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대진국(발해) 고고학 (2) '황후' 호칭..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 아니다 본문
(※ 698년 발해 고왕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는데요, 원래 국호는 진국(대진국)이었습니다.)
1949년에 길림성 육정산에서 발해국의 제3대 王인 문왕(文王)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
1980년에 黑龍江省 화룡현에서 발해국의 제4대 王인 문왕(文王)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
1991년에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발해 왕릉,
2004~2005년 길림성(지린성吉林省) 화룡시(허룽시和龍市) 용해촌(룽하이촌龍海村) 용두산(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부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지(墓誌)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발굴됐습니다.
이형구교수는 발해의 무덤에는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도 있는데, 벽돌무덤의 상부에 삼령둔 석실봉토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향당이 축조됐을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기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정효공주(貞孝公主, 792년 卒) 무덤이라고 합니다.
『발해의 무덤에는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도 있는데, 벽돌무덤의 상부에 삼령둔 석실봉토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향당이 축조됐을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효공주(貞孝公主, 792년 卒) 무덤이다.
화룡현 서고성 부근에는 발해 무덤들이 많이 널려 있는데 지금까지 1,000여 기의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다. 1980년에 연변박물관에서 화룡현 용수향 용두산(龍頭山) 위에서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용두산 고분군은 발해 왕실 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정효공주 무덤의 구조는 무덤 바깥 길[연도(羨道)], 무덤 문[묘문(墓門)], 무덤 안 길[용도(甬道)], 주검 칸[현실(玄室)], 무덤 탑[묘탑(墓塔)]의 5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무덤 남북의 길이는 약 15m, 동서의 너비는 약 7m이다. 무덤 바깥 길은 무덤의 남쪽에 설치되었는데, 그 수평거리는 7.1m이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은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다. 무덤 안 길의 길이는 1.9m이다. 주검 칸은 남북의 길이 3.1m, 동서의 너비 2.1m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벽돌로 축조되었다. 주검 칸의 벽의 높이는 동·서벽은 1.4m, 북벽은 1.6m, 남벽은 1.66m이다. 네 벽의 윗 부분은 벽돌과 돌로 평행고임을 만들고, 그 위에 큰 판석(板石)을 덮어서 천정을 얹었다. 벽면과 천정에는 모두 흰 회를 발랐다.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 묘 현실 실측도면
벽돌로 쌓은 주검 칸과 무덤 안 길의 벽에는 흰 회를 바른 위에 주인공의 문위(門衛)·시종(侍從)·시위(侍衛)·악사(樂士)·내시(內侍) 등 모두 12명의 입상 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무덤 안 길에서는 완전히 원형대로 보존된 정효공주묘지(貞孝公主墓誌)가 발견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인 정효공주는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 그가 죽은 때는 부왕이 아직 살아 있던 792년 6월이고 장사를 지낸 것은 그해 11월이다.
발해 정효공주 묘의 현실 벽화 인물도[모사도]
무덤 칸[현실] 내부의 관대 위에서 남녀 2인의 유체 골격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정효공주 부부가 2차에 걸쳐 매장된 합장묘로 추측되고 있다.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 위에 흙을 덮어 축조하고 다시 그 위에 무덤무지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탑의 기초가 있다.
그 위에 이른바 묘탑(墓塔 혹은 廟塔)을 세웠다. 탑신은 이미 없어졌고 방형으로 된 기초만이 남아 있다. 지상에 있는 탑 기초의 남북 길이는 5.6m, 동서 길이는 5.5m이다. 묘탑은 삼령둔 고분에서 보는 일종의 향당(享堂)과 같은 묘상건물(墓上建物)이다.』(1)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한국사의 안뜰] 〈27〉 발해 공주의 초대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묘비 이외에 석사자등이 발견되었고, 정효공주 무덤에서는 발해 시기 생활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12폭 벽화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는 아버지 제3대 문왕이 57년간 재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토록 하여 3황 5제와 견줄 만하다고 칭송하였습니다.
