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

5·18 왜곡 망언과 '동국통감' (daum.net)

입력 2019. 3. 8. 06:06수정 2019. 3. 8. 20:16
 
[책과 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극우 인사 지만원씨가 7일 오후 서울 강서구 방화동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연 '좌파정권에 부역하는 김성태 규탄집회'에 참석해 있다. '5.18 북한 배후설'을 주장하는 지씨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추천하려는 자유한국당 일부의 움직임에 대해 김 원내대표가 '난색'을 표하자 지씨 등 극우 보수 인사들이 반발해 집회를 열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8.11.7.

홍윤성(洪允成)은 세조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신임의 근거는 단종을 몰아낸 그 정변(政變), 곧 세조의 왕위찬탈 쿠데타를 적극 도왔던 데에 있었다. 홍윤성은 난폭한 성정, 거침없는 폭력으로 유명했다. 첩이나 노비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활과 칼로 다스렸다.

홍윤성이 춘추관(春秋館) 감춘추(監春秋)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시정기(時政記)를 읽어보니, 자신의 죄악을 넘쳐나게 써 놓았다. 춘추관은 당대의 시정(時政), 곧 동시대의 정치를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것이 곧 시정기다. 시정기는 뒷날 역사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된다. 시정기에 자신의 악행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보통의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홍윤성은 “일본산 좋은 종이에 인쇄한 <강목>(綱目)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거늘 하물며 <동국통감>을 읽겠는가? 너희들 마음대로 써 봐라, 누가 우리나라 역사를 읽으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책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말이었다.

 

뒷날 권력을 잡기 위해 더러운 음모를 꾸미고 살육을 행한 악인들은 이 말을 자신들의 악행을 덮는 말로 써먹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들어서자 조정에는 새 바람이 불었다. 이른바 사림(士林)들의 개혁정치가 시작되자 낡은 세력들은 음모를 꾸며 개혁의 선두에 섰던 조광조를 죽이고 사림을 정계에서 축출했다.(이른바 기묘사화다) 그 음모의 수괴는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었다. 역사가 두렵지 않냐는 말에 남곤 역시 “<동국통감> 따위를 누가 읽는단 말이야?”라고 답했다.

명종 때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과 한 패거리가 된 이기(李?)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을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영의정까지 올랐던 그 역시 <동국통감>은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다는 남곤의 말을 되풀이했다.(그러고 보니 남곤도 영의정까지 지냈다!)

홍윤성·남곤·이기가 아무도 읽는 사람이 없다고 했던 <동국통감>은 성종 때 만들어진 역사서다. 주자(朱子)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도 읽지 않는데,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냐고 했는데, 그래 그 말은 옳았다. <동국통감>은 거의 아무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동국통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홍윤성과 남곤, 이기의 악행과 추악한 음모를 증언하는 글과 책이 넘쳐 났던 것이다. <동국통감>은 읽지 않았지만, 그 글과 책으로 그들의 악행과 추악한 음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21세기에도 <동국통감>을 누가 읽느냐는 자들이 있다. 근자에 5·18에 대해 태연히 망언을 내뱉은 자들이다. 알량한 권력으로 진실을 덮고 역사를 왜곡해도 자신들의 더러운 이름이 잊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하지만 <동국통감>이 읽히지 않아도 역사는 진실을 전했다. 아니, 역사의 심판을 기다릴 것도 없을 것이다. 망언을 내뱉은 자들을 처벌하고 정계에서 축출해야 할 것이다. 망언의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망언조차 다양한 역사 해석의 하나라는 궤변을 지껄이는 자들까지 정계에서 깡그리 축출하는 것이야말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이종섭 기자입력 2015. 3. 5. 14:25수정 2015. 3. 5. 14:25

일본 원로학자 한남대에 '동국통감' 희귀본 기증 (daum.net)

일본인 원로 학자가 자신이 소장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일본 판본을 대전 한남대에 기증 한다. 동국통감은 조선 전기 편찬된 우리 역사서로 일본 판본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한남대는 고노시 다카미츠(神野志隆光)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17세기 일본에서 간행한 판목으로 찍어낸 동국통감 56권 전체를 기증 받는다고 5일 밝혔다.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한 책으로 조선 전기 왕명에 의해 관에서 편찬한 대표적 역사서다. 우리가 단기(단군 기원)를 쓸 때 기원전 2333년을 출발점으로 삼는 근거가 바로 이 책에 나온다. 이 책은 1458년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인 1458년 완성된 것으로, 모두 56권 28책으로 이뤄진 활자본이다.

고노시 교수가 소장한 판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약탈됐던 동국통감을 바탕으로 당시 일본 미토번(현재 이바라키현)에서 판목을 만들어 조선으로 가져온 뒤 찍어낸 것이다. 이 일본판 동국통감의 판목은 지난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남대가 고노시 다카미츠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기증 받는 동국통감 |한남대 제공

하지만 국내에는 동국통감의 일본 판본이 없으며, 일본에서도 7개 대학에 소장돼 있지만 56권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문 희귀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기증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평소 고노시 교수와 친분을 맺어 온 배정열 문과대학장의 주선으로 이뤄지게 됐다. 고노시 교수는 "귀중한 역사서가 한국에서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읽히고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동국통감을 연구해 온 백승호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부터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 정작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역사서"라며 "이 책을 일본 사람들이 가져다 우리 역사를 알기 위해 활용하고 직접 만들어서 봤던 것으로, 약탈됐던 역사서가 일본 책판으로 형태를 바꿔 국내로 돌아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노시 다카미츠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한남대는 9일 오후 총장실에서 기증식을 가진 뒤 이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도 연다. 학술대회에서는 고노시 교수가 '하나의 한자세계로서 동아시아'라는 주제의 발표를 하고, 국내 연구자인 백승호 교수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의 동국통감에 관한 발표가 이어진다.

<이종섭 기자 nomad@kyunghyang.com>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능화

[김종성 기자]

  이능화가 지은, 우리나라의 기생에 대해 그 역사와 실상을 다룬 책 <조선해어화사>
ⓒ 국립한글박물관
   
한국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학자 중 하나가 이능화(1868~1943)다. 그는 불교·기독교·유교·도교뿐 아니라 여성사와 사회사에 관한 책들도 저술했다. 기생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해어화사>는 지금도 이 분야 연구에 활용된다.

그런데 그의 역사 연구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초했다. 그는 한국 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 못지않은 인물이다. 식민사관의 산실인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기간만 봐도 그렇다.

이병도가 '역사를 엮고 가다듬는다'는 직책인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일한 것은 1925년 8월부터 1927년 5월까지다. 그 뒤 그는 1938년 6월경까지 촉탁 신분으로 근무했다. 대략 13년간 조선사편수회에 몸담았던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 따르면, 이능화가 조선사편수회의 전신인 조선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간 것은 1922년 12월 28일이다. 이곳은 1925년 6월에 나온 '조선사편수회 관제'에 따라 조선사편수회로 바뀌었고, 그는 여기서 1942년까지 근무했다.

그가 그런 기관에만 가담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수관과 교과서조사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총독부의 관변 역사학자로 살았던 것이다.

거액을 벌어들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 긴 기간 동안 일본 녹봉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 기간에 친일 재산을 쌓아가며 한국 역사를 편찬했다. 다른 나라 연구소도 아니고, 한국을 침략한 나라의 연구기관에서 한국사를 편찬했다. 그가 받은 봉급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보면, 그는 가성비가 높은 친일파였다. 일본이 녹봉을 준 기간도 짧지 않지만, 일본이 얻은 것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많았다.

일본은 한국 강점 2년 뒤인 1912년 8월, 그에게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했다. 3년 뒤 11월에는 요시히토 일왕(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했다. 1928년 11월에는 히로히토 일왕(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부여했다. 이듬해 1월에는 훈6등 서보장을 서훈했다. 그랬다가 1940년 4월에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히로히토 일왕의 은배를 수여했다.

20여 년간의 녹봉과 더불어 이 같은 치하의 표시는 이능화가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 때문이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리고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떨어트리는 데도 기여했다.

 

<조선사> 편찬 통해 비관적 인식 확산에 기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3년에 펴낸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장의 기고문인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는 이능화가 조선사편수회에서 담당한 집필 분야가 조선시대 중기 및 후기였다며 "당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와 근대사의 분기점까지 맡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독부가 1927년에 펴낸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은 "이조의 선조 이후의 정치사는 바로 당쟁"이라고 한 뒤 "양반계급은 이미 당파심이 격렬한 탓으로, 이에 추종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계급 역시 스스로 당파를 만들어 널리 시행한 탓으로 상민 이하의 비천한 계층에까지 파급되었다"라고 서술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벌 싸움이 없는 나라는 없다. 파벌 싸움의 다른 말은 당쟁, 당파 싸움이다. 이런 정치 투쟁은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심하다. 그런데도 일제는 당파 싸움이 조선에만 있었던 듯이 과장을 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조적 논리를 유포했다. 이능화는 <조선사> 편찬을 통해 그런 비관적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의 <조선사> 서술은 일본군이 동학혁명 진압을 구실로 조선에 침략한 뒤 이른바 갑오개혁 혹은 갑오경장을 벌인 1894년을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했다. 일본군이 벌인 일을 조선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서술했던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필요에 맞게 조선의 제도를 개편한 갑오경장은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능화 같은 역사학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조선사>의 편찬 취지는 중 하나는 단군사관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국인들이 단군을 중심으로 자국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단군과 한국인들을 갈라놓는 게 핵심 목적 중 하나였다.

2010년에 <사학연구> 제99호에 실린 박찬흥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조선사(조선사편수회 편)의 편찬 체제와 성격'은 "<삼국유사> 고조선조(條)를 고구려 동명성왕 즉위조에 첨가하거나 <제왕운기>등의 단군신화 관련 기록도 제외시킨 것도 단군신화를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능화는 <조선사>가 그런 방향으로 편찬되는 데도 기여했다. 담당한 분야는 조선시대였지만, 전체적인 편집 방향을 논의하는 기회에 그런 역할을 했다. 위의 <친일파 99인>에 인용된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에 따르면, <조선사>의 기본 틀이 짜여지던 1934년에 그는 조선사편수회 회의장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몇 편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것에 관한 사료가 매우 적기 때문에 저는 별편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삼국유사>와 <동국통감>과 기타 중국인의 학설 등을 모아서, 좀전에 이나바 간사가 말씀하셨던 고려 백문보의 항이나 이조 세종의 항에 수록하면 좋겠습니다."

