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입력 2009.05.31 15:58

“몽골 시조 알랑 고아는 고구려 주몽의 딸”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대만에 거주하는 몽골인 사학자 한촐라 교수가 1990년 한국에 도착해 한 말이다. 한촐라 교수의 제자인 박원길 박사는 이를 몽골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몽골비사』에 전해지는 성녀이자 몽골의 시조로 추앙받는 알랑 고아의 아버지가 고구려 건국 시조인 고주몽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알랑 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 코리(Kohri)족을 떠나기로 하고 지지자를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보르칸 산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알랑 고아는 다섯 아들을 낳는다. 이 중 세 아들은 빛의 정령을 받아 출산한다. 고구려의 주몽·유화부인 얘기와 흡사하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몽골·만주·반도 등에 걸친 민족은 동일한 갈래에 속하는 데다 이후 고려·몽골 양국 지배층 간 혼인으로 관계가 깊어져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게렐 주한 몽골 대사도 최근 “몽골과 한국은 모두 북방에서 기원한 기마 유목민족의 후예이고 하늘의 상징인 푸른 반점을 지니고 있다”며 ‘사돈의 나라’라고 강조했다.

몽골 언어는 우리말과 어순은 물론 자음·모음 구조까지 비슷하다. 그래서 몽골인과 한국인은 상대 언어를 빠르게 배운다. 재한몽골학교 관계자는 “몽골인은 모음 발음 하나를 빼고는 한국어 발음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말했다. 최기호 교수는 몽골어·만주어·한국어 등이 같은 계통의 언어(동북아시아어족)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단어도 있다. 김운회 교수에 따르면 ‘눈’이 같고 ‘귀’가 비슷하며, ‘바른쪽으로’를 ‘바른쭉으루’, ‘왼쪽으로’를 ‘준쭉으루’로 발음한다.

또 세 민족은 체질인류학적으로 얼굴과 몸매·골격이 아주 비슷하다.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이 유학생 3000명을 포함해 3만~4만 명에 달하지만 외모에서는 한국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몽골반점이 공통적으로 90% 이상 나타나고, 유전자 염색체 지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설화나 ‘까치가 울면 정다운 손님이 온다’는 말이 몽골에도 있다. 몽골인도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를 한다. 제기차기·공기놀이·씨름 등의 민속놀이 역시 유사하다.

역사적으로 이들 민족의 활동무대는 만주·몽골 대평원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그리고 요(거란족)·금(여진족)·원(몽골족)·청(만주족)은 치열한 민족 경쟁 속에 세워진 제국이다. 이들은 중국에 대등하게 맞서거나 중국을 장기간 지배했다. 이 중 지금까지 독립국가를 유지하는 민족은 한민족과 몽골족뿐이다. 북방민족이 세운 마지막 제국인 청은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 본토와 대만·티베트·위구르를 장악했다. 몽골 전역도 1717년 청 수중에 들어간다. 몽골인은 이를 대평원에서 경쟁하던 만주족에게 지배당한 것이지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나라 때 멸시당하던 한족은 19세기 들어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다시 흥하게 하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되자 청에 복속됐던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은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의 뜻을 이룬 곳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몽골(외몽골)뿐이었다.

티베트와 위구르가 세운 독립국은 중국 공산당의 침공으로 와해됐다. 만주와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은 일본의 지원 아래 만주국과 몽골신장자치국이 들어섰으나 일본 패망과 함께 중국에 점령당했다. 중국은 몽골의 독립을 승인했으나 여전히 ‘몽골은 중국이고 칭기즈칸은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구해우 상임이사는 “중국의 역사 왜곡을 자기 땅을 삼키려는 음모로 보는 몽골이나,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북한 점령을 합리화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한국은 비슷한 처지”라고 말했다.

허귀식 기자

 

 

송고시간2017-02-28 16:48

'칭기즈칸 평전' 출간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칭기즈칸 동상[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1995년 12월31일자에서 지난 1천 년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1162∼1227)을 선정했다.

WP는 당시 칭기즈칸에 대해 "태평양에서 동유럽,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동서문화의 연결을 촉진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가 건설한 대제국은 로마제국보다 두 배 컸고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보다는 4배나 큰 규모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이기도 했다.

중국 베이징대 교수였던 주야오팅(朱耀廷)은 '칭기즈칸 평전'(민음사 펴냄)에서 칭기즈칸을 무엇보다 스스로 노력하며 끊임없이 진보하고 굳세게 항쟁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영웅이 늘 그러하듯 테무친(칭기즈칸의 본명) 역시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겪었다. 아홉 살 때 그의 부친이 독살된 뒤 하루아침에 풀뿌리를 캐고 들쥐를 잡아먹으며 지내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한 달여 만에 부인은 다른 부족에 납치됐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아내를 빼앗은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복수는 그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됐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타타르 부족을 적으로 삼았고 부인을 되찾기 위해 첫 번째 전쟁을 시작했다.

사람을 쓸 때도 주인을 배신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가 있다면 민족과 출신을 묻지 않았고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이나 이전의 적도 과감하게 기용해 인재를 구했다.

서방정벌 역시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됐다. 1219년 칭기즈칸은 무역을 위해 450명 규모의 상단을 조직해 호라즘에 파견한다. 그러나 상단이 호라즘 변방의 오트라르 성(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도착하자 성주인 아날추크(가이르칸)가 상인들을 죽이고 상단의 재물을 빼앗았다.

분노한 칭기즈칸은 사흘 밤낮을 단식하며 '저를 도우시어 저에게 복수할 힘을 달라'고 기도한 뒤 산에서 내려와 서방정벌에 나섰다.

책에는 중국 위주의 시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호라즘 사람들의 행동은 몽골 민족을 무시하고 능욕한 것인 만큼 정벌이 당연하다는 시각도 내비친다.

또 서방정벌에 대해 동방과 서방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을 국면'을 타파했다면서 역사 발전상 필연적인 추세였다고 평가한다.

칭기즈칸이 정벌 과정에서 대량 학살을 하고 야만적인 정복전쟁을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부분만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려는 단편적 인식"이라고 비판한다.

칭기즈칸의 국적에 대해서도 몽골족이 중화 민족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 때문에 칭기즈칸 역시 중국인이라고 주장한다.

책을 번역한 이진복 서울사이버대학 외래교수는 "저자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의 관점 아래 칭기즈칸을 중국인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면서 "책을 읽을 때 칭기즈칸의 생에 전반에 관한 상세한 내용뿐 아니라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정책인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 투영돼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768쪽. 3만5천원.

zitrone@yna.co.kr

 

 

중앙일보 입력 2020.10.24 10:00

'칭기즈칸'이란 말 쓰지 마! 중국은 왜 예민할까 | 중앙일보 (joongang.co.kr)

  "칭기즈칸 전시회? 그렇게 부르지 마. 절대 안 돼!" 

칭기즈칸 동상 [셔터스톡]

 

프랑스 서부 도시 낭트에 있는 낭트 역사박물관(Nantes History Museum) 측은 최근 불쾌한 일을 겪었다.

13세기에 세계를 호령한 몽골 제국 건국자 칭기즈칸(1162년~1227년)을 다룬 전시회를 정성 들여 준비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중국 정부가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중국 측은 "전시회에 '칭기즈칸' '몽골' '제국'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또 전시회 팸플릿과 관련 책자 편집권을 달라고까지 했다.

시진핑 주석 [AP=연합뉴스]

 

중국 네이멍구 박물관(내몽골 박물관)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전시회이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 요구였다. '칭기즈칸 전시회'에서 '칭기즈칸'이란 단어를 빼라니. 또, 몽골 제국의 건국자인데 '몽골'이란 말을 어떻게 지우란 말인가.

낭트 역사박물관은 반발했지만 중국 측은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낭트 박물관은 전시회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검열'을 받고서는 전시회를 진행할 수 없다"며 "스톱"을 외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왜 그랬을까.

지난 9월 내몽골자치구에서 일어난 시위 [AFP=연합뉴스]

 

잠시, 요즘 중국 네이멍구(내몽골자치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자.

지난 9월 네이멍구 주민 수천 명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몽골족(독립국가 몽골의 '몽골인'과 같은 민족이지만 중국 국적)이 살고 있는데, 중국 중앙정부가 중국어 교육을 강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단순한 중국어 교육 강화가 아니었다. 몽골어로 가르치던 초등학교 문학 과목을 앞으로 중국어로 가르치겠다는 방침이었다. 다른 과목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중국 정부가 수십 년째 진행하고 있는 '한족 동화정책'의 일부다. 중국은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기보다는 이들이 한족(중국의 중심 민족)을 따르기를 원한다.

네이멍구에 살고 있는 580만 몽골족은 위기감을 느꼈다. 몽골어가 이런 식으로 점차 사라진다면 몽골 고유의 문화, 나아가 몽골족도 사라질 게 뻔했다. 이들이 폭력적인 진압에도 거리로 나온 이유다.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풍경 [연합뉴스=신화통신]

 

다시 첫 번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같은 맥락에서 중국 정부는 칭기즈칸이 '몽골인'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위대한 중국인'으로 홍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낭트 박물관 측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사실 칭기즈칸을 아예 '중국인'으로 못 박으려 하는 이런 시도는 수년 전부터 있었다. 몽골과 네이멍구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자치구 탄압에 이어 몽골 역사 지우기까지 나선 중국 정부에 세계는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몽골족의 싸움은 단순히 언어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며 "언어를 잃게 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이미 정치적 자유, 고유의 유목 생활방식 등을 빼앗긴 상황에서 또 "문화적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중앙포토]

 

눈길을 끄는 점은, 몽골족을 탄압하고 칭기즈칸이 중국인이란 억지를 부리면서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꿈은 '21세기의 칭기즈칸'이란 점이다. 육해상 실크로드를 재건해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그 야망의 정점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를 이해, 존중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겠다고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 아닐까. 더 디플로맷은 이렇게 꼬집는다.

