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1.7〈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본문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1.7〈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대야발 2024. 2. 18. 10:39《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과 중국 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만주·터키·조선 네 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몽골제국시대에 상호작용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지명·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민족의 구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동진〉
『인류의 발상지를 두고 파미르고원이라는 설과 몽골초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조선 민족이 어딘가에서 동진을 해왔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고어에서는 왕의 성씨를 해(解)라고도 하고 왕의 칭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도 했다. ‘해’라는 성씨는 태양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고, ‘불구래’란 칭호는 태양의 빛이 붉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천국을 환국(桓國)이라 한 것은 광명처럼 환하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조선 민족은 서쪽 파미르고원이나 몽골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진을 해왔다. 이들은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이 부근을 ‘조선’이라 불렀다. 조선이란 말은 ‘광명’을 의미하는 고어에서 나왔는데, 이것을 후대에 이두자로 ‘朝鮮’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민족의 동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1.2 2007년 3월 13일 서울신문 〈“中 동북공정은 패권주의 역사관 요동·한반도 하나의 역사로 봐야”〉
『고구려사는 과연 어느 역사에 귀속시켜야 하는가. 응당 한국사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다.’(중국 동북공정),‘고구려사는 만주사의 하위 개념이다.’(일제 ‘만선사학’) ‘고구려사 해석은 요동사로 풀어야 한다.’(김한규의 ‘요동사’)는 등의 학설은 고구려사를 다시 생각케 한다.
최근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 ‘주몽’이 막을 내렸다.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주몽은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증폭시킨 것이 사실이다.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도 확산됐다.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서해문집 펴냄)는 이번 봄호에서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국민 모두 당연히 우리 역사로 알고 있는 고구려사에 대해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사 편입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는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역사적 사실관계 등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의 중국 영토’라는 전통적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기준마저 폐기하고, 중국 왕조의 판도가 가장 넓었던 과거 불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중국사의 범주를 최대한 확장하려는 극단적인 패권주의 역사관”이라고 규정했다.
여 교수는 “고구려의 된장과 김치, 온돌은 한민족의 삶속에서만 살아 숨쉬는 등 현재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사를 온전히 계승한 역사체는 한민족뿐”이라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고구려의 외연은 멸망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확장됐다.”면서 “고구려는 여러 족속을 아우르면서 광활한 영역을 운영했던 한민족의 대제국이었다.”고 부연했다.
고려대 박찬흥 연구교수는 고구려사를 만주사의 하부구조로 전락시킨 일제 ‘만선사학’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일제의 만주공략이 시작되던 1905년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만선사학은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돼왔다. 일본의 ‘한반도 남부경영론’과 함께 한국사를 타율적인 역사로 전락시킨 것. 만선사학은 고구려 건국 주체세력인 고구려족이 부여족의 일파이고, 모두 만주민족이기 때문에 만주사와 조선사는 하나라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일제가 아무리 고구려사의 위대함을 찬양했더라도 그것은 만주사에 포함되는 고구려사가 갖는 위대성일 뿐”이라면서 “만선사학에서의 고구려사 인식은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김한규 교수가 제기한 ‘요동사’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요동사는 만주, 요동으로 불리는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이 전통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고, 따라서 이 공간에서 명멸한 고구려는 별도의 역사공동체로 봐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법종 우석대 박물관장은 ‘요동사의 입장에서 보는 고구려사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요동을 한반도와 다른 역사공동체로 보는 시각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그 근거로 ▲한반도-요동반도의 동일한 고고학적 문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일한 언어 사용 ▲고조선-삼한-삼국역사 계승인식 등을 제시했다. 그는 “요동사는 학문적으로 창작된 가상의 역사체”라고 일축했다. 박홍환 기자』
1.3 2007년 3월 15일 헤럴드경제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韓民族”〉
『김영한 LA특파원이 만난 이 홍 범 헌팅턴 커리어 칼리지 학장
서구의 동북아 역사관은
‘中ㆍ日이 날조한 왜곡문화
‘아시아 이상주의’곧 출간
‘中에 맞서‘대륙공정’펼것
존 패어뱅크(John K. Fairbank) 하버드대 교수는 생전 “중국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 왜곡하고 날조한 동아시아 역사관을 서구학계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민족의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제대로 알려졌는지 의문스럽다.
