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5/02 (31)
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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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노태맹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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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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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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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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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강단사학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는 대동강 부근이 되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곳이 발상지가 되기 때문이죠.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遼寧省)의 서쪽, 즉 요서 지역에 있었어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그곳에 있었던 거죠.” [INTERVIEW]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한 획 그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고조선, 중국 하북성 동남쪽 요서까지 지배했다” 중국 고대문헌에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활동 무대가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남쪽 요서(遼西) 지역까지 이르렀음은 물론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또한 요서를 지배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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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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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송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고려와 전쟁을 세 차례 치르는데 이때 거란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 중에는 장구의 원형인 요고(腰鼓)를 그린 것이 있는데, 거란의 무덤 벽화에도 우리의 장구와 똑같은 북이 그려져 있다. 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된 것이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다. 그런데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는 아골타의 6대조를 고려에서 온 김함보(金函普)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나라와 한국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입력2008-08-31..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Gaya Tumuli)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가야와 관련한 고분군이 780여 곳에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연합뉴스, 김예나기자, 사진은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2023.9.17 백제와 가야의 흔적이 모두 묻어 있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사적으로 지정됐다.문화재청은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와 아영면 두락리 일원에 있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했다. 남원 유곡리 및 두락리 고분군 전경/사진제공=문화재청 호남 지역 ..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는 창녕군의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포함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던 창녕지역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 초기 신라 유적이냐 가야 유적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 전체 형태와 부장품을 통해 신라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군은 창녕분지의 배후 산지에서 서쪽 평야를 향해 뻗은 구릉지에 조성됐다. 모두 115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며, 봉토분이 분포하지 않는 지대에도 지하에 많은 수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전경 /창녕군 ◇순장 소녀 '송현이'로 상징 = 또 다른 특징도 있다.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은 구릉지 능선을 따라 위치하고, 조금 늦게 6세기에 축조된 고분이 구릉지..
20~30m 내외 높은 봉분 27기 모여, 전체 고분 숫자 1000여기 추정 일본보다 빠른 말머리가리개 6점, 임나일본부설 극복 강력한 근거 금동장식 투구·금동제허리띠 등, 여러 나라 교류 유물 다수 발견 합천 옥전고분군. 하지만 특이하게 언덕의 한쪽 지역에는 지름 20~30m 내외의 높은 봉분을 가진 무덤이 27기가 모여 있으며 전체 고분의 숫자는 약 1000여기로 추정하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언덕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묘역을 넓혀가면서 축조되었다. 무덤 형태는 일반적인 덧널무덤과 덧널의 바깥쪽에 돌로 보강한 이 지역의 독특한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하다. 보물 제2043호, 옥전 28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화려한 장신구로는 귀걸이와 목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