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시간2017-10-15 11:55

김씨가 550여년간 다스린 신라…후대에 박씨 왕 나온 이유는 | 연합뉴스 (yna.co.kr)

이종서 교수 "초기엔 성씨가 혈족 구별 기능…말기엔 성씨집단 해체돼"

경주 배동 삼릉.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성의 왕 3명이 묻힌 무덤이라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 초기 왕은 대부분 박씨(朴氏)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는 약 230년 동안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까지 7명이 신라를 통치했다.

박씨 왕조에 균열을 가한 성씨는 석씨(昔氏)였다. 탈해 이사금(재위 57∼80)이 제4대 왕에 올랐고, 아달라 이사금 이후 7명의 석씨 왕이 배출됐다.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양분하던 신라에 새롭게 등장한 성씨는 김씨(金氏)였다. 미추 이사금(재위 262∼284)이 김씨로는 처음 제13대 왕이 됐고, '마립간'이란 왕호를 최초로 쓴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는 김씨만 왕좌를 차지했다.

김씨 왕조는 통일의 과업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을 거쳐 효공왕(재위 897∼912)까지 55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신덕왕(재위 912∼917)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다시 박씨에게 넘어갔다. 공고했던 김씨 왕조는 왜 갑자기 무너진 것일까.

이종서 울산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최근호에 실은 논문 '신라 진골 성씨의 성립과 기능 변화'에서 "한때는 성씨가 하나의 혈족집단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는 점차 성씨집단의 개념이 약화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로 성씨를 칭한 인물은 진흥왕(재위 540∼576)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성(姓)에 대한 관념이 없었는데, 진흥왕이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대외 관계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에는 초창기 혁거세, 알지, 탈해를 시조로 숭앙하는 귀족 혈족집단이 있었을 것"이라며 "진흥왕이 김씨를 칭하면서 혁거세를 추종하는 집단은 박씨, 탈해를 섬기는 집단은 석씨를 성으로 채택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김씨는 세 성씨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혈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하면서 임금은 혈족집단에 의존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왕이 특정인에게 성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야계인 김유신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교수는 "후대에는 김씨가 단일한 성씨집단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였다"며 "이러한 사실은 9세기 중반에 김씨인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이 서로 살육하며 왕위를 다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9세기 초반의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은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에 제사했다"며 "성씨별 분립 의식이 소멸해 혁거세가 김씨를 포함한 진골 귀족 전체의 선조로 숭앙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씨 사이의 동질의식이 희박해지자 박씨도 왕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박씨인 신덕왕은 김씨인 효공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대 형태로 왕이 됐다. 평화로운 왕위 이양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효공왕의 왕비가 박씨였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성씨집단이 해체하면서 결국 개인을 기준으로 한 혈연의식이 강화됐을 것"이라며 "박씨 국왕의 재등장은 김씨와 박씨로 구성된 진골이 혈연을 통합적으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말기에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따르는 '양측적 혈연의식'이 확대됐고, 이는 '양측적 친속조직'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즉 진골이라는 귀족 집단이 중요했을 뿐, 성씨는 더 이상 특정 세력을 가르는 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 후기에는 혈연의 친소만 따졌고, 성씨의 같고 다름은 신경 쓰지 않았다"며 "고려 지배층에서 확인되는 양측적 친속관계의 연원은 신라 하대 진골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신라왕족 묘지명 중국 시안서 발견(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송고시간2013-02-14 16:41

 
김영관 교수, 774년 사망 김일용 묘지명 공개
재당신라인 묘지명 공개

(서울=연합뉴스) 당나라 서울 장안인 중국 산서성 시안에서 최근 발견된 신라왕족 김일용(金日用)의 묘지명 중 본문인 지석(誌石). 2013.2.14 << 문화부 기사참조, 김영관 제주대 교수 제공 >>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왕의 종형(從兄)으로서 당(唐)에 들어가 고위직에 올랐다가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 지금의 산시성 시안)에서 죽은 사람의 묘지명(墓誌銘)이 공개됐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김영관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오는 16일 오후 서강대 정하상관에서 열릴 신라사학회 제122회 학술발표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재당(在唐) 신라인 김일용(金日用) 묘지명의 초보적 검토'를 발표한다.

 

김 교수는 "김일용 묘지명의 발견은 당에서 활동한 신라인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이 묘지명은 개석(蓋石. 덮개돌)과 지석(誌石. 비석 본문을 쓴 몸돌)을 모두 갖춘 청석질(靑石質)로서, 묘주(墓主)의 인적 사항과 출신, 당에서의 활동 내용 등이 적혔다"고 14일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묘지명은 현재 시안시에 소재하는 민간박물관으로 2009년 개장한 대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에 소장됐다.

이 박물관이 소장한 500점가량에 달하는 묘지명 중 하나인 김일용 묘지명은 2010년 구입품이다.

일부가 파손된 개석은 정방형에 가로 41㎝, 세로 41㎝, 두께 7㎝의 비교적 작은 크기로, 겉에 '유당 고 신라 김 부군 묘지명'(有唐故金府君墓誌銘)이라는 9글자를 3행에 걸쳐 3자씩 음각했다.

역시 장방형인 지석은 가로 42.5㎝, 세로 42㎝, 두께 7㎝로 줄을 그어 글자를 썼다. 글은 전체 17행이며 해서체로 총 302자를 음각했다. 글자 수는 9행까지는 칸막이 선에 행당 19자를 유지했지만 그 뒤로는 행당 작게는 3글자, 많게는 31자까지 불규칙하게 새겼다.

김 교수가 묘지명을 검토 결과 그 주인공 김일용은 신라 출신이자 신라왕의 종형으로 713년 신라에서 태어나 당에 들어와 황제를 숙위하다가 774년 여름 4월28일 향년 62세로 장안성 숭현방이라는 주소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字)가 일용(日用)이었다.

재당신라인 묘지명 공개

(서울=연합뉴스) 당나라 서울 장안인 중국 산서성 시안에서 최근 발견된 신라왕족 김일용(金日用)의 묘지명 중 덮개돌인 개석(蓋石). 2013.2.14 << 문화부 기사참조, 김영관 제주대 교수 제공 >>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은 장씨로 755년 무렵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가 남편이 죽자 장안성 영수향이라는 곳에 합장됐다.

묘지명에는 김일용이 "굳세고 위엄이 있으며, 마음씀씀이가 사려 깊었다. 참된 정성은 하늘이 내려주었고, 조정을 받들어 섬기는데 만국(萬國)보다 솔선하니 천자가 칭찬했다"고 하는가 하면 신라에 대해서는 "의를 사모하여 만 리 먼 곳에서 조알(朝謁)하기 위해 급하게 달리고 큰 바다를 건너 힘을 다해 천자의 궁궐에 이르렀다"고 묘사했다.

김일용은 생전에 종3품인 은청광록대부 광록경(銀靑光祿大夫光祿卿)이라는 벼슬에 올랐다가 죽으니 당시 당 황제가 예주도독을 추증했다고 묘지명에는 보인다.

김 교수는 김일용이 원래 신라의 왕족으로 당에 숙위(황제호위)했다는 사실을 묘지명으로 알 수는 있지만 신라에서의 행적과 신라왕 누구의 종형인지 등등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김일용이 죽을 당시를 기준으로 신라왕은 혜공왕(재위 765-779)이므로 그의 종형으로 볼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김일용의 아버지는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재위 742-764)의 형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김 교수는 이런 김일용이 당에 들어간 이후 신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은 "신라 중대 숙위의 특성상 근친과 혈족을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추정했다.

