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후기신라 (1) 670년~676년 신라 - 당 전쟁(나당전쟁) 본문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
[고구려사 명장면-137]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임진강을 당군 남하의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을 영유하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라의 전략 변화가 배경이 되었다.
이렇듯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신라와 당 사이 전쟁에서 종속적인 변수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당전쟁의 결과가 결국 보덕국 고구려유민들의 존재 방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운동을 좌절케 한 나당전쟁에서 673년 이후 전쟁의 전개와 마무리까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의 연합에 균열을 가져온 전투가 바로 672년 8월 석문(石門)전투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신라는 이후 주장성(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요충지에 다수 성곽을 축조하면서 방어망 구축에 전력을 다하였다.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년)조에 보이는 아래 축성 기사는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큰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8월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물론 이런 산성 축조들이 곧 닥칠지도 모를 당군의 침공으로 신라인들이 공포심에 빠졌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에 대비한다는 장기 전략과 함께, 어쩌면 풀어졌을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문무왕이 석문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김유신에게 대책을 묻자, "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으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 요소를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위의 산성 축조는 김유신의 제안에 따른 산성 방어망의 정비라고 할 수 있겠다. 김유신은 여전히 신라 정부의 중추였다. 그의 판단과 말 한마디는 곧바로 정책으로 실현되곤 했다.
석문전투 패배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신라군은 673년 8월에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임진강과 한강 하류에서 당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겨울철 당군의 공세에 임진강 이북의 근거지를 모두 잃어버린 고구려 부흥군을 받아들여 신라군은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때까지 당군의 주요 목표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공세였다. 물론 그 배후에 신라군이 있음을 진작에 알아차렸고, 석문전투에서는 아예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니, 당으로서도 이제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할 때였다.
674년 정월 당 고종은 신라가 백제 영역을 차지하고, 또 고구려 부흥군을 후원한다는 점을 이유로 삼아 문무왕의 책봉 관작을 철회했다. 대신에 당시 당 장안에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도록 했다. 아울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으로 삼고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장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여 신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인궤 등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을 전개한 때는 이듬해 675년 2월이었다. 즉 674년 1년 동안 기록상으로는 당군의 군사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당군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기록상 알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1년 동안 당의 공세는 소강상태였고, 다행스럽게 신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4년(674)조 다음 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8월에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는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六陣)병법을 관람하였다.
8월, 9월에 수도에서 벌인 연이은 군대 사열은 곧 서라벌 사람들에게 신라군의 자신만만한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문무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주도하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효과도 의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9월에 문무왕은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封)하였는데, 이 역시 고구려 부흥군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신라군 단독으로 당과의 전쟁을 치르겠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나당전쟁을 시작하고 이끌어간 중심은 문무왕과 김유신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당제국의 거대한 힘을 직접 목도한 신라 장군과 귀족 중에는 당과의 전쟁이 무모한 선택이고 잘못된 결정이라고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개중에는 당과 내통하기도 했다. 예컨대 674년 7월 1일 김유신이 사망하자, 곧바로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나당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669년에는 한성 도독 박도유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었고, 670년 12월에는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당군과 내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특히 당군과 대결하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주의 군사령관들이 연이어 배반하는 행적은 곧 당과의 전쟁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문무왕과 김유신 입장에서는 당과의 전쟁을 선택한 이상 이런 내부 불만과 불안해하는 민심을 잘 다독거리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673년 임진강전투에서부터 675년 매초성전투까지 신라 측 사료는 신라군의 승리로, 당측 자료는 당군의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673년 호로하(瓠濾河·임진강)전투에 대해서 '구당서' 고종본기에서는 "윤5월 정묘일(13)에 연산도 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에서 고려 반역 도당을 쳐부수니 고려 평양의 남은 무리가 신라로 달아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9월에 당 군사와 말갈(靺鞨)·거란(契丹)의 군사가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서 죽은 당 군사는 셀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와 당이 서로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호로하전투에서 양측은 서로 적잖은 희생을 치렀던 모양이다. 물론 당측 기사는 윤5월 전투에 상대방을 고구려 부흥군으로 기록하고 있고, 신라 측 기사는 9월에 신라군의 당군 전투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호로하 유역에서 두 번의 전투가 벌어진 경우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자신의 승리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연천 전곡리 전경 : 전곡리 일대는 매초성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비정된다. /사진=문화재청상원 2년 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 무리를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침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신당서' 신라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가을 9월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명을 이끌고 매초성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격퇴시켰는데, 전마(戰馬) 3만380필을 얻었고 남겨놓은 병기도 비슷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이해의 전투는 674년 정월에 계림도대총관으로 임명된 당 유인궤가 1년여 뒤 2월에 임진강의 칠중성(七重城)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측 기록에서는 칠중성전투 이후 말갈군을 바닷길로 보내어 신라 경내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매초성전투다. 당측 기록에서는 이근행이 매초성에서 세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반하여, 신라본기에는 20만명의 말갈군을 물리치고 전마와 병장기 다수를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상반된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자세하게 검토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매초성전투에 대한 신라 측 기록에서 말갈군 20만명은 아무래도 의문이 많다는 견해가 다수다. 사실 한반도 내에서 한쪽 병력이 20만이나 되는 전투가 벌어질 지리 공간은 별로 없다. 특히 매초성 전투지가 임진강 전곡 일대로 비정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 말갈군의 전사자 기록이 없이 전리품만 기록한 점도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당측의 기록처럼 당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당측 기록에서는 이 매초성전투를 마지막으로 나당전쟁 기사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초성전투에서 당군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전쟁을 여기서 종료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보면, 이 전투의 실제 상황은 당군의 군사행동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고 판단된다. 즉 양측 기록처럼 서로의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상대방에서 커다란 타격을 주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신라본기에서는 매초성전투 이외에도 천성(泉城)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당군과 말갈군과의 전투 기록을 남기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이듬해 기벌포전투로 나당전쟁 관련 기사를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일련의 전투 기록은 다음회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신라본기의 기사가 풍부하다는 점은 그만큼 신라인들이 나당전쟁 과정에서 가졌던 절실함을 반영하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신라본기의 기록들에는 당시 "전쟁의 승리"를 절박하게 기원하는 신라인들 심성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고 보인다. 역사 기록을 당대인의 심성으로 들여다볼 때 좀 더 생생하게 읽히는 좋은 사례가 바로 나당전쟁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https://v.daum.net/v/20211209153304107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고구려사 명장면-139] 한국사 교과서에는 나당전쟁에 대해서 675년 매초성(買肖城)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격퇴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신라의 승리로 종결시킬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당전쟁의 승리로 비로소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 대해 이런 교과서 기술대로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그만큼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인상적인 전투 중의 하나이다.
