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후기신라 (2) 36대 혜공왕(765~780)~46대 문성왕(839~857) 왕위쟁탈전 본문
■김씨끼리 죽고죽인 왕위쟁탈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신라, 특히 하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에 포기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부계, 모계, 비계가 모두 근친혼으로 맺어졌고, 게다가 형제간, 사촌간, 혹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왕권다툼을 벌였으니 말이다. 촌수를 가늠하기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적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36대 혜공왕(765~780)이 살해되고 선덕왕(780~785)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839~857)까지 60여 년 동안 무려 11명의 왕이 교체됐다.
그 중심에 원성왕(785~798)이 있었다. 원성왕(김경신)은 경쟁자인 무열왕계의 김주원(생몰년 미상)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로써 원성왕계 왕통이 성립됐다. 이쯤에서 왕실 계보도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791)의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그들이 ‘인겸계’인 소성왕(39대·799~800)-애장왕(40대·800~809)-헌덕왕(41대·809~826)-흥덕왕(42대·826~836)이다.
신라 원성왕 이후의 왕실계보도. 근친혼인이 다반사였던 신라에서는 하대에 들어 김씨 간 치열한 왕권다툼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헌안왕의 제종손(6촌 손자뻘)이다. 헌안왕의 두 딸은 경문왕의 7촌 고모가 된다. 한마디로 경문왕은 7촌 고모들과 혼인한 셈이다. |그래픽:김덕기 기자
하지만 흥덕왕이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혼란이 생긴다. 원성왕의 셋째인 김예영(생몰년 미상)의 둘째 아들인 김균정과, 손자인 김계륭이 각축을 벌인다. 김계륭은 김예영의 첫째아들인 김헌정(생몰년 미상)의 아들이다. 삼촌(김균정)과 조카(김계륭)가 왕권다툼을 벌인 것이다.
같은 ‘예영계’에서 ‘균정계’와 ‘헌정계’(김계륭)로 분화한 것이다. 이 싸움에서 조카 김계륭이 승리를 거뒀다. 김계륭은 신라의 43대 희강왕(836~838)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희강왕은 3년을 버티지 못한다. 흥덕왕 이후 왕권에서 밀려난 원성왕의 첫째 아들 김인겸의 손자인 김명(44대 민애왕·838~839)에게 피살된다. 왕위는 잠시 ‘인겸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전에 조카인 희강왕(김계륭)에게 피살된 삼촌(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846)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김명)을 죽인다. 이로써 이른바 ‘균정파’인 김우징은 왕위(신무왕·재위 839년)에 오른다. 하지만 신무왕은 1년을 버티지 못했고, 그 아들인 문성왕(45대·재위 839~857)이 뒤를 잇는다. 문성왕은 죽기 전에 “숙부인 의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 유언에 따라 등극한 이가 문성왕의 숙부이자 경문왕의 장인인 헌안왕(45대·재위 857~861)이다.
그러니까 원성왕 이후 왕실계보를 정리하면 이렇다. 원성왕의 첫째인 ‘인겸계’(소성왕·애장왕·헌덕왕·흥덕왕)로 이어가다가 셋째인 ‘예영계’에서 분화된 ‘헌정계’(희강왕)를 거쳐 잠깐 ‘인겸계’(민애왕)로 복귀했다. 그런 뒤 다시 ‘예영계’ 가운데 ‘균정계’(신무왕·문성왕·헌안왕)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경문왕은 누구인가. ‘헌정계’인 희강왕의 손자였다. 그렇다면 희강왕에게 피살된 김균정의 후손인 헌안왕으로서는 경문왕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헌안왕은 경문왕을 사위로 맞이하고, 그 사위에게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문성왕 시대부터 모색되었던 인겸계와 예영계, 그리고 예영계 내에서도 다시 골육상쟁을 벌인 헌정계와 균정계 사이의 화합을 완성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860년 9월의 임해전 청문회와 861년 1월의 헌안왕 유언 기록은 장편 사극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을만큼 흥미진진하다.(1)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라 명품族의 못말리는 사치 행각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오로지 외국산 물건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예의가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843년, 왕(신라 흥덕왕)이 단단히 화가 났다. 해외 명품만을 좇고 국산을 무시하는 등 사치향락이 빠진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슬퍼런 법령을 내린다.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린다.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 삼국사기 > '잡지')
신라 명품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명품빗. 장식용으로 머리에 꽂았다.보르네오 등에서 잡히는 거북등껍질인 대모로 만들었다. 청옥을 감입한 꽃무늬 금장식을 매달았다. 손잡이 부분은 금사로 각종 꽃무늬를 새겼다. | 호암미술관 소장
■비취모, 공작미, 슬슬전…. 신라 명품 패션의 끝은?
