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

출처;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신동아 (donga.com)

입력 2007-09-14 12:00:00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신동아 (donga.com)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입력2007-09-14 12:00:00
 

환단고기를 전한 이유립 선생.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씨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기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실크로드 흥망사’란 부제가 붙은 이 ‘환단고기’는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년,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주)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놓은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위서(僞書)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다.

한글은 1443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한자(漢字)만 해도 갑골문에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고 알파벳도 북셈문자와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발전해왔다. 일본의 가나(假名)는 한자 초서 등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에는 가나 이전에 고대 문자가 있었고 그것이 가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조선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원시 한글’이라 할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한글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놀랍게도 환단고기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녹도문과 가림토 문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녹도문은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이고, 갑골문에 앞서 한자의 근원이 된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녹도문은 표의(表意)문자일 가능성이 높고, 환단고기는 그 모양을 그려놓지 못했으므로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세 번째 단군인 가륵(嘉勒) 2년, 가륵 단군이 삼랑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문자의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로,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환단고기는 원시 한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이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민은 모르는 아주 이상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삼척동자를 붙잡고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고주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과연 고주몽일까?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주몽이다’라고 밝혀놓은, 우리 민족이 펴낸 가장 오랜 사서는 ‘삼국사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라고 기록하고, 바로 다음에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주몽은 추모로도 불릴 수 있고 중해로도 불릴 수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원문 :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云鄒牟云衆解).

고구려 시조는 주몽인가, 추모인가

‘주몽’과 ‘추모’와 ‘중해’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은 중국어와 다르다. 신라시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위해 ‘이두’와 ‘향찰’를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고구려 말을 한자로 적었을 것인데, 어떤 이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적고, 어떤 이는 추모로, 또 어떤 이는 중해로 적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세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조 때인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8년이니,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때로부터 477년이 지나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또 하나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집안에는 고구려 당대인 서기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당대에 세워진, 삼국사기보다 731년 앞선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추모’로 기록된 것이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추모’로 밝히고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지금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바로 그 책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삼국사기는 조선 태조 3년인 서기 1394년 김거두란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새로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는 빠진 글자가 있어 완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중종 때인 1512년 이계복이 김거두의 삼국사기를 개판(改版)해서 새로 찍어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삼국사기다.

1512년에 인쇄된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사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고구려 당대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사실(史實)’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조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광개토태왕릉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인만큼 시조의 이름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 이름을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데, 현대에 나온 모든 사서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부르고 있다. TV 드라마까지 주몽으로 불러,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란 인식이 고착화된 상태다.

한글의 뿌리를 연구해야

추모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첫째, ‘고구려 시조 이름을 당대 이름에 가깝게 바로잡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대 우리 민족이 쓰던 말을 한자로 옮기다 보면 다르게 적힐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삼국사기에 ‘북부여 속담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모와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뜻하는 고구려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고구려 말 발음을 한자로 옮길 때 추모로 적을 수 있고 주몽, 중해로도 적을 수도 있다. 추모와 주몽, 중해가 발음이 비슷하듯 원시 한글을 뜻하는 ‘가림토’와 ‘가림다’도 발음이 흡사하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은 가림토와 발음이 비슷한 원시 한글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가 조선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훈민정음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史實)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렇다면 가림토와 가림다 문자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이 입과 목을 이용해 발음하는 것을 보고 수년 사이에 훈민정음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는 쉽게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학자들도 무엇인가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역사적인 창조를 할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한번쯤 환단고기의 진위부터 한글의 시원(始原)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집현전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제시된 가림토(가림다) 문자를 발굴해 그것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이 옳은지를 추적해보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치우 등장시킨 환단고기

사실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럼을 들고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는 치우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게 됐는가. 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1911년에 편찬된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년(조선 숙종 1년)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즉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100% 허구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단정짓고 아예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것도 단군에 앞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

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된다.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중국인을 가리켜 자칭, 타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한족은 진시황에 이어 한(漢)고조 유방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한나라가 등장하기 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화족(夏華族)’이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화족은 중국을 이룬 전설상의 인물인 3황5제 가운데 5제의 첫 번째 인물인 황제를 시조로 여긴다. 한민족 하면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듯, 하화족은 황제의 후손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5제 중 한 명인 우(禹)가 세웠다고 한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이름을 ‘추모’로 밝히고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중국인은 황제가 이끄는 황제족과 경쟁을 하다 황제족과 하나가 된 종족을 3황 가운데 마지막인 염제(신농)가 이끈 염제족으로 보고 있다. 염제가 이끄는 염제족을 황제족이 제압함으로써 거대한 황제족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거대한 황제족을 중국인들은 ‘염황족’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이들이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하화족’으로 부른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을 거론할 때 치우가 이끄는 치우족은 배제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사서는 황제(헌원)가 탁록이라는 지역에서 치우와 싸워 이김으로써 패권을 장악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탁록 전투에서 치우가 이끄는 종족이 황제가 이끄는 종족을 이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승패의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중국 사서와 환단고기 모두 황제족과 치우족이 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지금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치우가 황제, 염제와 더불어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95년, 중국인들은 치우와 황제가 역사적인 결전을 벌인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의 사당을 만들고 그 안에 황제와 염제, 치우를 모신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그리고 치우가 황제, 염제와 함께 중국 민족을 만들었다며 이들을 ‘중화3조(中華三祖)’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만일 치우가 중국인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우리는 중국인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한 ‘바보 같은’ 민족이 된다. 물론 환단고기도 쓰레기 같은 잡서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면…

그러나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는 ‘동이족’의 선조가 치우라는 주장은 점점 힘을 받고 있다. 환단고기가 없었으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치우를 우리 조상으로 내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환단고기가 등장한 후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 단군이 실존인물, 단군조선이 실재한 나라로 적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환단고기는 ‘환웅과 단군 시대에 관한 옛 기록’이라는 뜻인데, 이 책은 단군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대통령과 같은 ‘자리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밝혔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단군조선을 적시한 우리 교과서도 위서 시비에 빠질 수 있다. 환단고기의 위력은 비단 역사와 문화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계와 학계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림다 문자가 나오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소도경전본훈’편이 있는데, 여기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천부경은, 환단고기와 별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천부경의 등장으로 한국철학사와 한국종교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철학은 중국에서 생겨난 유학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시대에 이 땅에 전래된 불교는 한국화한 종교로 여겨져왔다. 우리 민족이 외래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화’했다는 것이 한국철학과 한국 종교의 큰 줄기였는데, 환단고기와 함께 천부경이 등장하자 천부경이야말로 외래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우리 조상이 만든 철학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양오행론과 다른 천부경적 세계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환단고기에 실린 또 하나의 경전인 참전계경은 유학이나 불교와 다른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또는 중국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음양오행론이다. 음양오행론은 다르게 발전해온 ‘음양론’과 ‘오행론’이 중국 전국시대에 합쳐짐으로써 생겨났다.

음양론은 전기의 플러스(+)와 같은 양(陽)과 마이너스(-)와 같은 음(陰)으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을 6개로 한정해 모아보면, 6개가 모두 양인 것에서부터 6개 모두가 음인 것까지 모두 64개가 만들어진다(2×2×2×2×2×2=64). 이러한 64괘 가운데 ‘반쪽짜리’ 4괘가 바로 태극기에 들어 있는 ‘건·곤·감·리’다.

주(周)나라 시절 중국인들은 자연변화를 64괘로 압축했다. 그리고 미래를 살피는 점을 치면서 64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뽑게 했는데, 이때 뽑아낸 괘를 보면서 거꾸로 미래 상황을 펼쳐 보였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한자로는 ‘역(易)’으로 표현하니, 주나라 때 만들어진 이 인식체계는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오행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에너지 원소를 수·화·목·금·토 다섯 가지로 본다. 이 다섯 가지 기운 가운데 물(수)과 불(화)처럼 충돌하는 관계도 있지만, 물(수)이 나무(목)를 잘 자라게 하듯 도와주는 관계도 있다. 물은 불을 꺼버리므로 물은 불과 상극관계이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잘 자라므로 물과 나무는 상생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상극이라고 해서 무조건 최악은 아니다. 물과 불이 ‘솥’이라는 매체로 분리돼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솥에 담겨 있고 솥 밑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다면, 불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해 탈 수 있고, 물은 설설 끓어 음식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솥으로 분리된 물과 불은 자기 성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음식을 익히는 새로움을 창출하니 이때의 물·불은 상극관계가 아니다.

천·지·인의 3수론

환단고기의 단군세기 등에 실려 있는 가림토 문자. 원시 한글일 것으로 추정된다.

오행론은 수화목금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이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됐다. 그 영향으로 500여 년에 걸친 내전(전국시대)을 종식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문(文)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만큼 음양오행론은 한·중·일의 공통된 사유체계로 이해돼왔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음양론이 음과 양 두 개의 수로 만물 변화를 설명한다면, 천부경적 사유체계는 천(天)·지(地)·인(人) 세 개의 수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론은 두 개로 설명을 하니 대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경적 사고는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 이론처럼, 제3의 방안을 제시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 주목할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됐다. 단군교는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떨어져 나갔다.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이르러서다.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환단고기의 천부경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위서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년,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이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고 한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역시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와 천부경을 민족철학으로 여겨 해석한 학자들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인데도 한국 지식인들은 환단고기의 실체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은 ‘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치우를 엠블럼으로 한 대형 깃발을 내세운 붉은악마 응원단.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지금 전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천부경을 실은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은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고 주장했다.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출판사를 통해 인쇄해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면 이유립은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서 출판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은수씨의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와 임승국씨가 1986년 5월 정신세계사에서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임씨는 이유립씨와 함게 국사찾기 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가 1982년 ‘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기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들이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다. 다급해진 기자는 환단고기를 출간한 국내 출판사를 하나씩 접촉하며 어떤 경위로 이 책을 내게 됐는지 알아봤다.

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임승국씨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외에도, 1987년 고려가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 제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은수씨가 주해해서 기린원이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민족문화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한뿌리출판사에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코리언북스출판사가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바로보인출판사가 문재현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편으로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해석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다급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서 시비가 있는 책인데….

조급함은 곧 불안감으로 증폭됐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기 때문이었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다’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反유교 反조선 기치 내건 개화기 일본

가지마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일본 신도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며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준 이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이다. 일본 신도를 연구하는 김 연구원은 가지마를 ‘의식 있는 일본의 재야사학자’로 정의했다. 김 연구원으로부터 일본 신도의 역사와 가지마 노보루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불교의 절과 신도의 신사(神社)가 함께 있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 퇴계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이 친(親)유교(성리학), 친(親)조선이었다면,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의 일본은 반(反)유교 반(反)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봉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줘야 했고, 메이지(明治)시절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모시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불교가 들어온 7세기부터 신사와 절을 공존, 융합시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이어왔다. 신사와 절이 함께 있고, 가정에는 신도의 제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제단인 ‘불단(佛壇)’이 함께 놓인 것이 바로 신불습합의 전통이다.

신도를 부흥하려 한 일본의 엘리트들은 불교도 봉건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불상과 불경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는 신도만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라 척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불교 탄압을 중단하고 신불습합을 인정하며 신도 부흥에 매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총리대신 밑에 전국의 신궁과 신사를 관리하는 ‘신기국(神機局)’을 뒀다. 신기국은 일본서기와 고서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일본을 한국보다 오래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로 바꾼 것이다. 신기국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도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만들게 했다.

