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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옥저

옥저 (1)

대야발 2025. 3. 2. 11:46

 

 

 

 

 

 

옥저(沃沮, 기원전 3세기 ~ 285년)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조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때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북옥저는 치구루(置溝婁)나 구루로 나타내었고 고구려어로 성(城)을 의미한다고 한다.

 

 

옥저는 고대에서 함경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 사회이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 남으로는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를 접하였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에는 부여와 읍루, 남쪽에는 예맥에 접하였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예는 남으로 진,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후한서》 「동이열전」의 옥저에 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윤내현 주장 - 옥저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역의 대릉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이 유역에 현토군을 설치하자 이를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함경도에 정착한 것이 동옥저이며 옥저와 동옥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한서》에서,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덕일은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 옥저의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남옥저의 중심지역의 집단은 기원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고, 기원전 108년, 다시 의 군현에 소속되었다. 임둔군에 소속된 후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폐지되자 현도군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제2 현도군으로 이동하였을 때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고 여겨진다.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봉해졌으나 56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 관구검이 이끄는 (魏)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고, 285년에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시작되었다.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이후 동부여를 이루었다고 보는데 이 동부여는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원정으로 인해 소멸되었다.(1)

 

 

 

 

 

 

1. 개요[편집]

  

 

옥저(沃沮)는 늦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25] 기원후 285년까지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었던 국가 집단이다.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가 존재했다. 남옥저의 경우,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전에서 북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한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남옥저를 동옥저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기원전 3세기경 북옥저와 남옥저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명인 '매구루'의 '구루(溝婁)'는 대표적인 고대 한국어 어휘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보이는 홀(忽)과 동원이며 현대 한국어의 '골'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이다. 그 뜻은 본래 '사람이 사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어와 백제어에서 '성읍'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고, 시간이 지나 '성' 등의 한자어에 밀려 '골짜기'에서 볼 수 있듯이 길쭉하게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말로 축소되었다.

환단고기》는 서옥저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역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바가 없다.

 
 
 
 
 

2. 역사[편집]

 

 

옥저는 세형 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단결-크로노프카 문화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중국의 사서에 '옥저'라는 말은 종족명 또는 영향권의 읍락 집단 명칭으로 나오며, 이들은 단결-크로노프카 문화 3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문안식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함흥 지역은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본래 '임둔'이라 불리는 세력권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데, 북옥저인들의 함흥 진출과 고조선에서의 대외 교섭으로 인해 남옥저 혹은 동옥저가 형성되었고, 북옥저는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전한이 쇠퇴하면서 남옥저와 북옥저는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1세기는 사서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고구려가 성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의 망인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을 할 때, 옥저가 모두 (조선에) 복속하였다. 한무제 원봉 2년(BC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BC 108).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니(BC 75), 지금 소위 '현토고부'라는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지역에 동부도위를 나누어두고, 불내성을 치소로 한 영동 7현을 따로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가 모두 현이 되었다.[원주]

삼국지》 동이전 옥저조[27]
 
 

 

전한에 의해 위만조선이 합병된 뒤 세워진 한사군  임둔군이 기원전 82년에 현도군에 합병되었고,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이동하자 이 중 영동 7현을 낙랑군 동부도위가 담당했다.

 

 
 
후한[後漢] 광무建武 6년(A.D.30;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3)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옥저沃沮의 동부東部]도위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거수渠帥)로 모두 현후縣侯를 삼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등의 모든 현縣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국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주부主簿 등의 제조諸曹를 두었는데, 예인濊人이 모두 [그 직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현국縣國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동옥저[29]

 

 

후한때 광무제가 낙랑군을 재정복하자, 기원후 30년에 동부도위를 폐지했다.[30] 이때 영동 7현 또한 함께 폐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 대신 남옥저와 동예의 토착 유력자들을 귀의후(歸義侯)로 임명했다. 군현제를 통한 직접 지배를 포기하고 토착 유력자들에게 조세와 군역의 의무만 부과한 것이다. [31]

