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운기]

이수영입력 2022. 11. 4. 05:00
 

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 편찬된 이승휴의 역사서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책이다. 저서가 사학계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고구려사·발해사를 바탕으로 중국과 대등한 우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이다. 책은 상하 각 1책씩으로 꾸며졌다. 상권에는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와 진(秦), 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하권은 지리기(地理記), 단군의 전조선, 후조선, 위만, 삼한,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과 후삼국 및 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승휴는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 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한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책은 정치, 사회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한 의욕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가치 기준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한 원나라의 정치 간섭에 대한 불만이 이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최근 민족 대서사시인 ‘제왕운기’가 이탈리아어로 번역·출간돼 주목을 끌고 있다. 안양대 마우리찌오 리오또(Maurizio Riotto) 교수는 최근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를 번역해 ‘한국의 서사시(Poesia epica della Corea)’라는 제목의 도서를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책은 이승휴 선생의 일생을 소개해 저술 배경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제왕운기가 외국어로 처음 편찬돼 한국사의 정통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삼척 쉰움산 자락에 있는 천은사는 저자가 용안당을 지어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쓴 유서 깊은 사찰이다. 삼척에서는 매년 이승휴 선생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외국어 번역본 탄생을 계기로 천은사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의 민족정신과 저서의 문학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수영 논설위원

 
기자입력 2022. 11. 28. 14:16수정 2022. 11. 28. 14:22

안양대학교(총장 박노준)는 신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단의 마우리찌오 리오또(Maurizio Riotto) 교수가 이탈리아어로 <해동고승전> 및 <제왕운기> 번역서를 출간했다고 28일 밝혔다.

마우리찌오 리오또 교수가 이탈리아어로 출간한 <해동고승전>과 <제왕운기>.


한국 불교 고승들의일대기를 다룬 <해동고승전>과 단군신화가 들어 있는 한국 고대 역사서사시 <제왕운기>가 유럽에 번역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안양대 신학연구소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단에서 동서교류 문헌 연구에매진하고 있는 리오또 교수는 1985년 문교부(현 교육부) 연구생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연구했고, 석촌동 고고학 발굴에 참여했으며 이탈리아로 돌아가 국립 로마대학교에서 ‘한국의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그 후 1990년부터 2019년까지 나폴리 동양학대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 및 문학을 가르치며 한국학 관련 학자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리오또 교수의 한국 문화사에 대한 관심은 고전문학 연구로 이어져서 <한국청동기시대> <한국어입문> <한국문학통사> <한국사 > 등 저서를 출간했고, 이후 <삼국유사> <왕오천축국전> <구운몽> < 홍길동전> 등 한국 고전 30여 권을 이탈리아어로 번역·출간했다 .

마우리찌오 리오 교수


특히 그의 저서는 스페인어로까지 번역 출간, 한국 고전을 유럽 여러 나라로 전파되는데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생활경제부

 

 

입력 2022. 10. 4. 11:50

[홍춘봉 기자(=삼척)(casinohong@naver.com)]
삼척시와 (사)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는 제44회 이승휴·제왕운기 문화제의 일환으로 고려 충렬왕 13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며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동안 이승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제722주기 동안대제를 지난 3일 천은사 내 동안사에서 개최했다.

(사)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대표 최선도)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박상수 삼척시장, 정정순 삼척시의회 의장과 각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했다.
▲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가 주관한 제722주기 동안대제가 지난 3일 천은사 내 동안사에서 박상수 삼척시장, 정정순 삼척시의회 의장과 각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제 진행되고 있다. ⓒ삼척시

아울러, 제722주기 동안대제를 시작으로 올해로 제44회를 맞는 ‘이승휴·제왕운기 문화제’가 오는 16일 죽서루 경내에서 열린다.

‘이승휴·제왕운기 문화제’는 이승휴 선생의 사상과 민족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제39회 동안 이승휴 백일장을 비롯해 제4회 동안 이승휴 사생대회, 제왕운기 탁본체험과 2021년에 개최하였던 백일장·사생대회·온라인 사행시 짓기대회에 대한 작품전시회 등이 진행된다.

 

시는 이번 문화제를 통해 이승휴 선생이 삼척에서 민족의 대역사 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저술했다는 것을 홍보하고 이승휴 선생의 얼을 선양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지난 3일부터 12월 30일까지 2022년도 국비공모사업에 선정된 종교문화여행 치유순례 프로그램 지원사업 ‘이승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나를 찾는 종교문화여정’이 관내 천은사, 이승휴 유적지, 성내동 성당, 하가교회, 죽서루, 영경묘, 활기 치유의 숲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프로그램 운영은 (사)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에서 주관하며 명상길 걷기, 차담회, 참선 체험, 전문가 특강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치유순례 프로그램은 당일 체험 프로그램 4개 코스 10회, 1박 2일 프로그램 2개 코스 4회, 봉사체험활동(3일) 프로그램 1개 코스 1회 등 총 7개 코스 15회로 구분해 운영된다.

모집인원은 회당 30명(선착순)이며 프로그램 참가를 희망하는 자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주간 목요일까지 신청하면 되며, 기타 자세한 사항은 삼척시청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참고하면 된다.

시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의 종교문화를 알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고, 현대인들의 소외, 갈등 등을 풀어낼 것을 기대하고 있다.

[홍춘봉 기자(=삼척)(casinohong@naver.com)]

 

 

입력 2021. 8. 25. 15:03

이승휴 선생의 업적과 사상 선양 홍보

[홍춘봉 기자(=삼척)(casinohong@naver.com)]
삼척시가 동안거사 이승휴 선생의 사상을 선양하며, 향토문화 유적의 보존․전승으로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추진한 이승휴 제왕운기 문화제사업으로 (사)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이사장 최선도)와 함께 ‘제왕운기의 산실, 천은사’(김도현 저)를 발간했다.

저자인 김도현 문학박사는 천은사를 이해하는 데 사용된 다양한 사료와 유물·유적 분석 등을 통해 천은사의 연혁과 역사성, 복장유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시도해 전통사찰로서의 천은사의 역사적 의의가 재조명되기를 원했다.

▲제왕운기의 산실 천은사 표지. ⓒ삼척시

특히,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이승휴 선생이 10여 년 이상을 천은사에 머무르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유서 깊은 사찰이라는 면에서 역사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다.

삼척시 관계자는 “문화체육관광부, 강원도청, 관내 유관기관 및 공공도서관 등에 본 신간을 배부해 동안거사 이승휴 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선양하는데 홍보할 계획”이라며 “(사)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와 함께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지의 보전·전승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춘봉 기자(=삼척)(casinohong@naver.com)]

 

 

입력 1999. 6. 21. 18:54수정 1999. 6. 21. 18:54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고려말 유학자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제왕운기(帝王韻紀))는 단군에서 시작되는 유구한 한국역사를 중국역사와 비교하면서 유려한 칠언오시(七言五詩)로 읊은 기념비적인 장편 서사시로 꼽히고 있다.

이 책은 고려중기 이규보(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동명왕편(東明王篇))과 함께 우리 문학사에서 장편 역사시의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소외됐던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의미도 대단히 큰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지금 전해지고 있는 이 작품이 이승휴가 1287년 완성해 충렬왕에게 바친 원본「제왕운기」가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의해 대폭 삭제되거나 보태진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계명대 이종문(李鍾文) 교수는 최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고려시대 역사시 연구」라는 논문집에 발표한 `제왕운기의 원전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이라는 글에서 현존하는「제왕운기」가 대폭 첨삭됐다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무엇보다 편찬자인 이승휴 자신이 말한 「제왕운기」와 현존 「제왕운기」가 일치하지 않음을 주목하고 있다.

즉 이승휴는 중국과 한국역사를 각각 상,하 두권으로 나눠 읊은 이 작품이 상권의 경우 반고(반고(盤古))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마지막왕인 애종(哀宗)까지 중국역사를 서술했다고 곳곳에서 밝히고 있음에도 현존 「제왕운기」는 금나라 뒤에도 원(元)나라와 남송(남송(南宋))의 역사까지 모두 20구 140자나 더 붙어있다.