교과서 기술이 이렇게 명확한 면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과연 이 두 전투를 신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지, 승리라고 해도 대규모 전투로 결정적인 승전보라고 할 수 있는지, 매초성의 위치를 어디로 비정할 수 있는지, 기벌포 전투 시점도 676년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당전쟁을 신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지 등등 이다.
그렇다면 두 전투에 대해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은 근거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역사 연구의 기본이 사료 비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애국적인 관점의 투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좀 더 따져 올라가면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인이 갖고 있던 나당전쟁에 대한 인식을 오늘 우리가 반복한 결과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나당전쟁의 마지막 전개 과정을 짚어보고자 한다.
674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왕 문무왕의 책봉 관작을 박탈하고 장안에 머물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하는 한편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장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어떤 사정인지 이들 원정군이 실제로 한반도에 등장한 때는 1년 뒤인 675년 2월이었다.
지난 회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신당서] 신라전 기록을 보면 이때 당군의 공격으로 3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칠중성 전투, 말갈병에 의한 전투, 마지막으로 이근행이 지휘한 매초성 전투이다. 이중 칠중성 전투와 매초성 전투는 비록 전황이 다르게 기록되었지만 <신라본기>에도 보이는데, 말갈병이 신라 남경을 침공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유인궤가 칠중성 전투 이후 말갈병을 바닷길로 보냈다는 기사를 보면, 유인궤는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출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군대에 말갈병이 별도 부대로 포함되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동 중에 요동이나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일부 말갈병과 합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갈병은 물론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 이근행의 말갈군도 유인궤의 당군과 보조를 맞추어 육로를 통해 한반도로 진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매초성 전투는 신라본기 기록대로 9월에 일어났을 것이다.
유인궤가 공격한 칠중성은 호로하(瓠瀘河:임진강)를 도하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673년 9월에도 당군과 격전을 치렀던 곳이며, 이때 신라군과 당군은 한강 하류 왕봉하(王逢河)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673년 9월 전투와 675년 2월 전투는 매우 유사한 전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75년 2월에 칠중성 전투 이후 바닷길로 말갈병으로 침공하게 한 신라 남경 역시 한강 하류 지역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당 측 기록에 의하면 이 두 번의 전투에서 유인궤는 승리를 거두고 본국으로 회군하였고, 대신에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이 신라군과의 전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전투가 매초성 전투이다.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와 당이 서로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은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는 전투의 승패 여부보다는 매초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좀 더 살펴보고 싶다.
나당전쟁 지도. 대부분 교과서에 수록된 나당전쟁 지도에는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가 부각되어 있다./사진=7차교육과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매초성(買肖城)의 '肖'는 '초' 혹은 '소'로 읽히는데, 근래에는 매소성으로 주로 읽고 있다. 이는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전투에 참가한 매소천성(買蘇川城)과 동일한 곳으로 보고 매소성으로 읽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매초성과 매소천성을 다른 곳으로 보기도 한다. 매초성의 위치에 대해서 연천 대전리산성이나 양주 대모산성에 비정하는 견해가 현재는 주류이다.
그런데 근래에 매초성을 예성강 상류의 요충지인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수곡성의 고구려 이름인 매차홀[買且忽=買旦忽]이 매초성과 서로 통한다는 근거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이렇게 보면 당시 신라군과 당의 전선이 임진강 일대에서 예성강으로 북상하게 되어 전쟁 상황의 전개가 많이 달라진다.
매초성 전투와 관련해서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천성(泉城) 전투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자. 천성 전투는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675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 안내자로 삼아 와서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서 이겼는데, 1400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 도망가니 전마(戰馬) 1천필을 얻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본기>에는 매초성 전투가 9월 29일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9월의 천성 전투는 매초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전투로 보인다. 물론 이 기사는 의문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당의 장군인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년)에 상주(象州)로 유배 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연 설인귀가 이 천성 전투에 등장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신라 측에서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 천성 전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설인귀가 워낙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후대에 다른 당의 장군을 설인귀로 오해하고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임진강과 한강의 입구인 오두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 당군은 보급부대로서 천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매초성의 말갈군이 보급이 끊겨 후퇴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 기록에 신라군의 전리품이 병선 40척, 전마 1천필이라는 점에서 이 당군이 단순히 보급부대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앞서 2월에 칠중성 전투를 벌인 유인궤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바닷길로 들어왔고, 보급보다는 전투부대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또 천성을 강화 교동도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천성이 섬인지 여부는 위 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천성(泉城)의 '泉'은 '白水'로도 기록되는 글자로서, 672년 전투에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 연합군이 당군을 물리친 백수성(白水城)과 동일한 곳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백수성은 예성강 일대로 보기도 하지만, 필자는 황해도 재령 일대로 비정한 바 있다. 앞서 매초성을 수곡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른다면, 천성 역시 백수성 즉 재령이나 예성강 일대로 비정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매초성과 천성 두 곳의 전투 지점을 통해 당시 신라군의 북방전선이 예성강 혹은 예성강을 넘어 북상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672년 석문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당의 공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신라는 평양 이남 지역을 차지하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하고 임진강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언제 다시 북방 전선을 예성강 너머까지 확장했을까?
당이 674년 정월에 문무왕의 책봉을 삭탈하고, 675년 2월에는 칠중성을 공격하는 등 강경책을 취하자, 신라 역시 전열을 정비하고 북방 전선을 임진강 일대에서 예성강 일대 혹은 그 너머까지 북상시켰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점에서도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에 대한 신라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신라본기>에는 천성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매초성 전투에서는 큰 전과를 거두는 승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매초성에서 당의 장수 이근행이 20만명의 말갈군을 거느렸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과장인 듯하다. 고구려 부흥군을 공격할 때 이근행은 말갈군 3만명을 거느렸으니, 아마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초성 전투의 승패에 대해서 신라와 당의 기록이 서로 어긋나고 있음은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이다.
<신라본기>에 기록된 나당전쟁 최후의 전투는 676년 11월에 벌어진 기벌포 전투이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 기벌포 전투 역시 당 측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위 기사에서 당의 장군으로 설인귀가 등장한다. 앞서 천성 전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설인귀는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이 기사 역시 의문이 있지만, 천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기벌포 전투 자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전투 시점을 달리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671년 11월로 보기도 하고, 매초성 전투 직후인 675년 11월로 보기도 한다.
