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0.04.03 17:11 수정2020.04.04 01:31 지면A22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 한국경제 (hankyung.com)

 

(27) 발해의 건국과 발전


발해는 한민족의 역사
구성원 대부분이 고구려 유민
목간·그릇·파편 등에 '고려' 글자
日 기록에도 "발해는 옛 고구려"
둘레가 16㎞인 상경성 궁성 입구. 현무암으로 돼 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태도를 바꿔 ‘말갈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발해인들의 자의식과 자기 발언, 일본의 기록으로 볼 때 첫 국호는 ‘고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발해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다. 《삼국사기》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 또 발해를 무척 싫어한 최치원은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 이름을 발해라 했다’고 기록해 발해민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알려줬다. 《삼국유사》는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인 조영은 성이 대(大)씨이며,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의 《구당서》는 ‘(발해) 풍속이 고구려 및 거란과 같다’고 했고,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고 썼다. 중국은 ‘별종’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족이라는 듯 주장하지만, ‘고려(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高麗本夫餘別種也)’나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夫餘別種也)’ 등에서 볼 수 있듯 ‘별종’은 갈래 집단임을 표현한 단어다.
 
 
또 일본인들은 역사책 《류취국사》의 말갈 서술 부분을 인용해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은 이를 추종했다. 그런데 이는 북만주와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거친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숫자, 관리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소수인 속말말갈(말갈의 한 부족)은 본래 고구려의 구성원이었고, 발해는 이를 계승했을 뿐이다. 당연히 ‘대씨’ ‘고씨’ 등의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한 혼합종족체제일 수밖에 없다.
우수리스크 체르냐치노 5 유적의 발해인 거주지 온돌.
 
스스로를 天孫으로 칭한 발해 왕
 
고구려 계승성은 발해민들의 자의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속일본기》에는 발해 임금이 스스로를 ‘천손(天孫)’으로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정효공주묘의 묘지(墓誌)에 따르면 문왕은 ‘황상(皇上)’ ‘성법대왕’이란 호칭을 받았고, ‘대흥’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후 11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임금이 연호를 사용했다. 또 황제국체제처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란 봉작을 사용했고, 지방 토착세력을 ‘수령’이라고 불렀다. 반면 통일신라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의식이 미약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 밖에도 고구려 계승성은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
 
 
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사신을 파견했다. 한편 일본은 8세기 중반에 ‘신라정토론(新羅征討論)’을 내세워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선포했고, 공동의 적인 신라를 상대로 발해·일 동맹이 맺어졌다. 발해는 교류를 주도해 727년 이후 220여 년간 34회 사신단을 파견했고, 746년에는 민간인 1100명이 동해를 건너 혼슈 북부 해안에 상륙했다(윤명철,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2002년).
 
만주 일대를 지배한 해동성국 발해
 
흑룡강성 영안현 흥륜사에 있는 발해 석등. 원래는 상경성에 있었다.그럼 발해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을까? 첫 수도인 동모산 지역은 좁았으므로 742년에 넓은 터인 중경 현덕부(화룡현 서고성)로 천도했다. 이어 755년에는 토지가 넓고, 목단강의 수원인 경박호가 있는 상경(홀한성,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으로 천도했다. 다시 동경성(두만강 하구의 훈춘 일대)으로 옮겼으나, 9년 만인 794년에 상경으로 복귀했다. 이어 818년에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신당서》는 ‘땅은 사방 5000리이며, 호구는 10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다’고 기록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남으로는 대동강부터 원산까지, 서로는 요동반도까지, 북으로는 고구려도 관리하지 못했던 연해주 북부와 하바로프스크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광대한 제국이 됐다. 전에 우리 학자들은 일본 학계 주장을 수용해 요동을 뺀 채 압록강 하구에서 중만주 일대까지, 연해주 남부의 일부 지역까지가 발해 영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 중국, 특히 러시아 학자들의 발굴 덕분에 만주 일대가 대부분 발해 영토였다는 주장이 많아졌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그래서 고구려보다 영토가 1.5배나 넓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지방 및 종족 관리 방식의 차이, 자연환경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해 연구 기반 더 다져야
일본은 만주 침탈을 목적으로, 중국은 자기 역사임을 주장하려고 그리고 러시아는 연해주 일대가 자국 영토임을 알리려고 발해를 연구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내내 무관심했던 우리는 유득공 등 실학자와 장도빈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발해 연구를 시작했다. 북한은 일찍부터 연구했고(박시형), 남한은 관심 부족 탓인지 1998년까지 박사 학위자가 세 명에 불과했다. 필자가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을 때 발해를 ‘남북조 시대’ 범주에 넣고 싶었는데, ‘남북국 시대’라고 쓰는 것조차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발해인들이 강대국인 당나라를 물리치고, 빠른 기간에 대국을 이룩한 힘은 무엇일까? ‘세 명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三人渤海當一虎)’는 용맹함 때문일까? 문자가 있었고(《구당서》 발해말갈전), 외국인만 응시하는 당나라 과거(빈공과)에서 많은 합격자를 낸 수준 높은 교육열과 문화에 대한 열정 때문일까? 아니면 국가 시스템이 철저하게 완비되고, 군사력과 기술력이 크게 높아진 덕분일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지금까지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고대 문화의 동질성을 재조명하는데 큰 의의를 두었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동질성에 기초한 것이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업에 소홀했다.

발해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안정된 정치와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면서 926년 거란(, 요나라)에 망할 때까지 220여 년간 해동성국()으로 존재했다.

발해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구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국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계의 민족[]”이라 전제하고, 이어서 발해의 건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당()나라 즉천무후()가 대장군 이해고()에 명하여 대조영을 쫓게 하자 대조영은 고려[고구려]와 말갈의 민중을 모아 해고에게 항거하니 왕사(, 당나라 왕이 보낸 군사)가 크게 패해 해고는 간신히 탈출하여 돌아갔다. 즉천은 더 이상 대조영을 토벌할 수 없게 되므로,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개루부()의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웅거하게 되었는데, 말갈과 고려[고구려]의 여중()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자 스스로 진국( 혹은 )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가 성력() 연간으로 698년이다.

여기에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고려[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나라[진국]을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대조영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중국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 건국의 양대 건국 유공자, 즉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내원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는데, 후세의 해석상에서 이를 구분치 않아 대조영을 혹자가 잘못 ‘말갈인’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대조영을 ‘’이라고 분명히 지칭하고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한 것이나, 『주서()』이역전에서 “백제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계 민족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당서』가 말한 “ []”이란 것도 마땅히 대조영이 고구려계 민족이란 뜻이다.

둘째, “조영과 말갈의 걸사비우[]”라고 하는 구절인데, 여기에서 걸사비우 앞에 굳이 ‘말갈’을 지칭하였으나 조영 앞에는 ‘고려’가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당서』는 조영을 전구()에서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이미 종족명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라 하지 않고 조영 앞에 오는 종족명[고려]을 생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이라 칭한 것은 “”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발해는 고구려와 동일시한 즉,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는 「발해전」 앞에 분명히 「말갈전」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해국의 민족 구성의 중요 성원이 고구려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발해 동경성지(東京城址)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실정이지만 고구려와 발해국은 분명 우리의 역사에 속한다. 발해국이 우리의 역사로 인정되는 사료는 발해국이 중국사로 오인될 수 있는 사료보다 훨씬 많다. 또한 발해국의 문화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국의 문물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발해 성곽을 들 수 있다. 발해 5경() 가운데 상경용천부()인 동경성(), 중경현덕부()인 서고성(西), 남경남해부()인 청해토성()을 들 수 있다.

발해국의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인 동경성() 유적은 일찍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서 조사된 바 있다.1)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고 당시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한편 동경성 안에서는 수십 편의 와불()이 출토된 바 있다. 발해 석등()은 지상에 몇 안되는 건조물[조각] 중의 하나이다.

발해 동경성지 석등(石燈)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내 청나라때 흥륭사(興隆寺)가 있던 자리에 발해 석등이 남아 있다. 높이 6m.

 

상경용천부는 일명 동경성이라고 하는데 성의 축성 방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발해 수도 동경성지(東京城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도성, 일명 동경성이라고 한다. 둘레 16,296m나 되는 외성 안에 황성과 궁성이 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시기[698~926]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사방 수백 리가 되는 평탄한 분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분지 둘레는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 처져 있으며 성의 서남쪽에 있는 경박호()에서 흘러나오는 모란강()이 성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감아 돌면서 자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상경용천부는 궁성·황성·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상경용천부의 외성은 평지토성()이다.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 밖의 길이는 동쪽이 3,358m, 서쪽이 3,406m, 남쪽이 4,586m, 북쪽이 4,946m로 전체 둘레는 무려 1만 6,296m나 되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 정도 된다.2) 외성 밖으로 모란강 물을 끌어들인 해자()가 둘러져 있다.

황성과 궁성은 성의 북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궁성의 정남으로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도시계획이 정연하게 이루어진 모습이 마치 근대적 도시계획인 ‘전()자’ 형과 비슷하다. 이는 일찍이 552년부터 586년까지 대규모로 계획도시가 건설된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 역시 외성과 중성[황성], 내성[궁성]으로 된 기본적인 구조에 방어성인 북성을 축성하였다.

상경용천부의 외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평양성의 평지에 쌓은 성벽 축조 방법과 마찬가지로 돌로 성벽의 외연()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져 쌓는 판축방법으로 축성하였다. 판축수법은 중국과 같은 판축토성이기는 하지만 외연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방법은 중국의 고대 축성법과는 다르다.

상경용천부에서는 석재 건축유구를 비롯하여 유명한 발해 석등, 불상과 사리함 등 불교유물 및 여러 종류의 기와와 유약을 바른 기와 그리고 발해삼채()·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해에서는 삼채 말고도 녹유 도기, 백자 등이 제작되었다. 우리는 발해 자기의 유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유물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고구려적이다. 동경성의 서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는 유명한 발해 삼령둔() 고분이 있다.

길림성 발해 용정현 중평() 사지 출토 발해 석조 삼존불상()

발해 삼채완()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북대 7호묘에서 최근 발견되어 공개된 발해 삼채완()이다.

흑용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동경성() 출토 발해삼채() 편]록.청.황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도기.(『동경성()』, 1936, PL.103)

발해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서고성지(西)는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남북 길이가 각각 720m, 동서 넓이 각각 630m로 전체 둘레 2,700m이다. 기저부 폭은 13~17m이고, 모양은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번갈아 쌓으며 다졌다.[니토항축()]3) 외성의 사주에는 해자를 둘렀다. 최근 2000~2001년 발굴을 통해서 성안에서 41×25m 면적의 1호 궁궐지를 비롯하여 건물지와 연못지가 조사되었으며, 기와와 벽돌들이 출토 되었다. 그리고 유약을 입힌 기둥 밑 장식, 치미, 괴면, 전벽돌, 약간의 철정() 등 건축 장식 및 재료가 출토되었다.4) 이 성은 성의 구획, 건물의 배치, 규모, 형식, 건축장식 그리고 출토 유물에 이르기까지 상경 용천부와 유사하다.5) 이 곳은 발해 3대 문왕()이 수도로 사용하던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가 있던 현주()이다. 서고성지 주변에 발해 시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해 정효공주() 무덤이 있다.

발해 서고성지(西) 발굴전 전경[1990]

발해 서고성지 발굴 장면[2002]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청해토성()이 있다. 이 곳은 남경 남해부가 있던 발해 5경 가운데 하나로, 5경 중 유일하게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6) 현재 남아 있는 규모는 동쪽 성벽 332m, 서쪽 성벽의 길이가 342m이며, 남쪽 성벽 328m, 북쪽 성벽의 길이는 340m로, 성벽의 둘레는 길이 1,342m이다. 그러나 원래의 성은 이보다 규모가 더 컸는데, 1916년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그 둘레가 2,132m가 된다고 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놓인 장방형이다. 성벽의 남은 높이는 2~3m이며 기저부 넓이는 약 8m이다. 성의 바깥 둘레에는 해자가 있으며 성벽에는 각루()와 마면()이 있다. 마면의 길이는 6m 정도이고, 높이는 2m이다. 성내에는 건물지와 우물지가 있으며, 출토 유물로는 초석·기와·벽돌·괴면·치미 등이 있다.

발해 남경남해부 청해토성지(靑海土城址)

함경남도 북청읍 토성리에서 동남쪽 16km 지점 남대천 하구에 위치한 발해 남경남해부의 청해성. 평지 토루(土壘)형의 성터는 지금 남아 있는 높이가 약 2m 정도이고, 둘레 1,342m의 정방형이다. 북한의 지정고적 제172호.

