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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진국(발해) 고고학 (3) 연해주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 본문

북국/대진(발해,고려)

3. 대진국(발해) 고고학 (3) 연해주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

대야발 2025. 1. 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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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발굴 작업을 진행 중인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블라디슬라프 볼딘 박사는 지난 12년간 발굴 내용을 종합한 결과, 염주성은 성·사찰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식 표현을 번역한 성·사찰복합체란 곡식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사장인 사직(社稷)과 유사한 개념으로 성 내부시설이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러시아 측은 1980년 염주성 북서지역에서 대규모 사찰터를 발견하고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2007년부터 총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가 발해 염주성 사찰터에서 발굴한 내용을 토대로 제작한 금당복원도와 우물평면도, 사찰터평면도의 모습./자료제공=동북아역사재단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인근 핫산지구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지역. 러시아에서 크라스키노성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 위치한 발해(698~926년) 염주성(鹽州城)이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한 ‘성·사찰 복합체’라는 러시아측 연구결과가 나왔다.

 

염주성 중심부에 자리한 사찰터는 지금까지 발굴된 발해의 불교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로 불교가 발해의 국가 통치 기반의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연해주 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진 발해의 불교 사찰들 중에서 염주성 사찰은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전체 둘레 1.3km에 달하는 사찰터에는 숭배건물인 금당과 전각, 생산 및 경제 건축물들이 집중돼 있다. 사찰이 위치한 염주성 서북쪽은 도로, 온돌, 수로 등 생활시설 집중된 지역으로 그 중심에 위치한 건축물이 바로 사찰이다.

 

그동안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터에서 금당지, 전각지, 우물, 기와 생산 가마터, 마당을 발견됐고, 금동 불상과 장식물, 기와, 용기 등의 유물도 발굴됐다.

 

 
 

러시아 연해주 핫산지구 크라스키노 지역에 위치한 발해 염주성(鹽州城)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사진제공=동북아역사재단

 
 
 
 

특히, 성 내에서 가장 높은 부분에 위치한 사찰터는 성 내부가 잘 조망될 뿐만 아니라 성 밖도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됐다. 또 사찰 내 중심 건물인 금당은 주변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장방형의 토축기단 위에 세워져 당시 사찰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발굴작업에 참여한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사찰터가 발견된 서북지역은 석축담장에 의해 사찰구역과 주거구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며 “이러한 사실은 사찰이 처음부터 염주성의 전체 구획에 맞춰 조성됐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 인근 핫산지구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지역에 위치한 발해시대 염주성(鹽州城) 발굴지를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사진제공=동북아역사재단

 

 

 

볼딘 박사는 사찰의 존속시기를 10세기 전반이나 그보다 더 이른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도 염주성은 여전히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란국은 926년 발해를 정복한 이후에 속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발해인들을 통치해왔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도 거란은 염주성을 일본, 신라와의 교역을 위한 거점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볼딘 박사는 “염주성의 마지막 단계는 거란이 동단국을 멸망시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파괴된 사찰 건축물과 생산시설 등 사찰터에서 발굴된 학살과 화재의 흔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염주성은 토층 연구를 통해 발해 건국 이전인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고고학 자료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 62개 주 중 하나인 염주성에서 이 정도 규모의 사찰터가 발굴됐다는 점을 통해 발해가 불교를 국가의 핵심적인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염주성의 사찰터, 금당지, 전각지, 우물 등의 건축양식과 축조방법을 보면 고구려의 계승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며 고 말했다.(1)

서울경제, 최성욱 기자, "발해 염주성은 불교사찰 중심 도시였다", 2019. 11. 6.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유적에서 8세기 중후반에 주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동전이 출토됐다.

2006년부터 매년 염주성을 조사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은 러시아 발해역사연구협회와 함께 2018년 7월 17일부터 8월 17일까지 염주성 북서쪽을 발굴 조사한 결과, 저장구덩이에서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발견했다고 8월 23일 밝혔다.

개원통보는 1998년 러시아 조사단이 염주성에서 찾은 동전과 같은 종류로, 지름 2.4㎝·무게 3.7g이다.

