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평창/허윤희 기자입력 2023. 11. 10. 03:06수정 2023. 11. 10. 09:17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 ‘110년 만의 귀향’ (daum.net)

평창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12일 개관
9일 강원도 평창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 취재진이 전시된 실록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시장에 활짝 펼쳐진 ‘중종 실록’ 첫 장에 붉은 인장 두 개가 찍혀 있다. 하나는 도쿄제국대학 도서인, 다른 하나는 경성제국대학 도서장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무단 반출됐다가 돌아온 왕실 도서의 아픈 역사가 표지 면지와 첫 장에 또렷이 남았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에 보관됐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궤가 기나긴 타향살이를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1913년 실록이 일본에 반출된 지 110년 만의 귀향이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오대산 사고본 실록 75책과 의궤 82책을 보관·전시하는 국립 조선왕조실록 박물관을 12일 정식 개관한다며 9일 현장에서 언론 공개회를 열었다.

오대산사고본 국보 ‘성종실록’(1606년). 1913년 일본에 무단 반출된 지 110년 만에 귀향한 조선왕조실록이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등 깊은 산속 4곳에 사고(史庫)를 만들어 주요 서적을 분산 보관했다. 이 중 오대산 사고에는 20세기 초까지 실록과 의궤를 포함해 총 4416책이 소장돼 있었다.(1909년 ‘오대산 사고 장서 목록’)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왕조실록 788책 전량이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됐고,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상당량이 불에 탔다. 가까스로 화마를 피한 일부 실록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왔다.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27책이 이전됐고, 2006년 도쿄대에 남아 있던 47책이 서울대로 반환됐다. 2017년에는 일본 경매에 등장한 ‘효종 실록’ 1책을 국립고궁박물관이 추가로 사들였다.

9일 강원도 평창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열린 언론 공개회에서 취재진이 전시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왕조의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오대산 사고본 의궤는 1922년 일본 궁내성(현 궁내청)으로 반출됐다가 2011년에야 43종 82책이 고국에 돌아왔다. 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궁내청에서 돌아온 오대산 사고본 의궤는 모두 19세기 후반 이후 제작된 고종·순종 대 의궤로, 일제가 조선 왕실을 일본 황실에 편입시켜 ‘왕공족실록(王公族實錄)’을 편찬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의궤 반출 목적이 왕공족실록 편찬이었기 때문에 왕실 인물의 일생과 밀접한 기록, 즉 장례·책봉·혼인 등 생애 주기 관련 의례에 집중돼 있다”고 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서 문을 여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문화재청

 

오대산사고본의 귀향은 지역 사회와 불교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수년간 격론 끝에 지난해 국회의 관련 결의안까지 끌어냈고, 결국 기존 월정사 성보박물관이 운영해온 왕조실록·의궤 박물관을 국고를 들여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우선 공개하는 상설전시관에선 실록과 의궤의 편찬부터 환수까지의 역사를 실물과 영상, 그림, 사진으로 펼쳤다. 내년에는 기획 전시실, 실감형 영상관, 수장고 등을 보수·정비할 예정이다. 박수희 연구관은 “실록의 원본을 상시로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박물관”이라며 “이번 전시엔 실록 9점과 의궤 26점을 전시했는데 향후 유물 교체와 특별전을 통해 더 많은 원본을 다양하게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장슬기 seul@mbc.co.kr입력 2023. 11. 9. 11:03

오대산 사고본 '성종실록'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조선을 세운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110년 만에 제자리를 찾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오는 12일 정식 개관하는 강원도 평창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를 돌려보내 상설 전시한다고 밝혔습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시대 지방 외사고 중 하나인 오대산사고에 보관 중이다 일본 동경제국대로 반출된 실록과 의궤 157책을 2006년과 2011년, 2017년에 걸쳐 환수했습니다.

 

환수된 실록과 의궤는 줄곧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번 박물관 개관과 함께 원 소장처였던 오대산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겁니다.

110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실록과 의궤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상설 전시돼, 언제든 실록 원본을 볼 수 있습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이 운영하던 '왕조·실록의궤박물관' 일부를 새로 단장한 뒤, 부분 개관한 것으로 2025년까지 재정비가 이뤄질 예정입니다.

문화재청은 "오대산 사고본의 귀환을 생각하면서 아픈 역사의 상처를 씻어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이 회복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장슬기 기자(seul@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3/society/article/6541771_36126.html

 

 

이기환 기자입력 2023. 12. 25. 08:00수정 2023. 12. 25. 08:04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손자 정조(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에 쓴 영조의 어제시(아래 그림).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정조의 장서인 중 ‘탕탕평평평탕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은 사력을 다해 탕평책을 썼던 정조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너의 소임이거늘(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하여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는 내용입니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짓고 있습니다.

전시기획자는 “영조가 탕평을 반대하는 무리에게 ‘주제를 모르고 나서지 말고 네 본분을 지키라’고 비판했다”고 해석했어요. 이것이 혹시 아전인수의 해석이 아닐까요. 마침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다룬 논문이 있네요.

삽살개는 원래 래원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영조의 ‘어제시’가 유명하지만 그림 또한 생동감 넘친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영조는 ‘계해(1743년) 6월 초하루 다음날(2일)’ 김두량의 그림에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보면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 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이 보입니다. 김두량의 <고사몽룡도>에는 “먹을 쓰는 법이 기고(奇古·기이하고 고아)하여…주상(영조)께서 ‘남리’라는 호를 하사했다”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발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영조의 사랑을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러한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보면 참 생동감 넘치게도 그렸습니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얼마나 사납게 짖어댑니까.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같은 김두량의 ‘흑구도’에 표현된 개는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습니다. 노곤한 모습이죠.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품에도 ‘삽살개’처럼 사납개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김두량에게 ‘짖는 개 좀 그려’하고 명하고는 ‘(신하의) 본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붕당의 다툼’을 꼬집었다는 해석이 나온 겁니다.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탕탕평평평평탕탕’ 등을 새긴 정조의 ‘장서인’을 봅시다.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여러가지 인장(장서인)을 찍은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이면서 정조의 별호이기도 한 ‘홍재(弘齋)’가 우선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거죠.

