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 본문
일연은 고려 후기에 『삼국유사』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태어나 충렬왕(忠烈王) 15년(1289)에 사망했다. 고종(高宗) 6년(1219),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수행을 거듭해 구산문 사선의 으뜸이 되었다.
몽고 침입 후에 무주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남해 정림사에서 대장경 제작에 참여했다. 이어 원종(元宗)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의 선월사에 머물며 설법하였다. 1277년부터 4년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그 즈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283년에 국사가 되었다.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1년(1214)에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고종 14년(1227),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文殊)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에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除授)받았다. 원종(元宗, 재위 12601274) 2년(1261),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 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重創)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3년(1277)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駐在)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에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저술로는 『어록(語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100여 권과 『삼국유사』 5권, 「인천보감후지(人天寶鑑後識)」 등이 있다.
이 중 『중편조동오위』, 『삼국유사』, 「인천보감후지」가 남아 있는데, 저술들에서 간화선, 조동선(曹洞禪), 운문선 등 당시 여러 갈래의 선 사상과 함께 화엄(華嚴), 유식(唯識)에 이르는 폭넓은 사상적 경향이 발견된다.
또한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한국 고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수록함으로써 일연 개인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의 역사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1)
『삼국유사』는 고려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총 5권 2책이다. 권의 구분과는 별도로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체제는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분류한 자유롭고 독특한 형식의 역사서이다.
유교적 역사인식과 서술태도와는 다르게 신이한 역사 이야기와 그 전거를 밝히고 고대 사료의 원형을 전달함으로써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며, 한국 고대어 연구와 불교미술 연구를 위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일연(1206 ~ 1289)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사료를 수집한 것은 청년시절부터였고, 그 원고의 집필은 대개 70대 후반으로부터 84세로 죽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졌다.
저자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자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 곳에 있다. ‘무극기(無極記)’라고 표한 것이 그것이다.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행하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 시기 고판본의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1965년 보물 지정 이후, 2003년 국보로 지정된 송은본은 현재 곽영대(郭永大)가 소장하고 있다. 이 본은 3 · 4 · 5권만 있는데, 권3의 첫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잔본이다.
석남본은 1940년부터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하였던 것으로 왕력(王歷)과 제1권만 남은 잔본으로 소장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남본 및 송은본을 모사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몇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한다. 이 본의 권말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이계복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 발문에 의하면,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冊板)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1행 중 겨우 4, 5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다. 이계복은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발문에는 당시에 전 책판을 개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구각판(舊刻板)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시 새겼다. 다시 새긴 판에 각자(刻字)의 양식이 다른 것들이 많음은 각 고을에 나누어 새긴 탓이기도 하고, 개각판은 번각(飜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정을 담당하였던 최기동(崔起潼) · 이산보(李山甫)의 교정능력이 의심스럽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존되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중종임신본을 인행(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한다. 5권이 갖추어진 완본인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은 이계복이 판각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된 것인데, 훗날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소장하면서 가필을 하였기에 수택본이라 불린다. 이 본은 이마니시[今西龍]가 1916년부터 소장하였는데(일인들은 흔히 今西本이라 칭한다),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본은 완본이지만 약간의 가필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은 초기의 임신고인본으로 평가되고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이 밖에도 중종임신본은 몇 가지 더 전한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 · 기이(紀異) · 흥법(興法) · 탑상(塔像) · 의해(義解) · 신주(神呪) · 감통(感通) · 피은(避隱) ·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 · 가락국 · 후고구려 ·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권1 · 2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 이후 이 책이 두루 유포되어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책에 인용되었고 영향을 주었다. 최근 이 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간행과 유통 또한 활발해졌다.
