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출처; 단군정신 일깨운 종교사화서 『규원사화』 <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tongilnews.com)

입력 2022.06.28 14:08  수정 2022.07.05 11:46

단군정신 일깨운 종교사화서 『규원사화』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1)

  • 기자명 이양재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2022년 6월 23일 오후부터 서울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이날 국립중앙도서관(이하 국중) 고문헌실을 진짜 오랜만에 찾았다. 나의 20대에 국중(國中), 즉 국중의 소공동 시절 말기와 남산 시절 전 기간, 그리고 30대에 서초동 시절 초기를 드나들던 국중을 이번 세기 들어와서는 처음으로 간 것이다.

이십 년여 만에 국중을 다시 찾은 이유는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실물을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19) 『규원사화(揆園史話)』

『규원사화』는 1675년(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서문(序文)과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揆圓)’이라는 이름은 저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라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강력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었지만, 저자는 유학자들은 주체성 없는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 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라 주장한다.

우선 이 책을 형태서지학적으로 살펴보자.

가. 『규원사화』의 형태서지학적 검토

『규원사화』 개장한 표지, 최고본,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국중본). 중국식(中國式)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 국중본의 원래의 앞표지. 사침선장의 흔적과 서명 일부가 보인다. 능화문 흔적이 없고, 표지도 중국 종이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는 서문 3장과 본문 68장으로 이루어진 고서이다. 한 장의 중심부를 접어 판심(版心)을 만들며 장수(張數)를 적고, 접힌 반면(半面)의 종이에는 붓으로 10행의 칸을 대충 그린 후, 한 칸에 20자를 적어 넣었다. 즉 이 책은 10행20자본으로, 모두 26,814자로 되어있다.

책의 목차(目次)는 아래와 같다.

揆園史話序 1~3장(5면)
(이후 본문의 장 번호를 다시 1번으로 시작함)
揆園史話卷之 (지운 흔적 있음) (본문 1번 장 앞면의 1행)
一. 肇判記 (본문 1번 장 앞면의 2행~본문 3번 장 앞면의 1행)
二. 太始紀 (본문 3번 장 앞면의 2행~본문 13번 장 앞면의 2행)
檀君記 (본문 13번 장 앞면의 3행~본문 49번 장 앞면의 6행)
漫說 (본문 49번 장 앞면의 7행~본문 68번 정 앞면 1행)

이 목차에서 “一. 肇判記”와 “二. 太始紀”에서는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데, “檀君記”와 “漫說”에서는 일련번호를 적어 넣지 않았다. 이것은 내용서지학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문제점을 유추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중본 『규원사화』 이외의 다른 이본(異本)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국중본 『규원사화』의 형태는, 근래에 책 전장(全張)에 걸쳐 얇은 저지(楮紙)로 배접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오침선장(五針線裝)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고, 국중본 『규원사화』는 능화문이 들어간 새로운 표지로 개장했음에도, 개장하기 이전의 원 표지는 능화문(菱花紋)이 없다. 즉 개장(改裝)하면서 사침선장을 한 것은 개장하기 이전부터 사침선장본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중본 『규원사화』의 바탕 종이는 저지(楮紙, 닥종이)나 피지(皮紙)가 아니라 중국산 선지(宣紙)의 특성을 보인다. 즉 닥의 섬유질이 안 보이고 있으므로, 나는 국중본 『규원사화』는 중국산 종이에 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국중본의 필체는 다른 『규원사화』보다는 예상외로 훨씬 양호한 필체였다. 그런데 필사(筆寫) 시(時)의 오기(誤記)를 교정한 것을 보면, 이 책은 초고(初稿)이거나 원저자(原著者)의 자필본(自筆本)이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책을 베껴 쓴 것이다.

『규원사화』 「서문」 끝의 기명(記名) 부분, ‘규원초당’에서 ‘규(揆)’자를 틀리게 썼다가 수정하고 있다. 원저자가 자신의 기명을 직접 썼다면 좀처럼 잘못 쓸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이러한 수정된 예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예를 들자면, 저자가 자신의 기명(記名)을 쓰면서 잘못 써서 수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국중본 『규원사화』의 서문 마지막에 “상지이년을묘삼월상한북애노인서여규원초당(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北崖老人書于揆園草堂)”이라 하고 있는데, “규(揆)”자를 수정을 거듭한 흔적이 보인다. “규”자를 잘못 써서 고쳤었다가 다시 종이를 잘라 붙인 후에 “揆”라 쓴 것이다. 본문 33장 뒷면 7행19번째 자를 “교(敎)”라고 썼다가 면(面) 천부(天部)에 “교(交)”라고 써서 교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베껴 쓰기 실수를 보면 국중본은 사본(寫本)이지,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 같이 1675년에 쓰인 원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국중본의 필체를 보면 상상외로 매우 감각이 좋다. 누군가가 상당한 공부를 한 인물이 베껴 쓴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까지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이러한 형태서지학적 검토가 전혀 시도되지 않았는가? 아니면 검토한 연구자가 있으나 발표를 애써 외면한 것일까? 나는 후자일 것으로 본다. 발표해 보았자 괴롭힘을 당하여 귀찮게 되었을 것이다.

나. 『규원사화』의 내용서지학적 검토

『규원사화』의 저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에 청명산인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라고 주장하는데, 『진역유기』는 고려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강하게 쓰인 책이라고 주장한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 5월 26일 戊子 3번째 기사에 팔도의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私處)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는데, 그 대목에서 『조대기』란 서명이 우리 역사상 단 한 번 등장한다. 이를 두고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지만, 만약 『규원사화』가 후일 저술된 책으로 규명한다면 『규원사화』와 『조대기』의 연결성은 허구가 된다.

내가 보기에는 『규원사화』의 편자(編者)는 북애자 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세 사람 정도가 나누어서 편술(編述)한 것으로 여겨진다. ①서문의 저자가 있고, ②「조판기」와 「태시기」의 저자가 있으며, ③「단군기」와 「만설」의 저자가 달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서문의 저자가 가장 늦게 개입한 것으로 본다.

(1) 『규원사화』 「서문」의 문제점

『규원사화』 「서문」 첫 면, 최고본,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국중본). 실물은 예상보다는 매우 양호하였다. 저지(楮紙)로 배접을 하였고, 원(原) 지면(紙面)에서 닥 섬유를 발견할 수 없는 중국산 선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치는 양호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역사 서술에서 기년법을 쓸 때 조선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쓰고, 일본은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이다. 『규원사화』를 검토하면서 내용서지학적 측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문에서의 기년(紀年) 문제이다. “상지이년을묘삼월상한북애노인서여규원초당(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北崖老人書于揆園草堂)”이리고 한 부분으로, 제2기 후기의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이 서문의 기년(記年)을 1675년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상지이년’과 ‘을묘’년은 일치하지 않고 서로 다른 연도가 된다. ‘을묘’는 1675년이 맞다. 그러나 ‘을묘’는 ‘숙종1년’이다. ‘을묘’를 ‘상지’로 할 경우에는 ‘상지일년’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상지이년’이라면 ‘병진(1676)’이 된다. 즉 『규원사화』 「서문」의 저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기년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이제 기년법을 언급하고자 한다. 『춘추』에 의하면, 선왕(先王)이 죽은 뒤 그해를 새왕의 원년(元年)으로 치지 않고 다음 해를 원년으로 쳤는데, 이는 선왕의 뜻을 이루고 중도에서 바꾸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사용하여 앞의 왕이 죽은 해에 달(月)이 바뀌면 새로 즉위한 왕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시대까지도 그대로 유월칭원법을 사용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춘추』를 따라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새 왕이 즉위한 해에는 앞 왕의 연호를 그대로 쓰고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했다.

나는 북애자를 의문의 인물로 판단한다. 조선시대의 기년법이 유년칭원법이었음을 볼 때 ‘북애자’란 인물은 조선인이 맞는가? 아니면 가공한 인물인가?

또한 『규원사화』의 서문에는 이 책을 1675년으로 볼 경우 당시의 시제(時制)가 동떨어지는 표현이 일부 있다. 그 부분은 이미 학계에서 지목한 바 있어 여기에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2) 『규원사화』의 「조판기」와 「태시기」

『규원사화』 「1. 조판기」, 국중본. 첫 행에 “揆園史話卷之”라하고 한 글자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다음 행에 “一 肇判記”라 하였는데, 이는 이 책은 처음 구성할 때 4권1책으로 구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조판기」는 태고적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내용이 『성경전서』의 「창세기」 천지창조와는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마치 그처럼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동아시아의 철학과 설화가 『성경전서』 「창세기」 천지창조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즉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규원사화』의 「조판기」는 개신교가 전래한 이후의 저술로 판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규원사화』 「2. 태시기」, 국중본. “二 太始紀”라 하였는데, ‘조판기’처럼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시기」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창조한 후,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천왕(桓雄天王,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탁록(涿鹿)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 해 동안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열두(12) 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

즉 『규원사화』의 「태시기」는 중국의 신화 및 전설적 사화(史話)를 다룬 고문헌을 『규원사화』 아래에 두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조판기」와 「태시기」는 중국사와 조선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의 편술(編述)로 판단된다.

