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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후기신라

1. 후기신라 (4) 892년 ~ 936년 후삼국시대

대야발 2024. 10. 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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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 통일전쟁 뛰어든 후백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37) 후백제의 발전과 해양활동 능력



후백제 상선이 표류했던 대마도 북쪽 해안.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을 벌였다.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통일은 실제로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통일을 지향해 왔을까?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지나치게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 

 

 

신라의 분열과 해양세력들의 등장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해갔다. 또한 거듭되는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권력 쟁탈전에서 소외당한 세력들은 재야세력으로 힘을 기르고, 지방에서 태동한 자생적인 호족세력들이 발호했다. 특히 해안지방에는 상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소 해양세력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훗날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과 그의 동맹이 된 김포·풍덕·파주·인천·안산·남양(화성시)·평택·당진·나주 등의 해양세력들이 있었다. 금강 세력인 견훤과 우군인 섬진강 하구(순천) 세력, 그리고 동해중부의 명주(강릉) 세력 등도 있었다. 그 밖에 전라도 압해현의 ‘능창’처럼 지방해적들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잔여세력들은 대부분이 벽골제로 강제이주를 당했지만, 일부는 일본 및 중국으로 망명했고, 해적으로도 변신했을 것이다. 

 

 

이 무렵 신라 해적들이 활동을 재개해서 일본의 공물선들을 약탈했고, 큐슈 북부 해안과 대마도를 몇 차례 공격해서 동아지중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는 해양호족들이 우후죽순처럼 대거 등장하고, 신라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해군력을 동원한 전쟁이 벌어졌다 (윤명철, 《한국해양사》)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 시대 가장 강력한 해양세력은 견훤(甄萱)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방어를 맡은 군인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불만과 옛 백제땅이라는 민심을 활용해 달포 사이에 규모가 5000여 명에 달했다.

 

 

892년에는 자신을 왕이라 칭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에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 

 

 

후백제는 927년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했다.

또 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겼다.

그 후 주도권을 상실하고,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 935년에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했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결국 1년 후인 936년에 고려의 10만 대군과 벌인 낙동강 상류(구미 지역)전투에서 대패한 후에 멸망했다.

 
 

경상도 산골 출신의 하급군인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킨 힘과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견훤은 야망이 컸고, 지도력과 군사작전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해서 민심을 이용할 줄 알았고, 의자왕의 복수와 백제의 계승이라는 지역의 정체성과 갈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양활동능력을 보유하고, 적합한 지역을 수도로 선정한 일이었다. 
  
후백제 수군과 고려 수군의 서해 해전들 

 

수도인 전주의 배후이면서 외국과 교류하는데 적합한 장소는 영산강 하구지역이었다. 견훤은 901년에 대야성공격이 실패한 후에 금성(나주)의 남쪽을 공격했다. 그러자 903년에 후고구려의 궁예는 젊은 강화만 해양세력인 왕건(해군대장)을 파견하여 영산강 하구를 급습해서 금성군과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아 ‘나주’로 이름을 바꿨다.

 

 

궁예는 909년에 왕건을 나주에 다시 파병했고, 이때 오월국에 파견하는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하고, 진도와 고이도 등을 점령하였다. 또 910년에는 견훤이 나주성을 포위하자 수군을 파견했고, 914년에는 왕건을 시중직에서 해임한 후에 나주로 내려보냈다. 이렇게 벌어진 영산강 하구 쟁탈전은 결국 후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그후 한동안 후백제는 특별한 해군활동이 없었는데, 932년에 들어서자 돌연 활발해졌다. 9월에 수군으로 고려의 핵심인 예성강에 침입해 지금 NLL(북방한계선) 일대인 연안·배천·정주의 선박을 100척이나 불사르고, 근처인 저산도의 말 300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다시 10월에는 해장군인 상애(尙哀)를 보내 공략했다. 후백제 수군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왕건은 6년간 해로가 막혔다고 한탄했다. 삼국유사의 거타지조에는 신라가 아찬인 양패를 중국에 보냈는데, 백제(후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에서 가로막는다는 소문을 듣고 궁사 50명을 뽑아서 따르게 했다. 배가 혹도(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십 여 일 동안 머무르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 