단군조선에 관한 자료가 매우 적다고 말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단군조선을 <조선사> 본편에서 빼는 것을 합리화했다. 그런 뒤 단군조선을 본편이 아닌 별편에 넣으면 어떨까, 세종대왕 항목에 끼워 넣으면 어떨까 등등의 궁색한 제안을 내놓았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교화 사업'으로 미화
 
  이능화
ⓒ 자료사진
이능화가 단군조선에 관한 사료가 매우 적다고 말하던 시기에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뤼순감옥에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다. 그의 글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신채호는 일제강점 이전에 있었던 한국 고서들은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 곳곳에 산재한 고조선 관련 자료를 일일이 수집해서 단군조선 역사를 서술했다.

감옥에 갇힌 신채호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것은 고조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능화는 사료가 적다는 이유로 단군조선 역사를 본편에서 생략하는 데 동의했다. 그런 뒤 1942년까지 조선사편수회의 녹봉을 받았다. 친일파냐 아니냐를 떠나 학자의 기본적인 양심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학자적 양심도 없는 인물이 <조선사> 편찬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조성된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한국인들은 한국사의 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역사관이 해방 뒤에도 남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으니, 그가 받은 녹봉은 일본이 얻은 이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가성비 높은 친일파였다.

1965년과 2023년에 굴욕외교를 주도한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군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조선사>의 서술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조선사> 등에 기반한 일제 식민사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능화가 일본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하고 죽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능화는 역사 서술 분야에서만 일제에 부역한 게 아니었다. 일본 왕실에 아부하는 한시를 써서 공모전에 출품해 당선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능화 편은 "1939년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한시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을 지었다"라고 알려준다.

일왕의 교화가 영원무궁하라는 의미의 이 시는 "하늘이 내리신 진무천황을 만세토록 하늘이 보호하시도다"라고 한 뒤 "메이지 대제는 중흥을 이루어 앞길을 밝히시네/ 그 위세는 청국과 러시아를 아우르고 교화는 조선에 미치도다"라고 읊었다.

무쓰히토(메이지) 일왕은 1867년 즉위해 1912년 사망했다. 일본이 강화도 사건을 도발한 해가 1875년이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해가 1910년이다. 무쓰히토 재위 기간에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개시해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능화는 '메이지의 교화가 조선에 미치도다'라고 칭송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교화 사업'으로 미화했던 것이다.

이런 친일 사학자가 퍼트린 논리들이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의 뇌리를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어", "단군조선은 신화일 뿐, 사실이 아니야" 라는 말이 우리 귀에 들리면, 이능화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영남취재본부 이세령입력 2022. 10. 7. 14:22

제임스 S. 게일 선교사를 주제로 한 제576돌 한글날 기념 심포지엄 자료 화면. / 이세령 기자 ryeong@

 

[아시아경제 영남취재본부 이세령 기자] 소설 ‘천로역정’을 가장 먼저 우리말로 번역한 ‘제임스 S. 게일’의 삶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지난 6일 저녁 열렸다.

경남 창원극동방송에서 열린 제576돌 한글날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장이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게일 선교사’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박 회장에 따르면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은 1888년 12월 12일 대한민국 부산에 첫발을 디딘 캐나다인 선교사이다.

개신교 선교사인 동시에 한국어학자인 제임스 게일은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현지 문화 적응에 열을 올렸다.

언어나 생활 습관은 물론 한국문화를 제대로 익혀야 한다며 한자 공부에도 매진했다.

게일 선교사가 번역·출간한 책자들. / 이세령 기자 ryeong@

 

40년간 전국을 다니며 한국문화와 고전을 연구한 그는 한국어 성경 제작, 한영사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문법책과 한자 교과서 등을 편찬했다.

성서와 함께 천로역정·로빈슨크루소 등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한국 구비문학 작품집과 조선의 풍물을 기록한 책 등을 미국에 출간하기도 했다.

동국통감과 춘향전·흥부전·심청전·금수전·홍길동전·옥루몽·운영전 등도 영어로 번역해 외국에 소개했다.

 

거문고, 장구 등 조선 악기를 예배에 도입하고 찬송가 가사를 한글로 직접 붙이기도 했다.

‘기일(奇一)’이란 한국식 이름을 서명으로 사용할 정도로 한글을 사랑했던 게일 선교사는 일제강점기를 겪는 젊은 조선인들에게 근대화에 대한 개화 이식과 독립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

연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정신여학교, 경신학교를 창설해 이승만 전 대통령, 헤이그 특사 이준, 독립선언문 33인 중 1명인 이갑성, 애국부인회 김마리아·이해경·김영순·장선희 등을 양육했다.

게일 선교사는 1912년 당시 “우리가 알지 못한 예언적 은총으로 한국인들은 이미 466년 전에 참으로 편리한 문자를 보유하게 됐다”며 “세종대왕이 만든 이 간편한 문자 덕분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이 금단의 나라에 전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왼쪽부터 윤평원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고문, 박시영 회장, 박동철 경남기독문화원 실행이사. / 이세령 기자 ryeong@

이날 발표자로 나선 박 회장은 “게일 선교사는 주변 나라들이 미개하다며 업신여기던 시절 한국을 문필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평가한 인물”이라며 “한글 대중화에 앞장선 그를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논찬자로 나선 박동철 경남기독문화원 실행이사는 “평생 한글을 쓰며 살면서도 게일 선교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감사하고도 놀라운 그의 삶을 전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라고 했다.

또 다른 논찬자인 윤평원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고문은 “게일 선교사가 우리 문화에 끼친 공적이 너무너무 크다”라010며 “한글과 한국문화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영남취재본부 이세령 기자 ryeong@asiae.co.kr

 

 

동국통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사서의 하나로 꼽히며,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개요[편집]

세조의 지시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이후 성종 때 완성되었다. 총 56권 28책의 활자본으로 이뤄졌다. 이 책은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으로 밝히고 있으며,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였음에도 신라의 역사를 추가로 집필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편찬 배경[편집]

세조의 편찬 지시[편집]

1458년(세조 4년) 9월 12일, 세조는 우리 나라의 기존의 사서가 빠지고 누락된 것이 많아 자세하지 못한 데다 체계도 서있지 못했으며 또한 편년체의 통사가 없어 상고 이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자치통감》에 준하는 사서를 편찬할 것을 명했는데, 이것이 편찬의 시작이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편찬 중단[편집]

1463년(세조 9년) 9월 5일, 서현정(序賢亭)에서 진법을 훈련하는 자리에서 최항(崔恒)ㆍ양성지(梁誠之)ㆍ송처관(宋處寬)ㆍ이파(李坡)와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수령(金壽寧) 등에게 "억지로라도 한 책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비치고 있는데, 27일에 다시 신숙주ㆍ권람ㆍ최항 등에게 《동국통감》의 편찬을 의논하도록 하고 있다. 사람이 많으면 더 빨리 완성할 수 있다는 권람의 말에 왕은 그럴 필요 없다며, 우승지 이파를 시켜 궐내의 유생들 가운데 편찬에 참여할 만한 적당한 인물들을 뽑아 올리게 하였다. 이때에 이파는 세자정자(世子正字) 최명손(崔命孫)ㆍ예문 봉교(藝文奉敎) 신숙정(申叔楨)ㆍ대교(待敎) 원숙강(元叔康)의 이름을 써서 바쳤고, 이들을 통솔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하는 일이 양성지에게 맡겨졌다.

감수는 신숙주권람이 맡았고 동시에 책의 편찬을 전담할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두어 당상과 낭청을 임명하였다. 하지만 동국통감청이 설치될 무렵, 세조와 수사관들 사이에 편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생겼다. 세조가 편차를 묻기도 하고 직접 작성한 기본 원칙의 범례를 제시하기도 하고, 세세한 내용까지 직접 간섭하기도 했다.

1466년(세조 12년) 최항ㆍ김국광ㆍ한계희ㆍ노사신 등에게 재차 편찬을 명하고도 편차 사목을 결정하지 못했고, 1467년(세조 13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으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이듬해 9월 세조가 훙서하면서 편찬 사업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1469년(예종 원년), 최숙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편찬이 재개되었지만, 이듬해 예종이 갑작스럽게 훙서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편찬 재개와 완성[편집]

1484년(성종 15년) 11월에 완성되었다. 앞서 1483년(성종 14년) 10월 서거정의 발의로 편찬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이미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가 있어 조속한 편찬이 가능했지만 성종은 이때 완성된 《동국통감》의 내용 중 집필자가 개인적 역사관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 및 견해를 적은 사론 부분에 만족하지 못했다.

1485년(성종 16년) 사론을 중심으로 재편을 명한 끝에 《신편(新編)ㆍ동국통감》(전56권)이 탄생한다. 이 《신편ㆍ동국통감》이 바로 오늘날 현존하는 동국통감이다. 완성 당시의 수사관은 서거정(徐居正)을 비롯한 10명이었으며, 382편의 사론 가운데 178편은 기존의 사서에서 추리고 나머지는 편찬자들이 작성하되, 그 중 118편은 최부(崔溥)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은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된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강상윤리(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사람을 칭송하였으며, 군신ㆍ부자ㆍ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지절(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구성과 특징[편집]

《동국통감》은 외기(外紀)ㆍ삼국기(三國紀)ㆍ신라기(新羅紀)ㆍ고려기(高麗紀)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단군 조선에서 삼한삼국의 건국에서 669년(신라 문무왕 9년)까지, 669년(문무왕 9년)부터 935년(고려 태조 18년)까지, 이후 고려 말까지를 서술하였다.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로 한 것은 사서가 없어져 자료가 부족한 탓에 왕대별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삼국기는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예에 따라 무통(無統) 즉 정통이라 쳐줄 왕조가 없다고 서술한 점은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신라 중심 서술과 차이가 있다. 또한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과는 달리 당대의 사실대로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채택하여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입장에 서 있다. 삼국의 연대기는 연호로 표기하지 않고 중국과 삼국의 연대를 아울러 썼다.