(3) 『규원사화』의 「단군기」

『규원사화』 「단군기」, 국중본.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임금(壬儉)들의 치적을 아래와 같이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1. 단군(檀君) : 재위 93년-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
2. 부루(夫婁) : 재위 34년-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3. 가륵(嘉勒) : 재위 51년-기원전 2206년 즉위
4. 오사(烏斯) : 재위 49년-기원전 2155년 즉위
5. 구을(丘乙) : 재위 35년-기원전 2106년 즉위
6. 달문(達文) : 재위 32년-기원전 2071년 즉위
7. 한율(翰栗) : 재위 25년-기원전 2039년 즉위
8. 우서한(于西翰) : 재위 57년-기원전 2014년 즉위
9. 아술(阿述) : 재위 28년-기원전 1957년 즉위
10. 노을(魯乙) : 재위 23년-기원전 1929년 즉위
11. 도해(道奚) : 재위 36년-기원전 1906년 즉위
12. 아한(阿漢) : 재위 27년-기원전 1870년 즉위
13. 흘달(屹達) : 재위 43년-기원전 1843년 즉위
14. 고불(古弗) : 재위 29년-기원전 1800년 즉위
15. 벌음(伐音) : 재위 33년-기원전 1771년 즉위
16. 위나(尉那) : 재위 18년-기원전 1738년 즉위
17. 여을(余乙) : 재위 63년-기원전 1720년 즉위
18. 동엄(冬奄) : 재위 20년-기원전 1657년 즉위
19. 구모소(緱牟蘇) : 재위 25년-기원전 1637년 즉위
20. 고홀(固忽) : 재위 11년-기원전 1612년 즉위
21. 소태(蘇台) : 재위 33년-기원전 1601년 즉위
22. 색불루(索弗婁) : 재위 17년-기원전 1568년 즉위
23. 아물(阿勿) : 재위 19년-기원전 1551년 즉위
24. 연나(延那) : 재위 13년-기원전 1532년 즉위
25. 솔나(率那) : 재위 16년-기원전 1519년 즉위
26. 추로(鄒盧) : 재위 9년-기원전 1503년 즉위
27. 두밀(豆密) : 재위 45년-기원전 1494년 즉위
28. 해모(奚牟) : 재위 22년-기원전 1449년 즉위
29. 마휴(摩休) : 재위 9년-기원전 1427년 즉위
30. 나휴(奈休) : 재위 53년-기원전 1418년 즉위
31. 등올(登兀) : 재위 6년-기원전 1365년 즉위
32. 추밀(鄒密) : 재위 8년-기원전 1359년 즉위
33. 감물(甘勿) : 재위 9년-기원전 1351년 즉위
34. 오루문(奧婁門) : 재위 20년-기원전 1342년 즉위
35. 사벌(沙伐) : 재위 11년-기원전 1322년 즉위
36. 매륵(買勒) : 재위 18년-기원전 1311년 즉위
37. 마물(麻勿) : 재위 8년-기원전 1293년 즉위
38. 다물(多勿) : 재위 19년-기원전 1285년 즉위
39. 두홀(豆忽) : 재위 28년-기원전 1266년 즉위
40. 달음(達音) : 재위 14년-기원전 1238년 즉위
41. 음차(音次) : 재위 19년-기원전 1224년 즉위
42. 을우지(乙于支) : 재위 9년-기원전 1205년 즉위
43. 물리(勿理) : 재위 15년-기원전 1196년 즉위
44. 구홀(丘忽) : 재위 7년-기원전 1181년 즉위
45. 여루(余婁) : 재위 5년-기원전 1174년 즉위
46. 보을(普乙) : 재위 11년-기원전 1169년 즉위
47. 고열가(古列加) : 재위 30년-기원전 1158년 즉위~1128년까지 30년간 통치.

이상 단군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1205년간 지속되다가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단군기」의 기년법을 분석하여 보면, 「단군기」는 조선시대의 예와 같이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에서 유년칭원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규원사화』 이외의 다른 기록은 전혀 없다. 확실한 것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까지는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북애자가 썼다는 「서문」과 「단군기」는 기년법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서문」과 「단군기」가 같은 저자라 볼 수 있을까?

‘국혼의 재발견’ (13)회 연재,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나는 “홍만종은 기자의 생존연대는 BC 1173년에서 BC 1083년으로 주장”하였다고 하였다. 이른바 기자조선이라는 가공된 왕조의 기록, 즉 1879년(고종 16)에 정인기(鄭璘基) 등이 증보(增補)한 『기자지(箕子志)』에 수록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왕대(王代)‥‥‥, 그 왕대의 원류로 볼 수 있는 1840년에 필사한 『고금역대보감』 권지이‥‥‥, 그 연재에서 나는 “1840년까지도 단군조선의 왕대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840년 이후에 나온 책일” 수 있음을 제시하며 “단군조선과 이른바 기자조선의 왕대가 합쳐진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시도한 일”로 규정하였다. 『규원사화』를 보면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기자지』의 이른바 기자조선 왕대의 상한(上限) 연도에 단군조선의 하한(下限) 연도를 끼어 맞춘 듯한 감을 느끼게 한다. 기자조선의 왕대가 먼저 만들어지고, 단군조선의 왕대를 만든 것 같다.

(4) 『규원사화』의 「만설(漫說)」

『규원사화』 「만설」, 국중본.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았다. 이 「만설」은 편자의 의중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의 「만설」은 저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고 있다.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를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는 1910년대, 그 망국시대의 대종교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事大思想)의 근원(根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나는 신교(神敎)란 단어가 마음에 거슬린다. 대종교(大倧敎)적인 표현이라면 ‘선교(仙敎)’, 또는 ‘선도(仙道)’라야 옳다.

다. 『규원사화』의 본질과 가치

『규원사화』 번역본, 신학균(申學均)이 번역하여 1968년에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1974년 8월 15일 자로 서울 인사동 89의 대동문화사에서 재판본을 발행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제국의 대학자 김교헌이 남긴 『규원사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는 1914년 『신단실기』를 출간하게 한 이후 1923년 타계하기까지 이 책에 대하여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알려지고 난 이후 민족사학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왔다. 사실(史實)과 사회주의 철학을 추구하는 민족사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고, 대종교를 위시한 신앙적 측면을 추구하는 민족사학자들은 긍정적이었다.

나의 『규원사화』의 형태서지학적 및 내용서지학적 고찰은 혹독하다. 그러한 혹독한 평가위에서 이 책의 본질과 가치를 논한다. 『규원사화』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神敎, 仙道)의 입장에서 쓰인 일종의 종교사화서(宗敎史話書)로서, 그 문화사상적 가치는 매우 높다. 우리는 『규원사화』를 역사책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우리 민족 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역사 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종교성이 짙은 책이다. 이런 정신사적(精神史的) 영역에서 평가해야 한다.

한의학의 고전적 불후의 명작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이 있다. 이 책은 서지학적으로는 위서(僞書)로 지목되지만, 한의학에서는 기독교의 『성서(聖書)』와 같은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다. 『성서』의 「창세기」는 상당 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사서(史書)로 인정하는 역사학자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유태인은 「창세기」를 절대적인 역사서로 믿는다.

『규원사화‧청학집』 영인본, 1976년 4월 10일, 아세아문화사 발행. 일백부 한정판. 이 영인본은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소장본을 손진태(孫晋泰, 1900~1950)가 필사한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영인한 책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는 상당한 부분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성서』의 「창세기」와 같이 사서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규원사화』를 사서로 보는 것은 민족종교의 관점이지, 비교종교학이라든가 역사학의 관점이 아니다.

『규원사화』에서 단군시대 47대 왕명(王名)을 열거하고, 나아가 동이(東夷)라고 총칭되었던 동방의 여러 종족을 단군조선의 주민인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웅대한 대제국으로 재구성한 것은 대체로 구한말의 대종교(大倧敎) 성립 이후부터이다. 물론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은 『규원사화』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규원사화』는 김교헌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정신은 구한말과 항일투쟁시기의 대종교 사상과 단군민족주의의 근간으로서 단군정신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라. 『규원사화』의 출현 시기 및 저자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903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찬집위원(纂輯委員), 1909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 간인위원(刊印委員)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학자이다. 그는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에도 간여하였다. 그는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의 교리와 역사를 연구한 대종교 최고의 이론가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단군신앙을 이론화시키기 위하여 각종 기록을 수집하였고, 또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신단실기(神檀實記)』(1914년 발행)를 편술하였다. 그런데 『신단실기』의 「단군세기」에는, “一千二百十七年庚子三月十五日에 入阿斯達山하샤(今文化九月山) 化神御天하시니 開天이 二百十七年이오 在君位가 九十三年이오 傳不知幾世오 歷一千二百十二年이라”라고 하여 단군조선의 역대 왕명과 재위 기간, 치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

『대동사강(大東史綱)』, 김광(金洸), 1929년 3월 15일, 대동사강사 발행. 『규원사화』 「단군기」의 단군조선 왕대를 처음으로 공식 인용한 책이다. 김광(金洸) 편차(編次)라고 되어있으나, 판권 면에는 저작자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진율리 440의 “김용학(金龍學)”으로 밝히고 있고, 저작 겸 발행자를 경성부 낙원동 210번지의 ‘정석채(鄭錫采)’로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즉 『규원사화』는 『신단실기』를 포함하여 1910년대 말까지 나온 어떤 책에도 인용되고 있지 않다. 『규원사화』를 처음으로 인용한 책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내놓은 『대동사강(大東史綱)』이다. 이를 보면 『규원사화』는 『신단실기』(1914년) 이후에, 『대동사강』(1929년)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고본(最古本) 『규원사화』로 알려진 국중본은 중국산 종이에 중국식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으며, 「조판기」와 「태시기」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고대의 세계관과 창조관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1915~1928년 사이에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2인이 공동(共同) 편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중본 『규원사화』는 초고본을 정서(淨書)한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이다. 그 필치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규명이 후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눈에 낯선 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 나의 넋두리

내 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엇갈린다. 이쯤에서 밝혀야 할 것 같다. 나의 조부는 유학자셨지만, 나의 증조부는 천도교 계열의 독립운동가셨다. 증조부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일제 강점기에 돌아가셨으므로 나는 증조부를 뵌 적이 없고, 나의 조부는 유학자로서 유년 시절의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쳤지만, 의외로 내 삶의 형성과 민족주의적 신념에 지대한 영성(靈性)을 남긴 분은 증조부였으니, 내가 유교를 넘어서서 천도교와 대종교 보천교 원불교에 우호적인 마음을 갖는 이유가 바로 증조부 때문이다. 증조부는 3.1운동 직전에 포천과 가평의 재산을 상당량 처분하여 천도교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썼다. 그분의 재판기록에는 그러한 천도교의 그림자가 얼른거린다. (중략)

나는 청소년기를 벗어나 주민등록증을 받게 되자 반갑게 달려간 곳은 지금의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장 자리로, 당시에 그 자리에는 국립중앙도서관(흔히 國中이라 줄여 부른다)이 있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소공동 국중을 롯데그룹에 넘겼고, 국중은 1974년에 남산에 있던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어린이회관은 광진구 능동으로 이전하였다. 국민의 가장 소중한 장소를 일본에서 국내 투자를 기웃거리던 친일 재벌에게 넘기고, 여기서 박정희와 육영수의 육영재단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당시 국중의 소공동 말기와 남산시절 초기는 민족사학자들의 둥지였다. 한국고전연구회의 시작점이 남산의 국중 열람실에서 태동되었고, 거기서 임승국 등이 민족사관에 대하여 세미나를 하다가 독지가를 만나 교통이 편리한 종로구 낙원동 낙원빌딩 5층으로 (한국고전연구회는) 이전하였고, 이들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지원한 분이 교사 출신의 박의근이었다. 여기서 국사찾기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박정희 정권은 제2기 민족사학의 태동지를 친일 재벌 롯데에게 매각하는 망동 저지른 것이다. 벌써 48년이나 지났으니 지금 이러한 1970년대 중반의 민족사학계 사정을 아는 사람은 당시 청년이었던 나 외에는 없을 것이다.

