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조재현 기자입력 2022. 11. 22. 16:02수정 2022. 11. 23. 07:56

마한 후기 국제교류 활발했나…함평 표산고분군서 日·中계 토기 출토 (daum.net)

 

마한 후기 국제교류 활발했나…함평 표산고분군서 日·中계 토기 출토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전남 함평군의 마산리 표산고분군 2차 발굴조사 결과 유리옥과 은 장신구, 일본·중국계 토기 및 도자기 등이 나왔다. 해당 지역이 다양한 문화의 교류지였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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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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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도·전라도에 퍼져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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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도·전라도에 퍼져 있었으며, 월지국(目支)[1]·백제(伯濟)[2]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가 마한 세력을 통일했다.

개요[편집]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3]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삼한시대 마한이, 진한과 변한을 모두 지배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4]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5]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6]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현토성과 요동 공격에 마한의 군사를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역사[편집]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조선시대까지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7]에 세운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발굴된 유적의 특징으로 볼 때에,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처럼 북방계 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3세기 전반 마한소국연맹체의 맹주는 목지국(《삼국지》에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음)의 진왕(辰王)이었다. 마한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고예맥족(古濊貊族 : 개마족)이 남하한 선주(先住) 토착 집단이라는 견해도 있고, 북마한(北馬韓)이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비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고이왕(古爾王)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근초고왕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와 연합해 한반도 서남부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8]

하지만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땅을 파서 돌방을 만드는 백제의 무덤과 달리 흙을 쌓아서 그 위에 돌방을 만들고 옹관묘를 안치하는 마한식 무덤이 출토되고 있는 점, 백제의 행정구역이 6세기 중엽에 이르러 22담로에서 37군으로 바뀌는 점, 6세기 즈음 백제의 양식과 다른 금동관이 발견된 점을 들어 마한의 잔여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독립적 혹은 자치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2023년 11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유물을 공개했다.[9]

문화 사회적 특징[편집]

마한의 문화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성곽은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 청동기 유물을 풍부하게 활용했다.
  •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 옥을 좋아하고, 금, 은, 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 농업과 양잠업에 힘썼다.

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마한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 지대에는 어업(漁業)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제정은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국읍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각각 따로 두어 이를 천군(天君)이라 일렀다.

그리고 마한 여러 나라의 특별한 지역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인데, 본래 이것은 단군설화에 보이는 신단수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서 만주 풍속의 신간(神竿)과도 같이 신역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하는 악기였던 것이다.

이 신역에서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 역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鄕巫 : 골무당 또는 단골무당)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이 밖에 마한에서는 연중행사로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주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수십 명이 같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가며 추었다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술래’와 같은 노래춤[10]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한에서는 이러한 제삿노래를 10월에도 행하였다 하는데, 이는 상고 농업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것으로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이고 10월에는 풍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후하게 지냈다.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을 쓰고 곽(槨)[11] 은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도 모두 장사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축을 순장(殉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습은 뒷날 백제의 문화 기초가 되었다.

2세기 초 마한

마한 54개국[편집]

마한의 인구는 큰 나라는 1만여 호 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라고 하며, 총 10여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추산한 총인구수는 약 50만 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역대 국왕[편집]

대수왕명휘재위 기간비고

1 준왕(準王) 준(準) B.C 194? ~ ? 단군조선의 말대 국왕월지국의 초대 국왕
? ? ? ? ~ B.C 19년 박혁거세 조에 등장.
?
(마지막 대)
? ? ? ~ 8년 온조왕 조에 등장.
마지막 왕.

마한 왕계[편집]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마한왕의 역대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한 건국~멸망까지 9대)후조선 마지막 哀王(애왕)의 망명 후 馬韓(마한) 건국에서 멸망까지 9代 王位 世系"가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족보 속의 왕계보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12]

대수시호휘재위 기간비고

1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한준(韓準) B.C ?년~B.C 193년 기자조선의 말대 국왕월지국의 초대 국왕
2 강왕(康王) 한탁(韓卓) B.C 193년~B.C 189년  
3 안왕(安王) 한감(韓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한식(韓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한무(韓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한형(韓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한섭(韓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한훈(韓勳) B.C 58년~B.C 33년  
9 계왕(稽王) 한정(韓貞) B.C 33년~B.C 17년 마한의 마지막 왕. 온조왕에게 나라를 빼앗김.

