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8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본문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8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대야발 2024. 2. 18. 10:43《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8 2008년 8월 31일 신동아 2008년 9월호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신동아
● 황하문명과 분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홍산문명
● ‘알타이語族’은 람스테드의 실수, 이제는 홍산語族이다
● 전쟁으로 꽃핀 청동기문화, 난하에서 만난 홍산과 황하문명
● 고원 초원의 한계, 일정한 수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지 못한다
● 왕소군과 문성공주 사례로 본 중국의 역사의식
● 몽골을 지배한 흉노-선비-돌궐-요-금-몽골-청은 같은 뿌리
● 홍산은 토기와 옥기와 청동기가 발전할 수 있는 조건 갖췄다
●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둘로 갈린 홍산 세력
● 북위-요-금-원-청의 역사는 중국이 아닌 홍산문화인의 역사
● 元은 홍산문화인의 역사를, 淸은 홍산문화인의 영토를 중국에 바쳤다
● 얄타회담으로 기사회생한 한국과 몽골, 국가연합을 거론하다
요나라 때 제작된 봉황 장식품. 거란은 한국과 친연성이 강한 종족이었다.
▼ 제1부 : “이제는 알타이語族이 아니라 홍산語族이다”
기자는 한국에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2003년 여름, 동북공정의 속내를 드러낸 중국 ‘광명일보’의 시론(試論)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을 입수 번역해, 신동아 2003년 9월호에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반(反)동북공정 운동을 촉발시킨 바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만 가져가려고 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모태인 고조선부터 몽땅 가져가려는 것이 동북공정의 목표다. 이를 위해 중국은 정교한 논리를 만들었다. 중국은 한국이 ‘단군조선을 신화 속의 나라로 여긴다’는 데 착안해, 단군조선의 실재를 간단히 부인한다. 그리고 중국 고대국가인 상(商)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에서 고조선이 시작한다고 정리한다.
이러한 기자조선을 중국 연(燕)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뒤집고 위만조선을 여는데, 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4개 군(郡)을 설치한 이가 중국 한(漢)나라 무제다. 한 무제가 세웠다는 한4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족이 많이 사는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족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니,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 변방국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다.
적봉 중앙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 강. 홍산문화의 젖줄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대흥안령 산맥의 지류이다. 이곳은 비가 적은 고원이라 여름에만 겨우 풀이 자란다.
이러한 논리를 간파한 기자는 단군조선의 실존을 밝히기 위해 2006년 10월호 신동아에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있었다’는 기사를 작성해 보도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도움을 받아 고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중국의 역사기록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 또, 신동아 2008년 4월호에는 고조선이 있었던 곳을 직접 답사해 ‘고조선의 심장부를 가다/웅녀(熊女)의 자취, 우하량의 곰뼈를 찾아라’라는 르포를 내놓았다.
협의의 홍산문화, 광의의 홍산문화
이러한 보도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제법 알려진 것이 ‘홍산문화(紅山文化)’와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 下層文化)’라는 말이다. 홍산문화는 중국 내몽고자치구 적봉(赤峰)시 홍산(紅山)구에서 발견된 서기전 4000년 전후의 신석기문화인 동시에 적봉시와 그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후기 신석기문화 전체를 일컫는 통칭이다.
통칭으로서의 홍산문화는 서기전 7000년쯤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문화’, 서기전 6000년 무렵의 ‘흥륭와문화’, 서기전 5000년경 일어난 ‘조보구문화’, 서기전 4000년 앞뒤의 ‘홍산문화’, 그리고 서기전 3000년 전후에 꽃핀 ‘소하연문화’ 등을 포괄한다. 물론 소하서 이전에 있었던 신석기문화도 포함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살력파향(薩力巴鄕)의 하가점이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문화다. 여기서 ‘이 지역’이란 통칭으로서의 홍산과 같은 곳을 말한다. 그 후 유사한 청동기 유물이 적봉시 경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면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홍산문화의 뒤를 이어 이 지역에서 크게 일어난 초기 청동기문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오래된 유물일수록 깊은 곳에서 발견된다. 적봉지역(홍산지역)에서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나온 곳보다 덜 깊은 곳에서 서기전 1300년쯤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됐는데, 이 유물을 만든 문화를 가리켜 ‘하가점 상층문화’라고 한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으나, 유물 가운데 말방울 등 유목민이 사용한 것이 많았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는 유목민이 사용하는 청동기가 발굴되지 않았으나 상층문화에서는 유목민 특성을 보여주는 유물이 주로 출토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해석이 정주(定住) 생활을 하던 하가점 하층문화인들이 유목 생활을 하는 하가점 상층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대 화하족과 고조선족의 경계였던 난하와 중국 기록에 나오는 조선성, 낙랑의 위치. 그리고 비파형 동검문화가 일어난 능하지역.
적봉시 남쪽에는 몽골어를 한자로 음차해 적은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이 산맥 동남쪽에서는 대릉하와 소릉하란 강이 발해만으로 흘러가므로 ‘능하(凌河)지역’으로 통칭된다. 이 능하지역에서 서기전 800년쯤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물이 다량 발굴됐다. 능하지역의 청동기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청동기와 달리 유목민의 유물은 적고 제작기법이 훨씬 더 발달해 있었다.
기후변화로 南下
홍산지역은 해발 600m의 고원 평지지만, 노노아호산과 발해만(바다)으로 둘러싸인 능하지역은 저지대 평지다. 따라서 농경이 가능해 이곳에 살던 청동기인들은 정주생활을 했다.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적봉 일대에서 신석기문화가 대단히 오랫동안 꽃피었다는 것은 이곳이 고원이긴 하지만 농경을 하는 정주생활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농경을 했다는 것은 그 지역이 비가 적절히 내렸고 날씨 또한 그리 춥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서기전 1300년 무렵부터 유목민 문화가 등장하니 이는 큰 기후변화가 일어나 비가 적게 오고 추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상당수는 홍산문화의 변두리인 노노아호산 남쪽의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발달한 정주 청동기문화인 ‘능하문하’를 일으키고, 적봉지역에 남은 세력은 초지에서도 생활이 가능한 유목문화로 들어갔다.…’
능하문화 지역은 윤내현 교수가 중국역사 자료 분석을 통해 고조선 지역이라고 밝힌 곳과 일치한다. 상당수 중국 사료는 능하 주변에 ‘조선’과 ‘낙랑’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윤 교수는 고조선과 한4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그곳에 있었기에 그러한 지명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이 시기 중국인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이 황하 중류에서 일으킨 황하문명이 황하 하류로 세력을 넓혀왔다. 그리하여 고조선족 문화와 화하족 문화는 황하 하류 북쪽에서 만나게 됐는데, 이때 두 세력이 경계선으로 삼았던 곳이 ‘난하(?河)’라는 강이라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지금의 능하지역은 한반도보다 강우량이 적다. 그러나 고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던 듯 난하 유역은 매우 넓다. 윤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고조선족과 화하족이 큰 강인 난하를 경계로 삼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윤 교수의 제자이자 중국 길림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탐험가인지 고고학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대담한 답사를 많이 하여,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빗대 ‘복기애나 존스’로 불린다. ‘복기애나 존스’도 능하지역을 한국 상고사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곳이라고 강조한다.
이유는 이곳에서 황하 중류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동검과는 다른 비파형동검과 다뉴세 문경 등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은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때문에 ‘복기애나 존스’를 포함한 상당수 한국 학자와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이를 능하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영향력이 만주와 한반도로 확장된 것으로 해석한다.
만주와 한반도는 전세계 고인돌의 50%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의 왕국’이다. 만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크고 정교하지만 한반도 고인돌은 거칠고 작은 편이다. 그러나 하가점 하층문화와 능하문하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능하문화인들이 동진(東進)하기 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후기 신석기 시대는 난혼과 근친혼이 성행한 다처다부 사회다. 요녕성 심양시 신락유적지에는 다산을 중시한 이 시대 풍속을 보여주는 인형이 움집 안에 전시돼 있다.
‘병(病)은 곧 죽음’인 사회였으니 생명을 이어가려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다. 이 위험은 홍역 예방약을 내놓고, 파상풍은 병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기생충은 사실상 박멸시킨 현대의학이 등장한 후 소멸됐다. 병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 확률이 떨어지자 비로소 인류는 다산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모계집단에서 구성원이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경이다. 농경이 잘되려면 비가 적절히 내려야 한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이 중요해지는데, 이 제사는 ‘큰 어머니’로 추앙받는 여성이 치른다. 학자들은 여성 리더가 하늘과 통하는 제사장을 맡던 풍습이 지금은 무녀(巫女)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근친혼과 난혼이 횡횡한 모계사회
제사장이 여성이면 신(神)도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신석기인들은 여신상을 만들어 제를 올렸다. 이러한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여제사장은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아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제사장은 집단을 이끄는 군장(君長) 역할도 겸했다. 제사장과 군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시절이 후기 신석기 사회다.
여성이 집단을 이끈 후기 신석기 사회는 전형적인 모계사회였다. 이때의 신은 여신이고 제사장도 여성이었다. 여성 제사장이 종족을 이끌고 움집 안에 모신 여신에게 천제를 올리는 모습을 재현한 내몽고 박물관의 모형.
군장과 제사장 역할을 맡은 여성 리더는 집단 내의 남성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시사회는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주 중요했으므로 여성 리더가 집단 내 모든 남성을 독점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집단을 지키려면 다른 여성에게도 출산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계사회는 일처다부(一妻多夫)가 아니라 다처다부(多妻多夫)의 사회다.
‘관계’는 대개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근친혼(近親婚)이 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이니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남매도 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부모 자식이 관계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난혼(亂婚)이다. 근친혼과 난혼을 다반사로 하는 다처다부 사회이면서 중년 여성이 리더십을 쥐고 제사장 역할도 겸하는 것이 신석기 후기 사회였다.
토기를 만들 수 있는 고운 흙
이러한 집단은 불을 다루며 생활했다. 불을 이용해 난방뿐만 아니라 화식(火食)을 했다. 직접 불에 구워 먹기도 하고, 불로 물을 끓이고 그 물의 열기로 음식을 익혀 먹기도 했다. 굽는 것보다는 삶거나 찌는 것이 더 맛이 좋다. 삶거나 찌려면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 도구가 바로 토기다.
그런데 토기는 아무 흙으로나 다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지금도 도자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있으니, 고대 사회에도 토기를 만드는 흙은 따로 구해야 했다. 모래나 돌이 섞이지 않고 존득존득하게 이겨지는 ‘찰흙’이 그것이다. 이런 흙으로 만든 토기는 불에 올려놓았을 때 터지지 말아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흙이 많은 곳이 신석기인들의 정주지가 된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웃자란 풀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므로 답사팀은 사방을 조망하다가 내려왔다. 바로 그때 서울대 체육교육과의 이애주 교수가 “앗!” 하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중요 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僧舞)’ 보유자 이 교수는 한국 춤의 원류를 찾기 위해 줄기차게 이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서대 유적지로 올라갈 때 기자는 이 교수에게 “교수님이 넘어지면 국보(國寶)가 깨질 수 있습니다”라는 농담을 했었다. 그런데 하산길에 넘어졌으니 답사단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국보 깨진다~”고 소리를 질렀다. 몸이 가벼운 이 교수는 재빨리 일어나 쑥스러워 하며 옷을 털었다. 그런데 흙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단국대 몽골학과의 이성규 교수가 “이것 좀 봐. 이렇게 흙이 고우니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지” 하며 혀를 찼다. 이 교수가 가리킨 곳은 빗물이 흘러 생긴 길 옆 도랑인데, 그곳에는 빗물을 타고 흘러온 아주 고운 흙이 고여 있었다. 문외한이 봐도 도자기를 빗는 데 적합한 흙이었다.
기자는 이 흙물에 샌들 신은 발을 담갔는데, 그때 발톱 밑으로 들어간 흙물은 1주일이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발톱 밑으로 들어갈 정도로 고운 흙이 서대 유적지를 포함한 적봉 일대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우연한 발견…. 비가 오지 않았고 이애주 교수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기자는 이 곳에 토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많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운 흙이 대한민국에 피해를 준다. 몽고 초원은 가을부터 봄까지 지독한 가뭄이 이어진다. 이른 봄 강한 편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이곳에 깔린 고운 흙이 일제히 떠올라 베이징 지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온다. 이른바 ‘황사(黃砂)’다.
서대 유적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도랑에 고인 고운 흙. 이런 흙이 있기에 이곳은 ‘토기의 천국’이 될 수 있었다.
워낙 고운 흙 때문에 이곳을 흐르는 강도 누런색을 띤다. 적봉지역을 관류하는 가장 큰 강은 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 강(西拉木倫河)’인데, 몽골어로 ‘누런 강’이라는 뜻이다. 동서로 길쭉한 내몽고의 서남쪽인 오르도스를 휘감고 지나가며 누런 흙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강이 바로 황하다.
