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202002호 (2020.01.17) [242]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튀르크 14개 왕조의 뿌리, 고구려 고(高)씨 왕가 

6세기 고대 튀르크인의 모습이 우리 선조와 닮은 까닭은?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튀르크 14개 왕조의 뿌리, 고구려 고(高)씨 왕가

6세기 고대 튀르크인의 모습이 우리 선조와 닮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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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호 (2020.02.17) [254]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중앙아시아 ‘중세 300년’ 호령한 예맥 칸국 

750명 유민(遺民)으로 시작한 ‘고구려 굴기(屈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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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명 유민(遺民)으로 시작한 ‘고구려 굴기(屈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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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호 (2020.03.17) [318]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마지막 회)] 고구려와 튀르크 잇는 ‘미싱링크’ 킵차크 칸국 

동아시아(요나라 vs 금나라) 대전쟁이 낳은 연합왕국(키멕 칸국)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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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

 

201701호 (2016.12.17) [329]

[새연재 | ‘異論’의 역사] ‘나무꾼과 선녀’ 설화에 얽힌 비밀 

청(淸) 왕조 세운 여진족과 우리 민족의 관계를 밝히는 열쇠 

전원철 미국변호사, 법학박사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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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왕조 세운 여진족과 우리 민족의 관계를 밝히는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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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호 (2017.02.17) [309

[‘異論’의 역사(3)] 원수이자 은인, 청의 중원 정벌 뒤에 그가 있었다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5671

 

[‘異論’의 역사(3)] 원수이자 은인, 청의 중원 정벌 뒤에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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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4)] 조선(朝鮮)의 혈맥 천자(天子)의 제국을 다스리다

‘조션인(女真族)’ 출신 태조 주원장, 몽골·고려의 핏줄 받은 영락제 한족(漢族)의 제국 명나라 황통(皇統)에 조선민족의 뿌리가 승계돼 17세기 몽골의 석학 룹상단잔의 <황금보강(黃金寶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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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5)] 명(明) 황제는 왜 ‘조선류(流)’에 빠졌나

영락제의 공헌현비(恭獻賢妃) 권씨(權氏)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이야기… 당시 명의 황궁은 문지기부터 침실 수발까지 조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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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6)] ‘칭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의 옛소리?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른 한자음은 ‘팅궤트칸’, 자음접변 거쳐 ‘텡기즈칸’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lica) 창출한 몽골제국의 기원은 발해 왕가임을 밝히는 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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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201707 호]

[異論의 역사(7)]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異論의 역사(7)]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조선(大朝鮮) 보혈(寶血)이 서토(西土)의 강역을 휩쓸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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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8)] 칭기즈칸의 선조 지파(支派) 부랴트 3종족의 기원

알란 고아(阿蘭乞哥)의 10세대 후손이 세계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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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9)] 몽골제국 4칸국 수립과 고려·중원·세계와의 관계

쿠빌라이칸이 세운 대원국은 대발해와 쌍둥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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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10)(마지막 회)] 원래 ‘한 핏줄’인 고려와 몽골제국

칭기즈칸과 누르하치, 그들은 한민족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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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 (1부)투르크족과 코리안의 역사적 형제관계에 대하여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 연구가

2015/12/25 

 

목 차

I. 서문 (투르크인들의 전설적 선조 오구즈 칸)
II. 본론 (오구즈 칸, 오구즈종족 코르쿠트 아타, 오스만제국 술탄 오스만과 고구려)
1. “오구즈 칸 이야기”의 기록
2. “오구즈 칸 이야기”의 내용
3. “오구즈 칸”은 칭기스 칸의 “모골 칸”과 “타타르 칸”의 고구려 왕가 계보 속의 인물
4.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말의 투르크어 형태
5. 오구즈 투르크 “바야트 씨족”의 데데 코르쿠트는 “부여 씨족”의 코르쿠트
6. 동서방을 오고 간 고구려 종족과 투르크 종족의 역사적 관계 약사
7. 서방으로 이동해간 고구려 종족에서 나온 투르크 종족의 오스만 칸 가문
III. 투르크, 터키와 코리안은 진정 피를 나눈 형제민족

I. 서 문 

투르크인들의 전설적 선조 오구즈 칸

  터키인들과 투르크멘, 아제르바이잔, 우즈벡, 카자흐 등 여러 투르크 민족들의 전설과 역사서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선조는 기원전에 나타나 기원후 4세기 초에 사라지는 훈, 그 직후에 나타나는 선비, 그 다음의 독쿠즈 오구즈, 셀죽 투르크, 근세의 오스만 투르크 등 여러 역사적 시기에 기록되거나 전설로 이어온 종족들을 자신의 선조로 기술한다. 이들 가운데 여러 투르크 종족들의 기록된 최초의 전설적 선조 중 하나인 “오구즈 칸(Oğuz Kağan)”은 누구인가?

  오늘날 많은 터키인을 비롯한 여러 투르크 국가들은 특히 1300년대 초중반에 쓰인 <집사>의 별책인 <오구즈 사(Tarikh-i Oguz)>에 기록된 “오구즈 칸”을 자신들의 선조로 본다. 물론 오구즈 칸의 부족들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와 터키에 남아 오늘날의 터키인들과 다른 여러 투르크 민족들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이는 올바른 이야기이다. 

그 오구즈 칸은 그러면 누구인가? <집사, 부족지>에는 오구즈 칸이 투르크와 몽골 종족이 분리되는 계기를 주는 인물로도 기록되어 있다. 또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오구즈 사>와 비슷한 시대에 최초로 글로 적힌 것으로 추정하는 위구르어 본 <오구즈의 書(Og'uzname)>에도 나온다. 

 

▲ 라시드 웃딘의 <집사>의 내용에서 투르크와 몽골의 분리 계기가 되는 오구즈칸 그림     © 편집부


  그 오구즈 칸에 관해서 터키 학자 우마르 오플라즈(Umar Öflaz)가 쓴 <오구즈의 書-하늘로 올라가는 길(Oğuznâme-Ko'klere giden yol)>은 “오구즈 튀르크의 관습을 보면 오구즈 카간(Oğuz Kağan, 오구즈 칸)은 튀르크인들의 최초의 선조이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우마르 오플라즈의 이 말은 발표자가 방금 말한 투르크인들의 오구즈 칸에 관한 관점을 대표적으로 잘 비추어 준다. 이러한 보편적인 관점은 위키피디아는 물론, 그러한 관점의 또 다른 한 예로 아래 삽화가 보여주듯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아시카바드에는 오구즈 칸의 동상이 “투르크멘의 전설적 선조”로 서있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터키인들을 중심으로 투르크멘, 아제리 및 여타 투르크인들이 자신의 선조라고 간주하는 그 “오구즈 칸”의 시대는 언제이고 또 그는 단지 투르크 종족의 “전설적인”선조에 불과할까, 아니면 역사적 실존인물일까? 만일 실존인물이라면 그는 과연 누구이며 그 당시 그의 백성은 또 어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도대체 민족이었을까? 또 그들은 오늘날의 투르크 민족들과 어떤 관계일까?

  이 문제에 관해 우마르 오플라즈 자신도 “오구즈 카간이 존재한 시대는 어느 시대일까?” 하고는 물었다. 다만 그는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내가 던진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오구즈 칸”이 당연히 역사적 실존인물이며, “오구즈 칸” 자신은 너무도 자명한 그 “오구즈 칸” 자신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이 물음과 관련된 한-터키 내지 한-투르크 형제사의 한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 (좌) "투르크인들의 선조” 오구즈 한, (우) 투르크메니스탄 아쉬카바드의 오구즈 동상     © 편집부

 
II. 본 론 
오구즈 칸, 오구즈종족 코르쿠트 아타, 오스만제국 술탄오스만과 고구려

  이러한 주제를 위해 우리는 여기서 방금 서두에서 제기한 오구즈 칸과 그 외 그와 관계되는 오구즈 종족의 코르쿠트 아타,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창시자 술탄 오스만이 고구려-발해인과 가지는 관계를 간략히 봄을 통해 오늘날 한-터키 내지 한-투르크 형제사의 한 면을 보도록 한다. 

  1. “오구즈 칸 이야기”의 기록

  우선 투르크 종족의 선조 오구즈 칸에 관한 이야기이다. 터키학자 파티흐 셍굴(Fatih Sengul)은 그가 쓴 몇몇 투르크 종족의 기원에 관한 글에서 “오구즈 칸”에 관한 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가장 오래 된 오구즈 칸 이야기(Oğuz Kağan destani)는 위구르어와 문자로 쓰인 기록된 것이다. 단, 우구르어 오구즈나메(Oğuznâme)는 유감스럽게도 서두, 중간, 끝부분 등 여러 부분에서 완전하지 못하다. 

오구즈 이야기(Oğuz destani)는 ... 동시대로 이름난 모골 역사가 라시드 웃딘이 정착시켰다. 저자의 <집사(Camiu't-Tevarih)>라는 위대한 사료에 ‘오구즈 투르크 역사와 세계정복의 이야기(Tarih-i Turkanu Oğuz ve Hikayeti Cihangir)', 곧 '투르크인들의 그리고 오구즈의 역사와 그의 세계정복 이야기(Turkler'in ve Oğuz'un Tarihi ve onun cihangirliginin hikayesi)' 부분이 이 사본(suret)과 함께 나온다.”

  곧 여러 권의 시리즈로 된 <집사> 가운데 한 별책인 <오구즈 역사(Tarikh-i Oguz)>에 나오는 “오구즈 칸 이야기”가 바로 오늘날 터키인 및 여러 투르크 민족들이 자신의 선조라고 부르는 “오구즈 카간의 이야기(Oğuz Kağan destani)”라는 말이다. 이 <집사>에 나오는 “오구즈 칸”은 호라즘 샤이바니 우즈벡 칸들 가운데 하나였던 아불가지 바하두르 칸(Eb'ulgazi Bahadir Han, 1603년~1663년)이 쓴 <투르크의 계보(Shecerei Terakime)>와 그가 쓴 또 하나의 사서 <투르크의 계보(Tu'rkun Soy Agaci)>[편의상 <투르크의 계보 2.>]에 나오는 “오구즈 한”과 같은 인물이다.

 

터어키 관련기사목록

출처;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49§ion=sc9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주 칸'의 후손인 칭기즈 칸 (2부)

칭기스 칸은 키야트족의 시조 키얀의 증조부 '팅기즈 칸'의 19대손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 연구가

2016/01/10 [17:16]

 

이 오구즈 칸의 이야기는 몇 가지 사서에서 시대를 따라가면서 기록되었다. 그 사서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쓰인 사서는 1310년대 초에 모골이 서방 이란과 시리아, 아제르바이잔에 걸쳐 건설했던 일 칸국의 가잔 칸(Ghazan Khan)의 명에 따라 그의 페르시아인 재상 라시드 웃딘이 1310년대에 쓴 <집사>이고, 그 다음 15세기에 티무르 제국의 한 칸이던 울룩 벡이 쓴 <사국사>도 이 오구즈 칸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풀이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그보다 좀 더 나중 17세기에 히바 칸 아불가지가 자신이 쓴 <투르크의 계보(Shecerei Terakime)>속에서 오구즈 칸 이야기를 다시 실었다.      