 
 
 
 
염주성 유적에서 나온 개원통보.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개원통보는 당나라 건국 직후인 621년 처음 만들었는데, 이번에 발견한 동전은 뒷면 문양을 보면 8세기 중후반에 제작한 것 같다"며 "20년 만에 다시 개원통보가 출토되면서 염주성에서 활발한 국제교역이 이뤄졌음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염주성 유적에서 나온 개원통보.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김 위원은 "개원통보는 발해 고분에서 주로 나오지만, 발해 수도 상경성 남쪽 담장과 대조영이 698년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염주성 조사 지역 전경. 가장 위쪽이 서북쪽 성벽 인접 구역, 가운데가 저장구덩이 발견 구역, 아래쪽이 건물터 출토 구역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염주성은 발해 62개 주 가운데 하나인 염주(鹽州) 행정기관으로, 대외 교류 거점으로 알려졌다. 성 둘레는 1.38㎞이며, 동·서·남쪽에 옹성 구조 성문이 있다.

 

 

이번 조사는 염주성 내부 3곳에서 진행됐는데, 주작대로와 연결된 북부 중심 구역에서는 밀집된 건물터 유적 3동이 나왔다.

건물터 유적 중 하나는 길이 6.4m·너비 4.2m이며, 또 다른 건물터는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으나 길이 6.5m·너비 4.1m로 파악됐다. 또 벽체 안쪽에서는 아궁이 흔적이 나왔다.

 

 

북서쪽 성벽과 인접한 구역에서는 사원터로 향하는 4m 너비의 초기 도로 유적이 발견됐다.

김 위원은 "염주성은 구획 작업이 서북쪽에서도 매우 세밀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며 "도로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아직 특정할 수 없지만, 성을 만든 초기부터 내부에 도로가 구축됐다는 사실은 입증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로를 발굴하면서 성벽 기초 부분을 조사했는데, 지면을 잘 다진 뒤 모래흙과 판돌을 기단석처럼 깔고 그 위로 성돌을 쌓아 올렸음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성벽 안쪽 출토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단은 2015년 조사 당시 회색 윤제(輪製·돌림판이나 물레로 제작) 토기 항아리 조각이 출토된 문화층(특정 시대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 목탄을 방사성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3∼6세기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김 위원은 "염주성이 고구려 시기에도 존속했을 가능성이 커졌다"며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평원왕 12년(572)에 고구려 사신이 동해를 건너 일본에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염주성이 고구려가 동해로 나가는 출구였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장구덩이가 나온 구역의 문화층도 연대 측정을 의뢰할 계획"이라며 "결과가 고구려 시기로 나오면 염주성은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유적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

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연해주 발해 염주성서 8세기 중국 동전 출토(종합), 2018. 8. 23.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유적에서 꽃무늬 전돌(흙으로 구운 돌)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러시아 발해역사연구협회와 함께 2017년 7월 26일부터 8월 22일까지 염주성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발해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되는 꽃무늬와 유사한 문양이 새겨진 전돌을 찾아냈다고 9월 20일 밝혔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에서 나온 꽃무늬 전돌.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 전돌은 9세기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염주성의 중심 건물지에서 출토됐다. 이 건물지의 길이는 3.4∼4.9m이며, 여러 차례에 걸쳐 구들을 조성한 흔적도 있었다.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상경용천부에서 염주성은 직선거리로 150㎞ 정도 떨어져 있다"며 "이번에 발견된 전돌의 무늬는 매우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정도 문양의 전돌이 나왔다면, 건물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김 연구위원은 "발굴 건물지는 전체 구역의 3분의 1 정도로 보인다"며 "기초부 남동부 모서리에서는 초석 2개가 확인됐다"고 말했다.

 

 

 

염주성 중심건물 기초부.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번 조사에서는 당초문 전돌 외에도 핀셋·허리띠 장식 등 청동제 유물, 비녀못·화살촉 등 철제 유물, 토기, 고누알 등이 출토됐다.

 

 

이와 함께 염주성 서북쪽 도로 유적도 모습을 드러냈다. 곡선 형태의 도로는 사원과 거주지 사이를 가르는 경계석을 따라 2m 너비로 조성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 연구위원은 "염주성 서북쪽에서 도로 유적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여러 곳에서 도로가 확인됨에 따라 염주성이 계획도시였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6년부터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염주성은 발해 62개 주 가운데 하나인 염주(鹽州)의 행정기관으로, 발해의 대외 교류 거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번에 조사한 염주성 중심건물의 기초부를 심화 발굴해 이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방침이다. 또 연말에는 염주성을 소개하는 대중 교양서를 펴낼 예정이다.(3)

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연해주서 발해 꽃무늬 전돌 출토.."수도 상경부와 유사한 문양", 2017. 9. 20. 

