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

편집자주
사람에게 따뜻함을 주는 반려동물부터 지구의 생물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구체적 지식과 정보를 소개한다.
밀렛 ⓒ게티이미지뱅크

 

올해는 유엔이 정한 '국제 밀렛(millet)의 해'다.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농업계에서조차 주목하지 않은 채 한 해가 지났다. 밀렛은 조, 수수, 기장 등 벼과에 속하는 기장족(Paniceae) 식물 중 식용으로 재배하는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잡곡으로 통칭하고 있을 뿐 별도로 구분하는 이름이 없다. 세계적으로 밀렛은 주요 곡물인 벼, 밀, 옥수수에 비해 영양성분이 풍부한 '슈퍼푸드'로 재인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온건조한 기후에 잘 적응해 자라기 때문에 온난화에 따라 확산하고 있는 고온과 가뭄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식량작물로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쌀 이외의 곡물을 잡곡이라 부르는 데에는 중요하지 않거나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얼마 전 국립식량과학원에서 그 명칭에 대한 의견을 모아 본 적이 있다. 그중 '영양곡'이라는 이름이 맘에 들었다. 밀렛은 싹이 되는 배아와 중요 양분을 저장하는 호분층의 비율이 높아 단백질을 포함한 주요 영양성분과 비타민류, 기능성 물질들이 벼, 밀에 비해 훨씬 풍부하다. 밀가루에 많은 글루텐도 매우 적어 셀리악병이나 소화장애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조와 기장은 신석기시대 중국 요녕지역에서 한반도로 전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발간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조가 오곡 중 가장 많이 난다는 내용이 있고, 재배 기술도 많은 고농서에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는 쌀 못지않은, 어쩌면 쌀보다 더 중요한 백성들의 먹거리였다는 증거다. 고려시대부터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왕실이 예를 갖춰 지켜야 했던 '종묘사직(宗廟社稷)'에서 '직(稷)'이라는 한자는 기장을 뜻한다. 조선 건국 당시부터 땅과 곡식의 신에게 예를 올리던 '사직단(社稷壇)'은 지금도 경복궁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올여름 우리나라는 기록적인 폭우로 큰 재난을 겪었다. 반면 태국과 인도 등 동남아 국가들과 북미와 남미의 곡창지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고온과 가뭄 피해가 극심했다. 지구온난화로 국지성 폭우 피해도 크지만, 고온과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은 나라가 훨씬 많고 심각하다. 우리나라도 여름철 집중호우 피해 못지않게 겨울과 봄철 가뭄도 매년 심각해지고 있다.

탄수화물 이외의 영양분을 탄소배출량이 많은 동물성 식품에 의존하면 할수록 기후변화 속도는 더 빨라지게 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위기를 걱정하는 유엔이 밀렛에 주목하고 관심을 촉구하는 가장 큰 이유다.

서효원 식물학 박사

 

 

완도신문 유영인입력 2023. 12. 1. 11:24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황칠나무 천연기념물 지정... 보길도 정자리의 황칠목

[완도신문 유영인]

 

그대 못 보았더냐!
궁복산 가득한 황칠나무를
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네
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하듯 하는데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 물감 이와 견줄소냐
서예가의 경황지가 이로 인해 더 좋으니
납지, 양각 모두 다 무색해서 물러나네
이 나무 명성이 자자해서
박물지에 왕왕이 그 이름 올라 있네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工匠)에게 옮기는데
서리들의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이 이 나무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지난 봄 조정에서 공납 면제 해준 후로
영릉에 종유 나듯 신기하게 다시 나네
바람 불어 비가 오니 죽은 등걸 싹이 나고
나뭇가지 무성하여 푸른 하늘 어울리네

- 다산 정약용의 시 '황칠(黃漆)'
 
  황칠의 안식향(安息香)은 신경 안정 효능이 매우 뛰어나다고 유명하다
ⓒ 완도신문
1200년 전 서라벌의 어전회의.