또한 재위기간 대흥(大興),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효감(孝感)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금륜성법대왕(金輪聖法大王), 즉 전륜성왕으로서 온 사방에 덕을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의 벽 넘어.. 공주의 무덤과 함께 발해의 문이 열렸다
“강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무덤은 어느 날에야 다시 빛을 보리오.(河水之畔 斷山之邊 夜臺何曉)”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그동안 육정산 고분군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자료를 통해서만 묘비와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었다.
올해 4월,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일반에 개방되며 정혜공주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변려체 해서로 쓴 정혜공주 묘비에는 총 21행 72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비는 파손정도가 심해 그중 234자는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1980년 중국 지린성 용두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 묘비에 기록된 총 18행 728자로 인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공주는 20살의 나이차에도 그 삶의 행로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굴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고, 올해 4월에야 개방돼 정혜공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과 어린 자식 먼저 보낸 불행한 삶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예쁘고, 총명하며 지혜로움이 남달랐다. 또한 견문이 넓고 안목이 높아 궁중 많은 이들의 찬사가 잇따랐다. 신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두 공주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이 행복했던 시간을 묘비에는 “원앙새처럼 짝을 이루고, 봉황새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공주 모두 젊은 시절 남편을 갑작스럽게 여의었다. 불행은 이후 잇달아 두 공주 모두 어린 아들, 딸을 앞세워 보냈다. 기록에는 “온 세상이 캄캄했다. 그 어디를 돌아봐도 그리운 님, 사랑하는 자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햇빛은 잿빛이 된 듯 온 세상에 슬픔이 가득했다”고 한다.
“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 두 새가 홀연 등을 돌리고, 두 칼은 끝내 외롭게 되어버렸다.(所天早化 幽明殊途 雙鸞忽背 兩劍永孤) 어린 아들이 일찍 죽으매 젊은이에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子又夭 未經諸郞之日) 어린 딸이 요절하매 방추를 가지고 놀던 때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女又夭 未逢弄瓦之日)”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정혜공주는 777년, 마흔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정효공주도 언니의 길을 따랐다. 지아비를 여의고, 사랑하는 딸을 여읜 슬픔을 안고 끝내 37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아버지 문왕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왕도를 일으키셨으며, (중략) 해와 달처럼 온 천하를 비추었으며, 기강을 세워 어진 정치가 온 세상에 가득하였네. 이에 그 업적은 중화에 짝할 만하고 하우와 비슷하며, 상탕왕의 도야에 주문왕의 국량을 갖추었도다.(惟祖惟父 王化所興 … 若乃乘時御辨 明齊日月之照臨 立極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肖夏禹 陶殷湯而韜周文)”
위대한 조상들이 천하를 통일하고 반석에 올려놓은 나라를 이어받은 아버지 황상 문왕은 덕을 베풀어 3황 5제, 주나라 성왕, 강왕에 견주어질 만큼 칭송을 받았다. 그 왕이 고목처럼 쓰러져 목놓아 통곡했다. 손자손녀를 앞세웠고 또다시 그 사랑하는 두 딸을 떠나보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조회도 열지 못했고, 나랏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놓아버렸다. 공주들과 함께 나누고 즐겼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놀이와 음악도 그만두었다. 지친 몸, 애간장이 끊어지는 슬픔에서도 이별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손수 챙겼다. 그리고 상여소리에 실어 두 공주를 떠나보내며 가슴에 묻었다. 행여 추울세라, 행여 외로울세라 소나무, 가래나무를 벗삼아 주었다. 그리고 염원했다.
