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2019-10-19 11:20 등록 2016-07-25 08:09 

최고 시조집 ‘청구영언’ 원본 찾았다…국립한글박물관 입수 (hani.co.kr)

자료 공모 통해 구입…“시조집의 원형, 문학사적 가치 높아”

김천택의 청구영언 원본. (국립한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김천택이 1728년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시조집인 '청구영언'(靑邱<혹은 丘>永言) 원본이 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한글박물관 관계자는 "유물과 자료를 공개 구매하는 과정에서 청구영언을 입수했다"며 "최근 전문가 자문 결과 이 책이 그간 학계에도 거의 공개되지 않은 김천택의 청구영언 원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25일 밝혔다.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조집으로 꼽히는 청구영언은 개인 문집에 수록돼 있거나 구비 전승되던 시조 580수를 모아 펴낸 책이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 정몽주와 이방원이 읊었다는 '단심가'와 '하여가'가 한글로 처음 기록된 서적이기도 하다.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편찬한 이후 19세기 말까지 조선에서는 170여종의 시조집이 간행됐다.

그중에는 김천택의 청구영언과 내용이 전혀 다른데도 같은 제목을 단 책도 있다.

청구영언 원본을 직접 살펴본 권순회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김천택의 청구영언은 국립한글박물관 전시 전까지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며 "조선 시조집의 원형적 모델로 문학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권 교수는 "청구영언은 예부터 전해오는 노래 가사를 김천택이 적은 기록물로, 후대에 시조집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될 만큼 영향력이 컸다"면서 "다른 시조집들은 청구영언의 편찬 형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당시 상황에 따라 악곡과 사설을더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덧붙였다.

김천택의 청구영언은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가 활자본으로 출간한 바 있으며, 학계에서는 동명의 다른 책과 구분하기 위해 조선진서간행회의 '진'(珍) 자를 따서 '청구영언 진본(珍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천택이 손으로 쓴 청구영언 원본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유명한고서점이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공개하지 않아 '도난됐다'거나 '심하게 훼손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권 교수는 "원본과 활자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서 "활자본 중간 제목에 있는 '무씨명'(無氏名)은 원본의 '무명씨'(無名氏)를 잘못 옮긴 결과라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까지 2차 자료인 활자본으로 연구를 진행해 한계가 있었는데, 원본이국립한글박물관에 공개돼 더 정확하고 다양한 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며 "청구영언 원본이 개인에게 넘어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구영언 원본을 영인본(원본을 복제한 인쇄물)으로 만들면 활용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립한글박물관 관계자는 "교과서, 문학 개론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책인 청구영언의 의미와 가치를 알릴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송고시간2018-12-23 06:30

정약용 유배 시절 제자 황상이 1860년대에 편찬

안대회 교수 "새로운 구조와 내용 지닌 독자적 저술"

황상이 필사한 택리지. [안대회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후기 지리지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독창적인 생각과 해석을 집어넣어 필사한 책이 나왔다.

향촌 지식인이 전라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 대한 기존의 박한 평가를 뒤집고, 그 근거를 제시한 개정증보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최근 연구자 9명과 함께 이본(異本) 20여 종을 비교해 정본(定本) 택리지 번역본을 출간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인 황상이 주관에 따라 재편집하고 증보한 택리지를 발굴했다"고 23일 밝혔다.

조선 후기 문인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1751년 세상에 내놓은 택리지는 저자가 남긴 마지막 수정본이 전하지 않지만, 이본만 200여 종에 달하는 베스트셀러.

안 교수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한국문화'에 투고한 논문에 따르면 치원 황상(1788∼1863)이 필사한 택리지는 개인이 소장한 치원총서의 일부다. '장자'(莊子)·'동파시집'(東坡詩集)·'문선'(文選)·'검남시'(劍南詩) 등으로 구성된 치원총서는 모두 16책이지만, 그중 1책이 전하지 않는다.

1860년대에 편찬한 치원총서 택리지는 첫 장에 '택리지권지일'(擇里志卷之一)이라고 적은 뒤 하단에 '여흥 이중환 논저(論著), 탐진 황상 절록(節錄)'이라 명기하고 도장을 찍었다. 절록은 알맞게 줄여 기록했음을 뜻한다. 치원본 택리지는 두 번째 책이 존재했다고 추정되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안 교수는 "황상 택리지는 절록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일부를 발췌한 사본으로 예상하기 쉽지만, 3분의 1 정도는 원저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으로 채웠다"며 "그 어떤 사본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구조와 내용을 지녀 황상의 독자적 저술로 간주해도 좋다"고 평가했다.

황상 택리지는 이중환 택리지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인 택리지는 팔도론(八道論)이 앞에 나오고 복거론(卜居論)이 뒤에 등장하지만, 황상은 복거론을 먼저 쓰고 팔도론을 뒤에 붙였다.

아울러 팔도론 순서도 국토 변방에서 중심으로 서술한 이중환 체계를 부정하고, 경기도부터 외곽으로 서술해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복거론의 네 가지 기준인 지리, 생리(生利), 인심, 산수를 지리, 생리(生理), 풍속, 천석(泉石)으로 바꾼 점도 돋보인다.

황상이 필사한 택리지. [안대회 교수 제공]

 

황상 택리지의 진정한 특징은 내용에 있다. 안 교수는 "황상은 당시 금과옥조처럼 인식된 택리지의 지역 평가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이중환은 전라도를 설명하면서 "풍속이 음악과 여자, 그리고 사치를 숭상하고, 경박하고 교활한 사람이 많으며 학문을 중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한 사람이 경상도보다 적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황상은 "전라도의 풍속을 두고 세상에서는 속이고 경박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겠다. (중략) 예로부터 절의를 지킨 선비가 많았기 때문에 그 풍속이 또 호협하고 기개를 숭상한다"고 반박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은 호남과 대비해 영남 사람이 투박하고 도탑다고 했으나, 황상은 영남 사람이 뻣뻣하고 사나우며 남에게 돈 한 푼 내주지 않는 인색한 기질임을 폭로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중환은 스스로 전라도에 가보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라면서 "전라도 사람인 황상은 속속들이 파악한 자기 지역 정보와 현황, 특산물, 자랑거리를 필사 과정에서 대폭 보완했다"고 덧붙였다.

황상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관서와 관북 지방에 대한 이중환의 저평가도 부인했다.