현재 간행, 유포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여러 종류로 영인본 · 활판본 · 번역본 등이 있다. 1926년 순암수택본을 축소, 영인하여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총서 제6으로 간행하였고, 고전간행회에서 1932년 순암수택본을 원래의 크기로 영인, 한장본 2책으로 간행하였다. 1964년 일본의 가쿠슈원동양문화연구소[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에서 고전간행회영인본을 축소, 재영인하기도 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3년 서울대학교 소장본을 반으로 축소, 영인하였는데, 이동환(李東歡)의 교감을 두주(頭註)로 붙이고, 「균여전(均如傳)」 및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를 부록으로 덧붙인 양장본이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1983년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을 축소, 영인하였다. 부록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소장 필사본, 즉 석남본 및 송은본의 모사본을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활자본으로는 동대본(東大本, 東京帝國大學 문학부, 1904) · 속장경본(續藏經本, 동대본을 정정하여 속장경 지나찬술부 사전부에 수록) · 계명본(啓明本, 崔南善 교정, 啓明 제18호, 1927) · 신증본(新增本, 최남선, 三中堂, 1943 · 1946) · 증보본(增補本, 민중서관, 1954) · 대정신수대장경본(大正新修大藏經本, 1927) · 조선사학회본(1928) · 한국불교전서본(韓國佛敎全書本, 동국대학교 출판부, 한국불교전서 제6책에 수록, 1984) 등이 있다.
『삼국유사』의 번역본으로는 국역본 · 일역본 · 영역본 등이 있다. 국역본으로는 사서연역회번역본(고려문화사, 1946) · 『완역삼국유사』(고전연역회 이종렬 책임번역, 학우사, 1954) · 『원문병역주삼국유사』(李丙燾 譯, 동국문화사, 1956) · 수정판『역주병원문삼국유사』(이병도 역주, 廣曺出版社, 1977) · 한국명저대전집본(이병도 역, 大洋書籍, 1972) · 조선과학원번역본(북한에서 1960년 번역) · 세계고전전집본(李載浩 譯註, 광문출판사, 1967) · 세계사상교양전집본(李民樹 譯, 乙酉文化社, 1975) · 권상로역해본(權相老 譯解本, 東西文化社, 1978) · 성은구역주본(成殷九 譯註本, 전남대학교 출판부, 1981) · 『역해삼국유사』(박성봉 · 고경식 역, 서문문화사, 1985) · 삼중당문고본(李東歡 역주, 1975) · 삼성문화문고본(이민수 역, 1979) 등이 있다.
일어 번역본으로는, 『원문화역대조삼국유사(原文和譯對三國遺事)』 · 초역삼국유사 · 국역일체경본 · 임영수(林英樹) 역본 · 『완역삼국유사』(金思燁 역, 朝日新聞社, 1979) 등이 있다. 1972년 연세대학교에서 영역본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삼국유사』의 주석서로는 미지나[三品彰英]의 『삼국유사고증』 상 · 중 2책이 있다. 색인으로는 이홍직(李弘稙)이 『역사학보』 5집에 발표한 것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삼국유사색인』이 있다. 이홍직이 작성한 것은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의 부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작성한 색인은 주제별 및 가나다 색인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다를 뿐 아니라 불교사서인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이 책의 체재를 10과(科)로 분류한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의 경우와 비슷한 듯하지만, 왕력 · 기이 · 효선 등 중국 고승전의 선례와 다른 것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다. 또한, 삼국의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다.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도, 불교사서, 설화집성집, 불교신앙을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 잡록적 사서, 야사 등 많은 견해들이 있다. 이 책의 내용에는 불교사적인 것이 많지만, 순수한 불교사서로 보기는 어려우며, 많은 설화를 수록하고는 있지만, 간단히 설화집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저자가 서명(書名)을 통하여 밝히고 있듯이, 『삼국유사』는 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어 표현한 것이다.
