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한(삼한) (2) 나주 반남고분군 본문

나주는 ‘내륙의 바다’ 역할을 한 영산강 물길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고대 문명 교류의 거점이자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마한의 핵심 지역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나주는 국보 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보물 금동신발과 같은 마한 관련 지위와 권세를 나타내는 금은 장식 위세품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다.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 복원 최적지 ‘급부상’
금동관 금동신발 마한 유적·유물 전국 최다
반남고분 옹관가마 ‘마한 실리콘밸리’ 주목

윤병태 나주시장은 “나주를 빼놓고 영산강 유역 마한 역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주는 마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며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나주에 유치하는 것은 마한 역사의 실체를 규명하고 정립하려고 노력한 나주시민들의 노력과 성과에 마침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한역사 실리콘밸리 나주

나주는 ‘내륙의 바다’ 역할을 한 영산강 물길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고대 문명 교류의 거점이자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마한의 핵심 지역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나주는 국보 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보물 금동신발과 같은 마한 관련 지위와 권세를 나타내는 금은 장식 위세품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다.
특히 마한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대형 옹관고분, 그중에서도 국내에서 가장 큰 3.28m의 옹관(왕곡면 마산 화정일 1호구분 출토 옹관)이 지난 2008년 발굴됐다. 옹관을 제조했던 옹관 가마 유적도 나주 오량동에 있다. 옹관 가마는 마한시대에 옹관을 생산하고 유통했던 생생한 유적이다. 이 때문에 나주는 ‘마한의 실리콘밸리’로 손색이 없다.
2021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문화권 12개 지자체별 관련 유적을 총괄한 결과 총 2567가지 중 나주시에만 403가지가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독보적으로 많다.(1)
서울신문, 나주 서미애 기자, 나주 마한을 탐(探)하다 “국립마한역사센터 유치 나섰다”, 2023. 4. 6.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옹관고분 묘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백제식 석실고분으로 완전히 대체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크게 유행한다. 그렇다면 화려한 금동관에 금동신발 신고 각종 장신구로 치장하고 큰 칼을 옆에 둔 채로 옹관에 누워 잠들어 있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한국의 유물유적] 고대 미스터리 왕국 '마한' 대표 유물, 국보 '나주 신촌리 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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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 1917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구리와 금을 섞거나 구리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든 관이다 |
ⓒ 문화재청 |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던 1917년 12월 17일. 조선의 주요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던 조선총독부 고적 조사단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일행은 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사무소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면사무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30여 기의 고분군을 조사하던 야쓰이 일행은 높은 곳에 위치한 고분 한 곳을 발굴 대상으로 선택했다. 그곳에 올라 바라보면 주변의 모든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좋은 곳에 최고 권력자의 무덤이 조성됐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땅을 파내려 가자 크고 작은 독널 11개가 묻혀 있었다. 신촌리 9호분이라 명명했다. 조사단은 독널의 발견 순서에 따라 갑(甲), 을(乙), 병(丙), 정(丁)으로 순서를 매겼다. 이중 을관의 구연부는 점토로 막혀 있었다. 주변에 7개의 작은 항아리들이 을관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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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반남고분군과 함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고분군 |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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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당시 신촌리 9호분의 모습. 원형으로 복원했지만, 실제로는 방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
ⓒ 문화재청 |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며칠간 내린 눈이 고분 주위에 쌓였지만 야쓰이는 조선인 인부들을 재촉하여 을(乙)관의 벌어진 틈새를 이용하여 윗부분을 들어냈다.
한반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커다란 '옹관(甕棺)'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고 권력의 상징인 '금동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금동관뿐만 아니었다. 금동신발, 봉황무늬 큰칼, 세잎무늬 큰칼, 크고 작은 토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눈앞에 줄줄이 펼쳐졌다.
옹관 속의 시신은 이미 산화되어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고 머리맡에 금동관이 놓여있었다. 왼쪽에 대도, 창, 화살촉 등이 있었고 목과 상박부 주위에 목걸이와 팔찌, 각종 구슬이 흩어져 있었다. 발 근처에 금동신발과 작은 옥구슬들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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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당시 신촌리 9호분 을관의 내부 모습. 시신은 이미 산화 됐고, 금동관과 환두대도 각종 구슬, 토기 등이 보인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잃어버린 왕국 마한의 상징 '옹관과 금동관'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된 금동관은 고고학 역사상 한반도에서 최초로 세상에 나온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구리와 금을 섞거나 구리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든 관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20년 경남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모관과 대관이 출토되었고, 1921년에 경주 금관총에서 순금으로 만든 신라의 금관이 세상에 나왔다.
