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송고시간2015-02-16 15:17

336만자 고려사 전체 베낀 필사본, 영국서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유희해·옹수곤 등 청대 고증학자들이 활용"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336만 9천623자에 달하는 고려사 전체를 한 글자 한 글자 곱게 베낀 필사본 완질이 영국에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지난해 발주한 '구한말 해외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책임연구자 유춘동 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과정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에 고려사 필사본 완질 139권 19책이 보관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조사단의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가 찾아낸 이 고려사는 양장(洋裝) 제본에 'KAOLI SHIH'라고 표기됐다. 조사 결과 이 고려사는 괘선지에 해서체로 또박또박 고려사 전체를 필사한 것이며, 19세기 중국 학자들이 애장하며 돌려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주청 영국공사를 역임하면서 중국 고서를 전문적으로 수집한 토마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 1818~1895) 기증 도서다.

아울러 필사본에 대한 장서인(소장자가 찍은 도장)과 그에 적힌 문구 조사를 통해 이 필사본 고려사가 중국 청대 최고의 금석문 학자인 유희해(劉喜海.1793~1852)와 당시 중국 최고의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아들 옹수곤(翁樹崑.1786~1856), 그리고 장서가 고천리(顧千里. 1766~1835) 등이 활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첫 권 고려사 서문인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위에 찍힌 가음이장서인(嘉蔭이<竹 밑에 移>藏書印)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편저자인 유희해의 인장이다. 허경진 교수는 '가음이'가 그의 장서루 명칭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 아래에 유희해인(劉喜海印)과 유희해의 호인 연정(燕庭)이라는 도장이 확인돼 유희해 장서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진고려사전이 끝나는 부분에는 옹수곤이 적은 "1813년 12월부터 교열하면서 읽다가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문장이 있고, 권137 뒤에도 역시 그가 적은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라는 글이 확인됐다.

허 교수에 따르면 이 두 부분에는 각기 수곤상관(樹崑嘗觀)과 성원상관(星原嘗觀)이라는 도장을 찍혔다. 옹수곤은 옹방강의 여섯째 아들이며 성원이 옹수곤의 자(字)다.

따라서 이 필사본의 발견은 "청나라 금석학자들이 조선 금석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 그리고 조선금석문 연구를 위해 고려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구입하거나 필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다"면서 "나아가 19세기 한중(韓中) 학자들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재단은 평가했다.

이 고려사 필사본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거리다.

옹수곤은 추사가 북경에 가서 만난 스승 옹방강의 아들로 추사와 동갑내기 친구다.

당시 옹수곤과 유희해는 고려시대 금석문 연구에 몰두해 있던 때라 조선 사신이 오갈 때마다 탑본(탁본)을 부탁하고 이렇게 구한 탑본의 글자를 판독하고 고증하기 위해 고려사를 구해 열심히 대조해가며 읽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사 완질본을 구하기 힘들자 옹수곤은 김정희나 정조의 부마이자 당대의 문장가인 홍현주(洪顯周. 1793~1865), 문인 이광문(李光文.1778~1838) 등에게 빠진 부분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며, 자기 소장본과 유희해 소장본을 대조하다가 빠진 부분을 찾아냈다고 허 교수는 덧붙였다.

허 교수는 "이 책은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문 학자 유희해가 소장하고 옹수곤이 교감했다는 점에서 귀중하다"면서 특히 "유희해가 해동금석원을 편집할 때 이 책을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려사는 김종서·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1449년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 139권으로 완성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현재 대부분 목판본으로 전하고 금속활자본이나 목활자본이 그 다음으로 많다.

총 글자수 336만 9천623자에 달하는 고려사 중 필사본은 열전이나 지(志) 부분만을 필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사 전체를 필사한 것으로는 규장각 소장 61책과 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71책 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본처럼 전질을 정성스럽게 필사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허 교수는 말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방학연구소와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윌리엄 애스턴(W.G. Aston.1841~1911) 도서에 대한 전모를 파악했다고 재단은 덧붙였다.

애스턴은 구한말 주한 영국공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의 각종 문집, 세책(貰冊) 고소설류 및 한글 교재 등을 구입했다. 아울러 그는 한글을 재미있게 배우기 위해 '조선설화', '장화홍련전' 등의 고소설을 수집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두고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등 한일관련 다양한 전적도 수집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는 그가 책을 구매하면서 적은 책 권수와 가격, 구매자, 특징 등을 기술한 목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더 큰 것으로 평가됐다.

이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1893년 조선을 찾은 알레산드로 드류(Alessandro Damer Drew.1859~1926)가 수집한 성경책 등의 자료들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그가 모은 책은 대부분 조선에서 간행된 초기 성경책과 선교 관련 자료로서 그에는 그의 한국이름인 유대모(柳大模)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박대기입력 2023. 12. 11. 11:11수정 2023. 12. 11. 11:11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 장군…별똥별이 떨어져 적을 공격했다? [오늘 이슈] (daum.net)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주목을 받으면서 극 초반 처절한 전투를 지휘한 양규 장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제 7권 양규 편을 보면, 기록된 역사 속 활약은 드라마에 못지 않습니다.

거란이 고려의 실권자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을 설득했지만, 양규 장군은 "나는 왕명을 받았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게 아니"라며 성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강조의 패전 이후 양규 장군이 아군을 수습하고 빼앗긴 성을 탈환한 사실도 기록돼 있습니다.

 

장군은 이를 전후해 일곱 차례 적을 섬멸하고 끌려가던 고려인 3만 명을 해방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양규 장군이 성을 공략할 때 별똥별이 성벽을 무너뜨린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옵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고려사에는 큰 별똥별이 귀주에 떨어졌다는기록이 있지만, 내막은 미지수입니다.

고려 현종은 양규의 아내에게 보낸 글에서 장군에 대해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했다"며 높이 평가했습니다.

멸망의 위기 속에서 납치된 백성을 구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KBS뉴스 박대기입니다.
 
 
 
입력 2024. 1. 15. 06:00수정 2024. 1. 16. 06:12
구글어스로 추정해본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의 위치. 130~170m 고지군을 따라 능선상에 축조된 성이다. 넓은 개활지와 삼교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한 장점을 갖고 있다. ‘걸망성’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 성에서 거란군이 망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죠.

1254년 몽골의 잇따른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재위 1213~1259)은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죠.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표현한 겁니다.

■고려판 이순신

또 한 분은 2차 고려-거란 전쟁 승리의 주역인 양규(?~1011) 장군입니다.

돌이켜보면 3차례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세 분이 있죠. ‘1차(993~994)=서희(942~998)’, ‘2차(1010~1011)=양규’, ‘3차(1018~1019)=강감찬(948~1031)’입니다.

이중 서희와 강감찬 등에 비해 2차 전쟁의 주역인 양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됐습니다. <고려사>에 양규 장군의 행적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한 1010년 11월 16일부터, 전사한 1011년 1월 28일까지 딱 2개월 10여일치만 남아 있습니다.

현종은 양규 장군에게 ‘공부상서’ 관직을 추증했고요. 부인에게는 해마다 벼 100곡을 제공하고, 아들(양대춘)에게도 관직(교서랑)을 주었습니다. 현종은 그때 양규의 공을 거론합니다.(<고려사> ‘열전·양규’)

“그대의 남편이…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강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

양규는 1024년(현종 15)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까지 하사받았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은 ‘태조 왕건 때의 삼한공신 이후 공신각의 벽에 초상이 봉안된 공신’을 뜻합니다. 이런 분인데, 지금까지 홀대를 받았던 겁니다.

이번 드라마 덕분에 ‘양규=고려판 이순신’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고려 땅을 넘본 거란군을 끝까지 섬멸하고 전사한 양규 장군이죠. 이순신(1545~1598) 장군도 퇴각하는 왜군들과 최후 일전(노량해전)에 앞서 “이 원수만 무찌르면 죽어도 한이 없다(此讎若除 死則無憾)”고 외치며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양규 장군이 활약한 전투 장소인 애전, 이수 등의 지명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추정일 뿐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몸과 뼈가 가루가 될지언정…

이제 역사서에 기록한 그대로만 ‘2차 고려-거란 전쟁’과 양규 장군 이야기를 해볼까요.

1009년 1월 고려에서 큰 정변이 일어나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1010)가 목종(재위 997~1009)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겁니다. 강조의 정변입니다. 그러자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은 “임금을 시해한 강조의 대역죄를 묻기 위해 직접 출정하겠다”(<고려사> ‘세가·현종’)고 선언합니다. 고려도 가만있을 수 없었죠.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진을 쳤습니다(<고려사> ‘세가 현종’). 11월 16일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거란 성종은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등장합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거란 황제가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는 도순검사(조정이 파견한 임시 군지휘관)가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흥화진성은 22일까지 7일 동안 펼쳐진 거란군의 거센 공세에도 끄떡없이 버텼습니다. 그 와중에 거란 성종이 항복을 권유하는 칙서를 잇달아 보냅니다. “역신 강조를 사로잡아 네 앞에 내보내면 철군할 것”이라고 한 겁니다.