아불가지 칸은 또 우리 말로는 <투르크의 계보(Tu'rku'n Soy Agac)>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앞의 책과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지만 원어로는 구별되는 두 사서를 썼다. 이 두 번째의 <투르크의 계보(Tu'rku'n Soy Agac)>를 잠시 <투르크의 계보 2>라고 불러보자. 그는 이 사서에서도 투르크의 계보 이야기를 하면서 오구즈 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 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 편집부

 


이 몇 권의 사서들에 적힌 그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Adam)의 시대에서 여러 대를 거쳐서 라멕(Lamek)의 아들 노아(Nuh)의 시대에 하늘(Tanri)의 명으로 홍수가 넘쳐 모든 사람들이 죽고 오직 노아의 3아들과 그 색시들만이 남았다. 그들은 주디(Cudi) 산에서 방주에서 내렸다. 노아는 큰 아들 함(Ham)을 힌두(Hint)로, 삼(Sam)을 이란(Iran)으로, 야페스(Yafes)를 북극(kuzey kutbu)로 보냈다. 노아는 그들에게 “아담 아들들 가운데 너희들 셋 밖에 남지 않았다. 너희 셋은 세 유르트(나라)에서 살도록 하라. 가문이 불게 되면 그 땅을 나라로 하여 살도록 하라.” 고 했다.      

  야페스에 관해 어떤 이들은 선지자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아니라고 한다. 야페스는 아버지의 명으로 주디 산에서 이딜(Itil, 볼가, Volga)와 야익(Yayik, 우랄 Ural) 강에 가까운 곳에 가서 250년을 살고 죽었다. 그에게는 8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가문들이 불어났다. 아들들의 이름은 투르크(Tu'rk), 하자르(Hazar), 사클랍(Saklab), 루스(Rus), 밍(Ming), 친(Cin), 키마리(Kimari), 타리흐(Tarih)이다. 야페스가 죽을 때 큰 아들 투르크(Turk)를 옆에 두고 다른 아들들에게 “투르크가 너희들 자신의 파디샤(padishah, 王)가 되어 그의 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투르크에게 야페스오글루(Yafesoglu)라는 이름을 주었다. ... 투르크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투툭, 하칼, 바르사차르와 엠락이다. 투르크가 죽자 파디샤자리는 큰 아들 투툭에게 주었다.... 그는 아젬(Acem: 이란)인들의 최초의 왕인 키유마르스(Kivmars)와 동시대 사람이다.... 사냥을 하다가 (소금)땅에 떨어진 고기를 먹어보니 맛이 좋아, 소금을 쓰게 되는 방법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들 일체한(Ilcehan)이 그의 자리에 올랐다. ... 일체한이 죽자, 그 자리에 아들 딥바쿠이 한(Dibbakuy Han)이 올랐다. ‘딥’의 뜻은 왕의 자리, ‘바쿠이’는 백성과 나라의 수령이라는 말이다. ... 그 뒤 구육 한(Kouyouk Han)이 권좌에 앉았다.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린 뒤 왕관을 알린자 한(Alinca Han)에게 주었다. 알린자 한도 많은 해들을 통치한 뒤 마침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으로 갔다. 노아에서 알린자 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야페스 후손들은 올바른 종교(din)을 믿었다....     

  알린자 한의 두 아들이 있었다. 쌍둥이로 났다. 큰 아들의 이름은 타타르(Tatar), 작은 아들은 모골(Mogol)이다. .... 타타르 한(칸)은 많은 해들을 통치한 뒤 죽었다. 그 자리에 가문의 7명의 사람들이 뒤를 이어 왕좌에 앉았다. 타타르 한 뒤에 부카 한(Buka Han)이 자리에 올라 긴 시간을 통치했다. 그 뒤 아들 옐렌제(Yelence), 옐렌제 한 뒤에는 아들 아들르 한(Adli Han)이 이었다. ....[*이 뒤로 타타르 칸의 8세대 칸의 이야기가 세빈치 한(Sevinchi Han)까지 나오나 이는 줄임] 

  한편 [*앞서 말한 타타르 칸의 쌍둥이 형제인 모골 가계의 시조] 모골 한(칸)은 오랜 해들을 파디샤로 통치했다. 4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카라한(Karahan), 둘째는 우즈한(Uzhan), 셋째는 쿠즈한(Kuzhan), 넷째는 쿠르한(Kourhan)이다. 그가 죽자 자리를 카라한에게 남겼다. 카라한은 아버지 뒤에 모든 나라의 파디샤가 되었다. 오늘날 이름은 울룩 닥(Ulug-dag)과 쿠축 닥(Ku'chu'k-dag)인 아르 닥(Ar Dag)과 카르 닥(Kar Dag)에서 여름을 지냈다. 겨울이 오면 카라쿰(Karakum)에서 시르 강(Sir Suyu) 가에서 겨울을 났다.  

카라한 시대에 모든 모골인들은 카피르(Kafir, 이교도, 불신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진실한 탕그리(Tanri, 하늘, 하느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뒤로 알린자 칸의 아들 타타르 칸과 모골 칸 형제, 그 중 모골 칸의 아들 카라한의 아들 오구즈 칸의 행적 이야기가 자세히 이어지는데 이는 줄임] 이 계보는 각각의 인물에 관한 짧은 이야기와 함께 모골 칸의 아들 카라 한(칸)의 아들 오구즈 칸, ... 균 한(칸), 아이 한(칸), 일디즈 한(칸), 멩클리 한(칸), 뎅기즈 한(칸), 일 한(칸)의 모골 칸 9세대로 이어진다. 

  일 한(칸)(Il Han) 다음으로는 라시드 웃딘이 쓴 <집사>가 말하는 “투르크와 모굴” 사이의 대전쟁이 일어난다. 이는 달리 울룩 벡이 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와 모굴” 간의 대전쟁이다. 그 이야기의 구체적 내용은 여기서 줄인다. 단지 간단히 말하자면, 모골 종족의 일 한(일 칸)의 시대에 타타르 종족의 수윤지(세빈치 칸)이 키르그즈(키르기즈) 칸과 모의하여 모골 종족에 대한 대전쟁을 걸어온다. 일 한의 모골종족은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처음에 승승장구한 이 전쟁은 마침내 모골 종족의 참패로 끝나고 모든 병사가 전사했다. 그 참혹한 전쟁에서 전멸당한 모골 종족 가운데서 오직 일 한의 아들 키얀과 그의 종형제(종조카) 노쿠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적군의 포위를 뚫고 어스름을 틈타 그들의 갓 혼인한 각각의 두 아내와 몇 명의 시종들을 데리고 사서들이 전하는 전설적인 모골-투르크 종족의 고향 에르게네 콘(*<집사>와 <사국사>의 아르카나 콘)이라는 지방으로 피신해 들어가 살았다.    

▲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 칸이 차지했던 영토는 그들 조상의 활동무대였다.     © 편집부

 


많은 세월이 흘러 그 두 사람의 후손이 점차 불어나 그들은 각각 키야트 종족(씨)과 다를라킨 종족(씨)이 되고 그 결과 그 장소가 좁아졌다. 그러자, 그들은 마침내 그 에르게네 콘에서 빠져나오기로 하고 철광석으로 둘러싸인 그 에르게네 콘 계곡을 70마리의 소들을 잡아 거대한 풀무를 만들고 석탄을 태워 그 철광석으로 된 계곡을 녹이고 탈출한다. 예전에 바로 거기로 들어간 “키얀”과 니쿠즈 두 사람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종족(씨)”으로부터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이 태어나 그의 선조 가문이 된다.      

바로 그 “키야트 종족”의 시조가 된 “키얀”의 증조부인 “팅기즈 칸=뎅기즈 한”의 19대손이 오늘날 “몽골인”으로 알려진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오구즈 칸의 후손 계보는 칭기스 칸에게까지 이어지는 데, 그 “오구즈 칸”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이다.

 

기사입력: 2016/01/10 [17:16]  최종편집: ⓒ greatcorea.kr

 

출처;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53§ion=sc9

 

 

오구즈칸은 칭기스칸의 23대 선조로 高句麗 왕족 (3부)

칭기즈칸의 선조 타타르칸=대대로칸, 오구즈칸의 조부 모골칸=말갈칸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연구가

2016/01/28 [16:41]

 

오구즈 칸은 특별한 정황에서 무술만(무슬림, 회교도)으로 태어났다. 이 때문에 마치 흉노의 모둔 단우(*선우)와 그 아버지 사이에 벌어진 일처럼, 자신의 아버지 “카라 한”과 대결을 벌인다. 이 전쟁은 매우 심각하고도 큰 싸움이어서 <집사>는 그 결과 투르크 종족과 모골종족의 분리가 일어났다고 한다. 단, <집사>와는 달리, <사국사>는 이 두 종족의 분리에 관한 사실을 특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 뒤의 이야기는 <집사> 시리즈 별책인 한 권의 책 <오구즈 사>에서 자세히 기술되었다. 이 사서를 읽어보면, 오구즈는 “칸”이 된 뒤 동서방의 여러 나라와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여러 지방과 백성을 정복한다. 

이와 관련하여 라시드 웃딘은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줄여 <집사> 부족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내가 자세히 써서 뒤에 이 축복의 사서의 부록으로 덧붙이겠지만, 오구즈는 이란, 투란, 시리아, 이집트, 룸, 프랑크 및 다른 모든 지방들을 정복했다. 모두를 정복한 뒤 자신의 목지가 있는 우르탁(*읍루 땅)과 쿠르탁(*고려 땅)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거기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을 모으고 매우 장려한 황금의 천막을 치고 거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 오구즈의 세계정복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생략하지만, 매우 영웅적이고 서사시적인 이야기이다. 특히 라시드는 이 이야기들을 그가 말한 <집사>의 “부록”, 곧 내가 말하는 “별책”인 <오구즈 사(Tarik-i Oguz)>로 기록하여 별도의 한 책 속에서 자세하게 적었다. 그것을 민간 전승의 내용으로 적은 것이 위구르어본 <오구즈나마>이다. 그것들이 다른 투르크어 본에서 터키인을 비롯하여 여러 투르크민족들이 “오구즈 칸 다스타니(Oguz Khan destani)”, 곧 “오구즈 칸 이야기”라고 부르는 투르크 전승이 된다. 

  라시드 웃딘이 정리한 <오구즈 사>와 위구르어본 <오구즈 나마> 속의 이야기들은 민간전승의 힘을 빌려 여러 가지 이야기 형태로도 퍼졌다. 그것이 보통 투르크인들이 “오구즈 칸 이야기”라고 부르는 전설이다. 히바 칸 아불가지도 자신이 쓴 <투르크의 계보(Shecerei Terakime)>에서 오구즈 칸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이미 그 사서보다 앞서 15세기에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Dede Korkut Hikayeleri)>로 문자화되었다. 

▲ 영국 동인도회사 출신의 마일스 대령이 1838년 번역한 <투르크와 타타르의 계보>     © 편집부

 


3. “오구즈칸”은 칭기스칸의 “모골칸”과 “타타칸”처럼 고구려왕족

  이제 방금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 그 <집사>의 <오구즈 사>와 <투르크의 계보> 등에 나오는 “오구즈 칸”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고구려”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제부터 중요한 사실을 보자. 그 사실은 간단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오구즈 칸” 자신은 바로 “고구려 왕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오늘날 투르크인들이 자신의 선조로 받아들이고, 그 근거로 제시하는 앞서 든 몇 가지 사서들에 기록된 그 “오구즈 칸”은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바로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23대 선조인데, 이 칭기스 칸의 가문이 바로 고구려-발해 왕가의 가닥족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방의 투르크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설적 선조로 간주하는 “오구즈 칸”은 생각지도 못하게도 세계제국을 지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또 우리 극동지방에 존재했던 “고구려” 왕가의 지파 인물이다! 

