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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1)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 삼국사기는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대야발 2008. 3. 2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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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고대사에서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정사(正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아닌가, 그런데 그게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인가? 사대주의 사상으로 쓰여진 책 아닌가?”

 

 

[유석재의 돌발史전] 삼국사기는 과연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삼국사기에 대한 세 가지 고찰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 /문화재청

 

 

 

 

저도 오래 전 청소년 시절에, 지금 표현하자면 ‘국뽕’이라 말할 수 있는 생각에 젖어 있었던 때가 잠깐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막 출간된 ‘환단고기’를 읽고 나서 저 스스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삼국사기는 사기품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유사품이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의 역사학과에 진학하고 대학원 공부까지 할 무렵엔 뭔가 스스로 삼국사기에 대해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삼국사기의 역사관이 사대주의에 의해 씌어진 것인가의 문제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처음 사 읽었던 삼국사기는 동서문화사에서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던 두 권짜리 번역본이었습니다.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뜻밖에도 ‘신라본기’가 맨 처음에 수록돼 있었습니다. 신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으려는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삼국사기가 고구려를 정통으로 한 것이라는 일설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용을 읽어볼수록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곳곳에 수록돼 있는 김부식 자신의 사론(史論)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멸망함이 마땅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쓴 것은 잘한 일이다”… 참으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기가 막힌 말들이 많았습니다. 김부식을 ‘모화사상으로 똘똘뭉친 사대주의자’로 보는 것은 일리 있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겨납니다. “그렇게 사대주의적이고 중국 중심적인 입장에서 쓴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과연 타당한 태도일까요? 물론 용어의 사용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점들이 눈에 띕니다. 중국으로의 사신은 모두 ‘조공’이었고 왕의 죽음은 모두 붕(崩)이 아니라 그보다 격이 낮은 훙(薨)입니다. 또한 철저히 신라 중심적인 서술이었으므로 신라에 불리한 내용들은 많이 빠뜨렸다는 의심도 듭니다. 열전 10권 중 3권을 김유신전으로 도배하고,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항쟁한 백제 장수 지수신을 누락시키고 당나라에 항복한 흑치상지를 열전에 넣는 등, 의혹은 끊이지 않습니다.

 

 

 

김부식 표준영정. 권오창 화백의 작품이다.

 

 

 

그러나, 숱한 사론을 통해 비뚤어진 시각을 피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고, 용어를 중국 중심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납토성을 비롯한 많은 고고학적 발굴과 더 오래된 다른 기록과 합치되는 부분들은 삼국사기가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기록들의 수집과 편집을 거쳐 매우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 끝에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기록해 울릉도와 독도가 최소한 그때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기록한 책 역시 삼국사기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가 삼국사기를 읽을 때엔 그 ‘사대주의적인 의도’를 충분히 감지한 상태에서 제시된 기록들을 검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는 고구려의 ‘유기(留記)’와 ‘신집(新集)’도(이것은 책 이름이 아니라 그저 ‘남아있는 기록’ ‘새로 편집한 책’이란 뜻일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서기(書記)’나 신라의 ‘국사(國史)’ 또는 고려 초의 ‘구삼국사(舊三國史)’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을 최고(最古)의 정사로 삼아야 하는 우리 역사학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숱한 왜곡으로 가득찬 허술한 기록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더 큰 오류를 낳게 될 것입니다.

 

 

 

둘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 책만이 존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 후의 상황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부식은 인종 23년(1145)에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했습니다. 이때는 김부식 자신에 의해 묘청의 난(1135∼36)이 진압된 이후의 일입니다. 묘청의 난(여기서 ‘亂’이란 용어가 전통적인 왕조사관에 입각한 것임은 물론입니다)이 진압됐다는 사실은 서경으로의 천도,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을 표방한 정치세력이 몰락했음을 의미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며, 일련의 낭가(郞家)사상과 자주적-고구려계승 의식을 가진 세력이 유가(儒家)사상과 사대적-신라계승 의식을 가진 세력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충남 천안 국학원에 있는 묘청 동상.