김두량의 또다른 개그림인 ‘검은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모든 장서인 중 ‘고갱이’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이 장서인을 얼핏보면 아무리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탕탕평평평평탕탕’이라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죠. 그런데 서화연구자가 단번에 알려주더라구요.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을 보라”는 겁니다.

그 ‘〃(땡땡)’이 반복부호라는 겁니다. 아! 그렇게 해서 읽으니까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얼마나 ‘탕평’을 갈구했으면 이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침전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개그림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암의 ‘모견도’ 등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개가 사납게 짖는 모습은 좀체 표현되지 않았다.

 

■약을 조제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홍범’은 ‘홍범구주’의 준말이고요. 하나라 우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한 ‘9개 조목(九疇·구주)의 큰 법(洪範·홍범)’을 가리킵니다. 그중 5번째 조목인 ‘황극(皇極)’에 ‘탕탕평평’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17세기 후반 소론의 영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황극의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같이 크고…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4일)

정조의 ‘장서인’ 중에는 ‘만기(萬機)’가 많다. ‘만기’는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는데서 유래됐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나왔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결국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왕권 강화’의 방편이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다른 정파의 ‘쓸만한 인물도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조제하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이것은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되어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다.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종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연루?

영조의 탕평책을 보죠.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그와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서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21·24일)

왕세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요. 겨우 왕대비인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무려 20만명이 반란에 가담했는데요.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정조는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 현판을 걸어두었다.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써서 창문 위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소통방안을 마련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책의 편찬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를 평정한 내용을 담은 <감란록>이 눈길을 끄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박았습니다. 영조는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18일자) 신하가 임금 후보자를 미는 형세이니 패배자측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영조는 경종 승하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강력 부인하고 당신의 입장을 밝힌 <어제대훈>을 펴냅니다. 영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여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이어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영조는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를 설득으로, 힘으로 해결한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을 이뤄나가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를 담았습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탕평비)이라고 했죠.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승정원일기> 1764년 5월14일)고 재차 훈계했습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 이복형인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있었다. 와병중인 경종에게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함께 올리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 먹어서는 안되는 인삼과 부자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펼쳐갑니다.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1785년(정조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도목정사(都目政事)’는 해마다 2~4차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일종의 인사위원회입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하고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힌다. 또 ‘게장 사건’과 관련해서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림을 보면 ‘인사위’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절대 당색에 빠져 공정한 마음을 잃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이번 특별전에서 정조는 즉위 300주년을 맞이한 영조에 주연자리를 비워주고 ‘주조연’으로 내려 앉아야겠죠.

그래도 신하들과 격의없이 주고받은 편지정치와 관련해서는 그냥 넘길 수가 없겠습니다.

정조가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눈에 띄는데요. 심환지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의 죽임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노론 벽파의 영수였죠. 그래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2009년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주고받는 내밀한 편지가 공개되었답니다. 이 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그중 1798년(정조 22) 1월11일 밤에 보낸 편지를 볼까요.

1785년(정조9) 12월 정조는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인사위원회(도목정사) 에 직접 참여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엎드려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명분을 삼는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

정조의 편지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고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임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정조가 69세의 노정승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47세의 정조가 69세의 노재상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왜 입조심 하지 않으냐.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는 등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이번 특별전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정조는 신하들을 두고 ‘주둥아리’니 ‘호로자식’이니 하는 막말로 호칭하는 등 신하들을 완전히 틀어잡았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보다 15년전인 1755년(영조 31) 영조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걸리거나(나주 벽서사건), 그런 내용을 답안지로 제출한(과거시험장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요. 영조는 ‘이인좌의 잔적’이라면서 소론 500여명을 소탕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영·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과 준천(하천 준설사업)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또한 물 흐름이 자주 막혀 범람하기 일쑤였던 도성내 하천의 준설공사도 펼쳤다. |국립중앙박물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뜻은 이뤄진다”

그렇다고 ‘탕탕평평’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권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 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이었습니다. 1751년(영조 27) 양인(16~60세)이 군복무 대신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준 겁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줬죠.

영조는 준설공사 후 제작한 <준천첩>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를 써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정비된 지 오래되어 물 흐름이 막히거나 넘치는 일이 번번했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차례 현장지도에 나선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 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가 담여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월드컵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영조가 <시경>과 <서경>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 그림’.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된다(유석암암)”는 것과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외민암)”는 의미가 담겨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석암암(維石巖巖)은 <시경>에 실려있다네(詩經攸載)’, ‘고외민암(顧畏民巖)은 <서경>의 훈계라네(書傳訓戒)’라는 글귀를 담은 그림인데요. ‘유석암암’은 <시경> ‘절남산’, ‘고외민암’은 <서경> ‘소고’의 구절입니다. 요컨대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되네.(유석암암)”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고외민암)”

영·정조의 ‘탕탕평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말아야 할 것 같아요.

 

(이 기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경 학예연구관·허문행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근호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정은 국립해양박물관 선임학예사가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이수경·허문행·명세라·이현숙,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근호,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2016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2

김영진·박철상·백승호,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이정은, ‘영조 어제로 본 김두량 삽살개 연구’, <문물연구> 30권 30호,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16

백승호·장유승·박철상·진재교·안대회·이상하·김문식·임형택, <정조어찰집>, 성균관대 출판부, 2009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유석재 기자입력 2024. 1. 15. 03:08

‘조선의 의궤’ 연구서, 프린스턴대서 출간 (daum.net)

 
이성미 한중연 명예교수 10년간 집필… 556쪽 영문판 내
이성미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아니 세상에, 그런 기록이 한국에 남아 있었군요!”

미술사학자인 이성미(85)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2014년 모교인 미국 프린스턴대에 초청받아 조선왕조의 의궤(儀軌)에 대한 특강을 하자 그곳 학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미 2007년 조선왕조 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는데도 생소하게 여겼던 것이다.