30일 뉴욕 캠브리아 출판사에서 패어뱅크 교수의 의문을 풀어 줄 만한 한 권의 책이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헌팅턴 커리어 칼리지의 이홍범 학장이 평생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영문으로 출간하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라는 400쪽 분량의 저서가 바로 그것. “고대 한민족의 정신문명이 중국과 일본 문명의 원류”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주장을 담고 있다. 이 학장은 이 저서를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우리의 ‘대륙공정’이라고 규정했다.
이 학장은 동경대 법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국제관계와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대학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등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이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신이 밟아온 최고의 학풍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이 학장은 “한민족의 역사는 객관적 연구라는 미명 아래 고대에는 중국의 식민지로, 근세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비문명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다”며 “불행하게도 이런 날조된 역사관이 서구 학계의 정설로 통하는 실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학장은 동양의 초합리적 직관과 자연과학을 병행한 ‘총체적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 아니라 1만년이며 4대 문명 전 이미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존재했다”고 입증한다. 고증에 따르면 중국의 3황 5제, 일본의 천황계는 모두 한민족 계열이다. 중국 한(漢)문화는 다름아닌 한(韓)민족 문화다. 청(淸) 태조 누르하치 또한 중국 역사문헌에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점을 들어 한민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들며 이 학장은 한민족 정신문화가 중ㆍ일 문화의 원류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이념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분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해왔으나 이제는 한민족의 홍익주의를 세계민주주의(Unicracy)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홍익이념이야말로 세계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라는 생각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이 ‘도전과 응전’이었다면 이 학장의 역사관은 ‘자아투쟁’이다. 역사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정신과 인격이기 때문에 인격이 몰락하면 역사도 몰락한다는 것이 이 역사관의 의미다.
이 학장은 “중국과 일본은 한민족 인물까지 자기네 민족으로 둔갑시켜 자아를 확장하려 애쓰는데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이 미국 학계에서 어느정도 반향을 일으킬 지 주목된다. 김영한 LA특파원』
1.4 2007년 7월 31일 동아일보 기사 〈中 동북공정에 영향 받은 역사학계 4가지 새 인식틀〉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된 시선만 일깨워 준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 온 동북아시아 고대사와 관련한 새로운 시각에 눈뜨게 해 줬다.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 묶인 채 문헌 자료에만 의존하던 실증사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 연구의 지평을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로 확장시켰고 고고학과 신화 연구의 영역을 적극 끌어안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이병주 씨는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썼다. 동북공정의 반작용을 통해 한국역사 연구에서 교교한 달빛만 어리던 분야에 찬란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 징후로서 4대 역사인식의 전환을 소개한다.》
① 동아시아의 最古문명은 랴오허 문명
② 몽골-만주-일본도 동이족 문명체 포함
③ 동이계열 遼元淸중국사 제외 움직임
④ 韓中논쟁 초점 고구려에서 부여로 이동
○최고(最古) 문명은 황허(黃河) 문명이 아니다
『사계절출판사가 최근 출간한 ‘아틀라스 중국사’는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를 황허 문명이나 중국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황허 문명 외에 양쯔(揚子) 강 유역의 하모도 문화, 랴오허(遼河) 강 유역의 신락·홍산 문화 등 기원과 계통이 다른 문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동아시아 문명’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특히 신석기 홍산 문화는 돌무덤, 비파형 청동검, 빗살무늬토기 등 몽골 만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북아 문명의 원형을 보여준다. 중국학자들은 랴오허 문명을 “중화 문명의 기원”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포장하며 자국역사화한다. 국내학계에선 이를 신화로만 전해지던 고조선 문명의 실체로 바라본다.
○오랑캐의 재인식
중화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부터 오랑캐로 폄훼하던 몽골 만주 일본을 동이(東夷)라는 더 확대된 문명공동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중원의 한족 외에 이민족을 동이 서융 북적 남만으로 차별화하던 중국이 점차 이들을 중화 문명의 주역으로 둔갑시키는 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랴오허 문명론은 중화민족의 기원을 △중원의 화(華)족 △동남 연해안의 하(夏)족 △동북의 황제(黃帝)족 집단으로 3분한다. 여기서 동이와 북적은 황제족의 후손으로 탈바꿈된다. 이에 맞서 국내학계에선 동이족을 랴오허 문명(고조선)에서 출발한 동일 계통으로 바라볼 필요를 제기한다.
