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입력 2021. 1. 4. 17:48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단군관련 각종 사서 간행 (daum.net)

 
[47회]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김삼웅 기자]

 
  대종교 3대종사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석. 비석에는 ‘대종교 대종사’라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는 ‘반일 지사’로 적어 놓았더군요.
ⓒ 조종안
 
나철 선생의 대종교 중광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는 대종교를 항일구국운동의 비밀결사체로 인식하면서 1급의 치안경계 대상으로 삼아 탄압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 마을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ㆍ상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ㆍ중국ㆍ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10월 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여타 종교는 불문하고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단군에 대한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대종교 3인의 묘- 독립이란 민족의 대의(大義)를 위해 삶을 바쳤던 3인의 묘 앞에서 우리 일행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고은빈
 
1914년에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의 발간을 시작으로 1922년에 『신고강의』, 『신리대전』, 『회삼경』, 『신사기』, 『조천기』, 『신단민사』, 『신가집』을 간행하였다.

1923년에는 국문으로 된 『현토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화삼경』, 『신단민사』등을 발간하고, 이와 함께 『신고강의』, 『종라문답』, 『신가집』, 『배달족강역형세도』등 교적을 속속 간행하였다.

대종교의 각종 사서 간행은 1930~1940년대에도 이어져서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종문지남』, 『한얼노래』등을 펴내어 동포들을 교육하고 민족혼을 유지하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대종교에는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이 참여했다. 신규식ㆍ박은식ㆍ윤세복ㆍ신채호ㆍ김두봉ㆍ정인보ㆍ유근ㆍ김교헌ㆍ서일 등 당대의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참여하고 사서 편찬을 지원하였다.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나라 망한 원인을,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도 한민족은 민족혼을 지키며 건강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철 선생의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잊혀지고 저평가되고 있는 것은 '종교인'이라는 따옴표로 묶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대종교의 독립운동 특히 무장독립운동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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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삼웅입력 2020. 12. 20. 18:00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대종교경전 주관한 민족사학자 김교헌 (daum.net)

 
[32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삼웅 기자]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은 주요 경전 『신고강의(神誥講義)』, 『신리대전』, 『회삼경(會三經)』, 『신사기(神事記)』, 『조천기(朝天記)』, 『신가집(神歌集)』 등의 편찬을 주관한 대종교의 이론가임과 더불어 치열한 민족사학자이다.

그는 특히 대종교의 종사(倧史)인 『신단실기(神壇實記)』와 민족통사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그의 국사인식은 대종교의 국사인식을 확연하게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저술을 대종교계의 국사인식과 관련해서 누구보다 주목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김교헌의 국사인식은 1914년에 저술한 『신단실기』에서 찾아진다. 여기서 그는 대종교의 연원을 역사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박영석, 『일제하 독립운동사연구』)

 

그는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에는 문헌비고찬집위원회 편집위원이 되었다.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이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모함으로 해직되면서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하게 되었다. 해직된 후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들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고전간행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9년에는 복직되어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수위원을 겸직하였는데,『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만을 모아 후대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1년 총본사 요직을 두루 거쳐 도사교위의 중책을 맡아 4년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 모음집인 『단조사고』(1911)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1914년 대종교의 남도본사 전리,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 및 전강 등 중책을 맡으면서 종리(倧理)와 종사(倧史)를 연구하던 중 1914년 『신단실기』와 『신단민사』를 저술하였다. 

이 두 저서는 우리의 건국 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였고, 이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사학은 후에 박은식ㆍ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14년에 저술한 『신단민사』는 만주지역 우리 사관학도의 국사교재로 사용되었다. 대종교의 종사(倧史)라는 『신단실기』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까지도 반영하면서, 여기에 대종교적인 단군민족주의 세계관을 투영시켜 새로운 상고사의 체계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흔히 신화로 돌리기 쉬운 단군에 관한 사적을 역사체계내로 흡수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석 8)

주석
8> 이도학, 「대종교의 근대민족주의사학」, 『국학연구』제1집, 67쪽.

 

 

김동호 기자입력 2020. 2. 4. 16:56

[서울경제]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런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대표적 <요하문명> 연구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상호보완해 이슈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 2월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1부이다.
 

◆ 현재 요하문명과 고조선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대중들의 관심이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견해를 부탁드린다.

우실하 : 우선 ‘고조선’과 ‘단군고조선’을 구별해야한다. 아직도 ‘신화’ 취급을 받는 ‘단군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최초의 고조선이다. 1980년대 초부터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에서 지난 5000여년 동안 누구도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기원전 2333년에 건설되었다는 ‘단군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요하문명 지역에서 새롭게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이 황하 문명과는 이질적일뿐 아니라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정희 : 사람은 누구나 전통 있고 유서 있는 오래된 그 무엇의 후손이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일례로 발굴된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과 어떤 식으로든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쪽에서 발굴된 유적 등과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고조선에 대한 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 그렇다면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두 분의 견해는 어떠한지 말씀 부탁드린다.