"실크로드가 번창했던 것은 그 길을 오가는 수많은 문화를 서로 인정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지금처럼 소수민족을 억압한다면 '새로운 실크로드'는 그저 꿈으로 남을 것이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06 2015 

[역사탐험]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월간조선 (chosun.com)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 3대 ‘大武神王’에서 유래, ‘칭기즈 칸’은 ‘震國王’
    즉 ‘발해왕’이라는 의미
⊙ ‘몽골’은 ‘말갈(靺鞨)’, 즉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이라는 의미
⊙ 몽골족의 역사 다룬 《집사》 등에 나오는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발해 武王 때 발해와
    羅唐연합군의 전쟁을 다룬 것
⊙ 칭기즈 칸의 조상 엘 콘은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둘째 아들 일한
⊙ 《칭기스의 서(Da’ftari-Cingiz-nama’)》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황금의 칸’)’은
    金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金幸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쪽)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金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 기사입력 2015.11.13 05:00

터키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 혈통  - 한국NGO신문 (ngonews.kr)

  • 기자명이윤태 기자
[한국NGO신문] 이윤태 기자 = 구리시(시장 박영순)에서 개최된 고구려국제학술대회에서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은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4대 조상이 되고, 고구려 왕족인 대야발의 19대 손이 바로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돼 참석자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7일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이사장 김진만)와 터키이스탄불문화원, (사)한배달이 공동주최한 제2회 한국·터키 고구려국제학술대회에서 20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전원철 박사가 북방민족의 계보 연구를 통해 터키·몽골과 한국이 형제국이라는 학술적 근거를 통해 밝혔다.

특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는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핵심은 12,000km나 멀리 떨어져있는 터키와 한국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인연 때문에 서로 형제국이라고 했는지가 중요하다. 터키인들이 한국인을 아주 가까운 형제라고 하는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터키의 짝사랑에 화답할 때”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터키에서 온 오스만 세르트카야 교수는 “한국어와 터키어는 친척이라고 설명하면서, 돌궐비문에 bökli(뵉클리)라고 새겨진 나라는 ‘맥고리(貊高麗=맥족들이 사는 고구리)’로 한반도보다 10배나 넓은 초원과 사막지대가 주 활동무대였다.”고 설명했다.

(사)한배달 박정학 회장은 일제가 호태왕 비문을 조작해가며 만든 임나일본부(가야=임나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설은 한마디로 허구이며, 일제의 소행으로 보이는 글자가 깨져 없어진 부분을 복원해보면 오히려 “호태왕이 보·기병 5만을 보내 왜국을 유린하자 왜왕이 나와 항복하고는 군(식민지)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는 근거로 <고구려사초·략> 영락제 14년(404) 기록에 왜왕이 인덕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으로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김진만 이사장은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우리의 역사 고구려에 대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표되었고, 터키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되어 향후 한국·터키간의 우호증진 및 학술교류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입력 2006-03-14 03:04업데이트 2009-09-30 09:08

“‘쥬신’이란 민족을 아십니까?”

 

이 생소한 이름의 민족이 한국은 물론 일본, 만주 등 동북아시아 민족들의 공통된 시원(始原)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구려 문제로 다시 불거진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풀어낼 새로운 가설이 등장한 것이다.

김운회(국제통상학) 동양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저서 ‘대쥬신을 찾아서’(전 2권·해냄)에서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문명사적 벨트의 주역이자 공통의 민족적 시원으로서 이들 지역에 금속문명을 전파한 ‘쥬신’이라는 유목민족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삼국지에 숨어 있는 중화주의의 심각성을 파헤친 ‘삼국지 바로 읽기’(2004년)를 통해 중국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과시했던 인물. 그가 이번엔 역사학뿐 아니라 인류학, 신화학, 고고학을 총동원해 ‘대(大)쥬신론’을 주창하고 나선 것.

○“실체는 하나, 이름은 여럿”

중국의 사서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한 동이(東夷)족을 크게 동호(몽골, 거란), 숙신(말갈, 여진), 예맥(고조선, 부여, 고구려)으로 분류해 왔다. 한국학자들은 이 중 예맥족이 한반도 남부의 한(韓)족과 결합해 오늘날의 한민족이 됐다고 설명해 왔다. 최근 중국은 고대사 침탈을 위한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이들 동이족이 모두 중화문명에 흡수됐으므로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김한규(사학) 서강대 교수는 2004년 “동호, 숙신, 예맥은 한민족도 중국의 한족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사”라고 주장해 파문을 낳았다.

이런 가운데 제기된 김운회 교수의 대쥬신론은 “동호, 숙신, 예맥은 물론 한민족과 일본민족까지 동일 원류에서 비롯했으며 이는 중국 한족과는 뚜렷이 차별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강한 논리로 반박한다.

김운회 교수는 먼저 고고학적으로 중국 황허(黃河)문명과 뚜렷이 차별화된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 돌무덤, 고인돌 등의 특징을 지닌 고대문명이 랴오허(遼河) 유역에 존재하다 점차 요동과 한반도,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에 주목했다. 여기에 현재 몽골족, 만주족, 한민족, 일본민족이 유전적으로 매우 밀접하며 이들의 언어도 닮았다는 인류학과 언어학의 연구결과를 접목시켰다. 또 이들 종족의 창세신화와 건국신화에 천손(天孫)신화와 난생(卵生)신화가 섞여 나타나고 명궁(名弓)이 등장하는 특징을 지니며, 이들이 세운 나라 이름에 쇠, 새, 해, 밝음, 아침, 불, 금속 등 서로 연결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들어 있다는 신화학적 분석을 결합시켰다.

그는 이를 종합해 기원전 7세기경 알타이 산맥에서 출원한 고도의 청동기 기술을 갖춘 유목민족이 중국 허베이(河北) 성과 산둥(山東) 성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한족에 쫓겨 만주로 이동했으며 그중 일부는 몽골로 서진하고 일부는 한반도, 일본으로 남진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사서의 기록은 이 종족이 계속 이동함에 따라 시대적, 공간적 차이로 여러 이름으로 혼동해 불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국인을 지역에 따라 조선족, 고려인, 코리안으로 부르는 것처럼.

○코리족 또는 쥬신족의 놀라운 유사성

그럼 이 고대종족의 이름은 왜 쥬신인가. 그 종족명은 크게 코리 계열과 쥬신 계열이 있다. 코리는 이들이 처음 출원한 알타이의 종족명으로 구려, 고리, 고구려, 고려 등으로 전승돼 왔다는 것. 그 어원은 구리 또는 하늘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쥬신은 조선, 숙신, 식신, 직신, 주신 등으로 한자 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발음은 유사한 형태로 계승돼 왔다는 것이다. 쥬신의 어원은 태양, 아침, 산 등이 복합된 것으로 설명된다.

코리는 한민족 계열에 나타나지만 쥬신은 만주와 한반도에 공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좀 더 포괄적이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종족을 주신(珠申)으로 부르다 훗날 ‘문수보살’의 문수의 발음을 빌려 ‘만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만주족이 세운 금과 청의 역사서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 출신의 김함보(金函普)라 밝히고 있음에 주목한다. 금과 청은 이에 따라 자신들의 성(姓)을 금(金)을 뜻하는 아이신자오뤄로 지으면서 그 한자 표기를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새겼다.

김 교수는 이처럼 ‘중국 25사’는 물론 몽골비사와 고서기, 일본서기 등을 샅샅이 뒤져서 한민족 거란족 만주족 선비족 몽골족 일본민족의 공통된 정체성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특히 유목민들이 이동을 할 때 고향의 지명을 갖고 가는 전통 때문에 박달산(보르항 산, 홍산, 태백산), 평양(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 아리수(아무르 강, 압록강, 한강), 서라벌(경주, 서울, 도쿄) 등의 지명이 알타이, 몽골, 한국, 일본에 똑같이 존재한다는 설명은 압권이다.

그는 “중국 한족의 민족의식 수원지가 한(漢)이라면 쥬신족의 수원지는 고구려”라며 “중국에 고구려를 내주면 몽골-만주-한국-일본을 잇는 과거와 미래의 공동체로서의 ‘쥬신’은 사막화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입력 2014.02.12 14:21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 ZUM 뉴스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⑧

드라마 <기황후> 25부에서는 기양의(후일 기황후)가 황제(순제 : 혜종)에게 "저의 복수가 바로 폐하의 복수"라고 하면서 엘테무르(연철)의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후궁(後宮) 간택의 과정에서 "백성들은 황제 폐하의 올바른 정치와 따뜻한 관심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폐하, 모든 음식에 필요한 소금처럼 부디 백성들의 마음에 녹아드는 황은(皇恩)을 베푸소서."라고 아뢴다. 어쩌면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로 보면, 기황후와 순제의 관계가 사실에 가깝다.

 

한국과 몽골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문화적,심리적 공통성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한 관습들도 공유한다. 예컨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살을 먹는다든가(중국과는 분명히 다르다), 식당이나 가게 등에 가면 한국에서는 '이모', '아제'라고 하듯이, 몽골에서는 '형', '동생'이라고 부른다거나(의제가족) 아이들이 오래 살라고 귀할수록 '개똥이' 등으로 이름을 비하하여 부른다거나 한다. 또 유난히 흰색을 많이 사용한다.

 

뉴밀레니엄(2000년) 이후 그 동안 한국과 몽골의 친연성(親緣性)에 대해서는 수많은 저서들이 있었고 방송에서도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새삼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왜 몽골인들이 과거부터 고려인(한국인)들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철저히 밝혀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거의 비슷한 풍습들과 민담, 신화, 민화, 아이들의 놀이 문화, 사고방식, 씨름 문화, 장례 문화 등등의 수많은 공통요소들이 있어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 문화들을 천년 전의 것과도 비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유목민들은 기본적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몽골 초원과 알타이의 흔적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아리랑(Arirang)'만 해도 그렇다.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아리랑은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 정서의 원형질이었다. 한국에는 각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 아리랑은 한국의 마음이요 한국의 역사다. 그러나 이 말의 뿌리에 대한 정설이 없다. 만주어와 관련하여 산(山)의 만주어는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이므로 이 말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퉁구스어(아리라)나 터키어(알리, 알린, 알리라)와도 일치한다. <금사(金史)>에는 만주인들이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 모(某) 산(山)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리라'는 고향(故鄕)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고향, 즉 마음의 고향(Heimat des Herzens)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2005년 한,러 유라시아 문화포럼에서 우실하 교수는 "바이칼 주변의 민족들이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밝혔다. "'아리랑'과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shamanism)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주1)

 

나아가 동호의 대표 민족인 선비족 선조들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카셴둥(嘎仙洞 : 알선동) 동굴에 접하여 서쪽에 있는 강 이름이 아리하(阿里河)이기도 하고, 껀허시(根河市 : Gēnhé Shì)에 있는 아룡산(阿龍山)에도 아리령(阿里嶺)이 있어, '아리랑'은 이 지역과의 관계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두 지역은 모두 현재의 네이멍구자치구(内蒙古自治区) 후룬베이얼시(呼伦贝尔市) 인근에 있는데, 카셴둥은 후룬베이얼 동쪽으로 헤이룽장성에 가까운 어룬춘자치기(鄂伦春自治旗) 아리허진(阿里河镇)의 도시이고 아리령은 동북부, 따싱안령(大兴安岭) 북단 서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유적지와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따라서 '아리랑'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다. 이 말이 알타이와 그에 인접한 몽골 초원과 만주 땅(시베리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홍규 교수(서울대)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유전자와 한국인의 유전자형을 분석한 결과 70% 가량이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유전형을 보였다 … 부계(父系)를 알려주는 Y염색체의 경우 시베리아 원주민은 주로 O형, 남아시아 원주민은 CㆍD형인데 한국인은 O형과 CㆍD형이 섞여있다"며 "한국인은 북방 몽골로이드와 남방 원주민의 피가 섞여 형성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2005 한,러 유라시아 문화포럼)

 

한국과 몽골은 북방 그룹, 한국인의 70%는 북방계

 

동물지리학적 분포도(map of the terrestrial zoogeographic realm)를 보면, 한국은 북방계다. 동물지리학적 분포도는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유전자의 특성에 따라 대별한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동물지리학적 영역과 세계의 지역을 표시한 것인데, 이를 보면 한국은 중국과 달리 북방과 직접적인 연계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은 북방 그룹(Palearctic group)에 속한다.