특징[편집]

  • 단군조선의 건국연도를 기원전 2333년으로 명시해 놓음으로써 이후 단군기원 등을 비롯해 한국사가 시작된 기점을 구체화하였다.
  • 신라기를 따로 독립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고려기에서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를 대등하게 계승한다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 범례에 따르면 조선 초기, 특히 세종대에 연구가 활발했던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 강목의 규례에 따라 강령(綱領)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사실을 서술하여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하였다.
  • 삼국사기》와 달리 신라 고유의 명칭인 거서간(居西干)ㆍ이사금(尼師今) 등을 모두 '왕(王)'으로 바꿔 표현하였다.
  • 세조대의 훈구와 성종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들이 함께 참여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정치적 차원에서는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성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함으로써 성종과 사림의 역사 인식이 크게 반영되었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세조와 그 훈구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았다.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 역사편찬과 서술은 일단락되었다.[1]

목록[편집]

접기동국통감동국통감 전동국통감 서외기동국통감 외기삼국기권수연도국왕신라기고려기

동국통감 범례
고조선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사군 · 이부
삼한 (마한 · 변한 · 진한)
권1 기원전 57년 ~ 기원후 32년 신라 시조 혁거세왕 · 남해왕 · 유리왕(유리 이사금)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 유리왕(유리명왕) · 대무신왕
백제 시조 온조왕 · 다루왕
권2 33년 ~ 180년 신라 유리왕(유리 이사금) · 탈해왕 · 파사왕 · 지마왕 · 일성왕 · 아달라왕
고구려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백제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 초고왕
권3 184년 ~ 342년 신라 아달라왕 · 벌휴왕 · 내해왕 · 조분왕
첨해왕 · 미추왕 · 유례왕 · 기림왕 · 흘해왕
고구려 고국천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서천왕 · 봉상왕 · 미천왕 · 고국원왕
백제 초고왕 · 구수왕 · 사반왕 ·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비류왕
권4 343년 ~ 489년 신라 흘해왕 · 내물왕 · 실성왕 · 눌지왕 · 자비왕 · 소지왕
고구려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백제 비류왕 · 계왕 · 근초고왕 ·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권5 490년 ~ 611년 신라 소지왕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고구려 장수왕 · 문자왕(문자명왕) · 안장왕
안원왕 · 양원왕 · 평원왕 · 영양왕
백제 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혜왕 · 법왕 · 무왕
권6 612년 ~ 646년 신라 진평왕 · 선덕여주(선덕여왕)
고구려 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백제 무왕 · 의자왕
권7 647년 ~ 660년 신라 선덕여주(선덕여왕) · 진덕여주(진덕여왕) · 태종왕(무열왕)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권8 661년 ~ 668년 신라 태종왕(무열왕) · 문무왕
고구려 보장왕
권9 669년 ~ 692년 신라 문무왕 · 신문왕
권10 694년 ~ 826년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권11 827년 ~ 917년 흥덕왕 · 희강왕 · 김명(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주(진성여왕)
효공왕 · 신덕왕
후백제 견훤
후고구려 궁예
권12 918년 ~ 935년 신라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후백제 견훤
고려 태조 왕건
권13 936년 ~ 981년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경종
권14 982년 ~ 997년 성종
권15 998년 ~ 1018년 목종 · 현종
권16 1019년 ~ 1046년 현종 · 덕종 · 정종
권17 1047년 ~ 1083년 문종 · 순종
권18 1084년 ~ 1102년 선종 · 헌종 · 숙종
권19 1103년 ~ 1110년 숙종 · 예종
권20 1111년 ~ 1122년 예종
권21 1123년 ~ 1127년 인종
권22 1128년 ~ 1134년
권23 1135년 ~ 1146년
권24 1147년 ~ 1164년 의종
권25 1165년 ~ 1170년
권26 1171년 ~ 1178년 명종
권27 1179년 ~ 1187년
권28 1188년 ~ 1197년
권29 1198년 ~ 1213년 신종 · 희종 · 강종
권30 1214년 ~ 1219년 고종
권31 1220년 ~ 1233년
권32 1234년 ~ 1254년
권33 1255년 ~ 1259년
권34 1260년 ~ 1268년 원종
권35 1269년 ~ 1270년
권36 1271년 ~ 1274년
권37 1275년 ~ 1278년 충렬왕
권38 1279년 ~ 1285년
권39 1286년 ~ 1294년
권40 1295년 ~ 1300년
권41 1301년 ~ 1308년
권42 1309년 ~ 1320년 충선왕 · 충숙왕
권43 1321년 ~ 1330년 충숙왕
권44 1331년 ~ 1343년 충혜왕
권45 1344년 ~ 1351년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권46 1352년 ~ 1357년 공민왕
권47 1358년 ~ 1363년
권48 1364년 ~ 1369년
권49 1370년 ~ 1374년
권50 1375년 ~ 1377년 신우(우왕)
권51 1378년 ~ 1382년
권52 1383년 ~ 1387년
권53 1388년
권54 1389년 공양왕
권55 1390년
권56 1391년 ~ 1392년

 

 

[동사강목]

중앙선데이 입력 2011.01.22 23:53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 중앙일보 (joongang.co.kr)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각저총(角抵塚) 벽화. 두 장정이 씨름하는 왼쪽 구석에 작은 호랑이와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이어졌다고 주장하게 되는 유명한 벽화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토템이어서 이를 무조건 단군신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 벽화는 중국 측의 관리 소홀로 크게 훼손됐다(오른쪽 작은 사진). 김운회 교수 제공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247년,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에 병란을 겪어 평양성에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 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川王)고 적는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단군은 본래 한민족이 간직한 단군신화라고 볼 수 없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다. 삼국유사에는 “옛 기록(古記)에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내려와 곰과 교혼하여 단군이 태어나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세웠다고 한다(三國遺事 卷1)”고 기록돼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최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 그 이름은 단군이라.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竝與帝高興戊辰 …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라고 한다. 제왕운기는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한시(漢詩)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고기 등에 적힌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들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여 나타난 폐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安鼎福 東史綱目第1上)”라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도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했다는 것은 믿을 만한 문헌자료가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라고 하였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현재는 소실)에서는 “신라,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은 모두 단군의 자손(壽)”이라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이들 삼국이 그 스스로를 고조선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용비어천가에서도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 한다.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梁書 諸夷傳),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개모성(盖牟城)’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로 하여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을 지적하였다.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은 설화 수준으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

 

 

김삼웅입력 2023. 12. 26. 07:30

'삼한정통론' 첫 사학자 안정복 (daum.net)

[겨레의 인물 100선 47] 안정복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단재 신채호가 망명길에 나서면서 짊어지고 갔던 유일한 책이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이다. 저자의 후손으로부터 자료를 빌려 손수 필사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저자와 가치에 대해 말했다.

 

안정복은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백년 이래 유일한 사학전문가라 할 수 있다.(…)연구의 정밀함은 선생의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지리의 잘못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가장 공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숙종 38년 12월 25일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순(百順)이고 호는 순암(順庵)이다. 아버지는 미관말직을 지낸 안극(安極)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참의를 지낸 할아버지(안취)가 울산부사를 지냈다.

안정복은 부모가 제천과 서울, 어머니의 고향인 영광과 울산·무주 등지를 오가며 살았기에 그도 잦은 이사를 하며 새로운 풍물을 접하며 유년기를 보내었다. 15살 때 할아버지가 울산부사를 사임하면서 전북 무주에 은거하여 그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그후 25살이 될 때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두루 배우고 성장하면서 독습으로 주자학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은 이웃에 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과의 만남이었다.

순암이 35세 때인 1746년, 이웃 안산에 사는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을 찾아 나섰다. 젊은 순암을 대한 성호는, 가을 바람과 샅이 같이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순암 역시 그때에야 참다운 스승을 만나 많은 담론을 나누었고 의견을 교환했다.

순암은 학문에 의문이 있을 때에는 직접 찾아 물어보기도 하였고, 편지로 질문하기도 하였다. 성호는 21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다를 때에는 재삼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입장을 취했다.(이이화, <안정복>,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그는 벼슬길보다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호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학문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관직이 있어야 했다. 스승의 추천으로 38살 때에 만녕전 참봉으로 부임하고, 43살 때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그의 가계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이어서 능력에 비해 미관말직이었다. 그나마 부친상을 당하면서 관직을 떠나 광주로 퇴거하여 다시 학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역사연구에 매진했다. 우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 등에서 나타난 모화사상을 배격하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제시하였다.

내가 여러 사서(史書)를 읽어보고, 개연히 바로 잡을 뜻을 가지고, 동사(東史)를 널리 취하고, 중국사에서 동쪽의 일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대저 사가의 대법(大法)은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을 엄히 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전장(典章)을 상고하는 것이다.(<동사강목>)

그는 45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동사강목>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동사강목>의 범례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계통은, 사가가 책 머리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데, <동국통감>은 단군·기자의 사적을 별도의 외기(外記)로 삼았으니 그 의의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정통을 기자에서 시작하고 단군을 기자가 동래(東來)한 아래에 붙였는데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편수 삼진(三晋)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안정복은 우리 나라의 정통이 단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계통을,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고려 태조라하였다. 위만은 권력을 찬탈한 도적이기에 제외시켰다. 우리 사서에서 단군을 시조로 하고 삼한정통론을 제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아쉬운 대목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동사강목>에 담긴 민족사상의 대강을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외래 침략자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을 특히 서술하고, 충신과 명장들의 빛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과 고려의 대 거란·몽고 전쟁 등에서 조국의 수호를 위한 민중의 분투와 을지문덕·강감찬·서희 등 뛰어난 인물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우리 민족의 용감성을 자랑하는 한편, 신라 통일 이후 문치를 숭상하고 국방에 관심을 돌리지 않아 나라가 약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2. 봉건국가의 대민정책이 착취에만 치중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것을 비평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진대법(賑貸法) 시행에 관한 만설(挽說)에서, 무상으로 주는 것은 좋지만 빌려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고, 빌려주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국가의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논파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의 노비안진법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문종 때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옥사에 분격하여 옥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과 그 개혁을 주장하였다.(이우성, <해제 동사강목>)

안정복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 사관을 탈피하여 단군을 국조로하는 사관을 정립하면서 <동사강목>을 편찬하였다. 4년여 동안 오로지 여기에 매달렸다. 전체 17권이지만 각 권은 상하로 나누어져 실제는 34책이나 된다. <고려사절요>가 3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편찬한 책이 35책인 것에 비해 <동사강목>은 순전히 개인의 힘으로 펴낸 것이다.

 

 

기자입력 2023. 2. 14. 05:00수정 2023. 2. 14. 19:55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동국역대전수도’. ‘단군조선- 기자조선-마한-문무왕 9년(669)부터의 신라-태조 19년(936)부터의 고려-조선’을 정통왕조로 규정했다. 삼국이 균형을 이룬 ‘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는 ‘무통’이라 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고려 때 무왕(誣枉·생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움)한 사필(史筆·역사 기록)을 씻는다면 (조선)왕조가 빛날 것 같습니다.”