이 사서가 정사가 아니라고 해서 만록(漫錄) 정도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신이(神異)한 사화(史話)가 많음이 흔히 지적된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기이할 것이 없다는 일연의 역사인식과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방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연의 역사인식과 서술태도는 유교적 역사관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학사적인 위치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비하여 복고적이라거나 진보적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다. 찬술동기나 서술체재가 서로 다른 두 사서의 직접적인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고, 또 『삼국유사』의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오늘날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 · 지리 · 문학 · 종교 · 언어 · 민속 · 사상 · 미술 · 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는 역사 · 불교 · 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 · 사지(寺誌) · 비갈(碑喝) · 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 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 · 불상 · 사원건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 · 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 · 유적을 조사 · 연구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삼국유사』는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삼국사기』 화랑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의 찬(讚)이 있어 그의 시문학이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다. 이 책의 체재, 즉 권차(卷次) · 편목(篇目) · 항목 등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다. 본문 또한 오자(誤字) · 탈자(脫字) · 궐자(厥字) · 중문(重文) · 혼효(混淆) · 전도(顚倒) 등으로 인한 변화도 있다. 정밀한 교감이 요구된다. 고대사료가 가진 애매성이나 신이한 설화의 문제도 있다. 역사 · 문학 · 종교 등 종합적인 연구와 자세한 주석이 필요하다.(2)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9) 우리 민족의 창세기 『삼국유사』
2022.04.0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
나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역사서로 단정하지 않는다. 역사서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종교서로 보고자 한다. 종교는 뭐를 믿던 자유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는 황당성을 상당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서가 사실에 바탕하고 있더라도 종교서는 역사서와 구분되어야 한다. 세계의 종교서 『성경(聖經)』에도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등의 역사서가 있지만, 『성경』의 역사서는 유태인과 관련된 것이라는 지엽적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에서의 역사서도 사실에 기반을 둔 고대(古代)의 기록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종교의 근현대 종교서의 소개는 뒤로 미루고, 이번 제9회분 연재에서는 사서(史書)로서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논하고자 한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일연(一然, 1206~1289)이 1281년에 편저한 “『심국유사』는, 특히 「고조선」 사실(史實) 기록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리 민족의 창세기이다.”
현존하는 『삼국유사』 권제1 가운데 가장 고본으로 공인(共認)되는 파른 손보기 박사 구장본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증앙도서관 소장. 판목이 닳지 않아 자획(字劃)이 분명한 것을 보아 조선초기에 판을 보각한지 얼마 안 되어 찍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고고학자 손보기(孫寶基, 1922~2010) 박사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분의 저서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문고판 소책자 한 책으로 된 책이었지만 필자는 3권이 파책이 되도록 보았고, 손 박사와 필자는 고서수집가로서 경쟁자이기도 했다. 아마도 의학사학자 및 서지학자 김두종(金斗鍾, 1896~1988) 박사라든가 서지학자 천혜봉(千惠鳳, 1926~2016) 박사, 그리고 출판학 및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 1926~1993) 박사 만큼 필자에게 준 영향은 컷다.
손보기 박사는 자신이 『삼국유사』 조선초기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후에 유족이 이 소중한 책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고 나서 2013년에 공개한 것이다.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을 우리 민족이 기록한 현존하는 최고(最高)의 고문헌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단군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제17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 조(條)에서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이라 하며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라 한 것이 유일하다. 『삼국사기』는 오직 삼국에 관한 기록만 한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군을 기술(記述)하는 것으로부터 책을 시작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 『삼국유사』 고판본
일연의 『삼국유사』는 1281년에 편찬되었으나, 편찬 직후에는 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편찬 30년 후인 1310년대에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에 의하여 간행되었다는 책이 초판본인 것 같다. 이후 조선초에 중간되었으며, 1512년에도 다시 경주부에서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되었다. 이들 판본은 모두 목판본이다.
