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니경부터 앱 도서관까지..서울국제도서전

2011. 6. 16. 08:05

 

[앵커멘트]

1,200년 전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부터 오늘날의 스마트폰 속 앱 도서관까지, 우리 출판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17번째를 맞은 서울국제도서전, 이승은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1,200년도 더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도 신라 후기 희귀한 기록 문화재입니다.

판각 1,000년을 맞은 초조대장경을 재조대장경과 한 눈에 비교할 수 있고, 인쇄 체험도 가능합니다.

개인 기록을 가지고 오면 직접 전자책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앱 도서관도 부스를 차렸습니다.

성우들이 읽은 오디오북을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폰 앱 도서관에 기증하게 됩니다.

[녹취:김영준, 서울국제도서전 집행위원]

"출판은 사람의 생각을 바꿉니다. 이번 도서전은 세계 출판 문화의 정상에 있던 우리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2차원인 책이 3차원으로 바뀌는 팝업북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호기심을 끕니다.

팝업북을 만드는 직업인 '페이퍼엔지니어'들의 창조력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팝업북의 조상격인 무버블북도 만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멘토 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신진 작가 정유정 씨 등 베스트셀러 작가에서부터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등 다양한 인문서 저자가 독자와 소통의 시간을 갖습니다.

17번째를 맞은 서울국제도서전에는 23개 나라 570여 개 출판사가 참여했습니다.

[녹취:사이드 알쿠바이시, 아부다비 문화 담당 공무원]

"한국 아동도서는 교육적이면서도 재미있습니다. 읽으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일요일인 오는 19일까지 계속되는 서울 국제도서전은 남녀노소 모두가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행사입니다.(1)

YTN 이승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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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기자임종업
  • 수정 2007-11-01 19:54 등록 2007-11-01 19:54
무구정경의 복원 전(위)과 후(아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석가탑에서 나온 묵서지편(墨書紙片)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의 관계에 적실하다.

그 동안 무구정경은 석가탑이 조성된 서기 751년에 탑 안에 넣은 것으로 간주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기려져왔다. 그런데 묵서지편 판독 결과 △석가탑이 고려 초인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 해체 보수한 사실 △그 당시 무구정경을 새로 넣었다는 의미로 읽히는 문구가 확인되면서 세계 최고의 지위가 위협받게 생겼다. 만일 통일신라때 것을 다시 넣은 게 아니라 고려 때 새로 넣은 거라면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는 770년께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한테로 넘어간다. 그동안 곁다리로 취급되던 떡진 종이가 국보인 무구정경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무구정경 ‘세계 최고’ 논란부를 사료중앙박물관 수장고에 40년간 방치박물관쪽 늑장·무성의…‘고의성’ 의혹도

묵서지편은 1966년 석가탑 해체 복원 당시 2층 탑신부 사리공 사리함에서 무구정경과 함께 발견된 떡처럼 뭉쳐진 종이뭉치다. 무구정경은 1989년 일본의 지류문화재 복원 전문회사인 오카보코도(岡墨光堂)에 맡겨 깔끔하게 수리돼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영광을 독차지해왔다. 반면 묵서지편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봉인된 채 40년동안 방치돼 왔다. 물론 1988~89년 무구정경 복원 당시 최소한의 보존 조처를 했으며(1차 작업) 1997년 종이떡을 하나하나 펴는 2차작업을 했다. 1차, 2차 ‘보존작업’을 하는 몇 개월을 빼도 ‘40년’에서 큰 차가 없을 듯하다.

무구정경과 묵서지편이 나온 불국사 석가탑.

 