당시까지 내가 보아온 불경이나 성경 등은 모두는 외래의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구약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그러한 존재가 우리 민족에게 나타남은 없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 당시에 내가 우리 민족의 경전으로 접하게 된 것은 천도교의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대종교의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단실기』, 『신리대전』 등등이었다. 나의 20세쯤의 일이니, 아마도 1975~6년 일 것이다.

내가 민족주의 사학자 최인(崔仁)을 처음 만난 곳도 여기 소공동 시절의 국중이었다. 차츰 나는 최인의 민족주의 사상에 심취하였고, 안호상(安浩相) 임승국(林承國)과도 가까워졌으며, 문정창(文定昌) 박시인 등 제2기 민족사학자들과의 안면을 넓혀 갔다. 이런 일은 이유립의 『환단고기』가 나오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찾아 대종교 청년들과 대담을 하며 그들의 교리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실체를 배웠고, 수년 후에는 헛걸음이기는 했지만 홍은동 산꼭대기로 이전한 대종교 총본사를 다시 찾은 바도 있다. 당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종교는 우리나라에서 번성하여야 할 종교였지만 매우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대종교인들의 독립운동과 자주적 민족주체성에 매료되었지만 대종교는 나의 신앙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단군을 대종교 만의 것으로 가두어 둔다면, 단군과 우리 민족사상은 고립될 수도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다는,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종교와 종파 종단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역사의 실체적 인물로 숭모(崇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종교는 그러한 것을 거부하고 단군을 자신들의 신앙 대상으로 가두어 놓았다. 당시 내가 만났던 대종교 청년들 일부는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둥 말로만 단군을 신으로 신봉하였지, 실제로는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라는 무신론적 관념에 빠져 있었다. 대종교인들의 신관(神觀)은 그토록 허약하였고, 교세가 약해진 것이 그 때문임을 간파하였다. 

 

 

입력 2008. 12. 10. 02:42수정 2008. 12. 10. 02:42

"상고사 문헌의 가치 재조명 필요" (daum.net)

국학원 학술대회 열려"신뢰못할 위서 단정 부당"1980년대 재야 사학자 이유립이 편찬한 < 환단고기 > 가 대중의 관심을 끌자, 환웅과 웅녀의 전설에 머물던 한국 상고사가 학문적 시비의 대상이 됐다. < 규원사화 > < 삼성기 > < 천부경 > 등 정사(正史)의 테두리 밖에 있던 사서들의 진위 논쟁이 뜨거워졌다.

학계의 중론은 "사료로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것. 20세기 들어와서 생긴 개념어가 등장하는 등 이 사서들의 많은 허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의 상식이 된 상고사 위서론을 따지는 학술대회 '단군ㆍ선도사서에 대한 위작설을 반박한다'가 국학원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주최로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국학원은 "상고사 문헌들이 고유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위작 논란으로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며 "한민족 고유의 선도(仙道) 사상의 원류로서 이 문헌들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기조발표를 맡은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민족주의적 맹신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20세기 이후 출간된 책을 모두 위서로 단정하는 태도"라며 "재야 사서를 인정하기를 덮어놓고 꺼리는 사학계의 태도가 혹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재 신채호가 상고사 문헌을 위서로 인식했다는 학계의 주장에 대해, " < 독사신론 > < 조선문화사 > 등을 쓴 맥락을 살펴보면 단재도 상고사 문헌을 존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반박한다.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는 발표문 '선도사서 < 규원사화 > 해제'를 통해, < 규원사화 > 에 대한 위작설을 반박한다.

그는 "1972년 서지학자ㆍ금석학자들에 의한 검증 결과, 이 문헌이 늦어도 조선 중기에 존재했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위작설을 일축하고 "이 문헌이 단군왕조의 실존을 보증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단군왕조사가 실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임 교수는 " < 규원사화 > 의 가치는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민족 자주의식에 있다"고 강조한다. "고려말 이암이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단군을 제시한 것처럼 양란 이후 조선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 규원사화 > 가 등장했고, 이것이 조선 말기의 단군 종교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회에서는 이밖에 < 단기고사 > < 삼성기 > < 천부경 > 등 위작설에 휘말린 사서들에 대한 다양한 발표가 진행된다.

 

 

 

입력 2003. 10. 6. 12:08수정 2003. 10. 6. 12:08

경기대 법대 교수이자 국사찾기협의회 부회장인 고준환 교수가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과 단군조선사"를 기고해 왔다. 고 교수는 언론인 출신으로 우리 상고사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바 있다....편집자 주지금부터 4336년전 10월 3일은 왕검단군께서 첫 민족국가 조선(고조선 또는 단군조선)을 개국하신 날이다. 우리는 10월 3일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개천절로 자랑스럽게 경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47대 단군 2095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사(實史)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신화로만 생각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실사로 생각하겠지만, 사대식민사학자를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화로 생각하는 것이 실정인 것 같다. 지금은 남북해외의 한민족 8천만이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대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려면, 주인의식을 갖고, 그 뿌리인 민족자주 역사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바, 사대식민사관이나 유물계급사관등으로 왜곡돼서 잘못 알려진「2천년 반도의 패배사」를 극복하고, 단군조선사를 포함한「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를 되찾아 자리매김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군조선사 2천여년이 신화로 몰려 부정되는 엄청나게 잘못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따른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조작왜곡 농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일제식민사학의 첫 기록은 일본의 사학자 동경제대의 시라도리(白鳥庫吉)교수가 AD 189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이라 했고 이어서 나가통세(那珂通世)가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를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조작했고, 그에 이어 1902년 금서룡(今西龍 = 이마니시류 이병도 박사의 스승)의 「단군고」등이 뒷받침하여 단군을 철저히 부정했다.

또 AD 1910년 한・일 합방이후 일제가 전국에서 민족고유사서 20만권을 모아 불사르고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고, 한국사를 일본역사 2600여년 보다 짧은 2천년이하로 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사 2천여년을 빼버리고 본격적으로 단군신화론을 왜곡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8・15광복 후에 이승만 정권은 민족정기를 찾는데 노력을 경주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를 탄압하고 해체하는 등 반민족적 행태를 나타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 말살・왜곡에 참여한 이병도 박사(서울대 사학과 주임교수), 신석호 박사(고려대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등이 해방 후에도 식민사학에 대한 반성 없이 강단사학을 사실상 장악하여 일제식민사학이 유지되고 전파되게 한데 큰 원인이 있다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천여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증과학적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유적과 사료인 문헌자료를 살펴보는 것인바, 먼저 단군조선의 유물유적을 살펴보자. △ 왕검단군이 단기 51년 부루태자 등을 시켜 강화도에 쌓은 정족산성과 마니산 참성단 △평양 강동군 대밝산의 구을단군릉 △흘달단군 50년(BC 1733년)에 벌어진 5성취루(五星聚婁)현상의 과학적 입증(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가 천문과학으로 입증)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묘비(환단고기 기록 입증) △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시 노은면 불상(장수왕 연호가 건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 입증) △ 단군조선의 성터(평양 낙랑성터,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영자성터, 내몽고 적봉성터 등 60여곳) △ 단군조선시대 암각화(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 △ 단군조선시대 고인돌(세계고인돌의 반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그 중에도 많은 곳은 강화도, 평양 문흥리 등 10개 지역, 경기 파주군 옥석리,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대구 대봉동 지역 등) △ 단군조선의 청동기문화출토(초기 청동기 유적〜요동지역, 평북 신암리 세죽리 유적, 평양시 금탄리유적,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등 7개 유적, 함북과 길림성 50개이상 지역에서 출토) (발달된 비파형청동검〜단기 13세기 요동지방부터 한반도를 거쳐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구주지방까지 전파됨.) △ 미송리형토기(단군조선의 대표적 토기, 평북 의주군 미송리동굴서 질그릇과 유골2구등 발굴), 채색토기, 흑색토기, 나무곽무덤, 귀뜰무덤, 벽돌무덤 등 다양한 출토물들 많음. 다음엔 단군조선사에 관한 문헌자료를 살펴보자. 단군조선에 관련된 사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응제시주, 해동역사, 산해경, 위서(魏書), 사기(史記)등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주사학자와 강단식민사학자 사이에 사료적 가치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대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서로 몰고가는 편에선 강단사학자는 이기백, 조인성, 송호정, 박광용, 송찬식 교수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선 것은 조인성 교수로 민족자주사학자들은 본다.

진정한 국사를 찾는 남・북사학계의 결론은 규원사화는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위서가 아닌 참된 사서임에 틀림없고, 환단고기는 부분적으로 가필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에 있어 이를 더 연구해야하나,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조인성 교수는 AD 1988년 논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71쪽)등 여러 논문에서 일부용어가 현대어라든지,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규원사화 단군기를 기술하는데, 저본인 진역유기나 원저본인 조대기(朝代記)를 안보았을 것이라는 것 등을 내세워 위서로 몰고 갔으나, 민족자주사학자인 이상시 변호사가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여 제압하고, 규원사화 단군기는 단군조선의 실사라고 결론 지었다.(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192면 참조) 조인성 교수의 이론을 제압하는 이상시 변호사의 글과 대동소이한 글이 북한에서도 나왔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 국사학계를 사실상 대표하는 후보원사 원로교수인 손영종박사는 AD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민족공동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 학술토론회"(필자참석)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며, 참된 사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은바, 이를 발췌해 본다.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이다.