이 놀라운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세계정복자”로 이름난 이른바 “몽골”, 아니 고구려의 7개 말갈부(靺鞨七部) 중 하나인 속말(粟末) 지방 “말갈(靺鞨)” 가문 출신으로 드러나는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인”으로 알려진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놀랍게도 오늘날 서방세계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여러 “투르크 민족들의 선조”로 알려진 바로 그 “오구즈 칸”의 출신과 그 계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권과 2권에서 <집사>와 <투르크의 계보> 1.2.와 같은 계열의 사서로 울룩 벡이 그것들보다 앞선 시대에 쓴 <사국사>에 기록된 “팅기즈 칸” [곧 <투르크의 계보> 1.2. 등이 말하는 “뎅기즈 한(Deniz Han, *Dengghiz Khan)”]이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盤安郡王 大野勃)임을 밝혔다. 특히 나는 “팅기즈 칸”(뎅기즈 한)은 정확히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제19대 선조임도 밝혔다. 

▲ 남(내)몽골 다구르 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 선생 주해의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이라고 번역되는 《알탄 톱치》.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 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 편집부



이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는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계보(shecere, shejere)를 기반으로 그것을 여러 동방의 사서들의 기록과 철저히 대조하였다. 더불어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산 지방의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한편은 문헌사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역사언어학적 또 다른 한 편 역사지리학이라는 연구방법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그 계보의 인물들의 출신과 행적, 시대, 그들이 산 곳 등을 자세히 밝혔다.
 
  이러한 연구를 위한 1차 사료가 되었던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 2>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그 “팅기즈 칸”의 4대 선조가 바로 투르크 종족의 한 중요한 선조인 “오구즈 칸(한)”이다. <사국사> 등에 따르면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모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이 두 인물 가운데 “모골 칸”의 6대 후손이 칭기스 칸의 19대 직계선조인 “팅기스 칸”이다. 

사서에 기록된 알린자칸의 아들 타타르칸과 모골칸 형제, 그 중 모골칸의 아들 카라한의 아들로 태어난 오구즈칸이 칭기 칸의 19대 선조 텡기즈칸과 연결되는 계보 

칭기스 칸의 전설적이자 역사적 선조인 <집사>의 “키얀”의 종할아버지 팅기즈 칸, 곧 “진국왕(震國王)”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계보
 
  이와 관련하여 나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권에서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 1.2.>에 기록된 “타타르 칸(Tatar Khan)”은 사실은 “고구려인(高句麗人)” “대대로(大對盧)” 가문의 한 “가한(可汗: 고구려-말갈어)”[곧 “각간(角干: 신라어)”, 즉 다른 말로 “칸”(汗: 만주어), 干(간: 신라어), 郞(랑: 고구려어), 郞君(랑군: 고구려어), 노욘(noyon/noyan: 몽골어), 족장: 오늘날의 말뜻풀이의 지위에 있었던 대대로 개금(蓋金, 蓋蘇文)의 할아버지 개(연)자유[蓋(淵)子游]와 같은 인물임을 밝혔다. 

  또 몽골어와 투르크어의 “타타르 칸”이라는 말 자체가 고구려-말갈어의 “대대로 칸”도 밝혔다.  동시에 이 “타타르(대대로) 칸”의 쌍둥이 형제로 기록된 “모골(Mogol)” 가문의 시조 “모골 칸”은 곧 “말갈(靺鞨) 칸”이고 그는 대조영 가문의 4대 선조임도 밝혔다. 바로 이 “모골 칸”의 아들이 “카라(高麗) 칸”이며, 이 카라 칸에게 다시 아들이 되는 이가 “오구즈 칸”이다. 

나 자신의 저서에서 이에 관한 설명은 내 글이 말하려는 주된 주제와는 관련이 비교적 적다는 데 덧붙여, 서술상 지면이 많이 든다는 문제로 생략하였다. 단, 이제 그 생략한 부분의 계보를 이 글을 통해 밝혀보자. 그러면 이 “오구즈 칸”은 고구려(高句麗) 막리지(莫離支) 겸 “대대로(大對盧)” 개소문(蓋蘇文) 가문의 3대조로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 2>가 “타타르 칸”이라고 부르는 개(蓋, 淵)자유(子游)의 2대 종(從)손자이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56§ion=sc9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말의 투르크어 형태 (4부)

전원철 법학박사

2016/02/13 [22:57]

 

고구려-발해 왕가의 한 후손으로 드러나는 칭기스 칸의 이른 시기의 선조로 그의 “모골” 가문의 창시자(중시조)인 “모골 칸”의 손자가 바로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칸은 모골 칸의 아들인 “카라 칸”에게 또 다시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오구즈 칸”은 서두에서 인용한 터키학자들도 인정하듯이 바로 <집사> 속의 “오구즈 칸”이고, 바로 이 인물이 터키를 비롯한 투르크인들이 말하는 전설적인 그들의 선조 “오구즈 칸(Oğuz Kağan)”이다. 

  칭기스 칸의 이른 시기 선조는 고구려(高句麗)-말갈(靺鞨) 가문의 인물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세대인 “알린자 칸”의 두 쌍둥이 아들 가운데 작은 아들인 “모골 칸의 아들”로 난 “카라 칸의 아들”이 바로 “오구즈 칸”이다.  참고로 <투르크의 계보2> 속의 “알린자 칸(Alinca Han)”은 울룩 벡의 <사국사>에서는 “알무잔나 칸”으로 나오는 인물인데, 이 이름은 오늘날에는 “을지설 각간(乙支設 角干)”이라고 발음하는 이름의  옛 소리 “알라이(乙支) =*알린 + 설(設)=차르(*투르크어 “-자/-자르”) 카간(角干)=칸(한)”을 투르크어로 쓴 이름이다.

  이 두 가문 가운데 “타타르 종족”, 곧 ‘대대로(大對盧) 가문’이 인물들이 남긴 비문의 기록을 보면 이 두 가문의 이른 시기의 공동선조는 바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이다. 두 가문은 모두 주몽(朱蒙)의 후손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고구려(高句麗)의 ‘대대로(大對盧) 가문’과 고구려(高句麗)-말갈(靺鞨) 왕가의 계보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인 모골 칸의 손자 “오구즈 칸(Oğuz Kağan)”은 분명히 “고구려인”이다. 특히 그는 고구려 왕가의 일원, 그 가닥족속의 한 사람이다.
 

▲     © 편집부

 


 4.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말의 투르크어 형태

  “오구즈 칸(Oğuz Kağan)”은 칭기스 칸의 선조인 고구려(高句麗)-말갈(靺鞨) 왕가의 계보 속에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고구려인”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칭호) “오구즈 칸(Oğuz Kağan)” 자체도 역사언어학적 차원에서 보면 사실은 “이름+칭호”로 이루어진 고구려어 낱말이다.  
  
  우선 “오구즈 칸(Oğuz Kağan)”에서 뒷부분인 “-칸(Kağan)”이 분명히 고구려어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는 “기자(箕子)와 가한(可汗)을 섬기고 있었다” 고 하여 “가한(可汗)”이라는 칭호를 이미 기원전 1100년전 인물에 관해 쓰고 있었다. 또  “가한(可汗)”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더불어 부여신(夫餘神), 곧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에 대한 숭배 및 제사도 언급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기자가한과 주몽의 어머니 부여신을 섬긴 것은 고구려가 지어진 시기인 BC1세기로 올라갈 수 있다. 

고구려 주몽의 서자 가문인 온조의 백제가문도 <삼국사기>에 따르면 수백 년 동안 국경을 넘어 부여신에게 제사지내는 그 특별한 날에는 서로 간에 빈번히 발생한 정치적 적대와 전쟁도 잠시 잊어버리고 한 핏줄, 한 집안의 일원으로 그 제사에 동참했다.   그 신성한 뿌리를 다시 돌아보곤 했던 계기가 된 선조에 대한 제사의 한 대상의 이름(칭호)로 쓰인 “칸(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에서 “가한”이라는 말이 거의 기원전에 이미 쓰인 점은 이 글을 통해 이미 확인 되었다. 그렇지만, 그에 비해 투르크어로 “왕(King, emperor)”을 뜻하는 이 “-칸(Kağan)”이라는 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어 “가한(可汗)”보다는 훨씬 나중인 530년경에 투르크(돌궐)의 칭호로 채용되었다. 이는 신라에서 “각간(角干)”에 앞서 520년에 쓰인 서불-한(舒弗-邯)보다는 좀 늦고, 신라어 “각간(角干: 이는 오늘날의 우리 말로 “큰 칸”이라는 뜻의 옛말 “커 칸”의 한자 이두식 표기로 보임)” 또는 “간(干)” 계열의 칭호가 551년에는 쓰인 것보다는 좀 이르다. 

  고대 조선어 낱말 “가한(可汗)”은 오늘날로부터 약 3100년전의 인물로 드러나는 기자의 직칭으로, 약 2000년 전인 고구려 초에도 사용되었다고 보이는 말이다. 단, 이와는 대조적으로 “투르크어”에서는 4~5세기경까지 “군장(君長)” 계열의 뜻을 가진 백제어 “솔(率)”과 고구려어 “살(薩)”에서 유래한 말로 보이는 “샤드(設, 설)”를 썼다. [좀 더 후세의 위구르 시대에는 이 지역에서 고대 동이어(東夷語) “벡(伯)”의 투르크어 형태인 “비(斐)”, 곧 “Biy”가 상당동안 쓰였다.] 

그러다가 “코구려씨(鬱久閭氏, 울구려씨)”로 분명히 고구려어 계 인물로 유연(柔然* 옛소리로 ‘조젠/조센’, 곧 朝鮮), 곧 유유(蠕蠕, 조선과 유연의 탁발선비어(북위)식 변음)를 세운 “모쿠리(木骨閭, 목골려)”의 후손 사륜(社侖)이 처음 자기의 칭호를 “두대-가한(豆代-可汗)”이라고 했다. 이때는 오호 십육국 시대 북위의 제1대 황제인 도무제(北魏 道武帝, 371년 ~ 409년, 재위: 386년 ~ 409년) 때이다. 그러므로 그 때는 늦어도 400년대 초이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59§ion=sc9

 

 

bökli čölgil은 돌궐비문에 나타난 고구려의 이름 (5부)

Pr. Osman Fikri Sertkaya

2016/03/04 [22:48]

 

10. 위서(魏書), 북사(北史), 통전(通典), 통지(通志) 같은 중국 문헌들에 나오고 mu ku lü로 읽히는 낱말은 “대머리”를 뜻한다. 즉 사람의 머리에서 털이 나지 않는다. 이것과 평행하여 중국어-산스크리트어 사전에서는 kao li ~ gao li의 산스크리트어 상응어가 일본어 전사는 mo ku ri, 중국어 전사는 mu kü li로 이루어진다. 