묵서지편이 석가탑을 보수한 기록을 적은 중수기라는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은 2005년 9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의 이 아무개 학예연구실장은 “고려시대 초·중기에 해당하는 중국 연호가 보이고, 석탑 중수와 관련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파악한 상황”이라며 다음해부터 본격 판독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박물관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그해 국정감사에서 늑장핀다는 지적을 받고 판독작업 착수를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작 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2년 뒤인 올해 5월. 이승재 교수(서울대 언어학과)와 함께 판독작업에 참여한 노명호 교수(서울대 국사학과)는 자료를 한꺼번에 제공받지 못하고 일부는 판독 중에 넘겨 받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실 묵서지편은 10년 전인 1997년에 낱장으로 펴는 작업이 완료됐다. 당시 외부인력으로 박지선씨(현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를 도와 이 작업에 참여한 천주현씨(현 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말. “지하 작업실(현 고궁박물관)에서 넉달에 걸쳐 작업을 끝내고 사진촬영도 마무리했다. 또 묵서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가 나와 놀랐다. 당연히 윗선에 보고됐을 거다.” 당시 수장고 관리 담당 소재국씨(현 고궁박물관장)는 “박물관에서 공식발표하기 전이라 극비사항에 속해 몇 사람밖에 알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묵서지편이라는 이름처럼 판독 전부터 묵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 펼침 작업 도중에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박물관 학예실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문서의 성격을 보고받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장이었던 정양모 교수는 “그토록 중요한 사안이면 보고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보고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일선에서는 알았지만 위에까지 보고가 안됐다는 추론.

왜일까? 1997, 1998년이 박물관 이전 준비로 한창 바빴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소재국 관장은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 일을 맡아서 하라는 지시를 받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기계인가”라고 말했다. 급한 일에 밀렸다는 얘기다. 거기에다 윗선에서는 현장 장악력이 없었던 듯하다. “박물관은 여러 사업을 하기 때문에 보고받지 못하면 현장에서의 일은 알 수 없다.”(이건무 교수)

더 중요한 문제는 보존처리 따로 판독작업 따로였던 점. 당시 펼침작업을 담당한 박지선, 천주현씨는 외부인력이었던데다 맡은 일 자체가 하드웨어 작업에 국한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문서를 판독할 능력이 있는 인력이 따라붙지도 않았다. 보존처리와 판독을 기계적으로 나누어 동시작업 아닌 선후작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껏 판독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 해놓고는 도로 수장고에 넣어두었다가 10년 뒤인 올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판독작업에 나선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일부러 펼침작업과 판독을 미룬 것은 아닐까.

묵서지편을 펴서 공개하지 않으면 무구정경은 붙박이 세계 최고인데, 괜히 잘못 건들여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나, 혹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에 내가 총대를 멜 필요가 있나 하고 판단한 사람은 없었을까. 당사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무구정경의 간행시기가 고려로 내려올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비애국적으로 보는 현실에서 그런 혐의를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문화계 인사는 묵서지편의 내용분석을 두고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종이떡을 펼칠 국내인력이 없었다는 박물관쪽의 해명은 사실로 보인다. 97년 박지선 교수의 펼침작업에 조수로 참여한 천주현씨는 종이떡 분리해체는 습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면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일본에서 그 기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묵서지편을 둘러싼 해프닝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통이 커 10년 또는 40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 앞으로 문서의 완전한 해독과 무구정경의 발간연대 확정은 적어도 10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2)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현존 세계 최고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통일신라 유물일 가능성 높아”

중앙일보
입력 2007.10.29 05:02 업데이트 2007.10.29 06:10


묵서지편 110쪽 중 하나. 박물관은 문서 사진을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불국사 석가탑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하 무구정경)은 언제 만들어졌고 언제 석가탑 안으로 반입됐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됐던 ‘묵서지편’(墨書紙片)이 판독됐으나 완전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무구정경은 통일신라 때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문서를 판독해 27일 보고회를 열었다. 학계에선 무구정경이 당초 통일신라 때 석가탑이 창건되면서 함께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가탑이 고려 때 수리됐다는 사실이 2005년 알려지면서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 중 하나로 꼽히는 무구정경의 제작 및 반입 시기에 논란이 일었다.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고려 이두로 적힌 묵서지편 110쪽을 판독한 결과, 고려 현종 15년(1024) 처음으로 석가탑을 해체하면서 무구정경 9편(偏)과 무구정경 1권(卷)을 사리공에서 수습했다가 안장(安藏)한 것으로 밝혀졌다. 원인은 지진으로 인한 탑의 파손이었다. 이때 ‘사리를 안장하되 전에 있던 물건들은 그대로 두고(前物不動)’라는 구절이 있어 무구정경이 신라 시대 석가탑 창건 때 안치한 것일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고려 정종 4년(1038)에 작성된 문서엔 ‘이 해 ○월 ○○일 대덕(大德, 승려) 숭영(崇英)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사리공에 매)납(納)했으며 얼마 뒤 무구정경 1권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이 교수는 글자가 지워져 있어 정확한 내용은 판독할 수 없으나 문맥상 ‘납(納)’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되면 고려 때 무구정경을 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무구정경이 신라 때 것을 그대로 다시 넣은 것일지, 고려 때 새로 제작해 넣은 다른 것일지는 미스테리다.