이중환은 팔도론 함경도에서 "관서와 관북의 함경도와 평안도 두 개 도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했으나, 황상은 복거론에서 풍속을 다루면서 "관서와 관북 두 개 도는 오랫동안 사환(仕宦·벼슬살이를 함)이 끊겨서 400년 이래로 고관대작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그곳 백성들은 누구나 비분강개한다"고 적었다.

또 황상은 지리 서술에 지역 전설을 포함한 이중환과 달리 역사나 야담을 반영하는 태도를 지양하기도 했다.

황상이 필사한 택리지에서는 다산의 영향도 확인된다. 일례가 명산지를 소개하면서 추가한 은풍의 감과 양주 남일원의 밤이다.

안 교수는 "은풍 감은 조선 후기에 왕실 진상품이었으나,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며 "정약용은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 정조로부터 은풍 감을 받고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황상은 다산으로부터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면서 "남양주 화도읍 금남리를 지칭하는 남일원이라는 지명을 언급한 지식인은 정약용이 거의 유일하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치원본 택리지는 이중환과 황상, 정약용이 국토지리를 보는 시각과 참신한 정보, 지식을 버무린 저술로 세 사람의 지리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며 "이 책은 19세기 중반 인문지리학과 다산학단 지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우리나라 최초 국문 번역본 소설 순창군, 본격 문화-관광 상품화 추진 나서

<기획> 하늘닮은 전북, 하늘 담은 문학 <12> '설공찬전'과 순창

조선시대 당시 필화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번역본 소설(이견 상존)로 알려진 설공찬전(薛公瓚傳)에 대해 순창군이 본격적으로 문화, 관광 상품화 추진에 나섰습니다. 작품 무대와 등장인물이 순창인 설공찬전은 조선 종종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채수(蔡壽,1449∼1515)의 작품으로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국문 번역본 소설입니다.

1996년 설공찬전을 최초로 발견한 이복규 교수(서경대 국어국문학과)는 설공찬전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 이후 기재기이(企齋記異)에 이르기까지 80년의 소설사적 공백을 메꾸어 준다는 점, ▲홍길동전 이전에도 한글로 표기된 소설 이 존재했으리라는 그간의 심중이 물증으로 확인됐다는 점 ▲설공찬전 국문본은 우리나라 국문소설사의 전개과정을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로 번해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중종 6년(1511년), 중종반정을 통해서 공신들을 격분시킨 책, 뜻밖에도 같은 공신이었던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설공찬전’은 소각되었고, 채수는 파직당하고 맙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설공찬전’에 대한 논의가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죄명은 혹세무민, 즉 백성을 현혹시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길래 채수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일까요?

순창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에게 공찬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공찬의 혼이 설충란의 형인 설충수의 아들인 설공침에게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설충수와 설공침이 밥을 먹는데, 설공침이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괴이하게 여긴 설충수가 설공침에게 왜 왼손으로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침의 몸속에 들어가 있던 설공찬이 저승에선 그렇게 먹는다고 대꾸했습니다. 이에 놀란 설충수는 설공찬의 혼을 몰아내려고 하지만, 설공찬이 자신을 쫓아내면, 공침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설공침은 곧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이에 공찬이 공침의 몸속에 들어가 저승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에서 약 40리 정도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사는 5영혼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공찬은 심판을 받았지만, 증조부의 덕으로 풀려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은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한 주전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내용은 "임금에게 충성하다가 비명에 가면 저승에 가서 잘살고, 임금이라도 반역자라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현세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공신들이라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중종반정에 참가한 사림파들에 대한 반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설공찬전’은 소각되었으며, 자신마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순창의 삼인대(三印臺)는 1515년(중종 107)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이 중종반정으로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곳이지 않나요. 신씨는 역적 신수근의 딸로 중종반정후 폐위되고 장경왕후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10여 년만에 윤비가 죽자, 이 세 사람이 여기에 모여 신비 복위를 청했습니다. 삼인대라는 이름은 이때 이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관인(官印)을 소나무가지에 걸어 놓고 맹세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호남사림의 절의정신을 상징물이 됐습니다.


실록은 다음과 같이 채수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채수(蔡壽)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成宗朝)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反正) 뒤에는 직사(職事)를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하였는데, 뒤에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설공찬전의 배경지가 순창 금과의 매우리라는 것은 학계를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랍니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설공찬이 실제 인물 설충란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순창설씨 대종회가 제공한 순창설씨의 족보를 보면 설충란에게는 공포와 공순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설충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금과의 설모씨가 성장 과정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설공찬은 설충란의 둘째아들 설공순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공찬전은 귀신이나 저승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채수는 어렸을 때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작품 창작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합니다. 순창이라는 실제 지명을 배경공간으로 삼고, 이 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이야기인 것처럼 위장하고, 등장 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배합해 설정,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관념과 무속에서의 공수현상 등을 활용해 대중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요.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예요. 이 대목은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김시습의 금오시화 속 ‘남염부주지’ 같은 여타 유사계열의 전기(傳奇)소설이나 설화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이 살아나지도, 그 일을 꿈속의 일로 돌리지도 않으며, 다만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관직을 받아 잘 지내더라는 대목도 주목되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사회체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 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창의 고추장이 다른 지방의 것보다 맵고 알싸한 까닭입니다. /이종근기자

 

 

다섯번째 한글본 ‘연행록’ 발견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7-11-22 00:00ㅣ 수정 : 2007-11-22 00:00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단의 행적을 한글로 기록한 기행문집 ‘연행록(燕行錄)’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조선 철종때 중국으로 파견된 공식사절단의 행적을 한글로 기록한 기행문집 연행록(왼쪽)과 한문필사본인 연사록(오른쪽).
의왕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의왕시는 21일 의왕문화원에서 개최하는 의왕시사 발간기념회를 통해 연행록을 공개했다.

의왕시사편찬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이 한글 연행록은 철종 때 품산(品山) 김직연(1811∼1884)이 작성한 문집으로, 국내에서 5번째로 발굴된 것이면서 현존하는 마지막 사행(使行)기록이다.

의왕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 연행록은 철종 9년인 1858년 10월26일부터 이듬해 3월20일까지 동지사(冬至使·조선시대에 명과 청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한 김직연이 기록한 기행문집이다.

