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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대진국(발해) (3) 737년~793년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대흠무, 연호: 대흥(大興), 보력(寶曆), 781년 치청절도사 이정기를 도움 본문

북국/대진(발해,고려)

1. 대진국(발해) (3) 737년~793년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대흠무, 연호: 대흥(大興), 보력(寶曆), 781년 치청절도사 이정기를 도움

대야발 2020. 6. 11. 20:55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그 사이에 우리에게 발해는 중국과의 역사분쟁으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발해를 둘러싼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전쟁은 100여년간 벌어졌다.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고, 만주와 한국은 하나의 역사라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우며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발해의 모든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바꾸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숨 가쁘게 진행된 역사 전쟁, 그 사이에서 발해의 실체를 밝혀온 연구자들을 살펴보자.

 

 

■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러시아 학자가 찾은 발해, 일본과 중국은 왜 은폐했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22. 5. 20. 00:32

 
 

발해 역사 지우기 100년

 

 

「 러 고고학자, 발해 상경성 첫 발굴
오래 잊혔던 발해의 면모 되살려

일본의 궤변 “우리가 발해 첫 연구”
“조선과 만주는 하나” 침략 정당화

중국 동북공정 “만주는 우리 역사”
발해 유적 홍보하며 관광자원화」

 

금나라 때문에 사라진 상경성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에서 출토된 돌사자 머리. 궁전 난간 장식물이다. 발해인의 기개가 엿보인다. [중앙포토]

 

 

 

발해를 대표하는 유적인 상경성은 755년에 발해 3대왕 대흠무(문왕)가 건설하여 상경용천부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잠시 수도를 옮긴 시간을 빼면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수도 역할을 했다. 그 덕에 상경성 성벽과 궁전터는 대표적인 발해 유적으로 꼽힌다.

 

 

상경성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시(寧安市)에 있다. ‘닝안’은 비록 행정구역은 헤이룽장성이지만 실제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옌볜(延邊) 지역과 가깝다. 지금도 옌볜조선족자치주를 제외하고 중국 내에서 조선족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심지어 옌볜자치주의 둔화(敦化) 지역보다 조선족이 많지만 정작 조선족자치주에서는 빠졌다. 발해 수도가 조선족자치주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는 중국 당국의 게리맨더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상경성 성터에 남아 있는 발해 시대 우물. [중앙포토]

 

 

 

상경성은 최근까지도 ‘동경성’이라 불렸다. 이는 여진의 금나라가 들어선 후에 새롭게 붙여진 것이다.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 유민들은 거란에 의해 사방으로 강제로 이주당했고, 이 지역에서 발해의 역사를 지우려는 여진과 거란의 지속적인 노력 탓이다. 수도마저 원래 이름을 빼앗긴 것은 지워지고 잊힌 발해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방의 파리’로 불린 하얼빈

 

 

발해 상경성(동경성)을 발굴한 러시아 동성문물연구회. [사진 강인욱]

 

 

 

발해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들어 다시 불붙었고, 그 중심에 하얼빈이 있었다. 하얼빈은 19세기 말 제정러시아가 동청(東淸) 철도를 세우면서 만든 도시다. ‘동양의 파리’로 불릴 만큼 국제적인 분위기였다. 또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한국 독립운동가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어로 ‘까레야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에 모여든 러시아인들은 ‘동성문물연구회’를 조직해 발해 연구를 최초로 시작했다. 발해 이외에도 선비·여진·말갈 등 우리의 북방사를 활발하게 연구했다. 동성문물연구회에서 발해를 담당한 사람은 러시아 우랄 지역 출신이었던 V V 포노소프(1899~1975)였다.