또한 이 작품 상권 머리말에서 이승휴 자신은 상권이 대략 2천370자라고 하고 있음에도 현존 「제왕운기」는 모두 2천436자로 66자가 더 많았다.

이런 사정은 한국역사를 서술한 하권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도 마찬가지라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이승휴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이 연대기는 1천460자가 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이보다 238자나 많은 1천694자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역사를 다룬 제왕운기 하권 중 고려 역대왕들의 업적을 담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 또한 이승휴가 말한 700자보다 무려 110자나 많은 810자나 되었다.

 

이 교수는 이런 점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제왕운기」가 후대에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대폭적인 수정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증거로 앞으로 「제왕운기」 연구는 원전으로 되돌아 가야할 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런 주장에 대해 이우성 민족문화추진위원장은 "지금까지「제왕운기」 원전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면서 "그러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진 있음)

taeshik@yonhapnews.co.kr

 

제왕운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년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로 쓴 역사책이다.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으며, 단군부터 고려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기술했다. 공민왕 9년(1360년)과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각각 다시 간행되었다.[1] 오늘날 유포된 책은 이 3간본을 영인(影印)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아래의 천은사(天恩寺)에서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성[편집]

《제왕운기》는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중국의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의 역대 사적을 264구(句)의 ‘칠언시(七言詩)’로 읊었고, 하권은 한국의 역사를 다시 1·2부로 나누어, 시로 읊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제1부에는 지리기(地理記)와 전조선(前朝鮮)·후조선·한사군·삼한·신라·고구려·백제·발해와 후삼국을 264구 1,460언의 칠언시(七言詩)로 기술하고 있으며, 제2부는 고려 초부터 충렬왕 때까지를 ‘5언시’(五言詩)로 기록하였다. 제1부에 있는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최초의 역사서이다.

편찬 및 간행본[편집]

《제왕운기》의 편찬 목적은 고려와 서토(중국)와의 지리적·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고려인은 한족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골(몽골족)의 정치적 간섭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은 중국사와 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하고 한민족이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또한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본[편집]

권말의 발(跋)과 후제(後題)를 보면 초간은 이승휴가 생존해 있던 원정 연간(元貞年間, 1295년1296년)에 진주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책은 고려 공민왕 9년(1360년)에 경주에서 중간된 것으로 인쇄상태로 보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후쇄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권 상의 제18장, 권 하의 제6·7·8·16장이 결락되어 필사로 채우고 있으나, 곽영대 소장본(보물 제418호)과 인쇄상태가 완전히 일치하는 동시에 발문과 후제가 모두 갖추어져 있어 서지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

입력 2023. 1. 25. 15:38수정 2023. 1. 26. 14:49

사진은 <평생도 8곡병> 중 과거 급제 장면. ‘전설의 고려 일타강사’는 고려 충렬왕 때 제자 10명을 한꺼번에 급제시킨 강경룡이라는 인물이었다. 130여년이 지난 조선조 세종 연간에서도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조정에서 공론화된다.|국립중앙박무관 소장

 

“(개성 용산동)…모퉁이에 한가로운 이 집을 지었는데…모든 선비들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어 공부에 뜻을 갖고….”

고려의 천재 문인이자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시(‘진수재·晉秀才)의 별장에 붙이다’)입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뒤따릅니다.

한마디로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진씨 성을 갖고 있는 진사 혹은 생원급 ‘일타강사’였던 것 같습니다. ‘진수재’ 같은 고려시대 ‘일타강사’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보입니다.

‘진수재’를 소개한 이규보 역시 학창시절 당대의 ‘일타강사’에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고려시대부터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기에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과거급제를 위해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를 이어 고액과외 받은 이규보 부자

이규보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개성의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영재였습니다.

그런 이규보는 1183년(명종 13)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를 코 앞에 두고 족집게 고액과외를 받았습니다.

“공(이 이부)은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이규보)도 지난 묘년(1183·계묘년)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

무슨 얘기냐면 이규보는 그 해(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이때 아버지(이윤수·1130~1191)가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 이규보에게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을 붙여주었습니다.

이규보의 시에 “묘(卯)년에 이 이부라는 분한테 배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1183년이 바로 계묘년이었거든요.

‘1183년 이규보의 과외선생=이 이부’였다는 예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규보의 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에 나타나있는데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大丈)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겁니다.

“신대장은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여기서 ‘대장(大丈)’이라는 직책이 흥미로운데요.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장은 고려시대 죄인의 처벌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잡류직’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신 대장’의 신분은 일종의 구실아치(관청에 딸린 하급관리)였던 겁니다.

얼마나 유명한 ‘일타강사’였으면 그렇게 낮은 신분에도 천하의 이규보가 가장 아낀 아들을 가르쳤을까요.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풍자하는 풍속화이다. 과거 급제를 위해 온갖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안산시 소장

 

■고려~조선을 들썩이게 한 레전드 강사

그런데 고려시대 대표적인 ‘일타강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명성이 후대의 조선조까지 알려진 ‘전설의 강사’였는데요.

이름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에까지 등장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사>를 우선 볼까요.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 곡식을 내려주어라.”(<고려사> ‘세가·충렬왕’조)

때는 바야흐로 1305년(충렬왕 31)의 일입니다. 충렬왕(재위 1274~1308)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실렸는데요. 대체 벼슬에 오르지도 못한 유생(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요.

<고려사>와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이유가 나오는데요.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다.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쳇말로 ‘강경룡 학원’의 소속학생 10명이 한꺼번에 과거(국자감시)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격생들이 스승(강경룡)의 집에 찾아와 하루종일 마을이 떠나가도록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에 살던 종친(익양후 왕분·생몰년 미상)이 왁자지껄한 소리에 자초지종을 파악한 뒤에 이를 임금(충렬왕)에게 고했다는 겁니다.

이에 익양후의 보고를 들은 충렬왕이 강경룡을 크게 치하하면서 곡식을 내려주었다는 겁니다.

고려시대엔 공교육을 맡은 국자감 말고도 개인이 개경에 세운 12공도, 즉 12개 사학이 유명했다. 그중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다. 천재문인 이규보도 그 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조 세종까지도 칭찬한 고려 ‘일타강사’

그런데 1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가 들어섰는데도 ‘강경룡 사례’가 ‘워너비’로 칭송 받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죠. 당시 지성균판사 허조(1369~1439)가 세종대왕 앞에서 갑자기 ‘강경룡’이라는 인물을 소환합니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옵니다.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법(<육전>)에 따라 특별포상 하신다면….”(1436년 10월8일)

이 무슨 말일까요. 허조는 “고려시대부터 한량·유생들이 서재(서당)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들어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개인이 서당을 시행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허조는 교육의 혜택이 고루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개국초임을 강조했습니다. 허조는 조정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혹은 사설학원의 설립을 장려하자는 취지로 상소문을 올린 겁니다. 세종은 허조의 상소에 따라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습니다.

고려 최고의 천재 문인인 이규보도 1183년 과거(국자감시)를 앞에 두고 이이부라는 족집게 과외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고려 12대 명문사학

이러한 사교육 열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시대부터’ 예를 들어보죠.

교과서에 배웠듯이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992년(성종 11) 창설된 국자감이었죠.

국자감은 1123년(인종 1)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구요.

그런데 국자감 교육에는 신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거든요. 그렇기에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다른 문을 두들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방 향리 가문 출신인 이규보가 ‘사학(문헌공도)’를 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중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개경에 설립된 ‘십이공도(十二公徒)’입니다. 명문 사학 12개 학교는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홍문공도, 노단의 광헌공도, 김상빈의 남산공도, 김무체의 서원도, 은정의 문충공도, 김의진의 양신공도,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고려사> ‘선거지·사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습니다. 이규보가 입학한 바로 그 학교죠.

“1155년(문종 9) 설립한 문헌공도에 양반의 자제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반을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얼마나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까지 했을까요. <고려사>의 구절이 가슴에 와 닿죠.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고싶은 대학, 가고싶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다는 얘기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을까요.