1781년(정조 5) 정조 임금이 승선(국왕 비서) 정지검(1737~1784)에게 특별한 명을 내렸다. 순암 안정복(1712~1791)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동사강목>의 필사본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때 순암은 정지검에게 “‘고려 말의 일’을 이제와서는 기휘(忌諱·꺼리고 싫어함)할 만한 이유가 없으니 당시 잘못 기술된 역사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이 말을 반드시 성상(정조)께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순암이 언급한 ‘생사람 잡은 일’은 무엇인가. 우왕(재위 1375~1388)과 창왕(1389~1399)을 공민왕(1351~1374)이 아닌 신돈(?~1371)의 아들·손자(‘신우와 신창’)로 기록한 <고려사>를 일컫는다.

마침 김문식 단국대 교수의 논문(‘순암 안정복의 우왕·창왕 이해’, <성호학보> 24호, 성호학회, 2022년 12월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을 통해 왜 순암이 400년 가까이 ‘조선의 국시’처럼 여겨진 ‘신우·신창’설을 고치고자 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또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왜 1910년 4월 블라디보스톡 망명길에 오르면서 <동사강목> 1권만 들고 갔는지 가늠해본다.

<동사강목>의 지도. 순암은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 등의 위치를 표시했다. 영고탑은 현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시절 지명이다.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었던 요충지다. 순암은 훗날에 일어날지 모를 국경선분쟁을 위해 근거사료를 제시해놓은 것이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 맞나

문제의 <고려사>를 보자.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의 역사를 군주의 사적인 ‘세가’에 다루지 않고 ‘열전·반역전’에 신돈-신우-신창으로 이어지게 했다. <고려사>가 세종 연간에 편찬(1449~1451)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신우·신창’설을 주장한 이가 다름 아닌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였기 때문이다.

즉 1389년(창왕 원년)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우왕과 창왕이 쫓겨나 죽임을 당한다. 이때 차기 국왕을 결정하는 논의에서 이성계가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을 촉구한다. “우왕과 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고려사> ‘열전·신우’조)

이성계의 주장대로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손일까. <고려사> ‘세가·공민왕’조의 편찬자는 “자식이 없던 공민왕이 다른 사람(신돈을 가리킴)의 자식(우왕)을 데려다 대군으로 삼았다”는 평론을 달았다. ‘열전·신우’조도 “신돈의 비첩 반야가 모니노(牟尼奴·우왕)를 낳았는데, 공민왕이 자기 자식으로 여겼다”고 언급했다. ‘우왕=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순암 안정복은 “<삼국사기>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고, <고려사>는 내용도 번잡하고 요점이 적다”면서 춘추의리에 맞는 역사서(<동사강목>)를 편찬했다. 그는 “역사가는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반역을 엄하게 다루고(嚴簒逆), 옳고 그름을 바르게 하며(正是非), 충절을 포양하고(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서술하는 것(詳典章)”이라 했다.

 

그런데 같은 ‘열전·신우전’에 이상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가 낳은 아이를 친구인 능우의 모친에게 맡겼지만 아이가 첫 돌이 되지 않아 죽었다. 능우는 이웃 병졸의 아이를 훔쳐 반야의 아이(모니노·우왕)라고 속였다.”

무슨 소리인가.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해놓고, 다시 이웃집 병졸이 낳은 아이로 고쳐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왕은 신돈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공민왕의 직접 발언을 기술한 다음 기사도 헷갈린다.

“공민왕이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그 집 여종에 성은을 입혀 아들(우왕)을 낳았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역사서, 그것도 같은 ‘열전·신우’조에서 우왕이 ‘신돈→이웃집 병졸→공민왕’의 아들로 둔갑했다가 결국 태조 이성계에 의해 ‘신돈의 아들’로 낙인찍힌다.

순암 안정복(초상화)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택재(사당). 순암이 편찬한 <동사강목>은 ‘고조선~고려 공양왕’까지의 통사이다. 본편 17권, 부록 3권 등 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광주시청·강세구 순암 안정복 연구가 제공

 

■‘우왕=공민왕의 아들’ 주장은 대표적인 직필

<고려사>를 읽은 조선의 식자들은 일관성없는 ‘우왕·창왕’ 기사에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폐가입진’을 주장한 이가 다름아닌 태조 이성계인 이상 대놓고 문제를 삼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고려사>의 ‘폐가입진’설을 둘러싼 수근거림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우선 퇴계 이황(1501~1570)이 재미있는 평가를 내렸다. 즉 제자들이 “(조선조 성리학의 사표인) 포은 정몽주가 신씨(우·창왕)의 조정에서 관리로 활동함으로써 충절을 잃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황은 “왕위를 계승한 것은 신씨지만 왕씨의 종사가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몽주가 벼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나라 여씨 등이 이성(異姓)으로서 권력을 휘두른 것과 같다”고 옹호했다. 진나라 여씨는 진시황을 가리킨다.

원래 진나라 군주의 성씨는 영(영)씨인데, 진시황이 본래 ‘여불위(呂不韋)’라는 인물의 소생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진시황’이 ‘영정(영政)’이 아니라 ‘여정(呂政)’으로서 즉위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진나라의 왕통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암은 <동사강목> ’지리고·강역연혁고정’에서 당시의 조선강역인 8도와 함께 요동과 영고탑의 연혁을 기록했다. 그는 “요동은 본래 구이(동이)의 땅이었다”고 했으며, “영고탑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차지했다가 요(거란)에 병합됐다”고 소개했다. <동사강목> 수권의 ‘지도’에도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 등의 위치를 표시했다.

따라서 정몽주가 우왕·창왕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변호한 것이다.

 

이황의 변론은 성리학의 기틀을 쌓은 정몽주를 감쌌지, ‘우·창왕=신씨’라는 <고려사>의 기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왕·창왕이 비록 신씨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고려의 왕통이 끊긴 것은 아니라고 보기는 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알려진 상촌 신흠(1566~1628)은 한발 더 나아갔다.

대표적인 이가 상촌 신흠(1566~1628)이다.

신흠은 “고려말 인물인 원천석(1330~?)이 ‘우왕=공민왕의 아들’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면서 “이것이 가장 뛰어난 직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려말 정도전(1342~1398)과 윤소종(1345~1393)의 무리가 ‘우왕=왕씨’라 하면 역적으로 낙인찍어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동사강목>은 단군조선을 ‘정통의 첫머리’로 두었으면서 정작 본문에서는 ‘기자조선’부터 서술했다. 즉 <동사강목> ‘제1상’은 ‘기묘년 조선 기자 원년·주 무왕 13(기원전 1122)’부터 시작한다..‘단군조선’ 기사는 ‘기자조선’을 설명하면서 두번째 기사에 상당히 길게 붙여놓았다.

 

역사서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임상덕(1683~1719)의 <동사회강>은 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 이후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사의 각주에서 ‘신우·신창’이 아니라 ‘폐왕 우·폐왕 창’이라는 절충의 표현을 썼다.

임상덕 보다 한 세대 뒤에 깃발을 들고 나선 이가 바로 순암 안정복이다. 순암은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과 야은 길재(1353~1419)가 우왕을 위해 3년상을 지냈고, 우왕의 아들(창왕)을 국왕으로 옹립한 것을 예로 들었다.

“천명을 받아 건국한 조선에서 왕씨·신씨가 무슨 대수인가. 조준(1346~1405)·정도전 무리가 옛 신하들을 넘어 뜨리려고….”

그랬으니 정조가 “<동사강목>을 가져와보라”는 명을 내렸을 때 순암이 “제발 우·창왕대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동사강목>은 우·창왕을 ‘전 폐왕 우’와 ‘후 폐왕 창’으로 표현하고 ‘공민왕’ 다음의 정사로 다루었다.

순암 안정복은 <고려사>에서 반역열전으로 돌렸던 우왕과 창왕을 정사로 편입했다. 고려계통도에서 31대 공민왕에 이어 32대(폐왕 우)와 33대(폐왕 창)으로 그려놓았다.

 

■안정복이 ‘골골 80’했던 이유

사실 순암은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은 약골이었다. 40대들어 자주 혼절하고 언어장애까지 일으키는 병에 걸려 3번이나 유서를 쓰는 등 악전고투했다. 게다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재야사학자’의 향기가 짙게 풍긴다.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35살이 돼서야 성호 이익(1681~1763)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평생 과거시험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눈에 들어 세손 시절부터 3차례나 부름을 받고 출사했다. 그것도 61살의 나이에 처음 세손을 지근거리에 모시게 되었으니 참 기막힌 인연이다. 그런 순암이 온갖 병치례의 와중에도 ‘골골 80’ 했던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고, <고려사>는 내용도 번잡하고 요점이 적으며…역사가는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반역을 엄하게 다루고(嚴簒逆), 옳고 그름을 바르게 하며(正是非), 충절을 포양하고(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서술하는 것(詳典章)이다.”(<동사강목> ‘자서’)

이것이었다. 제대로된 역사서를 편찬하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다.

순암의 <동사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주자(1130~1200)가 편찬한 <통감강목>을 벤치마킹했다.

주자는 특히 “역사서에는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엄정한 포폄(평가)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통감강목>은 주-진(秦)-한-진(晋)-수-당나라 등 단지 몇나라만을 정통왕조로 취급하고 있다. 나머지는 열국·찬적·건국·무통·불성군·원방소국 등 7가지로 분류했다. 한나라의 여후와 왕망, 당나라의 무측천 등은 왕위를 찬탈한 ‘찬적’으로 분류했다.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을 엄격히 함으로써 강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사> ‘세가·공양왕조’에 등장하는 ‘폐가입진’ 기록. 1389년(창왕 원년) 우왕과 창왕을 잇달아 폐하고 차기 국왕을 결정하는 논의에서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왕위를 이을 수 없다”면서“따라서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廢假立眞)”고 주장했다.

 

■단군조선을 둘러싼 순암의 고민

순암의 <동사강목>도 그랬다. 조선 역사의 정통계보는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문무왕 9년(669년)부터의 신라-태조 19년(936년)부터의 고려-조선’이다. 그외에 정통으로 볼 수 없는 왕조를 ‘무통·참국·도적·소국’ 등으로 분류했다.