모두 3권으로 된 연행록은 정사(正使)인 이근우(1801∼1872)를 비롯해 310명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대궐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이르는 과정,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사행 목적을 완수하고 떠나기 전날까지의 상황, 베이징을 떠나 귀국해 복명하기까지의 과정으로 각 권을 구분했다.

강남대 경기문화연구소 김근태 박사는 “조선시대에 모두 870차례에 걸쳐 중국 명과 청에 공식 외교사절을 보냈고 이를 기록한 연행록은 100여편이 전하지만 이 중 한글본은 드물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글 연행록은 허목의 ‘죽천행록’(1624년 10월∼1625년 10월), 홍대용의 ‘을병연행록’(1765년 11월∼1766년 4월), 이계호의 ‘연행록’(1793년 8∼10월), 서유문의 ‘무오연행록’(1798년 10월) 등이 있다. 이번에 발굴된 연행록은 한글본과 함께 한문필사본 ‘연사록(燕 錄)´도 발견돼 이를 비교 분석하면 한글과 한문으로 구분해 기록을 남긴 의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의왕시는 이날 연행록 한글본 외에 일제 초기에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만든 지적도인 ‘과세지견취도(課稅地見取圖)’도 공개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입력 2007-10-27 02:59업데이트 2009-09-26 07:46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석봉 한호가 1583년 선조의 명을 받아 쓴 ‘석봉천자문’ 초간본. 사진 제공 동국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서예가인 석봉 한호가 쓴 ‘석봉 천자문’ 초간본과 추사 김정희가 조선시대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백파 긍선 스님에게 보낸 편지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동국대는 30일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서울 중구 필동 캠퍼스 중앙도서관에서 ‘고서 특별전’을 열어 이들 유물을 포함해 희귀 고서 133종 161책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 초기 월인석보 7, 8권과 고려 말기 묘법연화경삼매참법 등 보물 6종도 함께 전시된다.

특히 석봉이 1583년 선조의 명을 받아 판각한 초간본 ‘석봉 천자문’은 석봉 천자문 중 처음 발간된 판본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추사의 편지인 ‘간찰’은 추사가 백파 긍선 스님에게 보냈던 편지의 초고본으로 추사의 글씨체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조선 중기 부제학까지 지낸 금호 임형수가 1539년 함경도 회령도호부의 판관으로 떠날 때 지인들이 써 준 이별시를 모아 놓은 ‘회령별장첩’도 처음 공개됐다.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 관료들의 글씨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조선 불교의 독립성과 국권 수호를 강조하며 진행됐던 ‘임제종 운동’을 만해 한용운과 함께 추진했던 박한영 김경운 진진응 등 승려들의 편지도 처음 공개된다.

이 밖에 보물 1518호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과 보물 1519호 ‘묘법연화경삼매참법’, 보물 1459호 ‘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 보물 1012호 ‘몽산화상법어약록’ 등 불교 관련 보물급 자료도 다수 전시될 예정이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입력 2007-06-27 19:48  

허균의 시선집 `국조시산` 원본 발견 - [디지털타임스] (dt.co.kr)

   
교산(蛟山) 허균이 조선 초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고의 문인 35명의 시 889수를 선정해 엮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時刪)`의 원본이 발견됐다.


고문헌연구가 박철상(광주은행 여의도지점) 씨는 30일 발간 예정인 학술지 `한 국문화연구` 12집에 기고한 `허균 수정고본(手定稿本) 국조시산의 출현과 그 가치`를 통해 국조시산 원본의 발견을 알렸다.
박 씨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해제 사업 자문위원으로 도서관 수장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원본 국조시산에는 허균의 호 교산(蛟山)을 새긴 수장인이 찍혀있으며 첫 장 하단에 양천허균단보비선(陽川許筠端甫批選)이라고 써있다.

양천은 허균의 본관이며 단보는 허균의 자다. 비선(批選)은 허균이 비평하고 선정했음을 뜻한다.

그동안 국조시산은 1697년 문신 박태순(1653-1704)이 간행한 목판본만이 전해왔다. 박 씨는 "원본과 목판본은 서로 다른 책이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강조했다.

원본과 목판본은 체제부터 다르다. 목판본은 5언절구-6언절구-7언절구-5언율시-5언배율-7언율시-7언배율-5언고시-7언고시-잡체시의 순서로 구성됐다.

반면 원본은 5언고시-7언고시-잡체시-5언율시-5언배율-7언율시-7언배율-5언절구-6언절구-7언절구의 순서로 배열됐다.

수록 작가와 작품명이 다른 경우도 있다. 원본에는 `감흥(感興)`이라는 시가 변계량의 것으로 실려있지만 목판본에는 변중량의 것으로 실려있다. 또 원본의 박순 작 어부사(漁父詞)는 목판본에서 권벽의 작품으로 바뀌었다.

작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법도 차이를 보인다. 목판본에서는 먼저 작자의 이름을 쓰고 아래쪽에 두 줄에 걸쳐 작은 글씨로 작자의 약력을 기재했으며 다음 줄에 시제(詩題)를 썼다.


반면 원본에서는 위쪽에 시제가 있고 같은 줄 아래에 작자의 이름만을 표기했다.

작자의 관작이나 약력은 나타나 있지 않다.

또 원본의 발견으로 목판본의 비평(批評)에 오류가 있었음이 확인됐다.

비(批)는 하나의 시 전체에 대한 감상이며 평(評)은 한 구절에 대한 감상이다. 따라서 평은 정확한 위치가 중요한데 목판본에는 평의 위치를 잘못 적은 것으로 의 심되는 부분이 종종 발견됐다.

원본과 대조한 결과 목판본에서는 원본의 비와 평의 위치가 바뀐 곳이 있었으며비가 아닌 것이 목판본에서는 비로 표기된 것도 있었다. 누락된 비와 평도 상당수였다.

박형규 순천향대 교수는 "허균의 수장인이 찍혀있다는 점에서 원본이 틀림없어 보인다"며 "원본이 나왔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입력 2019. 12. 11. 15:42

전주에서 발간한 책 '완판본(完板本)' 기록 고서 첫 발견 (daum.net)

이태영 전북대 교수 "사전적 뜻풀이 바로잡을 계기"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조선 시대 전북 전주에서 발간한 책을 일컫는 '완판본(完板本)'이라는 용어가 쓰인 고문헌이 처음 발견됐다.

완판본 연구자인 이태영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경매를 통해 1916년 전주의 옛 서점인 다가서포에서 발간한 '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란 책을 구했다고 11일 밝혔다.

