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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 환인(桓因)인가? 환국(桓國)인가?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1)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 환인(桓因)인가? 환국(桓國)인가?

대야발 2008. 6. 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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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고조선(古朝鮮)」 기사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들 사이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고기운석유환인(古記云昔有桓因)”이란 부분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에는 '桓囯'으로 되어 있는데,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던 순암 수택본에는 ‘囯’자를 ‘因’자로 묵서(墨書)로 고친 것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이마니시류가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친 것은 순암 안정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9) 우리 민족의 창세기 『삼국유사』

2022.04.0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

 

 

라. 환인(桓因)인가? 환국(桓國)인가?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제일 장1 뒷면 2행부터 장2 뒷면 1행까지 “고조선(왕검 조선)”이 기록되어 있다. 꼭, 1장(2면)의 분량이다. 이 고조선 기록의 끝부분에서 기자(箕子)와 한분치삼군(漢分置三郡, 한사군)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일연도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중화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조선초기 본, 목판본.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이 『삼국유사』 권제1 「고조선」에는 '‘口+土’'으로 되어 있다. 고(古) 불경에서도 '보이는 '‘口+土’'자는 ‘因’자의 이체자(異體字)로 고려대장경에도 같은 자형과 쓰임이 확인된다. (참조 : 연세대학교 박물관, 2016, 『파른본 삼국유사 교감』, 58쪽).
물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환인(桓因)'으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단군(檀君)의 조부로서의 환인과 환웅은 인격체이며 환국(桓囯)은 인격체라 할 수가 없어 고기(古記)의 문맥(文脈)에도 맞지 않는다. 특히 필자는 중종 임신년 본의 ‘囯’자를 ‘因’으로 고친 것은 이마니시 류가 아니라 순암 안정복으로 판단하며, 그것은 책을 볼 때 발견하는 오자(誤字)를 독자가 고쳐 놓는 수택본(手澤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않고 문맥도 파악 없이 판각(板刻) 오자(誤字)에 집중하여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桓國)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고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몰상식한 행위로 비판 받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古朝鮮)」 기사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들 사이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고기운석유환인(古記云昔有桓因)”이란 부분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에는 '桓囯'으로 되어 있는데,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던 순암 수택본에는 ‘囯’자를 ‘因’자로 묵서(墨書)로 고친 것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이마니시류가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친 것은 순암 안정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국보 『삼국유사』 권제1 장1 후면(後面), 「고조선」 조(條), 중종 임신년(1512) 본,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사진출처 - 서울대 규장각]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은 「기이 권제일」의 앞 두 장은 자획(字劃)의 굵기가 다른 면의 것보다 가는 것을 보면 이 권제일의 앞 부분 두 장은 1512년에 보각(補刻군)한 판이다. 판을 보각하면서 환인(桓因)을 환국(桓囯)이라 오각(誤刻)한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4행11자에서는 나라 ‘국(國)’자를 ‘국(國)’으로 제대로 판각하였는데, 5행4자에서는 ‘囯’자로 판각하고 있다. 이것은 ‘囯’자가 ‘국(國)’을 의미하는 글자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은 「기이 권제일」의 앞 두 장은 자획(字劃)의 굵기가 다른 면의 것보다 가는 것을 보면 이 두 장은 1512년에 보각(補刻)한 판이다. 따라서 이보다 앞선 조선초기의 판본으로 보각판의 오류를 교감할 수 있다.

 

현존하는 『삼국유사』 권제1 가운데 가장 고본으로 공인(共認)되는 파른 손보기 박사 소장본 『삼국유사』 권제1에는 ‘口+土’으로 되어 있다. 고(古) 불경에서 보이는 ‘口+土’은 ‘因’의 이체자(異體字)인데, 고려대장경에도 같은 자형과 쓰임이 확인된다.(참조 : 연세대학교 박물관, 2016, 『파른본 삼국유사 교감』, 58쪽).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지리지.(부분) [사진제공 - 이양재]

“(중략)....., 靈異,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이하 중략)....” 
“(중략).....,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이하 중략)....” 

 

 

물론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에 저술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1454년 편찬을 완료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단군의 조(祖)로서의 환인(桓因)과 부(父)로서의 환웅(桓雄)은 인격체이며 환국(桓國)이 나라의 이름이라면 인격체라 할 수가 없어 고기(古記)의 문맥에도 맞지를 않는다.