흥덕왕이 신분에 따라 정해놓은 규제는 촘촘하기만 하다. 우선 지금의 패션에 해당하는 < 색복 > 규정을 보자.
"~진골 여자의 목도리(표)와 6두품 여인들의 허리띠는 ~금은실(金銀絲)·공작미(孔雀尾)·비취모(翡翠毛)을 쓰지마라. 빗(梳)과 관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로 장식하지 마라."
목도리는 어깨에 걸치는 천이다. 요즘으로 치면 숄(shawl) 같은 것이다. 신라의 귀족여인들이 이런 '명품 숄'(진골)과 '명품 허리띠'(6두품 이상)에 열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흥덕왕이 혀를 끌끌 차며 엄금한 것이다.
'비취모'는 캄보디아(진랍국·眞臘國) 등에서나 겨우 잡히는 비취조, 즉 물총새(Kingfisher)의 털이었다. 남송대(13세기)의 지리서인 < 제번지(諸蕃志) > 의 '비취조'를 보자.
"지극히 사치스러운 자들은 진귀한 비취털로 색을 맞추어 무늬를 넣고 두툼하게 짠 부드러운 요로 만들어 사용했다. 해마다 조정에서 엄격히 사용을 금했지만 귀족들은 몰래 사용했다. 상인들은 옷소매나 사타구니 속에 넣어 밀수했다."
불국사에서 나온 명품 원목 '침향'의 조각들. 수마트라 등에서 난 것이었다. 요즘의 인도네시아산 고급 원목의 원조이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13세기 대 중국에서 '호화·사치품'으로 규정돼 밀수로 통용될만큼 중국 명품족의 사랑을 받았던 비취모…. 그것이 400년 전에 신라 '명품족'의 넋을 빼앗았다는 것이 된다. '공작미'는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대에서 서생하는 공작새의 꼬리를 뜻한다.
'슬슬전'도 마찬가지였다. '슬슬'은 이란어계인 '세세(Se-se)'이며 에메랄드를 일컫는다. < 신당서 > '고선지전'은 "고선지 장군이 석국(石國·타슈겐트)에서 슬슬 10여석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 결국 슬슬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이었다. '대모'는 거북등껍질이다. 보르네오(渤泥)와 필리핀 군도, 자바(도婆) 등에서 포획한 사치품이었다.
