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입력 2023. 8. 6. 10:21

"우린 신라인의 후예" 한국이 무시한 '오랑캐'의 진실 (daum.net)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연인>

[김종성 기자]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지난 4일 첫 방송을 탄 MBC 사극 <연인>은 동아시아 최강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는 전환기를 배경으로 한다. 17세기에 벌어진 그런 변화 속에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여진족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그 시기에도 조선인들은 그들을 하찮은 오랑캐로 치부했다. 제1회 방영분의 37분경에 묘사된 장면이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주인공 유길채(안은진 분)의 첫사랑이자 전도유망한 청년 유생인 남연준(이학주 분)이 지역 선비들에게 상소문을 올리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모이셨으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중원에서 명나라와 후금 오랑캐가 싸우고 있는 것을 다들 아시지요? 헌데 오랑캐왕이 우리 임금께 보낸 글에 자신을 대청 황제라 칭하더니, 조선을 너희 나라라 불렀다 합니다.

헌데 조정에서는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와 싸우기는커녕 오랑캐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 스승님께서도 허락해주신 바, 우리들의 뜻을 모아 전하께 상소 올리고자 합니다."

이 장면은 훗날 한국에서 청나라로 불리게 될 대청(大淸)이란 국호가 사용된 직후를 배경으로 한다.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해는 광해군 집권기인 1616년이고, 그 아들 홍타이지(청태종)가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해는 인조 집권기인 1636년이다.

선비 남연준의 제창에 대해 청년 유생들은 격한 찬동을 표시했다. "너희 나라?", "뻔뻔한 오랑캐놈들 같으니!",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에게 본때를 보여야지!" 등의 발언들이 튀어나왔다.

딱 한 사람, 이장현(남궁민 분)은 남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그의 입에서는 "명나라가 반드시 오랑캐를 이긴다는 보장이 있소?"라는 말이 나왔다. 당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맹국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여진족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여진족을 혐오하고 야만시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한국 문화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위와 같은 드라마 장면뿐 아니라 영화나 서적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처럼 비하하는 여진족이 실은 우리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고대에 이들은 우리와 동족이었고 발해 멸망 이전만 해도 한민족과 함께했던 말갈족의 후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그는 여진족이 한민족과 하나의 '아'를 형성한 시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동족인 여진족"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신채호는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어족과 중국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면서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민족·흉노족은 전자에 속한다"라고 한 뒤 "조선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발해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시기에, 말갈족에 들어가 이들을 여진족으로 재편한 인물이 있다. 신라 왕족 출신인 김함보가 그 주인공이다.

여진족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청나라가 편찬한 <만주원류고>는 여진족 시조인 김함보가 신라인이라고 알려줬다. 청나라 정부가 관찬 역사서를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후예'라고 공식 인정했던 것이다.

여진족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은 몽골 원나라도 인정했다. 위의 <금사>는 금나라 정부가 편찬한 책이 아니라, 몽골 정부가 중국어로 편찬한 금나라 역사서다. 이 <금사>에 "금나라 시조는 김함보라고 불린다. 고려에서 왔다"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 신라 출신인 김함보는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 말갈족에 들어갔다. 그래서 "신라에서 왔다"라고 하지 않고 "고려에서 왔다"라고 서술한 것이다.

이처럼 말갈족은 서기 10세기에 여진족으로 재편되면서 주류 한민족과 좀더 가까워졌다. 말갈족일 때보다도 여진족일 때에 혈통적으로 더 가까워졌던 것이다.

여진족 천대했던 한국인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 MBC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시하고 천대한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의 위 장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은 친숙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진족은 한없이 무시했다. 여진족이 고대 한민족에서 분리됐을 뿐 아니라 고구려·발해 때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에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야박한 대우였다.

한국인들이 여진족을 배척하는 것은 금나라와 청나라에 눌린 굴욕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업구조나 경제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문명을 발달시킨 주류 한민족과 달리 여진족은 농경문명보다는 유목문명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한민족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라며 그들을 천시했다. 수렵문명보다는 유목문명이 선진적이고 유목문명보다는 농경문명이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이런 관념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해버리기에는 그들이 이룩한 객관적 결과물이 너무 거대하다. 김함보의 후손들이 왕실을 형성한 여진족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도 진출하지 못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해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금나라는 중국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북중국을 지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사회를 이끌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금나라를 능가하는 결과물을 구축했다. 청나라는 북중국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통할했다. 13세기에 몽골 기마병이 동유럽과 중동까지 휩쓴 이후부터 1840년 아편전쟁에서 서유럽이 중국을 꺾기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최강국의 권위에 필적할 강대국이 여타 지역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여진족 청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끌었다. 1840년 이전까지는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나라는 그런 결과를 거두는 과정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같은 치욕과 상처를 조선왕조에 안겼다. 그 이전의 금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려왕조에 상당한 아픔을 안겼다. 그래서 금나라와 청나라의 성과를 평할 때는 그것이 고려와 조선에 미친 부정적 영향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 해도, 금나라나 청나라가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과 말갈족(여진족)은 갈라졌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926년이다. 앞으로 3년 뒤면 1100주년이 된다. 한민족과 말갈족이 갈라진 것은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민족이나 문명의 분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이처럼 '불과' 천년 전만 해도 한 식구였던 여진족이 지금은 남남이 되어 있다. 오늘날 그들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여진족의 역사도 자기네 역사였다면서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이 유목민이고 전쟁의 상처를 입혔다는 등등의 이유로 한민족이 그들을 남남으로 다루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남남처럼 인식되는 현상은 동족이 남남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연인>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연인이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은 같은 민족일지라도 어느 순간 이민족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다. 하나였던 민족이 갈라져 남남처럼 지내는 일은 대륙에서 당기는 힘과 해양에서 당기는 힘을 함께 받는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는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다.

 

 

[ 2015-03-27, 13:10 ]

"淸 태조 누르하치는 신라인 후손" (chogabje.com)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인터뷰- 동아시아의 문명의 시작과 끝
이상흔(조선pub)

 

 

<주> 아래 기사의 출처는 조선pub입니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중원 대륙에서 발견되는 삼한시대 관련 유적
 
-낙랑군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많겠지만, 지난번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주제를 ‘삼국시대’로 옮기겠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삼한(三韓: 마한ㆍ변한ㆍ진한)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 발해만에서 시작되는 중원 대륙이었다면 삼한도 한반도에만 존재했을 수가 없겠네요.
 
“내몽고 적봉시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는 고조선이 남긴 문화유적이라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가점하층문화와 동질성을 띈 문화유적이 하북성 남쪽 서수현(보정시 관할)의 한가영(韓家營)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시경》에 나오는 연(燕)나라 부근에 있었다는 한성(韓城:  서주시대 맥족의 한성, 즉 한국)의 위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바로 서주시대 이전에 있었던 대륙한국의 존재를 문헌과 고고학이 아울러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하북성 서수현 고적 설명 기록 중에는 ‘해왕성(解王城)’에 관한 기록도 등장합니다. 이는 북부여ㆍ동부여ㆍ졸본부여의 시조들인 해모수ㆍ해부루ㆍ고주몽과 연관이 있는 지역임을 나타냅니다. 고주몽도 원래 해씨(解氏)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민족은 태양을 숭배했던 민족으로 여기서 말하는 해는 물론 ‘해’, 즉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의 한자 표현입니다. 중국의 한족역사상에는 ‘해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북성 서수현의 ‘해왕성’ 유적은 부여의 해부루, 해모수와 관련된 유적이 확실해 보입니다.”
 
-우리는 국사 시간에 ‘고구려가 압록강 지류의 졸본(중국 요녕성 환인현) 지방에 자리 잡았다가 나중에 압록강 중류 유역의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으로 천도하면서 발전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국내에 교육부 검정교과서 8종이 그 내용이 대동소이합니다. 고구려에 관한 서술에서 요서(遼西: 오늘날의 요서가 아니라, 북경 북쪽에서 발해만으로 빠지는 조하를 기준으로 한 고대의 요서지역을 말함)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분명히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압록강 유역이나 요동지방이 아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대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은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영토가 요서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성을 쌓을 때 한나라로부터 새로 땅을 빼앗아서 쌓은 것이 아니라, 한나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했으니, 이때 고구려의 활동 중심지가 이미 요서지역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 오늘날 《삼국사기》에도 언급된 ‘요서고구려’에 대해서 학교에서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요.
 
“이병도가 《삼국사기》의 이 조항에 주석을 달면서 ‘잘못 기재한 오류가 아니면 지명의 오기일 것이다’라며 요서고구려를 부정했습니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했고, 우리의 강단사학이 이병도 사학을 계승하고 있으며, 이를 계승한 강단사학의 주장이 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늘날 국사교과서에서 요서고구려를 잃어버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이병도와 이병도 사학을 계승한 강단사학은 고대의 요동을 오늘날 요하 동쪽의 요동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써 한국사를 압록강 이남의 반도사로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며 “요서ㆍ요동에 대한 오해가 한국사를 요서조선ㆍ요서낙랑ㆍ요서고구려ㆍ요서백제를 모두 잃어버린 반신불수의 역사로 왜곡시킨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심 원장은 고대의 요서ㆍ요동이 오늘날의 요서ㆍ요동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산해경》에 의하면 〈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요녕성의 요하는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갑니다. 요녕성에 있는 모든 강은 지리적으로 볼 때 발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남쪽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요녕성의 요하는 《산해경》에서 말한 고대의 요수와는 완전히 다른 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은 어디에 있는가. 하북성에 있습니다. 가령 하북성 남쪽에 있는 호타하는 동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갑니다. 하북성에서 정확히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가는 강은 ‘조하’와 ‘난하’가 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에 현재 북경 북쪽에 있는 조하가 조선하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하가 고대의 요수이며 진한시대에 설치한 요서군, 요동군의 기준이 된 것은 바로 이 조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병도를 위시한 강단사학자들은 역사지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고대의 요수를 현재의 요녕성 요하로 오인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패수를 청천강, 낙랑을 대동강유역으로 보는 등 온갖 오류가 발생한 것입니다.”
 
고조선의 '왕험성'이 고구려의 '평양성'
 
-원장님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에서 고구려의 원래 수도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원래 수도는 어디였습니까.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에 진(晋)나라 때 설치했던 평주(平州)  지역을 설명하면서 <후위(後魏)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후위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으로 선비족이 세운 북위 정권을 가리킵니다. 《통전》의 <평주> 조항에는 <평주 소재지는 노룡현에 있다. 오늘날의 노룡현에는 옛 고죽성이 있는데 백이 숙제의 나라였다. 전국시대에는 연나라에 속하였고, 진(秦)나라 때는 우북평과 요서군 지역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태평환우기》에 <고조선의 조선성이 있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다행히 수ㆍ당시대의 노룡현은 현재 중국 지도에 아직도 그 지명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북위시대, 진(晋)나라시대의 평주, 진한시대의 요서군, 은나라시대에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었던 그 지역이 바로 요서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입니다. 남송시대 학자 왕응린의 《통감지리통석》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노룡현 부근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이 요서고구려의 수도 평양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측 기록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삼국사기》<동천왕> 조항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터전이다. 다른 어떤 기록에는 왕의 도읍은 왕험이다>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왕검의 터전’ 혹은 ‘왕의 도읍은 왕험이다’라고 한 것은 국조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울 때 도읍했던 그 평양성을 가리킨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도읍한 평양성은 어디인지 궁금해지는데, 바로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에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발해의 모퉁이가 오늘날의 발해만 일대 요서지역이고, 이 요서지역을 진(晋) 나라시기에는 ‘평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평주의 평은 ‘평양’의 평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427년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북한의 평양으로 옮겨졌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통전》에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요서의 평주에 도읍했다’고 했으니, 장수왕 15년에 옮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북한의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북경 북쪽의 조하, 즉 조선하 유역에 있던 요서의 평주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수ㆍ당이 압록강 혹은 청천강 등을 건너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했다고 알려진 내용도 완전히 달라지겠군요.
 
“장수왕이 천도했을 때가 고구려의 국력이 쇠약했을 때가 아니고 광개토대왕 바로 다음 시대로 국력이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입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발해만을 끼고 있는 요서지역으로부터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을 때입니다.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는데, 《통전》에서 <안동부 지역에 진(晋)나라 때는 평주가 설치되었고, 북위시대에는 고구려가 거기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닌 평주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심 원장은 “이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파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며 “결국 당나라가 멸망시킨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 평양성이 아닌 요서에 있던 평주 평양성이 된다는 결론”이라고 말했다. 
 
요서의 터전을 잃고 압록강 이남으로 밀려난 고구려
 
-당나라와 전쟁에서 패하고 나서 짧은 시간에 요서지역에 있던 고구려 주력 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고구려가 요서지역의 터전을 잃고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쪽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것입니다. 이는 후대에 고려가 원나라에 한 번의 전쟁으로 먹히지 않고, 강화도를 배경으로 수십년에 걸쳐 항거하면서 명맥을 유지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 고려는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고, 원나라는 당나라보다 국력이 강할 때인데도 원나라는 고려를 한 번에 삼키지 못했습니다. 강력했던 고구려의 잔존세력(보장왕)이 한반도로 터전을 옮겨 한반도에서 명맥을 유지한 것은 일면 당연합니다.”
 