신석기인들은 움집을 짓고 불을 피워 난방을 했지만, 옷 만드는 기술은 발전하지 못했기에 너무 추우면 살지 못한다. 농경을 할 정도로 따뜻한 계절이 길어야 집단생활을 한다. 적봉지역에 후기 신석기 유적지와 초기 청동기 유적지가 즐비하다는 것은 옛날에는 사람이 살 만했다는 의미다. 비도 적절히 내렸고 지금보다는 따뜻한 계절이 훨씬 길었다.
신석기인들이 끓는 물을 이용해 음식을 익혀 먹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다리가 세 개 달렸다고 하여 ‘삼족기(三足器)’란 이름을 얻은 토기다. 신석기인들은 사진에서처럼 삼족기 아랫부분에 물을 넣고 가운데에 뭔가를 걸친 후 그 위에 고기와 곡식을 얹어 삼족기 아래에서 불을 지폈다.
삼족기가 옹기를 낳았다
이 삼족기를 만들면서 신석기인들은 불에 구운 토기인 옹기(甕器) 개념을 터득한다. 옹기는 굽지 않은 토기보다 단단하다. 그래서 귀한 것은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다. 서대 유적지에서 불에 구운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동산취라는 곳에서도 불에 구워 만든 임신한 여성상(孕婦像)이 출토됐는데, 이는 다산을 숭상했다는 증거다.
밑이 편평한 토기는 불에 올리지 않고 곡식 낱알 등을 보관하거나 천제를 올리는 제기(祭器) 등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신석기인은 한마디로 흙의 예술가다. 이들은 흙을 이용해 그릇을 만들고 집을 짓고 성도 쌓았다. 신석기인들이 흙으로 쌓은 성을 ‘토성’이라고 하는데, 진흙을 빚어 반듯한 벽돌을 만들고, 이것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판축(版築)기법을 사용했다.
요녕성 신락유적지 박물관에 전시된 삼족기(왼쪽)와 삼족기를 이용해 음식을 익히는 원리를 설명한 그림.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깎는 기술이 없었기에 석성(石城)을 쌓아도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돌의 거친 면이 밖으로 나오므로, 적군은 그것을 잡고 성을 타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토성은 표면이 매끈해 타고 넘기 힘들다. 수레에 큰 돌이나 나무를 싣고 와 때림으로써 성을 부는 ‘충거(衝車)’는 신석기 시절엔 없었으니, 토성은 훌륭한 방어수단이었다.
판축기법으로 만든 흙벽돌을 불에 구우면 돌만큼 단단해진다. ‘인조(人造) 돌’이 탄생하는 것이다. 불에 구운 벽돌을 한자로 ‘전(塼)’으로 적는데, 중국인들은 전(塼)을 이용해 성까지 쌓았다. 구운 벽돌은 왕의 무덤과 탑, 그리고 도자기 등을 굽는 가마를 만드는 데 이용됐다. 그러나 인조 돌을 만드는 것은 신석기 시대가 끝난 다음이었다.
장군총으로 이어지는 적석총문화
신석기인들은 들돼지(멧돼지)를 잡아 가축화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무덤에서 껴묻기(副葬)를 한 돼지 뼈가 발굴됨으로써 확인됐다. 적봉지역은 호랑이가 살 만한 곳은 아니다. 초원지대에서는 늑대나 이리가 패권을 행사하는데, 이를 입증하듯 몽골인의 전설에는 늑대가 자주 등장한다.
답사단은 오한기 사가자(四家子)진의 초모산(草帽山) 뒤에 있는 유적지도 방문했다. 초모는 ‘풀로 만든 모자’니 곧 삿갓이다. 이 ‘삿갓산’ 뒤쪽에서 협의의 홍산문화 시절 만든 제사터와 무덤터가 발굴됐다. 홍산문화는 후기 신석기문화 가운데 가장 후기의 것이라 그전의 신석기문화보다 확실히 발전한 모습을 갖는다.
반듯한 돌을 모아 방형(方形) 계단꼴로 쌓아올렸던 초모산 적석총 흔적.(좌) 내몽고 곳곳에서는 지금도 양머리 등을 바치고 천제를 올리는 ‘오보’를 볼 수 있다.(우)
대표적인 것이 적석총(積石?)의 등장이다. 적석총은 신석기인들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전체 모양은 네모꼴인데, 이 네모꼴 위로 한 계단 올라가 작은 네모꼴이 있고, 그 위에 한 계단 더 올라가 더 작은 네모꼴이 있는 형태다. 쉽게 말하면 피라미드 만든 것인데, 피라미드 제단의 가장 발달한 형태가 바로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이다.
무덤터가 곧 천제를 지내는 곳
장군총은 철기 시대에 만든 것이라 엄청나게 큰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그러나 홍산문화인들은 청동기도 만들지 못했으니 반듯한 돌을 주워다 각(角)을 맞춰 쌓아 올렸다. 이러한 적석총은 제사터로 사용됐는데, 적석총은 대개 여성 리더를 매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터 위에 만들어졌다.
실제로 초모산 유적지의 적석총 안에서 적잖은 무덤이 발견됐는데, 시신은 벽돌처럼 반듯한 돌을 쌓아 만든 ‘석관(石棺)’ 안에 놓여 있었다. 시신을 안치한 다음에는 구들장처럼 얇고 넓적한 돌로 위를 덮어 석관을 완성한다. 왜 신석기인들은 석관을 안치한 곳에 제사터인 적석총을 만들었을까. 그 이유는 ‘하늘과의 소통’에서 찾아야 한다.
후기 신석기인들은 ‘사후(死後)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에 시신을 매장했다. 죽은 사람은 하늘이라고 하는 또 다른 세계로 가는데, 평소 하늘과의 소통을 담당한 것은 여성 리더다. 따라서 여성 리더가 숨지면 정중히 매장하고 그를 묻은 곳을 하늘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삼는다. 자연계에서 하늘과 소통하는 동물은 ‘새’다. 그래서 이곳의 신석기인들은 새를 숭배했다.
이곳에서는 까마귀가 가장 크므로 까마귀를 숭배했는데, 이러한 의식은 이들이 옥을 이용해 새를 새긴 옥기를 만든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리더의 무덤터를 천제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전통은 고구려로 이어졌다. 집안의 장군총은 고구려를 연 추모(주몽이라고도 한다)의 무덤인 동시에 천제를 올리는 제사터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대 유적지와 초모산 유적지는 공통적으로 근처에 제법 큰물이 흐르는 구릉지에 있었다. 높은 준봉(峻峰)의 꼭대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낮은 언덕에 하늘과 소통하는 무덤터와 제사터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동산 주변에 움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언덕 꼭대기를 하늘 제사터로 삼는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은 몽골이다. 몽골에는 동네 인근의 언덕이나 동산에, 붉은 천을 내건 ‘오보’라는 돌무덤을 만들어놓고 양 등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천제를 올린다. 장군총도 이와 유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장군총은 산속이 아니라 압록강 옆의 구릉에 있다. 장군총 아래쪽에는 광개토태왕릉을 비롯해 크고 작은 능이 밀집해 있다.
초모산 유적지에서는 돌에 새긴 사람 얼굴상(石彫人像)이 발견됐다. 그리고 전체 홍산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옥기(玉器)도 출토됐다. 초모산 유적지에서 나온 대표적인 옥기는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네모형 옥기다. 왜 적봉지역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숱한 옥기가 출토되는 것일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적봉지역을 포함한 전 내몽고 지역이 ‘옥(玉)밭’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옥이 매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풀린 옥기 제작의 비밀
옥은 돌보다 무르다. 옥을 물에 넣고 돌로 갈면 원하는 모양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돌을 갈아서 ‘간석기’를 만들 듯, 옥 원석(原石)을 물에 넣고 갈면 쉽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홍산문화인들은 돌에다 사람 얼굴을 새기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돌보다 무른 옥을 이용해 갖가지 모양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몽고 전체가 옥밭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원시인들이 옥기를 만든 사실을 아주 신기해했다. 그러다 보니 과도한 해석이 쏟아졌다. 신석기인들이 만든 C자 모양의 옥기를 보고, 중국인들은 ‘용(龍)을 새긴 것’이라는 황당한 해석을 내놓았다. 오한기 서쪽에는 사해(査海) 유적지가 발굴된 요녕성 부신(阜新)시가 있다.
사해 유적지는, 발굴 당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주거지로 알려졌는데, 이 곳에서도 C자형 옥기와 용 모양 돌무지가 발견됐다. 그러자 중국은 재빨리 이곳을 중화제일촌(중국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촌락), 이 돌무지와 옥기를 중화제일용과 중화제일옥으로 명명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케 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옥기가 숱하게 출토되자 이 해석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그리고 “당시는 다산을 숭배하는 사회였으니 C자형 옥기는 동물이나 인간의 태아를 본뜬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용을 새겼을 것이라는 주장도 자취를 감췄다. 중국인들은 C자형 옥기를 이용해 홍산문화를 용을 숭배하는 중국 문명에 접속시키려다 포기한 것이다. 적봉지역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옥 장식품을 만들었다. 이 전통이 좀 더 발전한 형태로 전해진 것이 신라와 백제, 가야의 금관이나 금동관에 달려 있는 곡옥(曲玉)이다.
적봉지역의 신석기인들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 석관묘 안에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도 넣었다. 이 옥기를 중국인들은 ‘중국 최초의 봉황(鳳凰)’이라고 해석했으나, 이 새는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까운 모습이다. 봉황은 용과 더불어 중국의 상징이라는 생각에서 이 옥기를 봉황으로 해석한 것 같다. 그러나 봉황은 홍산문화의 후예인 거란족이 리더의 상징물로 사용했고, 지금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이 되었다.
신석기인들에게 토기와 옥기 이상으로 중요한 도구는 석기(石器)다. 구석기인들은 돌을 돌로 때려서 만든, 면이 날카로운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했으나, 신석기인들은 돌을 돌로 갈아서(간석기) 훨씬 많은 종류의 석기를 개발했다. 돌화살촉을 만들고 돌도끼를 만들었다. 간석기의 등장은 음식물의 변화도 가져왔다.
과거에는 곡식 껍데기를 벗기는 것이 힘들었으나 간석기는 이를 쉽게 해결해주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사진처럼 판판한 면을 가진 간석기 위에 곡식을 올려놓고 둥근 밀대 모양의 간석기로 밀어주면, 곡식 껍데기가 쉽게 벗겨지는 것이다. 껍데기를 제거한 곡식 덕분에 사람들은 음식을 훨씬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숯으로 만드는 청동기
흙과 불과 돌과 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토대 위에서 서서히 청동기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신석기 시대에 흙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했다면, 청동기 시대부터는 불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해진다. 청동의 원료인 구리나 아연 주석은 삼족기의 물을 끓일 때보다 훨씬 높은 온도의 불을 때야 녹아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불은 나무를 태워서는 얻을 수 없고 숯을 이용해 피워야 한다. 숯으로 강한 불을 만드는 것이 청동기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광물을 품은 광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적봉에는 광물을 품은 돌이 많았다. 좋은 예가 홍산문화라는 말을 만든 ‘홍산(紅山)’이다. 홍산은 적봉시 홍산구에 있는 산인데, 광물을 함유한 바위가 많아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광물을 품은 돌이 많으니 숯을 만들 줄만 안다면 청동기 제작은 비교적 쉬워진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녹아 나온 광물을 원하는 모양대로 굳히는 용범도 제작해야 한다. 신석기인들은 돌을 가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용범 제작은 어렵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이 반복되면서 하가점 하층문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청동기는 석기에 비해 무르기 때문에 농기구로 사용할 수는 없다. 청동기가 등장했더라도 농사는 여전히 석기로 지어야 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청동기를 등장시켰지만, 주력 도구는 여전히 간석기인지라 ‘동석(銅石) 병용기’ 시절로 부른다.
간석기를 이용해 곡식의 껍데기를 벗기는 것을 실연하는 모습. 요녕성 심양시 신락유적지 박물관에 걸려 있는 사진이다.
농경이 중요한 경제생활이던 시절, 청동기는 간석기의 보조품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경제를 키우는 핵심 수단이 되면 청동기는 석기를 제치고 주요 도구로 떠오른다. 돌화살촉과 돌도끼를 만들려면 돌을 오랫동안 갈아야 한다. 그러나 합금술이 발전하고 강한 불을 만들 수 있고 매끈한 용범을 제작할 수 있다면, 청동 주물을 이용해 단기간에 많은 청동화살촉과 청동도끼를 생산할 수 있다.
