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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3. 대진국(발해) 고고학 (2)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아브리코스 발해 절터 유적 본문

북국/대진(발해,고려)

3. 대진국(발해) 고고학 (2)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아브리코스 발해 절터 유적

대야발 2025. 1. 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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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됐습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7년 7-8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과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을 조사한 결과를 9월 18일 발표했습니다.

 

 

 

 

 

 

트라이츠코예 고분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1천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무덤의 조성시기가 발해의 존속연대(698-926년)인 8-10세기로 추정돼 러시아 학계에서 발해와의 관련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문헌자료 등 2차 자료를 통해 발해의 최북단 영역을 추정하는 학설은 제기됐으나 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유물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문화재연구소가 트로이츠코예 유적을 조사한 결과 목곽 또는 목관을 불태우는 장법, 다인(多人) 2차세골장법(洗骨葬法), 말뼈 부장 등의 매장풍습이 확인됐다. 이런 매장풍습은 중국 및 연해주 지역의 발해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또 주변지역 지표조사 결과 고구려의 전통을 잇는 발해 석실분이 발견됐으며 행정치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의 성이 여럿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문화재연구소 홍형우 학예사는 "이번 발굴결과를 통해 아무르 지역과 발해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며 "발해 무왕과 선왕대에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해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는 문헌기록과 아무르주의 제야강 유역까지 발해의 영역으로 보는 북한 및 러시아 학계의 견해와 부합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연해주 동해안에서 5㎞ 가량 떨어진 낮은 언덕지대에 형성된 소콜로프카 유적에서는 평면형태가 원형이며 지름이 11-12m에 이르는 연해주 최대 규모의 '얀콥스키문화' 적석유구(積石遺構)가 발견됐다.

 

 

문화재연구소는 '얀콥스키문화' 유적은 두만강 유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며 "연해주와 두만강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의 상호관련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1)

연합뉴스, 김승욱기자, 발해 세력권 러시아 아무르강까지 미쳤나, 2007-09-18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8년 8~9월 러시아과학원 극동 지부 역사·고고·민족 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연해주 남서부 라즈돌나야 강가에 자리한 스타로레첸스코예 발해 평지성 발굴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발해 토성의 크기와 축조 방식이 밝혀졌습니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남벽 절개조사지 전경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발해 토성의 크기와 축조 방식이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8~9월 러시아과학원 극동 지부 역사·고고·민족 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연해주 남서부 라즈돌나야 강가에 자리한 스타로레첸스코예 발해 평지성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남벽 판축 중심부 전경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은 발해 지방행정구역 15부 중 솔빈부(率濱府) 옛 땅에 있는 평지성이다. 서쪽, 북쪽, 동쪽으로 라즈돌나야 강이 흘러 해자 구실을 하고 있다. 길이 150m의 남벽과 30m의 짧은 서벽이 남아있다.

 

 

인근에 흐르는 강 때문에 성 내부 서쪽이 유실되는 등 유적 원형이 계속 훼손돼 성 남벽과 서편 일대를 중심으로 지난해 7월부터 긴급 조사를 통해 그 현황을 기록·보존하고 있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지하식 저장고 세부 전경

 

 


이번 조사에서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성벽 전체 규모와 축조 방식을 확인했다. 성벽은 강 자갈과 점토로 기초를 다진 뒤 중심부를 폭 4m, 높이 2m 사다리꼴로 판축 기법을 사용해 쌓고 그 위에 흙을 덧쌓았다.

 

 

중심부는 점토층과 모래층을 번갈아 가며 20겹 정도를 쌓았다. 판축한 점토층 윗면에서는 목봉(木棒) 등으로 다진 흔적이 확인됐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지하식 저장고 전경

 

 

 

성벽을 쌓고 나서 유실을 막고자 강돌로 윗면을 덮었다. 성벽 전체 폭은 14m에 이른다. 판축은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사이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쌓는 건축방식으로, 한성백제 도성인 서울 풍납토성도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

 

 

강 때문에 계속 훼손되는 성 내부 서편에서는 강돌을 이용한 지상 구조물 흔적과 구덩이를 판 뒤 돌을 쌓아 벽을 축조한 지하식 저장고를 확인했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지하식 저장고 내 삼족기와 동물뼈 출토 모습

 

 


저장고 내부에서는 다양한 발해 토기, 동물 뼈, 물고기 뼈, 비늘, 철체 손칼 등 당시 발해인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특히, 이번 저장고에서 출토된 삼족기(三足器)는 원통형인 다리 3개가 흑회색 작은 항아리의 편평한 바닥에 부착된 형태다.