심 원장은 “고려시대 원나라의 몽골족은 바로 우리나라 머리맡에 위치하고 있어서 말을 타고 바로 쳐들어올 수가 있었지만, 당나라의 중심은 장안 (지금의 섬서성)이었다”며 “그곳에서 고구려처럼 강력한 나라를 일거에 정벌하여 없앤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고 덧붙였다.
 
“명나라 때 유명한 학자 정개양(鄭開陽)이 쓴《정개양잡저》 5권 <조선고>에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여리에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장수왕 때 현재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요서고구려의 평주 평양성을 함락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정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고구려가 요서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심 원장은 “정개양은 왕양명의 제자로 <일본도찬>, <조선도설>, <유구도설> 등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로 동아시아의 정세에 아주 밝았던 학자”라며 “그가 고구려에 대해 이같이 주장했다면 반드시 어떤 명확한 근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는 거대한 제후국
 
-백제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면, 결국 백제의 주 근거지도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씀이 되는 건지요.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를 포함하여 해안을 따라서 발해만 일대에 나라가 걸쳐져 있었습니다. 청나라 황제의 특명으로 편간된 《흠정만주원류고》 3권에 보면 <백제는 국내에서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나라ㆍ제나라(남북조시대의 남조를 말함)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는 백제의 영토는 광활하고 인구는 많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는 것입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백제의 강역은 서북쪽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를 포괄하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의 융성기에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대륙 동북쪽에 광할한 영토를 소유했던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심 원장은 “조선이 친명배청(親明背淸) 정책을 펴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는 만무하다”며 “다만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 보니 백제사와 만나게 되었고 그것을 가감없이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백제와 부여와의 관계를 좀 부연해주시죠.
 
“백제는 고조선-부여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였고, 대륙 깊숙한 요서 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을 세운 나라였습니다. 《후한서》<동이열전>에 부여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본래는 예(濊)의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북성 예하(濊河) 유역이 북부여의 발상지로 판단되는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권 18 <예하> 조항에 보면 <예하를 포오거(浦吾渠)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즉 예하가 후한시대 연간에 ‘포어거’로 불렸다는 건데 ‘포어거’는 ‘부여하’의 다른 이름입니다. 후대 금나라에서 부여가 있던 곳에 ‘포여로(蒲與路)’를 설치했고, 명나라에서 ‘복여위(福餘衛)’를 설치했는데, 이는 모두 부여의 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글자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중국어에서 ‘포’는 ‘푸’로 부여의 ‘부’와 같은 발음이고, ‘여(與)’와 ‘오(吾)’는 ‘여(餘)’와 같은 발음에 속합니다.”
 
-예하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강입니까.
 
“《명일통지》에 <예하는 평산현 서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평산현 동남쪽을 경유하여 호타하로 유입된다>고 했습니다. 예하는 오늘날 중국 지도 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늘날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부여는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것처럼 길림성 송화강 일대가 아닌 북경남쪽 호타하 유역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중원에 있었던 고조선의 영토에서  고구려와 부여가 흥망한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가를 고증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손들
 
-금나라 역사서에 금태조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1115~1234)의 시조인 함보(函普)가 신라인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신라와 금나라와의 관계는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요.
 
“금나라는 전성기에 북송을 멸망시키고, 남송과 서하를 굴복시키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120년간 중원을 다스렸습니다. 금나라에 대한 현재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여러 중국민족 가운데 하나인 여진족이 수립한 정권으로 기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금나라는 여진족, 거란족, 한족, 발해족, 고려족 등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통치세력은 신라족 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금나라는 신라족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진족이 주요 구성원인데 어떻게 그렇게 보시는지요.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와 노나라의 건국을 주도한 통치 집단은 서주로부터 이주해온 세력이었지만, 먼 옛날부터 토착민으로 이 지역에 거주한 원주민은 우이(嵎夷)와 내이(萊夷)였습니다. 이 두 민족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민족을 구성하는데 주체 성분이지만, 제나라와 노나라를 우이족 내이족 정권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함보가 신라의 선진문명을 가지고 여진 지역으로 가서 추대를 받아 수령에 취임했고, 그 후손이 여러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운 게 금나라입니다. 당연히 신라인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면 여진족 중에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보와 그 후손 아골타는 신라인이라는 것이 청나라 이전 중국문헌에 보이는 공통된 견해입니다.”
 
-함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함보는 신라가 망할 무렵에 여진으로 터전을 옮겼으니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고려사》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김극수(金克守)라는 분이 바로 함보와 동일인이 확실합니다. 이 분은 고려에서 망명한 신라왕족의 후예인 김행의 아들입니다.
 
《고려사》에는 금나라 시조의 후손들, 즉 아골타를 비롯하여 금의 초창기 왕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호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때 나온 《흠정만주원류고》는 금나라 국호도 신라왕의 김씨 성에서 유래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청나라 당대 최고 학자들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거친 끝에 내린 최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후손들이 청나라(1616~1912)를 세웠다. 심백강 원장은 “동북 백두산 지역에 근거지를 두었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리장성 너머 중국의 동북지방이 모두 중국의 강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족이 중원을 다스리던 한ㆍ당ㆍ송ㆍ명 시대에는 만리장성 너머 동북방을 제대로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선비ㆍ말갈ㆍ거란ㆍ여진 등 동이(東夷) 민족들이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만 또한 청나라의 강희 황제가 중국에 편입시킨 땅입니다.
 
오늘날 거대한 중국의 기초를 닦은 것은 한나라도 당나라도 송나라도 명나라도 아닌 바로 동이민족이 세운 청나라 왕조였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애신락라(愛新覺羅)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로 원래 국호는 대금(大金)이었으며 그 아들 황태극에 이르러 비로소 국명을 청으로 개정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심백강 원장은 청나라 황실의 성(姓)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애신’은 만주어로 ‘금(金)’을 의미하며, ‘각라’는 여진어에서 ‘원방(遠方)’을 의미하는데 후에 ‘원지(遠支)’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만주어 애신각라는 김원지(金遠支)인데 우리말로는 ‘김씨의 먼 지손’이 된다는 것이다. 심 원장의 부연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는 남송과 몽고의 협공으로 멸망했으나, 잔존세력들이 중국의 동북방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명이 부패하고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누루하치가 분열된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웠습니다. 앞서 조상들이 세운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죠. 2대 황제인 황태극이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꾸면서 국명에 내재된 신라왕실 김씨의 흔적은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성씨인 ‘애신각라’ 네 글자에는 청나라가 신라 김씨의 후예라는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원장님 말씀을 들으니, 우리 역사를 대하는 시각부터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신라왕실의 김씨 후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김씨 왕조인 금나라를 세웠고, 이 금나라가 발전하여 중국 천하를 완벽하게 통일한 것이 바로 청나라 왕조입니다. 반만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밝달족에 의해 요서의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최후의 국가 역시 밝달족 신라의 후손들에 의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밑을 발상지로 하여 건국된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한마디 하신다면.
 
“저는 제 책에서 동북공정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의 논리는 저절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제가 《사고전서》 자료를 가지고 쌓은 밝달족의 고조선 장성이 앞으로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할 수 없도록 영원한 만리장성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학파나 정권이 알아주는 일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가 알아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민족과 역사는 그 무엇보다 생명력이 강하고 길기 때문입니다.”

 

 

 

[ 2007-08-24, 11:01 ]

淸 제국 역대 황제의 성씨는 '新羅金氏' (chogabje.com)

만주원류고가 말하는 청나라와 신라의 친연성
김운회 교수 外

 

중국에는 지금 강희제의 일대기를 다룬 <康熙王朝>, 강희황제의 민간 암행기를 다룬 <康熙微服私訪記>, 강희황제가 즉위하기까지의 청나라 초기 궁중비사를 다룬 <孝庄皇后秘史> 등 청조와 강희황제를 조명하는 TV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중이다. 특히 <강희왕조>는 근년에 제작된 것을 재방하는 것인데 극중 대만을 통일한 강희제의 업적을 통하여 최근 독립기도를 보이고 있는 대만에 대해 중국통일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중국 관방의 의지가 그 배경에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중국작가 二月河의 <강희황제>, <옹정황제>, <건륭황제>의 제왕삼부곡 대하역사소설은 중국에서 공전의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중국 역사상 한 무제, 당 태종이 걸출한 명군으로 꼽히지만 이들은 먼 역사 속의 인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청조 강희제와 그의 뒤를 이어 백여년간 중국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태평성대를 이룩한 옹정, 건륭 삼대 황제의 치적만큼 현대 중국인들에게 실감을 주지는 못한다.
  
  오늘날 중국이 인구대국이 된 배경에는 이 시대의 안정과 번영이 바탕이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대만, 내몽골, 외몽골, 신장(투르키스탄), 서장(티베트)을 정벌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말하자면 영토와 민족 구성 등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왕조가 바로 淸朝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근대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가 이민족의 통치에 의해 이룩된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조가 한국인에게 주는 인상은 매우 착잡하고 왜곡된 측면이 있다. 우선은 두 차례의 胡亂을 통해 조선왕조와 백성들에게 씻기 어려운 치욕을 안긴 역사적인 사실이 몽고의 元朝와 함께 淸朝를 우리 민족사의 침략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또한 중화문명의 정통에서 벗어나 중원에 오랑캐풍의 변발과 호복을 잔혹하게 강요하고 결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양문명의 동점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약하고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종이 호랑이의 형상으로 비쳐지고 있는 편이다. 明을 멸하고 등장한 청조를 일찍이 조선시대에도 내심 멸시하고 중화의 대를 이을 정통은 오히려 동방의 조선에 있음을 상정하는 사조가 형성된 적이 있었다.
  
  봉건시대가 종말을 고한 이후 중국에는 청조를 포함한 이민족 왕조들을 역사기술에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큰 무공을 세운 사람들을 중화영웅으로 찬양하고 이민족 정권에 영합한 한족을 한간(漢奸)으로 격하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는 홍콩, 마카오를 접수한 이후 대만문제와 소수민족 분리주의자들을 의식하여 중화민족의 단결과 화합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강렬하게 일고 있다.‘중화민족’이란 한족을 포함하여 오늘날 중국 영토내에 거주하는 56개 민족을 통칭하는 정치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다. 관련하여 역사교육에서도 한족과 이민족 정권을 구분하는 기술이 줄어들고 역사적인 영웅의 상정도 한족 중심의 시각을 탈피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근대사 절정의 盛世를 이룩한 강희제 등 청조 세 황제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또한 최근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는 중국 관방학계의 東北工程도 멀리는 이러한 중국사회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 있다.
  
  중국 최대의 자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으로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강희제는 여덟 살에 제위에 올라 60년을 넘게 대륙을 통치했다. 유사이래 어떤 황제도 이렇게 오랜 기간 재위했던 적이 없었다. 부친인 선제 순치제가 젊은 나이에 병사함으로써 어린 나이에 황위를 물려받은 愛新覺羅 玄燁( 강희제의 실명 )은 조모 효장황태후에 의해 철저하게 제왕학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선제의 유지에 따라 네 명의 보정대신이 그를 보필하였으나 마침내 14세의 나이에 친정에 임하여 중국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영명한 군주가 되었다.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의 이민족을 제압한 황제, 중국역사상 유일한 학자풍의 제왕, 문치와 무공의 재능을 겸한 군주, 중화문명을 문화적으로 집대성한 황제 등이 강희제를 묘사하는 서술들이다. 강희제는 어려서부터 제왕의 길을 교육받은 준비된 제왕이었지만 선천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외에도 결단력이 뛰어난 제왕이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몸에 밴 학문의 대한 소양은 평생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게 했고 이즈음 선교사와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활발하게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했다.
  
  무엇보다 강희제를 성군이 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으로 중원의 대통을 이은 이민족 제왕으로서의 무한한 책임감이었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한시도 변함없이 선조가 남긴 敬天法祖(경천법조), 勤政愛民(근정애민)의 유훈을 받들어 집정에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황제가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상주문의 수는 50건 정도였는데 그는 하루에 500건의 업무를 처리했다. 물론 직접 그가 붓을 잡거나 서류를 작성하지는 않았음에도 거의 매일 자정을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러한 집정자세는 아들과 손자인 옹정, 건륭황제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는데, 특히 옹정제는 재위 10여 년간 집정의 책임감 때문에 한번도 북경성을 벗어나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희황제의 영명한 統治術과 用人術은 오늘날 중국집정자들의 전범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강희제는 이상적인 제왕의 자질을 모두 갖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왕이란 관건이 되는 중요한 일과 원칙만 챙기고 세세한 일은 관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일에 성실하지 않으면 온 세상에 근심이 쌓이고, 시기를 놓치면 장기간의 우환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만사에 철저하려 했다. 또 康熙帝는 재위 중 治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엄청난 열의를 가졌다. 그는 거의 30여 년을 치수에 직접 참여하고 지휘했는데 치수에 능한 장인들을 정규 과거를 통해서는 발탁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유지를 내려 治水, 천문, 지리, 數術(산술), 역법, 詩詞, 機械 등 한 가지 학문이나 재능에만 능통하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康熙帝는 탁월한 用人術을 가졌다. 그는 신하들을 발탁함에 있어 正道란 君子와 小人의 장단점을 정확히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자는 모함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소인에게서는 군자가 가지지 않은 재주를 발견하여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康熙帝는 황제로서 많은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백성을 위하지 않는 일에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로서의 본분과 책임에 성실했고 포용력 있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대신들의 귀감이 되었다. 청말의 대신 曾國藩은 강희제를 다시 보기 어려운 성군으로 심지어 周文王과 같은 반열에 올릴만하다고 상찬했다.
  
