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1) 서거정(徐居正) 동국통감(東國通鑑) 본문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亭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直長)을 지내고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1478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에 또 장원,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등을 두루 거쳐서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고,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인《동문선(同文選)》과 설화집인 《필원잡기(筆苑雜記)》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과 산문 문학을 집성했다.
문학 이외에도 여러 방면에 통달하여 세조 때 《경국대전》,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1)
조선전기 문신 · 학자 서거정 등이 왕명으로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여 1485년에 편찬한 역사서. 56권 28책. 인본.
1458년(세조 4)에 편찬 사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에 ≪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전년에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감≫ 56권을 신편하였다.
원래 세조가 목표했던 의도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1476년에 완성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거의 짜여진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해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1474년에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신숙주가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음으로써 노사신(盧思愼)이 주축이 되어 서거정·이파(李坡)·김계창(金季昌)·최숙정(崔淑精)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의 연결을 의식하고 편찬한 듯한 ≪삼국사절요≫는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수이전≫·≪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이용하려던 고기류(古記類)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수사관(修史官)이 완성한 것이지만 세조 자신이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보다 고대문화를 훨씬 포용하고 있다.
이는 처음으로 삼국의 세력이 대등하다는 입장이 표방되어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을 수정했다는 것과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음으로써 고대문화에 대한 비판을 완화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신편동국통감≫은 서술 체재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였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 부족으로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며,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 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워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된다 하겠다.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의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즉위년칭원법으로 바꿔 당시의 사실과 맞게 고쳤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을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정신을 절충시켰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편, 모두 382편의 사론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 서거정도 사론을 썼으며 다른 사신(史臣)도 이를 쓴 듯하다.
찬자 자신들이 쓴 사론의 성격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명교(名敎)를 존중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난신적자를 성토하고, 간유(奸諛)를 필주하고자 하는 것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취지의 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론이 전보다 한층 경직된 포폄(褒貶)이 가해지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교를 존중하는 사론으로 중국에 지성으로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은 철저히 비판되고 있다.
둘째, 강상의 윤리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다. 강상윤리를 잘 지킨 인간상으로 기자(箕子)·김보당(金甫當)·조위총(趙位寵)·박제상(朴堤上)·김흠운(金歆運)·계백(階伯)·경순왕자(敬順王子)·한유한(韓惟漢) 등이 칭송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공리를 배격하고 인의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다. 불교·도교·민간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은 기왕에도 있었으나, 고려 태조의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별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팔관회(八關會) 실시, 신라의 삼보(三寶)에 대한 물음, <훈요십조 訓要十條> 등이 모두 비난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그리고 신라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단군조선·고구려·백제·발해·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다.
이 책은 세조에 의해 유교적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고 낭만적인 신화적 역사 서술을 받아들여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입장에서 그 편찬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지키려는 유신들의 비협조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삼국사절요≫는 신숙주 주도하에 유교적 명분론을 깔고 수정된 ≪동국통감≫의 일부로써, 아직도 세조 때 낭만적 분위기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1484년(성종 15)에 서거정의 주도하에 찬진된 ≪동국통감≫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찬자들이 모두 훈신이었던 성향으로 보나, 찬자 자신들이 사론을 써넣지 않은 점으로 보나,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있던 사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지금 전해지는 1485년에 개찬된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해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투영된 사서가 되었다. 따라서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해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세조 및 그를 보좌했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를 가지며,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세조와 훈신을 비판해온 재야 사림세력의 처지를 강화해주는 기능을 가진다고 하겠다. 동시에 훈신의 압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편찬은 형식상으로는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공동 합작으로 편찬되어 지금까지 모아지지 못했던 대립적인 요소가 합일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초기 역사 서술에서 완성의 의미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2)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한 책으로 조선 전기 왕명에 의해 관에서 편찬한 대표적 역사서다. 우리가 단기(단군 기원)를 쓸 때 기원전 2333년을 출발점으로 삼는 근거가 바로 이 책에 나온다. 이 책은 1458년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인 1458년 완성된 것으로, 모두 56권 28책으로 이뤄진 활자본이다.
일본인 원로 학자가 자신이 소장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일본 판본을 대전 한남대에 기증 한다. 동국통감은 조선 전기 편찬된 우리 역사서로 일본 판본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한남대는 고노시 다카미츠(神野志隆光)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17세기 일본에서 간행한 판목으로 찍어낸 동국통감 56권 전체를 기증 받는다고 5일 밝혔다.
고노시 교수가 소장한 판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약탈됐던 동국통감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미토번(현재 이바라키현)에서 판목을 만들어 조선으로 가져온 뒤 찍어낸 것이다. 이 일본판 동국통감의 판목은 지난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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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가 고노시 다카미츠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기증 받는 동국통감 |한남대 제공 |
하지만 국내에는 동국통감의 일본 판본이 없으며, 일본에서도 7개 대학에 소장돼 있지만 56권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문 희귀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기증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평소 고노시 교수와 친분을 맺어 온 배정열 문과대학장의 주선으로 이뤄지게 됐다. 고노시 교수는 "귀중한 역사서가 한국에서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읽히고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동국통감을 연구해 온 백승호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부터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 정작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역사서"라며 "이 책을 일본 사람들이 가져다 우리 역사를 알기 위해 활용하고 직접 만들어서 봤던 것으로, 약탈됐던 역사서가 일본 책판으로 형태를 바꿔 국내로 돌아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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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시 다카미츠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
한남대는 9일 오후 총장실에서 기증식을 가진 뒤 이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도 연다. 학술대회에서는 고노시 교수가 '하나의 한자세계로서 동아시아'라는 주제의 발표를 하고, 국내 연구자인 백승호 교수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의 동국통감에 관한 발표가 이어진다.(3)
<자료출처>
(1) 서거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동국통감(東國通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참고자료>
동국통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5·18 왜곡 망언과 '동국통감' (daum.net)2019.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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