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본문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김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김부식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김근(金覲) 때부터였다.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견 관료인 예부 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까지 이르렀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부식은 13 · 14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김부식을 포함해 4형제의 이름은 송나라 문호인 소식(蘇軾)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4형제 모두 과거에 합격해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김부식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았고 매년 임금이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곡식을 받았다. 더구나 4형제 중 김부식과 둘째형 김부일(金富佾), 동생 김부철(金富轍, 뒤에 金富儀로 개명함) 3형제는 당시 관직 중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한림직(翰林職)을 맡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때 어머니 또한 포상되었으나 아들들이 임금의 은총으로 이미 녹을 받고 있음도 감사한데 그 위에 또 다시 포상을 받을 수 없다 하여 받지 않았다고 한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해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추밀원 승선 위계정(魏繼廷)의 천거로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한림원 등의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로는 예종(睿宗) · 인종(仁宗)에게 경사(經史)를 강(講)하기도 하였다.
1116년(예종 11) 7월에 문한관으로서 추밀원 지주사(知奏事) 이자량(李資諒)을 따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나라가 대성악(大晟樂)을 보내준 것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다. 6개월간 송나라 휘종(徽宗)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오는 길에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질을 가지고 왔다.
인종이 1122년에 즉위하자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 일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나서 국왕의 외조로써 국왕에게 칭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처와 함께 집안 행사에 궁중의 음악을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중국고사(中國故事)의 예를 들어 그것의 부당함을 논하고 적극 제지하였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때에는 침묵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송나라에 고종(高宗)의 등극을 축하하러 갔으나 금나라 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남천(南遷)을 하였으므로 수도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사실 당시의 사신 파견은 표면적으로 송나라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송나라와 금나라의 사이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한 정보수집 차원이었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송나라의 반대로 수도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자겸 일파가 정계에서 축출된 이후 관리들의 승진이 용이해졌는데 1130년(인종 8) 12월에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修國史)로 승진되어 재상직에 오른 후 다음 해 9월에는 검교 사공 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로, 1132년(인종 10) 12월에는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하였다.
과거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에 타자 묘청(妙淸) 일파가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유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 1월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김부식은 중서시랑평장사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고 있었는데 원수(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을 지휘 통솔해 그 진압을 담당하였다.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해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 · 김안(金安) · 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당시 개경의 재상들과 부하 장군들이 그에게 조속한 진압을 독촉하고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지연책을 추진함으로써 관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진압하려고 노력하였다.
서경 진압 도중 묘청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조광(趙匡)이 묘청 · 유참(柳旵) 등의 목을 베어 윤첨(尹瞻)으로 하여금 개경정부에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그들을 관대하게 처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개경의 재신(宰臣)들이 이를 듣지 않고 윤첨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반란군의 재결집을 야기시켰다. 이로 인해 1년 2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제압한 공으로 개경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 태보 수 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에 승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 태보(監修國事上柱國太子太保)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서경에서 개선한 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때 자신의 막료로서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頤)를 포상하지 않고 도리어 탄핵해 양주방어사(梁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윤언이가 이전에 주장했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 묘청의 난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경의 재신 중 김부식의 건의에 비협조적이었던 추밀원 부사 한유충(韓惟忠)도 좌천시켰다.
그러나 인종은 1140년(인종 18) 김부식 등 재신과 대간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 결과 윤언이 · 한유충이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보복을 염려해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김부식의 형제들이 죽고, 자신의 우호세력인 정습명(鄭襲明)마저 탄핵을 받아 퇴임하자 그 자신 역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동덕찬화(同德贊化) 공신호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의종(毅宗)대에 이르러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봉해졌다. 만년(晩年)에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瀾寺)를 원찰(願刹)로 세워 불교수행을 닦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은 김부식을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김부식은 인종이 죽기 직전인 1145년(인종 23)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해 바쳤다. 『삼국사기』의 편찬체재를 스스로 정하였고, 이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 · 정리시켰으며, 사론(史論)은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도 담당하였다.