③ 인용서목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이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이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다. 이 역사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⑥ 사상, 이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온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 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니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기록을 보고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로 될 것이 없다.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태백일사, 삼성기 그리고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 등을 국사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조인성 교수가 계연수 선생이 펴낸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대강 요지는 ①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사용연대에 관하여 BC 10세기 전으로 올라가기 어려운데, 단군조선 건국은 BC 24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한국 청동기 문화를 BC 5세기〜8세기경으로 잡았으나, 만주・몽골・중국등지에서 나오는 청동기문화는 BC 30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중국사학계의 유력 학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②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용어가 근대용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寧古塔, 文化, 父權, 原始國家〉등이다. 이들 용어는 옛날에도 사용했을 수도 있고, 필사하고 정서하며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필이나 손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히 가필여부를 밝혀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6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기 흘달단군 50년 천문학적 5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가 "대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 5. 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음 ⑥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현재 그런 사람이 없음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자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타계 직전 과거에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반 유물유적과 사료로 볼 때, 왕검단군은 지금부터 4336년전 아사달(백두산 천평 비정)에 첫 민족국가 조선(朝鮮→朝光鮮明에서 따옴)을 건국하셨다. 그 이념은 홍익인간, 광화세계(光化世界=光明理化)를 내용으로 하는 신선도로서 천하평화를 지향하였다.

고조선 초기 국경은 북으로 대황(흑룡강 흥안령 산맥)서는 설유(몽고 훈육), 남은 해대(중국 산동성), 동은 창해(한반도 동해)까지였다고 규원사화는 전하고 있으며, 그 후에 영역의 부침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는 왕검단군때 세 번 옮겼으며(백악산 아사달<길림성 돈화, 소밀성>. 요녕성환도산성. 장당경<황해도 문화현>) 그 후로 2세 부루단군때(환도산성) 22세 색불루 단군때(요동 험독현 창려) 34세 오루문단군때(낙랑홀=지금 평양) 44세 구물단군때(장당경) 각기 천도하였다.

단군조선은 1단군 3한 3사 8가의 기본체제와 화백(和白 고루살이) 민주제와 범금8조법 등의 법제가 있었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우현왕 고등의 자손으로 스스로 봉기하여 단군이 되어 후단군조선을 열었고, 단군조선사 가운데 기자(奇子)조선과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3조선관경의 하나인 변방 번조선(요녕성 지역)에서 생멸하였다.

독립운동가요, 민족자주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만이 희망이다"라고 하였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 한민족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되돌아보아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며,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이자 세계문화중심국으로서 열린 마음을 갖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오마이뉴스 기자 (ohmynews@ohmynews.com)

 

 

입력 2006. 12. 27. 13:46수정 2006. 12. 27. 13:46

100부작 대하사극 '단군' 기획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이번에는 단군이다.

SBS가 2008년 방송을 목표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조명하는 100부작 대하사극을 야심차게 준비 중이다. 드라마에서 단군을 본격 조명하는 건 처음이다.

SBS는 27일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등으로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이 크게 손상돼 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커져 있다. 현재 고구려 관련 사극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그러한 관심의 발현"이라며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의 전신이자 우리 민족 최초의 고대국가로 일컬어지는 고조선과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단군' 프로젝트 가동의 의의를 밝혔다.

 

드라마 '단군'은 '머나먼 제국' '남벌' '아마게돈' 등 만화 및 무협지계 유명 작가 야설록의 원작을 바탕으로 구성되며 신화 속 단군이 아닌 인간 단군과 그의 시대를 조명할 예정이다. 아직 극본과 연출은 정해지지 않았다.

SBS는 '단군'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주류 사학계의 이론과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 재야사서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할 예정이다. 고조선 1천500년의 역사는 일제하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신화로 규정되면서 아직도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에는 단군이 한 인물이 아니며, 고조선은 동쪽으로는 사할린부터 서쪽으로는 티베트에 이르는 대영토의 제국으로 기록돼 있는 등 보편적으로 알려진 단군 신화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SBS는 "단군과 고조선은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 원시적인 신화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으나나 드라마 '단군'에서 이야기할 BC 23세기의 동아시아는 대제국 배달국이 쇠퇴하고 수십 개 제후국들이 일제히 융기하던 전국시대였다"면서 "드라마 '단군'은 이러한 대혼란기를 배경으로 거대한 전쟁 장면과 한번도 선보인 적 없는 고대 제국의 면모를 구현하는 스펙터클한 서사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획을 맡은 구본근 책임프로듀서는 "'단군'은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라며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민족의 상고사를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은 무척 위험하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다방면으로 조사해본 결과 단군과 고조선을 조명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의의를 지닌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학계에서도 단군에 관련해서는 자문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그만큼 논란의 여지가 많다"면서 "드라마 방영에 앞서 단군과 관련한 다양한 입장과 학설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한 회 정도 준비해 방영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족의 시조를 다루는 사극인 만큼 '단군'은 기본적으로 역대 어떤 사극보다 스케일이 클 전망이다.

SBS는 "당시로서는 첨단무기였던 비파형 청동검, 사거리가 300m를 넘어가는 활 맥궁, 화살촉에 달린 피리에서 공포스런 소리를 내 적들을 떨게 만들었던 명적 등을 무기로 동아시아에 위명을 떨치는 한민족의 옛 모습을 통해 용맹한 한민족의 모습을 조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단군'에서는 단군과 배달국 공주 려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 려를 사이에 두고 영원한 숙적이 되는 당국 임금 요와의 대결 등이 펼쳐질 전망이다.

pretty@yna.co.kr

 

 

 

 

 

 

규원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저자[편집]

  • 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 말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고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간단하게 언급되었다.

전래 과정[편집]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1]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2]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3]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구성[편집]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 조판기(肇判記)
  • 태시기(太始紀)
  • 단군기(檀君紀)
  • 만설(漫說)

내용[편집]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淸平 李茗)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4]

단원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원사화서[편집]

서문에 해당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다.

조판기[편집]

〈조판기〉는 수백만 년간의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시기[편집]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며 1만 1천 년에 해당되는 ‘궐천년’ 간의 일이 설명된다.

탁록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

단군기[편집]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세우고 이후의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리는 1천 2백여 년간의 치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시 방면'이라는 북애자의 의견이 포함되었다.

〈단군기〉의 각 임금의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다.

  1. 단군(檀君) 임금 : 재위 93년 - 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우수하의 벌판에 수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임검성(壬儉城)이라 하였다.
  2. 부루(夫婁) 임금 : 재위 34년 - 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3. 가륵(嘉勒) 임금 : 재위 51년 - 기원전 2206년 즉위
  4. 오사(烏斯) 임금 : 재위 49년 - 기원전 2155년 즉위
  5. 구을(丘乙) 임금 : 재위 35년 - 기원전 2106년 즉위
  6. 달문(達文) 임금 : 재위 32년 - 기원전 2071년 즉위
  7. 한율(翰栗) 임금 : 재위 25년 - 기원전 2039년 즉위
  8. 우서한(于西翰) 임금 : 재위 57년 - 기원전 2014년 즉위
  9. 아술(阿述) 임금 : 재위 28년 - 기원전 1957년 즉위
  10. 노을(魯乙) 임금 : 재위 23년 - 기원전 1929년 즉위
  11. 도해(道奚) 임금 : 재위 36년 - 기원전 1906년 즉위
  12. 아한(阿漢) 임금 : 재위 27년 - 기원전 1870년 즉위
  13. 흘달(屹達) 임금 : 재위 43년 - 기원전 1843년 즉위
  14. 고불(古弗) 임금 : 재위 29년 - 기원전 1800년 즉위
  15. 벌음(伐音) 임금 : 재위 33년 - 기원전 1771년 즉위
  16. 위나(尉那) 임금 : 재위 18년 - 기원전 1738년 즉위
  17. 여을(余乙) 임금 : 재위 63년 - 기원전 1720년 즉위
  18. 동엄(冬奄) 임금 : 재위 20년 - 기원전 1657년 즉위
  19. 구모소(緱牟蘇) 임금 : 재위 25년 - 기원전 1637년 즉위
  20. 고홀(固忽)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612년 즉위
  21. 소태(蘇台) 임금 : 재위 33년 - 기원전 1601년 즉위
  22. 색불루(索弗婁) 임금 : 재위 17년 - 기원전 1568년 즉위
  23. 아물(阿勿)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551년 즉위
  24. 연나(延那) 임금 : 재위 13년 - 기원전 1532년 즉위
  25. 솔나(率那) 임금 : 재위 16년 - 기원전 1519년 즉위
  26. 추로(鄒盧)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503년 즉위
  27. 두밀(豆密) 임금 : 재위 45년 - 기원전 1494년 즉위
  28. 해모(奚牟) 임금 : 재위 22년 - 기원전 1449년 즉위
  29. 마휴(摩休)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427년 즉위
  30. 나휴(奈休) 임금 : 재위 53년 - 기원전 1418년 즉위
  31. 등올(登兀) 임금 : 재위 6년 - 기원전 1365년 즉위
  32. 추밀(鄒密) 임금 : 재위 8년 - 기원전 1359년 즉위
  33. 감물(甘勿)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351년 즉위
  34. 오루문(奧婁門) 임금 : 재위 20년 - 기원전 1342년 즉위
  35. 사벌(沙伐)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322년 즉위
  36. 매륵(買勒) 임금 : 재위 18년 - 기원전 1311년 즉위
  37. 마물(麻勿) 임금 : 재위 8년 - 기원전 1293년 즉위
  38. 다물(多勿)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285년 즉위
  39. 두홀(豆忽) 임금 : 재위 28년 - 기원전 1266년 즉위
  40. 달음(達音) 임금 : 재위 14년 - 기원전 1238년 즉위
  41. 음차(音次)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224년 즉위
  42. 을우지(乙于支)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205년 즉위
  43. 물리(勿理) 임금 : 재위 15년 - 기원전 1196년 즉위
  44. 구홀(丘忽) 임금 : 재위 7년 - 기원전 1181년 즉위
  45. 여루(余婁) 임금 : 재위 5년 - 기원전 1174년 즉위
  46. 보을(普乙)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169년 즉위
  47. 고열가(古列加) 임금 : 재위 30년 - 기원전 1158년 즉위해서 1128년까지 30년간 통치하였다.
  •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1205년간 지속되었다.