 

 

 

 

설령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남송(南宋)의 선진문화를 흠모하는 문벌귀족 세력이 당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대주의적 기술태도라는 것은 김부식 자신의 취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신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각과 다르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 H. 카는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역사가를 연구하라”라고 했습니다.

 

 

셋째, 그런 사대주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기술’했다는 행위 자체는 일정한 ‘자주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 점은 김부식 자신에게도 딜레마였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삼국의 역사 모두를 ‘본기(本紀)’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술에서 ‘본기’는 제후의 역사인 ‘세가(世家)’와는 달리 군주, 즉 왕이나 황제의 역사를 적는 카테고리입니다. 따라서 “김부식이 철저히 중국의 지방사로서 우리 역사를 보았다”는 주장은 조금 곤란합니다. 혹자는 삼국사기에 ‘세가’가 없다는 점을 들어 김부식을 공격하지만, 사실 우리의 역사에서 지방분권적인 제후국(諸侯國)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 점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이후의 역사책들은 어땠을까요? 조선 초에 씌어진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세가’란 항목에서 기술하고 있고, ‘본기’는 없습니다. 철저히 우리를 ‘제후국’으로 보았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 삼국사기의 차별성은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삼국사기를 ‘민족자주적인 입장에서 씌어진 역사서’로 볼 수 없다는 점 또한 명백하지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덕적 합리주의라는 일정한 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삼국사기’는 그것 나름으로 값어치를 가진다. 또 당시의 사대적인 환경이나 유교적 가치관이 풍미하고 있는 속에서도 자아발견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는 점이 지적되고 아울러 그곳에 드러나고 있는 강한 국가의식도 높이 살 만하다.” 걸러서 읽어야 한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 뒤에는 한국고대사가 ‘이국(二國)이 아니라 ‘삼국(三國)’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1)

 

유석재 기자, [유석재의 돌발史전] 삼국사기는 과연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2023. 6. 9.

 

 

 


"삼국사기를 지을 때 김씨의 마음은 이를 독립의 조선사로 지은 것이 아니라 지나(중국) 역대사 가운데 동이열전의 주석으로 자처함이 명백하도다."(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선유들이 말하되 3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없어 부족하므로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다."(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단재 신채호는 '삼국사기'를 이렇게 맹렬하게 비난했다. 근대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 '삼국사기'는 폐기되어도 아쉬울 게 없는 책으로 전락했다. 근대 애국지사들은 '삼국사기'에 민족정신을 말살한 역적이요 사대주의 화신이란 낙인을 찍었다.

 

 

근대 사가들이 '삼국사기'에 새겨놓은 낙인은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삼국사기'가 중국 역사서들을 그대로 모방하여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고 인식한다. 거기에 관찬 역사서에 대해 갖는 반감이 더해져 '삼국사기'는 읽지는 않지만 비난할 수 있는 역사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그저 사대에 찌든 역사서로, 관변적인 역사서로 매도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12세기 중세 보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삼국사기'에서 근대 사가들이 그토록 원했던 '민족정신'을 고취할 만한 요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민족에 대한 개념도 없고, 민중 의식도 없고, 요동벌에 대한 영토 의식도 없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관계는 수나라, 당나라, 돌궐, 왜국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삼국은 모든 나라와 필요에 의해 연합하고 필요에 따라 전쟁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적일 뿐이다.

 

 

이처럼 김부식에게 역사는 근대 사가들이 생각하는 역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근대인들의 역사 관념과는 다른 지점에서 역사를 구성한다.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삼국사기'는 역사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출구이기도 하다.

 

 

●천재지변도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우박이 내려 나는 새가 죽었다.'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고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고 서울에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었다.'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우렛소리 같았다.' '주력공의 집 소가 한 배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뱀이 남쪽 고방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에 박히고 토성이 달을 범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TV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본기>는 이 천문현상과 천재지변에 관한 일을 정치적 사건만큼이나 비중있게 다룬다. '삼국사기'에서 천재지변은 전쟁이나 반란이나 왕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경고하거나 예시하는 조짐이다. 그야말로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 나타난다.

