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시간2019-08-06 09:46

소장자, 소송으로 돌려받아야 할 상황…문화재청 "난감한 판결"

2016년 경찰이 공개한 삼국유사 기이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2016년 1월 한 경매에 고서 삼국유사가 출품됐다.

권2 기이편(紀異篇)으로, 경매회사는 보물 419-2호로 지정된 성암고서박물관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도 보물급으로 보는 책이었다. 시작가는 3억5천만원으로 책정됐다.

하지만 삼국유사가 경매에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곧바로 장물 의혹이 제기됐다. 출품은 취소됐고, 경찰은 수사를 통해 삼국유사를 경매에 내놓은 문화재 매매업자 김모 씨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6일 문화재청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김씨에 대해 원심대로 징역 4년을 확정했다. 그러면서 은닉 문화재는 몰수하도록 한 문화재보호법 제92조에 따라 김씨가 숨긴 삼국유사와 박문수 간찰을 국가에 귀속하게 했다.

삼국유사와 박문수 간찰은 이미 도난문화재로 신고된 상태다.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도난문화재 정보를 검색하면 '대전 삼국유사 목판 최초 인쇄본 등'은 1999년 1월 25일, '고령박씨 어사 박문수 유물'은 2007년 10월 초에 각각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두 유물은 원소장자가 명확하다. 삼국유사는 고 조종업 충남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자택에서 사라졌다. 박문수 간찰은 소유자 박용기 씨·관리자 박용우 씨로 등록됐다.

하지만 법원이 몰수 결정을 하면서 소장자는 민사소송을 통해 문화재를 돌려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소유자가 확실히 있는데도 왜 몰수했는지 모르겠다. 다소 난감한 판결"이라며 "보통은 신안선 유물처럼 소유자가 없는 경우에 문화재를 국가 귀속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물이 여러 차례 유통됐다는 사실 때문에 법원이 소유권을 분명히 따져보라는 취지로 판결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원소장자가 민사소송을 통해 소유권을 회복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 입력 2013.01.21 17:42

조선초기 간행된 ‘삼국유사’ 판본 공개 < 학술·문화재 < 문화 < 기사본문 - 불교신문 (ibulgyo.com)

기자명엄태규 기자 che11@ibulgyo.com

공개된 판본 중 가장 이른 시기 판본으로 평가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시대 초기 판본이 공개됐다.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시대 초기 판본이 공개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글자 탈락이 많아 알 수 없었던 역대 왕조별 왕의 족보를 다룬 왕력편(王曆篇)이 포함돼 고대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삼국유사> 판본은 서지학자 고(故) 손보기 교수가 소장해 온 것으로, 지난 16일 고인의 유족들이 연세대에 <삼국유사> 목판본을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기증된 판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대 왕에 대한 족보를 기록한 ‘왕력편’과 삼국시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기이편’ 권1과 권2로 구성됐다. 다른 판본에 비해 인쇄 상태가 확연히 좋은 점도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

전 5권 2책으로 구성된 <삼국유사>는 1281년 고려의 일연스님이 지은 것으로, 조선 중종 7년인 1512년 경주에서 간행한 목판본 ‘중종 임신본(中宗 壬申本)’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남아 있어 대표적인 판본으로 꼽히고 있다. 이밖에도 석남본, 송은본 등 중종 임신본보다 앞선 조선 초기 판본들은 3~5권 등 완전한 형태가 아닌 일부만 전해져왔다.

특히 <삼국유사>를 구성하는 여러 편 가운데 왕력편의 경우, 글자의 탈락이나 오류가 심하고 ‘중종 임신본’ 이전 시기에 간행된 판본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판본이 갖는 의미는 더욱 크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기존 판본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기존에 잘못 알려지거나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을 수정하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세대 측은 고(故) 손보기 교수의 유족이 기증한 삼국유사를 고인의 호를 따서 ‘파른본’으로 명명하고, 향후 국가문화재 지정과 관련 학술대회 등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연세대박물관은 “기증된 삼국유사 파른본을 통해 <삼국유사> 조선 초간본 완질이 구비되게 된다”며 “이를 통해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된 저자, 간행시기, 판각장소 등에 관한 논의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으며, 임신본 등 여러 이본과의 대조를 통해 <삼국유사> 정본을 만드는 작업까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불교신문 2882호/ 1월23일자]

 

 

이영환 기자입력 2017. 9. 27. 16:44

일반에 최초공개된 파른본 삼국유사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2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파른 손보기 소장유물 기증 특별전 '파른, 역사의 기억을 연세에 남기다'를 찾은 학생들이 휴대전화에 파른본 삼국유사를 담고 있다.

파른본 삼국유사(보물 제1866호)는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됐다. 2017.09.27.