양규 등은 그러나 흥화진 부사 이수화의 명의로 “(황제가) 군사를 돌려 자중해야 고려의 복종을 얻을 것”이라는 답서를 보냅니다. 거란 성종이 재차 “답서를 보니 귀순할 뜻이 없고, 내용도 불성실하며 문장도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꾸짖었는데요.

이에 고려군은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고려의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라면서 결사항전을 외쳤습니다.

“거란 황제는 ‘고려군이 결코 항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읽고 흥화진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 황제는 20만 대군을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20만 대군은 통주로 진출했다.”(<고려사> ‘열전·양규’)

이 흥화진의 항전은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거란군의 7일 공세에도 끄떡없이 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의 40만 대군 중 절반인 20만명의 발목을 묶어둔 겁니다. 양규 장군은 지켜낸 흥화진을 기반으로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반격작전을 펼침으로써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흥화진을 포기한 거란군은 강조가 주둔한 통주성 공략에 나섰다. 강조는 성 앞 삼수채까지 진출해 진을 친 뒤 거란군과 맞섰다. 전투에서 강조군이 초반에는 연전연승했지만, 적을 얕잡아본 나머지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 결국 대패했다. 이때 고려군 3만여명이 전사했다. 거란군은 인근 통주성 공략에 나섰다. /지도는 대동여지도, 그림은 안주섭의 논문을 바탕으로 재정리



■“난 강조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거란군의 다음 목표는 강조가 지키고 있던 통주성이었습니다. 전투는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벌어졌습니다. 강조는 성을 부하들에게 맡겨두고 통주성 남쪽(삼수채)까지 나와 거란군과 싸웠는데요. 처음엔 연전연승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의 총공세에 강조가 사로잡히고 고려군 3만명이 전사했답니다. 강조는 “내 신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고려 사람이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버텼고요. 결국 처형당했죠.

그렇게 강조 군대를 깨뜨린 거란군은 통주성으로 달려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통주성도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거란은 흥화진에 거짓으로 꾸민 강조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겁니다.

거란군은 흥화진-통주성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곽주성 공략에 나섭니다(12월 6일).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됐습니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습니다.

그러다 10일 뒤인 12월 6일,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필살의 반격작전에 나섭니다.

흥화진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했고요. 밤중에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성을 공격한 겁니다. 불의의 기습작전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요. 양규 장군은 성안의 백성 7000여명을 구출해 통주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흥화진과 통주성을 사수하고, 빼앗겼던 곽주성마저 탈환하자 거란군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주성(북한 보존급 문화재 138호). 강조가 이끄는 3만 고려군이 인근 삼수채에서 전사했지만 중랑장(정5품) 최질·홍숙 등이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낸 통주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거란군은 곽주성으로 진격했다.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백과>, 2008)



■초조해진 거란 황제

전쟁이 길어질수록 거란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요사>(병위지)는 “(원래 유목민인 거란은)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철군은 12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농사를 짓는 정주민(고려 등)의 경우 9월부터 추수를 끝내고 곡식을 저장하잖아요. 거란군은 전쟁 기간 중 군량을 현지 조달했거든요.

고려군은 그러나 백성과 곡식을 모두 성안에 들여놓고 결사항전하는 ‘청야술’로 맞섰거든요. 그러니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조달할 군량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12월이 지나면 말들을 다시 초원에 방목해야 할 시기가 되죠.

그런데 전쟁이 질질 늘어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란군으로서는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황제가 친정한 전쟁이니만큼 고려 현종의 무릎을 꿇려야 체면이 서는 건데요. 그렇지만 고려가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죠.

■고려의 거짓 입조 약속

고려 현종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흥화진-통주를 지켰고, 곽주도 재탈환하기는 했죠. 거란군의 남진은 계속됐고요. 서경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현종이 거란의 성종을 알현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합니다(<고려사절요>). 하지만 고려 현종이 쉽게 거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죠.

서경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16일간(12월 11~26일) 벌어졌고요. 결국 거란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진합니다. 급기야 12월 28일 현종이 개경을 떠나 피란길에 오릅니다. 피란을 권한 이는 예부시랑(정4품) 강감찬이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있는) 강조가 이미 죽은 만큼 우려할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워낙 강성하므로 일단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고려사절요> 12월 28일)

이것이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나오는 유일한 ‘강감찬’ 기사입니다.

곽주성(능한산성·북한 국보 61호). 흥화진과 통주성 점령에 실패한 거란군은 곽주성으로 진격했다.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됐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진으로 본 북한 국보유적>, 2006



■‘입조했다’치고 철수

이때 고려는 하공진(?~1012)과 고영기(미상)를 거란 진영에 보내 강화를 요청합니다.(12월 30일)

“국왕(현종)이 진실로 와 뵙기를 원했지만 거란 군대의 위세가 너무 강성한 데다… 멀리 강남 지역으로 피란 가셨습니다….”

거란 측이 “고려 국왕이 어디 있냐”고 묻자 하공진은 “왕(현종)이 간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거란 성종은 철수를 허락하면서 하공진 등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고려사절요> 1011년 1월 3일)

<요사>는 “고려가 ‘요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입조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러나 현종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입조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란군이 철군합니다. 정식으로 강화가 성립됐는지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아요.

하공진 등이 찾아오자 철군의 명분을 찾느라 골몰하던 거란 성종이 ‘옳다구나’ 싶어 덥석 강화를 받아들인 인상이 짙어요. ‘입조했다’고 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해버린 것 같아요.

곽주성은 1010년 12월 6일 거란군에게 점령당한 뒤 6000여명의 거란군이 잔류하며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흥화진을 지켜냈던 양규 장군이 흥화진과 통주 군사들을 규합한 뒤 곽주성을 공격해 거란 주둔군을 격멸하고 백성 7000여명을 구출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그렇게 쫓기듯 철군하는 적군을 그냥 보내줬을까요.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정리해보죠.

1월 17일 귀주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1만여 수급을 베었고요.

18일부터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18일 양규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했다. 거란군 수급 2000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000여명을 구했다.”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하며 수급 2500여 급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빼앗았다.”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수급 1000여 급을 베고 남녀 1000여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28일 양규가 애전(의주)에서 거란의 선봉을 공격해서 1000여 급을 베었다. 얼마 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양규와 김숙흥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양규의 활약상을 제대로 정리합니다.

“양규는 후원군도 없는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 달 만에 7번 싸워 거란 군사들을 다수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만여명을 구해냈다”면서 “낙타와 말, 무기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고 전했습니다.

양규·김숙흥 장군이 전사한 뒤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이 그냥 압록강을 건너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반쯤 건너려 할 때 흥화진사 정성(미상)이 공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양규 장군은 한 달 사이 7전 7승의 신화를 이뤄냈고요. 그 휘하인 김숙흥과 정성 등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거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이역만리 거란 땅에까지 끌려갈 운명이었던 포로 3만명을 구해낸 것은 천고에 빛날 양규 장군의 공적입니다.

양규 장군 등이 거란군을 무찌른 전투 장소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연구마다 전투 장소를 추정한 지도 및 그림이 약간씩 다르다. 왼쪽은 국방부전사편찬위의 <여·요 전쟁사>(민족전란사 7, 1990) 추정 지도. 오른쪽은 안주섭의 ‘고려-거란 전쟁사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01‘의 지도.



■갈 때는 곱게 못 보내준다

또 “올 때는 그냥 왔지만 갈 때는 곱게 못 보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거란군도 그 꼴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송나라 사서인 <송사>의 ‘고려전’이 “고려 현종이 기이한 대책을 세워 침략한 거란군을 다 죽였다”고 평가했겠습니까. 황제의 체면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난 거란 성종은 어찌 됐을까요.

1012년 4월과 7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약속대로 친조하라”(<고려사>)고 재촉하는데요.

현종은 그러나 요즘 말로 “뭐래?”를 외쳤습니다. 고려는 “왕(현종)이 아프다”(<고려사>)고 점잖게 거절하는데요. 그러자 거란 성종은 “그럼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성까지 빼앗아라”고 불같이 화를 내죠. 고려가 그러나 왜 강동 6성을 내주겠습니까.