정혜공주 묘에서 출토된 석사자와 동경 등의 유물은 찬란했던 발해 문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구려 계승 자처한 황제국
발해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비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정혜공주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인 반면에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이었다.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묘비 이외에 석사자등이 발견되었고, 정효공주 무덤에서는 발해 시기 생활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12폭 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매장자가 발해 공주의 신분이었음은 물론 발해 왕실 귀족들의 성격이 확인되면서 발해사 전 분야의 자료 부족, 결핍의 갈증을 풀 수 있었다.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는 아버지 제3대 문왕이 57년간 재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토록 하여 3황 5제와 견줄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발해가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재위기간 대흥(大興),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효감(孝感)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금륜성법대왕(金輪聖法大王), 즉 전륜성왕으로서 온 사방에 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성인(聖人), 황상(皇上)으로 불리며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었고 동궁, 공주, 능 등 외명부제나 동궁제, 능묘제 등을 실시한 흔적들도 기록하였다. 또한 정혜공주는 사망해서 장지에 묻힐 때까지 고구려 3년상의 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무덤은 고구려 전통의 굴식돌방무덤에 모줄임천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록과 유물은 발해를 세운 자신들은 고구려 유민이고, 이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웅변하였다.
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정혜공주 묘비. 21행 725자의 비문은 정혜공주의 삶을 전한다.
◆발해를 오롯이 전하는 육정산 고분군
그런데 그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던 육정산 고분군, 바로 정혜공주가 잠들어 있는 곳이 개방된다는 소식을 접한 필자는 그동안 가슴 졸이며 다가가 굳게 잠겨 있던 쇠난간 사이로 카메라를 집어넣어 사진을 찍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드디어 만나 볼 수 있을까. 조금씩 묘역에 접근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요동질을 쳤다. 묘역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고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사실들을 확인했다. 게다가 관람자들의 편의를 위해 일부는 내부시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유리관으로 만들어 놓았고, 안으로 들어가 형태를 직접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다.
도깨비처럼 행운도 이어졌다. 그동안 한번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석사자와 묘지비 그리고 여러 유물들이 필자가 길림성 박물관을 방문한 날 눈앞에 전시되고 있었다. 주둥이를 크게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이 앉아 있던 정혜공주 묘 출토 석사자, 반듯하고 아름다운 해서체로 왕국과 왕비의 생을 기록한 758자의 묘지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정효공주 묘역이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팔각형의 뚜껑 가운데에 은상감한 용, 봉황, 역사상을 번갈아 수놓고 당초문과 구름무늬로 이은 은상감칠합, 두꺼비 형태의 손잡이를 둘러싸고 공작, 신수, 신조, 석사자 같은 동물을 배치하고 인동문, 새를 장식한 도금한 동경 등도 전시되고 있었다. 발해문화, 발해예술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졌다.
그동안 판독문으로만 알려진 묘지비를 실제로 보니 가슴이 한없이 뛰었다. 과연 판독문처럼 기록되어 있는지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확인하면서 탄식을 쏟아내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눈 부릅뜬 석사자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다.
또 그 주변에는 발해유적 곳곳에서 나온 각양각색의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공주들의 손때 묻은 집안을 물건들을 살피면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 속에 담긴 온갖 사연을 회상하고 나누듯이 한참이나 자리에 머물렀다. 자신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슬픔 뒤 간절함인 듯,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그들은 어느 샌가 필자 앞에 다가와 있었다.』(2)
2004~2005년 길림성(지린성吉林省) 화룡시(허룽시和龍市) 용해촌(룽하이촌龍海村)에 있는 발해시대 유적인 용두산(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부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지(墓誌)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발굴됐습니다.
또한 발해 무덤 최초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ㆍ새깃털을 꽂은 관)의 전통을 잇는 금제 관식(冠飾 왕과 왕비가 쓴 관의 장식물)도 발견됐습니다.
비문에 '황후'라는 호칭이 있어 발해국이 황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시(和龍市) 룽하이촌(龍海村)에 있는 발해시대 유적인 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부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지(墓誌)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발굴됐다.
또한 발해 무덤 최초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ㆍ새깃털을 꽂은 관)의 전통을 잇는 금제 관식(冠飾 왕과 왕비가 쓴 관의 장식물)도 발견됐다.
