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9.1 〈(1)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1.11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 본문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1. 통사 1.9.1 〈(1)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1.11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
대야발 2024. 2. 18. 10:51《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9.1 2010년 1월 14일 한겨레 〈[한민족의 시원, 만주]<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법륜 스님
『[한민족의 시원, 만주]<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환인 한나라, 환웅 배달, 고조선, 고구려 터전
신라는 정통성 없고 조선은 사대로 역사 ‘망각’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 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에 탄생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라는 것은 본 정부가 따로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임시로 정부를 세웠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나라냐, 민이 주인인 나라냐에 따라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라는 것은 왕이 주인인 국가다. 고종황제 때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단체이고, 신문일까? 많은 사람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선은 언제부터 청나라에 예속되었을까?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법륜스님이 좋은벗들이 지난해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상 캡쳐. 박종찬 기자
일제의 식민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지배한 것이다. 그 전에 조선은 청나라와 싸워서 졌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 인조는 1636년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다 항복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도두’의 예를 갖추었다.<편집자>) 그래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외교권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는 의미로 독립 연호를 썼다. 황제국가인 중국만 연호를 쓰는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쓰지 못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
대한제국의 모체는 조선왕조다. 조선왕국은 어디가 모체일까? 고려왕국이 모체다. 조선왕국이란 것은 빈 땅에 세운 것도 아니고, 원시적인 사회에 세운 것도 아니다. 나라가 원래 있었는데 주인만 바뀌었다. 왕만 바뀌었다. 왕의 성이 바뀌었다 해서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조선과 고려는 결국 같은 나라다. 그러면 고려왕국은 어디를 계승했느냐?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로 지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자신을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다. 해모수는 누구인가? 부여를 세운 사람이다. 고주몽이 바로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엔 연대가 너무 멀다. 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고주몽은 말은 자신이 부여왕족이라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여를 세운 해모수는 자신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부여에서 단군 조선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배달 나라, 한나라
단군조선은 환웅을 계승했고,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민족의 기원이 된 ‘배달나라’다. 인기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은 우리 상고사의 주인공인 ‘환웅’을 연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고조선이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인데 후기에 조선이 또 생겼으니 구분하기 위해 옛날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니 단군조선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자신을 환웅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인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환인이 더 근원이다.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린 나라는 한나라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한’은 한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 환인의 한나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그것은 없다. 그러니까 민족사가 한나라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여기까지다.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지는 것이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한나라가 시작이다.
열국, 또는 부여시대
다시 한번 우리의 민족사를 되풀이해본다면 제일 먼저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성립한 나라를 쭉 내려오면 빠진 나라들이 많다. 예, 맥, 신라, 백제, 가야, 옥저 등이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
고조선의 말기에 가면 여러 제후국이 세워진다. 작은 부족들이 다 독립해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부여였다. 부여시대가 열국시대다. 부여가 중심이지만,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포진했다. 옥저, 예, 동예 등이 있었고, 옥저에도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하는 식으로 여러 개가 있다. 또 맥이라는 나라도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후손들이 이동해 한강 이남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게 한이다. 한도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시대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열국시대의 중심 나라인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계승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원부여족이 있었고, 거기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지기 전 부여를 원부여라고 하고 갈라진 뒤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다. 이처럼 동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 아래 삼한 가운데 마한은 백제로 흡수되었고,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나오고, 가야가 일어났다.
열국시대의 많은 나라는 결국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5국 시대로 정리가 되었다. 5국 시대에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역사의 주류,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여와 백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세 나라가 심한 마찰을 빚었다.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 않았던 가야나 신라와는 마찰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가 위험에 처할 때 고구려가 도와주기도 했다.
3국 시대, 그리고 발해가 빠진 통일신라시대
5국 시대의 후기에 가면 동부여는 고구려에 합병이 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이 돼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이 천하를 통일해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요녕성 환인시 북동쪽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첫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터와 병영터, 우물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조현 기자
남북국시대 또는 2국 시대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해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임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고구려인보다 말갈인이 많다. 그렇다고 말갈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국가인데 구성원으로 보면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엔 왕만 고구려 사람이면 그 나라를 고구려라고 보았다.