이번에 2차 고려-거란 전쟁을 다루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습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대부분이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뭇 영웅’으로, 겨우 이름 석 자만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름 석 자라도 남은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죠. 이름도 빛도 없이 싸우다 스러진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백성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이기환 기자입력 2024. 1. 8. 06:06

'고려도경' 서긍은 간첩단 두목이었다…송나라 사신단의 ‘넘버4맨'[이기환의 Hi-story] (daum.net)

쓴다 쓴다 하면서 미뤄뒀다가 해를 넘긴 아이템이 있습니다.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이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 되는 해가 2023년이었는데요. 그러나 그냥 넘길 수 없죠. 음력으로 치면 아직 해가 바뀌지도 않았고요.

고려를 방문하고 귀국한 서긍이 <고려도경>을 써서 송 휘종(1100~1125)에게 바친 것이 1124년(인종2)이었습니다. 따라서 2024년은 <고려도경> 편찬 900주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그러니 ‘~주년 기념’ 기사는 유효하겠지요.

1123년 송나라가 고려에 파견한 사신단을 태운 최첨단 거함 ‘신주(神舟·추정도)’. <고려도경>에 따라 추정해보면 신주는 길이 30여 장(90m), 높이 9장(27m), 폭은 7장 5척(24m)에 이른다. 어떤 연구자들은 신주의 길이 34m, 높이 13m, 폭 11m 정도로 추정하기도 하다. <고려도경>은 신주에 승선할 수 있는 선원만 180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림은 문경호 공주대교수 제공

 

■비색청자와 세밀가귀

<고려도경> 하면 ‘비색청자’가 첫손가락으로 꼽히죠.

“도기의 푸른 빛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는데, 근래에 더욱 정교해져서 빛깔이 좋아졌다.”(<고려도경> ‘기명3·도준’)

고 했습니다. 나전칠기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일컫는 ‘세밀가귀(細密可貴)’도 빼놓을 수 없죠.

“고려의 나전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而螺細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 ‘잡속2·토산’)고 했습니다.

나전칠기에 사용된 나전이 2만~3만개에 이르고, 나전의 두께가 0.3~0.8mm 정도에 불과하니, 그런 찬사가 나온겁니다.

<고려도경>은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길이는 10여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5자이고 2000여곡을 실을 수 있다…선원은 배마다 60명에 이른다”고 했다.|그림은 문경호 교수 제공

 

■음주문화…1차에 15잔은 기본

이외에도 당대 고려의 풍속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흥미로운 장면이 포착되는데요. 특히 음주 문화도 눈길을 끕니다.

사신단은 방문 첫날부터 귀국 때까지 고려 국왕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는데요.

첫번째 연회부터 “왕(인종)이 사신단에게 술 9번 돌린 뒤 쉬었다가 다시 술자리에 앉으라”(<고려도경> ‘궁전2·연영각전’)고 했고요.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요. ‘밤 늦게까지 15차례씩 마셨다 쉬었다 마셨다’를 반복한 술자리가 사신단이 돌아가는 순간까지 3차례(<고려도경> ‘연례·헌주·관회·서교송행’)나 이어집니다. 1차에 15잔씩 2차, 3차까지 가는 술자리….

아마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의 술공세에 넉다운 되었을 겁니다. 2차, 3차로 차수를 이어가는 음주문화는 최근까지 이어지죠.

송나라는 1123년 년신주 2척과 객주 6척 등 총 8척에 1000명에 이르는 사신단을 실어 고려에 파견했다. 당시 요나라와 금나라 등 북방 세력에 시달리던 송나라가 그나마 믿을 구석은 고려였다. 송나라는 고려의 도움도 청하고,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사신단을 보냈다.|문경호 공주대 교수 제공

 

■고려인은 ‘깔끔쟁이’

서긍의 눈에 비친 고려인은 어땠을까요. ‘깔끔쟁이’였습니다.

우선 “옛 사서(<위서> ‘열전·고구려)는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더러운 중국인’을 ‘디스’하는 말을 옮깁니다.

“고려인들은 늘 중국인이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한다.”

서긍은 <고려도경> ‘서문’에서 1123년 사신단 파견의 목적 중 하나가 “황제(휘종)의 명에 따라 고려의 실정을 낱낱이 파악해 보고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서긍도 고려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다고 콕콕 쑤십니다.

“고려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혼인도 쉽게 하고 이혼도 쉽게 한다…예법을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

이상합니다. 서긍의 ‘디스’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싶은데요. 그런데 요즘 풍속에 비추어보면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요.

송 휘종은 1123년 사절단에 무술에 뛰어난 군인 외에도 고려의 풍속을 살펴 글과 그림으로 정리할 문사들과 예술인, 기술인(측정 및 측량 담당) 등 스파이 58명을 특별히 파견했다.|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장 설명

 

■고려 여인의 몽수패션

‘여성 패션’ 기사가 눈길을 끄는데요. “부인이 몸을 꾸밀 때는 화장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분을 바를 때 붉은 색은 사용하지 않는데 버들같이 그린 눈썹이 이마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합니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3폭으로 만든다. 한 폭의 길이는 8척이다.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땅에까지 내려온다.”

 

그런데 일하는 여인들은 거추장스럽지 않게 “몽수를 늘어뜨리지 않고 정수리에서 겹쳐지게 한 후 옷을 추스르며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천한 집에서는 몽수 패션을 할 수 없었답니다. 신분 때문이 아니고요.

“몽수 가격이 은 1근에 해당되니 가난한 집에서는 마련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고려패션 중에 ‘돌려입는 치마’가 눈에 띕니다, 치마가 8폭인데요.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려 높이 묶는답니다.

“몸을 휘감을수록 고상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부귀한 집안의 부녀자는 치마를 만들 때 7~8필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송나라의 첩보활동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서긍은 “고려에 머문게 겨우 한달 남짓이었고, 고려가 객관을 제공한 다음에는 군사가 지켰으므로 객관을 나선게 겨우 5~6번에 불과했다”고 토로했다.

 

■송나라는 사면초가

그런데 지금까지 <고려도경>과 관련해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왜 이 <고려도경>을 만들어 황제(휘종)에게 바쳤을까요.

사실 송나라가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보낸 것은 그때(1123)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45년 전이었습니다.

1078년 송나라 신종(1067~1085)이 고려로 떠나는 대규모 사신단을 막 건조한 거함(‘신주·神舟)’ 2척에 태웠습니다.

<고려도경>은 “예전(1078)에 신종 황제가 고려에 보낼 사신단을 위해 거함 두 척을 만들도록 했다. 그 규모가 매우 웅장(規模甚雄)했다”고 전했습니다. 1078년(문종 32)이면 언제입니까.

“이제 요(거란)의 운명도 다했으니 송나라의 책봉을 받으라”는 송나라의 협박반, 읍소반의 끈질긴 구애작전에도 불구하고 고려 인종은 “아직 선왕(예종)의 장례도 끝나지 않았으니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완곡하기 거절했다.

고려 현종(1009~1031)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최종승리(1018~1019)를 거둔 후 전성기를 누리던 때죠.

송나라는 왜 ‘웅장한 규모의 거함’까지 건조하면서까지 대규모 사신단을 보냈을까요.

여기에는 심각한 속사정이 있었죠. 당시 송나라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강국 요(거란)과 서북방의 서하 등에게 막대한 세폐(해마다 건네주는 물자)를 대가로 평화를 구걸하는 처지였죠.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1075~76) 남방의 교지국(베트남)과도 국경분쟁을 벌였습니다.

<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실정을 모두 탐문해오라는 송 휘종의 뜻에 따라 58명의 스파이 요원이 고려의 감시를 뚫고 눈도장, 귀동냥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고려관련 정보 보고서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의 <고려도경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특별전 도록, 2018

 

■고려에 까인 송나라

그나마 거란과 송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고려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송나라로서는 그런 고려를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뜨거운 구애작전을 펼친겁니다.

그러나 송나라 신종의 외교전은 실패하고 맙니다. 고려 입장에서 북쪽에 요(거란)이 버티고 있는데 그렇게 가볍게 놀 수 없었죠. <고려사>를 읽어보면 송나라 사신단을 맞이한 고려 문종(1046~1083)이 이런 말을 합니다.

 

“황제가…후히 하사하니 영광스럽고 감사하나, 삼가 두려운 것도 많다.”(<고려사> 1078년 6월25일)

‘삼가 두려운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송나라의 접근이 부담스럽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송나라가 고려에게 ‘까인’ 겁니다. 그럼에도 신종은 고려를 향한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데요.

송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들의 연도에 고려관(혹은 고려정)을 세워 편의를 제공했고요. 고려와의 공적·사적 무역을 전면 허용하는 고려교역법을 반포하기도 했습니다.(1079년 1월)

<고려도경>에는 그 시대에 고려에서 쓰인 30여종의 생활용기가 너무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동파는 ‘혐한파’

그런데 친고려정책을 썼던 신종이 죽고 새 황제(철종·1085~1100)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지죠.