 

 

포노소프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한창이던 1931년에 발해 상경성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무국적자로 보호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면서 비적들이 횡행하는 이 지역에 목숨을 걸고 갔던 그는 상경성의 주요 지점을 발굴하고 전체 평면도를 정밀하게 작성했다. 발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발굴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

 

유적 정비를 마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인 상경성 전경. [사진 강인욱]

 

 

 

포노소프의 목숨을 건 상경성 조사 직후 반년 만에 하얼빈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일본의 관변단체인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발해 유적을 접수했다. 1900년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 대한 배상금으로 세운 이 단체는 일본의 중국과 몽골 침략에 발맞춰 1925년 일본 교토대학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와 도쿄대학의 하라다 요시히토(原田淑仁) 등이 주축이 돼서 설립했다. 그들은 군인을 앞세워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 사방에서 유물을 도굴에 가깝게 발굴하여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동아고고학회가 가장 먼저 발해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내선일체(한국과 일본은 하나)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만주를 차지하면서는 만주와 한국을 하나로 보는 만선사관을 내세웠다. 둘을 연결하면 곧 만주는 일본의 땅이라는 역사적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생각에서다.

 

 

동아고고학회는 하얼빈을 접수하자마자 포노소프의 발굴 자료 일체를 건네받았고, 그에 근거해서 발굴을 준비했다. 1934~1935년에 발해 상경성을 조사하고, 보고서도 화려하게 발간했다. 이를 근거로 지금도 자신들이 발해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고 널리 홍보하고 있다.

 

 

“발해서 일본 첫 동전 발견” 조작

 

하지만 최근 공개된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이는 실제와 전혀 달랐다. 발굴을 주도한 도쿄대 교수 하라다 요시히토가 작성한 내부 보고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러시아 및 중국학자들이 동경성(상경성)의 조사를 이미 행하고 있으니 그 선수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동아고고학회가 고의로 포노소프의 연구를 가로채고 은폐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발해 상경성 위치

 

 

 

일본은 심지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물을 위조하기까지 했다. 1934년 일본의 어용 고고학자들이 발해 상경성에서 일본 최초의 화폐인 ‘와도카이친(和同開珍)’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곧바로 함께 발굴한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은 일본인이 와도카이친을 가져와 파묻은 것이라 폭로했다.

 

 

일본은 반성하는 대신에 1940년에 만주국 수도인 신경(지금의 창춘)에서 ‘아스카 나라 문화 전람회’에서 이 동전을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인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 문화재 조작마저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도 국내외에서 일본의 ‘침략’은 잘못이지만 일본이 발해고고학의 기틀을 세웠다는 식의 논조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러시아 학자 이름 삭제한 중국

 

한편 포노소프는 최후까지 남았던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건국 후 12년이나 지난 1961년까지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하얼빈 러시아 학자들이 조사했던 유적에 대한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중국 학자들에게 전달했다. 40년 가까운 시간을 만주사 연구에 바쳤던 그는 62세가 돼서야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이미 소련 지역이 된 그의 고향 우랄 산맥 지역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호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고고학 연구를 이어 갔다.

 

 

중국은 그가 남긴 자료로 지난 수십년간 하얼빈 일대의 발해는 물론 금나라와 선사시대를 조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포노소프와 러시아 고고학자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이 만주를 자국 역사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하며 포노소프와 같은 하얼빈 러시아인들의 연구를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중국,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포노소프 이후 북한도 1963~1965년 발해 상경성 공동발굴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모든 교류를 중단했고, 지금은 쉽게 접근하기도 어려운 유적이 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끝났지만, 중국 지방정부는 발해 유적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발해를 백두산과 함께 세계 사람들이 중국 동북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기억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복잡한 역사 분쟁 속에서 한국의 입장을 유일하게 옹호하는 측은 러시아였다. 지금도 러시아의 수많은 발해유적이 한국인의 손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모국으로부터도 버림받았지만 발해에 일생을 바친 하얼빈의 러시아 연구자들이야말로 국가의 이익보다 순수한 학문적인 열의로 발해를 연구한 표본이 아닐 수 없다. 황량하고 싸늘한 북방의 벌판에 버려진 우리 역사의 유적들에 젊은 나날을 바친 그들에 대한 재평가에서 발해 연구는 다시 시작돼야 한다.(1)

 

 

 


이런 문왕을 당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발해의 황제를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던 당도 762년부터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습니다. 국력이 커진 발해를 당나라도 인정한 것이지요. 이런 치세를 통해 문왕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를 다스리는 대제국으로 발해를 발전시킵니다.