 

 
▲ 유전자의 특성에 따른 동물지리학적 분포도. (관련 논문 : B.G.Holt et) ⓒ김운회

 

신석기 문화를 보면, 한국인들은 알타이 ― 몽골 ― 대흥안령 ― 아무르강 ― 만주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라인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 : 빗살무늬토기 - comb marked pottery)는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거쳐 한편으로는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지나 두만강 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한반도 서북부로 유입되었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 2001) 95쪽.

 

 
▲ 즐문토기 문화권.(정수일, 2001 : 70) ⓒ김운회

한족(漢族)의 경우 허난성(河南省)의 양샤오앙소(仰韶)에서 최초로 채도(彩陶 : design pottery)가 발굴되었는데 채도는 주로 그리스, 이라크, 이란, 인디아의 하라빠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들의 문화가 남방에서 인디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펄쩍 뛰면서 이를 반박하고 핏대를 올리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유전형질의 측면에서도 이 점은 명확하다. 이홍규 박사(서울대)는 당뇨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에너지 공장이 있고 그 에너지의 양은 그 사람의 유전형질로 결정된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형질은 대대로 유전되는데, 북방인들은 A, C, D, G, Y, Z 형 등이 많고 남방인들은 B, F, M 형 등이 많다고 하는데 이홍규 박사는 한국인들의 70%는 이 북방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방계는 대략 30% 정도 된다. 김욱 교수(단국대)는 1200여 개 이상의 유전 샘플을 조사하여 한국인들의 유전적 특성을 연구 발표하였는데, 남방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대체로 벼농사의 유입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남방의 유전자형이 쌀농사가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는 말이다.(주2)

 

고기석 교수(건국대학교 해부학교실)에 따르면, "한국과 가장 닮은 이들은 카자흐(Казах : 알타이 인근 서몽골) 민족"이라고 한다. 두개골의 구조는 인간의 기원과 동계(同系)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상으로 두개골 구조와 관련된 조사항목은 6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머리뼈의 봉합선이라든가, 구멍의 유무 등으로 두개골 연결부에 있는 구멍은 한국인들 75%가 나타나는데 이 조사를 통해보면 한국인들은 카자흐 민족(동 카자흐스탄) 즉 과거 몽골 서부지역과 동일하고 다음으로는 몽골, 부리야트(Burya-tu : 몽골의 바이칼 호수 인근에 거주) 등과 흡사하다고 한다.(주3)

 

한국과 몽골은 청동기 문화의 주역

 

북방인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었다. 중국의 양쯔강 유역에서 고도의 신석기 문화가 있었지만 그것이 청동기,철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북방에서 수혈(輸血)을 받아서 황하문명이 형성되었다. 그 동안 중국 정부는 일본과 함께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양쯔강 유역에서 청동기 유적들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면 동아시아 지역에 청동기 문화의 수혈이 어떤 방식으로 되었을까? 이것은 청동기의 유적 또는 유물 분포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신석기, 청동기 유적지 분포도.(금성출판사 <사회과부도> 역사 부분.) ⓒ김운회

신석기와 청동기의 유적 분포도를 보면, 청동기 유적의 분포가 즐문토기인의 이동로(한국인들의 이동로)와 거의 일치한다. 청동기 유적은 만리장성의 남쪽 즉 한족(漢族)의 영역에는 은허(殷墟)를 제외하고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완성품밖에 없다. 정수일 교수를 따르면 중국의 안양(安陽) 은허(殷墟) 등지에서 나타나는 청동기는 그 성형법이나 소재, 문양 등을 보건대 이미 상당히 발달한 청동기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라시아 청동기나 서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주4) 즉 은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은나라 쪽으로 수입되었다는 말이다. 만약 은나라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생했다면, 초기 청동기 흔적이나 중간 과정의 형태나 가공품들이 출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나라는 청동기의 최종 소비자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사기>에 "은나라는 오랑캐의 나라(殷曰夷)"라고 하여 은나라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한국인을 표현하는 말인 오랑캐夷로 나타난다.

 

 
▲ 청동기 유적 및 유물 집중 지역.(정수일, 2001 : 123 재구성) ⓒ김운회

청동기 유적 및 유물 집중 지역을 지도 위에 표시해보면, 고조선을 포함한 북방인들은 청동기의 주요 전파자였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 문명의 실질적인 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몽골, 눈 작고 숏다리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눈이 작고 상체가 잘 발달해있는 반면 하체가 짧다. 콧대가 상대적으로 길며, 눈썹이 진하지 않고 입술이 가늘고 콧구멍이 적다(콧구멍이 크면 북만주에서는 폐렴이 걸린다.) 이것이 대체적인 한국인의 모습인데 요즘은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바로 짧은 하체 이른바 '숏다리(short leg)'인데, 이것을 각종 언론에서는 마치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처럼 방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분명히 한국인(알타이人)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Koreans)의 모습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본다.

 

수십 년간 한국인들의 체질, 체형, 얼굴 등을 연구해온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의 특징을 매우 재미있게 묘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무다리'이다. 즉 한국인들의 짧은 허벅지를 '조선무다리' 로 표현했는데 몽골―만주―한반도―일본에 이르는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지역 사람들의 체질(physical constitution)도 대동소이하다.

 
▲ 짧은 허벅지(좌)와 체질 분포(우). 자료 : 조용진(1999 : 85) ⓒ김운회

다리가 짧은 것은 춤을 안정적으로 추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가 세계의 피겨여왕으로 등극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작아진 눈은 원거리를 쉽게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 여성 골프계를 석권하는 요소가 되었다. 양궁(洋弓)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이나 몽골인은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였다.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주5) 현재 한국인의 신체 구조는 시베리아라는 특수한 환경에 철저히 적응할 수 있는 구조로 진화한 것이라 한다. ① 눈目이 작고, 털毛은 적고, ② 콧망울은 작지만, 코의 길이는 상대적으로 길며, ③ 치아는 크고 다리는 짧은데 허벅지 근육은 발달하였고, 두이고(頭耳高)는 세계 최고이며, ④ 미는 힘은 유럽인들의 절반 정도지만 당기는 힘이 강하고, ➄ 시베리아의 눈 속에서 발을 빨리 뺄 수 있도록 발꿈치가 길고, 낮은 온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그래서 한국인들은 비교적 온도가 낮은 상태에서도 잠을 잘 잔다). 시베리아라는 특수한 환경에 철저히 적응할 수 있는 것만 중요한 사안이었으므로 한국인의 얼굴은 남녀 차이가 가장 적다.

 

좀 더 살펴보면, 북방계는 이빨도 큰데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세계에서 이빨이 가장 큰 민족이라고 한다. 따라서 턱도 크다. 이것은 농사나 과일 채취가 불가능하니 고기를 언 채로 씹거나 말려 먹느라 이빨이 커졌고 덩달아 턱도 커진 것이라고 한다. 코와 입술이 작은 것은 코가 길면 코끝이 커져 동상(凍傷)에 걸리기 때문이고 입술도 크면 열(熱) 손실이 많기 때문에 북방계는 입술이 작다고 한다. 또 속눈썹 길면 고드름이 달리니 시베리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북방계는 눈썹이 짧고 연하다.

 

북방계는 정서적으로 주로 우뇌(右腦)가 발달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목과 사냥이 중요한 업무이다 보니, 공간 감각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또 시베리아의 눈 속에서 고립될 경우에도 생존하려면, 분석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판단하여 직관적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른쪽 눈이 큰데, 한국인 가운데 4분의 3이 오른쪽 눈이 크다고 한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몽골인도 대부분 우뇌형인데 명분론(名分論)이 강하다. 우뇌가 극도로 발달한 사람이 바로 샤먼(shaman)이다. 한국인이나 몽골인은 뇌간(腦幹, brain stem)이 약하기 때문에 각성 수준이 낮아 이른바 '냄비근성'이 강하다. 그래서 실질적인 에너지가 약하고 수업 시간에 자주 졸거나 비즈니스도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많이 나타난다.