 

 



"우라~~~~~~~ " ('만세'라는 러시아 말)
갑자기 옆쪽에 있는 발굴장이 시끌벅적하다.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무슨 일일까? 인터뷰 중이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학 교수님이 무언가 좋은 것이 발굴된 것 같다며 현장으로 안내한다. 문제의 물건을 직접 발굴한 예브게니아 겔만 러시아측 발굴단장(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을 자세히 보니 낙타상이다.

 

 

 

크기는 가로 세로 2cm 정도, 보기에도 앙증맞은 물건이다. 봉우리가 두개인 쌍봉 낙타상이었다. 재질은 청동이라고 했다. 겔만 박사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고, 발굴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물건이길래...?

2015년 8월 7일 낮 12시.

기자는 러시아의 극동 중심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30km 떨어진, 중국.북한 국경과 가까운 크라스키노를 찾았다. 동해를 바라보는 광활한 늪지대 한복판에 발해 염주성 성터 발굴현장이 있었다.

 

1980년부터 러시아 연구자들이 발굴을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동북아역사재단이 합류해 한-러 양국이 공동으로 발굴작업을 진행중이다. 7월 14일부터 8월 15일까지 1달 동안 집중적으로 발굴이 진행됐다.

 

그 현장을 취재하러 방문한 취재진 앞에서 청동 낙타상 발굴이라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35년 넘게 이어진 발해 유적 발굴 사상 청동 낙타상 발굴은 처음이란다.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KBS 취재진이 찾아온 덕에 좋은 일이 생겼다며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발해 염주성 발굴 현장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평범하고 앙증맞게만 보이는 이 작은 청동 낙타상이 대체 어떤 가치를 지녔길래, 연구자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걸까?

낙타는 고대로부터 교통수단이자 문화 교류의 수단이었다. 문헌을 보면,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도 서역에서 낙타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겔만 박사는, 카라반(대상)이 서역에서 상품을 싣고 이곳 염주성에 왔으며 이는 발해가 아라비아와도 긴밀히 교역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설명했다.

 

2012년에는 이곳에서 낙타뼈가 발견된 점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낙타상과 함께 몇가지 청동 장신구가 발견된 점으로 미뤄, 이곳에 청동구 제조 공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해 장신구 전문 연구자인 아스타셴코바 박사는, 자신도 이런 청동 낙타상은 처음 본다면서 그만큼 발해인들의 세공 기술이 뛰어난 것을 반증한다고 설명했다. 처음 발굴된 유물인 만큼 이 조그만 청동 낙타상이 과연 어디에 쓰인 물건인지는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2m 30cm 토층


 

 

이번 발굴에서는 발해 모든 시기의 건축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이 2m 30cm의 토층이 발견됐고, 저장고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한꺼번에 4개 정도 발굴되는 등 고고학적 성과가 대단히 풍성했다.



■ 발해를 꿈꾸며

1990년대 문화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4년 여름에 내놓은 뮤직 비디오가 '발해를 꿈꾸며' 였다. 촬영지는 철원의 옛 노동당사였다. 왜 하필 발해인가? 당시 발해가 통일신라와 마주보고 이른바 '남북국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통일을 지향하는 뜻이 있었나? 해석도 다양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 기자는 발해의 옛 터를 방문하고 그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봤다. 왜 지금 발해인가? 발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발해 성터 발굴 현장


 
 

기자는 2012년 남북러 가스관 연결사업 취재와 2013년 나진~하산 철도연결 사업 취재차 크라스키노를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까지 230km 라고 하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4시간이나 걸린다.

 

 

도로 양 옆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것을 보고, 도대체 저 넓은 땅이 왜 저렇게 방치돼 있는 걸까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었다. 한때 저 땅에서 고려인들이 경작을 했을 것이고, 그 이전엔 .....아...발해가 있었지...



그랬다. 연해주에서 발해 유적이 심심찮게 발견된다는 소식에 관심이 쏠리던 터에 발해 유적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라는 말을 듣고 취재를 결심했다.

 
 


크라스키노 가는 길


 
 
 

서기 698년,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는 한때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성기의 발해 영토는, 오늘날의 중국 지린성과 연해주 대부분,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일부 등 사방 5천리에 달했고, 고구려보다 더 넓었다고 한다. 발해는 남쪽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 시대를 열어 서기 926년까지 무려 228년을 이어갔는데, 발해의 멸망을 끝으로 우리 역사는 더 이상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고 반도에 머물고 말았다.