"전하! 우리 서라벌의 하늘이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허~ 다 청해진의 진귀한 물건들 때문이요.″

1200년전 청해진 종합물류상사에서 거래하는 여러 가지 물목중에 으뜸으로 치는 물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황칠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통일신라시대 왕경도(王京都)가 디오라마로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금입택(金入宅 황금박을 두른 호화로운 집)이 35채가 복원되어 있다, 학자들은 당시 사회의 여력으로 보아 수십채의 집에 금을 두를 수는 없고 황칠이 상당히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몽골의 칩입으로 모든 금입택이 불에 타 기록으로만 전해올 뿐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황칠은 수액을 받기가 이만저만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만 '옻칠 백년 황칠 천년'이란 말이 있듯이 황칠은 한번 도포를 해 놓으면 여간해서는 변질이 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쇼쇼인(正倉院)에는 통일신라시대 가야금(신라금이라 불리우며 장보고선단의 물목으로 추정하고 있음) 3점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데 그 표면에 황칠,을 도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쇼인의 비 협조로 황칠인지 옻칠인지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완도에는 엄청난 면적에 수십곳의 황칠나무 군락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앞으로 체계적이고 정확한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완도의 상왕봉(象王峰)과 보길도의 적자봉(赤紫峰)에는 수십년 된 황칠나무 자생지가 여러군데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적자봉의 끝단인 정자리 우두(牛頭)마을에 완도 정자리 황칠나무(莞島亭子里黃漆木)가 지난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수령 200여년으로 추정되는 이 황칠나무는 흉고둘레 115cm, 수고 15m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 크기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천연기념물로 승격 재 지정되었다. 우두마을의 가장자리이자 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있는데 인근 주민들에게는 재수 없는 나무 또는 신목(神木)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았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땔감으로 화를 면하게 된 설이 두 가지가 있는데 설은 비슷하다.

하나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련의 주인공이 삶을 비관하여 목을 매 죽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우두 마을의 젊은이가 삶을 비관하여 목을 매 죽었다는 설이다.   

 

전자는 우두마을의 부자집 아가씨와 그집의 머슴이 서로 사랑했는데, 처녀의 아버지가 반대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했다는 이야기다. 후자는 1970년대 초 마을에서 발생한 이야기로 전한다.

완도 상왕봉 뿐만 아니라 보길도에서 자생하는 황칠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수령이 매우 짧은데 다산선생이 말한 것처럼 아전들의 수탈이 심해서도 나무가 훼손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까지 황칠나무는 농어촌의 땔감과 염소먹이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황칠나무는 가벼우면서 휘발성이 강해 시골에서 땔감으로 최고 인기가 있었는데 높은 산에서 둥치나무(나무의 가지만을 골라 묶은 땔감)를 해서 지게에 지고 다니기가 수월해서 1980년대까지 무분별하게 벌채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보길도의 노인들은  이 나무를 '상철나무' 라고도 불리나 그 어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황칠과 관련된 기록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나온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 계림지(鷄林志) 등에 신라칠(新羅漆)로 나타나 있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천금목(千金木)으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황칠이 완도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황칠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나며 그것도 난대림이 펼쳐진 완도 등 서남해안에서만 생산된다. 칠을 할 경우 찬란한 황금빛을 내는데다 은은한 안식향을 풍기기 때문에 대대로 귀하게 쓰였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안타깝게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백성들이 심기를 꺼려하여 아예 맥이 끊겨 버렸고, 또한 칠을 구하기가 워낙 힘들고 그 채취나 정제법이 까다로워 100년 전부터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전통 황칠을 다시 살리기 위한 연구가 공예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현대인들에게는 약용식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정혈 작용, 간기능 개선, 항산화 작용, 면역력 증진, 항균 작용, 신경 안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황칠의 안식향(安息香)은 신경 안정 효능이 매우 뛰어나서 우울증과 불면증,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들에게 좋은 약리 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6월에 흰색으로 핀다. 타원형의 열매는 20~30개씩 모여 달려 푸른색을 띠다 11월이 되면 검게 익는다. 수액채취는 음력 6월(여름이 오기 전)쯤 나무줄기를 칼로 여러갈래로 긁고 하단부를 V자 형으로 홈을 파서 수액을 채취한다. 

 

수령 20년 이상의 나무에서 채취가 가능하며 양은 매우 적게 나온다. 우윳빛 칠이 흐르면서 공기 중에서 산화되면 황색이 되고 굳으면 마차 송진처럼 된다. 