유정희 :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의 시원이거나 아니면 최소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료가 필요하다. 곧, 발굴된 요하문명과 일치하는 사료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현재로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치적인 기록이 아니다. 정치적인 사건의 기록은 <레지 고조선 사료: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 유정희 명명>, 일명 <레지 사료>이다.

<레지 사료>에는 소략하나마 고조선(레지가 Coree로 기록)과 중국 하(夏), 상(商)왕조와 전투 장면이 기록돼 있다. 내가 이를 백년 전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등이 쓰신 <신단민사/실기> 등과 사료 교차검증(cross-examination) 하였고, 다른 신문에서도 고맙게 언급해 주셨지만, 이를 더 나아가, ‘서경-후한서 동이열전-삼국유사-레지사료-신단민사/실기’ 등으로 사료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여 고조선 역사의 기본 틀과 큰 뼈대를 만들었다. (한국강사신문 2019. 2. 12. 고조선 논쟁, 역사학자 유정희, 살아나는 사료들 참고)

 

우실하 : 현재도 우리나라 중-고 역사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등이 분포하는 만주 일대를 ‘고조선 영역’, ‘고조선의 문화권’, ‘고조선의 세력 범위’ 등으로 가르친다. 요하문명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요하문명의 꽃’인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의 후기(BC 3500~3000)에는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고,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 2300~1600) 시기에는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고고학의 대부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7) 선생은 홍산문화 시기에는 ‘고국(古國)’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는 하-상-주와 같은 ‘방국(方國) 단계의 대국(大國)’이 존재했었다고 본다. 설지강(薛志强)은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夏)나라보다 앞서 건설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홍산문화를 바탕으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건설된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하나라 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설지강)’이 바로 ‘단군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 관련분야의 국내 연구 진척에 대한 두 분의 평가는 어떠한가.

우실하 : 나는 요녕대학교 한국학과 교수(2000.2~2002.8)로 있던 시기부터 20년 동안 요하문명 지역을 답사하고 요하문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논문과 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 고고-역사학의 주류학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재야학계에서 열광할수록, 오히려 주류학계에서는 멀리하는 내가 예기치도 않는 이상한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유정희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 한국고대사 관련 역사학계에서는 되도록 요하문명과 고조선이 연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러면 일단 검토를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슈화시킨 <레지 사료>는 요하문명과 고조선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레지 사료>는 고조선이 유구한 나라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증명해줄 거의 유일한 ‘해외작성사료(historical record of Old Joseon produced by non-Korean writers)’이기 때문이다.

/김동호 기자 dongho@sedaily.com

 

 

김동호 기자입력 2018. 10. 2. 11:10수정 2018. 10. 2. 15:55

 
[서울경제]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일연의 〈삼국유사〉 기록은 한국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요, 풀리지 않는 퍼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국왕검의 탄생과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담긴 〈삼국유사 기이편〉 이외에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사료는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 측 사료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측 사서에도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기록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18세기 초인 1710년대에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프로방스 출신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쟝 밥티스트 레지(Jean-Baptiste Regis : 1663~1738)’는 한국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을 글로 남겨 유럽으로 전했다.

 

그와 그의 동료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작성한 중국과 동아시아 관련 기록들은 당대 유럽에서 『Description ge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기에는 고조선 건국의 실마리를 풀어줄 흥분되고도 충격적인 기록들이 담겨져 있다.

레지 신부의 기록을 해제, 교차검증까지 하여 출간한 이는 유정희(柳正熙, 37, 남)라는 젊은 역사학자이다. 그는 최근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레지 신부의 글을 해제, 교차검증까지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를 만나 주장을 들어봤다.

 

▲ 고조선 연구에는 어려움이 많은데?

일연의 기록은 단군이 1천 9백 8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고조선 연구에 주로 활용되는 중국 측 사료에 고조선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333년으로부터 무려 1600여년의 세월이 흐른 기원전 7세기의 일을 다룬 <관자(管子)>의 기록이다.

이 시간적 공백은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일연의 기록을 의심케 하였다. 따라서 어쩌면 역사학자들이 <삼국유사>의 고조선 건국기사를 제대로 된 역사기록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 고조선에 대한 생각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확인시켜 줄 다른 사료가 없다,”라는 논리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증거가 미약하다,”라는 이유로 한국 역사학계는 기원전 20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조선의 건국을 ‘증명불가능한 명제’로 규정하였고, 같은 이유로 고조선 건국문제는 한국 역사학의 ‘리만가설’로 남게 되었다.

 

“더 이상 사료는 없다”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줄곧 역사학계가 내린 결론은 결국 역사학자들이 “고조선 건국설화는 ‘신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고 선언하게 하였는데, 이는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인식과 큰 거리가 있어 대중과 역사전문가들 사이의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 레지 신부의 책을 해제하고 출간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중국 선진사(先秦史), 그중 주로 하상주(夏商周) 전공자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한 대학도서관에서 300년이 넘게 잠들어있던 레지 신부의 불어와 영어 원문기록을 발굴했다. 이를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인 김교헌, 유근 등이 편찬한 〈신단민사(神檀民史)〉, 〈신단실기(神檀實記)〉 등과 교차검증하는 작업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새롭게 조명하였다.