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기의 페르시아계 유리잔. 서역에서 수입된 제품이다. | 이한상 교수 제공
■명품으로 도배한 신라의 마차
신라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에 속하는 < 거기(車騎) > 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진골은 수레의 재목(車材)은 자단(紫檀)과 침향(침香)을 쓰지 못한다. 대모(玳瑁)를 붙일 수 없다. 6두품 여자는 물론 5·4두품,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자단과 침향을 말안장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금·은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당시의 수레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덮개가 없는 무개차와, 양쪽 벽면을 나무판으로 막고, 앞 뒤에 휘장을, 지붕을 천으로 덮는 밀페형의 유개차였다. 흥덕왕이 규제한 수레는 아마도 후자인 유개차였던 것 같다. 당시 진골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산 자재로 수레를 꾸민 것이다. 진골들 뿐이 아니었다. 6·5·4두품은 물론 가장 하층민인 백성여자들도 '말안장틀'을 명품으로 장식했다.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나온 토용. 턱수염을 한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경주에는 이런 서역인 상인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 국립경주박물관
자단은 유향목재이다. 인도와 스리랑카 원산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재목이 향기롭고 견고하며 속은 암홍자색을 띠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등에 쓰인다. 침향의 주산지는 베트남(점성국·占城國)과 수마트라였다. 나무를 베어 몇 년 후 껍질을 썩여 없앤다. 그러면 견고하고 검은 심재가 남아 물에 가라앉는데 이를 목재로 쓴다. 이것이 침향이다.
흥덕왕의 규제내용을 종합해보면 신라인들의 '가없는 마차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들은 물론 일반백성,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흡사 고급승용차를 선호하고, 차의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평민 여자들까지 다투어 말안장만큼은 금은옥을 장식하고, 고급외제목재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보다못한 왕이 나서서 '외제명품에만 혈안이 돼있다'고 호통을 치면서 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신라 때도 유행한 인도네시아산 원목가구
지금으로 치면 주택인 < 옥사(屋舍) > 와 생활용품인 < 기용(器用) > 도 사치향락의 상징이었다.
"진골의 집은 길이·너비가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를 덮지 않고 금·은 등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진골은 물론 6두품까지 침대를 대모·침향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침대까지 외제 '대모와 침향'으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침향은 지금으로 치면 동남아산 티크재 원목 정도로 볼 수 있다. 최고급 원목가구에 대한 신라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는 풍조가 아닌가.
또 진골과 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집을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고 규정했다. 12세기 아랍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신라에서는 개(犬)의 목걸이도 황금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황금이 흔했다는 얘기다.
당나라제 삼채 뼈단지. 경주 조양동에서 나왔다. | 국립경주박물관
생활용품(기용)도 외제품으로 가득했다.
"6두품에서 일반백성들까지 금·은 도금한 그릇과, 호랑이 가죽과 구수와 탑등을 쓰지마라."
금은 그릇과 호랑이 가죽은 물론 구수와 탑등까지….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둘다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깐다. 구수 보다는 탑등이 좀더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일반백성들이 페르시아의 직물(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966년 불국사 다보탑에서 발견된 유향(乳香)도 아랍산이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하드라마우트(Hahdramaut) 연해에서 생산되는 향료이다. < 제번지 > 는 "유황은 수마트라 파램방(Palembang)에 집화되어 중국으로 수출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신라가 수입한 것이다.
다만 이같은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유물들이 드문 것이 유감이다.
이한상 교수(대전대)는 "신라인들은 금관 등 부장품을 한껏 넣은 5세기와 달리 6세기부터는 무덤형태도 작아지고, 부장품의 양도 줄어든다"면서 "국력이 절정기였던 통일신라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9년만에 무너진 태평성대?
각설하고 흥덕왕이 신라의 사치향락풍조를 개탄하던 8세기 이후 신라는 외형상 최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해외 명품이 당나라를 통해 서역 상인들과 함께 경주로 들어왔다. 경주는 완전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경주의 귀족들은 앞다퉈 명품을 사들였다. 차츰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사치향락의 풍조가 번졌다.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외호석물인 무인상과 흥덕왕릉의 외호석상은 서역인이 분명하다. 메부리코에 턱수염을 한 소그드인이…. 경주 용강동 고분의 도용과 서악동 고분의 신장상도 마찬가지이다.
