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후기신라 고고학 (1) 사천왕사터 발굴 - 녹유신장벽전과 명문편 본문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
<27>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경주 낭산(狼山)은 예부터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神遊林)이 있던 상서로운 곳이다. 20일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을 거쳐 선덕왕릉에 다다르자, 낭산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숲길을 10분쯤 내려갔을까.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폐사지 한 곳이 보였다.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다.
2006∼2012년 7년에 걸쳐 발굴이 이뤄진 사천왕사에는 금당과 목탑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과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동아시아 최강국 당나라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문무왕이 온 백성의 염원을 담아 부처의 도움을 갈구했다.
○ 신라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갑옷을 입고 칼을 쥔 채 악귀를 엉덩이로 깔고 앉은 신장의 위세가 당당하다. 커다란 코에 부리부리한 눈은 언뜻 봐도 위협적이다. 얼굴만 봐도 악귀들이 감히 불법(佛法)을 넘보지 못할 것 같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벽塼·녹색 유약을 칠한 신장 조각 벽돌)은 승려 양지가 남긴 수작으로 손꼽힌다.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제작하기도 한 양지는 ‘신라의 미켈란젤로’로 통한다. 녹유신장벽전은 조각가 이름과 제작 시기(679년)가 모두 확인되는 신라 불교조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09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 특별전에서 공개한 녹유신장벽전 복원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된 벽전 조각과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조각이 90여 년 만에 결합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2006년부터 발굴을 맡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윤근일 당시 소장(70·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과 윤형원 학예연구실장(51·현 국립부여박물관장), 최장미 학예연구사(38·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차순철 전문위원(49·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의 노력 덕에 가능했다.
“당초(唐草·덩굴) 무늬가 살짝 보인다!”
2006년 10월 12일 사천왕사 서쪽 목탑 터 발굴 현장. 계단 돌이 쓰러져 생긴 틈 사이로 차순철이 조각상을 발견했다. 목탑의 기단 면석을 장식한 당초 무늬 벽전과 녹유신장벽전 조각이었다. 파괴된 계단 돌이 벽전 쪽으로 쓰러진 건 발굴팀엔 행운이었다. 흙더미 속에서 계단돌이 감싸준 덕에 녹유신장벽전이 토압에 휩쓸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유구 조성 당시 유물의 본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유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어서다.
사천왕사 발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굴 전 녹유신장벽전은 탑 안에 봉안돼 있었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6년 발굴에서 목탑 기단의 계단 옆에 녹유신장벽전이 서 있던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이것은 탑 면석(面石)이었음이 밝혀지게 됐다. 조사 결과 목탑 기단부 네 면에 걸쳐 24개의 신장벽전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 신장상…사천왕 vs 팔부중 논쟁
녹유신장벽전에 조각된 험상궂은 신장들의 정체는 뭘까. 사실 이 부분은 고고미술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학계 일각에서는 사천왕사의 명칭과 관련지어 신장상은 사천왕(四天王·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을 묘사한 걸로 봤다. 그러나 ‘사천왕사 탑 밑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팔부중(八部衆·육욕천 등에 머물며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2008년 7월 3일 사천왕사 동쪽 목탑 터 발굴 성과가 주목된다. 이곳 기단부 계단 옆으로 세 종류의 녹유신장벽전이 나란히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쪽 목탑에서 나온 녹유신장벽전도 이 세 가지(A, B, C)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의 출토 위치도 조성 당시 그대로여서 신장벽전의 배치 순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 목탑 기단은 ‘A-B-C-계단-A-B-C’ 순으로 구성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녹유신장벽전 3개가 한 세트임을 감안할 때 신장상의 정체는 사천왕이나 팔부중이 아닌 제3의 존재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불교조각 연구자인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탑의 가장 아래인 기단에는 신격(神格)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신왕상(神王像)이 조각됐을 걸로 본다”며 “그보다 위인 사천왕상은 목탑 안에 봉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1)
당나라 침략의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사천왕사.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낭산)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선덕여왕릉, 그리고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성한 망덕사지 등 1400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한꺼번에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출처; https://www.khan.co.kr/article/200812051654395)
■ "사천왕사 출토 '차임진' 등 명문편 5개는 신문왕릉비가 틀림없다"
“신문왕릉비가 틀림없다.”
지난 1976년 경북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 남단의 해발 53m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천왕사터의 당간지주 동쪽에서 ‘차임진’(次壬辰) 명문 비석편이 나왔다.
또 2012년 12월 역시 사천왕사터 서귀부 부근에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비석 2편이 나왔다. 이밖에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비석편 중 ‘명왈’(銘曰) 명 1편(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소장)과 ‘장’(<金+將>)명 1편(국립경주박물관)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5편의 비석이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의 능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예사 연구자인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오는 20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하는 정기발표회에서 사천왕사 출토 비석 조각의 서풍, 필법, 각법을 분석한 논문(‘신라 사천왕사지 출토 비편의 새로운 이해’)을 발표하면서 이들 비편 5개가 신문왕릉비임을 논증할 예정이다.