2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중국과 한국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작성된 이 두 기록이 일치한다는 것은, 20세기 초 김교헌 등이 불어, 영어에 무지하고 〈신단민사, 실기〉 등이 레지의 글보다 훨씬 구체적이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김교헌 등이 레지의 글을 본 것이 아니라 애초 300년 전부터 이 둘의 공통원전이 되는 중국 측 사료가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사실을 시사한다. 이러한 믿을만한 교차검증으로 역사학계의 리만가설이 풀릴 수도 있다.

 

▲ 레지 신부의 기록이 가지는 의미는?

레지 신부의 기록은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조선 건국에 대한 학계의 공식입장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워낙 중요한 사료인 만큼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가 레지 신부의 사료를 직감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간접적으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학계를 고민에 빠뜨렸던 오랜 난제가 풀리려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 유정희(Thomas F. G. Yu)

: 대구 태생, 오성고(대구 수성구) 졸업, 미국 리버럴알츠 대학교 중 하나인 Midwestern State U.(TX) 등에서 Global Studies를 전공하고, 또한 고려대(서울) 대학원 사학과에서 동양 고대역사를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역사학자, 고고학자, 작가.

* 리만가설

: 독일의 천재수학자 ‘리만(Geo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1826~1866)’이 1과 자기 자신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소수의 패턴에 대해 제기한 가설이다. 그의 사후 지독하게 증명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수학계의 7대 난제로 불린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의 실제 주인공인 미국의 수학자 존 내시(John F. Nash, 1928~2015)가 이 문제에 천착하다가 조현병에 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동호기자 dongho@sedaily.com

 

 

입력 2018. 7. 31. 09:35

김교헌 [사진=독립기념관]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중 일제와 갈등
-대종교에 입교해 제2대 교주로 취임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독립기념관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8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김교헌 선생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 성균관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에 맞서다 해직됐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고, 대종교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해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에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해 단군과 대종교의 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1916년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했고, 일제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이후 민족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교세를 크게 넓혔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 인사 중심으로 조직된 북로군정서에 참여했고, 이듬해 10월 북로군정군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보복 차원에서 그 일대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대중교의 독립운동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김교현은 본부를 영안현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했으나 1923년 11월 병으로 만주에 있던 대종교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soohan@heraldcorp.com

 

신단민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신단민사》(神檀民史)는 1904년 김교헌이 저술한 으로, 단군조선부터 고종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 및 특기사항[편집]

  • 신시시대(신시)-배달시대(단군)-부여시대-열국시대-남북조(南北朝)시대-여요(麗遼)시대-여금(麗金)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대한제국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 환웅에 해당되는 신시의 통치자는 '신시'라 하였으며, 단군조선을 '배달시대', 기자조선을 '부여시대'로 분류하였다.
  • 단군조선보다 120년 앞서는 신시시대를 그 시초로 삼는 연대를 따르고 있다.

 

 

[대동사강]

  •  입력 2022.08.23 08:13  수정 2022.08.30 15:55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서 및 고문헌 <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tongilnews.com)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9)

  • 기자명 이양재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는 원래 해방공간에서 극우 세력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안 박사는 자신이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원어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읽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1948년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初代) 문교부 장관이 되었고,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의 뜻에 따라 1919년경에 대종교인(大倧敎人)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창씨개명을 거부한 안호상 박사는 1970년대 중반에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며 자신의 민족사학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를 부지런히도 하였다. 지금 나는 1977년경에 그의 강연회에 따라다니며 슬라이드 필름을 돌리던 일이 눈에 선하다.

당시의 민족사관을 주장하는 몇 명 안 되는 민족사학자들에게 갈급한 일은 단군과 고조선을 국정교과서에 싣는 일이었다. 그 일의 최일선에 나선 인물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안호상 박사였다. 해방공간에서 극우였던 안호상 박사의 이러한 열정은 결국에는 1995년에 단군릉을 찾아 밀입북하여 북한에서 비밀스러운 여러 일화를 남기기까지 한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945년 해방할 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당시의 고서수집가들에게는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문헌이라면 그 문헌이 쓰여진 시대와 내용을 따질 겨를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수집하는 기풍이 있었다. 그만큼 단군과 단군조선의 문헌을 찾는 일은 고서수집가들에게도 절실하고 다급한 일이었다. 이런 민족주의적 풍토에서 1982년 5월 21일 자로 ‘한국고서동우회(회장 안춘근)’가 출범하였다.

그런데 1984년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소설가 김정빈이 당시 대종교(大倧敎)의 총전교였던 권태훈(權泰勳, 1900~1994)을 소재로 하여 『단(丹)』이라는 실명 소설을 ‘정신세계사’에서 출판하여 1년여 동안 우리 출판사 상 최초로 100만 권이 넘어선 슈퍼 베스트셀러가 나온 것이다.