청동화살촉과 청동도끼는 돌화살촉과 돌도끼에 비하면 강도가 약하지만 살상력은 똑같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가벼운 무기’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다른 종족 지역으로 쳐들어가 그들이 축적한 것을 빼앗아 오는 것이 농경과 수렵을 하는 것보다 세력을 더욱 빨리 늘리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전쟁으로 등장한 부계사회
전쟁이 반복되면서 종족 내에서 전쟁을 하는 남성의 지위가 강화됐다. 자기 종족의 남성을 하나로 묶어 다른 종족을 쳐들어가 승리한 남성은 영웅이 됐다. 이러한 남성은 다른 종족의 공격을 받으면 가장 먼저 피살되므로, 평소에도 자기 종족의 남성을 묶어 보초를 서게 하면서 전체 남성을 관리한다. 여성 리더와는 성격이 다른 또 다른 리더가 되는 것이다.
우하량 여신묘(廟)의 곰뼈는 이것이다
왼쪽 위는 흙으로 만든 새 날개 모양의 토기, 아래 것은 흙으로 만든 맹금류의 발톱 부분이다. 오른쪽 위는 여신묘에서 출토된 곰 발톱 모양의 토기이고 아래가 바로 곰 이빨과 함께 발굴된, 흙으로 빚은 곰의 아래턱뼈 부분이다.
지난 4월호 ‘신동아’에 ‘웅녀의 자취, 우하량의 곰뼈를 찾아라’란 기사가 보도된 후 적잖은 사람이 우하량 여신묘에 있던 곰뼈의 행방을 궁금해 했다.
이유는 ‘삼국유사’ 고조선조 내용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이 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알을 받고 굴에 들어가 삼칠일 동안 금기 생활을 했는데, 곰은 여자가 됐으나 금기를 지키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여신상을 모신 우하량 여신묘(廟)에 곰뼈가 있었다면, 이는 ‘삼국유사’ 내용과 관련해 흥미로운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이 곰뼈는 요녕성 고고문물연구소 우하량공작참 자료실에 보관돼 있지 않았는데, 기자는 이 곰뼈의 사진을 요녕성 박물관에서 찾아냈다. 요녕성 박물관에는 우하량에서 발굴된, 진흙으로 만든 곰 아래턱뼈 부분과 그 진흙턱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 곰 이빨을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곰 발 모양의 토기 조각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이러한 유물은 우하량 여신묘 남쪽 끝에 있는 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여신묘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매를 연상시키는 맹금류의 발톱과 진흙으로 만든 새 날개 모양도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여신전에는 여신상 외에 곰상(熊像)과 큰 새의 상(鳥像)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 홍산문화인들은 여신상을 모신 우하량의 여신묘에 새와 곰의 상도 함께 세워놓았을까. 노노아호산과 접해 있는 우하량 일대는 호랑이보다는 곰이 살기 좋은 곳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살던 후기 신석기인들은 새와 함께 곰을 토템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들이 바로 환웅족과 결합한, 큰어머니를 제사장과 군장으로 모신 웅녀족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비중이 커지면 이러한 남성은 군장의 지위를 차지하고, 여성 리더의 역할은 제사장으로 축소된다. 청동무기를 이용해 정복전쟁을 하는 시기에는 남성 군장과 여성 제사장이 종족을 함께 이끌었다. 이때 패배한 쪽에선 남성 군장뿐만 아니라 여성 제사장도 피살되므로 여성 제사장은 자기 종족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여성 제사장은 남성 군장의 보호를 받게 돼 남성 군장의 힘이 여성 제사장의 힘을 능가하게 된다. 이 시기 남성 군장은 패배시킨 종족에게서 붙잡아온 여성을 독점하는 권한을 갖는다. 남성 군장에게는 자기 세력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니, 그는 여러 여성에게 ‘씨’를 퍼뜨린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비가 분명하니, 그는 아이들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원시적인 성(姓)이 등장하고 일부다처(一夫多妻)와 부계사회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남성 군장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여타 남성도 자신이 붙잡아온 여성을 독점하면서 자기 세력을 넓힌다. 그러나 그는 남성 군장에게는 고개를 숙여야 하니, 남성 사이에 계급이 등장한다. 그리고 배반을 하지 않도록 의(義)를 강조하면서 복잡한 철학이 등장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도 발전한다. 청동무기를 이용한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등장해 각종 이론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삼국유사’ 첫머리의 고조선조에 비교해 풀이하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시로 내려온 환웅은 청동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종족이거나 청동병기를 사용하는 남성의 대표일 수 있다. 이러한 환웅족을 만난 웅녀는 곰 토템을 갖고 있는 신석기 종족의 여성 리더일 것이다
초기 단군은 힘이 없었다
웅녀족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환웅족과 웅녀족은 싸우지 않고 결합한다. 환웅은 자기 종족을 이끄는 남성 군장 노릇을 하고, 웅녀는 군장과 제사장을 하며 자기 종족을 이끈다. 그리고 둘은 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는데, 그가 바로 단군이다. 그러나 환웅족과 웅녀족의 자치권은 매우 강했기에 단군은 두 종족을 아울러 지배하지 못한다.
이렇게 힘없는 단군이 수백 수천 년간 계속 탄생한다. 그러면서 외부 공격으로 두 종족은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는데, 이때 두 종족 대표의 피를 이어받은 단군이 리더십을 잡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단군조선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연 시기를 ‘여고동시(與高同時)’로 표현했다. ‘여(與)’는 ‘더불어’라는 뜻이고 ‘고(高)’는 중국문명을 만든 요 임금의 이름이므로, 여고동시는 ‘요 임금과 같은 시기’라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적어놓았는데,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해는 경인년이 아니라 무진년이다. 한국은 무진년으로 정정한 때를 단군조선의 개국 시기로 삼았는데, 이때가 서기전 2333년이다.
원·명·청 황제가 의무려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북진묘 안에는 ‘태백’이라는 한자를 새긴 큰 비석이 서 있다. 오른쪽 사진은 이 비석에서 ‘태백’이 새겨진 곳을 가리키는 답사단.
하가점 하층문화를 발굴한 중국 고고학계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일어난 시기를 서기전 2200년쯤으로 보고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의 출현 시기와 엇비슷하다. 동석 병용기인 하가점 하층문화는, 환웅족과 웅녀족이 만나 오랫동안 동맹을 이어간 시기일 수 있다. 이때 단군은 있었으나 환웅족은 환웅족 리더가, 웅녀족은 웅녀족 리더가 각자 통치했으므로 단군은 힘이 없었다.
북진묘의 ‘태백’
적봉지역이 건조해지고 추워지자 이들은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능하지역에 있는 세력과 싸우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해 두 종족은 하나가 되면서 두 종족의 피를 이은 단군이 리더가 된다. 단군이 이끈 고조선족은 능하지역의 신석기인들을 패배시키고 이들의 여성과 아이와 재산을 차지해 순식간에 세력을 불린다. 능하지역의 절대 강자가 된 것인데, 이때가 서기전 8세기 무렵이다.
‘삼국유사’는 환웅이 내려온 곳을 태백산이라고 한 후 ‘지금의 묘향산이다’는 주를 달아놓았다. 많은 사람은 이 주를 무시하고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홍산지역에서 신석기인들이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 적석총을 쌓고 천제를 올린 곳은 비교적 큰물이 돌아가는 야트막한 동산의 꼭대기였다.
그렇다면 태백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지 백두산이나 묘향산 같은 특정 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평양이 평안남도에 있는 평양이 아니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여러 곳에 있었던 지명이라는 사실은 이미 보편화된 상식이다. 고대인은 평지에 모여 살았으므로 그들이 사는 편평한 곳이 바로 평양이다. 고대인들은 이동을 했다. 이동하면서 평양이라는 지명과 함께 개울과 산 이름도 갖고 갔다.
그렇다면 요서와 요동에는 군데군데 태백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야 한다.
서대 유적지와 초모산 유적지를 찾아오기 전에 답사단은 요녕성 금주(錦州)시 북진(北鎭)에 있는 북진묘(北鎭廟)를 방문했다. 북진묘의 북쪽에는 몽골어를 음차해서 적은 ‘의무려산(醫巫呂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의무려산은 서울의 북한산처럼 화강암이 드러난 멋진 석산(石山) 덩어리다. 의무려산의 자태는 북진묘에서 가장 멋지게 보인다.
북진묘의 ‘묘(廟)’는 종묘의 묘자와 같으니, 북진묘는 의무려산 산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나라와 명나라, 청나라의 황제는 종종 이곳을 찾아 의무려산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이곳을 중수한 다음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북진묘 안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로 만나는 건물 안에는 북진묘의 내력을 적은 거대한 비석이 있다.
단군조선은 요서지역에서 도읍했다
이 비석은 너무 커서 위쪽의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이 비석 오른쪽 하단부에 ‘무엇을 일컬어 태백이라고 한다’는 뜻을 가진 ‘호태백(乎太白)’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왼쪽 하단부에는 ‘삼한(三韓)’이라는 글귀도 있다. 북진묘의 내력을 설명한 비석에 왜 태백과 삼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일까. 태백이 의무려산을 가리킨다면, 태백은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적봉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노노아호산을 넘어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그곳에 있던 신석기인을 정복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이 커지자 이들은 보다 큰 산을 영산(靈山)으로 모신다. 이러한 영산을 가장 큰 산이라는 뜻으로 ‘태백산’으로 표기한다. 노노아호산은 제법 숲이 있는 산이니 이들은 이 산을 태백산으로 모셨을 수 있다.
그러나 능하지역에 포진한 단군조선은 화하족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에 따라 도읍터인 평양과 영산인 태백산도 이동한다. 이들은 능하지역의 동쪽에 있는 의무려산 자락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의무려산 남쪽에 있는 지금의 금주(錦州)시 일대의 광활한 평야가 평양이 되고, 의무려산이 태백산이 된다.
의무려산은 요하의 서쪽인 요서지역에 있다. 화하족의 공격이 거듭되자 단군조선은 요하라고 하는 천연 방어선을 이용하기 위해 다시 요동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휘하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잃으면서 사라졌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했다가 평양으로 옮기고 백악산 아사달과 장당경을 거쳐 아사달로 옮겼다고 돼 있는데, 이는 단군조선이 도읍지를 옮긴 기록이다.
단군조선과 화하족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은 청동무기를 개발해 정복전을 치르면서 상대적으로 비옥한 황하 하류로 진출했다. 역시 청동무기를 개발한 단군조선족은 보다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진출했으니 이들은 난하 인근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청동무기로 무장한 두 세력의 만남은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중국 기록물은 단군조선족과 화하족이 긴장한 상태로 만나게 된 사건으로 기자의 망명을 거론한다. 앞에서 밝혔듯 기자는 상나라 사람이다. 그는 화하족의 정권이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바뀌는 격변기에 화하족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기반을 잃은 그는 조선으로 망명했다. 기자의 망명은 곧 화하족이 단군조선 땅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암시였다.
전쟁의 시대
중국 기록에 나오는 화하족의 두 번째 동진자는 연(燕)나라 진개인데, 그는 망명이 아니라 공격을 해왔다. 이때 기자조선은 진개 세력에 협조했던 듯 큰 피해를 보지 않았으나 단군조선은 치명타를 맞았다. 이때부터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지배에서 벗어나 영향력을 넓히는데, 이때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연나라 내부 정치투쟁에서 튕겨져 나와 기자조선 땅으로 망명해온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연다.
이 위만조선을 향해 공격을 가한 것이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인 한(漢)나라다. 한나라의 공격으로 위만조선은 사라지고 능하지역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민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능하지역은 한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아주 먼 곳이다. 한나라의 지배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능하지역에서 철기로 무장한 단군조선의 후예가 일어나 내부를 통일하고 외적을 척결하기 위해 경쟁한다. 이 싸움에서 부여가 주도권을 행사하다가 마침내 고구려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강역을 회복하기 전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들도 활발히 움직인다. 이들은 유목을 했기에 기동성이 남달랐다. 따라서 영역 확장이 빨라 화하족과 충돌한다. 능하문화의 형제인 하가점 상층문화인들은 능하문화의 후예보다 화하족과 더 많이 충돌했다. 왜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는 화하족과 그렇게 많이 충돌했는지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기로 한다.
적봉은 황하 중류를 능가하는 후기 신석기문화를 일궜고, 청동기문화도 먼저 발현시켰다. 그러나 청동무기 제작에서 뒤짐으로써 화하족과의 싸움에서 밀렸다. 홍산문화인들이 청동무기 제작이 늦었기에 화하족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은 아니다. 지리적 조건이 불리했기에 이들은 화하족에 밀리게 되었다.
