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운회의 新고대사 통합 검색 결과 - 중앙일보 (joins.com)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부록 : 그림으로 보는 고조선
1. 코리안 루트
【해설】한국인들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만주․한반도에 들어왔다. 제1 경로(와 루트)는 동남아 - 중국 동부 해안을 통해 요동과 한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 경로(이들을 ‘왜’라고 한다), 제2 경로(쥬신 루트)는 중국 본토에서 산동 - 베이징 - 요동의 경로, 제3 경로(까오리 루트)는 알타이 - 몽골 - 만주 - 한반도의 경로 등으로 대별된다.
【해설】한국인들이 들어온 세 가지 경로를 표시한 것인데 위의 지도는 시기적인 변화에 다른 한국인들의 이동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와(倭)루트를 따라 한반도에 먼저 들어오고 다음으로 쥬신 루트와 까오리 루트로 이동하여 온 것이다. 위의 그림은 유골에 의한 분석임. 조용진『얼굴』(사계절 : 1999) 85쪽.
2. 코리안 루트
【해설】고대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 : 빗살무늬토기 - comb marked pottery)는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거쳐 한편으로는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지나 두만강 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한반도 서북부로 유입되었다.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 2001) 95쪽. 민족 이동의 경로를 보면 중국의 한족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
【해설】청동기 문화의 유적지는 만리장성 이남에서는 은허(殷墟)를 제외하고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은허조차도 발견되는 청동기는 대부분이 완제품이어서 중국내부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다. 청동기 유적지가 한국인들의 이동로처럼 나타나고 있다. 전송림『중국 산업지리』( 백산출판사 : 2001)참고.
3. 웅녀의 뿌리
【해설】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시베리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그런데 서양의 학자들은 이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퉁구스(Tungus)’라고 부른다. ‘퉁구스’인들은 곰 토템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로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웅녀(熊女)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단군신화가 민간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웅녀 설화가 민간에 충분히 유포되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충남 공주 지역의 유명한 웅녀 설화는 에벤키족의 웅녀설화와 거의 같다. 에벤키족의 시조신화가 한반도의 공주 지역까지 내려와 있는 점이 민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오로촌족도 에벤키족과 다름없이 곰을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단군신화에 나타난 웅녀는 마치 에벤키족의 웅녀설화의 속편처럼 보인다.
즉 에벤키족은 남자와 암곰이 교혼하여 살다가 남자가 도망가 버리자 암곰은 자식을 두 쪽으로 찢는데 하나는 곰이 되고 하나는 에벤키족의 시조가 된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웅진(공주) 곰나루의 설화와 거의 같다. 그런데 이 웅녀설화가 단군신화에 이르면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암곰으로 나오고 결국 여인으로 변화하여 환웅(桓雄)과의 사이에 단군(檀君)을 낳고 이로써 한민족이 시작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보다 정치적인 의미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4.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 국가
【해설】『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직계라고 보기는 어렵고 방계(형제국)로 봐야할 것이다.
은나라 멸망 후 기자의 흔적 : 기자 묘
【해설】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따졌다. 조선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묘가 어떻게 중국 하남성에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지만 ‘기자 광풍’은 이런 의문을 쓸어버렸다.