이 책의 표지에는 대통감완판십칠자십(大通鑑完板十七字十)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데, 여기서 완판은 전주에서 간행한 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완판본은 서울에서 펴낸 경판본(京板本)과는 다르게 명칭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아 그 역사성과 유래에 대한 연구가 더디게 이뤄졌다.

이전까지는 1940년 발행한 문학 잡지 '문장(文章)'에 실린 평론가 윤규섭의 수필 제목인 '완판'이 문헌에 쓰인 가장 오래된 용어로 알려져 있었다.

대통감 표지에 적힌 '완판' [이태영 교수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이 교수는 "목판으로 인쇄된 고서의 제목은 매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현재까지 완판본을 기록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책"이라며 "조선 후기에 전주에서 출판하던 인쇄업자들은 이미 '완판'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현재 다수의 국어사전은 완판본의 개념을 '전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의 고전 소설' 정도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제는 역사적인 사료가 발견된 만큼 '전주에서 간행한 옛 책' 내지는 '조선 시대 전주에서 간행한 판매용 책'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 수정 2019-10-02 15:30 등록 2019-10-02 15:30

아깝게 과거 급제 놓친 17세기 조선 선비의 답안지 공개 (hani.co.kr)

평택 임씨 송암공파 종친회, 홍주성역사관에 기탁
1665년 임금의 온양온천 행차 기념해 열린 과거에서
전체 9위 기록…‘차상’ 등급 받아 급제는 못해

기자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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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임유가 1665년 열린 과거 시험에서 써낸 답안지. 홍주성역사관 제공

 

충남 홍성군 홍주성역사관은 최근 평택 임씨 송암공파 종친회로부터 조상 임유(1638~?)의 354년 전 과거 시험 답안지를 기탁받았다고 2일 밝혔다.

이 답안지는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임유가 과거 시험에 응시해서 제출한 답안지로 흔히 시권(試券)이라고 불리는 문서다. 현종이 당시 온양온천(현재 아산시)에 행차한 것을 기념해 충청도민을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이때 문과 시험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가를 논하라’(人力可以奪造化論)였다.

임유는 이에 대해 ‘조화’라는 개념을 ‘자연의 조화’와 ‘인간이 만든 조화’로 구분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한쪽이 이기고 지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자연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지를 펼치며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임유는 이 답안으로 ‘차상’ 등급을 받아 급제하지 못했고 전체 응시자 중 9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험 결과가 나온 뒤 현종은 급제자 중 온양온천 출신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고 온양온천이 고향인 응시생을 추가로 합격시키라고 명했다. 현종의 명에 따라 임유도 추가 합격의 기회를 얻었으나 임유는 외가가 온양온천이지 본가는 결성현(현재 홍성군 결성면)이라는 점이 드러나 다시 탈락했다. 홍주성역사관의 김예신 학예연구사는 “보통 과거 시험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답안지는 모두 수거돼 옷을 만드는 등 재활용되는데, 임유는 비록 최종에선 탈락했지만 합격자로 간주돼 답안지를 돌려받았고 이를 문중에서 계속 보관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택 임씨 집안은 대대로 홍주(홍성)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임유의 증조부는 조선 중기의 무신 임득의(1558∼1612)인데, 그는 선조 29년(1596년)에 홍주에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해 청난공신(淸難功臣)에 책봉됐다. 홍성군 서부면엔 임득의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 정충사(충남 문화재자료 제401호)가 있다. 또 임득의의 셋째 아들인 임전(1600~1651)은 효종 1년(1650년)에 홍주 목사를 지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왜적이 얼마만큼 원수인가?"..조선 의병장 420년 전 '일갈' (daum.net)

정대하입력 2019. 8. 30. 14:06수정 2019. 8. 30. 20:56
 
금계 노인, 일본 포로수용소 기록 <금계일기> 남겨
일본 탈출해 명나라 거쳐 귀국 여정의 풍물 등 담아
국립광주박물관, 후손한테서 '금계일기' 받아서 관리
전라도 나주 출신 의병장 노인(魯認·1566~1622)이 쓴 <노인금계일기>(보물 제331호).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왜적이 얼마만큼 더러운 자이고, 얼마만큼 원수인가?”

전라도 나주 출신 의병장 노인(魯認·1566~1622)이 쓴 <노인금계일기>(보물 제331호)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꼿꼿한 심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금계일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노인이 명나라로 탈출해 귀국할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일기다. 노인은 일기에 “오늘에 이르러 죽지 못하여 원수의 밥을 먹고 안녕하지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적었다.

‘금계일기’는 1599년 2월21일부터 6월27일까지 4개월7일 동안 내용이 앞과 뒤가 끊어진 채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종균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전해지는 것 전후로도 일기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포로로 보낸 2년5개월가량의 경험 중 4개월여의 일기만 전해져 아쉽다. 그러나 중국 탈출 과정과 체험 부분이 담겨 있고, 지금 전하는 부분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전라도 나주 출신 의병장 노인(魯認·1566~1622)이 쓴 <노인금계일기>(보물 제331호).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17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리학을 공부하던 노인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약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권율(1537~1599) 휘하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했다. 노인은 1597년 8월15일 남원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고 쓰러져,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선생은 일본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자결하려고 했지만, 몸이 묶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노인의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젊은 관리들은 노인에게 부채를 들고 와 글씨와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그들이 두고 간 돈을 모아 통역관을 매수한 뒤 ‘일본 산천의 지세와 호구, 군사정보’ 등을 꼼꼼하게 일기에 기록했다. 일본인들의 풍속·습관과 포로들에 대한 대우, 탈출 경위 등도 적었다.

노인은 1599년 3월17일 일본 와텐슈우(和天州)에서 만난 중국 사신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이미 한 차례 배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적이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노인은 푸젠성(福建省)으로 가서 조선 송환을 요청해 귀국을 승인받고, 베이징을 거쳐 1600년 1월 한양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그 과정에서 중국 관리와 지식인들과 만나 성리학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는 등 학문적으로 교류했다.