 

특히 필자는 중종 임신년 본의 ‘囯’자를 ‘因’으로 고친 것은 이마니시류가 아니라 순암 안정복으로 판단하며, 그것은 책을 볼 때 발견하는 오자(誤字)를 독자가 고쳐 놓은 수택본(手澤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않고 문맥 파악도 없이 오자에 집중하여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시도한 것처럼 결국에 가서는 「고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본 연재의 제1회 기고 ‘사색을 시작하며’의 ‘(4) 민족성을 말살하는 법’에서도 밝혔듯이 이는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파괴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마.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의 실존성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은, 유태교나 기독교의『구약(舊約)』 「창세기(創世記)」와 같은 것이다. 「창세기」가 유태인 중심의 신앙과 역사의 서술이므로 타민족이 보기에는 오류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대한 신념이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유태교든 기독교든, 심지어 회교(回敎)도 까지도 믿음이 성립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에서 단군에 대한 부분이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성립할 수가 없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기에 단군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부정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의 심각성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사상의 일부에 단군 말살의 의도를 숨겨 뒤섞어 놓은 데 있다. 즉 진실에 근거하여 거짓을 뒤섞어 놓아 궤변을 떨며 민족의 정체성을 기만한 것이다. 환인(桓因)을 환국(桓囯)으로 오인(誤認)하게 하여 환인(桓因)의 의미를 부정하는 순간, 단군의 실체와 우리 민족의 천손사상(天孫思想)이 부정된다. 그러므로 제2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이유립(李裕岦, 1907~1986)과 황상기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 후 우리 사학계의 큰 수확은 한반도 내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중국에도 상당수 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0여년간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漢字)는 황제(黃帝)의 사관이었던 창힐(蒼頡)이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대략 BC 3,000년 정도 무렵으로 본다. 즉 황제이든 단군이든, 그들은 석기시대 이후 초기 문명시대의 인물이다.

 

 

석기시대 이후 초기 문명시대에 고조선, 즉 단군조선은 우리 역사에 실체로서 존재하였다. 아무리 단군의 존재를 끌어 올린다고 해도 기존의 단군 기원 BC 2333년에서 300~400년 정도이어야 한다.

 

 

왼쪽 사진은 북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1962)에서 단군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북의 ‘과학원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1964년에 일본에 있는 총련계의 ‘학우서방’에서 영인하였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1978년경에 처음 입수하여 『국정국사교과서의 고칠 점들』이라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역사로 보았던 자료집(1979년 2월 20일자 서문)을 낼 때, 이 책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사진제공 - 이양재]

 

 

이 책의 존재를 널리 분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이다. 이 자료집을 만들 당시에 안호상 박사는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당시 중앙정보부 고위직에 있던 어느 제자가 ‘고조선을 연구한 책이 북에서 나왔다’며 전해 주었다”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원래 안호상 박사는 민족주의자 상향이기는 하지만, 반공(反共) 안물로서 후일 대종교(大倧敎) 총전교를 지내다가 1995년 4월에 당시 정부의 승인없이 방북한 바 있다. 

 

 

참고로 북한은 “1993년 10월 '단군릉발굴보고'를 통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사람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라고 한다.

 

 

흔히 고고학상에서 연대를 측정하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은 측정 한계성이 있어 측정 연대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1993년에 5011년 전이면 BC 3018년을 말하는데 측정 오차를 ±300년으로 잡아도 단군릉 출토 유골은 황제헌원(黃帝軒轅) 보다도 이전의 유골이 되는 것이고, BC 3018년이면 단군 기원에서 685년전이다.

 

 

현재 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황제헌원은 “BC 2717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BC 2698년에 즉위하였고, 119세 되는 BC 2599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주장대로 황제 즉위년을 BC 2698년으로 볼 경우에는 단군의 즉위 연도 BC 2333년 보다 365년이 앞선이다. 이렇듯 단군의 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넘어오는 초기 문명시대이다.