5. 기자묘의 위치와 기후명 청동기 출토지
【해설】1973년 대릉하에선 기후(箕侯)의 명문(銘文)이라고 주장되는 청동 예기(禮器)가 출토되었다. 이 ‘기후(箕侯)’를 ‘기자(箕子)’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기자묘와 유물 출토지가 수백 ㎞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그렇게 단정하기는 무리다. 인정한다 해도 이 예기는 ‘기자가 기껏 산동이나 대릉하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일 뿐이다. ‘기후 = 기자’이며 기자는 곧 (고)조선 왕이라면 이는 오히려 고조선의 일부 영역(기자 조선)이 현재의 산동반도나 베이징 인근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한서』이다. 『한서』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하였다. 대개 조선․예맥․구려의 등의 야만적인 오랑캐들이었다.”라고 한다. 이 기록에 대하여 안사고(顔師古)는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라는 것은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벌하고 기자를 조선왕에 봉한 곳과는 다르다.”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이 기록은 기자가 조선왕에 봉한 곳과 현재의 한반도와는 무관한 지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6. 사서에 나타난 기후(箕侯)의 고죽국(孤竹國)의 위치
【해설】『수서』에는 “주나라는 기자가 일족 사람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아예 인정(人情)을 베풀어 고죽(孤竹)의 땅을 그에게 봉하였다.”라는 기록과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죽국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 동남부~차오양(朝陽)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사기정의(史記正義)』), “요서 영지현(令支縣)에 고죽성이 있다.”(『한서(漢書)』지리지), “유주(幽州)는 상(은)나라 때는 고죽국으로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요동지(遼東志)』지리지),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7. 주나라와 고죽국(孤竹國)의 위치
【해설】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천하를 통일한 은나라 탕 임금은 옛 성현들의 후손들이나 은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고죽 등의 나라에 봉했다.”고 했다. 이 기록은 BC 1600년경의 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기후의 고죽국이 은나라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의 왕가와 가까운 제후국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 고죽국은 고조선의 역사와 그 영욕을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로인 까닭에 ‘고대 동북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정세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8. BC 11세기 주나라 초기 주변정세
【해설】『춘추좌전(春秋左傳)』에 “왕(주나라 왕)이 (신하인) 첨환백을 진나라에 보내어 질책하여 말하길, 무왕이 상왕조를 이긴 후에(BC 1100여년경?) 숙신․연․박이 우리(주나라)의 북쪽 땅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다.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그런데 이 박(亳)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이후 『순자』의 “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라거나, 『사기』의 “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9. 춘추시대(BC770∼BC403) 발조선의 위치
【해설】조선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책이 『관자』이다. 『관자』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吳越)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특이한 점은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되어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가 떨어져 있다. 따라서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 한계선이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거리의 개념이 오늘날의 거리 개념은 아닐 것이다.
10. 전국시대(BC403∼BC221) 맥족의 영역
【해설】이지린 선생은 동호(東胡) = 맥(貊) 이라고 보고 맥(貊)은 처음부터 예(濊)의 지역 북방에 거주했으며 BC 10세기 이전에 이미 그 일부가 중국 북부까지 진출하여 늦어도 BC 5세기에는 요서와 요동의 고조선 지역 북부에 걸쳐 맥국(貊國)을 건설했지만 흉노와 연나라의 세력에 밀려 요동지역으로 몰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지린 선생은 허베이(河北)에서 요동 요서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한 예(濊)가 요동의 개평(蓋平)을 수도로 하여 세운 나라가 고조선으로 보고 이 예족이 바로 고조선족이라고 파악하였다. 이지린 선생에 따르면, 예와 맥은 고대의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맥족의 일부를 포함하여) BC 8세기~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지린 선생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동호(東胡)란 동이(東夷)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으며 일종의 동쪽 오랑캐라고 하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지나치게 민족명으로 세분하여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예맥도 범칭에 가까운 말이지만 점차 민족명으로 거의 변화된 단계에서 동호라는 말이 중국 동부 지역의 이민족의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지린 『고조선 연구』(사회과학출판사 : 1964)
11. BC 4세기 고조선과 연나라
【해설】『위략(魏略)』에 따르면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 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 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다.
12. BC 3세기 고조선과 연나라의 각축
【해설】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은 진개의 침입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진개는 동호의 인질로 가 있다가 동호가 그를 깊이 신뢰하자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1천여 리 밖으로 격퇴하였고 이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호가 『삼국지』에는 고조선으로 나타나고 있다.