“신국민과 만선사관을 위해 번역”

가지마 노보루가 1982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환단고기와 서문. 표지에는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러한 운동이 일기 전, 일본 신도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히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일본 국학 부흥을 부르짖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민(國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국민은 국가가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민중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비판 없는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든 헌법(평화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신도는 메이지 시대 이전처럼 자력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때 ‘신도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신도의 위기는 비판 없는 일본인의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민’이란 단어에는 ‘무비판’과 ‘무조건 수용’의 뉘앙스가 담겨 있으니 이제 일본인은 국민이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인민임은 부정할 수 없어 ‘신국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 가지마 노보루다. 다음은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배운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의 의견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를 무대로 한 역사 주체 가운데 방계에 해당한다. 일본은 동북아 역사 무대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중심이 되자는 것이 신국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영국에서 갈려나온 방계이지만 지금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중심이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동북아의 주무대에서 갈려 나온 방계이지만 지금부터는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중국에 문화적으로 편입돼 있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예 중국의 영토가 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으로 삼자는 ‘만선(滿鮮)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만주와 조선에 있는 형님이 잃어버린 정신을 일본에 살던 동생이 대신 세우겠다는 것이 만선사관과 신국민에 담긴 의지다. 가지마는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환단고기를 번역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하듯 일본이 한국을 대신한다”

이유립 선생이 타계한 후인 1987년에 출간된‘대배달민족사’(전5권).

신국민은 비판능력이 있어 나라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신국민은 메이지 시절의 엘리트가 조작한 일본 고대사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출간한 ‘신국민사’다.

신국민사는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와 재야 국학자들의 모임이 됐다. 가지마는 이 모임의 핵심이기에 ‘환단고기’ 서문에 ‘일본서기와 고서기는 모략위서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가지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봤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가지마의 생각이다.

‘鬼道 檀君敎’

가지마는 한·중·일 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다. 그 후 가지마는 역시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도 규정했다.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만선사관으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을 우리는 어떤 논리로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신동아 (donga.com)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입력2007-09-14 13:17:00
 

월간 ‘자유’를 창간해 국사 찾기 운동을 벌인 고(故) 박창암 장군.

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이유립씨가 쓴 고대사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1970년대의 월간 ‘자유’지.

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선우휘 주필이 국사 문제를 놓고 이유립씨와 대담한 기사를 실은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 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 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는 ‘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에 실린 계연수에 대한 기록. 그러나 이 책자에 실린 계연수 기록엔 틀린 부분이 있다.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곤(坤)’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 참조).

유·불·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남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세,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 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 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1979년 조병윤씨가 출판한 환단고기의 판권 부분. 조씨가 단단학회의 대표로 돼 있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씨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桓檀古記跋이라고 된 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글자는 이유립씨가 오자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本)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강화도 마니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단단학회의 커발한 개천각. 이유립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년,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단(丹)’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년 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 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년 4월18일).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 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 간판을 내걸었다.

가운데 환웅, 좌우에 치우와 단군을 모신 커발한 개천각. 제단 맨 오른쪽에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를, 맨 왼쪽엔 세종대왕을 그 오른쪽엔 광개토태왕을 모셨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다.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사(史)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元)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환단고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한중 국경선 부근에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가, 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이, 태천엔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다.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보현사가 있는 북한 묘향산에 ‘단군사’란 사당이 있다. 보현사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단군사를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길림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 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황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출처; 환단고기에 대한 소고 (breaknews.com)

환단고기에 대한 소고

환단고기가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이 책을 역사서로 받아드리는 노력을 하자.

이순복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4/11 [17:49] 
 
 
환단고기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한 동이족 최고의 역사서이다. 그런 역사서를 계연수가 편집한 후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그의 제자 이유립(李裕岦)이 하였다. 이유립은 스승 계연수의 명을 받고 이 책자를 1979년에 영인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라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로 구성되었으며 고대 동이족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져 있다.

삼성기(三聖記 : 상하권)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라 한다. 고조선의 역사 저자가 고구려인이 아니고 신라인이라 하니 그 책이 전해진 경로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건 저러건 이 책들은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 책들은 1421년 조선조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책에는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환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1363년(공민왕 12) 문정공 이암(李喦)이 전한 것으로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한 단군임금들의 역사서다. 1대 단군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하·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 까지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북부여기는 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고려 공민왕 때 사람 문정공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한 것으로 환국(桓國)· 신시시대· 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 발해· 고려의 대외 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 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천부경[天符經]은 태백산에 있는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묘향산에서 10년간 수도한 바 있는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 암벽에 새겨진 내용을 발견하여 이듬해 대종교에 전하였다고 한다.

기본적인 내용은 천 ·지 ·인이 하느님을 뜻하는 일(一)로 귀일(歸一) 또는 통일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주의 근본이요 만유에 비롯되는 수이니 하나보다 먼저 비롯됨은 없으며 그것을 분석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재이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통일이나 인류의 세계일가(世界一家) 건설도 천지 만유가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원시반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삼일신고 [三一神誥]는 단군이 한울·한얼·한울집·누리·참이치 등 다섯 가지를 삼천단부(三千團部)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단군왕검시절의 신지혁덕(神誌赫德)이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

단기고사 [檀奇古史]는 719년 대야발(大野勃)이 썼다고 전해지는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연대기이다.

발해의 시조 고왕(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무왕 1)에 썼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발해문자로 씌어졌는데 약 300년 뒤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1905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국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전하여 지고 있다. 구성은 서문, 전단군조선, 후단군조선, 기자조선으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실린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를 두고 조상님들의 빛나는 발자취를 우리의 정신문화로 승화하여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 역사서의 진위 논쟁으로 다시 암흑 속으로 묻히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남북분단의 아픔보다 더 먼저 역사의식의 단절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를 완전하게 복원하여 정신적으로 우월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역사가 단절된 민족의 내일이 없다. 민족의 영구 불멸과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상고사 복구가 우리민족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군왕검과 고조선은 우리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자 할 때 항상 먼저 떠올려 왔고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단일민족으로서의 존재근거가 되어왔다.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굳건한 신념은 수천 년 세월 동안 동이민족을 하나의 동포애로서 끈끈하게 묶어 주었다. 만일 우리들 중에 "단군이 국조냐? 실존인물이었냐?"고 따져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조상님이 진짜 우리 조상님인지 따지고 드는 참으로 불경한 질문이며 그렇게 따져 묻는 분도 단군의 자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를 보는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면 우리 역사를 왜곡시킨 일제의 어용학자들의 후학들이 고조선 건국사와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사 까지도 모두 신화라고 우기면서 우리 역사가 일본 역사보다도 늦은 3세기경에나 시작되었다고 하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용학자들이 짜놓은 상고사 해석은 일본이 패망해 물러간 후에도 지금까지 이 땅에 그대로 남아서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앞에서는 반만년 역사와 배달민족을 강조하면서도 돌아서면 단군신화를 말하는 조잡한 역사인식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처리하는 무지함을 씻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책임이 있는 역사학계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뿌리가 끊어진 기존의 문헌사료만을 고집하지 말고 실질적인 사적(史蹟)조사에 매진하여 끊어진 역사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아니 된다. 왜 우리의 역사가 겨우 2천여 년에 불과하단 말인가?

잃어버린 역사를 문헌을 통하여 조속히 복원하라! 중국의 역사서 만주지 등등에 고대사 복원의 단초를 제공할 상세한 문헌사료가 더러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 되고 있는 환단고기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아니 될 귀중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여 우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긍지로 갖고 살게 하자.
 
 

 

출처; 연내 ‘한단고기 국내외 6종 비교본’ 나온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09/10/07 [14:26]

연내 ‘한단고기 국내외 6종 비교본’ 나온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올바른 원문을 통하여 민족사학계에서 ‘한단고기’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도서출판 북캠프(대표 권태흥)에서 ‘정본 한단고기’(2005년)를 출간하여 화제가 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단단학회 소장본을 입수하여 영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외 6종의 한단고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시아역사문화원(회장 여운건)'의 정윤훈, 오재성 선생 두 분의 노력으로 ‘한단고기 국내외 6종 비교본’이 연내 출간될 예정으로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단단학회 소장본이 국내 공개되어 이를 기본으로 국내외 6종을 비교하므로써 앞으로 올바른 한단고기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 (도)북캠프 출간 단단학회본 '한단고기'     © 플러스코리아

 
아래는 출간예정인 ‘비교본’의 일부분으로 ‘숙명대본, 오형기본, 단단학회본, 1991년 임승국 번역본, 일본인 가지마 노부로 본, 1995년 칠리문고 기증본’의 6종을 비교한 것이다. 아래 보이는 원문내용이 ‘단단학회 소장본’이다.

▲ 출간예정인 한단고기 6종 비교본 샘플     © 플러스코리아


단단학회 소장본의 공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한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고구려국 본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庚寅)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데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쪽은 대수(南至帶水)에 이르고 동쪽은 큰 바다(東濱大海)에 이르기까지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숙명여대본’과 ‘단단학회본’은 ‘남지대수(南至帶水) 동빈대해(東濱大海)’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본은 ‘북지대수(北至帶水) 서빈대해(西濱大海)’로 되어있다.

▲ 한단고기 비교본 내용 '샘플'     ©플러스코리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 그 이유는 방향에 따라 고구려 초기의 강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시조단군 해모수’ 편을 보면 ‘浿水今潮河也(패수금조하야)’라 기록하여 당시의 패수가 하북성 조하(潮河)라 기록하고 있는데, 단단학회본에 따르면 ‘남지대수(南至帶水)’라 하였으니 대수는 하북성의 어느강(호타하, 청장하)으로 보여진다.

글자 두 자에 따라 고구려 강역이 바뀔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지도로 표시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핵심강역이 하북성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나타난다.
 

▲ 한단고기에 나오는 패수의 위치는 하북성 조하     © 플러스코리아

 
의도적인 글자변조가 아니길 기대하지만 의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래 일본인 '가지마 노부로'가 번역한 한단고기에는 ‘북지대수(北至帶水) 서빈대해(西濱大海)’로 해설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일본인 가지마 노부로가 번역한 한단고기     ©플러스코리아


어찌하였건 '아시아역사문화원'의 정윤훈, 오재성 선생 두 분의 노력으로 ‘한단고기 국내외 6종 비교본’이 연내 출간될 예정이라 하니, 올바른 원문을 통하여 민족사학계에서 ‘한단고기’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성공적인 출간을 플러스코리아가 기원한다.
[수정] '남빈대해(南濱大海)’를 '서빈대해(西濱大海)’로 수정합니다.  

 

 

출처; 한단고기, 과연 위서인가 진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편집부  | 기사입력 2006/09/19 [16:25]

한단고기, 과연 위서인가 진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한단고기>> 시리즈 2


《한단고기》는 대한민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견해로 치우친다. 일부 용어들이 고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많은 부분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후대의 위작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한단고기》와 일부 내용이 겹치는 《규원사화》는 양쪽 학계 모두 조선 숙종 때 저술된 진서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 학계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 않고,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의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대한민국 학계

기존의 전래된 내용을 바탕으로 창작되어진 위서로 판정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그 저술시기로는 구한말 ~ 일제 치하, 1949년, 1979년 부근 등의 이견이 있다. 고조선의 광대한 묘사나 환국과 배달국 등의 기록은 근거가 부족하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 내용 채택을 보류하고 있다. 

◆ 일본의 학계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吾鄕淸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극찬하고 우익 또한 환영하였으나, 이와는 별도로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문헌의 불명확함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또한, 일본의 고사고전(古史古伝)[4] - 실사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의 사서(일본어 위키백과) - 과 비슷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한단고기》는 진서이다 
 
진서라는 측의 주된 주장은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각 권마다 구성의 치밀함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삼국 시대 이후의 불교 사상이나 고려·조선 시대의 유교 사상과는 다른 한인 시대부터 독특한 "삼신사상(三神思想:한사상)"이라 하는 민족 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도교 사상(道敎思想)과도 거리가 멀어 신라 시대 최치원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 신채호 선생의 낭가사상(郎家思想) 등으로 표현되는 고유의 전통사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삼신사상은 오히려 불교 사상이나 유교 사상보다 훨씬 원초적인 인간존중의 사상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구체적 방법론처럼 제시되고 있다.