 

 

오히려 옛 고구려의 전성기 때보다도 2배 정도 훨씬 큰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지요. 마치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천손', 즉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동시에 유연한 통치와 외교 관계로 8세기 동아시아에서 발해는 당당한 자주 독립 국가로 위상을 떨치게 됩니다.

 

 

 

[한국사 공부]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한국경제  2015. 4. 10. 17:33

대원고 최경석 쌤의 '술술 읽히는 한국사' (13)

 

 

(12) 원효와 의상, 서로 다른 길을 가다 (14) 지금 내 옆에는 누가 있나? (15) 역발상으로 국가를 지키다 (16) 송나라 사신이 감탄한 고려청자 (17) 김윤후, 몽골 침략에 온몸으로 맞서다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만주 지역 동북 3성의 역사와 문화를 재해석하는 국가 사업이었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민족주의의 강화로 이어지며 이 지역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역사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사가 모두 중국사라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무계하지요?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

 

특히 만주 지역은 물론 오늘날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까지 차지했던 우리 민족 국가 발해에 대해 말갈족의 국가라는 역사 왜곡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당이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며 따라서 우리 민족 국가도 아니고, 당나라 변경에 있던 지방 정권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중국 역사에 발해의 역사를 귀속시키려는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반박하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있을까요? 저는 1980년 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발굴된 한 무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792년 6월에 36세로, 아버지였던 왕보다 먼저 사망한 발해 정효공주입니다.

 

 

그녀는 문왕의 넷째 딸이었는데요. 여기서 묘지석이 하나 출토됐습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꽤 긴 이름이 나옵니다. 정효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대흥' 그리고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발해 3대왕 문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묘지석의 이름처럼, 당시 중국의 황제만이 쓰는 연호를 발해도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유교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감동한다는 '효감'이라는 글자와 '금륜성법대왕'이라고 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왕이라는 불교의 왕명을 활용하는 등 최고의 존칭들만 모아 사용하였지요.

 

 

사실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연호를 발해는 이미 1대 왕이었던 대조영 때부터 사용합니다. 그의 연호는 '천통', 2대 대무예 무왕도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발해가 연호를 사용한 것 이외에 또 다른 증거는 없을까요? 2대왕 무왕은 당과 대립각을 세워, 장문휴를 시켜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는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당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격이지요.

 

 

당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내세운 발해

 

자, 그런데 발해 3대 왕인 문왕 때부터 무언가 헷갈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분명 연호를 사용하지만 당나라의 문물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당나라 중앙 제도인 '3성 6부'가 유사하게 발해에서도 시행되고, 수도 상경용천부에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본따 '주작대로'를 건설합니다. 그럼 정말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서 이렇게 따라한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코 아닙니다. 마치 패션에도 유행이 있듯 당시 세계사적으로 국제적인 교류의 중심에 있었던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지요.발해 문왕은 당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되 여기에 종속되지 않고 거꾸로 발해도 당당한 황제국가로 만드는 이중 전략을 택한 것이에요.

 

당의 3성6부라는 중앙 제도는 발해에서 명칭과 운영면에서 독자성이 엿보입니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중심이 돼 그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정이라는 이원적 운영체계를 만들고 '이·호·예·병·형·공부'의 당나라 6부가 아닌 '충·인·의·지·예·신'이라는 유교적 명칭을 사용하였지요. 더구나 이미 황제국인 당나라처럼 3성6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지방정권이 아니라 당과 동등한 국가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수도를 몇 번 옮겼는데, 특히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 근처 목단강 유역인 상경용천부로 옮기고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주작대로를 만들었어요. 이는 단순한 수도 천도가 아니라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함과 동시에 북쪽의 말갈족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고 통치하기 위해 수도의 위상을 장안성만큼 높인 것이지요.

 

 

 

고구려 계승하고 문물을 발전시킨 발해 문왕

 

한편 발해 문왕은 일본과도 사신을 교환하며 우호 관계를 넓혔는데요. 758년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을 때 국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문왕을 고려왕이라고 인정하는 국서를 보내왔어요. 즉, 당시 대외적으로 발해는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받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문왕을 당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 발해의 황제를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추어 불렀던 당도 762년부터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불렀습니다. 국력이 커진 발해를 당나라도 인정한 것이지요. 이런 치세를 통해 문왕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를 다스리는 대제국으로 발해를 발전시킵니다.