 

 

 

러시아 스타로레첸스코예 평지성 출토 삼족기

 

 


삼족기는 발해 수도 상경성이었던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인근에서 2점이 출토됐다. 그중 1점은 유약을 바른 발해 삼채(三彩)다. 발해 유물 중 출토가 드문 토기다.

 

 

유적은 중국 동북부에서 연해주로 흐르는 강가에 있다. 저장용 구덩이 다수가 성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다. 삼족기, 원통형 기대 조각 등 고급 기종도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 조사지역이 발해 중심부에서 연해주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물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10세기 동아시아 문화강국인 발해는 그 옛터가 중국, 러시아, 북한에 흩어져 실물 자료를 통한 직접 조사가 힘든 상황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러시아 연해주 소재 발해유적에 대한 분포 현황 조사와 발굴 조사를 추진해 발해의 동북방 중심지로 기능한 콕샤로프카 유적, 영역 확장을 보여주는 시넬니코보-1 산성 등 다양한 유적의 실체를 확인했다.(2)

뉴시스, 이수지기자, 러시아 연해주 발해성, 규모·축조 방식 확인, 2018. 10. 25.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중국 훈춘 발해 성지에서 출토된 발해 불상. 가슴에 십자가(동그라미 표시)가 새겨져 있다. 강인욱 제공

 

 

 

우리에게 기독교는 근대 이후 서양을 통해 들어온 대표적인 종교다. 하지만 최초의 기독교는 그보다 훨씬 이른 1500년 전에 서유럽을 거치지 않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들어왔고, 당나라와 몽골 제국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그리고 그 일파는 발해에도 도달한 흔적이 최근 고고학적 자료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억울하게 이단으로 규정받았던 네스토리우스파였다. 그들은 실크로드에서 교역을 주로 담당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유라시아 대륙을 넘었고, 동아시아의 여러 문화와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종교가 반목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는 지금, 동아시아 변방에서 번성했던 초기 기독교의 흔적 위에서 종교가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연해주 발해 절터에서 발견한 십자가

 

발해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련의 고고학자 샵쿠노프(1930~2001)는 1960년에 우수리스크 근처 고려인 마을이었던 ‘차피고우’ 일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발굴지는 아브리코스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발해 절터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기왓장 사이에서 자그마한 진흙 조각을 발견했다. 그냥 흙덩이로 착각할 만한 진흙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였다. 그것도 보통 십자가가 아닌 끝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특이한 형태였다.

 

 

아브리코스 발해 절터에서 나온 십자가. 출처 샵쿠노프 저서

 

 

 

바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해로 유입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십자가였다.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는 주로 아시아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대표한다.

 

 

샵쿠노프의 놀라운 발견은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에 그의 발견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최근 발해 유적에서 다양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확인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억울하게 이단이 된 네스토리우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출처 위키피디아

 

 

 

한문으로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네스토리우스교는 네스토리우스(368~450)라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사상은 431년 제1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 서방의 기독교에서는 배척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리가 원인이 아니었다. 학식과 외모로 주변을 모두 압도했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시기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의 반대파들은 네스토리우스 무리의 도착이 풍랑으로 지연되는 틈을 타서 일방적으로 공회를 열어 이단으로 규정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에서 한 많은 여생을 마쳤다. 그의 추종자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동방으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활발하게 이어진 실크로드를 따라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은 페르시아를 거쳐 아르메니아와 인도, 중앙아시아로 퍼졌고, 당나라까지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이미 서기 6세기께부터 경교 신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번성한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등과 함께 공인되었다. 서기 635년에 페르시아의 시리아 교회에서 파견한 알로펜(阿羅本)이라는 교주가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당나라의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세웠으니, 지방마다 그들의 사원이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자신들의 종교를 공인받은 경교 신도들은 당나라 전성기인 781년에 시안(서안)에 경교 사원인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하고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시안의 비림(碑林)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비석은 높이가 3m에 가까운 거대한 크기에 한문과 시리아 문자가 새겨져 있다.

 

 

대륙을 건너서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찾은 그들의 감격이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전해지는 듯하다. 이 비석은 천년 가까이 지난 뒤에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던 가톨릭 선교사들이 재발견하면서 다시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던 제정러시아의 고고학자 판투소프는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공동묘지를 발견했고, 이후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오가며 상업을 하면서 살아왔던 무리였음이 밝혀졌다.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은 무슬림과 불교도들의 탄압으로 자신들의 교회나 벽화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덤과 일상에서 사용하던 도기에 자신들만의 십자가를 남겼고, 땅속에 숨어 있던 그들의 흔적을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것이다.