‘정신세계사’에서는 그러한 복고적 분위기 위에서 1986년 5월에 임승국이 『환단고기』의 한글 번역본을 내어놓으면서 『환단고기』의 존재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애서가들은 어처구니없이 웃고 “토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나는 월간 『전통문화』 1986년 11월호 pp.136~143에 「고서적 위조의 실상」을 기고하면서 “⑭이론에 맞추어 저작한다”라고 막연히나마 고서적 위조를 지적은 하였다. 즉 당시 서명(書名)을 언급함이 없이 지적한 ⑭번에 해당하는 그러한 예가 바로 『환단고기』를 지적하는 예이다. 당시에 피동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이제 30세를 갓 넘긴 내가 임승국이나 노회한 박창암과 대척점(對蹠點)에 서는 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당시 우리 애서운동가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지금과 같은 황당사관이 민족사관으로 위장하도록 번지게 일을 키우고야 말았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고서수집가들이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문헌을 본능적으로 수집하는 기풍이 거의 없어졌다. 황당한 『환단고기』가 나옴으로써 더는 단군과 단군조선의 문헌이 나와 봐야 그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27)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임란 이후의 고서 및 고문헌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것을 애서가 대부분은 못마땅해 한다. 대체적으로 광적(狂的, mania)인 수집가로서의 애서가(愛書家)가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의 수준에 이르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수준에 이른다.

지난 제17회 연대 “『제왕운기』와 히브리 기원(紀元)”에서 우리나라의 단군 사실(史實)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조선」조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본기」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단군 사실을 언급하는 고문헌들은 이 두 건의 고문헌을 근본으로 하여 요약되거나 안(按)이 붙은 것이지만,

이번 29회 연재에서는 제3회부터 제28회까지의 연재에서 중점적으로 소개한 자료는 제외하고, 단군과 고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몇 종의 고서 및 고문헌을 몇 종 소개하고자 한다.

 

가. 임란 이후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고서 및 고문헌

1. 오운의 『동사찬요』

『동사찬요(東史簒要)』 권지1상, 오운(吳澐), 목판본, 1609년에서 1614년 사이에 간행된 재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사찬요(東史簒要)』 목판본 8권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임란 의병장인 오운(吳澐, 1540~1617)의 편저이다. 대부분이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 부분만을 본다면 이 책은 조선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되기 시작하였던 인물과 관련한 전문 저술의 선구적인 책이다.

오운은 1606년 영주에서 『동사찬요』 8권본(초판본)을 편찬하여 목판본으로 발행하였다. 이후 이를 수정 증보하여 11권(재판본)으로 만들었는데 8권본의 판목(版木)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새로 증보한 부분은 판목을 추가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1614년에는 다시 「지리지」 1책을 보충하여 12권본(삼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 뒤 후손이 1908년 영주 삼우정에서 16권본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수장하고 있는 이 책은 표지에 『동사(東史)』 4책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책1의 서두에 있는 『동사찬요 목록(目錄)』은 권지8 「별록(別錄)」까지 있고, 실제로는 권지2 상(上)까지 4책만이 남아있다. 낙질의 4책을 완질로 위장하기 위하여 책 표지의 표제 밑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란 권차(卷次)를 적어 넣었다. 목록에서 권지2 하(下)부분부터 그 이하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록에서 이를 제거하면 이 책은 낙질(落帙)의 수준보다 못한 파본(破本)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보았을 때 내가 소장하고 있는 『동사찬요(東史簒要)』 영본 4책은 1606년 초판본은 아니다. 1609년에서 1614년 사이에 간행된 재판본으로 보이는 11권본『동사찬요』의 낙질본이다. 이 책이 낙질본인 줄 알면서도 고서경매에서 매입한 이유가 있다. 재판본의 권1상(上) 첫 면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군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조선시대 주자학파들이 사대주의 존화사관으로 왜곡한 부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을 편찬하는데 참고한 「찬집제서(纂輯諸書)」의 목록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2. 조정의 『동사보유』

『동사보유(東史補遺)』, 조정(趙挺) 저, 필사본.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사보유(東史補遺)』는 조선중기의 문신 조정(趙挺, 1551~1629)이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1646년에 아들 유도(有道)가 목판본 4권2책으로 간행하였다.

필자는 이 책의 초기 저술 상태를 볼 수 있는 필사본 3권1책본을 소장하고 있다. 내용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전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권1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구려의 멸망까지의 삼국사를 다루고 있고, 권2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에서부터 신라의 멸망까지를 다루며, 권2 삼국시대사 끝에 중요 인물과 사건, 그리고 명신(名臣)을 부기하고 있다. 권3은 고려시대를 다루고 있다. 필사본에서는 권3의 끝에 명신전을 부기하지 않았다.