1481년(성종 12) 5월27일 성균관 진사 이적(생몰년 미상)의 한마디가 고금을 초월한 ‘일류병’을 상징적으로 일러줍니다.

“지금 인재선발은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재주가 없다(비재·非才)’고 낙인찍고 으레 ‘별볼일 없는 관리(속리·俗吏)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진수재(晉秀才)’라는 시쳇말로 당대 사설학원의 강사를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내용이다.

 

■문헌공도의 여름철 ‘모의고사’

각설하고 ‘과거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니 과거급제를 위한 교육이 극성을 떨었죠.

특히 최고의 명문이라는 ‘문헌공도’의 교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정식 학기철은 물론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인근 사찰(귀법사 등)을 빌려 50일간 이른바 ‘하과(夏課·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습니다.

문헌공도 출신 선배들이 특별강사로 초빙되었구요. ‘하과’의 특별시험 중에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해서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는데요. 이런 시험을 불시에 치른다고 해서 ‘급작(急作)’이라고 했죠.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구요.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겁니다.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는 다른 사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답니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는 등의 기사가 보입니다. 문헌공도와 같은 사립학교에서 이렇게 극성을 떠니 국립학교는 가만 있었겠습니까.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답니다.(<목은집>)

그래도 생각해보면 ‘하과’는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에 만족할 교육열이 아니었습니다. 이규보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던 이들은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았으니까요.

이규보는 셋째아들(이징)의 개인교습을 ‘신 대장’이라는 과외선생에게 맡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시로 표현했다. 이규보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겠냐”고 사례했다.

 

■실패로 돌아간 일타강사의 과외

그렇다면 ‘사교육 열풍’은 과거를 위해, 출세를 위해 언제나 옳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장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최고 명문인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1등을 차지한 이규보의 예를 들어볼까요. 앞서 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코 앞에 두고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이 이부)를 붙여주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나 이규보는 그렇게 특별 과외를 받고도 그 해 시험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이규보는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낙방을 거듭한 끝에 4번째 도전에서 겨우 급제했습니다. 이규보 같은 천재라도 ‘일타강사’의 족집게 과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마침 고려를 풍미한 사교육 열풍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평가한 분도 있네요. 조선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의 <금계집>은 최충의 문헌공도를 ‘디스’하고 있는데요.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치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세상에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 그러나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속속 파고들어 깊에 연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경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황준량은 과거시험준비에만 몰두하느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참교육을 행하지 못한 고려의 사학을 개탄했던 겁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입력 2021. 5. 12. 03:06수정 2021. 5. 12. 03:36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활동
관직 얻는데 인맥 중요했던 시기.. 당시 저술한 고구려 왕 일대기
벼슬 얻기 위한 글이라는 해석.. 관직 얻은 후 승승장구 했으나
정권 맞춤 글쓰기로 비판 받기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동아일보DB
 
이규보(1168∼1241)는 무신정권 시기에 시인, 수필가,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성품이 활달하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며, 시문을 짓되 옛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공부하여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혀있습니다. 열전은 이규보를 자유분방한 문학인, 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 활동을 관료 임명 이전과 이후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무인에게 관직 구하는 시를 쓰고 ‘동명왕편’ 저술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 22년) 평범한 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을 전후해 시를 지은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성명재에서 과거를 준비했습니다.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과거는 여러 차례 낙방했습니다. 무신정권 시기에 치른 과거라 합격하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집권자와의 연결이 중요했지요. 또 그는 선천적으로 형식에 맞춘 글을 멸시했습니다.

이 시기 이규보는 ‘죽림고회’라고 부르는 문학인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죽림고회’는 무신정권 시기 관직을 떠나 시와 술을 즐기는 문학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과 어울리는 영광을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계속 은둔생활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대 초반이던 1190년에 과거에 합격했지요. 당시에는 이의민이 집권한 시기였고, 과거에 합격했다 할지라도 관직에 임명되기 어려웠습니다. 집권자가 불러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집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를 써서 바치던 시대입니다. 관직을 준비하는 사람, 세상을 등진 초야의 학자 모두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규보는 25세부터 32세까지 관직을 구하는 시를 지으며 집권자가 불러주길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고 막막했던 그는 25세이던 1193년에 ‘동명왕편’을 저술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일대기를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했습니다. 그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현재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유교적이고 신라사 중심인 ‘삼국사기’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외적이 침략하는 시기에 민족의 자부심과 침략에 대한 항거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이지요. 세 번째는 집권자와 집권자의 측근 세력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주몽의 일대기는 무인들의 영웅 서사시이고 집권자와 민중 모두 공감하기 좋은 소재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무인들에게 소용 가치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무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저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국정 총괄

고려의 문인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묘역. 동아일보DB
 
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규보는 1199년 최충헌이 개최한 시 모임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관직은 전주지방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사록겸장서기(7품)였습니다. 관직의 대가로 받는 봉급은 적었고 행정 잡무마저 번거로운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 관리들의 중상모략으로 관직 생활이 고통스러웠고 결국 1년 4개월 만에 동료들의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도 관직을 구했건만 초임지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거죠. 이후 끊임없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을 통해 관직에 복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규보는 1207년 최충헌이 여러 학자를 초빙해 개최한 백일장에서 ‘모정기’라는 글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모정기’의 마지막 구절은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누가 지었겠는가/우리 진강후(최충헌을 일컬음)의 어짐이로다./잔치를 베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노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였습니다. 최충헌에 대한 노골적인 예찬을 담고 있어 비굴해 보입니다만 최충헌은 이 글을 보고 칭찬하면서 드디어 직한림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규보는 1219년 최우가 집권한 이후 관직 생활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1232년 강화 천도를 찬성하고 몽골과의 전쟁 중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실질적인 국가 업무를 총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몽골 천도에 대해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청하(최우 정부를 일컬음)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고려는 벌써 오랑캐 땅 됐으리”라고 하면서 최우의 강화 천도를 찬양했습니다.

이규보는 몽골과의 전쟁 시기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습니다. 몽골이 쳐들어오면 철수를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몽골이 그 대가로 수달피나 고려인을 바치라고 하면 그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무신정권 시기 지식인의 유형은 초기부터 도피 유랑한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지방에서 유학자의 삶을 산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개경으로 돌아와 관직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한 사람, 무신정권 초기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거나 최씨 무신정권을 위해 관직에서 일한 사람 등으로 나뉩니다. 이규보는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이규보는 60대 중반 이후 강화도에서 관직 생활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언제나 속마음은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국왕보다 무신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략 속에서 나라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의 삶은 비참했으니 고통이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강구열입력 2020. 1. 28. 02:02

한국사 최초 장편 서사시 창작 배경은 / 관료 아버지 사망·결혼 후 식구 늘자 / 넉넉한 삶에서 생계 걱정하는 신세돼 / 유학자들이 떠받드는 中 신화 끌어와 / '고려는 성인이 이루어 낸 왕조' 강조 / 무신정권서 고주몽 소재로 관심 끌어
훗날 고려의 대문호로 이름을 날릴 것이나 26살(1193년)의 이규보는 밥벌이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어렵게 과거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은 쉬 열리지 않았고, 정치적·학문적 후원자로 여유로운 삶을 뒷받침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낳고 보니 호구지책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규보는 이런 상황에서 동명왕(주몽)을 주인공으로 고구려 건국신화를 노래한 ‘동명왕편’을 세상에 내놨다. 스스로 밝힌 창작의 동기에는 결기가 넘친다.

“동명왕의 이야기는…실로 나라를 세운 신이한 자취이니…이에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이 이룩한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팍팍한 현실에 주눅이 들었을 법도 한 ‘생활인 이규보’와 원대한 포부를 가감없이 드러낸 ‘지식인 이규보’. 동명왕편을 번역하고, 주석 및 해설을 달아 최근에 발간된 ‘동명왕편-신화로 읽는 고구려의 건국 서사시’는 어딘가 상반되어 보이는 그의 이 두 가지 정체성이 문자로 전하는 한국사 최초의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이라고 설명한다.
고려의 정치인이자 문인인 이규보의 표준영정.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통해 고려가 중국에 못지않은 ‘성인의 나라’임을 천명했다.
 