두 전사는 모두 그 뜻이 “모래투성이 나라”이다. 즉 나라의 토지가 모래투성이 사막이어서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 첫째 것에서는 사람의 머리에서 머리털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둘째 것에서는 그 땅에서 식물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mo ku 또는 mu kü (일본어로는 baku) 기호들이 사용되는 것은 숙고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11. 이제 쾰 티긴 비문과 빌개 카간 비문에 나오는 구절의 자역(字譯)과 전사를 제시하자:

: LiGLOC : iLKUB B²ẄK²L²I : ČẄL²G²IL² : bökli : čölgil :
: Cgbt T¹B¹G¹Č : t(a)bg(a)č :
: TOpUT T²ẄPẄT² : töpöt :
: rp PR¹ : p(a)r :
: mrup PWR¹M : (a)p(a) ur(u)m :
: zkrix K¹IIR¹K¹Z : kırk(ı)z :
: nkirqCO ẄČK¹WR¹IK¹N¹ : üč korïk(a)n :
: rttztu WT¹ZT¹T¹R¹ : otuz t(a)t(a)r :
: ytix K¹IT¹NY : kït(a)ny :
: ibtt T¹T¹B¹I : t(a)t(a)bï :


이 열두 종족 이름에서 오직 한국의 이름만 bökli čölgil 형태로 동의어로서 나온다. apa urum, üč korïkan 및 otuz tatar 종족 이름들은 형용사 수식 구문 구조로 표현되었다.

   öŋre kün : togsıkda : bökli : čölgil : t(a)bg(a)č : töpöt : p(a)r : (a)p(a) ur(u)m : kırk(ı)z : üč korïk(a)n : otuz t(a)t(a)r : kït(a)ny : t(a)t(a)bı bunça bod(u)n k(e)l(i)p(e)n : sïgtamïš : yoglamïš :     

   “동쪽에서 해뜨는 곳으로부터 bökli čölgil [한국], tabgač [중국], töpöt[티베트], par [이란], (a)p(a) ur(u)m [大로마], kırk(ı)z [키르기스], üč korïk(a)n [3 새끼양], otuz t(a)t(a)r [30 타타르], kït(a)ny [거란], t(a)t(a)bï [해(奚)] 이만큼의 백성이 와서 울었다 한다,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12. 끝으로 빌헬름 라들로프(Wilhelm Radloff)로부터 오늘날까지 이루어진 다양한 독법 및 설명들에 대하여 내가 처음으로 여기에서 밝힌 나의 독법과 해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쾰 티긴 비문과 빌개 카간 비문에 나오는 구절 bök li ~ bük li는 중국어 낱말 *mo li 漠理의 mak ~ miek 또는 mê ~ mô 형태의 중국어 발음과 한국어에 있는 옛 발음을 튀르크 룬 글자들로 표기한 것임이 분명하다.     

   2. 중국어 구절 bök li ~ bük li 다음에 오는 낱말 čölgil은 구절 bök li ~ bük li의 “사막에 속하는, 사막의, 초원의”라는 뜻의 고대 튀르크어 대응어이다.     

   3. 구절 bök li čölgil ~ bük li čölgil은 중국어 bök li ~ bük li + 튀르크어 čölgil 형태로 중국어와 튀르크어로 된 중복어(synonim compositum) 이고 쾰 티긴 비문과 빌개 카간 비문에서 한국의 그 시대의 이름으로서 사용되었다.

BÖKLI ~ BÜKLI ~ BÖK ILI ~ BÜK ILI 참고문헌

1902 Kurakhichi Shiratori [白鳥庫吉], “Über die Sprache der Hiungnu und Tunghu Stämme [흉노 및 동호 종족들의 언어에 대하여]”,
Izvestija Imperatorskoj Akademii Nauk [제국 학술원 통보], XVII/2, 1902, pp. 1-33.
1903 Ed. Chavannes, Documents sur les Tou-kiue (Turcs) Occidentaux
[서돌궐에 대한 문헌들], St. Petersbourg, 1903, 378 p.
1912-1914 Joseph Marquart, “Über das Volkstum der Komanen [쿠만 민족성에
대하여]” Abhandlungen der Königlichen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괴팅엔 왕립 학외 회보],
Philologisch-Historische Klasse [어문-역사 반], Neue Folge [새 시리즈], XIII, No 1, Göttingen 1912-1914, pp. 25-238.
1923 Fujita Toyohachi, “Zenzen no kakugô oyobi kakango ni tsuite [über den Namen Juan-juan und über den Titel Kagan] (연연(蠕蠕)이라는 이름과 카간(Kagan)이라는 칭호에 대하여)” Tôyôgakuhô, 13, 1923, 55-70. 
(藤田豊八, 「『蠕蠕の国号及び可汗号につきて』において」 [연연(蠕蠕)이라는 국호와 카간(Kagan)이라는 칭호에 대하여], 『東洋学報』 13, 1923, pp. 55-70.)
1929 Prabodh Chandra Bagchi, Deux lexiques sanskrit-chinois [산스크리트어-중국어 2개 국어 소사전], I, Paris 1929, p. 39a & 295.
1936 Iwasa Seiichiro, “Ko tokketsu hibun no Bökli oyobi Par Purm ni tsuite [On the Bökli, Par and Purm of Orkhon Inscriptions]”, Iwasa Seiichiro I kô [Remains of Iwasa Seiichiro], Tokyo 1936, pp. 61-76. 
(岩佐精一郎, 「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mに就いて [옛 돌궐 비문의 Bökli와 Par Purm에 대하여]」, 『岩佐精一郎遺稿』, 東京 1936, pp. 67-68.)
1937 Ch’en Chung-mien [岑仲勉], “A Note on the T’u-chüeh inscriptions on the Ch’üeh-te-ch’in stone tablets on the Orkhon”, Fu-jen hsüeh-chih [輔仁學志], Catholic University, Peiping, VI, 1937, No 1-2, pp. 249-274.
1947 Denis Sinor, “Autour d’une migration de peuples au Ve siècle [5세기 민족들의 이동에 대하여]”, Journal Asiatique, 1946-1947, p. 34 등등.
1952 W. B. Henning, “A Farewell to the Khagan of the Aq-Aqatärān”, Selected Papers, II, Leiden 1977, p. 501/5. (원전: W. B. Henning, “A Farewell to the Khagan of the Aq-Aqatärān”,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14/3, Studies Presented to Vladimir Minorsky by His Colleagues and Friends, London, 1952, pp. 501-522.)
1956 Hans Wilhelm Haussig, “Theophylakts Exkurs über die skytischen Völker [스키타이 민족들에 대한 Theophylaktos의 여록]”, Byzantion, XXIII, Brüxelles, 1953, pp. 331-348; 349-352; 384.
1956 Jaques Bacot, “Reconnaissance en haute Asie septentrionale par cinq envoyés ouigours au VIIIe siècle [8세기 5명의 위구르 사절에 의한 위쪽의 북부 아시아에서의 인식]”, Journal Asiatique, 244, 1956, pp. 137-153.
1957 Vladimir Minorsky, “Mongol Place-names in Mukri Kurdistan”,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19/1, London, 1957, pp. 58-81.
1957 Gerard Clauson, “À propos du manuscrit Pelliot Tibetain 1283 [펠리오 티베트어 1283 필사본에 대하여]”, Journal Asiatique, 245, 1957, pp. 11-24.
1958 Liu Mau-tsai [劉茂材], Die chinesische Nachrichten zur Geschichte der Ost-Türken (T’u-küe) [동 튀르크(돌궐)족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정보], II, Wiesbaden, 1958, s. 550.
1963 L. P. Potapov, “O narode böklijskoj stepi [뵈클리 초원의 민족에 대하여]” Tjurkologičeskije Issledovanija [튀르크학 연구],
Moskva-Leningrad, 1963, pp. 282-291.
1964 Sergej Grigor’eviç Kljaštornyj, Drevnetjurkskije runičeskije pamjatniki kak istočnik po istorii Srednej Azii [중앙아시아 역사 자료로서의 고대 튀르크 룬 문자로 된 기념비들], Moskova, 1964, p. 23/33.
1964 Gari Ledyard, “The Mongol Campaigns in Korea and the dating of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Central Asiatic Journal, IX, 1964, pp. 1-22.
1977 Mori Masao, “Iwayuru bökli ni tsuite - minzokugaku to rekisi no aida”, Egami Namio Kyôju Kobi Kinen Ronjû; Minzoku Bunka-hen, Tokyo, 1977, pp. 299-324 
(護雅夫, 「いわゆるbökliについて-民族學と歷史學との間- [이른바 bökli에 대하여 -민족학과 역사학의 사이]」, 『江上波夫敎授古稀記念論叢 ‒ 民俗·文化篇』, 東京, 1977, pp. 299-324)
1977 Moriyasu Takao, “Chibetto-go shiryô chû ni arawareru hoppô minzoku: Dru-gu to Hor”, Ajia Afurika gengo bunka kenkyû, 14, 1977, pp. 1-48 
(森安孝夫, 「チベット語史料中に現れる北方民族: Dru-guとHor [티베트어 사료 중에 나오는 북방민족: Dru-gu와 Hor]」, アジア・アフリカ言語文化研究, 14, 1977, pp. 1-48.)
1981 Masao Mori, “‘Bökli’ veya ‘Bükli’ şekillerinde transkripsiyon edilen bir kelime üzerine [‘Bökli’ 또는 ‘Bükli’ 형태들로 전사되는 한 낱말에 대하여]” VIII. Türk Tarih Kongresi (Ankara: 11-15 Ekim 1976) [제 8 회 터키 역사 학술회의(앙카라: 1976년 10월 11-15일)]. Kongreye sunulan bildiriler [학술회의에 제출된 발표문들]. II. Cilt [제 2 권], pp. 579-582.
1992 Toru Senga [千賀徹?], “‘Northern’ Neighbors of the Khazars around 750 A. D.”, Ural-Altaic Yearbook, 64, 1992, pp. 59-71.
1993 Talat Tekin, Hunların Dili [흉노족의 언어], Mayıs 1993 [1993년 5월],
p. 31, § 10. Muh-kuh-lü.
1995 Duck-chan Woo, Juan-Juan’lar [연연(蠕蠕)족], Hacettepe
Üniversitesi Sosyal Bilimler Enstitüsü [하젵테페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Yayımlanmamış Doktora Tezi [발간되지 않은 박사학위논문], Ankara 1995, pp. 16-17.
2012 Kürşat Yıldırım [퀴르샤트 이을드름], “Tatar adının kökeni üzerine [타타르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하여]”, Türkiyat Mecmuası [튀르크학 학술지], 22, Güz [가을] 2012, pp. 171-190
2013 Kürşat Yıldırım, “Juan Juan adı üzerine [연연(蠕蠕)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Türk Kültürü incelemeleri Dergisi [튀르크 문화 연구 학술지], İstanbul 2013, pp. 1-10. 
2013 Kürşat Yıldırım, “An Opinion on the Meaning of the Name ‘Ruanruan’”, Central Asiatic Journal, 56, Wiesbaden 2012-2013, pp. 35-40.


저자가 모르고 있는 논저로서 다음의 것이 있다:
Yong-Sŏng Li, “Zu QWRDNTA in der Tuńuquq-Inschrift [투뉴쿠크 비문에 있는 QWRDNTA에 대하여]”, Central Asiatic Journal, 47/2 (2003), pp. 229-241; p. 236에서 이 낱말을 bök(kü)li (< *bäkküli < *mäkküli 貊句麗) 또는 bök(kö)li (< *bäkköli < *mäkkoli 貊高麗)로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Talat Tekin, 이용성 역, 『돌궐비문연구 – 퀼 티긴 비문, 빌개 카간 비문, 투뉴쿠크 비문』, 서울 2008에서도 p. 90의 역주 47, p. 221의 역주 42에서 다시 언급되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최근에 한국에서 나온 두 편의 논문이 있다:
1) 김병호, 「오르혼 옛 튀르크語 비문과 한반도의 옛 이름 – 퀼 테긴 碑와 빌게 카간 碑에 나타나는 ‘Bökli’ 해석 -」, 『東北亞歷史論叢』 42 (2013年 12月), 동북아역사재단, pp.7-45. 
[김병호는 p.28이후에 bök(kö)li로 읽으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참고문헌에 Talat Tekin, 이용성 역, 『돌궐비문연구 – 퀼 티긴 비문, 빌개 카간 비문, 투뉴쿠크 비문』, 서울 2008가 있는데도, 이 번역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최초로 bök(kö)li 독법을 주장하는듯한 뉘앙스를 주고 있다.]