20hwan@newsis.com

 

박지혜 기자입력 2017. 9. 27. 16:30

연세대 박물관, 보물 제1866호 '파른본 삼국유사' 최초 공개

 

(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2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파른 손보기 교수 기증유물 특별전-파른, 역사의 기억을 연세에 남기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최초 공개된 보물 제1866호 '파른본 삼국유사'를 둘러보고 있다.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되는 파른본 삼국유사는 왕력을 포함한 조선 초기본으로 일그러진 글자나 탈획된 부분이 거의 없고 선명한 인쇄상태를 가진 희귀본이다.

파른 손보기 교수는 1940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에 입학했고, 1963년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1964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2010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7.9.27/뉴스1

pjh2580@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3/07 [18:22]

삼국유사 고조선조, '환인이냐 환국이냐':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謂帝釋也(위제석야)가 논리적 해석의 관건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시대 초기 판본이 공개됐다. 이 판본은 2013년 1월 21일자 인터넷 불교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글자 탈락이 많아 알 수 없었던 역대 왕조별 왕의 족보를 다룬 왕력편(王曆篇)이 포함된 것으로, 고대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 판본은 서지학자 고(故) 손보기 교수가 소장해 온 것으로, 지난 16일 고인의 유족들이 연세대에 <삼국유사> 목판본을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대 왕에 대한 족보를 기록한 ‘왕력편’과 삼국시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기이편’ 권1과 권2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판본에 비해 인쇄 상태가 확연히 좋은 점도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판본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는 昔有桓 口+土 謂帝釋也 庶子桓雄(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이라 기록되어 있다.

▲ <2013년 1얼 21일자 불교신문에 실린 손보기 선생 소장의 삼국유사 판본중 고조선조>     ⓒ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물론, 어떤 사람들은 위 판본에서 昔有桓因(석유환인)의 因(인)자를 나타낸 口+土(또는 士)라는 글자를 國(국)자로 해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뒤를 이어 바로 적힌 謂帝釋也(위제석야:제석이라 한다)라는 글자로 보면, 앞의 글자는 해석논리상 昔有桓因(옛날에 환인이 있었다)이 명백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판본의 원판을 새길 때, 因(인)을 새기다가 口 안의 大라는 글자를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획수가 되는 土로 새기게 되어, 因자의 이체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이 조선초기 판본만으로 해석해 보면, 고려시대에 <삼국유사>를 지은 승려 일연은 庶子桓雄(서자환웅)을 글자 그대로 서자(庶子)인 환웅(桓雄:한웅)으로 인식하고서, 앞의 문구를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 한 것이 된다. 즉 桓雄(환웅)을 桓因(환인)의 서자(庶子)로 적은 것이다.
 
한편, 일제시대에 일본 싥민사학자 금서룡이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위조하기 이전의 판본에는 昔有桓 口+王 이라 되어 있었는데, 최남선과 일본학자 녹도승은 昔有桓國(석유환국)을 금서룡이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날조하였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때 口안에 王이 든 글자를 국(國)의 이체자로 본 것이 된다.
 
그런데, 금서룡이 날조하기 이전의 昔有桓 口+王 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는 문구에서 그 내용으로 볼 때, 謂帝釋也(위제석야)의 해석상 앞의 昔有桓 口+王은 昔有桓因(석유환인)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순조로운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삼국유사 판본에서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경우에는 앞의 네 글자는 자연히 昔有桓因(석유환인)이 맞는 것이 된다.
 
다만, 桓國(환국)이라고 기록하는 경우에는, 삼성기(三聖記, 안함로 저, 원동중 저>, 태백일사 한국본기(桓國本紀, 이맥 저), 조선시대 남구만 선생의 약천집 등의 자료에서처럼, 庶子桓雄(서자환웅)을 庶子部桓雄(서자부환웅)이나 帝釋庶子桓雄(제석서자환웅) 등으로 해석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논리상 맞는 것이 된다. 남구만 선생의 약천집에서는 朝鮮之初 有桓國帝釋庶子桓雄(조선지초 유환국제석서자환웅)...이라 적고 있다.
 
이상으로 위 삼국유사 조선초기 판본에 따르면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해석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왕검조선)을 지을 때, 昔有桓國(석유환국)이 아니라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적은 것이 확실한 것으로 된다.
 