 

민족 기원에 관한 일본의 연구들

 

일본 학자들의 연구들을 살펴봐도 민족들의 분포 상태를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귀지(ear wax)는 젖은 귀지(습형)와 마른 귀지(건형)가 있는데 그 비율이 한국과 만주, 일본, 몽골 등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간염의 항원(Antigen Type of Hepatitis) 분포도를 봐도,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과 만주 몽골지역, 일본 지역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 귀지의 분포도 尾本 (1986)와 간염의 항원 분포도西岡(1982). ⓒ김운회

한국과 몽골은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왔고 이를 언어적으로 지지하는 이론이 알타이어족설이다. 알타이어족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한국과 몽골이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은 주로 일본과 터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타이어족 이론을 대체할만한 학설은 없다.(주6)

 

산타페 언어연구소(Santa Fe Institute)가 만든 세계 인류 언어진화 기본지도에 따르면, 한국어는 유라시아계(인도유럽어, 우랄어, 알타이어)의 언어이며, 그 가운데서 알타이어에 속한다. 알타이어는 상당히 오래전에 터키어 , 몽골어․한국어 등으로 분화되었고, 다만 특기할 것은 한국어는 일본어와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분화된 시기가 가장 늦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어와 고대 알타이어에는 공통된 말들이 많은데 이것은 원나라와 청나라의 중국 지배에서 보듯이 북방인들이 중국을 점령,통치하는 과정에서 많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 세계 언어의 기본 진화 지도.(산타 페 연구소 자료 재구성) ⓒ김운회

한국어는 일부 농업 관련 단어들을 제외하고는 알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일본의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는 북방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대륙한어(몽골, 만주어) → 반도한어(한국어) → 열도한어(일본어) 등으로 분류하였다. 대부분의 일본어는 한국어를 어근으로 하는데 5천여 개의 유사한 단어가 있다고 한다. 대륙한어는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반도한어 → 열도 한어가 되었다는 것이다.(주7)

 

한국어는 원알타이어(Proto Altaic language)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말 가운데 순수한 고유어들은 대개는 알타이어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벼농사에 관한 말들을 제외하고 대개의 지형이나 각종 고유 동사, 형용사들은 알타이어를 기원으로 하는 말들이 많다. 가령 '나라'로 발전한 어휘인 골, 굴 등이라든가 한국인들의 나라 이름과 직접 관련이 있는 구리(까우리, 꾸리), 왕(king), 곰(bear), 검다(black) 등의 어휘인 곰, 감, 검 등은 알타이어다. 이 부분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비교언어학자인 세르게이 스타로스틴(Серге́й Анато́льевич Ста́ростин, 1953~2005) 박사의 연구를 통하여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주8)

 

 
▲ 한어의 영역지도. 시미즈 기요시, 박명미(2004) ⓒ김운회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보면, 한국말의 '불(fire)', 새벽을 의미하는 한국 고대어 '배', '태우다(burn)', 뿌리(root), 빨갛다(red), 볕 또는 빛(light), 별(star), 벼리(그물의 중심) 등은 대부분 원알타이어(Proto-Altaic)와 일치한다. 특히 한국에서 넓은 평원(field, plain)을 의미하는 '벌平原'은 원알타이어인 p`ā̀là 팔라(의미 : field, level ground), 만주어의 pāla-n팔란, 일본어의 pàra파라̀ 등과 거의 일치한다.(주9)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국어와 알타이어(한국어,일본어,만주어,몽골어,터키어)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어에는 성조(聲調)가 있는데 알타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성조가 있거나 복잡한 언어들은 대부분 남반구의 더운 나라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중국문화는 한국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만리장성 이북의 언어들은 현대의 중국어와 같은 현란한 성조가 없다.

 

 
▲ 성조 언어가 나타나는 지역. (이홍규(2012) <인류의 기원과 한국인의 형성>, 한국몽골학회(2012, 159)) ⓒ김운회

그렇다면 알타이를 기점으로 하여 한반도 일본에 이르는 이 민족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은 없다. 필자는 그동안 민족의 이동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서 알타이人 또는 쥬신(Jushin 또는 Jusin)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한국인(Korean)이라는 말보다는 한국인들(Koreans)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점도 지적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말은 '가라' 또는 '가야'와 같이 '칸(한)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에 이 말은 보통명사로 굳이 한반도에서만 사용해온 용어가 아니라 몽골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 말이기 때문이다.(주10)

 

알타이와 몽골 초원은 한국인들의 마음의 고향

알타이는 영원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다. 알타이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운 <콩쥐팥쥐>, <우렁각시>, <혹부리영감>,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등의 원고향이다. 헝가리 평원과 극동지역에서 크게 원을 그리면 그 원은 알타이 산에서 만나게 된다. 알타이와 몽골 초원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어머니 대지이며 한국인들의 문화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한국인들은 하늘에서 큰 나무를 타고 알타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늘과 우리를 이어주는 큰새, 태양의 새 삼족오(三足烏) 까마귀, 사슴, 나무, 산, 황금을 우리는 신성시하는 것이다.

 

기마민족들은 큰 새, 큰 나무, 사슴 등의 세 가지의 상징이 있다. 사슴은 대지(good earth)를, 자작나무는 세계의 축으로 천상과 지상을 잇는 동아줄을 의미한다. 알타이人들은 하늘로부터 이 나무를 타고 산으로 내려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큰새는 하늘의 사신이니 알타이人들이 죽으면, 이 새를 따라 다시 칠성님(북두칠성) 즉 하늘로 돌아간다. 이 세 가지의 상징이 황금으로 통합되어 영원한 형상을 가진 것이 바로 신라의 금관(金冠)이다. 이것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한다.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기마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다.(주11)

 

'알타이人의 아버지 탄자강'은 황금 개구리왕금와왕(金蛙王) 탄자강이 알타이人의 시조로 나오는 설화다. 그런데 이 금와왕은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분이다. 즉 부여와 고구려가 바로 이 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주12)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가 되는 나라는 고리(槀離 : 까우리)국 즉 원 코리아(Proto-Korea)로 기록상 최초로 나타나는 코리어(Korea)이다. 따라서 고리국은 알타이 지방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한국(Korea)은 바로 알타이라는 말이다.

 

알타이의 최고봉인 벨루카 봉으로 가는 길은 한국의 성황당과 흡사한 <세르게>(몽골의 오웨)가 곳곳에 있다. 산에서 흐르는 강에는 돌을 쌓아둔 것도 많아서 한국의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벨루카는 "언제 어디서나 정상의 하얀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태백산(太白山)이요 장백산(長白山)이다. 그러니까 알타이산은 한국인들의 제1 주산이고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간 것이 한반도 북부의 장백산(백두산)이다. 필자는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욕설에 가까운 말이니 사용하지 말고 장백산은 원래는 만주인들의 용어였으나 현재는 중국인들의 용어로 굳어진 관계로 태백산(太白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한 바 있다.(주13)

 

원래 알타이는 몽골의 영역이다. 현재 알타이 지역은 몽골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맞닿은 지역이다. 카자흐人들도 서부 몽골인인데, 세월이 흘러 카자흐人은 투르크와 몽골의 중간쯤 되었다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 이 지역에 아사달(阿斯達)이라는 말이 살아있다. 알타이어에는 알타이 시라(sira 또는 tēga : 山의 뜻), 알탄시라, 알탄테가, 아사타라 등의 말이 살아있는데 이 말은 한국인을 나타내는 아사달 (주14) 등과 직접 관련이 있다. 다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사달이라는 말의 문헌적 연계가 고대 수필집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관련 정사(正史) 문헌을 찾아내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 알타이 지역과 알타이 풍경. ⓒ김운회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현재 수도는 아스타나(Astana)인데 이 말은 아사달(아스타라)와 같은 의미다. 즉 아사달은 한국인들의 최초의 수도로 기록된 곳으로 그 의미는 '태양이 비치는 밝은 벌판(또는 높지 않은 산)'으로 '도읍지(Capital)' 또는 '신성한 땅(Holy City)'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알타이어로 볼 때, 아스(아사)는 '밝게 비치는(불타는 : lightly burning)', 타라(타르)는 '약간의 언덕지역 또는 낮은 산'을 의미한다.

 

이상을 보면, 한국과 몽골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부정할 수 없고 현대에서도 한국과 몽골이 특히 가까운 것은 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려시대 집중적으로 한국과 몽골의 혈연이 융합된 것이 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본문 주석

 

(주1) 연합뉴스 : 2005.08.14

(주2) KBS 1TV 2004 <위대한 여정 한국어> 제1부

(주3) 카자흐민족은 투르크의 일파로 알타이, 카자흐스탄, 중국 서부에 거주한다 ☞ 관련 자료 : KBS 몽골리안 루트 6 황금가지(2001년 2월 방영)

(주4)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2002) 70쪽.

(주5) 이하의 서술은 조용진 <얼굴> (사계절, 1999) 참고. 또 위의 내용의 일부는 필자가 조용진 선생으로부터 직접 인터뷰한 내용임.

(주6) 이성규 「광물이름의 비교를 통한 알타이어족 분화시기 연구」<몽골학 27호> (한국몽골학회, 2010)

(주7) 시미즈기요시․박명미 <아나타(あなた)는 한국인> (정신세계사 : 2004)

(주8) 세르게이 스타로스틴(러시아 주립대학 인문학 연구소 소장) 박사는 러시아 비교언어학파의 수장으로 인간 언어의 진화를 연구한 바벨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안타깝게도 2005년 심장마비로 급서하였다. 인터넷상에서 바벨프로젝트인 스타로스틴 DB를 볼 수 있다. 바벨 프로젝트 DB 중 알타이 계열어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http://starling.rinet.ru → Click here to start(바벨탑 사진 하단) → All Databases → Altaic etymology (Compiled by Sergei Starostin)에서 view |query | description 가운데 query 를 클릭 → View All Records

(주9) 여명기의 한국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많이 등장하는 말로 조선, 쥬신, 숙신 등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맥(貊), 박(亳), 발(發), 백(白), 불(不) 등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 말들은 '불(fire : 火)'을 의미하거나 '밝다(light)', 홍익인간(弘益人間) 등의 의미로 태양(Sun) 또는 하늘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표현하는 말이고, 이것이 민족의 이름으로 정착되어간 것이다. 부여(夫餘)라는 말도 이 말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에 있어서 조선(朝鮮)이라는 말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스타로스틴 DB로 알 수 있다.

(주10)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2>(해냄, 2006) 20장. 환국,칸국,한국 참조

(주11) 이한상 <황금의 나라 신라>(김영사 : 2004) 49쪽.

(주12)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날 북방에 고리(槀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三國志> 魏書 扶餘傳 주석)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주13)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고려 성종 때 백두산 첫 기록, 만주족은 '장백산'」<중앙 SUNDAY> 2010.8.8 참고.

(주14) 스타로스틴 DB로 보면 Proto-퉁구스만주어로박(bag)은 white, shining, clear (of sky, weather) 등을 의미하고 한국어의 '밝( : 밝다)'에 해당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발(發), 맥(貊), 또는 단(檀) 등으로 나나타고 있는데, 이 말은 샤먼을 의미하는 박시(Baqsi)와 연계되어있다. 따라서 發조선이란 貊조선, 檀君조선이라는 말과도 큰 차이가 없다. 다만 檀은 박달나무와는 큰 상관이 없고 '밝달' 또는 '배달(태양이 비치는산 또는 태양족)'을 표현하는 말이다. "bright, to shine"의 의미로 Proto 알타이는 먈릭 mi̯ali(-k`V)이고 투르크어는 밝 bAlk 몽골어는 멜 mel 만주 퉁구스어는 먀ㄹmia(l)이고 한국어에서는 맑다 mằrk에서의 '맑'과 같다. 결국 '맥'과 '밝'은 서로 호환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기자 : 김운회 동양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12.10.20 00:02 업데이트 2012.10.20 11:17

“몽골은 한국과 4촌 … 고구려 첫 도읍도 몽골에 있었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오른쪽)이 지난 6일 대학 체육관서 종이문화재단과 함께 개최한 ‘세계평화 기원 종이비행기 날리기’ 행사서 몽골 어린이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고 있다. [사진 종이문화재단]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성산인 자이슨 자락. 현지인의 존경을 받는 한 한국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이다.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불렸던 의사 이태준(1883~1921)을 기리는 곳이다.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의학전문(연세대의 전신) 제2회 졸업생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박사의 권유로 1914년 몽골로 들어갔다. 그는 몽골 환자들을 치료하며 독립운동을 돕는다. 그러던 중 1921년 몽골을 삼키려던 일본군과 손잡은 백러시아군에 체포돼 38세로 자이슨 자락에서 생애를 마친다.