2) 노태돈,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북아시아 유목민 국가」, 『東洋學』 第58輯(2015年 1月),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院, pp. 193-202.

이상 Pr. Osman Fikri Sertkaya 교수의 연재를 마칩니다.

 

출처;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61§ion=sc9

 

 

오구즈는 고구려에서 투르크식으로 음이 변한 것 (5부)

고구르(高句麗)-->호구르-->오구르-->오구즈 (투르크어식 음변)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 연구가

2016/03/04 [23:10]

 

한편 돌궐의 선조로 평량(平涼) 지방의 잡호(雜胡)였던 성(姓) 아시나씨(阿史那氏)의 아현-설(阿賢-設)은 백제의 “솔(率)”, 고구려의 “살(薩)”과 한 계열의 관칭인 “-샤드(設, 설)” 칭호를 썼다. 이 말은 다 오늘날의 말 ‘족장’, ‘씨족의 낭군(대표)’이라는 말인데, 정치적으로는 ‘왕(king)’이라는 말과 통하는 낱말들이다. 

그 뒤 후위(後魏), 곧 북위(北魏, 386년~534년) 말(末), 곧 534년 부근에 와서 바로 그 아시나씨(阿史那氏)의 후손 “이리가한(伊利可汗)”이 처음 이 “칸”의 칭호를 썼다. 이는 앞서 말한 전쟁 고아 모쿠리(고구려)가 세운 조선(유연)의 수령들 가운데 하나인 그 “두대-가한(豆代-可汗)”보다는 120~130년가량 늦게 돌궐=투르크의 선조가 이 관칭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8세기에 들어와서는 빌게 카간(Bilge Kaghan) 등의 오늘날의 몽골 땅의 오르혼 비문 등에서 “-칸(Kağan)”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다. 이로 보아 원래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쓰인 고구려어 낱말 “가한(可汗)”은 고구려 바로 곁의 국가인 4세기와 5세기 초 유연(蠕蠕)을 거쳐 6세기 전반기에 더욱 서쪽의 투르크 종족에게도 도입되어 쓰이게 되었다. 

 오르혼 강에서 발견된 돌궐비문     ©편집부

 


그러다가 8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쓰였다가 더 늦은 시기인 AD 13세기 후에는 투르크어뿐 아니라 다른 중앙아시아 민족어로도 도입되었고, 16세기 이후에는 인도와 아랍지역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로 보아 투르크어 “-칸(Kağan)”은 원래 고구려-신라 계의 고대 조선어에서 유래하여 서방의 중앙아시아와 터키에까지 전해진 낱말이 틀림없다. 반대의 증거는 사서에 기록된 것은 물론,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한편 “오구즈 칸(Oğuz Kağan)”의 “오구즈(Oğuz)-”의 뜻에 관해서는 투르크 학자들이나 터키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어원이 “Ok-uz”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사실은 고구려어 국명인 “고구르(高句麗)-->호구르-->오구르-->오구즈”라는 형태로 투르크어식 음변이 일어난 말이다. 그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역사비교언어학적 차원이다. 

오늘날의 투르크어의 “오-, 아-, 이-” 등 모음으로 시작하는 낱말 가운데에는 상당수가 고대에 “Kh +o" 또는 "H + o" 처럼 “Kh-" 또는 "H-" 소리가 딸린 것이었다. 몽골어에서는 더욱 현저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고 심지어 오늘날 몽골방언들 사이에도 그런 현상이 발견된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날에 와서 투르크어에서는 그 낱말 머리의 소리가 약화되어 모음만 남은 낱말이 많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고대 투르크어에서 낱말 끝의 “-r-” 자음 소리는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약화되어 “-z-” 소리로 바뀐 낱말이 많다는 점이다. 이점은 거의 대부분의 투르크어 학자들 사이에서 공인된 것이다. 이러한 투르크어의 역사적인 발전 법칙에 비추어 보면 “오구즈(Oğuz)-”는 “고구르(高句麗)-->호구르-->오구르-->오구즈”라는 형태로 투르크어식 음변이 일어난 “고구려”라

그렇다면 “오구즈 칸(Oğuz Kağan)”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적은 고구려식의 표현을 쓰면 “고구려(高句麗) 가한(可汗)”이고 만일 신라식의 표현을 쓴다면 “고구려(高句麗) 각간(角干)”이라는 말이 투르크어화한 것이다.      

  투르크어의 “오구즈 칸”이 고구려-말갈어의 ‘고구려 칸’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둘째 근거가 있다. 그것은, 앞서 본 <투르크의 계보>가 보여주는 대로, “오구즈 칸”이 속한 계보 속에서 그 밖의 다른 세대의 인물들이 모두 자기 이름(칭호)으로 “국가(지방) + 칸”의 형식으로 된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오구즈 칸”이 속한 하나의 족보의 “계보(系譜)” 속에서 다른 세대의 인물들은 “모골 한=말갈 칸”, “카라 한( ㅋ.ㄹ. 칸)=고려 칸”, “오구르 한=고구려 칸”, “팅기즈 한=진국 칸(발해 왕)”이라는 칭호를 자기의 이름(칭호)로 쓰고 있다. 이와는 달리 팅기스 칸의 아들 “일 한(일하, 壹夏)”의 이름은 반대로 나중에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시리아와 이랔에 터를 내린 “일 칸국”이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 칭기스 칸이 차지한 영토 중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일한국     © 편집부


  이를 보면 이 인물들 속에 끼어있는 “오구즈 칸(Oğuz Kağan)”이라는 이름(칭호)도 분명히 다른 그의 선조와 후손과 마찬가지로 “국가명 + 칸(王)”이라는 이름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구즈 칸이라는 이름(칭호)가 “국가(지방) + 칸”으로 이루어진 이름(칭호)라는 전제에 따라 이 말의 어원을 찾을 경우, “오구즈-”의 고대 투르크어 형은 “오구르-->호구르-->코구르=코구려”로 거슬러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오구즈-칸”은 원래 “오구르-한 ==>고구려(高句麗)-칸(王)”이라는 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62§ion=sc9

 

 

오구즈 투르크 '바야트 씨족'의 데데 코르쿠트는 '부여 씨족 (6부)'

오구즈칸은 칭기스칸의 19대 선조인 발해왕 대조영의 4대 선조의 칭호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 연구가

2016/03/19 [00:18]

 

방금 우리는 투르크인들의 “오구즈 카간의 이야기(Oğuz Kağan destani)”에 나오는 “오구즈 카간(Oğuz Kağan)”이 바로 칭기스 칸의 19대 선조인 발해왕 대조영과 그 아우의 계보속에서 그들의 4대 선조로 확인되는 고구려-발해 왕족 한 인물의 이름(칭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오구즈 카간(Oğuz Kağan)”이 다스리는 투르크 종족이 바로 “오구즈 투르크”이다. 이들이 오늘날 터키를 비롯한 여러 지파의 투르크인들의 선조들 가운데 한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투르크 종족의 전설이 또 있다. 15세기에 글로 적힌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Dede Korkut Hikayeleri)>이다. 이 전승에는 “데데 코르쿠트”와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이른 바 “투르크 종족”들이 나오는데, 오늘날 터키 등 투르크인들은 그와 그의 속민들을 자신들의 선조로 본다. 

이 이야기는 터키와 투르크메니스탄,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등의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인 “데데 코르쿠트(코르쿠트 할아버지)” 또는 “코르쿠트 아타(코르쿠트 아버지)”는 오구즈 투르크 종족의 현명한 자문이자 영수로 묘사된다. 

1) 바로 이 인물은 우리가 <투르크의 계보2>를 통해서 분석해 본 결과 시대적으로는 “고구려 각간(高句麗 角干)”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호구르 칸=오구즈 칸”과 거의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2) 그는 또 부여왕 해모수(解慕漱)의 부여 왕성 “해 씨(解氏)”, 곧 고구려 왕성 “고씨(高氏)”와 바로 그 성씨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왕성 “부여 씨(夫餘氏)”를 가진 사람이다. 나아가 3) 오구즈 칸의 속민들인 “오구즈인(Oguzlar)” 또는 “독쿠즈(九姓) 오구즈인(Dokkuz Oguzlar)”인들의 지도자이다.      

그렇다면 이 “데데 코르쿠트(코르쿠트 할아버지)”는 바로 오구즈 칸 시대에 서방으로 이동한 고구려 왕족과 그의 속민들의 영수라고 간주할 수 있다. 오구즈 칸이 고구려 계인물이라는 우리의 결론을 더욱 굳게 해주는 인물이다. 

▲ 터키의 신화 데데코르쿠트에 대한 12편 이야기 중 한 편의 세밀화     © 편집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보기 위해 우선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Dede Korkut Hikayeleri)"를 살펴 보자. 연구자들은 그 책은 이른 시기의 투르크 종족의 전설을 오스만(Osman) 시대의 초기에 적은 글로 간주한다. 한 예로 터키 학자 케말 벡(Kemal Bek)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투르크 글로 설명된 전통의 기본적 작품 가운데 하나인 데데 코르쿠트라는 책의 원래의 이름은 [*독일의] 드레스덴(Dresden) 도서관에서 발견된 원고로 ‘오구즈 종족의 언어로 쓰인 코르쿠트 할아버지의 책(Kitab-i Dedem Korkut 'ala Lisan-i Taife-i Oguzan(Oguzlarin Diliyle Dedem Korkut Kitabi)"이다. 바티칸(Vatican)에서 발견된 원고에서는 카잔 벡과 그 밖의 오구즈의 書의 이야기(Hikayet-i Oguzname-i Kazan Beg ve Gayri(Kazan Bey ve Ötekilerin Öyküleri)이다. 이것들은 대략 15세기에 기록된 원고가 아니고, 최초의 원고에서 더 나중에 베껴진 서로 다른 원고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고대의 어느 시기에 생겨난 데데 코르쿠트 전승이 나중에 글로 옮겨졌고, 그것은 15세기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단, “데데 코르쿠트는 전설에 나오는 영웅의 한 사람이 아니다. 데데 코르쿠트는 실지로 살아갔는지 살아가지 않은지도 알려지고 있지 않다”      

  한편 데데 코르쿠트는 진지한 사서인 <투르크의 계보(Secere-i Tarokime)>에도 기록되어 “코르쿠트 아타(Korkut Ata, 코르쿠트 아버지)”로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아틸라 외즈키름리(Attila O'zkirimli)는 “<투르크의 계보(Secere-i Tarokime)>에 따르면 그는 295년 또는 300년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카이 씨족(Kayi boyu)의 카라 호자(Kara Hoca)이다”라고 지적하고, 나아가 “데데 코르쿠트”는 실존의 역사적 인물이라고 본다. 