앞에서 정리했듯이 적봉은 평지였으며, 토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있었고, 옥기를 제작하는 옥 원석이 있었으며, 청동기를 만드는 광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불을 다루는 기술을 발전시켜 숯불을 개발해 화하족보다 먼저 청동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적봉은 해발 600m의 고원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고원은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추워지면 농경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적봉에 남아 유목을 하는 세력과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농경과 함께 목축을 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황하문명에서는 다수가 자기 자리에 남아 농경을 하고 소수가 티베트로 들어가 유목을 했으나, 적봉에서는 상당수 능하로 내려와 농경을 했으니 적봉에 남아 유목을 한 세력은 자연조건상 인구가 더디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민족은 와해되지 않는다
주력이 포진한 황하문명은 황하 하류로 세력을 확장했다. 황하 중하류는 중원(中原)이라고 불리는 대평원이니 농경을 하기에 좋아 화하족의 문화는 더욱 발전했다. 인구가 많았던 화하족은 극심한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술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고조선족은 이러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상태에서 화하족과 맞붙게 됨으로써 이들은 패배했다. 기후 변화가 끼친 영향은 이렇게 컸다. 그러나 큰 문화를 만든 세력은 쉽게 와해되지 않는다. 능하지역에서 패배한 고조선족의 후예는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밀려갔지만 그 지역을 깨우기 시작한다. 적봉에 남아 유목생활에 들어간 또 다른 고조선족은 초원길을 따라 이동 범위를 넓히면서, ‘기동력’이라고 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었다. 동북아는 또 다른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 제2부 찰흙밭, 玉밭, 광물밭, 그러나 高原이라는 약점이…
홍산은 도대체 어떤 조건을 갖췄기에 후기 신석기문화인 흥륭와문화(서기전 6000년쯤)-조보구문화(서기전 5000년 무렵)-홍산문화(서기전 4000년 전후)-소하연문화(서기전 3000년경), 그리고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서기전 2200~1500년)와 유목문화인 하가점 상층문화(서기전 1300년경), 정주문화인 능하문화(서기전 800년경)를 낳을 수 있었는가.
내몽고자치구의 면적은 22만㎢인 한반도의 5배, 9만9000여 ㎢인 한국의 11배가 넘는 110만㎢다. 그러나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인 2350여만에 불과하다. 내몽고자치구의 지방조직은 자치구-시(市)·맹(盟) -현(縣)·기(旗)-향(鄕)·진(鎭)·촌(村)으로 이어진다. 과거 몽고족은 ‘맹(盟)’과 ‘기(旗)’로 부족을 엮었기에, 내몽고자치구에는 아직도 시와 동급인 ‘맹’, 현과 격이 같은 ‘기’가 있다.
적봉시 행정구역도
내몽고자치구에는 수도인 호화호특시를 비롯해 9개 시(市)와 3개 맹(盟)이 있는데, 적봉시는 9개 시 가운데 하나다. 적봉시의 면적은 한국에 육박하는 9만㎢이지만 인구는 450만에 불과하다. 한국의 부산광역시는 초량구 등을 거느린 순수 부산시 지역과 순수 부산시 바깥에 있는 기장군 등의 군(郡)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적봉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순수 적봉시 지역에는 ‘홍산(紅山)문화’란 이름을 낳은 홍산구 등 3개 구가 있고, 그 외곽에 7개 기(旗)와 2개 현(縣)이 있다. 이 적봉시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 순수 적봉시 동쪽에 있는 ‘오한기(敖漢旗)’다. 오한기에는 흥륭와, 조보구, 소하연, 하가점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기와 함께 옥으로 만든 수많은 장식물(玉器)이 출토됐다.
충북 크기에서 한반도보다 많은 유적
오한기의 면적은 충청북도보다 약간 작은 8300㎢인데 이 오한기에서 발굴된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됐거나 발견된 유적보다 훨씬 많다.
남북한 전체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지는 300곳 정도이고, 유물이 발굴된 곳은 60개소 정도다. 청동기 유적지는 600곳 정도이고, 발굴지는 200곳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오한기에서 조사된 신석기 유적지는 1000여 곳이 넘고, 청동기 유적지는 2000여 곳이 넘는다.
오한기의 인구는 60만에 불과하므로 아직 ‘파보지 못한 땅’이 많다. 대부분의 지역이 농지나 초지이므로 개발을 위해 파보면 더 많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인들은 산 중턱의 동굴에서 살았기에 ‘동굴인’으로 불리지만 신석기인, 특히 후기 신석기인은 물이 가까이 있는 평지에 내려와 움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오한기를 포함한 적봉시 전체가 해발 600여 m의 고원 평지라는 사실은 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명은 물이 있는 평지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로 이 곳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췄다. 기자는 이곳에서 많은 토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우연히 발견했다.
적봉시 오한기 왕가영자(王家營子)향의 서대(西臺)마을에서 서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서대(西臺) 유적지’가 있다. 서대 유적지에서는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 소하연문화, 하가점 하층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그리고 중국 전국 시대 때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고 한다. 조보구문화를 제외하고는 적봉지역에서 발흥한 모든 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서기전 5세기~3세기인 전국 시대 유물을 끝으로 이후의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는데, 이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떠났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을 떠난 이유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질병일 수도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춥고 건조한 고원에서는 농경이 불가능하고 유목만 가능하다. 유목민은 가축이 먹을 수 있는 풀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일정한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유목을 하더라도 중심지는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서대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목축이 불편해지면 이들은 살던 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이주한다.
서대마을에 쏟아진 비
이렇게 되면 중심지도 흙으로 덮이게 된다. 신석기 시대에는 정주민의 중심지였고 유목이 시작된 후로도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철기 시대를 맞을 무렵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이 서대마을이다.
지금 적봉지역의 연 강수량은 300㎜에 불과해 사시사철 건조하다. 서대유적지를 찾아가던 날, 하늘이 꾸물꾸물해지더니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소낙비가 내렸다. 번개를 동반한 큰 비였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내몽고 지역에는 예년과 달리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이 크게 고민한 것은 대기오염과 더위였다. 중국은 이 문제를 ‘인공강우’로 해결하려고 했다. ‘구름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비가 내리게 한 것이다. 비가 내리려면 대기 중에 있는 수증기를 잡아당겨 물방울을 만드는 결정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름씨’다. 중국은 드라이아이스 입자로 만든 구름씨를 항공기로 뿌리거나 포탄으로 발사했다는데, 정작 오라는 베이징 지역에는 비가 적게 오고, 북쪽인 내몽고지역에 자주 내렸다는 것이다.
목마른 토지라면 모처럼 쏟아진 빗물을 재빨리 흡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랜만의 해후라서 그랬는지, 땅은 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몽고에서 인마(人馬)가 다니는 도로는 비가 오면 대개 물길이 된다. 물이 흐르는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는 뜻인데, 낮은 곳은 대부분 흙이 씻겨 내려가 자동차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단단한 것만 남는다. 바위처럼 단단한 것만 남았기에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일까?
신석기 후기문화부터 초기 철기 시대 사이의 문화가 꽃폈던 서대 유적지. 그러나 철기문화가 시작될 즈음 이곳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흘러간 물은 얕은 곳에 모여들어 증발될 때까지 물웅덩이를 만든다. 이 웅덩이가 바로 오아시스다. 칭기즈 칸은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는 등 더럽히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물은 이 곳에서 생명과 다를 바 없다.
불에 구운 여신상
비가 쏟아진 지 10여 분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비포장도로는 순식간에 큰 개울이 됐다. 물길을 거스르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 서대마을에 도착하자 비가 뚝 그쳤다. 서대 유적지를 찾아 나선 답사단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길이 왜 그렇게 미끄러운가. 기자는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더욱 미끄럽게 느껴졌다. 서대 유적지는 1987년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내몽고 공작대가 발굴했다. 유물은 박물관으로 옮겨갔지만 그 터라도 보려고 간 것인데, 막상 도착해 보니 유난히 많이 온 비 때문인지 풀이 우거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역시 유적지는 서리가 내린 다음에 보아야 한다. 한겨울이 곤란하다면 초봄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여신상(女神像)이 발굴됐다고 한다. 적봉 일대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심심찮게 여신상이 발견된다. 왜 고대인들은 여신상을 만든 것일까. 남신상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후기 신석기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가 없었다. 짐승처럼, 새끼는 모두 여성이 키우던 시절이었다. 남성은 ‘씨’를 줄 뿐 자녀 양육에는 관여하지 않으니, 새끼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새끼는 같은 ‘씨’에서 나온 것도 있겠지만 다른 씨에서 나온 것도 적지 않으니, 아버지를 따져봤자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장성한 아들도 그를 키워준 어머니의 통제를 받는다.
이를 ‘모계(母系)사회’라고 한다. 모계 사회는 다산(多産)을 중시했지만, 다산은 모계사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계(父系)사회에서도 다산은 아주 중시됐다.
현대의학이 일어나기 전 상당수의 신생아는 홍역 등을 앓다가 희생됐다. 홍역을 이겨냈더라도 성장 도중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에 파상풍이 감염돼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장성한 후에는 타 부족과의 싸움이나 동족 내의 싸움, 또는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죽기도 했다. 사냥과 싸움에서 이겼더라도 그 과정에서 입은 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도 많았다. 기생충과 전염병에 의한 희생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제3부 한국과 몽골, 역사적 유사성과 차이점
홍산문화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과 몽골이다. 한국은 능하문화를 이었고, 몽골은 하가점 상층문화를 이었다. 일본과 터키는 방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능하문화를 이은 한국의 방계이고, 터키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방계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동북공정에 올바로 대응할 수 있다.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는 어떻게 흥망을 거듭해왔는가.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갑골문자를 만들어 한자를 발전시킨 것은 황하문명이므로, 능하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의 흔적은 황하문명이 남긴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아야 한다. 능하문화는 그나마 한자를 빨리 도입해 역사시대로 들어갔으나 유목문화가 된 하가점 상층문화는 그것도 늦었다.
능하문화의 후예가 부여-고구려-삼국시대를 거치는 역사발전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기서는 하가점 상층문화 세력의 추이를 집중적으로 추적해본다. 주목할 것이 초원지대의 특징이다. 유목을 하는 초원은 발전에 한계가 있다. 인구와 짐승 수가 너무 많아지면 초지는 황폐해지고 그로 인해 가축과 사람은 동시에 아사(餓死)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위기가 닥치면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내부 투쟁이 벌어진다. 이 경쟁에서 패하거나 염증을 느낀 세력은 새로운 초지를 찾아 멀리 이동한다. 일부는 평야지대를 공격해 먹을 것을 빼앗아 오는 약탈전쟁을 벌인다. 약탈전쟁을 벌이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평야지대의 풍부함에 매료돼 눌러앉기도 한다.
고지 초원의 한계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원지대는 적정 인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철기 시대의 생산력은 왕성했기에 초원지대의 인구는 금세 또 적정선을 넘어섰다. 그래서 다시 쪼개지거나 평야지대를 공격한다. 평야지대의 공격은 여자와 아이의 납치를 수반하니, 이들의 세력은 금방 확장된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평야지대 사람들은 초원지대 유목민들은 배반을 잘 하고 알력을 자주 겪는다고 비난한다. 배신과 불화는 평야지대에도 있었다. 평야지대에서는 배신을 해도 평야지대 안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초원 사람들은 이동수단을 갖고 있기에 알력이 심해지면 완전히 헤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몽골공화국(외몽고)은, 몽골족은 물론이고 흉노와 돌궐족까지도 그들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흉노와 돌궐은 몽골 초원을 지배했다가 사라진 유목민족이다. 몽골이 조상으로 삼는 흉노와 돌궐(투르크), 몽골족은 언어학적 특징으로 볼 때 홍산문화에서 갈려 나온 것이 분명하다.
적봉지역에 남은 하가점 상층문화 세력은 초원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성 때문에 일찌감치 둘로 나뉜 것 같다. 하나는 적봉에 남은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적봉을 떠나 서쪽으로 갔다. 적봉 동북쪽에는 대흥안령산맥이라는 거대한 준봉군(群)이 있으니, 유목민은 광활한 초지가 있는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동해서 새로운 영역을 찾는데, 새로운 영역이란 물과 소금이 있는 곳이다. 물은 빗물로 해결하고 소금은 암염(巖鹽)으로 해결한다. 몽골 초원에서는 암염이 있는 호수가 이따금 나타난다. 적봉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가운데 일부는 오르도스 지역을 활동 영역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바로 중국인들이 ‘흉노(匈奴)’라는 흉측한 이름을 붙인 종족이다.
오르도스 일대는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이곳에는 노천 석탄광 등이 있어 지금 중국 광산업계는 이곳에서 많은 광물을 채취해가고 있다. 청동기 제작술을 갖고 이동한 흉노족은 오르도스에서 고도로 발달한 청동무기를 제작한다. 그리고 곧 오르도스 초원이 허용할 수 없는 인구 증가에 봉착한다.