880년 9월9일, 헌강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민공에게 말했다.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인가.(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헌강왕)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모두 성덕의 소치이십니다."(민공)
"하하! 모두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헌강왕)
< 삼국사기 > '헌강왕조'에 생생하게 묘사된 9세기 말 경주의 풍경이다. 왕은 태평성대임을 자화자찬하고…. 신하들은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화답한다. < 삼국유사 > '진한조'를 본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실제는 39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신라의 전성기'와 '금입택'이라는 대목이다. 880년 월상루에 올라 태평성대를 자랑한 헌강왕은 불과 6년 뒤 죽는다. 그런데 2년 뒤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887~897) 때 천하에 난리가 난다.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다. 신라는 그때부터 후삼국시대로 접어든다. 헌강왕이 치세를 자랑한지 불과 9년만의 일이다.
■흥덕왕의 헛된 몸부림
그렇다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가 단 9년만에 급전직하한 것일까. 아니었다. 망조를 느끼지 못했을 뿐….
이미 100여년 전인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진골귀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등장했다.
그 사이 귀족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 삼국유사 > 에 나온 '금입택'은 '금을 입힌 집' 혹은 '금이 들어가는 집'이 39곳이나 됐다는 이야기이다. 39곳에는 김유신의 종갓집도 포함돼 있다.
오죽했으면 흥덕왕이 "진골·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의 집까지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는 법령을 공표했을까. '금테 두른 집이 많았다'는 뜻일 수 있다. 아니면 명문귀족들의 집에 금이 수없이 들어갔다는 것, 즉 금 뇌물이 엄청났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흥덕왕의 시대부터 이미 250여년 전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마치 홍수처럼 들어갔다.(謂基金入望如洪水也)"( < 화랑세기 > '17세 염장공조')
'수망택'은 바로 < 삼국유사 > 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다. < 신당서 > '동이열전·신라조'를 보자.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동(奴童)이 3000명이다. 갑병(甲兵)과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
세상에! 노복이 3000명이 됐고, 갑옷을 입은 사병과 가축의 숫자가 각각 3000명과 3000마리나 됐다는 소리다.
그랬다. 헌강왕이 흐뭇하게 바라본 경주의 화려한 외형은 이미 망조의 기운으로 치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사치향락의 풍조에 푹 젖어들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1000년 사직…. 하기야 무얼 깨닫고 새출발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아닌가.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2)
■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 7] 경주 흥덕왕릉, 일편단심 사랑에 담긴 사연 친오빠를 죽인 원수가 남편.. 근친혼이 불러온 비극
신라 제 42대 왕 흥덕왕의 무덤. 사자상 네 마리가 사방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다. ⓒ홍윤호
흥덕왕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
흥덕왕은 통일신라 후기의 왕으로, 826년에 형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 836년에 사망한 신라 제42대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고, 홀로 남은 수컷이 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그러자 앵무새는 거울에 비친 상이 자기 짝인 줄 알고 거울을 계속 쪼아댔다. 그러다 곧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10의 흥덕왕 조 앞부분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중략)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죽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쌍쌍인 새도 자기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어찌 다시 무정하게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았고, 시녀들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다.
위 두 사료에 있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을 잃었는데,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다시 왕비를 들이지 않고 여생을 살았다. 그리고 짝 잃은 암컷을 그리워하다 죽고 마는 수컷 앵무새를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향가를 만들기도 한 다정한 왕이다.
보통 왕조국가에서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둘 수 있었고, 정식 왕비는 한 명일지라도 수많은 궁녀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왕비 한 사람만을 끝까지 사랑하고, 사망한 후에도 그리워하는 사례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잠깐이라면 몰라도.
형을 죽였지만 형의 딸을 사랑한 왕
부인에 대한 흥덕왕의 사랑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흥덕왕의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이다. 그런데 소성왕은 흥덕왕의 맏형이다. 소성왕이 39대 왕, 헌덕왕이 41대 왕, 흥덕왕이 42대 왕으로, 세 사람은 모두 형제이다. 따라서 흥덕왕은 형의 딸과 결혼한 것이니, 자기 조카와 혼인한 셈이다. 근친혼이다.