기존 학계가 밝혀내지 못한 고조선의 위치, 정부 형태, 정치 제도, 풍습 등과 부여의 건국과 역사, 고주몽의 계보, 발해의 건국 비화 등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화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환인, 환웅, 단군 등이 각각 한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군장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각 시대에 대한 역대 계보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엽에 발굴된 중국 선사 시대의 유적들이 환국과 배달국과 유사한 시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한단고기》는 위서이다 
 
《한단고기》가 위서(僞書)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도학, 〈在野史書 解題《桓檀古記》〉,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년, 경남대학교
•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년 5월 15일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년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년

이들 위서론의 논점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 용어사용의 부적절
사백력(시베리아), 흑수(흑룡강), 파나류산(파미르고원), 수밀이(수메르), 우루, 지백특(티베트), 남녀평권, 부권, 상춘, 영고탑 등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 인용서적의 불분명
•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
• 후대의 글 인용 등 내용상의 모순

부여조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1920년대 이후로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는 단군조선 47대 임금의 명칭은 유사하나, 그 연대, 치세기간, 기록된 내용이 전혀 다르다.

1949년 ~ 1959년에 일반에 알려진 《단기고사》와 고조선 47대 단군의 재위연수와 각 시대의 여러 부분의 내용이 일치하며, 구한말 이후에 지어진 글이 각자의 본문 내용에 맞추어 변경, 인용된 듯한 부분이 있어, 《환단고기》가 《단기고사》를 토대로 씌여진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술된 2천 년 간 인구 1억 8천만명에 가까운 인구를 유지했을 고조선이 남긴 유적(거주지나 무덤)과,《환단고기》의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의 유적이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책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한단고기》를 어떻게 검증하여야 할까  
 
한단고기가 우리 역사에 적용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위서론에서 제기된 모든 의문점에 대해 타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진위여부를 떠나 내용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1) 1979년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고, 2) 《규원사화》 등의 기타 고대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고 《한단고기》에만 기록된 '고유한' 내용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강단 재야 정부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06/09/16 [15:11]

식민반도사의 가짜 역사 덮기위한 '한단고기 위서론'-(1):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 '환단고기는 진서다'- (1)

한단고기의 23가지 실증사례 (1)


사대식민사학자와 반도식민사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대해 전면적인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데, 반해 의식 있는 재야사학자들과 정통역사가들은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며 "환단고기가 위서라한다면 다음 23가지 실증 사례에 답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 [정리]<환단고기가 위서인 이유>. https://m.blog.naver.com/dbswlgus2367/220548274366     ©편집부

 

한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주장한다.

(위 블로그의 게시물 게재 위치:  https://m.blog.naver.com/dbswlgus2367/220548274366 )

 

"<환단고기>란, '계연수'라는 존재불명 인물이 닦은 초고를 이유립이라는 사람이 계승에 마무리했다고 주장하는 '역사' 책입니다.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군왕검이라는 사람 이전에 살던 선대 나라와 선대 단군 왕조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다만, 내용의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 적도 없으며 논증도 허술해 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합니다. 철저히 객관 위주의 이성을 갖고 계신다면 환단고기 내용이 얼마나 우주를 초월하는 뭔가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환단고기 전개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환단고기의 논리는 대부분 간파 당했으며 그 외에도 환단고기의 상당 부분이 잘못됐음을 증명할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굵직한 내용 위주)아주 짧게 요약해보자면;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걸쳐 환국이라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한민족의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지도자(혹은 백성)들은 매우 위대해 신적인 능력까지 있었는데 그래서 한 명 당 적어도 3천 살 이상을 살 수 있어 7명의 환국 지도자들이 63182년을 다스렸다고 합니다1. (조상님들은 엘프와 비슷한 무언가셨던 겁니다) 환국의 넓이는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라 기록합니다. 그런데 아시아의 넓이가 동서 24,699리 남북 22,127리로 환다고기대로라면 위와 아래로는 남극과 북극에 닿는 길이입니다..."생략/

 

충격적이게도 1980년대 말,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한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필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1982년 쇼와(昭和 57년)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주)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이 일본인이 펴낸 한단고기를 국내 유수의 사학자들에 의해 번역을 하게 되고,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책팔이 장사치로 나선 대부분의 재야사학자들을 보면서,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이전 이유립 선생이 월간 '자유'지에 의해 발표된 한단고기는 개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는데,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한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단고기는 일본인과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이 엉터리로 만들어 놨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한단고기는 조선후기 학자 리기선생의 지도로 1911년 계연수선생에 의해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때 조선독립군 부대에서 한단고기를 편찬하는데 군자금을 댔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대조선역사의 진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첫째 : 한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 동영상 참고

▲오성취루현상     © 플러스코리아


‘한단고기’는 구한말 리기선생과 계연수선생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환단고기’와 ‘단기고사’ 등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했다. ‘5성 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한 것이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 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 ‘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된 것이다.

▲정효공주묘 비문     © 플러스코리아 

 

셋째 : 고구려 유장 리정기장군이 중공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 :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리정기 장군의 세력 확장도     © 플러스코리아

 다섯째 :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평양의 단군릉     © 플러스코리아


여섯째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연개소문     © 플러스코리아

 

일곱째 :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 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 :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 :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 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기사     © 플러스코리아
 
열 번째 :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 원칙에 입각하여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반도식민사학자들과 이를 같이하는 유사학자와 사이비사학자들 중 현재까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식민반도사의 가짜 역사 덮기위한 '한단고기 위서론'- (2):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한단고기의 23가지 실증사례 (2)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는 은나라의 귀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 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비파형 동검과 출토 지역     © 플러스코리아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 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황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러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림토 문자     ©플러스코리아



 열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발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택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 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 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요하)’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지리지와 삼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나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낙랄왕 최숭의 이주경로     © 플러스코리아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 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BC 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 솟토 소토 소도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 위 글의 출처는 [신명나는 한국사(고준환 著 p.61~69)]이며, 일부 학설은 [아!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이다.)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한글과 한자문화 (hanja-edu.com)

기획논단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2006년 3월 (통권 제80호)
安昶範
濟州大學校 名譽敎授(韓國哲學 專攻) / 本聯合會 指導委員


Ⅰ. 問題의 提起
『桓檀古記』는 桂延壽 선생이 서기 1911년(光武 15년) 5월 묘향산 檀窟庵(단군굴 암자)에서 <三聖記>ㆍ<檀君世紀>ㆍ<北夫餘紀>ㆍ<太白逸史>를 모아 하나로 묶은 책이다. 그 요점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우리 民族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桓檀古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민족의 이상을 높이고, 민족의 기강을 강하게 하며, 민족의식이 다시 되살아날 것 같은 굉장한 책이다.
그러나 이들 문제들은 우리 民族의 원초적 종교를 모르고, 漢字를 경솔히 國譯하거나, 古典 섭렵이 많다하더라도 생각이 깊지 않는 사람은 理解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難題들이다.
이를 정리하면, 서기 2005년 현재, ① 9202년 전부터 3301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天山을 중심으로 12연방의 桓國과 7세 桓仁이 있었다는 기록, ② 5901년 전에 배달국의 태조인 환웅천황이 開天立敎하고 以三神設敎하였다는 기록, ③ 기독교 측에서 신화적인 가상 인물로 취급하는 古朝鮮의 태조 檀君王儉이 실존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적인 존재인가 하는 문제, ④ 中國의 儒學思想으로 배워온 五行思想이 『桓檀古記』에 나오는데 중국사상이냐 아니면 한국사상이냐 하는 문제, ⑤ 寧古塔이 <檀君世紀>와 <北夫餘紀>에 나오는데, 일부 학자는 청나라 때의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문제, ⑥ 立法ㆍ司法ㆍ行政의 삼권분립 사상이 <檀奇古史>에 나오는데, 그것이 서구사상이냐 아니면 한국사상이냐 하는 문제 등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이들 문제를 본 논문의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 밖의 天符經ㆍ三一神誥ㆍ參佺戒經의 경전, 삼륜ㆍ오륜ㆍ오계ㆍ팔조ㆍ구서의 계율과 덕목, 鹿書ㆍ花書ㆍ雨書ㆍ龍書ㆍ가림토(神篆) 등의 문자, 上下無等ㆍ男女平權 등의 민주적인 표현과 순수한 역사문제는(고준환 박사 지음, 「하나되는 한국사」, <한국교육진흥재단, 2002, 7, 개정판, 2쇄>의 머리말에서 실증적 역사문제를 자세히 밝히고 있음) 위의 문제가 풀리면 자연히 풀릴 것이므로 본 논문의 연구대상에서 제외한다.
이상의 이유로 『桓檀古記』 僞書論者인 젊은 교수들은 『桓檀古記』?『檀奇古史』ㆍ『揆園史話』를 조작 또는 위조라고 주장한다(단군학회, 「단군학연구」 제2호, 2000. 4. pp.33-50. 조인성의 논문). 반면에 민족종교 측과 재야의 원로 사학자들은 『桓檀古記』를 민족의 상고사를 밝히는 珍書라고 평한다. 그러한 것이 在野 史學派와 講壇 史學派, 민족종교 진영과 기독교 측 사이에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부터 『桓檀古記』 내용 중 僞書論者들이 주장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해설하고, 典據와 證據를 제시한다. 아울러 그 근본원인이 僞書論者들의 오류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桓檀古記의 問題點과 歷史的 事實의 一致
1. 桓國은 實在했었다.
1) 문제점 : 『桓檀古記』를 보면,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중앙아시아의 天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桓國이 있었고, 이를 3301년 동안 무위이화한 7세 환인이 있었다. 이에 대한 논증이다.
2) 해설 : 換局은 7세 桓因에 의해 무위이화한 神敎國家로서 神政一致 국가였다. 神政一致란 神敎(신선도의 고전적 표현)의 원리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영역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桓國의 영토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이 아니다. 또한 桓國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지에 의한 분류의 표현이다.
7세 桓因은 불교의 前七佛과 같고, 그 흔적이 신라의 고도 鷄林(지금의 경주)에 前七佛의 절터가 있다. 일본의 『日本書紀』 및 『古事記』의 건국신화에도 7세의 神이 있다. 중앙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나오는 天山과 불교의 수미산이 구조상 동일하며, 신선도와 불교를 연구해 보면, 그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그에 대해서는 졸저 「환웅천황과 한국고유사상의 탄생」,(제주대학교 출판부, 2001) 제2부, 제1편, 제9장 “불교와 신선도의 동일성”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桓檀古記』를 조작이다 위조다 하는 僞書論이 제1차로 부정되고, 珍書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3) 典據 : 주지하는 바와 같이 桓國 12연방 가운데 수밀이국(Sumer)과 우루국(Ur)이 서양사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중국인의 사서인 『晉書』 <裨離國等十國傳>에 나온다. 예컨대.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5만여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肅愼은 古朝鮮의 別稱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晉書』는 당 태종이 房玄齡과 李延壽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東晋과 西晉의 史書로서 25史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中國正史다. 이러한 책에 『桓檀古記』에서 말하는 12연방의 이름이 실려 있고, 疆域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桓國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僞書論 제2차로 부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우리 민족의 역사는 9200여년으로 올라간다. 연구의 대상인 것이다.
4) 實在的 證據 :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Novosibirok)山 및 아바칸(abakan)山脈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桓國의 중심지이다. 또한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전적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僞書論 제3차로 부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桓雄天皇의 開通天文과 宗敎創設
1) 문제점 : <三聖記全> 하편에 안파견 환인이 홍익인간을 위해 환웅에게 “開天立敎하고 在世理化하라”하고,? 환웅이 “天經을 演하고 神誥를 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桓雄이 以三神設敎하고 佺戒로서 勸善懲惡하는 법을 세웠다”고 하였다. 문제는 開天立敎와 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를 오역하여 『桓檀古記』를 위서라고 주장하고 우리 민족은 종교도 철학도 없는 민족이 된다. 중요한 문제이다.