 

 

오히려 옛 고구려의 전성기 때보다도 2배 정도 훨씬 큰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지요. 마치 고구려 시조 주몽처럼 '천손', 즉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동시에 유연한 통치와 외교 관계로 8세기 동아시아에서 발해는 당당한 자주 독립 국가로 위상을 떨치게 됩니다.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에서 발견된 돌사자상이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를 이은 듯 앞다리를 곧게 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위용이 당시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의 독자적 국가로 발돋움한 발해를 연상케 합니다. 서태지의 노래 제목처럼 오늘 발해를 꿈꿔봅니다.(2)

 

최경석 선생님

최경석 선생님은 현재 EBS에서 한국사, 동아시아사 강의를 하고 있다. EBS 진학담당위원도 맡고 있다. 현재 대원고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을 위한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이 크는 인문학 6-역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황후'란 두 글자다. 발해가 황제의 나라였다는 얘기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이는 비문에 새겨진 141자 중 극히 일부일 뿐, 중국은 전체 내용은 물론 묘비 사진마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상경성은 756년 발해 문왕 대흠무가 설계한 궁궐이다. 지금까지 상경성이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했다는 것이 중국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제 2궁전 발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상경성 제 2궁전지가 전면 19칸에 달하는 큰 규모로 나타난 것. 당나라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은 11칸에 불과하다. 발해가 당의 속국이었다면 일개 지방정권이 황제보다 더 큰 궁궐을 가진 셈이다.

 

 

 

■ 중국은 왜 '황제의 나라' 발해를 숨기나

서울신문 임일영기자 2011. 6. 16. 03:19

 
 
 
 

 

 

 

 

2011년 5월 발해 황후 무덤이 발굴된 중국 지린성(吉林省) 용두산 고분군을 KBS 역사스페셜 취재팀이 찾았다. 제작진이 다가서자 관계자는 날카로운 공구로 위협하며 막아섰다. 발해 유적지는 취재는 물론 사적인 촬영까지 차단하는 상황이다. 취재진과 함께 발해 수도 동경의 궁궐지였던 훈춘시 팔련성을 찾은 윤재운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네 번째 방문인데, 표지판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KBS 역사스페셜은 16일 오후 10시 '추척! 발해 황후 묘는 왜 공개하지 못하나'를 통해 중국 당국이 발해 유적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내막과 발해사 왜곡의 실태를 드러낸다.

 

 

한국 학자들이 중국 지린성의 발해 순목황후 묘 발굴을 접한 때는 지난 2009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고고'(考古)를 통해서다. 지극히 간략한 내용만을 담고 있어 발굴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발해의 정치체를 밝혀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渤海国顺穆皇后, 即 简王皇后泰氏也'(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씨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황후'란 두 글자다. 발해가 황제의 나라였다는 얘기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이는 비문에 새겨진 141자 중 극히 일부일 뿐, 중국은 전체 내용은 물론 묘비 사진마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재 중국은 외부 접근을 차단한 채 단독으로 발해 유적지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상경성(上京城)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중국은 지난 2006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당 발해국 상경 용천부 유적 보호 조례'를 통과시킨 뒤 유적 정비작업을 시작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상경성은 756년 발해 문왕 대흠무가 설계한 궁궐이다. 지금까지 상경성이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했다는 것이 중국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제 2궁전 발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상경성 제 2궁전지가 전면 19칸에 달하는 큰 규모로 나타난 것. 당나라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은 11칸에 불과하다. 발해가 당의 속국이었다면 일개 지방정권이 황제보다 더 큰 궁궐을 가진 셈이다.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를 세계사에 포함한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발해가 중국 역사책에 실린 건 무려 반세기 전이다. 이미 두 세대 이상이 발해를 중국사로 배워 온 것이다. 취재진은 현지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3)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동아지중해 누비며 무역 강국 자리매김