  강희제는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있어 설사 불가피하게 국법을 거스르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江南省 淸江 縣令 于成龍이 황하 및 회하와 운하가 합쳐지는 淸江으로 홍수의 위협을 피해 사방에서 이재민들이 몰려들어 1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순식간에 10만명으로 불어나자 直隸(직예)로 보낼 皇糧(황궁의 식량)을 독단으로 풀어 이재민들에게 배급한 사건이 있었다. 총독이 상주문을 올려 우성룡을 탄핵했다. 물론 우성룡을 비호하는 순무 方皓之의 탄원서도 있었다. 康熙帝는 이 사건에 대해 양측의 의견을 수렴한 후 국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성룡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는 우성룡을 조정의 명령 없이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황량일지라도 감히 빼내 백성을 구휼한 자상하고 인간미있는 충성스런 관리로 보았다. 청백리 우성룡의 일대기는 연전 중국 중앙기율위원회와 감찰원의 후원하에 별도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송된 적이 있다. 날로 늘어나는 독직사건을 줄이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중앙당의 기도로 이루어진 일이다.
  
  강희제의 생애와 통치술이 영화와 드라마 외에도 역사소설 그리고 成功學(처세술에 해당하는 중국어) 관련서 등 출판의 빈번한 소재가 되는 것은 그의 일생과 통치기가 그만큼 비범하고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소년황제로서 친정에 임했을 때 보정대신으로 당시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고 황권을 유린하던 오보이(鰲拜)를 기지로 제거한 일이며, 개국공신 吳三桂 등이 일으킨 ‘三藩의 난’을 평정한 일,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고 몽골, 티벳, 신강, 대만을 제압한 일 등 정치적인 풍상이 허다한 외에도 겨우 몇 십만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건립한 청조가 1억이 넘는 다수 한족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강희제가 평생을 통해 다진 왕조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강희제는 평생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완벽한 군주였던 강희제를 평생 번뇌하고 고민하게 했던 한가지 문제는 후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골육상쟁, 조정대신들간의 반목은 그가 장장 61년을 재위한 후 병사하고 넷째아들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그 막을 내린다. 순치제도 황타이지로부터 어린 나이에 제위를 물려받고 섭정왕 도르곤에 의해 황위찬탈의 위기를 맞았으나 모친 효장황태후의 기지와 노력으로 제위를 보존하고 마침내 강희제의 등장이 가능하게 했다. 또한 옹정제의 등장도 우여곡절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데 청조 초기의 궁중사는 드라마적인 상황이 많아 관련서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옹정제는 황위 계승상의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후에 太子密建法(태자밀건법)을 제도화하게 된다.(태자밀건법이란 후계자를 미리 공표하지 않고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밀봉하여 황제 집무실의 ‘正大光明’이라 쓴 편액 뒤에 두었다가 황제의 사망 후 대신들의 입회하에 개봉하여 후계자를 공표하는 제도를 말한다)
  
  淸을 건국한 만주족은 예로부터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의 만주 땅을 생활터전으로 살아온 민족으로 肅愼(숙신), 邑婁(읍루), 말갈, 女眞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으며 우리 민족과 같은 퉁구스 계열로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말갈족이었는데 오늘날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키면서 말갈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淸을 민족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므로 우리 민족사의 外史로라도 다루어야 한다는 학계 일부의 주장이 있을 정도다. 더구나 청조의 황실인 愛新覺羅(애신각라)氏가 멀리는 新羅金氏와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만주어에서 애신은 金, 각라는 族을 뜻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황족의 다수가 자신들의 성을 金씨로 삼았다고 한다.(12세기 만주와 중국 화북지방을 차지한 金나라 개국자 아골타阿骨打)의 조상이 황해도에서 여진지역으로 건너간 新羅金氏라는 역사기록이 있다. 청조의 전신인 누르하치의 金나라를 역사상 아골타의 金과 구별하여 後金으로 기술하고 있다.)
  
  소수민족 정권으로서 중원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역사상 유례없는 성세를 이룩한 淸朝 康雍乾 삼대 황제의 치적과 지혜, 인생 이야기는 오늘날 가히 국내의 중국붐을 맞아 대륙경영의 제대로 된 지침서와 안내서가 궁핍한 한국과 한국인들을 위하여 우리 출판계의 신선하고 훌륭한 또 하나의 기획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관련자료1]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에서는 “금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 『金史』本紀第一「世紀」)”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이 남송(南宋) 때 저술된 북방사(北方史)인 서몽신(徐夢莘)의『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에도 있고 남송 때 금나라 견문록인 홍호(洪皓)의『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의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1778년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 또는 힘보(函普)]께서는 원래 고려에서 오셨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께서는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遼)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 初從高麗來[按通考及大金國志 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 往二國呼稱不爲分別 : 『欽定滿洲源流考』卷7, 部族 7 完顔)”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금(金)일까요? 물론 쥬신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금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죠. 일단 당사자이신 금나라 태조(아골타)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遼)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애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즉 금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국가(만주의 ‘영원한 신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시터(Rossiter)나 포콕(Pocock)의 지적처럼 미국인들이 ‘영원한 영국(England)’을 건설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듯이 말입니다.
  
   금ㆍ후금의 황실이 신라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신라왕의 성을 족성(族姓)으로 삼은 데에는 천년왕국 신라의 부활을 꿈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에는 때로는 고려, 때로는 신라로 나타나있는데 그것은 신라는 이미 망해 없어졌고 고려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혼동일 뿐입니다. 따라서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의 망국민(亡國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문이 생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가 세워지면 대체로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같은 민족이 건국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요. 신라에서 고려로 바뀐들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함보라는 분은 굳이 고려를 떠나고 그 후손들은 나라 이름을 또 금(경주 김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분이 신라의 왕성(王姓)과 그 원형을 지켜야만 한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진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엔 이 분이 신라의 왕족이었거나 아니면 신라의 귀족계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의 일대기에 나타난 것으로 봐서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인 듯한데 당시의 상황에서 본다면 귀족 이상의 계급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죠.
  
   만약 귀족이라면 왜 고려를 떠나야 했겠는가 하는 문제도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고려의 호족화(豪族化)되는 과정에서도 굳이 고려를 떠나야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 분의 형님은 중이 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김함보의 신분이 높고 고려에는 적응하여 살아가기 힘든 상태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비슷한 시대의 기록인 홍호(洪皓)의『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김함보가 신라 왕족이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만주 쥬신은 반도 쥬신과도 강한 형제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나라의 태조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있습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과거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고려사(高麗史)』).”
  
   여기서 말하는 여진(女眞)이 바로 쥬신에 가까운 발음이 나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만주 쥬신은 ‘영원한 신라의 꿈(Millennium Shilla)’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즉 처음에 천년의 제국 신라가 망할 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들은 영원한 신라를 꿈꾸었겠지요. 마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Millennium Kaya)’의 꿈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만주 쥬신들은 유달리 자기들은 신라와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거부하고 중국만을 짝사랑하는 반도 쥬신이 문제지요. 일단 계속 신화를 봅시다.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99일의 표류를 거쳐 삼성 지방에 도착했다. 뿌꾸리융순은 마을사람들에게 ‘나는 선녀가 낳은 천동(天童)인데 당신들을 다스리러 왔소’ 하고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 몇 명의 목곤달(穆昆達 : 만주어로 족장)의 주도로 그날로 혼례를 치르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를 올리고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때 이후로 다시는 싸우지 않았다.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 뿌꾸리융순은 삼성지방의 사람들을 인솔하여 어뚜리성(鄂多哩城)을 건설했다.”
  
   바로 이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이란 분은 만주족의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먼 훗날 청나라를 건설한 태조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이 분의 직계 후손이라고 합니다. 즉 『청조실록』에는 뿌구리융순이 “너희는 내게 복종하라. 나는 천녀의 아들이고 성은 아이씬자오뤄, 이름은 뿌꾸리융순이다. 하늘이 나를 낳게 한 것은 그대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족들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만주라 했고 누루하치는 바로 그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지요[『청실록(淸實錄 : 中華書局 影印本)』태조실록(太祖實錄)].
  
   이 내용은 『청사고(淸史稿)』의 내용(姓愛新覺羅氏,諱努爾哈齊.其先蓋金遺部.始祖布庫里雍順母曰佛庫倫相傳感朱果而孕.稍長,定三姓之亂,衆奉爲貝勒,居長白山東俄漠惠之野俄染里城,號其部族曰滿洲.滿洲自此始)과도 대동소이합니다. 즉 이들 기록들이 청 태조의 선조들은 모두 금나라가 남긴 부족이라는 것이지요. 만주 쥬신들에게 있어서 장백산(백두산)은 야루(鴨綠 : 압록강), 훈퉁(混同), 아이후(愛滹) 등 세 무렌(江 : 강)의 근원이며 만주 구룬(國 : 나라)의 선조는 장백산(백두산) 동쪽 보구리의 볼후리 호수가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뿌구런 이라는 이름의 압캐 살간(하늘의 여인 : 天女)의 자손들이죠.
  
   만주 쥬신의 시조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다기보다는 부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화합을 도모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화는 단지 신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건국 시조이신 김함보의 일대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시죠.
  
   “금나라 시조는 휘(황제, 또는 왕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가 함보(函普)이고 원래는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세였다. 시조(함보)의 형님인 아고내(阿古迺)는 불교에 심취하여 고려에 남으려고 하면서 ‘먼 훗날 자손들이 다시 만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기가 어렵겠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조는 아우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갔다. 시조는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복간수(僕幹水)에 자리를 잡으시고 보활리는 야라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쥬신의 10여 부족)이 갈소관으로써 태조(아골타)에게 귀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 선조 세 분이 서로 이별하여 떠났는데 자신은 대략 아고내의 후손이고 석토문(부족명)과 적고내(부족명)는 보활리의 후손’이라고 하였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 后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其后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盖自謂阿古乃之后 石土門迪古乃 保活里之裔也 : 『金史』本紀第一 世紀).”
  
   여기서 보면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의 형제가 세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갔던 세 선녀들이 다시 내려왔다가 두 언니는 그대로 올라가고 막내 선녀만 아이신자오뤄 뿌꾸리융순을 낳는 장면만 나오지요. 이것은 김함보의 형제들 가운데 김함보만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삼성(三姓)의 땅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화라는 것이 현실을 자로 잰 듯이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신화에서는 시간의 압축이나 변형도 자주 일어나죠.
  
   여기서 다시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는 대목을 봅시다. 이것은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그 지역의 현녀와 결혼한 것과 부합됩니다. 물론 신화에서 결혼한 사람은 물 긷는 처녀인데 역사서에 나타난 실제의 사실은 환갑(60세)이 넘은 노처녀와 결혼합니다. 『금사』에는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部有賢女 年六十而未嫁 嘗以相配 仍爲同部 始祖曰諾 : 『金史』本紀第一 世紀).”라고 되어있죠.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면이 있긴 합니다.
  
   과거에 민족적 영웅의 그릇을 가진 사람은 어린 처녀와 결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미 60이 넘은 노파와 결혼을 하다니요? 그래서 제가 보기엔 여기서 말하는 현녀(賢女)라는 것은 샤먼이자 강력한 정치세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김함보는 이 세력을 발판으로 하여 흩어진 부족을 통합해내는 힘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녀와의 결혼 후 김함보는 드디어 여러 부족들의 염원대로 부족들의 현안 문제인 부족간의 갈등을 수습하기 시작합니다. 삼성의 사람들이 비록 용감하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그 전쟁이 매우 처절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전투력이 강하여 어느 한 부족이 압도적으로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피해가 날로 커갈 수밖에요. 이 과정에서 부족 통합의 분위기가 일어나있게 되고 이 시기에 김함보가 송화강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신화에서는 같은 형제들 간의 싸움을 안타까이 여긴 만주 쥬신의 성모(聖母) 뿌구런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자 천손인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을 보내어 이 문제를 수습하려 합니다.
  
   실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사(金史)』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상세히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상세히 보도록 하죠.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거처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 부족 사람이 서로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이 서로 미워하여 싸움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깨우쳐 말하기를 ‘한 사람을 죽여서 싸움이 풀리지 않는다면 손상이 더욱 클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 한 사람을 죽이는데 그치고 부내에 있는 재물로서 보상을 하면 싸움도 없이 득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설득하니 피해자 집에서도 이에 따랐다. 그래서 ‘무릇 사람을 살상한 자는 그 집에서 사람 1명, 말과 소 각 10마리씩 황금 6량을 징발하여 피해자 집에다 보상하면 이내 양측은 화해해야 하고 사사로이 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여진의 풍속에서 살인하면 말 30마리로 보상하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始祖至完顔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哄斗不能解。完顔部人謂始祖曰 若能爲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嘗以相配,仍爲同部。始祖曰諾 乃自往諭之曰 殺一人而斗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无斗 而且獲利焉怨家從之。乃爲約曰 凡有殺傷人者,徵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卽兩解,不得私鬪。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 : 『金史』本紀第一 世紀).”
  