만설[편집]

북애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풀어 서술하였다.

진위논란[편집]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5]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른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7][8]

위서론[편집]

《규원사화》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환단고기》류'로서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한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진서론[편집]

위서론에 반박하고 진서임을 주장하여 《규원사화》의 내용의 실제 역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규원사화》는 다른 단군관계비사들에 비해 과장이나 가필이 적다고 판단, 일부 내용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라는 설에 동의하지만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1975
  •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1981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비주류사상인 선가(仙家)의 역사인식에 주목하였다.

  • 심백섭,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3

국립중앙도서관의 인증[편집]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귀중본 《규원사화》의 지질을 비롯한 사항을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9] 그러나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 한국사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10]

위서론 및 반론의 주장[편집]

다음은 현재까지 제시되어 있는 규원사화의 위서론 및 반론이다.[8][11][12]

위서론반론

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특히 文化는 당시의 의미인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culture의 의미로 쓰였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13] 조인성 교수가 말하길 先民,民氣라는 단어는 중국 고전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고, 天主또한 숙종 이전에 알려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 교수의 [culture가 문화로 번역되어 사용된 것이 일본에서부터]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숭녕 박사의 [한국언어발달사]를 제시했으나,일제 이후 각 분야에 새로운 일본식 한자어가 침투했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 [culture를 뜻하는 문화라는 글자가 원래 일본에서 사용되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주장과 거리가 있다.
후대에 출간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사>에서 잘못 인용한 내용이다. 《규원사화》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럼 둘 중에 하나는 다른 하나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해동역사》에는 전거가 된 문헌을 모두 밝히고 있지만 《규원사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전거가 된 다른 문헌에서 이 잘못된 인용구를 찾을 수 없다.[14] 규원사화의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기존의 역사책을 인용하여 내용을 서술하고, 쟁점이 되는 사항을 비교한 다음,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순서로 책을 쓰고 있다. 규원사화는 인용할 때 대부분 曰을 넣고 이따금 按,云으로 표시한다. 조인성 교수의 의견처럼 고려사를 인용했다면, [高麗史 曰] 또는 [高麗史 云]으로 시작되는 [고려사에 의하면]의 형태를 띄어야한다. 하지만[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라는 문장형식을 띄고 있고, [의하면]에 해당하는 云자가 白頭山外居之 다음에 씌여 있다. 해동역사에서는[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로 씌여있는데, 여기에도 고려사 다음에 云이 들어있지 않다. 규원사화나 해동역사의 저자들이 직접 고려사를 인용하지 않고, 고려사 광종 10년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 라고 쓰인 다른 책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15]
저자는 〈만설〉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으나 숙종 원년은 전란과 같은 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문맥을 고려하면 문제 없는 내용 전개이다. 빼앗긴 강토는 발해의 영토인 만주와 요동을 의미한다.
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다르다. 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 산속에 숨겨둔 도교 계열의 책이어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없다.
  • 고려 시대에 저술된 《삼국유사》에서도 '治'자는 쓰이고 있다.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이후 2백여 년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자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애자의 생각을 적은 만설에 '경주의 첨성대는 천수백 년이 지났는데 우뚝 솟아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규원사화가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1675년이고 첨성대는 선덕여왕대(632년~647년)에 건립 되었으니 맞지 않다. 송호정 교수가 말하기를 [관자23권][경중갑]편에서 조선이 제나라와 8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거리는 8000리가 안되는데,이 말은 곧, 고전 특유의 과장법으로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16] 위의 예에서 보듯이, 북애자의 [천수백년이 지났다는] 말 또한 과장법으로 오래되었다라는 뜻이다.
1889년 일제 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구절을 인용한 1914년에 김교헌이 쓴 《신단실기》의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을 가지셨으나 그 형제를 드러내지 않고 최상지천에 앉아 계시니(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구절이 《규원사화》에 들어있다.[17]  

역사적 인식[편집]

민족주의사학과 관련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 이해, 사대모화사상의 비판, 북방 중심의 역사 인식, 단군의 민족의 기원으로서의 인식 등과 같은 역사적 인식을 주목하기도 한다.[12]

 

[단기고사]

출처;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tongilnews.com)

  • 입력 2022.08.30 13:51  수정 2022.08.30 15:55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30)

  • 기자명 이양재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지난 제13회 연재에서 기자(箕子) 동래(東來)의 허구성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에서 쟁점이 되는 한사군(漢四郡)과 이부(二府), 그리고 위만(衛滿)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후 출현한 『단기고사』와 『부도지』 최근에 출현한 『화랑세기』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8) 후기 고조선 멸망과 고구려 건국 사이의 여러 나라, 그리고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위만과 사군(한사군) 및 이부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쟁점이었다. 이를 두고 “민족적 시각으로 판단하느냐 사대적 시각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민족사학이냐? 식민사학이냐?”가 구별된다. 그만큼 민감하고 중대한 쟁점이다.

 

가, 위만, 사군, 이부

필자는 제13회 연재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조선시대 사대사학자들이 말하는 기자(箕子) 동래가 허구임을 주장하며, “오늘날에는 요동(遼東)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가 중국과 크게 다르고, 한(漢)나라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자동래설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중국의 기자와 고조선의 기자를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도 나온 바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현재는 민족사학계이든 강단사학계이든 기자의 동래를 부정하는 것은 남북역사학계 공통의 보편적 시각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단군조선의 멸망한 이후 기자조선이 아닌 후기조선이 나왔으며, 그 후기조선의 개국자(開國子)를 기자(箕子)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라는 관점이나 “중국의 기자와 조선의 기자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관점마저 형성하게 한다.

 

(1) 위만 조선의 정체성

『삼국유사』 「위만조선」, 1512년 정덕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여기에서는 ‘위만(衛滿)’을 ‘위만(魏滿)’이라 적고 있다. 위만에 대한 최고의 기록은 『사기(史記)』인데, 거기에는 단지 ‘조선왕(朝鮮王) 만(滿)’이라고만 적고 있다. 그런데 후한(後漢)대에 쓰여진 『잠부론(潛夫論)』에서 처음으로 ‘위만(魏滿)’이라는 표기가 보이고, 이후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위만(衛滿)’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위만(魏滿)’으로 적고 있다.

 

위만(衛滿, BC 3세기 후기~BC 2세기 전기)은 누구인가? 그동안 학계에서는 그를 고조선계 유민이나 한인계(漢人系) 연인(燕人)으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 왔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위만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한 후, 자신의 벗이었던 노관(盧綰)을 전국 7웅의 하나였던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연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기록 때문에 위만이 노관의 부하 장수로 알려졌으나, 『사기』 「노관열전」에는 위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는 노관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로 보인다. 위만에 관해 기록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불과 수십 년 차이밖에 나지 않은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이 쓴 『사기』로 보아야 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위만이라고 알려졌지만, 『사기』에는 단지 이름 ‘만(滿)’뿐, 성씨 ‘위(衛)’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만은 후대에 중국학자들이 만왕을 중국계 유민으로 단정하고 동북지역에서 흔한 중국계 성씨인 ‘위(衛)’씨를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분석도 있다.

즉, 『인물한국사』 「위만(衛滿)」 항목에 의하면 “『사기』에는 조선의 왕 만(滿)은 옛 연나라 사람(故燕人也)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나라 초기에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고, 옛 연나라가 멸망(B.C. 222)한 후 최소 20년 이상 1천명 이상의 세력을 거느리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동쪽 변경에서 세력을 키웠던 부족장 정도로 볼 수 있다. 그가 1천명의 부하들과 함께 북상투와 고조선의 복장을 하고 망명했다는 점은, 그가 본래 고조선 출신의 사람이었음을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그는 B.C. 3세기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1천리 땅을 빼앗았을 때, 연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후손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준왕에게 쉽게 신임을 얻고 왕위를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의 출신 때문이라 하겠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 일본의 정한론파 사학자들은 그가 중국 유민이라고 여기고, 위만조선을 중국의 식민정권이라고 하여 조선의 역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가 이민족 출신이라고 해도 그가 다스렸던 고조선이 다른 나라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만은 왕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고조선 역사를 단절시키지 않았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후 고조선을 흔히 위만조선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구분을 하기 위한 것일 뿐, 그는 나라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여전히 (고)조선이었으며, 수도 역시 왕검성(王險城) 그대로였다.

그가 임금이 된 것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이 있을 법하지만, 그는 큰 문제 없이 고조선을 안정시켰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중원 땅에서 온 수만 명의 망명객이 고조선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앞선 고조선 시기에 비해 이때 중원문화가 고조선에 일정하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이 중원의 망명객을 받아들인 것은 후기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準王)이었고, 그것은 당시에 인구를 늘리고 국력을 키우기 위한 국가전략의 하나였다.

위만이 이들 망명객을 규합하여 권력을 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가 중원의 문물을 가져와서 고조선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준왕의 정책이 만든 기회를 잘 이용했을 뿐이었다. (참조 : 『인물한국사』 「위만(衛滿)」, 2011년)

지난 8월 5일 자에 독자이신 임찬경 박사께서 보내주신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2019. 한국학술정보) 1책이 도착하였고, 8월 25일에는 자신의 논문 「위만조선(衛滿朝鮮) 시기의 창해군(滄海郡)과 무제대(武帝臺) 위치 연구」 파일을 카톡으로 보내 주셨다. 임찬경 박사 “논문의 결론은 서기전 128년에 설치된 창해군은 한반도 혹은 그 인근 요동반도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창해군과 마찬가지로 위만조선도 한반도나 혹은 그 인근 요동반도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서기전 110년에 세워진 무제대는 현재 중국 창주(滄州) 동쪽에 있는데, 그 곳은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었던 지역의 일부라는 것이다”라는 매우 중요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위만에 대한 최근의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이른바 위만조선의 국가적 정체성은 허구이며, 그는 후기 고조선의 권력을 찬탈한 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 위만은 역사에 기록된 우리 민족 최고의 쿠데타 주모자로도 지적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사군의 실체와 의미

사군(四郡)은 한사군(漢四郡)을 말한다. 전한(前漢)의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네 개의 군급 행정구역이다. 사군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진번군이 폐지된 자리에 대방군이 세워졌기 때문에, 명칭으로는 총 5개 군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제의 정한론 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존재를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확대 해석하여 우리 민족의 고대사 인식을 왜곡하는 악영향을 끼쳐왔다.