그는 나아가 “오늘날 알려진 무덤은 타쉬켄트에서 코잘리(Kozali)에 오면서 코르쿠트 역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곳에서 시르다리야의 아랄 호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이다.(각주2)”라고까지 한다.  이처럼 그의 무덤이 있다면, 그 무덤 자체가 가짜가 아닌 한, 그 “코르쿠트 할아버지”는 비록 그 자신의 이야기는 전설화되어 전해졌을지라도 그 자신은 분명히 역사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Tanri)의 평안이 그에게 나릴 하즈라티 무함마드(Hz. Muhammed) 때에 가까운 시기에, 바야트 씨족(Bayat boyu)에서 태어난 코르쿠트 아타(Korkut Ata)라고 불리는 한 사내가 나왔다. 이 인물은 오구즈인들(Oguzlar)의 완전한 지자(知者)였다. 무엇을 말해도 되었다. 아는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 소식을 이야기해주었다. 높은 하늘(Yüce Tanri)은 그의 정신에 영감을 불어주었다.      

코르쿠트 아타가 말하기를: ‘마지막 시대에 칸국은 다시 카이(Kayì)에게 주어질 것이다. 최후의 시대가 와서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누구도 손에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오스만 가문이다. ... 코르쿠트 아타는 오구즈 씨족의 문제들의 풀이 자체였다. 어떤 일이 있으면 코르쿠트 아타에게 상의하지 않고서는 실행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는 고대 오구즈 투르크 종족의 지적인 영도자이자 오늘날 투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하나로 간주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언제인가?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이에 관해 그 때가 “하즈라티 무함마드(Hz. Muhammed) 때에 가까운” 때라고 했다. 알라(Allah)의 사도 예언자 무함마드는 일반적으로 서기 570년경~632년 6월 8일 사이에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코르쿠트 아버지”도 이 시기의 인물인데,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바로 고구려 말기이다.      

▲ 데데 코르쿠트에 대한 그림     © 편집부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역사적 실존인물인가? 이 물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그가 “바야트 씨족(Bayat boyu)에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묘술은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그 “바야트 씨족(Bayat boyu)”이라는 말은 달리 우리 옛말 고구려-백제어로는 “부여 씨(夫餘氏)”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조선민족과 매우 달라 보이는 터키인들의 선조가 고구려-백제 성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분명히 이 “바야트 씨족(Bayat boyu)”이라는 말은 바로 고구려의 “고씨(高氏)”와 그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의 “부여 씨(夫餘氏)”가 투르크어 형태로 바뀐 말이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고구려, 백제, 발해, 몽골 왕족의 성씨의 유래와 그들이 상호 친족관계에 있음을 잠시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65§ion=sc9

 

 

투르크 '바야트 씨족'의 의미는 '부여(말갈) 씨족' (7부)

몽골비사, 집사, 투르크의 계보, 데데 쿠르쿠트 이야기 등에 기록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유목민족사 연구가

2016/03/30 [19:54]

 

우선 고구려 왕족 “고씨(高氏)”와 그 씨족의 지파인 발해 왕족의 “걸씨(乞氏)”는 모두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이다. <신,구당서(新, 舊唐書)> 등 사서는 고구려 왕족과 백제 왕족을 “부여별종”, 곧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한문사서들은 또 발해말갈의 왕족에 관해서도 그들이 “고려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 곧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무경총요(武經總要)>는 그들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 곧 “부여별류(夫餘別類)”라고 한다. 이 두 기록은 사실은 다 같은 말로 서로 보충하는 말이다. 이 발해의 “부여씨”는 몽골어로는 황후 가문인 콩그라트 씨족의 성씨 “부르-(테)” 씨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말로는 “부여(夫餘)-대(大)”씨, 달리 “부여(夫餘)-걸(乞)”씨이다. 칭기스 칸의 “보르-지-긴”씨도 “부여-씨-행(行=干)”씨로 “부여씨”라는 말이다. 이 몇 가지 “부여씨”는 모두 투르크 “바야트 씨족(Bayat boyu)”의 원류이다. 

▲ 송나라 때 편찬한 병서로 모두 40권으로 된 군사상의 기술서적     © 편집부

 

   
그렇다면 이제 투르크의 “바야트 씨족(Bayat boyu)”을 기록한 사서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몇 가지만 보자. 

첫째는 1200년대 칭기스 칸 생시에 기록된 것이 명백한 <몽골비사>이다. 이 사서는 칭기스 칸의 9대 선조 보돈차르, 곧 <집사> 계열의 서방 사서가 “보잔자르”라고 부르는 인물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의 감추어진 부계 측 씨족을 기록했다. 그것은 곧 “마가릭(Maalig) 바야우드(Bayaguday) 씨”, 곧 “말갈 바야-우드(씨)”이다.  이는 현대의 우리말로 옮기자면 “말갈, (곧 고구려) 부여-씨”를 말한다. 곧 고구려-말갈어의 “말갈 부여씨”의 몽골어 형태인 “마아릭 바야우드씨”라는 말에서 “바야우드 씨족”이 투르크어 형태로 바뀐 것이 바로 “바야트 씨족(Bayat boyu)”이다.  
 

▲ 내몽골 다구르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선생 주해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알탄 톱치》는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

 


둘째는 보잔자르와 칭기스 칸의 후손으로 일 칸국(Il Khaanate)의 황제 가잔 칸이 1300년대에 쓰도록 명한 <집사>의 기록이다. 이 사서는 오늘날 부랴티아의 바르고진 토쿰 지방에서 살던 “바야우드”씨에 관해서 기록했다. 이는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가 말하는 “바야트 씨족(Bayat boyu)”과 같은 씨족이다.

  또 하나의 사서는 히바 칸 아불가지 칸이 쓴 <투르크의 계보(Secere-i Tarokime)>이다. 그가 쓴 코르쿠트 아타의 계보를 오늘날의 표현을 빌어 설명해보자. 그러면 그는 고구려 왕족 “고씨(高氏)” 씨족의 지파인 발해의 “걸씨(乞氏)”, 곧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가 말하는 “키야트(Kiyat)”가 진국 칸(震國 王=渤海 王)의 후손 칭기스칸의 시대를 거쳐 서방으로 가서 모골-투르크화한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울룩 벡이 쓴 <투르크의 계보(Secere-i Tarokime)>는 “코르쿠트 아버지”에 관해 “그의 아버지는 카이 씨족(Kayi boyu)의 카라 호자(Kara Hoca)이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코르쿠트 아타의 “바야트 씨족(Bayat boyu)”은 그 아버지의 “카이 씨족(Kayi boyu)”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 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편집부

 


위 두 번째의 “카이 씨족(Kayi boyu)”은 한자로 된 고구려 왕족 성씨 “고 씨(高氏)”와는 물론, 이 성씨의 다른 한자 표현방식인 “해 씨(解氏)”와 역사적 음운론상 완전히 같다. 이 성씨의 다른 형태인 “해 씨(解氏)”의 “해(解)”의 고대 발음은 오늘날에도 한자의 고대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일본어 한자소리가 그것을 “카이(Kai=解)”라고 하듯이, 바로 “카이(Kayi)”이다. 그러므로 “카이 씨족(Kayi boyu)”은 곧 부여왕 해모수(解慕漱)의 부여 왕성 “해 씨(解氏)”, 곧 고구려 왕성 “고 씨(高氏)”이다. 

그렇다면 “바야트 씨족이자, 카이 씨인 데데 코르쿠트”의 “아버지는 곧 해 씨(解氏), 달리 고 씨(高氏)”이고, 그의 이름은 “카라 호자(Kara Hoca)”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칭호) “카라 호자(Kara Hoca)”는 아래 아(.) 자를 쓴 우리 한글 고어를 참조하여 그의 이름을 다시 쓰면 그것은 “ㅋㆍㄹㆍ 호자”인데, 이는 곧 “코로(高麗) 호자”이다. “호자(hoca, khwaje)”는 이슬람 종교의 지역수령을 말한다.      

▲ 무용총 수렵도의 호랑이/사슴 사냥과 흡사한 '데데 쿠르크트' 책표지     ©편집부

 

뿐만 아니라, 라시드 웃딘이 쓴 <집사>의 오구즈 칸의 계보는 “오구즈 칸의 맏아들” “쿤 칸”의 후손(*아들)으로 “카이”와 “바야트”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아들의 후손이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에 나오는 투르크의 “카이씨”와 “바야트씨”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투르크 씨족은 바로 주몽(朱蒙) 가문의 성씨 “해씨(解氏)=고씨(高氏)” 및 “부여씨(夫餘氏)”와 그 옛 소리가 같고, 결국 같은 것을 투르크어와 오늘날의 고구려-말갈어, 곧 우리말로 읽은 차이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선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며, “오구즈인들(Oguzlar)”은 서방의 투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가운데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이었던 “코르쿠트 (할)아버지”는 “부여(바야트)씨-고/해(카이)씨”의 수령이며, 그 아버지는 “코로(高麗) 호자”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계보상으로 본다면 그들은 오구즈 칸의 큰 아들 “쿤 칸”의 아들 세대 또는 그에 가까운 후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들이 살아간 시기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라술 일라(Rasul Illah) 무함마드(Muhammad)의 시기에 매우 가까운 그 뒷시대 또는 그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특히 <오구즈 사>에 나오는 “오구즈 칸”과 “코르쿠트 아타”와 그 아버지 “카라 호자”는 모두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기 570년경~632년 6월 8일 사이를 살아간 무함마드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갔지만, 그보다는 조금 늦은 해들을 살아간 인물들이다.      

  그런데 오구즈 칸의 맏아들 “쿤 칸”은 대조영과 대야발의 3대 선조인데, 이 “쿤 칸”의 후손 씨족인 “카이”와 “바야트” 씨(*종족)는 대조영과 대야발의 2세대 선조, 곧 할아버지 세대이다. 그렇다면, 대조영(?~719, 재위 698~719)이 죽은 때인 719년을 기준으로 보면, 그의 할아버지 세대는 30년 x 2세대가 앞선 659년경 인물들이다. 이는 바로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가 전하는 “바야트-카이 씨의 코르쿠트 아타”의 시대와 27년 차로 거의 일치하는 시기이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68§ion=sc9

 

 

동·서방을 오고 간 고구려와 투르크 종족의 역사적 관계 (8부)유럽을 정복한 아틸라는 男生의 뜻, 투르크로 망명한 고려왕 고문간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유목민족사 연구가

2016/04/12 [00:24]

 

6. 동·서방을 오고 간 고구려와 투르크 종족의 역사적 관계 약사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 터키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투르크인들은 흉노(匈奴)의 위대한 서방 정복자 “아틸라(Attila)”를 오늘날 몽골리아와 북방 지나 땅 등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동해온 투르크 종족 자신의 선조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한다. 이는 그와 그의 종족이 원래 동북아시아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단, “아틸라(Attila)”라는 이름 자체는 터키 등에서도 자주 쓰이는 이름이지만, 오늘날의 투르크어로는 그 뜻풀이가 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흉노인이라고 보통 말하는 그 아틸라가 원래 살았던 동북아시아의 몽골과 만주에서 흉노의 이웃 종족으로 살아간 고구려의 향찰 읽기 방식으로 이 이름은 쉽게 풀이가 된다. 고구려에서는 “아달라(Adal-la/Adal-na)”, 곧 “男(아달)-生(나)”로 읽는 개소문의 큰아들 개남생의 이름이 있었고, 신라에서도 신라 제 8대왕 박-아달라 님금(阿達羅 尼師今,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 154년~184년)의 이름으로 “아틸라(Attila)”와 같은 이름이 쓰였다.      