   그래서 금나라 시조가 살인 사건으로 깊어진 부족간의 갈등을 물질적인 보상을 통하여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부족 통합의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쥬신의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평화(平和)의 중재자로서 부족 통합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신(男性神)보다는 부드러운 여성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과정은 신화에서 말하는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라는 말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에서 만주 쥬신은 매우 신라적(新羅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대적으로 익숙한 편인 데다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신라의 신화나 역사를 보거나 각기 다른 성의 왕들이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한다든가 가야 세력과 쉽게 융합하는 등의 과정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합니다. 일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차별이 거의 없어집니다(이것은 유목민의 특성이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그 근본은 가야세력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 장군은 백제 정벌군ㆍ고구려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합니다(참고로 청나라 황제들은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 왕공의 자제들과 결혼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 장군의 조카(김법민 : 문무왕 -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왕후의 소생)가 바로 신라왕이 되지요.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이와 같이 외부에서 온 사람을 이만큼 출세시켜주는 왕조가 달리 있겠습니까? 이런 점들은 한마디로 유목민적인 특성입니다. 물론 같은 천손족(天孫族)이라는 의식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 같은 현상이 농경민인 중국에서는 결코 나타나기 힘듭니다. 오히려 오랑캐로 찍혀서 경계 대상 1호가 될 뿐만 아니라 고선지 장군과 같이 여차하면 모함하여 죽여 버릴 것입니다. 뒤에 몽골 쥬신이나 만주 쥬신, 환국(桓國)과 한국(韓國 : 汗國) 등을 분석할 때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죠.
  
   그러므로 북위 - 금나라 - 후금(청) 의 신화에 이르는 과정이 쥬신이라는 민족적 특성을 가지면서 확장ㆍ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와 후금의 황제들은 영원한 금의 제국, 즉‘영원한 신라(Millennium Shilla)’를 꿈꾸고 있었고 그것이 금나라·청나라의 건국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중시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죠[사실 당시 삼국(고구려ㆍ백제ㆍ신라) 가운데 여왕(女王)이 나라를 다스린 곳은 신라뿐이죠].
  
   (3) 신라인 김함보에서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까지
  
   만주 쥬신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금나라 태조(阿骨打)의 조상으로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주 김씨이자 안동(安東) 김씨의 시조인 경순왕(敬順王 : 김부)의 후예라고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후손들이 일부는 금강산으로(마의태자 이야기), 또는 강원도 철원 땅으로, 일부는 장백산(백두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시기적으로 봐서는 신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잔여세력들이 장백산으로 만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요.
  
   결국 금나라와 후금(청)의 건국신화는 신라에서 장백산을 거쳐 만주로 들어간 김함보라는 신라의 왕손(?), 또는 신라 귀족(?)의 일대기와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선녀는 결국 김함보의 형제분들을 말하고 아이신자오뤄뿌꾸리융순이 만난 물 긷는 처녀는 바로 환갑(60)이 넘은 현녀(賢女)였던 것이지요.
  
   신화에 따르면 이 처녀는 김함보의 배(작은 뗏목)가 좌초된 것을 가장 먼저 보고 마을로 달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분입니다. 그리고 김함보는 무력(武力)이나 카리스마보다는 깊은 학식으로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합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삼성 지역의 만주 쥬신들은 김함보를 부족장으로 모시게 됩니다(衆奉爲貝勒 : 『淸史稿』本紀一). 이러한 화합의 힘이 이 분을 만주 쥬신의 시조로 만든 것이지요.
  
   즉 이 김함보라는 분은 12세기 초 금나라를 건국(1115)하신 금나라 태조[아골타(阿骨打)]의 직계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금나라 태조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만주 쥬신을 규합하여 금(金)나라를 세웠고 세력을 확장하여 한족(漢族)과 가까웠던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南宋)과 대치합니다. 13세기 초에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키지만 그들의 풍속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15세기 초에는 명나라가 만주쥬신의 분포지역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합니다. 금나라가 멸망(1234)한 이후 청나라가 건국(1616)될 때까지 상당한 시련이 이들 만주 쥬신을 엄습합니다. 명나라 때 만주 쥬신은 크게 건주(建州 - 건주여진), 해서(海西 - 해서여진), 동해(東海 - 동해여진) 등의 3부로 나누어졌고 이 가운데서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삼은 건주여진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까지도 이들 사이에는 참혹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만주 쥬신들 사이에는 또 다시 민족 통합의 염원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신화는 어떻게 묘사할까요? 계속해서 만주 쥬신의 신화를 보시죠. 이마니시 하루아끼(今西春秋)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뿌꾸리융순은 장백산 동쪽 밝은 벌판의 어뚜리(鄂多理)라는 성을 서울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대가 지나자 한[王]들이 백성을 학대하므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족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오직 반차라는 한 아이만이 까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 때 이후 만주 구룬의 한[王]은 까치를 수호신이라고 보호하여 죽이지 않는다. 그 후 반차의 후손인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한[王]이 되어 구룬(나라)의 이름을 아이신(금)이라고 했다[今西春秋『滿和對譯滿洲實錄』(최학근 대역)(서울 : 1975) 1권].” 여기서 말하는 금나라는 흔히 뒤에 나왔다고 해서 후금(後金)이라고 합니다.
  
   즉 후금을 건국(1616)하신 청나라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금나라의 멸망(1234) 이후 4백여 년간의 민족 분열과 한족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이겨내고 마침내 통일 대업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청나라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은 ① 땅의 지배자와 하늘과의 연계, 즉 천손사상(天孫思想)과 ② 새 토템 사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손사상은 다만 남성과 여성이 역할이 바뀌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분석해 드린 천녀(선녀) 신화로 충분히 이해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새 토템 사상으로 나타나는 까치는 만주와 한국 어느 곳에서도 길조(吉鳥)입니다.
  
   청나라(만주 쥬신 : 만주족)의 건국신화는 여러 면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동호계열의 몽골과 숙신계열인 만주족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민족으로 배우고 가르쳐왔는데 신화를 보면 북위(동호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달리 만주쥬신의 신화가 통합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 만큼 통합하기 힘든 것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이겠지요. 유목민들은 (삶 자체가 훈련이라고 하듯이) 농경민과는 달리 바로 무장군인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물리력으로 복종시킨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한족(漢族)의 시각에서 보면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라가 되었다가 이내 해체되기도 하고 또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되풀이하기도 하니 이해가 될 리 없겠죠.
  
   유목민들이 통합을 강조하는 측면은 만주 쥬신의 창세신화(創世神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만주 쥬신의 창세기를 한번 요약해봅시다.
  
   “태초에 물거품 속에서 아부카허허가 탄생한 후, 그의 몸으로부터 땅의 신 바나무허허와 태양의 신 와러두허허가 생겨났다. 두 번에 걸쳐 인간 세상에 대홍수가 일어나고 이어 남신인 아부카언두리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을 만들어 지상(地上)에 가서 살도록 보내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기에 인간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카언두리는 그 도제들에게 4개의 태양을 만들게 했으나 그들이 9개를 만들어 대지가 메마르게 되었다. 이 때 와지부(窩集部)의 산인베이지가 있었다. 그는 장백산 주인(長白山主)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아브카언두리가 하늘제사 때에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지상의 인간과 관계하여 난 아들이다. 산인베이지는 9개의 태양에게 1개만 남고 가라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장백산 부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산인베이지는 부왕이 일러 준대로 물의 신(河神)과 땅의 신의 도움을 얻어 드디어 여러 태양을 없앤다.”
   [傅英仁 搜集整理, 󰡔滿族神話故事󰡕(北方文藝出版社 : 1985) 95~99족]
  
   이 신화는 천신(天神) 예(羿)의 신화와 동이족의 조상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궁국(有窮國) 군주 활의 명인 후예(后羿)의 신화와 대부분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태양을 활로 떨어뜨린다는 내용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주 쥬신의 창세 신화에 나타난 여러 개의 태양으로 인하여 서로 다친다는 말은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난립하여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산인베이지가 이들을 통일한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늘과 닿아있는 장백산신(長白山神)의 도움, 물의 신, 즉 하백(河伯)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만주쥬신은 하늘 - 장백산 - 하백의 도움 - 여러 부족이 통합과 화합 등의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늘과 장백산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선녀(천녀)입니다. 그 선녀(천녀)의 후손이 바로 아이신자오뤄, 즉 경주 김씨 집안입니다. 이 경주 김씨는 후에 금태조(아골타) - 후금태조(누루하치)로 이어져서 중국을 정벌하여 쥬신 천하를 열게 됩니다.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은 유난히도 정신적으로 신라와 가까웠습니다. 마치 금나라 시조이신 김함보가 꿈꾸던 ‘신라(新羅) 영생(永生)의 꿈[Millennium Shilla]’을 끝없이 현실에서 이루려했다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로 볼 수 있죠(자손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잖아요). 마치 일본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伽倻)[Millennium Kaya]’를 꿈꾸고 아마테라스가 ‘영원한 부여(夫餘)의 꿈[Millennium Puyou]’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주 지역에서는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의 호적을 봐야만 ‘만인(滿人)’이라는 표시가 있을 뿐이지요. 만주 말과 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만주의 말이나 글은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배울 수도 없지요.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외부적으로는 만주어를 보존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만주어를 가르치는 곳은 단 한 곳뿐입니다. 그것도 만주 시골 벽촌에 낡고 초라한 초등학교에서 너덜너덜한 시험지 교재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수준입니다[2004 KBS 특별기획『위대한 여정 한국어』(2004)]. 그러면서 중국정부는 만주 문화를 보존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쥬신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 전체를 말살하려는 이 같은 만행(蠻行)은 세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해야 합니까? 만주 쥬신이 꿈꾸어 온 찬란한 ‘천년 신라’의 꿈도 사라져갑니다. 수천 년을 지켜온 전통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갑니까? 현대의 황제(黃帝) 모택동과 그가 이끈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역사학을 공부한다는 작자들은 침묵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 같은 역사의 문외한(門外漢)들이 전공 공부는 안 하고 역사 문제에 대해 핏대를 높이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잠시, 거란(契丹)의 시조 신화도 한번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옛날에 한 신인(神人)이 백마(白馬)를 타고 마우산(馬盂山)에서 토하(土河)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고 아가씨 하나는 청우차(靑牛車)를 타고 황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 아래,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신인과 아가씨는 만나서 부부가 되었고 이들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이 자손들이 번성하여 거란의 8부가 되었다. 거란 사람들이 전쟁이나 봄과 가을의 제사 때 백마와 청우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간직하기 위함이다(『遼史』37卷「地理志」)”
  
   이상이 거란의 시조신화인데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결혼 이야기 같지만 백마(白馬)와 청우(靑牛)라는 코드(code)가 숨어있습니다. 알타이와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에 따르면, 백마와 청우는 오랜 옛날부터 알타이 어족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마는 신남(神男), 청우차(靑牛車)는 천녀(天女)가 탔다는 것이지요(박시인, 『알타이 신화』344쪽).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거란(契丹)이란 이 분야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바로 쇠[철(鐵)]를 의미한다고 합니다[愛宕松男,『契丹古代史の硏究』(京都大 : 1959)].
  
   이상의 신화들을 보면 고구려ㆍ몽골 - 북위ㆍ거란 - 금ㆍ후금 등의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분리하기조차도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들의 신화를 보더라도 숙신(만주) - 예맥(요동 만주) - 동호(몽골)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연계성을 가진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바탕에는 고구려ㆍ부여ㆍ신라는 물론이고 단군신화가 흐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리국 -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 거란 - 일본 등에 이르는 여러 쥬신들의 신화가 결국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며 신화를 통해서 봐도 이들(몽골쥬신ㆍ만주쥬신ㆍ반도쥬신ㆍ열도쥬신)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화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민족(쥬신)이라는 범주로 끌어들이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족(漢族)이 중심이 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종족을 범쥬신(Pan-Jüsin)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하는 데 무리는 없는 것이지요.
  
   이제 기나긴 쥬신 신화의 분석도 끝이 났습니다. 원래 이 부분은 역사학계나 국문학계 모두에서 다루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사학계는 신화적인 특성에 대한 분석이 불충분하고 국문학계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신화의 참모습과 묘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새로이 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쥬신 신화에 대한 많은 이해가 있으셨기를 기대해봅니다.
  