13. 전국시대 후기에서 만조선(위만조선) 성립까지
【해설】『위략(魏略)』에 따르면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라고 하였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燕)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 경에 이르러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14. BC 2세기 초 만조선(위만조선)의 성립
【해설】『사기』에는 “(고조선이) 왕검(王險)으로 도읍을 삼았다.”고 하면서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고 한다. 또 왕검을 험독이라고도 기록했다. 창려를 현재 창려(昌黎 : 현재 베이징 동부해안)로 보면, 왕검성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란 말이 된다. 그러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가 된다. 고조선의 영역과 기족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따라서 기국이 고조선의 선민족임은 분명해 보인다. BC 2세기 경 고조선은 연나라에 뺏긴 과거 고죽국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다만 그 시기는 한나라 장군인 번쾌와 주발의 대군이 이 지역을 평정(BC 195)하고 철수한 이후로 보인다.
15. BC 2세기 고조선
【해설】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BC 2세기 초반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이었던 고죽국 지역을 점령해 왕검성을 건설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이에 따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사기』의 기록에 “흉노의 좌현왕과 그 장수들은 주로 동방에 살고 있는데 예맥과 조선에 접하고 있다.”는 기록은 흉노의 구체적인 위치와 조선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흉노가 조선과 예맥에 바로 접하고 있다는 말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많은 오랑캐들 즉 동호, 선비, 오환, 숙신 등은 모두 개별적인 의미가 없고 흉노에 속한 유목민(또는 반농반목민)과 속하지 않은 유목민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한다.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다.
16. 고조선 멸망과 임신5적의 봉지
【해설】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사기』에 나타나는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했다고 나온다. 조선을 한나라에 팔아넘긴 5대 매국노(임신5적)들인 참(參), 한음(韓陰), 왕겹(王唊), 장(長), 최(最) 등은 한나라의 작은 제후로 봉해졌다. 참은 홰청후(澅淸侯), 한음은 적저후(狄苴侯), 왕겹은 평주후(平州侯), 장은 기후(幾侯), 최는 온양후(溫陽侯)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봉지(封地)가 대부분 고죽국이나 왕검성에 가까운 곳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위소(韋昭) 등의 주장을 인용해 “홰청과 온양은 제(산동반도), 적저는 발해(渤海), 평주는 양부(梁父), 기는 하동(河東)”이라고 했다. 이들 봉지가 고조선 땅이란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봉지는 자신이 속한 곳의 땅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5개 봉토의 분포는 고조선 영역이 일부는 산동 북부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
17. 고조선의 후예들
【해설】 고조선이 멸망한 뒤, 유민들의 한 갈래는 고조선 남부와 해안을 중심으로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른 갈래는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고조선 유민의 한 갈래인 선비족은 중국 북부에 여러 제국들을 건설했다. 고구려와는 결혼동맹을 비롯하여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광개토대왕은 선비인 후연에 대해 ‘종족의 예’를 베풀었고, 장수왕이 서거한 뒤 그들은 조부를 잃은 듯 애도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지금은 다 잃었다.
18. 부여의 영역과 관련 청동기 문화
【해설】부여 시조인 동명(東明)은 바로 금와왕의 까오리에서 탈출하여 부여를 건국하였는데 부여가 대체로 현재의 하얼삔에서 눙안(農安)․지린(吉林) 인근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곳보다 더 북방 지역이라면 까오리국은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지나 현재의 흑룡강 상류 지역이나 동몽골 지역 또는 바이칼(Baikal) 호수 인근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지역에서 부여(夫餘)과 관련된 유사 지명 가운데 가장 북쪽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치치하얼(齊齊哈爾) 북부 푸위(富裕)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부여 또는 까오리국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현지 지역민들은 부여가 이 지역의 강 이름인 우위얼허(烏裕爾河)에서 나왔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이들 현지인들의 현대 증언을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인 부여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치치하얼 동쪽으로는 백금보 문화(白金寶 文化 : BC 1400~BC600경의 초기 청동기 문화로 부여 초기의 문화로 추정) 유적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까오리국은 이 지역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부여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청동기문화인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 BC 9C~BC 3C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나타난 청동기 문화)와 부여의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탁리국의 문화로 추정하는 백금보문화이다.