한국경제,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2020. 4. 10. 17:06

 

 

(28) 발해의 산업·무역·해양활동

 

철·금 등 풍부한 지하자원
모피·어업·목축업 활발
일본과 활발한 해양무역

 
중국 산둥성 등주항(현 봉례시) 내항 모습. 발해 수군이 점령했던 성으로 발해인과 신라인이 무역하던 곳이다. 윤명철 제공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

 

 

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해는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극동 지역으로 진출한 중요한 이유는 질 좋은 모피를 획득할 수 있었고, 모피 세금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베링해를 발견한 것은 해달피를 얻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였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료에는 미타호(흥개호)의 붕어만 특산물로 기록돼 있지만, 흘러든 유기물로 인해 물색이 검게 된 송화강 하류 그리고 흑룡강(아무르강)에는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근대까지도 어업은 동만주의 주력 산업이었고, 소수 민족은 생선을 식량·비료로 사용했으며, 껍질로는 의복·신발·장식품을 생산하는 어피문화를 발전시켰다.

 

 

산둥 제나라로 말(馬) 수출

 

부여는 명마(名馬)의 산지였고, 원조선과 고구려는 말 수출 국가로 유명했다. 발해 또한 지역적인 특성상 목축업이 발달했다. 특히 솔빈부(우수리스크)의 말은 뛰어나서,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일가가 세운 산둥반도의 제(齊)나라로 수출했다. 말 떼를 육로로 압록강 하류까지 몰고 간 후 단둥시 외곽인 박작구(고구려의 박작성)에서 운반선에 실어 서해 북부 해양과 발해 해협을 통과해 등주(지금의 봉래시)에서 하역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하구에 세운 정안국도 말을 대규모로 보유했고, 송나라에 매년 1만 필 이상을 수출했다(《송서》).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발해의 배(船)는 동중국해 절강 지역(저우산군도·舟山群島)까지 나아갔다(《여지기승》).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특히 고구려 후기부터 교류해온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함께 실크로드 무역망에 참여했으며, 경교(동방기독교) 같은 서쪽 문화도 수용했다. 그런데 국가 정책, 과학기술과 산업, 발해인들의 기질과 능력이 발휘된 분야는 일본과의 해양 무역이었다.

 

 

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다. 특히 일본은 항해 능력이 달려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얻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구난희 《발해와 일본의 교류》). 하지만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쌍방교류’에서 경제교류가 주목적인 발해의 ‘일방교류’로 전환됐다.

 

 

일본에 34차례 공식 사절단 파견

 

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 사신선에는 관리와 상인 외에 지방세력인 수령도 정책적인 배려로 동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부(하바로프스크 추정) 사람이 무려 1100여 명이나 출우(아키타현)에 도착했다가 송환됐다. 이런 사례를 보면 발해의 민간 상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지방세력과 사(私)무역을 벌였고, 철과 주석을 교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상륙한 사신단 일부는 항구에 세운 객관(客館)과 객원(客院)에서 몇 달씩 장사를 했으며, 나머지는 수도로 들어가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본격적인 무역을 했다.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가지고 간 국서(國書). 항법사를 뜻하는 천문생이란 직책명이 있다.

 

 


발해 상단은 담비·호랑이·표범·말·곰 같은 짐승 가죽 등 양질의 모피, 꿀·인삼·산삼 등 토산품, 철·동 같은 광물, 명주·해표피·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 다시마 같은 수산물과 함께 대모배(동남아시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술잔) 등을 수출했고, 면·명주·수은 등과 돈을 받아갔다. 871년에 온 사신단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대금은 무려 40만전(錢)이나 됐다. 자연스럽게 발해악(樂) 등 각종 문화가 일본에 전파됐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심각한 무역 역조를 개선할 목적으로 발해 사신단 활동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9세기 초에는 사신이 입국하는 횟수를 12년마다 정하고, 1회 입국 인원을 105명으로 제한했는데 이를 위반하면 추방했다.