 

 

후백제의 국제관계와 이용항로
 

후백제 및 고려와 교류한 오월국 수도인 영파시에 복원한 고려사관 건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후백제는 해양능력을 국제관계에 최대한 활용했다. 10세기에 들어와 중국은 남쪽의 오월국, 북쪽의 후당, 거란 등으로 분열돼 적대관계를 맺었고, 후삼국 또한 적대관계인 상황 속에서 국제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각 국가들은 해양을 이용해 긴박한 외교와 무역을 벌였고, 심지어는 해상제어와 봉쇄까지 실행했다.

 

후백제는 896년에 절강성 지역인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909년에도 사신을 파견했지만, 광주의 염해현 부근에서 후고구려의 수군에게 나포됐다. 918년에는 사신과 함께 말을 보냈고, 반대로 927년에는 오월국에서 사신을 파견했다. 925년에는 산동지역에 있었던 후당과 교섭했고,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을 벌였다. 일본과도 교섭해 사신을 대마도에 보냈는데, 이는 신라를 압박하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29년에는 대마도에 표류한 상선을 도수가 돌려보내자, 사신을 보내 답례했다. 

 

 

그렇다면 후백제는 어떤 항로를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활동했을까? 많이 사용한 항로는 동진강 만경강 금강의 하구와 변산반도 해안을 출항해 곧장 바다로 나가 사선으로 청도만이나 산동반도 남단의 여러지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황해중부 횡단항로이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위도(부안 앞바다)에서 바람을 이용해 배를 띄우면 중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필자는 2003년에 뗏목 '장보고호'을 타고 이 항로를 무리없이 재현했다. 또한 경기만과 일부 남부지방의 여러 항구를 출항해서 백령도를 경유해 산동반도의 여러 지역에 도착하는 항로도 사용했다. 또 군산·김제·부안·영광·해남· 강진 등 전라도의 해안을 출항해 사단으로 항해한 후에 강소성과 오월국의 수도인 영파 및 항주만 등의 해안으로 도착하는 황해남부와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사용했는데, 이미 신라의 승려, 상인, 사신, 유학생 등 활용하던 항로였다. 그리고 남해의 서부해역을 출항해 대마도를 경유하거나 통과물표로 삼으면서 큐슈북부에 도착하는 남해항로를 사용했다.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는 내륙 항구도시 

 

군산 앞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 방문해서 안전을 기원하는 선유도 오룡사당.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이러한 항로의 중심에 전주가 있었다. 전북 해안지역은 고대에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을 했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되는 입구였다. 변산반도의 죽막동 유적에서 발굴된 중국계, 왜계의 유물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동진강을 통해서 정읍·김제·고창 등 평야지대로 쉽게 연결되고, 군산지역을 통해서는 금강 하구로 연결된 하계망을 이용해서 전북과 충남 일대의 깊숙한 곳까지 교통이 가능하다.

 

백제 등이 사용했던 만경강은 ‘한천(漢川)’을 통해서 전주 시내까지 연결된다. 전주는 이른바 해륙교통과 수륙교통의 합류점이었고, 해양능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견훤은 전주의 이점을 파악하고 수도로 택한 것이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그런데 놀랍게도 전주사람들은 전주가 40년 가까이 후백제의 수도였으며, 사신선들이 발착했던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던 사실을 모른다.  

 

 

정체성이 부족하면 집단은 자체 분열하고, 외부 집단과 경쟁을 벌일 때는 쉽게 파멸한다. 때문에 정체성을 찾고, 왜곡을 바로 잡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갈등처럼 손쉽게 악용돼서 집단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후백제’의 등장과 발전은 우리 역사의 분열을 심화시킨 것일까, 아니면 통일을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일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1)

 

 

900년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성립 당시 판도

(출처; https://namu.wiki/w/%ED%9B%84%EC%82%BC%EA%B5%AD%EC%8B%9C%EB%8C%80)

 

 

 

 