○중국사의 해체
동이족에 대한 이런 통합적 관점은 자연스럽게 중국사의 해체로 이어진다. 같은 동이 계열의 거란족이 세운 요, 여진족이 세운 금 청, 몽골족이 세운 원 등의 제국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의 범주에 집어넣을 경우 고구려와 발해 역사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과 상충된다.
이들 동이족 계통에선 언어(알타이어계)와 신화(난생신화, 곰 숭배, 활쏘기 신화), 문화(태양 숭배, 제천 문화, 솟대 문화, 샤머니즘, 씨름 문화)의 특징을 공유한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는 이런 공통점을 흉노 위구르 등 북융은 물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 핀란드 에스토니아로 이어지는 ‘고조선 문명권’으로 확대해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잃어버린 고리’ 부여의 재발견
동북공정이 우리 고대사 전체를 겨냥했음이 뚜렷해지면서 한중 역사논쟁은 점차 고구려사에서 부여사로 이동 중이다. 신용하 교수는 부여족의 일부가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로, 동쪽으론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도학 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가 시조왕으로 모신 동명이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동명성왕)가 아니라 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설화 내용이 거의 같다는 점에서 동일 계통 신화의 후대 합성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부여 구태왕이 남쪽으로 이동해 백제 고이왕이 되고,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진(應神) 천황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를 대륙 부여-반도 부여-열도 부여의 성립 과정으로 설명한다. 권재현 기자』
(출처;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7310143)
1.5 2007년 10월 16일 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이형구 선문대 교수
『넓은 의미 발해 연안 문화·출토유물… 한반도 고대문화와 밀접한 관계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원형적석유구. 중국 요녕성 조양시 건평현에 있다. <신동호 기자>
인류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인류의 문명을 말할 때는 신석기시대부터를 가리킨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은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간 최초의 발명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 가버리고, 시베리아·몽골 지역의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와 신석기 시대가 시작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발해 연안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발해 연안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반도, 서부의 하북성 일대, 북부의 요녕성 지방, 북동부의 요동반도와 동부의 길림성, 남부의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발해 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해오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발해 연안 북부의 요서 지방과 요동반도에서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요동반도 영구(營口) 금우산(金牛山) 동굴유적, 본계(本溪) 묘후산(廟後山) 동굴유적에서는 북경원인과 비교되는 곧선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비롯하여 요하(遼河)·압록강·두만강 등지에서 계속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평양의 용곡 동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윗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인류 화석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계승·발전 과정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귀고리 일종 옥결 한반도서도 출토
또한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 사해(査海)문화, 내몽골 흥륭와(興隆窪)문화와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발해 연안 북부의 심양(瀋陽) 신락(新樂)문화, 요동반도 남단의 광록도(廣錄島)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와 압록강 하류 후와문화가 있다. 이들 문화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출토되고 있다. 옥결은 귀고리의 일종으로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옥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함께 발해 연안의 대표적인 문화다. 이들 신석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6000년 또는 3000년께 유행했던 동북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이 시기는 시베리아나 몽고의 신석기 문화보다 훨씬 빠른 연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여명을 맞이하게 된다.
발해 연안에서는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적석총과 석관묘가 출현한다. 이와 같은 돌무덤(石墓)-적석총·석곽묘·석관묘·지석묘 등-은 발해 연안에서 흔히 보이는데 특히 대릉하 유역 요녕성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의 적석총과 석관묘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청동기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에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적석총,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유행하고 있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3500~3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시베리아의 가장 이른 돌무덤의 연대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빠르다.
