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대진국(발해)의 강역 (2) 발해의 수도 본문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
- 업데이트 2009년 9월 26일 13시 21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8월 박사학위 졸업논문 ‘발해 문왕(文王)대의 지배체제 연구’(필자 김진광)가 그것. 국내 15번째 발해사 전공 박사논문인 이 논문은 발해 3대 문왕의 재위기간(737∼793년)에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발해의 최대 판도가 확정됐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성 6부제 같은 중앙행정체제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체제가 완비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이 같은 제도의 완비가 이뤄진 시점은 10대 선왕(宣王·818∼830년) 때라는 것이 그동안 학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김진광 박사가 특히 주목한 점은 발해 문왕 때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의 5경제가 확립되고 57년의 재위기간 중 사실상 4차례나 도읍지를 옮겼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발해의 5경제를 당의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당의 5경제는 본래 4경제였다가 ‘안사의 난’(755년) 때 현종의 피란처였던 남경을 757년 다섯 번째 수도로 지정하면서 성립됐으며 그나마도 불과 4년 뒤인 761년 폐지됐다. 또한 후대 중원을 장악한 국가들로 계승되지도 못했다. 반면 발해의 5경제는 755∼756년경 중경(당시 지명은 현주·顯州)에서 상경으로 천도할 즈음부터 성립했다고 봐야 하며 이후 요와 금의 5경제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기원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 김 박사의 지적이다. 북경에 해당하는 상경의 명칭에 이미 상하좌우와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위의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과 발해의 5경제가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긴 하지만 당의 5경이 내란의 산물이라면 발해와 요·금의 5경은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내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왕은 동모산→중경→상경→동경으로 3차례의 천도를 단행됐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를 준비하다 그 1년 전에 숨졌다.
김 박사는 이처럼 발해의 천도가 문왕 때 집중된 것은 새로 획득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에 대한 통치력 강화라는 내재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이는 발해의 상경천도가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내분을 이용한 적극적 북방정책의 일환이라면 동경천도를 일본과 외교관계 강화를 위한 동방정책의 포석이란 식으로 대외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던 것과 차별화된 시각이다.
실제 문왕 사후 4∼9대 25년간 계속된 내분과 잦은 왕의 교체로 왕권 약화와 영토 축소가 이뤄지면서 수도가 상경으로 고정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10대 선왕 때 이뤄진 정복 활동이 그 과정에서 발해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발해의 5경제가 이처럼 내재적 발전 논리에 의해 도입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영토가 겹치는 부여의 5가(五加)제나 고구려의 5부(五部)제 또는 신라의 5소경(五小京)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했다”고 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 박사는 “발해 문왕 때에 들어서 비로소 자신을 천손(天孫)으로 지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기 시작한 점은 독자적 천하관을 구축했던 고구려의 천손의식을 명실상부하게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완비했기 때문”이라며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기틀은 선왕 때가 아닌 문왕 때부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中 학자들, 고고발굴 성과 보고서 통해 단언
"都城 건설도 중원 漢문화 영향 크게 받아"
국내 학계서도 관련 논의 활성화 계기 될듯
(서울=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일대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다. '간도(間島)'로도 불린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1909년 9월 4일 청(淸)나라와 체결한 '중한계무조관(中韓界務條款ㆍ간도협약)'에 의해 중국의 영토가 된 곳이다.
지린성 내의 수많은 고구려ㆍ발해 유적 중 옌볜자치주 허룽(和龍)시 시청(西城)진 청난(城南)촌에 있는 서고성(西古城) 유적은 이미 1940년대에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동양사학자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등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발해 5경(五京)의 한 곳인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비정됐다.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옌볜자치주 문화국, 옌볜자치주박물관, 허룽시박물관은 2000-2005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이 서고성에 대해 대대적인 고고발굴작업을 벌였으며 그 성과를 '서고성 - 2000∼2005년도 발해국 중경현덕부 고지(故址) 야외고고 보고'라는 이름으로 최근 펴냈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보고서에서 서고성 성터가 바로 중경현덕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면서 서고성 성터에 대한 고고발굴과, 이 성터에서 대량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와 문자 기와 등을 통해 중원의 한문화(漢文化)가 발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도굴'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심층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보호관리가 허술했던 서고성에 대한 중국의 전면적 고고발굴 작업과 보고서 발간은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서고성에 대한 부분적 조사는 1964년 북ㆍ중 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공동으로 진행된 바 있으나 그 보고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중경은 발해 3대왕인 대흠무(大欽茂ㆍ문왕)가 자신의 재위 때(서기 737-793년)인 대흥 5년(742년)부터 대흥 19년(755년)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14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곳.