 

 

『삼국유사』 권1 「고조선」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그 초기 문명시대에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부인(天符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단군신화와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을 비추어 볼 때 거울(鏡), 검(劍), 방울(鈴), 북(鼓), 모자(冠) 등의 무구(巫具)가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고, 현재 사용되는 민속상의 무구와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과 비교해 볼 때 천부인 세 개를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천부인 세 개를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린다는 의미의 세 개 인수(印數)를 말한다는 주장도 있고, 천부인을 「천부경(天符經)」과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필자는 천부(天符)와 인(印)을 구분할 수도 있다고 본다. 천부인과 천부경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천부인에 대한 기존 이론에서 천부인을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로 보는 것과 북의 단군릉에서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참고하면, 단군은 청동기시대 초기의 인물이라는 명제(命題)가 성립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바. 신시(神市)의 의미

 

환웅이 다스리던 신시는 그 뒤 환웅이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평양을 도읍지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 현재 신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로 “신시는 신정시대에 도읍 주위에 있던 별읍(別邑)으로서 삼한의 소도와 성격이 같은 신읍이었다”는 해석이 있었고, 둘째로 “신시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으로서 환웅을 가리키며, 그것은 조선 고대의 국가들에서 왕을 뜻하는 ‘신지(臣智)’가 존칭화 한 것이다”라는 해석이 있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필자는 「고조선」조 기록에 있는 환웅의 신시(神市)를 글자 그대로 시(市)로 본다. 즉 신시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市場)이다. 화폐가 없던 시대에 서로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하는 장소, 즉 원시 경제 체제가 확립된 장소가 신시인 것이다. 이러한 신시는 물건의 교환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노동력의 변화도 가져오며 철기(鐵器) 기술의 발달도 필연적으로 가져 온다.

 

 

현재, 유물로 남아있는 노동 집약적인 인력 동원으로 만든 고인돌과 청동기 기술로 만든 비파형 단검(短劍) 등이 고조선의 유물로 확정되고 있는데,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나타나는 지역 즉 현재 중국의 동북 삼성 전체와 산동반도, 그리고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대부분이 고조선의 강역(疆域)이거나 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임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고인돌이라는 보편적 유적과 비파형 단검이라는 독특한 유물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음으로써, 고조선의 영역과 실체는 거의 대부분을 규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황당한 『환단고기』에 매달려 우리 주변국들의 역사학계에 떼를 쓰는 듯한 인상을 남겨 우리 민족의 민족사관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는 질색할 만한 기가 막힐 일이다. “스스로가 민족사관을 말한다면서 어찌 이렇게 우리 민족의 본질과 정체를 왜곡할 수가 있는가? 그들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한 번이라도 신시(神市)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 일이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사. 추기(追記) 1 :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록에 환웅이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風伯) 등등 3,000명의 중요한 인물들을 이끌고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천손사상(天孫思想) 또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의미하여, 경제사학적(經濟史學的)으로 원시적 시장경제의 출현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史實)이다.

 

 

기원전 24세기에 3,000명의 무리라면 수만 명을 통제하거나 다스릴 수 있는 거대한 부족국가(部族國家)로서, 이것은 고대의 시장경제가 싹트고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이다. 이러한 신시의 적통성(嫡統性)을 이은 것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산다. 특히 고대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 있어야 세력도 군대도 형성된다.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고대 민족의 강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이다.

 

아. 추기(追記) 2 :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저하면서 『위서(魏書)』라든가 『고기(古記)』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대로 주(註)를 달았다. 일연이 단 주는 부정되는 경우가 있다. 일연의 주가 틀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환인을 “제석(帝釋)”이라 주를 단 것이라든가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太伯山)”을 “묘향산(妙香山)”이라 주를 단 것 등이다.

 

 

그러나 대체로 민족사학자들은 환인을 “제석”이라 주를 단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보며, 아울러 여기에서의 태백산의 ‘백’은 ‘우두머리 백(伯)’자이므로 조종(祖宗)의 산(山) 백두산(白頭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태백산(太伯山)은 백두산의 이칭(異稱)이다.

