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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8) 김종서(金宗瑞)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1)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8) 김종서(金宗瑞)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대야발 2018. 10. 15.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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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는 조선 전기 문신 김종서 외 28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이다. 『고려사』가 완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완성하였으며, 대체로 『고려사』를 축약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고려사』에 없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김종서는 조선전기 함길도 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83년(우왕 9)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사망했다. 144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인사권을 전담하기도 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 책임관을 맡았다. 좌의정으로 단종을 보필하다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1746년에 복관되었다.

 

 
 
 

1452년(문종 2) 2월 김종서(金宗瑞) 등 모두 28명의 춘추관(春秋館) 수사관(修史官)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중 정인지(鄭麟趾), 김종서 등 21명은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책은 『고려사』가 완성된 시기로부터 약 5개월여 만에 완성되었다. 『고려사』 편찬을 통해서 얻은 경험이 토대가 되었으며, 춘추관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 35권. ‘절요(節要)’라는 명칭이 붙기는 했으나, 『고려사』를 줄인 책이 아니라 『고려사』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사서(史書)로서, 고려시대사 연구의 기본 사료로 활용된다.

 

편찬이 완료된 다음 해인 1453년(단종 1) 4월, 1434년(세종 16)에 주조한 갑인자(甲寅字)로 출판되었다. 이때 찍은 책은 35권이 35책으로 장정(裝幀)되었다.

 

몇 질을 인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54질을 집현전(集賢殿)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단종실록(端宗實錄)』에 보인다. 이 초간본의 전질이 일본 재단법인 미장덕천여명회(尾張德川黎明會)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 도서에도 그 일부인 24책이 있다.

 

 

중종(中宗)  을해자(乙亥字)로 다시 간행되었으며,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규장각본(을해자본)을 대본으로 영인한 바 있고, 이를 1960년 동국문화사에서 다시 영인하였다.

 

같은 해 일본 가큐슈원[學習院] 도요분카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에서는 초간본(갑인자본)인 호사문고본을 영인했으며, 이를 대본으로 다시 197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 · 출판한 바 있다. 1968년 번역본이 동국문화사가 간행한 영인본을 사용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다.

 

 

 

1392년(태조 1)에 편찬되기 시작해 1395년(태조 4)에 완성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인 『고려국사(高麗國史)』는 이후 다섯 차례나 개찬(改撰)되는되는 과정에서,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로 편찬이 완료되어 1451년(문종 1) 8월 문종(文宗)에게 바쳐졌다.

 

그 자리에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김종서는 『고려사』는 열람하기에 불편하니, 새로이 편년체의 사서를 편찬할 것을 건의해 문종의 승낙을 받았다. 이에 5개월 만에 김종서 등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35권을 찬진하였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고려사절요』가 편찬된 것은 기왕에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 ·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 등 편년체 사서의 편찬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윤회(尹淮)의 『수교고려사』나 권제(權踶)의 『고려사전문』은 비록 내용상의 문제로 배포되지 못했지만, 둘 다 편년체 사서로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데 기본 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편찬 원칙으로 범례 4개항이 있다. 첫째는 치란흥망(治亂興亡: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럽거나 흥하거나 망함)에 관계있는 기사로서 귀감이 될 수 있는 기사는 상세히 기술하였으며, 기타는 『고려사』에 실렸으므로 간략히 처리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모든 자료를 실으면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치란흥망과 관계가 없는 기사는 삭제한다는 것과 정치적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는 왕과 왕실에 관련된 용어로서 비록 참유(僭踰: 분수에 넘쳐 지나친 것)한 것이라도 이를 직서(直敍)하며, 기사를 싣고 뺀 것을 항목별로 제시한 원칙이다. 직서의 원칙은 『고려사』 편찬과 똑같은 방식이며, 수록과 삭제의 원칙을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회(朝會) · 제사(祭祀)의 평상적인 일은 이를 못했을 때 기록하고, 임금이 직접 참여한 제사는 기록한다.

 

임금이 사찰에 행차하거나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도량(道場)을 연 것은 당시 군주들의 일반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 쓰지 않고 각 왕의 처음 기사만 쓰며, 반승(飯僧)이 1천여 명에 이르러 곡식을 많이 소비한 경우에는 반드시 쓴다.

 

상국(上國)의 사신 내왕은 번거롭더라도 반드시 쓰며, 재이(災異)의 기사는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쓰고, 왕이 사냥을 나간 일은 잦더라도 반드시 쓴다. 대신(大臣)의 임명 · 파면과 현사(賢士)의 관계(官界) 진퇴는 상세히 쓰며, 상소문 중 받아들여져 행해진 것과 절실한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에서 군주에게 교훈을 주려는 내용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군주는 조회와 제사를 걸러서는 안 된다는 것, 불교 신앙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자연 재이 등의 하늘의 견책이 나타나면 왕은 이를 경건히 받아들이라는 것, 유희 오락을 삼가라는 것, 대신과 현신(賢臣)의 대우를 잘 하라는 것, 충언(忠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군주에게 경계시키려 하였다.