  [관련자료2] 300년간 中國을 지배한 만주족 깨어난다
  
  • 젊은층, 사멸위기 만주語 학습열풍 인터넷 ‘만주족 네트워크’도 확산
  
  지난 3월18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한족(漢族)에 동화된 만주족들이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만주족 언어가 사멸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산자쯔(三家子)의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는 80대 노인 18명만이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 만주어의 사멸은 시간문제”라며, “그렇게 되면 청나라 문헌 200만 건도 해독이 불가능해 영원히 수수께끼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강력한 전제군주국가인 청(1616~1912)을 건설하고 3백년 가까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인구는 1000만 명으로 장족(壯族·약1600만) 다음으로 많지만, 만주어 전용 신문이나 방송을 갖지 못했고, 후세들을 위한 정규 학교도 없다.
  
  인구 200만의 조선족이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초·중·고와 대학을 세우고, 여러 개의 언론기관을 운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만주족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처럼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일까.
  
  그러나 물밑으로 만주족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만주족 젊은이들이 인터넷에 자신들만의 사이버 커뮤니티를 열고, 만주어 강습과 역사 문화교육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지난 3월말 베이징 한복판에 만주어 무료교실도 열었다. 단순히 언어 교육에 머물지 않고, 한족 위주로 서술된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지난 3월31일 오전 9시, 베이징 시청취(西城區)의 한 전문학교 교실에 20~40대 남녀 20여명이 모였다. 교실 칠판에는 꽈배기 모양의 꼬불꼬불한 글씨가 쓰여있고, 학생들은 “나, 나, 나”하며 선생님의 발음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이 강좌는 NGO단체인 ‘뚱쩐나란(東珍納蘭) 문화전파중심’과 인터넷 사이트 ‘만주의 하늘(滿洲的天空)이 공동으로 개설한 무료 ‘만문(滿文·만주어)기초교학반’이다. 작년 3월에 이어 두번째다.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내 강좌를 제외하고, 민간이 만주어 강좌를 연 것은 드문 일이다.
  
  
  
  강좌에 참석한 왕모(25)씨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만주족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에 만주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주어를 써보면서 나 자신의 뿌리를 발견한 느낌이다”고 말했다.
  
  강좌를 듣는 사람은 대학생 중에는 만주어를 배워 만주어 사료 번역작업에 참여하려는 의욕도 보이고 있다. 강좌를 개설한 ‘뚱쩐~중심’의 리단(李丹·29) 대표도 만주족 청년으로, 매혈(賣血)로 에이즈에 감염된 농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NGO활동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만주어를 몰라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만주족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인 ‘만주의 하늘’을 알게 된 뒤 운영자인 왕숴(王碩·24)씨와 힘을 합쳐 이 강좌를 열었다”고 말했다.
  
  다니던 설계회사에 사표를 내고 만주어 강의를 맡고 있는 왕숴씨는 헤이룽장 하얼빈 출신으로 대학 시절 만주어 연구자에게서 말을 배웠다. 그는 만주어를 더 배우기 위해 조만간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시보(錫伯)족 자치현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시보족은 만주족의 일파로,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신장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팔기군(八旗軍) 병사들의 후손이다. 약 17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한족 생활권과 떨어져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만주어와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의 하늘’처럼 인터넷에서 만주어를 가르치는 통칭 ‘만주족 네트’는 중국 전역에 20여 개에 달한다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만족고향네트’란 사이트는 광고회사에 다니는 우스보(吳思博·28)씨가 2003년 친구 3명과 만든 것. 매년 회원이 1000명씩 늘어나, 현재 4000여명에 달한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사이트는 회원들이 수집한 민족문화 자료와 만주어 학습교재 등을 공개하고 있다. 우씨는 “도서관에나 가야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깨닫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만주족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베이징대학 역사학부 쉬카이(徐凱) 교수는 “전국에 만주족 자치현과 자치향이 7개 있으며, 이곳의 만주족들이 교육이나 취업에서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앙민족대학의 황유복(黃有福) 교수(조선족)는 “만주족은 교육에서 오히려 우대를 받았고 이들은 과거에는 민족분류에서 ‘한족’을 선택했으나, 요즘은 ‘만주족’을 택한다”고 말했다. 교육의 우대란, 베이징대학·칭화(淸華)대학 등 일류대학들이 일정한 숫자의 소수민족 출신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말한다. 소수민족 출신은 ‘쿼터’ 덕분에 일류대학 가기가 그만큼 쉽다.
  
   또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는 강희제(康熙帝)의 8대손인 진헝웬(金恒源·63)씨는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만주족 자치현인 모란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소수민족 자치현을 찾은 것 자체가 만주족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만족고향네트’에서 알게 된 만주족 청년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역사왜곡’의 대표적 사례는 ▲남송의 악비(岳飛)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다.
  
  악비는 남송의 장수로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 철저히 저항하여 중국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 이에 대해 만주족들은 “만주족을 중화민족의 하나라고 한다면 결국 금과 남송의 전쟁은 내전인데, ‘내전’에서 싸운 악비를 어떻게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이 주장은 동북공정의 역사관과도 맞닿아 있다. 청말의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혁명의 선구’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만주족을 살해한 잔학행위는 은폐되어 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강희·옹정제(雍正帝)에 관한 책을 썼다는 진헝웬씨는 “지난 4월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 강희제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틀린 것이 많다”면서 “이는 베이징의 중앙당안관(黨案館)과 대만의 당안관에 있는 수많은 만주어 사료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만주족 청년들의 민족의식 회복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까. 중국만학회(中國滿學會) 얜충녠(閻崇年) 회장은 “민족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젊은이들”이라며 “민족의식이 강해진다고 해서 티벳족이나 위구르족처럼 한족과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족은 오랫동안 한족 문화와 잘 융합해 왔다”고 그는 강조했다.
  
  만주족 사회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미풍(微風)이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2005년 08월 29일 (월)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팔기제도를 편성 완료했다. 1621년에 심양과 요양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二元)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중립외교 정책을 택했던 광해군을 좋아 낸 인조가 친명정책으로 선회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여 신복(臣服)시켰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조선 사람들에 의한 후고(後顧)의 걱정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을 동원해 한군(漢軍)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1644년,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홍타이지의 어린 아들은 순치제(順治帝)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청나라 황제들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중국본토라고 불리는 내지와 달리, 비 한족관료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만주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만주족은 중국의 강역을 2배 이상으로 확장했으나, 자신들의 본고장인 만주를 포함해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모두 물려준 꼴이 되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Text In PDF.../ 편집자 주

 

 

 
 
▲ A Manchu Warrior

 

명(明)을 정복한 여진족 청(淸)왕조
 
만주 호랑이의 귀환(歸還)


홍원탁 (서울대 교수)


전통적 2원(二元)제도의 개선: 농병일치(農兵一致) 팔기제도(八旗制度)

 

누르하치(奴爾哈赤, 1559-1626)는 자신의 여진족 군대와 그 가족들을 몇 개 집단의 기병(旗兵)으로 조직했다. 1601년, 황(黃), 홍(紅), 백(白), 남(藍)의 깃발로 구별된 네 개의 기병 군단을 편성해, 자신의 친족 네 명을 이들 기병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누르하치가 스스로 후금(後金)의 칸(汗)이라 칭한 1616년, 이들 네 개의 기병 군단을 각각 양분한 다음, 황기, 백기, 남기에는 홍색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홍기에는 흰색 선을 둘러, 처음 네 개와 함께 모두 여덟 가지 깃발을 만들어 구별했다. 이들 깃발은 전투 시 병사들의 인식표지 역할을 하여 소속 식별을 용이하게 했고, 특정 팔기병(八旗兵)의 구성원 신분은 평상시 주민등록의 근거가 되었다. 1

 

팔기제도의 수립과 동시에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교육받은 한족들은, 항복을 하면, 급속히 팽창해가는 여진족 관료조직에 가담 해 봉사를 할 기회를 얻었다.  누르하치 편으로 넘어 온 고위 한족 관리들은 누르하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명예 칭호를 받아,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한족 관료들은 만주부족들의 팔기군 군사활동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요하 주변의 한족 정착민들을 통치하는 정부행정 만을 전담했다. 2

 

 
 
▲ The Manchu Expansion
Crossley (1999: 131)

 

조선 조정의 사대주의 전략

 

한반도에서는 선조(1567-1608)를 승계한 광해군(1608-23)이 노련한 솜씨로 외교정책을 수행하여 조선이 여진족과 명나라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했다. 광해군은 수비 요충지들을 수리하고, 무기체계를 개량하고,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새로 도입하는 등, 조선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광해군은 인조(1623-49)에 의해 쫓겨났다. 3 인조는 반 여진 친 명 정책으로 선회했다. 이기백(1984: 215)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만주족은 명과의 싸움을 벌리기 전에 조선조정의 정책전환에 의해 야기된 후방의 위협을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 太宗, 1627-43)는 한족 자문관들의 도움을 받아 집권을 했다. 1635년, 내몽골 부족들이 만주족 국가에 흡수편입 되었다. 북방 정벌로 흑룡강 유역 생여진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하고, 다음해 1636년에는 자신을 청나라 황제라고 선언했다.

 

 
 
▲ Beijing under the Manchus was divided into eight sectors, each sector serving as the residential zone for one of the Eight Banners. Each zone was further divided into Manchu, Mongol, and Chinese banner neighborhoods.
Elliott (2001: 103)

 

국명을 청이라고 바꾸기 전인 162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고, 조선 조정으로부터 후금을 형님으로 모신다는 형제의 맹약(兄弟之盟約)을 받아 낸 다음 철군을 했다. 자신을 황제라 칭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바꾼 1636년, 홍타이지는 조선 조정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만주, 몽골, 요동한족 병사들로 편성된) 1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1637년,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명 왕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조를 모시며, 명나라 원정을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고, 두 왕자를 인질로 보내겠다는 등의 서약을 했다.

 

청의 한반도 침략은 단기간에 끝장이 난 것이지만, 당시 청나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서북지역은 황폐화 되었다. 한반도 사람들이 거란족이던, 여진족이던, 몽골족이던, 한족이던 간에 강자에 신복(臣服)하고 기민하게 사대주의 외교를 실천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세판단을 잘 못하고 강자에 대항했을 경우에는, 자발적이던 비자발적이던, 자세를 전환할 때까지 전국이 전화로 파괴되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특히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한반도 사람들에 의한 후방의 위협[後顧의 걱정거리]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주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 요동한족 팔기군: 몽골족을 작은 동업자로 동원

만주족은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 몽골족들을 종속적인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1635년,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동일한 형태로 [거란족을 포함하는] 몽골족의 팔기군을 편성했다. 5 만주 국경으로부터 감숙성에 이르는 지역의 모든 몽골족은 팔기제도에 흡수편입 된 것이다. 징기스칸의 직계 후손들은 자신의 부족을 지휘하면서 청나라 조정의 직위를 수여 받았다. 청조 지배자들은 각 몽골부족에게 지정된 목초지를 고정적으로 배정해 주고, 각각 별개의 동맹자로 관리하는 방법으로, 몽골족을 효과적으로 분열시키는 동시에 기동성을 제거했다. 청 왕조는 내륙 아시아의 변경지역을 지키기 위해 몽골 팔기군에 크게 의존했다. 여진족이 몽골 동맹군과의 동류의식이 강했던 것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대체로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7

 

Ledyard(1983: 328)는 “만주족의 몽골족에 대한 태도나 정책은 다른 종족에 비해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만주족은 몽골족을 자신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또 동료로서 협력을 구했다”고 말한다. Purdue(2005: 124)에 의하면, 만주족이 “몽골 귀족가문과 적극적인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두 종족간의 동맹관계는 한층 공고하게 되었다. 1612-15년 기간 중,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홍타이지는 12명의 딸들을 몽골 부족장들에게 시집을 보내, 결혼동맹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1637년, 청 태조 홍타이지는 요하 주변에 거주하는 한족(漢族)을 동원해 2개의 한군기병(漢軍旗兵)집단을 만들었고, 1639년에는 4개로, 1642년에는 8개로 확장해, 그로부터 2년 후의 중국대륙 정복 개시를 위한 한족 팔기군 편성을 완료했다. 한족들은 대포를 주조하고 사용할 줄 알았으며, 소총사용의 경험도 있었다.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후, 많은 수의 한족들이 비옥한 요하 유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정착민들의 후예가 청나라 군대조직에 가담하여 한족 팔기군의 핵심을 구성했고, 여진족 청나라 지배자들이 전 중국을 정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9 고대 요동지역의 한족 정착민 후예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즉 요동한족 팔기군의 언어가 만주족 지배자들에 의해 북경으로 도입되어 후에 소위 만다린이라는 명칭으로 오늘날 중국의 공식상용어가 된 것이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1640년대 초까지, 병사들이 돌아가며 현역으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등록을 하여 가족을 보호하며, 농토의 경작을 감독할 수 있는 세습적 사회-군사 조직을 제도적으로 완성했다. 팔기군 단위부대들은 전통적인 부족 단위로 조직이 되었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황제 휘하에 소속되었다. 팔기병(八旗兵) 요원들은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의 세습적 계층으로부터 선발되어, 정복과 점령 목적을 위해 군사와 행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10 팔기병들은 전쟁 노획물을 분배 받았고, 평화시에는 쌀과 녹봉을 지급 받았으며, 팔기병 집단은 구성원 개인이 관료로 선발될 기회가 부여 된 인재 풀을 형성했다. 11 전형적인 팔기병을 군인-서기-관료 등 범 국가기능 요원으로 간주하는 정복 이전 시기의 이상(理想)은 정복 후에도 계속 청나라 교육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12 Elliott(2001: 348)은, 황제 한 명 만을 제외하고, 만주족 남녀노소 전원이 팔기조직에 속했다고 말한다. 13 팔기제도란 고도로 군대화 한 병민일체(兵民一體, 農兵一致)의 사회조직인 것이다.

