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대진국(발해) 문화유산 (1) 발해 5경 유적과 발해 석등 본문
이형구교수는 발해국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로 발해 5경(京) 가운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인 동경성(東京城),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인 서고성(西古城),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인 청해토성(靑海土城)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 성곽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大祚榮)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震國)’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渤海)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업에 소홀했다.
발해와 후기 신라시기[8세기] 강역도
발해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안정된 정치와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면서 926년 거란(契丹, 요나라)에 망할 때까지 220여 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존재했다.
발해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발해전에는 발해국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려[고구려]계의 민족[本高麗別種]”이라 전제하고, 이어서 발해의 건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당(唐)나라 즉천무후(則天武后)가 대장군 이해고(李楷固)에 명하여 대조영을 쫓게 하자 대조영은 고려[고구려]와 말갈의 민중을 모아 해고에게 항거하니 왕사(王師, 당나라 왕이 보낸 군사)가 크게 패해 해고는 간신히 탈출하여 돌아갔다.
즉천은 더 이상 대조영을 토벌할 수 없게 되므로,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개루부(桂婁部)의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웅거하게 되었는데, 말갈과 고려[고구려]의 여중(餘衆)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자 스스로 진국(振國 혹은 震國)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가 성력(聖曆) 연간으로 698년이다.
여기에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고려[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나라[진국]을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대조영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중국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 건국의 양대 건국 유공자, 즉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내원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는데, 후세의 해석상에서 이를 구분치 않아 대조영을 혹자가 잘못 ‘말갈인’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대조영을 ‘本高句麗別種’이라고 분명히 지칭하고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高句麗 ······ 以爲夫餘別種]”이라고 한 것이나, 『주서(周書)』이역전에서 “백제가 부여의 별종[百濟者 ······ 夫餘之別種]”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계 민족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당서』가 말한 “大祚榮者 本高[句]麗別種”이란 것도 마땅히 대조영이 고구려계 민족이란 뜻이다.
둘째, “조영과 말갈의 걸사비우[祚榮與靺鞨乞四比羽]”라고 하는 구절인데, 여기에서 걸사비우 앞에 굳이 ‘말갈’을 지칭하였으나 조영 앞에는 ‘고려’가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당서』는 조영을 전구(前句)에서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이미 종족명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高麗]祚榮與靺鞨乞四比羽”라 하지 않고 조영 앞에 오는 종족명[고려]을 생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渤海靺鞨’이라 칭한 것은 “合高麗靺鞨之衆”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발해는 고구려와 동일시한 즉,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는 「발해전」 앞에 분명히 「말갈전」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해국의 민족 구성의 중요 성원이 고구려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발해 동경성지(東京城址)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실정이지만 고구려와 발해국은 분명 우리의 역사에 속한다. 발해국이 우리의 역사로 인정되는 사료는 발해국이 중국사로 오인될 수 있는 사료보다 훨씬 많다. 또한 발해국의 문화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국의 문물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발해 성곽을 들 수 있다. 발해 5경(京) 가운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인 동경성(東京城),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인 서고성(西古城),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인 청해토성(靑海土城)을 들 수 있다.
발해국의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인 동경성(東京城) 유적은 일찍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서 조사된 바 있다.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고 당시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한편 동경성 안에서는 수십 편의 와불(瓦佛)이 출토된 바 있다. 발해 석등(石燈)은 지상에 몇 안되는 건조물[조각] 중의 하나이다.
발해 동경성지 석등(石燈)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내 청나라때 흥륭사(興隆寺)가 있던 자리에 발해 석등이 남아 있다. 높이 6m.
상경용천부는 일명 동경성이라고 하는데 성의 축성 방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발해 수도 동경성지(東京城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도성, 일명 동경성이라고 한다. 둘레 16,296m나 되는 외성 안에 황성과 궁성이 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시기[698~926]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사방 수백 리가 되는 평탄한 분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분지 둘레는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 처져 있으며 성의 서남쪽에 있는 경박호(鏡泊湖)에서 흘러나오는 모란강(牧丹江)이 성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감아 돌면서 자연해자(自然垓子)를 이루고 있다.
상경용천부는 궁성·황성·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상경용천부의 외성은 평지토성(平地土城)이다.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 밖의 길이는 동쪽이 3,358m, 서쪽이 3,406m, 남쪽이 4,586m, 북쪽이 4,946m로 전체 둘레는 무려 1만 6,296m나 되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 정도 된다.2) 외성 밖으로 모란강 물을 끌어들인 해자(垓子)가 둘러져 있다.
황성과 궁성은 성의 북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궁성의 정남으로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도시계획이 정연하게 이루어진 모습이 마치 근대적 도시계획인 ‘전(田)자’ 형과 비슷하다. 이는 일찍이 552년부터 586년까지 대규모로 계획도시가 건설된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 역시 외성과 중성[황성], 내성[궁성]으로 된 기본적인 구조에 방어성인 북성을 축성하였다.