의궤란 국가 행사와 의례의 전 과정을 기록한 책으로, 글은 물론 다채롭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세세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문화 유산이다. 덕분에 의궤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변화까지도 연구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조선만의 이 독특한 기록물 얘기에 “그럼 의궤에 대한 책을 좀 써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 결과가 10년 만에 나왔다. 최근 프린스턴대에서 출간한 영문 책 ‘Recording State Rites in Words and Images: Uigwe of Joseon Korea(국가 의례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다: 조선의 의궤)’다. 국배판(A4) 556쪽 분량에 올 컬러 인쇄로 한국 기록 문화의 정수(精髓)를 오롯이 담아냈다.

이 교수는 “우리 의궤를 본격적으로 세계에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해 간단히 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책은 의궤 작성의 이념적·역사적 배경에 이어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 오례의(五禮儀)를 소개했다.

이어 어진(御眞·국왕의 초상화) 의궤와 정리(整理) 의궤(정조 때 제작한 활자인 정리자를 사용한 첫 번째 의궤), 화성 성역 의궤를 다뤘다. 다음 ‘의궤와 미술사’ 장에선 왕실 의례에 사용한 병풍들, 의례를 위해 일한 화원·사자관(寫字官)·여령(女伶)의 사회적 지위를 서술했다. 이 교수는 “의궤가 조선 시대 궁중 문화는 물론, 정치·경제·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담은 기록물임을 알 수 있게 했다”고 했다.

덕성여대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1989년, 이 교수는 그곳 장서각에서 수많은 의궤와 만났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말고도 이런 자세한 기록물이 또 있었다니!” 그 뒤 왕실 혼례를 다룬 가례도감 등 본격적 의궤 연구에 뛰어들었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금맥을 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했다. 의궤와 궁중 회화를 알리는 자리라면 국경을 가리지 않고 강단에 섰다. 2011년엔 외규장각 의궤 환수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문화어: 조선봉건왕조실록(朝鮮封建王朝實錄)[1])은 태조(1392년)부터 철종(1863년)까지 25대에 걸친 472년간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年月日順)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별칭은 『조선실록』(朝鮮實錄)이다.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2]

개요[편집]

『조선왕조실록』 은 총 1,894권 888책[3]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4]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 지정되었다.[2][5]

『조선왕조실록』 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다. 왕의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6]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 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신(史臣)은 논한다. …”라는 형식으로 사관의 의견(일종의 논평)을 적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은 편찬될 때마다 여러 부를 활자로 더 인쇄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쟁 시기에도 그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대한제국의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별도로 본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과 순종에 대한 실록은 국내외 상황이 불안정하여 편찬되지 못하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종태황제실록』 과 『순종효황제실록』 은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규례(사관이 작성한 사초를 바탕으로 집필해야 한다 등)에도 맞지 않고, 일본 제국의 관점에 입각해 서술되었기 때문에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견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 은 철종(哲宗) 때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고 있다.[7][8]

연혁[편집]

조선 전기[편집]

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하여 동년 4월 22일(음력 3월 22일)에 완성한[9]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을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2부는 고려 시대로부터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씩 더 등초하여 전주·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으며, 이후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다. 다만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활자화하지 못하고 처음에 등초한 그대로 보관하였다.

임진왜란과 실록[편집]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에 왜구에 의해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난중인데도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혹은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지로 나누어 보관했다가, 평란 후 국가 재정이 곤란하고 물자가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실록 재출판 사업을 일으켜,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선조 39) 3월까지 2년 9개월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을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한 부수는 3부였으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교정본(校正本)을 합하여 5부의 실록이 되었으므로 1부는 국가의 참고를 위하여 옛날과 같이 서울 춘추관에 두고,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과 도서(島嶼)를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고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신간본, 마니산에는 전주실록,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선조실록』을 편찬 출판한 후 또한 다섯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했다.

조선 후기[편집]

그 후 춘추관에 보관했던 실록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또 다시 소실되어 완전히 없어지고, 묘향산 실록은 1633년(인조 11)에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으로 이전하고, 마니산 실록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크게 파손되어 낙질(落帙) 낙장(落張)된 것이 많이 생겼다.

그 후 현종 때에 마니산 실록은 보수되었으나 춘추관 실록은 영원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니산 실록은 1660년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성 안에 사고를 신설하고 1678년에 정족산 사고로 이전하였다.

인조 이후 실록은 정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으며, 이후로 역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4사고에 추가 보존케 하였는데 전례에 따라서 정족산·태백산·적상산 사고에는 정인본, 오대산 사고에는 교정본을 보관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4사고의 실록은 일제 침략 당시까지 완전히 보전되었다.

일제 강점기[편집]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정족산 및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전의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설치한 소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로 옮기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이왕직(李王職 : 지금 구왕궁) 장서각에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에 가져다 두었는데 오대산본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에 788책 중 714책이 불타버렸고[10] 일부 외부로 대출되었던 책들만 보존되어 오대산본 중 27책을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国大学)에 반환되었다.[11]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国大学)으로 옮겨졌다.

해방 이후[편집]

이리하여 광복 당시까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고, 이왕직(李王職 : 지금 구왕궁)에 있는 적상산본은 광복 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탈취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실록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정도이다.

한편, 2006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된 오대산본 이 도쿄 대학으로부터 대한민국에 기증 형식으로 47책 이 전달 되었다.[12] 문화재청에서는 소장처를 임시로 서울대 규장각으로 결정하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소장처가 결정되기도 전에 규장각 소유라는 도장을 찍어 해당 도서를 훼손시켰다.