그렇다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생략된 부분과 모순된 부분을 역사적으로 보완하면,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은 연대기적으로도 아주 정확한 기록이 된다. 다만, 한인(桓因)과 한웅(桓雄) 시대의 역사를 나라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사람 중심의 역사로 기술한 점에서, 후세인들이 자칫 신화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만, 제석(帝釋)은 불교의 신(神)만이 아니라, 원래는 한국(桓國) 시대의 임금이던 7대 한인 중 5대 석제임(釋提壬) 한인(桓仁:桓因)을 가리키거나 7대 지위리(智爲利) 한인(桓因)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인데, 한웅이 석제임 한인의 아들이라 할 때는 직계 아들이 아니라 자손이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 <삼국유사> 판본 비교. <사진왼쪽 <삼국유사>는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임신본(壬申本, 명나라 황제의 연호인 정덕正德을 따 정덕본이라고도 함), 사진 오른쪽은 이마니시류가 변조하여 세간에 퍼트린 경도제대 영인본.     © 편집부

[참조:  단군신화로 조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무려 16년에 걸쳐 「조선사」의 간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조선사」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이전) 1, 2권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획해 열겠다고 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최남선 등 역사학계가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친일파 이병도, 신석호 등은 단군조선시대까지 없애버리려고 일제에게 더욱 충성하고 견마(犬馬) 가 되어 일제가 만든 <조선사 35권>외 선조들의 삶의 땅을 한반도로 국한한 <대국사관>을 집필하여 조선사35권과 대국사관이 우리 역사인양 교과서에 싣게 된 것이다.
▲ 석남 송석하 소장 <삼국유사> 필사본이다. 학계에서는 석남 송석하 소장 필사본을 임신본 이전의 고판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 편집부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현재까지 국내 삼국유사 번역자 대부분이 今西龍(이마니시) 등 일본인 학자들괴 매국역적 이병도 일파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된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왜곡한 자료를 원본으로 활용하면서 삼국유사를 번역하여 우리민족 뿌리 역사를 잘못 인식 시키고 있다.

이는 민족사 발전에 크나 큰 죄악이며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과 위대한 역사가 왜곡 말살되도록 광복 후 지금까지 청산하지 못하게 이병도 일당 후학들이 지금도 버젓이 사학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현실이다.

今西龍(이마니시) 등 일본인 학자들과 친일식민사학자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된 왜곡된 자료를 근거해서 삼국유사를 번역하여 시중 서점에 유포시키고 있는 삼국유사 번역자들께서도 깊이 반성하시고 이에 대한 책자를 즉시 리콜하여 자진 소각시키고 두 번 다시 이러한 책자를 펴 내지 말아 주기 바란다.

이마니시(금서룡)는 왜 '석유환국'에 주목했을까?

이마니시는 왜 ‘석유환국’이란 이 네 글자를 조선사 제거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일까? 당시 일본이 수거한 20여만 권의 서적들 중에는 한민족의 고유 사서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을 것이다.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초간본 30권 중의 일부도 수거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1911년은 일본이 사서 수거 작전을 감행하던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이마니시와 주변 인물들은 <환단고기> 같은 사서들이 전하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근세조선의 건국 이전에 이미 7,8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를 어떻게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심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십여년(1911~1926) 동안 그 사서들을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마침내 환국 - 배달 - 고조선의 역사를 ‘한꺼번에’ 말살할 수 있는 결정타로 ‘석유환국’, 이 한 구절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 일연이 '천제 환인'을 '불교적 환인'으로 주석을 단 것이 신화로 둔갑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이마니시가 석유환국에 주목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일연이 석유환국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제석은 인드라Inder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제석환인帝釋桓因Sakra-Devanam Indra을 줄여서 제석 또는 환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환국을 세운 천제天帝가 곧 환인桓仁이다. 비록 ‘인’ 자의 한자 표현이 다른지만, 승려 일연은 환인 천제를 불교의 신, 환인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일연은 환국 옆에 “불교의 제석을 이른다(謂帝釋也)”라고 임의로 설명을 붙여 환인천제가 세운 나라인 환국을 불교의 신, 환인의 왕국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삼국유사>의 잘못된 주석에 의존하여 환국을 신화의 역사로 부정한 것에 대해 이마니시는 ‘자신은 일연의 기록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그는, 1926년에 ‘석유환인’이라 새겨진 [삼국유사]<경도제대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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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12/29 [13:47]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1: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 편의상 고조선으로 호칭함)을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편의 앞에 싣고 있는데, 이는 고조선이 이씨왕조(李氏王朝)인 조선의 이전이라기 보다 위만조선의 이전에 있었던 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단 보아야 할 것이다. 
 
1. 서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말은 없으며, 단지 서기전1122경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만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땅 한 곳에 봉하여 제후로 삼았다는 말이고 단군조선을 완전히 차지하여 조선을 다스리게 했다는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이때는 단군조선 제 25대 솔나단군 때이며, 단군왕검 때부터 삼한인 진한, 번한, 마한을 두었고, 제 22대 색불루 단군 때 삼조선이라 관경을 정하여 각 삼한을 두어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진조선, 비왕인 번한이 다스리는 번조선, 비왕인 마한이 다스리는 마조선으로 삼조선으로 분치하고 있었는데, 바로 기자가 망명 귀화하여 은거한 장소가 번조선의 서쪽 변방인 서화(西華)라는 구려국(句麗國)에 속한 땅인 것이다.