문인이기도 했던 김부식은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인 김황원(金黃元) · 이궤(李櫃)와 함께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六朝風)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 · 송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동문수(東文粹)』와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져 오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인물조에서 김부식을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만나보기도 하였고, 윤관(尹瓘)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문(靈通寺大覺國師碑文)이 잘못되었다고 문도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자 다시 짓기도 하였다.
1153년(의종 7)에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1)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다.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이 목판은 이 당시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그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나타나나, 전본(傳本)이 없어 그 실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 이온문(李溫文) · 허홍재(許洪材) · 서안정(徐安貞) · 박동계(朴東桂) · 이황중(李黃中) · 최우보(崔祐甫) ·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 · 간관(諫官: 諫議大夫 · 起居注)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의 현실 비판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가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 『삼한고기(三韓古記)』 · 『신라고사(新羅古史)』 ·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 · 『화랑세기(花郎世記)』 ·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 『진서(晉書)』 · 『위서(魏書)』 · 『송서(宋書)』 · 『남북사(南北史)』 · 『신당서(新唐書)』 ·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 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 편찬은 왕권 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 ·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는 이미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 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가 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 국가적 자신감과 여진의 위협에 따른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지나친 사대주의 입장이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 가문과 윤관(尹瓘) 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이자겸(李資謙)의 충돌 등 문벌가문 간의 격심한 갈등이 겹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비리가 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갈등이 국가멸망의 원인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후세에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 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 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 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 · 신하 ·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기 · 지 · 표 ·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본 기
중국사서는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본기는 신라 12권(통일신라 7권 포함), 고구려 10권, 그리고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라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
원래 본기는 주요 사실의 기록으로서 주로 왕의 치적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본기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 · 천재지변 · 전쟁 · 외교 등 4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일정한 비율로 증감되고 있다.
정치기사는 본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서, ① 축성(築城) · 설책(設柵) · 수궁실(修宮室) 등 대규모 인력 동원에 대한 기록, ② 민심수람과 국민의 결속을 강행하려는 순행(巡幸)의 기사, ③ 관리의 임면(任免)이나 관청의 설치에 관한 기록, ④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와 풍흉에 따른 종교적 관례에 관한 기사, ⑤ 기타의 내용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정치기사의 내용은 삼국의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축성과 궁궐 조성 기록은 백제가 가장 많아 일찍부터 대외전쟁에 시달렸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라는 관리의 임면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순조로운 왕권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둘째의 순행기사는 135회의 기록(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이 있으나 삼국의 양상은 각기 달랐다. 즉, 신라는 구휼과 군사상 필요를 비롯하여 권농 · 영토확인 · 수렵 · 구인(인재등용) 등을 목적으로 하는 순행이 많았고, 백제 · 고구려에서는 주로 수렵(군사훈련)이 목적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순행은 제사 · 구인 · 독려 · 지세파악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출행 시기(出幸時期)가 천재지변과는 큰 관계가 없는 1·2월에 집중되고 있으며, 백제 · 고구려는 1∼3세기에, 신라는 9세기에 빈번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왕권이 약할 때 왕이 지방출장을 많이 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셋째의 관리임면 기록은 태자 · 왕비의 책봉이나 관리의 임명 등으로, 왕권의 구체적 행사를 표시한다. 신라에서 제일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의 종교적 기능에 관한 기록은 시조 · 종묘에 대한 제사, 풍요의 기원 및 재난 예방에 대한 기원을 내용으로 하며, 백제가 가장 빈번히 나타난다. 천재지변기사는 930여 회의 자연변이의 기록이다. 이는 600여 회의 천재와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상응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천재에는 혜성 ·5성 · 유성 · 일식 등으로 대표되는 천변(天變)과 가뭄 · 홍수 · 벼락 등의 천재가 있으며, 지변에는 지진 · 화재 · 동물변이 · 수변(樹變) · 인변 등이 있다. 이러한 천재지변 중에서도 혜성 · 일식 · 지진 · 가뭄 · 용 등은 큰 영향을 주는 구징(咎徵)으로서, 특정 사건에 대한 예고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들은 사망 · 전쟁 · 모반 등을 예언하는 것으로 천재와 지변은 상호 연관성이 있어 그에 대응하는 대책이 요구되었다.