김 교수는 이 묘지명은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면서 "당에서 활동한 신라인의 면모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신라 중대 정치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평가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4. 4. 11:13수정 2021. 4. 4. 12:48

 

https://youtu.be/RbcMO436VS8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보입니다. “신라 전성기 서울(경주)에는 17만8936호가 있었고…. 금입택(金入宅)이 35개(실제로는 39곳)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4인 1가구 기준으로 따져볼 때 전성기 경주의 인구가 70만명을 훌쩍 넘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금이 들어간’ 호화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 35곳(39곳)에 달했다는 것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까.

834년 흥덕왕은 백성들이 해외명품만 좋아한다면서 신라사회의 사치향락 풍조를 개탄했다. ①보루네오 등에서 잡히는 거북등껍질인 대모로 만든 신라시대 머리빗(호암미술관 소장) ②경북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기의 페르시아계 유리잔과 병(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③경주 조양동 출토 당나라제 삼채 뼈단지 ④불국사에서 나온 수마트라 산 명품원목 ‘침향’의 조각들(이한상 교수 제공) ⑤황남대총 북분의 유리잔. ⑥황남대총 출토의 페르시아계 유리병과 유리잔.|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판 호화저택 공개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 기사를 쓰면서 ‘금입택’, 즉 호화저택의 명단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금입택’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바로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財買井宅)’입니다.

먼저 한번 생각해봅시다. ‘금이 무시로 들어간다’는 뜻인 ‘금입택’은 과연 어떤 집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금입택’이란 표현을 쓰면서 ‘부잣집의 호화저택(부윤대택·富潤大宅)’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었습니다. 이 ‘금입택’ 표현을 두고 ‘금당과 탑을 가진 호화저택’이라고 풀이하는 연구자도 있더라구요. ‘금입택’은 ‘금당입택(金堂入宅)’의 약칭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금입택=금당입택’설은 신라 진골 귀족들의 저택 안에 조성한 ‘개인 원찰’일 가능성을 타진하는 겁니다.

물론 ‘금입택’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답니다. 그런데 ‘황금이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표현은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펴볼 때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닙니다. 보십시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등 5~6세기 신라시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황금유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 등장하는 금입택(金入宅) 관련 기사. <삼국유사> 편찬자는 ‘황금이 들어가는 집’인 금입택이 신라에 35곳(실제로는 39곳) 있다고 소개한 뒤 ‘금입택은 부윤대택, 즉 부유한 호화저택’이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또한 금입택 39곳을 열거했는데 특별히 ‘재매정택’을 소개하면서 ‘김유신의 종가’라고 콕 찍었다.


■실제로 ‘금테 두른 집일 수도’

사실 ‘신라=황금의 나라’라는 인식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퍼져있었어요.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천애갈망자의 산책>)고 표현했어요.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946?~1000?) 역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그릇을 사용한다”(<창세와 역사서>)고 했어요.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입택’ 단어도 허투루 볼 수 없겠네요. 그냥 부잣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황금이 쏟아져 들어가는 집, 혹은 황금으로 잔뜩 치장한 호화저택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귀족의 저택을 두고 ‘금테두른 집’이라는 수근거림과 함께, 황금 뇌물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풍자한 단어일 수 있죠.

<화랑세기> 염장공조를 보면 수상한 기록이 보입니다. 염장공(586~648)은 17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데요. “사람들이 공의 집을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마치 홍수처럼 들어갔다”는 겁니다.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거든요. 풍월주의 저택에 황금이 쏟아져 들어간다면 정상적인 재산축적일 수도 있지만 어떻습니까. 뇌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경주 왕경지역에서 발굴된 추정 금입택. 개인저택 안에 금당과 목탑, 석탑 등을 조성했다. 즉 ‘금입택’은 ‘금당이 들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며, 진골 귀족들의 저택 안에 마련한 개인원찰이라는 주장이 있다.|이은석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 제공


또 중국측 기록인 <신당서> ‘신라조’는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비와 갑병(甲兵), 그리고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고 했네요.

그뿐이 아니구요. 이른바 ‘금입택’의 경제력을 암시하는 문헌과 금석문도 적지않습니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탑비(국보 315호)에 나오는 기록을 봅시다. 지증대사(824~882)가 사찰에 기증한 개인소유의 토지가 500결이라고 했습니다. 9살 때 출가한 지증대사가 자력으로 재산을 모았을 리 만무하겠죠. 지증대사가 쾌척한 토지 500결은 대사의 가문이 축적한 재산 중 일부였을 겁니다.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신라촌락문서에 따르면 ‘촌락인구 463명이 경작하던 토지가 564결’이라 했는데요.

 

이 문서에서 단서를 찾는다면 500결은 400명 가량이 경작하는 토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증대사의 가문이 이 정도였다면 어떻습니까. ‘금입택’의 주인인 진골귀족의 재력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전남 장흥 보림사에 보조선사 탑비(보물 158호)도 의미심장한데요.

“860년 헌안왕은 (금입택에 속한) 수망택과 이남택에게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사찰인 보림사에 황금 160분, 벼 2000곡을 희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황금 160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벼 2000곡은 요즘의 3000~4000가마에 이르는 양입니다. 임금(헌안왕)이 자신이 존경하던 스님을 위해 금입택 가문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강요했다는 겁니다.

헌안왕이 두 금입택 가문에게 “황금 160분과 벼 2000곡을 사찰에 희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는 보조선사 전남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내용.


■“해외명품만 좋아한다”고 개탄한 흥덕왕

신라사회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기록이 있죠.

834년(흥덕왕 9년) 흥덕왕이 “백성들이 해외명품만 찾는다”고 개탄하며 사치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잡지’에 보입니다. 흥덕왕은 “백성들이 앞다퉈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해외명품만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고 한탄합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신라인들은 당시 금은실과 인도산 공작꼬리, 캄보디아산 비취모(물총새의 털)로 만든 허리띠와 페르시아산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한 머리빗, 그리고 보르네오와 필리핀 등에서 잡은 거북등껍질로 만든 관 등을 썼습니다. 요즘의 자가용에 해당되는 마차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는데요. 여기에 인도 및 스리랑카산 목재인 자단과 베트남산 침향으로 마차를 ‘튜닝’하는 자들도 많았답니다.

흥덕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죠. 골품에 따라 주택의 외양과, 침대를 포함한 가구와 인테리어, 마차와 말안장 등의 치장 규정을 엄격히 규정해 놓습니다. 흥덕왕은 그러면서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리는데 만약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에는 지증대사가 토지 500결을 절에 희사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지증대사가 9살에 출가했으므로 아마도 대사의 가문에서 희사한 것으로 보인다.|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김유신 종가의 우물

그렇다면 김유신 가문은 어땠을까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금입택’ 가운데 으뜸은 단연 김유신의 ‘재매정택(財買井宅)’입니다. ‘재매정택’은 집 안에 있는 우물(재매정·사적 246호)을 근거로 붙인 이름인데요.

김유신의 우물과 관련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죠. 645년(선덕여왕 14년) 김유신이 매리포성(거창)을 공격한 백제군을 물리치고 개선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백제의 반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한채 병기를 손질하고는 다시 출정길에 나섭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집(재매정)안 사람들이 개선한 장군을 문밖에서 영접했는데요. 장군은 ‘쌩’하고 대문을 지나쳐가다가 그냥 가기가 뭣했는지 말을 멈추고는 부하를 시켜 집에서 마실 물을 길어오게 했답니다. 김유신은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하면서 감탄했다네요.

