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대진국(발해) (2) 719년~737년 무황제(武皇帝) 대무예, 연호: 인안(仁安), 732년~733년 발해-당 전쟁 본문
1. 대진국(발해) (2) 719년~737년 무황제(武皇帝) 대무예, 연호: 인안(仁安), 732년~733년 발해-당 전쟁
대야발 2020. 5. 22. 22:10
제1대 고왕의 뒤를 이은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대무예와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흠무(大欽茂) 시기는 발해 역사의 전반기에 해당하며, 영토 확장과 제도 ‧ 문화면에서 큰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치(武治)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왕이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무왕의 활발한 영역 확장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야기하였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무력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왕 대에 발해는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여기에 압박을 느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견제하려 하였다. 당나라 역시 북방을 위협하던 돌궐 ‧ 거란 등과 연대하고 있던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726년에 흑수말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설치하였다.
무왕은 이것을 흑수말갈이 당과 손을 잡고 앞뒤에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친동생인 대문예와 장인 임아(任雅 또는 任雅相)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숙위한 경험이 있던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이 당나라를 배반하는 일이고, 군사의 열세를 들어 반대하였다. 대문예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러서도 반대 글을 올리자 화가 난 무왕은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문예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발해는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만약에 있을 당과 신라의 연계에 대비하였다. 신라의 경우 발해가 팽창하는 것에 맞서 북경의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 거란 ‧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형세가 구축되었다.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무왕은 732년 9월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돌궐 및 거란과 연합하여 마도산 등 하북 지방을 공격하면서 국제전을 벌였다. 당나라는 발해를 격퇴하기 위하여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남쪽 경계를 협공하였다. 이때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735년경 신라는 참전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리고 735년 전쟁이 종식된 이후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양국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 732년~733년 발해-당 전쟁
726년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당에 조공을 했다. 이어 당 현종이 흑수말갈 지역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를 두고, 사신을 파견하여 진무케 하였다.
발해국왕 대무예(武王)는 당이 흑수말갈과 공모하여 발해를 협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동생 대문예(大文藝)를 시켜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문예는 흑수주에 대한 공격은 당을 자극하는 일이라며 만류하다가 대무예의 진노를 일으켜 소환령을 받자 당나라에 망명했다. 당 현종은 대문예의 망명을 반기며 그에게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의 벼슬을 주었다.
대무예는 당에 사신을 보내 동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당은 대문예를 보호해주었다.
728년 당 현종은 흑수말갈의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중국식 성명을 하사했고,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를 제수하였다. 같은 해 4월 당에서 숙위 중이던 발해 왕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했다.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조치는 발해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자 대도리행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대무예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문예는 형의 장자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차자인 대흠무(大欽茂)와 똑같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에 당의 개입 가능성이 커졌다.
발해국왕에게 있어서 망명한 동생 대문예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730년 정월에 입당한 발해사신 대낭아는 당 현종이 대문예를 영남(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유배보냈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대무예는 강력하게 당에 항의했고, 정보누설을 알아챈 당 조정은 책임자를 파면하는 동시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731년 8∼9월경 칙서를 지참한 당의 사신이 발해를 향해 출발했다. 칙서의 내용에서 당 현종은 발해국왕 대무예의 행실에 흠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 대문예를 보호했다고 했다. 이어 발해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이에 대해서 당이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러한 칙서 내용에 대한 강경한 대답으로 발해는 732년 9월 당의 등주를 기습 공격하게 되었다.
732년(인안仁安 13년) 9월 발해 해군이 당나라 등주의 치소(治所)에 상륙했다.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기반시설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곳은 과거 수·당이 고구려를 해상으로 공격할 때 전함과 보급선이 집결했던 해군기지였다.
상륙한 발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이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다. 장문휴가 이끈 발해군은 위준을 전사시키고 휘하 병력을 거의 섬멸하였다.