실록의 편찬과정[편집]

태조가 승하한 1409년 (태종 9년)에 태종은 하륜에게 명을 내려 전조의 예에 의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사관이었던 송포 등은 당대의 사람이 실록을 편찬하면 올바른 역사를 편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하륜으로 하여금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다음 정종과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 5년에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도 두어 대 지난 뒤에 편찬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세종은 이것을 묵살하고 이듬해 3월부터 변계량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여 1426년 (세종 8)과 1431년 (세종 13)에 각각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완성하였다. 이후 역대 임금의 실록은 그 임금이 사망한 뒤 곧 편찬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의 편찬을 위해 임시로 실록청 또는 찬수청을 설치하고 영의정 또는 좌 ․ 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을 총재관에 임명하여 총지휘하게 하고, 대제학과 기타 글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당상과 낭청에 임명하고, 도청과 일방 ․ 이방 ․ 삼방 등 각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다.

일방 ․ 이방 ․ 삼방 등 각방은 편찬자료를 수집하여 1차 원고인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세종이나 성종과 같이 재위연수가 길고 자료가 많은 임금의 실록은 6방으로 나누고, 세조나 명종과 같이 20년 내외로 재위한 임금의 실록은 3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는데, 각 방은 연수를 평균 분담하였다. 예를 들면 명종의 경우 1방은 즉위년과 3․ 6․ 9․ 12․ 15․ 18․ 21의 8년을, 2방은 1․ 4․ 7․ 10․ 13․ 16․ 19․ 22의 8년을, 3방은 2․ 5․ 8․ 11․ 14․ 17․ 20의 7년을 담당하였다. 각 방이 연속한 8년 또는 7년을 담당하지 않고 두 해 건너 한 해씩 담당한 것은 연속한 3개년을 동시에 편찬하여 이것을 수정하는 도청에 넘기고, 다음 3년도 이와 같이 하여 빠른 시일 안에 편찬을 완료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13]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에 관해서는,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의 한 기술 가운데는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경연일기, 각사등록 등 상고할 수 있는 문서라면 모두 주워 모아 연대순으로 나누고 순서의 구별을 하여 편집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실록의 편찬에는 정부의 모든 기관에서 기록한 문서류는 물론, 그밖에 개인의 문서까지도 참고가 되어 작성되었다.[14]

하지만 실제로는 시정기가 이미 임금의 동정과 경연강론을 위시하여 승정원일기, 각사계사 중의 중요한 것, 소장(疏章)이나 제수의 표표한 자, 등과인원, 각사의 계하문서 등에 관한 자료를 참고하여 수찬된 것이기 때문에 기본 자료가 되었다. 중종 29년 6월에 실록에 대하여 “대저 시정기를 근본으로 실록을 마련하여 만세에 전한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수집된 개인소장 사초(史草)는 전문 그대로 실록편찬시에 부입(附入)되었다.[15]

이와 같이 시정기와 사초 등 모든 자료를 수집한 다음 각 방의 당상과 낭청이 날마다 실록청에 나와서 연월일 순의 편년체로 실록의 1차 원고인 초초(初草)를 작성하여 도청(都廳)에 넘긴다. 이것으로써 각 방의 임무는 끝난다. 다음으로 도청에서 낭청이 먼저 초초를 교열하여 잘못된 것은 정정하고 빠진 것은 추가하고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여 2차 원고인 중초(中草)를 작성한다. 그러면 실록 편찬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중초를 교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함과 동시에 또한 많은 필삭을 가하여 정초(正草)를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실록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초초와 중초, 정초의 세 단계를 거쳐서 완성되면 곧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봉안하고, 실록의 기본 자료였던 춘추관 시정기와 사관의 사초 및 실록의 초초와 중초, 정초 등은 모두 세초(洗草)하였다. 이는 기밀의 누설을 방지함과 동시에 종이를 재생하기 위함이었다.[16]

목록[편집]

순서제목권책편찬 연도정식 제목기타

1 태조실록 15 3 1413년
(태종 13년)
[a]  
2 정종실록 6 1 1426년
(세종 8년)
공정왕실록
(恭靖王實錄)
숙종 대에 묘호를 올리면서 "정종대왕실록"으로 개칭
3 태종실록 36 16 1431년
(세종 13년)
[b]  
4 세종실록 163 67 1454년
(단종 2년)
[c]  
5 문종실록 13 6 1455년
(세조 1년)
[d]  
6 단종실록 14 6 1469년
(예종 1년)
노산군일기
(魯山君日記)
추존 후에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개칭
7 세조실록 49 18 1471년
(성종 2년)
[e]  
8 예종실록 8 3 1472년
(성종 3년)
[f]  
9 성종실록 297 47 1499년
(연산군 5년)
[g]  
10 연산군일기 63 17 1509년
(중종 4년)
연산군일기
(燕山君日記)
 
11 중종실록 105 53 1550년
(명종 5년)
[h]  
12 인종실록 2 2 1550년
(명종 5년)
[i]  
13 명종실록 34 21 1571년
(선조 4년)
[j]  
14 선조실록 221 116 1616년
(광해군 8년)
[k]  
선조수정실록[17] 42 8 1657년
(효종 8년)
[l]  
15 광해군일기[18] 중초본 187 64 1633년
(인조 11년)
광해군일기
(光海君日記)
 
광해군일기 정초본 187 40 1653년
(효종 4년)
 
16 인조실록 50 50 1653년
(효종 4년)
[m]  
17 효종실록 21 22 1661년
(현종 2년)
[n]  
18 현종실록 22 23 1677년
(숙종 3년)
[o]  
현종개수실록[17] 28 29 1683년
(숙종 9년)
[p]  
19 숙종실록 65 73 1728년
(영조 4년)
[q]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가 합쳐져 있음
20 경종실록 15 7 1732년
(영조 8년)
[r]  
경종수정실록[17] 5 3 1781년
(정조 5년)
[s]  
21 영조실록 127 83 1781년
(정조 5년)
[t] "영조"로 묘호가 바뀜
22 정조실록 54 56 1805년
(순조 5년)
[u] "정조"로 묘호가 바뀜
23 순조실록 34 36 1838년
(헌종 4년)
[v] "순조"로 묘호가 바뀜
24 헌종실록 16 9 1851년
(철종 2년)
[w]  
25 철종실록 15 9 1865년
(고종 2년)
[x]  
  • 연산군(10대 왕)과 광해군(15대 왕)은 폐위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록은 일기로 낮추어 부른다.
  1.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
  2.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3.  세종장헌대왕실록
    (世宗莊憲大王實錄)
  4.  문종공순대왕실록
    (文宗恭順大王實錄)
  5.  세조혜장대왕실록(世祖惠莊大王實錄)
  6.  예종양도대왕실록(睿宗襄悼大王實錄)
  7.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
  8.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實錄)
  9.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실록(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實錄)
  10.  명종대왕실록(明宗大王實錄)
  11.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
  12.  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
  13.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
  14.  효종대왕실록(孝宗大王實錄)
  15.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
  16.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
  17.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
  18.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실록(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實錄)
  19.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수정실록(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修正實錄)
  20.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실록(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實錄)
  21.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
  22.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실록(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實錄)
  23.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실록(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實錄)
  24.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