이 외에 갑옷·활촉·창끌 등 무기류와 말등자·말자갈 등 마구, 낫·삽 등 생산도구와 기타 토기류가 있다. 성벽의 중앙에서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옹성() 형식의 문터가 확인되었으며, 토성 주위에서는 발해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구려계의 문화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청해토성지 궁뜰

청해토성지 부근 발해 고분

 

함경남도 북청읍 명수리에서는 최근 수십 기의 발해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 특유의 묘제인 소형 석실 봉토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해의 산성도 고구려의 성곽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발해의 산성은 고구려의 산성과 같이 남쪽이 낮고 그 북쪽에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우묵한 골짜기를 낀 산 능선에 성벽을 두른 ‘고로봉식()’ 산성이다.

발해국의 성터를 고르는 방법에서부터 성벽을 쌓는 기술, 왕궁의 기본 구조와 건축술, 도시계획 그리고 무덤을 축조하는 짜임새, 주검을 묻는 방법, 그 밖에 건물에 사용되는 기와 종류와 형태는 물론 제작기술에 이르기까지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 고구려의 계승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주검을 묻은 고분이다. 발해의 고분은 지상이나 지하에 돌을 사용해 무덤을 축조하고 그 위에 흙을 덮는 이른바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이는 고구려 계통의 전형적인 무덤형태이다.

발해국의 고분은 주로 발해 5경()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상경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과 중경현덕부가 있던 화룡현 서고성(西), 그리고 발해 구국도()인 동경용원부가 있던 길림성 돈화현의 오동성() 주변의 고분군이다.

특히 발해의 무덤 가운데 고분의 봉분 위에서 건물의 기단부나 추춧돌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고분 위에 목조건축물을 세운 시설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고분 위에 목조건축물[묘상건축()]을 세우는 풍습은 고구려의 장군총·태왕릉·천추총·임강총·서대총 등 왕릉급의 고분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사당과 같은 릉상묘()로서 저자는 이를 ‘향당()’이라고 했다.1)

발해 향당이 존재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고분은 발해 5경 중 가장 장기간 도성으로 존속했던 상경용천부 북방 5km지점 영안현 삼릉향()에 있는 삼령둔() 고분이다. 세 기의 능()이 있다고 해서 삼릉(), 혹은 삼령()이라고 한다.

발해와 후기 신라시기[8세기] 강역도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삼령둔 고분은 삼릉 1호분이라고도 하는데 동경성 동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는 동서 123m, 남북 121m의 대형 조역()을 형성하고, 고분의 중앙부에 남북 20m, 동서 15m 넓이의 장방형의 현무암으로 적석하고 반지하식의 묘실[현실()과 연도()]을 축조한 석곽묘이다. 석곽의 표면에는 칠식(, 즉, 오늘날의 콘크리트 구조물과 같은)을 바른 흔적이 남아 있고 입구는 남향이다.

고분의 상부에는 발해시대의 녹유() 치미()와 기와편이 산포되어 있고, 분구상()에서는 초석() 4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역() 내 곳곳에서도 녹유와를 비롯하여 많은 발해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경성지 삼령둔() 고분 실측도

삼령둔 고분 정상의 주춧돌고분 정상부에서 세운 향당 건물의 주초석이 발견되었다.

 

한편, 삼령둔 고분의 외형에 대하여 보고서에는 “묘의 봉토는 높지 않고 낮게 성토한 위에 혹종()의 건조물()을 덮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2) 저자는 여기서 말하는 ‘혹종의 건조물’을 향당()으로 보았다.3)

삼령둔 고분 석실의 구조면에서는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통구 산성하묘구의 절천정총()이나 평안남도 중화군 진성리 제1호분 석실의 석벽축조와 천정 결구방법이 유사하다. 이 밖에 삼령둔 고분 및 조역, 또는 동경성지 일대에서 출토된 발해 와당도 고구려계의 전통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발해문화의 고구려적 요소가 선왕선공()을 모시는 상례()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삼령둔 고분의 향당에서 찾아 볼 수 있으니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중국의 주국침()은 “무덤 위에 향전(殿)과 같은 종류의 건축물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하였다.4)

발해의 무덤에는 벽돌무덤[전축분()]도 있는데, 벽돌무덤의 상부에 삼령둔 석실봉토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향당이 축조됐을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효공주(, 792년 ) 무덤이다.

화룡현 서고성 부근에는 발해 무덤들이 많이 널려 있는데 지금까지 1,000여 기의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다. 1980년에 연변박물관에서 화룡현 용수향 용두산() 위에서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용두산 고분군은 발해 왕실 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5)

정효공주 무덤의 구조는 무덤 바깥 길[연도()], 무덤 문[묘문()], 무덤 안 길[용도()], 주검 칸[현실()], 무덤 탑[묘탑()]의 5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무덤 남북의 길이는 약 15m, 동서의 너비는 약 7m이다. 무덤 바깥 길은 무덤의 남쪽에 설치되었는데, 그 수평거리는 7.1m이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은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다. 무덤 안 길의 길이는 1.9m이다. 주검 칸은 남북의 길이 3.1m, 동서의 너비 2.1m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벽돌로 축조되었다. 주검 칸의 벽의 높이는 동·서벽은 1.4m, 북벽은 1.6m, 남벽은 1.66m이다. 네 벽의 윗 부분은 벽돌과 돌로 평행고임을 만들고, 그 위에 큰 판석()을 덮어서 천정을 얹었다. 벽면과 천정에는 모두 흰 회를 발랐다.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 묘 현실 실측도면

 

벽돌로 쌓은 주검 칸과 무덤 안 길의 벽에는 흰 회를 바른 위에 주인공의 문위()·시종()·시위()·악사()·내시() 등 모두 12명의 입상 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무덤 안 길에서는 완전히 원형대로 보존된 정효공주묘지()가 발견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인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그가 죽은 때는 부왕이 아직 살아 있던 792년 6월이고 장사를 지낸 것은 그해 11월이다.

발해 정효공주 묘의 현실 벽화 인물도[모사도]

 

무덤 칸[현실] 내부의 관대 위에서 남녀 2인의 유체 골격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정효공주 부부가 2차에 걸쳐 매장된 합장묘로 추측되고 있다.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 위에 흙을 덮어 축조하고 다시 그 위에 무덤무지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탑의 기초가 있다.

그 위에 이른바 묘탑( 혹은 )을 세웠다. 탑신은 이미 없어졌고 방형으로 된 기초만이 남아 있다. 지상에 있는 탑 기초의 남북 길이는 5.6m, 동서 길이는 5.5m이다. 묘탑은 삼령둔 고분에서 보는 일종의 향당()과 같은 묘상건물()이다.

1973년 6월에 길림성박물관, 연변박물관 및 훈춘현문화관이 훈춘시 마적달향 마적달촌에서 약 1km 떨어진 마을 북쪽 산중턱에서 마적달() 무덤을 정리하였다.6) 마적달 무덤은 전부 벽돌과 돌로 쌓았고 지면의 묘탑과 지하의 궁전[지궁( 즉, 현실())], 무덤 안 길, 무덤 길로 구성되어 있다. 탑 둘레는 남북의 길이가 13m, 동서의 너비가 10.3m이다. 벽돌을 깐 지면 가운데에 탑 기초가 있다. 기초는 남북의 길이 4.95m, 동서의 너비 4.8m이며 방향은 남에서 동쪽으로 40°이다. 탑의 기초는 ‘지궁[현실]’ 윗부분의 판석() 위에 장방형으로 벽돌을 쌓았다. 지궁의 중심은 높이가 2.3m, 길이가 2.7m, 너비가 1.86m이다. 바닥에 관대 같은 것들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또 사람의 아래턱 뼈·등뼈·팔과 다리 뼈가 있었는데, 한 개체의 중년 남자 유골()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마적달묘탑 역시 무덤 위에 세워진 향당으로 볼 수 있다. 이 묘탑은 원래 7층이었으나 민국() 10년[1921]에 무너졌다고 한다.

마적달 무덤은 발해 동경용원부() 자리인 팔련성()에서 약 50km 떨어진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무덤의 축조 방법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마적달묘탑을 쌓은 연대도 정효공주 무덤의 축조 시기인 792년과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며, 마적달묘탑에 묻힌 사람도 발해 왕족일 것으로 보인다.

훈춘시 마적달묘탑 복원 상상도[위]와 현실 실측도면[아래]『연변문물간편』 p.124.

 

이밖에 발해의 묘탑으로, 길림성 장백현() 현성에서 서북으로 1km 떨어진 탑산()의 서남골 평탄한 둔덕에 ‘영광탑()’이 있다. 영광탑이란 명칭은 이 지방 토어()이고, 원래는 발해 묘탑이다. 대지는 해발 820m 분지로 동서 길이 약 4리[2km], 남북 길이 2리[1km]정도이다. 묘탑으로부터 약 2리 되는 곳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묘탑은 ‘누각식공심방탑형()’으로 탑신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탑신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발해 묘탑이다. 묘탑은 연도, 용도, 지궁[현실], 탑신, 찰주() 등 5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림성 장백(長白)조선족자치현 발해 영광탑(靈光塔)지하에는 묘실[현실(玄室)]을 축조하고 지상에는 벽돌로 5층으로 쌓아올린 묘탑(廟塔). 고구려 시기의 묘상건축(墓上建築)인 향당(享堂)과 같은 성격의 발해 시기 향당 건축이다. 높이 13m.

 

묘탑의 기단은 현실 천장에 덮은 개석() 위에 흙으로 판축하고, 그 위에 전돌로 탑신을 축조하였다. 묘탑은 모두 5층이며, 높이는 12.86m이다. 탑신은 방형이고 1층 정면[남면]에 아치문[공권문()]을 설치하고, 2·3·5층의 기단마다 방형 감실()을 두었다.

영광탑의 지궁[현실]은 평면이 남북 길이 1.9m, 동서 길이 1.42m, 폭이 1.49m의 장방형으로, 바닥은 세 겹으로 전돌을 깔았고 벽면도 전돌을 쌓았다. 천장은 석판()으로 덮었으나 많이 붕괴되었고, 현실의 벽면과 천장은 백회를 발랐으나 대부분 벗겨졌다.

현실의 후벽 중앙 약간 동쪽으로 석대좌()가 놓여 있는데 보고자는 이를 사리함()으로 추정하고 있다.7) 그러나 현실의 크기로 보아 시신을 안치한 고분형 전축분이 아닌가 한다.

발해의 무덤 위에 전돌로 탑을 세운 것은 전 시기 고구려의 왕릉급무덤 위에 건물을 세우는 향당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탑은 본래 죽은 자를 묻는 무덤으로,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한 묘()와 같이 제사의 대상인 탑()을 상징물로 삼았다.

고구려의 능묘()의 향당 제도에서 비롯하여 불탑() 형식으로 발전한 발해의 독특한 묘탑 묘제이다. 화장() 사리() 묘제인 신라의 모전석탑()이나 전탑()과의 관계를 주목해 볼 만하다.

육정산(六頂山) 발해 고분 출토 벽화 잔편(殘片)길림성박물관 소장.

 

1991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전사 5』 발해편에 “집안의 장군무덤 꼭대기에 집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풍습이 고구려에도 있었으며, 발해 무덤에 보이는 지붕은 고구려의 풍습을 계승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8) 고구려의 향당제도에 대하여 본서 21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향당제도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묘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이 밖에 발해 고분 가운데 봉분 위에 묘탑[향당]을 설치한 고분이 몇 군데 더 발견된 바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벽화파편이 출토되는 고분도 발견되고 있다.

발해의 돌칸 흙무덤도 그 짜임새가 고구려의 돌칸 흙무덤과 똑같다.9) 한편, 중국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왕승례() 씨는 돈화현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 780년 매장)의 대형 석곽묘 천장의 이른바 말각조정() 결구방법이 집안() 고구려 모두루총()의 결구방법과 같다고 하였다. 또, 소형 석관묘의 무덤 위에 여러 장의 판석을 덮는 방법이나 묘장의 형태가 통화()나 집안 일대의 고구려 소형 석관묘와 동일하다고 하였다.10)

일찍이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 선생은 『발해사』11)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해국이 이룩한 문화는 그 정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이전 고구려 사람들의 것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 남은 발해의 도시 유적·성곽·고분·전축·조각·공예품 및 기타 유물·유적들은 다 고구려의 것들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며, 그 가운데는 고구려 것인지 발해 것인지 거의 가려낼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것들도 적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예전처럼 중국사의 입장에서 쓰이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점령시대에서와 같이 일본사의 일부로 쓰여서도 안 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다만 얼마나 사실에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실사구시학()’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의 향당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입력 2007. 7. 13. 18:00수정 2007. 7. 13. 18:00

만리장성과 대등히 맞선 제국의 영욕

 

"광대무변한 역사 보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

김홍신(60)씨가 소설가로 귀환했다. 2005년 여름부터 1년 반 동안 칩거하며 대학 노트에 만년필로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을 쏟아냈다. 7개월의 퇴고를 거친 작품은 <김홍신의 대발해>(아리샘 발행ㆍ전 10권)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전작인 <초한지> <삼국지> <수호지>와는 달리, 원전 없이 역사서 탐독과 현장 취재, 상상력에 기댄 역사소설이다.