기벌포 전투의 내용도 양측 주력군의 회전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가 퇴각을 기도하는 당군과 그에 의탁한 백제인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소탕하는 성격의 전투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단 이 전투에서 신라 측 주장인 시득의 관등이 8등인 사찬이기 때문에 신라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천성 전투의 신라 장군인 문훈이 3등인 잡찬급이라는 점과 비교된다. 또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뒤 크고 작은 전투가 22회나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력 부대 사이의 전투라고 보기 어려운 전황이다. 그렇다면 기벌포 전투가 당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나당전쟁을 마무리 짓는 전투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겠다.
매초성 전투가 신라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고, 또 기벌포 전투 역시 당의 주력 수군을 격파한 전투가 아니라면, 결국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로 신라가 군사적으로 당군을 제압하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교과서의 서술은 다소 지나친 평가라고 하겠다. 다만 교과서의 서술이 근거하고 있는 <신라본기>의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기록에는 나당전쟁의 승리를 염원했던 신라인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신라인은 나당전쟁 시기에 당군을 물리쳐 왕조와 국가를 보존하고, '삼한일통'했던 자신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역사 기록으로 남겼고, 그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 곳곳에 담겨 있다. 이런 신라인의 의식을 읽어내고 이해할 때 나당전쟁의 실상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https://v.daum.net/v/20211223152101384
신라인이 나당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고구려사 명장면-140]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얻은 값진 승리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커다란 자부심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전쟁과 승리를 기억하는 방식은 때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고구려가 수양제와 당태종의 침공을 물리쳤을 때도 그 승리에 대한 고구려인 나름의 기억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고구려 독자적 역사 기록이 소멸되고 승전의 기억조차 전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고구려와 수·당 간 전쟁은 전적으로 중국 측 기록에 의존해 구성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많았다.
다행스럽게 나당전쟁의 경우는 달랐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에서 스스로 승리를 거뒀다고 자부했고, 그 자부심을 역사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의 기사로 전해지고 있는데 중국 측 기록과는 달리 신라인의 시각에서 나당전쟁을 바라보는 내용이 적지 않다.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 두 전투는 전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스스로 승리했던 전투라고 기록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675년 9월 매초성 전투와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가 벌어진 그 사이에 여러 전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앞의 두 전투에 가려져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데, 오히려 나당전쟁에 대한 신라인의 기억을 되새겨보는 데는 더 적절한 기사라고 하겠다. 아래에 신라본기 기사 그대로 제시한다.
①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②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였다.
③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고 전멸시켰다.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④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⑤ (676년) 가을 7월, 당 군사가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죽었다.
위 전투 기사 ①~④는 신라본기에서 매초성 전투 기사 뒤에 이어서 기록돼 있는데, 그렇다고 이 전투 전부가 매초성 전투보다 늦게 벌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①의 아달성 전투는 삼국사기 열전 소나전에 풍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675년 봄에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②의 칠중성 전투는 2월에 당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한 전투와 동일한 전투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그 뒤에 다시 칠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매초성 전투 이후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위 전투 기사들은 675년 중 어느 달에 벌어졌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매초성 전투 기사 뒤에 몰아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에 보이는 전투 지역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아달성은 강원도 철원, 적목성은 강원도 회양, 칠중성은 경기도 파주, 도림성은 강원도 통천에 비정되며. 석현성은 불분명한데 대략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전투 지역은 곧 신라군과 당군의 주요 접전지로서, 당시 신라의 북쪽 전선이 어디쯤이었는지를 대략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위 다섯 전투 기사에서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바로 신라 측 전투 지휘관인 성주와 현령이 모두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점이다. ③~⑤의 경우에는 성도 지켜내지 못하고 당과 말갈 등 적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모두 패전한 전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경우 신라의 승리를 다소 과장해 기술한 면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패전이나 다름없는 이들 전투를 일일이 기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신라본기에는 ④ 기사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이어진다.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 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위 기사는 마치 675년에 벌어진 당군과의 전투를 마무리하는 듯한 기록인데, 매초성 전투 외에도 18번이나 되는 크고 작은 승리를 얻었음을 자부하고 있다. 그중에는 그 승리를 자랑할 만한 전투가 몇 건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18번의 전투가 아니라 패전에 가까운 앞의 ①~④ 기사를 더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라인에게 위 기사의 전투는 결코 패배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비록 성은 함락되고 성주와 현령 및 많은 군사가 전사했지만 바로 그 죽음을, 이들 전투와 순국한 인물들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숭고한 기억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삼국사기 소나 열전에는 기사① 아달성에서 소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소나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현재 충남 천안시 직산면) 출신인데, 아버지 심나(沈那)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적으로부터 "신라의 나는 장수"라고 불렸던 인물이었다. 675년에 소나는 아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말갈군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이때 소나의 행동에 대해 열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고자 도모하지 않을 것이니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분노하여 적에 돌진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단지 화살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또한 화살을 쏘니 화살이 벌떼처럼 나는 듯했다. 아침때부터 저녁때까지 싸우니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嘉林郡·현재 충남 부여)의 양가집 딸이다. (중략) 가림군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하니 그 아내가 곡하면서 대답하였다.
"남편이 평소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제 뜻대로 죽은 것이다."
대왕(문무왕)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의 일에 용감하였으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소나열전)
소나와 그의 아내, 그리고 문무왕까지 모두 전장에서의 죽음에 대해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과 맞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또 전장에서의 죽음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다. 이런 죽음을 오늘날 순국(殉國)이라고 표현하는데, 소나의 경우 등이 꼭 국가 의식의 발현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소나의 행위에 문무왕은 지방 출신에게 중앙 관등을 부여함으로써 보상하고 있다. 이는 이후 소나 가문의 사회적 위상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물론 소나가 그런 보상을 바라고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대가를 바라는 것을 단지 통속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희생과 죽음에 공동체가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건강하고 지속적인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해 단지 말만 번지르르한 칭찬으로 때운다면 과연 그 뒤 누가 같은 희생을 기꺼이 치르겠는가. 소나의 예를 보면 유동, 탈기, 선백과 실모, 거시지 등의 죽음도 그에 합당한 존중과 보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김유신 초상(1926년 발간,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 수록): 김유신은 아들 원술에 대해 비정한 아버지가 됨으로써 당시 신라 사회에 국가와 개인이 맺어야 할 충의의 기준을 다시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싸워 죽으려고 하므로,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렸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만일 죽어서 성공이 없다면 살아서 후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
(원술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고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나라 군대가 뒤를 추격하였다.
거열주(居烈州) 대감(大監)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공 등은 힘을 다하여 빨리 떠나가라! 내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이때야말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 가운데로 돌입하여 전사하였는데, 그 아들도 따라 죽었다. 대장군 등은 슬며시 서울로 들어왔다.