1604년 경남 통영 앞 바다 전투 상황을 담은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노인은 귀국 후 선조에게 일본의 상세한 정황을 보고한다. 그리고 1604년 경남 통영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을 물리치는 데도 공을 세운다. 당시 통제사 이경준과 친적 노홍 등 28명의 장군이 왜군을 격파했다. 당시 전투 상황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에 남아 있다. 선조는 당시 “노인이 몸을 갖기를 깨끗이 하고 근명하여 매번 복수하고자 해 계책(1599년 서계 10조)을 올리고 사직을 지켰다”며 통정대부로 승진시키고, 수원부사 직책을 수여했다. 이후 광해군 때 정국이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국립광주박물관은 “노인의 후손(광주광역시 거주)한테서 ‘노인 금계일기’를 맡아 보관해달라고 수탁받았다”고 30일 밝혔다. 금계 선생의 저술로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지은 <피부동고록>(被?同苦錄), <거왜수록>(居倭隨錄), <왜국지도>(倭國地圖)가 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을 남겼다. 김승희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번에 수탁된 의병장 노인의 <금계일기>뿐 아니라 남도 출신 의병장의 활약상을 지속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등록 2018.12.14 06:06:00

 

보물 제949호 '예념미타도량참법'과 동일한 판본으로 인출된 대흑구 목판본 '예념미타도량참법' 1책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보물 제949호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과 같은 판본으로 인쇄된 불경이 경매에 나온다.

경매회사 코베이 옥션이 19일 개최하는 제228회 '삶의흔적 반올림 #9 프리미엄 특별경매'에 출품된 '예념미타도량참법' 권제4~권제5 1책은 보물 제949호 '예념미타도량참법'과 동일한 판본으로 인출된 불경으로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종과 세조의 명복을 빌려고 간행한 불교 의식집이다. 초간본은 1474년 나왔다.

대흑구 목판본 '예념미타도량참법' 1책

 
이 책은 일반 사찰에 널리 퍼지지 않았다. 1503년 해인사에서 다시 간행해 국보 제32호 해인사 대장경판에 포함됐다. 왕실이 주관했기 때문에 글쓴이, 그린이, 목판 작업자 모두 조선 초기 일류 기술자였다. 

보물로 지정된 것보다도 상태가 양호하다. 경매 시작가는 1500만원이다.
            
조선 대표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도 나온다 추사의 문하생 흥선대원군, 소치(小痴)  허련, 희원(希園) 이한철의 편지와 그림이다.

흥선대원군의 간철첩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1851년 음력 8월27일 32세에 쓴 간찰첩은 추사체로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무과 출신 삼수부사 조한진과 아들 조석일, 허전을 비롯한 13인이 강원도 홍천 좌운 천동 거주 허 석사에게 보낸 서간이 수록됐다. 이하응의 간찰은 코베이 경매에 출품됐지만, 젊은 나이에 쓴 편지 출품은 비교적 드물다. 경매 시작가는 170만원이다.

조선 말기 화가 희원 이한철이 추사체로 쓴 간찰

 
조선 말기 화가 희원 이한철(1808~?)이 쓴 간찰도 나온다. 역시 추사체로 썼다. 그가 그린 김정희 초상화는 김정희 종가 유물과 함께 보물 제547호로 지정돼 있다. 경매 시작가는 30만원이다.

소치 허련의 4폭 병풍 '매죽도'

 
김정희에게 그림 실력을 인정받은 소치 허련(1809~1892)의 그림 '매죽도'도 출품됐다. 허련은 귀양을 떠난 김정희를 제주도까지 따라갈 정도로 김정희를 극진히 모셨다고 알려져있다. 4폭 병풍으로 된 이 그림의 경매 시작가는 300만원이다. 

시인 김억(1895~?), 시인 조명희(1894~1938), 시인 서정주(1915~2000)  등 한국 근현대 문학가들의 시집 초판본도 나온다.

안서 김억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 초판본

 

소월(素月) 김정식의 스승으로 유명한 안서안서(岸曙) 김억의 첫 시집이자 조선 근대 문학 최초 창작시집인 '해파리의 노래' 초판본은 1923년 조선도서주식회사가 발행했다. 경매 시작가는 1800만원이다. 

조명희 시집 '봄 잔듸 밧 위에'

 
1924년 춘추각이 발생한 시인 조명희의 첫 시집 '봄 잔듸 밧 위에' 초판본은 600만원, 1941년, 남만서고가 발행한 시인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은 500만원에 경매를 시작한다. 

12일부터 19일 오후 3시 경매 전까지 서울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 6층 코베이 전시장에서 실물을 볼 수 있다.
 suejeeq@newsis.com
 
 
 

 

400년전 한산도민이 올린 청원서를 아세요? (daum.net)

유석재 기자입력 2018. 5. 14. 03:07
 
임진왜란 후 겪은 고통 절절히 담아
1623년 한산도 주민 11명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줄 것을 청원한 ‘한산도민 등장(等狀)’. /조완제씨 소장


'옛날의 1000여가구가 점점 흩어져서 300여가구에 지나지 않으니, 애달픈 이 섬의 백성은 삶의 근거를 보존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임진왜란 종전(終戰) 25년 후, 한산대첩의 승전지였던 한산도는 피폐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5년) 1월 한산도 주민 11명이 통제사에게 올린 청원서 '한산도민 등장(等狀·여러 사람이 이름을 써서 관청에 하소연함)'이 발굴됐다.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냈던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최근 임진왜란 때 고성 현령을 지낸 조응도의 후손 조완제씨가 소장한 이 문서를 찾아내 본지에 공개했다.

 

청원서에는 당시 한산도 주민들이 겪고 있던 고통이 절절히 기록돼 있다. 주민들은 한산도의 관아와 내륙 두룡포(지금의 경남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 사이에서 온갖 진상(進上·지방의 토산물 등을 바치는 일)과 요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산도에선 붉은 해삼 6종을 진상하고, 전선(戰船)을 만들 목재를 끌어 운반하고, 강을 굴착하는 일을 했다. 두룡포에서는 생전복과 익힌 전복 6종을 진상하고, 전선 8척을 물로 끌어내는 일에 동원됐다.