 

1643년, 청 태조는 동생 도르곤 친왕을 자신의 5살 난 (9번째) 아들의 섭정으로 세워놓고 급작스럽게 죽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은 북경을 포위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명장 오삼계(吳三桂)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으로 진군했다.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으로 구성된 청 군은 항복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해안을 따라 진군해 북경에 입성했다. 어린 황제는 순치제(福臨, 世祖 順治帝, 1643-61)라는 칭호로 제위에 올랐다. 순치제의 모친은 징기스칸의 후손이었고, 강희제(康熙帝, 1661-1722)의 할머니가 된다. 14 명 황족과 그 지지자들을 모조리 색출 처단하는 데는 그로부터 18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1662년, 명나라 후계자를 자칭하는 잔당이 운남에서 모조리 처형되었다.

 

만주족은, 중국본토로 진입하기 10여 년 전에, 심양에 명 조정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주족, 몽골족, 한족 관리로 충원된 육부(六部) 설치했었고,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도도 도입했었다. 따라서 만주족이 북중국에 진입했을 당시,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식으로 통치를 할 준비가 완료되었던 것이다.

 

1648년 당시, 총 팔기군 중 만주족 팔기가 겨우 16% (1723년에는 23%), 몽골족 팔기가 8%, 그리고 나머지 4분지3은 모두 한족 팔기였다. 15 대다수의 한군(漢軍)팔기병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모두 구사했다. 요동한족 팔기군이 없었다면 명 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16

 

4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 몽골족, 요동한족) 팔기군이 한족의 명 제국을 정복하고, 북경과 18개의 전략적 지방 요충지에 (소위 만주족 도시라는) 팔기 수비대를 설치하여, 팔기병들이 해당지역의 한족주민과 격리되어 가족과 함께 성안에 살수 있도록 주거지가 배정되었다. 17 Elliott (2001: 363)에 의하면, 정복 당시 (노비를 제외하고 정규 중대 만을 계산하여) 만주족 총인구는 대략 20.6만-39만 명 사이였고, 이들이 1억2천만 명의 한족 중국을 정복한 것이다.

 

만주족은 한족 모양 천치이던 불량배이던 장남이면 제위를 승계한다는 전통이 없었다. Elliott(2001: 356)에 의하면, 만주족은 “알타이 습속에 따라 가장 유능한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133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2-36), 건륭제 (1736-96) 등, 세 명의 유능하고 근면한 황제들이 유교의 덕치를 내세워 신생 제국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강희제는 몸소 유목민 원정을 지휘하며 전쟁터의 흥분을 즐겼다. 18

 
 
▲ Hang-zhou

 

일찍이 몽골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오아시스 국가들과 달리(大理)를 정복하고, 티벹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버마에 이르렀고, 베트남과 참파의 정복을 시도했었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몽골 정복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과거 한(漢) 왕조와 당 왕조가 성취했던 것 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적 통일을 달성해 현대 중국에게 넘겨준 것이다. 1770년대 중반, 건륭제는 (타르바가타이 동쪽, 알타이산맥 서쪽의) 중가리아와 (천산산맥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신강 지역을 포함하는 중앙아시아의 정복을 완료했고, 이 모든 지역을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속받았다. 19 만주 땅 전체가 중화인민공화국에 포함된 것은 만주족에 의한 중국대륙 통치의 산물인 것이다.

 

 
 
▲ Jing-zhou (bottom) Elliott (2001: 109, 112)

 

 

1779년, 북경을 제외한 모든 만주족 수비대 도시에서 한족 팔기병이 모두 제거되었다. 20 오랜 기간에 걸친 한족 팔기병 제거 과정을 거쳐, 모든 팔기병은 마침내 만주족(혹은 몽골족)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Fairbank and Goldman(1992: 148-9)에 의하면, “공인된 존재로서의 한족 군대는 공격훈련을 받지 않고, 단지 우편물 배달 통로를 지키고 도적을 잡는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지방 군대(綠旗軍)뿐이었다.”

 

만주족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

6부(六部)는 만주족과 한족 등 2명의 장을 가지고 있었고, 각 지방에는 한족 지사들과 만주족 총독들이 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충성스런 만주족들이 감시를 하는 제도인 것이다. 21 Fairbank and Goldman(1992: 143 and 151)에 의하면, “만주족 지배자들은 통치제도의 일부로 만주어를 보존시키면서, 거란, 여진, 몽골족들의 관행을 답습 해, 한족이 볼 수 없는 만주어 서류를 작성했다.” 즉, 중요한 내용의 서류는 만주어로만 작성이 된 것이다. 만주족을 혼혈을 금지하고 한족과 만주족의 상이한 관습을 보호 해,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만주족은 그들 자신 만의 고유한 종교적 관행을 유지했고, 사찰 내에서 무속인들이 제례를 지낼 때 한족의 참관을 금했다. 22 사냥과 말 타고 활 쏘는 훈련을 통해 무술의 우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만주 글과 말을 사용하여 문화적 차별성을 강조했다. 만주족 여인들은 발을 묵지 (纏足) 않았다. 만주족 황제들은 내몽골(承德=熱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사냥과 말 타고 활 쏘기를 통해 신체를 단련 했다. 23

 

건륭제는 팔기병 에게 만주어와 군사기술을 철저하게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는 옛 만주족의 전통을, 말 타고 활 쏘는 무술 연마에 진력, 만주어를 말하고 쓰기, 샤머니즘, 근검절약, 조상숭배 등으로 정형화 했다. 건륭제는 “너희들이 사서삼경 고전을 배웠건 안 배웠건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24 여진족 금 왕조가 12세기에 송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건륭제 조정이 경축하며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만주족이 여진족 금나라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25

 

청조 지배자들은, 온갖 노력에도 불고하고, 만주족이 중국화되는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국대륙을 정복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중국화와 민족 자멸을 의미했다. 19세기 말 이후, 전 만주대륙은 한족들의 대량 유입으로 매몰되었다. 오늘날 만주 총인구의 90% 정도가 한족이다. 26 중국대륙-몽골고원-만주라는 삼각지형에서의 진화과정은 외몽골과 한반도 만이 21세기 현재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독립적인 존재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청나라 역사를 포함한 전 중국역사를 오로지 한족(漢族)의 관점에서만 기술하는 관행

아주 전형적인 한족 중심의 중국역사 서술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정치적 문화적 외형(外形)의 일부가 형성되었다; 청 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규제를 받았다; 청나라는 만주족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청 지배자들은 확립된 한족 가치관에 조화를 이루도록 조정을 개조했다; 청조의 황금시대는 청나라 지배자들 중 가장 유교적이고 가장 중국화된 건륭제의 치세이었다.”Crossley(1999: 3)에 의하면, 이러한 서술이 청나라 역사를 전공한다는 학자들 모두가 수용하는 기초적 상식이라는 것이다.

 

명나라 황제들은 관료들에 대항 해 통치권을 장악하는 투쟁을 계속 했어야만 했다. 청나라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했다. 만주족은 제국의 영토를 2배 이상으로 확장했다.  명나라의 13개 지역단위와 2개의 수도권역은 청나라 때 18개의 지역단위로 개편되어 “중국 본토”라고 불리는 내지를 구성했다. 만주, 몽골, 신강, 티벹, 대만 등은 비 한족관리 관할 하에 별도로 다스려 졌다. 정복 지배층은 상무전통을 고취하면서 제국을 통치했고, 중국화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정복자들은 그들 고유의 통치조직을 가지고 흥했고 또 망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6 (2005. 8. 27.)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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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후금 건국 (naver.com)

임진왜란의 발발로 동아시아 정세가 변화하다

요약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일본에서는 새로이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고 중국에서는 명청 교체가 이루어졌다.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던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느라 국운이 더욱 기울어지자, 청의 태조 누르하치는 이때를 틈타 후금을 건국하고 명을 격파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614년 : 이수광, 《지봉유설》 간행
1623년 : 인조반정, 서인 집권 시작
1636년 : 병자호란 발발
1645년 : 소현세자, 서양 문물 들여옴

누르하치의 등장, 만주족을 재통일하다

청 태조 누르하치여진족의 한 부족장으로 주변 부족들을 통일하고 즉위, 후금을 세웠다. 사르후 산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전상으로 죽었다.

만주족은 만주지방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로 역사적으로 숙신, 말갈, 여진족 등으로 칭해졌고 명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일찍이 12세기 초에 금나라를 건국하여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원나라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송화강 유역의 해서 여진, 장백산 일대의 건주 여진, 연해주 일대의 야인 여진, 대략 3개의 큰 부족 집단으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건주 여진에서 누르하치가 등장하여 만주족을 재통일하였다. 그는 건주 여진의 부족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했던 부족장으로, 명나라에 반대하는 아타이 세력이 명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명에 항복하게 할 목적으로 아타이의 성에 들어갔다가 억류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가 나오지 못하자 아타이의 성에 들어갔다가 억류당했다. 결국 모두 명나라가 아타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스스로 명나라와 대적할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다.

만주지역 책임자 이성량, 돈에 눈이 멀어 파직당하다

당시 만주지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성량이라는 명나라 장군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해 갔으며 이성량에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만주에서 많이 나는 인삼이나 모피, 진주 등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명의 상인들은 이성량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성량과 누르하치는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성량은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이 멀어 만주지역의 북방민족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보고에 의해 파직당했다.

누르하치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왕.

명,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다

그러나 이미 누르하치의 세력은 만주지역에 크게 떨쳤다. 새로이 만주에 파견된 명 관리들이 누르하치의 세력을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다가왔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것이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커다란 정치변동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1587년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16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해 단숨에 수도 한성을 점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한 다이묘.

명나라는 조선을 보호하여 중화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였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정명가도()'를 외쳤기 때문에 전쟁터를 조선에 한정시키기 위해 원군을 보냈다. 북경의 울타리인 요동을 보호하는 것이 목표였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수군이 눈부신 활약을 하는 가운데 조명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일본은 화의에 응했으나 '명 황제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킬 것, 조선 남부 4도, 경상, 전라, 충청, 경기를 일본에 할양할 것, 일본과 명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의 황당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수함으로써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임진왜란부산진순절도. 16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한 사건.

명청 교체기,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지다

이 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새로이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고 중국에서는 명청 교체가 이루어졌다. 다만 조선만이 권력의 재편에 성공하여 집권세력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선조는 전란의 책임을 반성하지 않았다.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할 조선의 민중들은 세 나라의 오랜 전쟁터가 되었던 삶의 터전을 다시 가꿔 생존을 이어가는 데 급급했다. 조정은 군대나 의병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고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이른바 '재조지은()'을 높이 받들면서 실추된 권위를 만회하고자 했다. 명나라는 이를 이용해서 장차 후금과의 대결에 조선의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미 쇠퇴의 길에 접어든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게 됨으로써 명의 국운은 더욱 기울어지게 되었다.

누르하치, 후금을 건국하다

누르하치에게는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족들을 통합하고 내부체제를 정비하여 1616년, 마침내 '후금'을 건국하고 흥경에서 칸 위에 올랐다. '후금'이라는 이름은 그의 조상들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이다.

후금의 군사조직 ‘팔기군’, 유목민 특유의 사회 군사조직을 갖추다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후금의 군대조직은 팔기군으로, 태조의 건국 시 약 10여만 명 정도였다. 팔기군은 금의 맹안모극제나 몽골의 천호백호제처럼 유목민족 특유의 군사조직으로 사회조직과 일치되어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유목민들은 빈번하게 이동하는 특성에 따라 일찍부터 군사기능과 징세, 행정의 기능을 모두 포함하는 유목민 특유의 사회 군사조직을 갖게 되었다. 평상시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그대로 부대편성으로 이어져 세력 확대에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청대 전사의 모습청조 융성기의 작품이다. 낭세령(카스틸리오네) 그림. 고궁박물관 소장.

팔기란 말 그대로 서로 다른 여덟 개의 깃발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부족집단들을 4개의 묶음으로 하여 노랑, 빨강, 남색, 백색 4가지 색의 깃발로 구별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팔기가 아니라 사기였던 셈이다. 이 후 4기를 더 만들어 팔기가 되었다. 팔기의 '기()'나 9서당의 '당()'은 모두 깃발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팔기의 기본단위는 니루인데 1니루는 300명의 장정이다. 국가는 니루를 기본단위로 하여 군대징발, 장비 마련, 요역 · 노동력 징발을 했다. 5니루를 1잘란, 5잘란을 1 구사로 편성했고 구사가 곧 기가 된다. 따라서 한 기는 산술적으로 하면 7,500명의 장정이 속해 있는 집단이 된다. 각 기는 유력한 대표자들에 의해 통제되어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도 전 부대를 다 장악하지 못했다. 태조의 뒤를 이어 태종 홍타지에 이르면 정복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몽골족, 한족들을 중심으로 몽골 팔기와 한인 팔기를 따로 편성하게 되었다. 물론 군사력의 핵심은 만주팔기였다.