 

2) 해설 : 첫째, 開天立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세우다”로 해석한다. 그와 같이 말이 안 되는 해석을 한다. 開天의 開자는 “(문이)열리다. (막히고 닫친 것, 아주 크거나 미세한 것,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드러내다. 관통하다. 개통하다. 大覺하다. 大通하다. (꽃이)피다”의 뜻이다. 天자는 하늘ㆍ땅ㆍ사람의 會意文字로서 “천체ㆍ천체의 운행원리ㆍ자연의 이법ㆍ천도ㆍ천리ㆍ天文ㆍ天門, 그 밖의 모든 것”를 의미한다. 곧 開天은 “天門이 열리다. 천문을 개통하다. 개통천문하다. 天文을 대통하다(관통하다). 천체의 구조와 운행원리를 깨치다. 인체의 돌고 도는 이치를 깨치다. 자연의 이법을 깨치다. 天道를 대각하다”는 등등의 뜻이다. 이와 같이 개천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立자는 “서다. 세우다. 일어서다”의 뜻이다. 敎자는 “가르치다. 본받다. 교지. 종교”의 뜻이다. 곧 개천입교는 桓雄天皇께서 “천문을 개통하여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그 기념행사가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이다. 뒤에 상설한다.

 

둘째, 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보통 “삼신으로 가르침을 설치하다”로 해석한다. 이와 같이 의미도 통하지 않는 해석을 한다. <三神五帝本紀>에 의하면 三神은 天一ㆍ地一ㆍ人一을 의미하며, 一은 천ㆍ지ㆍ인의 작용을 의미한다. 만물은 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 三神을 庶物의 원의라 한다. 設敎의 設자는 “만들다, 창설하다. 설치하다. (물건을)진설하다”의 뜻이다. 곧 以三神設敎는 “天一ㆍ地一ㆍ人一의 삼신으로 종교를 만들다”는 뜻이다. 天一ㆍ地一ㆍ人一의 <一>은 작용으로써 <一>을 종교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天一ㆍ地一ㆍ人一은 氣ㆍ心ㆍ身 내지 命ㆍ性ㆍ精이 되고, 거기에서 道敎ㆍ佛敎ㆍ儒敎가 된다. 『丹書口訣』에도 “天ㆍ地ㆍ人을 三才라 하고, 道ㆍ佛ㆍ儒를 三敎라 하니, 三才에서 삼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창설한 종교가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天敎 곧 신선도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본원적 固有宗敎이며, 원천적 根源思想이다. 종교성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拙著를 보아주기 바란다.

 

셋째, 文字도, 글도, 종이도 없는 太古時代에 어떻게 종교를 창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곧 經典과 戒律을 어떻게 강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鹿書, 자부에 雨書, 치우에 花書, 복희에 龍書, 단군에 神篆 등 문자가 있었다 하고, <三一神誥 봉장기>에 임금(桓雄天皇)이 <三一神誥>를 가르치시니(誕訓神誥) 高矢는 동해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오고, 神誌는 돌에 경전을 새겨서 전하였다. 또한 박달나무를 다듬어 殷文으로 써서 읽었다고도 하였다. 이를 보면, 돌과 나무에 경전과 계율을 새겨서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탄생이래 처음 있는 일인 것이다.

 

넷째, 桓雄天皇이 언제ㆍ어디서 종교를 창설했느냐 하는 문제다. <三聖記全>하편에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弘益人間 在世理化 하였다고 하였다. <檀君世紀>에는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太白山(白頭山) 神市 檀木 아래에 이르러 天神祭를 올리고 국인 九桓의 추대를 받아 朝鮮國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이 檀紀 4339년이다. 그러므로 桓雄天皇이 백두산 신시에서 종교를 창설한 때는 지금부터 5902년(1565+4339-2=5902) 전, 음력 10월 3일이다. 이 날이 開天節이다. 그러므로 開天節은 桓雄天皇의 開通天門과 宗敎創設, 그리고 檀君王儉의 朝鮮國 건국 기념행사인 것이다. 뒤에 상설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桓雄天皇이 지금부터 5902년 전 10월 3일에 백두산 신시에서 天門을 開通하시고,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종교를 창설하여 經典과 戒律을 강론하니, 신하들이 돌과 나무에 새겨서 전하고, 3000단부가 모이니, 弘益人間 理化世界 하였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때는 세계 인류가 원시의 迷夢에서 깨기 전이다. 일반적으로 문자도 글도 발달하기 전이다. 그러나 桓雄天皇이 天符經ㆍ三一神誥ㆍ參佺戒經의 경전과 三倫ㆍ九誓의 戒律을 강론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것이 아닌가? 그것이 弘益人間 理化世界이며 선천개벽이 아닌가? 그래서 수밀이국은 古朝鮮(배달국)을 하느님 나라라 동경하고, 中國에서는 東方禮儀之國 또는 君子之國이라 칭했던 것이다.
人類史에 유래 없는 대변혁이며 憧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滿洲와 韓半島를 중심으로 세계 각 처에 고인돌(한국어로서 “고인 돌멩이”이다)이 생기고, 샤마니즘(한국어로서 “辰韓ㆍ馬韓ㆍ弁韓의 삼한사상”의 변음이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후대에 이르면서 古朝鮮에서는 天神敎, 扶餘에서는 代天敎, 高句麗에서는 敬天敎, 新羅에서는 崇天敎, 渤海에서는 眞倧敎, 遼와 金에서는 拜天敎, 滿洲에서 主神敎, 高麗에서는 王儉敎, 現在에는 大倧敎라 전한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4차로 부정되고, 진서론의 반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典據 : 첫째, 『天道敎創建史』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敎主 崔時亨 先生이 “우리 도의 대운은 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無極之運이며, 天皇氏는 先天開闢의 始祖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義菴 孫秉熙 선생도 “우리 대선생(崔濟愚 선생)께서 비로소 無極大道와 大德의 근본원리와 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 초의 天皇氏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즉, 崔濟愚ㆍ崔時亨ㆍ孫秉熙 선생은 선천시대에 개벽의 시조인 天皇이 있었고, 그 天皇에 의해 성립된 고유종교가 있었으며, 그 종교를 계승한 것이 東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5차로 부정된다.

 

둘째, 『周易』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4시의 운행이 어김없는 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써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 하였고, 『東文選』에도 “신비한 법도로써 宗敎를 창설하니 太平이 가득하다”고 하여 『周易』과 『東文選』이 太古時代에 孔子나 釋迦 탄생 이전에 대성인이 있었고, 그 聖人이 천도에 의해서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6차로 부정된다.

 

셋째,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37년 조의 <崔致遠鸞郞碑序>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道ㆍ佛ㆍ儒 일체의 玄妙之道인 풍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곧, 만인이 인정하는 『三國史記』가 우리 나라에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7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4) 考古學的 實證 : ① 桓雄天皇이 처음 도읍한 곳은 白頭山(太白山) 神市였다. 그런데 홍콩의 星島日報는 중국관영 新華通信을 인용하여 백두산에서 40기의 고대제단 유적과 함께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考古學界는 새로운 古代文化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白頭山이 신선도의 발상지임을 실증하고, 桓雄天皇의 宗敎創設이 白頭山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8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② <神市歷代記>에 배달국의 도읍지를 神市에서 靑丘로 옮겼다고 했다. 靑丘는 지금의 만주 요령이다. 그런데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거기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塑造神像과 靑銅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지금부터 5500년 전으로 나왔다. 이것은 배달국의 존재와 고유종교의 실재를 考古學的으로 실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9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③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印度風이 아니라 韓國風이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인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10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④ 그밖에 宗敎的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檀君陵에서 신선사상을 상징하는 금관조각이 발견되었고, 高句麗ㆍ新羅ㆍ百濟ㆍ伽倻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한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사찰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신선도의 실재를 증명한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11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2)한글과 한자문화 (hanja-edu.com)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2)
2006년 5월 (통권 제82호)
安 昶 範
濟州大學校 名譽敎授(韓國哲學 專攻) / 本聯合會 指導委員


3. 桓雄天皇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이시다.
『神市歷代記』에 桓雄天皇을 居發桓이라 하였다. 居發桓은 天地人 일체에 대한 호칭으로서 부처님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 宗敎 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桓雄天皇은 天地人 일체의 천문을 관통하시어 종교를 창설한 大聖人이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天地人 일체를 대통한 부처님이시다.

 

둘째, 桓雄天皇을 字義로 해석하면, “桓雄”은 밝아범을 의미한다. 밝아범은 이를 옛말로 표현하면 곧 “박가범”이다.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 薄伽梵(박가범)이다. 박가범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과 아미타불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桓雄天皇의 다른 이름이 居發桓(거발환)인데, 거발환은 “빛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으로 부처님을 의미한다. 아미타의 다른 이름이 無量光佛인데, 無量光佛은 “한없는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환웅천황ㆍ아미타불은 모두 박가범 부처님이며, 빛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부처님으로서 동일한 인물이다.
『高麗史』 世家 제24대 元宗 12년에 4월 8일의 행사는 본래 國俗으로서 觀燈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음력 4월 8일의 부처님 誕辰日은 환웅천황 탄신일 기념행사이며, 아미타불 탄신 기념행사이다.
곧 환웅천황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인 것이다. 고려 중엽에 仙佛合作되면서 환웅천황 탄신일이 불교화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출판 예정인 『天地人思想과 韓國固有思想의 誕生』을 보아주기 바란다.
그러면 釋迦佛의 탄신일은 언제인가? 성인의 탄생일은 특이하여 干支가 모두 같다고 한다. 그런데 『長阿含經』 <遊行經>에 석가모니의 탄신일ㆍ출가일ㆍ成道日ㆍ涅槃日(열반일)이 모두 2월 8일이라 하였다. 음력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신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의 탄신일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4월 8일의 존경대상이 환웅천황임을 확연히 알게 된다.

 

셋째,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시며 숭배의 대상이시다. 死後에는 국토를 수호하는 호국신 내지 산신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산악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그 유상이 일본의 北九州 英彦山 神宮에 안치돼 있다. 그것은 환웅천황이 부처님이었기 때문에 모신 것이다.

 

넷째, 세계일보 1992년 2월 22일 2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지리학회가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를 촬영한 결과, 세계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釋迦氏譜』에 天地(세계)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백두산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웅천황은 백두산에서 천문을 대통한 아미타불 부처님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환웅천황이 부처님이며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웅천황을 무조건 신화적 가상 인물로 취급하거나,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매도함은 實證을 무시하는 모순행위다. 사실을 사실대로 평가하는 것이 학자의 윤리이다.


4. 開天節은 桓雄天皇의 開通天門 記念行事다.