발해 연안에서는 옥룡(玉龍)이 발견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옥룡은 발해 연안 서쪽으로 내려가 은(殷)나라에서 계승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은민족은 우리 민족과 같은 동이(東夷)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곡옥(曲玉)은 이와 같은 옥룡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남 진주 남강유역 청동기시대 옥방 5지구 원형적석유구. 선문대 박물관 진주남강유적 전시실에 있다. <이형구 교수>
고대 갑골문화도 발해 연안 북부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 내려가 은나라에서 유행하면서 갑골문자가 완성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두만강유역 무산(茂山) 호곡동(虎谷洞), 남해안 일대의 변한 지구, 영산강·금강 유역의 마한 지구 등 철기시대나 삼한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토기의 발명 이래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 연안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유적으로는 발해 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과 내몽골 적봉(赤峯)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이 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순동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는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하량 적석총에서 홍산문화 시기의 청동을 제련할 때 쓰는 도가니와 청동 찌꺼기(slag) 그리고 청동기 조각이 수습되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를 반출하는 우가촌(于家村) 적석총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500~1300년으로 측정된다. 한반도에서도 요동반도와 같이 적어도 기원전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연결시키고 청동기시대의 인류도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연안의 초기 청동기시대의 연대가 기원전 2000년쯤이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가 반출된 유적의 연대도 기원전 1500년쯤이기 때문에 기원전 12~8세기의 카라스크 문화의 연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대릉하지역·한반도 청동기문화 유사
대릉하 유역과 요하 이서(以西) 지역에서 발견되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는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箕子)가 은이 망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자의 동주(東走) 노선과도 부합한다. 이는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주목할 만한 점이다.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와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이른바 하가점 상층문화-필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한다-를 만들어낸다. 남산근문화의 내용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청동기 문화가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라고 하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돌무덤들은 어떤 집단의 상당한 신분을 가진 수장(首長) 급의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용으로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을 부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릉하의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우하량 여신묘에서 소조 여신상이 출토되고 동산취(東山嘴) 제단 유적에서는 소조 임부상이 출토되었는데 여신상과 임부상은 지모신(地母神)을 숭상하는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고대 사회에서 대형 적석총, 제단, 신전 그리고 신상과 옥기가 문명의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탄생을 보았다.
이번 대탐사에서 우리 민족과 문화가 북방에서 온 게 아니라 발해 연안에서 우리가 ‘발해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출처;
1.6 2008년 2월 28일 플러스코리아 〈문헌으로 보는 동방문명의 뿌리 韓族〉
심백강 역사학자·민족문화연구원장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퍉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탏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흲)이다(夷者흲也).” 여기서 이(夷)를 저(흲)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흲)란 과연 무엇인가. 저(흲)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흲)’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흲)·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흲)의 의미를 다시 저지(흲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흲地)의 저(흲)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흲)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퍉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퍉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퍉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글/심백강 역사학자·민족문화연구원장』
●1956년 경기 파주 출생●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월간 ‘한배달’ 편집인●저서 :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기자사료'‘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출처: 플러스코리아,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9513§ion=section78§ion2=)
1.7 2008년 3월 31일 플러스코리아 〈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동북공정은 만주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
윤내현 단국대 교수
『1.고구려는 한국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중국은 고구려사가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연구결과이다. 이 사업은 “동북공정”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彊歷史與現象系列硏究工程)이다.중국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많은 연구결과를 축적하여 놓았으므로 굳이 한국의 움직임에 반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은 그 명칭이 보여 주듯이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는 학술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북지역 즉 만주와 한반도의 매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고구려 역사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중국은 만주와 그 지역 거주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연고권을 역사를 통해 확고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중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이 만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고구려가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구려는 오늘날 중국의 영토인 만주에서 건국되었으며 대부분의 기간 그중심부인 도읍은 만주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동북 변방에 있었던 소수민족의 정권이며, 둘째는 한민족은 그 활동영역이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한 고구려인들이 한민족에 포함될 수는 없으며 셋째는 고구려는 서한 무제가 설치한 중국의 행정구역인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나라임으로 중국을 계승한 나라이다. 이 외에도 조공과 책봉 등 몇 가지를 더 들고 있지만 이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구려는 한민족의 영역인 한반도 밖의 만주에서 건국되었고 그 중심부도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한민족이 아니며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국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불행하게도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주장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지난날 한국 학계통설을 따르면 한민족은 한반도와 만주를 통합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한국사개설서에는 고구려는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 근래에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국한해서 보는 견해가 지난날 우리 학계의 통설이었고 지금도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만주의 거주민을 한민족에 포함시킬 근거가없다. 민족은 지역을 단위로 한 정치공동체, 문화 공동체로서 일정한 지역의 거주민이 자신들이 구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짐으로써 형성되는 것인데 한반도와 만주가 하나로 통합된 적이 없다면 만주 지역 거주민이 한민족에 속한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고구려가 한민족의 나라라는 분명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 건국 이전에 한반도와 만주는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루어 그거주민은 이미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건국한 단국조선을 계승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대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한다.