대한제국 실록[편집]

  • 고종실록, 순종실록 두 실록은 전통적인 실록 편찬 방식으로 편찬되지 않은 실록이다.
  • 고종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때 만들어 졌기에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하지만 역사적 연구자료로써 실록에 포함한다.)
  • 순종실록부록은 경술국치 이후부터 순종 승하까지의 기록이 담겨져있다.

순서제목권책편찬 연도정식 제목기타

26 고종실록 52 52 1934년 [a]  
27 순종실록 22 8 1934년 [b]  
- 순종실록부록 17 3 1934년 [c]  
  1.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2.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실록(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實錄)
  3.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실록부록(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實錄附錄)

기년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의 연호입니다.

기년법이란 과거의 어떤 해를 기점으로 해서 해를 통산하는 방법으로, 조선시대에는 일세일연호제(一世一年號制)로 한 명·청의 연호를 차용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국왕의 즉위한 해 또는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아 해를 헤아렸다.

  •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 : 국왕의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조선시대 기년법의 원칙이다. 이는 선대왕을 존중하여 그 연호를 사용 중에 바꿀 수 없다는 유교적 효 사상의 영향이 적용된 것이다.
  •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 : 국왕의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정변, 새 왕조 창건 등으로 선대왕(先代王)을 반드시 존중하여 그 업적을 인정하지 아니할 때에만 사용하였다.

보존 및 번역[편집]

1929년부터 1932년까지 4년 동안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실록 전체를 사진판으로 영인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때 겨우 30부밖에 출판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고 한국에는 총 8부밖에 두지 아니하였다.

광복 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할 경우에 이 실록의 절대적인 보급의 필요를 느껴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에 착수하다가 중단되었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에 대한민국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태백산본을 8분의 1로 축쇄 영인하여 국배판(菊倍版) 양장본(洋裝本) 48책으로 간행하여 국내 각 도서관은 물론 구미(歐美) 각국의 중요한 대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1980년에 『리조실록』의 이름으로 번역본을 전 400권 발행했고, 1994년에 대한민국에서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해서 발행했다. 1953년 이래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동방문화연구소에서 영인본으로 축쇄 간행하고 있다.

전산화[편집]

현재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왕조실록 전부를 전산화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번역 오류의 지적[편집]

기존 조선왕조실록의 한글본을 비롯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직지심체요절승정원일기일성록조선왕조의궤팔만대장경판동의보감 등 고전 번역의 주체가 다른데다 시간과 예산에 쫓기다보니 오역 투성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고전번역원이 재번역 5개년 계획에 영역 스케줄을 맞춰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속성 국역본의 오류를 잡아야한다는 조언이다.[19]

의의[편집]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사 연구의 근본 자료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치·경제·법률·문학·외교·군사·산업·교통·통신·미술·공예·종교 기타 무엇이든지 한국 문화, 역사를 연구하려면 꼭 필수로 연구할 서적이다.

특히 조선 초,중기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왕이 기록하지 말라고 한 사소한 것도 기록 한 것, 재위 중인 왕 및 다음 왕까지 실록 확인을 하지 못하는 점으로 보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에 등재될만큼 객관적이고, 실록의 왕의 실제 성격을 알 수 있는 한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오로지 궁정(宮廷)을 중심으로 한 사건의 기록이어서 지방의 실정을 단적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흠도 있다, 또한 선조 때부터의 실록은 기사가 점차 간략되었고, 또 붕당정치의 당쟁 때문에 내정에 관한 기사는 다소 조작 및 순화한 아쉬운 부분이 존재한다. 그 반면 외교에 관한 기사는 꾸밈이 적고, 중국·만주·일본·유구(琉球) 등과의 교섭 기록도 매우 많이 존재하여 동아시아사 연구의 사료로도 많이 이용된다.

대중 문화 속 조선왕조실록[편집]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중문화 작품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었으며, 실제 기록을 고증하거나 재해석한 작품도 있으며 아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모티브로 한 허구를 다룬 작품이 존재한다.

 

[승정원일기]

김호천입력 2023. 11. 2. 14:37

'승정원일기를 탐하다' 포스터 [제주학연구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의 제주 관련 내용만을 탐색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제주도 제주학연구센터는 '승정원일기를 탐耽하다'라는 주제로 승정원일기 탐독 강좌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 강좌는 제주학연구센터가 그동안 진행해 온 승정원일기 제주기사 번역 편찬사업의 번역 성과를 알리기 위해 기획했다.

강좌는 선착순 3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강좌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개강좌로 나누어 진행한다.

일반강좌는 오는 22일부터 내달 6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4시 제주시 임항로 278 제주학연구센터 2층 강의실 '마레'에서 한다.

조계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김호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교수가 강의한다.

일반강좌 수강 신청은 15일까지 온라인(https://naver.me/xPvvOMkm)으로 받는다.