▲     © 천산태백


기자는 조선으로부터 크게 환영은 받지 못하였고 번조선이나 마조선의 감시를 받았으며, 단지 후대에 서기전 323년에 읍차(邑借) 기후(箕詡)라는 기자의 먼 후손이 제 70대 번조선왕이 되면서 기준에 이르기까지 6대 동안 번조선을 다스린 사실은 있는데, 이때는 해모수단군의 북부여 때이고, 서기전 425년에 단군조선이 국호를 대부여(大扶餘)로 고쳤으므로 기후가 번조선의 왕으로서 조선왕이라 칭한 것으로 이를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칭하면 모르되, 서기전1122년부터 은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망명귀화한 기자가 기자조선을 다스렸다는 말은 역사를 호도하는 것이다.

다만, 서기전1286년에 제 21대 소태 단군이 서우여를 살수의 땅에 봉하여 섭주라 하고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고 제 22대 색불루 단군이 서우여를 번조선의 번한에 봉하였는데, 대진국인 발해의 개국시조 대조영의 동생인 반안군왕 대야발이 돌궐 거란 등을 답사하면서 지은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서우여의 번조선을 기자(奇子)조선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기자를 은나라에서 망명귀화한 기자(箕子)로 혼돈시킬 여지가 있었던 것 같다.


기자의 후손이 다스린 번조선이 왕 기준 때 서기전 194년에 연나라 도적 떼인 위만에게 망하여 위만조선이 되었는데, 이 또한 그 위치가 서쪽인 발해만 부근으로 우매한 역사가들이 단군조선을 발해만 부근이나 한반도의 평양에 한정하여 찾고자 혈안이 된 것에 통곡을 금치 못한다.

왕검은 단군조선의 첫 임금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말한다. 단군은 박달(나무) 단자와 임금 군자인데, 그 뜻은 우리말로 박달임금, 배달임금 즉 박달나라, 배달나라 임금이란 뜻이고, 왕검은 임금 왕자이고 검은 왕자를 임금으로 읽으라는 이두식 표기이므로 임검 즉 임금으로 읽어야 하나 왕검으로 읽어도 그 뜻에는 변함이 없고, 그래서 단군왕검은 배달나라의 임금인 임금이란 말로 특히 서기전2333년에 아사달에서 조선을 개국한 분을 단군임금이라 부르는 것이 된다. 
 

2. 삼국유사의 저자와 시대배경
 

가. 저자 일연(一然)

고려 후기(1206:희종2~1289:충렬왕15)의 승려로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이다. 경주 장산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彦弼)이다.

9세에 해양(海洋)의 무량사(無量寺)에 취학, 14세에 설악산 진전사( 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1227년(고종14)에 상상과(上上科)에 급제, 1237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259년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77년에 충렬왕의 명으로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1278년에 역대연표를 작성하고, 1279년 73세~1282년 76세에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1283년 3월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1289년 7월에 84세로 입적하였다.

나. 시대배경

일연이 활동하던 시기와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시기는 몽고침략 시기(1231~1356)에 해당한다.

이때는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비판되고 민족자주의식이 강하게 대두되던 시기로, 삼국유사의 내용에는 민족감정이 반영되어 있고, 소위 정사라는 삼국사기와는 대조적이면서 상호보완적 성격을 가지며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2: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삼국유사의 편찬, 고조선이라 기록한 이유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1/01 [09:29]

 

[역사정립=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에 최초로 판각본이 간행되었다고 보이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1515년(중종7) 경주 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주관하여 간행한 정덕본(正德本)이 가장 오래 되었는데, 중간의 편목 명칭이 누락되어 있다.


3. 삼국유사의 편찬


가. 고려시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에 최초로 판각본이 간행되었다고 보이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나. 조선시대

1515년(중종7) 경주 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주관하여 간행한 정덕본(正德本)이 가장 오래 되었는데, 중간의 편목 명칭이 누락되어 있다.

위 정덕본이 1845년(헌종25)에 개간되었다.

필사본으로는 안정복이 소장하던 것이 발견되어 여러 차례 영인, 출간되었는데, 탈자와 우자가 많고 후세인의 가필이 많아 자료로서 가치를 감소기키고 있다.

현대 활자본으로는 1908년 일본 동경대학 문학부에서 나온 사지총서본이 가장 오래 되었는데, 임진와랜을 전후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바탕으로 하고 다른 판본을 참조하여 교정한 것이 된다.