송나라 조정에서 고려비판론이 등장한 겁니다. 특히 고려 지식인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던 소식(소동파·1036~1101)이 실은 ‘지독한 혐한파’였는데요. 웃기죠. 당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1075~1151)·김부철(1079~1136) 형제가 소식·소철(1039~1112) 형제를 신봉한 나머지 이름까지 바꿨다는데 말이죠.

그런 소식이 1089~1093년 사이에 끈질기게 고려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그가 주장한 고려의 오해론(五害論·5가지 폐해)은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거란(요)의 앞잡이’인 고려에게 너무도 많은 선심을 베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송나라가 쓰지 않아도 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여론 때문에 송나라의 고려 구애작전은 흐지부지 되는 듯 했는데요.

<고려도경>은 “멥쌀로 만든 술은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길이 100m의 초대형 선박 건조

그러나 국제정세가 다시 급변하게 되죠. 1100년 송나라 황제가 휘종(1100~1125)으로 바뀐 것이 첫번째 변화였는데요.

무엇보다 북방에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1115년 건국한 금나라(여진족)가 무서운 기세로 강성해졌구요.

결국 송나라는 북방의 패자로 급부상한 금나라에게 막대한 세폐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연경과 계주 등 6주의 지배권을 획득하기는 했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1122년 12월)

송나라는 다시 고려로 눈길을 돌렸는데요. 그것이 바로 서긍이 파견되는 1123년의 사절단입니다.

송 휘종은 1178년을 능가하는 사절단을 꾸밉니다. 우선 1178년에 건조한 배(신주·神舟)를 능가하는 새로운 신주 2척을 건조합니다. 여기에 민간 무역선인 객주 6척을 더 동원합니다. <고려도경>은 ‘신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민간 무역선인 ‘객주’의 규모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놓고는 ‘신주의 길이·너비·높이·크기·집기·용기·인원수 등은 모두 객주의 3배’라고 특기해놓았습니다.

서긍이 파견되었던 12세기 고려에서 사용된 각종 술 관련 질그릇(도기) 술병과 청자 주전자 및 청자 잔. |경기도박물관의 ‘ <900년전 이방인의 고려방문기-고려도경>(특별전 도록), 2018’에서

 

■1000명에 육박한 사신단 수

그럼 객주의 규모를 볼까요. “객주의 길이는 10여길(장), 높이는 3길, 너비는 2길5자이고…선원은 배마다 60명에 이른다”(<고려도경> ‘객주’)고 했어요. 신주의 규모는 정확하게 객주의 3배라 했죠.

그렇다면 신주는 길이 30여 장(90m), 높이 9장(27m), 폭은 7장 5척(24m)이라는 얘기입니다.(#주:실제 신주의 규모는 길이 43m, 높이 13m, 너비 11m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또 객주 6척에 선원(1대당 60명)만 360명(6×60명)이 탔다고 했죠. 그럼 객주의 3배라는 신주에도 선원만 360명(2×60×3)이 탄겁니다. 그렇다면 8척(신주 2척+객주 6척)에 승선한 선원만 총 720명에 이릅니다. 또 <고려도경>에 기록된 공식사절단수가 156명인데요. 이것만 해도 876명인데요. 그밖의 수행원까지 합하면 1000명에 달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자그만치 900년 전인데요. 송나라가 10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사신단을 고려국에 보냈다는 겁니다.

송나라 사신단은 고려 인종의 술공세에 넉다운됐다. <고려도경>에는 연회가 있을 때는 술잔을 최소 9번에서, 기본으로 15잔씩 돌고 잠깐 쉰 다음 다시 술자리에 앉아 2~3차를 이어갔다는 기사가 속출한다.

 

■<고려도경>은 기행문이 아니다

아무리봐도 보통 사절단 같지 않죠. <고려도경>은 단순한 기행문이나 풍물지가 아닙니다.(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장 설명)

일단 <고려도경> ‘서문’을 들여다 봅시다.

“구중궁궐 깊은 곳…천자(황제)는 만리 밖 사방을 손바닥 위에서 가리키듯 훤히 살펴야 한다.”

“고려는 요동에 자리잡고 있어서…가까운 제후국이 아니다. 도적(圖籍·지도와 호적) 작성이 곤란하다.”

“눈 귀가 닿는대로 널리 일을 탐문하는 것이 사신의 직분이다.”

“고려의 실정을 수집하여 사신의 임무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한다.”

어떻습니까. ‘쌔~’한 느낌이죠. 좋은 말로 ‘정보수집’, 쉬운 말로 ‘스파이’ 같죠.

그렇습니다. <고려도경>에는 58명에 이르는 ‘그 다음 보충된 하절(차충대하절)’들의 임무가 적혀있는데요.

“충대하절은 군인 신분이 많았다. 이번 사절단에는 군인 뿐 아니라 사인(士人·선비)이나 예술인 및 장인들도 뽑았다. 이번 사절의 행차에 고려인을 위로하고 살피라는 황제의 뜻을 모두 유념했으므로 누구나 고려의 풍속을 살피려고 했다.”

<고려도경>은 “옛 사서에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고려인들은 늘 중국인이 ‘때가 많다’고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한다.”고 전했다.

 

■송나라 스파이 58명의 암약

이 무슨 뜻입니까. 공식사절단(156명) 가운데 58명의 스파이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무술을 익힌 군인들도 있었지만 더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 더러는 측정과 측량을 담당하는 기술인들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죠.

서긍은 어떤 역할이었을까요. 서긍은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도할관 다음인 ‘제할관’이었는데요. ‘넘버4’였죠.

1000명에 육박하는 사신단원과 신주·객주, 그리고 고려와 주고받은 예물을 관리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긍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뽑힌 이유가 있었죠. 글씨는 물론이고요.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신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풍물과 인물을 그리고, 기록하는데 적격이었다는 뜻입니다.

서긍은 본인은 물론 58명의 ‘스파이’가 수집해오는 정보를 취사 선택하고 정리해서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총지휘했을 겁니다. 송나라의 다른 의도도 있었을 겁니다. 요즘의 항공모함 같은, 길이 100m에 육박하는 초대형 최신 선박에 1000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함으로써 송나라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을 겁니다.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혼인도, 이혼도 쉽게 한다”고 꼬집었다.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월야밀회’.|간송미술관 소장

 

■감시의 눈 번뜩인 고려

고려 조정은 과연 송나라의 의도를 몰랐을까요. 알았던 것 같습니다.

1123년 6월12일 당대 세계최대의 선박인 신주 2척을 앞세운 송나라 사절단의 배 8척이 위풍당당 예성항 어귀에 들어섰습니다. 송나라 사신단은 내심 고려인들이 거대한 신주의 규모에 압도 당할 고려인들을 상상했겠죠.

그러나 더 놀란 것은 송나라 사신단이었습니다. 서긍은 “중무장한 기병들과 의장대를 비롯한 고려 정예부대 1만명이 도열해 있었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둘러서 있었다.”(<고려도경> ‘예성항’ ‘초신기대’)고 보고했습니다.

사신단이 도착부터 송나라와 고려가 엄청난 기싸움을 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은 ‘몽수’라는 특유의 패션을 전한다.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는 한 폭의 길이는 8척이며 정수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얼굴만 드러내게 한다”고 소개했다.|사진은 경기도박물관 제공

 

그럼 첩보활동은 자유로웠을까요. 아닙니다. 서긍의 발언을 들어보죠.

“고려에 머문게 겨우 한달 남짓이었고, 고려가 객관을 제공한 다음에는 군사가 지켰으므로 객관을 나선게 겨우 5~6번에 불과했다. 수레가 달리는 동안이나 연회 도중에 주워듣고 보았던 부분에 대해서….”

고려 조정의 감시로 첩보활동에 너무도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서긍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서긍은 그런 상황에서도 58명의 스파이요원이 눈도장, 귀동냥한 것을 토대로 나름 그럴싸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도경>이라는 책이름처럼 글과 그림을 곁들인 보고서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1127~28)에 일어난 ‘정강의 변’(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 금나라에 잡혀간 사건)-북송의 멸망-남송의 건국 등 난리통에 그림 부분은 사라졌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몽수 패션을 할 수 없었다. <고려도경>은 “몽수 가격이 은 1근에 해당되니 가난한 집에서는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경기도박물관 제공

 

■실패로 끝난 사신단의 임무

그렇다면 송나라가 고려에 보낸 대규모 사신단은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그렇지 못했답니다.