신라는 권력 독점과 재산 유지, 왕실의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지속적인 근친혼을 이어갔다. 삼국시대 신라에도 근친혼의 사례는 자주 발견되므로 그 전통은 꽤 뿌리가 깊다. 유명한 김유신만 해도 자기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켜 왕비를 만들었지만, 60대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과 다시 결혼한다. 여동생이 장모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때까지도 계속된다.
39대 왕 소성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애장왕이 4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애장왕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고, 소성왕의 동생이자 애장왕의 큰아버지인 김언승이 한동안 섭정을 하였다. 그러다 애장왕 10년(809) 김언승이 군사를 끌고 궁궐에 들어가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다. 이 사람이 헌덕왕이다. 조선 시대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례와 같은 경우다.
헌덕왕의 친동생이었던 김수종은 헌덕왕 재위 중에 상대등이 되었고, 헌덕왕 재위 중에 이미 다음 왕위 계승자로 확정되어 궁궐(월지궁)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헌덕왕 사후 왕에 오르니, 이 김수종이 곧 흥덕왕이다.
그러니 헌덕왕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될 때 김수종도 적극 협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헌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가 동생에게 넘어간 것은 애초에 약속된 일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정변 이후 바로 왕이 된 헌덕왕은 이 정변의 주역임이 분명하다. 섭정을 했으니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애장왕에게 반대로 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20대 나이가 된 애장왕과 물밑에서 암투를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헌덕왕의 형제들은 헌덕왕에게 붙어 정변에 가담했다. 흥덕왕도 그 이후의 행보를 보아 적극적인 가담자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은 오빠인 애장왕이 정변으로 죽임을 당할 때 자기 남편이 여기에 가담해서 권력을 잡는 과정을 눈으로 봐야 했을 것이다. 즉, 남편과 남편 친형의 정변으로 친오빠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근친혼의 비극이다.
서로 X자형으로 교차하여 올라가는 소나무 두 그루의 모습. 필자가 임의로 부부소나무라고 붙였다. ⓒ홍윤호
흥덕왕의 비극과 신라의 비극
그녀는 이 사건 전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가 자기 남편과 남편 형제들이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가능했을까. 흥덕왕은 오로지 아내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어떤 여성도 가까이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인에 대한 흥덕왕의 감정은 사랑보다는 미안함과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장화부인은 오빠가 죽은 이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갔을 것이다. 남편이 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이 아니었다면 살해당한 왕의 여동생이라는 위치상 죽음을 피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거꾸로 보면 흥덕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기 아내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간 흥덕왕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좀 더 복잡한 상황을 안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속마음까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죽을 때도 합장해 달라고 유언했으니 분명히 생전에 장화부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사랑은 일편단심 순애보라기보다 근친혼이 가져온, 안타까운 비극적 사랑에 가깝다.
이런 사정 때문일까. 그는 사망시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지명했지만 의도적 누락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정치 투쟁에 희생당할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장화부인처럼 근친혼 결혼으로 인한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봤을 수 있다.
하지만 흥덕왕의 후계자 지명 여부와는 상관 없이 그의 사후 신라는 최악의 권력 쟁탈전을 겪게 된다.
원성왕계로 분류되는 친족들 사이에 궁궐 내외에서 난투극에 가까운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지방 세력(대표적인 인물이 장보고)까지 끌어들여 서로가 죽고 죽이는 복수극이 이어졌다. 죽느냐 사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정글 같은 권력 투쟁이었다.