이에 군사들은 “대장군도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전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군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괴로워 할 건가”(<삼국사기> ‘김유신 열전’)하고 전의를 다졌답니다. 그것이 하필 우물 이름을 ‘재매(財買)’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종가의 택호(宅號)로 삼은 이유가 돼겠죠.

김유신의 종가인 재매정택 안에 있는 유물. 재매정택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우물 때문에 붙은 것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

삼한통일의 으뜸공신인 김유신 가문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쌓았죠. 우선 김유신의 증조부인 김구해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구형왕·재위 521~532)입니다. 신라 법흥왕(514~540)은 532년 항복한 김구해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본국(금관가야)의 땅을 식읍으로 내렸죠. 자신이 다스리던 금관가야 영토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셈이죠.

게다가 김유신은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여러차례 포상을 받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662년(문무왕 2년) 고구려와의 임진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공로로 본피궁(신라의 관청) 소속의 토지(경주 시내의 노른자 땅으로 추정)와 갖가지 재화, 그리고 노복까지 하사받았습니다.

1년 뒤인 663년(문무왕 3년) 백제부흥운동을 제압한 공로로 밭 500결(230만평)을 받았고요.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인 669년(문무왕 9년)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상급을 받았죠. 즉 문무왕이 전국의 말 목장 174곳을 왕실(22곳)과 국가기관(10곳), 개인 등으로 골고루 나눠주었는데요, 김유신은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629~694·5곳)보다 더 많은 6곳의 말목장을 하사받았죠.

김유신가를 향한 신라왕실의 대접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됐는데요. 예컨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당시 김유신의 손자들(김윤중·윤문 형제)를 총애했는데요. 임금의 친족까지 “아니 왜 김유신 후손들만 싸고 도냐”고 시기질투했지만 성덕왕은 “지금 여러분이 무사태평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다 김윤중 형제의 할아버지(김유신) 덕분이 아니냐”고 일축했다네요.

이렇게 김유신의 재매정은 왕족까지도 시기질투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이 됐는데요.

하지만 사실 김유신 가문은 그렇게 대접받을만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의 피할 수 없는 전쟁(황해도 석문전투)이 벌어지자(672년·문무왕 12년) 둘째아들인 원술이 싸움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원술은 살아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김유신은 “내 아들은 왕명을 욕되게 했으며, 가훈도 저버린 비겁쟁이”라면서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그러나 문무왕은 “원술에게만 혹형을 내릴 수 없다”면서 사면령을 내렸답니다.

35(실제로는 39) 금입택 중 하나로 명시된 김유신의 재매정택터. 재매정택의 안에 있는 우물이 사적(246호)로 지정됐다.|문화재청 제공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원술

이에 원술은 부끄럽고도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로 달아나 숨었습니다.

원술은 아버지가 죽은 뒤(673년) 비로소 어머니(지소부인)을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문무왕의 누이이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원술은 이미 돌아가신 남편에게서 아들 취급을 받지 못했다.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원술은 가슴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태백산에 은거한 원술은 675년(문무왕 15년) 매소성(경기 연천 전곡의 대전리 산성으로 추정) 전투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신라는 매소성 대첩으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원술은 아버지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꺾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원술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답니다.

2017년 김유신의 종가로 알려진 재매정택의 구덩이에서 갑옷 조각들이 출토됐다. 오른쪽 사진은 그 조각들을 복원한 모습이다. 물론 김유신의 갑옷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유신 가문의 누군가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부모에게 받아들이지 못한 한 때문에 초야에 묻혀 평생을 살았는데요.

만약 김유신 가문의 금입택인 ‘재매정’이 문자 그대로 ‘재물을 부르는 우물’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김유신 가문은 그저 돈만 좇은 신라판 재벌가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재매정’에는 공동체의 가치를 오롯이 지키는 진정한 명문가의 정신이 녹아있습니다. 2017년 재매정터에서 갑옷이 한 점 발견되었는데요. 비록 김유신 장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네요. 그러나 돈만 추구하지 않았던 ‘신라판 노블레스 오블레주’ 가문의 상징유물이라면 그 또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겠죠.

 

 

창원|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21. 1. 6. 06:02수정 2021. 1. 6. 16:07

최치원이 가야산이 입산하기 직전에 머물렀다는 경남 창원 합포구 월영대에 우뚝 솟아있는 각석. 최치원의 친필글씨라는 ‘월영대’ 3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최근 ‘월영대’ 명문 옆에 그 이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작은 명문들이 존재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푸른 물결 호묘(浩渺)하고 돌이 우뚝한데, 그 안에 봉래 학사(蓬萊學士·최치원) 놀던 축대가 있네.”(정지상) 고려 중기 문인인 정지상(~1135)이 ‘최치원이 노닌 곳’으로 지목한 경남 창원 합포구의 월영대(경남도기념물 125호)가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은 894년(진성여왕 8년) 시무 10여개조를 올려 아찬(6등급)에 임명됐다가 곧 시기·질투 때문에 유유자적의 길을 택했고, 최후에는 가족과 함께 가야산에 은거했다. 월영대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입산하기 직전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그 월영대에는 지금까지 높이가 2m가 넘고(최대 228㎝) 폭이 35㎝나 되는 각석이 떡하니 놓여있다.

성균관대박물관이 펴낸 <신라금석문 탁본전> 중 ‘월영대’ 명문 옆에 보이는 ‘十四日’이라는 글자. 그외에도 명문의 자흔이 역력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각석에는 해서체로 ‘월영대(月影臺)’(세로 22.5~27㎝ 정도)라고 새긴 커다란 명문이 보인다. 그리고 이 명문은 최치원의 친필글씨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이 각석의 ‘월영대’ 글씨 양 옆에 작은 명문들이 다수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2016년부터 5차례에 걸쳐 현지조사를 통해 월영대 각석에서 17자 정도의 글자를 판독했다”고 4일 밝혔다. 박 관장은 이같은 조사결과를 담은 논문(‘창원 월영대 각석면의 선대 명문’)을 신라사학회가 2020년 12월30일 간행한 학술지(<신라사학보> 50)에 발표했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새롭게 찾은 월영대 각석의 명문글씨를 살펴보고 있다.

 

박 관장이 이 명문을 주의깊게 관찰한 것은 2016년 1월이었다. 성균관대 박물관이 2008년 펴낸 <신라금석문 탁본전>을 살피다가 ‘월영대’ 탁본의 글씨 옆 쪽에 보이는 ‘十四日(십사일)’ 명문을 확인한 것이다. ‘십사일’ 아래 위에도 세로로 쭉 이어진 글씨들이 보였다.

박 관장은 이후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함께 탁본작업을 벌였고,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현지조사를 벌여 글자를 판독했다. 작은 명문들은 자형에 따라 3.5~8㎝로 차이가 컸고, 마멸이 심해 판독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북면의 명문. 3행에 60여자의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짐작되고 이번에 17자 정도 판독했다. |박홍국 관장의 논문에서

 

그나마 뚜렷하게 남아있는 북면의 명문은 3행 정도가 식별 가능했다. 각 행에는 22~23자가 새겨져있다고 짐작되지만 판독가능한 글자는 3행을 합해도 17자에 불과했다. 박홍국 관장은 “그중 제1행에서 간지에 해당되는 ‘△亥’ 위에는 아마도 연호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 윗부분에 ‘二十(이십)’이라는 숫자가 보이기 때문이다. ‘二十’ 다음에는 ‘一’자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二十(혹은 二十一年<?>)△亥 七月 十四日…’로 읽을 수 있다.