한편 정확한 천재지변의 기록은 고대과학의 발달을 가져와 일식(14.8년) · 가뭄(9.2년) · 지진(10.3년)등의 주기 산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쟁기사는 삼국이 존속한 10세기 동안에 일어난 28개국과의 440여 회에 걸친 전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삼국간에 일어난 경우와 외국과의 싸움으로 구별되는데, 고구려는 대외전을 주도하였고, 백제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시련을 받았다.
그러므로 백제는 국가 발전이 둔화되었고, 고구려는 백제 · 신라와의 싸움을 적게 치렀기 때문에 중국과의 항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끝으로, 외교기사는 연 34개국과 620여 회의 교섭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외교 기록은 거의가 조공(朝貢)으로 대표되는 한중 관계가 중심이 되지만, 중국측에서 온 기록도 상당히 많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외교는 정치적 안정과 짝한다는 사실로서, 장수왕과 후위(後魏), 성덕왕과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공이 중화 사상의 표시라고 하여도 결코 종속 관계는 아니었고, 삼국의 자아 의식은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외교관계 기록에는 조공이라는 광의의 개념 속에는 진하(進賀) · 사은(謝恩) · 인질(人質) · 구법(求法) · 숙위(宿衛) · 숙위학생 등 다양한 외교 사절과, 책봉(冊封) · 조위(弔慰) · 책망(責望) 등 중국측 사절도 포함되었다.
외교기사에서 특기할 사실은 16명의 숙위와 10여 명의 숙위학생들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독특한 외교적 존재였다.
(2) 지
『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 거기(車騎) · 기용(器用) · 옥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이다. 그리고 제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데, 중앙관부(7권), 궁정관부(8권), 무관과 외직(9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 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오행지에 중심을 둔 『한서(漢書)』나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唐書)』와 다른 점이다.
우선,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 되며, 악지는 악기 · 가악(歌樂) · 무(舞) · 악공(樂工)의 순서로 되어 있다. 복색조 · 기용조 · 옥사조에 나타난 금지 조항은 전국민을 하나의 법규 속에 묶어 국민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4두품과 평민에 대한 동일한 대우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지리지가 큰 비중으로 취급된 것은 일종의 영토 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직관지에서는 중앙행정관부에 있어서 14관부와 19전(典: 7寺成典 포함.)을 균형있게 배려하고 있으며 궁정관부가 110여 개가 넘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왕권 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보게 한다.
(3) 표
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 · 종실표(宗室表) · 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와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4) 열 전
열전 10권은 중국 문헌에 비하면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 기준도 항목별(名臣 · 循吏 · 酷吏 · 儒林 · 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 · 공주 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중에서 김유신(金庾信) 개인 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어,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인물 나열이 핵심이 된다.
제1∼3권은 김유신전으로, 선조(武力^舒玄)와 후손(三光 · 允中 · 巖)의 업적을 강조하였고, 제4권은 을지문덕(乙支文德) · 거칠부(居柒夫) · 이사부(異斯夫) · 김인문(金仁問) · 김양(金陽) · 흑치상지(黑齒常之) · 장보고(張保皐) · 사다함(斯多含)의 전기이다.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 후직(后稷) · 밀우(密友) · 박제상(朴堤上) · 귀산(貴山) · 온달(溫達) 등 10인의 전기이다.
제6권은 강수(强首) · 최치원 · 설총(薛聰) · 김대문 등 학자의 열전이다. 특히, 최치원의 마한고구려설이나 백제의 해외 진출에 대한 견해는 설총의 『화왕계 花王戒』와 함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7권은 해론(奚論) · 관창(官昌) · 계백(階伯) 등 19인의 전기이다. 여기에서는 찬덕(讚德)과 해론, 심나(沈那)와 소나(素那), 반굴(盤屈)과 영윤(令胤), 비령자(丕寧子)와 거진(擧眞) 등 부자가 순국한 충의열사의 기록이 중심이 된다.