통제영에서 치러졌던 무과 별시(別試)의 급제자들도 민폐 요인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며 놀거리를 찾아다녔고, 승려들이 공문을 빙자해 폐단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매년 700~800냥에 이르는 잡다한 세금 징수 역시 백성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 인구가 예전의 30%로 줄어들었다. 청원서는 '제대로 된 절목(지침)을 만들어 백성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호소했고, 문서 끝에서 통제사는 '규정 외의 강제 징수는 엄하게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민간에 전래된 고문서들이 대부분 양반가 문서였던 것과 달리 과중한 세금과 요역에 시달렸던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실상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입력 2018. 3. 29. 16:59

국립경주박물관, 5월 10일까지 특별전
김수흥의 '포석정회고'.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굽이굽이 흐르는 물이 잔을 날랐던 곳이라/ 맑은 개울, 돌에 부딪히며 흘러온다/ 천년 옛터가 여기에 있으니/ 좋은 시절 3월이 돌아왔네"

조선 중기 문신인 퇴우당(退憂堂) 김수흥(1626∼1690)은 '포석정회고'(鮑石亭懷古)라는 시에서 경주 포석정에서 느낀 감흥을 노래했다.

그는 "과객은 전성기를 생각하나 주민은 경애왕을 이야기하네"라며 "슬픈 마음에 오릉을 뒤로하니 허물어진 누대와 연못이구나"라고 읊었다.

경주 포석정은 남산 서쪽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 장소다.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는 곳으로, 927년 경애왕이 연회를 벌이다 후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동남승도. 주사위를 굴려 팔도를 유람하는 놀이.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이 29일 개막한 특별전 '선비, 고도를 읊다 - 조선시대 한시로 본 경주'는 김수흥을 비롯해 조선시대 선비들이 경주를 주제로 쓴 시 40여 편과 여행기 7편으로 엮은 전시다.

보물로 지정된 서책인 '상설고문진보대전'과 '고금운회거요'를 비롯해 '매월당시집', '퇴우당집', '대동여지도', '해동남승도' 등 유물 70여 건이 나온다.

전시는 전통적으로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인 기승전결로 구성됐다.

 

도입부인 기(起)에서는 '한시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시의 의미와 규칙을 설명한다. 승(承)의 주제는 '경주 오는 길'이다. 여행기와 사행록을 바탕으로 경주에 들른 관료나 사신이 잠시 머물렀던 객사를 소개한다.

이어 '전(轉) - 고적 순례'에서는 선비들이 불국사, 봉황대, 괘릉, 첨성대, 이견대 등 신라 유적과 옥산서원, 서악서원을 둘러보고 남긴 시를 조명한다. 결론인 '결(結) - 옛날을 돌아보다' 부분은 성덕대왕신종 등 신라의 옛 물건을 소재로 쓴 시와 여행기로 꾸몄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조선시대 시는 신라 문화유산이 오늘에 이어지기까지의 궤적을 보여준다"며 "봄날에 경주를 찾은 사람이 선비들의 시를 읽고 경주 곳곳을 탐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 기간에 큐레이터가 하는 해설은 목요일 오후 3시에 진행된다. 전시는 5월 10일까지.

psh59@yna.co.kr

 

 

송고시간2018-02-20 09:31

추사가 30년간 고민하고 쓴 글씨 '침계' 보물 된다 | 연합뉴스 (yna.co.kr)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추사 서예 3점 보물 지정 예고

보물로 지정 예고된 추사의 글씨 '침계'.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였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30년간 고민한 끝에 쓴 글씨 '침계'(침<木+岑>溪)가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서예 작품 중 '침계'를 포함한 3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0일 밝혔다.

'침계'는 지난해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이 펴낸 책 '추사명품'(秋史名品)의 표지에 실린 작품이다. 추사가 만년인 1851∼1852년께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침계' 두 글자를 커다랗게 쓰고 왼쪽에 8행에 걸친 발문을 적었다.

'침계'는 조선 후기 문신인 윤정현(1793∼1874)의 호다. 윤정현은 추사가 함경도로 귀양 갔을 때 함경감사를 지낸 인물이다.

발문에 따르면 추사는 일찍이 윤정현으로부터 호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한나라 예서(隷書·중국의 옛 서체인 전서보다 쓰기 쉽도록 고안된 서체)에 '침' 자가 없어서 오랜 고민 끝에 예서와 해서(楷書·정자체)를 합해 썼다.

최 소장은 '추사명품'에서 '침계'에 대해 "웅혼하고 장쾌한 필체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썼다"고 평가했다.

보물로 지정 예고된 추사의 글씨. 왼쪽이 '대팽고회', 오른쪽이 '차호호공'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번에 보물로 함께 지정 예고된 작품은 '대팽고회'(大烹高會)와 '차호호공'(且呼好共) 대련(對聯·문이나 집 입구 양쪽에 거는 대구의 글)이다.

추사가 세상을 뜬 해인 1856년에 완성한 '대팽고회'는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吳宗潛)의 '중추가연'(中秋家宴)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대팽두부과강채/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글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성대한 연회는 부부·아들딸·손자라네"라는 뜻이다.

'차호호공' 대련은 중국 촉나라 예서를 활용해 '차호명월성삼우/호공매화주일산'(且呼明月成三友/好共梅花住一山)이라는 글귀를 쓴 작품이다. 의미는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다.

'대팽고회'는 나이 든 서예가가 꾸밈없는 소박한 필치로 인생관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차호호공'은 자획의 굵기가 다양하고 빠른 붓질로 속도감을 내 운필의 멋을 살린 수작이다.

추사의 글씨 중에는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과 '김정희 예서 대련 호고연경'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김정희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그린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에 각계 의견을 받은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psh59@yna.co.kr

 
 
입력 2017. 6. 15. 05:02

현존 최고본 사시찬요(四時纂要) 발견.."국보급 가능성" (daum.net)

조선 최초 금속활자 계미자로 인쇄..기존 목판본보다 2세기가량 앞서
(예천=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조선 시대 최초 금속활자로 인쇄한 현존 최고본 '사시찬요(농업서적)'가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2017.6.15. duck@yna.co.kr

 

(예천=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현존 최고본(最古本) '사시찬요(四時纂要)'가 발견돼 학계 관심을 끌고 있다.

학계에서는 조선 시대 최초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한 이 책이 국보급 문화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15일 경북 예천군 등에 따르면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BK플러스21사업팀(팀장 남권희 교수)이 최근 용문면 죽림리 남악종택 문화재 목록화 사업을 하던 중 계미자본 사시찬요 1권을 발견했다.

 

이 책은 계미자만의 독특한 서체인 송조체(송나라 서체)로 인쇄했다.

