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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연해주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발굴 작업을 진행 중인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블라디슬라프 볼딘 박사는 지난 12년간 발굴 내용을 종합한 결과, 염주성은 성·사찰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식 표현을 번역한 성·사찰복합체란 곡식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사장인 사직(社稷)과 유사한 개념으로 성 내부시설이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러시아 측은 1980년 염주성 북서지역에서 대규모 사찰터를 발견하고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2007년부터 총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가 발해 염주성 사찰터에서 발굴한 내용을 토대로 제작한 금당복원도와 우물평면도, 사찰터평면도의 모습./자료제공=동북아역사재단 러시아..
발해의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됐습니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7년 7-8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과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을 조사한 결과를 9월 18일 발표했습니다. 트라이츠코예 고분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1천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무덤의 조성시기가 발해의 존속연대(698-926년)인 8-10세기로 추정돼 러시아 학계에서 발해와의 관련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문헌자료 등 2차 자료를 통해 발해의 최북단 영역을 추정하는 학설은 제기됐으나 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유물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

1949년에 길림성 육정산에서 발해국의 제3대 王인 문왕(文王)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1980년에 黑龍江省 화룡현에서 발해국의 제4대 王인 문왕(文王)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1991년에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발해 왕릉,2004~2005년 길림성(지린성吉林省) 화룡시(허룽시和龍市) 용해촌(룽하이촌龍海村) 용두산(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해 3대 문왕(文王)의 부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지(墓誌)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발굴됐습니다.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묘비 이외에 석사자등이 발견되었고, 정효공주 무덤에서는 발해 시기 생활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12폭 벽화 등이 발견되었습니다.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는 아버지 제3대 문왕이 57년간 재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대조영이 세운 발해(渤海.698~926)는 2백28년간 모두 네차례나 수도를 옮겼다. 그것도 건국한 지 1백년도 안된 기간에 이뤄졌다. 모란강 상류 동모산 지역(현 지린성 둔화현)에 도읍을 정한 발해는 740년께 서고성(지린성 허룽현)으로 첫 천도를 한다. 그리고 다시 755년 상경성(헤이룽장성 영안현)으로 옮겼고, 또 785년엔 두만강 부근의 팔련성(훈춘)으로 이전했으며, 793년에 다시 상경성으로 되돌아가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삼았다. 755년 상경성으로의 두번째 천도는 당시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킨 안록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옮긴 것이다. 발해 천도에 대해 연구한 임상선(교과서문제연구소 소장) 박사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기에 천도하..
윤재운교수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10대 선왕(宣王)과 13대 대현석(대현석(大玄錫) 대에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발해의 영역은 대체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고 있었으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송기호교수는 발해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 넓이는 최소 50만㎢, 최대 6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한반도 면적을 22만㎢로 어림잡을 때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고, 통일신라의 영역과 비교하면 발해는 3.8~4.9배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도 1.5~2배 넓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

30년간 발해문명권을 연구해온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선양을 출발하여 8000년 유적인 차하이(査海·사해)~싱룽와(興隆窪·흥륭와) 탐사에 나서는 길.중국인들이 ‘중화 제1촌(차하이)’, ‘화하(華夏) 제1촌(싱룽와)’이라 하여 중국 시조의 마을로 떠받드는 곳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발해문명. 즉 우리 민족뿐 아니라 중국·일본까지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이 된 발해문명의 여명을 열어젖힌 곳이 아닌가. # 8000년 전의 용(龍) 다링허 상류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차하이 유적에서 확인된 돌무더기 용의 형상이다. 주거지와 주거지 사이에서 발견됐으며, 용 신앙의 시원으로 평가된다. 뻥뻥 뚫린 채 방치된 수풀이 무성한 발굴 흔적 너머로 인공 울타리가 보인다. 가..

발해는 거란에 항복한 직후에 연해주 일대와 함경도 일대에서 복국(復國)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남아 있었다. 929년에 대연림은 후발해국을 세워 화북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938년에 정안국이 압록강 하류에서 건국됐다. 995년에 올야국(兀惹國)이 건국됐으나 금방 멸망했다. 1029년에 흥요국은 요와 전투를 벌이면서 고려와도 교류했으나 결국 다음해 멸망했다. 1116년에는 고영창이 대원국(대발해)을 세웠다. 발해인은 거의 200년 가까이 복국운동을 한 특이한 사람들이다.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2021. 7. 12. 09:05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7) 발해의 복국운동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중국 지린성..

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925년 윤 12월,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발해는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다. 넓은 영토에 자연환경이 거칠고 종족들도 다양하므로 관리 체제가 느슨했다. 임금의 잦은 교체로 정치에 혼란이 생겼고, 잦은 천도(수도 이전)로 재정이 악화됐으며, 백성은 마음이 떠난 채로 나라의 위기를 방관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티고 전격적으로 무너진 발해..다양한 종족 구성에 잦은 임금 교체로 정치 혼란 거듭2021. 7. 5. 09:01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6) 발해의 멸망 발해 영토였던 러시아 ..

다음백과에 따르면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년)에 당과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패강(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를 당과 신라가 나누어 통치한다는 비밀협약 - 나당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치열한 전쟁을 전개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연결하여 신라를 협공하는 형세였고,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의 배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신라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신라는 고구려·백제가 침입할 때마다 당에 구원 사절을 파견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입장에서 고구려·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648년(진덕여왕 2) 두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적 결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두 나..

한반도와 인접해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했던 옛 간도와 만주땅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 동북 3성 인구가 10년간 1100만명 넘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2일 중국 CCTV 등 중국매체에 따르면 국가통계국이 전날 발표한 인구 센서스 결과 동북 3성 상주인구는 2010년 말 1억952만여명에서 지난해 말 9851만여명으로 10%나 줄었습니다. 중국 전체 인구 늘었지만, 동북 3성은 인구 급감중국 당국, 동북 3성 산아제한 전면 완화 검토 중국 인구가 10년 전 13억3972만여명에서 14억1178만명으로 늘었지만, 우리 동포가 주로 거주하던 동북 3성 지방 인구는 1100만명이나 급감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중국 상하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중국인 가족.[EP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