지린성서 발해 황후 묘지·고구려 양식 금제 관식 발굴… 중국 동북공정 반박 자료 주목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고고(考古)' 6월호는 2004~2005년 실시된 룽터우산 고분군 중 발해 고분 14기에 대한 발굴 성과를 실으면서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발굴을 담당한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와 옌볜조선족자치주 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은 '지린 허룽시 룽하이 발해 왕실묘장 발굴 간보'라는 제목의 보고를 통해 효의황후와 순목황후 묘지가 각각 대형 석실묘인 M12와 M3 묘에서 출토됐다고 밝혔다.
홍갈색 사암을 재료로 한 순목황후 묘지(너비 34.5㎝, 높이 55㎝, 두께 13㎝)에는 세로 9행에 걸쳐 총 141자를 새겼으며,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씨(泰氏)다"는 등의 내용이 비문에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묘지 실물 사진과 정확한 비문 내용은 아직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묘지에 '황후'라는 호칭을 썼다는 사실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반박하는 자료"라고 분석했다.
송 교수는"이번 보고는 간략한 형태라 자세한 내용은 정식 보고서가 나와야 알 것 같다"면서 "발굴한 지 5년이나 흐른 후에야 결과를 공개했다는 점이 의문스럽다"고 덧붙였다.
금제 관식 또한 동북공정의 반론 증거로서 주목된다. 부부합장묘로 추정되는 M13ㆍM14 묘 중 M14묘에서 출토된 금제 관식은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것으로, 물고기알모양무늬와 구름무늬, 인동당초무늬가 새겨져있다.
'고고'지에 실린 사진을 검토한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내부 문양이 발해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면서 "고구려 조우관의 전통이 발해까지 면면히 계승됐음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조우관은 고구려 관료들이 썼던 독특한 양식의 관으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라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이번 발굴은 중국 정부가 발해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룽터우산 고분군은 1980년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貞孝公主ㆍ757~792) 묘가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3)
1991년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발해 왕릉을 처음으로 발굴했다는 기사입니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대형(大型) 석실(石室)과 철제 화살촉과 동물의 머리모양의 도자기, 기왓장 및 인골(人骨) 등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묘실의 중간에 10여구의 성인과 어린이의 인골(人骨)이 발견되어 여러명이 합장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묘실(墓室)의 네 벽과 통도(通道)의 양측 벽에는 고도의 예술적 기법에 의한 화훼(꽃과 화초)와 인물(人物) 2점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묘실의 천정에도 화훼가 그려져 있습니다.
『중국(中國), 발해(渤海)國 왕릉 사상 처음 발굴
대형묘실에서 화려.정교한 벽화 발견 (홍콩=연합(聯合)) 金炳秀특파원 = 중국(中國)은 최근 東北部 黑龍江省 寧安縣에서 사상 처음으로 唐나라 시대의 <수수께끼 왕조(王朝)>인 발해(渤海)國의 왕릉을 발굴, 정교하고도 화려한 벽화와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지방민족 정권이 약 2백년간 계속된 발해(渤海)國> 역사의 연구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홍콩의 중국(中國)系신문인 文匯報가 11일 보도했다.
文匯報는 하얼빈發 新華社통신 보도를 인용, 중국(中國) 黑龍江省 고고(考古)학자들이 지난 9월부터 10월에 걸쳐 寧安縣 三陵鄕의 三星村의 한 솟아올라온 凸字 모양의 경작지에서 발해(渤海)國의 왕릉을 처음으로 발굴,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대형(大型) 석실(石室)과 철제 화살촉과 동물의 머리모양의 도자기, 기왓장 및 인골(人骨) 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文匯報에 따르면 이 고분의 묘실 상부에 백회(白灰)로 밀봉한 보호층이 있고 이 백회층과 땅 표면의 밭흙 사이에도 또하나의 단단히 다져진 강토층(土層)이 묘실(墓室)과 백회층을 보호하고 있다.