즉, 이 필사본 『동사보유』는 조정의 저술이기는 하나, 그 목판본을 베낀 책이라기보다는 조정이 미완성인 채로 남겨 높은 『동사보유』를 정서한 것의 사본으로 보인다. 즉 미완의 상태로 남은 조정이 말년(1628~9년경)에 편찬한 『동사보유』 원고를 정서(淨書)하며 재편(再編)하고 판하서(板下書)를 쓰는 과정을 거쳐 4권2책의 목판본으로 인출하였는데, 이 책은 그 초기의 원고 정서본을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동사보유』의 특색은 첫째, 고기(古記)에 실린 신화와 설화들을 많이 수록한 것을 들 수 있다. 단군신화 해모수신화 고주몽신화 김수로왕신화 김알지설화 등이 모두 실려 있다. 또 비단 고대사에 관련되는 개국신화만이 아니라, 고려 태조에 얽힌 설화도 ‘고려태조세계(高麗太祖世系)’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해 소개하고 있다. 삼국시대사 끝에 박제상(朴堤上) 도화녀(桃花女) 천사옥대(天賜玉帶) 장춘랑(長春郎) 문무왕(文武王) 차득공(車得公) 수로부인(水路夫人) 등을 부기한 것도 이 같은 설화와 전설을 존중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했던 신화와 전설을 중시한 것도 이 책의 커다란 특색이다.

또 삼한의 위치에 관한 권근(權近)의 설을 부인하고 『동국여지승람』을 따라 최치원(崔致遠)의 ‘삼한설’을 좇고 있다. 북부여와 동부여를 독립 항목으로 내세워 삼국의 선행 국가로 설정한 것도 특이하다. 발해는 따로 독립시키지는 않았으나, 신라 효소왕조에 대조영(大祚榮)의 졸기(卒記)를 적으면서 발해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삼국과 고려 시대의 역사는 군주의 치적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사에 치중하였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포폄(褒貶)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끝에 붙인 명신은 대부분 애국무장(愛國武將)이나 충신 의사 열부 그리고 명유(名儒)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이 책은 주자의 강목법(綱目法)을 따라 엄격한 포폄(褒貶)을 위주로 하던 17세기 초기 사서(史書) 편찬의 일반적 분위기와도 매우 다르다. 특히 1606년(선조 39)에 완성되고 1609년(광해군 1)·1614년에 개찬되었던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비되는 저술이다.

즉, 조정의 역사의식은 규범적이고 명분론적이기보다도 낭만적이고 탈규범적이라 할 수 있으며, 학계 일각에서는 이것은 “대북파 정권의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인 정책 방향과도 관련된다”고 본다.

 

3. 작자미상의 『동국사기』

『동국사기(東國史記)』, 작자미상, 필사본, 단군조선으로부터 근대조선 숙종 즉위년(1674)까지의 역사를 쓰고 있다. 표제에는 “『동국사기』 계사십일월상한(癸巳十一月上澣)”이라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계사년은 숙종 즉위 후 첫 계사년인 1713년 이후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작자미상의 『동국사기(東國史記)』 필사본 1책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근대조선 숙종 즉위년(1674)까지의 역사를 쓰고 있다. 표제에는 “『동국사기』 계사십일월상한(癸巳十一月上澣)”이라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계사년은 숙종 즉위 후 첫 계사년인 1713년 이후로 보인다.

저지(楮紙)의 지질(紙質)이나 필체에서 조선조 말기의 특성이 보이므로 1893년경에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시기에 편찬된 『동국사기』를 베낀 것으로 보인다. 『동국사기』의 원저자가 누구인지 이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사대주의 역사관의 일면을 잘 알 수가 있다.

 

나.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대한제국 고서 및 고문헌

4. 현채의 『동국사략)』

『동국사략(東國史略)』, 현채(玄采), 삼판본, 1908년 7월 15일 일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 현채의 『동국사략』은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근세사로 시대를 구분해, 태고사(권1)는 단군에서 삼한까지를, 상고사는 삼국 분립에서 후삼국과 발해의 멸망까지를, 중고사(권2)는 고려의 건국과 멸망을, 근세사(권3~4)는 조선의 건국에서 대한제국의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연간까지를 다루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東國史略)』 4권4책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가 조직한 ‘국민교육회’에 가입해 계몽운동을 벌였던 백당(白堂) 현채(玄采, 1886~1925)가 편술하여 1906년 6월 10일자로 보성관에서 초판본을 발행하였다. 초판본은 선장본(線裝本)인데 종이는 두터운 중질지(中質紙)에 양면 인쇄를 하고 있다.

1907년 10월 30일에는 판(版)을 달리하여 일한도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한 재판본 4권2책을 자신의 사가판(私家版) 발행하였고, 다시 1908년 7월 15일에는 일한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한 삼판본 4권2책을 역시 자신의 사가판으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초판본은 『동국사략』으로 제호되어 있는데, 재판본부터는 『중등교과 동국사략』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제호를 바꾼 이유는 중등학교의 교과서로서 사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1909년 5월 5일자로 발간이 금지되어 금서로 묶였다. 금서로 묶인 후에 1924년에 삭제와 증보를 거쳐, 현채 원저(原著)의 『동국제강(東國提綱)』으로 발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25년에 현채는 사망한다. 현채 사후인 1928년에는 『반만년 조선역사』로 제목을 바꾸어 발간되었다.