 

채취된 황칠은 바로 사용 할 수 없고 정제법을 거쳐 사용 되는데 금빛을 띠고 있으면서도 투명하여 쇠, 종이, 가죽, 나무에 칠 할 경우 황금색으로 변하고 특히 나무에 칠할 경우 나뭇결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도 표면은 황금색을 띤다. 칠이 워낙 귀하고 비싸다보니 금빛을 더욱 강하게 내기 위하여 목재나 종이의 경우 먼저 치자 우린 물로 초벌을 한 후 황칠로 마감하기도 한다.
 
  황칠나무
ⓒ 완도신문
완도에는 집집마다 황칠나무 한그루 이상이 식재돼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박현주 미술전문입력 2023. 10. 21. 06:00수정 2023. 10. 30. 11:01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농식품수출정보(KATI)에 따르면 지난해 막걸리 수출량은 1만 5천396톤으로 지난 2020년 1만 2천556톤과 비교해 22.6% 증가했다. 4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고객이 막걸리를 고르고 있다. 2023.10.04. xconfind@newsis.com

 

[서울=뉴시스] 와인이 세월과 지역을 넘어 사랑을 받는 이유는 와인이 가진 역사적,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와인이 가는 곳에는 종교와 문화가 따라갔고, 또 와인을 매개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됐다. 와인은 이미 기원전에 중국에 들어왔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나라로는 확산되지 않았다. 대신 쌀이나 보리 등 곡물로 만든 술은 광범위하게 전파된다. 유교와 성리학의 발전도 술 관련 풍습과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술과 함께 독자적인 술 문화가 발전한다.

우리나라의 술은 이미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명주로 이름을 날렸다. 대이두(大李杜)라 불린 이백과 두보에 빗대 두목(杜牧)과 함께 소이두(小李杜)로 불린 당나라 말기의 시인 이상은(李商隱, 813~858)은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시 ‘공자’(公子)에서 신라주를 찬미했다.

 

“신라주 한잔의 취기가 이른 새벽 바람에 사라질까 두렵구나.”(一盞新羅酒 凌晨恐易消, 일잔신라주 능신공이소)

신라의 술이 중국에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준다. 신라주는 중국의 황주처럼 1차 발효 후 여과한 것으로 보인다. 알코올 도수도 비슷했을 것이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서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 1823) 제26권 ‘물산지’(物産志)에는 이 이상은의 시를 소개하고 신라주가 고려시대 멥쌀로 만든 고려주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상은의 시 원전에서는 새벽을 뜻하는 ‘능신’(凌晨)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해동역사에서는 ‘능상’(凌霜)으로 잘못 쓴 부분도 눈에 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1634) 권12에도 이상은의 시를 소개하면서 당나라에서는 신라주를 귀하게 여겼다고 썼다.

 

당나라 단성식(段成式, 800~863)이 지은 ‘유양잡조’(酉陽雜俎) 속집(續集) 권1에도 신라의 술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는 대식가였다(삼국유사 권 제1, 태종춘추공편). 김유신이 술집으로 향하는 애마의 목을 쳤다는 설화에서도 보듯 신라에서는 술과 술집이 일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구려에 속했던 만주 지역의 말갈족은 당시 이미 와인을 양조했고, 중국의 여러 기록에도 고구려 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송나라 시대 편찬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979)에는 고구려 여인이 ‘곡아주’(曲阿酒)를 중국에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서’(魏書) 유조전(劉藻傳)에도 곡아주 이야기가 나온다. 한반도와 가까운 장수성 단양(丹陽)에서 생산되는 황주인 ‘봉항주’(封缸酒)는 곡아주라고 칭하기도 한다. 일찍이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도 고구려에서는 집집마다 ‘좋은 술을 담근다’(善藏釀)고 했다.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의 주몽신화도 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 대무신왕 편에서는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주’(旨酒)를 보내 달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 지주는 좋은 술이란 뜻이다.