그 위치와 관련해서는 대조영이 처음 터를 잡은 구국(舊國)과 동일한 지역인지, 중경현덕부의 소재지가 그 아래의 노주(盧州)인지 현주(顯州)인지를 놓고 학설이 분분했다. 그러나 1980년 10월 서고성 가까운 곳에서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의 묘가 발견됨으로써 서고성이 중경현덕부라는 학설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발굴보고서는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였다는 기존의 '통설'이 실물 증거자료 부족으로 추론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번 고고발굴에서 나타난 자료와 기존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발해국 중격현덕부의 옛터를 서고성 성터로 충분히 확정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해 강역이었던 지역에서 확인된 발해 성터 중 규모면에서 도성의 조건을 갖춘 곳은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자리였던 지린성 훈춘(琿春)시 팔련성(八連城) 성터를 제외하고는 서고성 성터밖에 없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도 서고성은 팔련성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문헌에 기록된 발해 5경의 방위와 대체로 부합하며, 유적ㆍ유물면에서는 궁전의 크기라든가 건축 장식물로 사용된 유약도기 등이 도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러한 도성의 조건은 지린시 화뎬(樺甸)에 있는 발해 장령부(長嶺府) 소밀성(蘇密城) 성터, 염주(鹽州) 크라스키노성 성터(러시아 하산지방) 같은, 발해의 부(府)급과 주(州)급 성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고성 성터의 중경현덕부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보고서는 '학술적인 추론'임을 전제로 "발해정권이 이미 대흠무 재위 시기에 5경제도(5경.15부.62주)를 수립했으며,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인 동시에 현주로 비정하고 있다"면서 고고학 연구를 통해 중경현덕부와 현주의 관계도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산 경성대 역사학과 한규철 교수(발해사)는 "이번 발굴을 통해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라는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고 본다"면서 "발해 연구를 위한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학계에서도 서고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밖에 "서고성 성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성터의 도성 건설에 중원 한문화의 선진적인 도성 건설 경험과 영양분을 대량으로 흡수ㆍ섭취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하고 했다.
또 "여덟 잎 연꽃무늬 기와는 발해인들이 다소간 중원지구 육조(六朝) 연꽃무의 기와의 모티브와 도안을 직접 차용한 것"이며 "서고성에서 발견된 치미(망새)역시 육조와 수ㆍ당 시기의 치미가 갖고 있는 형태적.구조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 서고성 = 서고성 성터는 두만강의 최대 지류인 해란강 중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터우다오(頭道)평원 서북부의 개활지와 구릉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평균해발은 320m. 동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해란강이 흐른다.
직사각형인 성터는 내성와 외성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내성은 외성 북반부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총면적은 약 0.46㎞이고, 외성의 전체 길이는 2천720m, 내성의 전체 길이는 992.8m이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주로 다섯 곳의 궁전터와 그 부속건물터, 외성 성벽과 남문(南門)터, 내성 성벽 사이벽과 문터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중국 당국은 1981년 서고성 성터를 지린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보호ㆍ관리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격상시켰다. 2000년에는 3개년 계획으로, 2004년에는 2개년 계획으로 서고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발굴작업을 벌였다.
2005년에는 서고성 외성 북벽 인근을 통과하는 옌지(延吉)-허룽 1급도로를 140-180m 북쪽으로 이동시켜 확장했고, 지난해에는 서고성 성터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과 외성의 농경지를 모두 정리하는 동시에 62가구를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일부 관측통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경용천부 유적지 등 일련의 발해 시대 유적지와 함께 서고성을 복원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기 위한 준비작업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2)
[발해의 천도는] 100년간 4차례 옮겨
중앙일보
입력 2003.12.21 17:52
업데이트 2006.04.11 00:33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3780
755년 상경성으로의 두번째 천도는 당시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킨 안록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옮긴 것이다. 발해 천도에 대해 연구한 임상선(교과서문제연구소 소장) 박사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기에 천도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임박사는 또 "발해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점차 동쪽으로 천도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이며, 서고성과 훈춘의 경우 고구려의 핵심 지역이었다는 점과 농사가 잘 되고 인구가 많다는 점도 고려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기호(서울대 국사학) 교수는 "경제적 이점이나 고구려와의 연관성 등 천도의 배경에 대해 다양한 추정은 가능하지만, 현재 있는 자료만으론 두 번째 천도 이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3)
<주>
(1)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동아일보 (donga.com) 2009-09-26
(2)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daum.net) 2007. 11. 23. 09:01
(3) [발해의 천도는] 100년간 4차례 옮겨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06.04.11 00:33
'북국 > 대진(발해,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대진국(발해) 고고학 (3)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16) | 2024.10.24 |
---|---|
3. 대진국(발해) 고고학 (2) '황후' 호칭..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 아니다 (12) | 2024.10.24 |
3. 대진국(발해) 고고학 (1)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0) | 2024.05.29 |
1. 대진국(발해) (1)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 (1) | 2019.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