 

 

셋째, 범례에서 우왕(禑王)은 왕망(王莽)의 예에 따라 원년 · 2년으로 표시하지 않고 갑자(甲子)의 간지(干支)로 써서 토죄(討罪)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실제 『고려사절요』에서 우왕의 기년(紀年) 표시는 간지로 하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신우(辛禑) 몇 년 등으로 부주(附註) 하였다.

 

 

넷째는 공양왕(恭讓王) 원년 10월 이전은 창왕(昌王)이 재위했으나 정월부터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하였다. 그렇게 쓴 예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들고 있다. 따라서, 창왕이 즉위한 해의 기사는 우왕 14년조로 기술되고 다음 해는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되어, 창왕의 기년은 기록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보다 내용에 있어서 소략하다. 그러나 『고려사』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도 있으며, 『고려사』가 세가(世家) · 지(志) · 열전(列傳)으로 나누어 기술됨으로써 연월(年月)의 기록이 누락된 것이 많은 데 비해, 연 · 월순으로 기술되었으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특히, 정치적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는 『고려사』보다 월등히 좋은 자료이다.

 

 

그리고 역대 역사가들이 썼던 사론(史論)을 모두 실었으므로 사학 사상(史學思想)을 연구하는 사학사(史學史)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서이다. 이처럼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를 보완해 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고려사』는 수사의 주체가 군주이기 때문에 군주 중심의 경향이 강하고, 『고려사절요』는 그 주체가 신료(臣僚)이기 때문에 신료 중심의 사서적 성격을 띤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 적용된 직서는 전면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황제(皇帝)’, ‘천자(天子)’ 등은 삭제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고려사』에서는 황제국 체제와 관계되는 용어들이 거의 모두 존치되었지만, 『고려사절요』에서는 제가(制可), 조가(詔可: 조서를 내려 허가함) 등 국왕의 명령과 관계되는 용어들을 중심으로 존치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린 졸기(卒記)를 비교하여 『고려사절요』가 『고려왕조실록』의 원문을 비교적 충실하게 옮겼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고려사절요』는 단순히 『고려사』의 축약이라 할 수는 없으며,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갖고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와 마찬가지로 찬자들의 사론을 써넣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사절요』는 후대의 군주로 하여금 정치에 참조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교훈적 성격이 『고려사』에 비해 강하게 반영되었다.

 

즉, 고려시대 실록에 수록되었던 고려시대 사신(史臣)의 사론, 『국사(國史)』에 실렸던 이제현(李齊賢)의 사론, 정도전(鄭道傳) · 정총(鄭摠) 등이 『고려국사』에 써 넣었던 사론 등 총 108편의 사론을 실었다. 이는 『고려사』에서 세가에만 34편을 실은 것에 비해 대단히 많은 사론을 실은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와 함께 고려사 연구의 양대필독서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완역본이 초판 발간 38년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최근 선보였다.

 

도서출판 신서원(대표 임성렬)은 1966년 12월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원문없이 한글로 완역했던 「국역 고려사절요」를 새로운 시대감각에 맞게재편집한 「신편(新編) 고려사절요」를 상.중.하 3권으로 냈다.

 

 

이번 신편의 가장 큰 특징은 번역문별로 그에 해당하는 한문 원전 사료를 영인해 첨부, 고활자본을 눈에 익히는 동시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번역상 오류를 바로잡도록 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원문을 일일이 참조해야 하는 이 분야 전문 연구자들은 큰 수고를 덜게됐다. 이전에는 원문이 필요한 경우, 800여쪽에 달하는 「고려사절요」 영인본을 별도로 구입해야 했다.

 

 

영인 첨부된 「고려사절요」는 규장각 소장본을 저본으로 삼은 주자본(鑄字本.쇠활자로 찍어낸 판본)이다.

「국역 고려사절요」는 이재호.이익섭.김철수.이강로.임창재.홍찬유.김용국씨가번역을 하고, 교열은 대부분 성락훈씨가 맡았으나 일부는 고 임창순씨가 했다.

 

 

전 35권인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전 139권)가 우여곡절 끝에 조선 문종원년(1451) 8월25일에 완성되고 난 5개월 뒤인 문종 2년 2월20일에 만들어져 왕에게올려졌다.

 

 

요점을 간추렸다는 의미의 "절요"(節要)라는 명칭이 시사하듯, 「고려사절요」는 훨씬 방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고려사」의 축약본이다.

 

 

「고려사절요」는 후일 수양대군(세조)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 참살된 김종서가 편찬을 진두지휘한 사서로, 세가(世家)와 열전(列傳), 지(志)등을 두루 갖춘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고려사」와는 달리, 연대순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배열한 편년체(編年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려사」의 "세가"(世家)만을 따로 떼어낸 모습이 「고려사절요」라고 할 수있다.

하지만 「고려사절요」는 단순히 「고려사」를 축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이 보이기도 하며, 같은 사건을 전하면서도 표현 등이 서로 달라, 고려사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숙독해야 하는 기초사료로 통하고 있다. 상.중.하 각 800쪽안팎.(1)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고려사절요」 38년만에 신체제 완역본, 2004. 9. 7.

 

 

 

<자료출처>

 

 

(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고려사절요」 38년만에 신체제 완역본 (daum.net)2004. 9. 7. 

 

 

 

<참고자료>

 

 

고려사절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김종서(金宗瑞)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김종서 (1383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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