발해는 명백히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더 커졌다.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2배나 넓혔으니, 인구구성상 말갈족의 비중이 높아진 것뿐이다. 정리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민족사로 볼 때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 2국 시대, 양국시대라고 본다. 3국 시대에서 2국 시대로 갔다고 봐야 한다.
고려의 ‘다물사상’ 계승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고려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사람들이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구전이나 문서로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다는 게 없다. 고려와 고구려 사이의 나라가 신라와 발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한 것이다. 신라만 계승해도 그렇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의 절름발이다.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의 뿌리가 유지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웠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 한 무제가 침입해 땅을 뺏겼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고토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우리가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고구려의 전쟁은 침공이나 침략전쟁이 아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뺏은 게 아니라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고구려의 ‘다물 사상’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물사상을 계승했다.
서희의 강동 6주 담판이 의미하는 것
서희와 소손녕의 ‘강동6주’ 담판.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해 새치 혀로 강동 6주를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고려는 북진정책을 펴서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했다.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이 다 거란 땅이라고 생각했으니 고려의 북진은 자기 땅을 침공한 것으로 봤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침공해오자 서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새 치 혀로 강동 6주를 인정받았다.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했다.
거란 입장에선 혹 때려다 혹 붙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영토문제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요와 고려가 국교를 맺었다. 그것으로 영토분쟁은 일단락됐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했으면 요나라 땅을 침공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럼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고려의 역사의식과 조선의 자발적 사대주의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
반면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란족도 강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더 강성했다. 요나라나 금나라만 해도 고려와 형제의 예를 맺고 화친했는데, 원나라는 너무 세서 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시절 복속된 민족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자고 하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는 투철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이렇게 강했던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약소국 비슷하게 전환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모두 약소국가로 전락했다. 즉 자발적 사대를 취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현상이 빚어졌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다시 정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사를 상고사부터 다시 되돌아보면서 웅대했던 역사의식을 되찾자는 것이다. 법륜 스님, 정리/박종찬 기자』
(출처; 한겨레)
1.9.2 2010년 1월 22일자 한겨레 기사 〈[한민족의 시원, 만주] <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중국보다 앞선 문명, 하늘 열고 평화국가로
[한민족의 시원, 만주] <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
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명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환인의 한나라가 어디쯤 있었겠느냐?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설은 여러 가지다. 바이칼 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환인 시대에 이어 환웅이 세운 배달 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유물과 결합시켜 보면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보인다.
환웅세력 이동 추정도. 바이칼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그래서 요즘은 멀리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이(발해만 연안지역 인근)에서 기원했을 것이란 설도 제기된다. 그 당시에 수만 리를 이동해 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환인의 한나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그냥 옛날 기록으로만 말한다면 하늘나라, 신의 나라로만 인식되었다.
▶환인 시대, 민족의 근원이지만 시작은 아니다
환웅 무리가 이동해 온 경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환웅은 “천손이다.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수준도 토착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옷도 잘 입으니까 원주민들은 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예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화사적으로 보면 좀 더 선진 문명을 가진 지역에서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국 역사와 비교해 설명해 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나라의 역사를 따지면 200년밖에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역사까지 따지면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을 같은 나라로 보진 않는다. 뿌리는 같지만, 엄격히 다른 나라다. 영국에 뿌리를 둔 나라는 캐나다, 뉴질랜드도 있다. 그런 것처럼 한 나라에 뿌리를 둔 나라와 민족은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동아시아 인종 분포도. 한나라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따라서 한나라가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민족사의 시작을 한나라부터 잡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환웅이 이동해 와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연, 신시를 연 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이를 개천(開天)이라고 한다.
▶고대 동북아의 중심지, 발해만 연안의 ‘신시’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은 동북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요하강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아래 대릉하가 흐른다. 환웅이 내려와서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시’를 건설했다고 할 만한 지역이다. 신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신시(新市)라고 할 수도 있고,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시를 세웠다는 말은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보통 선진 부족이 후진 부족에 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주로 정복 국가를 세운다. 토착민을 다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고 영토를 뺏어서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평화국가였다. 토착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국가를 세우면서 ‘선진문명을 가진 부족이 후진문명의 지역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일이다. 나중에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몇 천 년 전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게 홍익인간 정신이다.