제8권은 향덕(向德) · 성각(聖覺) · 김생(金生) · 솔거(率居) · 도미(都彌) 등 11인의 전기이다. 특히, 효(향덕 · 성각) · 충의(劒君) · 기예(김생 · 솔거 · 百結) · 열녀(薛氏女 · 도미) · 효녀(知恩) 등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제9권은 창조리(創助利)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열전으로서, 왕을 시해한 반신(叛臣)의 기록이다. 제10권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열전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신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이다. 논찬이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 바, 『삼국사기』에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칙, 고구려본기에 7칙, 백제본기에 6칙, 열전에 8칙 등 모두 31칙의 논찬이 있다.
내용은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姓娶妻)나 혁거세의 왕후 동반 순행을 옹호한 점,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 곳 등에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는 신채호(申采浩)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 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改惡書)는 아니었다.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도 우리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 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 주도하의 관찬(官撰)이라는 역사 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 초의 역사 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 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첫째, 이 책은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말하자면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태조왕 · 고이왕 · 내물왕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전사관에 의해 역사 변천을 파악하여 신라 · 고려의 교체(交替)를 당위성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역사 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하늘의 변화[天災地變]와 인간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 내용을 추출시켰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왕의 정치 행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이 책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현실 비판을 특정한 과거의 사실인 백제 · 고구려 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虐民者)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 일파의 패배나 견훤 · 궁예의 멸망을 통일을 파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역사를 국민 교화와 계몽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넷째, 이 책은 강렬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대한 반론으로서 우리 나라 현실과 독자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서 엿볼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주의 사관이 아니라, 고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공적인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가치는 그것이 지니는 사료로서의 의미와 그 속에 반영된 역사 의식의 객관성과 자아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전 자료의 인용이나 기타 자료의 내용으로 보아 광범한 자료 인용의 원칙 속에서 피휘법(避諱法)이나 결필법(缺筆法)을 적절히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전거에서 분주(分註) 문제와 고기(古記), 그리고 구삼국사기의 관련 속에서 이 책의 사서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현존하는 판본 중 중요한 것으로서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삼국사기 권44~50(보물, 1981년 지정)
권44∼50 1책. 목판본. 13세기 후기에 인간된 것으로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어 성암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현존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판에서 찍어낸 후쇄본(後刷本)이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 듯한데,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고 잔존본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중종조 간본(刊本)의 오류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
50권 9책. 목판본. 1512년(중종 7)에 간행된 『삼국사기』 완질본이다. 명나라 무종(武宗),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판각된 삼국사기(국보, 2018-1 지정)와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계복이 중종 7년에 쓴 발문에 의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경주부(慶州府)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마멸되어 1행에 겨우 4, 5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경주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부임한 자신이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로부터 완본(完本)을 구하고 경상도 감사 안당(安瑭) 및 도사(都事) 박전(朴佺)과 의논하여 여러 읍에 나누어 새기게 한 다음 경주부에 돌려받았다 한다.
이 발문은 『삼국유사』에만 붙어 있으나, 여기에 『삼국사기』가 언급되어 있고 판본 또한 이 무렵의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간행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 판본에는 3종의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는데, 고려의 원각판(原刻板)으로 여겨지는 것과 1394년(태조 3)에 새긴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다.
권14 제1장 하반부와 권26 제2∼9장 하단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본문이 결실되어 있고, 어떤 것은 새김을 생략한 것도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중종조 간본 가운데 완질본으로 인쇄가 가장 선명하다. 1931년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1984년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영인하여 증수보주(增修補註)하여 학계에 제공하였다. 서울의 이병익이 소장하고 있다. 1981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3) 삼국사기(국보, 2018-1 지정)
50권 9책. 목판본.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것이다. 명나라 무종,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간행된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와 동일한 판본인데, 권수부분에 모필로 쓴 ‘萬曆元年月日玉山書院上(만력원년월일옥산서당)’이라는 기록이 있어 1573년 경주부에서 찍어내어 옥산서원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질본의 『삼국사기』이나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삼국사기(국보, 2018-2 지정)가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질본이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국보로 승격되었다.(2)
“오늘날 학사들과 대부들이 오경(五經)이나 제자(諸子)의 서책과 진·한시대 이래의 역대 중국 사서에는 간혹 넓게 통달해 자세히 말하는 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망연해져서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할 일이다. … 이제 마땅히 박식하고 뛰어난 재사를 얻어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전해 해와 별처럼 밝게 할 일이다.”
