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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진국(발해) 고고학 (1)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본문

북국/대진(발해,고려)

3. 대진국(발해) 고고학 (1)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대야발 2024. 5. 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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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2007. 11. 23. 09:01
 

中 학자들, 고고발굴 성과 보고서 통해 단언

"都城 건설도 중원 漢문화 영향 크게 받아"

국내 학계서도 관련 논의 활성화 계기 될듯

(서울=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일대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다. '간도(間島)'로도 불린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1909년 9월 4일 청(淸)나라와 체결한 '중한계무조관(中韓界務條款ㆍ간도협약)'에 의해 중국의 영토가 된 곳이다.

 

지린성 내의 수많은 고구려ㆍ발해 유적 중 옌볜자치주 허룽(和龍)시 시청(西城)진 청난(城南)촌에 있는 서고성(西古城) 유적은 이미 1940년대에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동양사학자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등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발해 5경(五京)의 한 곳인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비정됐다.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옌볜자치주 문화국, 옌볜자치주박물관, 허룽시박물관은 2000-2005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이 서고성에 대해 대대적인 고고발굴작업을 벌였으며 그 성과를 '서고성 - 2000∼2005년도 발해국 중경현덕부 고지(故址) 야외고고 보고'라는 이름으로 최근 펴냈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보고서에서 서고성 성터가 바로 중경현덕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면서 서고성 성터에 대한 고고발굴과, 이 성터에서 대량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와 문자 기와 등을 통해 중원의 한문화(漢文化)가 발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도굴'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심층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보호관리가 허술했던 서고성에 대한 중국의 전면적 고고발굴 작업과 보고서 발간은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서고성에 대한 부분적 조사는 1964년 북ㆍ중 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공동으로 진행된 바 있으나 그 보고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중경은 발해 3대왕인 대흠무(大欽茂ㆍ문왕)가 자신의 재위 때(서기 737-793년)인 대흥 5년(742년)부터 대흥 19년(755년)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14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곳.

그 위치와 관련해서는 대조영이 처음 터를 잡은 구국(舊國)과 동일한 지역인지, 중경현덕부의 소재지가 그 아래의 노주(盧州)인지 현주(顯州)인지를 놓고 학설이 분분했다. 그러나 1980년 10월 서고성 가까운 곳에서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의 묘가 발견됨으로써 서고성이 중경현덕부라는 학설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발굴보고서는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였다는 기존의 '통설'이 실물 증거자료 부족으로 추론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번 고고발굴에서 나타난 자료와 기존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발해국 중격현덕부의 옛터를 서고성 성터로 충분히 확정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해 강역이었던 지역에서 확인된 발해 성터 중 규모면에서 도성의 조건을 갖춘 곳은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자리였던 지린성 훈춘(琿春)시 팔련성(八連城) 성터를 제외하고는 서고성 성터밖에 없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도 서고성은 팔련성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문헌에 기록된 발해 5경의 방위와 대체로 부합하며, 유적ㆍ유물면에서는 궁전의 크기라든가 건축 장식물로 사용된 유약도기 등이 도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러한 도성의 조건은 지린시 화뎬(樺甸)에 있는 발해 장령부(長嶺府) 소밀성(蘇密城) 성터, 염주(鹽州) 크라스키노성 성터(러시아 하산지방) 같은, 발해의 부(府)급과 주(州)급 성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고성 성터의 중경현덕부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보고서는 '학술적인 추론'임을 전제로 "발해정권이 이미 대흠무 재위 시기에 5경제도(5경.15부.62주)를 수립했으며,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인 동시에 현주로 비정하고 있다"면서 고고학 연구를 통해 중경현덕부와 현주의 관계도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산 경성대 역사학과 한규철 교수(발해사)는 "이번 발굴을 통해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라는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고 본다"면서 "발해 연구를 위한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학계에서도 서고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밖에 "서고성 성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성터의 도성 건설에 중원 한문화의 선진적인 도성 건설 경험과 영양분을 대량으로 흡수ㆍ섭취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하고 했다.

또 "여덟 잎 연꽃무늬 기와는 발해인들이 다소간 중원지구 육조(六朝) 연꽃무의 기와의 모티브와 도안을 직접 차용한 것"이며 "서고성에서 발견된 치미(망새)역시 육조와 수ㆍ당 시기의 치미가 갖고 있는 형태적.구조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 서고성 = 서고성 성터는 두만강의 최대 지류인 해란강 중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터우다오(頭道)평원 서북부의 개활지와 구릉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평균해발은 320m. 동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해란강이 흐른다.