 묻혀 있던 이태준 열사의 존재를 찾아내고 이런 기념공원을 만든 주역 중 한 명이 최기호(70)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이다. 최 총장은 “오지의 병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이라며 “동시대에 활약한 성자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의인”이라고 말했다. 이태준의 별명이 ‘몽골의 슈바이처’다. 최 총장은 “몽골의 비밀 기록을 확인해 그의 존재와 활약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몽골 정부가 제공한 땅에 연세대가 비용을 대 2000년 7월 묘비 제막식을 했다. 당시 기념공원 일대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도시의 팽창과 함께 노른자위 땅이 됐다. 한때 땅을 돌려달라는 요구가 몽골 당국에서 나왔다. 최 총장은 “도시에는 공원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했더니 더 이상 그런 말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약 2000㎞ 떨어진 몽골. 하지만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던 나라다. 냉전과 남북 분단 때문이다. 남한 땅은 섬 모양을 하고 있다. 북으로는 갈 수 없고 동·서·남 3면의 바다를 통해서만 외부와 교류하는 나라가 됐다. 최 총장에게도 몽골은 먼 땅이었다. 그는 “90년 몽골에 처음 갔을 때 홍콩과 베이징을 경유해 3일 넘게 걸렸다”며 “중국 항공사의 비행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최 총장이 몽골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어와 만주어·몽골어·일본어 등 주변 언어 간 관계를 연구하면서다. 30년 전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몽골학과를 수료했다. 하지만 냉전의 벽은 적성국가 몽골을 가볼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길이 뚫린 것은 한·몽 수교가 이뤄진 90년이다. 지금은 직항로가 열리고 4만여 명의 몽골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몽골인만 2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약 300만 명)의 10% 가까운 몽골인이 한국 생활을 체험했다는 말이 된다.

최기호 울란바타르대학 총장은 “한국과 몽골은 언어·인류학 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말했다.

 최 총장은 학문적으로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고려시대 ‘청산별곡’에서 그는 몽골의 흔적을 읽는다. 몽골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고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태를 고려인 원감국사(圓監國師)가 표현한 작품이란 주장이다. 특히 후렴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를 몽골어로 해석해 보여줬다. 그 뜻은 ‘이기자 이기자 이긴다 이기리라 이겨’다.

 우리말에는 많은 몽골어 잔재가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부산의 자갈치 시장. 과거 이 곳이 자갈밭이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지만 최 총장의 해석은 다르다. 물고기를 뜻하는 몽골어 ‘자가스’에 직업을 뜻하는 몽골어 ‘치’가 합성된 단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갈치 시장은 ‘물고기를 파는(잡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쯤 된다. 최 총장은 ‘한참을 가다’는 말의 어원도 몽골의 역참제도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몽골제국이 정비한 역참제도에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약 40㎞)가 ‘한 참’이다. 이게 먼 거리여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변했다.

 몽골이 말을 키웠던 제주도의 지명에서 몽골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1273년 삼별초가 평정된 뒤 몽골 관부가 설치된 곳이다. 1276년 8월 몽골 말 160마리를 제주도로 가져와 수산평(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했다. 제주도의 ‘조랑말’ 명칭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조로모로’ 주법이란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몽골학회 박원길 회장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말에게 가장 치명적인 설사병 치료제로 몽골 초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약용식물도 가져왔다. 수산평 근처에서 자라는 피뿌리풀이다.

 최 총장은 “제주도 지명에 많은 ‘오름’은 몽골어로 ‘산’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산굼부리’ 역시 ‘가운데가 아름답게 깊이 파인 비탈산’이라는 몽골어에 유래했다고 본다. ‘비바리’는 ‘작다(비)’와 ‘며느리(바리)’가 결합한 몽골어다. 제주도에서는 이 말이 처녀를 뜻한다. 한라산도 몽골어로는 ‘큰 호수가 있는 산’쯤으로 풀이된다.

 최 총장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첫 도읍이 동(東)몽골 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마리는 올해로 서거한 지 1600년이 된 광개토대왕의 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대왕 서거 2년 뒤인 414년에 세웠다. 비문의 첫 머리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의 행적으로 시작한다. 연구 초점은 바로 추모왕이다. 12세기 중엽 편찬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주몽(朱蒙)’과 같은 인물이다. 13세기 말의 삼국유사에서도 추모왕은 주몽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주몽·추몽·중모·도모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최 총장은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추모’가 당연히 가장 정확하고, 나머지는 이를 다른 한자로 옮긴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추모’는 무슨 뜻인가. 최 총장은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인 데 착안해 ‘샛별(동명성·금성)’이란 뜻의 몽골계 단어인 ‘촐몽’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본다.

 최 총장이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추모왕이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게 됐다는 비문 대목이다. 추모왕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부여의 대소로부터 도망쳐 후일을 도모하라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따른다. 엄리대수는 삼국사기에서 ‘엄사수’, 삼국유사에선 ‘엄수(淹水)’다. 최 총장은 ‘엄리’가 강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어근이고, ‘대수’가 ‘큰 강물’이란 뜻이므로 엄니는 ‘아무르(아무+르)’라는 강 이름이라고 풀이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넌 뒤 비류곡 홀본(忽本)에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중국사서인 위서는 홀본이 아니라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기록했다. 사서들은 비류곡을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지형으로 묘사했다. 몽골어나 여진어로 ‘모드’가 ‘나무’이므로 모둔곡은 바로 ‘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최 총장의 주장이다. 동몽골 부이르노르 할힌골에는 끝없는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산이 있다. 최 총장은 이 할힌골이 홀승골이라고 본다. 그는 92년부터 수차례 할힌골 부이르노르와 다리강가 일대를 답사했다. 한국의 시골 주거지역에서 자라는 비름나물을 비롯해 초원에서 보기 어려운 풀들이 자라고 있는 지역이었다. 조개묻이 세 곳도 골짜기에서 발견됐다. 유목민이 먹지 않는 조개를 잡아먹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성터나 석인상도 확인됐다. 또 몽골 여인과 고구려 여인이 초원에서 만나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는 전승설화가 채취됐다. 최 총장이 펴는 주장에 이론이 없을 수 없다. 초기 고구려의 위치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가 동몽골 땅에서 나라를 열었고, 지금도 언어·인류학적으로 몽골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확신한다. 그는 “일본이 한국과 8촌쯤 된다면 몽골은 4촌뻘”이라고 말했다.

 그가 2년 전부터 총장을 맡고 있는 울란바타르대학에는 몽골인 3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 8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한국어과도 설치돼 있다. 학생들은 몽골어와 어순이 같은 한국어를 비교적 쉽게 익힌다고 한다. 최 총장은 “한·몽 교류와 협력, 몽골의 발전에 이바지할 몽골 청년들을 키운다는 보람으로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몽고 vs 몽골=몽고(蒙古)와 몽골(Mongol)은 한국인에게는 그게 그거 같다. 하지만 몽골인에게 몽고는 치욕의 단어다. 중국인이 몽골을 비하해 붙인 나라 이름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풀면 ‘몽매하고 고루하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런 의미 차이를 모르는 많은 한국인이 몽골과 몽골인을 몽고와 몽고인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네이멍구(내몽고)’처럼 여전히 몽골을 몽고로 부른다. 고려는 몽골 치하에서 독자적인 왕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제국의 간섭은 많았으되 외형상 독립국의 지위는 잃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의 말로와는 대조를 이룬다.

 

 

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7/12 [18:13]

유라시아 경영한 한국.고구려 후예 몽골: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중앙선데이 입력 2017.09.10 00:02 업데이트 2017.09.10 12:02

아시아가 서구 지성 발전에 큰 역할, ‘종교의 자유’ 가치 칭기즈칸서 유래 | 중앙일보 (joongang.co.kr)