 

삼국시대에는 누룩의 사용이 일반화됐다. 백제에서도 일찍이 누룩을 이용한 양조기술이 발달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 712) 중권 응신천황조 편에는 ‘수수허리’(須須許理, 스스코리)라 불리는 백제인 ‘인번’(仁番, 니호)이 응신천황(應神天皇, 재위 270~310년)에게 대어주(大御酒)를 빚어 바쳐 왕이 기분 좋게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에는 주인공이 바뀌어 백제 도래인 ‘증증보리’(曾曾保利, 조조호리) 오누이가 인덕천황(仁德天皇, 재위 313~399년)에게 대어주를 바쳤다고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뜬금없이 수수허리가 아니라 ‘수수보리’(須須保利)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또 수수보리가 일본의 사가신사(佐嘉神社)에 주신(酒神)으로 모셔져 있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어 있다.

 

수수보리라는 ‘인물’은 일본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세계대백과사전 2판’의 인물이 아닌 용어설명 란에는 수수보리(須須保利)가 한국의 김치, 중국의 자차이(榨菜), 유럽의 피클과 같은 절임(漬物, 츠케모노)의 일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법률과 관습에 대해 기술한 ‘연희식’(延喜式, 927) 제39권 우지춘채료(右漬春菜料) 편에도 채소 절임의 일종으로 처음 등장한다. 실제로 나라(奈良)시에 있는 일본 야마토 시대 전통요리 전문점 ‘본가’(萬佳)에서는 수수보리 절임(須須保利漬)을 옛날 방식대로 재현에서 내놓고 있다. 무에다 간장, 현미식초, 절구로 간 생 콩을 넣어 절인다. 발효를 위해 누룩도 넣는다.

 

사가신사(佐嘉神社)에 얽힌 이야기도 허구다. 규슈의 사가현에 위치한 사가신사는 573년에 창건되었다. 제사를 올리는 신은 ‘콩의 신’이라는 ‘미두남신’(彌豆男神)과 ‘미두여신’(彌豆女神)이다. 앞서 언급한 증증보리 남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술과는 딱히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오히려 콩을 사용한 수수보리 절임과는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에는 주신을 모시는 신사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마츠오 타이샤(松尾大社)는 주신(酒神)을 모시는 3대 신사 중 하나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울진 지역에서 도래한 하타(秦)씨족이 농경과 양조를 관장하는 신인 오야마쿠이카미(大山咋神)을 기려 701년 교토에 건립했다. 건립 후에는 하타씨족의 조상에게도 제사를 올린다. 하타씨족은 일본에 양잠, 양조, 제방과 농수로의 축조 기술을 전파했다. 여러 연구로 보아 백제가 일본 사케의 기원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3~5세기 우리나라가 일본의 양조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부여, 동예, 삼한 등 삼국시대 이전의 부족국가 시대에도 제례 및 경조사에 술이 빠지지 않았다. 고려시대 이전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대부분 중국의 제한된 기록에 의존한다. 하지만 고려시대 후기 이후에는 자체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의 찬란한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해동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기전체로 기술했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한치윤이 원편 70편을,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속편 15권을 편술한 것으로, 한반도 서적 이외에 중국·일본 등 외국의 서목 550여 종에서 자료를 뽑은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 안정복의 <동사강목>과는 달리 단군조선을 인정하여 단군에서부터 기전체로 기술한 점, 역사를 분야별로 나누어 세기(世紀)·성력(星歷)·예(禮)·악(樂)·병(兵)·형(刑)·식화(食貨)·물산(物産)·풍속(風俗)·궁실(宮室)·관씨(官氏)·석 (釋)·교빙(交聘)·예문(藝文)·인물·지리 등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점, 흔히 안 다루던 숙신씨(肅愼氏)를 별개로 다룬 점 등이 모두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종래의 관찬사서(官撰史書)들이 취한 관료적인 편찬방법을 탈피하고, 역사와 지리의 합일을 꾀하였던 것이다.

개설[편집]

한치윤은 원편 70권, 한진서는 속편(續編) 15권을 저술하여 85권이다. 속편은 지리고(地理考)로 한치윤이 10여 년 작업에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조카 한진서가 뒤이어 1823년(순조 23년) 편찬을 마쳤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편 70권
    • 권1~권16 :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여러 나라 세기(世紀)
    • 권17 : 성력(星曆)
    • 권18권~권22 : 예악(禮樂)
    • 권23 : 병지(兵志)
    • 권24 : 형법
    • 권25 : 식화(食貨)
    • 권26~권27 : 물산
    • 권28 : 풍속
    • 권29 : 궁궐
    • 권30~권31 : 관제
    • 권32 : 석가(釋家)
    • 권33~권41 : 교빙(交聘 : 외교)
    • 권42~권59 : 예문(藝文)
    • 권60 : 숙신(肅愼)
    • 권61~권66 : 비어(備禦 : 미리 준비하여 막음)
    • 권67~권70 : 인물
  • 속편 15권 : 지리 서술.