◆“성인이 이루어 낸 왕조임을 알리고 싶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명왕편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지금이야 이런 형식의 이야기가 가진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지만 이규보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신화란 황당하고, 기괴한 것이어서 언급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공자의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괴이하고, 힘세고, 어지럽고, 귀신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이란 언급은 유학자들에게는 ‘금과옥조’였다. 스스로 유학자이기도 한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짓는 논리적인 근거, 창작의 정당성을 분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유학자들이 성인으로 떠받드는 중국의 신농씨, 복희씨, 요순 임금 등의 신화를 끌어온다. “하늘에서 좁쌀이 떨어져 신농이 마침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느니 “요가 어진 임금이 되니 하루에 열 가지 상서로움이 나타났다” 같은 이야기를 동명왕편의 첫머리에 배치했다.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하고 있는데 동명왕의 신이한 이야기가 무슨 문제냐, 고 반문한 것이다. 또 동명왕과 비슷한 시대를 살며 왕조를 열었던 한고조 유방, 후한의 창업자 유수의 탄생과 성공에 부응한 상서로운 징조들을 글의 말미에서 밝혔다. “이규보는 주몽을 이들과 동궤에 놓아 천명의 신성함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실재성을 강화하려는 수법을 구사한” 셈이다.

이규보는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읽고 난 뒤 “동명왕의 신화를 밝은 세계로 이끌어내는 시적 결단을 감행”하며 “‘저들이 중화면, 우리도 중화’라는 강한 집단적 자부심”을 드러내는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이나 거듭 음미하면서 점점 그 근원을 찾아들어가니, 환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인천 강화군에 있는 이규보의 묘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직을 위해 창작된 동명왕편

책은 그러나 “(동명왕편의) 서문에 명시된 창작 동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 수는 없다”며 동명왕편 창작의 이면을 파헤치는데, 여기서 ‘생활인 이규보’의 면모를 소개한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지금의 경기 여주 중소지주로 수도 개경에까지 진출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관료였다.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던 덕에 그는 “현실에 대한 관조와 비판, 그리고 현실도피라는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결혼 등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동명왕편을 짓던 그 해(1193년), 예부시랑 장자목이 자신을 추천할 것이란 소문을 듣고 구직을 부탁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장자목 시랑께 바침’이란 제목의 이 장편시에는 “명성은 벼락을 놀라게 할 듯 도량은 강호를 품은 듯”이라는 낯간지러운 찬양까지 등장한다. 연이어 나온 것이 동명왕편이었다. 책은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를 복합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동기가 강했을 것”이라며 “동명왕편을 ‘구관시’(求官詩)의 하나로 보는 시각은 정곡을 짚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욕구를 감안하더라도 왜 하필 유학자 관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책은 “무신들이 정권을 좌우하던 시기에 성장한 그로서는 무신들도 좋아할 만한 소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며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임했던 고려 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력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고주몽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적절한 소재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가 ‘성인의 나라’임을 밝힌 부분에서는 중국 왕조에 못지않다는 당시 고려 지식인들의 문화적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이규보의 이 같은 인식은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에서도 표현된다. 제왕운기의 첫머리는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중화인들이 소중화라 이름 지었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입력 2018. 7. 3. 03:36

(12)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서울신문]“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

후덕한 인상의 이규보 초상화. 시와 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삶을 보여 주는 듯하다. 서울신문 DB

 

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긴 기다림 끝 명예 얻었으나…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찍부터 문재를 드러냈지만 과거에 몇 차례 낙방했다. 23세에 급제한 후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구직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했다. 32세인 1199년 6월 비로소 전주목 사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1202년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부 녹사 겸 수제원으로 종군해 1204년 3월 개선하는 군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해마다 첫 번째로 추천을 받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관직을 얻지 못했다.

 

1207년 한림이 된 이후에야 중앙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랫동안 국가의 문장을 담당했다. 재상의 반열인 종1품까지 승진해 1237년 70세로 치사했다. 63세에 잠시 부안의 위도로 귀양 간 일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할 만하다.

이규보의 관직 진출과 승진에는 당대의 권력자인 최충헌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한림이 되기 전 최충헌이 모정(茅亭)을 짓자 이인로 등과 함께 불려가 ‘모정기’를 지었다. 이보다 앞서 1199년 첫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도 최충헌의 집에 불려가 시를 지었다. ‘동사강목’에서는 최충헌과 관련된 이규보의 이러한 행적에 관해 “최씨에게 아첨해 사론의 죄를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규보 생전에 ‘권력자에게 아부했다’는 비방과 조소가 뒤따르는 계기가 됐다.

인천 강화군 길상면 진강산 기슭에 자리한 이규보 묘소.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기 전 사망한 이규보는 강화에 묻혔다. 석양과 문인석 등 당시 석물이 남아 있다. 묘비와 상석, 장명등, 망주석은 후대에 세운 것이다.

 

#천마산의 백운거사

이규보는 18세 때 53세의 오세재와 망년지우가 돼 이인로, 오세재, 임춘 등과 ‘칠현’(七賢)이라 자칭하며 모인 죽림고회에 동참해 시와 술에 침잠했다. 과거에 급제했지만 곧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규보는 부친상을 계기로 천마산에 은거해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백운거사어록’에서는 “거문고와 술, 시 세 가지를 매우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고 싶지만, 좋아하기만 하고 잘하지 못하므로 백운의 장점을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규보는 운(韻)을 부르자마자 나는 듯이 붓을 달려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술에 취하면 시는 더욱 거침없어져 ‘만취한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지은 장편 율시에 한 글자도 고칠 것이 없다’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남다른 재능과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솜씨로, 한림별곡에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로 남아 있다. 훗날 술 마시고 하는 시 짓기 내기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젊은 날에 지은 시 300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술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술이 없으면 시도 내키지 않고

시가 없으면 술도 시들해

시와 술이 모두 좋으니

서로 걸맞고 서로 있어야 하네

손가는 대로 시 한 구 짓고

입 당기는 대로 술 한 잔 마셨지

-‘우연히 읊다’

나이 벌써 일흔을 넘었으며

벼슬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이제는 시 짓기를 버릴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밤에도 부엉이처럼 읊노라

-‘시벽’

이규보 묘비. ‘고려 이상국 문순공 하음백 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고 써 있다. 묘소를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묘비를 새로 세우면서 우측으로 옮겨 묘소 전경 사진의 망주석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미친 세밀한 눈길

이규보의 시 가운데에는 가족과 주변 사물을 노래한 것이 많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세밀한 관찰 결과가 담뿍 담겼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무거운 짐을 지고 매를 맞는 소, 거미줄에 걸린 매미, 고양이, 쥐 같은 동물이나 밤이나 햅쌀 같은 식물 그리고 몽당붓이나 깨진 벼루에도 고루 향했다. 이는 아무래도 오랜 기간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미친 결과가 아닐까. 밤을 노래한 시에서 ‘밤은 사람에게 유익한 과일인데 밤을 노래한 시가 적어서 짓는다’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했다.

 

잎은 여름철에 돋고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방울 틈처럼 쩍 벌어지면

윤기나는 알밤 감싸고 있네

제사상에 대추와 함께 올라가고

신부의 폐백에 개암과 함께 놓였네

오는 손님 대접만 하는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지

-율시

사람은 하늘이 만든 물건 훔치는데

너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치누나

다 같이 먹고살려 하는 일이니

어찌 너만 나무라랴

- 쥐를 놓아주다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권3의 주몽 설화를 주제로 한 서사시다. ‘구삼국사’ 내용을 원주로 기록해 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는 근거다.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역사로 남은 시

천마산에 은거하던 20대의 이규보는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동명왕편’ 등 장편 시를 남겼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중략/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라고 구체적인 창작 동기를 언급했다. 또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주석으로 밝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나마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사의식 덕분이다.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살 때보다 팔 때 더 받은 집값을 돌려준 노극청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극청전’이나 나룻배를 타면서 겪은 일을 적은 ‘주뢰설’은 청렴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당대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의 발로다. 산문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소재로 지은 시들도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 준다.