환웅시대 신시 추정도.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래픽 문석진
두 번째, 재세이화(在世理化)다.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성경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하늘이란 것은 선진문명이다. 그 법치, 문명, 도덕을 원시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통치철학이다. 이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치란 곧 하늘의 법도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다. 이렇게 신시가 탄생했다.
▶환웅시대, 청동기 문명으로의 전환
이 시대의 문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웅이 신시를 건설할 때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왔다고 했다. 당시 씨족, 부족이 고작 몇 십 명, 몇 백 명 단위였으니 엄청나게 큰 무리다. 이 사람들은 원시 채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명을 가졌다. 벌써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법률,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고,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경을 했다는 증거다. 원시부족이 아니고, 초기 국가의 형태를 띤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징표가 있었다. 그게 ‘천부인’(天符印)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로 청동기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초기에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도구였다. 워낙 귀해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제사 지내는데 썼고, 제례를 지내는 제사장의 징표였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였다가 시대가 흘러가며 국왕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화되고 제사장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늘날 무당이 굿을 하면서 방울과 칼을 흔드는 풍습은 당시 제사장이 지녔던 천부인의 징표에서 유래한다.) 청동기를 가졌다는 것은 천손이라는 징표이고 주변보다 월등한 문화를 가졌다는 상징이다.
환웅시대 천손이라는 징표가 천부인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그래픽 이규호
▶상고사 기록에 얽힌 비밀
환웅시대는 1대 환웅천왕으로부터 18대 거불단환웅까지 1,565년이나 지속했다. 18명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인당 80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딱 18명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이름이 18명이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끝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중간에 확실히 행적 있는 사람만 기록에 남는 것이다.
먼 훗날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27명의 왕을 다 기억할 수 있나? 처음의 이성계와 끝의 고종은 기억할 것이고,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정도만 기억할 것 아닌가. 예컨대 사료가 다 불타고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다고 하면 다 기록을 못 하고, 이성계가 나라 건국한 것 좀 쓰고, 태종 좀 쓰고, 세종 좀 쓰고, 세조 때 쓰고, 중간에 빼먹고, 영조·정조 좀 쓰고, 나머지는 지나간다. 이게 세월이 더 흐르면 태조와 고종만 남는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는 자료가 다 없어진 후니까 환인 시대에는 환인 한 사람, 환웅 시대에는 환웅 한 사람만 쓰고, 단군시대에는 단군 한 사람만 쓰고…. 그럼 환인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 아들이 단군이고, 그럼 환인은 3천 년 살아야 하고, 환웅은 천오백 년 살아야 하고, 단군은 2천 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나라가 3대가 된 거다. 비유하자면 고주몽 아들이 왕건이고 왕건 아들이 이성계라는 식으로 상고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웃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 속 이야기로만, 후대 사람들이 지어 낸 과학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환웅시대의 영웅, 14대 치우천왕
환웅시대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14대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다. 이 치우천왕은 청동기를 가지고 제기로만 쓴 게 아니라 무기로 썼다.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만들고 전쟁에 나가니까 돌 창 들고 싸우는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황제가 백전백패했다고 기록했다. 청동 투구를 썼으니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다. 싸울 때 불이 나고…. (쇠가 부딪히니까 불이 났다고 봤을 것이다.) 그 당시엔 천하무적이었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 투구와 청동기 무기. 환웅시대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은 앞선 청동기로 중국 황제와 싸워 백전백승했다고 전해진다. 조현 기자
그리고 이때 이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천 즉 하늘을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누구에서 유래한 것일까? 개천절, 홍익인간·재세이화를 단군의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이 아니라 환웅천왕이다.
▶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단군시대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상.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곰을 섬기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환웅시대에 선진 천왕족들이 결국은 토착민들의 여자, 토착 귀족의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긴 자손들은 아버지는 천왕족인데, 어머니를 보면 천왕족이 아니다. 같은 천왕족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천왕족만 왕이 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왕족이고 어머니가 토착민인 자손들도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부족장들은 순수 천왕족은 없었다. 또 배달 나라가 부패하면서 주변 부족장 중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단군이다. 아버지는 천왕족이지만 어머니는 곰족이라고 했다. 이는 곰을 신으로 섬기는, 여신으로 섬기는 부족의 어머니를 둔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듯, 단군도 이런 식의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어아악·조천무…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형성되다
단군왕검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패한 것을 새롭게 일신했다. 수도를 아사달로 옮기고, 환웅천왕의 신시를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웠다.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꿨다. 그렇게 단군의 조선 나라를 세우고, 배달 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을 <배달유기>라 한다.