 

2,500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책엔 고구려 패망 후 30년 만에 일어난 발해의 230년 역사가 유장하다. 태조 대조영을 위시한 15명의 황제가 등장하고, 뜨고 지는 신료 및 장졸의 수가 400명을 헤아린다.

2004년 총선 낙선 직후 "바깥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가두는" 심정으로 작품을 구상할 때만 해도 발해사의 장강을 틔울 물꼬가 보이지 않았다. "3대 문황제의 두 딸인 정혜ㆍ정효 공주의 비문에 적힌 1,500자 외엔 남은 기록이 없었다. 그마저도 발해가 칭제(稱帝)했고 불교가 흥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줄 뿐이었다"고 작가는 회고한다.

이후 한국, 중국, 일본을 가리지 않고 역사서를 섭렵했다. 북한 사회과학연구소의 발해 연구자료도 유용했다. <본초강목> <손자병법> 등의 고서나 신문, 잡지, 인터넷에서 건진 자료는 고스란히 작품의 살을 붙이는데 쓰였다.

그는 "대대로 장수했던 대조영 집안의 건강 비결을 밝히려 한의사 친구에게 무시로 전화했고, 정확한 기마전 묘사를 위해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경마 기수, 말 소유주에게 물었다"고 말한다.

발해의 정치ㆍ외교사를 현실감 있게 그리는 작업에는 현대정치사 전공 교수의 도움이 컸다. 재작년과 작년 여름엔 중국 동북3성과 산둥반도,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으로 시작하는 소설엔 시종 흙먼지가 가실 줄 모른다. 풍성하고 유려한 어휘를 머금은 간결한 문장은, 중국과 대등히 맞서며 폭력의 역사를 기꺼이 감당한 제국의 영욕을 긴장감있게 그린다.

 

때론 권력자의 탐욕과 불안을 섬세하게 탐구하고, 때론 주체 못할 애욕이 뿜어내는 풍경을 질펀하게 묘사하며 이야기의 숨을 고르는 실력이 작가의 관록을 증명한다.

그는 2대 무황제의 군대가 만리장성 코앞인 마도산, 산둥반도 옌타이, 베이징까지 쳐들어가 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면(5권)을 편애한다. "광대무변한 발해 역사를 보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이 작가의 변이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수기(手記)를 고집하는 작가에게 2년 여의 집필은 고행이었다. 촉이 닳아 만년필을 바꿀 때마다 뻑뻑한 필기감은 으레 오른팔 마비로 이어졌다. 볕을 못쬔 피부에는 햇빛 알레르기가 생겼다. 그래도 필력을 찾은 그의 머릿속엔 차기 작품 구상이 들어차있다.

먼저 붓다를 신격화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깨친 인간적 존재로 형상화하려 한다. 몸을 추스르고 내년 초 인도로 취재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560만 부가 팔린 출세작 <인간시장>(1981)의 현실고발 정신으로 정치판 군상을 비추겠다고 공언한 <신인간시장>도 있다. 단 "정치권을 떠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비판 정신을 벼리는데 좀더 시간이 필요하단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입력 2007-04-2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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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대외 교통로, 크게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다.


걸걸중상, 걸사비우, 이진충, 이해고, 설인귀…. TV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익숙해진 이름들이다.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 인물들은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만큼이나 발해를 한민족사의 중요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말갈족의 나라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구려를 승계한, 한민족의 국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사진)는 이같은 중국측 주장을 총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동아시아의 당시 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지만, 이같은 국제적 질서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발해 왕에 대한 당나라의 ‘책봉’은 주변 왕조에 대한 외교적 승인 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는 아니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입력 2006. 9. 18. 21:16수정 2006. 9. 18. 21:16

"발해 기층민 말갈족도 고대 한민족" 홍콩 사학자 김광석씨 논문 (daum.net)

발해 사학자인 김광석(62) 홍콩 능인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박사논문에서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족이 고대 한민족이라고 주장했다고 연합뉴스가 18일 보도했다.

김 교수는 1991년 홍콩에서 발표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에 따르면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 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는데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라는 의미였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특히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당나라 시선 이태백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그의 시문집 '옥록총담'에 기록돼 있다고 그는 밝혔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명희 기자 mheel@kmib.co.kr

 

 

  •  승인 2005.03.30 00:00 홍원탁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he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광개토왕대왕 이후, 고구려는 250여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 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나타난다.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하여 200년 이상 만주 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게 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

홍원탁 (서울대 교수)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은 백제 수도 한성을 (396년에) 포위공격하고, 요동을 정복한 후, 만주 동북쪽의 숙신(肅愼)마저 굴복시켰다.1 광개토왕 생전에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계기로, 고구려는 그 후 250여년간 흑수 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수왕(長壽王, 413-491)이 만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州)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507년에 고노(高老)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영양왕(嬰陽王)이 598년에 직접 만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고; 보장왕(寶藏王)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명을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2

금사(金史)에는 15만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고, 구당서(舊唐書) 역시 15만의 말갈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당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436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北燕, 409-36)의 왕과 그 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으며, 494년에는 숙신-말갈에 의해 쫓겨난 부여왕 일족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 위서(魏書)는,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대동(大同)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4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여러 차례 패한 곳은 바로 요하 유역과 산악 지형의 요동반도 이었다. 요동지역은 마침내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당 조정은 요동의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677년에)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동무가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동무의 직계 후손들이 태수직위를 세습하면서 역사가들이 요동을 소고구려(小高句麗)라 부르게 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땅에 발해(689-926)를 세웠다. 발해의 시조는 옛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689-719)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 영주(營州, 오늘날 朝陽)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거란족의 폭동이 발생하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진(震)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기록을 보면 대(大)씨족과 조영은 고구려 왕족 중 핵심 부족인 계루(桂樓)부에 속했거나, 아니면 고구려에 귀화한 말갈족이었던 것 같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大武藝, 719-737)은 바다건너로 군대를 보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오늘날의 봉래)를 공격하였다.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아래위로 동시에 공격했다. 통일신라와 발해 왕국의 출현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정복하겠다는 당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발해가 처음으로 야마토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던 것은 727년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옛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여 부여의 옛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며, 발해가 바로 옛 고구려임을 천명했다. 발해왕은 798년에 야마토 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가 고구려(또는 고씨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7

금사(金史)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동부 만주의 모든 말갈부족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8  후에 거란족이 발해를 정복한 후, 요(遼)에 편입된 흑수 말갈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요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흑수말갈족은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생여진족들은 이른바 백산-흑수 (장백산맥과 흑룡강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

발해는 안녹산의 난(755-7)을 틈타 요동을 점령하고 소고구려를 흡수하였다. 9 742년 당시의 당나라 지도는 요하 서쪽의 요서 연안이 당나라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10 그런데 763년의 지도에는 당나라 국경이 만리장성 뒤로 물러갔음을 보여준다 Ledyard (1983: 341)는 “676년에 요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단지 8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후, 756년에 철폐되었다”라고 구당서(39志19地理2)를 인용한다

당나라는 717년에 평로군사(平盧軍使)를 영주에 설치하였고, 765년부터는 평로군사가 신라와 발해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11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2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13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은, 발해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이며,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를 포함한 6개의 주(州)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4 요사(遼史)에 의하면 현주를 포함한 6주가 모두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과 서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地理誌)는, 안록산의 난(755-7)이 발생하기 이전인 건국초기의 발해 강역을 기술하면서,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 하나가 장백산맥 깊숙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을 했다. 15  이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현대 중국, 일본 역사가들은 발해의 “현덕부” 전체가 장백산맥 일대에 위치했었다고 단정을 하고, 당이 멸망하는 907년까지, 당나라 강역이 요동 전체를 포함하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요사는 몽골 원나라 말기인 1343-4년 기간 중, 11개월 이라는 단기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들도 많이 발견된다. 금사(金史) 역시 원 조정이 1343년 4월부터 20개월 만에 편찬을 완료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당서는,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는 북송(北宋) 조정이 1044년부터 1060년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을 투입 해, 중화사상 이념을 바탕으로, 아주 치밀하게 편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동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덜 왜곡된 역사 기록인지 자명할 것이다.

거의 500여년간 지속된 고구려-말갈족의 연합국가는 직접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동화 과정을 통해, 양측 언어에 어휘적-구문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여-고구려-신라어에서 유래하는 한국어와 숙신-말갈-여진어에서 유래하는 만주어는 모두 모음회전과 조직적인 모음전이 현상이 나타나, 모음 역할의 성격이 재구성되었고, 모음조화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16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후, 중부만주의 예맥-퉁구스는 서부만주의 선비족과 동부만주의 말갈족에게 밀려, 오래 전에 한반도로 내려와 쌀 재배를 하며 살아 온 예맥 친족들과 합쳐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와는 달리, 말갈-여진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발해왕국의 말갈-여진족 지배층이라는 존재도 대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 (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맥-말갈 연합의 전반부는 분명히 예맥-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후반부는 말갈-여진 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을 수도 있다. 급기야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예맥-퉁구스의 역사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덴마크 사람들이 지배하던 바이킹 제국(1397-1523)은 스웨디쉬 바이킹의 반란으로 해체되었고, 대니쉬 바이킹은 1658년에 스웨덴 남부의 룬트(Lund)지역 마저 상실했다. 1814년에는 스웨디쉬 바이킹이 주도하는 스칸디나비아가 등장 하여, 스웨덴 왕이 군림하는 스웨도-노르웨이 연합왕국의 형태로 1905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대니쉬 바이킹의 존재는 유틀란트 반도와 2개의 섬에 한정되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3 (2005. 3. 19.)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광개토왕 비문에는 398년 이후 어느 때인가 흑수 말갈이 굴복된 것으로 되어있다.

廣開土大王碑文 八年 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俗 … 自此以來 朝貢論事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 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2.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말갈군과 32번이나 싸운 기록이 있으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말갈군과 23번 싸운 기록이 있다.

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五十六年(468)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上 高麗 … 靺鞨之衆十五萬來援 安市城…太宗…收靺鞨 三千三百 盡坑之

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二十三年 秋 魏人數伐燕 … 燕王馮弘曰 若事急且 東依高句麗 二十四年 五月(436) 燕王率龍 城見戶東徙… 魏主…令送燕王 …以王違詔議擊之 …乃止 七十九年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魏書 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5. 舊唐書 卷 一百九十九 上 列傳 東夷 高麗. Lee (1984: 71-73) 참조

6. 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下 列傳 北狄 渤海靺鞨 …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 則天命… 先破斬乞四比羽 …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靺鞨之衆及高麗餘燼…自立爲振[震]國王 … 風俗與高麗及契丹同 … 開元七年 祚榮死 …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 大武藝襲父爲

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三 渤海 …唐高宗滅高麗 徙其人散處中國…高麗別種大乞乞仲象…子祚榮痲中宗時置忽汗州…封渤海郡王 … 其國土産物與高麗同

欽定 滿洲源流考 卷八 疆域一 …渤海 …遼史言 渤海大氏始…東牟山 … 舊唐書作桂婁之東牟山 桂婁爲高麗部名 高麗五部 西漢以還桂婁部爲王 三國志 魏書東夷傳 高句麗傳 …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7. 聖武 神龜四年 九月 渤海郡王使首領. . . 來着 . . . 十二月 渤海郡者 舊高麗國也 五年 正月 . . . 上其王書. . . 曰 . . .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續日本紀 二: 182, 186, 188)

渤海康王與日本國桓武書[796] … 可尋踨於高氏 … 日本逸史 卷七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 考三, 1779-84 편찬, 참조.)