 

화계에서 찻잎 따던 때를 이야기하세

관리들 집집마다 늙은이 어린이 되는 대로 찾아내어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 아슬아슬 손을 뻗어

멀고 먼 서울까지 등짐 지고 날랐다네

이것이 바로 만백성의 고혈이라

수많은 사람 피땀 흘려 예까지 이르렀네

그대 훗날 간원에 들어가거든

부디 내 시의 은미한 뜻 기억하게나

산과 들 불살라 차 공납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콘텐츠 실장

동국이상국집 목판본 표지. 조선 영조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이상국집 표지다. 표제는 ‘이상국집’(李相國集)으로 돼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 동국이상국집은

현전 본은 日서 구해 영조때 간행… 2000여 수의 시·표전·교서 수록

1241년 완성돼 그해 8월에 간행에 착수했지만, 이규보는 9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함이 시문을 추가하고 ‘연보’, ‘묘지명’ 등을 더해 12월 53권 14책으로 간행됐다. 1251년 손자 이익배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중간했다.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잃어버린 것을 일본에서 구해 와 지금 다시 간행했다’는 내용이 ‘성호사설’에 기록됐다. 영조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여수의 시와 왕명을 받아 지은 표전, 교서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수록됐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사시 ‘동명왕편’, 가전체의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 시화 ‘백운소설’ 등이 있다. 또 재조대장경 판각 경위를 밝힌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과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신서상정예문발미’ 등 중요한 사실을 전하는 글도 포함됐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번역문을 이용할 수 있다.

 

 

입력 2016. 1. 20. 09:05수정 2016. 1. 21. 08:53

금속활자 직지 복원 완료, '동국이상국집'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복원

금속활자 직지 복원 완료/사진=연합뉴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약칭 직지) 복원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청주시는 18일 청주 금속활자주조 전수관에서 올해 직지 금속활자 복원사업 착수 보고회를 열고, 마지막 복원 작업에 들어섰다고 밝혔습니다.

직지 상권 26∼39장까지 14판을 복원하면 직지금속활자 복원은 5년 만에 상·하권 모두 마무리됩니다.

 

앞서 시는 2011년부터 '고려시대 금속활자 복원사업'을 추진, 지난해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직지 하권 39판을 완료하고 원본이 남아있지 않은 상권도 25장까지 복원했습니다.

시는 직지뿐 아니라 '동국이상국집'과 '남명천화상송증도가'도 각각 한 판씩 복원하고, 그동안 복원한 78판을 모두 인출해 책으로 엮을 계획입니다.

이번 사업은 충북도와 문화재청에서 총 18억1천만원을 투입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금속활자 복원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 임인호씨 전통 주조법인 '밀랍주조법'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 직지는 원래 상·하권으로 만들어진 책이었으나 현재는 하권 2장부터 39장까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습니다.

 

 

강신욱입력 2010. 11. 19. 15:20수정 2010. 11. 19. 15:20

【청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19일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증도가)는 물론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현존하지 않는 '상정예문(詳定禮文)' 모두 자신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라고 공개한 '증도가자(證道歌字)'로 인쇄했다고 주장했다.

남 교수는 이날 오후 청주대에서 열린 서지학회 추계 학술발표회에서 '증도가자와 동국이상국집'이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를 제시했다.

 

남 교수는 현존본인 동국이상국집 분사대장도감판(分司大藏都監版) 계통의 번각본을 분석한 결과 "증도가의 글자와 같은 유형을 보이고 증도가의 글자와 크기가 같다"고 강조했다.

그는 ▲'증도가자'에 없는 작은 글자 사용 ▲약자, 이체자(異體字 )의 쓰임이 같다 ▲조판은 계선(界線)이 없고 같은 줄 내에서 글자의 겹침이 없다는 등을 분사대장도감판 번각본의 특징으로 들었다.

남 교수는 "1232년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할 때 증도가를 찍었던 금속활자를 함께 옮겨왔지만 증도가의 경우 간행 규모가 작고 널리 오래 전하고자 목판으로 찍는 것을 선호했다"고 밝혔다.

이어 "옮겨온 활자를 이용해 내용이 많았던 상정예문을 필요한 수만큼 찍어 여러 부서에 배포했고 동국이상국집은 신속하게 찍어낼 목적으로 전집(全集)을 같은 활자로 조판하고 찍어냈다"고 덧붙였다.

남 교수는 "이번에 발견한 고려활자(증도가자)가 증도가를 찍은 활자며 증도가, 상정예문, 동국이상국집 등 3책은 모두 같은 활자로 찍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증도가자'는 활자의 좌우 측에 날개와 같이 작은 돌출부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형태다. 이는 개성에서 만든 초기의 형태와 강화도에서 분량이 많은 두 책을 찍을 때 부족한 활자를 보주(補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동국이상국집은 53권(전집 41권, 후집 12권) 13책으로 구성된 시문집으로 1241년(고종28)에 전집이, 1242년에 후집이 간행됐다.

 

동국이상국집 후집 11권 서(序)에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나와 금속활자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이규보가 진양공(晉陽公)에 책봉된 최이(崔怡·?~1249)를 대신해 지은 동국이상국집의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에는 상정예문이 오랜 세월 지나면서 책장이 없어지고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워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崔忠獻·1149~1219)이 2부를 보완·제작해 1부는 예관에, 다른 1부는 자기 집에 뒀다.

그뒤 몽골의 침략으로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미처 챙기지 못했으나 다행히 최이의 집에 보관된 1부를 주자(鑄字·금속활자)를 사용해 28부를 인쇄하고 여러 관사(官司)에 나눠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命之曰詳定禮文…遂用鑄字 印成二十八本 分付諸司藏之…).

남 교수는 "상정예문 간행 시기는 책을 대신 저술하도록 한 최이가 1234년 진양후에 책봉됐고 1241년 이규보가 죽은 것으로 보아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서는 남 교수 외에 ▲'제중신편' 현존본의 서지적 연구(이정화 한국한의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충주 충열사의 소장 유물에 관한 연구(박문열 청주대 교수) ▲'어제비장전(御製秘藏銓)' 대장경 판본의 문자 이동(異同)과 교감(유부현 대진대 교수) ▲금속활자의 옹기토를 이용한 밀랍주조법 실험 연구(조형진 강남대 교수)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ksw64@newsis.com

 

 

윤석만입력 2023. 8. 21. 00:46수정 2023. 8. 21. 08:37

중화주의 오명 조선 ‘혼일강리도’ 재평가 움직임

윤석만 논설위원
 
1402년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에 파리(法里·법리)와 로마(剌沒·라몰)가 정확히 표시돼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아프리카의 해안선과 나일강의 수원(水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으면? 이 모든 궁금증을 한 번에 불식시키는 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강리도)’이다. ‘혼일강리’는 혼연일체의 강역이란 뜻으로 몽골의 세계상을 지칭하며, ‘역대국도’는 역대 국가의 도시라는 의미다.

대한지리학회장을 지낸 양보경 전 성신여대 총장은 강리도에 대해 “아프리카 대륙이 제 모습을 갖춘 칸티노 세계지도(1502년)보다 100년 앞서 아프리카 대륙을 사실적으로 그린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유럽·이슬람의 지리학과 몽골제국의 세계적 시야, 한민족의 지적 능력이 융합된 세계적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 서구·일본은 찬사, 한국선 왜곡
중국 과장 이유 ‘사대주의’ 평가

NYT “당대의 가장 완벽한 지도”
정화의 원정보다 10여년 앞서

원본 없고, 4개 사본만 일본에
다음달 2일 지도의 날 제정 기념

하지만 강리도는 오랫동안 중화주의의 소산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여러 역사교재와 대중서적 등이 강리도를 사대주의의 표본으로 삼는다. 이 같은 인식을 바로잡고자 최근 학계에서는 강리도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해 ‘지도의 날’(9월 첫째 토요일)을 제정했다. 다음달 2일 첫 ‘지도의 날’을 앞두고 강리도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과제 등을 살펴봤다.