환웅시대에는 문자가 나왔다고 한다. 사슴의 발자국 무늬를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 ‘녹도문’이라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녹도문을 더 발전시켜 한글의 원형인 36개의 가림토 문자를 썼다. 이 문자로 배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어아악’을 부르고, 춤은 조천무를 추었다. 제례 음악과 제례 춤이 생겼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은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문명의 쇠락과 상고사의 유실
이런 시대(상고사)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앞섰고 앞선 문명을 가졌다. 역사의 법칙이란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은 선진문명이 점점 쇠퇴하고, 변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명이 나중에 번성하는 것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중심은 몰락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 상고사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문명이 쇠락하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중국 쪽 문명이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게 중국의 한나라다. 한나라가 등장할 땐 이미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문화수준은 우리가 높았지만 문명이 쇠락할 땐 무력이 약해진다. 신흥강국은 경제력과 무력이 강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와 중국의 문명 수준이 비슷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최근 1천년 동안은 우리가 거꾸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흘러갔다가 도로 흘러오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는 가깝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근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였는데, 최근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유적이 만주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환웅, 단군 시대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문명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는 우리 민족 상고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요하문명전이다. 최근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조현 기자
▶중화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뿌리는?
우리는 왜 중국에 대해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졌을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옛 역사,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역사가 다 없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이 맺혀 있어서 고구려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역사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래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사료를 일부 복원했다. 그런데 발해도 이민족에 멸망했다. 특히 발해역사는 깡그리 유실되었다. 우리 스스로도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러나 신라 역사에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부여시대 얘기가 없다. 신라는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 역사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고사가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이 들어왔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옛 역사를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그러나 고려도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100년 가까이 싸우면서 굴복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다. ‘중국은 역사가 오래된 위대한 국가’라며 스스로 사대를 취했는데, 옛날 고기를 보니까 우리 역사가 더 길고 문명도 더 높았다는 것이 나오므로 이걸 중국이 알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금서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금서 목록목록에 있는 도서 등을 싹 뽑아서 갔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고 보니 남은 책이라곤 삼국사기와 몇 권의 역사 책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후를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이전의 해모수의 부여와 단군의 조선, 환웅의 배달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게 없다.
▶일본강점기 실증주의 사학의 대물림
일본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겼는데, 교수들은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 역사 공부했던 사람들은 일본 교수들이 서명한 합격 논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교수들은 역사는 실증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증주의를 하려고) 우리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중국의 기록에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책를 찾아서 그 책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삼국지’란 것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의 이야기다. 삼국지 가운데 ‘위지동이전’이라는 것이 있다. 위나라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 기록된 걸 보고, 우리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연구하는 식이다. 중국 책에서 뽑아서 우리 상고사를 정립하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형편없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사를 우리가 배우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 이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상고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바뀌기 어려운가? 그 선생의 제자가 선생이 되고 그 제자가 또, 선생이 된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교과서를 쓰는데 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물줄기에 있다. 이것이 상고사를 다시 정립하는 데 있어 아직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그래서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고, 이 상고사가 정립이 돼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고립, 한국은 자기 상실…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아니라 바로 잡자는 것이고, 과대하자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새기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신감이 있고 그래야 일본역사도 중국역사도 다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인정해 주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정체성이 있어 당당하면 상대방의 역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세계화하려다 와해 흡수되는 경우와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다 고립되는 경우다. 지금 보면 북한은 고립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남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둘 다 문제다.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흡수되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사관의 정립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 생생한 현장 중심의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 정리 박종찬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0452.html#csidx24d2732765132bb96b3755ed9d4b054
1.10 2015년 12월 11일자 한국NGO신문 기사 〈민족저력의 뿌리 상고사 복원 방향!〉
박정학 기자
『[한국NGO신문] 박정학 기자 = 사람이 얼이 빠지면 온전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나라의 혼이 역사라면 그 역사 전개의 원동력은 겨레 얼이다. 따라서 국사에서 겨레의 얼이 빠지면 그 나라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
겨레의 얼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 나타난 500만 년 전부터 민족과 국가를 형성한 약 5,000년 전까지, 인류역사의 99.9%에 해당하는 선사시대에 형성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는 얼이 형성되는 선사시대의 역사가 너무 가볍게 처리되고 있다. 새로 집필을 시작한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 겨레 얼의 형성과 내용이 포함되는 올바른 상고사로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12월 11일 오후 2시부터 국회의원회관 제1회의실에서 있었던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겨레 얼이 빠진 국사교과서’와 17일 동북아역사재단의 상고사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민족저력의 뿌리 상고사 복원 방향’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보인 엄청난 민족 저력
우리 겨레는 지난 세기에 35년간 일제의 악독한 식민 지배를 받았고, 국토를 폐허로 만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이 되어 ‘구제불능’이라는 평가를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북 군사대치와 이데올르기 대립,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얼빠진 민족’ ‘못난 민족’이라는 역사 교육을 받아왔다.