직사각형인 성터는 내성와 외성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내성은 외성 북반부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총면적은 약 0.46㎞이고, 외성의 전체 길이는 2천720m, 내성의 전체 길이는 992.8m이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주로 다섯 곳의 궁전터와 그 부속건물터, 외성 성벽과 남문(南門)터, 내성 성벽 사이벽과 문터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중국 당국은 1981년 서고성 성터를 지린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보호ㆍ관리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격상시켰다. 2000년에는 3개년 계획으로, 2004년에는 2개년 계획으로 서고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발굴작업을 벌였다.

2005년에는 서고성 외성 북벽 인근을 통과하는 옌지(延吉)-허룽 1급도로를 140-180m 북쪽으로 이동시켜 확장했고, 지난해에는 서고성 성터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과 외성의 농경지를 모두 정리하는 동시에 62가구를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일부 관측통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경용천부 유적지 등 일련의 발해 시대 유적지와 함께 서고성을 복원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기 위한 준비작업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d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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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 수정 2020-01-18 14:54등록 2020-01-17 05:00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18) 발해인도 기독교를 믿었을까
중국 훈춘 발해 성지에서 출토된 발해 불상. 가슴에 십자가(동그라미 표시)가 새겨져 있다. 강인욱 제공

 

우리에게 기독교는 근대 이후 서양을 통해 들어온 대표적인 종교다. 하지만 최초의 기독교는 그보다 훨씬 이른 1500년 전에 서유럽을 거치지 않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들어왔고, 당나라와 몽골 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그리고 그 일파는 발해에도 도달한 흔적이 최근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억울하게 이단으로 규정받았던 네스토리우스파였다. 그들은 실크로드에서 교역을 주로 담당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유라시아 대륙을 넘었고, 동아시아의 여러 문화와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종교가 반목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 변방에서 번성했던 초기 기독교의 흔적 위에서 종교가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연해주 발해 절터에서 발견한 십자가

발해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련의 고고학자 샵쿠노프(1930~2001)는 1960년에 우수리스크 근처 고려인 마을이었던 ‘차피고우’ 일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발굴지는 아브리코스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발해 절터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기왓장 사이에서 자그마한 진흙 조각을 발견했다. 그냥 흙덩이로 착각할 만한 진흙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였다. 그것도 보통 십자가가 아닌 끝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특이한 형태였다. 바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해로 유입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십자가였다.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는 주로 아시아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대표한다. 샵쿠노프의 놀라운 발견은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에 그의 발견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최근 발해 유적에서 다양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확인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억울하게 이단이 된 네스토리우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출처 위키피디아

 

한문으로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네스토리우스교는 네스토리우스(368~450)라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사상은 431년 제1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 서방의 기독교에서는 배척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리가 원인이 아니었다. 학식과 외모로 주변을 모두 압도했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시기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네스토리우스 무리의 도착이 풍랑으로 지연되는 틈을 타서 일방적으로 공회를 열어 이단으로 규정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에서 한 많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추종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동방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활발하게 이어진 실크로드를 따라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아르메니아와 인도, 중앙아시아로 퍼졌고, 당나라까지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이미 서기 6세기께부터 경교 신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번성한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과 함께 공인되었다. 서기 635년에 페르시아의 시리아 교회에서 파견한 알로펜(阿羅本)이라는 교주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당나라의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세웠으니, 지방마다 그들의 사원이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공인받은 경교 신도들은 당나라 전성기인 781년에 시안(서안)에 경교 사원인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시안의 비림(碑林)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비석은 높이가 3m에 가까운 거대한 크기에 한문과 시리아 문자가 새겨져 있다. 대륙을 건너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찾은 그들의 감격이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전해지는 듯하다. 이 비석은 천년 가까이 지난 뒤에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던 가톨릭 선교사들이 재발견하면서 다시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던 제정러시아의 고고학자 판투소프는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공동묘지를 발견했고, 이후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오가며 상업을 하면서 살아왔던 무리였음이 밝혀졌다.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무슬림과 불교도들의 탄압으로 자신들의 교회나 벽화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덤과 일상에서 사용하던 도기에 자신들만의 십자가를 남겼고, 땅속에 숨어 있던 그들의 흔적을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것이다.