오르도스는 황하 만곡부이니 황하를 따라 내려가면 화하족이 구축한 농경문화를 접하므로 흉노족은 화하족을 공격했다. 흉노족이 화하족을 공격한 것은 여러 차례인 것 같은데, 이 중 유명한 것이 ‘개 같은 융족’이라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견융(犬戎)’으로 표기한 흉노족이 서기전 8세기 주나라를 공격한 일이다.
흉노에게 왕소군 바친 漢나라
견융족의 공격은 살벌해서 주나라 유왕이 피살되고 주나라 조정은 호경에서 동쪽의 낙양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낙양으로 도주한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하는데 동주 시절부터 주나라 왕실의 지배력이 약해져,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 시대가 시작됐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은 진나라에 의해 일시적으로 통일됐다가 한(漢)나라 시절 안정적인 통일을 이룬다. 한나라는 무제 시절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며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로 이름을 떨쳤다.
이런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흉노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쳐들어왔다. 가을엔 흉노족이 기르는 말이 살찌고 하늘이 높아지는데, 이때가 되면 흉노는 바람처럼 나타나 한나라를 유린했다. 지금 천고마비(天高馬肥)는 풍족한 가을을 의미하지만 한나라 때는 흉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흉노족은 강력한 정복왕조인 한나라를 무력화시켰다. 흉노족의 리더 호한사선우는 한나라 원제로부터 중국 4대 미녀인 왕소군을 상납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내몽고 박물관에 있는 호한사선우와 왕소군 동상.
몽골에 가면 도처에서 칭기즈 칸 상을 볼 수 있는데, 칭기즈 칸 상 못지않게 자주 보는 것이 흉노족의 군주였던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의 상이다. 한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시구를 알 것이다. 이 시구는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과 관련이 있다.
한나라 초기 흉노는 다섯 종족으로 나뉘어 갈등을 거듭하다 호한사선우에 의해 통일된다. 이 무렵 한나라 왕은 무제로부터 3대를 내려간 원제였다. 가을철만 되면 흉노는 황하 중류지역을 공격해 재물과 여자와 아이를 빼앗아갔으므로, 원제가 이끄는 한나라 조정은 호한사선우에게 공격을 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호한사선우가 한나라 왕녀를 보내달라고 요구하자 원제는 이를 들어주기로 하고 왕녀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은 이심전심으로 흉노를 미워했기에 가장 추한 여자를 보내기로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왕소군은 ‘백’이 없는 궁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주지 못했고, 때문에 화가는 그를 못나게 그렸다.
왕녀를 뽑는 담당자는 그림을 보고 뽑았는데, 당연히 가장 추녀로 그려진 왕소군을 뽑았다. 원제는 왕소군을 흉노로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처음 왕소군을 보았는데, 뜻밖에도 절세의 미인이었다. 왕소군의 미색에 반한 원제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낸 후, 왕소군을 그린 화백의 목을 쳤다고 한다.
왕소군과 문성공주
호한사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아들을 하나 낳았으나 곧 호한사선우가 죽었다. 그리고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사선우가 정처(正妻)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고 살다가 죽었다. 중국의 문인들은 이러한 왕소군의 일생을 애달파 했다.
훗날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왕소군의 원한이라는 뜻으로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를 지으며 ‘(흉노 땅에는)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다’며 ‘춘래불사춘’이라고 했다.
몽골인은 중국에 당한 것이 많아 반중(反中) 감정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한나라 왕실로부터 왕녀를 상납받은 호한사선우를 칭기즈 칸 못지않은 영웅으로 여긴다.
왕소군 이야기는 중국 사서에 나오는 것이니 중국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한한 해석을 한다. 왕소군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았으니 왕소군이 낳은 흉노의 후예는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흉노의 후예가 몽골을 이루게 됐으니, 적어도 내몽고자치구에 사는 몽골인은 중국인이라는 것이 중국이 내세우는 논리다.
이와 똑같은 논리를 적용하는 곳이 티베트인이 많이 사는 서장(西藏)자치구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인들이 보여준 콘셉트는 ‘강한성당(强漢盛唐)으로의 회귀’였다. 강한성당은 강력한 한나라와 성대한 당나라 시절을 가리키는데, 두 나라는 중국인이 세운 유이한 정복왕조였다. 이러한 한·당을 보란 듯이 두들긴 나라가 흉노와 티베트였다.
중국인들은 티베트를 ‘토번국(吐藩國)’이라고 폄하해 기록했는데, 당나라 극성기인 당 태종 때 토번국을 이끈 인물은 송찬간포(松贊干布)였다. 송찬간포는 5호16국 시대에 활동하다 서쪽으로 밀려난 선비족이 지금의 청해성 쯤에 세운 토곡혼(吐谷渾)을 멸망시키고 이어 당나라로 쳐들어갔다.
이 공격에 놀란 당 태종이 협상을 제의하자 송찬간포는 당나라 공주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당 태종은 후비의 딸인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보냈다. 독립을 바라는 티베트인들은 당시 당나라가 티베트의 공격에 굴복해 공주를 바쳤다며 그때부터 이미 티베트와 중국은 별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결혼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사실인지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중국은 문성공주가 시집가서 티베트 왕실의 자녀를 낳았으니 티베트 왕실은 중국계이고, 그에 따라 티베트도 중국의 일부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티베트 지역을 상대로 한 서남공정(西南工程)의 핵심 논리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경우에는 부계사회의 전통을 내밀고, 왕소군과 문성공주 사례에서는 모계사회 전통을 내밀어 주변국을 모두 중국 역사의 울타리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 중국의 역사 공작이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등장하는 아틸라
적봉에서 갈려 나간 흉노족은 주나라 시절과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 그리고 한나라라는 최전성기까지 1000여 년간 화하족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화하족은 도처에 성을 쌓아 흉노의 공격에 대비했다. 시황이 이끈 진나라는 이 임무를 몽염에게 맡겼는데, 몽염이 전국 시대 각 나라가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을 연결해 완성한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초원은 많은 인구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흉노의 번성은 곧 흉노의 분열을 가져왔다. 한나라 시기 흉노는 중국과 가깝게 지내려는 남흉노와 계속 유목 생활을 하려는 북흉노로 갈리는데, 남흉노의 리더가 바로 왕소군과 결혼한 호한사선우다. 그 후 남흉노는 중국으로 들어와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본래 땅에 남은 북흉노는 동흉노와 서흉노로 나뉘는데, 동흉노는 제 자리에 남고 서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해 동유럽에 도달한다. 이 서흉노를 유럽에서는 ‘훈’으로 기록했다.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은 대혼란에 빠진다. 서기 450년쯤 아틸라가 이끄는 서흉노 일파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는데, 아틸라는 독일 노래인 ‘니벨룽겐의 반지’에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나올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서흉노가 유럽까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알타이산맥에서부터 헝가리까지는 대평원 지대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몽골 초원보다 더 거칠 것이 없다. 이러한 흉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흉노의 지배층은 어린아이 때부터 돌로 머리를 눌러 머리뼈를 위로 삐죽하게 만드는 편두(偏頭)를 했다. 편두를 한 두골은 가야와 신라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이 사실은 흉노가 오르도스 지역에 머물지 않고 산지사방으로 움직였음을 의미한다.
흉노가 맹위를 떨칠 때 적봉지역에서 활동한 하가점 상층문화의 후예가 중국 기록에 ‘산융(山戎)’으로 기록된 종족이다. 중국 사서인 ‘관자’는 ‘춘추 시대 가장 강력했던 제(齊)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을 지나 고죽국을 짓밟고 산융과 맞닥뜨렸다’라며 처음으로 산융을 언급한다.
산융도 화하족의 후예와 자주 싸웠는데, ‘사기’는 산융을 흉노의 일파로 기록해놓았다. 산융에 이어 적봉지역에서 활동한 세력은 중국 기록에 ‘동호(東胡)’로 표현된 세력이다. 동호는 산융의 후예인데, 중국인들은 이들이 흉노의 동쪽(홍산지역)에 산다고 하여 동호로 불렀다.
동호와 산융은 중국 전국 시대의 연(燕)나라와 자주 싸웠다. 연나라는 동호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곳곳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 장성은 만리장성보다 북쪽에 있어 ‘연 장성’으로 불린다. 진(秦)나라 시절 동호는 아주 강성해져서 서쪽에 있는 흉노를 쳐, 말과 토지 그리고 흉노족 족장의 부인까지 빼앗아 왔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모돈선우(冒頓單于)가 이끄는 흉노족의 역습을 받아 부족연맹이 해체되는 패배를 당했다.
적봉지역에서 패배한 세력은 대개 대흥안령산맥 안으로 피신해 세력을 키운다. 패배한 동호족은 오환산과 선비산 일대로 도주했는데, 오환산 지역으로 들어간 세력을 ‘오환(烏桓)’, 선비산 지역으로 간 세력을 ‘선비(鮮卑)’로 부르게 되었다. 오환과 선비 가운데 세력이 강성해진 것은 선비족이다.
한나라가 있던 서기 2세기 무렵 선비족은 단석괴(檀石槐)를 중심으로 우문(宇文)·모용(慕容)·탁발(拓跋)·단(段)·걸복(乞伏) 등의 세력이 모여 군사연맹체를 이루었다. 이때 요하 부근에서 고구려가 강성해졌으므로 이들은 고구려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충돌한 선비족은 ‘모용(慕容)선비족’인데, 모용선비족은 전국 시대의 연(燕)나라와 한자가 같은 나라를 만들었다.
적봉지대 장악한 광개토태왕
중국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를 화하족이 세운 연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모용연국(慕容燕國)’으로 표기한다. 모용연국의 리더인 모용황은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유린해 고구려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이 이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모용연국 군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태후를 붙잡아 갔다. 고구려는 이 위기를 외교로 극복하려고 했다. 고국원왕의 아들인 소수림왕은 모용연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며 유화관계를 갖고자 했다. 그리고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태왕 때 모용연국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광개토태왕비문으로 확인된다. 이 비문에는 광개토태왕 5년(395년)에 있었던 ‘비려(稗麗)’로 표현된 모용선비족 정벌에 관해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요나라 진국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오른쪽엔 봉황으로 보이는 새가 그려져 있고 왼쪽 남자는 장구를 들고 있다. (좌) 거란은 자기 문자를 가진 홍산문화의 후예였다. 한자와 비슷한 거란의 문자.(우)
여기서 염수는 소금이 나는 호수를 말하는데, 지금도 적봉 북쪽 지역에는 군데군데 염호(鹽湖)가 있다. 염호가 있는 지역까지 가려면 요하는 물론이고 적봉 중앙을 가로지르는 요하 상류 ‘시라무렌 강’을 지나야 한다. 광개토태왕이 염호까지 가서 수백개의 군영을 깨뜨렸다는 것은 홍산지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뜻이 된다.
모용연국은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와, 훗날 북위(北魏)를 만드는 탁발선비족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모용연국이 사라진 적봉지역에선 탁발선비족이 패권을 잡았다. 탁발선비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중국을 장악하고 몽골 전역을 지배했다. 북위를 세운 것이다. 북중국의 패자인 북위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고구려였다.
흉노에 이어 중국화 택한 선비족
북위가 북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중국은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여러 국가가 명멸하던 5호16국 시대였다. 이상하게도 만리장성 남쪽으로 내려간 유목민은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돌파한 탁발선비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화하고 말았다. 5호16국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을 이룬 것은 수(隋)나라였다.
수나라는 만주에 버티고 있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선비족 출신 장수를 동원했다. 모용선비가 활약하던 시절 우문선비가 있었다. 우문선비족은 모용선비와의 경쟁에서 패해 사라졌는데, 그 후예가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 정권에 참여했다. 그리고 수나라가 통일하자 수나라 조정에도 참여했다. 수나라는 우문술과 우중문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가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는데, 우문술과 우중문이 바로 우문선비의 후예였다.
터키까지 이동한 돌궐
전체 선비족을 통일하고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이 사라진 곳에서 모용선비의 후예로 보이는 거란족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엔 위세가 약했으므로 이들은 북위의 명멸에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거란족의 수도였던 적봉시 파림좌기에 있는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동상.(좌) 요태조 무덤 부근엔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석붕(石棚)이 있다. 요 태조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라고 한다.(우)
거란이 힘을 키우기 전 몽골 서쪽에 남은 동흉노는 북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북위가 사라진 서기 6세기쯤 돌궐족이 초원의 방식에 따라 바람처럼 일어났다. 투르크는 ‘투구’를 뜻하는데, 이를 중국인들은 돌궐(突厥)로 적었다. 돌궐족은 곧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북위가 사라진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와 10년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일부는 무주공산인 서쪽으로 뻗어나가 흑해 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때 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것이 정복왕조인 당나라다. 당나라는 두 나라를 모두 공격했는데, 이에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이 싸움에서 먼저 고구려가 패망했으나 돌궐은 계속해서 당나라와 싸웠다. 당나라가 돌궐과의 싸움에 진력하느라 힘의 공백이 생기자 고구려 땅에서 발해가 건국했고, 이어 거란이 일어났다.