사시찬요는 996년 중국 당나라 때 한악(韓鄂)이 편찬한 농업 서적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도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초간본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1961년 일본에서 발견한 책이 있지만, 1590년 울산에 있던 경상 좌병영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 발견한 책은 이보다 2세기가량 앞선 1403년에서 1420년 사이 계미자로 인쇄한 것이어서 한·중·일을 통틀어 현존 최고본으로 추정한다.

계미자는 태종 3년(1403년) 계미년에 만든 조선 최초 구리활자로 1420년 경자자(庚子字)를 만들 때 모두 녹여 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계미자로 인쇄한 책은 희귀해 낱장만으로도 수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개인 소장 서적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보로 지정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권6(국보 148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권4·5(국보 149호) 등이 계미자본이다.

이 책들이 각각 10장 안팎인 데 비해 경북대 사업팀이 발견한 책은 100장 분량인 데다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국보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예천=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조선 시대 최초 금속활자로 인쇄한 현존 최고본 '사시찬요(농업서적)'가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2017.6.15. duck@yna.co.kr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하고 봄 부분만 2권으로 구성해 '5권 1책' 체계를 갖췄다.

정월부터 섣달까지 매달, 24절기에 필요한 농업 기술과 금기사항, 가축사육 방법, 월령을 어길 경우 생길 수 있는 재앙 등을 담았다.

특이한 점은 1590년 목판본 3월 말 편에 기술한 종목면법(種木綿法:목화재배법)이 계미자본에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농서를 들여와 당시(1590년) 조선 실정에 맞도록 추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업팀은 이 책이 조선 시대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지학 측면에서도 활자 서체 및 조판법 연구 자료로 활용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한편 남악(南嶽)은 임진왜란 전 서애 류성룡과 함께 왜에 통신사로 다녀온 학봉 김성일(1538∼1593) 동생인 김복일(1541∼1591)의 호다.

울산군수, 창원부사, 성균관 사성, 풍기군수 등을 역임한 인물로 선조가 그의 강직한 성품을 높이 사 문헌비고, 성리대전 등 책을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duck@yna.co.kr

 
 
 
조태성입력 2018. 2. 19. 16:30수정 2018. 2. 19. 19:14

벼(禾)는 '으라이쓰' 조선시대 영어 읽기 (daum.net)

지석영의 영어교재 ‘아학편’

복간되며 인기… 재판 찍기로

아학편 첫 장. 한자를 두고 해당되는 영어 단어와 한국어로 발음 표기를 해뒀다. 베리북 제공

 

벼 화(禾)는 Rice, Rice는 ‘으라이쓰’다. 인군 군(君)은 Ruler, Ruler는 ‘으룰러’다. ‘ㄹ’ 발음 앞에 혀를 말면서 한 박자 쉬고 들어가는 느낌을 ‘으’로 표기해뒀다. R 같은 L 발음도 마찬가지다. 다만 R보다 혀를 덜 굴리는 L 발음이 조금 더 강하다. 호수 호(湖)는 Lake, Lake는 ‘을레익크’다. 마찬가지로 폭 복(幅ㆍ지금은 ‘폭’이지만 당시 음가로는 ‘복’)은 Latitude, Latitude는 ‘을나티튜드’라 발음한다.

출판사 베리북이 최근 복간해 내놓은 110년 전 조선시대 영어교재 아학편(兒學編)에 담긴 내용이다.

 

아학편은 원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 유배시절 아이들 한자 공부용으로 편집해 만든 책이다. 중국식 천자문 대신 다산이 별도로 2,000자를 골라 우리 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같은 유학자 특유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시작하지 않고, 천지부모(天地父母) 군신부부(君臣夫婦)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시간이 지나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었다. 이듬해인 1883년에는 미국 문물을 배우기 위해 보빙사가 두 달 여행으로 미국 뉴욕을 다녀왔다. 이후 미국 문물이 유입되면서 영어 교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때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선생이 ‘아학편’에 주목했다. 아학편의 한자에다 영어, 일어, 중국어 표기를 함께 병기한 책을 만들었다. 1908년 출간된 ‘영어교재 아학편’이다. 지석영은 서문에다 “지금 해문(海門)이 크게 열려 서구(西歐)와 아세아(亞細亞)가 교역(交易)하여 우리의 적고 비루함으로 저들의 우수하고 뛰어난 점을 취하여 열강( 强)과 겨누려면 어학(語學)이 필요하다"고 적어뒀다.

아학편 복간본의 반응은 의외로 좋다. 초판 3,000부에 이어 재판을 찍을 예정이다. 베리북 관계자는 “110년 전에도 지금처럼 이렇게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구나 싶기도 하고, 원음을 최대한 살려서 표기한 내용이 재미있기도 해서 독자들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야채→뻬쥐타불..조선시대 영어교재 "지금보다 정확해" (daum.net)

오원석입력 2017. 3. 3. 01:36수정 2017. 3. 3. 18:12
 
지석영이 영어본을 추가한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조선 시대 영어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교재로 알려진 책이 온라인 커뮤니티, 페이스북 등 SNS에서 누리꾼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교재는 한자와 함께 로마자 알파벳과 영어 단어, 발음 등을 교육하고 있다. 지금 교재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한글 발음표기가 눈길을 끌고 있다.

교재는 한자 '나물 채(菜)', '푸성귀 소(蔬)' 등의 영어를 'Vegetable'로 소개하며 한글 발음 표기로 '뻬쥐타불'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자 '나무 목(木)'은 영어로 'Tree'라고 적고 한글 표기로 '투리'라고 가르치는 식이다.

특히 원래 영어의 발음과 최대한 가깝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한글을 표기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벼 화(禾)' 한자를 영어로 'Rice'라고 적으며 한글로 '으라이쓰'라고 표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글 표기로는 영어 알파벳의 'R'을 정확하게 발음할 방법이 없어 '으라'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식 표기인 '라이스'와 다른 구조다.

이밖에 '아이 아(兒)'는 '촤일드', '임금 군(君)'은 '으룰러'라고 표기하고 있다. 다수의 영어 단어가 이처럼 지금은 쓰이지 않는 자음 표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석영이 영어본을 추가한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지석영이 영어본을 추가한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지석영이 영어본을 추가한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이 교재가 알려주는 영어 단어 발음법을 그대로 읽고 따라 해본 누리꾼들은 대체로 "지금보다 낫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베지터블', '라이스' 등 현대식 한글표기와 비교해 영어식 발음에 더 가깝다는 의견이다.