 

 

서미애입력 2023. 4. 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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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선임 기자 입력 2019.11.17. 08:15 수정 2019.11.17. 10:52 댓글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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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10.10 21:05 수정 : 2019.10.1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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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모 기자 입력 2018.12.26. 03:00 수정 2018.12.26. 09:22 댓글 389

[단독]함평서 첫 日얼굴토기 출토.. "5세기 왕성했던 국제교류 흔적" (daum.net)

 

[단독]함평서 첫 日얼굴토기 출토.. "5세기 왕성했던 국제교류 흔적"

전남 함평군 방대형 고분에서 출토된 사람 얼굴 모양의 인물식륜. 일본 돗토리현에서 발견된 식륜(아래 사진)과 유사 한 모양으로 코 주변에 수염을 표시하는 등 자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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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금산리 방대형 고분 유물 공개

토기로 얼굴 형상화한 '인물식륜'.. 마한시대 지배층 무덤서 출토
日고분시대의 대표적 유물, 돗토리현서 출토된 것과 비슷
마형식륜-자라병 등도 발견

 

 

 

입력 : 2017-05-31 16:14:12      수정 : 2017-05-31 16:14:12

해남서 3세기 마한 고분군 확인 | 세계일보 (segye.com)

 

해남서 3세기 마한 고분군 확인

전남 해남에서 1700여년 전인 마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수십기가 확인됐다. 지금까지 해남에서 나온 마한시대의 고분 중 최대 규모다. 고분에서는 가야에서 생산된 덩이쇠가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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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에서 1700여년 전인 마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수십기가 확인됐다. 지금까지 해남에서 나온 마한시대의 고분 중 최대 규모다. 고분에서는 가야에서 생산된 덩이쇠가 출토돼, 해남 일대가 가야와 교류한 해상세력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등록 2017-06-11 08:41:44 수정 2017-06-12 03:11:11 윤복현 칼럼 기자

[국민뉴스] 호남의 옹관묘세력은 열도로 이주한 마고 한민족(해=왜) (kookminnews.com) http://kookminnews.com/news/view.php?idx=14500

 

≪국민뉴스≫ 호남의 옹관묘세력은 열도로 이주한 마고 한민족(해=왜)

1만년전서남해평야를적시며흐르는대강(알이수=한강)과이어진호남의영산강지역옹관묘집단은한민족중심세력'해'『삼국사기』는영산강옹관왕국을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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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반도는 고조선이 아닌 마한제국의 영토였다

산동반도는 고조선이 아닌 마한제국의 영토였다제목 한나라시기이전 산동과 조선남부사이의 교류 중국학자는 위의 논문에서 산둥반도의 옜날 제나라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남부로 이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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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외면하는 삼한의 진짜 위치?

이덕일 역사 TV

https://youtu.be/dqvgyRN_XoQ

 

 

KBS 역사추적 – 영산강 아파트형 고분의 미스터리

최초 공개: 2020. 8. 19.

https://youtu.be/nUoFJPYKKhc?list=PLRAmvpNm4pmm7JqvcSC1qna8rYrgRQOfO 

 

 

광주MBC 특집다큐 :: 빅히스토리 마한

2019. 3. 24.

https://youtu.be/opFF-kBKgyY?list=PLRAmvpNm4pmm7JqvcSC1qna8rYrgRQOfO 

 

 

 

[한국사 探] 잃어버린 고대 왕국 마한을 찾아서 / YTN 사이언스

2017. 4. 27.

https://youtu.be/j3WR-gCi04Q?list=PLRAmvpNm4pmm7JqvcSC1qna8rYrgRQOfO 

 

 

 

1,500년전 무덤의 주인은? 고대국가 마한 장고무덤의 비밀 [광주MBC다큐 마한6부]

2015. 7. 31.

https://youtu.be/YiKMMFn-21Y?list=PLRAmvpNm4pmm7JqvcSC1qna8rYrgRQOfO 

 

 

 

[도올김용옥] 노자 29 고인돌과 고조선, "마한은 고구려의 전신이었다" -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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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fv64_gnHU?list=PLRAmvpNm4pmm7JqvcSC1qna8rYrgRQOfO 

 

 

 

[진한]

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진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한(辰韓)은 기원전 1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로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辰)을 계승한 부족 국가이다.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삼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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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은 기원전 1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로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辰)을 계승한 부족 국가이다.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삼척시태백시를 포함한 영동 남부 지역 일부와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馬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모두 12개의 국가로 되어 있었으며, 사로국이 이들을 병합하여 신라(新羅)가 되었다.