사신단장인 정사 노윤적이 “이제 요나라의 운명도 다했으니 송나라의 책봉을 받으라”고 막 즉위한 고려 인종(1122~1146)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인종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아직 선왕(예종)의 상(喪)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책봉을 요청하는 것은 예의상 미안한 일이오. 실로 황공하고 부끄러울 뿐이오.”(<고려사> 1123년 6월22일)

고려~조선의 지식인들이 ‘워너비’로 추앙했던 소동파(소식·1036~1101)이 실은 ‘지독한 혐한파’였다. 소식은 고려의 오해론(五害論·5가지 폐해)에서 “‘거란(요)의 앞잡이’인 고려에게 너무도 많은 선심을 베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송나라가 쓰지 않아도 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고 주장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구구절절한 외교적 수사죠. ‘상중(喪中)’이라는 점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한 겁니다.

한마디로 최첨단 거함 신주를 앞세워 고려를 제 편으로 만들려 했던 송나라의 외교전은 실패로 끝났던 겁니다.

하지만 단 한달여의 짧은 기간에 온갖 감시를 받아가면서 남긴 일종의 첩보보고서가 900년전 고려와 고려인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지침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이 기사를 위해 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장과 문경호 공주대 교수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강봉룡 목포대 교수의 논문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려도경>과 관련한 단행본으로 문경호 교수의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푸른역사, 2023)과 김대식 관장의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그림 강민경, 역사인, 2013)을 추천합니다.)

<참고자료>

강봉룡, ‘1123년 송의 봉사고려사신단 파견의 실상과 의의-대고려 거대 외교프로젝트의 관점에서’, <2023 해양실크로드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김대식, ‘이방인에 비친 고려, 고려도경’, <900년전 이방인의 고려방문기-고려도경>(경기도박물관 특별전 도록), 경기도박물관, 2018

김대식, <그림으로 읽는 고려도경>, 그림 강민경, 역사인, 2013

문경호, ‘도쿄대 소장 당선지도를 통해 본 신주의 선형과 구조’, <2023 해양실크로드 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3

문경호,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푸른역사, 2023

서긍, 조동원·김대식·이경록·이상국·홍기표 옮김, <고려도경>, 황소자리, 2005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도경 숨은그림 찾기>, 2019

경기도박물관, <900년전 이방인의 코리아방문기>(특별전 도록), 2018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입력 2024. 1. 5. 01:38수정 2024. 1. 5. 05:48

「 지방 사람들의 고려 건국

이익주 역사학자

 

한국 역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왕조의 수명이 길고, 왕조교체가 매우 드물다. 고구려·백제 600년 이상, 신라 1000년, 고려·조선 500년이다. 왕조교체는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된 것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역사 발전이 더뎠다는 정체론(停滯論)의 근거로 삼기도 하고, 전복 세력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은 선정(善政)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왕조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민심이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될 때도 민심이 요동쳤다.


신라 말 재정 시스템 붕괴가 반란 촉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청동상. 북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 안에 있는 왕건의 무덤 현릉에서 출토됐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말이던 서기 889년, 『삼국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나라 안의 모든 주군(州郡)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자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왕은 신라의 세 여왕 중 한 사람인 진성여왕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은 여왕의 실정을 부각하려 했지만, 이게 어디 국왕 한 사람의 잘못을 탓할 일이었겠나. 또 국가의 세금 독촉에 저항한 사람이 어디 몇몇 도적뿐이었겠는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쓰는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결과이고, 그 때문에 전국에서 헐벗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원종과 애노를 시작으로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과 궁예, 죽주(지금의 안성)에서 기훤, 전주에서 견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라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지방민들이 촌주(村主) 같은 유력자를 중심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도 있었다. 견훤은 본래 신라의 군인이었는데, 도적을 토벌하러 파견되었다가 오히려 그들을 규합해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출발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독립된 세력을 이루었고, 신라의 통치에 반발하는 민심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지금 우리는 호족(豪族)이라고 부른다.


호족의 지지를 받아 후삼국 통일

경북 안동의 태사묘. 이 지역 호족으로 왕건에게 협력한 김선평·권행·장정필 삼태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호족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양길과 싸워 이긴 것이 전자의 예라면,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이던 용건(왕건의 아버지)이 스스로 궁예 밑으로 들어간 것은 후자의 예이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독립 세력이 하나, 둘 통합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 후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그 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뒤 후삼국 통일을 달성했다(936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는 호족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왕건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각지의 호족들에게 ‘중폐비사(重幣卑辭)’의 뜻을 전했다. 선물을 넉넉하게 주고(중폐) 겸손한 말을 쓰겠다(비사)는 뜻이니, 자기 아래로 들어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우대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 말을 듣고 왕건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심지어는 왕건과 패권을 다투던 견훤의 아버지, 상주 호족 아자개조차 왕건에게 귀부해왔다. 또, 유명한 얘기지만, 왕건은 부인이 스물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의 지지를 끌어냈던 것이다.

 

지방 호족들의 협력은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다. 930년에 고창군(지금의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고창군에서는 견훤과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왕건이 불리했으나 그 지방 호족 세 사람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여기서 승리하면서 왕건은 전체 판세를 뒤집고 6년 뒤에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고창군(郡)은 안동부(府)로 승격했고, 세 사람의 호족은 왕건으로부터 김씨, 권씨, 장씨 성을 하사받아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라는 성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기득권 극복이 근본 과제

경기도 광주 하사창동에서 출토된 철조 불상. 광주 지역의 호족이며, 왕건의 장인인 왕규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은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가며 후백제의 견훤과 싸웠지만, 정작 더 중요한 상대는 신라였다. 비록 군사력은 와해되고 실제 통치 범위도 경상도 지역에 한정되었지만, 신라에는 1000년 왕조의 전통과 권위가 있었다. 경주가 서울이던 시절, 벽지이던 송악 출신의 왕건이 과연 통일 왕조의 임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새 나라를 만들고 송악으로 서울을 옮기는 것을 사람들이 용납할 수 있었을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동원된 논리가 마침 그때 당나라에서 들어온 풍수(風水)였다.

「 신라 말 재정 파탄 민심 요동쳐
지방 독립세력이 호족으로 성장

“복종하면 후히 대접” 지지 유인
풍수가 고려에 새로운 권위 부여

왕건은 건국, 호족은 이익 실현
서울과 지방이 공존했던 나라

풍수란 땅에 보이지 않는 기운, 즉 지기(地氣)가 있어서 성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한다는 믿음이다. 이에 따르면 경주가 영원히 변치 않는 서울일 수 없었다. 경주의 기운도 시간이 지나면 쇠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송악도 때가 되면 서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풍수는 경주의 전통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고려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시대 묏자리 잡는 음택(陰宅) 풍수로 쪼그라들기 전, 우리 역사에서 풍수가 가장 멋진 역할을 한 순간이었다.

왕건을 비롯해서 신라 말에 등장한 지방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투쟁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했던 것은 신라의 전통이었다. 고려 이전, 통일신라까지는 왕경인(王京人), 즉 서울 사람들의 독무대였다. 신라 골품제 아래서는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사이에 엄격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맨 아래 두품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 골품제는 서울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제였고, 지방 사람들은 모두 ‘골품 외’였다. 이렇게 된 것은 신라 국가가 처음 만들어질 때 경주 일대의 사로국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로국의 후손들은 1000년 가까이 건국 세력의 기득권을 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대는 왕경인이 통치한 사회’(전덕재,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말의 사회 변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권력이 교체된 대사건이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고려, 조선과 큰 차이

『고려사』에 인용되어 있는 『편년통록』.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으로, 풍수를 이용해서 왕건의 출현을 예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이익주,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이 지방 호족의 협력에 힘입어 후삼국을 통일했다면, 호족의 입장에서는 왕건을 통해 이익을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사람은 관직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 즉 1000년의 소외에서 벗어나 새 나라 고려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고려 왕조에서 지방 호족들은 중앙의 관리가 되거나 지방의 향리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향리로 남더라도 본거지에서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중앙의 관리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 점에서 광종 때 시작된 과거제도의 의미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실제로 고려 내내 지방 향리들은 과거를 통해 끊임없이 서울로 올라갔고, 지배 세력을 정화하는 새로운 피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고려는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따라서 서울과 지방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었다. 개경이 서울로서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점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았다. 서울과 지방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 모색되었고, 고려 특유의 본관제(本貫制)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존을 통해 고려는 500년을 버텼다. 서울 사람이 모든 것을 독차지했던 신라가 그것 때문에 멸망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고려는, 우리 역사 속에서 신라와 조선 사이에 500년 가까이 존속한 나라, 남녀 차별이 덜 심했고, 남녀 간의 사랑은 자유로우며, 대외적으로 개방적이고, 거란과 싸워 이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가장 잘 모르는 나라가 아닐까.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을 몇백 년 앞으로 끌어다 놓으면 그것이 곧 고려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불교 국가 고려와 유교 국가 조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조선과 다른 500년의 역사가 있었다.

◆이익주=역사학자이며 서울시립대 교수다. 고려 역사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주로 연구하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일도 열심히 한다. 『이색의 삶과 생각』(2013)을 썼고, 유튜브 ‘이익주는 역사’ 강의를 진행한다.