이 교재는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교재의 이름은 '아학편'으로 책의 이름처럼 당시 아동들의 실용한자 교육을 목적으로 집필된 학습서다. 다산 정약용이 쓴 책을 지석영이 편집해 1908년 엮은 것이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 수정 2007-11-02 20:06 등록 2007-11-02 20:06

“유교 문학은 글재주 이상의 사상 담아” (hani.co.kr)

〈우리 고전을 찾아서〉

 

인터뷰 / 〈우리 고전을 찾아서〉펴낸 임형택 교수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지난 3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남긴 원전을 출간하거나 번역 출판해 학계와 대중에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그가 인사동 고서점이나 도서관 서가에서 찾아내 소개함으로써 학계의 관심을 받게 된 옛 학자들도 여럿이다. 현실주의 시정신의 다채로운 성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진명 권헌(1713~1770)이나 개항을 앞둔 시점에서 서양 종교에 맞선 대항 사상 정립에 몰두했던 심대윤(자 진경·1806~1872)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지난 30년 동안 옛 우리 책을 소개한 출판물에 쓴 해제를 묶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우리 고전을 찾아서-한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한길사 펴냄·2만6000원·사진).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1328~96)의 〈목은집〉에서부터 월북 소설가 이태준(1904~?)의 작품 〈해방 전후〉까지 소개됐으니 600여년의 시간격을 두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전들은 일관된 체계에 의해 추려지지는 않았다. “햇빛을 보지 못했던 것들 가운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새로 발굴한 것과 이미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재평가가 필요한 것들이 수록되었지요.” 전자가 권헌의 〈진명집〉, 심대윤의 〈심대윤 전집〉, 노명흠(1713~1775)의 〈동패낙송〉이라면, 후자는 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이다.

그는 특히 몰락한 소론계열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호구지책으로 안성읍내에서 장사를 하며 학문을 닦았던 심대윤에 주목했다. “그는 위기의 시대인 19세기에 서양의 사상적 침투에 맞서 어떻게 사상적으로 대응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의 욕망과 이익추구를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성리학과 완전히 다른 체계이자 근대적 각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전에 이런 생각을 뚜렷이 제기한 이는 없었습니다. 동시대 인물인 다산과는 다른 측면에서 사상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나에게 이로우면 남에게 해로운 것이 이(利)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심대윤의 해답은 “남과 더불어 ‘이’를 취하는 ‘여인동리’”와, “남과 나의 이해를 저울질해서 한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지공지도(至公之道)”였다고 임 교수는 풀었다.

 
고려말서 ‘해방전후’까지 600년 고전 한눈에권헌·심대윤 등 저작 새로 발굴해 소개하며‘열하일기’ ‘목민심서’ 등 알려진 저서 재평가까지“한문학과 우리말문학 경계 허물고 하나로”

그는 권헌에 대해선 “중요한 시인이지만 완전히 사장되어 있었다”며 “리얼리스트로서의 성과가 그분만큼 풍부한 내용을 가진 시인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했다. ‘관북민’과 ‘시노비’와 같은 장편시는 “가난하고 비천한 인생을 인간적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서사적 전향을 생동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재해석에 가장 공을 들인 책은 〈열하일기〉이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생산기술을 도입한다는 북학론적 관점에서 읽혔으나 그가 보기에는 중국을 통한 세계 인식에 더 큰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지원은 당시 시대상황을 ‘어두운 밤’으로 인식하고 천하대세의 전망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연암이 상하 각층 인간 군상의 삶과 행동 양식과 그들 가슴속에 무슨 뜻들을 감추고 있는지 가지가지 수단을 동원해 살펴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연암의 확신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곁들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빼어난 문장가와 올곧은 사상가 가운데 그의 마음을 가장 강렬히 빼앗은 이는 이항복이다. 그는 선조·광해군 사이의 명재상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상을 경륜하면서 학문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융통성도 있으면서 진정한 애국자였지요. 또 ‘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문학가로서는 박지원, 학자로서는 정약용을 첫손으로 꼽았다.

임 교수는 유교적 문학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냥 글재주가 아닙니다. 사상성과 내용성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견해이죠.” 그렇다고 문학의 독자성을 주장한 용재 성현(1439~1504) 같은 학자가 유교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유교적 문학 안에도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유교가 그만큼 폭이 넓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그에게 좋은 사상과 좋은 문장은 한묶음이다. “이태준과 홍명희 같은 분 역시 문장도 명문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생각이 좋았습니다.”

최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는 국문학 연구에서 탈근대·탈민족 관점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임 교수는 강 교수가 제자란 점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민족을 앞세우는 학문 의식을 탈피하는 것은 좋다고 보지만, 통일 과제도 있는 상황에서 내화된 민족의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근대에서 근대까지 또 한문학에서 우리말 문학까지 통일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문학과 우리말 문학의 경계 나누기가 아니라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인간을 쾌락적 향락적인 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가 생각하는 동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 썩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성해야 합니다.” 내년 정년을 맞는 노학자의 염려이자 충언이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불조직지심체요절

[  ]

[네이버 지식백과]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불조직지심체요절

고려 말기의 승려 경한이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개설] 상하 2권.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고, 간략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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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의궤

[  ]

[네이버 지식백과] 의궤 [儀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궤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책. [연원 및 변천] 중국에서 ‘의궤’란 이름을 가진 책은 남북조시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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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의궤

[  ]

[네이버 지식백과] 의궤 [儀軌] (두산백과)

 

의궤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가지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서책이다. 실록 등에도 의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내용의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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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의궤도

[  ]

[네이버 지식백과] 의궤도 [儀軌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궤도

국가 의례의 과정을 기록한 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그림. [개설] 조선시대 국가 의례의 과정을 기록한 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그림을 의궤도(儀軌圖)라 한다. 의궤도라는 단일 명칭이 있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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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

[네이버 지식백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고려 고종(1237~1248)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 [개설] 국보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인사 장경판전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諸)경판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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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의보감

[  ]

[네이버 지식백과] 동의보감 [東醫寶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의보감

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집대성하여 1610년에 저술한 의서. 의학서. [개설] 25권 25책. 1610년(광해군 2)에 완성하여 1613년 내의원에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로 첫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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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성록

[ 錄 ]

[네이버 지식백과] 일성록 [日省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성록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까지 주로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 [개설]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 1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151년간의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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