8.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朝貢遂絶 五代時 契丹盡取渤海地 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 號熟女直 其在北者 不在契丹籍 號生女直 生女直地有 … 長白山 … 黑龍江

9. Lee (1984: 71-73)

10. Twitchett (1979: 403, 488) 참조

11. Kim (2004: 385-6) 참조.

12. 欽定滿洲源流考 卷十 疆域三 渤海國境 遼史 東京海州南海軍…渤海號南京南海府…舊五代史 自鐵州行七八日至南海府 元一統志 澄州本海州南海府…高麗時卑沙城…卽此渤海爲南海府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明一統志 海州…高麗爲沙卑城 渤海國爲南海府

遼史 東京遼州 本…渤海爲東平府 唐太宗親征高麗 李世勣拔遼城 高宗詔程名振蘇定方討高麗至新城大破之 皆此地也 …遼州有遼河

遼史 東京巖州白巖軍 本渤海白巖城 太宗撥屬瀋州白巖縣 渤海置州 按唐太宗貞觀十九年 伐高麗 旣得遼州 進軍白巖城 克之置巖州 …

遼史 鐵州 … 本漢安市縣地 高麗爲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渤海置州 蓋州 遼史辰州 本高麗蓋牟城 … 渤海改爲蓋州
金史 地理上 咸平府 本高麗銅山縣地 遼爲咸州 … 南有柴河 北有淸河 西有遼河

遼史 地理志二 咸州 … 本高麗銅山縣地 渤海置銅山郡… 唐 安東都護治永平二州間卽此

遼史 瀋州本挹婁國地 渤海建瀋州 遼東行部誌 瀋州在唐時 爲高麗侵據

遼史 銀州 … 本渤海富州 韓州 金史 … 本渤海鄚頡府

遼史 東京信州 本…渤海置懷府 穆州 遼史 … 本渤海會農郡

欽定 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遼史 顯州…本渤海 顯德府地 … 以奉顯陵 … 本漢無盧縣 卽醫巫閭 … 自錦州八十里至…自…一百里 至顯州 … 遼西州…本漢遼西郡地 世宗置州屬顯州 … 遼東行部誌 廣甯本陽羅郡渤海顯德府 遼世宗改顯州 … 乾州 …本漢無慮縣 …本渤海…縣 元一統志 乾州故城在 廣甯府西南七里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顯州 本渤海顯德府地…以奉顯陵… 置醫巫閭山絶頂築堂曰望海…穆宗葬世宗於顯陵西山 … 有十三山

金史 地理上 廣寧府本遼顯州… 廣寧有遼世宗顯陵 閭陽遼乾州 廣德軍 …有凌河 有遼景宗乾陵

13. 渤海 康王與日本國桓武書 [796] … 土統舊封 …金印紫綬 遼外光耀 … 日本後紀 卷五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考二 참조.

14. 新唐書 列傳 北狄渤海…中京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15. 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 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東北三十里…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742-756]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16. Janhunen (1996: 153)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12/27 [00:35]

대조영이 세운 나라는 '발해'인가, 대진국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이 2007년 12월 23일(일) 134부작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드라마 <대조영>의 시청률은 30%를 넘어 아주 높은 편이었고, 우리에게 잊혀지고 있던 발해(대진국)라는 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의미 있는 드라마였다. 비록 뜻하지 않게 나라(고구려)는 잃었으나 굴하지 않고 다시 나라를 30년 만에 되찾는다는 위대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드라마로 연말에 KBS 대상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마지막 2부에서 발해(대진국)에 대해 중요한 역사왜곡을 함으로서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발해라는 국호를 개국시 대조영 스스로 지은 것이고, 신당서란 사서에 보면 당나라에서 대중상에게 진국공을 내린 기록이 있기 때문에 진국이라 함은 우리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란 이상한 해설을 했다.

또한 발해(渤海)라는 국명은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도인 홀한성(상경용천부)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호수인 ‘경박호’에서 따온 것이라는 해설을 했다. 경박호는 비록 바다가 아닌 호수이지만 그 둘레가 30km가량 되는 큰 호수라서 바다처럼 여겨져 국호 발해가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억지춘향식 해석이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지도. 이런 땅이 넓어 5경을 두었다? 남경이 함경도 북청? 서경이 중강진 부근?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서쪽은 요하동쪽? 이건 대진국의 지도가 아니라 간도를 포함한 조선시대 영토보다도 작다.

 

게다가 발해는 땅이 넓어 5경을 두었다 하면서 지도를 보여 주었는데 그 5경의 위치는 현 강단사학계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남경남해부가 현 함경도 북청 땅에 있다는 것으로 발해와 신라의 국경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삼국통일 했다는 현 사학계의 이론과 같은 것이었다. 이 이론은 일제가 만든 <조선사 35권>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와의 화해 조건으로 요동 땅을 얻었다고 하면서 막상 보여 준 지도는 진짜 요동 땅이 안 들어간 영토였다. 왜냐하면 당시는 요나라가 건국되기 전이므로 요동이라 함은  현 요하 동쪽이 아니라, 고구려 요동인 현 난하 지역을 이르거나 한나라 요동인 현 산서성 일부와 하북성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필자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이러한 모든 것은 드라마 작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사학계의 이론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보니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일왕 특명으로 일제가 조선인의 세뇌교육용으로 만든 <조선사 35권>을 바이블로 하여 우리 국사가 정립되어 있다보니 드라마 작가인들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그런 강단사학계를 감싸는 국가의 잘못이 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1. 국호는 발해(渤海)인가 대진(大震)국인가?


발해라는 명칭은 당나라 때부터 중국이 일방적으로 부른 국호로,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면서부터 중국에게만 발해로 불리게 된다. 이 책봉을 당나라가 보낸 것은 사실이나 대조영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궂이 비유를 하자면 북한이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고, 중국이 얼마 전까지 서울을 한성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그 근거로는 건원칭제까지 한 나라가 무엇이 아쉬워 당나라의 일개 제후국이 되겠으며, 대조영의 아들인 3대 광종 대무예 때 산동성의 등주와 래주를 공격하고, 산서성 태원의 대산 남쪽에서 당군을 크게 격파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책봉을 받은 일개 제후국이 어떻게 종주국과 이런 전쟁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일본에 보낸 여러 국서에 보면 국호를 발해로 쓴 것이 아니라 고려(고구려)로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이러한 일방적인 책봉의 예는 원래 지나족들의 습성으로 자기네가 천자임을 알리고 상대방을 독립적인 제후(왕)으로 인정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책봉 관직명에는 통상 그 지방명을 사용한다. 그럼 책봉명의 발해는 어디를 말함일까? 드라마에서 말한 것과 같이 ‘경락호’에서 발해를 따왔을까? 경락호는 당나라 통치권 밖이라 그런 호수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니 그런 지명을 알지도 못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발해군왕(渤海郡王)의 발해는 자기네가 모르는 지명인 경락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발해지역을 말함이다. 발해라는 지명은 현재 요녕성, 하북성, 산동성, 요녕성에 걸쳐있는 중국의 내해를 이르는 단어로 예전에 발해는 산동성의 황하구 부근 앞바다를 말함이다. 그리고 발해라는 단어는 현재 중국에서 고려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발해군은 漢나라가 설치하였는데 하북성 하간현 동쪽‘창현’이다. 지금의 직예성 하간현이다. 하북성 하간현은 삼신산의 한 곳으로 영주(瀛州) 땅이다. 북쪽은 경조(북경) 안차현이다. 남쪽으로는 산동성 무체현이다.

당나라 무후 때 말갈인 대조영이 건국하였다. 처음 국호는 진국이라 했다. 선친 때 중견사로 발해군에 파견되어 발해왕이 되었다. 발해의 첫 발상지는 서경압록부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오히려 중국 사서에 정답이 다 나와있다.

북경대학 교재에 나와있는 발해의 표시. 황하이북동부터 연해주까지가 대진국으로 영토로 봐야한다. 황하 이남 동부는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자리잡었었고, 신라와 당나라가 전투를&nbsp;벌인 석문(석가장)은 현재 하북성의 성도이다.

 
따라서 발해라는 국호의 사용과 수도 5경은 다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 대진국의 영토는 황하이동이북부터 시작하여 현 만주와 연해주 전역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발해는 고구려보다 더 넓은 땅을 통치했으며 해동성국이란 칭호도 얻게 된다. 고구려 때도 현 하북성이 고구려 영토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따르면 대진국의 정사서(正史書)였던 <조대기>를 인용하여 1대 황제는 대조영이 아니라 아버지 대중상이고 668년 동모산에서 국호를 후고구려로 기원을 중광으로 건국했다고 한다.
대조영은 2대 황제로 아버지 대중상 황제의 붕어 시 태자였으며, 영주/계성(천진)에서 돌아와 제위에 올라 홀한성을 쌓아 도읍했고,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태백일사는 이맥선생의 개인 창작물이 아니라, 대진국 당시의 정사서인 <조대기>를 인용해 대진국본기를 썼다. <조대기>는 대진국에 대해 가장 정통한 사서로 조선시대 분서갱유인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없어진 사서이다.

이제는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발해라는 국호를 버리고 우리 스스로 칭한 대진국으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라는 단어를 버리고 남북국시대라 해야 적합할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는 반도사관을 만들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용어로 그 의미는 위대한 대진국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작가의 상상력에 역사적 사실 묻혀버려


판타지드라마가 아닌 대하역사드라마이니 역사적 사실에 준하여 뼈대를 만들고 그 뼈대 위에 극적인 살을 입히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다.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사실보다는 허구적 사건에 비중을 더 둘 수는 있다.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어떤 점이 역사적 사실과 안 맞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 대중상 : 천문령에서 이해고에게 죽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바로 동모산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로 699년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 걸사비우 : 천문령 전투가 있기 전에 이해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중국 사서에 나와 있다. 그리고 대조영의 의제(義弟)라기 보다는 아버지 대중상과 뭔가 격이 어울리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아 개국 후 군부를 맡는 것으로 되어있다. 

* 측천무후(624-705) : 중국 유일무이의 여황제로 67세인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인물이다. 대조영이 대진국을 건국할 당시(699년)는 76세의 나이인데 너무 젊은 분장을 해 이상했다. 그리고 당시 당나라라는 대사와 자막이 자주 나오는데 주나라가 맞다. 측천은 당나라 황제가 아니라 주나라 황제이기 때문이다.



* 이해고 : 천문령 전투에서 패해 도망가다 요하성에서 대조영과 결투하다 죽는 것으로 드라마에 나와 있는데, 역사 기록에 보면 천문령 전투 후 장안으로 돌아가 상을 받고 계속 활약한다. A.D 700년 거란 원정에도 정무정과 같이 참여한 기록이 있다. 


* 설인귀(613-683) : 평민에서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후부의 수장으로 있었다. 토번과의 전쟁 시 10만 대군을 잃는 대패를 하여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복직이 되고, 신라와의 전투에서 거듭 패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장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드라마에서 발해 건국 때(699년)까지 안 죽고 살아있는 걸로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16년 전인 683년 사망한다. 사실(史實)대로 설인귀가 죽는다면 극적 재미가 떨어질 것 같다는 작가의 판단 때문이었을까! 

 

한국에서 고구려 관련 드라마를 방영하자 중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의 일대기를 그린 <설인귀전기>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스토리 중 동북공정과 관계되는 내용은 발건(고구려)왕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다거나, 발건왕의 소양공주에게 공물을 들려 보냈다는 대목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을 떠올리게 한다. 소양공주가 설인귀와 부부의 연을 맺는 대목에선 고구려의 격을 낮춰보는 시각이 비친다. 이세민을 패배시킨 철세문(연개소문)은 권력을 찬탈한 뒤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는 역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철세문을 죽이는 설인귀가 그려진다.

중국은 드라마에서도 이렇듯 고구려를 제후국으로 낮춰 보고 잇는데, 우리는 대조영이 스스로 부른 ‘대진국’이란 국호를 버리고 중국이 책봉하면서 일방적으로 부른 ‘발해’라는 국호를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사대주의라는 것이다. 이러고도 중국의 동북공정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환단고기>를 빨리 민족의 정사(正史)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획기적인 조치 없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도 없고, <조선사 35권>을 바이블로 하는 치욕의 우리 국사를 바꿀 수도 없다. 우리나라는 일제가 저지른 역사 분탕질 때문에 대륙을 지배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고대사를 밝힐 사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선생은 아예 드라마에 언급조차 안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역사를 파괴한다. 그는 그때 잃어버린 환단고사를 찾기 위해 돌궐까지 두 번이나 다녀와서 <단기고사>를 집필한다. 대조영황제와 대야발선생 덕에 우리는 한국사와 동양사를 완벽하게 고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자기네 자리지킴한 역사 이론이 <환단고기>로 인해 허구인 것으로 밝혀지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력 2013-07-08 03:15:28

발해가 중국 지방정권인가…동북아역사재단은 답변하라 (skyedaily.com)

성헌식의 ‘대고구리’
 ▲ 성헌식 편집인(고구리역사저널)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이론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허황되기 이를 데 없는 엉터리 주장인지 모르겠으나, 동북공정이 전혀 근거 없는 사이비 이론이 아니라는 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나름대로 확실한 사서의 근거를 갖고 주장하기 때문에 제3자가 볼 때에는 중국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행정구역 유주(幽州)에는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어양군, 낙랑군, 현토군, 우북평군, 탁군, 대군 그리고 발해군(渤海郡) 등 10개 군이 속해 있다. 따라서 발해는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구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대조영의 나라가 발해로 불리게 된 것은 713년 당나라 현종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이다.
 