 

 

발해로 기독교가 전해진 배경

 

당나라의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845년에 발생한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사건과, 이어서 일어난 황소의 난(878년) 사이에 큰 피해를 보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실크로드에서 유입된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경교 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알려진 것만 수만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경교 신도들은 중국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고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중에서 몽골 지역으로 흘러들어간 경교는 몽골 제국에서 다시 화려하게 등장했다. 몽골 제국에서 경교를 믿는 사람들은 옹구트족(Ongud)이라고 불렸다. 홍산문화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내몽골 웡뉴터치(翁牛特旗) 지역이 바로 경교를 믿는 옹구트족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또한 몽골 제국의 4대 황제인 몽케와 5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네스토리우스교도였다.

 

 

 

내몽골 경교인 무덤에서 나온 성물. 강인욱 제공

 

 

 

 

경교가 당나라에서 탄압받던 시기에 한반도 일대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번성하며 사방과 교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발해는 몽골의 위구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이 살면서 많은 교역활동을 하던 때였다. 경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발해에서도 활동했으니, 그들의 일파와 함께 경교가 흘러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발해 아브리코스 유적은 불교 사원이고, 유물도 자그마한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십자가 말고도 중국 훈춘에서 경교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 시기의 불상 장식에서 십자가가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경교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많이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경교인들의 풍습을 보면 이런 상황은 이해된다. 경교인들은 수백년간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성상을 만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십자가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토착화해서 유교와 불교의 풍습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별도의 사원을 세우지 않고 불교나 유교 사원처럼 자신들의 사원을 꾸몄다. 둔황(돈황)이나 신장(신강)에서 발견된 경교 예수상도 불화의 한 장면에 십자가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인다. 경교인의 무덤에도 돌로 만든 십자가를 새겨넣었을 뿐이었다.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해뿐 아니라 통일신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불국사 출토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다. 하지만 불국사 출토품은 경교 십자가의 형태와 많이 다르며 경교 신도들은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다.

 

 

 

카자흐스탄의 네스토리우스교 묘지석에 새겨진 십자가. 강인욱 제공

 

 

 

 

통일신라와 경교의 관련성은 고고학 유물보다는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발굴하여 소개한 페르시아의 고대 서사시인 쿠시나메에 그 힌트가 있다. 쿠시나메 이야기는 7세기 후반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인 아비틴이 중국을 거쳐서 신라로 와서 타이후르라 불리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활동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야기로 윤색된 것이긴 해도 이 이야기는 회창폐불과 황소의 난과 같은 당나라의 탄압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국제적으로 번성했던 통일신라였으니 당나라의 탄압을 피한 사람들을 통해서 통일신라에도 경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발해 기독교는 개방과 공존의 증거

 

 

원나라 시기인 1253년 만들어진 경교 무덤의 묘지명. 강인욱 제공

 

 

 

수천년간 탄압받던 경교가 다시 주목받은 계기는 근대 이후 서양의 선교사가 동양으로 들어오면서이다. 기독교 선교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유럽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던 세력이었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로 바뀌어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은 다양한 종교를 인정했던 실크로드의 관용이었다.

 

 

 

둔황 막고굴 17호에서 발견된 예수상. 불교 회화처럼 그렸으나 이마에 십자가(동그라미 표시)를 넣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동양에서는 실크로드를 불교의 전래 경로로만 생각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실크로드 유물을 가져온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는 일본 불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인도의 불교가 일본으로 직접 들어왔다는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동서양의 다양한 나라들은 실크로드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해의 절터에서 발견된 경교의 십자가는 실크로드가 배타적인 종교의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던 종교의 해방구였음을 증명한다. 이단으로 몰려 박해받던 경교가 소수의 선교사 힘으로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배경은 적극적으로 현지 문화와 결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해의 기독교 흔적은 비록 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발해였지만 적극적으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음을 증명한다.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종교는 배타성과 갈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자신만의 종교를 고집하기 전에 최초의 기독교가 전해졌던 당시의, 타자에게 개방적이며 공존을 인정했던 발해와 초원의 열린 모습을 되새길 필요가 여기에 있다.(3)

한겨레,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18) 발해인도 기독교를 믿었을까, 2020-01-18. 

 

 

 

 

 

 

<자료출처>

 

 

(1) 발해 세력권 러시아 아무르강까지 미쳤나2007-09-18 

 

 

(2) https://v.daum.net/v/20181025121209719

 

 

(3)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24770.html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191018102313339 연합뉴스. 2019. 10. 18.

 

 

https://v.daum.net/v/20180706203335643 세계일보.2018. 7. 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134337

 

 

웅대한 고구려와 발해 한눈에 내려다 보는듯…|동아일보 (donga.com)2008-05-14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까지 발해 영토" (daum.net)2008. 10. 17. 

 

 

https://v.daum.net/v/200711230901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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