위 기사에서도 아진함과 그의 아들은 신라군의 퇴군을 위해 기꺼이 전장터에서 죽음을 택했다. 정작 패전을 책임져야 할 상장군은 살았으니 그래서 '슬며시' 돌아왔다. 모든 신라인이 순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원술은 기꺼이 죽고자 했지만, 담릉이 이를 말렸다. 그런데 전장에서 죽음을 대하는 원술과 담릉의 입장 차이가 눈길을 끈다.
즉 원술과 담릉은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태도는 같지만, 담릉은 공을 세우는 죽음, 즉 명예와 보상이 뒤따르는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 최고 지배층인 진골에 속하는 원술과 달리 중간 계층쯤 되는 담릉의 경우에는 죽음 못지않게 그에 따르는 이름값이나 사회적 보상이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원술은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 김유신에게 배척되고 어머니에게 외면받았다. 그런 수치스러움을 씻고자 참가한 675년 매소천성(買蘇川城)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술의 경우가 그 시기에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어떤 동기에서든지 전쟁에서 자기 희생과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가장 큰 존중을 받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전쟁터는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교차되는 긴박한 현장이다. 생사의 갈림길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희생을 지고한 가치로 여기는 순수한 순국 의식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을 게다. 그런 죽음에 대해 사회적 명예가 주어지거나 사회·경제적인 보상이 뒤따를 때 더욱 장려될 수 있다. 신라 정부는 통일전쟁기에 사회 전 계층의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이에 대한 보상을 그 어느 때보다 확대했다. 지방민에게도 중앙 관등을 부여했고, 관등의 승진과 경제적 보상도 그 어느 때보다 후했다.
소나 열전이 포함돼 있는 삼국사기 열전 7권에는 7세기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 대거 나와 있는데, 그 대부분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나당전쟁과 관련해서는 소나, 원술 정도밖에 기록돼 있지 않지만, 앞서 본 당군과의 전쟁에서 희생한 유동, 탈기, 선백과 실모, 거시지 등도 열전 7권에 들어 있는 인물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요새 같으면 국립묘지에 모시고, 또 기념관을 세워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삼국사기 열전 7권은 일종의 책으로 만든 기억의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가 여러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인물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가 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희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위기에 희생되는 인물도 적지 않다. 그런 희생을 통해 위기를 깨닫고 위기를 넘어설 방도를 찾게 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소중한 죽음이 된다. 이런 죽음을 존중하고 공동체가 보상해줄 때 그 희생이 비로소 값진 희생이 된다. 7세기 신라인은 그걸 알았고 실천했으며, 그런 죽음들이 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서 신라 승리의 견인차가 됐다. 그리고 나당전쟁을 기억하는 방식도 바로 그 점에 맞춰졌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https://v.daum.net/v/20220106154800649
약자가 선택한 전쟁, 약자를 배신한 전쟁 - 나당전쟁
[고구려사 명장면-136] 나당전쟁에 관련한 일련의 연구를 진행한 서영교 교수는 나당전쟁을 다룬 저서에 "약자가 선택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당전쟁이 갖는 핵심의 하나를 잘 드러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서 교수는 서역과 당의 정세를 살피던 신라가 당과의 전쟁 시점을 선택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어서 나당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국제 환경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좀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 발발 시점을 떠나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을 연합군으로서 함께하면서 당제국의 거대한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신라가 당을 상대로 '전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나당전쟁이 "약자가 선택한 전쟁"임은 분명하다.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선택한 이유 및 고구려 부흥운동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에 동맹국인 당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음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그 배신을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신라가 당의 이런 '배신'을 미처 모르고 어리숙하게 당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신라야말로 551년에 백제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곧이어 동맹국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던 전력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부터 신라는 그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또 이용할 줄도 알고 있었다. 이런 과거 경험을 떠나서도, 신라는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하는 과정에서 당의 배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군사 행동을 신중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 연재 110회 <황산벌 전투 뒤집어 보기>에서 다룬 바 있으니, 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당전쟁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의당 신라에 돌아갈 몫을 거부하고 전쟁의 결과물을 독차지한 당의 '배신'에 대해 신라가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감행한 전쟁이다. 그 신라의 몫이 정당하다는 명분은 <답설인귀서>의 첫머리에 있는 김춘추와 당태종의 밀약이었다. 이 밀약에 대해서는 본 연재 106회 <당태종과 김춘추의 밀약을 공개하다>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이 밀약은 백제 영토는 물론 평양 이남 고구려 영토도 신라에 귀속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에 따라 자신의 몫을 돌려받겠다고 나당전쟁을 '선택'한 신라인의 의지를 고려해 보면 고구려 유민의 '복국'을 신라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 이남은 신라의 영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한성 고구려국을 지원한 것은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당분간 당군의 남하를 저지해주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가 백제 영토를 다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신라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당군의 군사력에 맞서 고구려 부흥군의 군사력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당군을 막아주면 그만큼 신라의 군사력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고, 이들 부흥군이 당군에 격파되면 어차피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존재를 저절로 제거할 수 있으니 신라로서도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이렇게 약자의 운명은 강자의 이해관계에 절대적으로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 또한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672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명, 이근행이 말갈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이들은 전 해인 671년에 평양에 진주하여 한성 고구려국을 공격했다가 고구려 부흥군에게 격퇴되었다. 그 뒤 이들은 아마도 요동성쯤에서 겨울을 지내고 병력과 군수 물자를 보충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말갈 장수 이근행과 말갈군은 요동성이 아니라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합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672년 7월에 평양에 도착하였다면, 요동성을 출발지로 볼 때 대략 6월께에 출진하였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군사행동을 시작했는지가 의문이다. 671년에는 안시성의 고구려 저항세력을 진압하다가 9월께에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혹 672년에도 아직 요동 일대에 남아 있던 고구려 부흥세력 때문에 한반도 진군이 늦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8월부터 당군은 본격적으로 고구려 부흥군과 전투를 벌여 먼저 평양에 가까운 한시성과 마읍성을 빼앗고, 재령강 일대에 있는 백수성(白水城) 가까이 진군하였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연합군은 고간,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과 대결하여 적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후퇴했고 신라군은 석문(石門) 벌판까지 추격하였다. 당군과 말갈군이 석문 벌판에 진영을 벌리자, 신라군 역시 대방 벌판에 군영을 벌리고 대치하였다. 이때 신라군 중 장창당(長槍幢) 부대가 따로 진영을 치고 있다가 당군 3000명을 포로로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다른 신라군 부대들이 각자 공을 세우기 위해 진영을 분산했는데, 미처 새 진영을 갖추기 전에 당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신라본기> 기록을 보면 백수성 전투에서는 고구려군과 연합하였는데, 석문 전투에서는 신라군만 등장한다. 기록의 누락일 수도 있지만, 신라군이 고구려 부흥군을 빼놓고 단독으로 전투를 벌였다고 짐작된다.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전공(戰功)을 탐하는 태도를 보면 이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은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백제 지역에서 당군에 거둔 승리가 신라군을 자만하게 하고, 여기에 백수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군의 전투력을 낮추어 보고 서로 전공을 경쟁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하니 아마도 석문 전투에서 거두게 될 전공을 고구려 부흥군과 나눌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사이의 연합에 균열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곧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뜻한다.