이렇듯 근거가 확실한 중국의 주장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제대로 된 반박을 전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이론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거의 같은 일제식민사학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있으나마나한 동북아역사재단은 하루라도 빨리 해체시키는 것이 매년 200억 원이 넘는 국가예산을 절약하는 길일 것이다.

 ▲ <중국인터넷백과사전>의 ‘서한 때 유주의 땅’이 한반도 북부까지 들어온 이유는 한사군의 중심 낙랑군이 북한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미지=필자제공>

현재 대조영의 나라 발해에 대한 건국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 이남을 차지한다. 고구려 출신 유격대장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격파하고 동만주에 있는 동모산으로 가 699년 나라를 세우고는 국호를 발해라 했다. 근처에 발해라 불린 경박호에서 국호를 가져왔다.”
 
<중국 백과사전>에서는 대조영의 나라 발해에 대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조영은 스스로 성을 대씨라 했고, 측천무후가 그 아비를 진국공으로 봉했으며, 대외적 호칭은 대진국이라 했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했는데 이로써 발해국의 전신이 새로이 열린 것이다. 발해국은 당나라 때 속말말갈이 주체가 돼 건립되어 동북지구의 지방민족을 통치한 정권이다. 698년 속말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말갈국을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불렀다.
 
<구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713년 당 현종이 대조영에게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봉하고 그곳을 통합해 홀한주라 하여 ‘홀한주도독’을 추가로 제수했다. 그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발해라 불려 전해졌으며, 진국이란 국호도 발해국으로 바뀐다. 이러한 유래로 당나라 통치구역 내의 지방민족 자치정권이 된다. 762년 당나라 조정이 발해를 나라로 인정해 최초 도읍은 구국(길림성 돈화)이다. 742년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로 천도했고, 755년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용안)로 옮겼고, 785년 다시 동경용원부(길림성 훈춘)로 옮겼고, 794년 상경용천부로 도로 천도했다. 926년 요나라에게 멸망해 15세를 전하고 역년은 229년이다”
 
이상과 같은 발해에 관한 중국자료는 현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니 어찌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는가. 중국은 대한민국 예산으로 동북공정을 견고하게 확실하게 굳혀가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기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이러한 동북공정을 타파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원래 발해는 어디일까.
 
 ▲ 발해라는 지명이동을 통한 중국의 역사왜곡. <이미지=필자제공>

지금까지 발해는 중국의 산동성과 하북성과 요녕성으로 둘러싸인 현 중국의 내해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대조영이 동만주 돈화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근처에 있는 발해에서 가져왔는데, 그 발해는 지금의 경박호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보다 오히려 식민사학계의 역사왜곡이 도를 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이며, 그 황하북부 일대를 발해군(渤海郡)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발해라는 지명은 1928년경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나라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한 이유는 대조영이 당시 발해군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인데, 그 발해군은 바로 황하부근 하남성 학벽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은 황제국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 장수 대조영이 유격대 활동을 오랫동안 하다가 고구려 멸망 약 30년 만에 발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동북공정과 식민사학계의 공통된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 이론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고 다음과 같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668년 고구리가 망하자마자 대중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워 후고구리(後高句麗)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여 32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돼 있다. 뒤를 이어 즉위한 대조영이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한 후 체제를 정비하고는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대진국은 계속 황제라는 칭호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다.
 
 ▲ 황제 대조영의 등극 모습. 국호를 대진으로, 연호를 천통으로 바꿨다.<사진=드라마 캡쳐>

당나라는 이러한 우리의 대진(大震)을 자기네 마음대로 발해(渤海)라는 국호로 불렀다. 물론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책봉조서가 왔더라도 대진국 황제 대조영은 코웃음 치며 그 조서를 찢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과 15년 전에 당나라 대군이 천문령에서 장수 이해고가 겨우 몸만 빠져나갔을 정도로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고, 국호를 대진으로 연호를 천통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당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라는 책봉조서를 받아들였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진국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高句麗라는 국호를 썼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가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로 부르는 한 동북공정 타파는 요원하며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역사적 사실대로 국호를 대진국으로 바꾸는 것만이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을 극복하고 찬란했던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입력 2015.08.22 (08:33)수정 2015.08.22 (09:00)

<앵커 멘트>


혹시 발해를 기억하십니까?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서기 698년에 건국한 뒤 230년간, 중국 지린성과 러시아 연해주 대부분 등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입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는 지금도 발해의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데요,

그곳에서 발해 유적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를 치른 것처럼 요즘 유라시아 대륙과의 소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천년 전 만주와 연해주를 경략했던 발해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모스크바 하준수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연해주를 누비며 달리길 230km,

중국. 북한 국경과 가까운 크라스키노 입니다.

다시 드넓은 늪지대를 40여 분 걸어가면 나타나는 천막들,

발해의 염주성. 성터 발굴 현장입니다.

지난 1980년 시작돼 35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발굴 작업,

지금은 한국의 동북아 역사재단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은옥(길림대 고고학 박사과정) : "(다 사람 손으로 합니까?) 네..그렇죠. 기계를 안쓰고. 삽하고 호미하고..공구를 가지고 토기편 같은 경우 돌이랑 구별하기 어려운 면이 있거든요. 그걸 돌하고 구별해야 하니까.."

바로 이때, 근처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녹취> "우라~~"

모두를 흥분시킨 건 바로 이 작은 청동 낙타상입니다.

<녹취> 겔만(박사/러시아 발굴단장) : "정말 행복해요. 아주 희귀한 발견이죠.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요."

발해 유적 발굴 사상 청동 낙타상이 발견된 것은 처음입니다.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2cm에 불과한 이 정교한 쌍봉 낙타상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낙타상의 발굴은 지난 2012년 낙타 뼈 출토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낙타는 고대부터 이용된 교통 수단, 따라서 발해와 서역의 교류가 대단히 활발했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 입니다.

<녹취> 예브게니아 겔만(박사/러시아 발굴단장) : "캬라반(대상)이 상품을 갖고 육로로 이곳에 왔다는 증거죠. 발해가 여러 나라와 교역했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인터뷰> 김은국(박사/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발해인들이 가지고 있던 대외교류의 무한한 개방성과 교류의 다양성을 표현해주는 상징적인 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에서는 발해 전 시기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토층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토층의 높이는 2m 30cm에 달합니다. 발해 건국부터 멸망까지 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른바 '타임 캡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략 6개의 층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각층이 서로 다른 건축 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은국(동북아역사재단) : "과연 발해부터 시작했을까? 최하층에 발해 이전 유물로 볼수 있는 것들이 나오거든요. 발해가 아니라면 고구려인거죠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는 확증을 잡을 수 있는거죠."

움푹 파인 이 웅덩이에서는 각종 토기와 뼈 등이 출토돼 저장고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녹취> 정석배(한국전통문화대학 교수) : "한군데에 모여 있다는 것은 이곳이 이 성의 식량을 저장했던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거죠"

발해의 염주성은 대륙은 물론 바다 건너 일본과도 교역했던 교통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 거리에 있는 우수리스크..

다시 서쪽으로 6km를 달리면 또 다른 발굴 현장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고구려 양식의 발해 성벽이 발굴됐습니다.

<인터뷰> 윤형준(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사) : "한번 쌓고 안쪽에 약간 들여서 쌓는 것인데..들여쌓기는 고구려 건축 양식이기 때문에 발해대에서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성벽 쌓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강과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임을 짐작케 합니다.

<인터뷰> 윤형준(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사) : "여기서 발해인들이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주변의 말갈을 복속시키고 발해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기초를 닦았던 하나의 시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 발해 입방체. 양초나 깃대를 꽂는 용도로 쓰인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인터뷰> 클류에프(박사/러시아 발굴단장) : "서기 8세기에 발해의 영토 경계선이 서쪽으로 확장됐고, 이 지역이 발해의 영역에 속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기 698년,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는 한때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성기의 발해 영토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과 연해주 대부분,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일부 등 사방 5천리에 달했다고 합니다.

발해는 그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5경 15부 62주를 설치했습니다.

발해의 멸망을 끝으로 우리 역사는 더 이상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고 반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대외 정책 기조의 하나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했습니다.

한반도의 교통.물류망을 대륙으로 연결해,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경제권을 연계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 입니다.

지난달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친선 특급'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해 지나간 곳은, 천년 전 발해인들이 경략했던 땅입니다.

<인터뷰> 김은국(박사/동북아역사재단) : "서역문화와 당, 신라,일본 문화 등 주변의 모든 문화가 발해에 녹아서 발해만의 독특한 색깔을 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발해의 대외 개방성과 포용성 입니다."

바다와 대륙을 동시에 경영했던 해륙국가, 발해인의 기상은. 오늘날의 세계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터뷰> 윤형준(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사) : "우리가 단순한 반도사관에 갇히지 않고 더 넓게 세계 경영을 하고자 하는 현대의 흐름에 맞게 역사 인식을 다시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발해 염주성 발굴 현장, 그 앞쪽으로 한줄기 철로가 지나갑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와 하산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철길입니다.

시베리아에서 채취된 석탄이 이 철길을 따라 북한 나진항으로 운송되고 있습니다.

천 년 전 발해인들이 말 달리던 그 길이, 이제는 교통.물류 네트워크로 재탄생한 것 입니다.

서역과도 활발히 교류했던 발해인들의 기상이 깃든 이 철길이 한반도 종단철도와 이어짐으로써 대한민국의 대륙 진출 통로가 될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입력 :2008-05-16 00:00ㅣ 수정 : 2008-05-16 00:00 

‘발해를 다시 본다’ 개정증보판 낸 송기호 교수

발해사를 전공한 송기호(52)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990년 8월 서울신문의 발해 유적 답사단에 참여하여 자신의 표현대로 ‘꿈에 그리던’ 중국의 발해 유적을 처음으로 밟아보는 감격을 누린다. 이후 발해사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다룬 글을 한데 모아 1999년 내놓은 책이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발해를 다시 본다’(주류성출판사 펴냄)이다.

 

▲ 송기호 교수

 
그는 햇수로 다시 10년이 지난 올해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펴냈다. 그동안 중국이 발해를 고구려에 앞서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연구의 중심도 러시아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개정증보판은 그 10년 동안 발해사 연구자가 겪은 우여곡절의 기록이기도 하다.

송 교수는 1975년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전국 수석으로 합격하여 서울대에 입학한 뒤 법대나 상대가 아닌 국사학과를 선택하여 화제를 모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발해를 전공으로 삼아 다시 한번 눈길을 끌었던 인물이다. 여기에 소탈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더해전 그는 우리나라 발해 연구의 권위자이다.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송 교수는 “그동안 TV드라마 ‘대조영’ 등의 영향으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연구자도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연구자가 얼마나 늘어났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은 손꼽을 수 있는 정도”라면서 “학술적 의미가 있는 논문은 여전히 많지 않다.”고 멋쩍게 웃었다.