 

 

이렇게 일연의 이해 부족으로 단 주라든가 중화 사대주의적인 부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태백산(太伯山)이 후일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백산(太白山)으로 오인(誤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심국유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원문(原文)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支柱)이다.” 누구든 민족사학자임을 자칭한다면 『심국유사』 「고조선」조의 사실(史實)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그 사실(史實)은 우리 민족의 창세기(創世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환단고기』에 대하여 갖게 되는 분노는, ‘『환단고기』는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무시하고, 식민사관을 극복한답시고 황당사관을 주장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1)

 

 

 

 


■ 삼국유사 고조선조, '환인이냐 환국이냐'
謂帝釋也(위제석야)가 논리적 해석의 관건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2013/03/07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시대 초기 판본이 공개됐다. 이 판본은 2013년 1월 21일자 인터넷 불교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글자 탈락이 많아 알 수 없었던 역대 왕조별 왕의 족보를 다룬 왕력편(王曆篇)이 포함된 것으로, 고대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 판본은 서지학자 고(故) 손보기 교수가 소장해 온 것으로, 지난 16일 고인의 유족들이 연세대에 <삼국유사> 목판본을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대 왕에 대한 족보를 기록한 ‘왕력편’과 삼국시대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기이편’ 권1과 권2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판본에 비해 인쇄 상태가 확연히 좋은 점도 특징으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판본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는 昔有桓 口+土 謂帝釋也 庶子桓雄(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이라 기록되어 있다.

 


▲ <2013년 1얼 21일자 불교신문에 실린 손보기 선생 소장의 삼국유사 판본중 고조선조>     ⓒ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물론, 어떤 사람들은 위 판본에서 昔有桓因(석유환인)의 因(인)자를 나타낸 口+土(또는 士)라는 글자를 國(국)자로 해독하기도 한다.


 
그러나, 뒤를 이어 바로 적힌 謂帝釋也(위제석야:제석이라 한다)라는 글자로 보면, 앞의 글자는 해석논리상 昔有桓因(옛날에 환인이 있었다)이 명백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판본의 원판을 새길 때, 因(인)을 새기다가 口 안의 大라는 글자를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획수가 되는 土로 새기게 되어, 因자의 이체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이 조선초기 판본만으로 해석해 보면, 고려시대에 <삼국유사>를 지은 승려 일연은 庶子桓雄(서자환웅)을 글자 그대로 서자(庶子)인 환웅(桓雄:한웅)으로 인식하고서, 앞의 문구를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 한 것이 된다. 즉 桓雄(환웅)을 桓因(환인)의 서자(庶子)로 적은 것이다.


 
한편, 일제시대에 일본 식민사학자 금서룡이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위조하기 이전의 판본에는 昔有桓 口+王 이라 되어 있었는데, 최남선과 일본학자 녹도승은 昔有桓國(석유환국)을 금서룡이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날조하였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때 口안에 王이 든 글자를 국(國)의 이체자로 본 것이 된다.


 
그런데, 금서룡이 날조하기 이전의 昔有桓 口+王 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는 문구에서 그 내용으로 볼 때, 謂帝釋也(위제석야)의 해석상 앞의 昔有桓 口+王은 昔有桓因(석유환인)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순조로운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삼국유사 판본에서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경우에는 앞의 네 글자는 자연히 昔有桓因(석유환인)이 맞는 것이 된다.


 
다만, 桓國(환국)이라고 기록하는 경우에는, 삼성기(三聖記, 안함로 저, 원동중 저>, 태백일사 한국본기(桓國本紀, 이맥 저), 조선시대 남구만 선생의 약천집 등의 자료에서처럼, 庶子桓雄(서자환웅)을 庶子部桓雄(서자부환웅)이나 帝釋庶子桓雄(제석서자환웅) 등으로 해석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논리상 맞는 것이 된다. 남구만 선생의 약천집에서는 朝鮮之初 有桓國帝釋庶子桓雄(조선지초 유환국제석서자환웅)...이라 적고 있다.


 
이상으로 위 삼국유사 조선초기 판본에 따르면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해석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왕검조선)을 지을 때, 昔有桓國(석유환국)이 아니라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적은 것이 확실한 것으로 된다.


 
그렇다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생략된 부분과 모순된 부분을 역사적으로 보완하면,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록은 연대기적으로도 아주 정확한 기록이 된다.