참고로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김유신의 아들 원술 이야기가 바로 이 석문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에서 많은 신라군 장수와 병사가 전사하였고, 원술 역시 장렬하게 전사하고자 하였으나, 측근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리는 바람에 살아왔다가 부자의 의리가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술에 대해서는 삼국통일 전쟁 당시 신라인의 애국적 관념과 관련해서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다.
석문 전투의 패배는 신라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부랴부랴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 주장성은 오늘날 남한산성에 비정된다. 그리고 9월에는 당 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용서를 구하면서 그동안 전투에서 포로로 잡았던 당과 백제의 장수들과 군사를 돌려보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때부터 신라는 평양 이남 고구려 영토를 확보하려는 뜻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신라가 당의 웅진도독부를 내쫓고 백제 영토를 차지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백제 땅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지만,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마저 차지하려다가 당 정부의 분노를 더 키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당시 전황과 관련해서는 <신라본기>와 중국 측 기록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신라본기> 자료가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이에 의하면 신라군은 석문 전투 이후 후방으로 물러나 임진강 일대에 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 직전 신라와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대략 임진강 유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라가 평양 이남 땅을 포기했다고 해서 이 지역을 고구려 부흥군에게 넘겨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즉 석문 전투 이후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지원도 점차 접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의 전황이 이러한 동향을 시사하고 있다.
임진강 : 삼국시대에 호로하로 불리웠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전 해인 672년만 해도 당군과의 전투 지점이 백수성, 석문 등 황해도 재령 일대였는데, 673년에는 호로하와 왕봉하로 크게 남하하였다. 당시 당군은 별다른 전투도 없이 임진강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투 지점을 통해 신라가 북부 전선을 기존의 신라 영역으로 물러났다고 추정한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이후 당군의 군사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해 겨울에 당군이 고구려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한다. <신라본기>에는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을 고구려 성으로 기록하여 신라 영역과 구분하고 있다. 우잠성은 예성강 유역 황해도 금천군, 대양성은 강원도 회양군, 동자성은 경기 김포시 일대로 비정된다. 이 3성은 당군에 밀린 한성 고구려국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그 거점이 차례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신라군은 호로하와 왕봉하 전선을 지켰을 뿐, 그 북쪽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신라의 지원을 당이 질책하자, 신라는 그 지원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듯하다. 백제 땅을 차지한 신라로서는 더 이상 당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신중함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신라 북부 전선에서 당의 공격을 막아주었던 고구려 부흥 세력 입장에서는 곧 동맹에 대한 '배신'이었다.
약자로서 신라는 당에 배신당했지만, 한성 고구려국이라는 또 다른 약자를 배신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조국(祖國)에 대한 마지막 헌정인 한성 고구려국의 부흥운동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https://v.daum.net/v/20211111150314982
'역사저널 그날' 나당전쟁은 복수심에서 시작? 문무왕의 두 얼굴
[OSEN=장우영 기자] 삼국시대, 최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루고 나당전쟁까지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오는 25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신라 문무왕, 당나라에 복수의 칼을 갈게 된 사연은?’을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 복수심에서 시작된 나당전쟁?
삼국 중 가장 힘이 약했지만,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신라. 그런데, 나당전쟁이 시작된 이유가 다름 아닌 문무왕의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알려졌다. 문무왕이 당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된 사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의 뛰어난 외교술의 뒤에는 사실 아버지 김춘추의 남다른 조기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떡잎부터 달랐던 외교의 달인 문무왕의 외교 비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문무왕, 당을 향해 선제공격을 감행하다
665년 8월, 당 황제는 패망한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옛 백제 영토를 다스리는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문무왕으로 하여금 강제로 화친하게 한다. 큰 희생을 치르며 어렵게 정복한 백제와 다시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신라.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삼켜야 했던 문무왕은 당과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고구려가 패망시킨 뒤,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낸 당. 더 이상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문무왕은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당을 향한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압록강 너머 요동의 오골성으로 진격한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 세력 고연무의 부대. 과연 신라와 문무왕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 외교의 달인, 두 얼굴의 문무왕
갑작스러운 신라의 공격에 분노한 당 고종은 신라를 징벌하기 위해 장수 설인귀를 보낸다. 이때 설인귀와 문무왕 사이에 ‘설인귀서’와 ‘답설인귀서’가 오간다. 문무왕이 ‘답설인귀서’를 통해 밝힌 전쟁을 벌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를 신라에 주기로 한 당 태종의 밀약을 23년 만에 공개하며 전쟁의 명분을 제시한 문무왕. 하지만 최대강국 당과의 전쟁은 쉽지만은 않았고, 석문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며 신라는 수세에 몰린다. 위기에 빠진 신라, 신라를 위한 문무왕의 선택은 다름 아닌 기만전술이었다고 알려져 궁금증을 자아낸다.
▲ 반복되는 역사, 끝나지 않은 외교
675년, 천성전투에서 당의 보급로를 막은 신라군은 이어지는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어가고 끝내 문무왕은 삼한일통의 대업을 완성한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남다른 기지와 판단력으로 결국 신라를 최후의 승자로 만든 문무왕. 문무왕의 외교를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나라가 문무왕에게서 배워야 할 외교 비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본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오는 25일 밤 9시 40분 KBS1 역사저널 그날 390회 고대 동아시아 외교전쟁 ④ ‘복수혈전, 나당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elnino8919@osen.co.kr
https://v.daum.net/v/20221223111159908
https://v.daum.net/v/20151128160304724
신라가 나당전쟁서 이긴건 당의 흥망성쇠에 있었다
[서울신문]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서영교 지음/글항아리/816쪽/3만 8000원
7세기의 동아시아는 무대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옮겼을 뿐 전국시대와 다름없었다. 중국의 수·당,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 바다 너머의 왜국, 중앙 초원의 돌궐·설연타·거란·토욕혼, 티베트 고산지대의 토번 등이 뒤엉켜 벌인 국제전은 그야말로 ‘유라시아판 열국지’였다. 21세기의 지정학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풀이되는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중원대 한국학과 서영교 교수가 최근 출간한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은 고대 제국들이 존망을 걸고 맞부딪쳤던 치열한 대결 구도와 복잡하게 얽힌 역학 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저자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친 612년 살수대첩부터 676년 나당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시대를 세밀하게 되짚어 복원한다. 그러면서 삼국통일 과정에서 진행됐던 일련의 전쟁들이야말로 당시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웠던 ‘제1차 동아시아 세계대전’이었으며 한반도의 지정학을 최초로 결정지은 위대한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임진왜란을 조선과 왜국의 전쟁이 아닌 국제 정치적 역학 구도 속에서 치러진 세계전으로 바라보는 최근 학계의 움직임과 맞물려 주목받는 대목이다.