좌·우의정이 만든 세계지도

일본 류코쿠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사본.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로 원본은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됐다. [사진 김선홍]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을 줄여 몇 자 폭의 지도를 만드니 상세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가 다른 지도들을 참고해 연구한 후 이회에게 명하여 자세히 교정하고 합쳐서 한 장의 지도를 만들었다. (…) 특별히 우리나라는 크게 그리고 일본을 덧붙여 지도를 완성했다.”

강리도 하단에 적혀 있는, 참찬 권근이 쓴 발문의 일부다. 이에 따르면 1402년 8월(음력)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좌·우의정이 합심해 지도를 만들었다. 강리도의 제작 목적으로 “지도를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통치에 도움이 되며,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어 좋다”고 밝혔다. 훗날 권근은 자신이 쓴 문집에도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실제로 강리도에는 신대륙 발견 이전, 당시 인류가 알던 세상의 거의 모든 지리 정보가 담겨 있다. 동일한 축적을 쓰지 않아 한반도와 중국이 실제보다 크게 묘사돼 있지만,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 반도의 해안선은 현재의 위성지도와 비슷하다. 유럽과 아랍 국가의 도시명도 수백 개를 써 놨다.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파로스 등대처럼 명승고적도 표시해 뒀다.

사대주의 편견 벗어나야

1415년 정화의 대원정 때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대중의 인식 속에 강리도는 중화론의 표본처럼 왜곡돼 있다. 17년간 연구 끝에 지난해 10월 『1402 강리도』를 펴낸 김선흥 전 주칭다오 총영사는 “중국이 크게 그려져 있다는 단편적 사실 하나만으로 국내에서만 유독 강리도를 평가절하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고교 한국사 강의 영상과 교재에서 강리도를 ‘곤여만국전도’(1602년)와 비교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EBS 유튜브 채널의 ‘혼일강리역대국도와 곤여만국전도의 차이점’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선 “같은 세계지도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강리도에 대해선 “중국을 왜곡되게 크게 그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란 걸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의 중심인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인식을 지적했다. 반대로 곤여만국전도에 대해선 “중심이 중국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며 탈중화적 의미를 설명했다.

 

물론 강리도의 한 가운데엔 중국이 있다. 하지만 강리도에는 권근의 발문과 같이 한반도의 면적이 실제와 비교해 중국보다 3배나 크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동양 최초로 인도와 아프리카, 유럽의 지리 정보를 담았다. “중국 중심의 지도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한국의 지도』)이라는 방동인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강리도에선 중화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조선인의 인식이 돋보인다.

세계인의 강리도 찬사

처음 강리도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일본이다. 강리도의 존재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이 1910년 교토에서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지리학자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는 교토 소재 류코쿠(龍谷) 대학에 있던 강리도 사본을 찾아내 모사했다. 류코쿠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원 영지를 내준 것으로 유명한 서본원사(西本願寺·니시혼간지)가 설립한 대학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강리도가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임진왜란 때로 본다.

김영옥 기자

 

강리도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4개의 사본만 일본에 존재한다. 그 중에선 1481~1486년 조선에서 모사돼 일본으로 건너간 류코쿠본이 가장 오래됐다. 발견 당시 커다란 족자 형태로 비단 위에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크기는 가로 171.8㎝, 세로 164㎝였다. 한국에선 1960년대에 처음 강리도의 존재를 알게 됐고, 80년대 이후 류코쿠본을 모사해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했다.

서양에는 한국보다 20년가량 먼저 알려졌다. 1946년 독일의 역사학자 발터 푹스가 강리도의 존재를 밝혔고, 영국의 유명 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이 1959년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6쪽에 걸쳐 강리도를 설명했다. 니덤은 강리도에 담긴 지리 정보가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로는 몽골을 통해 아랍·페르시아인, 튀르크인과의 접촉을 통해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도에 담긴 개방·다양성

강리도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1992년 미국 워싱턴DC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서였다. 이때 류코쿠본을 보고 전시회 도록에 소개문을 쓴 개리 레드야드 컬럼비아대 교수는 “15세기 유럽에서 만든 지도 중에 강리도 만큼 잘 그린 지도는 없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도 “당시 세계를 그린 가장 완벽하고 오래된 세계지도”라고 묘사했다.

일각에선 정화의 대원정(1405~ 1433년)에 강리도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영국의 작가 개빈 멘지스는 “정화의 함대가 강리도를 참고해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그러나 멘지스의 주장은 하나의 가설일 뿐 직접적 증거는 없다. 다만 아프리카를 표시한 강리도의 세계관이 당시 중국에도 공유돼 있던 건 명확한 사실이다.

현존하는 강리도 사본으로는 류코쿠본 외에도 혼코지본, 텐리대본, 혼묘지본이 있다. 나머지 3개는 모두 16세기 이후 류코쿠본을 모사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88년 나가사키현의 혼코지(本光寺)라는 오래된 사찰에서 발견된 혼코지본은 류코쿠본과 달리 일본 열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16세기 이후 지리 정보가 추가돼 있다. 크기도 가로 276.8㎝ 세로 219㎝로 류코쿠본의 2배 정도다.

고려인의 글로벌 감각

강리도가 만들어진 건 조선 건국(1392년) 10년 뒤의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지리 정보는 이미 고려인들이 모아놓은 것이었다. 특유의 개방·다문화 정신으로 글로벌 사회를 이뤘던 고려의 감각과 세계제국을 이룩한 몽골의 지식이 합쳐져 강리도를 완성했다.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는 “강리도에는 13~14세기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던 몽골제국의 세계 인식이 투영돼 있다”고 설명했다(『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빼어난 아름다움(高麗)’이란 국호처럼 고려는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던 매력국가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41년)』에 묘사돼 있듯 개경의 국제항인 벽란도는 어선과 관선(조운선), 외국 상선이 즐비해 나루 사이를 잇는 배다리(船橋)를 형성하기 일쑤였다. “아침에 출발하면 한낮이 못 돼 남만(현 중국과 베트남 접경지역)에 이른다”던 이규보의 표현대로 벽란도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국제항이었다.

양보경 전 총장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물을 들여와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DNA”라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K컬처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했다. 김선흥 전 총영사는 “강리도에 담긴 선조들의 주체성과 개방정신이 조선 중기 이후 계승되지 못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며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가 강리도에 담긴 정신을 꼭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윤석만 논설위원

 

 

박현주 미술전문입력 2023. 11. 18. 06:00

CU 11월 와인 기획전(사진=CU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고려의 23대 고종(재위 1213~1259)은 46년을 왕위에 있었지만 평생 밖으로는 몽골과 거란의 침입에,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횡포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아예 궁을 나와 신하의 집에 머물며 술과 바둑에 빠져 살았다.

‘한림별곡’(翰林別曲)은 고종 때인 1216~1230년 사이 이인로(李仁老), 김양경(金良鏡) 등 여러 유림이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도 저자 중 하나다. 한림별곡 제4장은 술에 관한 내용이다.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예주’(醴酒), ‘죽엽주’(竹葉酒), ‘이화주’(梨花酒), ‘오가피주’(五加皮酒) 등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종류의 술 이름이 등장한다.

 

‘국선생전’에 나오는 ‘도잠’(陶潛, 도연맹)과 ‘유영’(劉伶)은 신선을 뜻하는 ‘선옹’(仙翁)으로 칭했다. 예종 때 이자겸이 송나라에서 ‘계향어주’(桂香御酒)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고려사 김인존 열전’), ‘고려도경’과 ‘속동문선’에는 이를 그의 동생인 이자량(李資諒)으로 적고 있다. 기록이 뜸한 고려 초기에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1075~1151)이 술을 노래한,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술잔을 기울일 때 봄이 따뜻함을 더한다”고 썼다.