김환영 기자 

[김환영의 지식 톡톡톡] 몽골이 아끼는 칭기즈칸 전문가 잭 웨더퍼드

칭기즈칸(1162년께~1227년, 재위 1206~27)은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위대한 정복자이지만, 그에겐 ‘학살자’ 이미지도 있다. 문화인류학자인 잭 웨더퍼드 매켈리스터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평등, 신앙의 자유, 관용, 다문화주의 같은 보편가치를 가장 먼저 실천한 역사적 인물이다. 웨더퍼드 교수는 세계적인 칭기즈칸 전문가다. 2007년 몽골 최고 훈장을 받았다. 몽골 정부는 2012년 칭기즈칸 탄생 85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행사를 거행했는데 전국의 신성한 장소에서 웨더퍼드 교수가 지은 책을 녹음한 것을 틀었다. 그의 칭기즈칸 연구 저작은 세계 2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최근 웨더퍼드 교수의 『칭기스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가 우리말로 출간됐다. 이 책은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의 뿌리가 칭기즈칸이라고 주장한다. 의외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페티 드라크루아가 쓴 칭기즈칸 전기(1710)는 18세기 식민지 시대 미국의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도 이 책의 애독자였다. 칭기즈칸이 오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웨더퍼드 교수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당신은 칭기즈칸이 종교개혁·르네상스·미국혁명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통념과 달라 믿기 힘들다. 어떻게 독자들을 설득할 것인가.“많은 학자조차 아시아가 서구의 경제적·정치적·지성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목표는 서구 가치의 핵심이 아시아에서 유래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연구를 통해 진정으로 믿게 된 것들을 제시할 뿐이다.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겠다. 내 결론에 동의할 수도, 나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칭기즈칸은 무엇을 믿었나. 샤머니즘? 애니미즘? 하늘?“아홉 살 정도 됐을 때 그의 식구들은 씨족으로부터 추방됐다. 조상을 섬기는 씨족 제사(祭祀)에 참가할 수 없게 된 칭기즈칸은 자신만의 영적인 행로를 스스로 발견해야 했다. 젊었을 때 칭기즈칸은 그가 살던 곳의 산신(山神)을 믿었다. 나이가 좀 들어서는 ‘어머니 지신(地神)’과 ‘아버지 천신(天神)’을 믿었다. 지도자가 된 후에는 무당들을 활용하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무당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말년에는 법치를 하늘(天·Heaven)의 뜻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관점은 계속 변했다. 칭기즈칸은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제도화했다면 그가 남긴 제국이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칭기즈칸이 바란 것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강한 법으로 통치되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마다 선(善)을 향한 고유의 길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교는 본래의 도(道)에서 벗어나 사람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고 봤다. 그에게는 법이 모든 종교 위에 놓였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법체제에 집중하는 것이었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는 게 아니었다.”  
기독교·불교·이슬람 등 당시 몽골제국 종교에 대한 칭기즈칸의 관점은.“그는 거의 모든 종교가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며느리로는 기독교인을 선호했다. 손주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기독교 여성이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봤다. 행정에는 무슬림을 발탁했다. 숫자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의 손자들은 고려 승려들의 궁술, 소림사 승려들의 무술 등 불교 승려들의 뛰어난 전투 능력에 주목했다. 한때 도교에 심취해 도교에 특혜를 베풀었다. 결국엔 지신(地神)과 천신(天神)만 믿었다. 칭기즈칸이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종교는 유교였다. 유교에서 그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유교 훈련을 받은 관리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의 결론은 간단했다. 만약 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릴 줄 알았다면 몽골이 그토록 쉽게 중국을 정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어떻게 종교를 활용했는가.“무엇보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행동가였다. 모든 종교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복 활동을 할 때에는 그의 모든 적들이 종교 간, 종파 간 갈등으로 내부적으로 분열됐다는 점을 파악했다. 적들의 종교 분열을 이용해 내 편을 만들었다. 힘으로만 제국을 건설하고 다스릴 수는 없었다. 10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백만 대군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적들 내부의 종족·언어·종교 갈등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평화 시기에도 종교를 이용했다. 종교 간 갈등을 부추겨 종교 간 세력균형과 조화를 유지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기미가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죽였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후원했다. 백성의 생각과 행동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왕들이 아니라 사제들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제국을 건설한 후에는 종교를 후원했다는 점에서 칭기즈칸과 가장 비슷한 역사적 인물은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운 아소카왕(재위 기원전 268~232년)인가.“아소카왕의 경우엔 모든 종교를 후원했지만 불교를 선호했다.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기원전 590년께~529년께)는 모든 종교에 자유를 주고 모든 종교를 후원했다. 칭기즈칸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관념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는 자유가 종교가 아니라 개인에게 귀속된다고 인식했다. 각 개인은 자신이 믿을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는 여러 개의 종교를 한꺼번에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 누구도 타인에게 종교를 믿거나 믿지 못하게 강요할 수 없다고 봤다. 이러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로 보면 칭기즈칸은 이전의 통치자들과 다른 매우 ‘근대적인 사상가’였다.”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나.“칭기즈칸에게 정치는 종교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궁극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대상은 사제나 승려가 아니라 통치자라고 가르쳤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인기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미국인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제국 건설이 꿈이었나.“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분투하던 미국 사람들은 유럽 바깥에서 영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칭기즈칸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미국이 몽골제국 같은 세계적인 제국을 언젠가 건설할 것이라는 관념이 없었다. 미국인들이 칭기즈칸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베낀 것은 개인의 종교적 자유다.”
몽골제국과 고려의 관계에서 어떤 특이점이 발견되는가.“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힘든 싸움을 벌였지만, 이내 몽골과 고려 사이에 특별한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몽골인들은 중국인 등 다른 종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고려 왕실과 결혼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했다. 몽골 사람들은 제지술, 조선술, 항해술, 도자기 제조법과 같은 고려인들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그 어느 나라보다 더 고려를 존경했다.”
칭기즈칸이 유럽과 미국에 남긴 유산이 관용의 정신이라면, 아시아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몽골제국의 가장 큰 기여는 아시아의 지도를 바꿔 놓은 것이다. 그들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했다. 러시아에 미친 영향도 마찬가지다. 몽골인들이 일본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몽골의 위협은 일본으로 하여금 단일 민족국가를 향한 길로 이끌었다. 또한 몽골 시대는 고려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적·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을 보다 깊이 의식하게 만들었다. 몽골시대 고려인들은 강대국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능력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결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외부로부터 들여와 흡수하는 능력 말이다.”
칭기즈칸은 야만과 문명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모든 시대는 야만과 문명의 혼합물이다. 문명이 성장하고 더 강대해지면 필연적으로 보다 야만적으로 변한다. 문명화된 독일인들이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다. 그 어떤 야만인보다 악독한 학살자가 됐다. 일본은 칭기즈칸보다 훨씬 끔찍한 야만성을 분출했다. 미국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일본인 민간인을 타깃으로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 우리는 야만인들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우리 내부의 야만적인 본성이 튀어나온다. 소위 ‘야만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들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칭기즈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대부분의 제국이나 위대한 나라는 비전을 가지고 건국된다. 시간이 흐르면 비전이 뿌옇게 되었다가 결국에는 사라진다. 칭기즈칸의 후예들 또한 비전을 상실했다. 그저 바라는 게 재물과 권력을 누리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칭기즈칸은 정치적인 이념이나 종교에 휘둘리지 않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문제들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통합된 세계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오늘날 정치지도자·종교지도자들은 이념으로 넘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는 150여 년간 민족들과 종교들이 평화를 유지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 오늘날에는 그런 평화를 달성할 수 없는지 묻기 위해서다.”
한국 독자들에게 강조할 게 있다면.“몽골제국 시대에 왕실 간 결혼 때문에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불렸다. 이제 한국은 몽골에 ‘형(兄)’이 됐다. 오늘날 몽골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한국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국 TV프로·음식·음악·대중문화를 즐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은 몽골인의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몽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한국과 몽골 사이의 역사적 고리와, 한국이 몽골의 ‘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다.”

김환영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김민정기자입력 2013. 1. 4. 17:11수정 2013. 1. 4. 17:11

[책과세상] 동서교류 시대 연 몽골제국의 힘은 실용주의 (daum.net)

■몽골족의 역사(데이비드 O. 모건 지음, 모노그래프 펴냄)

군대조직 십진법 체계로 일원화하고 통치 도움된다면 어떤 제도든 수용중앙아시아·유럽 등 하나로 아울러 동·서방 서로의 존재 인식 계기 마련

 

몽골제국은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를 거느렸다.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부족을 지배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의 장엄한 역사도 시작됐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역시 기세를 이어가며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러시아·동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몽골제국의 손아귀에 넣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모건 위스콘신대 역사학과 명예교수는 몽골제국의 이 같은 역사에 주목한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이 어떻게 건설되고 통치됐는지 몽골 제국의 발자취를 충실히 더듬어 간다. 중국 측 사료는 물론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러시아 등 중동과 유럽 지역 사료와 논문을 폭넓게 활용했다. 침략자 혹은 약탈자라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이 어떻게 국가를 조직하고 세계를 정복해 통치를 실현했는지,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화와 그 영향들은 무엇인지 몽골제국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책에는 군사 조직과 통신 체계 등 몽골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세부적으로 설명돼 있다. 몽골제국의 군대는 간단하고 획일적인 체계를 갖추기 위해 십진법 체계에 따라 10명·100명·1,000명·1만 명 단위로 조직됐다. 이 중 1만 명으로 구성된'투멘'이 가장 주요한 전투 단위였다고 분석한다. 몽골제국의 통신체계인'얌'(일종의 역참 제도)에 대해서도 설명을 곁들인다. 저자는 또"몽골족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실용주의자였다"고 풀이한다. 모건 교수는"몽골족은 정부의 효율적 운영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어떤 제도든 채택하고 누구라도 발탁했다"면서 모든 것을 조합해 전혀 다른 이질적 집합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는 것을 특유의'몽골적' 색채로 분석했다.

저자는 몽골제국의 역사를 좀 더 확장해 거대한 육상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도 조명한다. 몽골제국이 세계사에 남긴 영향은 중요하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유럽 등에서 개별적으로 역사가 진행됐다. 저자는 이 지역을 몽골제국이 하나로 아우르면서'광범한 교류'의 시대를 열었다고 풀이한다."몽골족이 지배한 아시아에 다양한 형태로 유럽인의 여행이 크게 늘어나면서 확고하게 굳어진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관념에 손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유럽에서 몽골지역으로 왔던 선교사 카르피니와 뤼브룩,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온 마르코 폴로, 북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인도, 중국으로 건너 왔던 이븐 바투타 등은 모두 몽골 제국이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이 같은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은 동방과 서방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가 됐고, 동서 교류가 확대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15세기 신대륙 발견으로'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콜럼버스가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여러 번 읽으면서 동방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는 사실 역시 몽골제국의 여파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는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책은 이처럼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인 몽골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물론 몽골 제국 역사 연구의 특징과 동향 등을 잘 버무린 개론서에 가깝다. 1986년 초판이 나온 이후 1990년 보급판이, 2007년에는 개정판이 발간됐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몽골 제국사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 중인 권용철 씨가 2007년 개정판을 우리말로 옮겼다. 2만 2,000원.

김민정기자 jeong@sed.co.kr

 

 

입력2012.12.07 19:14

몽골 제국은 기후 변화의 승리자? - 아시아경제 (asiae.co.kr)

김재연기자

[아시아경제 김재연 기자]동서양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의 몽골제국도 기후 변화로 생겨났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최신호(12월 8일)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의 에이미 헤슬박사와 콜롬비아대학의 네일 페더슨 박사의 연구를 인용해 이같은 주장을 소개했다.
 
연구진은 몽골제국의 정복활동이 한창이던 1208년부터 1231년 사이 나이테 자료를 조사한 결과 이 시기의 몽골이 다른 때보다 습하고 온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지구 물리 학회 학술모임에서 발표했다.

연구진은 온화한 기후로 인한 목초지의 증가가 칭기즈칸의 위력적인 몽골 기마병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목초지 증가로 말이 늘어나면서 기마병을 쓰기 위한 최적의 입지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나친 바타비레그 몽골 국립종합대학 생물학부 임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도 기후가 제국의 몰락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팀은 동물들의 배설물과 호수 등을 조사해 실제로 그 시기에 동물들의 폭발적으로 늘어났는지 조사하고 있다. 연구팀은 6~9세기의 돌궐제국과 위그루족도 몽골과 비슷하게 기후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기후변화가 나라와 제국의 흥망 성쇠에 종종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며 로마 제국 부터 마야제국의 붕괴, 프랑스 앙시아레짐의 붕괴도 기후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전했다.