후금, 살이호전투의 대승리로 유리한 전세를 갖다

후금이 요동지방을 놓고 명과 벌인 전투에서 유리한 전세를 형성하여 전환점을 이룬 대표적인 전투는 살이호(지금의 봉천성 신빈현에 있는 산)전투였다. 후금이 무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은 만주족 토벌을 위한 군대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다. 무순 동쪽 50㎞ 지점에서 살이호(, 사르후)전투가 벌어졌다. 1619년의 이 전투에서 명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금의 군대는 심양, 요양 등을 그들의 영역에 포함시켰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대륙을 향해 한 발 더 다가들게 된 것이다.

사르후 전투무순 동쪽 50km 지점에서 후금이 명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전투.

조선의 강홍립 장군, 뛰어난 중립외교로 후금의 침략을 막다

한편, 이 전투는 조선의 강홍립 장군이 파병되었다가 포로로 잡혀 조선 파병의 불가피성에 대해 후금을 설득했던 바로 그 전투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집권한 광해군은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독촉을 견디지 못해 명에 원군을 보냈으나 현명한 중립외교로 후금의 침략을 피해갔다. 후일 서인들은 이를 재조지은에 대한 배신으로 낙인찍고 1623년 이른바 인조반정을 일으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두 번씩이나 불러옴으로써 국력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그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삼전도비조선이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야기된 병자호란의 전승비.

누르하치의 사후, 후손들이 300년간 중국을 통치하다

누르하치는 1626년 2월, 요하를 건너 영원성을 공격하던 중 부상을 입어 9월에 사망하였다. 그가 첫 번째로 맛본 패배가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는 중국 본토 정복의 길목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그의 자손들은 중국을 지배하여 강력한 300년간의 통치를 이루었다. 누르하치는 그 초석을 세웠다. 한족의 오랜 분열책을 극복하고 '변방의 오랑캐'로 멸시당하던 만주족의 부활이라는 오랜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금 건국 - 임진왜란의 발발로 동아시아 정세가 변화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청의 중국 지배 (naver.com)

삼번의 난을 진압해 중국 지배를 완성하다

요약 몽골 평정 후 국호를 청으로 바꾼 청 태종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하고 요동 지배를 확고히 하는 등 청나라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여덟 살에 즉위한 4대 황제 강희제는 마지막 남은 한인 세력인 삼번의 난을 진압하며 청조의 중국 지배를 완성했다. 청은 번영을 누리며 이후 약 250여 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683년 :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1689년 : 김만중, 《구운몽》 지음
1696년 : 안용복, 독도에서 일인 추방
1699년 : 괴질로 25만여 명 사망

청 태종, 만주족 · 한족 · 몽골족을 지배하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홍타이지가 즉위하였다. 그는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커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명과의 교전 상태에서 즉위하여 내몽골을 평정하고 대원전국() 옥새를 얻은 후, 1636년 국호를 대청()으로 바꿨다. 그가 청 태종이다.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세 종족을 지배하는 다민족 국가가 출범한 것이다.

청 태종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의 2대 황제 홍타이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다

청 태종은 조선에 병자호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당시의 조선에서는 명청 교체기에 현명한 중립외교를 실시함으로써 국난을 예방했던 광해군의 현실정치는 실종되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 '재조지은()'을 내세우는 인조의 무모한 배금정책이 실시되었다. 명은 인조반정을 묵인한다는 명분으로 모문룡과 연합하여 후금을 공격하도록 요구했고 인조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후금의 침입을 받고 패배하였다. 이것이 1627년의 정묘호란이었다.

이후 후금은 조선으로부터 매년 막대한 세폐를 받아 몽골로부터 전마를 사들였다. 때마침 명의 장군 공유덕이 수군과 전함, 대포를 가지고 투항함으로써 해상전력을 보강한 후금의 홍타이지는 자신감 속에 칭제건원하고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1636년의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 피난했던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려 사대의 예를 취하고 조공 관계에 들어갔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은 이제 청을 도와 명과의 전쟁에 동원되는 신세가 되었다. 청은 조선의 전함과 수군을 동원하여 모문룡이 주둔하던 가도를 점령했고 다른 전투에도 조선군을 투입시켰다.

남한산성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했던 성.

청 태종은 조선을 제압하고 요동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팔기의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투항한 한인 관료를 우대하여 관료조직을 정비하는 등 청나라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643년에 죽었다. 태종이 죽고 아홉째 아들 여섯 살 순치제가 즉위하자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도르곤이 사망한 후 남명의 계왕을 운남으로부터 미얀마로 몰아냄으로써 명의 잔존세력을 평정하였다. 계왕은 미얀마 왕에 의해 청나라에 넘겨진 후 운남에서 죽었다.

강희제, 청조의 중국지배를 완성해 번영기를 열다

마지막 남은 한인 세력은 삼번이었다.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청조의 중국 지배를 완성한 사람은 청조의 번영기를 연 4대 황제 성조 강희제였다. 그는 1661부터 1722년까지 반세기를 훌쩍 넘게 지배한 최장 임기의 황제로서 그 긴 기간 동안 왕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번의 오삼계, 이자성을 치기 위해 청에 도움을 요청하다

삼번의 가장 강력한 세력은 오삼계였다. 그는 청조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대륙을 장악하는 길목에서 청에 협조한 명의 장군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하고 성대한 북경입성식을 거행하였을 때 새로운 왕조가 수립되는 듯했다.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한 지방 세력들은 이자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 바빴다. 이 때 중국의 관문인 산해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오삼계의 향방이 매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삼계명말청초 마지막 남은 한인 세력 중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던 장군.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국 동북 세력의 침입을 방어하는 최후 관문으로, 요동을 장악한 만주족의 중국침략을 저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곳에는 50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오삼계는 이자성군의 북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던 중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해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삼계는 명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아끼던 여자를 잡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오삼계는 이자성을 치기로 결정하고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산해관만주족의 중국 침략을 저지하는 요충지였던 관문. 이곳에서 이자성과 오삼계의 일전이 벌어졌다.

청,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의 전쟁을 틈타 북경에 입성하다

오삼계의 요청은 청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산해관이었다. 청은 오삼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청으로서는 중국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을 동시에 약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청나라가 격파해야 할 두 적대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빠진다면 청나라는 간단히 중국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이자성

명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오삼계

마침내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는 청군을 뒤에 두고 산해관에 다가와 있는 이자성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이자성군을 대파했다. 이자성군은 크게 패한 뒤 한걸음에 달아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자성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월 29일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자성은 지레 겁을 먹고 북경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 날 이자성군은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피했고, 그 다음 날 청군은 북경에 입성했다.

청의 한족 친화 정책, 명의 장군을 번왕으로 봉하다

북경에 입성한 청은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낸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의 숭정제를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명나라 때 관료를 지냈던 모든 사람을 관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관청 사무에는 만주문자와 더불어 한자를 계속 사용하도록 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청에 협조한 명의 장군으로 오삼계 외에 공유덕, 상가희, 경중명 등이 있었다. 특히 오삼계는 이자성군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부흥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계왕 영력제를 추적하여 미얀마로 쫓아낸 공을 세운 자였다. 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쪽 지방의 번() 왕으로 이들을 봉했다.

청조 공신 한인 무장들이 삼번의 난을 일으키다

삼번의 난은 운남성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 복건의 경정충 등 청조의 공신인 한인 무장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들 번왕은 번 내의 징병, 징세, 관리 임용권 등을 가지고 있는 거의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강희제는 독립적인 번을 폐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청조의 중국지배를 완성하였다.

1673년, 상가희가 아들 상지신의 번왕 계승 승인을 요청했다. 이에 돌아온 답은 번을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다른 두 명은 정부의 저의를 알기 위해 그들의 번도 폐지할 것을 신청했다. 역시 같은 답이 돌아왔다. 이들은 반란을 선택했고 진압될 때까지 18년간 항쟁하였다.

이들은 명나라의 부흥을 외쳤지만, 사실 이들 인물들에 걸맞는 명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던 운남, 사천, 섬서 일대의 한인 신사층과 관료들이 이들 진영에 동참하였다. 오삼계는 호남으로 진출하여 청조를 궁지에 빠뜨리기도 하였으나 다른 두 번과의 공동 작전에 실패하여 점차 밀리게 되었다. 청나라가 강남을 장악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 광동과 복건의 두 번이 먼저 격파당한 후 오삼계는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계승자인 손자 오세번도 자결함으로써 삼번의 난은 끝났다.

강희제, 삼번의 난을 진압해 역량을 인정받다

불과 여덟 살에 즉위한 강희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번을 폐하고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출중한 역량을 확인받았으며, 시험대에 올랐던 청조의 중국 지배력을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약 250여 년간 중국대륙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의 중국 지배 - 삼번의 난을 진압해 중국 지배를 완성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 (naver.com)

영토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다

요약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 년간 이어진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통치 시기가 청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영토는 꾸준히 확장되었고 도시와 농촌의 인구가 증가하며 유통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왕조의 지배체제는 부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712년 : 백두산 정계비 건립
1725년 : 탕평책 실시
1750년 : 균역법 실시
1763년 : 쓰시마 섬에서 고구마 전래

청, 250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다

청은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제국 통치의 경험이 적은 소수의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족들은 다수였고 스스로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우수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도의 통치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중국대륙 통치도 채 100여 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은 250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강희제(1662~1722년), 옹정제(1723~1735년), 건륭제(1736~1795년)의 통치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강희제의 남방 순행강희제는 황하 강 공사 및 대운하와 조운을 시찰하면서 강남 지방 백성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또 반청 분위기를 막기 위해 여섯 번 남방 순행에 나섰다.

강희제, 중국 통일 후 한족 지배층들을 통치에 참여시키다

성조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국을 통일하였다. 대만의 정씨 정권을 굴복시켰으며 몽골을 공격하여 외몽골을 중국의 통치권 내에 포함시켰다. 강희제는 중국을 장악한 이후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을 청조의 통치체제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한족 지배층들의 참여 없이 다수의 한족과 넓은 중국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많은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 지배하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했으나, 청나라는 한족들을 관직에 등용함으로써 이민족 통치에 대한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치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자 했다.

강희제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의 4대 황제.

강희제는 명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관리들을 대부분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최고위 관직까지도 한족과 만주족을 같은 비율로 임명했다. 지방행정의 대부분은 한족들에게 위임하여 명대의 지방 지배층인 신사층(향신층)의 지위를 계속 인정해주었다. 문자도 만주어와 한자를 같이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 문서만은 만주어로 통일했다.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대대적 편찬 사업을 벌이다

또한 강희제는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대대적인 편찬 사업에 참여시켰다.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중국 최대의 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희자전》이다. 이 자전에는 약 5만여 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대청회전》 등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편찬되었다. 그 때 편집된 《고금도서집성》은 1만여 권에 달하는 엄청난 대작이었다.

강희자전강희제가 전국의 학자를 모아 만든 중국 최대의 자전.

옹정제, 강희제의 후계자로 제위에 오르다

강희제는 8세에 즉위하여 61년 동안 황제의 직위에 있었다. 그에게는 3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여 황태자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후로 청조는 황제가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상자에 넣어 궁중에 보관하고 황제가 죽은 다음에 그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선포하게 했다. 이렇게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황제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파벌이 형성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방식을 정착시켰다.

새로운 통치기구를 만들고 한족 사상탄압 정책을 행하다

옹정제는 새로운 통치기구로 군기처를 만들었으며, 지방관들에게 자세히 보고를 하게 하고 직접 그 보고서를 읽고 지시를 내렸는데, 하루에 결재한 글자가 다작을 하는 문필가가 쓰는 분량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옹정제 때는 강희 · 옹정 · 건륭의 전성기 중에서도 '문자()의 옥()'이라 불리는 한족에 대한 사상탄압 정책이 특히 가혹하게 행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는 글이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필화 사건을 의미한다.

옹정제청나라의 5대 황제. 엄격하면서도 성실하고 뛰어난 군주였다.

만주족을 비방하고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어김없이 이 '문자의 옥'에 걸려들었다. 심지어는 실수로 잘못 쓴 글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사상 탄압은 한족에 대한 강경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예컨대 청은 한족 지식인들을 관직에 등용하거나 편찬 사업에 동원하는 등으로 회유하기도 했지만, 변발을 강요한다거나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을 금지한다거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사상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그들의 혈통을 잃지 않으면서 몽골에 비해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 정복활동과 편찬사업을 계속하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60년 치세 중에도 이러한 청조의 정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륭제도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 활동을 계속했으며 편찬 사업도 지속되었다. 이때의 편찬 사업은 강희제 시기 사업의 규모를 훨씬 능가했다.

건륭제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6대 황제.