2. 한국 고대사 체계에 문제가 있다
한국고대사 체계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치해놓고 있다. 현재 통용되는 우리의 고대사 체계를 보자.오늘날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대사 처계가 고조선ㅡ>준왕ㅡ>위만조선>한사군>ㅡ>여러나라ㅡ>삼국시대ㅡ>남북국시대 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설서들은 삼국시대부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그 이전 고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전의 역사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신화시대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고조선의 준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중국 망명객인 기자의 후손이다 중국 혈통인 것이다.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이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의 후손에게 정권이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준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왕을 한민족의 혈통으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준왕 다음에 등장하는 위만도 중국의 망명객이다. 중국의 서한 초에 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다고 위략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 학계에는 위만은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계통 사람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분명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중국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위만조선 다음에 등장하는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다.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다. 한국사 개설서에는 임진강 유역까지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여러나라가 등장한다. 그들이 위치한 지역은 대체로 북만주에 부여, 연해주에 읍루, 남만주와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한반도 남부에 삼한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한반도 남쪽에서 고대사 체계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단군조선은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 기자의 후손인 준왕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을까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까 실제로 이었다 해도 그것을 국가 수준의 사회로 볼 수 있을까.둘째, 준왕은 중국 혈통 인물이고 위만은 중국 망명객이며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다면 단군조선이 끝난 후 한민족은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중국에 통합되었다는 것이 된다. 만약 단군조선의 존재가 의심스럽다면 한국사는 중국인들의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셋째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한사군의 뒤를 이어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면 중국인들의 시각에서는 그 나라는 중국을 계승한 나라로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만약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 했더라도 좁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치집단이었다면 한민족은 이 시기까지도 민족을 형성했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중국인들은 지금 이러한 논리로 만주와 연해주에 있었던 부여 고구려, 읍루, 발해 등은 한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통용 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중국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준왕의 정권이나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위치했던 지역은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다. 이들의 흥망성쇠는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 지역에는 단군조선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가 중앙 권력의 약화로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독립하여 부여, 읍루 고구려, 최씨낙랑, 동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는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사 개설서들은 이를 바로잡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주군을 빼앗아 중국계통 사람의 지배를 받거나 한만족의 영토가 중국에 통합된 적이 없는 것이다. 기자일족의 망명 위만조선의 건국 한사군 설치 등으로 인하여 단군조선 영토의 서부 변경에 다소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 고대서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여러나라를 거쳐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등으로 끊어짐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에 서부 변경인 난하(灤河) 유역에서는 몇 차례의 정변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 망명 온 기자 일족에 의한 정권 수립,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에 의한 위만조선의 건국,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등이다. 서기 전 1100년경에는 기자 일족이 고조선의 서부변경으로 망명해 왔다. 기자는 원래중국 상(商)왕실의 후예로서 기(箕)라는 땅에 봉해졌던 자(子)라는 작위를 가진 제후였다. 그런데 상나라가 주족(周族)에 의해 멸망되자 기자는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하였다. 기자일족은 망명정권을 세우고 고조선의 거수국이 되었다그 후 서한 초인 서기 전 195년에는 위만이 서한에서 기자국으로 망명해 왔다.