1917년 12월 23일.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비운의 금동관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조사단장이었던 야쓰이 보고서 때문이었다. 2년 뒤에 나온 그의 보고서는 달랑 한 장. 너무나 간략했다.
"나주 반남고분군. 반남면이 있는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상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한다. 이 고분들의 외형은 원형 또는 방대형이고 봉토 내에 한 개 또는 수 개의 도제(陶製) 옹관을 묻었다...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 금동신발, 대도, 도자, 도끼, 창, 화살, 관옥,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유물들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倭人)들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제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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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당시 옹관의 모습. 옹관(甕棺)’은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관이다 |
ⓒ 국립중앙박물관 |
그 이듬해 1918년 2차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도 자세한 보고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보고서로 인하여 고분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귀중한 유물이 나왔음에도 아무런 보호조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서에 나와 있는 대로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유물들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倭人)'들일 것이다"라는 구절에 힌트가 있다. 일제는 왜(倭)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남고분군의 주인공들이 일본 열도에 신문물을 전해주었다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보고서를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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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금동신발 |
ⓒ 국립중앙박물관 |
그런 이유로 총독부 조사단은 무덤을 방치해 놓고 일부러 도굴을 조장했을 거라고 보는 견해는 결코 과하지 않다. 일찍이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현 후나야마 고분에서는 백제가 전해준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 발견된 바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금동관이 나온 나주 반남고분군은 묘제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대형 옹관을 사용했다. 지하에 나무관을 매장하는 무덤과는 달리 평평한 평지 위에 성토를 한 다음 3m가 넘고 무게도 500kg가 넘는 커다란 옹관을 안치한 후 봉분을 쌓았다. '옹관(甕棺)'은 흙으로 만든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붙여서 만든 관이다.
또한 커다란 봉분에 한 사람만 매장한 게 아니다. 장례 순서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봉분의 옆이나 위에 또 다른 옹관을 안치하고 봉분을 쌓는 추가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처음에는 옆으로 확장하다가 나중에는 수직으로 올라가며 언덕 형태의 '분구(墳丘)'가 형성되는 다층형 구조다. 쉽게 설명하자면 '아파트형 공동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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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구묘 형태의 신촌리 9호분. 평지에 성토를 한 다음 무덤을 조성한 ‘아파트형 공동무덤’이다 |
ⓒ 국립중앙박물관 |
신촌리 9호분도 옹관 11기가 함께 묻혀 있는 길이 33m 높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방형의 분구묘 형태로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무령 왕릉보다 훨씬 크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백제의 '석실고분'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하 좌우 중층으로 무덤을 쌓다 보니 시신의 유실을 막기 위해 쉽게 썩어서 무너져버리는 목관(木棺)보다는 썩지 않는 옹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망자의 재생과 부활을 염원하며 알과 같은 형태의 독널을 만들고 옹관의 목 주변에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톱니바퀴 모양의 태양 문양을 넣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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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나주박물관에 재현했던 옹관의 모습 |
ⓒ 김경남 |
금동관의 주인은 백제일까? 마한일까?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형태의 옹관고분 묘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백제식 석실고분으로 완전히 대체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크게 유행한다. 그렇다면 화려한 금동관에 금동신발 신고 각종 장신구로 치장하고 큰 칼을 옆에 둔 채로 옹관에 누워 잠들어 있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왜인의 수장'일까.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거대한 문명은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하여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발생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인류가 번성하였고 강은 곧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됐다. 전라남도 담양의 용추골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한반도 서남부 광주·나주·영암의 곡창지대를 흥건히 적시며 서해로 흘러간다.