이때 정리된 것이 《사고전서()》다. 이는 10년간 4,000여 명의 학자들이 동원되어 10억 개의 글자로 완성된 중국문화총서로 중국 고금의 거의 모든 문헌자료가 망라되었다. 경사자집(, 경전, 역사책, 맹자 등의 자서, 문집) 4부의 서적 총 3,458종 7만 9,070권을 수집하여 3만 6,383책으로 완성되었다.

사고전서10년간 4,000여 명의 학자들이 10억 개의 글자로 만들어낸 중국문화총서.

청의 대대적 편찬사업, 목적의 양면성을 갖다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은 청 황제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실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특히 전국의 서적을 모아 정리하는 것은 책들을 모두 검열하는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모은 책들을 모두 검토하여 청조의 입장에서 내용이 문제가 되는 책들은 전부 폐기처분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불에 타 사라졌다.

《청대문자옥당》에 수록된 자료에 의하면, 건륭 6년부터 53년까지의 40여 년 동안 '문자의 옥'이 모두 53차례 발생했다. 《금서총록》의 통계에 따르면, 《사고전서》는 금서로 정해져 전체 소각된 2,453종, 일부 소각 402종, 서판 소각 50종, 석각 소각 24종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탄생하였다.

청의 전성기, 영토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 년간의 강희 · 옹정 · 건륭제 통치 시기가 바로 청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영토는 꾸준히 확장되었다. 내몽골은 이미 태종 때 병합되었지만, 서몽골의 준가르와 70여 년간 격돌하여 승리함으로써 서북의 신강, 청해, 티베트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와 농촌의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유통이 확대되었다. 멕시코 등지에서 생산된 은이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관료들의 부패, 청조 내부를 갉아먹다

그러나 이미 건륭제 때부터 청조 내부에 서서히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성대를 지나면서 알게 모르게 관료들이 부패해 가고 있었다. 건륭제가 죽은 후 가경제는 권신이었던 화신을 숙청하였는데 몰수된 재산이 은 8억 냥에 상당했다고 한다. 이를 환산하면 청나라에서 20여 년 동안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였다. 전성기라 불리던 이 시기에도 왕조의 지배체제는 부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 - 영토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고증학의 발달 (naver.com)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다

요약 명말 청초에 훈고학과 성리학, 양명학 등의 공허한 담론을 비판하고 실학을 제창하여 새로 등장한 학문이 고증학이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 대학자들로부터 시작된 고증학은 건륭제 · 가경제 시기에 더욱 발달하면서 청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776년 : 규장각 설치
1784년 : 이승훈, 천주교 전도 시작
1790년 : 안정복 《동사강목》 지음

유학, 중국 학문의 중심으로 자리 잡다

중국의 사상은 각 시기의 사회변동과 맞물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변화해 왔다. 때로는 새로운 변화의 선봉에 섰고 또 때로는 기존 사회의 유지에 힘을 불어넣었다. 중국이 영역을 확대해 가며 고대 제국으로 발전해 갔던 춘추전국시대에는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들이 출현하여 사상의 황금기를 맞았다.

진나라가 강력한 법치로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에는 '분서갱유'라는 가혹한 사상 대탄압을 겪었지만 한나라가 중국적인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영역을 확립했을 때에는 위계질서를 수호하는 사상으로서 유교가 국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유학은 학문의 중심으로서, 유교의 경전은 학문하는 자의 기본 소양으로서 시대에 따른 다양한 해석을 거치며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한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훈고학과 성리학이 발달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대부분의 유교경전이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에 한나라 때에는 사라졌거나 잊혀졌던 유교경전의 내용을 찾아내어 바르게 해석하고 시대에 맞게 풀어내는 훈고학이 발달하였다. 즉,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훈고학의 학풍은 당나라까지 계속되었다.

과거제의 시행과 맞물려 당나라의 오경정의가 정통한 해석으로 간주되어 학문의 자유로운 발달이 저해되자 송나라에 들어오면 단순히 유교경전의 글자 해석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전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했다. 그 성리학적 세계관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은 인간과 세계, 자연의 이치를 보는 철학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그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성격은 유사하다.

고증학, 유교를 비판하는 새로운 학문으로 떠오르다

명말 청초에 이들 공허한 담론을 비판하면서 실학을 제창하여 새로이 등장한 학문이 고증학()이다. 이때는 이미 1583년 입국한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제수이트) 교단의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된 서양의 과학기술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만주족의 지배라는 중국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

청대의 신사층,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고증학을 연구하다

몽골족의 지배기에 관료로서의 진출이 제약되었던 한인들이 문인화를 즐겨 그렸던 것처럼, 만주족의 지배하에 있던 한인 신사층들 중에는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과거 공부와는 구별된 학문의 세계, 즉 고증학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나라 이후의 지배층인 신사()층은 전현직 관리인 '신()'과 학위 소지자인 '사()'를 합친 말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향신()층으로도 불린다. 송대의 형세호인 사대부는 소수였으나, 명청 시대에는 지방학교의 학생이나 과거 합격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관직은 2만 5천 명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국가도 관료를 도와줄 협력자가 필요하였으므로 이들 향촌 세력에게 몇몇 특권을 부여하면서 국가 통치를 보좌하도록 했다. 청대의 신사층은 관직 진출이 더욱 어려워졌고 청 조정도 이들 한인 지식인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대규모 편찬 사업 등에 몰두하기를 기대하였다.

고증학, 실사구시 학자들부터 제창되어 청나라를 대표하는 학문으로 자리잡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 대학자들로부터 시작된 고증학은 건륭제 · 가경제 시기에 정밀해지면서 청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으로 자리 잡았다.

고염무는 실학을 제창하여 현실 사회에 유용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학문하는 방법에서도 실사구시()의 고증학적 방법론을 제창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연구함에 있어 증거 없이는 쉽게 믿지 않는 기풍을 견지하였다. 대담하게 현실 정치에서 출발하여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경세치용()을 위한 목적에서 학문을 탐구하였다.

고염무청나라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로서 고증학의 창시자.

황종희는 현실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전통적 전제 정치를 비판하였다. 군신관계를 논할 때 천하 위주가 아닌 백성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근대지향적인 민주사상을 펼치기도 했다.

황종희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 전통적 전제 정치를 비판한 대학자.

왕부지는 항청 운동이 실패한 이후, 저술활동에 몰두하여 고대 철학을 집대성하였는데 이와 기의 관계에서 '천하는 오직 기일 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왕부지항청 운동이 실패한 이후 저술활동에 몰두하여 고대 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고증학의 한계, 은둔의 학문으로 변화하다

청의 중국 지배가 견고해지고 건가(건륭제 · 가경제) 연간이 되면 고증학은 《사고전서》 등 정부의 방대한 편찬 사업과도 관련되어 점차 현실정치와는 동떨어진 문헌자료의 연구에 치중하는 방법론적 학문의 역할에 국한되게 된다. 청의 한족 회유책에 동화되어 경세의 학문에서 은둔의 학문으로 변화해 갔다. 청의 지배층은 이른바 '문자의 옥'으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참여와 비판 의식을 거세하고 대규모 편찬 사업에 동원함으로써 케케묵은 기록을 살피고 연구하는 학문을 위한 학문에 매몰되도록 하였다.

한 · 당의 훈고학과 청의 고증학의 구별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밝히는 등의 연구 방법은 한나라에서 이루어졌던 훈고학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고어에 대한 자구 해석에만 만족하지 않고 고대 언어 연구의 비판적인 새로운 방법론을 전개시키기도 하였던 까닭에 이를 고증학이라고 하여 한 · 당의 훈고학과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증학파의 출현, 고증학과 함께 역사학과 지리학이 발전하다

건가 시기에는 혜동과 대진을 중심으로 오파와 환파라는 고증학파가 출현하였고 학문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치밀하게 경서에 깊이 몰두하여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원칙이 견지되었던 까닭에, 주관적이고 과장된 학풍이 후퇴하고 실증적이고 엄밀한 학풍이 자리잡게 되었다. 여러 시대의 기록을 광범하게 수집하고 인용하고 입증하는 과정에서 위조한 경서를 밝혀내기도 하였다. 고증학의 발달 속에 정부나 민간에서 수많은 책들이 편찬되면서 역사학과 지리학이 발전하였으며, 고증학의 방법으로 활용되던 고고, 금석학은 독자적 학문의 영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학과 고증의 유행, 고증학의 폐단이 지적되다

그러나 한학이 발달하고 고증이 유행하면서 문장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자질구레하게 변질되었다.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과 유리되어 과거로 후퇴하게 되는 등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위원은 임칙서의 부탁을 받아 《해국도지》를 편찬하여 중국인들에게 세계를 소개하는 등 새로운 학문의 기풍을 세웠다.

해국도지중국인들에게 세계를 소개하고 새로운 학문의 기풍을 세운 위원의 서적.

청을 풍미한 고증학, 사회 핵심적 사상으로 도달하지 못하다

결국 청나라를 풍미했던 고증학은 부분적으로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해내어 근대지향적인 사상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시대 전체를 주도할 만한 사상체계나 혹은 다가오는 근대세계를 맞아 사회의 핵심적인 사상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의 위치는 차지하지 못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증학의 발달 -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

 

 

입력 2008-03-01 03:02업데이트 2009-09-25 13:52

1934년 3월 1일 중국 최후의 황제 푸이(溥儀)가 만주국 황제로 취임했다.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청나라 황제에서 강제 퇴위당한 지 22년 만이었다.

 

만주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중국 침략 기지로서 일본 관동군이 만든 나라였으며 실권도 관동군에게 있는 ‘괴뢰국’이었다. 푸이는 단순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 공산당에 전쟁포로로 넘겨진 그는 오랜 옥중 생활 끝에 1959년 특사로 풀려나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에 중국 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그는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푸이가 만주국의 황제로 즉위한 내막은 중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됐지만 신해혁명을 겪고 군부와 일제의 괄시를 받으며 눈칫밥을 먹어온 그가 허수아비 황제로 이용될 것을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납치되었다는 설, 중국 혁명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설, 일본인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설 등이다. 푸이의 영국인 교사 레지노 플레밍 존스턴은 “푸이는 원래 영국이나 미국으로 유학 가고자 희망했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일본인들과 가까워졌다. 만주에 간 것은 스스로 원해서 내린 선택이다”라고 회고했다.

비록 객관성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푸이 자신이 중국 공산당의 조사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일본인들은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난 그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인 수십 명이 내가 머물고 있는 거처로 찾아와 포위했다. 난 시종들에게 탈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했으나 그들에게 끌려 나갔다. 자동차로 5일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만주의 허허벌판이었다. 그때서야 날 끌고 가는 목적을 알았다.”

결국 중국 황제로 복귀하려던 구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인들에 의해 굴러가는 정사를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의 동족인 만주인들이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할 때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스스로 지킬 힘을 갖추지 못한 황제는 비참했다. 어느 한 곳 의지할 데 없이 일제의 전횡을 막아낼 힘을 지니지 못했던 구한말의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힘없는 나라의 황제가 이럴진대 백성은 어떠했을지….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입력 2007-03-20 03:00업데이트 2009-09-27 17:17

“아가야, 빨리 잠들어라. 네가 자야 엄마가 일을 할 수 있단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의 외진 마을 싼지아지에 사는 멘슈징(82·여) 씨는 손자에게 가끔 이런 자장가를 들려준다.

그가 부르는 자장가는 중국어가 아니라 사어(死語)로 분류되는 만주어 자장가다. 뉴욕타임스는 18일 중국의 유일한 만주어 사용지역인 동북부 마을 르포를 통해 사멸 위기에 놓인 만주어의 운명을 조명했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지만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한 뒤 급속하게 한족에 동화됐다. 중국에서 자신을 만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1000만 명 정도. 대개 랴오닝(遼寧)과 지린(吉林), 헤이룽장 성 등 중국 동북부지역에 거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모국어인 만주어를 말할 줄 모르며 문화도 한족이 주도하는 중국 문화에 동화됐다.

뉴욕타임스는 중국 언어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용해 중국 동북부의 고립된 마을인 싼지아지에 사는 80대 이상의 노인 18명만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실정이라고 소개했다. 이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만주어는 지구상에서 실용어로서의 역할이 소멸된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은 이번 세기 말까지 전 세계 6800개의 언어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 중 만주어처럼 급격하게 쇠락한 언어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특집·한 글(주변국의 문자) (korean.go.kr)

 

특집·한 글(주변국의 문자)

2. e는 어두에서만 a와 구별된다. 어중과 어말에서 자형상으로는 a와 구별이 되지 않는데, q,Υ,k,g에 연할 때는 앞 자음에 의해서 a 와 e가 [몽고 문자표 1] (고전기) 현대 몽고자 표 [몽고 문자표 2]

www.korean.go.kr

 

 

삼태극 | 금나라 청나라, 과연 한국사인가, - Daum 카페

 

금나라 청나라, 과연 한국사인가,

금나라 청나라, 왜 한국사인가, 1. 총설 서기1125년 북방의 여진족을 통일한 아골타가 이끄는 금나라 군대는 일명 몽골준마(과하마)로 편성된 기마군단을 앞세워 요나라로 진군한다. 이어 고려를

cafe.daum.net

 

 

<참고자료>

 

청나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만주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Manchu people - Wikipedia

 

 

천명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청태조 누르하치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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