◆석가탑 ‘타임캡슐’=묵서지편은 1966년 석가탑 발굴 때 사리함 세트, 무구정경 등과 함께 나온 정체불명의 종이뭉치다. 박물관은 97년에야 이 뭉치를 110쪽의 낱장으로 분리했으나 판독하지 않은 채 뒀다. 2005년 이 문서 중 하나가 ‘무구정경탑중수기(重修記: 개보수한 기록)’라는 사실, 즉 석가탑이 중간에 수리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일부에선 무구정경이 고려 때 새로 들어간 것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박물관은 올 4월부터 ‘석가탑 발견유물 조사위원회’(위원장 천혜봉)를 꾸려 문서 판독에 들어갔다.

◆“무구정경은 통일신라 것”=조사위원들은 이날 무구정경이 통일신라 시대의 것임을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이승재 교수는 고려 때 새로 들어간 묵서지편은 사리함 밖 바닥쪽에서 나온 반면, 무구정경은 사리함 안 깊숙히서 발견된 대목을 들었다. 또한 무구정경의 서지나 서체 등으로 미뤄 신라 때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무구정경 속에 중국 당나라의 여제인 측천무후의 재위 기간(685∼704)에만 사용됐던 측천무후자(字)들이 나왔다는 점을 들었다.

과학적 방법으로 무구정경의 제작시기를 밝히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에는 대개 숯이 사용된다. 나무를 가공해 종이로 만든 뒤 배접하고, 발굴 후 복원수리까지 거친 무구정경으로는 정확한 연대 측정을 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박물관은 이날 문서사진 전체를 홈페이지(http://www.museum.go.kr)에 공개해 관련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3)
권근영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929120

 

 

 

“현존 무구정경은 신라시대 제작 가능성 커”

세 종류 무구정경 존재, 지진 2차례 만나

  • 수정 2007-10-27 12:00 등록 2007-10-27 12:00

현존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 중 하나로 거론되는 불국사 석가탑 사리공 내 발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은 고려초기에 석가탑이 중수될 때 새로 만들어 납입되었을 가능성도 내치기는 힘들지만, 교과서적 통설처럼 통일신라시대 유산일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조사성과가 제출됐다.
석가탑 출토 문서뭉치인 묵서류 문서 판독을 진행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은 27일 박물관 소강당에서 석가탑 묵서지편 문서류 판독결과를 정리한 보고서 '석가탑 발견 유물조사 중간 보고'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중간 정리 결과 묵서지편은 '현종 15년(1024)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와 '현종 15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 '정종 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정종 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라는 네 건의 문서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그 결과 무구정경은 고려 초기에 석가탑이 중수될 무렵에 작성된 각종 문서에는 세 번 출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어학자인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와 역사학자인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에게 문서 판독을 의뢰한 결과, 현종 15년 처음으로 석가탑을 해체하면서 무구정경 9편(偏)과 무구정경 1권(卷)을 꺼냈다가 석탑을 다시 세울 때 보협인다라니경(보협인경) 과 함께 사리공에 다시 안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석가탑은 잇따른 지진으로 정종 4년에 2차로 중수할 때는 보협인경과 함께 무구정경 1권을 다시 넣은 사실이 문서 판독 결과 나타났다.
이승재 교수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목판본 무구정경이 1차 석탑 중수 때 수습한 신라시대 유물을 다시 안장한 것인지, 아니면 고려초기에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두 가지 가능성 모두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신라시대 유물일 근거로 이 교수는 고려 정종 4년에 작성해 새로 사리공에 납입한 묵서지편은 사리함의 외부 바로 아래에서 발견된 반면, 유독 현존 무구정경 목판본만은 사리함 내부에서 발견된 대목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도 "정종 4년에 2차 중수하면서 새로 납입했다는 무구정경은 왜 남아있지 않는가를 설명해 주기 힘들다는 점에서 현존 무구정경은 고려시대에 납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 교수는 서지나 서체 등으로 보아 신라 작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이 자리에 동참한 다른 학자들 또한 현존 무구정경의 서지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무구정경의 통일신라 제작설에 무게를 싣는 발언을 쏟아냈다.
박상국 문화재위원은 "이미 일본과 중국의 최고 종이 전문가가 현존무구정경의 종이제작 연대를 8세기 초로 판단했다"며 "약간의 개연성을 근거로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무구정경 가운데 중국 당나라의 여제인 측천무후(재위 685-704년)가 만든 측천무후자가 다량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현존 무구정경의 통일신라 제작설을 주장했다.
아울러 이승재 교수와 노명호 교수 역시 설혹 현존 목판본 무구정경이 고려시대에 납입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고려초기에 제작된 경전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 제작된 판본이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고,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목판을 고려시대에 다시 이용해 찍어낸 판본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석가탑은 고려 초기에 대규모 지진 피해를 잇따라 보았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졌다.
이런 피해 상황은 '정종 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중 5-9행에 정종 2년(1036)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석가탑은 버팀목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는 내용으로 보이고 있다.
아울러 이 지진으로 불국사는 불문 남쪽의 계단부속시설, 하불문의 시설, 여러 행랑 시설 등이 무너져 내리는 심각한 피해를 본 것으로 형지기는 전하고 있다.
나아가 석가탑은 그 2년 뒤인 정종 4년(1038)에 또 다시 지진을 만났다고 형지기는 기록했다.
중앙박물관은 "형지기의 지진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현종 15년에 작성한 석가탑 중수기를 불과 14년 후인 정종 4년(1038)에 다시 작성해 안치한 의문이 풀렸다"고 밝혔다.(4)
김승욱 기자 kind3@yna.co.kr (서울=연합뉴스)