돌궐은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일부는 굴복했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흉노는 정서진(正西進)해서 동유럽으로 갔으나, 서돌궐은 서남진(西南進)해서 흑해가 있는 소아시아 반도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이란계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섞였다.
몽골족의 영웅 칭기즈 칸의 동상. 그러나 몽골족의 내분으로 칭기즈 칸의 후예는 전멸했다.
이 투르크 세력은 13세기 말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일으켜 1453년 동로마의 수도를 정복하고 강대한 제국을 세웠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600년간 계속되다 1922년에 무너지고 터키만 남게 되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CIS 국가 등이 독립하고 러시아가 소련의 지위를 이었듯,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많은 나라를 독립시키고 적통을 터키로 이어주었다.
이러한 투르크가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터키와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의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 러시아의 알타이공화국에서 쓰는 언어를 터키어 계열로 보고 있다. 신강위구르자치구는 1954년 동(東)투르크메니스탄을 자처하며 독립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위구르인들이 투르크 계열에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고인돌은 홍산문화가 아니다
능하문화가 꽃피기 전, 한반도와 만주에서도 군데군데 신석기문화가 존재했다. 만주에 있는 대표적인 신석기문화 유적지로는 요녕성 심양시 황화북대가 용산로 1번지에 있는 신락(新樂) 유적지가 꼽힌다. 신락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이곳은 1973년, 한 전자회사가 공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서기전 5000년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유물이 다량 발굴돼 일약 심양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됐다.
한국의 중심부인 서울에서는 암사동 유적지가 유명하다. 신락 유적지와 암사동 유적지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토성을 쌓고 움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들이 생활한 곳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는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구리와 아연광이 섞인 돌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노천 구리·아연 광산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의 신석기인들은 이러한 노천광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구리·아연을 품은 돌을 찾아낼 수 있는 능하문화인들이 들어오면서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다. 능하문화인들이 만든 청동기는 대부분 무기였다. 청동 농기구는 만들지 못했는데, 이는 농기구로 쓰기엔 청동이 너무 무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 화살촉과 청동검, 청동 도끼는 물러도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능하문화인들은 용범(鎔范)을 이용해 청동제 무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으니, 돌을 갈아서 돌화살촉과 석검(石劍), 돌도끼를 만드는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파형동검 문화와 고인돌 문화가 만나 하나가 됐다. 고인돌 밑을 발굴하다 보면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세형동검으로 모양이 바뀐다. 능하문화에서는 고인돌 없이 비파형동검이 제작됐으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세형동검이 제작됐다.
전쟁과 쿠데타 시대 연 청동기
능하문화인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힌 것은 정복전쟁의 일환이었다. 청동제 무기를 대량생산하게 되면 사람들은 농경만으로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정복전쟁을 통해 다른 종족을 약탈하는 것이 농경보다 빠른 재산 증식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약탈은 식량이나 재물에 한정하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도 납치한다.
여성을 납치하는 것은 자기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는 자기 종족으로 키우거나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부린다. 이러니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은 순식간에 재산과 인총(人叢)을 늘릴 수 있다. 이때 몇몇 세력은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세력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한다. 일종의 부족 연맹을 만드는 것이다.
부족 연맹에 참여한 세력은 일단은 굴복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쿠데타 가능 세력이 된다. 전체를 리드하는 세력이 방심하거나 여러 부족을 너무 강하게 지배해 반발을 사면, 이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리딩 세력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러한 일은 중국 화하족에 대한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화하족은 ‘하(夏)’라고 하는 최초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폭정을 일삼자, 하나라 조정에 협력하던 상족(商族)의 대표 탕(湯)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다. 그리고 상족이 화하족 전체를 지배하는 상(商)나라를 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왕인 주왕(紂王)도 하나라 걸왕에 못지않은 학정을 일삼았다. 그러자 상나라에 협조해온 주족(周族)의 리더인 무(武)가 혁명을 일으켜 주왕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열었다. 상에서 주로 왕조 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기자조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자(箕子)다.
기자는 상나라 주왕의 삼촌으로, 주왕의 독재에 항거해 바른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주왕의 미움을 사 투옥됐는데 이때 주족의 무(무왕)가 혁명을 일으켜 집권했다.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석방한 뒤 “함께 정치를 하자”고 했으나, 기자는 “나는 상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다”며 거절하고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화하족의 영역에서 왕조가 바뀌는 갈등이 있었다면, 고조선의 강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화하족은 갑골문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이를 한자로 발전시켰다. 고조선족도 기록을 위해 문자를 만들었을 것이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서돌궐과 결별한 동돌궐은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서기 734년쯤 무너진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동돌궐을 무너뜨렸지만 이들의 땅을 통치하진 못했다.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 도호부를 세웠지만 이곳은 당나라가 통치하기에 너무 멀었다.
당나라가 쇠약해지자 알타이산맥 남쪽에서는 돌궐의 지파인 위구르족이 일어나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몽골 초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위구르제국은 같은 투르크계인 키르기스의 공격을 받아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지역으로 쫓겨 들어갔다. 위구르를 패퇴시킨 키르기스는 몽골 초원으로 세력을 넓히지 않고 그들이 살아온 곳(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렀다. 그로 이해 몽골 초원은 다시 무주공산이 되었다.
위구르가 일어나기 전 만주지역에서 흥성한 홍산문화의 후예가 발해다. 그러나 발해는 대흥안령산맥에서 일어난 거란에 무너졌다.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시절 국호를 요(遼)로 고치고 발해 땅은 물론이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몽골 초원 전체를 장악했다. 흉노·북·위 돌궐에 이어 몽골초원을 지배한 대제국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과 친연성 강한 거란과 金나라
거란은 송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고려와 전쟁을 세 차례 치르는데 이때 거란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 중에는 장구의 원형인 요고(腰鼓)를 그린 것이 있는데, 거란의 무덤 벽화에도 우리의 장구와 똑같은 북이 그려져 있다. 장구는 고려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데, 고구려에서 시작된 장구가 요나라를 거쳐 고려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거란은 예상외로 우리와 유사성이 많다.
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된 것이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다. 그런데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는 아골타의 6대조를 고려에서 온 김함보(金函普)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나라와 한국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요나라를 무너뜨린 금나라는 몽골 초원으로 몰려가 그곳을 장악했다.
거란이 일어날 무렵 대흥안령산맥 북쪽인 중-러 국경 부근에서 ‘실위(室韋)족’이 세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곳은 너무 변방인지라 실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초원에서 세력이 커지면 반드시 쪼개진다. 실위족은 남(南)실위, 북(北)실위, 발(鉢)실위, 대(大)실위, 심말항(深末恒)실위의 다섯 종족으로 나누어졌다.
여진족은 몽골족을 잘 다룬 민족이다. 요나라를 대체한 금나라는 실위족을 장악해 몽골 초원을 지배해 들어갔다. 그리고 송나라와 전쟁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몽골 초원에 대한 금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졌다. 이러한 때 대실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몽올(蒙兀)실위’가 몽골 초원에서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몽올실위는 ‘구당서’에 처음 나오는 종족 이름인데, 학자들은 몽올에서 몽골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몽올실위 족에서 바람처럼 일어선 영웅이 바로 중국 기록에는 ‘성길사한(成吉思汗)’으로 기록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그들을 지배한 금나라를 제압하고 이어 송나라도 무너뜨렸다. 그리고 광활한 서쪽 초원으로 진출해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칭기즈 칸 정벌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그의 동생인 카사르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큰아들에게는 킵차크한국, 둘째아들에게는 차카타이한국, 셋째아들에게는 오고타이한국, 그리고 손자에게는 일한국을 물려주었으나 동생인 카사르에게는 그러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
중국을 점령한 몽골족은 그들이 사는 곳과 가까운 베이징(당시 이름은 大都)을 수도로 정하고, 칭기즈 칸의 적통에게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로 인해 원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카사르와 그 후예들이 불만을 품었다. 카사르와 그 후예가 이끄는 ‘호르친부(部)’는 칭기즈 칸 직계와 달리 몽골 초원에 머물렀다. 이러한 갈등이 훗날 몽골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몽골족의 내분은 잠시 뒤 정리하고 동북공정과 관련된 문제에 포커스를 맞춰보자. 작금의 중국 역사 판도를 넓혀준 두 민족은 몽골족과 여진족이다. 한·당보다 훨씬 더 강한 정복왕조를 세운 몽골과 여진족 덕분에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역사를 갖게 됐다. 먼저 몽골족이 중국에 기여한 면면을 살펴보자.
중국은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썼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역사서가 25종인데, 중국은 이를 ‘25사’로 부른다. 송을 무너뜨린 원나라 조정은 몽골인인 탁극탁(托克托) 등에게 명하여 ‘송사(宋史)’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편찬케 했다. 그리고 몽골인인 탈탈(脫脫)로 하여금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도 만들게 했다.
요·금 역사를 중국에 바친 元
몽골족이 자신을 지배한 요나라와 금나라 역사를 집필하게 한 것은 두 나라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다. 원나라로서는 몽골족뿐만 아니라 같은 북방족인 거란족과 여진족도 중국을 지배했다는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요사’와 ‘금사’를 서술케 한 것이다. 원나라의 이러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홍산문화의 후예인 요나라와 금나라를 화하족 역사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는 ‘원사(元史)’를 썼으므로 요·금·원사는 25사에 고스란히‘편입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홍산문화의 후예가 화하족에게 역사를 뺏긴 첫 번째 사건이다.
5호16국이 일어났던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낸 당나라는 이연수(李延壽)로 하여금 북중국에서 명멸한 주요 국가인 위·제·주·수(魏·齊·周·隋)의 역사를 모은 ‘북사(北史)’와 남중국에서 일어난 주요 국가인 송·제·양·진(宋·齊·梁·陳)의 역사를 묶어 ‘남사(南史)’를 편찬케 했다. 남사와 북사도 25사의 하나로 꼽히는데, 북사에 선비족이 만든 북위의 역사가 들어가 있다.
‘북사’로 인해 북위의 역사는 화하족의 역사에 편입됐다. 그러나 ‘북사’는 화하족이 만들었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몽골족은 스스로 ‘요사’와 ‘금사’를 편찬함으로써 홍산문화의 후예사를 중국사로 들어가게 했다. 몽골은 중국을 지배했지만 결과적으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에 가장 많이 헌납했다.
현재 중국은 청나라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고 있으나 중국이 청나라 역사서를 편찬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렇게 되면 ‘청사(淸史)’마저 중국 역사로 편입된다. 중국이 편입했거나 편입시킬 것이 분명한 북위-요-금-원-청사와 흉노-돌궐사를, 홍산문화의 후예인 한국과 몽골 터키가 자국 역사로 편입시킬 수 있느냐는 중국의 역사 공작에 대응하는 출발선이 된다.
기자조선(중국은 ‘기씨조선’으로 표기)을 필두로 중국이 삼키지 못한 동북아 옛나라(東北古國)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기 위해 최근 중국에서 출간한 사화(史話)들.
칭기즈 칸의 후예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몽골 초원을 버리진 않았다. 여름이 오면 원 황제는 몽골 초원에 만든 별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러한 원나라는 곧 모순에 봉착해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 쫓기게 됐다. 그러나 수도를 몽골 초원에서 가까운 베이징으로 정했고, 몽골 초원도 버리지 않았기에 몽골로 퇴각할 수 있었다.
동생을 분노케 한 칭기즈 칸의 실책
몽골족을 몰아낸 명나라는 화하족이 세운 송나라에 비해 영향력이 더 확대됐다. 그러나 적봉을 포함한 몽골 초원과 만주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명군이 장악한 곳은 능하지역이었는데, 능하지역에 있던 명나라 군벌(軍閥)의 후손이 훗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이여송이다.
몽골 초원으로 퇴각한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곧 부족을 통일해 일어서려고 했는데, 카사르의 후예인 호르친부는 완강히 합세를 거부했다. 이러한 때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일어나 ‘후금(後金)’을 세웠다. 금나라도 그랬지만 후금도 몽골족을 잘 다뤘다. 후금은 호르친부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힘을 얻은 호르친부가 칭기즈 칸의 후예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칭기즈 칸의 적통이 사라졌다.