고려 중기 유학자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완성한 ‘삼국사기’를 바치면서 함께 올린 표문인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의 한 구절이다. 인종의 말을 빌려 ‘삼국사기’를 편찬한 취지를 설파했다. 당 시대의 지식인들이 중국 학문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의 삼국을 서술 대상으로 한 고려의 관찬(官撰) 사서(史書)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우리나라 역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가 개혁론자들의 복권으로 정치적 입지가 위축되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 ‘삼국사기’ 편찬을 주관했다. 1145년 71세 나이에 ‘삼국사기’를 완성하고 1151년 생을 마감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고대를 돌아볼 때 반드시 읽어야 할 기본 텍스트다. 고대국가의 흥망과 신화, 전설, 신앙, 풍속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고대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고,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삼국사기’ 말고는 고대사의 원전(原典)으로 삼을 만한 책도 없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130여년 후인 1281년 일연이 쓴 ‘삼국유사’가 있지만, 본사(本史)가 빠진 채 ‘나머지 일’인 유사(遺史)를 담은 사료라는 한계가 있다. ‘삼국사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고대사를 복원할 수 없다는 게 역사학계의 평가다.
‘삼국사기’는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뤄진 기전체의 역사서다. 본기는 천하를 좌우하던 제왕들의 사적을 쓴 것이다. 삼국을 완전한 독립국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가 제후들의 사적을 기록하는 세가(世家)에 고려 역대 왕들의 사적을 다룬 것과 대비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살수대첩이나 신라의 대당 전쟁도 주체적으로 기술했다.
‘삼국사기’는 고조선·부여 등을 독립 항목으로 다루지 않고 신라에 관한 기록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이덕일은 저서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에서 “김부식 개인이 감당해야 할 비판이라기보다는 기전체라는 ‘삼국사기’의 서술 체제가 받아야 할 비판”이라고 했다.
“본기, 지, 표, 열전으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그 내용을 다 채울 만큼 풍부한 자료가 있어야 비로소 서술이 가능한 체제”라는 것이다. 고조선 등을 별도로 상세히 쓸 만큼 자료가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부식이 유학 테두리에 ‘삼국사기’ 서술을 제한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게 우리나라 역사의 자주성을 드러낸 ‘삼국유사’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김부식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고구려본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편찬자는 논평하여 말한다”로 시작된다. 김부식의 말이다.
“위아래가 화합하고 백성들이 화목할 때는 비록 큰 나라라 하여도 이를 빼앗지 못했지만, 국정을 의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지 못해 사람들의 원성을 불러일으키게 되어서는 허물어져내려 걷잡을 수가 없었다. … 그러한즉 무릇 국가를 가진 이가 강포한 관리의 구박과 세도가의 가혹한 수탈을 방임해 인심을 잃게 된다면, 비록 정치를 잘해 어지럽히지 않고자 하고 보존해 멸망하지 않으려 한들, 이 또한 억지로 술을 마시고서 술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역사가 위정자에게 보내는 엄중한 경고다.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몰린 당시 상황에서 김부식이 왕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작가 김훈은 산문집 ‘풍경과 상처’에서 “고대사는 살육과 판타지를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김부식은 거대한 혼돈을 두어 마디의 문장으로 내리찍는다”면서 “김부식의 역사 속에서는 ‘기근이 일어나 자녀를 파는 자가 있었다’는 단말마의 인간고와 ‘흰 개가 대궐 담 위로 올라왔다’는 공포의 판타지가 동격의 기사로 대접받고 있다”고 했다.