 

 

모피·꿀·철·명주·다시마 등 무역

 

그렇다면 험난한 겨울 동해를 건너다닌 발해인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뗏목 ‘발해 1300호’는 1997년 12월 3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항했다. 항해 25일째인 1998년 1월 24일 새벽에 오키제도의 도고섬에 좌초해 4명 전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발해선도 두세 번의 예외를 두고는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에 북서풍을 이용해 동해를 건넜고, 귀국할 때는 남동풍(信風)을 타고 3월에서 8월 사이에 항해했다. 당연히 ‘천문생(天文生)’이란 항법사가 동승했다. 842년에 발해가 일본에 보낸 문서에는 ‘배들이 바람을 점치고 때를 기다려 출항한다’는 내용이 있다(《속일본후기》). 하지만 험난한 항해라서 첫 사신단 파견 때는 승선자의 3분의 1이 희생당했고, 739년에는 1척이 표류해 40명이 죽었다. 776년에는 187명 중 46명만 생존했으며,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중 12명이 하이인(아이누족)에게 죽고 41명만 생존했다.

 

 

조선술은 전(前)근대에는 국가 산업으로 경제력과 과학·공학기술의 결정체였다. 발해선은 초기엔 20명 전후가 승선할 수 있는 소선(小船)이었고, 17척으로 325명(771년)이 일본에 간 경우도 있다. 9세기부터는 거의 100명 이상이 승선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커졌다. 보통은 일본의 견당선과 비교해 발해의 조선술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항해 상황을 왜곡하고, 항해술과 조선술의 메커니즘에 무지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한 결과다. 일본의 사신단은 항해 횟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렀으며, 때로는 승려·상인과 마찬가지로 발해선과 신라 민간선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와 교류하는 수준이었다.

 

 

작고 날렵하며 바닥이 뾰족한 발해船

 

 

 

봉강시 박물관에 전시된 혁철족의 어피옷

 

 

 

발해선은 동해의 황천(荒天)항해(폭풍·태풍 등의 악천후 속에서 항해하는 기술)가 가능하도록 건조돼야 한다. 그렇다면 침엽수를 사용해 선체는 작고 날렵하며 내구성이 강했을 것이다. 또 편서풍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돛대에 사각에 가까운 단순한 형태의 돛을 장착하고, 흘수가 깊고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이었을 것이다. 이런 발해선은 동해 망망대해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좌표로 삼아 항해해 혼슈 북부의 아키타현·니가타현·이시카와현의 노토반도와 후쿠이현의 쓰루가 등에 도착했다. 후기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돗토리현·시마네현의 오키제도와 이즈모·야마구치현, 심지어는 대마도(쓰시마)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시대 상황과 해양환경을 고려하면 발해선단은 오호츠크해와 동해가 만나는 타타르해에서도 활동하면서 오호츠크해 문화권과 교류했을 가능성도 있다(윤명철 ‘발해의 해양활동과 동아시아의 질서재편’·1998).

 

나라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죽음도 무릅쓰고 고난도의 항해를 부단히 시도했던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 그들을 잊고 있었던 탓에 우리는 지금 발해 역사를 중국에 빼앗길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4)

 

 

 

 

KBS 한국사전 – 발해 제2부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 – 문왕 대흠무

https://youtu.be/VSLeu3MmGoM?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KBS 역사스페셜 – 추적! 발해황후묘는 왜 공개되지 못하나

https://youtu.be/K3VX5W7bCDk?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20520003236400

 

 

(2) [한국사 공부] 발해는 결코 중국사가 될 수 없다 (daum.net) 한국경제 2015. 4. 10.

 

 

(3) 중국은 왜 '황제의 나라' 발해를 숨기나 (daum.net) 서울신문 2011. 6. 16.  

 

 

(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동아지중해 누비며 무역 강국 자리매김 (daum.net) 한국경제 2020. 4. 10.

 

 

 

<참고자료> 

 

 

문왕(文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문왕 (발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중국 역사교과서 왜곡] 러시아 학계선 "발해가 고구려 계승" (daum.net)2005.04.06

 

 

[플래시]'발해는 우리 역사' 잊지 말자 - 주간경향 (khan.co.kr)뉴스메이커579호.2004.06.24

 

 

한국고대사 |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고구려)라 불렀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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