월영대 각석의 왼쪽 부분이 울퉁불퉁하다. 두 조각으로 쪼개진 흔적이다. 왼면 중간 부근에 홈이 나있는데 비석을 옮길 때 밧줄 등으로 묶은 흔적처럼 보인다.

 

박 관장은 ‘해(亥)’를 기준으로 삼국시대에 처음 사용된 연호, 즉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락 원년인 390년부터 ‘월영대’ 기사가 등장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530년(중종 25년)까지 일치할 가능성이 있는 연호와 간지(해·亥)를 대조해보았다. 그중 해당되는 연호와 간지는 603년(계해)인 건복 20년(신라 진평왕 25년)과 411년(신해)인 영락 21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1년), 그리고 1191년(신해)인 건우 21년(서하국 연호·고려 명종 21년) 등이었다.

북면 제1행의 ‘해(亥)’와 ‘십사일(十四日)’, ‘각(刻·?)’ 등. 이중 14일은 탁본없이도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홍국 관장의 논문에서

 

여기서 숫자 ‘20’을 ‘二十’으로 새겼다는 것이 못내 걸렸다. 한국과 중국의 고대 비석들은 공통적으로 ‘20’’을 ‘입(혹은 卄)’으로 ‘30’을 ‘삽’으로 표현한다. 박 관장은 이런 점 때문에 ‘20’을 ‘입(혹은 卄)’이 아니라 ‘二十’으로 새겼고, 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각석이 고려, 즉 1191년(신해년·건우 21년)이나 그 이후로 건립된게 아닌가 짐작했다. 그러나 박 관장은 통일신라 시대인 771년(혜공왕 7년) 조성된 성덕대왕 신종에도 ‘三十’이라는 명문이 보이고, 중국 금석문에서도 드물게 ‘二十’ 혹은 ‘三十’으로 표기한 사례를 찾아냈다. 이 각석의 조성시기를 고려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각석의 서쪽면 중간부분과 밑부분에 걸쳐서도 ‘월(月)△영(影)△유(遺)차(此?)’라는 명문이 흐리게 보인다.

판독한 글씨 중 ‘해(亥)’자와 연호 등을 기준으로 찾아본 추정연대. 411년과 603년, 1191년 등이 유력해보인다. |박홍국 관장의 논문에서

 

그렇다면 ‘월영대’라고 새긴 큰 글자는 무엇인가. 이 ‘월영대’ 명문은 최치원의 친필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작은 명문들과 이 ‘월영대’ 큰 글자의 선후관계가 확연하다는게 박 관장의 주장이다.

즉 ‘△△二十(혹은 二十一)△亥’로 대표되는 작은 글자들을 무시하고 그 위에 최치원의 친필글씨라는 ‘월영대’ 큰 글씨 3자를 새겼다. 작은 명문이 먼저, 그리고 ‘월영대’ 3자 명문이 후대에 새겨진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고려 중기 문인 정지상의 ‘우뚝한 돌 봉래학사(최치원) 노닐던 축대’ 운운한 시는 물론, 여말선초의 문신인 이첨(1345~1405)의 ‘고운 선생이 월영대를 거닐었다’는 시에도 ‘월영대’ 3자 명문 이야기는 없다.

박홍국 관장은 “만약 ‘월영대’ 3자 명문이 최치원 친필글씨였다면 정지상이나 이첨 등이 반드시 ‘월영대=최치원 친필글씨’ 사실을 거론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530년(중종 25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회원현(마산·지금은 창원시 합포구) 서쪽 바닷가 최치원이 놀던 곳에 글을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비석의 서면에도 명문들이 보인다. ‘月?影△遺此’로 읽힌다.|박홍국 관장의 논문에서

 

박홍국 관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내용 중 ‘벗겨지고 부서졌다’는 글씨는 바로 이번에 확인한 작은 명문들이고 ‘월영대’ 3자의 대자명문은 일러도 1530년 이후에 새겨진 게 아닐까 추정한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물론 박 관장은 “만약 월영대가 최치원의 친필글씨가 맞다해도 이번에 확인된 작은 명문들은 최치원 이전의 고비(古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2m가 훨씬 넘는 이 각석을 보면 뭔가 심상치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월영대’ 명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면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지만 왼쪽면은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박홍국 관장은 “원래 직사각형이었던 큰 돌이 지금처럼 두 조각으로 동강난 게 아닌가 추정된다”고 밝혔다. 울퉁불퉁한 왼쪽면이 동강난 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엄청난 크기의 직사각형 돌을 만든 것일까.

박홍국 관장의 추정은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이 큰 돌이 선박 등의 계류장치로 제작됐다가 세로방향으로 쪼개진 뒤 오른쪽 돌을 비석으로 활용됐고, 어느 시점에 그 위에 ‘월영대’ 3자를 덧새겼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가지 원래부터 명문을 가득 채운 비석으로 제작됐고, 이것이 어느 시기에 선박의 계류장치 등으로 재활용됐다가 두 조각으로 쪼개진 뒤에 다시 비석의 한 면(북면)에 ‘월영대’ 3자가 덧새겨졌을 수도 있다.

경남 창원 합포구(마산)월영동에 있는 월영대. 예전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해변가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숲에 둘러쌓여 있다.

 

박홍국 관장은 “만약 두 조각으로 동강나지 않았고, 한면 전체가 비석면이었다면 광개토대왕 비문의 3분의 1정도 되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조각은 어떻게 되었을까. 왼쪽 면에는 깊이 2.3㎝, 폭 18.5㎝의 가로 홈이 파여 있는 것이 단서가 된다. 박홍국 관장은 “이 홈이 선박 등 계류장치로 쓰기 위해 관통시킨 구멍”이라고 추정했다. 박관장은 또한 “이 옛 비석의 고졸(古拙)한 서체, 마모상태 등을 볼 때 아무래도 통일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조금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현재까지 판독한 명문은 단 17자에 불과하므로 이 각석의 정확한 조성연대도 알 수 없고, 최치원 등과의 연관성 등도 파악할 수 없다. 박홍국 관장은 “이번에 이 각석에 명문글씨가 확인됐다는 사실만 학계에 보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며 “아마도 국가기관의 첨단장비를 동원하면 더 많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창원|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2018.12.05. 03:01

원효 '판비량론' 조각에서… 신라의 글자 또 찾았다 (chosun.com)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학술대회
뜻·발음 부호 새긴 각필자 발견… 흩어진 '판비량론' 8점 새로 나와
유석재 기자

 
지난달 29일 동국대 충무로영상센터에서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 등 한국 학자들이‘판비량론’바이케이본(梅溪本)의 각필 흔적을 조사하고 있다. 위 사진은 신라 각필자 '㠯'(점선 안)에 덧칠한 것.

 

원효(617~686)대사가 나당 전쟁기인 671년 쓴 저작 '판비량론(判比量論)'의 일부가 추가로 발견됐다. '판비량론'은 완전본이 전하지 않고 단간(斷簡·떨어져 일부만 남은 책) 형태로 있다. 지난해까지 5점이 발견됐고 이번에 새로 8점을 찾아내 13점으로 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30일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원장 김종욱) HK연구단·토대연구사업팀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오카모토 잇페이(岡本一平) 게이오대 강사 등 한·일 학자들의 발표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이 대회에서 권인한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하루 전 남풍현 단국대 명예교수, 김성주 동국대 초빙교수와 함께 동국대에서 5행 분량의 '판비량론' 바이케이본(梅溪本)을 조사한 결과 17~18곳의 새로운 각필(角筆) 흔적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도쿄 긴자의 한 고미술상이 소장한 바이케이본은 지난해 발견됐다.