 

석가탑 묵서지편서 새 이두 발견

문화전문 기자
입력 2007-10-29 00:00 수정 2007-10-29 00:00
 
석가탑에서 발견된 문서뭉치인 묵서지편(墨書紙片)에서 이두(吏讀)가 다량으로 확인됐다. 국어학계는 기존 학설의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만큼 문자발달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두인 如加賜乙(여가사을)은 ‘다(하)+더시늘’로 읽히고 ‘같으시거늘’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현대어의 ‘같다’에 해당하는 형용사를 ‘如’로 표기하고, 어미를 이루는 ‘加賜乙’을 통합한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천혜봉 전 문화재위원을 위원장으로 조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해 묵서지편을 판독한 결과 드러났다.

노명호 서울대 사학과 교수와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판독한 결과는 지난 27일 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석가탑 발견 유물조사 중간 보고’에서 공개됐다.

이두는 대체로 뜻을 가리키는 대목은 한자의 새김을 취하고, 문장의 형태를 만드는 대목은 한자의 음을 취하는 신라시대 이후의 표기법이다. 한문 문장의 이해를 돕고자 구절이 끝나는 곳에 끼워 넣은 구결(口訣)이나, 주로 향가에 쓰인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승재 교수는 “기존에 구결자로 알려진 몇몇 글자가 묵서지편에서는 이두문에 두루 쓰였다.”면서 “이런 사례는 아직껏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두자와 구결자의 혼용은 이두와 구결이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판독 결과 현종 15년 석가탑을 해체하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9편(偏)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卷)을 꺼냈다가 석탑을 다시 세우며 보협인다라니경(보협인경)과 함께 사리공에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정종 4년 중수할 때는 보협인경과 함께 무구정경 1권을 다시 넣었다고 적었다.

또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년)에 해체 보수했지만,12년 만인 정종 2년(1036년)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수 공사를 다시 벌여야 했다. 하지만 사리장치를 안장하는 등 복원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정종 4년(1038년) 다시 지진이 일어나, 또 한 차례 해체 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5)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무구정광경, 세계 최고(最古) 인쇄물 확실"

2007. 3. 28. 18:50

[쿠키 문화] 국립중앙박물관은 28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무구정광경)이 8세기초 신라에서 제작된 인쇄물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최근 제작 연대 논란을 빚고 있는 석가탑 유물관련 종합 경과보고를 통해 "무구정광경의 제작 시대를 기존 통설과는 달리 설정할 특별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무구정광경이 고려 초기인 1024년 석가탑을 중수할 때 새로 만들어 넣었을 수도 있다는 일각의 문제제기를 공식 부인한 것이다.

