 학문에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인류학.민속학을 누구보다 역사학과 접목하고자 했던 이들은 그 행적, 특히 친일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기는 하나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제창자였으며 그렇기에 학문의 거봉(巨峰)이면서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갖는 또 다른 공통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막강한역할에 비해 이상하리 만치 이들에 대한 연구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육당학과 남창학 연구 기운을 막았을까? 육당의 경우는 춘원 이광수와 함께 해방 뒤에 친일시비에 줄기차게 휘말리면서"친일파 군상" 등지의 책이나 논문을 통해 그의 "악랄한" 친일행적이 발굴되는데 주력되면서 자연스럽게 육당학에 대한 연구는 매몰되다시피 했다.

 

 

이에 비해 남창은 친일시비는 거의 없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가 불문명한데다 그와 일종의 경쟁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두계(이병도) 사학"이 남한에서주류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남창사학"은 전통이 단절되다시피 했다.

 

 

최근 나란히 선보인 두 종의 학술업적 「최남선의 역사학」(경인문화사)과 「남창 손진태의 역사민속학 연구」가 주목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전자가 2002년 6월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이영화(42)씨가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단독업적인데 반해 후자는 역사학과 민속학의 결합을 표방하는 학술단체인 한국역사민속학회 공동연구성과물이다.

 

 

이들 두 연구업적은 육당 역사학과 남창 역사민속학을 전문적으로 천착한 국내의 사실상 첫 단행본이다.

이영화씨는 「최남선의 역사학」에서 육당 사학을 그 배경과 역사연구방법론,단군론, 통사(通史)론으로 나누어 접근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20년대에는 단군론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는 강렬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육당이 왜 30년대 이후에 "친일"로 돌아서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단초를 그의 역사론에서 열고자 했다.

 

 

저자에 따르면 육당사학은 점점 보편주의로 기울어져 20년대의 민족주의가 탈색되어 갔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의식 또한 아울러 강해졌고 그것이 결국은 대동아공영론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남창 손진태의 역사민속학연구」는 새로 발굴된 남창의 원고를 소개하는가 하면 그의 신민족주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논문 및 그와 반대되는 측면에서 남창역사민속학에 내재된 식민성을 비판하는 논문 등을 싣고 있다.

 

 

특히 남근우 한림대 교수는 해방 이후 손진태가 제창한 "신민족주의"가 식민주의 사관에 대항하는 사관으로 "우상화"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남창의 학문은) 시타토리 구라키치를 비롯한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인) 만선(滿鮮)사학에 가깝다"고 비판했다.(3)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최남선의 역사학과 손진태의 역사민속학, 2003. 9. 24.

 

 

<자료출처>

 

 

(1) 손진태(孫晋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36

 

 

(3) 최남선의 역사학과 손진태의 역사민속학 (daum.net)200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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