19. 초기고구려 건국 추정지역
【해설】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정사 기록은 『한서(漢書)』로 “한무제 원봉 3년(BC 108)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도(玄菟) 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까지 현도를 현재의 함흥으로 봤다. 그런데 『한서』에 “현도군은 유주에 속한다 … 현도군은 고구려,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의 세 현”이라고 했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와 『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결코 함흥이 될 수 없다.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와 『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한서』에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菟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에 “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요양은 현재의 선양(瀋陽) 또는 랴오양(遼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재의 란하(루엔허)에서 선양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20. 2세기 고조선 후예 선비의 대두
【해설】흉노와 후한의 대치 국면에서 고조선은 번영하지만 한 무제의 침공으로 흉노는 후퇴하고 고조선은 멸망한다(BC 108).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고 이들 대부분은 잡거(雜居)한다. 1세기 초 후한은 흉노에 대해서 방어체제를 정책기조로 하였다. 그러나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 습격으로 수천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흉노는 내분으로 남ㆍ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내몽골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고조선은 2세기경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키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단석괴는 광할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ㆍ중ㆍ서부로 나눠 각각 대인(大人)을 배치했다. 동부는 현재의 허베이(河北) 핑추안(平泉)~랴오양(遼陽), 중부는 탕산(唐山)~베이징(北京), 서부는 베이징~뚠황(敦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약화됐다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단석괴 영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청주ㆍ서주ㆍ유주ㆍ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인 답돈(踏頓 : ?~207)이 황제 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 202)는 답돈에 화친을 요청해 우호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보내기도 했다.
21. 4세기 고조선의 부활
【해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약화됐다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단석괴 영역을 대부분 장악하고 청주ㆍ서주ㆍ유주ㆍ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遼河)를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 : ?~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자객에게 암살되자 다시 분열되어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 : 337∼370)과 후연(後燕 : 384∼409)을 건국했다. 4세기엔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진서』에 “모용외가 건무(建武 : 후한 광무제의 연호)초에 정벌 전쟁을 하여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 : 조선왕)에 봉해졌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고 했다. (고)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廆)가 조선공에 봉해진 후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4세기에 베이징 인근에서 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ㆍ모용황이 회복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22. 4세기 고조선의 후예 : 북위의 발흥
【해설】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하여 건설한 국가는 북위(北魏 : 386∼534)다. 북위와 고구려는 때로는 결혼으로 연합하면서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였다. 북위 헌문제(獻文帝 : 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개로왕의 국서(472)에 대하여 오히려 꾸짖으면서 장수왕을 두둔하였고, 육궁(六宮)이 미비하다고 하여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孝文帝 : 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 : 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宣武帝 : 499~515)를 낳았다. 선무제가 등극하여 황족들의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와 진압하여 북위 조정을 장악하였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訃音)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지은 심의(深衣)를 착용하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이 같은 효문제의 행동은 천자(天子)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정도의 애도(哀悼)의 정을 보이고 있다.
23. 요나라 건국의 요람 요택(遼澤)
【해설】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내몽골이다.『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지역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고『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ㆍ탁발부 등 타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수ㆍ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24. 요나라의 영역 및 수도와 홍산 지역의 위치도
【해설】고조선의 심볼인 비파형 동검은 주로 조양과 심양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유물의 중심 지역이 최근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홍산문화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이 바로 과거 요나라 수도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요하 상류 지역은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인 구들의 발상지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족의 난방 구조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요나라에 주목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년 이상을 중화사상을 추종하여 같은 민족을 오랑캐로 천시하고 외면하였지만 수많은 사례들과 기록들은 분명히 요나라가 고조선을 승통(承統)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기록을 보아도 단군조선과 관련된 정치이데올로기에 대한 계승문제가 언급된 바가 없는데 반하여 요나라의 역사에는 단군신화나 고조선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부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자료] 무씨 사당 벽화
【해설】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 곰과 호랑이 그림들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 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다.
[출처]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부록 : 그림으로 보는 고조선|작성자 byunsdd8972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우리겨레력사와 문화 > 우리겨레 력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근차근 한국미술사]/[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0) | 2020.06.12 |
---|---|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0) | 2020.05.08 |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韓國史속의 만주] (0) | 2018.08.17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외 (0) | 2018.07.06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0) | 2018.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