 

발해로 기독교가 전해진 배경

당나라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845년에 발생한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과, 이어서 일어난 황소의 난(878년) 사이에 큰 피해를 보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실크로드에서 유입된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경교 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알려진 것만 수만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경교 신도들은 중국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고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중에서 몽골 지역으로 흘러들어간 경교는 몽골 제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등장했다. 몽골 제국에서 경교를 믿는 사람들은 옹구트족(Ongud)이라고 불렸다. 홍산문화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내몽골 웡뉴터치(翁牛特旗) 지역이 바로 경교를 믿는 옹구트족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또한 몽골 제국의 4대 황제인 몽케와 5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네스토리우스교도였다.

내몽골 경교인 무덤에서 나온 성물. 강인욱 제공

 

경교가 당나라에서 탄압받던 시기에 한반도 일대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번성하며 사방과 교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발해는 몽골의 위구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이 살면서 많은 교역활동을 하던 때였다. 경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발해에서도 활동했으니, 그들의 일파와 함께 경교가 흘러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브리코스 발해 절터에서 나온 십자가. 출처 샵쿠노프 저서

 

발해 아브리코스 유적은 불교 사원이고, 유물도 자그마한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십자가 말고도 중국 훈춘에서 경교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 시기의 불상 장식에서 십자가가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경교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많이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경교인들의 풍습을 보면 이런 상황은 이해된다. 경교인들은 수백년간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성상을 만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십자가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토착화해서 유교와 불교의 풍습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별도의 사원을 세우지 않고 불교나 유교 사원처럼 자신들의 사원을 꾸몄다. 둔황(돈황)이나 신장(신강)에서 발견된 경교 예수상도 불화의 한 장면에 십자가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인다. 경교인의 무덤에도 돌로 만든 십자가를 새겨넣었을 뿐이었다.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해뿐 아니라 통일신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불국사 출토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다. 하지만 불국사 출토품은 경교 십자가의 형태와 많이 다르며 경교 신도들은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다.

카자흐스탄의 네스토리우스교 묘지석에 새겨진 십자가. 강인욱 제공

 

통일신라와 경교의 관련성은 고고학 유물보다는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발굴하여 소개한 페르시아의 고대 서사시인 쿠시나메에 그 힌트가 있다. 쿠시나메 이야기는 7세기 후반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인 아비틴이 중국을 거쳐서 신라로 와서 타이후르라 불리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활동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야기로 윤색된 것이긴 해도 이 이야기는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과 같은 당나라의 탄압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국제적으로 번성했던 통일신라였으니 당나라의 탄압을 피한 사람들을 통해서 통일신라에도 경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발해 기독교는 개방과 공존의 증거
원나라 시기인 1253년 만들어진 경교 무덤의 묘지명. 강인욱 제공

 

수천년간 탄압받던 경교가 다시 주목받은 계기는 근대 이후 서양의 선교사가 동양으로 들어오면서이다. 기독교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유럽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던 세력이었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로 바뀌어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은 다양한 종교를 인정했던 실크로드의 관용이었다.

둔황 막고굴 17호에서 발견된 예수상. 불교 회화처럼 그렸으나 이마에 십자가(동그라미 표시)를 넣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동양에서는 실크로드를 불교의 전래 경로로만 생각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실크로드 유물을 가져온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는 일본 불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인도의 불교가 일본으로 직접 들어왔다는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동서양의 다양한 나라들은 실크로드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해의 절터에서 발견된 경교의 십자가는 실크로드가 배타적인 종교의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던 종교의 해방구였음을 증명한다. 이단으로 몰려 박해받던 경교가 소수의 선교사 힘으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배경은 적극적으로 현지 문화와 결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해의 기독교 흔적은 비록 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발해였지만 적극적으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증명한다.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종교는 배타성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자신만의 종교를 고집하기 전에 최초의 기독교가 전해졌던 당시의, 타자에게 개방적이며 공존을 인정했던 발해와 초원의 열린 모습을 되새길 필요가 여기에 있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2)

 

 

 

 

<주>

 

 

 

(1)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24770.html

 

 

 

(2) https://v.daum.net/v/20071123090112122

 

 

 

 

<참고자료>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134337

 

 

 

웅대한 고구려와 발해 한눈에 내려다 보는듯…|동아일보 (donga.com)200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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