 

[수산집-동사]

입력 2005. 3. 9. 04:51수정 2005. 3. 9. 04:51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해 2002학년도 이후 고교 1학년생이 사용하는 현행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후기 "문화의 새 기운"이라는 항목에서 역사학 분야의 새로운 기풍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대목이 있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316쪽) 이처럼 현대 한국사학사에서 이종휘(李種徽.1731-1797)와 그가 저술한 "동사"(東史)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원류쯤 되는 저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대체 이종휘는 누구이며, 동사는 또 무엇인가? 이종휘는 자를 덕숙(德叔)이라 하고 호는 수산(修山)이라 하며,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철(李廷喆)의 아들이다. 하지만 요즘의 유명세와는 달리 정조 16-17년(1792-93)에 공주 판관을 지냈다는 점을 제외하고 그의 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가 죽은 지 6년 뒤인 1803년, 그의 아들에 의해 "수산집"(修山集)이라는 문집이 간행된다. 동사란 이 수산집 일부(권 11-13)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서술로 "동사"(東史)라는 말 그대로 동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고 평가되는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나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같은 동시대 동국(東國)의 역사서술이 상당한 거작이었음과 비교할 때 동사는 무엇보다 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체제를 보면 본기(本紀)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ㆍ연표(年表)ㆍ표(表)ㆍ지(志)로 구성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그대로 본떴음을 알 수 있다.

서술대상 시기는 단군조선 이후 고려시대까지를 커버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에 관한 일을 "단군본기"(檀君本紀)라는 이름으로 제일 첫 머리에 세우고 있고, 발해사를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항목을 별도로 만들어 다루고 있다.

여기에다 동사 현존본은 삼국시대와 관련해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라와 백제본기는 따로 없고 고구려 관련 기록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열전의 경우 고구려 관련 비중은 절반 이상이며, 일종의 사회ㆍ문화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지(志)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편명(篇名)들인 예문지(藝文志) ㆍ율력지(律曆志)ㆍ천문지(天文志)ㆍ지리지(地理志)ㆍ형법지(刑法志)ㆍ오행지(五行志) 앞에는 모두 "고구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단재 신채호 이후 동사야말로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하고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쓴 역사서로 꼽힌 까닭은 이러한 "현존본"의 모습을 이종휘가 구상하고 실천한 바로 그 동사의 원래 모습이었다고 암묵적으로 간주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만 이 현존본 동사는 여러 면에서 불완전본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첫째, 서문이 없다. 둘째, 역사서평을 가하는 주체(즉 이종휘 자신)가 어떤 곳에서는 외사씨(外史氏)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찬(贊)이라고 해서 요동을 치고 있다.

셋째,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본기도 없다. 넷째, 예문지(藝文志)를 필두로 하는 각종 지(志)에 "고구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들 지가 이종휘 저작이라면 그는 신라와 백제의 지(志)도 따로 구상했음을 엿보게 한다.

본기나 세가도 없이 느닷없이 그 시대에 대한 지(志)가 돌출한다는 것은 현존본 동사가 불완전 판본임을 보여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현존본 "동사"는 애초에 이종휘가 쓰다가 완성치 못한 것이거나, 완성은 했으되 원고 일부(혹은 상당수)가 망실되고 남은 것들을 수산집을 편찬할 때 "동사"(東史)라는 이름으로 긁어 모은 데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문이 없고 역사서평 형식이 다르다는 점은 적어도 현존본 동사가 이종휘가 애초에 하나의 통사로써 구상한 책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불완전한 현존본을 토대로, 거기에 고구려 관련 기술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주목해 동사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하고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쓴 역사서라는 평가는 매우 성급하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동사가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비되어 동국의 역사를 발명하려 얼마나 고심했던가 하는 흔적을 완연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규장각 책임연구원들인 김영심ㆍ정재훈 씨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지원하는 동서양 학술명저번역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동사를 처음으로 완역했다.