여진족은 호르친부와 ‘만몽(滿蒙)동맹’을 맺고 여진8기군과 몽고8기군을 동원해 명나라로 쳐들어가 청나라를 열었다. 호르친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지배하게 된 청나라 조정은 몽골족을 포함한 북방족을 우대했다. 이러한 청나라는 강희제 때 몽골 전역을 지배했다.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몽골 초원을 중국 영역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복속되지 않은 티베트도 지배했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키르키스에 패한 후 지금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포진한 위구르족을 장악했다. 건륭제는 미얀마와 베트남 접경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해 지금의 운남성과 광서장족자치구도 확실한 청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원나라 이후 중국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것이다.
청나라의 몽골 말살정책
이러한 청나라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화했다. 강희제 때만 해도 팔팔하게 살아 있던 여진의 전통이 사라지고 중국 일색이 된 것이다. 중국화한 청나라는 몽골족을 몰살하려고 했다. 당시 몽골 초원의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남쪽에 있는 친청(親淸)의 호르친부 후예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적개심을 품은 채 북쪽에서 흩어져 있는 다른 몽골족이었다.
청나라는 독립을 추구하는 북쪽의 몽골족을 궤멸시키기 위해 이 지역에 라마불교를 전파시켰다. 라마불교에선 장자(長子)를 제외한 모든 아들은 출가해야 하므로 몽골의 인구 증가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 청나라는 매독을 퍼뜨렸다. 중국인들이 몽골인을 궤멸시키기 위해 고의로 매독을 퍼뜨렸다는 것은, 중국인이 없는 자리에서 몽골인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로 인해 독립을 추구하던 몽골족은 종족이 거의 끊어지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때인 1911년 손문(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열었다. 중화민국은 정변(政變)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렸기에 청나라 영토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몽골과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을 중화민국의 영토로 삼게 된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기에 조선은 중화민국의 국경선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신해혁명 1년 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원 왕조가 요사·금사를 만들어 몽골은 물론이고 거란과 후금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켰다면, 청나라는 몽골과 여진·위구르·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집어넣어준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일어난 중국은 외세에 찢기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투는 바람에 통제력을 상실했다. 몽골 등 피지배 민족으로서는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러한 때인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벌어졌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은 혁명을 일으킨 홍군에 패해 몽골 초원으로 도주해왔는데, 이때 홍군이 따라 들어왔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홍군이 입성하자 독립을 바라던 몽골인들은 러시아의 후광을 입고 독립을 하자고 했다.
러시아의 홍군은 이들에게 큰 선물을 제공했다. 페니실린 등을 보급해 전인구의 5할까지 퍼진 매독을 고쳐준 것이다. 이것이 북부 몽골인을 감동시켰다. 수흐바타르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1921년 독립을 선포하고 1924년 헌법을 제정해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
그러나 호르친부의 후예는 독립에 가담하지 않았다. 내분에 휩싸인 중국은 독립을 선언한 몽골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손문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소련의 도움을 받았고,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도 공산종주국의 행동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불러들여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원나라가 무너진 후 몽골인들은 자력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와 비슷하게 청나라가 무너진 후 타력(他力)이긴 하지만 여진인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명나라 시절 몽골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웠지만, 여진은 외세인 일본에 의해 나라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본이 1937년 중국을 공격해 중일전쟁을 벌이고 1941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을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7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종전(終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1억 옥쇄’를 외치며 끝까지 항전했다. 이에 따라 얄타에서 미·영·소 연합국의 3 거두가 모여 일본을 패망시키는 방안과 일본 패망 후의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몽골인의 反中·反러 의식
이때 미국은 소련에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요구했다. 소련과 일본은 1941년 중립조약을 맺었기에 연합국과 주축국으로 갈렸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충돌을 회피했다. 소련은 참전 대가로 몽골 독립을 요구했고 미국과 영국은 이를 수용했다. 대신 일본이 점령한 만주는 소련이 빼앗아 중국에 돌려준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연합국은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패전한 일본에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결정도 내렸다.
1945년 8월 일본은 미군이 투하한 원폭 두 발을 맞고 항복했다. 연합국은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지도를 그렸다. 조선과 몽골은 독립시키고, 만주를 중국에 돌려준 것이다. 이때 호르친부의 후예는 독립몽골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았는데, 이들이 바로 내몽고자치구를 만들었다.
몽골족은 고유한 문자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몽골문자를 가져가 일부를 고친 후 자기 문자로 만든 것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다. 얄타회담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할 당시 몽골인들의 반중(反中) 의식은 대단했다. 이들은 소련의 힘에 의지해 다시는 중국에 먹히지 않겠다며 몽골문자를 버리고 러시아 알파벳으로 몽골어를 적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호르친부의 후예는 몽골문자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몽고자치구는 급속히 한화(漢化)됐다. 현재 내몽고자치구의 인구는 2350만 정도인데 이 중 90% 정도가 한족(漢族)이다. 내몽고자치구에서도 몽골인은 소수민족인 것이다. 하지만 내몽고자치구의 몽골인들은 몽골문자를 지켰다.
소련이 무너지고 난 다음인 1992년 몽골공화국(외몽고)은 공산주의를 포기하며 탈러시아화를 추구했다. 민주화 이후 몽골인들이 발견한 것은 ‘소련은 제2의 중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몽골인들은 소련으로부터 상당한 박해를 받았다. 이 때문에 몽골은 반중과 반러를 위해 친미(親美)노선을 선택하고 몽골문자 부활을 추진했다. 이러한 몽골이 ‘롤 모델’로 삼는 나라가 친미노선을 통해 G-10 수준으로 도약한 한국이다.
얄타회담에 따라 똑같이 독립했는데 왜 몽골은 뒤처졌는가. 이것이 요즘 몽골 사회의 화두다. 몽골의 친한(親韓) 분위기는 외몽고와 내몽고를 가리지 않고 정말 대단하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몽골과 국가연합을 맺자는 다소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게 됐다. 덕분에 수천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홍산문화의 두 후예가 만나게 됐다. 또 다른 만남도 이뤄졌다. 터키와 한국의 만남이다.
역사를 잊지 않은 터키
터키는 오래전부터 한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철저한 ‘소중화’를 추구했기에 이를 알지 못했다. 터키 역시 형제국가인 한국을 발전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은 K-9 자주포에 이어 KT-1 기본훈련기, K-2 전차를 터키에 수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무기 수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이민족을 많이 다뤄봤다. 지금도 55개 민족을 국경선 안에 끌어안고 있다. 이민족을 상대하다 보면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모순을 풀어가며 동화시켜온 것이 중국이다. 이러한 힘에 무릎을 꿇은 가장 큰 이민족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이다. 만주족은 자기 말과 글을 잃고 거의 중국인이 돼가고 있다.
중국은 여진족을 굴복시킴으로써 홍산문화를 자기네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잡았다. 적봉을 지배한 마지막 홍산문화의 후예가 여진족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홍산문화를 인접한 강의 이름을 따서 ‘요하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이 합쳐진 것이 지금의 중국문명을 만들었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 펼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요하문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 중국은 원과 청이 누락시킨 다른 홍산문화 후예의 역사도 중국사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기자조선(중국은 ‘기씨조선’이라고 한다)과 부여, 모용연국의 역사도 중국사에 집어넣으려 한다. 그리고 홍산의 또 다른 일파인 위구르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과 원나라의 후손인 몽골이 독립국가로 있으므로 ‘고구려사’와 ‘원사’만은 마음대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이 두 나라와는 고구려사 원사를 공유하겠다는 뜻으로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중국이 원나라 역사에 대해서만 일사양용의 태도를 취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중국은 ‘만주에 도읍한 고구려는 중국 고구려이고 평양에 도읍한 고구려는 한국 고구려’라며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일사양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제는 서북공정이다
중국의 처지에서 본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주변 나라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대단한 행사일 것이다. 온갖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 올림픽을 치른 중국은 전 국민을 모아 대국굴기(大國·#54366;起)의 모습을 보이려고 할 것이다. 대국굴기를 위한 거대한 사전 포석이 홍산문화를 삼키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고구려사나 고조선사를 가져가려는 것으로 좁게 바라봐서는 제대로 된 대처 방안을 세울 수 없다. 한국은 국사(國史)가 아닌 동북아 관계사의 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홍산문화를 연구해 이를 고조선사에 접목시키고, 홍산문화에서 파생된 여러 나라와 한국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동북공정에 대한 첫 번째 대응책이다.
한국이 중국과 전혀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중국과 전혀 다른 문명에서 나왔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한국이 중국에 종속되는 세계관을 갖는 것은 모순이다. 북학파가 주장했듯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화이일야’의 세계관을 갖고 홍산을 연구해야 동북공정을 무너뜨린다. 한국은 한반도의 서북에 있는 홍산을 연구하는 ‘서북공정’을 펼쳐야 한다.
기자가 조선 땅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은 서운한 마음에 ‘말로만’ 기자를 조선 왕에 봉했다는 것이 중국의 ‘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다른 영역으로 망명한 사람을 자기 나라 사람인 것처럼 왕으로 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극히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역사 서술인 것이다.
이 때문에 윤내현 교수는 기자를 받아들인 고조선의 리더는 기자를 난하 부근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임명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중국 기록에 나오는 ‘기자조선’(지금 중국은 ‘기씨조선(箕氏朝鮮)’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인데, 기자조선은 단군이 이끈 고조선의 변방에 있던 한 제후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주장이다.
고조선의 열국 시대
그 후 주나라는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키다가 서기전 8세기 흉노의 일파로 보이는 견융족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 ‘도주’를 계기로 주나라 왕실의 힘이 크게 약해진다. 그러자 주나라 왕실에 종속돼 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패권을 다투는 춘추 시대가 열린다. 춘추 시대는 전쟁의 시기였으므로 무기를 주로 제작하는 청동기문화는 극성기에 이른다.
그리고 서기전 5세기 초 보다 큰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 시대로 들어가는데, 전국 시대 말기 화하족은 철제 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철제 병기는 청동 병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으므로 전쟁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화하족은 진(秦)나라로 통일됐다.
그러나 능하지역의 고조선족은 화하족만큼 큰 분열을 겪지 않았으므로, 청동병기의 개발과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철기 개발이 늦었다. 전쟁술의 발전도 더뎠다. 이러한 때인 서기전 3세기(전국 시대) 중국 연(燕)나라 장수인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고조선 땅 2000여 리를 쳐들어왔다.
그로 인해 고조선은 치명타를 입고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의 진개 군은 고조선에 대해, 주나라를 공격한 견융 세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능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자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작은 나라들이 일어나 중국의 춘추 시대처럼 패권을 다투는 열국 시대가 열렸다.
부여-백제계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 세운 동대사. 도래인이 온 후 일본 건축물은 상당히 커졌다.
이러한 열국 가운데 기자조선이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이 있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나라는 기자조선과 부여였다. 열국 간의 갈등이 계속되던 서기전 194년쯤, 진개와 같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후 신임을 받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열었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서기전 108년 철기로 무장한 한(漢) 무제(武帝)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망하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영역에 4개 군(郡)을 설치했다. 한 무제의 공격을 계기로 고조선 영역 안에 있는 다른 열국들도 철기문화를 갖추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부여-백제 계열
한4군 설치를 계기로 고조선 영역의 국가들은 내부 통일과 외적 철퇴라는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이 목표는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절대 강자로 떠올라 내부통일을 하고 한4군을 밀어냄으로써 비로소 완수됐다. 고구려는 내부통일을 하고 한나라군을 궤멸시키며 고조선의 옛 땅인 능하지역을 수복했다.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통일전쟁과 반(反)외세 전쟁을 하는 동안 경쟁에 패한 세력은 ‘일종의 무주공산’인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따라 철기문화도 들어갔다. 그로 인해 마한·진한·변한 등 철기를 다루는 나라가 갑자기 생겨났고, 이어 백제·가야·신라라는 고대왕국이 등장했다.
한반도로 들어온 세력 가운데 일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도래인들은 청동기문화 말기부터 일본으로 건너갔으므로 일본에는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거의 동시에 도입됐다.
도래인들이 건너갈 때 일본에서는 ‘조몬(繩文)문화’를 만든 신석기인들이 살고 있었다. 조몬문화는 새끼줄 무늬 자국을 새긴 듯한 토기를 만든 신석기문화다. 도래인들은 조몬문화인들을 제압하고 바로 청동기-철기문화인 ‘야오이(彌生)문화(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 사이)’를 열었다.
청동기는 돌을 자르지 못하지만 철기는 바위를 자른다. 철기의 생산력은 청동기보다 월등히 강하므로 철기 시대에는 과거에 보지 못했던 강력한 전제군주가 등장한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군주가 죽으면 후손들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봉분을 만든다. 고분(古墳)문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에서 모두 일어났다. 고분문화가 생기면서 일본에서는 천황제가 일어난다. 일본은 조몬문화 시대부터 천황제가 있었다고 주장하나, 천황제는 고분 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수도의 이름을 ‘부여’로 삼았고 한때 국호를 ‘남부여’로 한 적이 있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를 보면 유독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백제는 많이 싸웠다.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와 백제는 똑같이 ‘동명(東明)’을 시조로 모셨다는 점이다.