① 낙랑군(樂浪郡) : BC108년 ~ AD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② 진번군(眞蕃郡) : BC108년 ~ BC82년. 토착민의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이 폐지되고 낙랑군에 편입되었고, 낙랑군 남부도위가 설치되었으나 3세기 초 한(韓)족 및 예족의 세력이 강해지고 삼한으로 망명하는 유랑민의 수가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낙랑군 남부도위에 해당하는 7개현을 독립시켜 진번군 자리에 대방군(帶方郡, 204년경~314년)을 재설치하였다. 낙랑과 함께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③ 현도군(玄菟郡) : BC107년 ~ AD404년. 창해군 자리에 설치되었다가 BC75년 고구려, 옥저 등 토착민의 저항을 받아 요동 근방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1세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무순(撫順) 지역으로 재이전되어 4세기 이후 모용선비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한사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하였다.

④ 임둔군(臨屯郡) : BC108년 ~ BC82년. 이후 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사군에 대하여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은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 현도 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요동설을 주장했고,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약천집(藥泉集)』 「패수(浿水)」조에서 “패수가 요동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하고, 답 이찰방 세구(答李祭訪 世龜)에서는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 땅에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중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라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조선시대의 학자군이 형성되었다. (참조 : 이덕일, 『한국 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⑩ 「조선 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을까?」)

또한 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나 위당 정인보 등등 제1기와 제2기 민족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부정하였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한나라 관계」를 다루며 “(중략)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선 역사상의 쟁점이다.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씨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지금의 개원(요령성 동북쪽) 이북은 당시에는 북부여 땅이었다. 지금의 흥경 동쪽은 고구려 땅이었다.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 땅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 땅이었다. 따라서 이 네 지역 밖에서 한사군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우리 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남과 북의 역사학계에서 활발해지면서 사군 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남측은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학설로 정리하였다.

북측에서는 조선시대 실학자들과 단재 신채호의 관점에 따라, “평양의 낙랑 유적은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 최이(崔理)의 낙랑국의 유적으로 낙랑국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랴오닝성(요녕성) 지역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북에서는 평양 락랑구역의 고분 및 유물들이 모두 낙랑국의 것이라 한다. 낙랑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남북한 학계의 세부적 주장이 다르지만, 남측에서도 점차 북측 학계의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3) 이부의 실체와 의미

『삼국유사(三國遺事)』 ‘이부(二府)’에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 BC82)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 (一然 註 :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 현토 임둔 낙랑 등 네 군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즉 ‘이부’는 사군의 후기 모습을 명칭만 달리 한 것이니 별로 의미가 없다.

 

나. 우산국

위에서 언급한 위만과 사군, 이부는 실체가 미약한 것을 침소봉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약하지만 실체가 확실한 해상국가가 있었으니, 동해상의 우산국(于山國)이다. 이제 우산국에 대하여 살펴보자. 필자가 여기서 우산국을 특별히 다룬 것은 독도(獨島)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1) 우산국

『삼국유사』, 1512년 정덕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의 일곱 번째 행에 ‘우산국(于山國)’의 정벌 사실을 싣고 있다.

 

우산국(于山國)은 지금의 울릉도에 있었던 고대의 소국이다. 우산국의 존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6월에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서 실존 국가임이 확실시된다.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4에 의하면, 내물왕 4세손인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 현재의 강릉)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사부가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력(威力)으로는 오게 하기 어렵지만, 꾀를 쓰면 굴복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師子) 모형을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알리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맹수를 풀어서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 곧바로 항복하였다”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에 동해상의 소국으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우산국이 있었던 울릉도에서도 여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있다. 즉 울릉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늦어도 청동기시대였던 것 같다. 언제라도 울릉도에서 선사유적과 유물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독도에도 선사유적이 있을 수 있다고 보며, 독도에 대한 고고학계의 정밀 탐사도 촉구한다. 독도는 우산국시대에도 무인도였을 것이며, 다만 어로(漁撈) 활동을 위하여 우산국인들이 들렸던 유적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심정적으로는 나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가 모두가 진본(珍本)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판단력은 이러한 나의 심정적인 소망을 거스른다. 이 책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고양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본질을 몽환적으로 왜곡하여 흔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책들로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1) 『단기고사』에 대하여

『단기고사(檀奇古史)』는 719년(무왕 1) 3월 3일 발해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탈고한 것으로 주장하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연대기이다.

원문은 발해문이었는데, 약 300년 뒤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며, 「저자의 말」과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단기고사』는 71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및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고 하지만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과 유응두의 등사본도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의 중간서(重刊序)와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가 부록되어 있으나, 이것이 진짜 서문인지 조차도 의심된다. 특히, 신채호가 『단기고사』를 단기(檀奇) 2000년사의 실사(實史)라 찬양하였다던가. 또한 출판인 김해암(金海菴) 이화사(李華史)의 출간경로(出刊經路)는 이 책을 한말에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롯하여, 마침내 광복 후기에 출판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며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해방후에 만들어진 주장으로 보인다. 정작 신채호나 이경직은 『단기고사』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1월 11일 경북대학교 김주현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는 ‘한국문학언어학회 동계학술발표대회’에서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 문제'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해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단재 신채호로 알려졌지만, 중간서의 내용·형식·문체 등을 고려할 때 신채호와 광복회 활동을 같이한 화사 이관구(華史 李觀求. 1885~1952)가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김 교수는 “중간서 마지막 부분에 글 쓴 시점을 임자중춘(壬子仲春, 1912년 음력 2월)으로 밝히고, ‘단기고사를 이 당시 중국 안동현에서 보았다’라고 적고 있으나, 단재는 1911년 12월 중순부터 1912년 5월5일까지 신문발간 사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1907년에 이경직이 썼다는 서문에 1909년에 단군교로 창교(創敎)하여 1910년에 이름을 바꾸어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大倧敎)’가 등장하며, 또한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쓰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大祚榮)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년~737년)는 ‘인안(仁安)’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이것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도 내용에는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의 근대에 등장한 용어를 사용하였고, 황당하게도 기구와 전화, 엑스레이와 잠수선, 비행기, 사진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필자는 이관구이던, 아니면 다른 누구이던, 『단기고사』는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김광의 『대동사강(大東史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해방 직후에 저술된 것으로 판단한다.

 

(2) 『부도지』에 대하여

『부도지(符都志)』는 삼국시대 신라학자 박제상(朴堤上)이 저술한 것으로 전하는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서라 주장되는 책이다. 박제상 사후에 박 씨 종가에서 필사되어 전해왔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 세조 이후에는 영해 박씨들이 숨어 살게 되면서 숨겨졌다가, 김시습이 저술한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 의해 원본 『징심록』과 그 속에 있던 『부도지』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현존하는 『부도지』는 1953년 울산에 있던 영해 박씨 55세손인 박금(朴錦, 1895~?, 본명 박재익)의 복원본을 말한다. 박금에 의하면, 해방 후 월남할 때 여러 대에 걸쳐 전수받은 원본을 함경남도 문천에 놓고 왔고, 분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원본에 가깝게 남한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이리도 이유립의 『환단고기』의 경우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지‥‥‥, 박재익의 『부도지』를 이유립의 『환단고기』로 표절한 것은 아닐까?

1984~5년쯤의 일이다. 당시 ‘한국고서동우회’의 연락처인 공평동 ‘한국출판판매(주)’의 고서부(古書部)에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찾아와서 “『부도지(符都志)』가 나오면 매수하겠다”라고 말하였다며, 부탁을 받은 직원이 그 책에 대하여 내게 물어 온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부도지』를 본 적이 있는데, 목활자본으로 채 열 장이 되지 않는 책”이라고 답변하며 매우 희소하여 구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부도지』가 1986년에 번역본이 나와 공급되었디. 문제는 내가 본 『부도지』는 번역되어 나온 『부도지』와는 전혀 다른 책이라는 점이다. 원래 『부도지』라는 고서는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마고에 대한 책이 아니라, 도참(圖讖) 서적(書籍)으로 기억하고 있다. 즉 지금의 『부도지』는 이름만 빌려 온 것이다.

 

(3) 드러나는 『화랑세기』의 실체

신라 진골 출신의 귀족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郎世記)』란 제호의 저술을 남김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신라의 왕호에서부터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으나 그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디. 그런데 1989년 2월에 박창화가 남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발췌본, 32면)을 서울신문이 공개하였고, 6년 뒤 1995년 4월에는 일본 궁내성 용지에 필사되어 있는, 그 전 발췌본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의 필사본(162면)이 공개되었다. 이 필사본은 일제하인 1933∼44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황실 도서관)에서 조선전고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 소장본을 필사한 것으로 성급하게 추정(推定)하였다.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僞書)가 아닌 진본(珍本)이라는 주장도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냐 소설이냐는 박창화의 유고(遺稿)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결론이 날 것이고, 그러한 전체를 보고 판단하는 연구를 역사학계 일각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즉, 2007년 12월 13일 오후 5시 동국대 문화관에서 개최된 ‘동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동국대학교 겸임교수인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를 비교하는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수」를 발표하였다. 그 발표애서 박남수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진 시기(1930, 40년대)보다 앞선 1930년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흡사한 45쪽의 소설책(가칭 ‘소설 화랑세기’)과 이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가 ‘소설 화랑세기’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됐고 비슷한 내용도 다수 발견됐다”라며 “이에 비춰보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소설 화랑세기’처럼 화랑을 다룬 박창화의 역사소설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마. 맺음말

우산국은 동해상에 있었던 실존적인 국가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이라든가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는 제각각이다. 특히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사실상 따지고 보면 하나의 작은 성읍(城邑)을 황당하게 국가 규모로 침소봉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위만에 대한 민족사관적 관점은 위만은 원래 고조선 사람이므로 조선이라는 국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그가 다스리던 위만조선은 평양이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었다. 또한 한사군은 그리 강력한 군(郡)이 아니었고,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도 요동지역에 있었고, 평양의 낙랑 유적은 최이의 낙랑국(樂浪國) 유적이다.