송나라 역사가 사마광의 ‘자치통감’, ‘수서’, ‘구당서’, ‘신당서’를 비롯한 25사와 ‘돈황본토번역사문서’, ‘요동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조선상고사’ 등 고대 문헌과 고대사에 관한 한·중·일의 최신 연구 성과들을 집대성했다. 실증적 사료와 함께 문학적 서사 형식을 취하면서 전장에서 불꽃처럼 스러져 간 장수들의 리더십과 당시의 치열한 전쟁을 눈에 보일 듯이 묘사하고 있다.
612년 수나라 황제 양광은 고구려를 ‘악의 축’으로 몰고 선전포고를 했다. 30만 대군이 고구려를 향했으나 돌아온 이는 2700명에 불과했다. 살수대첩 이후 고구려는 중국인들에게 세상의 끝이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이었다.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수나라가 망하고 618년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다.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뒤 스스로 황제가 된다. 당 태종 이세민의 집권은 고구려와 백제에는 위기였지만 고구려·백제, 왜에 포위된 신라에는 희망이었다.
643년 당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에 서한을 보낸다. “신라는 우리 당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며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고구려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라.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645년 태종은 정식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중국 역사에 박힌 가시이니 그것을 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당의 패배였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와의 소모전에 지치고 백제의 이중플레이에 신물이 난 당에 신라는 끊임없이 구애를 보냈다. 외교의 귀재 김춘추는 나당동맹 체결만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다.
책은 고구려군의 살수대첩과 안시성 전투 외에 무명 노장 김유신이 신라의 구원자로 등장한 대야성 전투, 백제의 비극으로 끝난 황산벌 전투, 백제가 무너지고 신라 삼국통일의 서막이 열린 백강 전투, 고구려를 내전에 휩싸이게 한 평양성 전투 등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전투들을 시공을 오가며 그려 낸다. 저자는 당나라 황실의사 장원창의 ‘신수본초’에 남은 기록을 통해 백제의 의자왕이 위암으로 추정되는 반위(反胃)로 긴 투병 생활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백제 왕조의 통수권이 약화돼 결국은 패망하게 됐다는 사실도 새롭게 조명한다. 또 사마광이 ‘자치통감’과 별개로 편찬한 ‘고이’(考異)의 기록 가운데 연개소문이 몽고의 설연타 제국 매수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추후 편찬된 자치통감 주석에서 찾아내 발굴하는 성과도 보였다.
저자는 당의 지원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친 신라가 어떻게 세계 최강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주변국의 정세와 당시 지형을 파고든다. 그는 당나라의 설인귀가 670년 동돌궐 기병 11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고원 대비천에서 토번군과 맞붙어 전멸당한 사실에 주목한다. 이후 당은 실크로드 교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된 동북아 거점을 만주에서 서역으로 옮기게 됐고, 이는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감행하게 만든 배경이 돼 통일신라가 지속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긴박한 정세의 일목요연한 전개와 자세한 전투 묘사, 거침없는 공간 이동과 세력 구도의 거시적인 조망, 전략 전술의 디테일, 전쟁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등은 여타 고대 전쟁연구서와 차별성을 지니며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https://v.daum.net/v/20150808013208190
고구려 멸망이후 10년 끈 나·당 전쟁 이겼지만 대륙 잃은 한민족, 동아지중해 조정역할 약화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9) 삼국 통일전쟁
660년 당과 신라 연합군은 수륙양면군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지만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663년 8월 나당 연합군과 백·왜 동맹군 사이에서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왜국은 나당 수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 해안가의 임시정청을 20여㎞ 내륙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이어 가네다성, 오노성, 기이성을 필두로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전략적 요충지마다 해양방어체제를 갖췄다. 모두 도호슌쇼(答春初) 등 망명한 백제 달솔(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 품관)들이 주도한 백제식 산성이다. 그리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700년 역사와 자유의지를 남긴 채 사라진 고구려
고구려는 백·왜 동맹군과 협동작전을 시도했으며, 666년을 비롯해 전쟁 중에도 여러 번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군은 고구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외교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외곽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됐다. 강국(사마르칸트) 왕에게 온 외교사절 가운데 두 명이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고구려인이었다. 국제관계로 봤을 때 튀르크인이나 소그드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테지만 초원과 산록, 사막을 지나 무려 4000여㎞를 행군한 것이다. 구국외교에 실패한 고구려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립무원인 고구려를 총력을 기울여 공격했다. 다음해인 668년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에 압록강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고, 9월 수륙양면작전과 남북 협공을 받던 평양성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함락당했다. 그러나 압록강 이북의 40여 성은 계속 저항했으며, 안시성은 671년 7월에야 항복했다. 고구려는 700년의 역사와 자유의지를 유산으로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70년간 벌어진 대전쟁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제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나라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복속할 것을 압박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손잡고 육지와 해양에서 10년 가까이 ‘나당전쟁’을 벌였다.
백제·고구려 유민과 이뤄낸 통일
고구려 복국군은 한성(서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672년에는 신라와 연합해 백빙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이어 673년 호로하(임진강 중류) 전투에서도 패했다. 신라군은 이런 상황들을 활용해 671년 10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방어했다. 675년 당군 20만 명을 매초성(경기 양주) 전투에서 궤멸하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22번의 전투 끝에 당군 4000명을 괴멸시켰다.