이런 한문 고전은 원문이 생명인데, 그것을 빼어버리고 번역문만 실은 점이 아쉽기 짝이 없다. 같은 학술명저번역총서 시리즈로 먼저 나온 "염철론"(鹽鐵論)도 원문을 누락시킨 바 있는데,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지원주체인 학술진흥재단이 나서야 할 것이다. 소명출판. 382쪽. 2만6천원. taeshik@yna.co.kr

 

 

입력 2012. 1. 20. 18:31수정 2012. 1. 21. 00:58

찬란한 역사·문화가 모두 땅에서 나오는데.. (daum.net)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지리와 인문이 어우러져 문명 이룩…풀 한포기, 흙 한줌도 위대한 유산조선 후기 역사가 이종휘 "중국 못잖은 축복의 땅" 예찬

이 땅은 아름답다. 봄꽃이 피고 여름 소낙비가 내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가을 단풍이 물들고 겨울 눈발이 날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대지의 축복이다.

 

풍광이 아름다운 데 이유는 없다. 화려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위대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쩌면 누추할지 모르고 어쩌면 왜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소소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했던 선비의 글 하나 생각나 옮겨 본다.

 

그의 이름은 이종휘(李種徽·1731~1797), 《동사(東史)》를 지은 역사가다. 그는 《수산집(修山集)》의 '동국여지승람의 뒤에 부친다(題東國輿地勝覽後)'에서 이렇게 썼다.

'천하의 이름난 산과 큰 강을 말할 때 반드시 오악(五岳·중국의 오대 명산)과 사독(四瀆·중국의 사대 강)을 꼽는다. 안탕산과 나부산은 산세가 하늘에 닿고, 부강(府江)은 함께 섞여 바다와 가없지만, 성명문물(聲明文物)과 예악도수(禮樂度數)는 저쪽에서 나고 이쪽에서 나지 않으니, 크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휘는 이어 조선은 중국 못잖은 자연과 함께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 온 천하가 오랑캐 땅이 되었는데 머리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사람들 사이에 의관조두(衣冠俎豆)와 문물예악(文物禮樂)을 지키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요, 그 인민은 반만명 은나라 사람의 후예요,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이 고군자국(古君子國)이다. 지금 세상에서 추로(鄒魯)의 풍속으로 의관을 하고 있고 이락(伊洛)의 풍속으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저기 불룩하고 우묵한 것이 다시 오악과 사독에 양보함이 없다.'

그러면서 도덕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이땅을 '동주(東周)' 또는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러 《동국여지승람》을 《동주직방지》나 《소중화광여기》라고 바꿔도 좋겠다고 말한다.

'옛날 맹자는 등나라 임금에게 권하기를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취해 법으로 삼으라" 했으니, 압록강 동쪽을 들어 강한(江漢)의 풍속을 기대해도 주(周)의 이남(二南)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논어》에서는 "나는 그 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이 책은 '동주직방지(東周職方志)'라 불러도 좋다. '소중화광여기(小中華廣輿記)'라 일러도 좋다.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한 것은 황조(皇朝)의 세상을 만난 배신(陪臣)의 말이었다.'

 

역사와 지리는 국가 지식의 보고(寶庫)다. 그 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 국가 지식의 보고는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이었다. 그런데 《동국통감》을 누가 읽느냐는 옛말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다행히도 그런 옛말은 보이지 않지만, 역시 후대로 갈수록 실용적인 가치는 낮아졌다.

하지만 황윤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종휘는 《동국여지승람》에서 기쁨을 느꼈다. 아니,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 고전적인 가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종휘가 《동국여지승람》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산수벽(山水癖)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몹시도 사랑했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땅 전체를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조선의 국토를 흐르는 물줄기의 원위와 형세를 자세히 연구해 《청구수경(靑邱水經)》을 지었다.