'판비량론'은 원효대사의 저작 중 유일하게 집필 연대를 알 수 있는 책이다. 현존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저작이자 당나라 현장법사의 불교논리학을 종합 검증한 논리학의 대저술이다. 1960년대 첫 발견 당시 일본 도쿄 시내에서 엿장수가 포장지로 쓰던 것이었다는 비화도 있다. 8세기에 신라인이 필사한 현존 '판비량론'은 오타니대 등 일본 각지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하도 달필이어서 욕심을 낸 사람들이 에도 말기에 책 한 권을 나눠 소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2년 이 책 때문에 NHK 등 일본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각필(角筆) 연구의 권위자인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히로시마대 명예교수가 "'판비량론'에서 신라의 각필 흔적을 찾아냈고, 이것이 일본 가타카나 문자의 기원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이다.'각필'이란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필기구로, 책 속 글자 옆에 작은 크기로 발음이나 뜻, 조사를 의미하는 부호를 새겨 문장을 읽기 쉽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伊(이)'자를 각필로 새겼다면 주격 조사 '~이'란 의미다. 고바야시 교수는 현행 가타카나의 'マ(마)'나 'リ(리)'와 비슷한 글자가 '판비량론'의 각필자에서 보인다고 했다.

남풍현 교수 등 이번 한국 학자들의 조사에선 '以(이)'의 옛 글자인 '

'('~로'란 뜻)와 '白'(사뢰다) 등 새로운 각필자를 찾아냈다. 고대 한국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발견으로, 고바야시 교수 없이 한국 학자들만 참여한 첫 조사다. 김천학 동국대 한국불교융합학과 교수는 "새로운 각필과 단간의 발견은 향후 문자학·사상사 등 각 분야의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장보고 숨결 깃든 중국 적산법화원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적산법화원의 장보고상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민 출신이었던 장보고는 신라에서 관직에 나서지 못하자 중국(당시 당나라)으로 넘어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령군 소장의 지위에 오른 뒤 적산 인근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을 위해 법화원을 창건했다. 당나라의 사원철폐령으로 헐린 법화원은 1990년 재건됐다.
해신(海神). 해상왕(海上王). 통일신라시대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한 장보고에 붙는 말이다. 장보고에게 신라는 좁았다. 중국과 일본을 넘어 아랍까지 그의 무대는 광활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 장보고의 흔적은 동쪽인 산둥(山東)성에 남겨져 있다. 장보고가 활동한 청해진(지금의 완도)과 가까운 곳이다.
적산법화원 입구로 들어가는 화려한 문으로 매표소와 함께있다.

산둥성 웨이하이에는 적산(赤山)이 있다. 바위가 붉게 보인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 붉은 바위들을 배경으로 산 위에 사찰 법화원이 있다. 산 이름과 합쳐 적산법화원으로 불린다. 장보고가 세운 사찰이다. 이 사찰은 당나라 때 사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1988년 한·중수교를 기념해 1990년 재건됐다.
장보고는 뛰어난 실력에도 천민 출신이어서 신라에서 관직에 나서지 못했다. 이에 장보고는 중국(당시 당나라)으로 넘어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령군 소장(武寧君 小將)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적산 인근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을 위해 법화원을 창건했다.
적산법화원의 명신상은 불상 높이가 55.8m에 이른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을 지켜주기 위해 건립된 적산명신상은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오른손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법화원을 가려면 주차장에서부터 입구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산길이어서 걸어가기는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차량이 운행된다. 10분가량 차량을 타고 가면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불상이 여행객을 맞는다.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적산명신상이다. 불상 높이가 55.8m에 이른다. 구리로 만들어진 이 불상은 금으로 칠해져 있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을 지켜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불상 오른손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명신상 뒤편으로 5분 정도 돌길을 걸어가면 장보고 동상이 왼편에 칼을 찬 채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높이 8m에 무게는 6t에 이른다. 월전 장우성 화백의 장보고 영정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장보고상 주변으로 건물 다섯 채로 구성된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기념관 안에는 장보고의 활약상을 그린 그림들이 벽면 가득 채우고 있다. 
장보고가 중국으로 건너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뒤 법화원을 건립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창설해 해상무역활동을 한 일대기가 각각 그림으로 설명돼 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기증한 150여점의 유물과 청해진 발굴 유물 복제품, 장보고 시대의 무역선 복원 모형 등도 자리를 잡고 있다. 중국이지만 전시실에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 중국어와 함께 한글로 표기돼 있다. 중국이 아닌 마치 한국에서 장보고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장보고를 아는 우리나라 여행객이 보면 중국에서 공을 들여 장보고를 기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외국 여행객에게 법화원은 거대한 명신상이 주인공이고, 동아시아 해양 패권을 쥐고 흔든 장보고가 한국이 아닌 중국의 조상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게 된다. 명신상은 가장 좋은 위치에서 바다를 조망하고 있지만 ‘해신’이라 불리는 장보고상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적산법화원의 꽃인 관음전 관세음보살 극락보살계 108가지의 연꽃모양 분수쇼를 보여준다.

기념관을 나와 10분가량 숲길을 따라 나오면 적산법화원의 꽃이라 불리는 화려한 모양의 관세음보살상이 자리 잡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을 중심으로 분수 쇼가 오전 9시30분, 오후 3시30분 하루에 두 번 펼쳐진다. 분수는 음악에 맞춰 108가지 연꽃모양을 이루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웨이하이(중국)=글·사진 김시은 기자 dream@segye.com

 

장보고의 청해진은 대륙 (서)신라의 땅: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해신 장보고를 통해 본 서신라의 존재. 신라는 동.서로 두 군데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4/09 [12:32]

 

▲ 현 교과서에 나와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영토

 

장보고와 청해진의 이야기는 우리 역사의 실체를 조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장보고(?~846년)가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의 멸망 약 170년 후이고, 후삼국의 후백제 건국 약 50년 전이다. 즉 강단사학계에서 말하는 통일신라시대이고, 엄밀히 말해 대진국(발해)와 대치한 남북국시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신라가 박혁거세의 건국 이래 줄곧 한반도의 동남부(경상도)에 위치했고,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 알고 있다. 또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에서 영토를 확정지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일까?

신라의 참 역사 소개

신라는 양자강 하류의 안휘성, 절강성, 강소성 일대에 있었다.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이 때부터 한반도신라와 대륙신라는 각각 고구려의 속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한반도신라는 나중에 만주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  동이 5국(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특히 신라는 동.서로 있었다.


23대 법흥왕 23년(536년)에 자체연호인 건원(建元)을 처음 사용하고, 24대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고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등 자체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후 신라는 자체연호를 사용하다 28대 진덕여왕 4년(650년)부터 중국(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  절강성에 있는 신라 유적지. 특히 김교각 스님에 대한 유적지가 눈에 띈다. 우측 하단은 대만이다.

 

김춘추는 사위와 딸의 복수를 위해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산동성 일대에 있었던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망하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 그러나 당나라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을 알게 된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석문(石門: 하북성 석가장)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백제와 신라 땅에서 당나라를 몰아낸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별도로 기고하기로 한다.)