이로 인해 원성왕계의 진골 귀족들은 상당수가 비명에 가거나 자살했다. 헌덕왕과 흥덕왕이 뿌려놓은 씨앗,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은 최소한의 자제력을 넘어 혈연의 둑을 터뜨렸고, 그 거센 물줄기는 수많은 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귀족들은 기진맥진했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며 아마 반성도 했을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도 없이 벌어진 이 노골적인 친족 간의 대결에서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장화부인 같은 상처를 안고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 얼마든지 더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그녀는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성공한 정변의 주역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흥덕왕릉 입구의 소나무숲은 분위기가 있고 매력적이며 조용하다. 경주 일대의 대표적인 소나무숲으로 꼽을 만하다. ⓒ홍윤호
명품 소나무 숲 속 명품 왕릉
흥덕왕릉은 경주의 중심부와 좀 멀리 떨어진 안강읍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이다. 도로에 흥덕왕릉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평범한 시골 마을의 산기슭에 자리했다.
흥덕왕릉 들어가는 입구에는 넓고 그윽한 소나무숲이 있다. 처음 찾아가는 이들에게는 뜻밖의 아늑하고 조용한 숲이다. 문화유산 답사에 앞서 그저 소나무숲 산책만을 목적으로 해도 좋을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훌륭한 소나무 숲 중 하나라고 본다. 아침 해 뜰 무렵에는 이 소나무숲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진가들이 제법 있다.
새벽에 몰려오는 안개가 소나무들을 허공에 띄울 때도 좋고, 아침 햇살이 나무들 사이사이로 화살처럼 들어와 잠자는 숲을 깨울 때도 좋고, 오후 햇살이 나무들에 선 굵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도 모두 좋다. 한마디로 명품 소나무숲이다.
숲 속 중간쯤 X자형으로 교차하는 인상적인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아름다운 어울림 때문에 그냥 개인적으로 부부 소나무라고 이름 붙였다.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울창한 소나무숲을 얼마간 헤치고 나면 마치 사람의 주변머리 사이에 드러난 대머리처럼 숲 중간에 훤하게 드러난 잔디밭 위로 한 기의 무덤이 우뚝 솟아 있다. 흥덕왕릉이다.
경주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이 무덤이 흥덕왕릉인 이유는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편의 발견 때문이다. 경주 일대에 남아 있는 무덤들 중 드물게 주인공이 거의 확실한 무덤이다.
왕릉의 형식이나 형태, 구조 등을 보면 이 또한 명품이다. 한 시대 문화의 전성기를 누린 신라의 문화적 역량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흔히 통일신라의 왕릉들 중 가장 우수한 왕릉으로 원성왕릉(괘릉)을 꼽는데, 이 흥덕왕릉도 만만치 않다.
왕릉의 사방에서 각자 다른 자세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키고 있는데, 무섭기보다는 귀여운 모습이다. ⓒ홍윤호
왕릉의 사면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자상은 서로 다른 표정과 자세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머리가 커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을 준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면 귀엽다. 그래서 갓난아기나 어린아이들이 귀엽지 않은가. 이 사자상들은 머리 한번 쓰다듬으면 더 머리를 들이밀며 귀여운 척을 할 것 같다.
혹시 이 사자상들을 뒤에서 본 적은 있는가. 뒤에서 보면 어린 강아지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각각 한 쌍씩 마주보고 있다. 세련된 조각 수법이 인상적이다. ⓒ홍윤호
흥덕왕릉만 홀로 떨어진 이유
무엇보다 무덤 앞을 지키는 석상들이 명품이다. 문인상과 무인상은 각각 서로 마주 보며 한쌍씩 서 있는데, 모두 원성왕릉의 그것들처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어 쌍둥이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무인상은 원성왕릉의 무인상처럼 서역인(이슬람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과 코가 크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며, 표정이 우락부락하고 팔을 걷어붙인, 영락없는 장사의 모습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원성왕릉의 무인상보다는 수법이 좀 떨어지지만, 각자의 표정과 개성은 살아 있다.
