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낙랑국 (2) 출토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본문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라羅직물과 견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겸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많은 양의 누에천(실크)이 출토되었다. 직물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복식유물의 한 구성부분으로 출토되었는데, 누에천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출토된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자료는 당시의 사회와 경제수준을 가름할 수 있게 해 줄 뿐 만 아니라, 무덤 주인의 국적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기존의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본 평양설과 북한학자들에 의해 대두된 요동설, 그리고 요서지역에 위치할 것으로 보는 난하설로 구분된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복식유물에 관한 분석은 비교적 소홀히 되었고,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에 대한 비교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직물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일제시대 교도섬유대학에서 처음으로 평양 낙랑구역에 위치한 왕우무덤, 채협총, 토성동 486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진 누에천을 실험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광무덤이나 정백리무덤과 마찬가지로 이 무덤들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유적일 것으로 분류되어 출토된 직물의 문화적 성격도 당연히 중국 한나라의 생산품일 것으로 단정되었다.
이처럼 일본 학자들이 한국 고대 누에천에 대해 단순한 분석의 틀을 가지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은 대동강유역을 낙랑군의 위치로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하였고, 또한 고조선에서 누에천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고 믿어왔다. 종속적 해석의 연구 경향은 요즈음 신진학자들의 연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서기 전 12세기 말경 기자箕子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정론처럼 통용되었다. 그 까닭은 문헌자료인 《漢書》와 《後漢書》에 기재된 서로 다른 내용을 무분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중국에서 사직물 생산은 서기전 2700년경부터였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인 서기전 2209년경부터 중국과 계속 우호적인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 시기에 중국은 500년 이상 축적된 양잠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도 양잠기술을 수입하지 않고 있다가 서기전 12세기경에 와서야 비로서 箕子로부터 양잠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므로 기자에 의하여 고조선에 양잠기술이 전달되었다는 《後漢書》 「동이열전」에 나오는 기록은 기자의 치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된 것이었다.
고대 한국은 중국에서 누에천을 생산한 시기인 서기전 2700년보다 앞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이미 야생누에로부터 누에천을 독자적으로 생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령성 동구현 后洼유적에서 누에의 조소품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 유적의 연대를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으로 밝혔다.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파림우기 나사태유적 등에서도 옥으로 만든 누에가 출토되었다. 또한 고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통잎뽕나무 조각무늬가 새겨진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한민족의 거주지역에서 메누에로부터 토종 뽕누에로 순화된 시기가 신석기시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학자 조희승이 평양의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고조선시기의 누에천을 실험‧분석한 결과 고조선에서 생산했던 누에천의 독자성과 고유성이 확인되었다. 조희승은 해방 전후시기에 낙랑구역 11개 무덤들에서 출토된 누에천을 실험 분석하여 그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한 이를 근거로 일본 교도섬유대학에서 진행한 무덤들의 분석결과는 한민족이 생산한 누에천의 특징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누에천의 특징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의 누에품종이 중국의 넉잠누에가 아닌 석잠누에라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이 평양일대에서 출토된 누에천은 조선 토종의 석잠누에로 부터 뽑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 연원은 중국의 산동일대에서 넘어 온 중국계통 석잠누에라고 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견絹직물(가공하지 않은 누에실로 짠 천)과 겸縑직물(가는 누에실을 겹쳐 촘촘히 짠 천), 라羅직물(누에실로 성글게 짠 천)에 대한 분석 내용을 중국 누에천과 비교하면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에 속하는 직물이 출토된 평양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한민족이 생산한 석잠누에의 누에천 만이 출토되었다.
둘째는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누에천들은 같은 시기 중국의 것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독창적인 직조방법과 염색기술 등을 갖는다.
셋째는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위 표에 보이는 직물들이 생산된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까지의 기간에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낙랑구역의 직물들이 보여주는 여러 사실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종래의 통설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는 직물과 함께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만들어진 유물도 있지만 한민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석암리 212호 무덤유적에서는 요녕성과 한반도 지역의 특징적 청동기인 세형동검과 함께 검자루 맞추개가 출토되었고, 고조선시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마구장식과 청동단추, 청동방울, 잔줄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낙랑구역 정백동의 부조예군무덤에서는 고조선 유물의 특징인 여러 개의 청동방울과 함께‘夫租薉(濊)君’이라고 새겨진 銀印이 출토되었는데, ‘부조예(예)군’은 고조선과 위만조선에서 사용했던 관직명이었음이 이미 밝혀진바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구결과와 함께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사직물이 고조선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밝혀져 이를 뒷받침한다.
왕우무덤(석암리 205호 무덤)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永平 12년”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영평 12년은 東漢 明帝시대로서 서기 69년이다. 이로 보면 왕우무덤이 조성된 연대는 서기 69년 보다 이르지 않을 것이다.