이종휘가 사랑한 이 땅이 단지 아름다운 산수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은 자연과 더불어 문화가 있는 곳이고, 오늘날의 사람과 더불어 옛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부여나 경주와 같은 고도(古都)에 가도 옛 역사를 까마득히 망각하고 단지 산수만을 볼 뿐이라면, 폐허로 남은 유적지를 보아도 아무런 사연을 생각지 않고 망설임 없이 휙휙 지나갈 뿐이라면, 그는 진정으로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이 곧 옛 사람이 태어난 동방의 나라이고, 내가 타고난 언어와 기품과 성정이 곧 옛 사람도 타고난 동방의 풍기라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내가 보는 수풀과 들판을 옛 사람도 보았고, 내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도 곧 옛 사람이 입고 먹었다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이종휘는 이런 마음으로 《청구고사(靑邱古史)》를 지었다.

지리와 역사가 어우러져 문화를 이룩한다.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은 근원적으로 이 땅의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되고 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전승된 이 땅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된다. 나의 순수한 양지(良知)가 이 땅과 만날 때, 그 땅은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어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종휘는 양명학에 공감한 인물이다. 양명학의 정감으로 이 땅의 아름다움을 심득(心得)한 순간,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열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이 《청구수경》과 《청구고사》의 편찬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해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산을 깎아 버리고 강을 파헤쳐 버리고 바다를 메워 버렸던 이욕(利慾)의 세파가 맑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땅이 곧 역사이고 문화이며 문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

 

 

동사 (이종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사》(東史)는 1803년 조선 후기 이종휘(1731년 ~ 1797년)가 지은 역사 책이다.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한 통사 서적이다. 《동사》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연표(年表), 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개요[편집]

《동사》는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의 문집인 《수산집(修山集)》 가운데 수록되어 전해져 온 기전체의 통사 서적이다. 이종휘는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사관의 재정립을 시도했다.

이종휘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혈통과 기자조선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바로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고구려는 단군의 후예인 부여의 주몽이 세운 나라로서, 기자조선의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백제나 신라에 비해 유교문화가 훨씬 발달하였고, 사방 4~5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대국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반면 유학자였던 이종휘는 신라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노장사상이나 불교가 번성하여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한국의 역사 체계 안에 포함시키고, 별도로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독립적인 항목을 구성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종휘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을 기자 이래 으뜸가는 위인으로 꼽았다. 이러한 이종휘의 역사 인식은 이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계 국가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로 이어졌다.[1][2]

동사의 특징[편집]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서 기자조선을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사의 뿌리는 단군조선으로서, 비록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예맥비류옥저 등을 건국하였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였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임을 강조하였다. 이종휘는 기자조선의 의미도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구성[편집]

제1장 본기(本紀)

  1. 단군본기(檀君本紀) :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는데, 태백산에 살면서 박달나무 아래에서 단군을 낳았다. 단군의 이름은 왕검이고 성은 환(桓)씨라고 한다. 도당씨[3]가 중국에서 나라를 세운 때 무진년 경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 단군의 아들 부루가 왕이 되어 갑술년에 도산에서 하우씨[4]에게 조회하였다. 단군은 죽지 않고 상나라 23대 왕인 무정(武丁)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2. 기자본기(箕子本紀) : 기자조선을 설립한 자서여(子胥餘)는 은나라 성탕왕의 16세손이고 은나라 마지막 왕인  임금의 큰 아버지이다. 주나라 왕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치고, 요수 동쪽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웠다. 8조 법금을 만들고 정전법을 도입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했다. 기자조선의 41세손 부왕(否王)에 이르러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이를 두려워 하여 진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였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準王)은 연나라 사람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으나,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평양성을 습격하자, 배를 타고 남쪽 (韓)으로 도망하였다.
  3. 삼한본기(三韓本紀) : 단군과 기자 때의 다른 부족으로 (濊), (貊), (韓), (餘), 말갈(靺鞨)의 다섯 종족이 있었다. 이 중 한(韓)이 가장 컸는데, 진한변한마한이라고 부르고 합쳐서 삼한이라고 불렀다. 삼한은 한강 이남에 있었고 땅이 사방 1천 리였으며, 78개 소국으로 나뉘었고, 모두 조선에 신하로 소속되어 군현처럼 세금과 조공품을 냈다.
  4. 후조선본기(後朝鮮本紀) : 후조선의 왕 위만(衛滿)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망명하여 준왕으로부터 박사 벼슬을 받고 서쪽 변방을 지켰다. 이후 세력을 키워 한나라 혜제 원년 정미년(기원전 194년)에 평양성으로 들어가 준왕을 내쫓고 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 나라가 점점 강해지자, 주변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 천자에게 조공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던 예족의 군장 남려는 이에 불만을 품고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수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나, 니계장 (參)이 우거왕을 암살하는 등 지배층의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08년). 위씨조선이 망하자 한나라는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다.