김재연 기자 ukebida@

 

 

송고시간2012-08-30 11:13

"몽골제국을 유지한 건 칭기즈칸의 딸들이었다"'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몽골인의 시각으로 쓴 역사서 '몽골비사'(蒙古秘史)는 단순한 역사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면서 했던 발언을 기록한 이 책은 대제국으로 성장한 몽골 제국의 기본적인 법률과 헌법의 역할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전 세계를 호령한 칭기즈칸의 정복사 등 베일에 싸여 있던 몽골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몽골비사' 내용 중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잘려나갔다. 13세기 후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검열자가 이 부분을 없애버린 것.

잘려나간 부분은 1206년 여름 칭기즈칸이 한 발언 내용을 기록한 부분이다.

칭기즈칸은 그의 아들들, 형제들에게 그들의 능력과 공훈에 따라 관직과 봉토 등을 하사했으며 이어 그가 딸들의 업적과 공로를 발표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고 기록한 바로 그 대목에서 검열자는 칭기즈칸의 발언을 삭제해버렸다.

검열자는 삭제된 텍스트에 들어 있던 "우리의 여자 후손들을 칭송하기로 하자"라는 단 문장만 남겨놓았다.

신간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는 '몽골비사'의 잘려나간 페이지 속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잭 웨더포드 매칼래스터대 인류학과 교수는 몽골 민요, 설화 등 풍부한 자료와 현지답사 등을 토대로 칭기즈칸 딸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책 내용은 흥미진진하고 놀랍다.

저자는 칭기즈칸이 영토 확장에 매진하는 동안 정복한 영토를 다스리며 제국을 유지한 것은 그의 딸들이었다고 말한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은 "음주에는 비범했지만 전투에는 평범했고" 다른 것들도 모두 신통치가 않았다. 반면 일곱 혹은 여덟 명에 달하는 딸들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딸들 중 네 명은 왕비 자격으로 그들의 나라를 다스렸고, 대규모 군부대를 지휘했다. 그들은 평화기에는 아이들을 키웠지만 필요할 때는 활과 화살 통을 집어들고 전장으로 나가 조국과 가정을 지켰다.

몽골 왕실의 여성들은 말을 잘 탔으며 때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자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고손녀 쿠툴룬 공주의 이야기도 흥미를 자아낸다. 칭기즈칸의 증손자 카이두칸의 딸인 쿠툴룬 공주는 씨름을 잘해 당해낼 남자가 없었으며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토트'의 모델이기도 하다.

웨더포드 교수는 "이 여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또 그토록 넓은 영토를 지배한 역사적 인물들은 전무후무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칭기즈칸의 딸들이 없었더라면 몽골 제국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정복한 제국의 방비를 아들들에게만 맡겨놓을 수가 없어서 점점 더 딸들에게 의존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몽골의 연대기 작가들과 학자들은 기록에서 칭기즈칸 딸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삭제했고 그녀들은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졌다.

칭기즈칸 딸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몽골의 역사를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몽골의 장대한 역사를 분석하는 저자의 시야가 넓고 명쾌하다.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문번역가인 이종인 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책과함께. 432쪽. 1만8천원.

yunzhen@yna.co.kr

 

 

입력 2006. 5. 22. 18:56수정 2006. 5. 22. 18:56

시베리아의 광대한 영토에 자리잡은 러시아연방 사하자치공화국의 안드레이 보리소프(55ㆍ사진) 문화부 장관이 한국_사하 친선협회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해 21일 방한했다.

보리소프 장관은 러시아연방의 공훈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 1990년부터 문화부장관을 맡고 있다. 이번 방한 중에 그가 제작중인 영화 '징기즈칸'도 소개할 예정이다.

"미국과 몽골의 징기즈칸 영화가 제국의 완성과 몰락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가 만드는 징기즈칸은 그가 어떻게 성장해서 제국을 만들었는지를 그리려고 한다. 그의 제국은 몽골족 하나가 아니라 야쿠트 부리야트 하카스 추바스와 같은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함께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하공화국의 주류는 야쿠트 족으로 스스로를 '용감한 무사'라는 뜻의 '우랑카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이 말이 '오랑캐'의 어원이며 야쿠트족은 발해의 구성원인 여진족이나 말갈족의 후예로 보고 있다.

사하공화국은 인구는 비록 200만명에 불과하지만 러시아 영토의 5분의 1을 차지하는데다 철 다이아몬드 금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이 많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다이아몬드 가공산업에 진출한 인도는 7년 전에 인도문화원을 세웠으며 일본은 야쿠츠크대학교에 일본어교수를 10년 이상 파견해왔다.

한국과는 1994년 당시 수도 야쿠츠크시 교육감으로 있던 미하일로바 부총리의 요청을 받은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강덕수 교수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사하_한국학교(중ㆍ고등학교)를 세우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 학교가 한국인들의 지원으로 사하에서도 명문학교로 자리잡으면서 2000년에는 야쿠츠크대학교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었다. 한국_사하친선협회는 한국의 아시아문화재단 지원으로 지난해 현지에 만든 한국문화원이 명실상부한 문화원이 되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올드보이'는 러시아 전역에서 텔레비전으로 상영됐다"고 소개한 보리소프 장관은 "사하의 원자재를 많이 팔고 한국의 발전한 문화를 배우고 싶다. 특히 한국 영화산업의 뛰어난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_사하친선협회 창립총회는 23일 오후 7시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몽골 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대몽골국(중세 몽골어: ᠶᠡᠬ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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ᠤᠯᠤᠰ 예케 몽골 울루스, 몽골어: Их Монгол улс 이흐 몽골 올스), 또는 몽골 제국은 보르지긴 테무친이 1206년에 건국한 국가로, 13세기와 14세기의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큰 육지 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칭기스 칸의 중앙 울루스를 중심으로 주치 카사르(1164?-1219?) 이하 동생들에게 흥안령 지역을, 장남 주치에게 알타이산에서 이르티시강 유역(킵차크 초원)을, 차가타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주변 츄강 유역(카라 키타이 고지), 그리고 우구데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우룽구강 일대(나이만 고지)를, 막내아들인 톨루이에게 몽골리아 지역을 분봉했다.[1][2]

국호[편집]

몽골인들이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몽골어로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국’라고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국호가 언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이같은 표현이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확인되는 것은, 1246년 11월에 작성되어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에게 맡겨져 교황 인노센트 4세에게 전달된 귀위크 칸의 서한에 찍혀진 인장에서이다. 위구르 문자로 새겨진 이 인장에는

원문

Möngke tngri-yin küchün-dür Yeke Mongghol Ulus-un dalay-in khan-u jrlq

해석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예케 몽골 울루스의 서해(四海) 군주의 칙령

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렇지만 김호동은 여기에 보이는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표현이 꼭 ‘국호’로 보아야 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 까닭은 ‘울루스’라는 말이 일차적으로는 ‘부민(部民), 백성’을 뜻하기 때문에, ‘예케 몽골 울루스’를 하나의 고착된 용어로서의 국호가 아니라 그냥 그 뜻에 따라 ‘큰 몽골 백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은 구육이 보낸 서한의 첫머리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구절이 투르크어로 “모든 큰 백성(kür ulugh ulus)”이라고만 되어 있고 ‘몽골’이라는 표현 자체가 빠져 있다는 점,[3] 또한 그보다 약 20년 앞서 칭기즈 칸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칭기즈 석(石)’에도 몽골어로 “모든 몽골 백성(몽골어: ᠬᠠᠮᠤᠭ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Qamuɣ Mongɣol Ulus)”라는 표현이 보인다는 점[4]을 생각하면 더욱 개연성이 있다.[5]

과거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도 그러했지만 몽골인들 역시, 중국이나 다른 정주국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국호나 연호를 정하여 선포한다는 개념에는 매우 익숙하지 못했는데, 몽골의 군주들은 그저 자신을 모든 몽골 백성들의 통치자라는 정도의 의미에서 ‘모든 몽골 백성’ 혹은 ‘큰 몽골 백성’의 군주라고 불렀고, 이것이 후일 점차 관용화되면서 일종의 국호처럼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예케 몽골 울루스’가 처음부터 고정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은 점차 국호처럼 사용되어 갔다. 《경세대전(經世大典)》「서록·제호」에는 “쿠빌라이 칸이 처음으로 대몽고(大蒙古)라는 칭호를 바꾸어 대원(大元)이라고 하였다” (世祖皇帝初易大蒙古之號而爲大元也)라는 구절이 그러한 사례이다. 샤오치칭(蕭啓慶)은 전폐(錢弊)·비문·사적(史籍)에 나타난 용례들을 검토한 결과, ‘대원’이라는 국호가 반포되기 전에는 ‘대조(大朝)’와 ‘대몽고국(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한자 국호가 사용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전자의 사용빈도가 훨씬 높았는데, 이 두 가지 명칭이 모두 ‘대원’에 의해서 대체됨으로써 사용중지된 것이라는 학설을 제시했다.[6] 이렇게 볼 때 《경세대전》의 ‘대몽고’가 ‘대몽고국’은 역시 ‘예케 몽골 울루스’의 번역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쿠빌라이 이전에는 ‘예케 몽골 울루스’가 그 한역어인 '대몽고'와 함께 하나의 고정된 국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7]

그러나 쿠빌라이 칸에 의해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국호는 더 이상 중지된 것이 아니라 '대원'이라는 국호와 일체화되었다. 1335년에 한문과 그것을 번역한 몽골문으로 작성된 《장씨선영비(張氏先塋碑)》에서 한문 '황원(皇元)'은 몽골문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되어 있고, 1346년에 작성된 《칙건흥원각비(勅建興元閣碑)》에서 '아원(我元)'이라는 한문 구절이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돼 있다. 나아가 1338년에 작성된 《달로화적죽온태비(達魯花赤竹溫台碑)》에는 '대원'이 '대원이라 칭하는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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ᠦᠯᠦᠰ Dai Ön qemeqü Yeqe Mongɣol Ulus)[8]로 번역되어 있으며, 1362년에 세워진 《추봉서녕왕흔도비(追封西寧王忻都碑)》에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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ᠦᠯᠦᠰ Dai Ön Yeqe Mongɣul Ulus)[9][10]로 나타나 있다. 이들 비문은 모두 몽골식 국호인 '예케 몽골 울루스'가 몽골의 중국지배가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사용되었음을 입증해 준다.[11] 몽골제국의 정식 국호인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국호를 언제 공식적으로 선포했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예케 몽골 울루스’가 처음부터 고정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은 점차 국호처럼 사용되어 갔다. 1271년 이전에는 ‘대조(大朝)’와 ‘대몽고국(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한자 국호가 주로 사용되었다.[12]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이 《건국호조》를 반포함으로써 한자 국호는 '대원(大元)'으로 확립되었다.[13]

역사[편집]

칭기즈 칸[편집]

1279년 몽골 제국의 최대 강역

1206년 카마그 몽골을 다스리던 보르지긴 씨족의 수장인 테무친이 몽골 지역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오논 강에서 개최된 쿠릴타이 회의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몽골 제국이 시작되었다.