다. 일제 강점기

1928년 조선사학회본과 계명구락부에서 출간한 최남선의 교감본(校監本)이 있다.

라. 대한민국

위 최남선의 교감본인 계명구락부본을 바탕으로 순암본과 광문회본 및 송석하본 등을 참조하여 교합한 1954년의 증보본이 있는데, 그동안 일반에게 가장 널리 보급되어 삼국유사 연구의 바탕이 되어 왔으나, 여러 종을 교합하면서 활자화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결함이 보이기도 한다.

마. 조선총독부의 삼국유사 날조

일본사람 鹿島昇이 자신의 글에서 쿄토대학의 어떤 놈이 삼국유사의 고조선편에서 원문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날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서에서 적고 있는 「환국(桓國)」이라고 하는 국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써여져 있다. 현행의 『유사(遺史)』에는 이것이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 맞는데, 이것을 경도제대(京都帝大)의 어떤 자가 가필하여 「환인(桓因)」이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고쳐 써버린 것으로, 오늘날, 한국사학에서는 이것의 위조가 문제로 되어 있다. ”

(1)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는 자료 소개

(가) 최남선의 글

<단군고기>는 광범한 고기록을 지극히 간략하게 요약하여 놓은 것이므로 ...<삼국유사>의 <단군고기>중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친 淺人(故 今西 龍)의 망필을 인용한 것이 그 하나다.......그 原書의 환인이라는 因자가 國(약자. 입구에 구슬 옥)자를 상도하여 因자로 만든 것은 일견하여 명백히 인정할 수 있는 바이다.

(나) 삼성기전 하편(三聖紀全 下篇)

옛날 한국(昔有桓國)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인(桓因)께서 천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널리 교화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다.

(2) 한인은 한국의 임금

녹도승과 최남선의 주장에 따르면, 삼국유사의 昔有桓因의 因은 원래 國자가 맞는 것이 된다. 그래서 昔有桓國으로서 옛날에 한국이 있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昔有桓國이라 하는 경우에 바로 뒤에 일연이 단 주석에 謂帝釋也라는 문구와 그 뒤에 이어지는 庶子桓雄과의 연결성에서 매끄럽지 못한 바, 이에 昔有桓因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謂帝釋也이라는 주석이 없다라면 昔有桓國 庶子桓雄도 틀리진 않은데, 이때 庶子桓雄은 당연히 서자부(庶子部) 한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桓國은 한국으로 읽는 것이 이두식 표기에 맞다. 환은 환하다 밝다는 뜻이나 한이라는 말도 밝다, 크다, 하나, 하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한국은 하늘나라를 가리키게 된다. 그래서 한국의 수도는 하늘산인 천산(天山)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서자 한웅(庶子 桓雄)이라는 말은 적자나 서자의 뜻이 아닌 한국의 서자라는 직책에 있던 한웅이라는 말이며, 결국 한웅은 한국의 서자부 대인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 말기에 호족과 웅족의 난이 심하여 한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품고 한국으로부터 천부삼인을 이어 받아 난을 평정하면서 배달나라를 연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내려 와 하늘의 도를 땅에 실현하므로 개천이라 하는 것이다. 한국은 하늘나라의 뜻을 가지고, 단국 즉 배달나라는 박달나라 즉 밝은 땅의 나라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임금은 하늘님 즉 한인이며, 배달나라 임금은 한인천제의 아들인 한웅천왕인 것이다. 천왕보다 작은 임금이 천군으로서 소위 단군을 천왕의 아들이라 하는 바, 단군왕검이 바로 한웅천왕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인천제, 한웅천왕, 한검천군(단군)이라는 질서가 잡히게 된다.

(3) 여론

한국은 하늘나라를 가리키며 한인은 하늘님 즉 천제라는 말이 되고, 단국 즉 배달나라는 박달나라로서 밝은 땅 나라라는 말이며, 한웅은 천왕이 되며, 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이며, 단군은 천왕의 아들인 천군이 된다.

단군조선은 단군이 모두 47분으로 2096년간을 이었으며, 배달나라는 18대 한웅이 1565년간을 이었으며, 한국은 황궁씨가 약1.100년, 유인씨가 약1,100년, 7대 한인이 약1,100년을 다스린 것으로 된다.