중국어와 한 뿌리에서 나온 티베트어
고구려는 고구려를 세운 추모(주몽)를 동명성왕으로 모시지만, 동명은 부여에서 모시던 신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에서 나온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구려족을 중심으로 뭉친 고구려가 부여 세력을 공격하면서 둘은 갈라진 듯하다. 궁지에 몰린 부여 세력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주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백제가 탄생했을 수 있다. 이러한 백제 세력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도래인은 부여-백제계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다면 한민족과 일본족, 그리고 만주족(여진족)의 문화는 능하문화-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홍산문화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어와 일본어, 만주어는 공통된 어순(語順)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언어는 몽골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어로 분류된다. 몽골어, 터키어도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반면 한국과 오랫동안 접하고 살아온 중국어 어순은 한국어 계열과 다르다. 중국어와 어순이 같은 것은 중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는 티베트어 그리고 미얀마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어와 티베트어, 미얀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기전 4000년까지 같이 살다가 갈라졌다고 한다.
몽골공화국과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 사이에 있는 알타이산맥 주변의 언어는 같은 계열이다. 람스테드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지금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밀을 재배하면서 계속 황하 중류에서 살았으나, 티베트-미얀마어를 사용하게 된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두 언어가 나뉘었다는 것이다. 유목을 한 사람들은 해발 4900m인 티베트고원으로 들어가 고립 생활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여기에서 일부가 갈려 남쪽으로 내려가 미얀마의 지배세력이 되면서 지금의 미얀마어가 탄생했다고 한다.
미얀마어와 티베트어,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를 쓰는 사람도 통역이 없으면 대화를 하지 못한다. 언어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더라도 헤어진 상태가 오래되면 단어가 크게 달라져 어순이 같아도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알타이語의 탄생 배경
그런데 한국어 계열과 어순이 같은 언어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몽골과 터키 지역에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의문과 관련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 ‘알타이어족(語族)’이란 말이다. 알타이어족은 핀란드의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존 람스테드(Gustaf John Ramstedt·1873~ 1950)가 만들었다.
터키어 계열은 터키에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터키어 계열에는 ‘타지키스탄어’를 제외한 중앙아시아의 모든 언어가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골공화국(외몽고)과 중국의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를 가르는 경계선에는 해발 4000여m대의 준봉들이 이어진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 중국어로는 ‘阿爾泰山’으로 표기)이 있다. 이 알타이산맥 동쪽에는 몽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살고, 서쪽엔 투르크어(터키어 계통)를 쓰는 사람이 살고 있다.
람스테드는 1912년부터 이 지역을 여행하며 두 언어를 비교한 결과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고, 두 언어를 알타이산맥의 이름을 따서 ‘알타이어족’으로 명명했다. 이로써 람스테드는 우랄-알타이어족에서 알타이어족을 떼내는 공적을 쌓게 됐다. 지금 러시아 알타이산맥 부근에 ‘알타이공화국’이 있는데, 이 공화국에도 알타이어계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람스테드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 무려 11년간 일본 주재 핀란드대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일본어와 한국어, 만주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세 언어가 몽골어,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해 세 언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시켰다.
몽골공화국(외몽고)과 중국 내몽고자치구 사이에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이 있다. 대흥안령산맥은 홍산문화가 일어난 적봉 북쪽까지 내려와 있다. 대흥안령산맥 서쪽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열이 있고 동쪽(동남쪽)에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좌우의 언어가 유사하다는 것을 먼저 발견했다면, 그는 이 언어집단을 ‘대흥안령 어족’으로 명명하고 이어 터키어 계열을 이 어족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
람스테드의 실수
람스테드가 대흥안령산맥 주변을 알타이산맥 좌우보다 늦게 살펴본 것이 혼란을 만들었다. 대흥안령산맥보다는 알타이산맥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고향이라는 ‘상(像)’을 만들어준 것이다. 람스테드가 활동할 당시 대흥안령산맥 서쪽인 일본과 조선(한국), 만주는 꽤 많은 사람이 살고 문화도 번성했다.
그러나 알타이산맥 좌우는 유목문화만 남아 있는 황량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발전한 곳보다는 목가적인 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적잖은 사람들은 알타이 지역을 한민족 문화의 발원지로 보려고 했다. 람스테드는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 ‘알타이어족이라는 용어를 먼저 만들었다고 하여, 알타이산맥 쪽에서 생겨난 언어가 대흥안령산맥 쪽으로 퍼져나갔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주목하지 않았다.
유목민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오르도스 청동기가 대량 출토된 황하 만곡부.
알타이는 터키·몽골어로 황금을 뜻하는 ‘알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 왕족의 상당수는 금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가졌고, 신라 고분에는 금관 등 많은 금 장식품이 나왔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일부 학자들은 신라 지배층은 황금의 산인 알타이산맥 쪽에서 이동해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알타이산맥은 몽골의 서쪽에 있는데, 몽골은 적봉지역보다 높은 해발 1000여m의 초원지역이다. 그리고 알타이산맥을 지나면 동유럽까지 끝없는 평원이 이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적으니, 말(馬)만 있으면 1000~2000㎞도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다. 초원은 바다보다 이동하기가 좋은 공간이다.
서기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 지금의 이란 북쪽 지역에 말을 잘 다루는 스키타이족이 일어나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했다. 스키타이족은 금 공예술이 발달했고, 청동기 제작술이 뛰어났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서기전 480~420년쯤)는 스키타이 지역을 방문한 후 기록을 남겨놓았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스키타이문명에 주목해, 스키타이족은 최초로 청동기문명을 연 종족으로 이해됐다. 이란 북쪽도 대평원 지대이기에 유목 문화가 존재했다. 스키타이 청동기는 말방울 등 기마민족의 특성을 띠는 것이 많았는데 이 문명은 초원을 통해 산지사방으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르도스 청동기 만든 흉노족
화하족은 황하 중류에서 서기전 16세기부터 초기 청동기문명인 ‘이리두문화’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夏)나라다. 이리두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와 함께 석기를 주로 사용하고 청동기를 장식품 등 보조로 사용하는 동석(銅石) 병용기 문화였다. 그리고 상(商)나라가 등장해 보다 발전한 청동기문화인 ‘이리강문화’를 열었다. 중국의 청동기문명은 상나라 때부터 본격화했다.
이러한 이리두문화에 이어 주(周)나라가 가장 발달한 후기 청동기문명을 열고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황하는 화하족이 포진한 낙양 인근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상류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내몽고자치구의 ‘오르도스(鄂爾多斯)’시에서 ∩자 모양으로 꺾인다. 오르도스는 ∩ 모양으로 꺾이는 황하 바로 남쪽에 있기에 황하에 푹 둘러싸인 형태다.
오르도스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시가 나온다. 오르도스 시를 감싸고 황하가 돌아가는 것을 ‘황하 만곡부(彎曲部)’라고 한다. ‘황하 만곡부’ 또는 ‘오르도스’에서 서기전 8세기 무렵 제작된 유목민계 청동기가 많이 발굴됐다.
오르도스는 알타이산맥의 동남쪽에 있는데, 초원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오르도스와 알타이산맥 사이는 먼 거리가 아니다. 화하족이 만든 중국 청동기의 특징은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긴 가설이 스키타이에서 일어난 청동기문명이 초원길을 통해 오르도스와 능하지역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이 등장한 배후에도 알타이 지역이 한민족의 원류일 것이라는 시각이 작용했다.
사람이 살려면 반드시 물과 소금이 있어야 한다. 알타이 지역 북동쪽인 바이칼호 부근은 물이 많다. 바이칼 호수에는 알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지금도 고대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알흔섬을 중심으로 한 바이칼호 일대에서 한민족 문화가 일어나 동남쪽으로 전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생겨났다. 이 또한 알타이를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알타이는 원형을 보존한 곳
알타이 지역은 대표적인 과우(寡雨)지역이다. 그로 인해 고비사막이라는 아주 황량한 곳까지 생겨났다. 이런 곳에서는 오래전에 도입된 문화가 존재할 수는 있어도 독자적으로 문화가 일어나긴 힘들다. 그렇다면 알타이산맥을 한민족 문화의 원류로 볼 것이 아니라 대흥안령산맥을 뿌리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대흥안령산맥 바로 남쪽이 해발 600여m의 적봉지역이고, 이곳에는 1만여 년 전부터 대단한 신석기문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청동기문화도 잉태했으나 건조한 곳으로 바뀐 탓인지 서기전 8세기 이후에는 유목문화의 특성만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유목문화가 초원길을 따라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확산됐을 수도 있다.
적봉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찍 말을 가축화했을지도 모른다. 말이 있었다면 이들은 적봉이 건조해지기 전에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갔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갖는다면 적봉은 하가점 하층문화-능하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정주문화’를 전파하고,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 상층문화를 거쳐 몽골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서쪽으로는 유목문화를 전파한 중심이 된다. 홍산문화를 일으킨 적봉이 한민족 문화의 원류이자 일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온 세력이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는 흉노의 분파인 훈족이 동유럽까지 진출한 것과, 돌궐에서 갈려 나온 투르크가 소아시아로 진출해 터키를 세운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소아시아에는 이란계 사람들이 이룬 스키타이문화가 있었다.
스키타이족도 초원길을 통해 사방으로 문화를 전파했다. 그렇다면 오르도스는 스키타이와 하가점 상층문화가 만난 접점일 수 있다. 이란계 문화가 동쪽으로 영향을 준 증거로는 중동에서 일어난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와 영하(寧夏)회족 자치구까지 전파된 점을 들 수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유럽인의 피를 전파한 것은 예니세이 강 상류인 미누신스크(Minusinsk) 지역에서 발굴된 카라스크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카라스크에서 발굴되는 돌무덤은 유럽의 돌무덤과 흡사하다. 중앙아시아는 적봉에서 일어난 홍산문화와 이란에서 일어난 중동문화, 미누신스크에서 일어난 유럽문화가 섞인 곳이지, 한국 문화의 원류일 수는 없다. 종족에게 언어는 종교나 혈통보다 우세한 것이므로 중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홍산문화로 봐야 한다.
홍산은 동북-중앙亞의 뿌리
홍산이 동쪽에 있는 한국어와 만주어 일본어, 서쪽에 있는 몽골어와 투르크어 계통에 영향을 줬다면, 알타이어족 대신 ‘홍산어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람스테드의 예를 따른다면 ‘대흥안령어족’이란 말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홍산문화가 널리 쓰이고 있으니 ‘홍산어족’이 더 나을 듯하다. 이러한 주장은 단국대 몽골학과 이성규 교수 등이 이미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능하문화가 바로 고조선 문화라는 주장은 능하문화는 물론이고 하가점 하층문화, 홍산문화가 발굴되기 이전에도 있었다. 1931년 단재 신채호는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이 원고는 훗날 하나로 묶여 ‘조선상고사’라는 책이 됐다)’ 첫머리에서 ‘조선족과 흉노족은 우랄어족에 속하는데,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鮮卑)·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다’라고 적시했다.
신채호의 주장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을 필두로 한 조선 북학파의 주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북학파는 소중화(小中華)를 추구한 성리학자들과 대립했다. 소중화를 표방한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의 후예인, 중국의 아류로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북학파는 실학을 중시해 중국이 중심이고 나머지는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중국과 오랑캐는 똑같다는 ‘화이일야(華夷一也)’라는 세계관을 갖고자 했다.
북학파의 ‘화이일야’ 세계관
화이관을 따르면 한국은 항상 중국에 눌려 지내야 하는데, 이러한 사관이야말로 동북공정이 바라는 바다. 그러나 중국이 오랑캐로 표기한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었고 앞으로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역사관을 가진다면, 동북공정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화이관은 노예적인 역사의식이고, 화야일야는 황제적인 역사관을 갖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물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신석기문명의 주역을 3황(皇)5제(帝)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적봉지역에서 일어난 거대한 신석기문명인 홍산문명에 대해서는 한 자의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홍산문명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 쪽 기록에 흐릿한 형태로 남아 있다.
화하족이 홍산문화의 후예를 만나 기록을 남긴 것은, 청동기 문화가 활짝 핀 서기전 7세기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후 2500년 이상, 홍산문화의 후예를 그들과 다른 역사 존재로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 홍산문화의 후예가 살던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홍산문화를 화화족 문화에 접목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홍산문화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동북공정을 부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품는다면 홍산문화의 A to Z를 추적해야 한다. 고대사회에서 종족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따라서 한국인의 역사관은 반도를 극복해야 한다. 이제 홍산으로 뛰어들어가 보기로 하자.』
(출처; 신동아 2008년 09월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775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