 

 

고려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려사(高麗史)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 왕조의 역사를 저술한 역사서이며 기전체(紀傳體)로 된 고려 왕조의 정사(正史)이다.

개요[편집]

1392년부터 1451년까지 60여년에 걸쳐 작성과 수정을 반복하여 편찬되었으며, 34명의 국왕이 다스린 474년의 각종 사건과 각 시대별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았으며, 후세에 지침이 될 만한 정치적 근거로서 조선을 건국한 주도 세력인 사대부들의 역사관을 담고 있다. 고려 왕의 기록은 본기(本紀)에 포함하지 않고 세가(世家)에 작성하여 격하하였다.

편찬 과정[편집]

편찬 목적[편집]

《고려사》 편찬 작업은 고려 시대의 국왕과 군신들의 행적과 자취를 참고하여 새로운 조선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나, 이후 기전체의 서술방식을 채택하였다. 《고려사》는 관찬사서이며, 이후 조선의 역사서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무신정권기로부터 우왕창왕 시대의 폐정을 경계하여 교훈을 얻고자 하였다.

편찬 및 개수 과정[편집]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명에 따라 1392년(태조 1년) 10월 13일, 정도전정총박의중윤소종에게 명하여 수찬하게 한 것이 처음이다. 1395년(태조 4년)에 고려 태조로부터 마지막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총 37권의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이때 편찬된 책이 《고려국사》인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414년(태종 14년), 《고려국사》에 공민왕 이후 고려 말기의 일이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기 위하여 하윤남재변계량으로 하여금 개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416년(태종 16년) 하윤이 죽어 편찬이 중단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세종은 유관과 변계량에게 개수 작업을 할 것을 명하였고, 1423년(세종 5년) 다시 개수하게 하였는데, 《고려실록》에 쓰인 고려 국왕의 묘호와 시호를 그대로 사용할 것과, 정도전의 편향된 시각으로 저술된 부분에 대하여 전면적인 개수를 명하였다.

 

 

지관사 유관(柳觀)과 동지관사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중략)
오늘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이에 성인이 취하고 버리신 본지를 엿보지 못할 바엔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바르게 기록하면, 찬미하고 비난할 것이 스스로 나타나서족히 후세에 전하고 신빙할 수 있을 것이니,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과실을 엄폐하려고경솔히 후일에 와서 고쳐서 그 사실을 인멸케 할 것은 없는 것이다.그 종(宗)을 고쳐서 왕(王)으로 일컬을 것도 사실에 좇아 기록할 것이며,묘호(廟號)와 시호(諡號)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고,범례(凡例)에 고친 것도 이에 준하여야 할 것이다.(중략)《고려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 · 혜종 의공왕이라 하고,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그 태후 · 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뺄것이요,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29일 (병자)

 

1424년(세종 6년),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올렸다. 이후에도 신개권제 등이 찬술하였고, 이계전어효첨에게 교정하도록 하였으며 1449년(세종 31년)에는 춘추관에 전지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종서정인지이선제에게 이 일에 대한 감독을 맡겼다. 실제 작업은 신숙주최항박팽년이석형김예몽하위지양성유성원이효장이문형 등 당대의 최고 문관들이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년) 최종적으로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구성하였다. 1452년(문종 2년)에는 김종서가 《고려사》를 요약하여 만든 《고려사절요》 35권을 만들었고, 1454년(단종 2년) 《고려사》 간행에 착수하였다.

체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본떠 세가(世家) · 지(志) · 표(表) · 열전(列傳)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사 판본[편집]

을해자 번각본[편집]

고려사高麗史종목수량시대소유주소정보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유형문화재 제104호
(2010년 9월 20일 지정)
75책 139권
조선시대
동아대학교
부산광역시 서구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고려사》는 총 139권75책으로 된 완질본으로 보존 상태는 완벽에 가까운 매우 좋은 상태이다. 이 판본은 1482년(성종 13년)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乙亥字本)을 1613년(광해군 5년)에 번각한 목판본이다. 인출 시기는 동일한 판본의 초쇄본으로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태백산사고본과 대조해 본 결과, 자면(字面)이나 계선(界線)에서 나뭇결이나 터짐 현상 혹은 탈락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규장각 소장본보다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1]

이 책은 총 75책 139권의 거질(巨帙)임에도 불구하고 낙질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상태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전래본 중 가장 일찍 인출된 것은 1482년(성종 13년)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본이나, 을해자본은 완질본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을해자본 다음으로 간인된 이 판본의 완질본이 현재 4질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그 내용이 전해지는 사료가 부족하여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로서 사료적 가치와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높은 자료이기 때문에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2]

목판본[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련사 고려사입니다.

백련사 고려사白蓮寺 高麗史종목수량소유주소정보

 부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76호
(2014년 3월 19일 지정)
111권 65책(결본)
백련사
부산광역시 남구 이기대공원로 85-7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백련사 《고려사》는 목판본으로 모두 65책이다. 표지는 모두 개장되었으나, 인쇄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며 파손된 부분은 거의 없다. 백련사 《고려사》는 65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권질의 《고려사》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있으며, 고려사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2]

필사본 고려사[편집]

《고려사》의 필사본은 전질의 경우 규장각에 소장된 61책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 소장된 71책이 알려져 있다.

2015년 2월 28일 한국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열상고전연구회 제69차 정례학술발표회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전적 가운데 중국인 학자 필사한 고려사 전질(139권 19책)이 소장되어 있음을 발표하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산하 '구한말 해외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 조사단은 2014년 5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도서관을 필두로 동방학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 전적 2,000여 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전적을 확인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된 필사본 고려사는 괘선지에 해서체로 필사한 것으로, 중국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1793년~1852년)가 소장하였고 《해동금석원》을 펴는 데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금석학자 옹방강(1733년~1818년)의 아들인 옹수곤(1786년~1815년)과 장서가 고천리(1766년~1835년) 등의 손을 거쳐 주청영국공사이자 중국고서수집가였던 토마스 웨이드가 기증한 것으로 확인된다.

구성[편집]

《고려사》는 총 137권으로, 〈세가(世家)〉 46권 · 〈지(志)〉 39권 · 〈표(表)〉 2권 ·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가[편집]