 
 


발해 강역도


 

 

그럼 왜 지금 새삼스레 발해를 말하려 하는가? 우리 정부의 대외 정책 기조의 하나가 바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이다. 한반도의 교통.물류망을 대륙으로 연결해,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경제권을 연계함으로써, 우리 기업들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달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뒤,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친선 특급'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해 지나간 곳은, 천년 전 발해인들이 경략했던 땅이다.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서역문화와 당, 신라, 일본 문화 등 주변의 모든 문화가 발해에 녹아서 발해만의 독특한 색깔을 냈었다면서, 현대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발해의 대외 개방성과 포용성이라고 강조했다. 바다와 대륙을 동시에 경영했던 해륙국가, 발해인의 기상은 오늘날의 세계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김은국 박사는 설명했다.

 


■ 대륙으로 가는 길

 


철길 사진


 

 

발해 염주성 발굴 현장 앞쪽으로 한줄기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와 하산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철길이다. 시베리아에서 채취된 석탄이 이 철길을 따라 북한 나진항으로 운송되고 있다. 기자는 철길과 나란히 달리는 도로를 따라 하산까지 가본 적이 있는데, 육로는 아직 포장이 안돼 있어, 철길이 훨씬 안전하고 빠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0년 전 발해인들이 왕래하던 그 길이, 이제는 대륙과 소통하는 교통.물류 네트워크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자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논의중인 과제이다. 서역과도 활발히 교류했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오늘날 되살린다면, 이 철길이 한반도 종단철도와 이어짐으로써 대한민국의 대륙 진출 통로가 될 그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4)

[취재후] 발해 땅에서 발굴된 청동 낙타, 천년의 비밀은?, 2015.08.27

 

 

 

 

크라스키노 유적에 발굴조사팀을 파견중인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은 2014년 8월 6일 중간 조사성과를 발표했다. 러시아사회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속학연구소와 공동 발굴을 진행한 결과, 2011, 2013년 발굴조사에서 일부가 발견됐던 두 방향 도로의 교차 부분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계획도시의 특징인 도로 구획의 자취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교차지점이 확인된 도로는 남북 16m('1호가'로 명명), 동서 29m('2호가') 길이다. 도로 표면에는 일반 돌과 자갈을 깔았던 것으로 드러났고, 주위에서는 잘게 깨트린 토기편과 기와편 등이 발견됐다. 재단쪽은 "그 동안 발해 유적에서 도로망으로 도시를 구획한 흔적은 발해 상경도성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이번 발견으로 발해의 지방성도 도로를 정연하게 구획하고 설계해 계획도시로 조성했음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북한 나진선봉 지역 바로 위쪽이며, 동해와 맞닿아있는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지역. 1200여년전 일본 열도로 뱃길을 텄던 대국 발해의 무역항 염주성이 있던 곳이다. 최근 이 염주성이 도로를 정연하게 구획하고 설계한 발해의 계획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와함께 이번 발굴에서는 특이한 모양의 '토제 탑 모형'도 출토돼 눈길을 끈다. 이 유물은 원통형 받침대 위에 8층 높이 탑을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탑 아래 부분에는 구멍 두개가 서로 엇갈리며 나있고, 받침대 아래쪽 가운데에도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 형태다. 14.3cm 높이인 이 토제 탑 모형은 발해 불탑 연구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 철제 삽, 자귀, 열쇠, 차관, 비녀못, 화살촉, 손칼, 청동제 띠꾸미개, 홍옥 구술도 다수 출토됐다고 재단 쪽은 전했다.

 

 

 

 

 

 

러시아 연해주 하산주의 크리스키노는 발해 62개 주 가운데 하나인 염주(鹽州)의 치소(治所)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신라·일본과 교류하는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재단은 2006년 출범이래 매년 여름 크라스키노 성을 발굴조사해왔다. 올해는 역사연구실 김은국 연구위원이 발굴을 총괄하고, 정석배 교수(한국전통문화대) 등 한국 발굴단 6명과 E. I. 겔만 등 러시아 쪽 학자와 학생 등 40여명이 조사팀을 이뤄 지난달 15일부터 1달 일정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앞으로 재단은 올해 발굴한 도로 구획에서 고려인 주거지 유적으로 조사범위를 넓히고, 내성 추정터도 발굴할 예정이다. 또 재단 출범 10주년 기념사업으로 한·러 공동발굴 20년 성과 종합보고서와 크라스키노 발굴 관련 자료집을 각각 출간하고, 염주 발해성 발굴 국제학술회의도 2016년에 개최를 추진할 방침이다.(5)

한겨레, 노형석 기자, 사진 제공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무역항 염주성은 계획 도시였다, 2014. 8. 6.