박물관은 근거로 기존 학계의 통설 외에도 석가탑에서 나온 종이류를 현미경으로 확대 조사한 결과 서석탑(석가탑) 중수형지기, 보협인다라니경, 무구정광경 순으로 섬유조직이 치밀하게 나타난 점을 들었다. 이들 유물이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무구정광경은 1966년 금동사리함, 목탑, 묵서지편 등과 함께 발견돼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본으로 평가받아 현재 국보 제126호로 지정돼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2005년 9월 묵서지편에 고려초 석가탑이 낡고 헐어 손질하여 고쳤다는 '중수기(重修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구정광경이 700년대 초에서 7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라는 정설이 흔들렸다. 무구정광경이 중수 당시 안치된 것이라면 11세기 인쇄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770년)이 세계 최고 인쇄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이내옥 유물관리부장은 "두 차례의 X선 조사를 실시한 결과 무구정광경과 달리 제본을 위한 목제축 등을 발견할 수 없었다"며 "박물관 내부 연구진 판단으로는 통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고 오히려 무구정광경이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또 박물관측은 "묵서지편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보존상의 어려움 때문"이라며 "중수기를 비롯한 묵서지편은 발견 당시 떡이 된 상태였고 1990년대 후반까지도 우리 복원 기술로는 힘들어 보존처리에만 치중해왔다"고 말했다.(6)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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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안치 무구정경은 어떤 경전?(1)

2005. 9. 20. 14:54

"탑을 쌓아야 무병장수.극락왕생" 주장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43년, 조선총독부는 경주 구황리(九黃里) 3층석탑을 해체.수리하는 와중에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불상 2구를 비롯한 많은 유물을 발견했다.

이 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탑을 건립하게 된 내력을 담은 명문(銘文)이 발견됨으로써 탑을 건립하게 된 연대와 그 건립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명문에 의하면 석탑은 신라 신문왕이 서기 692년에 죽자 그 아들인 효소왕이 부왕(父王)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완성하는 일은 성덕왕의 몫으로 돌아갔다. 같은 신문왕 아들이면서 요절한 효소왕 동생인 성덕왕은 재위 5년째인 서기 706년에 3층 석탑을 완성했다.

 

한데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고 있다.

"无垢淨光大陀羅泥經一卷安置石塔第二層"(무구정광/대다라니경/1권/안치/석탑/제2층).

약칭 '무구정경'이라 일컫는 불경(佛經) 1권을 석탑 2층에 안치한다(혹은 안치했다)는 내용이다. 이곳에서는 또 99개에 달하는 작은 탑(小塔)도 발견됐다.

석탑을 조성할 때 무구정경을 안치하고 그와 함께 소탑 99개도 같이 봉안하는 행위는 8-9세기 신라 석탑에서는 공식을 방불할 만큼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당장 구황리 3층 석탑보다 약간 늦은 서기 751년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불국사 석가탑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1966년 10월 13일, 해체 수리 과정에서 다른 곳도 아닌 2층 사리함을 넣는 공간에서 무구정경(无垢淨經)을 출토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705년경에 건립된 경주 나원리(羅原里) 5층석탑, 화엄사 서(西) 5층석탑(755년 무렵 건립), 산청 석남사(石南寺) 5층석탑(766년), 경주 창림사(昌林寺) 석탑(855년), 봉화 취서사(鷲棲寺) 5층석탑(867년), 경주 황룡사 9층목탑 심초석 사리공(895년), 강원 선림원(禪林院) 3층석탑, 대구 동화사(桐樺寺) 금당 서탑, 봉화 서동리(西洞里) 동탑, 성주사(聖住寺) 석탑, 공주 동원리(東院里) 3층 석탑(이상 9세기 건립 추정) 등지에서도 무구정광을 안치했거나 소탑이 출토됐다.