결국 신라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서로 단결해 당나라군과 전쟁을 벌여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질서의 재편이라는 유리한 환경도 작용했지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복수심에 불타 당나라 편에서 신라를 공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민족의 역사는 가정하기조차 싫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고구려와 수·당 간에 벌어진 70년 전쟁은 동아시아 종주권을 둘러싼 종족 간의 대결, 문명의 대결이었으며, 무역권 쟁탈전의 완결판이었다(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한민족 미래를 밝힐 삼국통일의 교훈
질문을 던진다. 안정적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왜 패배했을까? 신흥강국인 수와 당의 전략적인 유연성과 넘치는 에너지, 통일을 달성한 자신감과 동아시아 패권을 향한 집념에 밀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가 민족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거나 필요성을 덜 인식했으며, 외교정책의 실패로 신라로부터 공격받고 백제나 왜의 도움을 못 받았던 탓일까?
어쨌든 고구려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 주도권을 일부 빼앗기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 역할이 약해졌다.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 종족들은 훗날 우리를 압박한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한편 일본열도에는 탈출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본국이 탄생(670년)했으며, 이들은 신라는 물론 한민족과 영원한 적대적 관계를 고수하게 된다. 지금 세계질서가 재편되고 중국 중심의 질서가 강요되는 현실 속에서 남북한의 적대감은 더욱 높아간다. 거기에 남남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몫이며, 사건의 축적이 아니라 의미의 재생이 아닌가.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663년 8월 백제·왜 동맹군은 나당 연합군에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당나라는 667년 9월부터 고립무원인 고구려를 총력을 기울여 공격했고 이듬해 평양성은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함락당했다. 당나라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신라에 복속할 것을 압박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대결을 선택했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손잡고 676년 이민족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 주도권을 일부 빼앗기면서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 역할이 약해졌다.
https://v.daum.net/v/20210517090327340
착실한 준비로 백제와 고구려 무릎 꿇린 신라, 2단계로 당나라와 전쟁 이겨 삼국통일 이뤘다
(58)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왕권 강화와 선진 문물 수용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김춘추의 활발한 외교활동
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출병을 원하는 ‘걸사표(乞師表)’를 보냈으며, 계속해서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고당(高唐)전쟁이 벌어질 때 군사 3만 명을 파병했고, 그 와중에 백제에 7개 성을 빼앗겼다.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나라를 방문해 태종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신라와 당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삼국사기》).
결국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성공했고, 신라는 당나라 관복을 차용했으며, 고종이 즉위하자 연호를 폐기한 뒤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문정창, 《한국고대사》). 귀국 도중 고구려 수군에게 붙잡힌 김춘추가 탈출에 실패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평양성 함락 이후 2단계로 접어든 삼국통일전쟁
660년 여름(6월), 13만 명의 당나라군은 서해 중부를 횡단해 덕적도에 도착, 태자가 지휘한 신라함대 100척과 합세했다. 나당 연합수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한 김유신의 5만 군대와 합세해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비성을 함락한 뒤에 웅진성으로 도피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해 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의 지원을 요구했다. 백제와 금마군(익산 일대)에서 전투하다 죽은 무열왕을 계승한 문무왕은 수레 2000여 대에 쌀과 벼 등을 실어 평양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습격과 대풍·대설로 인해 군사와 말이 얼어죽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신라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을 백강전투에서 물리친 뒤 국력이 강화됐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귀순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멸(滅)하는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문무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북상해 당군의 평양성 도착을 기다렸으나, 당군이 패퇴하자 회군했다. 668년 당고종은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깃발을 주면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도 무열왕은 군사편제상에서 소정방의 지휘를 받았다. 당고종은 백제의 항복을 받고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伐)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663년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으며(《삼국사기》), 전쟁준비를 했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1)
경제·문화·종족 불완전한 신라의 삼국통일…원조선·고구려 계승 아쉬운 '반쪽 통합' 그쳐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9) 신라의 삼국통일 의미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떠 당나라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
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 멸망시켰다. 고구려 유민들도 요동과 요서에서 복국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당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676년 설인귀의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패하자 완전히 철수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화해·공격·굴복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민족통일 사업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사찰 등 건설하며 정신 통일·공동체 복원
신라는 당나라의 문화, 의복, 제도, 연호, 책봉 등 많은 것을 선택해서 정체성과 자의식이 약해졌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탓에 국토가 황폐해졌고, 질병과 군량미 공급으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또 외국 군대의 공격과 장기간의 진주 등은 동족 간, 지역 간에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낳았다. 정부는 유민들에게 관직을 주고, 군대에도 편입시켰으며(신형식, 《통일신라사연구》), 부석사·감은사 등 사찰을 많이 건립해 공존의식과 공동체를 복원하려고 했다. 원효(화쟁사상)를 비롯한 승려들도 전쟁의 상처와 회한, 민족분열 등을 치유하는 일에 동참했다.
신라는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과는 전쟁도 불사했다. 선박 300척을 동원한 일본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해양방어체제를 증강했다. 732년 발해의 공격을 받은 당나라의 요구에 군사를 파견했고, 이후 발해와는 냉전체제를 지속했다. 8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신라는 안정을 찾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비로소 삼국통일의 성과를 누렸다.
8세기 중반에야 삼국통일의 성과 누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종족적 통합을 부분적으로 성공시켰을 뿐인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재분단된 남북국 시대가 되면서 원조선과 고구려 문화는 불완전하게 전승됐고, 자원·영토도 상실했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은 훗날 요·금·원·청 등으로 변신해 한민족을 압박했다. 남쪽에서는 일본국이 탄생해 경쟁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질됐다(윤명철, 《역사활동과 사관의 이해》).
남북한의 적대관계와 남한의 동서 분열, 한국이 속국이었다고 세계에 선언하는 중국의 무한팽창, 한민족의 영구분열을 획책하는 일본, 해양 진출의 교두보를 원하는 러시아, 대륙 세력을 막는 초병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미국…. 이런 혼란의 시대에 신라인들의 애국심, 세계를 보는 눈, 인재 양성책 등은 남북통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방법론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2)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시아 무역의 시대 '물류 허브'였던 신라…서·중앙아시아 잇는 실크로드 출발·종착점
(60) 신라의 산업과 무역활동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국력이나 전력을 비교하면 약세였지만 화랑정신 등으로 다져진 특유의 용기와 자주의식을 갖고, 복국전쟁을 벌이던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을 포섭해 민족전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토번(티베트)의 계속되는 공격과 아랍세력인 압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진출, 실크로드 지역과 투르크 등 북방 지역의 동요 등 유라시아 세계의 역학관계와 혼란을 겪는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 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 내부에서도 토지의 황폐화, 인명의 손실, 군수산업 약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혼란, 고구려·백제 유민 흡수와 처우 문제, 사회 갈등 등 전쟁과 통일의 후유증이 산적했다. 그 가운데 국부를 창출시키는 정책이 근본적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안정과 무역의 시대
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국가들 간 충돌도 줄어들었다. 이제 정치와 군사가 주도하는 냉전질서에서 벗어나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헤게모니와 실크로드 무역권을 둘러싸고 아랍의 압바스왕조, 토번, 실크로드 도시국가 등과 전쟁을 이어갔으나 기본적으로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경제발전에 주력했다. 상공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면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를 조직적으로 활용했다.