위만은 준왕에게 국경 지대에 살면서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겠다고 하므로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로 삼아 국경인 난하 유역에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그곳에서 토착인들과 주국 망명인들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한이 쳐들어오니 궁궐을 지키겠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는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다.준왕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은 서한에 외신(外臣)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당시 서한은 건국 초로서 국력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였으므로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철기가 보급된 이후 종래의 경제구조와 사회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위만은 그 세력을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동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서한은 무제 때에 이르러 국력이 강성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서한 무제는 서기 전 108년에 위만조선은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에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등의 세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여세를 몰아 고조선 영토를 침략하여 지금의 요하(潦河)까지 차지한 후 앞의 세 군보다 1년 늦게 서기 전 107년에 요하 서부유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설치된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은 서기 전 82년에 진번과 임둔은 폐지되고 낙랑과 현도 두 개의 군만 남았다가 현도군은 오래지 않아 서기 전 75년에 고구려와 토착세력의 공격을 받아 난하 상류유역으로 이동하였고, 서기 106년에는 요동군(潦東郡)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명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서기 206년에는 그 지역을 지배하던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나 서기전 313~31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군, 대방군, 현도성 등이 모두 격파되어 한사군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난하 유역까지를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고토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기자국, 위만조선, 한사군은 서로 연결된 사건으로서 지금의 난하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이 기간에도 고조선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 개설서들은 기자의 후손인 준왕을 고조선의 왕으로 서술함으로써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빼앗았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위만의 정권 수립과 동시에 고조선은 멸망하였고 중국세력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고조선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3.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단군조선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국가였다. 『시경(詩經)』 「한혁(韓奕)」 편과 『제왕운기』는 고조선은 많은 소국(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국가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국가가 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 각 지역에는 마을연맹체들이 있었고 이들은 종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이 건국된 후 이들은 고조선의 지역 정치집단으로서 거수국이라 불리어졌고 그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라 하였다. 거수국은 대부분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각 지역에 있었던 마을연맹체들이 성장한 것이었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후 필요에 따라 새로 건설된 것도 있었다.당시에는 통치조직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에서 모든 백성을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각 지역 마을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수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봉지를 다스리도록 하고 중앙의 단군은 거수들만을 다스렸다.
따라서 거수들 사이는 신분이 대등하였으나 모두가 단군을 그들 공동의 통치자로 받들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동일한 법을 따르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일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에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고조선의 영토 안에 위치했던 작은 나라 또는 종족들의 명칭이 보인다. 이들은 고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이었던 것이다. 같은 지역에 독립국이 겹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들면 부여(夫餘), 고죽(孤竹), 고구려(高句麗), 예(濊), 맥(貊), 추(追), 기자국(箕子國),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양주(楊洲), 발(發), 유(兪), 옥저(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那), 주나(侏那), 한(韓, 三韓) 등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다.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거수국이 많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을 것이다. 서기 전 1세기에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북만주 지역에 동부여가 있었고 그 동쪽 연해주 지역에 읍루, 평안북도와 지금의 요동을 포함한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남북도 지역에 동옥저, 강원도 지역에 동예, 대동강 유역에 최씨낙랑, 한반도남부에 한(삼한) 등이 그것이다.
한은 신라, 백제, 가야 등이다. 동부여는 서기 전 59년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신라는 서기 전 57년, 백제는 서기 전 18년 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찍이 건국된 동부여, 고구려, 신라는 모두 건국 연대가 서기 전 1세기 중엽이다. 이 나라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한반도와 만주를 그 영토로 아우르고 있던 단군조선이 붕괴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 여러 나라는 모두 단군조선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음도 알게 해준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인 것이다. 고구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지만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 즉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중앙통치력을 잃게 되자 독립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에서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태어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4. 한국 고대사 체계 바꿔야 한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 기자의 후손인 준왕과 중국 망명객인 위만이 한민족을 통치했고 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이 설치됨으로써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삼한) 등이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가 옳다면 고대에 한민족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고구려도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음으로 중국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펼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의 고대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준왕 정권과 위만조선 및 한사국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었다.고구려가 한국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가 건국된 요동지역이 고구려보다 앞선 단군조선시대에 이미 한민족의 영토에 속해 있어야 한다. 즉 단군조선의 강역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래야만 만주와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하나의 국가에 속하여 동일한 정치공동체,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집단귀속의식을 갖게 되어 이 지역 거주민 모두가 한민족이 되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단군조선이 붕괴되면서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여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는 한민족의 국가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고대 문헌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해준다. 단군조선은 북경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를 서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그 영토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 기자국(준왕정권)이 서고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위만조선을 건국하여 그 영토를 대릉하까지 확장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다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하 유역까지 차지하여 난하와 요하 사이에 한사군을 설치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요하가 되었다.요약하면 기자국(기자국),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 즉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교체되는 기간에도 단군조선은 서쪽 국경에 변화가 일어났을 뿐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를 그 영토로 삼고 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단군조선의 여러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는데 단군조선 말기에 중앙의 통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구려와 부여, 발해 등 만주에 있었던 나라들은 중국변방사이고 한국사에 포함 될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주장은 계속될 것이다.』
윤내현 교수/약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 연구회 회장
(출처; http://www.pluskorea.net/9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