나는 1959년 한글 번역본 『단기고사』를 1978년경에 통문관에서 구입하였고, 『화랑세기』는 1999년에 출판된 이정욱 역주해본과 2002년에 출판된 김태식 본을 가지고 있다. 『화랑세기』는 『단기고사』나 『부도지』, 『환단고기』보다도 진위서(眞僞書) 논쟁이 더 치열하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본이냐는 소설이냐는 것은 박창화의 유고(遺稿)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결론이 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진서라 보기에는 허점이 많다.

『단기고사』나 『부도지』, 『환단고기』, 『화랑세기』의 공통점은 모두 해방후에 나왔고, 모두 필사본의 형태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부도지』와 『환단고기』는 잃어버린 책으로 그 내용 기억을 되살려 재구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자신들이 지어냈다는 말을 실토하는 수식어(修飾語)로서, 위서를 진서로 주장하는 한 반복적인 패턴(pattern)이 되었다.

필자는 심정적으로는 이 책들을 모두가 진본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판단력은 심정적인 소망을 거스른다. 이 책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고양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본질을 몽환적으로 왜곡하여 흔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책들이라고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러한 책들에 현혹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웃음꺼리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매우 심각한 일이다.

 

양해의 말씀

제가 9월 15일경부터 30일까지 국혼의 재발견에서 소개한 역사 자료 일부와 독립운동가 자료 및 관련 미술품 100여 점을 엄선하여 전시를 하려 합니다. 매주 화요일 연재하는 본 연재의 원고를 작성하느라 그 준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시 준비를 위하여 『국혼의 재발견』 연재는 두 주일 정도 순연해 9월 20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백민 이양재 배상 

 

 

 

김여진입력 2022. 12. 5. 05:00

‘아라리’ 한자 표기 최초 발견
아리랑 유래·어원 연구 전환점
“후렴 아닌 곡명 정착 가능성
정선아리랑 정통성 확보 강화”
▲ 왼쪽부터 아라리를 한자로 표기한 삼도탐요 일부. 붉은 색 원 안에 아라리 한자 표기가 선명하다. ‘음아어이오’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부분 일부. 아라리를 설명하는 한시가 실린 책 ‘해동죽지’ 표지.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을 맞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아리랑 유래 연구의 실마리를 풀 문헌이 새로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아리랑연합회는 ‘아라리’를 같은 한자로 표기한 동시대 문헌 2건을 최초로 발굴, 본지에 보내왔다. ‘아라리’를 한자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들이다. 의미없는 후렴구로 여겨졌던 ‘아라리’가 고대부터 ‘노래’, ‘소리’를 이르는 뜻을 가진 어휘임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간 학계에서 어원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아리랑’ 3음절이 아닌 ‘아라리’라는 용어에서부터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40여년간 아리랑을 연구해 온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아라리를 한자로 표기한 자료는 이들 문헌이 최초로 아리랑 역사에서 획기적 발굴”이라며 “19세기 말∼20세기 초 같은 시기에 활동한 두 지식인이 ‘아라리’를 같은 한자로 표기하고 있는만큼 이 시기 이전부터 뜻을 가진 어휘로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두 문헌은 대종교를 세운 하상역(1859-1916)이 1912년 펴낸 ‘삼도탐요(三道探要)’와 1921년 조선말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다.

먼저 ‘해동죽지’는 최영년이 역사적 사건과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세시풍속 등을 시로 표현한 책이다.

아라리. 이 책에 나오는 시의 제목이다. 번역하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이 노래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퍼져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소리가 슬픈 원망조이고, 뜻이 음란하고 가락은 낮고 슬프며 여운이 없다. 이 음악은 대개 말세의 음악으로 지금도 불리는데 ‘아라리타령’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아라리’를 구체적인 곡명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아라리’가 ‘아리랑’이라는 말이 조어되기 이전의 용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다른 문헌 ‘삼도탐요’는 대종교의 영가무도(詠歌舞跳)를 대중화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김일부에게 이어받은 정역사상과 영가무도(詠歌舞跳) 대중화에 힘쓴 하상역이 썼다. 책의 첫 표제부터 ‘아라리’로 삼아 영가무도의 ‘음악’과 ‘노래’를 설명하고 있다. 영가무도 음악에서는 우리나라 5음을 상징하는 ‘음아어이오’가 현대 아리랑의 ‘아라리’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다.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연대기 ‘단기고사’에도 “노인은 영가(詠歌)하고 아이는 무도(舞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가무도’가 고대의 전통 심신수련법이라는 무용계 연구 등을 고려하면 당시 고대 음악의 후렴구인 ‘음아어이오’가 ‘아라리’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라리’가 유래 깊은 고어(古語)임을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 ‘벙어리’, ‘옹알이(옹+아리), ‘메아리’의 단어에서도 ‘아리’가 ‘소리’, ‘노래’, ‘말’이라는 뜻을 가진 고어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에 대해서는 개인적 노래에서 17세기 집단 노동요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ㅇ’이 첨가되며 나온 용어라고 설명, “이 3음이 원래의 어원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문헌에 나온 ‘아라리’ 기록을 종합하면 ‘아라리’는 노래나 소리의 뜻을 가진 의미있는 어휘라는 점, 후렴 뿐 아니라 곡명으로 정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어르신들이 그냥 하는 말, 강원도 방언 정도로 치부했던 ‘아라리’라는 말이 실제로는 영가무도를 비롯한 고대 음악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며 “정선지역 분들이 아라리를 이어온만큼 정선이 명실상부 유서깊은 아리랑의 고향이라는 정통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리랑연구회는 오는 23일 서울에서 ‘아리랑의 역사, 그리고 어원’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고 이번 문헌 발굴의 의미를 심층 분석한다. 김여진

 

 

입력 2014. 5. 13. 03:10수정 2014. 5. 13. 03:58

"非정통 역사서 환단고기-단기고사 재조명을" (daum.net)

 
제1회 상고사 학술대회 13일 열려

[동아일보]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졸본)은 중국이 아닌 동몽골에 있는 지명이다."

13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제1회 상고사 학술대회'에서 최기호 울란바토르대 석좌교수가 발표할 '언어학으로 본 한국역사 용어의 왜곡 문제'에 포함된 내용이다. 최 교수는 광개토태왕비문 기록과 몽골 현지답사를 통해 홀본(졸본)이 동몽골 도르노드 아이막 인근 '할힌골'일 가능성을 주장한다. 할힌골의 한자 표기가 홀본의 다른 호칭인 흘승골(紇升骨)과 같고 고구려 시대 것으로 보이는 성터 유적과 석인상 2기가 발굴됐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는 상고사의 비주류 학설 6건의 주제발표가 이뤄진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 발표에서 동호계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 신화와 예맥계 부여·고구려의 건국신화의 유사성을 토대로 예맥과 동호(몽골, 선비, 거란, 여진)가 한족과 차별되는 동일 조상의식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사서(史書)에는 위서(僞書)는 없다' 주제 발표에서 정통 역사서로 인정받지 못하는 '환단고기'나 '단기고사'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진철 원광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고대국가 대왜(大倭)의 기원과 한(韓)'에서 마한의 속국 중에 일본인이 '야마토'라고 부르는 대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국'이 있다는 점을 들어 마한과 대왜가 모국과 분국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02-2012-6149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출처; '檀奇古史' 중간서 저자는 단재 아닌 이관구 (daum.net)

'檀奇古史' 중간서 저자는 단재 아닌 이관구

입력 2008. 1. 13. 07:05수정 2008. 1. 13. 07:05
 

김주현 경북대 교수 논문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단재 신채호 전집에 실려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 번역본의 중간서(重刊序.중간서문)는 단재가 쓴 것이 아니라 단기고사의 역자이기도 한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1885-1953)가 직접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주현 경북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 문제'에서 중간서의 내용과 문체, 형식 등을 분석해 이같이 주장했다.

단기고사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 썼다고 전해지는 단군조선ㆍ기자조선의 연대기로 1949년 화사와 해암 김두화가 낸 번역본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단기고사는 단군신화를 담은 '환단고기' 등과 함께 진위 논란에 휩싸여 왔는데 서문 마지막에 '단재 신채호 식(識)'이라고 적혀 있는 중간서는 단기고사가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핵심 근거 중 하나가 돼왔다.

단재는 중간서에서 책을 접한 동기를 소개하면서 "책 모양은 비록 오래돼 헐었으나 진본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그 유래를 물었다"고 적고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중간서에서 단재는 임자년(1912년) 중국 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화사의 부탁으로 중간서를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러 기록들을 나타난 단재의 행적을 볼 때 이 시기에 단재가 안동현에 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형식과 문체면에서도 ▲한문본인 단기고사에 국한문체로 서문을 쓴 점 ▲직접 번역 능력이 있는 단재가 '후인(後人)이 번역해 속간'하길 바란다는 구절을 쓴 점 ▲'주인공'이라는 표현과 일본어식 표현 등 여타 단재의 글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사용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와 함께 단재가 1914-1915년 쓴 '대동제국사선언'에서 단군사가 전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과 1916년 쓴 '꿈하늘'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구려사 등을 언급하면서도 단기고사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단재가 1912년 단기고사를 접했다는 점을 의심케 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진(眞)애국자론 등 중간사의 내용은 화사의 '의용실기'의 내용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화사는 사료 선택에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였던 단재를 끌어들임으로써 단기고사의 신뢰성을 높이려했던 것"이라며 "그러나 정작 단재의 문체나 사상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고 또 단재가 자신의 글에서 단군사가 전하지 않는다고 직접 기록해놓음으로써 결국 위작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전에도 중간서가 단재의 글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은 제기됐으나 정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못했다"며 "단재와 화사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화사가 단재의 이름으로 중간사를 쓴 것은 단재 사후의 일로, 단재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mihye@yna.co.kr

 

단기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이 8세기경에 편찬했다고 주장되는 역사서이다.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과 1990년에 복원된 한문초략본(백산본)이 확인되고 있다. 그 내용이 각 시대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로 평가한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옛 역사’라는 의미로, ‘전단군조선(前檀君朝鮮)’과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으로 나뉜 47대 단군의 재위 기간과 각 시대의 주요 기록, 약 2천여 년에 걸친 역사와, 전단군조선보다 늦게 시작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42대 1천여 년의 일을 시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1]

출간 경로 및 유래[편집]

  • 〈저자의 말〉과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단기고사》는 72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및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로 원판과 간행본이 소실되었으며, 1949년 간행본을 다시 한문본으로 복원했고,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이 복원본이다.
  • 1990년에 국한문 번역본이 실제 내용과 다름을 지적하여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는 한문초략본이 공개되었다.[2]

내용[편집]

1959년 국한문본의 구성[편집]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출간 및 책 내용과 관련된 자료
    • 보충 자료 - 역대총계표, 각종 기사, 역대약기, 전단제. 후단제. 기자조선 지도.
    • 단기고사중간사(김재형), 단기고사중간서(정해박), 본사출간경로(김재형, 정해박, 이종국) 등 출간 정보.
    • 보충 자료 - 국조단군칙어, 원본국가, 천부경
    • 단기고사재편서(발해국 대야발)
    • 단기고사중간서(이경직), 단기고사중간서(신채호)
  • 본문
    • 제1편 전단군조선
    • 제2편 후단군조선
    • 제3편 기자조선

국한문본의 내용[편집]

국한문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문초략본은 47대 1168년간으로 기록되어 《규원사화》와 비슷하다.)