 

 

천재지변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경고이자 재앙을 예고하는 징표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는 천재지변이 닥칠 때 늘 자신의 행위를 돌아봐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천재지변을 제대로 해석하여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다. 만약 통치자가 천재지변의 경고를 받아들여 하늘의 해와 달처럼 투명하게 잘못을 드러내고, 그 잘못을 고치면 재앙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조짐을 보고도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재앙을 피할 길이란 없다.

 

 

김부식에게 천재지변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천재지변은 인간사에 감응하고 인간사에 개입하는 역동적 실체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자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김부식에게 역사는 자연과 인간의 연동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현상을 역사적 사실로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 미신으로 치부되어 역사 저편으로 추방될 뿐이다. 김부식의 시대와 우리 시대는 역사적 사실조차 그 함의가 달랐다. 따라서 역사는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어떤 것을 사실로 인식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우리 시대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평강 공주와 온달, 또 다른 역사

 

김부식은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다. 대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삼국사기' <열전>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중 '온달전'은 문장의 백미다. 한 말의 문장가 창강 김택영은 박지원의 '야출고북구기'와 함께 '온달전'을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이라고 칭송했다. 삼국시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온달전'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여기에 답한다.

 

 

평강왕의 공주는 궁중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공주가 울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공주는 사대부의 처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의 처로서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가난하여 추레하지만 마음만은 올곧고 순수한 온달은 공주가 찾는 짝이었다. 공주가 온달을 만나 한 말도 바로 동심(同心)이다. 한 말의 곡식과 한 자의 베를 나눠 먹고 입더라도 마음이 맞으면 함께할 수 있다고. 마음이 맞는 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믿음이 공주를 움직인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온달은 공주의 내조 덕에 장수로 성공한다.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고구려의 땅을 찾기 위해 아단성 전투에 참여한다. 온달은 공주에게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던지고 전투에 나아갔다. 온달은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그는 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온달의 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생사는 결정되었으니 돌아가시라.'고 마음을 풀어준 뒤에야 관이 움직였다. 자신을 믿어준 공주에게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온달, 그 마음을 알아준 공주. '온달전'은 어리석고 미천한 남자가 아내를 잘 만나 성공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부부이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주고 믿어줬던 지기였다.

 

 

'삼국사기'는 주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다. 즉 통치자의 역사를 기록한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는 <열전>을 통해 이런 한계를 넘어선다. <열전>은 <본기>에서 담지 못한 삼국시대의 다양한 삶의 결들을 잡아낸다. 정사가 담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열전>에서 풀어내어 역사 너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2)

 

서울신문,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고전톡톡 다시읽기]<26> 김부식 '삼국사기', 2010. 7. 26. 

 

 

 

 

 

 

역사에 대해 좀 알고 <삼국사기>를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과연 현재 전해 내려온 <삼국사기>는 고려인 김부식이 쓴 원본과 내용이 같은가?

 

김부식이 아무리 중국의 모화사대주의에 찌든 유학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조상의 역사를 폄하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고려는 그나마 민족의 주체성이 꽤 있던 나라였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김부식을 나쁘게 평가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삼국사기의 원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런 의문을 영원히 불식시킬 수 없으리라 본다.

 

 

 

■ 성훈 칼럼니스트, 현 삼국사기는 원본인가? 조작인가?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본 삼국사기는 원본의 내용이 맞는가

 


일왕칙명으로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역사조작을 하게 되고, 그 일환으로 20만권이 넘는 고대사서를 불태워 버린다. 그 와중에도 일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불태우지 않고 남겨놓는다. 왜 이 두 사서는 불타지 않았을까? <삼국유사>는 단군신화 조작에 이용하느라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이고, <삼국사기>는 왜 불타지 않았을까?