접기세가(世家)권수제목비고연대

권1 세가 권 제1 태조 1 태조 1년(918년) ~ 태조 13년(930년)
권2 세가 권 제2 태조 2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태조 14년(931년) ~ 경종 6년(981년)
권3 세가 권 제3 성종 · 목종 성종 즉위년(981년) ~ 목종 12년(1009년)
권4 세가 권 제4 현종 1 현종 즉위년(1009년) ~ 현종 13년(1022년)
권5 세가 권 제5 현종 2
덕종
현종 14년(1023년) ~ 덕종 3년(1034년)
권6 세가 권 제6 정종 정종 즉위년(1034년) ~ 정종 12년(1046년)
권7 세가 권 제7 문종 1 문종 즉위년(1046년) ~ 문종 10년(1056년)
권8 세가 권 제8 문종 2 문종 11년(1057년) ~ 문종 25년(1071년)
권9 세가 권 제9 문종 3
순종
문종 26년(1072년) ~ 순종 즉위년(1083년)
권10 세가 권 제10 선종 · 헌종 선종 즉위년(1083년) ~ 헌종 원년(1095년)
권11 세가 권 제11 숙종 1 숙종 즉위년(1095년) ~ 숙종 7년(1102년)
권12 세가 권 제12 숙종 2
예종 1
숙종 8년(1103년) ~ 예종 3년(1108년)
권13 세가 권 제13 예종 2 예종 4년(1109년) ~ 예종 9년(1114년)
권14 세가 권 제14 예종 3 예종 10년(1115년) ~ 예종 17년(1122년)
권15 세가 권 제15 인종 1 인종 즉위년(1122년) ~ 인종 6년(1128년)
권16 세가 권 제16 인종 2 인종 7년(1129년) ~ 인종 16년(1138년)
권17 세가 권 제17 인종 3
의종 1
인종 17년(1139년) ~ 의종 6년(1152년)
권18 세가 권 제18 의종 2 의종 7년(1153년) ~ 의종 22년(1168년)
권19 세가 권 제19 의종 3
명종 1
의종 23년(1169년) ~ 명종 8년(1178년)
권20 세가 권 제20 명종 2 명종 9년(1179년) ~ 명종 27년(1197년)
권21 세가 권 제21 신종 · 희종 · 강종 신종 즉위년(1197년) ~ 강종 2년(1213년)
권22 세가 권 제22 고종 1 고종 즉위년(1213년) ~ 고종 17년(1230년)
권23 세가 권 제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 고종 37년(1250년)
권24 세가 권 제24 고종 3 고종 38년(1251년) ~ 고종 46년(1259년)
권25 세가 권 제25 원종 1 원종 즉위년(1259년) ~ 원종 4년(1263년)
권26 세가 권 제26 원종 2 원종 5년(1264년) ~ 원종 11년(1270년)
권27 세가 권 제27 원종 3 원종 12년(1271년) ~ 원종 15년(1274년)
권28 세가 권 제28 충렬왕 1 충렬왕 즉위년(1274년) ~ 충렬왕 4년(1278년)
권29 세가 권 제29 충렬왕 2 충렬왕 5년(1279년) ~ 충렬왕 10년(1284년)
권30 세가 권 제30 충렬왕 3 충렬왕 11년(1285년) ~ 충렬왕 19년(1293년)
권31 세가 권 제31 충렬왕 4 충렬왕 20년(1294년) ~ 충렬왕 26년(1300년)
권32 세가 권 제32 충렬왕 5 충렬왕 27년(1301년) ~ 충렬왕 34년(1308년)
권33 세가 권 제33 충선왕 1 충선왕 즉위년(1298년)
충선왕 복위년(1308년) ~ 충선왕 2년(1310년)
권34 세가 권 제34 충선왕 2
충숙왕 1
충선왕 3년(1311년) ~ 충숙왕 6년(1319년)
권35 세가 권 제35 충숙왕 2 · 충숙왕 (後) 충숙왕 7년(1320년) ~ 충숙왕 17년(1330년)
충숙왕 후1년(1332년) ~ 충숙왕 후8년(1339년)
권36 세가 권 제36 충혜왕 1 · 충혜왕 (後) 충혜왕 즉위년(1330년) ~ 충혜왕 2년(1332년)
충혜왕 후1년(1339년) ~ 충혜왕 후5년(1344년)
권37 세가 권 제37 충목왕 · 충정왕 충목왕 즉위년(1344년) ~ 충정왕 3년(1351년)
권38 세가 권 제38 공민왕 1 공민왕 즉위년(1351년) ~ 공민왕 4년(1355년)
권39 세가 권 제39 공민왕 2 공민왕 5년(1356년) ~ 공민왕 10년(1361년)
권40 세가 권 제40 공민왕 3 공민왕 11년(1362년) ~ 공민왕 13년(1364년)
권41 세가 권 제41 공민왕 4 공민왕 14년(1365년) ~ 공민왕 18년(1369년)
권42 세가 권 제42 공민왕 5 공민왕 19년(1370년)
권43 세가 권 제43 공민왕 6 공민왕 20년(1371년) ~ 공민왕 21년(1372년)
권44 세가 권 제44 공민왕 7 공민왕 22년(1373년) ~ 공민왕 23년(1374년)
권45 세가 권 제45 공양왕 1 공양왕 원년(1389년) ~ 공양왕 2년(1390년)
권46 세가 권 제46 공양왕 2 공양왕 3년(1391년) ~ 공양왕 4년(1392년)

〈세가〉의 특징[편집]

《고려사》 〈세가(世家)〉는 태조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국왕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

  • 《고려사》 〈세가〉의 연대표기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입각하여, 국왕이 즉위한 해는 즉위년이라 두고, 그 이듬해를 정식 원년으로 삼았다. 다만 〈태조세가〉 · 〈공양왕세가〉에서는 즉위년을 칭하지 않았다.
  • 〈충렬왕세가〉에서는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한 8개월 간(1298년 1월~7월)의 기록이 공백처리되었다. 이 공백처리된 부분은 〈충선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선왕세가〉에서는 충선왕이 충렬왕에게 양위를 받았던 8개월 간(1298년 1월~8월)의 기록이 수록되었으나, 다시 폐위되어 복위하기까지의 공백기간(1298년 9월~1308년 6월)은 〈충렬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숙왕세가〉에서는 충숙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시기(1313년 1월~1330년 7월)의 기록을 먼저 서술한 후, 복위한 후의 기록(1332년 2월~1339년 3월)은 이전의 재위기간과 구분하여 연도를 후년(後年)이라 표기하였다. 중간의 공백기간은 〈충혜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충혜왕세가〉에서는 충혜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던 시기(1330년 7월~1332년 2월)의 기록을 먼저 서술한 후, 복위한 후의 기록(1339년 4월~1344년 1월)은 이전의 재위기간과 구분하여 연도를 후년(後年)이라 표기하였다. 중간의 공백기간은 〈충숙왕세가〉에 수록되었다.
  • 제32대 우왕(1374년~1388년) · 제33대 창왕(1388년~1389년)은 《고려사》 찬자들에 의하여 공민왕의 적통이 아니라, 승려 신돈의 자식으로서 국왕을 참칭한 것으로 간주되어 〈세가〉에서 제외되었다. 때문에 우왕 · 창왕의 연대기는 〈열전〉 46~50권에 수록되었고, 이름은 신우(辛禑) · 신창(辛昌)으로 표기되었다.

 

[편집]

접기지(志)권수제목비고[3]

권47 지 권 제1 천문 1
권48 지 권 제2 천문 2
  • 과 오성의 침범과 의 변동 (의종 ~ 원종)
권49 지 권 제3 천문 3
  • 과 오성의 침범과 의 변동 (충렬왕 ~ 공양왕)
권50 지 권 제4 역 1
  • (曆) 서문
  • 선명력 : (추보술 : 기삭 · 발렴 · 일전 · 월리 · 구루 · 교회 · 오성)
권51 지 권 제5 역 2
  • 수시력경 상(上) : (추보법 : 기삭 · 발렴 · 일전 · 월리 · 중성 · 교회)
권52 지 권 제6 역 3
  • 수시력경 하(下) : (오성 추보법 · 수시력 입성)
권53 지 권 제7 오행 1
권54 지 권 제8 오행 2
  • 행(木行)
  • 행(金行)
권55 지 권 제9 오행 3
  • 행(土行)
권56 지 권 제10 지리 1
  • 지리(地理)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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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7 지 권 제11 지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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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8 지 권 제12 지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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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9 지 권 제13 예 1
  • (禮)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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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례대사
권60 지 권 제14 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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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례대사
권61 지 권 제15 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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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례대사
권62 지 권 제16 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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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례중사
권63 지 권 제17 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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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례소사
권64 지 권 제18 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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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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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례
권65 지 권 제19 예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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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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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
권66 지 권 제20 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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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
권67 지 권 제21 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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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
권68 지 권 제22 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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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
권69 지 권 제23 예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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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잡의
권70 지 권 제24 악 1
  • (樂)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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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1 지 권 제25 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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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2 지 권 제26 여복 1
  • 여복(輿服)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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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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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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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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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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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7]
권73 지 권 제27 선거 1
  • 선거(選擧)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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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1
권74 지 권 제28 선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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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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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권75 지 권 제29 선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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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관리
권76 지 권 제30 백관 1
  • 백관(百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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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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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7 지 권 제31 백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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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도감각색
  • 서반 · 외직 · 훈 · 작 · 문산계 · 무산계
권78 지 권 제32 식화 1
  • 식화(食貨)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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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토지제도)
권79 지 권 제33 식화 2
권80 지 권 제34 식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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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휼
권81 지 권 제35 병 1
  • (兵)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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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82 지 권 제36 병 2
  • 숙위 · 진수 · 참역 · 마정 · 성보 · 둔전
권83 지 권 제37 병 3
  • 간수군 · 위숙군 · 검점군 · 주현군 · 선군 · 공역군
권84 지 권 제38 형법 1
  • 형법(刑法)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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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 직제 · 간비 · 호혼 · 대악 · 살상
권85 지 권 제39 형법 2
  • 금령 · 도적 · 군율 · 휼형 · 소송 · 노비

[편집]

접기표(表)권수제목비고연대

권86 표 권 제1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정종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태조 원년(918년) ~ 의종 24년(1170년)
권87 표 권 제2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 원종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공민왕 · 신우 · 신창 · 공양왕
명종 원년(1171년) ~ 공양왕 4년(1392년)

 

열전[편집]