필자에게는 초판본 4권4책 가운데서 권2 영본(零本)이 있고, 재판본과 삼판본이 모두 있는데, 삼판본은 두 질(帙)을 복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필자 소장본 재판본은 1907년 11월 24일자로 인쇄하여 30일자로 발행하여 특별 제본(製本)한 하드카바 양장본 4권1책본이고, 삼판본은 1908년 7월 10일에 인쇄하여 15일자로 발행한 4권2책본을 복본(複本)으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본 권4, 99쪽 첫 행에서 이준(李儁) 열사의 자결(1907년 7월 14일)을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삼판본 복본을 대비하여보면 이 삼판은 두 종(種)이 있다. 같은 인쇄본인데 권4가 111면까지 있는 책과 70면까지만 있는 두 종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 111면 본은 「을사신조약」과 「해아사건급선위」, 「융희시사」 「결론」 등이 있으나, 70면 본은 그 내용이 빠져 있다. 같은 조판본인데, 70면 본은 권4의 목차에서도 그 순서가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보면 현채는 이 책 삼판본을 친일파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70면 본을, 민족주의자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111면 본을 공급한 것이 나일까 추정된다. 혹시 1909년 5월 5일자로 발간이 금지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현채의 『동국사략』은 전통적인 편년체를 탈피하여 근대적인 역사 서술방법에 의하여 저술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역사 개설서이다. 이 책은 일본인 하야시 다이쓰케(林泰輔)가 1892년 다섯 권으로 구성한 『조선사(朝鮮史)』를 참조하여 저술한 책이다. 하야시는 단군신화를 부정하였으나 현채는 「단군조선」을 책의 서두에 서술하였다. 또한, 하야시는 위만조선 및 한사군 문제를 중요시해 시대구분의 계기로 삼았으나, 현채는 이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고 마한 변한 진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진 삼국통합을 이뤘다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야시는 임진왜란에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을 주로 다루었으나, 현채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활약한 우리나라의 의병 활동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역사상 위인 및 명장과 외적과의 전쟁 등을 비중있게 다뤄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주 독립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나 권1의 25~6면에서 대가야가 임나(任那)라고 언급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비판받고 있으나, 이는 대가야가 일본에 진출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참고로 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국이 일본에 지방 소국(小國)의 형태로 진출해 있었던 것은, 본 연재의 제27회 연재본 「가야국의 실체와 『가락국기』」를 참조해 보기를 바란다.)

『동국사략』은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근세사로 시대를 구분해, 태고사(권1)는 단군에서 삼한까지를, 상고사는 삼국 분립에서 후삼국과 발해의 멸망까지를, 중고사(권2)는 고려의 건국과 멸망을, 근세사(권3~4)는 조선의 건국에서 대한제국의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연간까지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정치사뿐만 아니라 제도, 문학, 기예, 산업, 풍속 등의 장을 설정해 일반 대중의 생활사도 자세히 서술하였다.

반일(反日) 인물 현채가 40세에 요절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 일제 강점기의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하는 고서

5. 김광의 『대동사강』

『대동사강(大東史綱)』, 김광(金洸), 1929년, 대동사강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대동사강』의 권1부터 권6까지의 상권은 단군 개국 이래 고려 원종까지를, 권7부터 권12까지의 하권은 고려 충렬왕 원년(1275) 이후 융희 4년(1910) 한일합방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술은 편년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본문은 한문 원문에 한글 현토를 달았다. 삼국의 연기(年紀)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으로 적고 있다. 이는 제1기 민족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동사강』의 권1은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 「기씨조선기(箕氏朝鮮紀)」 「한기(韓紀)」 「마한급고구려신라백제기(馬韓及高句麗新羅百濟紀)」, 권2는 「고구려신라백제기(高句麗新羅百濟紀)」, 권3은 「고구려발해신라고려기(高句麗渤海新羅高麗紀)」, 권4∼8은 「고려기(高麗紀)」, 권9∼12는 「조선기(朝鮮紀)」로 구성되어 있다.

 

『대동사강(大東史綱)』 2권2책은 1928년에 송계(松溪) 김광(金洸)이 탈고하고,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교정히여 1929년 대동사강사에서 간행한 우리나라의 역사서이다. 이강(李堈) 민경호(閔京鎬) 이명상(李明翔)의 서문과 목록,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각 권 첫 면에는 김광(金洸) 편차(編次)라고 되어있으나, 판권 면에는 저작자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진율리 440의 “김용학(金龍學)”으로 밝히고 있고, 저작 겸 발행자를 경성부 낙원동 210번지의 ‘정석채(鄭錫采)’로 밝히고 있다. 김광에 대한 인적사항이 확인이 안 되므로 김광과 김용학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대동사강』의 권1부터 권6까지의 상권은 단군 개국 이래 고려 원종까지를, 권7부터 권12까지의 하권은 고려 충렬왕 원년(1275) 이후 융희 4년(1910) 한일합방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술은 편년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본문은 한문 원문에 한글 현토를 달았다. 연대표기는 간지(干支)를 앞세우고 다시 왕의 재위 연대를 적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삼국의 연기(年紀)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으로 적고 있다. 이는 제1기 민족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은 쌍행의 주석이나 ‘안’설로 덧붙이고 있다.