  1.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B.C.2512)
  2.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1. 3년, 도량형 통일 (B.C.2416)[3]
    2. 58년, 일식.
  3.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1. 2년,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選)
  4.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1.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 상류에 설치.
  5.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1. 13년, 혼천기(渾天機)를 제조. 태양 등 항성, 혹성, 중성의 원리와 9개 행성, 지동설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역서 제작
  6.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7.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8. 우서한(于西翰)단군 : 재위 8년
    1.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대궐에 들어왔는데, 날개 너비가 석 자였다.
  9.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1. 원년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10. 노을(魯乙)단군 : 재위 58년
    1. 16년, 장백산의 누운 돌이 일어나고, 발해에 용귀(龍龜)가 나타나고, 흑수(黑水) 강가에 금괴가 노출되니 수량이 열한섬이나 되었다.
  11. 도해(道奚)단군 : 재위 58년
    1. 48년,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 양수기, 자행윤선차, 경기구, 자발전차, 천문경, 소금천리상응기, 진천뢰, 어풍승천기, 흡기잠수선, 측우기, 측한계, 측서계, 량우계, 측풍계, 사진계 등 제조
  12.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1.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창해역사 여홍성은 비석을 지나며 시를 읊었다.
  13. 흘달(屹達)단군 : 재위 61년
    1. 16년, 지방자치제 실시.
    2. 20년, 법정학교(法政學校) 설립
    3. 태양의 원리 및 빛이 7개로 나뉘어 있고 흡수하면 검은 색이, 반사하면 흰색이 된다는 것을 검증.
    4.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14.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1.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어 호구조사. 총계 1억 8000만 명.
  15. 벌음(伐音)단군 : 재위 51년
  16.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1. 28년 만국의 제후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회의.
  17.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1. 20년, 일식.
  18.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19. 종년(縱年)단군 : 재위 55년
  20.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1. 40년 공을홀이 천하의 지도(세계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21.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22.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23. 아홀(阿忽)단군 : 재위 75년
  24.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1. 10년, 정치원론 저술
  25. 솔나(率那)단군 : 재위 89년
    1. 39년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김(후 단군조선), 서여가 기자조선 건국 (B.C.1291)
  26.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27.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28.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1. 11년 태풍이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니, 천하의 육지에 고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29.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1. 8년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다.
    2. 9년 가을에 남해(南海)의 조수가 석자(三尺)나 물러났다.
  30. 내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31.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32.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1. 13년, 3월 일식.
  33.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34.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1. 10년, 두 해(兩日)가 함께 떠오르듯 왕무(黃霧)가 사방을 덮었다.
  35.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1. 6년, 황충의 피해와 홍수.
    2. 8년, 일식.
  36.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1.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B.C.855)[4]
    2. 30년, 성리학, 심리학 저술
    3.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4. 50년, 의학화학 저술
  37.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38.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39.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1. 21년 일식.
  40.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41.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1. 4년, 종교론 저술
  42.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1. 5년, 지리학, 광물학 저술
  43. 물리(勿理)단군 : 재위 25년
    1. 8년, 논리학원본설 저술
  44. 구물(丘勿)단군 : 재위 40년
    1. 3년, 일식.
    2. 5년, 동물 및 식물학 저술
    3. 16년, 백과서 저술
  45.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1. 28년, 의학대방 저술
    2. 40년, 자본론 저술
  46.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47.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1. 22년, 건축학 저술
    2. 25년, 종수학(種樹學) 저술
    3. 기자조선 멸망, 위만조선 건국 (B.C.194)
  • 고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512년 ~ 기원전 416년에 해당되며,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44년 7개월이다. 기록상 전단조선의 치세 기간은 1214년간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계산하면 1222년간이다.
  • 기자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1291년 ~ 기원전 194년에 해당되며, 42대 1097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26년이다.[5]
  • 국한문본 《단기고사》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그 연대는 서로 다르나 왕의 명칭 및 재위 기간은 거의 일치하는 50여 건의 유사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6]
  • 국한문본 《단기고사》〈기자조선〉의 기록은 《환단고기》의 〈번한세가〉의 내용과 왕의 명칭과 업적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진위 논란[편집]

단기고사에는 근대 용어의 등장이나 당시 시대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모순으로 역사적인 자료로 인해 그 어떤 학계에서도 채택되지 않는다.

천문 기록의 연구[편집]

국한문본 《단기고사》에 기록된 10여 건의 천문 관련 기록의 실현 여부를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7] 논문의 내용과 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장 - 오성취합은 250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데, 기록과 실제 현상은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썰물 기록도 200년 사이에 가장 큰 썰물이 4년의 오차로 기록되었다. 이는 매우 적은 확률이며, 따라서 기록이 임의로 조작된 것일 확률도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 반론 - 논문은 국한문본 《단기고사》가 위작일 경우 막연하게 꾸며내었을 것을 가정하고 있지만, 동양 천문학의 지식이 있다면, 특히 천체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된 조선 세종시대 이후라면 옛 천문현상을 예측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연구의 기준으로 쓰인 연대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음을 가정한 것이며, 《환단고기》의 연대를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고사》의 연대로 같은 작업을 실행할 경우 200년 가까이 오차가 생기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오성취합은 20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으로 1년의 오차를 생각한다면 1/6 정도의 아주 높은 확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구[편집]

단군조선을 47대의 왕조로서 기록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지나치게 긴 재위 연대에는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채택하지 않고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근대 이후에 사용된 용어 등 많은 부분이 후대에 위조 가필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단기고사》 초략본(백산본)을 별도로 주목하였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의 기록과 나머지 기록들은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조선·후조선의 시대 구분만을 채택하였다.[8]

내용상의 모순[편집]

  • 서지 사항(출간 연도와 원본)
    •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한문 원본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1949년 간행본에 대한 기록도 알 수 없고, 1959년의 국한문 번역본 이전의 것도 없다. 1990년에 공개된 한문초략본은 국한문본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 일부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1907년에 공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교헌이나 신채호의 글에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국한문본에서 1907년에 씌여진 이경직의 서문에 1910년 이후부터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가 등장한다.
    •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씌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은 ‘인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및 어휘(정체 불명의 기계)
  • 재위 연도의 모순
    • 단기고사에는 고조선이 2096년에 모두 47대로, 기자조선이 1097년에 42대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수는 비슷한데 다스린 연수가 무려 2배의 차이가 난다. 단기고사에 기록된 왕들의 평균 재위 연대는 45년 가까이 되어 상식과 어긋난다(후반부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된 기자조선은 41대 1052년으로 기록되어 평균 재위 연대가 26년으로 계산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는 이 점을 들어 단기고사의 기록이 전부 날조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단기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전단조선 19세 단군 종년(규원사화는 구모소 임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1097년간 계속되었다. 위만조선의 시작 연대를 일반적인 기원전 194년으로 가정하면, 전단조선의 시작 연대는 기원전 2512년이 된다. 일반적인 기원전 2333년과는 179년의 차이가 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기원전 2333년이 고조선의 시작 연도로 기록되어 있다.
    • 박병섭의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에서는 후단조선과 기자조선의 동일 내용에 대한 심각한 시대 불일치로 자체의 기간 정합성이 없음이 지적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단기고사》의 기자(奇子)는 널리 알려진 기자(箕子)와는 다르며, 기자(奇子)가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기자(箕子)를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2.  최석기, 〈천부경과 단기양조의 고찰〉 《백산학보》37집, 1990년.
  3.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는 B.C.2237에 해당된다.
  4.  《환단고기》〈단군세기〉의 B.C.676에 해당된다.
  5.  위만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194년으로 추정하였다.
  6.  국한문본 《단기고사》의 고조선의 각 단군에 대한 연대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것보다 179년 앞선다.
  7.  논문의 내용은 일반인을 위한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박창범, 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95, 1993년.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2년.
  8.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북한:사회과학출판사·남한:도서출판 중심, 2001년 3월, 40쪽.

참고 문헌 및 링크[편집]

  • 대야발 원저, 정해박 역, 《단기고사(檀奇古史)》, 충북신보사(忠北新報社), 1959
  • 고동영 역, 《단기고사(檀奇古史)》, 한뿌리, 1990
  • 조인성, 韓末 檀君關係史書의 再檢討 :《神檀實記》·《檀奇古史》·《桓檀古記》를 中心으로, 국사관논총 제3집 (1989. 10), 國史編纂委員會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中 제3장 5절 《檀奇古史》·《桓檀古記》·《帝王年代歷》에 대한 文獻考證
  •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2
  • 박창범, 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95, 1993
  • 이문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 박병섭,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한단고기』의 역사성 검토, 한국종교사학회, 200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단기고사'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2」, 《역사비평》, 1992

 

 

<참고자료>

 

규원사화(揆園史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단기고사(檀奇古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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