영산강 유역의 기름지고 드넓은 땅은 선사시대부터 생활 터전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경 혼란했던 전국시대. 땅을 빼앗긴 고조선 유민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정착한다. 그들은 영산강 유역 비옥한 토지에서 찬란한 농경문화를 꽃피우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고대국가 '마한(馬韓)'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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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관 정면 |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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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관 뒷면 |
ⓒ 문화재청 |
고대국가 마한. 어떤 나라일까. 아쉽게도 우리의 역사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의 왕국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나 <후한서>에 기댈 수밖에 없다. 두 역사서는 마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韓)에는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三韓)이 있다. 마한은 한반도의 서쪽 일대에 있다.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큰 나라는 일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 정도다. 삼한 중에서 마한이 제일 컸으며 훗날 마한을 병합한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 중의 하나였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기·충청·전라지역에서 성립되기 시작한 연맹왕국 마한 54국의 위치는 여전히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다만 지금의 전남지역에는 '내비리국' 등 15개의 작은 왕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에서 나주 영산강 유역에 위치한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800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 증거가 바로 107년 전 신촌리 고분에서 발견된 국보 제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과 토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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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관 내관. 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했다 |
ⓒ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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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달려있는 유리옥. 15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롱하다 |
ⓒ 문화재청 |
신촌리 금동관은 높이 25.5cm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두 장을 붙여서 만들었다. 겉면은 인동문(忍冬文)으로 구획하고 안쪽에 '타출기법'으로 여러 개의 꽃을 장식해 놓았다. 이는 금속에 구멍을 뚫는 '투조기법'을 사용한 백제의 제작방식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장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금제관식은 모관에 세움 장식을 따로 세웠지만 마한의 금동관은 관테의 앞면과 좌우에 풀꽃모양의 세움 장식을 못으로 고정했다. 무엇보다 세움 장식의 끝부분에 유리옥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일부 연구자들은 백제 수도 한성에서 제작된 후 나주 반남면 일대의 마한 최고위권력자에게 내려준 위세품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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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리 금동관(좌측)은 '타출기법'을 사용했으나 공주 수촌리에서 발견된 백제 수촌리 금동관(우측)은 금속에 구멍을 뚫은 '투조기법'을 사용했다. |
ⓒ 문화재청 |
제작기법과 금동관의 양식을 봤을 때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크게 다른 토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백제왕의 하사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최근의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라고 했다. 1997년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1500여 년 전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 확연히 구분되는 고대국가 '마한(馬韓)'의 존재를 증언해주고 있다.(2)
오마이뉴스, 임영열기자, 영산강 유역 '잃어버린 왕국'의 금동관, 누구의 것일까, 2023. 3. 11. 20:36
이 시골에 국립박물관이 세워진 이유는 분명하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약 4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기 때문이다. 통칭해 반남고분군이다. 반남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고대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다. 반남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발굴돼 세상에 알려진 삼한시대 유적이다.
나주 우습제와 반남고분군
시골 들판 한가운데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이유
우습제에서 약 10km 떨어진 반남면 들판에 국립나주박물관이 있다. 도심이 아닌 전원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선 건 이곳이 처음이다. 느림과 휴식의 여유를 제공하는 역사공원을 겸하고 있다.

국립나주박물관 기획전시실은 반남고분군에서 발굴한 거대하고 특이한 모양의 독널을 전시하고 있다.

국립나주박물관 기획전시실은 반남고분군에서 발굴한 거대하고 특이한 모양의 독널을 전시하고 있다.
이 시골에 국립박물관이 세워진 이유는 분명하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약 4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기 때문이다. 통칭해 반남고분군이다. 반남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고대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다. 반남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발굴돼 세상에 알려진 삼한시대 유적이다.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 독널(옹관)과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당시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된 유물은 일본으로 옮기기 위해 서울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광복으로 해외로 반출되는 신세를 면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됐던 유물은 현재 국립나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금동관. 반남고분군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국립나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는 통유리를 통해 수장고를 볼 수 있다.
박물관은 기획전시실에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널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어른 키를 훌쩍 넘는 2개로 분리된 대형 옹기가 눈길을 잡는다. 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모형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유물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크기에 놀라고 진품이어서 다시 한번 놀란다. 반남고분군 유물 외에 전남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독널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독널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다. 초기에는 지면을 약간 파고 독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봉분을 쌓았으나 후대에는 봉분을 쌓은 후 정상부에 독널을 안치해 봉분의 규모도 커졌다고 한다. 독널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데 이곳 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동관이 발굴된 반남고분군 신촌리9호분. 반남고분군은 들판과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나주 반남고분군 봉분에 들꽃이 피어 있다.