 

 

 

중국의 발해사 왜곡이 한창인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 발해 염주성(크라스키노성)에서 발해 유적 발굴 사상 처음으로 다듬잇돌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러시아과학원 극동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발굴팀과 공동으로 2012년 7월 5일부터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유적 47구역과 48구역에 대한 발굴 작업을 벌여 발해 유적 발굴 사상 최초로 다듬잇돌을 발굴했다고 7월 24일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다듬잇돌은 장방형 구조로, 길이 67㎝, 너비 18㎝, 높이 8㎝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그동안 사료를 통해 발해 사신 양태사(楊泰師)가 남긴 시(詩)로만 전해져 오던 다듬잇돌을 역사상 처음으로 발굴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면서

 

 

"고고학적 가치는 물론 역사적, 학술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또 "발해 시대 주거 문화를 확인함으로써 발해인의 생활문화 복원 연구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발굴팀은 이와함께 염주성에서 대형 온돌과 발해시기 철제 창 2점(길이 25.9㎝, 24.1㎝)을 발굴했다. 연해주 지역에서 대형 온돌이 발견된 것은 체르냐치노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며, 발해 철제 창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온돌의 재발견은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또다시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굴팀은 온돌 등을 통해 염주성이 남북의 두 열로 주거시설이 있고, 그 사이에 도로 겸 광장 구조가 이어지는 도성이 구획된 것으로 파악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앞으로 염주성 북부 지역에 대한 5개년 발굴 계획을 마련해 크라스키노 발해성의 도시구획 전모를 파악하는 한편 발굴 종합 보고서와 유적 유물 사진 자료집 등을 발간할 계획이다.(6)

세계일보, 신동주기자, 러시아 연해주 발해성서 다듬잇돌 첫 발굴, 2012. 7. 24.

 

 

 

 

2005년 8월 1일부터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과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속학 연구소 공동 조사팀은 크라스키노 성을 발굴했습니다.

 

 

크라스키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약 200㎞,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에서 동쪽으로 40㎞ 지점에 있는 촌으로 한국의 리(里)급 마을입니다.

 

 

 

 
▲ 지난 21일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발해 성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옛 발해 성터에서 이제까지 발굴된 것 가운데 가장 크고 완벽한 형태의 온돌 유적이 발견됐다. 이 온돌 유적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상경용천부에서 나온 온돌 유적 보다 훨씬 큰 규모다. 전형적인 고구려식인 크라스키노 온돌 유적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발굴팀이 처음 크라스키노 성터 '34구역'의 표토층을 걷어내자 석렬(石列)이 드러났다.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발굴팀은 2~3일에 한번씩 장대비가 쏟아지는 악조건하에서도 작업에 박차를 가해 지난 21일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온돌 유적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 지난 21일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발해 성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현장 발굴팀장인 에브게니 겔만(46) 극동과학기술대 교수는 "발굴된 온돌은 'ㄷ'자 형태로 총 길이는 14.8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1.3m, 좁은 곳이 1m 가량"이라며 "온돌은 두겹으로 된 '쌍구들'로 돌을 양 옆으로 세우고 위에 판판한 돌을 얹은 전형적인 고구려식"이라고 말했다.

 

 

또 아궁이 2곳과 연기를 배출하던 굴뚝도 드러났다. 온돌이 있는 건물터의 총 면적은 50㎡이며 현재 50㎝정도 깊이로 판 상태다. 발굴팀은 일단 층위로 볼 때 온돌 유적의 연대를 서기 10세기 발해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겔만 극동대 교수 "크라스키노 온돌은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관계 증명"

 

 

 
 
▲ 크라스키노 발해 성에서 온돌을 발굴한 에브게니 겔만 교수.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겔만 교수는 "온돌 유적이 나온 곳은 크라스키노 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 였을 것"이라며 "따라서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크라스키노 성터의 온돌은 발해가 고구려와 계승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며 "앞으로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이 유적발굴의 의미를 평가했다.

 

 

고구려연구재단 발해팀의 임상선 박사는 "일본이 지난 1930년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에 있는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 성터를 발굴했을 때 온돌 유적이 나왔다"며 "그러나 이번 것은 길이 2.7m 폭 1.5m 가량으로 크라스키노 온돌 유적보다 훨씬 작다"고 설명했다.