발해도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수립하면서 확장된 유라시아 무역망에 진입하기 위해 당나라에 무려 130차례나 사신단을 파견했다. 신라도 8세기에만 60회 이상의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당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조선술과 항해술 등이 뛰어나 동아지중해의 무역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데 적격이었다. 그런데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면 당나라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당시의 국제 관계와 일본의 해양 능력으로는 발해와 일본 간에는 직접 무역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유리한 환경이었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서아시아부터 당나라 일본까지 연결하는 무역망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사신단은 공무역까지 겸했으므로 인원이 많았다. 752년에 나라(奈良)에서 도다이사(東大寺)가 완성됐을 때 왕자인 김태렴(金泰廉)은 7척의 배에 700명이라는 대사절단을 이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 반은 수도인 헤이코조(平城京)와 외항인 나니와(오사카 지방)에서 무역했고, 남은 인원은 규슈의 대재부(고로칸)에 머물며 장사했다. 사신단들은 체류 기간이 길어 일본 야마토 조정이 신라로 파견한 견신라사들은 보통 7개월에서 12개월 동안 신라에 체류했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신라는 자연스럽게 제철·제련·직조업 등의 산업이 발전했다. 수도인 경주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공방이 많이 생겼다. 조하주·어아주·루응령 같은 값비싼 비단 명주 제품과 금은 세공품, 생활용품 불교용품을 생산했고, 이 물건은 외국으로 수출됐다. 일본에는 1년에 한 번씩 공개하는 정창원이 있는데, 이곳에 신라 보물이 많이 소장됐다. 또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신라먹·종이·악기·모전(모직요)·잣·꿀·경전·불교도구들·거울·사발(佐波理) 등의 물품 목록이 있다. 또 훈육향·청목향·정향·곽향·령육향·감송향·용뇌향 등 남중국·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산, 페르시아산의 각종 향료와 약재를 팔았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사는 공작꼬리, 비취새의 깃털, 타슈켄트산 슬슬, 아라비아산 모직깔개인 구수, 인도양에서 잡은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비롯해 자단목·침향 같은 남방계 물품이 기록돼 있다.
신라가 당나라 및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이슬람권 상인들과 무역을 벌인 것이다. 이븐 쿠르다지바(820~912년)의 《제 도로 및 제 왕국지》 같은 아랍의 문헌에는 아랍 상인들이 신라에 온 사실과 신라의 상황, 수입 상품이 기록돼 있다.(정수일 《신라·서역교류사》) 아랍 상인이 신라에 거주했다는 증거는 처용가나 경주 괘릉에 서 있는 페르시아인 석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춰 신라는 당나라에서 정치적인 안전을 보장받고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와 간접무역을 벌였고, 일본국과 중계무역까지도 했다. 무역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797년에 편찬된 《속일본기》에는 신라 물품을 구매하려는 좌대신, 우대신 등의 대관과 왕녀들에게 구매 대금으로 서경인 대재부에서 면 7만여t을 줬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현상은 발해도 동일했다. 하지만 명실 공히 육상 및 해양 실크로드의 종착역은 발해도 일본도 아니라 신라였다.(3)
<자료출처>
(1)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71663791
(3)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081321481
<참고자료>
통일신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82066811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082622371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1090399371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실명 공개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 김유신의 황금저택 [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1.04.04
The 1,500-Year-Old Love Story Between a Persian Prince and a Korean Princess that Could Rewrite History | Ancient Origins (ancient-origins.net) UPDATED 8 MAY, 2018 - 18:51 MARK OLIVER
반구대 암각화 주변서 신라 누각 흔적 나왔다(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18-12-19
'한국 최고 불경 발견' 신라 반야심경 동판경-국민일보 (kmib.co.kr)2018-10-24
김씨가 550여년간 다스린 신라…후대에 박씨 왕 나온 이유는 | 연합뉴스 (yna.co.kr)2017-10-15
새롭게 단장한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관' (daum.net)2014.05.20.
신라왕족 묘지명 중국 시안서 발견(종합) | 연합뉴스 (yna.co.kr)2013-02-14
장보고의 청해진은 대륙 (서)신라의 땅: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09
[단독]국보 ‘보림사 삼층석탑’ 일제의 엉터리 복원, 80여년 만에 찾아냈다.경향신문 (khan.co.kr)2018.05.29.
천년 넘게 엎어져 있는 '경주 남산 마애불' 원위치 찾는다 | 연합뉴스 (yna.co.kr)2018/03/04
경주 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 보물 지정 (kukinews.com)2017-04-05
“신라 괘릉 무인상, 아라비아인 아닌 금강역사상이 모델” : ZUM 뉴스2017. 2. 1.
865년 제작된 통일신라 '청동북' 보물 됐다 (daum.net)2016. 08. 31.
경주 황룡사터 주변 통일신라시대 우물서 글자 새겨진 청동접시 - 경향신문 (khan.co.kr)2016-06-16
신라인 당나라 갔던 교역항 터 ‘唐(당)’자 새긴 기와 나왔다 (hani.co.kr)2016-01-14
국보급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 공개 | 연합뉴스 (yna.co.kr) 2014.10.10.
은은한 자태 뽐내는 사리호, 일반에 첫 공개 (daum.net)2014.05.20.
신라 미륵사지 금동 향로 (daum.net)2014.05.20.
미국에서 호평 받고 돌아온 보원사 철불 (daum.net)2014.05.20.
석가탑서 8세기 무렵 통일신라 불상 발견 (daum.net)2013. 07. 19.
경주 열암곡 마애불 처리 골머리 - 울산제일일보 (ujeil.com)2008.01.07
'남국 > 후기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후기신라 고고학 (1) 사천왕사터 발굴 - 녹유신장벽전과 명문편 (112) | 2024.11.23 |
---|---|
2. 후기신라의 강역 (1) 후기신라(통일신라)의 북계는 어디인가? (8) | 2024.10.04 |
1. 후기신라 (4) 892년 ~ 936년 후삼국시대 (19) | 2024.10.04 |
1. 후기신라 (3) 889년 농민 봉기(원종·애노의 난) (0) | 2024.05.28 |
1. 후기신라 (2) 36대 혜공왕(765~780)~46대 문성왕(839~857) 왕위쟁탈전 (0) | 2021.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