918년 왕건의 고려 국호 회복 직후 판도

(출처; https://namu.wiki/w/%ED%9B%84%EC%82%BC%EA%B5%AD%EC%8B%9C%EB%8C%80)

 

 

 

 

 

미래를 내다본 통일 군주 왕건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38) 후삼국을 통일한 해양세력 왕건

 

 

 
고려의 성균관 건물.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역사 속에서 집단과 국가는 항상 생성과 붕괴, 분열과 통일의 변증법을 반복한다. 우리는 과거 민족국가라는 의식이 강했고, 항상 통일을 지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여 년 만에 재발한 후삼국이라는 분열상태를 최종적으로 통일이라는 위업을 실현한 인물은 왕건이다. 무려 40여 년 가까이 벌어진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어떻게 역사에 등장했을까.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실패, 지방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의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의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국제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역사에서 증명됐고, 현실에서 보듯 내부분열이 심각할 때 외부 세력들이 강력하거나 통일되면 반드시 이용당하거나 침략당한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나라처럼 민족의 통일과정에 외세로서 간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상황이었고, 북쪽은 발해와 거란이 운명을 걸고 충돌 중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는 이러한 국제환경을 통일의 승자가 되는데 활용했다. 

 

 

포용력과 협력을 아는 왕건의 성격

 

왕건의 릉에서 발견된 왕건 청동상.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시조신화’에 따르면 왕건은 하늘과 바다의 만남, 산신과 해신의 결합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또한 통일에 효력을 발휘한 능력이자 궁예와 견훤이 못 갖춘 장점은 포용성 강한 성품과 거시적인 세계관이다.

 

 

신흥 고려는 국력이 강한 편이 아니었고, 왕건의 정치력과 군사력도 호족세력이나 부하들을 압도할 수준에는 못 미쳤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파악했고, 권력의 독점과 오만이 아닌 권력의 공유와 인품으로 통일을 추진했다. 밖으로는 경쟁자들과 불필요한 갈등과 전투를 회피했고, 안으로는 인내와 포용심으로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궁예의 부하로 입문한 직후부터 연전연승을 거둔 그가 이미 광기를 보인 궁예의 관심술과 칼날을 벗어났다는 점은 매우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임을 알려준다. 더구나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추대로 고려를 세운 사실은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927년에 견훤은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잔악한 짓을 했다고 기록됐다. 하지만 왕건은 멸망 직전인 신라를 우호적으로 대했고, 마치 신라의 복수전처럼 후백제와 대구 팔공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포위됐다가 신숭겸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왕건을 지켜본 신라인들은 이미 고려의 백성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그는 무려 29명에 달하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들을 부인으로 뒀다. 이러한 혼인정책을 추진해서 강력한 지방세력들을 군사적인 충돌, 희생 없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분점하고, 통일의 실질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심지어는 통일 완료 후에도 경순왕에게 딸인 낙랑공주를 부인으로 줬다.

 

 

적이었던 견훤은 물론이고, 끝까지 저항한 아들인 신검도 살려줬다. 이러한 행동과 정책들을 분석하면 그는 군사지향적이고 야심만만하며, 반란을 일으킨 인물치고는 드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위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해양력과 해양정책을 토대로 통일과 외교에 성공 

 

또한 왕건이 성공한 비결은 해양활동의 역할과 해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용했다는 점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지중해 서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경기만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작제건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내륙 하항도시인 개주(개성)를 비롯해 정주(풍덕), 염주(연안), 백주(배천) 4개주와 강화 등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서부, 강화도가 만나고, 황해와 한강하류와 예성강이 합쳐지는 소지중해에서 성장한 해상호족이었다.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는 해상세력이 물류체계를 장악한다면 경제력과 정치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해륙 및 수륙교통의 요지다. 