“정사를 쓰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지금도 저 흰 개는 짖고 있다, 우리는 해독되지 않는 것들의 울음과 짖음을 해독되지 않은 채로 후세에 전한다, 저 개는 인간세(人間世)의 들판을 향해 짖고 또 짖으리, 아마도 김부식들은 그런 두려움에 가위눌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김부식이 진삼국사기표의 끝에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명산에 비장할 만한 것은 아니오나 깨진 항아리에 바르는 일은 없기를 바라나이다. 제 구구한 망언을 하늘의 해가 비추고 있나이다.”(3)
세계일보,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19) 삼국사기 - 위정자에게 보내는 경고, 2018. 3. 16.
참 이상한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왕명을 받들어 여러 명의 학자가 몇 년의 세월을 매달린 국가 프로젝트였던 우리나라 사서보다 이웃나라 사서를 더 신봉한다.
그들이 신봉하는 사서는 기년부터 틀리기 일쑤인, 말하자면 사서의 기본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허접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서에 나온 내용만을 믿고, 우리 사서를 믿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눈치 챘을 것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회학자로도 명망 있는 지은이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라왕실의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한국 고대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연구(?)랍시고 해놓은 엉터리 주장들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물론, '실증사학'이라는 등의 찬사까지 받으며 버젓이 정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학자의 양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지은이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이 서로 다르면 '일본서기' 내용을 따르고 '삼국사기' 내용을 믿지 않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만연하고 있는 사태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5년의 일이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과연 조작되었는가'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지은이는 '삼국사기'가 푸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으나, 그의 비판은 묵살되고 지은이는 학계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은 평생을 학자의 양심에 비추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애써온 구순의 노학자의 아마도 '마지막 투쟁'의 결과물이다. 1985년의 논문을 토대로 하고 지금까지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여 '삼국사기 불신론'을 향한 생애 최후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고대 한일관계사를 왜곡한 대표적인 일본인 식민사학자 8명(쓰다 소키치, 마에마 교사쿠, 오타 아키라, 이마니시 류, 스에마쓰 야스카즈, 이케우치 히로시, 미시나 쇼에이, 이노우에 히데오)의 주장을 분석했다.
항목별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견강부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낱낱이 밝혀낸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식민사학자 8명의 엉터리 주장을 개괄적으로 비판한다.
먼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소개하고 불신론을 주장한 학자들의 계보, 그리고 그들이 불신하는 대목과 터무니없는 근거까지를 낱낱이 분석하면서 그들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대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한다.
2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식민사학의 대들보라 부를 만한 2명의 식민사학자인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한국고대사론'과 이마니시 류의 '신라상고사론'에 대해 한층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학문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정치선전에 불과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 왜 오늘날까지 면면히 살아 있을까? 지은이는 "일본이 1945년 패전 후에도 이런 비학문적인 정치선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인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일갈한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병도를 필두로 김철준, 이홍직, 이기백, 이기동, 문경현을 거쳐 김현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왜곡시킨 한국고대사와 고대 한일관계사를 거의 그대로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일제 식민사학 극복에 앞장서야 마땅한 한국사학계에서 오히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고칠 까닭이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학문이 죽고 왜곡이 득세하는 역사학계의 현실에 통분한다.(4)
<자료출처>
(1) 김부식(金富軾)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삼국사기(三國史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3) [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19) 삼국사기 - 위정자에게 보내는 경고 (daum.net)2018. 3. 16.
(4) '삼국사기'는 과연 조작된 역사서인가? (daum.net)2016. 3. 16.
<참고자료>
김부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삼국사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삼국사기 속 신라 청춘의 사랑, 소설로 되살아나다 (daum.net)2022. 12. 2.
[이종길의 가을귀]삼국유사의 가치는 삼국사기를 보면 안다 (daum.net)2021. 3. 12.
[문화재의 뒤안길] 판본 서로 다른 삼국사기 (daum.net)202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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