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여러나라시대(3) -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2) 본문

여러나라시대/여러나라시대

여러나라시대(3) -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2)

대야발 2024. 11. 14. 15:39
SMALL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 4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그림 1> 낙랑군 및 고조선의 갈석산과 습수, 열수, 산수, 패수의 위치

 

 

 

‘낙랑 1’은 심백강과 김봉렬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하북성설’입니다.

‘낙랑 2’는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난하설’입니다.

‘낙랑 3’은 신채호와 정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낙랑군 재요동설’입니다.

‘낙랑 4’는 노태돈과 송호정 등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입니다.(1)

 

 

 

 

 

신채호선생은 한사군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선 역사상의 쟁점이다.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씨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지금의 개원(요령성 동북쪽_옮긴이) 이북은 당시에는 북부여 땅이었다.

지금의 흥경 동쪽은 고구려 땅이었다.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 땅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 땅이었다.

따라서 이 네 지역 밖에서 한사군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2)

 

 

 

 

정인보선생도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낙랑군이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사실 고문헌을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익(李瀷)은 위나라의 관구검이 "현토를 통하여 출군하고 낙랑을 통하여 퇴각하였다"라는 《삼국지》의 기록만으로도 두 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이 점은 《삼국사기》,  《삼국지》 등 국내외 사서를 통틀어 보더라도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이익의 주장은 반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수성현은 진나라 때 축조한 장성의 기점이다"라는 《진서》의 기록이나 "갈석산은 한대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진나라 장성은 동쪽으로 요수를 가로질러 이 산에서 시작된다"라는 《통전》의 기록 등에 근거할 때 산해관 진황도 부근이 낙랑 속현의 옛 터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마주 보이는 해안과 이어지는 산하에서 낙랑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누방이 조양(朝陽)에 있고 패수(浿水)가 해성(海城)에 있었으며 함자가 양락(陽樂)과 일치하고 열구가 바로 영구(營口)라는 것 역시 모두가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3)

 

 

 

 

북한 리지린교수는 낙랑군이 난하(란하) 이동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인용한 자료들에서 말하고 있는 조선의 위치는 어디인가?

곽박은 주석하여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인데,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다. 렬수列水는 강 이름인데 지금 대방에 있고,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썼다.

 

곽박은 고조선의 위치를 자기 시대(4세기 초)의 락랑현(군)이라고 인정하였다. 기원 4세기 동진 시대의 락랑군의 위치가 어디냐? 《진서》晉書 14권 지리지 락랑군 조에는 그 관할현으로써 조선朝鮮,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成, 루방樓方 등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한 고증은 여기서 피하기로 하고, 나는 다만 곽박의 주에 근거하여 이 락랑군이 결코 오늘의 평양 지방이 아니라 료동 지방이였다는 것만 이야기해 둔다. 

 

곽박은 《산해경》의 《렬량》에 대한 중에서 《렬》列 자를 렬수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렬수를 주석하여 《렬은 강의 이름이다. 료동에 있다(列, 亦水, 遼東)》라고 썼는 바, 이 주석은 《방언》方言의 《렬수》 주석과 《후한서》 군국지 락랑군 렬구현 주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서 곽박은 고조선의 위치를 료동으로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그의 시대의 대방, 렬구 등 지역도 역시 료동에 위치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곽박이 말하는 료동은 지금 어느 지역인가?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곽박의 시대의 료동이란 오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거니와 《료동》이란 명칭은 연이 고조선을 침공하여 광대한 령토를 빼앗기 전 시기, 즉 기원전 3세기 초 이전 시기에도 연의 령토가 아닌 료동이 있었던 것이다.(《전국책》연책燕策).

 

그 료동을 오늘의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는 론자도 있으나 그것은 부정확한 설이며 이에 대해서도 아래에서 론급할 것이다. 요컨대 그 료동은 오늘의 란하 이동이라는 뜻임을 우선 이야기해 둔다.(4)

 

 

 

▲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현재의 요동과 고대의 요동은 다르다. 현재 요동은 요령성 요하(遼河) 동쪽을 뜻하지만 고대 요동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일대이다.(5)

 

 

 

 

윤내현교수는 낙랑군이 난하로부터 대릉하 유역에 걸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필자는 위에서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의 상호관계와 그 위치를 고증하고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종래의 통설이 갖는 문제점을 확인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래에는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증된 바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을 발굴하고 그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 유물을 근거로 하여 그곳이 한사군의 낙랑군지역이었다고 발표하자 그것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위만조선은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성립되었고, 한사군은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은 수직적인 계승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어야 한다. 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고증하여 그것들이 동일한 지역으로 확인되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치밀한 고증은 이루어진 바가 없다.

 

중국의 옛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중국의 상 · 주 교체기인 서기전 12세기 말에 기자 일족은 고조선(단군조선)의 변방인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으로 망명하여 고조선(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되었다.

 

그 후 서기전 195년에 서한으로부터 망명한 위만은 기자의 40여 세대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위만은 서한의 외신이 된 뒤 고조선(단군조선)지역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그 영토가 난하로부터 대릉하 유역에 이르렀다.

