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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무용총(舞踊塚)은 길림성(지린성) 통구에 있는 고구려 고분입니다. 고분 내부 오른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 벽에는 검은색 말을 탄 사람과 무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그림이 있습니다. 무용총의 남쪽에는 각저총이 있고, 무용총의 서남쪽에는 산연화총,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희분 등의 우산하고분군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마주보이는 현실 주벽에는 주벽벽화접객도가 있고, 현실 서쪽 벽에 수렵도가 있고, 수렵도와 함께 현실 서쪽 벽에 우차도(牛車圖)가 있으며, 현실 동측 벽에 무용도가 있습니다.(1) 임기환교수는 두방무덤인 무용총은 널방 벽면의 가무배송도, 수렵도, 묘주접객도가 유명하며, 그외 천장에 있는 하늘세계를 꾸미는 다양한 벽화도 눈길을 사로잡는데, 무용총이란 이름은 벽화 중..
이형구교수는 북한의 미술사학자 주영헌(朱榮憲)씨가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는데, 1990년대에 와서는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이라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안휘준(安輝濬) 선생은 “안악 3호분은 중국인인 동수(冬壽)의 묘로 보기보다는 역시 고구려 왕(王)의 능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 “묘주는 왕의 신분을 지닌 지체 높은 인물로 신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동 지방은 고조선의 옛 영토이다. 이곳은 3세기 무렵 위(魏)나라에 의해 점거되었고, 310년까지 서진(西晋)이 장악하였다. 물론 이후는 5호(胡) 16국(國)이 중국 중원을 차지하려고 할거하던 시기이다. 그래도 요동 지방은 중원 지방보다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건국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생애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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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형구교수는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학계에서는 서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이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정비된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태왕릉[오른쪽]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이른바 장군총을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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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으로 알려져 있지만,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형구교수는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전기에 유행했던 돌무지무덤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 발해연안의 신석기 내지 청동기시대에 동이족이 축조한 돌무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대릉하 유역 건평현 우하량 유적의 홍산문화시기[기원전 3500년경]의 계단형(階段形) 돌무지무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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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총 천추총의 주인공으로는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비정되고 있습니다. 천추총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집안 통구고분군을 이루는 6개 고분군 가운데 마선구고분군(麻線溝古墳群)에 속하는 고구려고분이며, 마선구평야에 위치한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천추총(千秋塚)이라는 명칭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명문에서 유래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소화 10)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공식명칭은 ‘마선구 1000호묘’이다. 천추총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을 잃었지만 원래는 10층 정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평면은 한변 길이 63m 정도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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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 다뉴(多紐 많을다·끈뉴)는 끈을 꿰는 고리(紐)가 여러 개라서 붙인 말이고요, 세문(細紋)은 가는 무늬, 잔 무늬라는 뜻이므로,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고리가 여러 개인 잔무늬 거울'인 것입니다.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청동기후기(기원전 5~4세기)에 만들었습니다. '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은 '고리가 여러 개인 거친무늬 거울'입니다. '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은 청동기 전기에 만들었습니다. 신용하교수는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거친무늬 거울)과 다뉴세문경(잔무늬 거울)이라고 합니다.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多紐粗紋鏡)과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이다. 보통 뒷면 무늬그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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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교수는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는데,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단검은 ①한반도 ②요동 ③요서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구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합니다.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고조선문명의 비파형동검은 고중국의 직선으로 도안된 동검이나 또는 북방 오르도스식 구부러진 도안의 동검과는 확연히 모양새가 달라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고조선 비파형동검의 큰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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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습니다. 지금 마을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고분에 도굴꾼들이 드나들고 있습니다.”1974년 4월 어느 날 안승주 공주대 교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충남 부여 초촌면 송국리 주민 최영보씨였다.최씨는 공주 남산리 유적 조사 때 잡역을 도와준 인연으로 안교수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4월19일 안교수는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은 소나무가 총총히 들어서 있어 현지 주민의 안내 없이는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1974년 4월 충남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에서 모습을 드러낸 청동기 시대 유물. 도굴의 화를 피해 기적적으로 간직되어 있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최씨가 지목한 지점에서 소나무 일부를 파 옮기고, 흙을 약 20㎝ 걷어내자 덮개돌의 윤곽이 드러났다. 고인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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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에게 저습지(低濕地) 유적은 ‘대박’으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서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온갖 유기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보존은 유물이 포함된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여 외부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60)과 둘러본 광주 신창동 유적은 한국 저습지 발굴을 태동시킨 역사적인 장소다. 1992년부터 20년 넘게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이 총 2000여 점이나 출토됐다.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 베틀, 문짝, 칠기(漆器),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