상경용천부의 외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평양성의 평지에 쌓은 성벽 축조 방법과 마찬가지로 돌로 성벽의 외연(外緣)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져 쌓는 판축방법으로 축성하였다. 판축수법은 중국과 같은 판축토성이기는 하지만 외연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방법은 중국의 고대 축성법과는 다르다.
상경용천부에서는 석재 건축유구를 비롯하여 유명한 발해 석등, 불상과 사리함 등 불교유물 및 여러 종류의 기와와 유약을 바른 기와 그리고 발해삼채(渤海三彩)·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해에서는 삼채 말고도 녹유 도기, 백자 등이 제작되었다. 우리는 발해 자기의 유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유물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고구려적이다. 동경성의 서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는 유명한 발해 삼령둔(三靈屯) 고분이 있다.
길림성 발해 용정현 중평(仲坪) 사지 출토 발해 석조 삼존불상(三尊佛像)
발해 삼채완(三彩盌)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북대 7호묘에서 최근 발견되어 공개된 발해 삼채완(三彩碗)이다.
흑용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동경성(東京城) 출토 발해삼채(渤海三彩) 편]록.청.황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도기.(『동경성(東京城)』, 1936, PL.103)
발해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서고성지(西古城址)는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남북 길이가 각각 720m, 동서 넓이 각각 630m로 전체 둘레 2,700m이다. 기저부 폭은 13~17m이고, 모양은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번갈아 쌓으며 다졌다.[니토항축(泥土夯築)]3) 외성의 사주에는 해자를 둘렀다. 최근 2000~2001년 발굴을 통해서 성안에서 41×25m 면적의 1호 궁궐지를 비롯하여 건물지와 연못지가 조사되었으며, 기와와 벽돌들이 출토 되었다. 그리고 유약을 입힌 기둥 밑 장식, 치미, 괴면, 전벽돌, 약간의 철정(鐵釘) 등 건축 장식 및 재료가 출토되었다. 이 성은 성의 구획, 건물의 배치, 규모, 형식, 건축장식 그리고 출토 유물에 이르기까지 상경 용천부와 유사하다. 이 곳은 발해 3대 문왕(文王)이 수도로 사용하던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가 있던 현주(顯州)이다. 서고성지 주변에 발해 시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있다.
발해 서고성지(西古城址) 발굴전 전경[1990]
발해 서고성지 발굴 장면[2002]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청해토성(靑海土城)이 있다. 이 곳은 남경 남해부가 있던 발해 5경 가운데 하나로, 5경 중 유일하게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규모는 동쪽 성벽 332m, 서쪽 성벽의 길이가 342m이며, 남쪽 성벽 328m, 북쪽 성벽의 길이는 340m로, 성벽의 둘레는 길이 1,342m이다. 그러나 원래의 성은 이보다 규모가 더 컸는데, 1916년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그 둘레가 2,132m가 된다고 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놓인 장방형이다. 성벽의 남은 높이는 2~3m이며 기저부 넓이는 약 8m이다. 성의 바깥 둘레에는 해자가 있으며 성벽에는 각루(角樓)와 마면(馬面)이 있다. 마면의 길이는 6m 정도이고, 높이는 2m이다. 성내에는 건물지와 우물지가 있으며, 출토 유물로는 초석·기와·벽돌·괴면·치미 등이 있다.
발해 남경남해부 청해토성지(靑海土城址)함경남도 북청읍 토성리에서 동남쪽 16km 지점 남대천 하구에 위치한 발해 남경남해부의 청해성. 평지 토루(土壘)형의 성터는 지금 남아 있는 높이가 약 2m 정도이고, 둘레 1,342m의 정방형이다. 북한의 지정고적 제172호.
이 외에 갑옷·활촉·창끌 등 무기류와 말등자·말자갈 등 마구, 낫·삽 등 생산도구와 기타 토기류가 있다. 성벽의 중앙에서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옹성(甕城) 형식의 문터가 확인되었으며, 토성 주위에서는 발해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구려계의 문화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청해토성지 궁뜰
청해토성지 부근 발해 고분함경남도 북청읍 명수리에서는 최근 수십 기의 발해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 특유의 묘제인 소형 석실 봉토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해의 산성도 고구려의 성곽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발해의 산성은 고구려의 산성과 같이 남쪽이 낮고 그 북쪽에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우묵한 골짜기를 낀 산 능선에 성벽을 두른 ‘고로봉식(栲栳峰式)’ 산성이다.
발해국의 성터를 고르는 방법에서부터 성벽을 쌓는 기술, 왕궁의 기본 구조와 건축술, 도시계획 그리고 무덤을 축조하는 짜임새, 주검을 묻는 방법, 그 밖에 건물에 사용되는 기와 종류와 형태는 물론 제작기술에 이르기까지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1)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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