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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진국(발해) (4) 818년~830년 선황제(宣皇帝) 대인수, 연호: 건흥(建興) 본문

북국/대진(발해,고려)

1. 대진국(발해) (4) 818년~830년 선황제(宣皇帝) 대인수, 연호: 건흥(建興)

대야발 2024. 5. 29. 17:12

 

 

 

 

 

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로 판단할 수 있는 9세기대(선왕·宣王·재위 818~830년) 발해성이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강 근처에서 발굴됐다. 이는 연해주 중북부 지역이 발해의 영역임을 증거해주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2008년 9월3일~10월2일 러시아 중북부 콕샤로프카-1성(城)을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구려의 전통을 강하게 이어받은 완벽한 형태의 왕성급 성(城)을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평지성의 규모는 총길이 1645m, 전체 면적 16만㎡에 달했다.

 

 

 

■ 연해주 중북부지역 '발해의 땅' 증거나와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2008. 10. 16. 18:09

 

 
 

 

 

 

 

ㆍ'도청 소재지' 추정 고구려 전통 왕성 발굴

 

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로 판단할 수 있는 9세기대(선왕·宣王·재위 818~830년) 발해성이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강 근처에서 발굴됐다. 이는 연해주 중북부 지역이 발해의 영역임을 증거해주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지난 9월3일~10월2일 러시아 중북부 콕샤로프카-1성(城)을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구려의 전통을 강하게 이어받은 완벽한 형태의 왕성급 성(城)을 발굴했다고 16일 밝혔다. 평지성의 규모는 총길이 1645m, 전체 면적 16만㎡에 달했다.

 

 

 

 

 

 

 

 

홍형우 학예관은 "5성15부62주인 발해 행정조직을 비추어 보면 이 성은 15부 가운데 한 곳의 행정치소(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가 존재했던 곳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인지는 모르나 15부 가운데 회원부(懷遠府) 혹은 안변부(安邊府)로 추정된다.

 

 

특히 성 안에서는 고구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곡(曲)' 혹은 '유(由)'자형 온돌이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 'ㄱ'자 모양으로 꺾어 건물 밖으로 빼내는 온돌구조는 고구려 유적인 지안(集安) 둥타이쯔(東臺子) 온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띠고리 손잡이가 달린 토기(대상파수호·帶狀把手壺)와, 주둥이가 안쪽으로 오므라진 항아리 모양 토기인 내만구연호(內彎口緣壺) 같은 토기는 고구려의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 치마 입은 여인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마치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키는 토기도 눈에 띈다.

 

 

이 밖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에서 제작된 해무리굽 청자(9세기)도 출토됐다. 이는 유적의 연대가 발해 선왕대 전후라는 암시를 준다. 홍 연구관은 "러시아에서는 이곳을 발해영역에서 제외하는 경향이 있었다"면서 "이번 발굴 성과로 연해주 중북부 지역을 발해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1)

 

 

 

■ 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세계일보 정승욱 선임기자

2012. 6. 22. 17:43

 
조선족 출신 중국학자 방학봉 교수 평생 연구 총망라

 

중국이 관변 학자들을 동원해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발해는 실로 동아시아의 대단한 나라였다. 668년 당에 멸망한 고구려보다 더 강성했던 적도 있다. 당시 중국 사가들도 발해를 일컬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부러워했다.

 

발해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사서나 한국 고문서 가운데 유독 발해를 입증할 만한 문헌이나 실증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에 한국 고대 사학자들 또한 분명한 견해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증과 실사에 의해서만 인정받는 고대 역사학의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척박한 발해 연구 환경에서 괄목할 만한 발해 연구서가 나와 주목된다. 연구서지만 지루하거나 딱딱하진 않다. 중국 연변대학의 주임 교수와 발해사연구소장을 지낸 저자 방학봉은 발해사 연구에 평생을 건 조선족 출신 중국 학자다. '발해의 강역과 지리'는 그의 평생 연구업적을 망라한 것이다.