開天節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天은 하늘ㆍ땅ㆍ사람 등 만물의 일체를 의미하는 글자로서 開天이란 막히고 닫히거나, 너무나 커서 까마득하거나, 너무나 작고 미세하여 肉眼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예컨대,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 등 천문형상의 구조와 법칙, 人體系의 조직과 그 기능, 그리고 사물의 성격과 기능 등을 파악하여 그 理法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인체에 天門(혼이 들고나는 곳)이 있고, 하늘에도 천문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인체의 천문과 하늘의 천문을 열고 들어가면, 慧眼이 열리고, 대각ㆍ대통하여 천문현상과 인체의 五臟六腑를 두 눈으로 보듯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환웅천황이 설한 『三一神誥』에 “신이 勅敎(칙교)로서 使者에게 시켜 빛의 세계(日世界)를 나누니 700세계라(예컨대, 빛의 세계가 은하계라면, 은하계에 700개의 태양계가 있다는 뜻이다), 너희 땅은 큰 것 같으나 하나의 타원 세계(一丸世界)라”하였다. 『周易』風地觀에도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觀하니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어김없는지라, 성인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환웅천황께서 천체의 일부와 그 理法을 보인 것이다. 일월화수목금토의 7회제신지역(七回祭神之曆)와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현재와 약간 다르다) 하는 曆法, 天文曆法과 寒暑紀年, 그리고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모두 환웅천황과 삼신일체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기념행사가 개통천문 기념행사이며, 요약해서 開天節이다.
그러나 환웅천황이 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빛의 세계(日世界)와 타원형지구(丸形世界)까지 관찰할 수 있느냐 하고 <三一神誥>를 조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민족비전>에 尸解法이 있다. 神仙이 되면,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어 하늘을 자유로 날듯이 영혼이 육신을 떠나 우주공간과 만리 밖을 자유로 드나들 수 있으며, 천문현상을 망원경으로 보듯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해법의 일부이다. 이를 이해하면 <三一神誥>와 환웅천황의 개천절을 이해할 것이며, 開天節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광이며 명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와 같이 위대한 환웅천황과 천도인 개천절이 어째서 지금까지 신화 또는 미신으로 취급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문제는 삼국이 불교ㆍ유교ㆍ도교 등 남의 나라의 종교를 수입한 이후 민족의식이 분열되고 해이되어 大學者와 聖人이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近世朝鮮이 明나라의 朱子學을 國是로 정하면서 정치ㆍ종교ㆍ교육이 중국화되고, 환웅천황과 개천절을 부정하고 미신으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桓檀古記』를 부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쉽게 朱子學과 開天思想을 비교 비판한다.
주자학이 인본주의 사상이라면, 개천사상은 天地人일체 사상으로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을 모두 포용한다. 주자학이 현실주의라면, 개천사상은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모두 포용하는 이상주의ㆍ현실주의ㆍ중용주의 일체사상이다. 주자학이 실증주의라면 개천사상은 天文主義다.

孔子를 1000년 앞을 내다보는 大聖人이라면, 환웅천황은 우주 전체를 내다보는 아미타불이시다. 따라서 孔子가 아무리 훌륭한 大聖人이라 하더라도 아미타불인 환웅천황을 이해할 수 없고, 현실주의가 이상주의를 이해할 수 없으며, 실증주의가 우주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자학이 우리 나라의 사회와 교육을 지배해왔다. 예컨대, 평범한 俗人이 산에서 修道한 道人을 이해하지 못하고 홀대하는 격이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우리 민족의 환웅천황과 개천절을 미신으로 멸시하여 역사에서 누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태고사와 고유종교가 말살된 것이다.


5. 檀君王儉은 歷史的 實存人物이었다.

『檀君世紀』와 『神檀民史』 등 여러 책을 종합해 보면, 단군왕검은 父王의 尊號가 檀雄 곧 居弗檀桓雄이시고, 母后는 熊氏 王女인데, 辛卯年(B.C. 2370) 5월 2일 寅時에 神市 檀木下에서 태어났다. 非西岬(비서갑) 河伯의 딸을 皇后로 맞아 슬하에 扶婁(부루)ㆍ扶蘇ㆍ扶虞ㆍ扶餘 등 四男을 두었다. 庚子 단기 94년(B.C. 2239) 3월 15일, 蓬亭에서 돌아가시고, 帝位에 있은 지 93년이며, 壽는 130세였다.
교외의 10리 지점에 장사지냈다. 평안도 강동현 대박산에 단군왕검의 단군릉이 있다. 오늘날 韓氏ㆍ鮮于氏ㆍ奇氏가 단군왕검의 직계손이다. 단군조선은 단군왕검이 戊辰年(개천 1565. B.C. 2333)에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47세를 전하니 역년이 2096년이다.

이와 같이 檀君王儉은 父母妻子와 생년월일시와 돌아가신 연월일과 무덤이 있다. 그밖에 考古學的 實證이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존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僞書論者들이 단군왕검을 신화적 존재라고 무시한다. 특히 기독교가 檀君像을 파괴하고 그 실재를 무시한다. 그 底意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6. 五行思想은 中國思想이라 하더라도 원래 韓國思想이다.

『桓檀古記』에 五行, 五行六正, 五行治水法 등 木火土金水의 五行思想이 자주 나오는데, 오행사상을 중국사상으로 본다. 그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한다.
天一ㆍ地一ㆍ人一의 「一」을 循環論의 입장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태양계, 地一은 지구계, 人一은 인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번 公轉하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4季가 생기고, 4계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木, 여름은 火, 가을은 金, 겨울은 水에 해당한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4계는 지구의 공전에 의해 생김으로 지구인 土가 4계의 중앙에 위치하여 木ㆍ火ㆍ土ㆍ金ㆍ水의 5行이 된다. 또한 5행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대입하면, 5행은 5장과 5지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한다.
그래서 『蘇塗經典本訓』에 太白眞敎는 天符에 근원하여 地轉에 합하고 人事에서 모두 끝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五行思想은 중국 儒敎思想이라 하더라도 삼신일체 사상의 표현으로서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7. 三權分立 思想은 西歐思想이라 하더라도 원래 韓國思想이다.

1) 문제점 : 『檀君世紀』 제13세 단제 흘달 조를 보면,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력분립을 말하는 것이다. 『檀奇古史』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前檀朝 제13세 단제 흘달 16년 조와 後檀朝 제7세 단제 등을 2년 조에 국가권력을 입법ㆍ사법ㆍ행정으로 3분하여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僞書論者들은 『桓檀古記』와 『檀奇古史』를 僞書라고 주장한다.
2) 解說 : 앞에서 天一ㆍ人一ㆍ地一의 삼신일체 사상에서 도ㆍ불ㆍ유 삼교일체의 종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이를 민본적인 의미로 바꾸면, 천인지의 일체는 상중하의 일체, 대중소의 일체, 곧 인간평등, 남녀평등, 빈부일체, 만민일체, 생명일체가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天一은 조화작용, 地一은 교화작용, 人一은 치화작용을 의미한다. 一의 작용을 정치적 법률적인 용어로 바꾸면, 조화는 입법, 교화는 사법, 치화는 행정의 의미를 지닌다. 곧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분립 합의제는 天一ㆍ地一ㆍ人一 삼신일체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서구사상이 되기 이전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 고대사회는 민본주의의 왕도정치였던 것이다.

3) 實證 : 『檀君世紀』 15세 단군 대음 조에 養雲ㆍ須密雨(수밀이) 두 나라 사람이 단군조선에 와서 방물을 바쳤다 하고, 27세 단군 두밀 조에도 수밀이국ㆍ양운국ㆍ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나라는 환국 12국 중의 하나로서 단군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S.N. 크레머는 “최초의 의회제도 ; The First Bicameral Congress”라는 논문에서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경에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분립 사상은 서구사상이 되기 이전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8. 寧古塔은 地名이 아니라 “寧安의 옛 塔”이란 뜻이다.

1) 문제점 : 李巖의 『檀君世紀』 16세 단군 위나 조에 “寧古塔에 모여 삼신상제에 환인ㆍ환웅ㆍ치우(蚩尤)ㆍ단군왕검을 모시어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무리와 더불어 오일 대연을 베풀었다”하고, 20세 고홀 조에는 “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范樟(범장)의 『北夫餘紀』와 李陌(이백)의 『太白逸史』에도 寧古塔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 보면, 寧古塔은 후세에 이르러 지명이 되었으나 檀君朝鮮 시대에는 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桓檀古記』 僞書論者들은 寧古塔을 중국 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 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桓檀古記』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僞作이라 주장한다. 그 典據를 보면, 『滿洲源流考』를 들고 있다.

2) 解說 :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寧古塔에 대한 기록 末尾를 보면, 滿洲語로 여섯을 寧姑라 하고, 자리는 特으로서 영고탑은 와전된 것이며, 지명이 아니라고 했다. 곧 『滿洲源流考』가 寧姑特을 寧古塔이라고 와전한 것이다.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영고탑을 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古城이라 하였다. 『星湖僿說』에는 영고탑은 烏剌(오랄)ㆍ艾滸(애호)를 합하여 東三城의 하나라 하고, 城이 높고 해자(도랑)가 깊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영안의 옛 성에 있었던 탑인 것이다. 그것이 후에 地名이 된 것이다. 예컨대, 光化門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景福宮의 남문이며, 鐘閣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光化門과 鐘閣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성이며, 옛 탑이라는 것이다. 곧 영고탑은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탑인 것이다. 위서론자들이 전거를 확인하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다.


9. 桓檀古記가 지금 出現한 事由

『桓檀古記』는 지금이야 갑자기 세상에 나왔으니 어느 國粹主義者의 僞作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桓檀古記』에 인용된 사서들에 의하면 몽고와 만주대륙과 중국대륙 일대가 거의 태고시대 우리 민족의 疆土였다.
그러므로 이들 사서를 인정하면 우리 나라와 몽고 및 중국 사이에 국경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약소국인 근세조선은 국가안정을 위해 『桓檀古記』에 인용된 사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桓檀古記』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종교를 창설했었다. 그것은 강대 민족인 이웃 민족들의 자존심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桓檀古記』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입력 2005. 8. 4. 17:24수정 2005. 8. 4. 17:24

배달교와 '삼성기' (daum.net)

[한겨레] 배달교의 뿌리는 고조선 배달겨레 '순'의 효도에 있다. 어버이 섬길 날이 짧다는 것을 깨우치도록 집안 뜰에 무궁화나무를 심었다. 차이니스들이 순 임금의 '효'는 자기들 것으로 흡수해 유교()라 했으나, 무궁화는 가져가지 아니했다.

배달교는 별을 숭상했다. 그것이 혼례 속으로 들어가서 북두구성()이 나와서 백년해로 혼례를 만들어냈다.  '바름'을 덕목으로 삼았다. 억울한 일이 생기면 배달겨레는 "오냐 두고 보자" 말하고, "그래 그래, 두고 보아라. 세상 만사가 반드시 바로잡히게 되느니라!" 하늘이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참고 견디라'는 말이 그렇다. 남을 해롭히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용서를 빌어 소용 없는 데가 배달나라땅이고, 용서를 빌어 쓸모 없는 겨레가 배달겨레다.

 '수양왕'이 찬탈왕이 되어 많은 이를 죽였다.

절간에 가서 죄를 빌었지만 14년 살다가 갔다. 겨레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나라를 재팬에 넘긴다는 '실국조약'에 도장 찍은 역적 '완용'이 교회에 가서 죄를 빌었지만 겨레가 용서해 줄 리 없다.

배달교가 이런 곳에서 뚜렷하게 된다. 죄를 짓지 말자가 배달교요, 가장 깨끗한 가르침이 배달교다.

<세조실록>에 '안함로'가 엮은 <삼성기>()라는 책이름과 '원동중'이 엮은 같은 책이름이 나온다. "안함로·원동중이 지은 <삼성기>란 책을 가지고 있는 이는 나라에 바치라. 그 사람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리리라!"는 교지를 전국에 내렸다는 말이 실렸다. 그 뒤, 나라가 구하는 책이름에서 <삼성기>는 빠지고 나오지 아니했다. 세조때 책이 조정에 들어갔기에 그런 것이다.

 광복시대에 <삼성기>란 책이 나왔다. '이유립'이라는 이가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가운데 '단군기'를 떼어 고려 사람 '이암'이 지은 것으로 서문을 짓고는 <환단고기>라고 해 냈다.

원동중 <삼성기>는 '환인기·환웅기·단군기'로 짜여 있다. 그 '단군기'를 이유립이 빼앗는 몹쓸짓을 했다. '단군세기 머리글'을 이암이 지은 것으로 했는데, 서문을 읽어보니, 근세 재패니스말이 많이 들어 있었다. 나는 원동중 <삼성기>를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고조선사기>(문음사)를 내어 그 거짓을 밝혀 두었다. 원동중 <삼성기>는 '고조선사기'에 해당하는 거룩한 책이었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입력 2014-05-13 03:00업데이트 2014-05-13 03:55

“非정통 역사서 환단고기-단기고사 재조명을”|동아일보 (donga.com)

 
제1회 상고사 학술대회 13일 열려“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졸본)은 중국이 아닌 동몽골에 있는 지명이다.”