  이 이름들이 서로 같은 이름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콩그라트(고구려) 왕가의 황금의 책인 <행운의 정원(Firdaws al Iqbal)>은 개소문의 큰아들 “男(아달)-生(나)”의 이름이 투르크어로 한자를 뺀 당시의 고구려 소릿말 이름 “아달라(아달-나)”와 같은 소리인 “오틀리 칸(Otlixon)"으로 적는다. <투르크의 일반사>는 이를 "아틀리(Atli)-칸(Khan)”으로 적는다.  

또 히베한 아불가지의 <투르크의 계보 2> 터키어 본은 이를 “아들리 한(Adli Han)으로 적는다. ”타타르(대대로) 종족“의 4대 칸으로 고구려 식 향찰로 읽은 “男(아달)-生(나)”의 이름에서 한자를 뺀 고구려 소리로 된 이름을 투르크어로 적은 이 세 가지의 이름들은 매우 작은 정도의 “-a-” -> “-e-” -> “-i-” 모음변화는 보여주기는 해도 모두 정확히 같은 이름이다. 

  이 “아틸라”라는 이름은 그 뜻이 고대조선어로는 쉽게 “아달(男)이 났다(生)”라는 뜻으로 풀리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아틸라”와 그 일족이 동방에서 살았고, 어쩌면 그 자신도 “흉노”라고 불린 고대 “조선민족”의 일파였다는 놀라운 결론도 나올 수 있다. 좀 더 연구해 보면 그 관점이 올바를 것이다.

▲ 동.서로마제국과 아틸라제국의 영토     © 편집부

 


 “아틸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록상으로 확실히 확인이 가능한 투르크 종족의 선조 중의 하나는 돌궐의 아시나(阿史那氏) 가문인데, 이들도 동북 아시아에서 서방으로 간 부락의 하나이다. 아시나 가문은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부랴티아, 키르기즈의 겜 강 유역, 그리고 만주북방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의 일부는 오늘날의 위구리스탄(신강), 키르기즈스탄을 거쳐 서방으로 옮겨간 부락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아시나 씨 돌궐의 칸인 “바가투르(默啜, 묵철)”의 가문은 고구려가 망한 뒤 망명해온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 고장(高藏)의 아들이나 손자로 판단되는 고려왕 막리지 고문간(高麗王 莫離支 高文簡)과 고공의(高拱毅) 일행 중 고문간에게 칸 자신의 딸인 아시나 씨의 부인을 시집보내고 그들을 도우며 머나먼 요동(遼東) 고구려의 옛 땅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돌궐과 고구려 왕과 백성들 사이의 화친을 다졌다.      

  고문간 일행은 715년 당나라의 변방, 아마도 하서(河西)를 거쳐 당으로 들어왔다. 당시 당나라는 사라진 고구려를 이어 그 자리에 발해(渤海)가 들어서서 또 다시 당나라에 위협이 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당나라의 변방으로 온 것을 보자 당나라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환영했다.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고구려 고토 요동(遼東) 지역의 서쪽 영토 요서(遼西) 지역으로 보내 “요서군왕(遼西郡王)”의 자리를 주고 발해의 위협을 방어하게 한 것이다.      

▲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                                                                                                   © 편집부

 


  한편 투르사사와 서방사서에 나타나는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인들에 관해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몽골리아의 동부 외투켄 산에서 몽골 서쪽과 카자흐스탄의 천산, 그리고 알타이-사얀 산맥에서 처음에 활동하다가 서방으로 이동해간 종족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시기는 시대는 고구려 멸망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원이라고 간주되는 돌궐 “회흘(回回纥/回鶻)” 부가 발흥한 것은 고구려 멸망 직후로 잡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흥과 관련하여 눈여겨 보아야 하는 사서가 있다. 바로 <구당서>인데, 이 사서는 고구려가 망하고 “고장(高藏)이 영순년간에 죽자.... 그 왕과 백성들(高麗舊戶)이...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들어가서 고씨군장(高氏君長)은 사라졌다”고 한다. 곧 고구려 멸망 후 많은 고구려인들은 옛 투르크 종족에 가입한 것이다. 그런데, <집사>는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이는 일을 가리킨 것으로 판단되는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71§ion=sc9

 

 

回紇의 발음 '코이고르'는 高句麗의 이두식 표현 (9부)

몽골 서남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우즈벡까지 이동한 거란족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민족사 연구가

2016/04/18 [23:50]

 

우리가 “고구려 칸”이라고 본 “오구즈 칸”의 자식들로부터 나온 24개의 지파를 가리켜 “오구즈의 종족”이라는 말을 쓰고, 오구즈는 아버지 카라 칸과의 싸움에서 자신에게 연합한 종족과 숙부들에게 “위구르”라는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 종족 출신이 자신에게 연합한 자기 숙부와 형제족속들에게 “위구르”라는 족칭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위구르”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한자명칭으로 바로 “회흘(回紇)”이라고 보는 투르크민족이다. 이들도 <집사>에 따르면, 곧 “투르크”라고 불리게 된다. 

 

고구려 칸 오구즈 칸이 자신의 숙부와 형제들에게 준 종족칭이므로 역사언어학적 차원에서 돌궐인의 선대로 간주되는 이 “회흘(回紇)” 부의 이름 옛 소리는 “코이고르”는 이제 다른 땅에 지어진 “커고르=고구려”라는 뜻으로 “고구려(高句麗)”와는 구별되는 다른 한자 이두로 적은 사실은 같은 종족의 이름이 틀림없다. 

그 위구르 부, 달리 “회흘(回回纥/回鶻)” 부의 골력배라(骨力裵羅)는 동돌궐의 지배를 받으며 셀렝게 강 유역에서 살아오다가 744년에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이른 바 “위구르제국”을 건설하는데, 이 무리가 후에 셀주크 투르크인이라고 불리면서 서방으로 대이동을 개시했다.  이 부류의 일부는 몽골고원에서 서남을 향해 오늘날의 위구리스탄, 곧 지나 땅의 동투르키스탄(*신강)과 키르기즈스탄으로 이동하고 남고, 또 다른 일부는 더멀리 서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 현재 중국의 서북쪽에 있는 위그르는 본시 투르크족의 땅     © 편집부

 

 

 이와 같은 예는 여러 번 있다. 한 예로 만주와 조선반도의 북부에 존재했던 거란의 요나라를 보자. 거란은 조선반도의 북부에서 일어난 조신(女眞, 여진)의 금(金)나라에게 1125년에 망했다. 그러자 거란 아율 아보기의 9대손 야율대석이 오늘날의 몽골리아 동남부와 카자흐스탄 남부, 키르기즈스탄, 동투르키스탄, 멀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까지 이동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곳에서 세운 나라이름을 “카라 키타이”라고 하여 칭기스 칸의 시대인 1218년에까지 존속하다가 칭기스 칸의 군대에 망해 그 속에 통합되었다. 그들은 오늘의 만주와 조선반도의 북부에서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을 지나 멀리 우즈베키스탄 땅으로까지 간 것이다. 여기서 터키어 “카라 키타이”는 일반적으로 “흑거란”이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은 “고려거란”이라는 말로 보인다. 

▲ 유럽을 뒤흔든 북방민족 흉노, 돌궐, 몽골의 이동도     © 편집부

 

 

왜냐하면 아이신교로 울라히춘 등이 거란대자로 쓴 여러 기록을 풀이해 본 결과 거란인들은 자신의 나라 이름을 “키토이(Kitoy)-코루지(Koluji)-구르(gur)”로 썼음이 드러나는데, 이는 나의 견해에 따르면 “키토이(거란, 乞氏)-코루지(고려인)-구르(나라)”로 풀이되는 국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칭기스 칸의 몽골, 곧 고구려인의 후예 “말골(말갈)”도 오늘날 터키에서는 아나돌루로까지, 그 아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 맞은편에까지 진출한 사실이 있다.  

  다시금 이에 앞서 고구려 때 이야기로 돌아가자.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시대에 동아시아의 판도를 벗어나, 광대한 몽골리아와 중앙아시아 여러 지방에서 활동했다. 이 사실은 <수서(隋書)> 등에는 이미 동돌궐(東突闕)의 “계민 칸”과 고구려 사신이 수 양제 시기에 그의 유르트에서 서로 만나고 있었다고 하는 사서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고구려인들이 중앙아시아와 서방 지역에서 활동했음은 오늘날 또 하나의 투르크 지파의 무리가 다수를 이루는 확인이 된다. 

▲ 우즈베키스탄, 곧 옛 서돌궐 땅의 “아프라시옵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사신도     ©편집부

 


  나아가 <사국사> 계열의 사서는 오구즈 칸이 동방의 “친과 마친, 경계에서 [*서방의] 루스 호까지, 알타이와 콩코이,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가르는] 자이훈 강(아무 다리야)까지” 모두 정복했고, “투르크 씨족들에게 씨족명(laqab)을 주었으며”, “아랍과 이란 지방도 모두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국사>의 이 기록은 앞서 인용한 <집사>의 기록이, “오구즈는 이란, 투란, 시리아, 이집트, 룸, 프랑크 및 다른 모든 지방들을 정복했다. 모두를 정복한 뒤 자신의 목지가 있는 우르탁과 쿠르탁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거기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을 모으고 매우 장려한 황금의 천막을 치고 거대한 연회를 열었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74§ion=sc9

 

 

오스만 제국의 창시자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 (10부)고구려-발해 왕의 19대손 칭기스칸과 오구즈칸 족보상에 있는 오스만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유목민족사 연구가

 

2016/05/01 [12:49]

 

7. 서방으로 간 고구려 종족에서 나온 투르크 종족의 오스만 칸 가문

방금 머나먼 극동에서 지구의 반대쪽으로 고대인들이 오고 간 역사의 예 몇 가지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오늘 특히 터키-조선민족 관계에서 매우 충격적인, 그러면서도 중요한 종족 이동의 결과를 하나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터키가 자랑하는 오스만제국을 세운 황제 “술탄 오스만”은 어쩌면 “고구려 왕족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를 세운 술탄 오스만은 고구려 왕족의 후예     © 편집부

 

   
  그 이야기에 앞서 잠시 <사국사>라는 중요한 사서를 지은 울룩 벡을 보자. 그는 아미르 티무르가 지은 “티무르제국”의 5대 칸이자 그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미르 티무르는 오늘날의 인도북부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터키, 남러시아 킵차크초원,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을 잇는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때문에 소비에트시대의 스탈린조차 아미르 티무르를 극도로 숭배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몽골 4칸국의 하나로 오늘날 터키에 가까운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주로 활동한 사람인데, 차가다이 칸국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제2의 칭기스 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따지고 보면 속말말갈 가문의 팅기스 칸, 곧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19대 선조 대야발과 대조영 가문에서 태어나서 칭기스 칸의 3대 직계 선조가 된 투미나이 칸의 두 아들 카불 칸과 카촐리 바하두르 가운데 아우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으로 태어 난 이이다. 그의 8대 선조대의 종조부에 해당하는 카불 칸의 손자인 칭기스 칸의 관점에서 보면 아미르 티무르는 종5대손이다. 그러므로 그의 뿌리는 물론,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와 싸워 그를 포로로 잡고, 한 때 오늘날의 터키를 정복한 적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아미르 티무르의 가문에서 태어나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 손자 울룩 벡은 자신이 쓴 <사국사>에서 당시 터키의 위대한 제국 가운데 하나였던 오스만 제국의 창시자 “술탄 오스만(*오스만 칸)”의 선조가 바로 “오구즈 칸”의 후손이었다는 계보를 전하고 있다. 터키가 자랑하는 오스만제국의 창시자 “술탄 오스만”이 앞서 본 오구즈 칸, 코르쿠트 아타와 함께 오래전에 서방으로 옮겨간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이다. 