삼국사기의 대표적인 의문점


1) 중국 사서에도 엄연히 적혀있는 고구려의 건원칭제 사실이 없고, 중국이 매번 XXX대장군 XX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과, 중국에 조공을 올렸다는 기록들이 너무 많다.



2)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가 <한단고기>와 많이 다르며, 고구려의 건국이 신라보다 늦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3) 지리지에서 패수를 대동강으로 평양을 서경으로 비정한 <삼국사기>의 저자들이 모르는 지명이 360개나 된다는 점. (이는 대륙에 있었던 지명으로 본다)



4)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태왕 ~ 문자명왕까지의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열전의 최치원 전에서 슬쩍 고구려의 영토를 언급한다.)



5) 후기 신라와 함께 남북조시대를 연 대진국(발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삼국의 역사서이니 대진국을 넣지 않을 수도 있으나, 굳이 뺀 이유를 모르겠다.)



삼국사기 의문점에 대한 해설

 

▲ 장수제의 연호가 건흥이라고 새겨진 불상의 뒷면

 

 

 

1) 고구려가 건원칭제를 하지 않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수시로 올렸다 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임이 밝혀진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隋書)>에 보면 “位宮玄孫之子 曰昭烈帝 (위궁(산상왕)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 말한다)”라고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소열제(昭烈帝)라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 임금 중에서 유독 고국원왕만 황제였을까? 그리고 이 기록을  김부식이 못 보았을까?



참고로 고구려의 건원칭제를 밝히는 사서로는 <한단고기>가 있고, 유물로는 광개토태왕 비와 1979년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근처 사찰에서 발견된 불상(명금동석가삼존불광배)에서 ‘고려대왕(高麗大王: 장수열제)’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있었을 이 유물들을 김부식은 과연 몰랐을까?



2) <한단고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북부여의 후손으로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된다. 엄밀히 말해 고조선의 54대 단군이요, 국호를 바꿔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빠져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부여의 해부루가 도읍을 가섭원(동부여)으로 옮겨가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한단고기>의 내용과 같은 내용을 김부식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쓰지 않고 이상하게 써 버렸다.



즉 쉽게 말해 요즈음 표현으로, 고주몽은 고조선과 북부여라는 대그룹을 물려받은 재벌 3세로 그룹이름을 바꾼 것으로 봐야 하는데 (예를 들어 럭키금성-->LG),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 졸본에서 단칸방에서 출발해 자수성가하는 창업자로 보았다. 게다가 <한단고기>에는 동명왕이 고주몽과 별개의 인물로 나오는데,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동명왕으로 본 것이다. 이는 북부여 역사를 언급 안함으로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연관성을 끊으려 한 의도로 보인다.



게다가 김부식은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보다 앞세우게 하기 위해 고주몽의 나이를 20세나 줄여 버린다. 고주몽은 동부여의 금와왕과 같은 세대인데, <삼국사기>에는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와 같은 세대로 나온다. 그렇게 일찍 죽는 사람이 어떻게 단칸방 소기업에서 단시간 내에 그룹회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게 과연 그 짧은 시간에 가능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3) 우리 고대강역에서 가장 중요한 패수의 위치와 평양의 위치를 잘못 비정했다. <37권 잡지 지리>에서 우리 고대 강역에서 중요한 위치인 패수(浿水)의 위치를 대동강으로 분명하게 비정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은 서경(西京)인 것 같다고 적었다. 그 근거로 <당서>의 기록을 인용했다. 즉 <삼국사기>에 의해 패수가 현 대동강으로 비정되는 바람에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가 전부 현 북한 지역이 되고,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 실제보다 엄청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필자는 김부식이 인용한 <당서>를 열심히 읽어 보았으나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확정적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패강의 어귀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이 된다.”또는 “패강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다.”는 문구가 있다. 아무리 사대주의에 물들어있는 유학자라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집필진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데 이런 간단한 글귀만 보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단정지울 수는 없다. 패수란 중국 사서에서도 숱하게 언급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뭔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4) <삼국사기>는 본기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구체적으로는 언급 안했지만, 46권 최치원 열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100만으로 북쪽의 유, 연, 제, 노를 위협하고 남으로 오, 월을 침공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정벌에서 기인되었다.”라는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다.