소나무숲 한 구석에 있어 놓치기 쉽다. 귀부 위에는 흥덕왕의 일생과 업적을 새긴 비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홍윤호
이 무덤과 거리가 좀 떨어진 숲속 한 자락에는 귀부가 있다. 신라 때는 흥덕왕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올려져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덩그러니 귀부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제자리도 아닐 것이다.[오마이뉴스 글:홍윤호, 편집:이주영](3)
■ [이상훈의 한국유사] 통일신라 최대의 내전 '김헌창의 난'(822년)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게 반란의 원인이었다. 785년 선덕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여러 신하가 왕의 조카뻘인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고 김주원은 왕궁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이를 틈타 김경신(金敬信)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다분히 설화적인 요소가 강하다. 하지만 김경신 세력이 김주원 세력을 배제하고 왕권까지 차지한 것은 분명하다. 원성왕은 즉위 후 김주원에게 명주(강릉)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중앙에서 물러나게 했다.
김헌창은 반란의 명분으로 아버지 김주원이 즉위하지 못한 것을 내세웠다. 하지만 김주원의 왕위 계승 문제는 30여년 전의 일이었다. 김주원이 자리잡았던 명주는 김헌창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김헌창과 친형제인 김종기 세력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반란의 규모가 전국적이었던 점으로 볼 때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신라 사회에는 헌덕왕과 동생 수종(秀宗)·충공(忠恭) 등의 정치개혁을 둘러싸고 반발 움직임이 있었다. 김헌창 자신이 지방직인 도독(都督)으로 임명되는 등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특히 헌덕왕의 동생 수종이 부군(副君)에 임명되면서 김헌창의 왕위 계승 순위는 더 멀어졌다. 이런 개인적 불만뿐 아니라 어수선한 지방민의 동향도 반란 요인으로 크게 작용한 듯하다.
김헌창은 9주 5소경 가운데 5주 3소경을 차지했다. 웅천주, 완산주(전주), 무진주(광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 국원소경(충주), 서원소경(청주), 금관소경(김해)이 반란에 가담한 것이다. 김헌창은 옛 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영토의 절반을 세력권으로 뒀다. 이로써 신라는 북방의 한산주, 우두주, 명주와 단절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역과 주변이 모두 반란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헌덕왕은 서둘러 진압군을 편성했다. 먼저 장수 8명을 차출해 수도 주변 8곳에 배치했다. 상대등 충공에게는 경주 남쪽의 문화관문(蚊火關門)을 방어케 했다. 다음으로 공격부대를 선발대, 본대, 별동대로 나눠 편성했다. 선발대는 장웅·위공·제릉이, 본대는 균정·웅원·우징이 거느렸다. 별동대는 명기·안락이 이끄는 화랑부대였다.
선발대는 도동현(영천)을 거쳐 삼년산성(보은)까지 공격한 뒤 웅진성(공주)으로 향했다. 본대는 달구벌(대구)을 거쳐 성산(성주)에서 전투한 뒤 웅진성으로 향했다. 별동대는 낙동강 하류의 황산(양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경주 기준으로 선발대가 먼저 북서쪽으로 이동한 다음 보은의 삼년산성을 공격하고 본대는 서쪽으로 이동해 성주에서 반란군과 전투를 치렀다. 별동대는 남쪽으로 이동해 반란군의 동향을 견제했다.
헌덕왕이 김헌창의 반란을 인지하고 진압군 편성에 나선 시점은 3월18일이다. 반란군이 진압된 시점은 4월13일 이전이다. 신라군의 작전 기간은 길게 잡아도 25일이다. 한 달이 채 소요되지 않았다. 신라군이 웅진성을 포위한 기간은 10일이다. 이 기간을 제외하면 실제 보름 만에 경상도 지역과 보은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으로 들어간 셈이다.
직선거리로 경주에서 공주까지 200㎞다. 당시 교통로를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250㎞ 이상이었다. 신라군이 250㎞를 15일 만에 주파했다면 하루 평균 16~17㎞로 행군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의 행군 속도는 하루 평균 12~24㎞였다. 신라군이 다소 빠르게 행군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행군 도중 도동현, 삼년산성, 속리산, 성산 등지에서 반란군과 직접 전투를 벌인 점까지 감안하면 신라군의 행군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다.