순암은 ‘단군조선’을 정통의 첫머리로 삼았다. <동사강목>의 ‘동국역대전수도’와 ‘단군·기자 전세도’ 등은 ‘단군조선’부터 시작한다.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첫 군주인 단군이 신성한 덕을 베풀었기 때문”(<동사강목> 제1상)이라 했다.

여기서 착안점이 있다. <동사강목>이 단군조선을 ‘정통의 첫머리’로 두었으면서 정작 본문에서는 ‘기자조선’부터 서술했다는 것이다. 즉 <동사강목> ‘제1상’은 ‘기묘년 조선 기자 원년·주 무왕 13(기원전 1122)’부터 시작한다.

‘단군조선’ 기사는 ‘기자조선’을 설명하면서 두번째 기사에 상당히 길게 붙여놓았다.

여기서 순암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순암 본인은 ‘정통 단군조선’을 본문의 첫머리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단군·기자조선의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 ‘외기’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멘트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순암은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그런 순암이 불가(일연 스님)의 입장에서 쓴 <삼국유사> 내용을 고증없이 담아내기가 주저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순암은 <삼국유사>의 환인과 환웅의 이야기는 서술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다.

“단군이라는 신인(神人)이 스스로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왔을 뿐 환인·환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환인제석’은 불경(법화경)에 등장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동사강목>은 우·창왕을 ‘신우’와 ‘신창’이라 해서 ‘반역열전’으로 밀어낸 <고려사>와 달리 ‘전 폐왕 우’와 ‘후 폐왕 창’으로 표현하고 ‘공민왕’ 다음의 정사로 다루었다. 우왕과 창왕을 왕씨로 본 것이다.

 

■“삼국시대는 계통 없는 시대”

앞서 밝혔듯이 순암은 ‘처음으로 문물을 일으켜 신성한 정치를 한 기자’를 정통으로 여겼다. “기자가 단군조선이 쇠망한 지 196년 후 나타나 ‘홍범구주(洪範九疇·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도리)’에 따라 신성한 교화의 정치를 폈다”는 것이다.

사실 기자라는 인물은 “고구려는 음식을 먹을 때 기자의 유풍이 남아있으며, 기자신을 모시기도 한다”는 <구당서> ‘동이전’의 기록처럼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역사에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성리학의 발전과 함께 소중화 의식이 강했던 조선 때 더더욱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순암은 ‘위만조선’은 ‘참국(僭國)’으로 평가절하했다. 정통(기자조선)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순암은 위만조선 대신 마한을 적통으로 삼았다. “위만의 반란으로 남쪽으로 망명한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고 금마군에 도읍했다”는 기원전 192년을 ‘마한왕 기준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통인 기자의 제사’를 이은 기준(준왕)이 적통이라는 것이다.

순암이 본 마한의 정통기간은 기준 원년(기원전 192년)~온조 27년(기원후 9년)까지 202년이다.

백제 온조왕의 마지막 공격으로 마한의 원산과 금현이 항복한 때(기원후 9)를 마한의 멸망연도로 본 것이다.

반면 마한정통론에 따라 마한 멸망 전인 기원후 9년까지의 초기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은 ‘참국’으로 분류됐다.

또 기원후 10년(마한 멸망) 이후~668년(고구려 멸망)까지의 삼국시대를 ‘무통’으로 분류했다. 삼국이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시기니 만큼 ‘무통(無統)’ 즉 ‘정통이 없던 시기’라는 것이다. 이밖에 918년(고려 태조 원년)~935년(후삼국 통일)까지의 고려 18년은 ‘참국(僭國)’으로 분류했다. 왕건이 ‘도적’인 궁예의 부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정통인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야 ‘겨우’ 정통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밖에 진한·변한·예·맥·옥저·가야·발해 등은 소국(부용국)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봉은 ‘도적’으로 각각 분류됐다.

순암 안정복은 80세까지 장수했지만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40대들어 자주 혼절하고 언어장애까지 일으키는 병에 걸려 3번이나 유서를 쓰는 등 악전고투했다. 48세인 1759년 쓴 유서를 보면 아들(경중)에게 아직 마무리 짓지못한 <동사강목>의 완성을 신신당부하고 있다.|강세구씨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애석하다 요동을 잃다니…”

물론 300년 전의 시대를 살았던 순암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이 100% 옳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역사와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동이의 옛 땅인) 요동을 회복하지 못해 압록강이 커다란 깰 수 없는 경계가 되어 마침내 천하의 약한 나라가 되었구나. 애석하다.”(‘지리고·요동군고’)

천하를 더불어 다투는 땅(요동)인데, 세차례의 기회(통일신라 문무왕·고려 태조·조선 태조 때)를 모두 잃었음을 한탄했다.

백두산정계비를 두고도 코멘트 했다.

“1712년(숙종 38) 백두간 꼭대기에 돌을 세워놓고 분계강의 경계로 삼았다. 분계강은 두만강 북쪽 300여 리에 있는데 그 때의 당국자들이 깊은 생각없이 공공연히 그곳을 버려 이제 야인의 사냥터가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순암집> 권7)

그래서일까. 순암은 <동사강목> ’지리고·강역연혁고정’에서 당시의 조선강역인 8도와 함께 요동과 영고탑의 연혁을 기록했다.

순암은 “요동은 본래 구이(동이)의 땅이었다”고 했으며, “영고탑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차지했다가 요(거란)에 병합됐다”고 소개했다. <동사강목> 수권의 ‘지도’에도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 등의 위치를 표시했다.

영고탑은 현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시절 지명이다.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었던 요충지다. 순암은 훗날에 일어날지 모를 국경선분쟁을 위해 근거사료를 제시해놓은 것이다.

“강역과 경계는 나라에서 자세하게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어두워 잘못이 많으니 만약 사변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개탄할 노릇이다.”

어떤가. 단재 신채호 같은 이가 눈물을 머금고 망명길에 나서면서 ‘원픽 서적’으로 동사강목 한 권을 들고 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이 기사를 위해 김문식 단국대 교수와 강세구 순암 안정복 연구가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현상철 성균관대출판부 기획팀장, 이광훈 광주시청 문화예술과 주무관이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강세구,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연구>(순암연구 총서1), 순암선생 탄신 300주년 기념사업회, 성균관대 출판부, 2012

김문식, ‘순암 안정복의 우왕·창왕 이해’, <성호학보> 24호, 성호학회, 2022

김문식, ‘순암 안정복의 정조 보좌 활동’, <성호학보> 23호, 성호학회, 2021

국립중앙도서관, <실학자의 서재, 순암안정복의 책바구니>(순암 안정복 탄신 300주년 특별전 도록), 2012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허연입력 2019. 8. 23. 17:09  

"자기반성을 하는 자만이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다"
정조의 스승이었지만 보수의 길 선택한 대실학자
순암 안정복은 실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보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개혁군주 정조의 스승이었으며 조선 실학의 발원지인 성호 이익의 직계 제자였다. 하지만 개혁파이면서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했다. 그는 실학자 중 가장 앞장서서 서학(천주교)을 배격했다. 안정복이 내세운 천주교 반대 논리는 박해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그는 동문 수학한 벗 정약종과 사위 권일신, 사돈 권철신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군자를 섬기는 것이 이치인데 괴신(怪神)을 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음양의 조화에 의해 만물이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인데 세상을 누군가가 창조했다고 보는 것은 이단이라는 주장은 철저히 이기론(理氣論)에 기반한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일지 모르지만 그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이 발견된다.

성리학을 추종했다고 해서 안정복이 수구세력에 날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매우 늦은 나이인 예순다섯 살에 목천현감을 지낸다. 그때 남긴 '상헌수필'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풍속은 퇴폐하고 아전들이 교활하다. 이를 개혁하여 백성들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녹봉이 비록 박하기는 하나 끼니 걱정이 없는데 뭘 못하겠는가."

안정복의 원칙과 기개는 단단했다. 대표 저술인 역사서 '동사강목'은 그 고집의 산물이었다. '동사강목' 서문을 보자.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역함)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 아래 저술한 '동사강목'은 우리 사학계가 독자적 역사관을 갖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에서 마한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진다고 봤다. 또 한족이 침입해서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성에서 제외시켰다.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처럼 대륙세력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한 것도 '동사강목'의 특징이다.

 

안정복에게는 성리학을 신봉했으면서도 사대주의로 흐르지 않는 균형감각이 있었다. 그는 올바른 역사 서술을 위해 조선의 기록뿐아니라 중국과 일본 기록까지 교차 연구했다.

 

안정복의 행적을 보면 완고했지만 도덕적이면서 책임감 있었던 보수의 참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사실 안정복은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또 다른 일면이 드러난 글이 후세에 전한다. 그가 부인을 추모하면서 쓴 사부인곡(思夫人曲)을 보자.

"당신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났구려. 석 달이나 지났지만 당신이 죽었는지 아닌지 여전히 모르겠소. 밖에서 돌아오면 당신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배가 고프면 밥 달라 말하고 싶구려. 집안일을 헤아릴 때면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어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곤 하오. 47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흡사 금슬을 타는 듯하였는데 이제 끝났구려."

안정복은 조강지처 창녕성씨가 사망하자 석 달 동안 비통함에 젖어 있다가 겨우 아내의 영전에 제문을 올리고 통곡한다. 애처로움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안정복은 존경받을 만한 보수였다. 그는 "만물이 하늘의 뜻을 따르는데 사람만이 사욕으로 날뛴다"며 "자기반성을 하는 자만이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분과 도덕성, 책임감과 인간미를 고루 갖춘 보수였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손민호입력 2017. 7. 8. 01:00수정 2017. 7. 8. 07:27

 
 
동사강목의 탄생 박종기 지음, 휴머니스트

 

『동사강목』.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91)의 역사책. 미안하지만 『동사강목』에 관한 이해 수준은 여기까지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역사연구회장까지 역임한 사학자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기초가 된 조선 최고의 역사책에 예의를 갖추라고 훈계하는 듯하다. 『동사강목』도 모르는 세상을 상대로 『동사강목』의 집필과정과 의의를 또박또박 짚어내고 있어서이다.

 

다시 『동사강목』으로 돌아가자. 『동사강목』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역사책이다. 근대 이전에 편찬된 국내 사서 가운데 가장 긴 기간을 다룬다. 순암은 1754년 『동사강목』을 쓰기 시작해 1760년 완성했다. 이후에도 20여 년간 수정작업을 거쳤다. 『동사강목』의 편찬시점을 1778년이라고 밝힌 자료가 있는데, 1778년은 20권 20책의 『동사강목』 필사본이 완성된 해다. 순암은 타계하기 6년 전인 1785년에도 내용을 수정했다. 순암 일생의 작업이었던 셈이다.