이 왕릉의 내부는 묘도(墓道)와 통도(通道) 및 묘실(墓室) 등 3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두가 현무암 벽돌로 짜여져 있고 그 위에 다시 백회(白灰)로 두텁게 발라져 있다.
묘실의 중간에 10여구의 성인과 어린이의 인골(人骨)이 발견되어 여러명이 합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묘실(墓室)의 네 벽과 통도(通道)의 양측 벽에는 고도의 예술적 기법에 의한 화훼(꽃과 화초)와 인물(人物) 2점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묘실의 천정에도 화훼가 그려져 있다.
특히 천정의 벽화는 석회석으로 여러겹으로 만들어진 천정 벽에 2중으로 연속적인 꽃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도안이 매우 정교하며 색감이 풍부하고도 아름답다고 文匯報는 전했다.
이 신문은 묘실의 4면 벽화에는 다수의 여성인물화가 그려져 있고 통로 동서 양측 벽화에는 무사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자태가 생동감이 넘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없는 <예술적 진품(珍品)>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또한 벽화의 인물화에서 의상과 용모에 <당풍(唐風)>이 담겨져 있다고 주장하고 발해국은 중국(中國) 唐代에 말갈족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地方民族政權으로 약 2백년간 존속했으나 역사적 기록이 적어 <수수께끼의 왕조(王朝)>로 불리어왔다고 말했다.
文匯報는 이 왕릉의 발굴과정에서 철 화살촉, 짐승의 머리모양의 도자기, 도자기 그릇, 문자가 새겨진 기와 등의 고대유물도 함께 발견됐다고 밝히고 黑龍江省 고고학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이번 <대형석실(石室) 벽화墓>의 발굴은 중국(中國) 고고학 사상 중대발견이며 이 일대의 왕릉(王陵)區를 계속 발굴해 나감으로써 발해국의 장례, 인종, 건축, 복식, 예절과 풍속 등에 관한 여러가지 진귀한 자료를 얻어 앞으로의 발해(渤海)史 연구에 획기적인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은 또한 20세기 초부터 중국(中國), 러시아, 일본(日本) 및 북한(北韓)의 고고학자들이 발해(渤海)國의 발상지를 찾으려고 노력했었으나 별로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黑龍江省 고고학자들은 자성(磁性) 등을 응용한 현대적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여 발해(渤海)國 왕릉(王陵)區의 정확한 위치와 왕릉(王陵)의 분포 상황을 대체로 규명해 낼 수 있었다고 文匯報는 밝혔다.
지금까지 출토된 발해국의 분묘로는 1949년에 출토된 정혜공주의 묘와 1980년 黑龍江省 화룡현에서 출토된 정효공주의 묘 뿐인데 이들 공주는 발해국의 제4대 王인 문왕(文王)의 딸들이다.
발해의 왕릉이 발굴된 것은 사상(史上) 처음있는 일인데 文匯報는 이 왕릉이 어느 王의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발해(渤海)는 고구려인이 말갈족을 피지배계급으로 삼아 건국, 중국(中國) 동북지방을 활동무대로 삼았던 우리 민족의 마지막 한반도 북방지역 국가였으나 중국(中國)측에서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고 중국(中國) 동북지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발해(渤海) 유적지의 관광을 금지하고 있다.』(4)
(4) 중국(中國), 渤海國 왕릉 사상 처음 발굴 (daum.net)1991. 12. 11.
<참고자료>
발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중국, 발해 유적지 2곳 '고고유적공원' 지정 (daum.net) 한국일보. 2013.12.30.
중국의 발해유적 발굴현장 첫 포착 (daum.net) 2004.09.25.
'북국 > 대진(발해,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대진국(발해) 고고학 (3)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16) | 2024.10.24 |
---|---|
3. 대진국(발해) 고고학 (1)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0) | 2024.05.29 |
2. 대진국(발해)의 강역 (2) 발해의 수도 (0) | 2020.06.11 |
1. 대진국(발해) (1)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 (1) | 2019.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