이 때의 신라 영역을 정확히 선으로 긋기는 힘들지만, 대륙의 동부연안과 한반도와 만주 일부를 아우르는 즉 황해를 가운데 내해(內海)로 두는 큰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고구려의 영토는 거의 대진국(발해)이 차지했으나, 백제 영토였던 산동성은 신라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영토란 자국이 강할 때는 넓었다가도, 상대방이 강할 때에는 쪼그라들어 원래 시대에 따라 들쭉날쭉한 법이다. 어떤 나라의 영토는 이랬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가 사실상 곤란하다.

여하튼 신라는 한반도의 동신라(東新羅)와 대륙 동부연안의 서신라(西新羅) 이렇게 두 군데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 증거가 바로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인 것이다. 또 장보고의 이야기는 불과 50~60년 후에 생기는 후삼국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참고 자료도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역사의 테마라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역사

장보고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학계는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기인 790년 경 전남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했으며, 신라가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을 한 청해진의 위치를 완도에서 40m 정도 떨어진  작은 부속 섬 장도(將島)로 비정했다. 그래서 현재 장도에 청해진 유적지가 만들어져 있다. 글쎄요, 과연 전남 완도의 장도가 장보고의 청해진일까? 

▲  전남 완도의 장도에 있는 청해진(?)유적지 좌측으로 갯벌이 보여 우측은 얕은 수심임을 알 수 있다.


2004년 8월 열린우리당 장영달(張永達)의원은 중국 산동성 영성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중국 안내원이 장보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장보고의 부친은 중국인이고, 아버지가 신라에 건너가 장보고를 낳았으며, 이후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며 중국이 장보고에 대한 역사왜곡을 하고 있어 역사적 규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필자가 듣기에는 중국 안내원이 한 말은 역사왜곡이 아니라 7~80%는 맞는 말로 들렸다.

안내원의 말대로 중국인인 아버지가 한반도 신라의 완도로 와서 장보고를 낳고, 이후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는지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추적해 보기로 하자. 추적의 초점은 그 안내원이 말한 신라가 전남 완도가 있던 한반도 동신라인지. 아니면 대륙에 있었던 서신라(강회신라 江淮新羅)인지가 관건이다. 필자 귀에는 안내원이 말한 신라는 분명 서신라를 말한 것으로 들렸다.

아래는 정용석 선생의 “참과 거짓의 역사 2”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1) 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普)나 장씨연원보감(張氏淵源寶鑑)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절강성 소흥사람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고손(高孫)에 해당하는 장정필은 고려 초기에 안동의 호족이 된다."라고 되어있다.

소흥은 절강성 동쪽인 절동(浙東)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장보고의 아버지가 원래는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백제유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하튼 신라로 귀화했기 때문에 아버지 때부터 신라인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장보고는 자기네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왜가 절강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100% 틀린 주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장보고와 관련된 지명들. 옛부터 산동성은 청(靑) 강소성은 해(海)라 했기 때문에, 청해진은 정해라는 한 지역이라기 보다는 이 두곳을 합쳐 진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8년(816년) 기록에 (장보고가 당나라로 들어가기 4년 전),
“봄 정월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도독으로 삼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절동(浙東)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春正月 侍中憲昌 出爲菁州都督 璋如爲侍中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

여기서의 청주도독이란 중국의 산동반도의 '청주(菁州)'를 다스리는 도독을 의미하며, 절동지방이란 바로 중국 절강성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 산동성이나 강소성에서 양자강이남 절강성 동쪽지방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남하한 기록으로 보인다. <수경주>에 이르기를 “절동(浙東)은 절강(浙江)의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절강는 절강성(浙江省)의 최대의 물줄기로 410Km를 흘러 항주(杭州)시를 거쳐 항주만으로 유입되는 강이다.”라고 했다. 한반도엔 역사적으로 절동이란 지명이 없으니 당연히 중국에 있던 지명으로 봐야 한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당서> 당 헌종(憲宗) 11년의 기록에 보면, “두 번에 걸친 대홍수로 서울 및 여러 지역이 물에 잠기고 4,700호가 떠내려가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당 헌종 11년은 A.D 816년으로 신라 헌덕왕 8년이다. 이는 서쪽의 당나라와 이웃한 동쪽의 신라가 똑같이 흉년이 들었단 이야기이다. 그래서 신라인 170명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서쪽(당나라)으로 가지 않고 절강성의 동편으로 간 것이다.

▲  완도와 절강 사이의 해류. 올라가는 주해류와 내려오는 연안해류가 뒤엉키는 곳이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돛단 고깃배가 그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으로 보는지?

 

사학계는 신라에 흉년이 들어 신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절강성 동쪽으로 간 것이고, 이 때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로 들어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주 그럴듯한 이론 같으나, 170명의 백성이 군선을 타고 가지는 않았을 테고, 고기잡이배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절강은 북위 30도이고 한반도는 북위 35도이다. 게다가 절강과 한반도 사이에 흐르는 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흘러, 옛날 돛단배로는 한반도에서 절강으로 해류를 거슬러 내려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해류 지도에서 보다시피 완도와 절강 사이의 바다는 해류가 뒤엉키는 곳이라 아마 한반도에서 절강에 도착하기 전에 전원 물고기 밥이 되었거나, 선상에서 굶어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류 사진 중 적색 해류가 주 해류이고, 청색이 연안해류임) 그리고 한반도에서 뭐 하러 그 멀고도 먼 절강까지 가는가? 같은 위도 상에 있는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든가, 아니면 북쪽에 있는 대진국(발해)으로 가면 될 것을....

이 두 기록에서 장보고는 아버지의 고향인 절강이나 신라에서 태어났으며, 신라는 절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산동성이 신라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년)의 기록을 보면,
“가을 7월에 당나라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헌종이 장차 이를 토벌하고자, 조칙으로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신라)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무장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운주는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산동성 동평(東平; 제남 부근) 지역을 의미한다. 산동성에서 ‘제’나라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나라를 공략했었다. ‘제’나라는 고구려유민인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이정기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782년 11월 운주지역에서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이납은 슬하에 사고(師古) 사도(師道) 사현(師賢) 사지(師智)라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기사의 주인공은 이납의 아들 이사도를 말함이다.

비록 짧은 제국이었지만 ‘제(齊)’나라의 황제인 이사도가 당나라의 운주절도사란 <삼국사기>의 기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고구려 황제를  “XX대장군 고구려왕”으로 봉했다는 기록들도 역시 잘못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하겠다.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당나라가 관직을 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당나라가 자기네 관직에 봉해놓고 토벌을 했다는 기록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산동성 운주에 있는 ‘제’나라의 황제인 고구려 후예 이사도를 멸하러 동족(同族)인 신라장군 김웅원이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군사 3만을 이끌고 갔다는 서글픈 역사를 보면서, 역시 신라는 동족을 해치는 데는 선수권자(?)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같은 고구려의 후예 대진국(발해)은 ‘제’나라를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준다.

양주(사 지방)절도사가 한반도의 서라벌에 가서 신리왕에게 3만을 징발해 전라도 순천에서 배를 타고 운주로 갔을까? 당시 3만의 병력을 싣고 갈 배는 신라에 있었을까?

 

여기서 이 기록의 순천군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당시 3군데의 순천이 있었다.
1) 순천(順天) : 전라남도 동남쪽에 있는 시. (송광사라는 사찰로 유명한 곳.)
2) 순천(順川) : 평안남도 중부 대동강 중류 연안에 있는 시. (한자가 다름)
3) 순천(順天) : 중국의 <독사방여기요>에서 순천부는 하북 북경(기주 또는 유주)이라 했다. 
 