고려 중후기에 지어진 문집을 보면, 당시의 술 문화와 풍속을 읽을 수가 있다. 25대 충렬왕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가요 ‘쌍화점’(雙花店)에는 고려 여인이 술을 사러 술집에 가서 주인에게 손목을 잡히는 내용이 나온다. 작자미상의 ‘청산별곡’(靑山別曲)에는 술 빚는 냄새에 과객이 발길을 멈춘다. 농가의 4계절을 읊은 김극기(金克己)의 ‘전가사시’(田歌四詩)에는 들에서 농부가 탁주(濁酒)를 권하는 풍경이 묘사돼 있다. 고려 시대에도 농사를 지을 때 막걸리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주를 ‘농주’(農酒)라 부르는 배경이다.

‘제왕운기’(1287)에서 주몽신화의 술 이야기를 인용한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1290년 ‘빈왕록’(賓王錄)을 지었다. 1273년 원나라 황후와 황태자의 즉위식에 참석한 후, 와인 등 각종 술이 등장하는 몽골제국 황실의 ‘지순연’(質孫宴) 파티 현장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이때 충렬왕은 고려 세자로서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 머물고 있었고 파티에도 참석했다. 원종이 죽자 1274년 몽골의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충렬왕이 고려로 돌아온다.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와인을 마셨고,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원 황제가 여섯차례나 와인을 보냈다. 조선 초기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온다. 우리 역사서 최초의 와인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 말 술 이야기가 등장하는 여러 사람의 시가 남아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규보는 단연 독보적이다. 이백과 두보를 빼고 당나라의 문학과 술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그를 빼고 고려의 문학과 술을 이야기할 수 없다. 술을 논하기는 더욱 어렵다. 국선생전과 한림별곡이 아니라도 그는 수천편의 글을 지었다. ‘동국이상국집’에만 2000여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술과 관련된 시가 많다. 그의 시를 보면 고려시대의 사회상과 술 문화가 생생하게 보인다. 술과 시를 사랑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에 비유해 ‘죽림칠현’ 혹은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불렸던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이인로 등과 19세 때부터 교유했다. ‘국순전’을 지은 임춘은 이규보가 국선생전을 쓰는데 영향을 주었다. 임춘은 예천(醴泉) 임(林)씨의 시조인데, 예천은 단술이 나는 샘이라는 뜻이라 흥미롭다. 임춘도 죽림칠현답게 국순전을 비롯해 술에 관한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이규보가 강좌칠현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나이 차가 많아서였지만, 선배들은 그를 같이 대우했다. 오세재가 고향에 머물자 죽림칠현이 빈자리를 채우도록 권했지만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 열전’). 창의성도 뛰어났다. 대나무로 만든 정자에다 네바퀴를 달아 ‘4륜정’이라는 모바일 정자를 만들었는데, 아직 실물이 남아 있다.

그는 11세에 이미 술을 마셨는데, 삼백이라는 아명을 가진 어린 아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라는 시에서 아들이 날마다 삼백잔을 마실까 두렵다며 고주망태 아비를 닮지 말라고 했다. ‘주패’(酒旆)에서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주막의 깃발이 푸른색이라 묘사했다. 푸른 깃발을 달고 손님을 부르는 술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막걸리(白酒)를 즐겨 마셨지만 지위가 높아지자 청주를 마셨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후 청주 구하기가 어려워짐을 한탄했다(‘백주시’(白酒詩)).

유혹을 참기 힘든 ‘색마’(色魔), ‘시마’(詩魔), ‘주마’(酒魔)를 ‘삼마’(三魔)로 칭한 시에서는 “나이 들어 색마는 없앴지만 시마와 주마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우음’(偶吟)에서는 “시와 술이 서로 필요하다”(상치양상득, 相値兩相得)고 했다. “술은 시흥을 돋우는 날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화주’(花酒)).

와인이 번성했던 원나라에서 유학한 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귀국해서도 와인을 마셨다. ‘근재집’과 ‘목은시고’에 이에 대한 시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와인을 마신 것을 직접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색은 봄나들이 나왔다가 친구를 만나자 창고담당 관리에게 부탁해 즉석 와인 파티를 열었다. 당시 상류층에서 와인을 마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와인은 원나라에서 수입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름 있는 학자들 중에서도 술에 관한 시를 남긴 사람이 많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음주’(飮酒)라는 시를 지었다. 조선의 건국을 두고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이 갈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정몽주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지었다. “술동이에 술은 넘치고, 손님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네”(酒滿金尊客未歸).

고려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조선이 시작됐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유희동 기상청장입력 2023. 10. 29. 13:51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 돌고, 요 집 저 집서 값을 물어보고 배추를 들어도 보고 헤쳐도 보고, 얼마까지 해줄 거냐고 꼭 살 듯이 흥정을 하다가도 다음 집으로 옮겨가고 속 고갱이를 뜯어서 맛까지 보고도 아이 싱거워 배추는 고소해야지 하며 또 다음 집으로 옮겨가고….”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쑥스러운 고백>에 나오는 대목으로, 김장 배추를 정성스레 고르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재료는 단연 배추다. 김장은 좋은 배추를 고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배추는 온도에 무척 민감하여 추위에는 강하지만 더위에는 약하다. 따라서 고온의 환경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고 잎도 짓무르며, 추운 환경에서 자란 배추는 잎이 많고 속도 꽉 차 김장의 좋은 원재료가 된다. 11월부터 다음 해 1월에 생산되는 가을배추는 저온에서 잘 견디고 저장성이 좋으며, 비타민C가 풍부하여 겨울철 비타민의 공급원이 되기도 한다.

김장 김치. 국제신문 DB


그렇다면 좋은 배추를 잘 고르기만 하면 되는 걸까? 최상의 맛을 위해서는 김장 시기도 무척 중요하다. 김치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일평균기온이 4도 이하면서 일최저기온이 0도 이하로 유지되는 시기에 김장을 했을 때 가장 맛있는 김치를 맛볼 수 있다. 기온이 높으면 김치가 너무 빨리 익어 맛이 쉽게 변질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보관이 어려워진다. 반대로 기온이 너무 낮으면 배추와 무가 얼어 재료 본연의 맛을 내기 어렵고 신선도도 낮아진다. 발효라는 특별한 과정을 통해 유산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온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다. “무를 소금에 절여 구동지를 대비한다”라는 구절을 통해 지금과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오랜 김장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장은 늦가을 또는 초겨울에 겨울 동안 먹을 다량의 김치를 담그는 행위 또는 그렇게 만든 김치를 말한다. ‘입동이 지나면 김장철이 된다’라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오듯, 김장은 각 지방의 기후와 풍습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입동부터 소설까지의 시기에 행해져 왔다.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서울·경기·중부내륙지방은 11월 중순~11월 말, 남부지방과 동·서해안지역은 12월 초~중순, 남해안은 12월 중순~말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로부터 김장은 한해 공들여 수확한 여러 가지의 재료를 한데 버무려 사계절의 맛을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것처럼, 가족과 이웃이 다 함께 모여서 김치를 담그고 나누어 먹는 협력과 나눔의 의미를 지닌 소중한 우리 문화였다. 요즘에는 겨울철에도 신선한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식생활 및 가족 형태의 변화로 예전보다 김장을 하는 가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김장 문화가 지닌 가치는 지역과 세대를 초월하여 전승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장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고, ‘김치 담그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고 있다. 또한, 김치는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선정되어 우리나라의 음식문화를 세계 곳곳에 알리고 있다.

‘김장은 하늘이 도와야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 김장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가족, 이웃이 모여 김치를 담그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날씨와 자연환경이 잘 갖추어져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김장철에 앞서 기상청에서 제공하는 날씨 정보를 참고하여 김장 준비를 해 보면 어떨까? 기후평년값을 바탕으로 장기예보, 중기예보, 단기예보 등을 잘 활용하여 가족, 가까운 이웃과 함께 맛도 좋고 마음마저 훈훈해지는 김장 담그기를 준비해 보기를 바란다.

 

 

한겨레입력 2023. 9. 23. 18:05수정 2023. 9. 23. 21:15

[[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특별전 ‘고려도기’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나온 도기 항아리들. 신지은 제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특별전 ‘고려도기’(목포해양유물전시관, 내년 1월14일까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도기를 소개하는 전시다. 도기는 흙으로 만들어 1200도 미만의 온도에서 구운 그릇이다. 자기는 유약을 입혀 이보다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고려시대 도기는 대부분 유약을 입히지 않은 것으로 자기보다 소박하다.

