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서 (7)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본문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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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긴 기다림 끝 명예 얻었으나…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찍부터 문재를 드러냈지만 과거에 몇 차례 낙방했다. 23세에 급제한 후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구직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했다. 32세인 1199년 6월 비로소 전주목 사록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1202년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병부 녹사 겸 수제원으로 종군해 1204년 3월 개선하는 군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해마다 첫 번째로 추천을 받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으나 관직을 얻지 못했다.
1207년 한림이 된 이후에야 중앙 여러 관직을 거치며 오랫동안 국가의 문장을 담당했다. 재상의 반열인 종1품까지 승진해 1237년 70세로 치사했다. 63세에 잠시 부안의 위도로 귀양 간 일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고 할 만하다.
이규보의 관직 진출과 승진에는 당대의 권력자인 최충헌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한림이 되기 전 최충헌이 모정(茅亭)을 짓자 이인로 등과 함께 불려가 ‘모정기’를 지었다. 이보다 앞서 1199년 첫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도 최충헌의 집에 불려가 시를 지었다. ‘동사강목’에서는 최충헌과 관련된 이규보의 이러한 행적에 관해 “최씨에게 아첨해 사론의 죄를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규보 생전에 ‘권력자에게 아부했다’는 비방과 조소가 뒤따르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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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의 백운거사
이규보는 18세 때 53세의 오세재와 망년지우가 돼 이인로, 오세재, 임춘 등과 ‘칠현’(七賢)이라 자칭하며 모인 죽림고회에 동참해 시와 술에 침잠했다. 과거에 급제했지만 곧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이규보는 부친상을 계기로 천마산에 은거해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백운거사어록’에서는 “거문고와 술, 시 세 가지를 매우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고 싶지만, 좋아하기만 하고 잘하지 못하므로 백운의 장점을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규보는 운(韻)을 부르자마자 나는 듯이 붓을 달려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술에 취하면 시는 더욱 거침없어져 ‘만취한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지은 장편 율시에 한 글자도 고칠 것이 없다’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는 남다른 재능과 축적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솜씨로, 한림별곡에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로 남아 있다. 훗날 술 마시고 하는 시 짓기 내기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고, 젊은 날에 지은 시 300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시와 술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사랑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술이 없으면 시도 내키지 않고
시가 없으면 술도 시들해
시와 술이 모두 좋으니
서로 걸맞고 서로 있어야 하네
손가는 대로 시 한 구 짓고
입 당기는 대로 술 한 잔 마셨지
-‘우연히 읊다’
나이 벌써 일흔을 넘었으며
벼슬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이제는 시 짓기를 버릴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밤에도 부엉이처럼 읊노라
-‘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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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미친 세밀한 눈길
이규보의 시 가운데에는 가족과 주변 사물을 노래한 것이 많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세밀한 관찰 결과가 담뿍 담겼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무거운 짐을 지고 매를 맞는 소, 거미줄에 걸린 매미, 고양이, 쥐 같은 동물이나 밤이나 햅쌀 같은 식물 그리고 몽당붓이나 깨진 벼루에도 고루 향했다. 이는 아무래도 오랜 기간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미친 결과가 아닐까. 밤을 노래한 시에서 ‘밤은 사람에게 유익한 과일인데 밤을 노래한 시가 적어서 짓는다’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했다.
잎은 여름철에 돋고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방울 틈처럼 쩍 벌어지면
윤기나는 알밤 감싸고 있네
제사상에 대추와 함께 올라가고
신부의 폐백에 개암과 함께 놓였네
오는 손님 대접만 하는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지
-율시
사람은 하늘이 만든 물건 훔치는데
너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치누나
다 같이 먹고살려 하는 일이니
어찌 너만 나무라랴
- 쥐를 놓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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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남은 시
천마산에 은거하던 20대의 이규보는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동명왕편’ 등 장편 시를 남겼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중략/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라고 구체적인 창작 동기를 언급했다. 또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주석으로 밝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나마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사의식 덕분이다.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살 때보다 팔 때 더 받은 집값을 돌려준 노극청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극청전’이나 나룻배를 타면서 겪은 일을 적은 ‘주뢰설’은 청렴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당대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의 발로다. 산문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소재로 지은 시들도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 준다.
화계에서 찻잎 따던 때를 이야기하세
관리들 집집마다 늙은이 어린이 되는 대로 찾아내어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 아슬아슬 손을 뻗어
멀고 먼 서울까지 등짐 지고 날랐다네
이것이 바로 만백성의 고혈이라
수많은 사람 피땀 흘려 예까지 이르렀네
…
그대 훗날 간원에 들어가거든
부디 내 시의 은미한 뜻 기억하게나
산과 들 불살라 차 공납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출판콘텐츠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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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이상국집은
현전 본은 日서 구해 영조때 간행… 2000여 수의 시·표전·교서 수록
1241년 완성돼 그해 8월에 간행에 착수했지만, 이규보는 9월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함이 시문을 추가하고 ‘연보’, ‘묘지명’ 등을 더해 12월 53권 14책으로 간행됐다. 1251년 손자 이익배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중간했다.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잃어버린 것을 일본에서 구해 와 지금 다시 간행했다’는 내용이 ‘성호사설’에 기록됐다. 영조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여수의 시와 왕명을 받아 지은 표전, 교서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수록됐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사시 ‘동명왕편’, 가전체의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 시화 ‘백운소설’ 등이 있다. 또 재조대장경 판각 경위를 밝힌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과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신서상정예문발미’ 등 중요한 사실을 전하는 글도 포함됐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번역문을 이용할 수 있다.(1)
서울신문,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12) 이규보 '동국이상국집'거침없는 필력의 문장가.. 20대에 주몽 노래한 '동명왕편' 남겨, 2018. 7. 3.