발해 유적 中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

송 교수는 서울대에서도 아직 제자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발해에 관심을 가져 기대를 가졌던 제자도 논문을 쓰면서 고구려로 돌아섰다. 그래도 발해를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발해사를 공부하려면 중국·일본어에 러시아어를 알아야 하는 데다 고고학 지식까지 갖추어야 한다. 문헌사료가 취약하다 보니 고고학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헌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의견차이가 많아 사이가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발해사만큼은 서로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민의 관심이 고구려에만 쏠려 있는 데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중국은 1980년대에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작업을 마쳤고 그 다음이 고구려인 셈”이라면서 “지금은 고조선을 자신들의 역사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고,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에도 손길을 뻗고 있다.”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현재 발해 연구의 가장 큰 문제는 중국에 있는 유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고 했다.1990년대는 중국의 발해 유적을 몰래라도 둘러볼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발해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단독등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 학자는 물론 중국 학자들에게도 공개를 철저히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고 티베트 사태도 있었던 만큼 무리하게 등재를 시도하지는 않겠지만,1∼2년 사이에 발해 유적이 중국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했다. 그런 만큼 한국과 북한의 공동보조는 사실상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해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북한 학자들은 공동등록을 준비하자는 제안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부여·북옥저 등에도 관심 기울여야

한편으론 중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발굴 이후 중국학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등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놓았던 발해 왕비의 묘지명(墓誌銘) 2개가 햇빛을 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헌자료가 취약한 발해사 연구에 전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서울대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그는 “돈을 끌어오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 맡아서는 안 될 자리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송 교수의 관심사를 반영한 듯 21일부터 ‘위성에서 본 고구려, 발해’특별전을 시작하는데, 함경북도 북청의 청해토성 같은 발해 유적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발해사 연구의 마지막 공백지대는 중국도 러시아도 아닌 북한으로, 우리 학자들은 함경도 지역의 유적을 아무도 가보지 못했다.”면서 “아마도 남북간 교류의 폭이 넓어져 북한이 개방되기를 가장 염원하는 사람은 발해사 연구자일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송 교수는 마지막으로 “고구려나 발해는 물론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부여와 북옥저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부여처럼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사라진 나라를 중국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들의 역사로 생각한다.”면서 “북방의 역사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애정을 갖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수정 2008-04-29 18:50 등록 2008-04-29 18:50

‘발해 사랑’ 러 사학자 “중국 경계해야” (hani.co.kr)

니키틴 교수 “중, 유적을 관광지화” 한국 관심 촉구 

“최근 중국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 국경지역의 발해 유적 등을 집중 발굴해 관광단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발해(러시아명 보하이) 유적을 발굴해 온 사학자 니키틴 유리 게나디에비치(50·사진) 교수는 28일 ‘한반도 역사가 발해사로까지 확장되는 것에 동의한다면서 이와 관련한 중국의 움직임에 한국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러시아 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소속인 니키틴 교수는 한국의 여러 대학, 연구소 등과 함께 지난 수 년 간 발해 유적을 공동으로 발굴하고 있다. 그는 “1984년 이전에는 한국에서조차 발해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관심이 높아져 여러 현장에서 한-러 공동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현재 한국의 5개 대학, 연구소 등과 공동으로 발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한국 정부에서 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한 그는 “옛 소련시절 연해주 일대 역사유적 발굴 예산 중 발해유적엔 10%도 배정되지 않았고 소련 해체 후엔 아예 예산이 없어 이 지역 유적지 150여 곳 가운데 겨우 20 곳 정도만 발굴된 상태”라며 한국 쪽의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최근 한국 총영사관 직원들이 발해사 공부를 위해 휴일에 나를 초청해 유적지를 찾는가 하면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발해유적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간혹 현지 전문가와 제대로 된 토의조차 한 번 하지 않은 비전문가의 자의적인 역사해석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높은 관심이 자칫 객관적 근거 없는 주장과 환상으로 흐를 것을 경계했다.

니키틴 교수는 얼마 전부터 발해유적에 관심있는 한국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거의 대가없이 유적지를 안내하거나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능숙한 젓가락질로 김치를 맛있게 먹는 그는 “한국 발굴팀과 여러 차례 함께 일을 진행하다 보니 현장에서 한-러 학생들이 어울려 한 달에 20㎏의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필수식품이 됐다”며 김치 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톡/연합뉴스

 

 

입력2006.09.18 10:30 수정2006.09.18 10:30

중국 사학계만 발해는 중국 것 주장 | 한국경제 (hankyung.com)

 

日.러 사학계도 발해는 고구려계통

 

해외 사학계에서 유독 중국만이 고구려나 발해사를 자국에 예속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중국이 중화 패권주의적 의도를 갖고 발해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 한다고 지적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신중국 건립 이후부터 발해사 연구를 상당히 중시해왔던 중국 사학계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0여년간 발해사 연구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다 중국이 계급투쟁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노선을 전환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차 3중전회 이후 발해사 연구와 발해 유물 발굴을 본격 재개했다.
불과 수년만에 동북지역 사학계를 중심으로 발해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발해국 지역은 일찌기 중국 영토였다는 내용의 60여편의 논문이 각종 논총, 학보지 등을 통해 잇따라 발표됐다.

 
 

먼저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왕청리(王承禮)가 1979년 `발해국은 속말말갈 사회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당나라의 일부분에 속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왕청리는 나아가 80년대부터 발해의 사회통치 사상은 유가사상으로 사실상 발해 문화는 당의 문화라 할 수 있으며 당 왕조의 책봉을 받고 스스로를 당의 신하로 칭한 지방정권이라고 본격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발해는 당 왕조에 예속된 정권'(장서우펑<姜守鵬>.80년), `발해정치제도 약술'을 통해 `발해는 책봉, 조공, 볼모를 통해서 뿐 아니라 관제나 행정제도도 거의 당 제도를 모방했다'(웨이궈충<魏國忠>.81년)는 주장이 이어졌다.

 
 

또다른 역사학자 장옌(莊嚴)도 82년 발해의 정권 귀속 문제에 대해 발해는 당조 관할하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리전푸(李殿福)는 87년 발해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의 한 부분으로 발해문자는 한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발해사에 관심이 높은 남.북한을 비롯 일본, 러시아의 사학계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인다.
일본 학자 쓰다 소기치(律田左右吉)는 `발해사고(渤海史考)'를 통해 발해국 전신은 말갈 7부족 가운데 속말말갈로 고구려 문화의 이입과 당 문화의 수입을 통해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도 연해주에 터를 잡고 있던 발해에 대한 적잖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구 소련 사회과학원의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 박사는 73년 `소련 극동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논문을 통해 "중국 중심주의 사관은 세계문화사에 위협되는 요인으로 결단코 반대해야 한다"며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공박했다.
소련 학자 사프쿠노프도 68년 `발해와 연해지구 문화유적' 논문을 통해 "발해 통치자는 모두 고구려 이민자들에게서 기원했다"며 "발해 문화의 독립성을 말살하는 것은 중국이 발해사를 만주사 및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70년대부터 발해국은 고구려 왕조를 계승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북한 역사학자 박시형 교수는 62년 `역사과학'을 통해 "발해족은 고구려 인민이 창건한 국가로 발해국은 주민, 영역, 주권 등으로 볼때 모두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밝혔다.
또다른 북한학자 주영구도 71년 "발해족은 고구려 문화의 계승자이자 발전자이며 고구려 인민은 고구려 고지에서 나라를 건립했다"는 주장을 폈다.
(홍콩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jooho@yna.co.kr

 

 

입력 2006. 9. 12. 09:01수정 2006. 9. 12. 09:01

유득공 '발해고'서 '남북국시대' 첫 설정

'삼국사기'와 일제 관변학자들 빌미 제공

"발해는 고구려 후계", 왕도 국서로 자임

무덤양식.온돌.쌀 등 한민족 특유의 문화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잠잠하던 중국의 '동북공정'이 수면 위로 떠올라 한국과 중국 사이에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邊疆史地) 연구센터가 웹사이트에 "발해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당나라의 통치범위 안에 든 지방민족정권이다"는 등의 논문을 다수 게재한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다.

중국은 고조선, 부여도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킨 가운데 자국의 역사적 지평을 한강 이북의 고구려까지 포함시키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이런 주장은 한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이런 중국 주장의 이면에는 중국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관(中華史觀)과 한반도 상황에 따른 중국 동북지역의 장래불안 등이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역사는 일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중국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사는 역사적ㆍ문화적ㆍ종족적 발자취로 볼 때 당연히 전통적 한국사의 영역에 포함된다.

한국 사학계는 그동안 발해사 부분에 소홀히해온 게 사실이다. 이는 발해의 정사가 없는 상황에서 '삼국사기' 등 일부 기록이 발해를 역사 영역에서 배제했던 게 큰 원인이 됐다. 물론 발해사를 엄연한 한국사로 보는 방증 자료도 적지 않다.

발해사가 한국사라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를 '한국 속의 세계'(창비)의 저자인 정수일 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견해로 알아본다.

◇발해는 어떤 나라 = 발해는 698년에 건국해 926년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228년 간 15대를 이어간 중앙집권적 독립국가였다.

 

대외 정복활동으로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해 동북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국토 면적은 한반도 전체의 2.2~2.8배에 달하는 50-63만㎢였다. 강역은 북으로 아무르 강에서 서로 랴오허 강, 남으로 대동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을 받아 역사를 마감한다.

중국의 당나라는 이런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고구려 후예가 세운 고구려의 당당한 계승국임에도 중국은 현재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었다고 폄하한다.

발해는 통일신라와 더불어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까지 한국사의 남북국 시대를 구가했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한 가운데 한민족의 역사주체로 친선과 교류, 경쟁과 대립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발해였지만 우리가 가장 잘 모르고 있는 한국사 부분이기도 하다. 통일신라보다 30년 정도 수명이 짧았으나 영토가 그 4~5배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발해 지식은 통일신라의 그것에 비해 너무 빈약하다.

◇발해에 관한 역사 기록 =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발해의 건국과정과 발전모습을 전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규원사화'는 발해 유민이 고려에서 썼다는 역사서 '진역유기'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들 책은 발해 관련 내용이 매우 간단해 아쉬움을 남긴다.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설정한 사람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었다. 그는 1784년에 쓴 '발해고' 서문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서술했다. 이어 정약용이 저서 '아방강역고'와 '발해속고'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로 소개했다.

발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것은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박은식은 '발해사'를 통해 민족의 정통과 정기를 지키려 했다. 장도빈의 '국사', 권덕규의 '조선유기'도 그 같은 지향과 기상을 보인 민족사학 저서였다.

◇논란을 제공한 빌미들 =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발해사를 스스로 무시하는 데 대해 "우리나라 선비들이 신라 9주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버리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통탄했다.

이는 발해를 도외시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관련이 있다. 신라중심주의에 빠진 삼국사기는 발해사를 아예 무시해버렸는데 이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불완전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른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내재적 한계 때문이었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발해사는 일제 관변 사학자들의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올가미에 걸려 만주사의 일부로 변조된다. 여기에 하야시 다이스케는 '조센시(朝鮮史)'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신라가 있어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있을 수 없다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내놓아 발해사를 한국의 정통사에서 분리시켰다.

또 당나라에 유학한 일본 승려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펴낸 '루이쥬고쿠시(類聚國史)'는 이렇다할 증거도 없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 주민은 말갈인이라며 이른바 '이중종족론'을 폈다. 안타깝게도 이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물론 우리 학계의 일부조차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이는 발해가 파견한 외국 사절단에 말갈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유득공의 '발해고'의 견해와 배치된다.

◇자국사 주장하는 중국의 움직임 =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앞세워 중국이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해온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이후 정지작업을 꾸준히 해오던 중국은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발해 유적지에 철의 장막을 쳐놓고 외부인, 특히 한국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은 발해 유적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질 것으로 관련학자들은 전망한다. 이는 최근 드러나 백두산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추진과 2018년의 제25회 동계올림픽의 백두산 유치 움직임에 맞물려 주목되는 대목이다.

중국은 또 백두산 관광객들이 다니는 지린(吉林) 성 안투(安圖) 현에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대형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중국 역사서로는 '구당서' '신당서' 등이 발해를 언급한다. 이들 역사서는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나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는 주장을 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를 온전히 계승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라면 고구려 역시 말갈인이 뒤섞여 살았으므로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으로 비약한다.

◇발해사가 한국사인 역사ㆍ문화적 이유 = 발해 건국의 역사적 뿌리는 고구려 부흥운동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끌어 모아 부흥운동에 앞장섰다.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대부분은 나중에 고려로 망명해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에 넘겨주었다.

발해의 2대왕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며 고구려 후예임을 자임한다.

변방 소수민족인 말갈인이 세웠기 때문에 발해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말갈인이란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쑹화강 유역의 속말 말갈이나 백두산 지역의 백산 말갈에서 보듯이 지역에 따라 그곳에 사는 일반인을 가리키는 중국의 비칭(卑稱)이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발해인의 생활문화였다. 중국의 '구당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같다"고 썼다.

어느 민족이나 보수성이 가장 강한 장례법과 무덤양식을 볼 때 고구려와 발해는 같다. 무덤양식의 경우 똑같이 돌방무덤을 사용했고, 한민족의 독특한 주거문화인 온돌도 두 나라가 공유했다. 발해가 당시까지만 해도 동이족 중 한민족의 전유물이었던 쌀 농사를 지었던 것도 우리 민족의 얼을 뒷받침한다.

◇과제

발해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에 중국 내부에서도 있었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조차 생전에 역대 중국의 대국적 배타주의를 사과하면서 발해가 한국의 옛 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의 장안에 버금가는 수도를 가진 대제국 발해는 완벽한 국가체제와 주권주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의 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했다. 이런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오만에서 나온 역사의 변조일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발해가 고조선-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의 정통국가라는 내부 인식의 확산이 긴요하다. 이를 포기할 경우 민족사의 절반을 잃게 된다. '삼국사기'의 한계나 일제의 '만선사관' '지배 피지배층의 이중구조설'에 가로막혀 민족사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연구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과제다. 우리가 피동적으로 고구려 역사문제에 끌려 다니는 사이에 중국은 발해사 조작을 거의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발해 전공자가 박사 과정까지 모두 합해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대응채비가 허술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중국과 대비된다.

ido@yna.co.kr

 

 

입력 2005. 4. 6. 08:42수정 2005. 4. 6. 08:42

[중국 역사교과서 왜곡] 러시아 학계선 "발해가 고구려 계승" (daum.net)

[서울신문]|뉴욕 연합|중국의 동북공정이 중국사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 뒤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고구려 역사에 관한 대규모 국제 학술회의가 5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열렸다.