이 전시는 고려시대에 각종 음식물을 보관하는 요긴한 생활용기이자, 전국 각지의 특산물을 멀리 실어 나른 운반용기였던 도기의 쓰임새를 조명한다. 그리고 쓰임새를 살피는 시선은 만들고 쓰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으로 옮겨간다. 당시 세련된 색채의 유약을 발랐던 고려청자는 이전 시대엔 없던 고급 신소재로, 값비싼 청자나 금속 그릇을 쓸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도기나 나무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전시의 부제인 ‘산도해도 주재도기’(山島海道 舟載陶器)는 “섬과 바닷길에선 배가 도기를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의 문장을 빌린 이 제목에 전시를 아우르는 주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전시에 나온 고려 도기들이 배에 실려 운반되던 것이기 때문이다. 도기 항아리는 도시에서 물독으로 쓰는 구리 항아리에 비하면 값싼 물건이지만, 뭍과 바다를 오가는 뱃사람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눈여겨본 외국 사신의 기록 한 줄은 바닷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고려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놓고…

전시는 커다란 창으로 목포 바다가 내다보이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세심하게 조명을 조절해 놓은 전시들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햇빛 속에서 유물을 보는 도입부의 느낌이 무척 각별할 것이다. 종이나 나무와 달리, 고온에서 구워 만든 도기는 햇빛에 노출돼도 상하지 않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웬만한 냉장고 한 대와 맞먹는 용량의 커다란 도기 항아리다. 어린이 관람객보다도 키가 큰 대형 항아리부터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병까지, 70여점의 유물을 훑고 나면 도기의 든든한 회색 빛깔이 차분히 눈에 익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자만큼 귀하게 여겨지진 않아도, 도기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에서 요긴하게 쓰이며 사랑받은 그릇이었다.

고려 후기 문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그의 ‘최애 도기 술병’을 묘사한 시가 실려 있다. 그 병에 평생 담고 따른 술이 몇 섬인지 세지도 못한다는 너스레와 함께,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 손으로 들기 알맞고 값도 싸 구하기 쉬우니 깨진대도 무슨 원망을 하리”라는 알뜰한 찬사를 펼친다.

 

그 담백하고 친근한 질감을 좋아한 고려의 상류층은 도기를 청자나 금속기와 똑같이 만들어 쓰기도 했다. 베개와 정병, 매병 같은 고급 물건들이 광택과 빛깔만 다른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와 있다. 내 취향은 청자인지 도기인지, 고려 귀족이 된 기분으로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고려시대 침몰선들에서 건져낸 유물들을 소개하는 3부다. 태안 인근의 험한 바닷길을 지나다 침몰한 고려 배들은 그 앞에 있는 섬 이름을 따 ‘마도 1·2·3호선’으로 불린다. 특히 마도 3호선에서 나온 유물들에는 여수에서 출발한 무신집권기 권력자(유천우, 신윤화, 윤기화 등)의 ‘개인 택배’들이 담겨 있었다. 옛날에는 화물을 부칠 때 수취인과 내용물을 적은 나무 막대기를 매달았다. 목간, 죽간이라고 부르는 이 표지가 오늘날로 치면 택배 운송장인 셈이다.

도기 항아리, 목간과 함께 전복 등 특산품이 담긴 항아리를 재현했다. 신지은 제공

 

2011년에 발굴된 마도 3호선의 목간 35점을 분석해 보니, 배에는 전복과 홍합, 상어포, 각종 젓갈, 꿩 등을 담은 도기와 대바구니가 실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시에서는 재현품과 모형을 활용해서 배에 실린 물건들을 실감나게 재현해 마치 선실 안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항아리에 100개씩 꽉꽉 눌러 담은 전복, 요즈음 사람들도 먹어보기도 힘든 농게젓갈, 전복젓갈 모형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그 옛날에도 여수에서 강화도까지 저 갖가지 식재료를 주문해서 소비했다는 사실은 놀라우면서 놀랍지 않다. 서해에서 잡히는 민어의 뼈가 경주 서봉총에서 나왔듯이, 먹을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정은 뿌리가 깊지 않은가. 다만 몽골(몽고)과 긴 전쟁을 치르느라 수도까지 섬으로 옮겼던 시기에도 왕의 생일상은 풍성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권력자들은 수시로 먼바다의 진미를 넉넉히 누리며 생활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역시 놀라우면서 놀랍지 않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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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서 발굴된 물동이

3부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마도 3호선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새롭게 스토리텔링한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고려사’에는 무신정권 시기 권력자였던 김준이라는 인물이 왕의 생일에 사치스러운 술과 음식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마도 3호선에서도 김준이 수취인으로 적힌 목간이 나왔다. 전시는 이 겹치는 지점에 주목해, 이 배에 실린 수많은 식재료들이 ‘왕의 만찬’에 쓰일 식재료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펼친다.

배가 풍랑을 이겨내고 왕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하는 결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전시를 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하고 연구하는 문화재는 대개 수중발굴을 통해 발견된 해양 유물로, 대부분 난파와 침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을 떠올리며 영상을 보면, 그 가상의 이야기가 유물들의 불운한 내력을 잔잔히 어루만져 보는 평범하고도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배는 가라앉고, 어떤 항해는 실패한다. 수백년이 지나 뭍 위에서 그 흔적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바다에서 나온 유물들은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해 온다. 과거의 불운이 미래에는 새로운 의미로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울돌목에서 발굴된 고려 시대 물동이. 신지은 제공

 

유물 하나가 커다란 유적처럼 보일 때가 있다. 전시 1부에 나와 있는 손잡이 달린 물동이 한 점이 그렇다. 이 물동이는 진도 울돌목에서 발굴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그곳이다. 표면에는 숱하게 달라붙어 있던 따개비를 제거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만들어지면서도 사람 손에 쓰이면서도 없었던 무늬를, 쓰임이 멈춘 바다 밑에 머무는 동안 새로 얻은 것이다. 그 무늬에는 그 물건이 태어나고 거쳐온 시간과 공간이 고스란히 내비친다.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묵묵한 무늬들은 문득 우리가 견뎌온 과거의 불운들이 우리 삶에 어떤 무늬를 남겼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마음 밑에 가라앉아 있는 실패의 기억도 비로소 다시 건져내 바라볼 용기를 준다.

신지은 문화재 칼럼니스트

 

 

동국이상국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고려 고종 때 문인 이규보의 문집(文集)으로, 이규보의 아들 이함(李涵)이 간행했다.

전집 권 1~18은 연보(年譜)·시, 권 19~20은 잡저·상량문·구호(口號)·송(頌)·서(序), 권 22는 잡문(雜文), 권 23~32는 기(記)·방문·서(書)·서장(書狀)·표(表)·인국교통소제표전장, 권 33~34는 교서·비답·조서·마제(麻制)·관고(官誥), 권 35~36은 비명(碑銘)·묘지뇌언, 권 37은 애사(哀辭)·제문, 권 38은 도량(道場)·초소(醮疏)·제문, 권 39는 불도소(佛道疏), 권 40~41은 석도소(釋道疏)·제축(祭祝)으로 되어 있다. 후집 12권의 내용도 전집의 내용과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

동국이상국집에는 상정고금예문이 1234년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금속 활자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동명왕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가 1193년(명종 23년)에 지은 5언체 서사시이다. 지은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중 〈전집〉의 제3권에 실려있다.

이 작품에 딸린 서문[幷序]에 따르면

  1.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1]의 내용은 깊이 알고 보면 요술이 아닌 성(聖)이요 귀신이 아닌 신(神)이라고 찬양하고,
  2.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동명왕 관계 기사를 생략해 버린 것을 비판하면서,
  3. 자기는 고려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릴려고

이 작품을 지었음을 밝혔다.

 

 

<참고자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국이상국집 - Daum 백과

 

 

동명왕편(東明王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제왕운기(帝王韻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제왕운기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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