이 당시에 독립한 영동7국 중에서 불내不耐를 제외한 화려華麗, 옥저沃沮(부조夫租)등의 국가들은 모종의 갈등으로 인해서 서로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전해진다.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32]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33]
 
 

 

 

동해안을 따라서 신라와 접촉하기도 했다. 박혁거세가 신라를 다스릴 무렵에 동옥저에서 사신을 보내온 기록과 후한이 동부도위를 폐지하여 독립한 뒤로 화려국과 불내국이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라는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에 건국되었으며 유리 이사금이 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임을 감안하면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태조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에 복속된다.

북옥저는 매구루(買溝婁, 《삼국지》 동이전), 매구(買溝, 《삼국지》 관구검전), 미구루(味仇婁, 〈광개토대왕릉비〉) 등으로도 불렸으며, 그 중심지는 훈춘(琿春) 일대로 추정된다. '구루'는 '골', '홀'처럼 성(城)을 뜻하며, 곧 매구루가 고구려의 책성(柵城)이었다. 태조왕은 98년 봄 책성을 순수하고 그해 겨울에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두만강 유역과 함흥 평야가 이들 옥저의 영역이었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했고, 영역이 동해 바다 연안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여 주변국에 조공했다. 가장 가까운 강국인 고구려에 주로 조공했으나, 남쪽의 신라에도 말을 바치며 친선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 여담으로《후한서》와 《삼국지》동이전에서 모두 옥저가 보병전에 능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2.1. 이견[편집]

 

옥저에 대하여 학계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3옥저설(남옥저, 북옥저, 동옥저)이고, 나머지 하나는 2옥저설(남옥저, 북옥저)이다. 4세기 후 옥저는 동예처럼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아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했으나, 대외적으론 고구려의 내지로 인식되면서 사라진 세력이 되었다. 어차피 중세 시대까지도 조선 왕조 이전에는 지방 수령이 그 고을 토호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미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중국 정사인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동옥저(東沃沮)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연해주 남부 내륙과 동해안 지역(함경도 포함)에 등장한 얀콥스키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 이후 연해주 남부, 수분하 유역, 동북한 지역에 위치한 단결 문화, 크로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비정한다.

최씨낙랑국 미스테리와 관련하여, 최씨낙랑국의 정체를 조선과 낙랑군에 복속했던 옥저의 일파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4]

 

 

 

2.2. 위치[편집]

 

동옥저는 함경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아래로는 동예에 닿았다고 한다. 남옥저는 함경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북옥저는 북간도 및 연해주 최남단 일대에 있었다. 처음에는 남옥저와 붙어있었으나 후에 떨어졌고,[35] 동옥저와도 붙은 적이 있다고 되어있다. 동옥저는 남옥저와 동일한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2.3. 풍속[편집]

 

한국사 교과의 고대사 파트에서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 약혼을 한 뒤, 신부가 신랑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신랑이 신부 집에 예물을 건네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민며느리 제도와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살과 피부가 썩으면 뼈를 추스려 10여 장(丈) 정도 되는 길이의 목곽[36]에 안치하는 골장제 풍속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골장제는 옥저의 영역이었던 함경도 해안 지역에서 분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로 추정된다고 한다. 옥저가 언제 고구려에 흡수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혼인, 장례, 특산품, 정치 제도가 옥저에 대한 문제로 출제된다.

 

 

 

2.4. 멸망[편집]

 

나라가 작아 대국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끝내 구려에 신속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옥저조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15, 태조대왕 4년(AD 56년)
 
 

 

우선 동옥저는 서기 56년에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에 의하여 정복되었다.[37] 논란이 많은 남옥저는 기원전 2세기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이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에 근거지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아마 남옥저 일대 역시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확보했을 것으로 추론 가능하다. 일부 자료에서는 남옥저가 서기 260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게 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13 동명성왕 10년
 
 
 

 

마지막으로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고구려 동명성왕에 의해 멸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후에도 몇몇 기록이 있다. 서기 244년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제11대 동천왕이 패배한 이후 북옥저로 도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북옥저도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고[38] 285년 고구려 제13대 서천왕에게 귀속했다.