접기열전(列傳)권수제목비고

권88 열전 권 제1
후비 1
  • 후비(后妃) 서문
펼치기
태조부터 원종까지의 후비 목록
권89 열전 권 제2
후비 2
펼치기
충렬왕부터 공양왕까지의 후비 목록
권90 열전 권 제3
종실 1
  • 종실(宗室)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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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부터 명종시대의 왕자 목록
권91 열전 권 제4
종실 2 ·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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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부터 공양왕시대의 왕자 목록
펼치기
태조부터 공양왕시대의 공주 목록
권92 열전 권 제5 홍유 (附 : 배현경 · 신숭겸 ·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최언위 (附 : 최광윤 · 최행귀 · 최광원)
왕유 (附 :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왕순식 (附 : 이총언 · 견금 · 윤선 · 흥달 · 선필 · 태평) · 공직 · 박영규
권93 열전 권 제6 서필 · 최승로 (附 :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유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권94 열전 권 제7 서희 (附 : 서눌 ·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황보유의 (附 : 장연우) · 양규 (附 : 양대춘) · 지채문 (附 : 지녹연)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유소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권95 열전 권 제8 최충 (附 : 최유선 · 최사제 · 최약 · 최윤의)
이자연 (附 : 이자량 · 이자인 · 이혁유 · 이자현 · 이자덕 · 이예 · 이공수 · 이지저 · 이오 · 이광진)
박인량 (附 : 박경인 · 박경백 · 박경산) · 황주량 · 유신 · 왕총지 · 위계정
소태보 (附 : 왕국모 ·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임의 (附 : 임원후 · 임극충 · 임극정 · 임보 · 임유 · 임익 · 임항) · 김한충
권96 열전 권 제9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附 : 윤언이 · 윤인첨 · 윤세유 · 윤상계) · 오연총
권97 열전 권 제10 김부일 (附 :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附 : 이궤) · 곽상 (附 : 곽여) · 유재 (附 : 호종단 · 신안지)
김경용 (附 :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附 : 유록숭)
김준 · 유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附 :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권98 열전 권 제11 김부식 (附 : 김돈중 ·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附 : 이위) · 허재
권99 열전 권 제12 양원준 · 최유정 (附 : 최당 · 최린 · 최선 · 최종준 · 최온 · 최문본 · 최평 · 최옹)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유공권 (附 : 유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유응규 (附 :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附 : 최보순 ·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권100 열전 권 제13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정세유 (附 : 정숙첨 · 정안) · 정국검 (附 :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권101 열전 권 제14 민영모 (附 : 민식) · 송저 · 김광중 (附 :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정 · 왕규
차약송 (附 : 기홍수) · 정극온 · 유광식 · 권경중
김태서 (附 : 김약선 · 김미) · 문한경 (附 : 권세후 · 백돈명) · 노의수 · 김의원
권102 열전 권 제15 금의 · 이규보 (附 :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附 : 김승무) · 이공로
이인로 (附 : 오세재 · 조통 · 임춘) · 조문발
이순목 (附 :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附 : 하천단) · 채송년 (附 : 채정) · 손변 · 권수평
이순효 (附 :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권103 열전 권 제16 조충 (附 : 조변) · 김취려 (附 : 김문연 · 김변) · 이적 · 채정 · 박서 (附 : 송문주)
김경손 (附 :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권104 열전 권 제17 김방경 (附 : 김구용 · 김제안 · 김흔 · 김순 · 김영돈 · 김영후 · 김사형 · 박구) · 한희유
나열 (附 :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附 : 김심 · 김종연 · 김석견)
권105 열전 권 제18 유경 (附 : 유승 · 유돈 · 유만수)
허공 (附 : 허종 · 허관 · 허금 · 허부 · 허유)
홍자번 (附 : 홍승서 · 홍영통) · 정가신
안향 (附 : 안우기 ·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조인규 (附 : 조서 · 조연 · 조덕유 · 조린 · 조연수 · 조위)
권106 열전 권 제19 백문절(附 :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附 : 이행검) · 장일 · 김구
이승휴 (附 : 이연종) · 김훤 (附 : 김개물) · 정해 (附 : 정오 · 정포 · 정공권)조간 · 심양 · 추적 (附 : 이인정 · 채우) · 김유성 (附 : 곽린) · 윤해 (附 : 윤택)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항 · 박유 · 홍규 (附 : 홍융)
권107 열전 권 제20 한강 (附 : 한악 · 한수 · 한방신) · 원부 (附 : 원충 · 원호 · 원선지 ·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권단 (附 : 권보 · 권준 · 권렴 · 권용 · 권적 · 권고 · 권화 · 권근) · 민지 (附 : 민상정)
권108 열전 권 제21 민종유 (附 : 민적 · 민사평 · 민변 · 민제) · 김지숙 (附 : 김인연) · 정선 · 이혼
최성지 (附 :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권109 열전 권 제22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附 :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이조년 (附 : 이승경) · 이곡 · 우탁
안축 (附 : 안종원 · 안보) · 최해 · 정항 · 이성
조렴 (附 :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권110 열전 권 제23 최유엄 · 김태현 (附 : 김광재) · 김륜 (附 : 김경직 · 김희조 · 김승구)
왕후 (附 :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附 : 이달존 · 이보림) · 이능간
권111 열전 권 제24 염제신 · 이암 (附 : 이강) · 홍언박 (附 : 홍사우 · 유연) · 유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조돈 (附 :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권112 열전 권 제25 이공수 · 유숙 (附 : 유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설손 (附 :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권113 열전 권 제26 안우 · 김득배 ·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권114 열전 권 제27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附 :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권115 열전 권 제28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권116 열전 권 제29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권117 열전 권 제30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권118 열전 권 제31 조준
권119 열전 권 제32 정도전
권120 열전 권 제33 윤소종 (附 :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권121 열전 권 제34
양리 · 충의 · 효우 · 열녀
권122 열전 권 제35
방기 · 환자 · 혹리
권123 열전 권 제36 폐행 1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附 : 이습)
권의 (附 : 채모 · 이덕손) · 임정기 (附 : 민훤) · 주인원 · 이영주
이지저 (附 : 고종수 · 김유 · 인후 (附 : 인승단) · 장순룡 (附 : 차신 · 노영) · 조윤통
권124 열전 권 제37 폐행 2 윤수 (附 : 윤길보 · 송화) · 이정 (附 : 김문비 ·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附 : 임중연 · 강융)
신청 (附 : 박청) · 왕삼석 (附 : 양재 · 조신경 · 최노성 · 윤현 · 안규)
최안도 (附 : 이의풍 · 김지경 · 이인길) · 노영서 (附 : 박양연 ·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권125 열전 권 제38 간신 1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포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 석주
김원상 · 유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附 :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권126 열전 권 제39 간신 2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권127 열전 권 제40 반역 1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권128 열전 권 제41 반역 2 정중부 (附 : 이광정 ·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附 : 석린)
권129 열전 권 제42 반역 3 최충헌 (附 : 최이 · 최항 · 최의)
권130 열전 권 제43 반역 4 한순 · 다지 · 흥복원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조이 (附 : 김유 ·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권131 열전 권 제44 반역 5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권132 열전 권 제45 반역 6 신돈
권133 열전 권 제46 반역 7 신우 1
권134 열전 권 제47 반역 8 신우 2
권135 열전 권 제48 반역 9 신우 3
권136 열전 권 제49 반역 10 신우 4
권137 열전 권 제50 반역 11 신우 5

평가 및 비판[편집]

《고려사》는 《고려사절요》와 함께 고려시대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사료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 우창비왕씨설의 정당화: 이성계 세력들이 폐가입진을 정당화하려고 만든 설인데, 《고려사》가 간행된 지 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1454년[단종 2년]에 간행되어 유포되었음) 1475년(성종 6년)에 경연에서 성종은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했고[9], 이는 현대 연구자도 마찬가지다.[10]
  • 금석문, 다른 문헌자료와의 연월일 불일치: 묘지명, 개인 문집 등과 《고려사》를 비교해 보면 연월일이 적게는 하루부터(서공) 많게는 9년이나(대원공) 차이가 난다.
  • 열전에서 인물의 누락: 윤포(尹誧: 1063~1154), 오천유(吳闡猷: 1168~1238), 류보발(柳甫發: 1304~40), 이탄지(李坦之: 1085~1152), 진광인(晋光仁: 1126~85), 이승장(李勝章: 1137~91), 채인범(蔡仁範: 934~98), 호진경(胡晉卿: 1107∼60) 등이 《고려사·열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개인 문집이나 금석문(묘지명)에서만 나온다.
  • 열전에서 인물 평가의 불공정성: 현대 연구자와 학자들은 류청신[11]권한공[12]변안렬[13] 등에서 인물 평가가 공정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 오탈자, 연문: 《고려사》 안에서 같은 사실을 전하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오탈자나 연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
  • 내용·연월일 오류 및 누락: 편찬하는 과정에서 틀린 부분들이 고쳐지지 않았고, 일부 사실들은 누락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일부 연도는 내용이 없다.[15]

 

 

[고려사절요]

 

고려사절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조선 문종(文宗) 때 완성한 고려의 편년사(編年史)이다. 《고려사》가 기전체인데 비하여 독자적인 편년체를 취하였고, 《고려사》에 없는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김종서의 감수를 거쳐 1452년에 완성되었다.

구성[편집]

 

 

 

<참고자료>

 

고려사 - Daum 백과

 

 

고려사(高麗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고려사절요 - Daum 백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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