신병주 건국대학교 교수가 강의하는 공개강좌는 12월 13일 오후 2∼4시 제주문학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모든 강좌는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제주학연구센터 편찬 승정원일기 제주기사

 

제주학연구센터는 2016년부터 승정원일기 속 왕대별 제주기사를 발췌해 번역하고 주석을 달며 편찬하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승정원일기 제주기사1-효종대, 제주기사2-현종대, 제주기사3-숙종대, 제주기사4-영조대 등 4권을 편찬했다.

김순자 제주학연구센터장은 "국가 차원의 승정원일기 번역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완료되려면 3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제주 관련 내용만을 추려내 역주·편찬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제주 사정에 밝은 역사 연구자, 고문헌 번역가 등이 기존 번역의 오류를 수정하고, 역주까지 달아 편찬하고 있어 제주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주학연구센터 누리집(http://www.jst.re.kr)을 참고하면 된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전화(☎ 064-900-1822)로 문의하면 된다.

khc@yna.co.kr

 

 

김기범 기자입력 2024. 1. 3. 06:05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지난 1일 발생한 강진으로 2일 스즈시의 해안가 일대 주택 등이 파손되고,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최고 85㎝ 높이의 지진해일(쓰나미)이 관측됐던 강원 동해시 묵호항에 2일 거친 파도가 치고 있다. 동해 | 한수빈 기자
최근 10년 한반도 인근 해역서
해저지진, 1년 평균 20회 이상
빈도수 적지만 안심 수준 아냐
20~21세기 동안 해일 피해 5건
41년 전 삼척 2m 파고에 사상자

새해 첫날이었던 지난 1일 일본 강진으로 발생한 지진해일이 한국 동해안까지 영향을 미쳤다. 1993년 이후 31년 만에 국내 연안에 지진해일이 도달했다.

20세기 초부터 올해까지 124년 동안 한국에서는 지진해일이 5건만 발생했다. 드물게 나타나다 보니 기상청에도 지진해일을 실제 겪어본 이가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준은 아니다. 41년 전 강원 삼척 임원항에서는 2m가 넘는 지진해일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는 총 138회에 달하는 지진해일이 동해안뿐 아니라 제주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기상청 자료와 국내 학술지 등에 발표된 관련 논문 등을 보면 20세기에는 모두 4차례의 지진해일이 동해안에 다다라 크고 작은 피해를 줬다. 지난 1일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북쪽 해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지진해일까지 5건 모두 한반도와 일본 사이 해역, 그중에서도 일본 서안 근해에서 일어났다. 1940년과 1993년 지진해일을 일으킨 지진의 진앙은 홋카이도 근해, 1964년은 니가타현, 1983년은 아키타현 근해였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동쪽 해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한국 동해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1983년 5월26일 일어난 지진해일은 최근 2세기 동안 발생한 지진해일 중 유일하게 한반도에 인명피해까지 일으켰다.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실종됐으며 2명이 부상했다. 어선은 81척, 주택은 42채가 피해를 봤다.

 

당시 강원 묵호에서 파고가 최대 2m에 달하는 등 물결이 높기도 했지만 지진해일 대비가 전혀 없었기에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조용식 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가 2018년 한국수자원학회지에 게재한 ‘우리나라의 지진해일 연구’ 논문에 따르면 당시 정부나 지자체 등은 경고방송을 하지 않았고, 피난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10년 후인 1993년 홋카이도 남서외해 지진해일 때는 한국 기상청이 일본 기상청의 정보를 받아 미리 경고를 내려 인명피해가 없었다.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례로는 1707년 10월 지진해일이 꼽힌다.

당시 일본에서 발생한 규모 8.6의 해저지진이 만든 지진해일은 동해안뿐 아니라 제주와 중국에까지 다다랐다. 제주도의 연혁·인문지리·행정 등 사항이 기록된 17세기 서적 <탐라지>에는 숙종 33년이었던 1707년 일본 시코쿠에서 일어난 호에이대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제주까지 도달했다고 쓰여 있다. <탐라지>에는 ‘지진해일’이라는 용어가 국내에서 처음 사용됐다.

1707년 지진해일을 포함해 조선시대 약 500년간 지진해일은 총 138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균 강원도청 학예연구사는 2019년 학술지 ‘한국사연구’에 게재한 ‘조선시대 해일의 발생과 대응’ 논문에서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남아 있는 지진해일 발생 건수를 집계했다. 이 연구사는 논문에서 “동해안의 지진해일 발생 빈도는 낮지만 규모가 크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20회 이상의 해저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일본 쪽 해안에서는 지난 1일처럼 국내에 영향을 미칠 만한 강진도 비교적 자주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은 이번 지진해일의 최대 높이는 묵호에서 1일 오후 8시35분쯤 기록된 85㎝였다고 2일 밝혔다. 동해안 주요 지점의 지진해일 최대 높이는 강원 남항진 28㎝, 속초 45㎝, 임원항 45㎝, 경북 후포항 66㎝ 등이다. 한국의 지진해일은 일본에서 발생한 지 1시간51분 뒤인 1일 오후 6시1분쯤 동해안 남항진에서 최초 관측됐으며 이후 주변 해안으로 전파됐다.

이번 지진해일은 지진해일주의보 발령 기준을 넘지는 않았다. 지진해일주의보는 ‘규모 6.0 이상 해저지진이 발생해서 국내 해안가에 높이 0.5m 이상 1.0m 미만 지진해일 내습이 예상되는 경우’에 한해 발령된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박종인 기자입력 2023. 12. 9. 03:01수정 2023. 12. 10. 09:51

1884년 갑신정변 한 달 뒤, 改名 봇물 터졌던 까닭은

지난 4일은 ‘갑신정변’ 139주년이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서울 북촌에서 살던 명문가 출신 젊은 벼슬아치 5명이 청나라에서 독립하고 부패한 민씨 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모든 실패한 혁명은 역모가 되고 그 주동자는 역적이 된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거리에서 살해되거나 망명했다. 가족도 자살하거나 처형됐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안 된 그해 음력 11월 7일부터 ‘승정원일기’에는 자기 이름을 바꾸겠다는 벼슬아치들 개명(改名) 신청이 터진 봇물처럼 기록돼 있다. 개명 담당 부서인 예문관은 왕명으로 이들을 남김없이 허가했다. 1884년 음력 12월 말까지 정부에 개명 신청을 한 사람은 60명이다. 해를 넘기고도 개명 신청은 끝없이 이어졌다. 공인된 신분 세탁, ‘역적 이름 개명 사태’다.