▲ 2002 월드컵 응원 장면 © 민족NGO편집장
그러면서도 반세기만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2002 월드컵과 2010년의 G20 정상회의 등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IMF 사태도 조기에 극복했다. 최근에는 국가부도설 등 세계 경제가 매우 어려운 가운데서도 연예 분야는 물론 우리말과 글, 우리 음식, 새마을 운동 등으로 한류가 확산되면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어려운 나라들에게 경제적ㆍ문화적ㆍ군사적 지원을 하는 나라가 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다수의 세계적 석학들이 정신문화의 시대인 21세기에는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될 것이며 우리나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이것이 저력 있는 우리 겨레의 본 모습이다.
선사시대의 시대구분 기준을 바꾸어라!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생겨났고, 인류는 약 500만 년 전 지구상에 살기 시작했으며,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후에도 오랜 시간 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을 전후해서 정착생활을 시작하였고, 약 5,000년 전을 전후하여 법을 만들어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고 역사를 기록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여기서 민족이나 국가 형성 이전, 즉 기록을 남기지 않은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 선사시대가 인류가 살아온 전체 기간의 99.9% 이상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민족이 형성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이 시기에 성숙되었으며, 겨레의 얼도 그 기간에 형성되어 민족을 형성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만큼 선사시대 역사인 상고사는 민족사의 뿌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선사시대는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는 매우 미개했던 시대라고 가르치고 있을 뿐 그들의 사유체계에 대한 기술은 거의 없다. 겨레의 얼이 형성되는 4,995,000여년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처리해버린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단군의 고대조선 건국까지도 신화라고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 교육부는 교육과정에서 ‘단군신화’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상고사에 관한한 이 정도로 한심한 지경에 있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에서는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신시를 거쳐 단군의 고대조선이 건국되며, 그 과정을 이어주는 천부인과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이 환인으로부터 연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윤내현은 이를 서비스의 인류사회발전단계설과 연결시켜 <표1>과 같이 정리했다.
여기서 비고란은 필자가 윤내현의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며, 단군사화의 시대를 윤내현과 좀 다르게 본다. 한인시대를 붙박이 생활 시대로 보아 마을 사회로 보고, 환웅시대를 고을나라 시대, 환웅+곰녀시대를 민족 형성에 따른 국가사회로 본다. 시대구분을 이렇게 할 경우 최초의 사회조직이 환국이나 신시가 될 수 있다.
겨레 얼의 원형이 있는 민족 창세신화를 살려라!
앞에서 보았듯이 500만 년 전에 인류사 탄생하였고, 70만 년 전에 구석기 시대가 시작이 되었으며 1만 년 전에 붙박이 생활을 시작했으며 5,000년쯤 전에 민족이 형성되고 기록을 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무리사회와 구석기 시대로 분류되어온 최소한 1만 년 전 이전은 신화의 시대로 봐야 한다.