▲ 부르사에 있는 술탄 오스만(오스만 1세)의 무덤                                                                           © 편집부


  앞서도 인용했지만,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코르쿠트 아타가 말하기를: ‘마지막 시대에 칸국은 다시 카이(Kayì)에게 주어질 것이다. 최후의 시대가 와서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누구도 손에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오스만 가문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울룩 벡이 기록한 <사국사> 속의 그 오스만 칸의 계보는 바로 이 코르쿠트 아타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마르칸드의 울룩 벡은 오스만제국[코르쿠트 아타가 말한 그 “마지막 칸국”]의 창시자인 “술탄 오스만”이 고구려 왕족 “카이 씨”, 곧 “부여씨”임을 기록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쉽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이 결론은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앞에서 살펴본 이야기들을 보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라는 오구즈 칸은 

1)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발해 왕의 제19대손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 상에 있다. 
2) 따라서 오구즈 칸 자신의 이름의 고대소리와 같이 그는 “고구려 칸”이다. 
3) 그런데 그의 신민인 “오구즈(고구려) 종족” 지도자의 하나인 코르쿠트 아타는 “바야트(부여) 씨”와 같은 “카이(해) 씨”인데, 
4) 그의 이름은 ‘코르(고려)-쿠(가) 트(씨)’ 또는 ‘고려-굿’이다. 

5) 그런데 오구즈 칸은 룸과 이란, 투르크멘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고 한다. 많은 병사와 백성들도 그를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6) 그렇다면 코르쿠트 아타 역시 그 때 서방으로 간 오구즈(고구려) 칸의 오구즈(고구려) 종족의 왕족, 수령이다. 
7) 그런데 오스만 왕가의 “카이(Kayi)” 씨는 오구즈 칸(고구려 칸)의 큰 아들 “카이”의 후손이다. 
8) 또 오스만 왕가는 오구즈(고구려) 종족의 바야트(부여)-카이(해) 씨의 수령인 코르쿠트 아타와 같은 “카이(해)” 씨족이므로 그의 가계는 또 “바야트(부여)”씨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술탄 오스만의 “카이(Kayi)” 씨도 고구려 “해”씨와 같은 성씨이다. 

9) 그러므로 그와 같은 씨족사람인 “바야트(부여씨)-카이씨 코르쿠트 아타”는 자신과 같은 씨족 출신인 “카이 씨” 오스만 왕가를 다음 세대의 투르크 종족의 나라를 차지할 합법적인 왕가로 예언한다. 
10) 그렇다면 그 오스만 왕가의 계보가 “바야트(부여)-카이(해) 씨 코르쿠트 아타”를 통해 오구즈 칸과 고구려 왕가의 계보와 연결된다. 
11) 그런데, 실로 오구즈(고구려) 칸은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의 웃대 선조 계보에 들어있음이 문헌사적으로 확인이 된다. 
12) 또 <사국사>는 “술탄 오스만”의 계보가 “오구즈(고구려) 칸의 후손 계보”라고 전한다. 

  결국 사서와 전승에 따르면 이처럼 12가지 이상의 요소가 “오구즈 칸”, “바야트 씨-카이 씨의 코르쿠트 아타”, “칭기스 칸”, “오스만 칸”을 서로 이어주고 있다. 따라서 이 요소들을 기반으로 추론해 볼 때, 오스만 왕가의 “카이(Kayì)”씨는 바로 고구려 왕족 “해씨/고씨”이다. 곧 오구즈 칸과 코르쿠트 아타의 이야기는 멀리 서방에서 세워진 제국의 “오스만 칸”의 먼 선조로 그들은 바로 극동의 나라에서 서쪽으로 옮겨간 “고구려 왕족”이라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 동방에서 서쪽으로 간 훈족 아틸라제국의 강역.     © 편집부


  되돌아 보건데, 4세기 초 흉노 시대에 극동의 고향 땅에서 훈족의 수령 아틸라의 무리가 멀리 극서의 로마제국으로까지 이동해 민족대이동을 일으켰다. 만일 이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보다 훨씬 후대에 벌어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는 이러한 일도 당연히 절대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전설과 역사로 기록한 것이 바로 페르시아어로 쓰인 <집사>의 <오구즈 사>, 위구르어로 쓴 <오구즈나마>, 투르크어로 적은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그리고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 등이 전하는 “오구즈 칸 이야기”와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 그리고 “오스만 술탄의 선조의 고구려 칸 계보”이다. 

 

 

출처;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77§ion=sc9

 

 

터키와 코리안은 진정 피를 나눈 형제민족 (11부)6.25 이전 1,500년 전부터 혈연으로 얽힌 형제국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유목민족사 연구가

2016/05/15 [21:50]

 

III. 결론 
투르크, 터키와 코리안은 진정 피를 나눈 형제민족
  

오늘날 터키인들은 한국인을 두고서 자주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이 말은 그 이유를 따지지 않고서도 그 말을 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해지도록 하는 말이다. 서로 애초부터 아무런 관계가 없더라도 이 말을 듣고 말하는 이가 서로 모두 뭉클한 인류애를 느끼게 하는 감격적인 말이다. 이 말의 연유를 구태여 살펴보면 거기에는 계기가 하나 있다.      

우리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동족이 상잔하는 전쟁을 치를 때였다. 저 멀리 서방에 떨어진 터키와 그 국민들이 이 땅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을 보는 듯이 생각하고 대부분 지원병인 5,000여 전투병력을 한국을 위해 파병했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터키병사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많은 피를 흘렸다. 바로 이 계기로 인해 두 국민은 피로 이어진 형제국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훌륭한 일을 해준 터키국민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때로는 그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도는 적도 있다. 특히 나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쟁이 끝난 후에 우리의 영수가 터키군 대표에게 물은 말에 대한 터키 측의 대답이다. “전쟁에 도와준 덕에 보답하고자 하니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가?” 

이 때 터키 측은 “피를 함께 나눈 형제의 나라 사이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다만, 무술만(이슬람교도)인 우리들이 예배를 볼 곳이 없어 힘들었으니 무슬림들을 위해 이슬람 사원을 지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우리 측 영수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여, 터키병사들의 헌신과 희생의 덕을 기리어 이슬람 불모의 지대인 우리나라에 5개의 이슬람 메스지드(cemi, 사원)이 지어지게 되었다. 다시금 알라의 은총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도한다.  

▲ 부산 UN군 묘지에 잠들어 있는 터어키 장병들     © 편집부

  
  그러나 터키와 우리 한국인, 아니 조선민족 전체가 진정 터키인들과 “형제민족”인 것은 바로 그 6.25라는 전쟁만을 계기로 한 것이 결코 아닌 것을 양측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간 서로 몰랐을지는 모르지만, 조선(한) 민족과 터키, 나아가 모든 투르크 민족은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우리들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전부터 “형제민족”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에 동방의 대전쟁으로 흉노와 조선이 연이어 망하자 그 백성들은 큰 물결의 움직임으로 4세기까지에 걸쳐 동방에서 서방 로마제국의 안마당까지 민족대이동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또 수백 년이 흘러 고구려와 백제, 당나라와 신라간의 싸움이 터졌다. 이 동아시아 대전으로부터 또 한 세대가 못되어 발해와 당나라, 그리고 신라간의 대전쟁이 또 다시 일어났다. 또 다시 그로부터 약 200년 뒤 조선반도에서는 궁예의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가 뒤바뀌는 궁정혁명이 일어나고 8년도 못되어 이어서 북에서는 발해가 거란에 망했다.      

이 이어진 네 번의 대전쟁들의 여파로 조금씩 시차만 두고 적어도 네 번 이상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거대한 민족대이동이 서방을 향해 일어났다. 금나라에 망한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의 무리가 서방으로 이동하여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나아가 카라키타이를 세운 것을 빼고서라도 그 뒤 다섯 번째로 일어난 마지막 대이동이 지금부터 약 800년 전 칭기스 칸 백성의 서방대이동이다. 
 

▲ 말 달리는 속도와 땅 넓히는 속도가 같았다는 몽골제국의 영토는 과거 조선의 통치강역을 재현한 것.     © 편집부

 
이처럼 원래 동방에서 일어난 대전쟁들이지만, 결국은 서방세계로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던 민족대이동을 일으킨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고구려(Koguryo=Korea)의 멸망이다. 그것이 바로 "오구즈 칸"과 그의 백성 “오구즈 투르크”라고 부르는 이들의 서방으로의 대이동이다. “할아버지 코르쿠트”와 “술탄 오스만의 계보 이야기”도 이 사실을 말한다. 그들이 오늘날의 터키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터키인들은 까마득한 옛날에 자신들의 선조가 떠나온 곳이라, 그 선조들의 고향이 그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은 전해져, 그것이 동방에 있는 “에르게네 콘(Ergene Kon)”이라는 어떤 전설적인 지방이라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바로 이 글이 말하는 것처럼, 까마득한 옛날에 그들의 선조가 오늘날의 터키로 오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 묻어가져온 역사적 고향의 진실에 대한 희미한 회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전설적인 투르크인들의 고향인 에르게네 콘 지방은 바로, 내가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에서 밝힌 바대로, 우리 발해의 “압록강네 군”, 곧 “아-ㅂ-로-카-나 콘(A-v-ro-kan-a-kun)”, “아르카나 쿤”, 곧 발해서경이다. 바로 그 희미해진 과거에 대한 기억 속에 밝혀지는 이 역사적 진실처럼, 많은 터키인들의 선조가 바로 극동의 이 땅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신이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면서 이 이야기들을 이미 지나 간 일(“역사”)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무덤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 과거의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그 아픈 과거를 새로운 감동으로 다시 씹어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동시에 그 아픔의 결과 맺어진 진정한 형제민족의 뿌리도 조금이라도 밝히기 위한 애틋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이 글을 통해 우리 두 형제민족의 역사를 앞으로 더욱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장차 두 나라의 형제애와 우애를 다시 더욱 다지자고 하는 뜻에서 이 작은 글을 발표하기로 했다.      

  오늘날 터키 인구는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아랍계 종족의 토대위에서 새로이 아나돌루(Anadolu) 지방으로 옮겨온 유럽계의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계, 그리고 동방인 또는 중앙아시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투르크계 인구가 각각 일정한 비율을 이루며 오늘날의 터키인이 형성되었다.   
 

▲ 2002 한일월드컵 3~4위전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한 선수들     ©


그런데 이 글이 보여주듯이, 오늘날의 터키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대의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룸(Rum)과 아나돌루(Anadolu) 지방, 곧 오늘날의 터키로 옮겨간 동방인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터키인과 우리 코레리(Koreli, 터키어로 조선/한민족)는, 비록 긴 역사에 의해 조금은 희석되기는 했지만, 진정한 피붙이 형제민족들이라는 결론이다.      

너무나 까마득한 옛일이어서 오늘의 우리들은 알지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사실은 너무나 가까운 피붙이 형제들이 우리 코레리와 터키인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두 민족 사이에 더욱 폭넓은 우애와 선린, 상호이해가 자리 잡고,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의 상호교류와 상호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오래전에 사라진 고구려(高句麗, Mukri, Koguri)와 돌궐(突闕, Tukiu)은 오늘날에도 코레아(Korea)와 터키(Turkey)-투르크(Turk)로 이어져 오늘날에도 저 푸른 하늘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우리 모두에게 바란다. 

< 11부를 이어졌던 연재를 마칩니다. >

 

기사입력: 2016/05/15 [21:5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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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680§ion=s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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