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6) 한뫼 안호상(安浩相) 겨레역사6천년(1992년) 본문

한뫼 안호상(1902년(고종 39)~1999년)은 본관 탐진(耽津)출생지 경상남도 의령이다.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장관,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민족사상연구가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한뫼.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안석제(安奭濟)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집안 어른인 홍문각 교리를 역임한 항일운동가 안효제(安孝濟)와 독립운동가이자 실업가인 안희제(安熙濟)의 뜻에 따라 신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9년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을 다니면서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 가서 독일국립동제대학(獨逸國立同濟大學)에 재학중 김구·안창호·신채호·이시영·전진한·조소앙·이동녕 등 민족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한인 유학생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독일 유학을 결행, 1929년에는 독일 국립 예나(Jena)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독일 국립 훔볼트학술재단의 연구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나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그에게 교수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1년에는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연구하였고, 1933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해 보성전문학교 이사장이었던 김성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조선어학회사건과 녹지연맹사건 등에 연루되는 등 연속되는 반일행위로 인해 관헌의 일급 수배자로 지목되었다.
집안문제와 지병으로 인한 휴직과 복직의 와중에서도 1942년『철학개론』을 출간하고 헤겔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1945년에는 가족들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숨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는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청년단 총본부 단장 자격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5년 한독협회 초대 회장, 1958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1960년 초대 국회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으로서 민족사상 연구에 힘썼으며, 1966년에는 독일 훔볼트학술재단 초청으로 세계일주 학술강연을 했고, 196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독일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을 방문하였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1969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1971년 UN봉사단 한국본부 단장, 1974년 국사찾기협회 회장, 1981년 한성대학교 재단이사장, 1992년 대종교 총전교, 1993년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개천절에는 민족통일을 위한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당함으로써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7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74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최고십자훈장, 1991년 세계한민족평화상, 1994년에는 대한민국무궁화훈장을 받았으며, 1999년 2월 숙환으로 별세하자 사직공원에서 사회장으로 추모되어 동작동 국립묘지 제일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백성(일민)주의의 본바탕』(1947), 『민주적 민족론』(1961), 『배달의 종교와 역사와 철학』(1964),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의 얼』(1967),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1979), 『민족정론』(1983), 『한웅과 단군과 화랑』(1985), 『겨레역사6천년』(1992) 등 28여 권이 있다.(1)
지난 80∼92년 교육부 역사담당 편수관이었던 윤종영(63) 서울 금천교 교장은 기존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간 치열했던 80년대 국사교과서 논쟁의 진상을 담은 「국사교과서 파동」(혜안 펴냄)이라는 단행본을 1999년에 냈다.
이 책은 교과서 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교육부 실무담당자가 당시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학자들간 첨예한 대립을 가감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여기에는 당시 교과서 논쟁에 휘말려들었으며 아직 대부분이 생존해 있는 학자들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실제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국사교과서 파동은 지난 76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고 안호상 박사와 박시인 당시 서울대 교수, 임승국 당시 명지대 강사가 주도하는 재야사학계가 단군,기자의 실존설을 내세우며 이병도로 대표되는 기존 강단사학계를 일제 식민주의사관론자 및 민족반역자로 맹렬히 비판하면서 촉발됐다.
이윽고 이 논쟁은 78년 이들 재야사학자들이 `국사교과서 내용시정에 대한 건의서'를 정부에 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정소송으로 끌고가고 81년에는 국회로 이 문제를 확대한 뒤 87년 6월 `국사교과서 편찬준거안'이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이 책은 10여년간 계속된 이 논쟁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하면서도 재야와 강단사학계간 대립은 물론이고 강단사학계 내부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논쟁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컨데 이 책을 보면 편수관 발령 직후 집으로 찾아간 저자에게 안호상 박사가 이병도와 그에게서 비롯된 강단사학계를 향해 쏟아부은 독설이나 국회로 불려간 이기백 당시 서강대 교수가 `태도불량'으로 국회의원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분을 삭이던 모습이 나타난다.
또 한국 고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던 고 김원룡 당시 서울대 교수와 손보기 당시 연세대 교수간 한사군 위치 등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며 이 때문에 김 교수가 국사교육심의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며 위원회 위원장으로 손 교수가 내정됐다가 변태섭 당시 서울대 교수로 뒤바뀐 일화며 강단학자로는 재야에 가까운 학설을 내세웠던 윤내현 단국대 교수의 위원 사퇴파동 진상 등이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국사교과서 파동은 재야나 강단사학계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87년 `국사교과서 편찬준거안'이 발표됨으로써 일단락된 듯 하지만 최근 단군상 건립을 필두로 다시 불거지고 있는 상고사 재조명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이 논쟁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2)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80년대「국사교과서 파동」 출간, 1999. 8. 30.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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