김헌선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사유방식은 살아 있는 창세신화를 통해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는 ‘민족 문화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므로 매우 소중하다.”고 했으며, 서유원은 “신화는 선인(先人)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무형의 재산이며, 한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정신문화이다. 이 중에서 고대인의 원시 사유를 가장 강렬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세신화(創世神話)다.”라고 하여 창세신화를 중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는 우리 상고사에서 가장 먼저 복원시켜야 할 대상이다.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창세신화가 들어 있는 『환단고기』와 『부도지』 『규원사화』 등이 제도권에서 위서 시비에 걸려 있으므로 신화학자들은 무가(巫歌)에서 찾아서 연구하고 있다.
필자는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신화가 신화소도 풍부하면서 무가보다는 더 신빙성 있는 창세신화로 보아 요약해서 소개하면서 교과서에도 실리기를 청원한다.
선천의 시대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후천의 운이 열려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여 성(聲)과 음(音)이 섞인 음상(音像)을 이루었다. 마고가 실달대성을 끌어당겨 천수의 지역에 떨어뜨리자 여기서 나온 기(氣), 화(火), 수(水), 토(土)가 빛과 서로 어우러져 낮과 밤,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금수를 살찌게 길러내니 온 땅에 할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네 천인과 천녀가 만물의 본음(本音)을 나눠서 관장하다가 마고가 네 천인과 천녀에게 명하여 네 천인과 천녀가 결혼하여 각각 3남 3녀를 낳았다. 이 12남 12녀가 지상 인류의 시조가 되어 향상을 관리하니 역수가 조절되었다. 성중의 모든 사람은 품성이 순정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가 밝았는데, 지소를 시작으로 포도를 먹은 ‘오미(五味)의 변’ 이후 자재율(自在律)이 깨어지면서 지상낙원인 마고성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천성(天性)을 상실했으며, 수명이 감소되었다. 그 이후 사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수련을 통해 이를 복원하려는 노력(復本)을 계속하게 되었다.
민족의 이름, 형성시기, 범위를 복원하라!
상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민족의 형성의 역사다. 개인의 출생신고 때처럼 민족의 이름과 생일, 태어난 곳을 밝혀야 한다.
1998년도 판 『중학교 국사』 까지는 “우리 민족의 이름이 한민족인데, 배달민족이라고도 불린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2008년 판에는 우리 민족의 명칭에 대한 설명은 없어지고, ‘한민족’이라는 단어가 2회만 나왔다가 현재의 교과서에서는 민족의 이름이 사라지고 ‘우리 민족’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물론 「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 『고등학교 한국사』라는 교과서 제목, 한복과 한식 등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많은 용어에 ‘한’을 쓰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이름이 ‘한’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교과서에서도 민족의 이름을 복원해야 한다.
▲ 부도지 © 민족NGO편집장
현재 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형성을 고대조선과 동시(윤내현, 신용하), 고대조선 중ㆍ후기(한영우, 이종욱), 서기전 30세기 말(북한), 고려초(최남선), 고려 북방개척 시(이기동), 세종대왕 때(손진태) 등 다양하게 보고 있으며, 교육부 지침 및 교과서에서도 “선사 시대에 민족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다져졌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민족 문화의 바탕을 이룬 사실에 유의하라.” “고려 시대에 이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음에 유의한다.”는 등 애매한 지침만 있고, 민족의 형성시기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나 기술이 없다. 그러니 발해의 후손이 우리 민족사에서 없어져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민족의 범위에 대해서도 매우 불투명하다. 2008년 이전의 교과서에서는 <그림3>과 같은 고조선 세력범위 지도에 ‘동이족의 분포지역’이 그려져 있었다. 한반도 남쪽 지역은 고조선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동이족에는 포함시키고 있는 점에서 설명이 없어도 ‘동이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는 것 같았다.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동이족이라고 부른 적이 없으므로 우리 민족의 이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밝혀라!
‘민족’은 “역사적 공감성에 의해서 특정 성원들 사이에 운명공동체적인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집단”이라는 진덕규의 말처럼 긴 역사 과정에서 혈통과 민족전통을 중심으로 씨족, 부족, 종족으로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동체’로서, 법이나 제도로 규정되거나 눈에 보이는 경계를 가진 유형적 공동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구체적인 실체는 있는 자연공동체라고 필자는 인식하고 있다.