중국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헌원은 서기전 2698년 인물로 치우와의 탁록지전이 유명한데, 치우는 바로 배달나라의 제14대 자오지한웅이다. 치우천왕은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염제신농씨의 나라를 병합하고 염제신농의 9세손인 괴를 봉하여 제후로 삼고, 곧이어 황제헌원과 10여년에 걸쳐 70여회를 싸우고 합 100여회의 전쟁을 치루었는데, 중국측의 기록에서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이겼다고 하나 우리기록에는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자부선인으로 하여금 삼황내문을 가르쳐 도를 깨우치게 하였다라고 하는 바, 황제헌원이 죽였다는 치우는 치우천왕이 아닌 치우의 형제 중 한명을 가리키며, 다만 치우천왕이 서기전 2599년까지 다스린 것과 황제헌원이 서기전 2598년까지 다스린 것으로 보아 치우가 황제헌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황제헌원은 원래 웅족으로서 배달나라 제후국인 유웅국왕 소전의 후손이며 성은 공손씨이고 희씨이기도 하다. 헌원이 실질적으로 지금의 중국의 시조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요임금이 다시 배달나라에서 이탈을 시도하여 순임금, 하나라를 거치면서 지금의 중국으로 틀을 잡아 가게 된다.

염제신농의 후손국이 바로 단군왕검이 비왕으로 있던 나라가 되는데, 단군왕검은 염제신농의 13세손인 홍제 때 비왕으로서 섭정하다가 요임금의 난으로 동북지방의 아사달로 이동하여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4.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 기록한 이유 고찰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을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독립명칭이 아니다.

삼국유사에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라는 말이 과연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사료의 상투적인 기록방법으로 조선 땅의 일부에 기자를 봉했다는 것인지 이 기록만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기자를 진실로 조선왕으로 봉한 것이면 단군조선 전체가 아니지만 기자조선이라는 명칭이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필법으로 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기록한 것이면 기자조선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리고 설사 기자가 조선 땅에 봉해졌다 하더라도 그 위치는 단군조선 전체가 아닌 서쪽 발해만 부근에 위치한 번조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무왕 시대에 단군조선의 삼한 중의 하나인 번한 땅에 제 33대 번한인 임나(任那)가 엄연히 단군을 보좌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무왕이 원래 조선땅인 번조선의 서쪽 변방을 병합하여 기자를 그 땅에 봉한 것이 될 것이다.

기자의 무덤은 실제로 발해만 서쪽인 서화 땅에 있다. 즉 번조선 땅의 서쪽 변방에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으로 보면 기자가 조선쪽으로 왔다면 망명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주무왕으로 보면 기자가 조선으로 어떤 이유로 갔든지 간에 제후로 봉했다고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기록과 마찬가지로 우리 기록도 일관성이 없는 바, 한단고기에서는 기자가 서쪽변방으로 도망와 은거하는 것을 감시하였다라고 적고, 단기고사에서는 기자를 단군조선에서 왕으로 봉했는데 1대로 끝났다고 적고 있으며, 부도지에서는 은나라 기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서쪽에 도망하여 와서는 명예를 위하여 홍범무함을 시행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기자가 은이나 주나라를 피하여 단군조선의 서쪽 변방에 도망하여 온 것은 맞는 것 같으며, 또 실제로 한단고기에서 기자의 먼후손인 기후가 읍차로서 번조선이 혼란한 시대에 군사를 일으켜 제 70대 번조선왕이 되면서 조선왕이라고 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인 마한땅으로 도망한 사실 등으로 볼 때, 기자는 조선으로 도망하여 온 자(망명자)이며 그 후손이 조선사람이 된 것은 틀림없다. 단지 주무왕이 진실로 기자를 조선 땅에 제후로 봉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리하여,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 이전을 古조선(왕검조선)이라고 하여 고조선이 우리가 아는 이씨조선의 앞이라고 하여 고조선이라 한 것이 아니고 위만조선 이전이므로 고조선이라고 한 것이 된다.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1/04 [09:05]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3: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원문과 해석

 

[역사=플러스코리아  ]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아래에서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원문을 해석해 보고, 뒤 이어 고조선조의 내용을 다른 기록과 비교 종합하여 재해석해 보기로 한다.
 

5.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내용

가. 원문 :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砺-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兎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나. 원문 해석
 
위서에 말하기를,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수도를 세우고 개국하여 조선이라 하였으며, 고와 같은 때였다.

고기에 말하기를, 옛날에 한인이 있었는데 서자 한웅이 천하에 뜻을 품고 인간세상을 구하기를 욕심내니 아버지인 한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서, 삼위태백을 내려다 보라, 가히 홍익인간할 수 있도다하여 이에 천부인 3개를 주어 보내어 다스리게 했다. 한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이름하여 신시이다.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운사를 거느리고, 농사, 수명, 질병, 형벌, 선악(교육)을 맡게 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을 맡도록 하여 땅의 세상을 도리로써 다스리게 즉 재세이화하였다.

이때에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 한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빌었다. 이때 신이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햇빛을 백일동안 보지 않으면 능히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으며 삼칠일 즉 21일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고, 호랑이은 능히 금기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는 같이 혼인할 상대가 없어서 매일 단수 밑에서 주문을 외우며 자식을 낳기를 빌었다. 한웅이 이에 가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하였다. 아기를 배어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왕검이었다.