『대동사강』의 권1은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 「기씨조선기(箕氏朝鮮紀)」 「한기(韓紀)」 「마한급고구려신라백제기(馬韓及高句麗新羅百濟紀)」, 권2는 「고구려신라백제기(高句麗新羅百濟紀)」, 권3은 「고구려발해신라고려기(高句麗渤海新羅高麗紀)」, 권4∼8은 「고려기(高麗紀)」, 권9∼12는 「조선기(朝鮮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편년체 서술방식, 도덕론적인 역사인식 등 유교적 역사인식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단군조선이 한 기씨조선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 남북방(南北方)의 여러 국가들로 이어지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발해 이후 금 후금 청으로 이어지는 계열을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에서 수용하고 있다. 상고 시기의 역사 지리를 만주 일원에 비정하고 있는 것에서 제1기의 민족사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제는 우리나라의 모든 기록을 취합한다는 의욕이 앞서 『규원사화』와 『기자유지』의 계대를 무분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무분별한 수용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김광의 이러한 노력은 1939년 전남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215에 주소를 둔 서계수(徐繼洙)가 발행한 『세가보(世家譜)』로 이어진다.

 

6.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文化柳氏監察公派家乘譜)』, 류인구(柳寅龜) 편, 2권1책, 1936년 3월 30일 발행. 석판본(石版本). 권두(卷頭)의 권1 앞에 「원파록(源派錄)」이 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연대에 단군을 부수적으로 기록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문화유씨감찰공파가승보(文化柳氏監察公派家乘譜)』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201번지의 류인구(柳寅龜, 1895~?)가 편집하여 1936년 3월 30일자로 발행한 석판본(石版本) 가승보 2권1책이다.

이 책의 권두(卷頭)의 권1 앞에 「원파록(源派錄)」이 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연대(年代)에 단군을 부수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계보류 도서에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이런 사실도 있음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7. 창씨개명에 대항하여 『청금세보(靑襟世譜)』를 발행

『청금세보(靑襟世譜)』, 정인찬(鄭寅燦) 편, 2권1책, 1941년 11월 15일 발행. 단군조선에서부터 조선 영친왕까지의 왕대(王代)를 수록하고 있으며, 권2에서는 광주(光州)와 무안(務安)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의 가승(家乘)을 수록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기에 창씨개명에 대항하여 발행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39년에 일본제국은 모든 조선인에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창씨개명을 명령하였다. 당시 이름을 바꿀 수 있는 기간은 1940년 2월 11일부터 6개월간이었고, 이 기간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었다. 각급 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웠으며, 청년들은 징병이나 징용 대상자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식량 배급에서 차별을 받았다. 조상이 물려준 성과 이름을 바꿀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 80% 정도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 1941년에 조선의 성씨를 지킨다는 의도에서 불익을 감수하고 1941년 11월 15일자로 전남 광주에서 『청금세보(靑襟世譜)』 2권1책을 서울에 사는 정인찬(鄭寅燦)을 저작 겸 발행자로 하여 석판본으로 발행하였다. 이 책의 권1에서도 김광의 『대동사강(大東史綱)』 2권2책이나 서계수(徐繼洙)의 『세가보』 8권1책본을 참고한 듯한 단군조선에서부터 조선 영친왕까지의 왕대(王代)를 수록하고 있으며, 권2에서는 광주와 무안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주민들의 가승(家乘)을 수록하고 있다.

일제의 강점기에 모 성씨의 문중에서는 창씨개명을 앞장서서 하고, 창씨개명을 한 족보 마저 발행한 사실이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창씨개명에 대항하여 『청금세보』를 발행한 이들은 상당히 민족적인 정체성을 보존하려 애쓴 항일의 의지가 넘치는 분들이다.

 

라. 조선후기의 역대도

지난 제28회 연재에서 연대표를 소개하면서 역대도는 포함하지 않았다. 이러한 1장짜리 괘도(掛圖) 형식의 연혁도(沿革圖) 또는 역대도(歷代圖)는 서당(書堂)이나 사가(私家)에서 주로 교육용으로 만든 것이다.