형성[편집]

삼국지》, 《후한서》 및 《후한서》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한은 중국 (秦)에서 한반도로 옮겨온 유민인데, 마한이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이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赫居世 居西干 三十八年春二月 (기원전 20년 2월 (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辰韓)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1]로 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중국인들이 마한의 동쪽으로 대거 이주하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꺼려했다는 내용이다.
  • 北史 列傳 新羅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북사》의 기록에는 新羅(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진한)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진한)을 秦韓(진한)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진)나라 때 流亡人(유망인)들이 役(노역)을 피하여 [馬韓(마한)으로] 가자, 馬韓(마한)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진한)이라 하였다고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馬韓(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2]로 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신라의 선조인 진한은 중국 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로서 마한과 언어가 달랐으며 중국사람과 언어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 중국정사조선전 > 北史 > 列傳 > 新羅 > 《북사》의 기록에는 해석상 논란이 되는 구절이 있는데, ○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3]라는 구절이다. 이와 해석을 달리하여 이 기록의 주제는 신라에 중국인들이 살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이고 奔(분)의 주된 의미는 도망가다가 아니라, 힘차게 계속하여 달렸다이므로 신라의 선조는 고구려인이 아니라 관구검의 예하부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구절을, 〈혹은 (신라에 중국인들이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를 격파하고 옥저까지 힘차게 계속(繼續)하여 달렸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관구검의 예하부대가) 있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사로’라고도 한다.〉로 해석하는데 논란이 있다. 참고적으로 갈족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략했을 때 그 예하부대에 갈족, 말갈족이 있었고, 유연을 죽이고 후조를 세운 석륵(石勒)도 갈족이었다[4]는 주장이 있다.
    •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북사》新羅에 初附庸于百濟 라는 기록[5]이 있는데,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되어 있었다는 의미로서 여기서 부용은 속국이라는 의미라고 한다.[6]
    • 梁書 東夷列傳 新羅 《양서》에 신라는 百濟(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高]句驪·百濟(고구려 · 백제)와 접하고 있다.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普通 2년(A.D. 521; 新羅 法興王 8)에 姓(성)은 募(모), 이름은 秦(진)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驪·百濟接.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7]라는 기록이 있다.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8] 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후 경주의 사로국을 중심으로 복속되며 신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5,6세기에 조성된 경상북도 의성 지역 고분에서 수발형 장식이 달린 백제식 금동관모가 출토된적이 있는데, 의성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금동관모와 함께 경주지역 토기와 다른 의성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의성양식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멸망’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고 보고 있다.[9]

진한 12개국[편집]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을 이루는 12개의 소국은 사로국(斯盧國)(현재 경주시기저국(己柢國)(현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현재 경상북도 영일군 혹은 청도군)·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염해국(冉奚國)(현재 경상남도 울산시)·군미국(軍彌國)·여담국(如湛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우유국(優由國) 등이다. 이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의 규모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외에도 아래와 같이, 훗날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경제[편집]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였다. 철전(鐵殿)을 사용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다. 성(城)과 울타리가 존재하였다.

사회[편집]

마한과 언어가 달랐다. 단, 양서 제이열전에서는 진한이 사용하는 어휘가 중국 진나라 언어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한과 다르다고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마한과 진한은 언어 자체가 다른 게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한 땅에 중국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오기 이전에는 진한의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고, 진한의 토착민은 본래 마한과 언어가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풍속이 유순하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褊頭) 풍속이 있어서, 머리가 납작하였다. 남녀에 구별이 있다.[10]

문화[편집]

수렵에 능하고, 가무를 즐겼다.

참고 문헌 및 링크[편집]

 

분자인류학논단 | 부여...진한[辰韓].. - Daum 카페

 

Daum 카페

 

cafe.daum.net

 

 

[변한]

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변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이다. 진한(辰韓)과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辰)을 계승하였으며, 소수의 중국 문헌에 의해 진한(辰韓)과 지

ko.wikipedia.org

 

 

변한(弁韓)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이다. 진한(辰韓)과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辰)을 계승하였으며, 소수의 중국 문헌에 의해 진한(辰韓)과 지리적으로 구별되었다. 지금의 전라도의 남쪽과 동쪽 및 경상도의 남쪽과 서쪽 지역으로, 남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 동쪽은 진한에 접해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12개국이 있었다고 전하며, 나중에 구야국을 중심으로 가야로 발전했다고 추측된다.[1]

역사[편집]