▲ 단군왕검 영정     ©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요임금이 즉위한 때로부터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하였다. 다시 수도를 백악산아사달로 옮겼는데 궁홀산 또는 방홀산이라하고 금미달이다. 나라를 다스리기를 1,500년 (그러나 정확히는 1,212년)에 (중국의)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단군은 이에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고 후에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의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 되었고, 한나라가 나누어 3군을 설치하였는데, 현도, 낙랑, 대방이라 하였고 통전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

다. 해석상 문제 있는 문구

古朝鮮/ 魏書/ 二千載/ 壇君/ 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 與高同時/ 古記/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三危太伯/ 天符印三箇/ 徒三千/ 太伯今妙香山/ 一熊一虎/ 三七日/ 熊得女身/ 不得人身/ 雄乃假化/ 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高麗本孤竹國(今海州)/ 漢分置三郡 謂玄兎-樂浪-帶方(北帶方)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1/05 [12:31]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4: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고조선조 종합 재해석

[역사=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위나라 역사서인) 위서에 말하기를, (위서를 기록할 당시로부터) 2천년 전 (즉 서기전2333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송화강 하얼빈 유역) 아사달에 수도를 세우고 개국하여 조선이라 하였으며, (서기전2383년에 출현하고 서기전2357년에 옛 당나라를 세우고 서기전2284년에 순임금에게 자리를 넘겨준 요임금인) 고와 같은 때였다.

 

6.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
 

(어떤 옛기록인) 고기에 말하기를, 옛날에 (서기전7197년부터 서기전3897년까지 천산에 수도를 두었던 한국 즉 하늘나라의 임금 즉 천제 중 마지막 7대 한인인 지위리) 한인이 있었는데, 서자 (즉 서자부 즉 천제한인의 아들들을 교육하고 관리하고 담당하는 부서의 우두머리 즉 대인이었던) 한웅이 천하에 뜻을 품고 인간세상을 구하기를 욕심내니, 아버지인 (지위리) 한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서, 삼위 (돈황의 삼위산) 태백 (중국내륙의 태백산)을 내려다 보라, 가히 홍익인간할 수 있도다 하여, 이에 천부인 3개 (거울, 북, 칼 또는 홍익인간을 실현하는 길잡이인 천경, 신고, 전계의 3경전) 를 주어 보내어 다스리게 했다. 한웅이 (서기전3897년 갑자년에 하늘의 도를 실천하는 천왕랑인) 무리 3천을 이끌고 (중국내륙의)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10월 3일에 개천하니) 이름하여 신시이(고 나라이름을 배달, 박달 즉 단국이라 했)다.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입법담당인) 풍백, (행정담당인) 우사 (사법담당인) 운사를 거느리고, (우가, 마가, 저가, 구가, 양가 등 오가에게 각각) 농사, 수명, 질병, 형벌, 선악(교육)을 맡게 하고, (하늘, 땅, 인간의 원리, 도리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맡도록 하여 땅의 세상을 (하늘의) 도리로써 다스리게 즉 재세이화하였다.

이때에 (이주민인 곰족의 추장인) 한 마리의 곰과 (토착민인 호족의 추장인)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동네인) 굴에 살았는데, 항상 (한인 즉 하늘님의 아들인) 신 한웅에게 (백성이 되어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하늘의 도를 실천하는 인간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빌었다. 이때 신 (한웅)이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으면서 햇빛을 백일동안 보지 않으면 능히 (환골탈태하여 신계의 무리 즉 신선인)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곰(족의 추장)과 호랑이(족의 추장)는 그것을 받아서 먹으며 삼칠일 즉 21일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족의 추장)은 (인내심이 있고 한웅의 가르침을 지켜서) (곰족의 여추장으로서 한웅천왕의 백성이 되어 하늘, 땅,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인격을 가진) 여자의 몸을 얻었고, 호랑이(족의 추장)은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이 없고 호전적이어서) 능히 금기하지 못하여 (한웅천왕의 백성인 도를 실천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곰족의 여자인) 웅녀는 (호랑이족은 성질이 사납고 인내심이 없어 서로 상종 못할 사람들이므로) 같이 혼인할 상대가 없어서 매일 (성황당의) (신)단수 밑에서 주문을 외우며 자식을 낳기를 빌었다. (하늘님의 아들로 신 즉 신선인) 한웅이 이에 (감동하여 일부러) (보통사람으로) 가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비로 삼고 자손을 낳게) 하였다. (그후 서기전2333년까지 1,565년간 나라가 존속하였고, 서기전2706년경에 배달나라 제 14대 치우천왕 즉 자오지한웅이 청구로 도읍을 옮겼으며, 그후 배달나라 마지막 18대 한웅인 거불단한웅 때인 서기전2370년경에 한웅이 곰족의 왕녀 즉 단웅국왕의 딸인 웅녀와 혼인하여 비로 삼아) 아기를 배어 (서기전2370년 5월 2일에)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왕검이었다.