지금도 이름을 바꾸려면 법원에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은 왕의 허가가 떨어져야 개명이 가능했다. 이유는 ‘범죄인 혹은 긴절하지 않은 사유로 가볍게 개명하는 자가 많아서’였다.(1449년 음 3월 19일 ‘세종실록’) ‘신분 세탁’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그런데 국왕이 개명을 무더기로 허락한 사건이 몇 있다. 역모(逆謀) 사건들이다. 역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알아서’ 국가에 개명 신청을 했고, 국가는 이런 신청을 받아줬다. 갑신정변이 대표적이다.

갑신정변(1884) 주역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김옥균(왼쪽부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들을 포함한 참가자들은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정변 직후부터 이들 주도 세력과 이름이 한 글자라도 비슷한 사람들로부터 이름을 바꾸겠다는 개명 신청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위키피디아

 

1884년 개명 사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 정변 주역 5인 외에 갑신정변에 참여해 재판을 받은 사람은 23명이다. 이 가운데 21명이 능지처사(토막 처형)와 참수형을 당했다. 이들 이름은 이희정, 김봉균, 신중모, 이창규, 이윤상, 오창모, 서재창, 차홍식, 남흥철, 고흥종, 이점돌, 최영식, 윤경순, 이응호, 전흥룡, 윤계완, 김창기, 민창수, 최성욱, 이상록, 신흥모, 낭창관, 신기선이다.(박은숙 역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 진술 기록’ 아세아문화사, 2009)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모반대역부도(반역역모)’와 ‘모반부도(반역)’ ‘지정불고(범죄 미신고)’였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1884년 음력 11월 7일, 첫 개명 신청이 접수됐다. 한성 하급 관리 서광두(徐光斗)가 병두(丙斗)로, 병조 인사 담당인 정랑 서재후(徐載厚)가 정후(廷厚)로, 세조릉인 광릉 담당 관리 서재완(徐載琬)이 정완(廷琬)으로 개명을 신청했고, 정부는 이를 허가했다. 정변 후 망명한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을 의식한 개명 신청이었다(1884년 음11월 7일 ‘승정원일기’). 같은 날에는 사복시 하급 관리 김영식(金英植)이 형식(亨植)으로 개명을 허가받았다. 정변을 주도한 홍영식(洪英植)과 이름이 같았다.

12일에도 서광범과 같은 ‘광(光)’ 자 항렬 관리 4명이 개명을 허가받았다. 19일에는 김옥균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관리들이 일제히 개명을 신청했다. 인조 아버지 능인 장릉 참봉 김문균(金文均)은 문규(文圭)로, 김흥균(金興均)은 흥규(興圭)로, 김승균(金昇均)은 승규(昇圭), 김정균(金貞均)은 정규(貞圭), 김용균(金用均)은 용규(用圭), 김호균(金澔均)은 철규(澈圭), 김계균(金桂均)과 김가균(金可均)은 각각 태규(泰圭)와 석규(錫圭)로 개명했다.

서재필과 한 글자가 겹치는 서재두(徐載斗)는 정두(廷斗)로, 박영효와 이름이 겹친 박영풍(朴泳豐)은 승현(勝鉉)으로 바꿨다. 이희정(李喜貞)과 한 글자 ‘발음’이 같은 이호정(李鎬鼎)은 호겸(鎬謙)으로 바꿨다.

성이 달라도 이름에 한 글자라도 이 역적들과 같은 한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바꿨다. 서재필과 이름이 같은 김재필(金在弼)은 재원(在䛃)으로 개명했고 오창모(吳昌模)와 같은 김창모(金昌模)는 흥모(興模)로 개명했다. 박영효와 한 글자가 같은 방효함(方孝涵)은 두형(斗衡)으로 바꿨다. 이희정과 이름이 같은 차희정(車喜貞)은 우정(禹鼎)으로 바꿨다.

 

정변 타도 대상, 事大의 개명

 

거리에서 참수되고 토막 살해 당하는 역적들을 목격했으니, 중·하급 관리들은 행여 튈 불똥을 회피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적 낙인을 무릅쓰고 정변을 일으킨 이유도 개명과 관계가 깊다.

1866년 음력 9월 15일이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한창인 때였다. 청나라 칙사가 압록강을 넘어 한성으로 오던 중이었다. 이들을 맞는 ‘영접도감’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칙사 경로에 있는 고을과 관아 이름 가운데 경기도 홍제참(弘濟站)은 홍제참(洪濟站), 삭녕(朔寧)은 삭안(朔安)으로, 황해도 재령(載寧)은 안릉(安陵), 평안도 영변(寧邊)은 연변(延邊), 영원(寧遠)은 영원(永遠)으로, 구영진(仇寧鎭)은 구영진(仇永鎭), 숙영관(肅寧館)은 숙영관(肅永館)으로 개명했나이다.”(1866년 음 9월 15일 ‘승정원일기’)

영접도감이 개명했다는 ‘홍(弘)’과 ‘녕(寧)’과 ‘재(載)’는 각각 청나라 황제 건륭제(弘曆), 도광제(旻寧)와 동치제(載淳) 이름에 들어 있는 한자다. 감히 임명장을 내린 황실 이름을 조선에서? 아니 될 말씀이었다. 영접도감이 이리 덧붙였다. “사신들 이름 가운데 피해야 할 글자가 있으면 이 또한 바꾸라고 했나이다.”