이후 흩어진 옥저인들이 백두산으로 도망가 주변 말갈인들과 뒤섞여 새롭게 탄생한 종족을 백산말갈로 보는 학설이 있다. 흉노의 침공을 받고 선비산으로 도망가 선비족이 된 동호족의 예와 비슷한 경우이다. 하지만 백산말갈은 퉁구스계가 상대적 다수인 가운데 퉁구스계에게 동화되지 않은 부여 유민이 소수로 존재해 섬처럼 있어 서로 덜 섞인 경우인 속말말갈과는 달리, 유입된 말갈계가 소수였고 결국은 전부 예맥계 문화에 동화되어버린 현상이 관찰된다. 즉 백산말갈은 주민 구성이 대부분은 예맥계였기에 소수 유입된 말갈계가 문화 양상을 바꾸기는커녕 그 반대가 되어버린 것이고, 속말말갈보다 훨씬 빨리 고구려에게 복속되는 바람에 말갈계가 기존 옥저 예맥인들을 압도하는 지배자 행세도 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39] 요약하면 백산말갈은 퉁구스계가 약간은 섞였으나 전체적으로는 퉁구스계 말갈은 아닌, 고구려화된 옥저인들인 예맥계 말갈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3. 기타[편집]

  • 일설에는 여진족의 일부인 '와지'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현대 한국 한자음에만 의존한 설이라 그리 지지받지는 못한다. 특히 옥저(沃沮)라는 국명 자체가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얀콥스키 문화의 기원전 8세기 ~ 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 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 ~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40]
  • 얀콥스키 문화 이후 크로노프카 문화의 유적에서는 한민족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된다. 한반도로 온돌을 보급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온돌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반드시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는 반면, 옥저인들의 이웃인 읍루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온돌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옥저인과 읍루인은 사서에서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계통의 민족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 옥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처럼 전통 행사가 없었는데, 고구려에 일찍이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예와 고구려와는 혈통이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다 보니, 행사도 이들과 같거나 비슷했을 걸로 추정된다.
  • 옥저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나는 모피들을[41] 중국인들한테 파는 대가로 중국인들이 주는 화폐를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동전이나 전한 오수전 같은 중국 화폐들이 나온다. 옥저인들이 중국 화폐들을 들여와서 상거래에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된다.[42] 그래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화폐들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한다. 또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인상여가 만든 창 같은 청동기 무기들도 출토되는데, 옥저인들이 중국인들과 모피를 주고받는 교역의 대가로 청동기 무기들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청학집에 인용된 통일신라 시대 고문헌을 참고로 하여 작성한 조선 중기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에 의하면 평창 이씨 남옥저 유민 후손이다.(2)

 

 

 

 

 

정의

 

지금의 함경남도 해안지대에서 두만강 유역일대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의 종족. 동옥저 · 북옥저 · 치구루.

 

 

함흥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집단을 ‘동옥저(東沃沮)’라 하고, 두만강 유역의 집단을 ‘북옥저(北沃沮)’라 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동옥저의 가구 수는 5천여 호(戶)였으며,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길게 뻗친 거주지역은 1천여 리에 달하였다고 했다.

 

주업은 농업으로 기름진 바닷가 평야에서 오곡을 생산했고 해산물도 풍부하였다. 언어는 고구려와 거의 같았으며, 음식과 의복 · 가옥 · 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연원 및 변천

 

옥저는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지속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 말에 중국 한(漢)나라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군현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07년에 현도군(玄菟郡)의 일부가 되었다.

 

현도군은 요동(遼東)에서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이르는 동서를 잇는 공도상(孔道上)에 설치되었는데, 동쪽 끝이 바로 옥저였다.