지은이는 특히 1754∼60년 6년의 기간을 주목한다. 이 기간에 순암은 스승 성호 이익(1681∼1763)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서 편찬의 원칙을 검토하고 역사적 사실을 고증했다. 일부 대목에서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순암의 문집 『순암집』과 성호의 문집 『성호전집』에 각각 실린 사제의 편지를 수집했다. 그리고 편지를 시기에 따라 정리하고 내용에 따라 문답형식으로 재구성해 『동사강목』 의 탄생과정을 복원했다. 복원 결과는 다음과 같다. 『동사강목』 은 스승과 제자의 공동작업이었다.

공동작업이라고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순암은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 공신들이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고려 말의 역사를 바로잡았다. 『동사강목』 은 조선 후기까지 신돈의 자식으로 알려져 있던 고려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인정한 최초의 역사서다. 정치적 해석을 경계한 실학자의 역사의식이 드러난 대목이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입력 2017. 7. 3. 16:44

박종기 명예교수 '동사강목의 탄생' 출간
성호 이익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편찬한 제자 순암 안정복에게 1760년 10월 보낸 편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선생님의 답서에 '저탄과 대동강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어찌 동일한 이름이겠습니까?'라고 하셨으나,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지명이지만 같은 곳인 경우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순암(順菴) 안정복(1712∼1791)은 1756년 스승인 성호(星湖) 이익(1681∼1763)에게 편지를 보냈다. 순암은 서간에서 성호의 의견에 반박하면서 독자적인 주장을 펼쳤다.

두 사람이 대립한 주제는 백제의 북쪽 경계인 '패수'(浿水)의 위치였다. 성호는 황해도에서 발원해 개성으로 흘러드는 예성강(저탄)을 패수로 봤으나, 순암은 평양성 남부의 대동강이 패수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순암과 성호는 어떤 연유로 역사관을 두고 사제간에 논쟁을 벌였을까. 당시 순암은 고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집필하던 중이었다. 사서를 편찬하다 의구심이 생기자 스승에게 고견을 구한 것이다.

박종기 국민대 명예교수가 쓴 '동사강목의 탄생'(휴머니스트 펴냄)은 동사강목이 순암의 단독 저작물이 아니라 순암과 성호의 교류를 통해 완성된 서적임을 밝힌 책이다.

동사강목은 역사적 사건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는 편년체 중에서도 개요인 '강'(綱)을 먼저 서술하고 자세한 내용인 '목'(目)을 덧붙이는 강목체를 사용한 역사서다. 순암은 1754년 동사강목 집필에 착수해 6년 뒤 초고를 완성했으나, 1778년에 서책 형태로 펴냈다. 이후에도 수정 작업을 계속해 17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최종본을 내놨다.

동사강목은 부록을 포함해 20권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본편 17권에서 처음 5권은 고조선부터 고려 태조 18년까지를 다뤘고, 나머지 12권은 고려 역사를 기술했다.

고려사 전공자인 저자는 30년 전 정인지의 '고려사'를 우연히 입수하면서 동사강목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순암이 동사강목을 쓰면서 참고한 저본으로, 그가 각주 형태로 적은 글이 여백에 남아 있었다.

저자는 연세대에 있는 동사강목 초고본을 비롯해 안정복과 이익의 문집인 '순암집', '성호전집'을 모두 살펴 동사강목의 편찬 과정을 조명한다.

순암은 동사강목 제작에 앞서 역사 서술의 원칙을 명확하게 하고, 역대 왕조의 강역과 지리, 사실을 철저하게 고증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1754년 성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나라 역사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내용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성호는 "근세에 유계가 지은 '여사제강'(麗史提綱)과 같은 책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나마 '고려사'가 읽을 만하다고 추천했다.

이처럼 기존에 간행된 역사서의 한계를 공감했던 두 사람은 옛 왕조의 강역과 사건을 놓고는 충돌하기도 했다.

특히 고려시대 후기 우왕과 창왕을 바라보는 시각은 순암과 성호가 크게 달랐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므로 이들을 폐위하고 적통을 내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공양왕을 옹립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성호는 전통적인 견해를 수용해 '우왕은 신씨'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순암은 성호의 주장을 따르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성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탈고한 동사강목 초고본에는 우왕과 창왕을 각각 '신우'(辛禑)와 '신창'(辛昌)이라고 기록했으나, 나중에는 이성계에 의해 폐위된 국왕이라는 뜻에서 '전폐왕(前廢王) 우'와 '후폐왕(後廢王) 창'이라고 썼다. 이로써 동사강목은 우왕과 창왕의 정통성을 인정한 최초의 역사서가 됐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신채호와 정인보 등 많은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역사 연구와 서술에서 동사강목을 활용했다"며 "철저한 고증정신, 진지하면서도 경건하기까지 한 역사의식과 서술 태도를 추구한 순암 선생은 지금도 큰 스승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364쪽. 1만8천원.

psh59@yna.co.kr

 

 

 

 

입력 2015. 10. 15. 11:24

 

[READERS CAFE]역사서의 본보기 '동사강목' (daum.net)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어야 하는가? 역사교과서 논쟁이 뜨거운 가운데 이 본보기가 될 만한 이로 순암 안정복(1712~1791)을 꼽을 만하다. 역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 서문에서 안정복은 이렇게 썼다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정통성과 계통을 밝히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바로잡고, 전장(典章)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순암은 당시 전해 내려온 몇몇 역사서가 오류가 많고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범례가 어그러져 바로 잡을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조선의 현실과 한계를 성찰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고민했다.

조선역사학의 저력/오항녕 지음/한국고전번역원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문화콘텐츠학과)가 쓴 ‘조선 역사학의 저력: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한국고전번역원)은 동사강목의 구성과 서술방식, 주요 내용, 수준과 가치, 안정복의 역사 인식 등을 차근차근 설명해 놓았다. 순암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범례에 따라 자신의 책도 ‘동사강목’으로 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범례란 역사 편찬의 원칙과 기준. 강목체는 역사를 서술할 때, 중요 사건의 요지를 제시하고 전반적인 내용을 그 아래 달아주는 방식이다. 순암은 단군은 제쳐두고 기자에서부터 서술을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강(綱)에는 기자에 대한 사실을 기술하고, 단군에 대한 기록 가운데 전해오기는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은 목(目)에 실었다. 이 경우에도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면 안(按)이라는 역사 평론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붙였다. ‘정치’‘민생’‘사상’‘국제’ 등 균형적인 사고로 써내려간 순암의 ‘동사강목’은 역사서의 하나의 표본이 될 만하다.

 

 

 

입력 2012. 11. 8. 17:30수정 2012. 11. 8. 17:30

중국 사관의 봉인 깬 '동사강목' 재조명한다 (daum.net)

 
순암 안정복 300주년 기념 총서 발간

[세계일보]

올해는 순암 안정복(1712∼1791·사진)이 태어난 지 300주년 되는 해다. 자주적인 역사서 '동사강목'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순암은 경학(經學)·사학(史學)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 뛰어난 학자였다. 하지만 생전에는 자신의 재능이 기용되지 못했고, 말년에는 주위의 친구와 제자들이 천주교 탄압에 희생돼 슬하에 어린 손자·손녀만 남게 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순암 탄생 3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는 책 다섯 권이 발간됐다.

◆불우한 천재, 순암 안정복

 

명문인 광주안씨 가문에서 태어난 순암은 영특한 자질을 지닌 인재였지만, 평생 자신의 경륜을 펼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젊어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했으며, 만년에야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제수되었다. 죽은 뒤에는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순암은 35세 때부터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삼고 여러 학문을 섭렵했으며 특히 경학과 사학에 뛰어났다. 한편, 주자학적인 경학설에 따라 만사를 판단하면서도 경학은 어디까지나 경세(經世)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다. 또한 경학의 해석에서는 이황·이익은 물론 주자의 해석까지도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뚝심이 있었다.

저서에는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열조통기(列朝通紀)', 이익과의 역사문답인 '동사문답(東史問答)', 그리고 한국의 여러 인물전기류가 있다. 특히 1778년(정조 2년)에 완성한 동사강목은 한국사를 자주적이고 실증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한 역사서다. 순암은 종래의 중국적 사관에서 벗어나 단군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사의 상한을 올려잡았을 뿐 아니라, 종전에 모호하던 사실을 규명하고 외적의 침략에 항거한 장수들을 내세워 민족의 활기를 되찾으려 했다.

 

자주적인 역사서 '동사강목'의 저자로 잘 알려진 순암 안정복의 탄신 3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사상을 총정리하는 '순암연구총서'가 발간됐다.

◆'순암연구총서'…학문과 사상 총망라

순암 탄신 300주년을 기념해 순암의 사상을 총 망라하는 '순암연구총서'(성균관대학교출판부)가 발간됐다. 총 다섯 권으로 이뤄진 총서는 '순암 선생 탄신 300주년 기념사업회'가 그간 출판되었던 두 권의 저서를 포함, 학계에 발표됐던 논문들 중 63편을 엄선해 정리한 것. 총서는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연구' '순암 안정복의 사상과 학문세계' '순암 안정복의 역사학' '순암 안정복의 경학과 사회사상' '순암 안정복의 서학인식과 교육사상'으로 구성된다.

특히 1권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통사서로 불리는 순암의 역작 '동사강목'을 자세히 소개한다. 동사강목은 성호 이익의 주관 아래 성호학파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이뤄진 역사서로 성호학파의 역사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파의 큰 줄기인 성호학파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사료인 셈. 이 책은 근대에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 민족사학자의 학문·사상적인 계몽서가 되었으며 훗날 문헌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도 총서에는 1995년부터 최근까지 발표된, 여기저기 흩어져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논문들이 한데 모여 있다. 또한 외국 학자와 북한 측 학자의 논문 3편도 함께 수록돼 있다. 내년에는 현재 집필 중인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순암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논문집'과 한국고문서학회에서 주관하는 '순암 안정복의 일상과 이택재 장서'도 발간될 예정이다.

정아람 기자 arbam@segye.com

 

 

 

김언호입력 2020. 6. 16. 21:58

[경향신문]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시킨 한국학의 거목 이우성 선생. 고향 밀양 퇴로리에서.