이런 경우 민족은 국가라는 유형적 조직과 직접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다. 4국으로 나뉘어 있었던 우리의 역사에서도 보았고, 현재도 남북이 나누어져 있듯이 하나의 민족이 세 개의 나라를 만들 수도 있고, 여러 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형성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있다. 서양적으로는 국가가 형성되고 이를 공고화하기 위해 민족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국가보다는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고, 민족을 형성하는 원동력인 민족의식이라는 단결력을 바탕으로 국가가 성립되며, 이렇게 성립된 국가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1990년대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형성된 국가들로부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학자에 따라 ‘민족’의 구성요소는 언어, 종교, 경제 등 여러 가지를 다르게 내세우고 있지만, ‘마지막 한 가지’ 이것만 있어도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을 ‘귀속의식’이라고 보는 점은 공통적이다. 동질감에서 우러나는 이 귀속의식을 일반적으로 ‘민족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민족의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필자는 여러 종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려면 비슷한 자연환경과 기후 조건하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공통적으로 가지게 된 우주관이나 자연관, 생활관 등의 사유체계라고 본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뭉치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원동력이 있어 민족이 형성되고, 이 민족이 바탕이 되어 국가가 형성된다는 관계를 밝혀야 한다.
겨레 얼의 원형을 밝혀야 한다!
민족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민족의식이고 그 민족의식이 겨레 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이 겨레 얼은 민족 형성의 원동력이 되고, 그 민족이 형성한 국가의 각종 제도나 생활문화 등을 만드는 바탕이 되므로 그 민족 역사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따라서 ‘겨레 얼’이 민족 형성까지의 상고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하는데도 국사 논문이나 책에서 겨레 얼에 대해 기술한 글을 찾기 어려우며, 우리 교과서에도 이런 설명이 거의 없다.
▲ 고조선의 세력 범위 © 민족NGO편집장
겨레 얼은 긴 선사시대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므로 그 원형은 민족 창세신화에 들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본 마고신화에서 겨레 얼을 찾아보면, 8여(呂)의 음만 있을 때는 형상이 없다가 율(律)과 어우러져 음상이 생기고 음상과 빛과 기화수토 네 요소가 어우러져 만물이 생긴다는 내용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창조론이 아닌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만물이 생성된다는 조화론으로서 ‘어울림’을 기본으로 한다. 수련을 통해 원래 마고성에 있을 때와 같은 신성(神性ㆍ天性)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수증복본(修證復本) 천지인 합일(天地人合一ㆍ神人合一) 사상과 연결되는 ‘큰 어울림’ 사상이다. 따라서 이것을 너와 나를 경쟁의 관계로 보는 서양 사상과 달리 ‘우리’로 어우러져야 함을 강조하는 겨레 얼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단군사화에서도 겨레 얼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전체적인 구도에서 하늘 사람인 환웅과 땅을 상징하는 곰, 그 사이에서 탄생하는 사람을 하나의 세계로 연결시킴으로써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천지인(天地人)이 매우 현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둘째,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사유체계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해석은 일본식 해석이므로 ‘사람 사이를 크게 더한다’는 의미로 싸우지 말고 ‘우리’로 어울리라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셋째, 환웅이 받아온 천부인(天符印) 3개는 천부경(天符經)과 연결이 되므로 넷째는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는 데서는 현실적인 인간세상에서의 실천의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윤내현은 “인간세상을 하느님의 아들이 탐낼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보았고, 내세(來世)가 아닌 현세에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지상낙원을 꾸며 신과 사람이 공존ㆍ공영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 목표였다.”고 하는 해석에서 현실 인간 세계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우리 겨레 얼의 한 가닥을 찾을 수 있었다.
천부경은 창세신화와 단군사화와도 연결이 된다. 환인이 제천행사 후 등 백성들이 모일 때 임금이 강론을 했다고 전해지는 내용으로서 말로 전해져 내려오다가(口傳之書) 환웅 때 녹도문으로 기록이 되었고, ‘단군 때 전자로 비석에 새겼고 신라의 최치원이 서글 81자로 갱부작첩(更復作帖)하였다고 전해진다. 말 천부경-녹도문자 천부경-전자(篆字) 천부경-서글 천부경 모두 아직 명확하게 해석이 되지 않고 있으나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당시의 인구 팽창 상황과 천부경 강론 상황을 고려해보면 대의(大義)는 짐작이 간다.