 

이어 고구려의 저항에 의해 서기전 75년 현도군이 요동의 흥경 · 노성방면으로 쫓겨 감에 따라, 동옥저 지방은 현도군에서 분리되어 동예와 함께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에 귀속되었다.

 

이어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동옥저의 읍락들은 낙랑군 예하의 현(縣)이 되었다. 그 뒤 고구려의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진출해오자 그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244년 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魏)의 군대가 고구려 동천왕(東天王, 227∼248)을 쫓아 옥저까지 진격해 그곳의 읍락들을 유린하자 일시적인 격동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위나라 군대가 격퇴되어 고구려의 옥저에 대한 지배는 지속되었다.

 

 
 

내용

  1. 사회구조

 

옥저의 여러 읍락들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각 읍락의 족장이 자치적으로 읍락 내의 일들을 운영해 나갔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통할함에 있어, 각 읍락의 족장을 고구려 사자(使者)로 삼아 그를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 대가(大加)로 하여금 공납징수문제 전체를 관장하게 하였다.

 

고구려로 보내진 공물에는 맥포(貊布) · 생선 · 소금 및 그 밖의 해산물이 주된 것이었다. 그리고 미녀도 보내져 고구려인의 첩이 되었는데, 그녀들은 노예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의 국가구조에서 볼 때, 옥저의 각 읍락들은 지배조직의 말단에 위치해 일종의 집단예민(集團隷民)적인 성격을 지녔다.

 

과거 위만조선 · 한군현 · 고구려로 이어지는 외부세력에 의한 지배와 수탈이 옥저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억제하는 요인이 되었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읍락들의 사회상은 대체로 이웃한 동예의 그것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족장층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일반민과 함께 읍락 내에서 서로 섞여 사는 등 사회분화는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생활상

 

옥저의 읍락에는 소와 말이 적었기 때문에 옥저인들은 주로 보전(步戰)에 능하였다. 옥저의 풍속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민며느리제도이다. 즉, 소녀가 10여 세가 되면 양가에서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한 뒤, 소녀는 남자집에 보내졌다.

 

소녀가 장성해 처녀가 되면 다시 본가로 돌려보낸다. 처녀집에서는 돈을 요구하고 그것이 지불된 뒤에야, 처녀는 신랑집으로 가게 되었다. 일종의 매매혼적인 성격을 띠는 혼속이다.

 

옥저의 장례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 등으로 덮어 임시로 가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뼈만 추려 목곽(木槨)에 넣었다. 목곽은 길이가 10여 장(丈)이 되며, 한쪽에 입구를 만들어 뼈를 넣을 수 있게 하였다.

 

일종의 복장(複葬) 또는 이차장(二次葬)의 풍속이다. 오늘날에도 남해안 일부지역에서 보이는 초분(草墳)의 풍속과 비슷한 일면을 지닌다.

 

또한 한집안 사람은 모두 동일한 목곽을 사용하였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새긴 나무인형을 만들어 목곽 옆에 두어 그 숫자로서, 목곽 내의 죽은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릇에다 쌀을 넣어 목곽의 입구 쪽에 매달아놓았다. 이때 ‘한집안[家]’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야외에 두었을 때 쉽게 썩어버리는 목곽인 점을 고려할 때, ‘한집안’이란 부모자식으로 이루어진 소가족의 범위를 넘어, 친족집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당시 고구려나 부여에서 널리 행해진 혼인풍속인 취수혼(娶嫂婚)이 옥저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혼인과 장례풍속은 당시 옥저사회에서 친족집단 간에 공동체적 결속이 강했던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1. 북옥저

 

두만강 하류유역의 북옥저는 동옥저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습속은 동일하였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 하였다. 북옥저는 읍루(挹婁)와 접경하고 있어 읍루족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읍루족은 동부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면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 북옥저의 촌락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다. 그래서 강물이 많고 배의 운항이 가능한 여름철에는 읍루족의 침략을 피해 북옥저인들은 깊은 산중의 동굴로 가서 거주하고, 겨울철 강물이 얼어붙으면 촌락에 내려와 거주하곤 하였다.