김부식은 고구려가 하북성에 있었고, 광개토태왕이 염수(내몽고)를 정벌하고, 토곡(티베트)을 순시하고 당시 대륙의 동쪽에 있었던 백제(산동성)와 신라(안휘,절강), 왜(광동,복건)를 정벌한 내용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후대의 조작일까? 참고로 당시 고려는 대진국이 망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사서를 많이 전해 받았다. 그 목록은 조선시대 <사문난적 斯文亂賊 >과 일제의 분서갱유의 목록에도 있는 것이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서 당대의 최고 석학들이 모르겠다는 지명이 무려 360개나 된다. 이 지명들이 당시 고려의 영역 안에 있었으면 과연 김부식이 몰랐을까? 고구려와 백제 지명은 자료 유실로 그렇다고 치더라도, 신라의 지명까지 모르겠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참고로 낭산(狼山)은 신라 27대 선덕여왕과 31대 신문왕이 묻힌 곳인데, 신라계 고려인 김부식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현재 경주에 능이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필자는 감히 아래 셋 중 분명 하나일 것으로 본다.


1)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쥔 이성계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고는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청한다. 결국 조정은 명나라의 뜻에 따라 스스로 대륙을 지배했던 조상의 역사를 지우고 <삼국사기>의 내용을 고치게 된다. 참고로 조선이란 국호는 명나라가 정해 주었다.



2) 일제는 우리 고대 사서를 모두 다 없애는 것보다는, <삼국사기>의 원문을 약간 수정해서 남겨놓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 사서에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리라. 그 수정 내용이란 일제의 반도사관에 맞추어 내용을 바꾸는 것과 삼국의 위상을 깎아 내리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



3) 조선이 알아서 고쳐놓은 내용에서, 일제가 다시 또 필요에 의해 일부 고쳤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조선에서 고쳤고, 어떤 것은 일제가 고쳤느냐?”고 반문하면 그건 명확히 대답하기 곤란하다. 조선이든 일제든 누군가가 고치긴 고친 것 같은데 누가 얼마큼씩 고쳤냐는 것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편찬과 간행의 역사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해 김부식이 당대의 석학 10명과 함께 저술한 삼국의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을 마쳤다는 역사 기록은 있으나 책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 김부식의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다가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면서 원고가 없어진 것 같고, 후대에 누군가가 다시 편찬했으리라 짐작된다.



고려 때 얼마나 간행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조선 태조 때인 1394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중종 7년(1512년)에 다시 간행된 책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현재 옥산서원에 그 때의 간본(刊本)이 소장되어 있다. 이후 구한말의 유학자며 사가인 김택영에 의해 중국 남통에서 교정되어 <교정삼국사기>가 간행되는데, 이 책은 원본 <삼국사기>에 잘못 기록된 것을 교정해서 새로 출판하여 붙인 이름으로 이 때가 일제치하인 1916년이다.



이런 여러가지 의문점은 단 하나로 귀결된다. 즉 중국 대륙을 지배한 조상의 역사를 철저히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반도 안에만 있었던 민족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삼국의 참 역사를 김부식이 정말로 몰라서 안 적었거나, 아니면 제대로 적었는데  후대의 누군가가(조선 또는 일제) 내용을 일부 고쳤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본 삼국사기의 의문점