 

일제강점기에 온몸으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상가·실천가들의 정신을 나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읽고 싶었다. 1980년부터 2년에 걸쳐 펴낸 <한용운> <신채호> <김구> <박은식> <김창숙> <조소앙>이 그 책들이었다. 일제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편은 이우성(李佑成·1925~2017) 선생의 기획이었다.

“심산 선생은 민족주의자로 자명(自命)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친 일과 일제에 대해 비타협·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했다. 분단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을 잠시도 잊지 못했다.”

 

이우성은 1947년 22세 청년으로 심산 선생을 만난다. 심산은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이우성의 공부가 대단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불렀다. “자네가 이우성인가. 교수가 되기엔 너무 어리니 우리 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해 두게.” 나이도 나이지만 대학 학력도 없었으니 심산의 반응은 당연했을 것이다.

6·25가 터졌다. 수도가 부산으로 피란왔다. 성균관대는 이우성이 교사로 재직하는 부산고 가건물에 더부살이하는 형편이었다. 이우성은 낮에는 교사, 밤에는 학생 노릇을 했다.

이우성에게 또 하나 정신의 기둥은 단재 신채호였다. 1985년 10월, 나는 이우성 선생을 뵙고 단재의 민족독립정신과 역사정신을 오늘에 다시 세우는 일을 해보자고 의논드렸다. 선생도 이미 심산상과 함께 단재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1986년 단재 선생 순국 50주년을 맞아 이우성과 변형윤·강만길 교수가 이끄는 단재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재 신채호! 일편단심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선생은 1936년 2월21일 오후 4시20분,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단재 선생이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한 심산 선생은 “단재의 죽음으로 나라에 정기(正氣)가 쓰러졌다”고 통탄했다.

 

■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민족사의 진취적 지향 염두에 둔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강조
“지금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이 땅의 역사학도에 주어진 과제”

 

1982년 4월 한길사는 임형택·최원식 편으로 <한국근대문학사론>을 펴낸다. 1960년대 이후 고조된 민족적 각성과 민주화운동으로 개안된 ‘민족주체적인 시각’으로 근대문학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이우성 선생의 ‘고대시와 현대시의 교차점’을 경이롭게 읽었다. 1962년 발표했다는 사실도 주목되었다.

“시는 민족과 더불어 성장한다. 시인은 민족의 고난을 몸으로 체험하며 시를 생산해야 한다. 국토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고 대중의 실천·노동에 의하여 변혁된 역사적 존재며 생활을 매개로 친해지는 자연이다.”

나는 그 무렵 우리 국토와 산하를 온몸으로 답사하는 역사기행을 구상하고 있었다. 선생은 국토기행 기획에 큰 관심을 표했다. 민족이 살아온 발자취, 민중의 삶과 정서를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인식하는 국토운동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했다.

1982년 8월 창작과비평사가 출간하는 <한국의 역사상>은 문·사·철을 아우르는 이우성의 학문과 지성의 넓이·깊이를 보여준다.

이우성의 역사학은 ‘민족사학’이다. 민족사의 진취적·역동적 지향을 늘 염두에 두었지만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통한 민족사의 정립을 강조했다. “학문의 주체성,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인 자세”는 사학자 이우성의 확고한 문제의식이었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것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역사학도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과제다.”

 

■ 식민지 현실로 조부의 유훈을 못 지켜

신라의 토지 사적 소유 증명하고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여
실학의 ‘내재적 발전론’ 정립 등
선구적 연구로 역사학계 경각

 

이우성은 경남 밀양의 퇴로(退老)에서 1925년에 태어났다. ‘문한(文翰)’과 ‘부(富)’를 함께 누리는 양반가문이었다. 부친은 ‘개명(開明)적 지주형’ 인사였다. 일제하 한국인으로 가장 큰 규모의 누에종자 제조업을 경영했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는 “조부의 유훈을 받들어” 그를 끝내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일제가 강요했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고 가문의 각별한 관심하에 ‘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증조부 항재공(恒齋公, 李翊九·1838~1912)과 조부 성헌공(省軒公, 李炳熹·1859~1938)은 유학자이자 역사가였다. 항재공은 사론적 성격의 <서고독사차기>(西皐讀史箚記)를 저술했고, 성헌공은 조선조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저술했다. <조선사강목>은 숙종에서 중단된 미완성 대작이었다. <조선사강목>을 완성하는 것이 그 손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문중이 근대적인 학교인 정진의숙(正進義塾)을 설립해 운영하고, 서울이나 일본에서 유학하는 친척이 여럿 있었지만 유독 이 손자는 전통적인 공부를 해야 했다. 조부는 “글공부를 중단하지 말고 방향도 바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부의 유훈’은 ‘가학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조부의 유훈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현실이 펼쳐졌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었다. 조부의 <조선사강목> 사초(史草)를 압수당했다. 부친이 경남경찰부 고등과에 구속되었다.

이우성은 드디어 집 안에 소장된 ‘만 권의 책’에서 근대적 지식을 만나게 된다.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만난다. 집안 어른들이 정통의 공부를 하는 손자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치워두었던 책이다. 이우성은 이 책을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근대의 발견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간 자형이 역사·철학 책들을 보내와서 “서양에 관한 지식, 현대에 관한 지식을 나름대로 섭취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유물론적 사관에 대한 이해도 점차 갖게 되었다.

이우성 선생은 여름이면 젊은 연구자들과 우리 고전을 탐구하는 워크숍을 열었다(왼쪽 사진). 이우성 선생의 집안에서 실학의 태두 이익의 사상을 집성하는 <성호집>을 간행했다. 판목 1041장이 보존되어 있다.

 

■ 전두환 신군부 비판 ‘361인 선언’ 주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비판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거부
전두환 시절엔 ‘교수 선언’ 주도
강직한 신념 끝내 굽히지 않아

 

이우성은 1960년 4월혁명과 함께 진전되는 ‘학원의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61년 동아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성균관대로 옮긴 선생은 196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 회담을 비판하는 역사학회의 성명을 주도한다. 다시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하는 ‘교수 361인 선언’을 주도한다. 이 일로 잡혀가서 10여일간 조사받는다. 4년 동안 ‘해직교수’가 된다.

선생의 선구적인 연구는 역사학계를 경각시킨다. 신라 때부터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다는 실증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일본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에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다는 관점을 뒤집는다.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신라와 발해는 한 민족으로서 ‘남북국시대’를 전개했다는 연구다. 실학 연구에 몰두하여, 실학파가 추구한 개혁사상을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립했다. 근대로의 지향을 실학의 시기로 잡아 자본주의 맹아론을 도출했다.

“나는 역사를 공부할 때부터 식민지 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민족의 사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민족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진정한 민족사관이지요.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30년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고, 민중이 북방 오랑캐들을 막아내고 나라와 문화를 지켜내야겠다는 의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 고전의 천착

1995년 한길사는 이우성 선생이 1960년대부터 천착한 우리 고전 연구를 집성하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낸다. 사진작가 황헌만의 컬러사진을 곁들여 나는 큰책으로 번듯하게 만들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 굳건히 자기를 지켜가며 민족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지주(支柱)가 될 수 있는 품위 있는 학자·지식인이 지금 어느 시기보다 절실히 요망된다. 우리 조상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과 격조 높은 시문학의 정서가 담겨 있는 고전을 가까이하고 읽는 일이 요구된다.”

이규보·이승휴의 <고려명현집>부터 이황의 <퇴계전서>, 김육의 <잠곡전집>, 허목의 <미수기언>, 이익의 <성호전서>, 안정복의 <동사강목>, 박지원의 <연암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최한기의 <명남루전집>, 김창숙의 <심산유고>까지 우리 민족이 창출해낸 고전 39종의 이론과 사상을 해석해내는 <한국고전의 발견>을 펴내는 선생의 표정은 밝았다.

“옛 책이라고 하여 다 고전이 아니다. 역사를 통하여 여과된 고전만이 고전이다. 읽는 사람의 눈을 통하여 가슴에 와 닿을 때 비로소 고전의 값을 한다.”

2001년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이우성 선생은 <도산서원>을 편한다. 윤사순·금창태·정순우·이동환·송재소·임형택·이상해 등 한국의 퇴계 연구자, 두 웨이밍·장리원·도모에다 류타로 등 중국·일본의 퇴계 연구자들이 써낸 주요 논문을 수록했다. 자신이 쓴 ‘퇴계 선생의 이상사회와 서원창설운동’이 머리글로 실렸다. 도산서원의 사계와 의례를 담아낸 황헌만의 사진들이 책을 빛나게 했다.

“도산서원은 16세기 말 창립된 이래, 조선시대 사림의 정신적 메카가 되어왔고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 시절부터 퇴계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의 학문의 체취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에 대강장(大講場)인 도산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생전과 사후가 그대로 연결된 도산서원의 배경과 유서는 실로 우리나라 서원의 전형이다.”

2003년 선생은 <퇴로리지>(退老里誌)를 간행한다. 퇴로 마을 풍경, 퇴로의 건축물들과 퇴로의 의례, 장서와 인보와 간찰을 사진으로 담았다. <항재집> <독사차기> <조선사강목>의 해제와 정진학교 연구를 실었다. 밀양 근대교육의 요람 정진학교는 1899년 항재 이익구가 세운 화산의숙을 1921년에 개편하여 개교했는데, 1939년 일제는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정진학교를 기어코 폐교시킨다. 나는 황헌만이 촬영작업할 때 여러 차례 퇴로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우성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기도 했다. 고서들의 보존을 걱정하는 말씀도 했다.

 

■ 정신문화연구원 영입을 단호히 거부

선생은 1990년 퇴임 후 연구실 실시학사(實是學舍)를 열고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우리 고전 연구에 정진한다. 한길사는 그 연구결과를 출간한다. <다산의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1995), <다산과 문산(文山)의 인성(人性) 논쟁>(1996), <조희룡전집> 전 5권(1999), <다산과 대산(臺山)·연천(淵泉)의 경학논쟁>(2000), <다산의 경학세계>(2002)가 그것이다.

유신 말기 박정희는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선생의 영입을 한사코 시도했다.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선생에게, 대통령이 결재한 사안이라 되돌릴 수 없다면서 협박과 회유를 가해왔다. 선생은 끝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해직 시절, 일본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교수를 비롯한 양심적인 학자들이 선생의 처지를 걱정하여 선생 내외를 초청해 도쿄에서 1년 동안 체류하게 한다. 선생과 의논해 환영회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참석자들 모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 와중에 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준비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환영회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교과서 문제를 좌시하는 사람들과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타다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 “우리들은 교과서 문제를 묵과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항의집회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참석 거부를 철회하여 환영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하타다 교수는 “이우성 선생에 대한 존경의 염(念)이 한층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

 

 

동사강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조선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저술한 강목체(綱目體) ·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중국 남송(南宋)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의 체제를 따라 중국 (殷) 왕조의 기자(箕子)가 (周)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한 시점으로 알려진 기원전 1122년(주 무왕 13년, 기묘년)부터 고려(高麗) 34대(마지막) 군주 공양왕(恭讓王)이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강제로 양위하고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에 이르기까지의 2,514년에 걸치는 역사를 수록하였다.