 

 

다만, 한인(桓因)과 한웅(桓雄) 시대의 역사를 나라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사람 중심의 역사로 기술한 점에서, 후세인들이 자칫 신화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만, 제석(帝釋)은 불교의 신(神)만이 아니라, 원래는 한국(桓國) 시대의 임금이던 7대 한인 중 5대 석제임(釋提壬) 한인(桓仁:桓因)을 가리키거나 7대 지위리(智爲利) 한인(桓因)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인데, 한웅이 석제임 한인의 아들이라 할 때는 직계 아들이 아니라 자손이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 <삼국유사> 판본 비교. <사진왼쪽 <삼국유사>는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임신본(壬申本, 명나라 황제의 연호인 정덕正德을 따 정덕본이라고도 함), 사진 오른쪽은 이마니시류가 변조하여 세간에 퍼트린 경도제대 영인본.     © 편집부
 
 
 

▲ 석남 송석하 소장 <삼국유사> 필사본이다. 학계에서는 석남 송석하 소장 필사본을 임신본 이전의 고판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 편집부
 

 

 

 

[참조:  단군신화로 조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무려 16년에 걸쳐 「조선사」의 간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조선사」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이전) 1, 2권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획해 열겠다고 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최남선 등 역사학계가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친일파 이병도, 신석호 등은 단군조선시대까지 없애버리려고 일제에게 더욱 충성하고 견마(犬馬) 가 되어 일제가 만든 <조선사 35권>외 선조들의 삶의 땅을 한반도로 국한한 <대국사관>을 집필하여 조선사35권과 대국사관이 우리 역사인양 교과서에 싣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현재까지 국내 삼국유사 번역자 대부분이 今西龍(이마니시) 등 일본인 학자들괴 매국역적 이병도 일파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된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왜곡한 자료를 원본으로 활용하면서 삼국유사를 번역하여 우리민족 뿌리 역사를 잘못 인식 시키고 있다.

 


이는 민족사 발전에 크나 큰 죄악이며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과 위대한 역사가 왜곡 말살되도록 광복 후 지금까지 청산하지 못하게 이병도 일당 후학들이 지금도 버젓이 사학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현실이다.



今西龍(이마니시) 등 일본인 학자들과 친일식민사학자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으로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된 왜곡된 자료를 근거해서 삼국유사를 번역하여 시중 서점에 유포시키고 있는 삼국유사 번역자들께서도 깊이 반성하시고 이에 대한 책자를 즉시 리콜하여 자진 소각시키고 두 번 다시 이러한 책자를 펴 내지 말아 주기 바란다.

 


이마니시(금서룡)는 왜 '석유환국'에 주목했을까?

이마니시는 왜 ‘석유환국’이란 이 네 글자를 조선사 제거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일까? 당시 일본이 수거한 20여만 권의 서적들 중에는 한민족의 고유 사서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었을 것이다.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초간본 30권 중의 일부도 수거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1911년은 일본이 사서 수거 작전을 감행하던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이마니시와 주변 인물들은 <환단고기> 같은 사서들이 전하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근세조선의 건국 이전에 이미 7,8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를 어떻게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심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십여년(1911~1926) 동안 그 사서들을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마침내 환국 - 배달 - 고조선의 역사를 ‘한꺼번에’ 말살할 수 있는 결정타로 ‘석유환국’, 이 한 구절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 일연이 '천제 환인'을 '불교적 환인'으로 주석을 단 것이 신화로 둔갑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이마니시가 석유환국에 주목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일연이 석유환국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제석은 인드라Inder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제석환인帝釋桓因Sakra-Devanam Indra을 줄여서 제석 또는 환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환국을 세운 천제天帝가 곧 환인桓仁이다. 비록 ‘인’ 자의 한자 표현이 다른지만, 승려 일연은 환인 천제를 불교의 신, 환인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일연은 환국 옆에 “불교의 제석을 이른다(謂帝釋也)”라고 임의로 설명을 붙여 환인천제가 세운 나라인 환국을 불교의 신, 환인의 왕국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삼국유사>의 잘못된 주석에 의존하여 환국을 신화의 역사로 부정한 것에 대해 이마니시는 ‘자신은 일연의 기록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그는, 1926년에 ‘석유환인’이라 새겨진 [삼국유사]<경도제대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2)

플러스코리아, 천산태백 칼럼니스트, 삼국유사 고조선조, '환인이냐 환국이냐' 謂帝釋也(위제석야)가 논리적 해석의 관건, 2013/03/07 

 

 

 

https://youtu.be/9lJdR4xYByU

 

 

 

 

 

 

 

 

<자료출처>

 

 

(1)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690

 

(2) 삼국유사 고조선조, '환인이냐 환국이냐':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3/03/07 

 

 

 

<참고자료>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1: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2/12/29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2: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3/01/01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3: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3/01/04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재해석-4: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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