한국, 중국, 미국, 일본 등 6개국 16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회의에서는 고구려의 기원과 발전과정, 국제정세, 고구려 고분의 구조와 미술 등 8개 분과로 나눠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첫날 ‘역사와 역사문헌’ 분과에서 ‘고구려의 계승으로서의 발해’라는 주제발표를 한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사의 정체성을 추적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발해인의 자의식”이라며 “문헌자료를 볼 때 발해 지배층은 건국 때부터 멸망 후까지도 지속적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생각해왔다.”고 밝혔다. 송교수는 또 “당시 신라, 당나라, 일본 등 주변국들은 발해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송교수는 “전체적으로 볼 때 발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고구려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부 나타나는 말갈 요소만 강조해 발해를 말갈계 국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역사, 고고학적 관점에서 고구려의 기원’분과에서 ‘한의 현도군과 고구려 국가형성’에 관해 주제발표를 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의 마크 바잉턴 박사는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과 고구려는 (중국의) 한 왕조가 고구려 지도층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고구려가 공물과 노역을 바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조공관계였다.”고 분석했다. 바잉턴 박사는 그러나 “이런 관계는 고구려 사회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고구려 자체의 탄생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코리아소사이어티,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아시아센터, 라이샤워 일본학연구소, 페어뱅크 동아시아연구센터가 공동후원하는 이번 회의는 서구에서 열린 최초의 고구려사 관련 국제학술회의다.

 

 

 

'동북공정(工程)'. 토목공사를 연상시키는 이 생소한 중국 말이 우리 민족 감정을 뒤흔들어놓은 지 벌써 1년 정도 흘렀다. 한국인은 너나없이 중국의 역사왜곡 기도에 치를 떨었다. 언론은 연일 고구려 특집을 게재하면서 그들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고 학계에서는 잇따라 고대사 연구 학술대회를 개최했으며 서점에도 고구려사 관련 서적이 봇물 터진 듯 출간됐다.

 

하지만 발해라는 또 하나의 우리의 역사는 빠진 채였다. 발해의 중요성을 일깨운 다큐멘터리를 DVD로 제작해 대구시내 고등학교에 배포한 오한택 대구과학대 교수(방송연예과)의 작업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광개토대왕릉의 옆에는 석회공장이 있어 능 주변은 석회가루로 뒤덮여 있었고, 능 주변에 있던 담벼락에는 빼곡이 들어선 민가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 마구 쓰레기를 버려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이 광경에 오 교수는 충격을 받았고, 이에 실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2년여에 걸쳐 버려진 광개토대왕릉 주변을 영상에 담았다.

고구려를 좇아다니던 그는 2002년 1월 발해를 평생 동안 연구해온 ㅂ교수를 만났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인 ㅂ교수는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10년 동안 귀양살이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발해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온 인물이었다. 오 교수는 ㅂ교수의 행적을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고 싶었다. 제작비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2003년 여름이 되면서 겨우 ㅂ교수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ㅂ교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중국 정부에서 한국 사람과 함께 고구려-발해 유적을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시키는 공문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003년 여름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이 한국에 알려졌다. 발해도 엄연히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오 교수로서는 고구려 문제만 중요시하는 학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발해도 엄연히 우리의 역사라는 점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도움을 줄 한규철 경성대 교수(발해역사학) 등과 함께 오 교수는 1월 3일 중국을 향해 떠났다.

오 교수의 행동은 군사보호시설에 몰래 들어가 영상을 찍는 간첩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구려나 발해 관련 유적지 부근에는 중국 정부에서 나온 이들이 지키고 있다. 게다가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보이면 정부에 신고한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들의 부담감은 컸다. 발해 유적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에 성공하면서 이들의 부담감은 더욱 커졌다. 촬영이 다 끝난 뒤 붙잡히면 카메라와 필름을 포함한 모든 장비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오히려 민가를 피해 산길을 걸어 유적을 탐사하거나 공안이 있는 호텔 대신 민박을 이용했다. 오 교수 일행은 영하 20℃의 추위가 오히려 반가웠다. 날씨가 추우면 감시하는 눈이 그만큼 적어지기 때문이다. 추위 때문에 감시원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덕택에 정혜공주의 묘를 촬영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적도 있다.

그래도 오 교수 등은 나은 편이었다. 학문을 목적으로 하는 교수 명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안내한 현지인 출신 발해유적 전문가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사정이 달랐다. 간첩에게 군사보호시설을 안내해주고 사진까지 찍게 도와준 셈이라 잡히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현지인들은 긴장감 때문에 밤마다 술기운에 의지했다고 한다.

이들은 올해 1월 3일 동북공정의 이론가 손진기라는 사람이 있는 중국의 심양에 도착했다. 손진기를 만난 오 교수와 한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중국측의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 공격했고, 손진기는 이에 대해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작업이 고구려 유물뿐 아니라 발해 유물 대해서도 똑같이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오 교수 등은 원래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국가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이번 탐사를 기획했다. 고구려대부터 사용된 온돌이라든가, 무덤양식, 건축양식 등을 발해가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아,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되면 발해도 자동적으로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와 발해는 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월 9일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寧安)시에 위치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찾은 오 교수 등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이 광개토대왕릉 유적에 이어 올해 4월부터 20억위안(약 2천8백억원)을 들여 '복원프로젝트'를 시행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고구려에 이어 발해 유적까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 발해의 역사 역시 중국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상경용천부는 756년~926년까지 발해의 수도였던 곳으로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 이어 동북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 교수 일행이 2월 9~13일 다시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 있었다. 상경용천부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돼 있다. 내성 안에 있는 투타이쯔(土台子) 마을의 300가구, 주민 1만3천여 명을 이주시키고 내성 성곽과 내성안 5개 궁성, 정문인 오문, 내성과 외성 사이의 주작대로 등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서북쪽의 물줄기를 내성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중국풍으로 복원한다는 것이었다.

국내로 돌아온 오 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전시회를 대구시내에서 네 번 개최했다. 전시회를 찾아 중국의 움직임에 놀란 많은 이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를 원했다. 이에 그는 이번 탐사 다큐멘터리를 DVD로 제작해 일단 대구 시내 고등학교에 배포했다. 오 교수는 유물은 중국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발해는 우리 역사다'라는 역사의식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식을 일깨울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그는 올해 안으로 전국의 고등학교에 DVD를 배포할 생각이다.

오 교수의 작업은 계속된다. 자료를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현장을 뛰어다니며 관련 자료를 축적하는 역할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앉아서 연구만 하는 학자들을 향한 '일침'인 셈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현장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다. 일단 발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작업이 끝나면 간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활동반경을 넓힌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대구-글 정재용 기자 politika95@kyunghyang.com·사진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입력 2021. 7. 12. 09:05

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7) 발해의 복국운동
중국 지린성 돈화시에 있는 강동 24개석. 발해의 주요 교통로 위에 세워진 역참의 건물터로 추정된다.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

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

중국 지린성 옌볜시 화룽현 용두산 근처에 있는 발해 문왕의 넷째 딸 정혜공주의 묘에서 발견된 벽화.

 

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항복을 받은 직후에 괴뢰국인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유민들의 저항을 무마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즉시 압록주에서 유격기병 7000명이 홀한성을 돕기 위해 왔으나 패배했고, 연해주 일대와 함경도 일대에서 복국(復國)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남아있었다. 그럼 유민은 어떻게 됐을까? 첫째, 임금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등 지식인은 항복해서 적의 체제 속에 유리한 조건으로 흡수됐다. 둘째, 승전국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나 변방의 군인으로 살다 죽었다. 979년에 발해 수령인 대난하는 송나라로 귀순했다. 셋째, 현지에 남은 대부분 주민은 신질서에 순응하면서 말갈인이 됐다. 넷째, 일부 기개가 넘치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들은 독립군처럼 저항하다 희생당하고 일부는 나라를 세웠다.

 

929년에 대연림은 후발해국을 세워 화북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938년에 정안국이 압록강 하류에서 건국됐는데, 길림성 남부지역과 함경도 일대까지 차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금인 오현명은 송나라에 “본래 고구려 옛터에 발해의 남은 백성들을 거느려 사방을 지킨 지 여러 해 됐습니다”라는 국서를 보냈다. 말을 수출해서 ‘발해의 병마와 토지가 해(거란의 일족)의 족장보다도 강성합니다’(《宋史》)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985년에 멸망하면서 1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995년에 올야국(兀惹國)이 건국됐으나 금방 멸망했다. 1029년에 대연림이 흥요국을 세워 여진인들이 따랐으며, 요와 전투를 벌이면서 고려와도 교류했으나 결국 다음해 멸망했다. 1116년에는 고영창이 대원국(대발해)을 세웠다. 발해인은 거의 200년 가까이 복국운동을 한 특이한 사람들이다.

 

 200년 가까이 復國운동 펼친 발해인

다섯째, 탈출해서 남의 나라에서 살다가 끝내는 흡수됐다. 유민들은 고려·요·송·돌궐 심지어는 사신 배구처럼 일본까지 갔다. 《발해고》를 쓴 유득공(柳得恭)은 고려로 넘어온 사람들이 약 10여만 명이라고 했다. 실제로 927년부터 1116년까지 들어온 발해 유민은 12만 명 전후로 본다.(임상선, 《새롭게 본 발해유민사》) 왕건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작위를 내렸다. 수만 명을 데리고 귀순한 발해 세자 대광현에겐 발해종사(渤海宗祀)를 받들게 했다. 또 거란의 사신단이 942년에 50필의 낙타를 몰고 왔을 때 교류를 거절하면서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 심지어 후진과 동맹을 맺고 거란 공격을 시도했다.

한 집단과 구성원이 역사의 기로에서 선택한 것을 두고 후대인이 무책임하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발해의 왕과 귀족, 권력층인 지식인 등에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물론 백성들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비록 힘이 미약하더라도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민중 면피론’이란 허구가 사라져야 우리 역사에 미래가 있다.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라는 책에서 자아가 마비된 조선을 향해서 외친 절규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발해는 거란에 항복한 직후에 연해주 일대와 함경도 일대에서 복국(復國)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남아 있었다. 929년에 대연림은 후발해국을 세워 화북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938년에 정안국이 압록강 하류에서 건국됐다. 995년에 올야국(兀惹國)이 건국됐으나 금방 멸망했다. 1029년에 흥요국은 요와 전투를 벌이면서 고려와도 교류했으나 결국 다음해 멸망했다. 1116년에는 고영창이 대원국(대발해)을 세웠다. 발해인은 거의 200년 가까이 복국운동을 한 특이한 사람들이다.

 

 

  • 입력 2017.11.19 03:17 수정 2017.12.27 08:58
  • 기자명오종홍 기자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 용어부터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한규철 교수 ‘나는 낙랑군 위치 모른다’

 

발해는 국내서만 황제국체제, 밖에서는 아니다’

‘나는 발해사 전공이라서 낙랑군 위치 그런 것 모른다’

‘발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당나라 지방정권이 아니다’

“발해는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다”

‘이 같은 주장은 일제식민사학자, 시라토리구라키치가 한 말이다’

▲ 서기2017.11.15. 경남 김해국립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와 김해박물관이 공동으로 주관한 시민강좌 마지막 강연이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한규철 경성대학교 명예교수가 발해를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은 존티토라는 외국인학자가 그린 미래 통일한국의 모습이다. 일본은 한국 식민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날 한 교수는 이 지도가 흡족하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서기2017.11.15. 국립김해박물관과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한 마지막 회 시민강좌가 국립김해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마지막 강좌는 경성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한규철 교수가 맡았다. 이날 한 교수는 ‘발해국은 고구려를 계승한 황제국이었다’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이날 강연은 이제까지 강연과 상당히 달랐다. 지난 강연들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을 받는다. 그런데 이날 강연은 강연주제에서도 풍기듯이 상당히 자주사관이 들어가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강연 첫 부분부터 풍겨났다. 한 교수는 맨 처음 백두산 천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민족의 성지라고 거침없이 표현하면서 이곳은 우리민족 발상지 외에 만주족 발상지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만주족은 우리와 사촌지간이 된다며 사실상 동족이라는 논조를 펼쳐 충격을 주었다. 한국고대사학회에게는 파격이고 충격이라는 소리다. 한 교수는 더구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도 중국사냐”며 결코 중국역사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은 지금 만주가 중국 땅이라 것을 내세워 과거에도 중국역사라고 한다며 중국 동북공정을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역사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이어 동북공정을 저대로 놔두면 북한이 위험하다고 내다봤다. 우리는 북한이 무너지면 당연히 우리나라가 될 것이라고 여길 것이지만 어림없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중국이 고구려나 발해를 중국지방정권이라고 한 것은 북한을 중국 성으로 만들려는 포석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동북3성이라고 하지만 북한을 점령해서 동북4성을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또 한국외교부도 비판했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라고 올렸다가 중국 눈치를 보고 지금은 없앴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교수는 이런 강연이 중국에게는 껄끄러운 내용이라면서 자신은 중국에게 문화간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농담 삼아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동영상을 찍지 말라고 한 것이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 한 교수는 이날 중국 동북공정을 다루면서 자신의 강연이 중국당국에게 유출될 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는 이날 백두산을 우리민족의 신성한 산이라고 주장했다. 또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우리민족이라고 보았다.