만일 한반도의 전라도나 평안도 순천에서 3만 병력이 가려면, 육로는 대진국(발해)에 의해 막혀 있기 때문에 배로 갈 수 밖에 없다. 이럴 경우 병력을 실어 나르려면 많은 수(150~250척)의 군선이 필요하고, 그렇게 짧은 시일 내에 산동성에 갈 수가 없다. 그리고 해류 때문에 황해를 횡단하기도 어렵고, 대진국(발해) 앞바다의 연안해류를 거슬러 돌아가야 하는데 대진국이 이걸 보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리고 당나라는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멀고 먼 한반도에 있는 3만 군대를 징발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까도 의문이다.

참고로 약 770년 후의 임진왜란 때 전쟁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도 한정된 수량의 선박 때문에 한번에 1.5~2만 명씩 6번에 나누어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산동성으로 3만의 병력을 태워 보낼 선박이 신라에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신라가 수군으로 해전을 크게 했다는 역사기록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군선이 미리 준비가 되어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장보고가 1만 명의 군사로 청해진을 세우기 전, 당나라 해적들에게 신라 백성이 서쪽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전라도 순천에서 3만 병력을 한번에 실어 나를 수 있을 군선이 항시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해군력이 강한 신라가 그까짓 해적을 못 막아 백성들이 서쪽으로 끌려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장보고 이전에는 신라의 수군이 해적도 못 막을 정도로 아주 미약했고 배도 별로 없었단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즉 순천은 북경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주절도사를 보내 군사를 징발했다 하는데, 당나라의 양주는 산동성 운주 남쪽인 안휘성 부근이다. 안휘성 부근에 있던 양주절도사가 바다 건너 신라에 와서 군대를 징발해서, 3만 병력이 전라도 순천에서 배로 산동성에 가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양주절도사는 운주와 가까워 최전방을 지휘하는 지휘관인데, 급한 전선을 내팽개치고 한반도를 왔다 갔다 했다는 기록을 믿기는 어렵지 않은가!!!

분명 이 기록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주(안휘성)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순천군장군 김웅원은 북경(순천) 부근에 있다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육로로 산동성에 있던 이사도의 제나라를 협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서신라의 영역은 중국 대륙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4)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을 보면, 장보고와 친구 정년은 당나라에 들어가 서주 무녕군(徐州 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중국 안내원이 장영달 의원에게 “장보고가 당나라 장수로 활동했다.”고 한 것이다. 후에 장보고가 본국으로 돌아와 흥덕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여기서 서쪽이란 황해바다 건너 서쪽(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신라의 서쪽인 당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 해적들이 배를 타고 황해를 횡단해서 한반도까지 와서 신라백성들을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로서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해적들이 대륙에 있었던 서신라의 백성들을 데려가 해상에서 매매했고 육로와 황하의 수로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데려갔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본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의 청해진은 군사 1만 명이 주둔했던 큰 곳이었으며, 당에서 관직을 버리고 사수(泗水)의 연빙현(漣氷縣)에서 돌아온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국도(國都)로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고 신무왕(김우징)을 세우도록 한다. 후에 장보고는 재상이 되고, 정년은 장보고 대신 청해진을 지키게 된다고 기록되어있다. (漣氷(연빙)의 氷자도 水자를 고친 것 같아 보인다.)

분명 <당서>에는 장보고와 친구 정년이 같이 신라로 돌아 왔으며,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에 정년은 신라 땅 ‘사(泗), 연수(漣水)’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왜 <당서>의 내용대로 두 사람이 같이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  '청해금지완도'라고 적혀있다.

 

그건 아마 사. 연수를 신라 땅이 아닌 중국 땅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라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끝에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다 사라지고 소문조차 없었을 것이다.(雖有乙支文德之智略 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減而無聞)”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고려에서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던 장보고에 대해 중국 서적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중국의 원문과 다르게 기록했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또 소문조차 없었던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 중국 기록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어떻게 지금(고려)의 완도라고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청해진이 고려의 완도였다면 고려 땅에 장보고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기록은 분명 후대에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이는 필시 신라가 대륙에도 있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후대의 누군가가 고쳐 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은 어디인가?

중국 영성시 석도(石島: 옛 정해위 靖海衛)에 장보고 유적지가 있고, 한국에는 전남 완도군 장도(將島)에 청해진 유적지가 있다. 현재 석도 옆 청도(靑島)에는 중국의 해군사령부(해군기지)가 있으며, 장도는 갯벌이 심하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곳이고 현재 항구나 접안시설이 없다. 

▲  완도 장도의 청해진은 썰물 때 갯벌이 생기고 수심이 얕아 절대 수군기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 중국 산동성의 석도 장보고 유적지. 가파른 돌산이 있어 갯벌이 있을 수 없고 수심이 깊어 아무 때나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사진으로만 봐도 청해진은 전남 완도의 장도가 아니라 석도가 진짜 장보고의 청해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석도에는 만도(灣島)라는 섬이 있는데 이 만(灣)자가 중국 발음으로 완(WAN)으로 발음된다. 게다가 석도에는 장보고가 세웠다는 적산(법화)원이란 절도 있고, 고대 지도에 장보고의 사당으로 보이는 해신묘(海神廟)가 근처에 있다. 이 두 곳 중 어디가 진짜 장보고의 청해진일까? 

▲   고지도의 산동성에 해신묘(사당)와 적산 정해라고 적혀 있다. 이건 누구의 사당일까?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 본 해신 장보고의 청해진은 분명 산동성에 있었다. 참고로 장보고는 무주(武州)사람 염장에게 피살당한다. 839년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는다. 이 무주와 진해라는 지명도 중국에 있다. 어떤 학자는 중국의 정해위(靖海衛)은 완도의 청해진(淸海鎭)과 한자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지명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정해위는 예전에 청해로도 쓰였다는 고지도가 있어, 이런 주장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하겠다.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청해는 어느 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동성을 나타내는 청(靑)과 강소성을 나타내는 해(海)를 합친 지역을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우리를 동쪽의 청룡으로 여겼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하는 중국의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은 푸른 가면과 망토를 두른 청룡장군으로 나오고, 설인귀가 백호장군으로 나온다. 청(靑)은 예전부터 동이(東夷)를 의미했고, 동이의 본고장은 산동성이다. 그리고 장보고를 해도인(海島人)이라 했는데, 이는 원래 해도인(海到人)인데 고쳐쓴 것으로 (외지에서) 강소성에 온 사람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  중국이 만들어 놓은 어머어마한 크기의 장보고의 동상. 신라까지 동북공정을 하려는 의도인데, 우리에게는 오히려 서신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왜 중국은 신라인인 장보고의 유적지를 석도에 만들어 놓았을까? 지금까지 중국은 서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다고 조작했고, 소중화(小中華)인 우리 강단사학계도 중국과 똑같이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라인들의 숙소인 신라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 동부에 서신라인 대륙신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제는 장보고까지 중국인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역사를 정확히 밝혀내지 않으면 우리는 치우천자에 이어 또 한 명의 위대한 조상인 장보고까지 중국에게 빼앗길 것이다.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자기네의 변방역사라고 말하는 중국은 신라인 장보고를 중국인이라고 말함으로서 신라까지 동북공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강구열입력 2018. 3. 22. 20:49

신라 지켰던 녹유신장상 '100년 만의 부활' (daum.net)

국립경주문화재연·박물관 특별 진열 / 1915년 경주 사천왕사 터에서 첫 발견 / 파편 200여점 발굴조사·연구거쳐 복원 / 섬세하고 사실적 표현·뛰어난 조형성 /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 받아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이 고조되며 전쟁 위기로 치닫을 무렵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불러 대응책을 물었다. “(경주)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좋겠습니다.” 법사의 말대로 했더니 신라에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이 서해에 수장됐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679년)의 배경이다. 사천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었던 호국불교의 대표사찰이었다.