관직 얻는데 인맥 중요했던 시기.. 당시 저술한 고구려 왕 일대기
벼슬 얻기 위한 글이라는 해석.. 관직 얻은 후 승승장구 했으나
정권 맞춤 글쓰기로 비판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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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1168∼1241)는 무신정권 시기에 시인, 수필가,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고려사’ 열전에는 ‘성품이 활달하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며, 시문을 짓되 옛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공부하여 넓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적혀있습니다. 열전은 이규보를 자유분방한 문학인, 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이규보의 생애와 저술 활동을 관료 임명 이전과 이후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무인에게 관직 구하는 시를 쓰고 ‘동명왕편’ 저술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 22년) 평범한 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을 전후해 시를 지은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에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성명재에서 과거를 준비했습니다. 천재적 재능은 있었지만 과거는 여러 차례 낙방했습니다. 무신정권 시기에 치른 과거라 합격하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집권자와의 연결이 중요했지요. 또 그는 선천적으로 형식에 맞춘 글을 멸시했습니다.
이 시기 이규보는 ‘죽림고회’라고 부르는 문학인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죽림고회’는 무신정권 시기 관직을 떠나 시와 술을 즐기는 문학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과 어울리는 영광을 누렸으나, 젊은 나이에 계속 은둔생활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20대 초반이던 1190년에 과거에 합격했지요. 당시에는 이의민이 집권한 시기였고, 과거에 합격했다 할지라도 관직에 임명되기 어려웠습니다. 집권자가 불러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집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를 써서 바치던 시대입니다. 관직을 준비하는 사람, 세상을 등진 초야의 학자 모두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규보는 25세부터 32세까지 관직을 구하는 시를 지으며 집권자가 불러주길 기다렸습니다. 불행하고 막막했던 그는 25세이던 1193년에 ‘동명왕편’을 저술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일대기를 영웅적 서사시의 형태로 서술했습니다. 그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현재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유교적이고 신라사 중심인 ‘삼국사기’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외적이 침략하는 시기에 민족의 자부심과 침략에 대한 항거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이지요. 세 번째는 집권자와 집권자의 측근 세력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주장입니다.
주몽의 일대기는 무인들의 영웅 서사시이고 집권자와 민중 모두 공감하기 좋은 소재였습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무인들에게 소용 가치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에 무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저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국정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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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은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규보는 1199년 최충헌이 개최한 시 모임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인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관직은 전주지방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사록겸장서기(7품)였습니다.
관직의 대가로 받는 봉급은 적었고 행정 잡무마저 번거로운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 관리들의 중상모략으로 관직 생활이 고통스러웠고 결국 1년 4개월 만에 동료들의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도 관직을 구했건만 초임지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거죠. 이후 끊임없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을 통해 관직에 복직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규보는 1207년 최충헌이 여러 학자를 초빙해 개최한 백일장에서 ‘모정기’라는 글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모정기’의 마지막 구절은 “정자는 날개가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누가 지었겠는가/우리 진강후(최충헌을 일컬음)의 어짐이로다./잔치를 베푸는데 술이 샘같이 나오고 잔을 받들어 권하니 객은 천명이로다./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노니 산천이 변한다 해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였습니다. 최충헌에 대한 노골적인 예찬을 담고 있어 비굴해 보입니다만 최충헌은 이 글을 보고 칭찬하면서 드디어 직한림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규보는 1219년 최우가 집권한 이후 관직 생활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1232년 강화 천도를 찬성하고 몽골과의 전쟁 중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실질적인 국가 업무를 총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몽골 천도에 대해 “천도란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청하(최우 정부를 일컬음)의 계획 그토록 서둘지 않았더라면/고려는 벌써 오랑캐 땅 됐으리”라고 하면서 최우의 강화 천도를 찬양했습니다.
이규보는 몽골과의 전쟁 시기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습니다. 몽골이 쳐들어오면 철수를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몽골이 그 대가로 수달피나 고려인을 바치라고 하면 그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무신정권 시기 지식인의 유형은 초기부터 도피 유랑한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지방에서 유학자의 삶을 산 사람, 초기에 멀리 피신했다가 개경으로 돌아와 관직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한 사람, 무신정권 초기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임명되었거나 최씨 무신정권을 위해 관직에서 일한 사람 등으로 나뉩니다. 이규보는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이규보는 60대 중반 이후 강화도에서 관직 생활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언제나 속마음은 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국왕보다 무신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략 속에서 나라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의 삶은 비참했으니 고통이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2)
동아일보,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문인 이규보는 왜 '동명왕편'을 썼을까?, 2021. 5. 12.
<자료출처>
(1)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거침없는 필력의 문장가.. 20대에 주몽 노래한 '동명왕편' 남겨 (daum.net) 2018. 7. 3.
(2)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문인 이규보는 왜 '동명왕편'을 썼을까? (daum.net) 2021. 5. 12.
<참고자료>
동국이상국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명왕편(東明王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고려의 전설적인 ‘일타강사‘, 세종대왕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3. 1. 25.
"이규보, 구직 위해 '동명왕편' 지어.. 무신도 염두에 둔 듯" (daum.net)2020.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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