 

이날 한 교수는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일제식민사관 잔재도 지적했다.

먼저 라당연합군이라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신당연합군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라당에서 ‘라’는 신라의 뒷 글자 라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는 일제식민주의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용어라는 것이다. 신라를 비루하고 약한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뒷글 자를 붙인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마땅히 신라의 ‘신’자를 써서 신당연합군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 일화도 소개했다. 일본에 있을 때 신라와 일본을 합한 용어를 ‘라일羅日’로 표현했는데 일본인교수가 왜 그렇게 부르냐며 핀잔을 주었다고 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마땅히 신라의 신자를 앞에서 붙여, ‘신일新日’이라고 해야 맞다며 고쳐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또 대일항쟁기에 일제가 만들어낸 ‘일선동조론’ 용어에 숨어있는 음모도 언급했다. 이 용어를 제대로 표기하려면 일본입장에서도 ‘일조동조론’이라고 해야 맞다고 했다. 조선의 선鮮자를 붙일 것이 아니라 조선의 앞 글자인 조朝자를 붙여야 한다. 선자를 붙인 것은 일제가 우리민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한 교수는 이날 발해가 황제국이라고 하면서도 대내용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어 동해라는 말도 마땅치 않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조선동해라고 표기한다면서 자신도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 교수는 또 우리역사 시대구분에서도 자신 생각을 피력했다. 우리역사 시작을 군장사회라고 했고 지금은 통일운동시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주류견해는 남북분단시대로 본다고 상기시켰다. 하지만 통일운동시대라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더 열정적인 시대구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우리의 사명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통일은 반드시 우리가 해야 될 역사적 명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반면에 남북분단시대라고 하면 통일되든 말든 상관 안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어 비관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기1970년대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어떤 사람이 책을 출판하면서 ‘통일운동시대’라고 썼는데 거절당했다고 했다. 결국 남북분단시대로 바꿔서 책을 내게 되었다고 당시 시대상황을 우회해서 비판했다.

▲ 중국과 일본은 발해를 최대한 축소해서 본다. 위 지도를 보면 서북한이 우리나라 역사강역으로 들어와 있지 않다. 중국 땅으로 그려놓고 있다. 동북공정지도와 같다.

 

한 교수는 본 강연에 들어가면서 먼저 말갈족이라는 개념부터 새롭게 정의했다. 그는 말갈이 우리와 상관없는 별개의 종족이었다면 광개토태왕비문에도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말갈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종족이 아닌 지방민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흔히 발해를 구성한 주민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고 한다. 한 교수는 이 말의 기원이 대일항쟁기 일제식민사학자, 시라토리구라키치(白鳥庫吉)가 한 말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개념을 별 생각 없이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기전 온조왕시기에도 말갈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는 변두리 사람을 마치 이민족처럼 부른 호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갈은 우리민족과 다른 종족이름이 아니다. 오늘날 서울이 중앙이라고 할 때 지방에 전라도, 경상도가 있다. 이 지방 사람을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말갈은 중앙을 놓고 볼 때 당시 지방 사람을 부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시 말갈은 고구려나, 발해의 지방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한 교수 자신은 ‘말갈이라고 부른 고구려인’, ‘말갈이라고 부른 발해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요즘에 국사교과서에는 발해가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계층은 말갈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밝혔다. 즉 일본인 학자가 지배, 피지배층이라고 썼는데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촉구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으로 있으면서도 여러 번 지적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사관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여전히 발해가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혼합된 나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동북아시아 각 나라가 그린 발해강역도도 보여주었다. 중국과 일본이 거의 같게 그리고 있었다. 동북공정의 전형이다. 서북한 지역을 발해가 아닌 중국 땅으로 그리고 있다.

▲ 뒤집어 놓은 발해 강역도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효과도 있다. 한 교수는 이렇게 시야를 넓혀 만주역사를 다시 보자고 역설했다.

 

한 교수는 거꾸로 그린 발해지도도 보여 주었다. 북에서 남쪽을 바라보도록 뒤집은 지도였다. 그는 지금은 경제영역과 한류영역이 국경을 초월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는 섬과 같다고 낙담했다. 이를 극복하는 준비 작업으로써 고구려, 발해를 배우면서 자동차 타고 만주로 나가는 생각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어 존티도가 그린 지도를 보여주었다. 존티도가 그린 지도는 누리망상에서 심심치 않게 소개되고 있다. 이 지도는 일본을 한국 식민지라고 그려놓고 있다. 또 요서는 물론 중국 연안지역 성을 따라 복건성까지 통일한국 땅으로 그려놓고 있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한 교수는 이 지도를 보면서 너무 흡족하다고 했다. 이어 서기4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그린 지도도 보여주었다. 고구려는 서쪽으로 북경일대까지 뻗어 나가 있고. 백제는 중국 동해 연안을 따라 그려져 있고, 일본열도는 삼국의 분할해서 차지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한 교수는 이 지도가 존 티토라는 외국학자가 그린 것이라면서 자신은 사실로 믿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우리가 열등의식이 있어서 너무 크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며 부정했다. 뭘 모르는 외국학자가 그린 것 뿐이라는 것이다.

▲ 북한이 보는 발해강역이다.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는 것이어서 마냥 허황되다고 보기 힘들다.

 

한 교수는 이어 발해가 자주 국가이며 황제 국임을 역설했다. 그는 먼저 만주 한 고분군에서 황후명 비석이 나왔는데 중국당국이 묘비명을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는 “혹시 고구려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며 의심했다. 만약에 말갈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면 곧 바로 공개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10년 이상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발해가 왜 황제 국인지 밝혀나갔다. 첫째 연호를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라가 연호를 쓴 것을 빗대었다. 그는 신라가 통일 후 당나라 연호를 썼는데 그 이전에도 자체 연호를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때가 더 자주적이었겠느냐며 통일 후 당나라 연호를 쓴 행태를 비판했다. 이어 발해는 처음부터 연호를 썼다며 발해의 자주성을 부각시켰다. 또 현재 중국서 내놓은 <발해국사>라는 책이 있는데 발해가 당나라 지방정권이기 때문에 황제 국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연호를 쓸 수 없다면서 연호를 발해역사에서 빼버렸다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발해가 황제 국으로써 자주국가라는 점도 밝혀나갔다. 중국이 발해를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하는데 결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함이다. 먼저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가 내려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는 점을 강조했다. 발해는 처음에 나라 이름을 ‘떨쳐나간다’는 뜻을 가진 ‘진振’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또 당시 일본에서는 발해에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라고 칭했다는 점을 들어 발해를 고구려라고 했을 것이라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발해가 고구려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이어 받은 나라였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발해가 결코 당나라에서 책봉해서 정해준 것이 아니라고 재차 못 박았다.

▲ 한 교수가 우리역사를 대강 밝히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식민주의사관에서 주장하는 한사군과 삼한론을 그대로 따라고 있다. 또한 식민고고학이라고 하는 원삼국설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는 또 발해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이 누구냐를 가지고 발해가 우리민족역사임을 밝혔다. 발해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이 말갈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인의 다른 이름이라고 분명히 했다. 만주지역이 7백년이상 고구려 땅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지역 사람들은 다 고구려 사람이 된 것 아니냐며 이 땅에 세워진 발해도 고구려 후손이고 그 구성원인 말갈도 고구려인이라는 것이다. 북한과 연변조선족은 고구려가 서기전 2백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이 지역은 9백 년 동안 고구려 땅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묘장제도를 통해서 말갈이 우리와 같다는 점을 밝혔다. 기존 견해는 말갈 것은 토광묘제이고 고구려 것은 적석총이라는 이유를 들어 말갈을 고구려와 떼어 놓으려고 한다. 이에 한 교수는 적석총은 상층계급이 썼던 것이고 토광묘는 일반백성들이 쓴 것 뿐이라고 강조했다. 별개의 종족이라서 묘장제도가 다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발해가 온돌을 썼다는 점도 들었다. 발해지역에서는 난방을 온돌로 했는데 이것도 발해가 중국지방정권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증거라고 했다. 중국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발해가 먼저 당나라 등주를 공격했는데 당나라와 신라가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며 이것도 발해가 당나라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는 중국역사가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다고 본다면서 강의를 마쳤다.

그런데 이 날 강연은 근본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바탕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한 교수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발해사가 전공이라서 낙랑군 위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회피했다. 그러나 이날 한 교수가 보여준 시대구분 장면에서는 낙랑군과 삼한시대가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식민고고학 용어로 지적되는 ‘원삼국’이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이 시민강좌를 개최한 한국고대사학회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또 한 교수가 한국고대사학회 일원으로서 강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낙랑군 위치를 어디로 보는지 관점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회피해서 모처럼 만에 자주사관으로 한 강연이 퇴색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는 식민사학자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대내황제국, 대외제후국론을 그대로 따랐다. 발해나 고려가 연호를 쓰면서 황제국을 표방했다. 그런데 이는 국내용이라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과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외국에게 황제 국을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는 말로 발해가 대외적으로는 황제 국이 아니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한편 강연이 시작된 지 28분경에 강연장이 흔들렸다.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놀이기구에 올라탄 것처럼 미세하게 출렁였다. 녹화기도 떨었다. 약10초간 지속되었다. 이어 곧 바로 박물관 비상종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강연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아 계속 이어졌다. 이날 취재에는 손정금, 이윤지 선생이 함께 했다. 수고했다고 김밥과 식사를 대접했다. 특히 손정금 선생은 손수 운전해서 구포역까지 바래다주고 고속철 차표까지 끊어주었다. 지난주 강연 비평문도 나눠주었다. 마지막이라며 아쉬워하는 시민방청객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특히 매주 서울에서 왕복 10시간가량 걸리는 김해에 내려와 취재하는 것에 놀라워했다. 늦게 와서 못 받은 방청객들은 직접 찾아와서 달라고 했다.

▲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시민강좌 종강인사를 영상을 통해서 하고 있다. 임 관장은 공공이익을 위해서 시민강좌를 취재하는 행위를 범죄행위로 취급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편 이날은 시민강좌 마지막 날이라서 수료식이 있었다. 박물관 측에서는 다과를 제공했다. 그런데 수료식에서 이 시민강좌를 주관한 임학중 국립김해박물관장의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임학종 관장은 이날 수료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 생겨서 거기에 갔다고 했다. 대신에 영상으로 종강사를 남겼다. 그는 강연 중에 소란이 있었다면서 박물관이 이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해 사과한다고 했다. 여기서 소란이라는 것은 박물관 직원들이 기자의 취재를 방해하면서 발생한 소동이다. 임 관장의 ‘대처하지 못했다’는 발언은 기자의 취재활동이 불법행위였다는 전제를 깐 것이다. 취재활동을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사실 박물관측은 강연 내내 취재활동을 방해했다. 정식으로 취재요청 공문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음에도 강사들의 의견을 핑계 삼아 끝까지 방해했다. 심지어 학예실장이라는 인사는 하급직원으로 보이는 젊은이까지 동원해서 가로막았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인력과 그들의 역사인식이 어떤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이 시민강좌 연속취재기사에서 반복해서 밝혔듯이 여전히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준 일제식민주의사관이 장악하고 있다. 시민강좌 강사들은 우리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중견이상의 교수들이다. 이들이 키워놓은 후학들이 전국 박물관을 학예사 등의 직함을 가지고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사와 박물관 직원은 한 몸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이렇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적폐를, 지난 국회에서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언제까지 수수방관할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

 

KBS 한국사전 – 발해 제2부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 – 문왕 대흠무

조회수 553,232회

최초 공개: 2020. 1. 3.

출처; https://youtu.be/VSLeu3MmGoM?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KBS 역사스페셜 – 추적! 발해황후묘는 왜 공개되지 못하나

조회수 875,030회

최초 공개: 2020. 7. 22.

출처; https://youtu.be/K3VX5W7bCDk?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참고자료>

 

발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Balhae - World History Encyclopedia

 

 

발해(渤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고대사 |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고구려)라 불렀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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