사천왕사의 정확한 폐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매월당 김시습의 시집 등을 보면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대 초반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5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여는 특별진열에 나온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3점은 지금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천왕사의 가장 구체적 형태다. 폐허로만 남았던 6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중과 다시 직접 만나며 절이 과거에 누렸던 위상와 영광의 일단을 재현한 것이다.

◆시작 - 신라의 대표예술가 양지

 

경주 사천왕사터에서 녹유신장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5년이었다. 부서진 파편에 불과했지만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 뛰어난 조형성,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어 당시부터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뛰어난 조각품은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만들었다. 그는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과 함께 신라를 대표할 예술가로 꼽힐 만한 뛰어난 조각가였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 활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녹유신장상의 제작자라는 점에서 사천왕사가 창건된 문무왕 때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지 스님은 여러가지 기예에 통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뿐만 아니라 영묘사 장육존상과 천왕상, 법림사 주불과 좌우금강신, 석장사 탑삼천불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글씨도 잘 써 영묘사와 법림사 등 큰 절의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작품 활동 외에 전하는 바가 적어 양지 스님의 출신과 이력 등을 두고 각종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전한다는 점에서 신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각상 형식, 제작 방식 등이 고대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서역에서 온 외국인일 것이란 추정도 제기된다. 또 신라에 와당 제작술 등을 전한 백제 승려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부활 - 200여점의 파편으로 살려낸 걸작

 

일제강점기에 발견되기는 했으나 녹유신장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복원작업은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시작됐다.

녹유신장상은 사천왕사의 금당 앞에 세워진 목탑 두 기의 기단 부분을 둘렀던 것이었다. 모두 48점이 제작되었는데, 각각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A·B·C형’ 세 종류의 틀을 만들어 찍어내 그것을 한 묶음으로 배치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B형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A형은 오른쪽에,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C형은 왼쪽에 두어 신장들이 목탑 주변 사주를 경계하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연구는 파편을 이용해 녹유신장상의 온전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천왕사터 발굴에서 확보된 파편 200여점을 먼저 A형, B형, C형으로 분류해 최대한 맞추어 전체적인 형태를 갖춰 갔다. 이때 맞춰지지 않는 부분은 다른 파편을 이용해 온전한 도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연구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녹유신장상의 도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며 “실물 파편이 존재하지 않는 일부 부분만 따로 제작해 메꿔 넣었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수정 2016-01-14 21:36 등록 2016-01-14 21:36

신라인 당나라 갔던 교역항 터 ‘唐(당)’자 새긴 기와 나왔다 (hani.co.kr)

기자노형석

화성 상안면 유적에서 출토된 ‘唐(당)’자명 기와와 기와에 새긴 명문의 탁본

 

삼국~통일신라시대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 항구로 지목되어온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당성(唐城) 추정유적(사적 217호)에서 ‘唐’(당)자가 새겨진 기와 등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당성 추정유적에 대해 최근 3차 발굴조사를 벌여 삼국시대 쌓은 1차 성벽과 망해루터, 집수시설, 연못터 등과 ‘唐’자명 기와를 비롯한 유물 1천여점을 확인했다고 14일 밝혔다.

핵심 유물인 ‘唐’(당)자명 기와는 삼국시대 1차 성벽 안에서 나왔다. 기와 겉표면에 집을 뜻하는 ‘宅(택)’자 등이 함께 새겨져 있다. 연구소 쪽은 “실제 위치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당성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희귀자료”라며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을 당성으로 불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당항성(黨項城)으로도 불리웠던 당성은 원래 백제의 강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가 점령해 당성군이란 지명을 붙였고, 6세기 신라가 진출해 산성을 쌓고 중국과의 해상교류 거점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상안리 유적을 당성터로 비정해왔으나 일부 학자들은 당성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별로 없다며 의문을 제기해왔다.

또, 함께 조사된 망해루터에서는 항해 안전을 비는 제례 기물로 사용한 듯한 흙으로 만든 말모양 상들이 다량 출토됐고, 집수시설터, 연못터에서도 교역품인 중국 자기 조각 등이 나와 이 유적이 당성터였음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근거들을 상당수 확보하게 됐다는 평가다. 연구소 쪽은 15일 오후 2시 현장설명회를 열어 발굴성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양대문화재연구소 제공

 

 

2018-12-19 11:17

반구대 암각화 주변서 신라 누각 흔적 나왔다(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전망대 서쪽서 석렬, 동쪽서 집석 유구·연화문 수막새 나와

반구대 암각화 전망대 시굴조사 모습. 사진상 가운데 전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석렬 유구가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보 제285호 선사시대 암각화가 있는 울산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 누각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 흔적이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1월 19일부터 반구대 암각화 전망대 주변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해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존재한 건축시설 일부와 신라 기와·토기를 찾았다고 19일 밝혔다.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그동안 조사를 통해 공룡 발자국 화석이 많이 나왔으나, 건축물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

암각화 대곡천 건너편에 있는 전망대 주변에서 권위 있는 건축물에 사용하는 연화문 수막새와 건축시설 흔적이 나오면서 통일신라시대 무렵부터 이곳에 암각화와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누각을 세워 이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반구대 암각화 전망대 오른쪽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 석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사단은 고고물리탐사 결과와 지형 조건을 고려해 유적이 있을 확률이 높은 지점 9곳에 탐색 구덩이를 설치했다.

그중 전망대에서 암각화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서쪽) 지점에서 2∼3줄로 늘어선 통일신라시대 석렬(石列·돌로 만든 경계)과 조선시대 석렬을 확인했다.


 

퇴적층에서 나온 통일신라 석렬은 지반을 다지기 위해 점토와 목탄, 굵은 모래를 섞어 깔고 그 위에 건물 기초시설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남상원 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석렬은 구릉 급경사면과 평탄면 사이에 있으며, 구릉을 둘러싸고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며 "낮은 구릉이나 정상부에 세운 건축물을 보호하거나 경계를 지으려고 조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석렬 유적에서는 인화문(印花文) 토기 조각, 대형 항아리 조각 등 많은 통일신라 토기와 기와 조각이 출토됐다.

반구대 암각화 시굴조사에서 나온 연화문 수막새.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아울러 전망대 왼쪽(동쪽)에서는 강돌[川石] 수백 개로 이뤄진 집석(集石) 유구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신라 고식(古式) 막새인 육엽(六葉) 연화문 수막새과 고려 후기∼조선 초기 기와 조각이 나왔다. 이곳에서 더 왼쪽으로 떨어진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팔엽(八葉)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됐다.

남 연구사는 "집석 유구는 건물터가 아니라 폐기물을 쌓아둔 곳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석렬과 집석 유구를 보면 전망대 주변에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건축물이 자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집석 유구 위에서 기와가 많이 출토됐는데, 위치상 주변 경관을 조망하는 누각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유적은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명문과 함께 신라사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며 "추가 조사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https://youtu.be/NtYseItL3cY

반구대 암각화 일대서 발견된 신라 시대 누각 흔적 / 연합뉴스 (Yonhapnews)

 

 

 

<참고자료>

 

통일신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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