13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제1회 상고사 학술대회’에서 최기호 울란바토르대 석좌교수가 발표할 ‘언어학으로 본 한국역사 용어의 왜곡 문제’에 포함된 내용이다. 최 교수는 광개토태왕비문 기록과 몽골 현지답사를 통해 홀본(졸본)이 동몽골 도르노드 아이막 인근 ‘할힌골’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할힌골의 한자 표기가 홀본의 다른 호칭인 흘승골(紇升骨)과 같고 고구려 시대 것으로 보이는 성터 유적과 석인상 2기가 발굴됐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는 상고사의 비주류 학설 6건의 주제발표가 이뤄진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 발표에서 동호계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 신화와 예맥계 부여·고구려의 건국신화의 유사성을 토대로 예맥과 동호(몽골, 선비, 거란, 여진)가 한족과 차별되는 동일 조상의식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사서(史書)에는 위서(僞書)는 없다’ 주제 발표에서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진철 원광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고대국가 대왜(大倭)의 기원과 한(韓)’에서 마한의 속국 중에 일본인이 ‘야마토’라고 부르는 대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국’이 있다는 점을 들어 마한과 대왜가 모국과 분국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02-2012-6149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환단고기]ㆍ[규원사화] 등 仙家系 史學에 대한 남북 공동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

이 한국연구재단(NRF,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이 지원한 연구과제( [환단고기]ㆍ[규원사화] 등 仙家系 史學에 대한 남북 공동연구 | 2005 년 협동연구지정주제지원   | 정영훈(한국학중앙연구원) [ NRF 인문사회 연구책임 1회 수행 / 공동연구 1회 수행 / 학술논문 25편 게재 / 총 피인용 146회 ] )의 '중간산출물' 로 제출된 자료입니다.
  •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DB구축사업 참여 관련분야 전문가가 추가 입력한 정보입니다.
제작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국가 대한민국
발행일 2006-04-28
전체페이지수 pp. 1 ~ 74 (74pages)
언어 한국어
색인어 선가, 선가사학, 선가문헌, 도가사학, 한국고대사, 민족주의사학, 환단고기, 규원사화, 청학집, 해동이적, 오계일지집, 해동전도록, 단군민족주의, 대종교, 대종교사학, 신단실기, 신단민사, 단군교포명서, 단조사고
  • 주초록(메인언어)
  • 이 연구보고서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등 선가계 사학에 대해 남북 학계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를 묶은 것이다. 당초에 남북의 연구자들은 최근 상고사연구와 관련하여 그 사료적 가치를 두고 쟁점이 되고 있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 대해 균형있는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차제에 이들 사서의 배경에 있는 선가사학 전반에 대해 검토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합의했었다. 연구는 모두 5편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잇는데, 조선후기 선가문헌과 대종교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전개양상과 역사인식을 분석하는 3개의 주제들은 남측에서 맡고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검토하는 주제는 북측이 맡기로 하였다.

    연구는 수차의 실무접촉과 연구자회의를 거쳐 쌍방의 논문을 수합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남북교류의 여건이 원활치 못한 관계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는 데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다만 소주제별로 연구자들이 갖고있는 견해들을 개진하고, 쌍방의 논문에 대해 논평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최종보고서는 소주제별 담당자들에게 개진된 내용들을 감안하여 집필해주도록 위임하였다. 이번의 공동연구는, 순수학술적인 주제를 놓고 남북학계가 대화를 나눈 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며, 또 최근 북측이 전개하는 상고사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남북의 공동연구자들은 특히 환단고기 등 재야문헌을 무비판적으로 상고사연구에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이같은 연구결과는 재야사서를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있는 남측의 ‘재야학계’에 대해 엄격한 사료비판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주제별 연구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조선후기 선가문헌에 나타난 상고사인식](서영대, 남측)에서는 선가와 선가문헌 및 선가사학의 개념을 논의한 뒤에, 조선후기의 대표적 선가문헌인 <청학집>과 <해동이적>ㆍ<오계일지집> 등에 나타난 상고사인식을 분석하였다. 선가는 단군에 대한 인식을 전승해온 주역이자 상대적으로 주체적인 역사인식에서 앞섰고, 근대의 대종교사학이나 민족주의사학에도 영향미친 바가 크다는 견해가 있어왔지만, 그러나 선가들이 갖고있는 역사인식에 대해 분석한 연구는 없었던 바, 이 연구는 학계 연구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주고 있다.

    2. [대종교계 사서의 역사관](김성환, 남측)에서는 대종교 교단에서 출판한 <단조사고> <신단실기>를 비롯하여 김교헌ㆍ박은식ㆍ이상룡ㆍ권덕규ㆍ이원태 등 대종교계 인물들이 쓴 사서를 두루 검토하고 있다. 대종교계 사서는 단군을 역사의 정점에 놓고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배달민족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하는 데에 특징이 있으며, 그 역사인식에 비과학적인 부분이 많지만, 민족주의사학에 영향을 주고 독립운동의 동력을 제공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3.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정영훈, 남측)에서는 신채호를 비롯한 정인보ㆍ안재홍ㆍ박은식 등 주요 민족주의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이 가지는 특징들을 분석하고, 그를 규원사화 등 선가사학의 그것과 비교하고 있다. 민족주의사학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단군의 자손으로의 민족정체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다고 보았으며, 기왕에도 민족주의사학이 선가사학의 영향하에 성립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지만 이 연구에서는 양자의 비교를 통하여 그를 확인하고 있다.

    4.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최인철, 북측)에서는 <규원사화>와 관련된 위서론 논쟁에 대한 의견개진에 이어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연구자는 <규원사화>를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고 17세기 중엽에 저술된 것으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책에 잇는 내용속에는 믿을만한 부분이 많지 않지만 전조선왕조의 47대왕명과 왕세계, 관직명 등은 앞시기로부터의 일정한 전승에 토대했을 것이므로 사료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5.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문혁, 북측)에서는 <환단고기>의 위서론에 대해 논평하고 그 사료적 가치를 검토하였다. 논문에서는 <환단고기>를 근대에 와서 위작된 책으로 보며, <규원사화>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단기고사>와 일부 국내문헌기록들, 중국고문헌기록들, 신채호의 학설 등을 첨부하여 태백교-단군교의 이념에 맞게 서술해놓은 책이라고 판단한다. 내용적으로 민족적 긍지를 내세우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
  • 목차
  • Ⅰ. 연구개요
    Ⅱ. 연구내용
    1.大倧敎系史書의 歷史觀
    2.<<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3.<<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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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역사 읽기 I 상고사 (brunch.co.kr)

하나. 환단고기의 진실은...01

byArchitect shleeMar 02. 2016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인과 환웅의 역사를 기록한 삼성기, 

단군조선의 역사가 담겨있는 단군세기,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의 역사를 기록한 북부여기, 

마지막으로 태백일사에는 상고시대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다. 

 

바로 이 책 속에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진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일만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단군조선 있기 이전에 5천 년의 역사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에 환국이 있었고, 환국의 뒤를 이어 신시라고 불리는 배달국이 있었고 단군조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 북부여의 뒤를 이은 고구려, 대진국이라고 하는 발해, 고려의 역사로 펼쳐진다고 한다.

 

일만년 전 탄생한 최초의 국가 환국. 

환국은 3300년 동안 일곱 명의 환인이 통치했다 하고.

그 후 신시 배달국은 열 여덟 명의 환웅이 천 오백년 이상 다스렸다고 한다. 

환국과 신시 배달국이 오천년 정도 이어진 후, 마침내 단군조선이 탄생하는데, 마흔 일곱 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연 이 책의 진실여부은 어떨까요? 

 

삼성기 하편 기록 삼성기에는 이런한 기록이 있다. 

파내류산 아래 환인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 동쪽 땅이다. 

그 땅의 넓이가 남북 5만리 동서 2만 여리에 이른다. 

파내류산은 지금의 시베리아 중앙고원에 해당하고,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일만년 전에 탄생한 환국의 영토는 아시아를 넘어서는것이다. 

당시 환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이 땅에서 열 두 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고. 

이 나라들 중에서 수밀이국라는 나라가 있다고 하는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수밀이국을 고대 수메르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런 주장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켰던 수메르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광활한 영토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에는 눈부신 영웅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영웅은 치우천황, 신라시대의 이 도깨비 기와는 치우천황의 얼굴이라고 전해진다.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황은 5천 년 전에, 이미 철제무기를 사용했던 인물로 전쟁의 신으로 전해지고 있고.

 

머리는 구리로 두르고 이마를 쇠로 가린 모습이었으며 

쇠로 무기를 만들어내니 온 천하가 두려워하여 치우천황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헌원황제가 치우천황과 수십 번을 싸웠으나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 

환단고기는 이런 치우와 싸웠던 중국의 역사도 우리 민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정의한다. 

 

5대 환웅의 막내아들은 태호복희라고 한다.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 첫 번째 인물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진으로 갔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태호복희는 중국의 시조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이죠. 그가 바로 환웅의 아들이라면 중국의 역사도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 된것이다.  

이렇게 환단고기에는 하늘의 백성인 우리 민족이 광활한 대륙을 무대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며 활약했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렇듯 환단고기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일만년 전까지 거슬러가는 역사, 아시아 대륙을 넘어서는 광활한 영토, 전설적인 영웅의 이야기까지 환단고기에 담겨있는 우리의 상고사는 눈부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엔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이 담겨있다. 

한 가지 예로,

바로 문자다. 

왠지 낯이 익은 문자. 

환단고기에만 나타나는 문자인데, 이 책에서는 가림토 문자라고 말하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한글과 꼭 닮은 이 문자가 이미 4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뿐만 아니라 가림토 문자를 쓰기 전에는 태고의 문자인 녹도문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녹도문자의 구체적인 형태는 환단고기에 적혀 있지 않다.

이런 내용이 실려있는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문자를 만든 최초의 민족이 된다. 

더 크게는 최초로 문명국가를 세운 민족이자,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문명을 전파한 하늘의 민족이라고 한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직히 믿고 싶은 내용이기도 하고.

이렇게 상반된 마음은 환단고기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다음에 이어...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상고사 (brunch.co.kr)

하나. 환단고기의 진실은…02

byArchitect shleeMar 05. 2016

환단고기 열풍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환단고기가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의 내용만큼이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환단고기는 네 권의 책을 묶어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만든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기와 단군세기, 그리고 북부여기, 태백일사 그 중에서 삼성기는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5권 각각 저자이름 발생 이 다섯 권의 저자는 각각 다르고,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틀리다. 

이 저자들 중에는 이암과 이맥, 범장처럼 다른 사료에서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단군세기와 부여기, 태백일사를 썼는 지 다른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다. 

그리고 저자들 중에는 다른 사료에서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어서, 실존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이러한 저자들이 썼다는 책들은 남아있지 않고, 1911년에, 네 권의 책을 한 권으로 묶여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고한는것이다. 

네 권의 책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펴낸 인물에 대해서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신시개천 5808년 곧 광무 15년 신해 5월 

광개절날에 태백 유도 선천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범례에 의하면 1911년 네 권의 책을 묶은 사람은 계연수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필사한 장소는 묘향산 단굴암이라고 한다. 

그런데 1911년,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9년인것이다. 

재야사학자 송호수씨는 줄곧 환단고기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1979년에 인쇄된 환단고기 영인본을 가지고 있다. 

20년 가까이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그도 환단고기 원본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환단고기를 펴냈다는 계연수에 대해서도 소문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계연수에 대한 이야기. 

수안계씨 족보를 샅샅이 뒤져도 계연수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다. 

계연수가 펴냈다는 환단고기 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계연수가 어떤 사람인지 추정해본다.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을 다하여 옮겨 적었다. 