신라인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 살펴보면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인지 후대에 누군가가 조작을 한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당시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KBS <해신>으로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장보고의 청해진은 과연 어디일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반도 땅에서 장보고와 을지문덕의 소문을 들을 수가 없어서 중국의 서적을 인용하여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나 장보고의 청해진이라는 지명이 반도에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진다. 그리고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 360개에는 분명 살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4 장보고전>에서는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진을 설치케 하였다. 그 후 해상(海上)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었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을 설치케 했고, 그 청해진이 완도라고 분명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전체를 통해 삼국시대의 지명을 현재(고려)의 지명으로 확정해서 기록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그럼 현 완도는 청해진일까? 고려 때의 행정지명은 잘 모르겠으나, 조선 초부터는 완도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현재 완도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중제사의 일종인 사독(四瀆)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기타에 청해진(조음도 助音島) 등이 있다고 적어 놓았다. 김부식은 이상하게 청해진의 지명을 열전에서는 완도로 확정해 적어놓고, 제사에서는 조음도로 적었다. 즉 청해진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두 군데로 지명한 것이다. 그럼 청해진이 있었던 조음도는 현재 과연 어디일까? 



조음도(助音島)를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하니, 완도에 있는 섬이 아니라 거제도에 있는 섬으로 나온다. 그리고 현 완도 주민들은 현 완도 본 섬이 신라 때는 조음도라 불리다가 고려와 조선 때는 완도로 불렸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확실한 사료적 근거가 없다. 1970년 후반부터는 조음도가 완도 본 섬에서 30m 떨어져 있는 12.5만m2(약 3.8만평)의 작은 부속섬인 장도(將島)의 옛 지명이라는 주장이 사학계와 연구조사단에서 나와 지금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다. 

 
사학계는 그 근거로 조음은 조감(潮減 : 음력 매월 8일과 23일)의 이두식 표현이라는 전제 아래 조감선창이 있는 섬으로 하루 종일 보행이 가능하고, 또 조감은 ‘작은’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작은 섬이라는 이유를 들어 조음도는 장도(將島)의 옛 지명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고 억지 해석이 아닐 수 없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자기 조상의 역사를 축소 왜곡하는 실력은 한국의 강단사학계가 WBA/WBC 헤비급 통합참피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삼국사기> 기록에서 보듯이 청해진은 군사 1만 명이 주둔했던 진영으로, 당과 신라와 일본과의 해상무역의 중심지요 군사적 요충지(수군기지)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수군기지로는 청해진이 신라 최고의 천혜의 기지란 말인데, 불행하게도 현 완도는 청해진 이후에 역사적으로 주요한 수군기지로 기록된 적이 없다.



임진왜란 때도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과 3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이순신장군의 통제영(한산도)에서도 빠져 있다. 그건 완도의 입지조건이 대규모 수군기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기지는 진해에 있으며, 완도는 주요 무역항에도 들어가 있지 않다. 그만큼 항구(기지)로서의 입지조건이 다른데 비해 좋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 청해진이 있었다고 하는 완도의 장도(將島)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장도(將島)에는 청해진 유적지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과연 이곳이 그 유명한 장보고의 청해진인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선 썰물 때는 완도에서 차량으로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개펄이 있어 모든 배가 바닥을 개펄에 묻어야 한다. 그런 장도(將島)가 과연 수군기지로 자격이 있는 건지? 썰물 때는 출동도 안하고 육지에서만 싸우고, 만조 때만 배를 타고 나가 싸운단 말인가? 그리고 만조 때만 배가 들어와 무역을 한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 이야기이다. 


수군기지로서의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우선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지 않아야 하고 개펄이 없거나 작아야 한다.
둘째 조건은 군선이 육지에 최대한 가까이 접안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수군기지로의 입지조건을 가진 항구가 홍콩 섬이다. 항공모함이 도심 바로 옆 바닷가에 접안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직하면 영국이 홍콩을 100년간 조차했겠는가? 당나라와 신라 시절 최고의 무역항이 현 완도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장도(將島)는 갯벌이 길어 썰물 때 접안(배를 육지에 붙임)이 불가능하므로 절대로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기로 유명한 인천 앞바다의 강화도를 백제의 관미성(수군기지)이라고 주장하는 강단사학계의 작품인 듯 하다. 강단사학계에는 해군 장교 출신이 없나 보다.(?)