 

 

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발해의 강역과 지리/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1930년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난 방 교수는 "1949년 연변대 역사학부 학생 시절 발해 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묘 발굴작업에 참여하다 엄청난 규모의 발해 역사에 매료돼 평생 동안 연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국 사학계에서도 '발해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줄곧 발해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팔순을 넘긴 그는 "지금 나이에 무슨 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뭐가 있나. 편견이나 예단 없이 오로지 학자적 양심과 고증에 따라 발해사를 연구해 책을 썼다"고 강조한다. 그는 발해에 대해 "거란·말갈·돌궐·해 등 여러 부족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침략과 통치에 저항해 698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5경 15부 62주를 설치해 229년간 통치한 동아시아 대국"이라면서 "발해사는 아직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고 했다.

 

 

방 교수가 인용한 고서적은 당나라 정사인 10세기경의 '구당서'와 송대 '신당서'를 비롯해 중국 쪽 정사 25권을 포함한 100여권에 이른다. 신당서보다 더 권위를 인정받는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를 중국과 구별된 나라로 규정한다. 한족 중심의 중국과 동이족이 다수를 차지한 고구려는 과거부터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쟁패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쪽 학자들의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사실이다.

 

 

1984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이던 왕승례가 쓴 '발해간사'에 나온 발해 강역도.

 

 

발해 강역은 동쪽은 바다(동해)에 닿고 서쪽은 거란(요서)과 접했으며, 남은 신라와 접하여 패강(대동강) 일대에 미쳤다. 서남쪽은 요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고, 북쪽은 흑수말갈(연해주 북쪽)에 이르렀다. 방 교수는 특히 대조영과 당군이 북방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부분을 묘사했다.

 

 

발해가 빠른 시일 내에 넓은 강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패권적인 당나라에 반대한 당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당 통치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며, 이는 당시 북방 민족들의 공통적 염원이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은 분명히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당·신라 연합군의 침략으로 영주(베이징 부근 추정)에 강제 이주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고구려의 별종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의 영도 하에 당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걸걸중상이 죽자 대조영이 통일 지휘하여 천문령에서 이해고가 거느리는 당 추격군을 물리치고 진국을 건립했다.

 

 

평생 발해를 연구해 온 연변대 방학봉 교수가 발해를 풀이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도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합하여 (이)해고를 치니 왕군은 대패하고 해고는 몸을 빼어 돌아갔다. 조영은 동으로 나아가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은 용맹스럽고 용병술이 뛰어났다. 이에 흩어졌던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이 모여들었다. 조영은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북방 유민들에 널리 퍼져 있던 항당투쟁 열기는 대조영이 급속히 기반을 닦아 나라를 세운 자양분이 된 것이다.

 

때마침 진행된 당의 쇠락과 국제환경도 대조영의 발해 건립을 도와주었다. 당시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말갈 영토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당나라는 돌궐과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였고, 신라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발해의 남하를 막을 수 없었다. 대조영은 건국 10년 사이에 고구려 옛 영토와 말갈 영토를 대부분 수복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재야사학자 남주성씨는 "청대 건륭제가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해 나라를 세웠으며 청은 발해를 잇는다고 기술돼 있다"고 증언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중국의 정사 가운데 하나다.(2)

 

 

 

 

■ 발해와 일본 교역의 중심지 '크라스키노'

2005. 8. 25. 13:54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 크라스키노 마을 뒷산에서 바라 본 발해 성의 모습. 흰색 타원형 안이 성터의 모습으로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인다. 성의 왼편에는 추카노프카 강이 흐른다.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크라스키노는 연해주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약 200㎞, 중국의 훈춘에서는 동쪽으로 40㎞,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60㎞ 정도 떨어져있다. 풍광이 수려한 포시에트 만 안쪽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행정체계상 촌으로 한국의 리(里)급 마을이다.

 

촌의 중심지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발해의 옛 성터가 있다. 이 성을 마을 이름을 따 크라스키노 성이라고 부른다. 성의 남쪽에서 바다까지는 직선거리로 400m에 불과해 넘실거리는 파도가 물결치는 동해를 볼 수 있다.

 

발해는 5경·15부·62주의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크라스키노는 동경용원부(오늘날 중국 지린성 훈춘의 팔련성) 산하의 4개 주 가운데 염주(鹽州)의 주부(州府)가 있던 곳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고구려연구재단 구난희 실장은 "이곳은 발해와 일본을 왕래하는 배가 떠났던 이른바 '일본도(日本道)'의 출발지"라며 "발해는 말·철·주석 등의 무역품을 일본에 수출했는데 이들 물품이 모이는 집산지였다"고 설명했다.