 

 

왕건은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 통일을 추진하는데 해양호족들을 최대로 활용했다. 첫째 부인인 신혜왕후의 아버지인 유장자(유천궁)는 한강하구와 강화도가 만나는 정주에서 성장한 해상이었다.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의 아버지인 오다련은 영산강 하구에 기반을 둔 해상세력이었다. 어쩌면 장보고 새력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국가외교와 해양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창한 당성군이 있는 남양만의 홍유, 당진(면천)에 기반을 둔 박술희와 복지겸 세력들, 임진강 하구의 파평 윤씨, 한강 하구의 공암(양천) 허씨, 안양천의 금천 강씨(강감찬의 아버지), 셋째 부인의 아버지인 충주 유씨 세력들, 그밖에도 여러 해양세력들이 왕건의 전력이 되었다.

 

 

그는 903년 3월, 해양호족들과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남부로 내려가 나주 지역과 인근의 10여 군현을 빼앗았다. 909년에는 해군대장군으로서 나주를 지켰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했다. 910년에는 70여 척의 배에 2000여 명씩 싣고 후백제를 원정했다. 왕건 세력이 초기의 열세를 뒤집고 후백제에게 최종적으로 승리를 한 배경에는 ‘백선장군’, ‘해군대장’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의 강력한 수군력이 있었다. 

 

또 하나, 국제환경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해양을 외교전에 활용했다. 923년에 강남의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또한 답례를 받았다. 북쪽의 후량·후당·후진 등 화북의 나라들에게 사신을 자주 파견했고, 특히 후당은 925년을 시발로 짧은 기간에 8번이나 보냈을 정도였다. 후백제의 해상방해를 극복하며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사용한 해양능력 때문에 가능했다.

 

 

시대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는 해양의 중요성과 해양력의 강화가 국가발전의 토대라는 사실을 확신한 것이다. 이후 고려는 해양활동 능력을 바탕으로 군사적인 활동은 물론,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외교, 국제무역, 국내의 조운 등에 활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문화적으로 성숙했다.


   
정체성과 사상의 중요성, 미래를 내다보는 통일군주 

 

 

원래 개성시 판문군에 있었던 불일사 5층탑.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왕건은 신흥국인 고려의 정체성과 사상, 그리고 미래의 국가발전 정책까지 해결하려는 지도자였다. 북쪽에서 동족인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취약한 국력의 운명을 걸고 군사적인 능력이 검증된 요나라와 직접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는 발해를 구하는 모험을 포기했지만, 대신 계속해서 내려오는 발해 유민들을 수용해서 거주지를 마련했다. 아울러 고려인과 혼인을 추진했으며, 벼슬을 줬다. 그뿐만 아니라 거란을 적대국으로 인식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고,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둬 죽게 했다.

 

이는 왕건의 단호한 자세와 고려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국제적으로 선언했고, 북상해서 청천강 하류에서 영흥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나라의 국시, 즉 후대의 임금들이 추진할 국가발전 정책의 대강을 발표했다. 이 것이 훈요 10조이다. 그 가운데 제 7조는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 민심을 얻어야 한다’이다.   

 

 

936년 후백제 함락 직전 판도

(출처; https://namu.wiki/w/%ED%9B%84%EC%82%BC%EA%B5%AD%EC%8B%9C%EB%8C%80)

 

 

만약 통일이 필요한 작업이라면, 큰 상처와 실패라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추진할만한 가치가 있고, 시도해볼 만한 상황이 도래한다면 궁예·견훤·왕건의 성격과 정책을 비교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후발주자였고, 조건이 불리했던 왕건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실현시킨 특별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군사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과 국제질서와 시대상황을 파악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것은 포용성과 인간주의, 정치가로서의 거시적인 세계관과 미래 정책까지 고민하는 역사적인 인식이다. 왕건, 그가 한민족의 통일 모델로서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00621080103943

 

 

 

(2) https://v.daum.net/v/20200628082802600

 

 

 

 

 

<참고자료>

 

 

 

 

폐허가 된 한반도 중심..궁예와 서태지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daum.net) 2019. 10. 12. 

 

 

군사분계선에 있는 ‘궁예도성’… 남북 공동발굴조사 이뤄질까|동아일보 (donga.com)2018-05-09 

 

 

‘궁예 꿈’ 60년 침묵 깨다 < 학술 < 문화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kado.net)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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