또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마련하여 인쇄에 부쳤다

-환단고기 서문 중

 

먼저 환단고기를 감수했다는 이기. 

이기는 한말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애국계몽운동가였다. 

책을 인쇄하는데 자금을 댔다는 홍범도. 

홍범도는 간도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였고. 

홍범도와 함께 자금을 댔다는 오동진. 

오동진 역시 간도에서 활약한 독립투사였다. 

이기와 홍범도, 오동진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자, 대종교와 관련있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계연수도 대종교도이자 독립운동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70년 후. 

이유립이란 인물이 공개한다. 

원본이 전하지 않는 점, 

그리고 70년 후에야 책이 나타난 점 때문에 환단고기의 편자는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유립은 이미 사망한 상태. 

이유립은 단군사상을 연구하는 단단학회의 회장을 지냈다. 

단단학회에서는 계연수도 전임 회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계연수의 환단고기를 제자인 이유립이 펴냈다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이유립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다. 

부인은 이유립이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썼던 학자였다고 증언했다.

 

우리 뿌리와 역사를 찾자.. 우리나라를 찾아서 우리 세상을 찾자는 뜻으로 살았다..

 

이처럼 우리의 뿌리, 역사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그리고 그런 이유립의 글 중에는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실제로 이유립은 생전에 환단고기를 번역해서 자기 나름대로 책을 내려고 했다고 한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유립은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또 한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이다.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상고사 (brunch.co.kr)

하나. 환단고기의 진실은…03

byArchitect shleeMar 11. 2016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 중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다. 

정오표란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이다.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의 글씨가 분명했다. 

이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수정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979년, 이유립이 세상에 공개한 환단고기는 당시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환단고기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1982년에 일본에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오면서 부터였다. 

일본어 번역본은 신국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鹿島昇가지마 노보루가 펴낸 것이다. 

이것이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평소 한국과 중국에서 고서적을 수집해온 그는 1979년, 한국에서 환단고기 영인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영인본을 입수한 경위나 그것을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다가 잠깐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나 가지마 노보루가 이해한 진실은 환단고기가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히는 책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동양 역사의 근원을 파악했는데, 일본의 신도가 본류이고 단군은 지류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국내에 들어와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 한국에서는 가지마 노보루의 해석과는 다른 독자적인 번역본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숙데에 보관중인 1979년 영인본

1911년 계연수가 처음 필사한 원본이 사라진 점, 

그 후 70년이 지나서야 이유립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는 점, 

그리고 1979년 이유립이 펴낼 당시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어로 출판하면서 국내에서 주목받게 된 점 등.

 

이런 미스테리한 부분 때문에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이 모호하기 때문에 책의 가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지만, 환단고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은 이 책에 사료로서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죠. 환단고기에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실려있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실려있는 책은 삼국유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단군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짧고 압축적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며 수명은 1908세라고 나온다. 

그런데 환단고기에는 2천 년이 넘게 지속된 고조선을 한 사람이 통치한 것이 아니라 47명의 단군이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47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 치적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구체적인 것까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단군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왕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라본 점, 그리고 고조선을 수십 명의 단군들이 통치했다고 본 점은 눈여겨볼 만한 주장인것이다.

이렇게 환단고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근거가 발견된다.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에는 다양한 천문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오성취루 현상이다. 

오성취루란 목성과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나란히 늘어선 것을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장관이 단군조선 때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초로 이 기록에 주목한 사람은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 교수. 

그는 단군조선 시대의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한 논문을 발표했었다. 

천문현상을 추적해가면 그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는 물론 관측자의 위치도 알 수 있기 때문에 연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오성취루 현상은 서기전 1733년에 나타난다. 

천문관측 프로그램에 입력해본 결과, 일 년 전인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1년의 오차가 나지만 천문학계에서는 거의 정확한 것으로 간주한다.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고조선의 영역. 

환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한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과 함께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지역을 살펴보면 고조선의 영역도 좀 더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됐다.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과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을 비교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어 상당부분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적인 가치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단서는 바로 수서령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있는 책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된다. 

삼성기가 바로 그것. 

수서령의 대상이었던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 제목이 나타나는 것은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낼 당시, 옛부터 전해지는 책들을 있었고 그것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환단고기는 그냥 무시하거나 버려둘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대부분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한다.

왜 그럴까. 

그 결정적인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책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먼저 환단고기를 이루는 다섯 권의 책의 저자들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인데, 다른 사료에서 이름이나 행적이 발견되는 저자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환단고기 말고는 그 책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1911년에 다섯 권의 책을 묶어서 환단고기라는 단행본으로 펴냈다는 계연수에 대해서도 그가 펴낸 원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것이다. 

마지막으로 70년 후에 계연수의 제자인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공개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건축가의 역사 읽기 I 상고사 (brunch.co.kr)

하나. 환단고기의 진실은 04

byArchitect shleeMar 15. 2016

 

책 안에서 두 가지 기록 발생 또 다른 근거는 환단고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두 문장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사람인 행촌 이암이 썼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산업'이나 '문화'와 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 곳곳에는 '국가'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용어가 네 명의 저자들이 살았던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와 맞지 않는다다.

이런 용어의 문제 말고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는 먼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라가 형이라면 역사는 혼이다.

-단군세기 서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나오는 대목과 일치한다.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네 권의 책을 그대로 묶은 것이 아니고 편찬자가 가필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 연구회의 박찬규 박사는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관련기록을 다른 사서의 기록과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서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또한 환단고기에서는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다보니 지금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단군조선 시대의 인구.

 

호구를 조사해보니 모두 1억 8천만 구였다.

 

환단고기가 사료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책이 역사책보다는 경전에 가깝다는 것이고.

특히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소도경전본훈> 에서는 종교적인 경전의 색채가 강한 대목이 많다.

소도경전본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천제님이 가라사대 너희 5가와 중생들아! 저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것이 하늘이 아니니라.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 사방도 없고 겉도 비고 속도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 하나 싸지 않은 데가 없느니라.

 

이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실려있다.

이러한 천부경는 대종교의 핵심교리이고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경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역사책으로 보기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편찬자가 가필한 흔적이 나타나는 점,

다른 문헌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점,

책의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진위논쟁, 가치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최근 상고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 상고사의 화두는 단연, 단군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 단군을 둘러싸고 신화로 볼 것인가, 역사로 볼 것인가라는 논란이 새롭게 일고 있다.

이렇게 단군에 대해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이러한 환단고기 논쟁의 바탕에도, 상고사 열풍의 핵심에도 단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단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식이 나타나게 된 배경, 그리고 최근에 나타난 현상을 다음에 마지막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999년 여름 몇 몇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었다.

표면적으로 이 사건은 종교계의 갈등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단군에 대한 혼란된 인식때문이다.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었다.

단군이 역사적인 인물로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단군상을 건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단군에 대해서 이렇게 신화와 역사라는 두 가지 시각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금세기 초만 해도 단군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통일되어 있었다.

그것은 1900년대 초반에 발행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단군을 국조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 교과서에는 단군의 초상화는 비롯해서, 고조선과 삼한의 지도가 실려있다.

1900년대 초까지 단군에 대해 뚜렷한 역사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 단군은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까지만 해도 역사적인 존재였던 단군이 신화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의 상고사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는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이란 이름으로 서적을 색출한다.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책이 무려 51종 20만권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거두어들인 책은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신화로 축소됐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역사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최근 잃어버린 상고사를 회복하고 신화로 머물러 있는 단군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시인 김지하씨가 있다.

이런 상고사회복 운동에 대해 한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일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리고 학문적인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군은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환단고기 열풍의 이면에는 이처럼 단군과 고조선을 역사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의 열망이 잠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환단고기가 알려진 이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며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일반인들의 이런 관심과는 달리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대하는 반응은 냉담하다.

많은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사학계에서는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존 학계에 대해서 불만을 감추지 않다.

이런 학계와 재야사학계 간의 대립은 이미 1970년대 상고사 파동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재야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역사상의 인물로 규정하고 기존의 국사학계를 일제 식민주의 사관파로 비난했다.

일명 단군파동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1978년에 법정으로까지 비화됐다.

그리고 1980년대 환단고기가 등장하면서 양쪽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것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있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믿고 싶은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나타난 갈증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것처럼 최근의 사서의 재분석을 통해 환단고기는 재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억측인 부분이 전무하다고는 단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배워온 상고의 역사는 식민사관에 의한것임은 확실하다.

 

 

김은구입력 2023. 4. 26. 05:32

우순실(사진=차트코리아)

가수 우순실이 18년 전 발표한 노래가 요즘 유튜브에서 명상가요와 힐링 음악으로 뒤늦게 빛을 보고 있다. 지난 2005년 12월 발표한 ‘천부경’(天府經)이다.

이 노래는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우순실도 방송에 출연해 이 노래를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듣다 보면 현대인의 지친 심신을 정화시키고 불면증도 치료하는 신묘한 효과를 낸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게다. 연주 시간이 3분52초밖에 되지 않는 이 노래를 12시간 동안 계속 들을 수 있도록 제작해 유튜브에 업로드하며 “천부경은 기운을 정화시킵니다. 외출하실 때 노래를 틀어놓고 나가보세요. 집안 가득 천부경의 노래 소리로 공명이 되어 집안이 편안해집니다”라는 안내문까지 달아놓은 동영상이 17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천부경’은 한민족의 경전으로 불리는데 81자로 이뤄졌다. 불경과 성경보다도 더 오래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우순실은 경전 81자에 직접 곡을 붙여 노래했다.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으로 시작하는 이 ‘천부경’을 국악 정가의 형식으로 작곡해 조선시대 임금님들만 듣는다는 정가의 창법으로 불렀다.

한양대 작곡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우순실은 1982년 MBC ‘대학가요제’에 나가 ‘잃어버린 우산’을 노래해 입상하며 유명해졌다. 그러나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대생이 ‘대학가요제’에서 유행가를 불러 학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대학에서 난리가 났다.

우순실은 결국 자퇴를 선택하고 6개월 간 정악을 배워 이듬해 추계대 국악과 2학년에 편입해 정가를 전공하고 졸업을 했다. 가수로 바쁘게 활동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천부경’을 접하고 공부하다가 정가 형식으로 작곡해 노래했다.

‘천부경’은 한문이 등장하기 이전인 환국시대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경전이라고 하지만 기도문에 더 가깝다, 환웅 1세 거발한이 신시에 도읍하고 신지 현덕에게 지시해 녹도문자로 빗돌에 새겨 기록해놓은 걸 통일신라 말 대문장가인 학자 고운 최치원이 발견해 한문으로 번역해 놓았다. 1916년 묘향산에서 수도 중이던 스님 계연수가 암벽에 새겨진 그 내용을 발견해 이듬해 세상에 알렸다.

9자 1구에 9행,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1부터 9까지 수로 우주의 생성원리, 천(天) 지(地) 인(人)으로 구성된 삼극을 통해 만물의 생성원리와 인간의 도리 등을 담은 신비스런 경전으로 불린다. 글자 81자 중 31자가 숫자이고 그 중 1이 가장 많은 11번이나 등장한다.

이러한 수들은 음양오행설의 기초가 된 하도(河圖)의 원리가 되기도 하고 역경(易經)의 기초 원리로도 사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교류 전기를 발견한 미국의 전기학자 니콜라 테슬라가 “우주의 열쇠가 들어있다”고 주장한 수 3 6 9를 4차원 디지털 구구단인 9 감산법을 동원해 체수 또는 사람 수로 해석하며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놀라운 것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모음의 기본으로 사용한 천(·) 지(ㅡ) 인(ㅣ)과 자음을 만들 때 동원한 오(○) 방(□) 각(∆)의 원리가 이 천부경에 모두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81자 전체에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아 어디를 끊어 읽느냐에 따라 학자마다 그 해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한 학자의 이론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다가도,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는 학자의 다른 설명을 듣다 보면 논리가 뒤바뀌어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천부경’이 위서가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간혹 나온다. 그러나 ‘천부경’의 논리와 부합하는 이야기가 신라 내물왕 때 보문전 태학사였던 박제상(서기 364~419년)이 쓴 ‘부도지’(符都誌)에도 자세히 실려 있어서 그 사실을 들어 설명하면 위서라는 의심은 단번에 사그라진다.