 

 

 

 
▲ 포시에트 만의 아름 다운 모습. 이 만의 안쪽에 크라스키노 발해 성이 있다.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일본 등과의 교역의 중심지다. 이에 견줘보면 크라스키노는 발해 시대의 블라디보스토크와 같은 구실을 했다. 당시 발해인들은 겨울에 북서풍을 타고 일본의 후쿠라로 갔다가 이듬에 여름 남동풍을 타고 돌아왔다.

 

크라스키노 성의 총 길이는 1200m로 연해주 지역에 있는 발해 성터 가운데 가장 크다. 동문·서문·남문 등의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에는 발해 시대의 무덤 떼가 아직도 있다. 성벽 속에서 당나라 현종 때의 '개원통보'가 나온 것으로 봐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크라스키노 성의 각 문에는 옹성(擁城)이 있으며 동문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길이 4m에 폭 2m 정도의 치(雉)가 있다.

러시아 극동고고민속학 연구소의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 박사는 "크라스키노 성의 옹성(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과 치(稚·성벽의 돌출부)는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의 그것과 똑같다"며 "이는 이 성이 전형적인 고구려 방식으로 쌓은 것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3)

 

 

 

 

발해의 제10대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인수(大仁秀)는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그가 즉위하면서 발해의 왕계가 바뀌었다. 선왕은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았고, 문왕 사후의 침체기를 완전히 벗어나 중흥을 이루었다. 선왕은 즉위하자마자 당나라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도독(檢校秘書監都督) 발해의 국왕에 책봉되었다.

 

 

선왕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어” 820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대에는 대외 확장을 통해 월희말갈 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헤이룽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였다. 또한 서남쪽으로는 요동지방을 아우르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 남하하여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 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사방 5,000리의 경계가 확정되어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당나라에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에도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견일본사는 규모도 크고 상업적 성격이 강하여, 사신 접대에 경제적 부담을 겪은 일본은 방문 기한을 12년으로 제한하고 사신단의 사무역을 금지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사후 아들 신덕(新德)이 일찍 죽어 손자인 대이진(大彛震, 재위 831∼857)이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咸和)라고 하였고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대이진 대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두었다. 이 시기 발해에 다녀간 당나라 사신 장건장(張建章)은 『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저술하였다.

 

 

대이진 이후의 왕들은 연호와 시호 모두 전하지 않는다.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 재위 858871)은 대이진의 동생이며, 제13대 대현석(大玄錫, 재위 872894?)은 대건황의 아들이다. 제14대 왕인 대위해(大瑋瑎, 895?~906?)는 발해 왕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근대 중국학자인 진위푸〔金毓黻〕가 『당회요(唐會要)』에서 그 존재를 발견하며 알려졌다. 대위해의 연호 ‧ 시호 ‧ 가계는 알 수 없다.

 

 

발해는 선왕 이후 융성기를 맞으며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더욱이 발해 스스로 남긴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9세기 발해의 발전상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경제 ‧ 문화 외교 모습이나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872년에 발해 사람 오소도(烏炤度)는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인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였고, 906년에는 그 아들이 차석을 차지하며 신라와 우열을 다투었다.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졌는데, 당나라 황제가 “국명의 선후는 본래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9세기 말 신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4)

 

 

 

<자료출처>

 

(1) 연해주 중북부지역 '발해의 땅' 증거나와 (daum.net) 경향신문 2008. 10. 16. 

 

 

(2) 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daum.net) 세계일보 2012. 6. 22.

 

 

(3) 발해와 일본 교역의 중심지 '크라스키노' (daum.net)2005. 8. 25. 

 

 

(4) 발해(渤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참고자료>

 

 

“발해사 연구 공백지대는 중국 아닌 북한” | 서울신문 (seoul.co.kr)2008-05-16

 

 

대조영이 세운 나라는 '발해'인가, 대진국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7/12/27

 

 

‘발해 사랑’ 러 사학자 “중국 경계해야” (hani.co.kr)2008-04-29

니키틴 유리 게나디에비치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 문화일보 munhwa200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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