제2장 세가

  1. 기자세가 보유(箕子世家 補遺) : 기자(箕子)는 중조선의 태조 문성왕이고 성명은 자서여(子胥餘)이다. 기자의 근본은 (契)에서 나왔다. 설은 고신(高辛)의 아들로 그 후 탕왕(湯王)이 되었다. 기자는 탕왕의 16세손으로 조선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41세를 전하였다. 문혜왕 염에 이르러 서융이 주나라 유왕을 시해하여 주나라가 동쪽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자 제후들이 일어나 마침내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중국이 어지러워졌으나, 동방은 오히려 무사하였다. 수성왕 상이 즉위하였을 때, 공자가 구이(九夷)에서 살고자 하였는데, 기자의 나라에 인현(仁賢)의 교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순왕 췌가 즉위하였을 때 이웃 연나라가 군사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니 크게 패하여 땅 이천 리가 줄어들고 요동을 잃게 되었다. 이에 조선이 약해지고 기자의 업적이 쇠퇴하게 되었다. 애평왕 준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오자, 왕이 박사 벼슬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박사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평양성을 습격하자 왕이 남쪽으로 배를 타고 가 한(韓) 땅에 거주하니 이것이 곧 마한(馬韓)이다.
  2. 부여세가(扶餘世家) : 부여의 선조는 단군으로부터 나왔다. 부여는 압록강 북쪽에 있었는데 땅이 사방 2천 리이다. 단군기자의 교체기를 지나면서 어떤 것을 살아남고 어떤 것은 망하였는데 모두 조선에 신하로서 복속했다. 대대로 전한 것이 2천 년이 되었다. 해부루왕(解夫婁王)에 이르러 가섭원으로 천도하였는데, 이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해모수(解慕漱)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고 부여의 옛 도읍을 근거지로 삼았다. 해부루왕이 늙도록 자식이 없다가 곤연 돌 밑에서 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기를 주워 아들로 삼았는데, 커서 금와왕(金蛙王)이 되었다. 금와왕이 하백의 딸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금와왕의 장자 대소가 주몽의 재주와 능력을 시기하므로, 주몽이 졸본으로 달아나 고구려를 세웠다. 대소왕(帶素王) 즉위 21년에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죽임을 당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 달아나 갈사수 물가에 나라를 세웠다.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왕이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고 투항하였다. 한나라 안제 때 부여 태자 위구태(尉仇台)가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 군사를 협공하여 크게 물리쳤다. 의려왕(依慮王)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하여 왕이 자살하고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왕자 의라(依羅)가 진나라의 구원병을 얻어 모용외의 장수 손정을 죽였다. 현왕(玄王)에 이르러 연나라의 모용황이 부여를 침략하여 왕과 백성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부여는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고 투항하니 마침내 부여가 멸망하였다.
  3. 발해세가
  4. 가야세가

제3장 열전

  1. 예맥, 옥저, 비류, 낙랑 열전
  2. 고구려 가인열전
  3. 탐라열전
  4. 협부을송 열전
  5. 을지문덕 열전
  6. 설총, 최치원 열전

제4장 연표

  1. 삼조선 연표
  2. 삼한 연표
  3. 육국 연표
  4. 사군이부 건치 연혁표
  5. 삼한지제 칠십팔국 분속표
  6. 고사고금인표

제5장 지1

  1. 예악지
  2. 식화지
  3. 신사지
  4. 고구려 예문지
  5. 고구려 율력지[신라부]
  6. 고구려 천문지
  7. 고구려 지리지[부 신라 백제]
  8. 고구려 형법지
  9. 고구려 오행지[부 신라 백제]

제6장 지2 고려사

  1. 천문지
  2. 역지
  3. 오행지
  4. 선거지
  5. 여복지
  6. 백관지
  7. 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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