나주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관람객 눈높이에 맞춘 체험이다. 영상체험관에서는 매시 정각 바닥과 3개 벽면을 이용해 고분 조성과 부장품 제작 과정을 환상적인 영상으로 보여준다. 영상이 끝나면 금동신발 속 물고기와 용 문양을 활용한 영상체험이 이어진다. 바닥의 그림을 밟으면 자동 반응하는 방식이다.
지하 어린이박물관은 박물관 직업체험장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유적 발굴에서부터 보관 처리 전시 교육까지 문화재를 지키는 ‘박물관 사람들’의 업무를 소개한다. 통유리로 보이는 개방형 수장고에서 직원들이 유물을 복원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있다.
박물관 건너편으로 나가면 덕산리와 신촌리 고분군으로 이어진다. 들길을 따라 10여 기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경북 고령이나 경남 창녕의 가야고분에 비하면 밀집도가 떨어진다. 주변도 말끔히 정비된 상태가 아니라 농지와 마을이 혼재돼 있다. 옥수수밭을 지나면 커다란 고분이 등장하고 논두렁과 마을숲을 통과하면 다시 봉분과 마주하는 식이다. 고대인의 영혼이 현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자미산성 전망대에 오르면 나주평야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반남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자미산성으로 오르는 길 입구.

나주 우습제와 반남고분군 주변 여행 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인근 반남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마한농협’ 간판이 눈길을 끈다. 이곳이 옛 마한 땅의 중심이라는 은근한 자랑이다. 행정복지센터 옆길로 약 500m를 오르면 자미산성이다. 성벽은 흙과 돌로 축조되었고 둘레는 660m에 이른다는데 문외한의 눈으로는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대신 일대를 두루 관찰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이라는 점은 누구라도 짐작할 만하다. 높이 98m로 산이랄 것도 없지만 시야가 사방으로 확 트인다. 북쪽과 서쪽으로 멀리 영산강 물길이 꿈틀거리고, 남쪽으로는 월출산이 우람하다. 그 사이 광활하게 펼쳐진 나주평야가 넉넉하고도 평온하다.(3)
한국일보, 나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은은한 연꽃 향기처럼… 관광지인 듯 아닌 듯 자극 없는 여행지 [자박자박 소읍탐방], 2023. 7. 19.
<자료출처>
(1) 나주 마한을 탐(探)하다 “국립마한역사센터 유치 나섰다” (daum.net)2023. 4. 6.
(2) 영산강 유역 '잃어버린 왕국'의 금동관, 누구의 것일까
(3) 은은한 연꽃 향기처럼… 관광지인 듯 아닌 듯 자극 없는 여행지 [자박자박 소읍탐방]
<참고자료>
고창 봉덕리 고분군서 출토된 '금동신발' 국가보물 지정 예고 (daum.net)2021. 02. 17.
전북 고창 태봉산 정상서 2천년 전 마한시대 토성터 발굴 - 뉴스1 (news1.kr)2020-03-11
아산 봉덕리·고수 예지리 ‘태봉’ 정상부서 건물지 확인
마한시대 토성 축성 기술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전남 영암 내동리 쌍무덤서 마한시대 금동관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2020-04-21
일제 강점기 나주 신촌리 금동관 이후 100여년 만에 처음 출토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 유역 강력한 고대 마한 세력의 존재 재확인
해남서 3세기 마한 고분군 확인 | 세계일보 (segye.com) : 2017-05-31
전남 해남에서 1700여년 전인 마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수십기가 확인됐다. 지금까지 해남에서 나온 마한시대의 고분 중 최대 규모다. 고분에서는 가야에서 생산된 덩이쇠가 출토돼, 해남 일대가 가야와 교류한 해상세력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뉴스] 호남의 옹관묘세력은 열도로 이주한 마고 한민족(해=왜) (kookminnews.com) 2017-06-11
- 영산강세력은 다양한 형태의 무덤양식의 개방적인 해양세력
- 고구려의 남한정벌 때 영산강세력(해=왜)은 열도로 이주하였다
- '왜'는 '해(태양)'의 중국식 발음으로 사람.농경.마고(여)가 결합된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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