신라 능묘비는 무열왕릉비, 문무왕릉비, 무열왕 차남인 김인문비, 성덕왕릉비, 흥덕왕릉비가 조각 형태로 현존한다. 신문왕릉비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 명문 조각 전후면. “‘무궁하며, 그 덕은 열 가지’로 해석되는 첫 행은 신문왕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정현숙 위원의 논문에서
정 위원은 먼저 비석 건립 시기를 알려주는 간지인 ‘임진’(壬辰)에 주목했다. 신문왕이 세상을 떠난 해(692년)가 바로 임진년이라는 것이다. 정 위원은 ‘세차(歲次)’가 간지를 따라 정한 해의 차례를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차(次)’ 위에는 ‘세(歲)’ 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 위원은 승하한 신문왕의 뒤를 이은 효소왕(재위 692~702)이 선왕을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추정했다. 효소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도 지었다.
그런데 효소왕의 동생이자 역시 신문왕의 아들인 성덕왕은 706년(성덕왕 5) 황복사 삼층석탑 속에 다시 사리, 아미타불상,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면서 아버지 신문왕, 형 효소왕, 어머니 신목왕후의 명복을 빈 바 있다.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명문을 보면 “신문대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가셨다”로 해석되는 명문(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神文大王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 있다. 이 명문의 ‘십선(十善)’과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비편의 ‘십덕(十德)’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나왔다.|정현숙의 논문에서
이 탑의 해체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사리함 뚜껑의 명문에 탑의 건립 경위와 유물의 성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2~3행을 보면 ‘신문대왕…천수3년임진7년7월2일 승천’(神文大王 ……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비석에서도 보이는 신문왕의 몰년 ‘임진(壬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위원의 설명이다.
정 위원은 “사천왕사지 비편의 ‘임진(壬辰)’ 아래에도 부왕인 신문왕의 죽음을 언급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장방형의 구양순풍 해서로 쓴 ‘차임진’ 글씨는 가늘면서 힘차며, 후대의 대부분의 사적비나 선사비에 쓰인 행서의 필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왕의 위엄을 보여 주는 듯하다. 정 위원은 “정간(井間·바둑판 처럼 그은 획)과 구양순풍 해서는 능묘비의 특징 중 하나이므로 이것도 원비를 능비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전했다.
정 위원은 또 2012년 말 서석교 상부에서 출토된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 비석 2편에도 주목했다. 비석 2편은 무열왕릉비와 문무왕릉비처럼 우측이 사선으로 잘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비의 첫 행으로 추정된다. 두 편이 따로 출토되어 돌의 색깔은 조금 다르지만 붙여보면 원래 한 편임을 알 수 있다.
정 위원은 “‘무궁하며, 그 덕은 열 가지’로 해석되는 첫 행은 신문왕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명문으로 이같은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사리함기 2~3행에 “신문대왕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시키고 공을 이루고는 천수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가셨다”로 해석되는 명문(’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神文大王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昇天)‘이 있다. 정 위원은 “이 명문의 십선(十善)과 비편의 십덕(十德)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해석했다.
또 정 위원은 “1991년 소장처(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 입수된 ‘명왈(銘曰)’명의 경우 비석의 후면에 왕의 덕을 칭송하는 명사(銘辭)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명사는 비문의 후반부에서 비의 주인을 칭송하는 운문체 시이다. ‘명왈(銘曰)’ 이하에는 신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시구가 쓰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정 위원은 “그런데 이 ‘명왈’ 명 비편의 소장기관은 이 편을 ‘문무왕릉비’로 기록하고 있다”면서 “석질과 양식은 물론 기필의 방필법 등으로 미루어보면 경주박물관의 ‘문무왕릉비’와는 전혀 다르다”고 단정했다. 오히려 ‘명왈’명 비석편이 ‘차임진’과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 비석편과 같기 때문에 ‘신문왕릉비’의 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金+將’ 명 비석에도 주목했다. 기필의 각도, 예서의 필법이 남은 수필의 필법이 위의 3점과 동일하여 같은 비의 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위원은 따라서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비석편 중 ‘차임진(次壬辰)’명은 건비 시기가 692년경임을, ‘무궁기덕십야(無窮其德十也)’명은 비의 주인이 신문왕임을, ‘명왈(銘曰)’명은 신문왕을 위한 명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동일한 양식과 서풍을 지녔고 명문의 내용까지 더하면 다섯 비편을 ‘신문왕릉비’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2)
<자료출처>
(1)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동아일보 (donga.com)
(2) https://v.daum.net/v/20190417030028792
<참고자료>
https://www.khan.co.kr/article/200812051654395
https://www.khan.co.kr/article/200812121710295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470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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