당 현종은 발해군의 급습으로 등주자사 위준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갈복순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발해군은 철수해버린 듯하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전선을 타고 귀환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가 당의 등주를 기습공격한 이후 당은 대문예에게 유주(幽州)의 병사를 주어 발해를 공격하게 했다. 대문예가 당군의 사령관이라는 소식을 들은 무왕은 크게 진노하여, 자객단을 당나라에 침투시켰다. 자객들은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 일행을 급습하였으나, 당나라 관군에 의해 암살에 실패하고 낙양 근교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733년(인안仁安 14년) 3월, 무왕은 당나라에 대항하는 거란을 지원하여 병력을 파병했다. 거란, 발해, 돌궐까지 힘을 합쳐, 도처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다급했던 당나라는 신라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통해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발해의 남쪽 국경을 쳐 발해군을 교란하고자 했다. 출진했던 신라군은 추운 날씨 탓에 무수한 동사자를 낸 채 퇴각해버렸다. 무왕은 다시 군대를 보내 당나라의 마도산(馬都山)을 공격했다.
734년(인안仁安 15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당나라가 거란을 크게 격파하면서,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거란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또한 돌궐마저 카파간 카간이 암살을 당하면서 국내정세가 소용돌이에 빠져 버려, 대외원정에 힘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이렇게 국제 정세가 급변하자, 무왕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736년 무왕은 그간 전쟁에서 사로잡은 당나라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당나라에 화친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도 그간 붙잡아 두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었다.
737년 무왕이 붕어한 뒤 태자 대흠무(大欽茂)가 보위를 계승하여 당나라와 친선 기조를 유지하였다.
발해의 등주공격은 발해가 당을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당이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던 것이다.(1)
■ 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
그러나 두 나라의 평화적 교섭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것은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발단이 되었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관계에 있었다.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지배 아래 있는 흑수말갈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발해가 수륙양면으로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발해가 아니라 당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발해의 남쪽 국경에 파견하였다. 험한 날씨 탓에 신라군이 중간에 철수하면서 두 나라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국은 본격적인 대결 국면에 돌입한다.
발해 3대 문왕은 일본과 함께 신라를 협공하려고 '신라협공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안사의 난'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는 신라의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다시 교섭 국면에 돌입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원성왕(790년)과 현덕왕(812년)이 각각 '북국'(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원성왕과 현덕왕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약했고, 국내의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해와 교섭을 활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파병
남북국의 교섭은 8세기 초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서고,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협력을 맺음으로써 다시 대결 구도로 치달았다. 당나라는 819년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3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이를 수용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한국사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고 할 만 하다.
이사도는 고구려계인 이정기의 손자로 산둥반도에 진출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국 대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남북국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신라는 826년 1만 명을 동원해 발해와 국경에 성을 쌓는 등 발해를 상대로 한 국방력을 강화했다.


거란에 망한 발해, 거란을 도운 신라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발해가 멸망기에 접어든 10세기, 국력이 기운 발해 왕조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거란국지>는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전한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 발해는 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을까? 두 나라가 비록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이어온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를 돕기로 했던 신라는 약속을 어기고 발해 대신 거란을 도왔고, 그 공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거란을 돕는 데 군사적 지원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신라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란을 돕는 꼴이 된다. 발해는 결국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신라의 방관으로 거란에 망한 셈이다.
남북국시대의 교훈, 근친원교인가, 원교근공인가?
남북국시대 교섭과 대결은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나? 남북 교섭에서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국내 정치의 위기를 발해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반면 발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서 신라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국은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남북교섭은 차선책이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국시대 200여 년간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가 지속되었고, 정치 군사적 대결이 굳어졌다. 또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풍속이 점점 달라지면서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후손들은 발해는 물론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다른 종족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국제적인 외교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나라가 망한 뒤 발해 사람들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2)
한겨레, 한규철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2010. 3. 18.
KBS 한국사전 – 발해 제1부 최초의 중원 침공, 당을 정벌하라 – 무왕 대무예
https://youtu.be/-2qW-r2NMAw?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자료출처>
(1)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D%95%B4-%EB%8B%B9_%EC%A0%84%EC%9F%81#%EA%B0%9C%EC%9A%94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99%95_(%EB%B0%9C%ED%95%B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1957
(2) https://v.daum.net/v/20100318181024049
<참고자료>
김홍신, 2년 집필 끝에 대하소설 '대발해' 발간 (daum.net)2007.07.13
중국 사학계만 발해는 중국 것 주장 | 한국경제 (hankyung.com)2006.09.18
<기획탐구> 발해사가 한국사인 이유 (daum.net)200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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