 

 

연해주 지역의 경우 지난 1987년 노보가르제옙스코에 지역에서 온돌의 흔적만 발견됐었다. 고구려연구재단 정재운 박사는 "이번 온돌 유적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견됐다"며 "이제까지 발굴된 발해 온돌 유적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가장 큰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크라스키노 발해성에서 발굴 작업중인 고구려연구재단 발해팀 연구원들. 왼쪽부터 김은국 박사, 임상선 박사, 정재운 박사.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이밖에 철제 삽날·청동제 과대(허리띠의 버클)·유약을 발라 구운 발해 도자기(발해 삼채) 파편·물결 무늬가 있는 토기편 등 14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온돌은 한민족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중국·일본·거란·말갈 등 주변 민족 가운데 온돌을 사용하는 민족은 없다. 2000년 전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홀승골(중국 환인현 오녀산성)에도 온돌 유적이 확실하게 남아있다.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히터 시스템을 갖춘 현대식 아파트에 입주한 뒤 따로 많은 돈을 들여 온돌 시공을 한다. 수천년을 이어올 정도로 온돌 문화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2주 전 몽골 지역의 말갈 유적을 조사했던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 극동 역사·고고·민속학 연구소 부소장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서쪽 톨강 부근에 11세기 말갈의 유적이 있다"며 "이곳에서도 온돌이 나왔다. 서기 926년 발해가 망한 뒤 거란에 끌려갔던 발해 유민들이 남긴 것으로 현지 학자들은 보고있다"고 전했다.

 

 

중국, 발해 유적을 자국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계획

 

 
▲ 지난해 9월17일 중국인 발굴단이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있는 발해의 옛 도읍 상경성을 발굴하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김태경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고구려사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다. 또 집안과 환인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발해 역사는 더 심각하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한 중국은 상경용천부 유적을 모두 복원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시킬 계획이다.

 

지난해 6월24일 <중국교육보> 보도에 따르면, 중국 국가문물국 세계유산처의 왕다민은 '세계문화유산 청년논단'이라는 회의에서 "앞으로 수년 안에 발해 유적, 안양의 은허유적, 윈난성에 있는 하니족의 계단식 논밭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가문물국 세계유산처는 바로 중국이 자국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직접 관장하는 곳이다.

 

 

지난해 7월 24일 <중국신문> 보도에 따르면, 흑룡강성 여행국의 쑨쟈거우 처장은 "발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신청서를 이미 국가문물국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빠르면 오는 2008년 중국이 발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으로 보고있다.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발해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약간 더 늦출 가능성은 있다.

 

 

중국 정부가 발굴 작업을 하고 있거나 진행 예정인 곳은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성 영안현의 동경성(상경용천부), 연길 부근의 서고성(중경현덕부), 훈춘의 팔련성(동경 용원부) 등 8곳이나 된다. 중국 정부는 발굴 현장에 공안원을 배치하는 등 철저하게 외부인, 특히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오는 2006년까지 발해 유적 발굴 및 보수 작업을 끝내기 위해 최소 13억위안(1885억원)을 투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 정비에 들어간 비용 3억위안(435억원)의 4배나 되는 돈이다.

 

고구려 유적은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 지역에 상당수 남아있다. 그러나 발해의 경우 왕성 등의 중요 유적지가 중국에 집중된 상황이다. 중국은 지난 1960년대 북한과 딱 한번 발해 유적에 대한 공동발굴을 한 이후 외부 학자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발해를 둘러싼 '역사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국내 학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연해주 지역 발해 유적에서 성과를 올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크라스키노 성에서 최대 규모의 발해 온돌 유적을 발견한 것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7)

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최대 크기 '발해 온돌' 유적 발굴됐다, 2005. 8. 25.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91106144129016 서울경제. 2019. 11. 6.

 

 

(2) https://v.daum.net/v/20180823120545444 연합뉴스. 2018. 8. 23.

 

 

(3) https://v.daum.net/v/20170920113157828 연합뉴스. 2017. 9. 20.

 

 

(4) [취재후] 발해 땅에서 발굴된 청동 낙타, 천년의 비밀은? (kbs.co.kr)2015.08.27 

 

 

<참고자료>

 

 


‘38년 발굴’ 박물관 세운 러 조각가 (hani.co.kr)
20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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