전체 17권 34책(각권이 상·하로 분류되어 있다)에 서론과 부록 3권이 덧붙여져 있다.

개요[편집]

저자 안정복은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인 영조(英祖) 32년(1756년)에 《동사강목》의 저술을 시작하였다. 본서의 저술은 안정복의 스승이기도 한 성호 이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1], 《동사강목》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전체 초고가 완성되는 영조 36년(1760년)까지 4년에 걸쳐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 문제, 역대 강역과 지명의 고증 등에 대해 의심나는 점에 대하여 안정복은 일일이 스승 이익에게 편지로 질문하였고(이때 이익의 답변은 《동사강목》서술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이익의 문인인 소남 윤장(윤동규)과 이익의 조카 이정산(이병휴)에게도 영조 32년(1756년)과 35년(1759년), 32년(1756년)과 34년(1758년)에 각각 편지를 보내어 자문을 구했다. 이때 안정복이 보낸 12통의 편지와 그에 대한 스승 이익의 답장은 현재 《순암선생문집》권10 '동사문답(東史問答)', 《성호전집(星湖全集)》권24∼27에 그 내용이 실려 전하며, 「조선시대간찰집모음」(한국고서간찰연구회, 다운샘, 2006)에는 편지의 원본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사강목》은 기존의 역사서술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안정복은 기존의 역사책에 대해 "소략하면서 사실과는 다르다"(《삼국사기》에 대해), "번잡하고 쓸데없는 것이 많고 요점이 될 만한 것은 적다"(《고려사》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하고 그래서 방대한 책이 되었지만 의례가 어긋나고 잘못이 많고 잡스러움도 심하다"(《동국통감》에 대해) 비판하는가 하면, 이미 기존에 편찬되어 있던 《여사제강》(麗史提綱)이나 《동사찬요》(東史纂要)에 대해서도 "필법이 간혹 어긋나기도 하고 오류 때문에 잘못을 답습한 폐단까지 낳게 되었다" 등, 주자가 제시했던 강목체의 체제나 필법, 서술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특히 역사책에 서술된 사실들의 고증이나 내용의 부실함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져, 안정복 스스로가 《동사강목》의 집필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통감》 등의 역대 사서 8종뿐 아니라 32종의 문집류(묘지명·족보 포함) 등의 방대한 사료를 하나의 편년체적 형식을 띤 것으로 재구성하였고 여기에 김부식(金富軾), 이제현(李齊賢) 등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 17명의 사론을 참고로 제시하였다.

흔히 알려진 통설과는 달리 《동사강목》의 전체분량을 안정복 혼자서 집필한 것은 아니고, 집필을 시작하고 2년만인 영조 33년(1757년)에 병을 얻은 안정복은 일단 집필을 중지했다. 이때 이미 《동사강목》 수권(首卷)의 동사범례(東史凡例)와 부권의 지리고(地理考)는 완성된 상태였음을 영조 32년에 이익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 35년, 고려 중기인 인종(仁宗) 시대(《동사강목》권제8)까지 집필한 시점에서 병이 더 악화되자 자신이 집필을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 것을 대비해 동생인 정록과 아들 경증, 그리고 이원양(李元陽, 스승 이익의 손자)과 권기명(權旣明, 권철신 즉 그의 사위인 권일신의 형)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동사강목》의 완성해줄 것과, 예전 자신이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대장(大匠, 윤동규)에게 마지막 윤문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순암집》권14). 유서에서 안정복은 "이 책(동사강목)은 우리 나라에 아직까지 없었던 책으로서 여기에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며 《동사강목》 집필과 완성에 대한 기대를 보이고 있다. 나머지 초고 부분(11권 분량)의 완성은 1년 동안 이들 동료 문인과 제자들에 의해 급속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초고가 완성된 뒤 병이 다소 나은 안정복은 스승 이익의 부탁으로 그의 《성호사설》을 간추린 《성호사설유편》(1762년)과 고려 이후, 조선 왕조의 역사책인 《열조통기》(1769년)를 각각 완성하는 등의 저술 작업과 세손(世孫, 훗날의 정조)의 교육을 맡게 되어 서연에 참석하는 등의 관직 생활을 하느라 미처 완성된 초고를 보완할 시간이 없었다. 1774년 무렵에 《동사강목》의 열람을 요청하는 세손의 명을 받들어 안정복은 예전 완성해두었던 《동사강목》의 초고를 꺼내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여 정조(正祖) 2년(1778년) 책의 서문(序文)을 지음으로서 책이 완성된다. 《동사강목》의 초고가 완성된지는 18년, 그의 나이 67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후 정조 5년(1781년) 《동사강목》은 정조의 교서에 따라 대궐로 바쳐졌다.

구성[편집]

《동사강목》은 크게 수권(首卷)·본편(本編)·부권(附卷)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수권

  1. 제동사편면
  2. 동사강목서
  3. 목록
  4. 동사강목 범례(凡例) : 범례를 통해서 통계(統系) 및 포폄(褒貶)의 원칙을 세웠다.
    1) 통계 - 통계는 역사의 정통론을 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동사강목은 기자조선-마한(馬韓)-신라-고려를 정통으로 삼았다.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정통에 준하도록 기록하였으며, 삼국은 특정한 정통을 정하지 않고 무통(無統)으로 하였고, 위만조선후삼국, 신라 멸망 이전의 고려는 참국(僭國)으로 삼았다는 것이 있다. 부여·예맥·옥저·가락(駕洛), 대가야(大加倻) 등은 소국(小國)으로 기록했다. 또한, 이전 사서에서 고려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폐왕 우(前廢王 禑), 후폐왕 창(後廢王 昌)을 모두 정통 군주로 기록하였다.
    2) 세년(歲年) - 정통 및 참국의 기년을 기준으로 삼았다. 갑자(甲子)를 먼저 쓰고 다음에 기년을 서술하였으며 중국의 기년은 본문 바깥에 별도로 기록하였다. 정통 왕조의 기년은 연도만 표시하였고, 소국이나 참국 등의 기년은 국명 및 왕호를 함께 표기하였다. 삼국은 무통이기 때문에 모두 국명 및 왕호를 부기하였다. 신라의 여왕 및 찬탈자의 경우 이름 및 기년을 먹으로 표시하였다.
    3) 명호(名號) - 정통의 임금은 왕(王) 또는 시호로 표시하였고, 정통이 아닌 임금은 모국왕(某國王), 소국의 임금은 모국군(某國君), 찬탈자는 이름을 썼다. 초기 신라의 왕호는 기년 및 목(目)에는 왕(王)으로 표기하였으나 강(綱)에서는 원형 그대로 표기하였다.
    4) 포폄(褒貶) - 기록을 하는 데 있어서 단어 및 용어의 사용에 철저한 원칙을 세워 포폄을 나타내려 하였다. 같은 의미에도 칭찬하는 글자와 꾸짖는 글자를 달리 사용하였으며 정통에 사용하는 글자와 비정통에 사용하는 글자를 다르게 하였다. 예를 들어 정통의 왕의 죽음은 훙(薨), 비정통 왕의 죽음은 졸(拙), 찬탈자의 죽음은 사(死)로 서술하였다.
  5. 도(圖)
    1) 상(上) - 《동국역대전수지도》(한국 역대 국가의 흥망)와 전세지도(傳世之圖, 각국의 왕계보)[2]
    2) 중(中) - 지도(각국의 강역표)
    3) 하(下) - 관직연혁도(官職沿革圖)

2. 본편

  1. 권1상 - 조선과 마한
  2. 권1하 ~ 권4상 - 삼국 시대(10년 ~ 668년)
  3. 권4하 ~ 권5하 - 신라(669년 ~ 935년)
  4. 권6상 ~ 권17 - 고려(936년 ~ 1392년)

3. 부권

  1. 상권(上卷) - 고이(考異) : 전설이나 기록 등이 상반되게 전해져 오는 것을 따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사실 가운데 특정 사실을 선택한 이유를 서술.(사마광의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아 지은 것임을 저자 본인이 밝히고 있다)
  2. 중권(中卷)
    1) 괴설변증(怪說辨證) - 괴상한 전설·기록 등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것이다. 삼국의 시조 설화를 비롯하여 많은 신이(神異)한 전설에 대하여 비판.
    2) 보유(補遺) - 금의에 대한 자신의 추측을 기록. 통설과 상반되는 추측이기에 부록에 따로 서술.
    3) 잡설(雜說) - 기타 잡다한 고증이나 의견을 기록.
  3. 하권(下卷)
    1) 지리고(地理考) - 국가별 강역, 논란이 많은 개별 지명에 대한 문헌적 고증. 《동사강목》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평가[편집]

이 책에 흐르는 사상은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본편 17개 권 속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이 본편 외에 《동사강목》의 가치를 한결 높여준 것은 마지막의 부권(附卷)이다. 여기에는 고이(考異) · 괴변설(怪辯說) · 잡설(雜說) · 지리고(地理考) 등의 4개 편목(篇目)이 들어 있고, 각 편에는 다시 여러 개의 개별적 문제들이 취급되어 있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 · 사상적 영향이 더욱 현저하였다.

각주[편집]

  1.  《성호사설》경사문(經史文) 가운데는 한국사에 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평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이 있는데, 이들 내용은 《동사강목》에 적잖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동사강목》이라는 이름 자체는 유형원(柳馨遠)이 저술한 《동사강목범례》의 명칭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안정복의 스승인 이익의 당숙부 이원진은 유형원의 외숙부라고 하는 인척관계에 있었다.
  2.  정통 국가 뿐 아니라 가락, 대가야, 부여, 발해의 왕계보도 제작하였다.

 

 

 

<참고자료>

 

동국통감(東國通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국통감 - Daum 백과

 

 

동국통감 - 나무위키 (namu.wiki)

 

 

동사강목 - 나무위키 (namu.wiki)

 

 

동사강목 - Daum 백과

 

 

동사강목(東史綱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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