신기하게도 이런 석탑 조성 패턴은 고려시대 개막과 더불어 종말을 고한다. 현재까지 조사성과로 볼 때 고려시대 이후에는 무구정경 대신에 '보협인다라니경'이라는 새로운 불경이 안치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오쿠라컬렉션에 소장 중인 고려 총지사 제작 보협인다라니경에는 통화(統和) 25년(1007)이라는 제작 연대가 명확히 보인다. 같은 고려초에 건립된 월정사 석탑에서도 같은 불경이 출토돼 현재 보존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패턴으로 볼 때 고려초기에 석가탑을 중수(重修)한 내력을 담은 석가탑 중수기가 공개되었다고 해서, 더구나 그 중수기(重修記)가 고려초에 안치됐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고 해서, 그와 함께 1966년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고려초에 제작됐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지게 된다.

 

현재 110쪽으로 분리된 석가탑 중수기 중 국립중앙박물관이 사진 형태로 1장만 공개한 중수기에서는 조선시대 고문서에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간주할 만한 대목도 있어 그 성격과 내용에 대한 전모 파악은 상당한 시일을 요할 전망이다.

무구정경을 석탑에 안치하는 전통이 신라시대에 유행한 패턴이라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현존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물이라 주장되는 석가탑 출토품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고려초에 제작됐다고 판단되는 이번 중수기 공개됨에 따라 종래 이 무구정경이 751년 석가탑이 완공될 때 안치됐다는 주장 또한 그것을 뒷받침했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학계(주로 한국학계)는 석가탑 무구정경이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이라고 내세웠으며, 나아가 왜 신라시대 석탑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모름지기 이 불경을 안치해야만 했을까?(7)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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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獨 구텐베르크 박물관,한국실 2배 확장

1995. 12. 7. 05:08

(베를린=연합(聯合))이선근특파원=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술과 금속활자등 뛰어난 우리 인쇄문화가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이전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으며 일반에게 모습을 보일수 있게됐다.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1440),성서의 대중보급에 기여한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기려 금세기 설립된 세계 유수의 인쇄문화 전문박물관인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7일 기존의 한국실을 크게 확장개선해 재공개했다.

새로 단장된 한국실은 전체면적이 약 30㎡로 일본실(약 13㎡)이나 중국실(약13㎡)보다도 2배이상 넓은 전시면적을 확보,우리 인쇄문화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보다 제대로된 대접을 받게된 셈이다.

 

지난 74년 팔만대장경등 우리 고인쇄물 영인본 제공으로 연을 맺은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83년 한독수교 1백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독립된 한국관을 두게됐다. 그러나 유물수에 비해 전시면적이 크게 좁아(약 13㎡) 면적 확장및 전시방법 개선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아왔다.

한독 공동사업으로 추진된 이번 한국실 확장공사로 목판본,금속활자,한글활자등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대형 벽면전시판이 새로 설치됐으며 전시대도 새로 추가설치,기존의 혼합전시때와는 달리 각 유물별 특징과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낼수 있게됐다.

한국실에 비치된 70여점의 전시물중에는 서기 7백51년 석가탑 창건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의 복제품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있다.

이와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제작년대가 70년이나 앞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도 주요 전시품목이다.

이밖에 통감절요,대학연의등 금속활자 자료와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등 한글활자 자료도 전시되고 있으며 지도인쇄술을 보여주는 대동여지전도등 각종 복제품과 영인본들이 관람객을 맞게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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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https://v.daum.net/v/20110616080504332

 

 

(2) 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hani.co.kr)2007-11-01

 

 

(3) 현존 세계 최고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통일신라 유물일 가능성 높아” | 중앙일보 (joongang.co.kr)2007.10.29 

 

 

(4) “현존 무구정경은 신라시대 제작 가능성 커” (hani.co.kr)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27일김승욱 기자

 

 

(5) 석가탑 묵서지편서 새 이두 발견 | 서울신문 (seoul.co.kr)2007-10-29  

 

 

(6) "무구정광경, 세계 최고(最古) 인쇄물 확실" (daum.net)2007. 03. 28.

 

 

(7) https://v.daum.net/v/20050920145418798

 

 

(8) https://v.daum.net/v/19951207050800231

 

 

<참고자료>

 


'다라니경' 8세기 초 제작 확실.."고려초 새로 제작" 중수기 내용 사실상 부정 (daum.net)2007.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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