 

1.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中國古今歷代沿革之圖)』, 편자미상, 1827년, 필사본, 크기 100×132cm. 상부와 하부에 나무로 축심(軸心)을 넣은 것으로 보아 서당용으로 만든 것이다. 주로 중국의 고금 역대 왕조를 다루고 있으며, 조선은 일부에서 부기(附記)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사대사관에 의거하여 만들었지만,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中國古今歷代沿革之圖)』는 제작연도가 고갑자(古甲子)로 쓰여 있는 필사본이다. 즉 ‘강어대연헌(疆圉大淵獻)’이 그것으로써 이는 정해(丁亥)년을 의미한다. 이 연혁도에 기록된 마지막 임금이 정종(正宗, 즉 正祖)인 것으로 보아 순조 때 정해년, 즉 1827년에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크기가 100×132cm로서 다른 연혁도나 역대도 보다도 크고, 상부와 하부에 나무로 축심(軸心)을 넣은 것으로 보아 서당용으로 만든 것이다. 주로 중국의 고금 역대 왕조를 다루고 있으며, 조선은 일부에서 부기(附記)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사대사관에 의거하여 만들었지만,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2. 『중국동국고금역대도』

『중국동국고금역대도(中國東國古今歷代圖)』, 1855년, 목판본. 완산춘헌중간(完山春軒重刊). 크기 53×83cm. 같은 목판본이 전주역사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중국동국고금역대도(中國東國古今歷代圖)』는 헌종까지의 기록이 있고, “당저만세(當宁萬歲)”라고 한 것이 있고 “을묘추완산춘헌중간(乙卯秋完山春軒重刊)”이라고 간기가 있다. 이를 보면 이 목판본의 을묘(乙卯)는 철종 을묘(1855)년이다. 목판본은 크기가 53×83cm이다. 이 역대도는 『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와는 달리 『중국동국고금역대도』라고 문헌의 이름을 정한만치 중국의 역사보다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많이 다루고 있다.

같은 목판본이 전주역사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는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마. 맺음말

이상에서 임란 이후에 단군 및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고서 및 고문헌을 살펴보았다. 물론 지난 연재에서 이미 소개한 자료들은 이번 연재에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포함하지 않았다.

이미 소개한 자료와 이번 회에 소개한 자료들을 통하여 고려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우리 역사서의 흐름을 독자분들이 보면서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사관의 출현과 발전, 그리고 지향점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민족사관의 생명력이 길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민족사관의 생명력이 길어지려면 식민지사관 못지않게 황당사관도 극복하여야 한다.

한국의 제2기 민족사학과 북한의 주체사학을 대비하여보면. 북한의 주체사학에는 남측에서 민족사학으로 위장한 황당사학이 아예 침투하지 못하였다. 북한은 주체사학의 중심점에는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과 이를 보호 육성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체적 역사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는 주체적 역사관을 벗어난 황당한 이론의 전개는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적 진실과 평가 관점은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북의 역사학은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그 연결의 접점은 식민지사관도 아니고 황당사관도 아닌 제1기 민족사학자들과 그들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한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리지린의 『고조선연구』가 남측의 민족사학계에 처음 알려졌을 때 그 충격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 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이 각지의 역사 유적을 상호 방문하고 토론하며 상호간의 논리를 민족사관의 눈높이에서 점검하는 것이다. 그날을 함께 열어나가자.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국혼의 재발견』 연재가 회를 거듭하면서 호응하는 독자와 비판하는 독자로 반응이 엇갈려 나오고 있다. 글에 따라서는 역작이라는 평가를 한 사람도 있고, 공격의 칼날을 숨기며 필자에 대하여 탐색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서지학을 인식하는 애서가일수록 호평을 하고 있으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퍼 나르기를 하는 분들도 상당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 변명을 하고자 한다. 나의 이 연재는 매주 서둘러 쓰고 있다. 프린터로 출력하여 탈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고 파일을 보내므로, 문장 연결이 부드럽지 못하고 오타와 빼 먹은 부분도 있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만약 언젠가 책을 낸다면 이 원고를 모두 출력하여 보정하고 주(註)를 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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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사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대한제국 순종 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근거가 되는 사료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에 의하면, 역사와 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교정을 보았다.

출간사항[편집]

  • 1929년(쇼와 4년), 대동사강사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상권 1권과 하권 2권이 보관되어 있다.

  • 1974년, 경문사에서 상·하권을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내용[편집]

  • 권초에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기씨조선 이후로는 기씨조선, 한,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의 여러 나라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서로 합쳐지고 나뉘면서 단씨조선-기씨조선-마한-신라.고구려-고려-조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 시대구분: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과 삼국 시대-통일 신라와 발해-고려-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로 구분되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단군조선: 단군조선은 '단씨조선'으로 기록하였으며, 규원사화와 거의 같은 47대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수, 일부 치세내용이 기록되었다.
  • 기자조선: 기자조선의 기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야승을 참조하였다.
  • 만주의 역사: 만주의 역사를 포함시켜, 발해, 요, 금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 마한.삼국시대: 마한, 삼국의 기록은 각 왕의 재위연대를 비롯한 내용들은 기존의 기록과 대체로 부합하는데, 삼한에서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등,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다른 서적들과의 비교[편집]

단군조선의 기록은 《단전요의(檀典要義)》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환단고기》〈단군세기〉의 내용과도 유사한 부분이 있으며, 《대동사강》 기자조선의 31대 도국왕 이후인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되는 기록들과 유사한 내용들이 있으나, 통치한 왕, 재위년수 등은 서로 다르다.

 

 

 

<참고자료>

 

대동사강(大東史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신단민사(神檀民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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