‘부도지’가 한 민족을 포함한 온 인류의 창세기 같은 경전이라면 ‘천부경’은 우주 삼라만상의 전진과 번영을 염원하는 인류 최초의 기도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문자도 없던 그 옛날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경전이 어렵고 복잡했겠습니까. 각자 이해하는 방식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우순실의 설명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2020년 말 신곡 ‘첫사랑’과 ‘윤회’를 발표하고 유튜브 방송을 해온 우순실은 5월 6일 오후2시 강화도 스페인마을 야외공연장에서 무료 ‘바다 콘서트’를 개최한다.

석광인 대기자

전 스포츠조선 연예부장
전 예당미디어 대표
현 차트코리아 편집인

 

 

입력 2016.03.30. 03:00

"桓檀古記 등 역사서에 나온 실존인물" 주장도 (chosun.com)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2] 단군, 신화인가 역사인가


이선민 선임기자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단군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 이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이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환단고기(桓檀古記)' 등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들이다. 이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환단고기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묶어서 계연수란 인물이 1911년 간행했다고 하며 1979년 이유립이 필사 영인본을 출간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환단고기는 단군이 47대에 걸쳐 209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며 역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출간 경위가 불분명하고 근대 이후 등장한 용어들이 상당수 사용된 점 등을 들어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고 있다.


최근 일부 고고·역사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중국 네이멍구와 랴오닝성 일대에서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을 고조선·단군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네이멍구 츠펑(赤峰)과 랴오닝 차오양(朝陽) 인근에 기원전 4000~2500년 무렵 나타났던 홍산문화(후기 신석기)와 그 뒤를 이은 하가점 하층문화(초기 청동기)가 단군신화나 고조선 성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호랑이·곰 토템 유물을 유력한 증거로 제시한다. 또 홍산문화 지역에 자리 잡았던 환웅족(族)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토착 세력과 함께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이해한다. 단군신화는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의 이 같은 변화 과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3)

安    昶    範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철학)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1. 한단고기 오역

 

1) 한단고기의 유래 : 위서론자들이 『한단고기』를 위서로 오인하게 된 과오를 지적하기 전에 범례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단고기의 유래를 요약 소개한다.

 

삼성기전 상편은 신라의 고승 안함노가 찬한 것으로 계연수 선생댁에 소장됐던 것이며, 삼성기전 하편은 원동중이 찬한 것으로 백진사 관묵에게서 얻었다 하고, 단군세기는 고려의 문인 이암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 역시 백진사 관묵에게 얻었다고 했다. 북부여기 상하는 고려 말기의 학자 범장이 찬한 것으로 삭주 이동 이진사 형식의 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이 엮은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했다. 개천 5808년(서기 1911),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계연수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선지(줄친 종이)에 글을 잘 쓰고, 홍범도와 오동진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무판자에 새기게 되었다. 그 뒤 1920년 계연수 선생이 운명할 때,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의 경신년(1980)이 되거든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발문을 보면, 개천 5846년(서기 1949) 오형기씨가 이유립씨로부터 위촉을 받고 한단고기를 정서하였다. 그 뒤 개천 5876년(서기 1979) 수 십 부가 영인된 후, 녹도승라는 일본인이 한단고기를 번역하고 영인본과 함께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자들과 일부 사계학자들이 시비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소개한다.

 

2)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 :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은 제기하기를 "적어도 이 책(한단고기)이 계연수의 『범례』와 오형기의 『발문』에서 말하는 1911년 편집과 1949년 필사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인되더라도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대단할 것이며,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1911년의 편집과 1949년의 필사설을 확증할만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냐 하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역설할 경우, 물증이 있으면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조인성은 "만약 이유립이 인쇄본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정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한단고기』공개자로 알려진 이유립도 인쇄본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범례〉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한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곧 정서를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인쇄본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인쇄본이 없으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3) 문제되는 내용과 위서론자들의 과오 : 그러면 위서론자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한단고기』 범례 말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桓檀古記悉經 海鶴李先生之監修 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吳東振 兩友之出金付諸剞劂"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국역하면,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한 내(계연수)가 줄친 종이에 또박 또박 베끼고(선사),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겼다(기궐)"는 뜻이다.

 

그러나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한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한단고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계연수 선생이 '선사(선사)'했다는 단어를 "고쳐쓰다. 옮겨쓰다. 정서하다. 필사하다"로 오역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궐(기궐)'했다는 단어를 "인쇄 또는 편집"으로 오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계연수 선생이 만약 『한단고기』를 인쇄했다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한 인쇄했다면, 후에 정서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전에 의하면, 선사(선사)의 선자는 "(실로)깁다. 꿰매다"의 뜻이며, 사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서 「선사」는 "줄을 상하좌우로 곧게 쳐진 바둑판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는 뜻이다. 곧 선사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정서하다"는 뜻의 선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궐(기궐)의 기는 끝이 굽은 '조각칼', 궐은 끝이 굽은 '조각끌'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기궐」은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또한 인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기궐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굴속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아서 인쇄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는 처음에는 인쇄되었던 것이 아니라, 판각되었던 것이며, 종이에 찍은 간단한 인쇄본이 아니라, 나무판자에 각자한 방대한 양의 판각본 또는 목판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판각본은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어디에 한단고기 원본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와 목판책이 비장되어 있을 수 있으나, 단군상도 이를 철거하라고 파괴하는 이 때에 남북이 통일되고 민족적 자주의식이 강해질 때까지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본다.

 

4) 환단고기 목판책 작성의 이유 : 그러면 어째서 『한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각자했을까? 그때는 1911년 한일합방 직후다. 일경과 일군이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구금할 때다. 한단고기를 선사한 계연수와 출금한 홍범도와 오동진은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사로서 시중 출입이 불가능한 체포구금 대상 인물이다. 신변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한단고기를 필사하려면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필사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굴암 곧 단군굴 속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한단고기를 새겼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2. 실증사학의 모순

 

『한단고기』부정은 한문오역 외에 실증사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에 대해 그 모순을 몇 가지 비판한다.

 

1) 실증사학을 맹신 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 실증사학은 고고학에 기반을 둔다. 고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학문으로 성립됨으로써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 전체를 조사하거나 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본다 하더라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실물이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만을 신봉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며, 현대사 내지 근세사만을 인정하고, 고대사를 무조건 부정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영국 불란서 독일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다. 이상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 실증사학이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을 우리사회에 무조건 적용함은 크나큰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실증사학의 배경인 서양문화의 원형(patten)에 있어서 동양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서양문화는 헬레니즘(그리스 중심) 문화와 헤브라이즘(유태교와 기독교 중심)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두 문화의 공통점은 유목문화이며, 자연정복문화이다. 동양문화에도 불교 유교 도교에 따라 다소 다르나 공통점은 농경문화이며 자연조화문화이다. 이와 같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또한, 서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돌아감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천도)로서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고 한 바와 같이 동양문화는 천도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서양문화의 우주관은 창조론으로서 자연질서를 인간 위에 천신이 있고, 인간 밑에 동식물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서양문화는 천지인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관계로 본다. 이에 반해, 동양문화의 우주관은 순환론으로서 천지인의 관계를 수평적 일체관계로 본다. 이와 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발생학적 배경과 발생원리 그리고 우주관 등 문화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문화의 원형이 다른 서구학설을 동양문화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둘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3) 실증사학은 후진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 불서에 의하면 천지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 이를 풀어 말하면, 지구의 중앙에서 역대 성인이 모두 탄생하였고, 문화가 먼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각자인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리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중앙 곧 5대양 6대주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곧 우리 나라가 서양보다 먼저 개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서구사회는 우리 나라보다 후진사회였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유년기였다면, 우리사회는 청년기였다는 것이다. 현대 종교를 예로 들면,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은 지금부터 2천년 전후인데,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출현은 2천 5백년 이전이다. 이를 보아도, 실증사학은 분명히 후진사회를 기준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선진사회였던 동양사회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셋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되었다. 그리고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 결정적 원인도 한문오역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모든 학자들은 한단고기를 마음껏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인용해도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원래 고집이 세고 자기의 학설을 쉬이 바꾸려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자기의 학설을 바꾸어 본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려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외람되나마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들이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한다. 일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첫째, 자아반성과 사실검증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 : 실증사학자들은 모든 일에 실증과 검증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단고기를 비판하기 앞서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안목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만년 이내의 동양사와 민족사를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한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고 확인한 다음, 한단고기의 내용에 모순이 있으면, 그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그것이 한국사 연구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단고기』영구보존을 위한 "선사와 기궐"을 오역하고 있으니 연구의 넓이와 깊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7000만 민족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그 비판은 신중에 신중을 다했어야 했다. 깊은 반성과 자아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학문의 동기와 목적의 모호성에 문제가 있다 : 어렸을 때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취미나 적성에 따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투철한 사명감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 개인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인 독립운동가들의 글에 대해 위서니 조작이니 거리낌 없이 혹평하고,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을 위서 또한 위작이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실증사학자들이 학문을 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극히 애매 모호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을 위한 부정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아무리 태고시대의 국가라 하더라도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확인했다면, 부정하는 이유, 곧 그 유적유물에 대한 측정도구, 측정방법, 측정과정 등 어디에 모순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함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의 한단고기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서구학설을 맹신하는 사학계의 풍토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설은 서구인에 의해 성립된 서구제일주의 학설로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서구학설을 진리같이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사근취원하는 교육풍토에 문제가 있다 :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부터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풍토는 가까운 것인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보다도 먼 것인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무식하게 되고, 그 무식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왜곡하고,『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 나라는 태고시대에 이미 동방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말은 태고시대의 우리 사회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상과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허무한 조작같이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대해 소홀하게 되고, 그러한 소홀함이 무식을 낳고, 무식이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자연에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어 자연과 인생이 무상하듯, 문화도 거기에 생성소멸이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돌고 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도의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는 고도한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법칙 몰이해가『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실증사학자들에게 민족적 주체의식 내지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교육의 기초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있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자신의 안목과 사고방식이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를 자연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파란안경이든 검은안경이든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볼 것을 촉구한다. 곧 과거의 학설과 종교적 신념과 나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장이 1m 75cm면 정상적인 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1m 50cm밖에 안 되는 사람은 부러워할 것이며, 키가 2m 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잇을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서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 거의가 『삼국유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삼국유사』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한단고기』를 보는 시각이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보는 안목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생각과 태도를 바꿔 한단고기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래도 한단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영원히 신화 속에 묻혀 두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격으로서 다음과 같은 비민족적 비애국적 주장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되살아나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꺽는 주장이다.

둘째, 그것은 9000년 내지 6000년의 민족사를 단축시키는 주장이다.

셋째, 그것은 진실한 민족사관 정립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그것은 민족적 자주의식 확립을 저해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그것은 민족총화를 저해하는 주장이다.

여섯째, 그것은 선지자들의 교시인 원시반본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일곱째, 그것은 신진 사학자들의 태고사 연구열의를 꺽는 주장이다.

 

『한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특히 단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단군학회가 『한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그러한 글을 학회지 『단군학연구』(제2호)에 싣고, 한인 한웅 단군에 대한 역사를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니 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군학회의 결성 취지가 어디에 잇는 것인지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출전 :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시대소리 //news.sidaesori.co.kr]

 

출처 : 한(桓) 동이민족사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메모 :

 

 

<참고자료>

 

 

환단고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환단고기(桓檀古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환단고기 (naver.com)

 

 

환단고기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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