그리고 장도(將島)의 면적은 3.8만평으로 군사 1만 명을 주둔시킬 만한 곳이 아니다. 군사 1만 명이 주둔하려면 지원 인력과 그 가족을 합치고 무역 거래를 위해 머무는 유동인원까지 합치면 최소 5만 명이 거주해야 한다. 가까운 완도 본 섬까지 주둔을 했다고 치자.

 
현재 완도 읍(본섬)의 총 인구는 20,000명이고, 완도군 전체 섬의 인구는 58,000명이다. 1974년 완도군 전체 인구가 최대 147,000명인 적도 있었다고 하니 완도 읍 인구가 최대 5만 명이 된 적은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과연 이 완도에 최소 5만 명이 거주할 수 있었다고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군사적으로 수군의 요충지도 아니고,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입지 조건에다가, 인구 5만 명이 항시 거주해야 하는 청해진은 이곳 완도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을 잘 분석해 보면, 청해진은 이곳 완도가 아니라 다른 곳(중국 산동성)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의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의 기록은 후대에 누군가가 고쳤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조작하려면 확실하게 하든가, 아니면 아예 조작을 하지 말든가 해야 한다. 이 세상에 100% 완전범죄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조작해 놓으면 어딘가 그 흔적이 남는 법이고, 그 역사적 사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야 하는데 잘 맞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 훼손된 우리의 역사를 반드시 복원해야 하며, 반드시 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사학계는 역사적 사실이 조작임이 밝혀지면 즉시 바로 잡으면 되거늘 이상하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조작된 역사적 사실이 밝혀져도 꿈쩍도 하지 않고 역사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



강단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가 죽으면서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라 했고, 단군에 대한 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고 밝히면서  고기(古記)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후학들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도대체 왜 그런지 한 번 그들의 머리 속을 열고 들어가 연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강단사학계는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자 자기들이 지금까지 연구하고 강의했던 학설들이 전부 거짓임이 밝혀질 것이 두려워서인지 <한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버렸다. <한단고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근거가 없자, <한단고기>에 씌어진 단어 중 기술,개발,산업,학교 등과 같이 현대적인 용어가 있다는 이유로 현대에 씌어진 위작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트집을 잡아 위서로 몰아 모든 역사적 내용까지 전면 부정하게 된다. 원 세상에! 이런 어거지가 어디 있는가?



<삼국사기>의 내용 중 일부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은 설사 일부가 조작이라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모든 내용을 전면 부정하진 않는다. 위작된 내용은 위작된 것대로 가치가 있고, 위작이 되지 않은 내용은 정말로 소중한 우리의 사료이기 때문이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부 내용의 조작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사서 전체의 내용을 부정해 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참고할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강단사학계는 우리 사료가 없더라도 중국과 일본에서 준 엉터리 한국사 자료를 가지고 지금까지 이상 없이 자리를 잘 지켜왔기 때문에 우리 사료가 필요없을 지 모르겠으나, 민족사학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의 진실을 소중히 생각하고 역사를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에 귀중한 사료 한 개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이런 자세가 서로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3)

 

플러스코리아, 성훈 칼럼니스트, 현 삼국사기는 원본인가? 조작인가?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본 삼국사기는 원본의 내용이 맞는가, 2008/04/03 

 

 

 

https://youtu.be/3KYU-TUAeZQ

 

 

 

 

 

 

<자료출처>

 

 

(1) 유석재의 돌발史전] 삼국사기는 과연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daum.net)2023. 6. 9.

 

 

(2) [고전톡톡 다시읽기]<26> 김부식 '삼국사기' (daum.net) 2010. 7. 26.

 

 

(3) 현 삼국사기는 원본인가? 조작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03 

 

 

 

<참고자료>

 

 

[역사의 진실]>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1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14

 

 

삼국사기, 누가 언제 왜 조작했나? (2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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