이 칙사들은 동치제가 고종에게 보내는 ‘고명(誥命)’을 들고 오는 사신단이었다. 청나라 황제 동치제가 고종을 조선 국왕에 책봉한다는 임명장이다. 고종은 9월 24일 무악재에 있는 모화관에서 황제를 대리한 이들에게 임명장을 받았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이었다. 그 사대에 반발해 갑신정변이 터졌고, 모두 개명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척결 대상 1호였던 민영준도 이 개명 행진곡에 한몫했다. 1901년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이 부패 및 역모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민영준은 민영휘로 개명했다.(국사편찬위, ‘국역 매천야록’ 3 1901년 8. 주석면이 본관을 바꾸다)

 

 

김예나입력 2023. 11. 30. 08:03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 "문학·사상 등 다양한 자료 발굴할 것"
"'집현전' 위한 인력·예산 필요…전통문화 전문가 양성도 중요"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한문으로 된 지혜와 지식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여는 일입니다."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은 30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고전, 특히 한문 고전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말에 이같이 답했다.

김 원장은 "한자 또는 한자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공유 재산"이라며 "2천년간 쌓여온 지혜와 지식을 우리말로 바꿔 누린다면 세계적인 문화 자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대와 경희대에서 한문학을 가르치며 오랜 기간 고전 연구에 힘썼던 그는 한국고전번역원을 전통문화 계승·발전 및 연구를 위한 '현대판 집현전'이라고 했다.

1965년 설립된 민족문화추진회를 토대로 출범한 고전번역원은 그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한문 고전 3천200여 책을 번역하고 주요 문집 1천200여 종을 간행했다.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이런 학문적 성과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한 점을 언급하며 "K-문화의 바탕을 다졌다는 점에서 정말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전번역원이 해야 할 일을 100이라 한다면 30 정도는 한 것 같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서 시작했기에 많은 일을 해냈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덧붙였다.

조직을 널리 알리고 직원들의 처우 개선에 힘쓰려는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김 원장은 "고전 번역은 (작업하다가) 암초를 만나더라도 우회할 수 없는, 돌을 깨고 부수면서 해야 가능한 일"이라며 "인력과 예산이 충분히 확보돼야 연구의 영양분을 더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특히 "그간 번역·연구 방향이 주로 역사물에 치우쳐 있던 점이 아쉬웠다. 문학, 사상, 그리고 야담(野談·야사를 바탕으로 흥미 있게 꾸민 이야기) 등 다양한 자료를 발굴하고 번역해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고전종합DB [누리집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고전번역원의 부설 기관인 교육원 운영과 관련해선 "번역 전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전통문화 전문가를 양성해야 우리 고전 연구가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견해도 밝혔다.

어느덧 취임 반년, 김 원장은 "참 어려운 자리"라고 그간의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광개언로'(廣開言路), 네 글자를 늘 생각한다"며 "언로를 열어 폭넓게 듣는다는 말처럼 여러 직원을 만나 의견을 들으며 매사에 신중하게 결정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전번역원이 대중에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고전번역원이 여는 시민 대상 고전 특강이나 교육 프로그램은 지역 사회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참여도가 높지만, 아직 기관의 역할이나 이름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 원장은 대중화를 위한 방법으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언급했다.

그는 2018년 대학에서 퇴임한 이후 유튜버로 활동한 바 있다. 한자를 잘 알려드린다는 뜻의 '한잘알' 채널 구독자는 9천명 이상으로, 384개의 콘텐츠가 올라 있다.

그는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사회에 돌려드리겠다는 뜻에서 시작한 '봉사활동'이다. 한자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관심을 갖게 하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다"며 한자 교육의 필요성도 재차 역설했다.

김 원장은 고전번역원이 앞으로 해야 할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걸맞은 연구 성과를 내는 것도 과제다. 이를 위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한문을 자동으로 인식해 번역해주는 인공지능(AI) 기술을 개발하는 등 과학기술을 접목한 고전 활용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한자 문화에 담긴 지혜와 정수를 현대 국어로 바꿔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수원지(水源池)가 되고 싶습니다. 한국학의 총본산이 고전번역원의 목표입니다."

한국고전번역원 전경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승정원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 및 대한제국의 승정원에서 왕명 출납, 행정 사무 등을 매일 기록한 일기[1]이다.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음력 3월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의 기록이 현존하며, 현재는 인조와 고종 시기의 일기가 번역되어 있다.[2] 다른 이름으로는 후원일기(喉院日記)라고도 한다.

개요[편집]

승정원일기는 행정과 사무, 왕명, 출납 등을 맡은 승정원의 사무를 기록한 일기이다. 단일 사료로서는 가장 방대한 양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모두 3,245책, 글자 수 2억4250만 자이다. 1960년부터 1977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초서체였던 승정원일기를 해서체로 고쳐쓰는 작업을 하였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승정원일기 정보화사업을 진행하여 영인본 1책~111책, 127책~129책에 대한 전산화가 진행되었다.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3]

보존과 소실[편집]

승정원의 주서(注書)·가주서(假注書)는 날마다 승정원의 일기를 썼는데, 매월의 일기는 다음 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 이래의 일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1592년선조 25년) 불탔고, 1623년(인조 1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졌다. 그 후 임진왜란 이후의 일기를 개수했으나, 1744년(영조 20년) 승정원의 화재로 인해 임진왜란 직후부터 1721년(경종 1년)의 기록이 소실되어 1746년(영조 22년)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해 개수했으나 본래 책수의 3분의 1도 안 되는 양만 개수할 수 있었다. 또 영조 때의 승정원 일기 중 임오년의 일(임오화변)과 관련한 내용들은 세손의 청으로 인해 세초[4]되었다.[5] 그리고 1888년(고종 25년)에 또다시 화재로 1851년(철종 2년)에서 1888년(고종 25년)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개수했다. 그밖에 수많은 분실과 화재를 당하고 개수하기를 반복하였고, 개수 때 원본의 내용을 어느 정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평가[편집]

이 책은 당시의 공적 기록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과 더불어 드물게 존재하는 조선시대 국정의 결과에 대한 1차 사료로 그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조선왕조실록 (naver.com)

 

 

승정원일기 (naver.com)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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