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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전 박사는 “반대로 고려 왕실이 원 제국의 황실과 통혼하여, ‘훈신(勳臣), 세족(世族) 및 나라를 봉 받은 군주(封國之君)’로 대우 받은 것은 심왕(瀋王) 왕고(王暠)와 고려왕 5명을 포함, 모두 6명이며,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한 1명의 황녀, 7명의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1명의 평민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라며 “이런 관계는 몽골제국과 다른 그 어떤 나라와의 관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4)- 전원철 박사 인터뷰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신의 징벌 전(戰) 칭기스 칸은 ‘세계 정복자’라기 보다 ‘세계 징벌자’ -결국 이렇게 1300년 동안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을 푸셨다는 건데, 지하에 ..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3)- 전원철 박사 인터뷰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

⊙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 3대 ‘大武神王’에서 유래, ‘칭기즈 칸’은 ‘震國王’ 즉 ‘발해왕’이라는 의미⊙ ‘몽골’은 ‘말갈(靺鞨)’, 즉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이라는 의미⊙ 몽골족의 역사 다룬 《집사》 등에 나오는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발해 武王 때 발해와 羅唐연합군의 전쟁을 다룬 것⊙ 칭기즈 칸의 조상 엘 콘은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둘째 아들 일한⊙ 《칭기스의 서(Da’ftari-Cingiz-nama’)》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황금의 칸’)’은 金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金幸 ■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06 2015 MAGAZINE 월간조선 ..

몽골·만주·반도 등에 걸친 세 민족은 체질인류학적으로 얼굴과 몸매·골격이 아주 비슷하다.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이 유학생 3000명을 포함해 3만~4만 명에 달하지만 외모에서는 한국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몽골반점이 공통적으로 90% 이상 나타나고, 유전자 염색체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설화나 ‘까치가 울면 정다운 손님이 온다’는 말이 몽골에도 있다. 몽골인도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를 한다. 제기차기·공기놀이·씨름 등의 민속놀이 역시 유사하다. ■ “몽골 시조 알랑 고아는 고구려 주몽의 딸”중앙선데이, 2009.05.31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대만에 거주하는 몽골인 사학자 한촐라 교수가 1990년 한국에 도착해 한 말이다. 한촐라 교수의 제자..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757년에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 해준 위구르는 당나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이 840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에게 멸망 당하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반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와해되었다. 924년에 키르기스 돌궐족을 예니세이 초원지대로 쫓아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 만주의 거란족이었다. 926년에 요(遼)에 의한 발해의 멸망은, 만주 역사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버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요사(遼史)가, 거란족의 요는 선비족의 후예로, 고조선의 옛 땅에서 나왔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 팔조(箕子八條) 가르침의 유풍(流風)과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생..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 [한민족의 시원, 만주]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1-1..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