《삼국지》에 따르면 변진(변한)은 진한과 잡거(雜居)하였다고 한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 진한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제사의 방식이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도 변한과 진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2] 낙동강 하구 지역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삼한과 동예(東濊), (倭), 한사군 등에 수출하였다. 또한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이 신라(혁거세 거서간 통치 시)에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3]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4]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변한 지역의 소국들은 가야 연맹을 이루는 소국들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변한 12개국[편집]

삼국지 위서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有, 已柢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冉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馬延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이하의 위치 비정은 이병도설을 중심으로 일부 고쳤음. 이들은 대부분 전기 가야연맹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No이름한자현재의 위치

1 미리미동국 彌離彌凍國 현재의 밀양시 일대
2 고자미동국 古資彌凍國 현재의 고성군 일대
3 고순시국 古淳是國 미상. 천관우는 사천시 일대로 비정했다.
4 반로국 半路國 현재의 고령군 일대. 반파국(伴跛國)의 오기이다.
5 악노국 樂奴國 하동군 악양면.
6 군미국 軍彌國 사천군 곤양면과 곤명면일대.
7 미오야마국 彌烏邪馬國 현재의 창원시 일대
이후의 골포국. 이병도는 고령군으로 비정했지만 이지역은 반파국의 땅이다.
8 감로국 甘路國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이지역은 삼국사기에 진한으로 표기되고
일찌감치 신라 영역에 편입되었다.
9 구야국 狗邪國 나중의 금관가야
10 주조마국 走漕馬國 현재의 김천시 조마면
11 안야국 安邪國 현재의 함안군 일대. 아라가야가 일어선 곳이다
12 독로국 瀆盧國 현재의 거제도 지역.
13 접도국 接塗國 나중의 칠포국. 지금의 함안군 칠원읍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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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1.  《지도로 보는 한국사》, 김용만,김준수 지음, 수막새,43쪽(삼한의 성장)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변한 항목”. 2010년 3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9일에 확인함.
  3.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19년(서기전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4.  신채호저, 《조선상고사》<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

 

등록 2020-01-31 21:12:11

함안군, 가야읍 일대서 2천년 전 '안야국' 실체 알릴 유적 발굴 | 연합뉴스 (yna.co.kr)

 

함안군, 가야읍 일대서 2천년 전 '안야국' 실체 알릴 유적 발굴 | 연합뉴스

(함안=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경남 함안군은 삼한 시대 변한 12 소국 중 하나인 '안야국' 실체를 알릴만한 유적을 발굴했다고 31일 밝혔다...

www.yna.co.kr

 

 

[함안=뉴시스] 남문외고분군 긴급발굴조사에서 발견된 '5호 주거지' 전경. (사진=함안군 제공). 2020.01.31.  photo@newsis.com


[함안=뉴시스] 김기진 기자 = 경남 함안군은 삼한시대 변한 12개 소국 중 하나인  ‘안야국’의 실체를 알리는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31일 밝혔다.


이번 발굴은 문화재청이 ‘2019년 매장문화재 긴급발굴조사 국고보조사업’에 따른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산4번지 일원 발굴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군은 도 기념물 제226호인 남문외 고분군의 확대지정을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경남연구원에 의뢰해 이 일대 조사를 진행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에 형성된 삼한시대 취락유적으로 밝혀졌다.

발굴을 통해 주거지 10동, 수혈유구 8기, 구상유구 2기 등이 확인됐다.

주거 흔적뿐만 아니라 와질토기, 연질토기 등과 함께 벼루로 추정되는 석재가 확인되었다. 또한 철기생산과 관련된 철광석, 슬래그, 철재 등이 출토되었다.

[함안=뉴시스] 남문외고분군 긴급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삼각점토대토기'. (사진=함안군 제공). 2020.01.31.  photo@newsis.com  

이 시기에 해당하는 취락유적은 경남 남해안지역인 사천 늑도유적, 방지리유적, 봉계리유적 등지에서 확인되고, 함안군 내에서도 군북면 소포리 일원에서 집터 1~2동만 확인되는 등 희소가치가 높다.

 

발굴조사 자문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출토물은 아라가야의 전사(前史)인 ‘안야국’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또한 “유적에서 출토된 송풍관, 철광석, 철편 등을 통해 볼 때 제철 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높다"며 "영남지역 삼한시대 철 생산 유적의 조사사례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이 유적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군 관계자는 “향후 유적의 범위 확인 및 성격 규명을 위한 추가적인 조사를 위해 문화재청 및 경상남도와 지속적인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sk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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