토성지역에서는 ‘樂浪禮官’·‘樂琅富貴’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에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것이 출토되어 이 지역을 한사군의 낙랑군지역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지역에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기 때문에 낙랑예관 · 낙랑부귀 등의 명문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문은 이 지역이 반드시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기와의 명문은 서예사적인 연구에서도 중국과 구별되는 한민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기와 명문의 필획에 나타나는 특징에서 볼 때 중국의 기와명문이 명문을 중심으로 문양과 독립적으로 발전한 데 비하여 낙랑의 기와명문은 문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문양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즉 낙랑 기와명문에서 나타나는 필획이 문양화되고 점획이 圓點化하는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자를 주된 장식 수단으로 하는 중국미술에 비하여 문양을 주된 장식수단으로 하는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채협무덤(남정리 116호 무덤)에서는 목찰이 출토되었다. 木札의 내용은,“비단 3필을 옛 관리인 조선승 전굉이 아전을 보내어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하여 북한학자 손영종은 조선승 전굉이 그 부근에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오히려 전굉이 채협무덤 피장자 밑에서 복무하다 먼 곳인 낙랑군으로 가서 조선승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재물을 보냈다고 해석해야 할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일제시기 토성지역에서는 약 200개의 봉니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위조품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러면 이시기 평양의 낙랑구역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살았을까?
고대 문헌에 나타난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시대 최리왕이 다스리던 낙랑국이 있었다. 일찍이 이익과 신채호가 한사군과 다른 최리의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밝혔다. 즉 이익은 낙랑을 낙랑군과 낙랑국으로 나누고 낙랑군은 요동지역에, 낙랑국은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낙랑을 남낙랑과 북낙랑으로 나누고, 남낙랑은 대동강유역의 낙랑국으로 최리왕이 다스렸던 나라이고, 북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라고 했다. 이후 리지린과 윤내현이 그 연구 내용에서 조금씩 차이를 갖지만, 대동강유역에 있었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인 것으로 밝힌 바 있다.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다음의 문헌 기록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조(서기전 3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에 놀러 갔다 낙랑국의 최리왕을 만나 나눈 대화가 있다.
최리왕이 호동에게,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최리왕이 대화에서 고구려가 북쪽 나라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어디까지 인지 알아보기로 한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당시 고구려는 “4년(서기 57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무신왕 이후 태조대왕 시기까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대무신왕 때 남쪽 국경도 살수 즉, 청천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 위치는 청천강 이남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의 예전에는 예의 서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고, 한전에서는 마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가깝게 있다고 하였다. 마한이 당시 북쪽으로 황해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앞의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에 설명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그 위치는 대동강유역으로 고구려의 남쪽 경계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 서술한 羅직물은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한 것이었다. 이 시기 실제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로 한다. 낙랑국의 존속기간을 살펴보면,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은 가장 이른 기록이 서기전 28년에 보이고 있어 건국은 이보다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에 낙랑왕 최리의 공주가 왕자 호동의 지시로 적이 나타나면 알려주는 鼓角을 부수게 되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차츰 약화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나 서기 37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 다시 서기 44년에 낙랑국은 동한 광무제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서기 300년 대방국과 함께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존속했다.
위의 내용으로부터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표에 보이는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羅직물과 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하였으므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에게 축출되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보았을 때 다음의 사실이 정리된다.
즉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칠기는 서한무덤과 흉노무덤 등에서 출토된 칠기와 비교한 결과 황실용으로 낙랑군의 관리나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음도 밝혀진바 있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은 서기 1세기 초에 속하는 석암리 9호무덤에서 출토된 용무늬금띠고리의 금세공기술도 이미 중국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중국 漢문화로 볼 수 없다고 분석한바 있다.
또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의 분석결과 이웃나라의 것과 달리 산화연을 유리의 주원료로 사용한 연유리와 소다유리, 회분유리등으로 한민족 유리의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대동강유역 유물들에 관한 다양한 분석내용은 낙랑유적의 금속유물들이 중국의 것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 견해와 함께 복식방면에서도 종래의 잘못된 견해를 수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복식재료를 자료로 평양 낙랑지역 문화의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것은 복식이 고고학적 유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이기 때문이다. 복식의 특성 연구는 곧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밝히고, 복식양식과 자료의 고유성에 관한 분포 연구는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를 파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평양낙랑 유적의 복식유물도 그 재료적 특성과 직조기술을 통해서 그 지역 거주 민족의 정체가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었음을 추적할 수 있다. 복식유물의 국적을 알게 되면, 해당 복식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 주민들의 국적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복식이 민족적 정체성을 증언하는 시각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브레이크뉴스, 박선희. 상명대 교수. 출토옷감서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특별기고>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2011/12/05
<자료출처>
출토옷감서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breaknews.com) 201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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