판목이 닳지 않아 자획(字劃)이 분명한 것을 보아 조선초기에 판을 보각한지 얼마 안 되어 찍은 것으로 보인다. 파른 손보기 구장본 권제1~2와 이 곽영대 소장본 권제3~5를 합하면 『삼국유사』 조선초기본이 한 질로 완성된다. 그러나 손보기 구장본과 곽영대 소장본은 지질이 다른 것을 미루어 보면 각기 다른 시기에 인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존하는 『삼국유사』로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초기의 판본이다. 조선초기의 판본으로는 고 손보기 박사가 구장(舊藏)하다가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기증한 『삼국유사』 권제1~2의 2권1책이 있고, 현재 곽영대(송은 이병직 구장본)가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 권제3~5의 3권1책이 있고, 동래 범어사에는 권제4~5의 2권1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1512년(중종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 임신본(中宗壬申年本, 正德本)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한 질 소장되어 있다. 이상의 조선초기 판본과 규장각 소장본은 국보(國寶) 제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1512년 중종 임신본은 이외에도 국내외의 몇 곳에 낱권으로 또는 완질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국내외 소장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묵서(墨書)를 한 수택본(手澤本) 5권2책이다. 이 순암 수택본은 이계복이 중간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한 것으로,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매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 순암 안정복 수택본을 조선고전간행회에서 1932년에 원래의 크기로 영인한 후 오침(五針) 선장(線裝)하여 공급하였다.
나. 『삼국유사』의 내용과 비판
『삼국유사』는 5권2책으로 되어 있고, 권제1의 앞에는 「왕력(王歷)」이 있고, 이어서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아홉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1‧2권에 계속된다. 「기이」편의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 31항목,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참조 : 한국학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편)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다른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등등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판목이 닳아 자획(字劃)이 다른 면의 것보다 굵게 찍혔다. 즉 이 부분은 조선초기의 판으로 찍은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기이(紀異)」 권제일 장1 후면 2행부터 장2 후면 1행까지 “고조선(왕검 조선)”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꼭, 한 장 분량이다.
이 고조선 기록의 끝부분에서 기자(箕子)와 한분치삼군(漢分置三郡, 한사군)이 나오는데, 이에 근거하여 일연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였던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편자 일연이 승려였으므로 『삼국유사』에 불교의 설화적 내용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하여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서에 인용되었고, 사대주의 역사학자들조차 이 책에서 언급하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다. 『삼국유사』의 가치
『삼국유사』가 조선시대 유교의 풍토에서는 허황되게 평가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연구하는데 원천적 보고(寶庫)이다.
이 책은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도 많이 인용되었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 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나라 고대문학 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삼국유사』는 또한 우리나라 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 연구를 위한 가장 오래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탑상」편의 기사는 탑‧불상‧사원건축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싣고 있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유적, 특히 불교의 유물‧유적을 조사‧연구함에 있어 기본적인 문헌이다.
『삼국유사』는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전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종교적이고 풍류적인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삼국사기』 화랑(花郞) 관계 기사와는 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저자 일연의 찬(讚)이 있어 그의 시문학(詩文學)이나 역사인식을 엿볼 수 있다.(참조 : 한국학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편)
그러나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적지 않게 있다. 이 책의 체재, 즉 권차(卷次)‧편목(篇目)‧항목 등에는 약간의 혼란이 있고, 본문 또한 오자(誤字)‧탈자(脫字)‧궐자(厥字)‧중문(重文)‧혼효(混淆)‧전도(顚倒) 등으로 인한 변화가 있어, 각 판본의 정밀한 교감과 역사‧문학‧종교 등 종합적인 연구와 자세한 주석을 필요로 한다.
편자 일연(一然)이 이 책에 담고자 했던 본연(本然)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우리 민족의 신앙이자 생각이다. 사대화(事大化)된 유교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만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신앙과 생각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3)
<참고자료>
일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삼국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대사료DB/ 삼국유사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itemId=sy
연세대 박물관, 보물 제1866호 '파른본 삼국유사' 최초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17. 9. 27.
조선초기 간행된 ‘삼국유사’ 판본 공개 - 불교신문 (ibulgyo.com)2013.01.21
회수한 도난 '삼국유사', 법원이 국가귀속 결정 | 연합뉴스 (yna.co.kr)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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