(단군왕검이 어릴 때부터 덕이 있어 단웅국왕이 이를 듣고 비왕으로 삼았으며, 서기전2357년부터 서기전2333년까지 24년간 단웅국의 비왕으로 섭정하다가 서기전2334년에 궁성을 나와 순치하는 기회를 틈타 요임금이 궁성을 점령하는 바람에 무리 800을 이끌고 동북으로 이동하여) 요임금이 (서기전2383년에 임금으로) 즉위한 때로부터 50년 (또는 서기전2357년에 당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25년)인 경인년(이 아닌 무진년인 서기전2333년 10월 3일)에 (송화강 아사달인)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하였다. 다시 (단기1048년인 서기전1286년에 제 22대 색불루단군이 제 21대 소태단군으로부터 선양받아) 수도를 (상춘 즉 장춘 부근인) 백악산아사달로 (신궁으로 정하고 즉위하여) 옮겼는데 궁홀산 또는 방홀산이라 하고 금미달이다. 나라를 다스리기를 1,500년 (그러나 정확히는 1,212년)에 (중국의) 주나라 (무왕인) 호왕이 즉위한 (서기전1122년인) 기묘년에 (단군조선의 번조선 서쪽 변방인 서화 즉 고죽국 부근으로 망명하여 은거한) 기자를 조선(의 땅 한 곳)에 봉하였다. 단군은 이에 (단기1908년인 서기전426년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제 44대 물리단군이 피난하다 붕어하시고,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받고 난을 진압하여 단군으로 추대되어) 수도를 (개원 부근인) 장당경으로 옮겼고, 후에 (서기전238년 단군조선의 마지막 제 47대 고열가단군께서 나라의 재정이 딸리고 명령이 듣지 않아 나라를 오가들에게 맡기고) 아사달(산으로 입산수도하러 들어가서)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니, (서기전2333년부터 제 45대 구물단군이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기 전인 서기전426년까지 존속한) 나이가 1,908세였(고 서기전2333년부터 사실상 단군조선이 망한 서기전238년까지 총 2,096년이었으며, 북부여 해모수가 오가들을 설득하여 오가공화정을 철폐하고 접수한 서기전232년까지는 총 2,102년이)다. 당나라의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인) 고려는 본래 (발해만과 북경 부근의) 고죽국(을 원래 포함하였던 고리국의 후손으로 고주몽의 증조인 고구려후 고진의 나라)인데, (서기전1122년경) 주나라(의 무왕)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즉 단군조선의 삼조선의 하나인 번조선의 서쪽 변방 서화의 땅으로 고죽국이 아닌 기후국의 제후로)이 되었고, 한나라(의 무왕이 서기전 108년경에 침범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가 나누어 3군(또는 4군)을 설치하(려고 하)였는데 현도, 낙랑, 대방 (진번)이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북부여 제 2대 모수리단군 때 단군조선의 유민으로서 단군조선 마지막 제 47대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동명왕 고두막한이 서기전108년에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들을 물리쳤던 것이고, 고두막한은 서기전86년에 천제자라 칭하면서 북부여의 해부루를 동부여로 쫓아내고 제후로 삼고, 북부여를 이어 단군이 되었는데)고, 통전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


7. 여론


위만조선은 바로 단군조선 땅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번조선인 왕 기준의 조선 땅을 가리키는데, 번조선이 발해만 부근이므로 위만조선도 발해만 부근이 된다. 이곳에 소위 한사군이 위치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진한땅에는 위만조선시대에는 이미 북부여가 존재하고 있었다. 번조선땅에 고죽국이 있었고, 기자의 땅 서화가 있었고,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대방 등이 여기에 있었다.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 패수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

▲소위 한사군의 위치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도망할 때 조선인들은 위만을 도적이라 하였으나,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할 때 조선인들은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사와 싸웠는데 이때 출현한 사람이 동명왕 고두막한이다. 고두막한은 단군조선 제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기전108년에 동명왕이라 칭하면서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북부여의 해부루에게 자신이 천제자라 하면서 위협하여 동부여 제후로 삼고 북부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마니시류는『삼국유사』석유환국 부분을 석유환인..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이마니시류는『삼국유사』석유환국 부분을 석유환인으로 날조하지 않았다?

이마니시류는『삼국유사』석유환국 부분을 석유환인으로 날조하였다. 그런데 석유환국 부분만 口+土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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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삼국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삼국유사(三國遺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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