신라군의 반란군 진압 과정을 재구성해보자. 먼저 출발한 선발대는 영천 지역에 도착해 본대의 진군을 유도했다. 이후 선발대는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본대는 성주에서 각기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두 부대는 영천에서 분리해 각각 행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발대는 북상해 사벌주 방향으로 은밀히 이동하고 본대는 서쪽 달구벌(대구)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반란군의 이목을 끌었다.
신라군 주력부대가 대구를 지나 성주 지역으로 진입할 경우 사벌주와 청주의 반란군은 남북으로 양분되고 만다. 신라군 본대가 대구에 주둔하자 사벌주와 청주의 병력은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성주 지역으로 집결했다. 당시 신라군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성주 지역에 집결한 반란군 병력이 산라군을 압도하지는 못한 것 같다. 신라군도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었기에 반란군을 쉽사리 공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군과 반란군의 주력부대들이 대구와 성주에서 대치하는 사이 신라군 선발대는 영천에서 빠르게 북상했다. 이들은 상주를 지나 보은을 기습했다. 삼년산성이 위치한 보은 지역은 웅천주와 사벌주를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신라군 선발대가 반란군의 주요 통신로와 보급로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신라군이 삼년산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성주의 반란군에게 전해졌다. 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신라군 본대는 동요하는 반란군을 공격해 패배시켰다. 그 기세를 타고 곧장 웅진성으로 향했다.
신라군 본대가 웅천주로 진입하자 신라군 선발대는 본대와 합쳐 웅진성을 포위했다. 웅진성에 있던 반란군은 더 이상 외부의 지원세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반란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세가 신라군 쪽으로 기울자 김헌창에게 우호적이던 세력 중 일부는 이탈해 신라 편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반란군은 웅진성에서 10일간 포위된 채 서서히 무너지고 말았다.
성이 함락 위기에 처하자 김헌창은 화를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헌창의 종자가 그의 머리를 잘라 몸과 따로 땅에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신라군은 김헌창의 머리와 몸을 찾아내 다시 베었다. 그야말로 부관참시(剖棺斬屍)였다. 그리고 김헌창을 따르던 핵심 인물 239명도 처형하고 나머지 백성들은 풀어줬다.
김헌창의 반란에 가담한 군사들은 주로 지방군이어서 쉽게 진압됐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김헌창이 장수들에게 요충지를 지키라고 명령한 점, 반란군 정찰부대가 도동현까지 도착해 있었던 점, 사벌주의 병력과 청주의 병력이 성산에 집결한 점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반란군의 명령 및 지휘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만치 않았던 김헌창의 반란군이 패한 것은 반란군의 문제라기보다 진압군의 신속한 대응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헌창의 반란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압됐다. 하지만 신라는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3년 뒤인 825년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다시 북한산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그 후유증은 상당했다. 김헌창의 반란은 지방 호족들의 지방할거적 경향을 크게 촉진시키고 왕위 계승 쟁탈전을 더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은 ‘사병(私兵)들’을 주로 동원했다.
김헌창의 반란은 통일신라 최대의 내전이었다. 신라 왕조의 구심력이 원심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치열한 왕위 쟁탈전으로 왕권이 약화한 반면 지방의 호족들은 점차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신라 정규군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어 유명무실해졌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신라군은 하대를 지나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왕권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던 정규군은 도태되고 사병이 득세했다. 결국 통일신라는 후삼국 분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01006060708150
(2) https://v.daum.net/v/20120328143318736
(3) https://v.daum.net/v/20180423082706442
(4) https://v.daum.net/v/20210526104508388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190429090203155
https://v.daum.net/v/20160110115904311
https://v.daum.net/v/2003053008325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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