 

북옥저는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었고, 244년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에 쫓겨 북옥저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그 뒤 북옥저는 부여국 왕실이 옮겨오는 큰 변화를 맞았다.

 

즉, 285년 부여국은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자살하는 등 큰 타격을 입자, 왕실을 비롯한 중심세력이 옥저로 피난하였다. 이때의 옥저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로 여겨진다. 곧이어 부여왕실은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국을 회복해 돌아갔다. 이후 북옥저 지방의 사정을 전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 북옥저와 동부여와의 관계

 

북옥저를 동부여(東扶餘)와 연결해 고찰한 견해가 있다. 즉, 부여왕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 부여국의 일부세력이 그대로 남아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 역사상에 보이는 동부여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 뒤 광개토왕대에 동부여를 복속시키고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이곳에 책성(柵城)을 설치하였다. 북옥저의 또 다른 이름인 치구루의 ‘구루’는 고구려어로 성(城)을 의미한다. 곧 책성은 그 어원으로 볼 때 치구루와 통하는 말이다.

 

책성은 고구려 동부지방의 중심이 되는 주요한 성이었다. 북옥저는 동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성을 단위로 하는 지방제도 아래에 편제되었고, 옥저인은 고구려의 지방민으로 귀속되었다.(3)

 

 

 

 

■ 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6>


◇ 흑수(黑水)와 옥저(沃沮)

말갈과 발해 문헌을 뒤져보면, 흑수(黑水)와 옥저(沃沮)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송대(宋代) 소식(蘇軾: 1036∼1101) 즉 소 동파(東坡)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그 시인 맞다. 이 사람이 효자여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관리에 부임 안 하고 바로 어머니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치른 후에 동파거사는 아버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한수와 장강을 따라 수도 변경으로 갔다. 이 시인 삼부자는 여행 도중 100수가 넘는 시를 짓고는 ‘남행집’이라는 책도 냈다. 여행하기 위해서 물길에도 관심이 많았던 소식은 시간을 내서 우리나라 금수강산에 와보고 싶었을 것이다.

 

소동파가 지은 지도책인 듯한 ‘지장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진한(辰韓) 북쪽에 남과 북의 두 흑수(黑水)가 있다. 흑수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물 이름이기도 한 흑수를 이름으로 쓰고 있는 종족도 있다. 말갈 7부의 하나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다른 6부가 발해에 복속되자 726년 발해 몰래 당에 사신을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 당은 이때다 싶어 바로 장사(長史)를 파견하고 흑수국의 이름을 흑수주로 바꾸고 기미주(覊縻州)로 삼았다. 발해 무왕은 당연한 일인데도 힘이 아주 셌던지, 당을 치기 위해 먼저 당과 동맹을 맺은 흑수말갈을 쳤다.



옥저라는 이름을 찾아보니, 고구려 동명제(東明帝)는 왕이 된 지 10년만인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42년인 A.D. 23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가호가 신라에 투항했다. 또 혁거세 52년인 B.C.5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란 땅도 있었나 보다.



사실 북, 남, 동은 모두 어느 나라가 이 기사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붙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도 문헌을 쓴 사람이 어디에 거주했는지에 따라서도 다르다. 보통 수도에 거주했으니 수도 보다 북쪽에 옥저가 있었다면 북옥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방향이 도치돼 표기될 수도 있다. 남옥저는 옥저의 남쪽지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명칭만 다를 뿐 남해안 일부지역에서 보이는 초분(草墳)의 풍속과 같이 복장(複葬) 또는 이차장(二次葬)과 형사취소혼의 풍속을 가진 옥저들은 모두 하나의 나라인 옥저일 수 있다.(4)

 

뉴시스, [하도겸 칼럼] 소동파가 오고 싶어했던 옥저, 2015.03.23 

 

 

 

https://youtu.be/C0MAnFW9nRg

 

 

 

 

 

 

 

<자료출처>

 

 

<참고자료>

 

 

 

옥저인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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