빙하기가 끝나고 오랜 기간의 기온 상승으로 인구가 많이 늘어나 식량 부족으로 인한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마을사회에서 고을나라로 사회조직이 확대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무리를 데리고 새로운 거주지로 이동한 환웅이 백성 교화에 사용했고, 제사 지내고 단합의 수단인 술을 나누어 마신 후 강론을 했으며, 그런 후 오가(五加)에게 지시한 말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늘(또는 자연)의 이치라는 의미가 담겼으므로 단군사화의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이념과도 통해야 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필자는 천부경의 큰 의미를 “하늘의 이치대로 ‘서로 싸우지 말고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큰 하나 됨’, 즉 집단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화합을 강조한 가르침으로 본다.
제천행사의 취지를 제대로 밝혀라!
제천행사는 환인 아니면 늦어도 환웅 시절부터 행해진, 어울림을 실천한 대표적 행사로, 음주가무, 유희, 화백, 국중대회 등을 통해 신바람이 나게 하여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됨을 위한 행사로 자리매김할 경우 요즘의 제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사라질 것이다. 두레나 마을 등과 함께 화합과 연결시켜 해석하여 가르쳐야 한다.
너무 많은 분량을 줄이려다 보니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국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선사시대, 즉 상고사에서 우리 겨레 얼의 뿌리가 되는 창세신화를 꼭 복원하고, 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민족 저력의 바탕이 신바람과 역동성, 큰 하나로 어우러지는 어울림 이치에 있음을 알게 하는 역사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박정학 기자』
(출처; 한국NGO신문
http://www.ngo-news.co.kr/sub_read.html?uid=81548)
1.11 2019년 8월 7일 문화일보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 ‘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②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③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④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⑤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⑥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신석기 혁명으로 농업 시작되자
古한반도에 태양숭배 밝족 형성
한강·대동강 뻗어 나간 ‘한족’
풍요기원 햇빛살무늬토기 사용
우리에겐 ‘빗살무늬’로 알려져
요동 반도로 이동한 ‘예족’은
호랑이 토템 삼고 철광석 활용
요서 평야지대 정착했던 ‘맥족’
玉器 쓰며 제의문화 발전시켜
3부족이 결합해 ‘고조선’ 건국
인류 최초 독립 문명 탄생 원천
고(古)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해)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새’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밝’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밝’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밝’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한’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한’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한’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밝’족 또는 ‘한’족으로 호칭되다가 ‘밝’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한’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한’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새’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새’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알’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만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층), 약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한’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한’족은 ‘밝’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새(鳥)’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새’다”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새’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새’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다. ‘한’족은 ‘밝’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한’족의 무덤양식이었다.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밝’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예(濊)’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의 ‘東(동,쇠)’쪽으로 이동한 ‘밝’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쇠’(東)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쇠’를 ‘濊’ ‘예’ ‘예’ ‘穢’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예’(Ye)로 발음하게 됐다.
‘濊’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제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예’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예’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예’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범’을 주토템으로, ‘새’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貊(박)’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곰(熊)’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새’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밝’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貊’(박, 백, 맥)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박’ ‘백’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맥’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貊’(맥)을 ‘곰’과(科)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예’ ‘맥’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맥’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밝’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맥’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神)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곰’을 주토템과 ‘새’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夏)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의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밝’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맥’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곰’ 상과 ‘밝’족 및 ‘한’족의 토템인 ‘새’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곰’ 토템과 ‘새’ 부토템을 가진 것은 貊(맥, 박)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①‘한’족의 한강문화와 ②대동강문화 ③ ‘맥’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와 ④ ‘예’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한’ ‘맥’ ‘예’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과 사회과학원은 맥족의 요서 지방 ‘홍산문화’ 하나를 갖고서도 ‘요하문명’론을 정립하고 있는데, 그보다 선진한 고한반도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그리고 요동의 예족문화와 요서의 맥족 홍산문화(요하문명)를 모두 통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조선문명’을 인류 최초 독립문명의 하나로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화일보 7월 17일자 28면 4회 참조)』
(출처;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701032812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