 

서기전 108년에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 · 임둔 · 진번의 세 군을 설치한 후 여세를 몰아 고조선(단군조선)을 침략하여 서기전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낙랑 · 임둔 · 진번은 난하로부터 대릉하 유역에 걸쳐 있었고 현도군은 대릉하와 지금의 요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기자 일족의 망명지였고 위만조선의 건국지였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은 후에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

 

종래의 통설과 같이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요하 동쪽과 한반도 북부로 볼 경우 많은 모순이 나타난다.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을 당시에 지금의 요하 동쪽과 한반도 북부에는 고조선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므로 한사군이 동일한 지역에 이 나라들과 겹쳐서 있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는 당시에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는데, 종래에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낙랑군에 관한 기록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을 발굴하고, 그 지역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제시한 유적과 유물의 해석에도 많은 오류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그 유적들의 조성 연대가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가 아니라 동한시대 이후였다. 그리고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유적이나 유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유물은 여러 가지 연유로 생산된 곳으로부터 멀리까지 이동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강 유역을 한사군의 낙랑군지역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고대의 기본사료에 의해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이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대동강 유역의 유적이나 유물은 한사군의 것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이 요구된다. 그리고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지역이 아니었으므로 그 유적이나 유물들을 낙랑군유적이나 낙랑군유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대동강 유역 출토 중국 유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6)

 

 

 

 

심백강박사는 낙랑군은 동쪽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부터 서쪽으로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앞에서 고조선시대의 요동, 요서군은 역수를 기준으로 그 동, 서에 설치되었고 그 위치는 대략 현재 북경시 서쪽 창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일대, 남쪽으로는 하북성 역현 일대가 거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사고전서』의 문헌자료에 의해서 최초로 밝혀냈다.

.....

그러면 이때 낙랑군은 오늘날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하북성 진황도시, 당산시, 천진시, 보정시 일대에서 요서군과 경계가 서로 겹치면서 위치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낙랑군은 동쪽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부터 서쪽으로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던 것이다.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과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에 걸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노룡현에 낙랑군의 수현인 조선현이 있었다는 기록이 『진서』 『위서』에 전하고 있고 낙랑군 25현 중의 하나인 수성현이 현재의 서수현 수성진이었던 사실이 여러 기록을 통해서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밖에도 한사군의 낙랑의 위치가 지금의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진황도시 노룡현 지역에 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자료들이 있다.

 

예컨대 『전한서』 「가연지전」에는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서 현도,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서한 무제가 갈석산 부근에 낙랑군을 설치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서한시대의 갈석산이 어디인가. 동한의 고유는 『회남자』에 나오는 요수에 대한 주석에서 "요수는 갈석산에서 발원한다"라고 하였다. 고유의 주석에 의하면 요수는 바로 갈석산을 발원지로 하여 그 산 아래를 흐르는 강물이었다.

 

남북조시대 유신은 하북성의 역수를 요수라고 하였다. 이는 갈석산은 하북성 역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요수와 갈석산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이 『사기』 「소진열전」에서 확인된다. 소진은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역수가 있고 역수 부근에 안문산과 이웃하여 갈석산이 있다."라고 말했다.

 

역수는 호타하 북쪽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이 역수 부근에 있던 갈석산에서 동쪽으로 더 가게 되면 닿는 곳이 지금의 당산시, 진황도시이다.

 

따라서 『전한서』에서 말한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서 현도,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하는 것은 낙랑군이 오늘날의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에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7)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강단주류식민사학은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식민기관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북한평양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이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있던 곳이다.(5)

 

 

 

 

이덕일교수도 낙랑군이  갈석산, 만리장성이 있는 난하 유역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史書)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8)

 

 

 

 

[주]

 

 

(1)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6.08.06

 

 

(2) [네이버 지식백과] 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한나라 관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116-121쪽

 

 

(3)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424-449쪽

 

 

(4)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66-68쪽

 

 

(5) 한사군, 중국 1차 사료가 요동에 있다 말해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20.04.26

 

 

(6)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393-395쪽

 

 

(7)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바른역사, 139쪽-142쪽

 

 

(8)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hani.co.kr)2009-05-27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비봉출판사, 2007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문정창, 고조선사연구, 한뿌리, 1969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유엠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2019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6

윤내현, 우리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윤내현, 고조선연구 상·하, 만권당, 2016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만권당, 2017

윤내현, 한국고대사, 만권당, 2021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신용하,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연구, 2017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8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07

심백강,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바른역사, 2021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2021

심백강,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바른역사

 

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문성재,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2018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김운회,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역사의 아침, 2012

정형진, 고깔모자를 쓴 단군, 백산자료원, 2003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남한 “왕험성=낙랑군=평양” vs 북한 “왕험성=中 요령성 개주” | 서울신문 (seoul.co.kr)2018-04-23

 

 

 

부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8.05.30

 

 

 

고구려 4방 2천리, 낙랑국과 낙랑군의 비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김봉렬.2017.10.03

 

 

 

중국 한나라 낙랑군=평양이라구, 모두 망상속에서 나온 허구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7.08.25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2017.10.01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동쪽에 있었다 (brainmedia.co.kr)2014.07.29

 

 

 

[이덕일의 천고사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hankookilbo.com)2015.03.26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코미디 그만하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7/11/06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