제국 건국 이전 몽골에는 이란 지역과 아랍 문화의 화약을 사용한 무기 등 선진 무기들이 몽골 지역의 민족들에게 퍼지기 시작했고 실리적 과학과 의학 등이 전해져 왔다. 이 칭기즈 칸은 바이칼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 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군인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1219년부터는 호라즘 왕조를 정복하고, 캅카스를 정복해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정복했으며 1225년 귀환했다. 아시아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의 영토를 현저히 확대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서하 제국을 정벌하던 중 1227년 진 중에서 전사했다. 그 이후 손자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정복하였다. 칭기즈 칸 사후 당시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 평원에 접해 있었다. 또한 제국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툴루이의 섭정[편집]

칭기즈 칸이 서하 제국과 전쟁 하던 중 전사한 후 넷째 아들 툴루이 칸을 임시 칸으로 추대했다. 몽골의 귀족, 왕공족들은 툴루이가 차기 대칸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툴루이는 자신의 형인 오고타이에게 황제직을 양보하였다.

1229년의 쿠릴타이에서 정식으로 오고타이가 다음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오고타이 칸[편집]

2대 황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의 잔존 기병대, 보병대와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년에는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키예프 루스와 중앙 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 불가르인들의 제국은 1~2년 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키예프 루스의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 무렵 여러 소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키예프 루스는 몽골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발트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수도였던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루스인들의 일부 도시는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 왕국의 일부를 정벌했으며 전위 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손을 뻗쳤다. 독일과 폴란드 왕국의 기사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헨리크 2세 공의 지휘 아래 레그니차 근처 발슈타트에서 수부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년 4월 9일 궤멸에 가까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몽골군은 독일 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작전중인 부대에 합류했고, 1241년 4월 헝가리군을 사조 강 유역에서 완파한 몽골군은 헝가리 왕국에서의 몽골 점령의 기초를 구축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한편 그에 앞서 몽골군은 이란·그루지아·아르메니아에서 장기간에 걸친 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중지되었다.

귀위크 칸[편집]

오고타이 칸의 전사 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몽골군 군사령관들이 모여서 전쟁과 황제 선출에 관해서 회의를 하는 군사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의견 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 칸의 제자 귀위크 칸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바투는 오고타이 칸 생전의 서방 원정에 귀위크와 동행하였으나, 귀위크는 바투를 모욕했고, 양자간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오고타이는 후계자로 손자 시레문을 지명했지만, 퇴레게네 카툰은 자신의 아들 귀위크를 추대하려 했고, 바투는 쿠릴타이를 반대하거나 불참하였다. 5년간의 궐위 상태에서 결국 1246년 귀위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병약한 귀위크는 3년 만에 킵차크 한국 바투를 정벌하러 군사를 일으켰다가 원정길에서 전사하고, 다시 군사 회의인 쿠릴타이가 계속되었다.

몽케 칸 전쟁[편집]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오고타이 칸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오굴 카미시 카툰은 오고타이 카안의 유지를 내세워 시레문을 추대하려 했으나, 툴루이 일가 측에서는 오고타이 카안의 유언을 어기고 구유크 칸을 추대한 것이 누구냐며 반발하였다. 결국 두 군대는 내전을 치렀고 여기서 툴루이 측이 승리하면서,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몽케는 오고타이계 왕족과 이를 지지하던 차가타이계 왕족 및 오고타이 일가의 측근들을 숙청, 처형하였다. 그 후 몽골 제국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칸위는 툴루이 자손에 의해 독점되었다.

몽케는 이미 서정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었고 전장에서도 공적을 쌓았다. 몽케는 1252년 훌라구로 하여금 아바스 왕조를 멸하게 하고 이라크·이란 방면을 영토에 편입시켰으며, 쿠빌라이 등을 시켜 남송을 정벌하게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중국화를 의심하여 1257년 친히 남송 정벌을 노렸으나 1259년에 쓰촨 성 근처에서 병으로 죽었다.

제위 계승 내전[편집]

1259년 8월 몽케 칸이 남송 정벌 도중 전사했다.

카라코룸에 있던 몽케 칸의 넷째 동생 아리크부카는 감국을 하다가 1260년 3월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칸이 되었다. 아리크부카는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몽케 칸의 전사 소식을 측근들을 통해 들은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 칸은 회군, 1260년 5월 대도(현재의 베이징)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칸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군사를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가 아리크부카와 싸웠다. 초기에는 아리크부카에게 유리하였으나 보급로가 끊기고, 지지하던 차가타이 한국의 배신으로 패배, 4년 만인 1264년 8월 쿠빌라이에게 항복한다.

쿠빌라이 칸[편집]

1266년 내전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하였다.

그는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현재의 베이징)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였으며 1268년부터 대대적인 남송 정벌을 시작했고 1279년 애산전투에서 비로소 남송을 정벌하여 역사상 최초로 중국 전체를 정복하는 이민족 국가가 되었다.

한편 고려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았으며, 1274년과 1281년에는 고려와 연합하여 일본원정에 나섰고, 그 밖에 1288년 대월 원정1292년 참파 원정 등 수많은 정복 전쟁을 감행하였다.

제국의 내분과 대원[편집]

몽케 칸이 전쟁터에서 죽자,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 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군인과 오고타이계 제왕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심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상도에서 제5대 카안에 올랐다. 그 후 아리크부카의 군사 반란을 진압하고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 몽골어: ᠳᠠᠢ
ᠦᠨ Dai Ön)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 칸에게 불만을 품은 카이두의 군대는 오고타이 카안의 후계자인 카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 칸과 군사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은 카이두의 군대편에 서고, 일 칸국은 쿠빌라이 칸의 군대 측에 가담함으로써 전세계를 지배하던 대 몽골 제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게된다.

특히 카이두가 사망(1301년)하고 차파르의 투항과 귀순(1308년)으로 오고타이 칸국이 원나라 안으로 이동한 14세기 초가 되면, 몽골제국은 4개의 대형 울루스가 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유라시아 동부의 원나라,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킵차크 칸국, 그리고 서아시아의 일 칸국이었다. 그러나 이들 4개 울루스를 제외한 다른 울루스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4개 울루스 내부에는 여전히 여러 개의 소형 울루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14]

팍스 몽골리카[편집]

대형 울루스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을 추대했고, 카간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그를 추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울루스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연대성'이 존재했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카간은 여전히 한 사람에 불과했고 여러 칸국의 칸들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카간이 즉위하면 그는 제국의 여러 울루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국의 칸들도 즉위하면 카간에게 사신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카간은 중국에서 거두어지는 재정수입의 일부를 여전히 칸들에게 보내주었고, 칸들 역시 각 칸국에서 거두어지는 수입의 일부를 카간에게 보냈다.

이러한 느슨한 칸국들의 연맹으로서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상당 부분 보존은 칸국들 사이에 활발하고 빈번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했고, 그리하여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탄생시켰다.[15]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인간과 물자의 광역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기반은 단연 '역참(驛站)' 제도였다. 오늘날 역(驛)을 뜻하는 중국어 단어 '참(站)'의 기원이 된 몽골어 '잠(jam)'은 본래 초원을 지나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숙소 시설을 지칭했는데, 이것이 제국의 교통 네트워크로 채택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때부터였다. 그는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차가타이 칸국ㆍ킵차크 칸국과 연락을 하기 위해 역참제를 실시했다. 또한 몽골 초원과 북중국 사이에는 '나린(narin; 秘道)', '모린(morin; 馬道)', '테르겐(tergen; 車道)'이라는 세 역로를 설치하였다. 이후 제국의 영역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역참망도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부분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발전하여, 고려나 러시아와 같은 속국에도 역참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의 시대가 되면 원나라 내부에만 1,400여 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이들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站戶) 또한 35~70만 호 정도가 배정되고 있었다. 참호에 배정된 이들은 마필ㆍ선박ㆍ수레 등의 교통수단과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를 책임졌으며, 식량과 사료를 항시 준비해두어야만 했다. 또한 역참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규정이 있어서, 역참 사용자는 신분을 증명하는 '패자(牌子; paiza)'와 '포마차찰(鋪馬差札; belge)'이라는 문건을 소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일반 사무와는 별도로 군사적인 긴급 사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급체포(急遞鋪; paykan)'라는 제도를 마련해두기도 했다. 당시 몽골인들이 운영했던 이러한 역참 제도에 대해서는 유명한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에서 경탄어린 어조로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몽골 제국 시대에 마련된 이와 같은 역참 네트워크는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내륙 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격화된 1280년대 말부터 10여 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원활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역참 네트워크를 따라 칸국 간의 외교가 이루어지면서 사신의 왕래 이외에 군인ㆍ종교인ㆍ학자ㆍ기술자 등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원나라에서 일 칸국으로 파견되어 라시드 앗 딘의 《집사》의 편찬을 도왔던 볼라드 칭상(Bolad Chingsang)이나, 일 칸국에서 원나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 휘하에서 중용되었던 자말 앗 딘(Jamal al-Dìn)ㆍ이사 켈레메치(Isa Kelemechi) 등은 그러한 칸국 간 다양한 교류의 구체적인 사례들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 제국 지배층들의 재정관리 파트너가 되어 그들의 자본을 운영하던 '오르톡(ortoq; 斡脫)' 상인들의 존재 또한 '팍스 몽골리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르톡 상인들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원거리 무역을 수행했는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에게 자본을 제공한 제국의 지배층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 방면에서는 고리대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斡脫錢)'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다른 한편으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차원의 경제적 교류를 활성화하고자 은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각 지역 간의 교환 단위를 통일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은괴 2kg은 중국에서는 '정(錠)', 중앙아시아에서는 '야스툭(yastuq)', 서남아시아에서는 '발리시(balish)', 몽골 초원에서는 '쉬케(süke)' 등으로 지칭되면서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경제 단위로서 통용되었다. 은 4g의 '전(錢)과 '40kg의 '량(兩)'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유라시아 대륙 간 교류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의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 제국 시기 동안 여러 영역에서 그 양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16]

몰락[편집]

몽골 왕공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고있던 불교 교단을 모체로 할 것을 상징하던[17] 백련교도들이 조직한 홍건군의 수령 중 한 명인 주원장은 다른 반란세력을 제압한 뒤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북상하여 대도와 상도를 장악하고 몽골 세력을 장성 이북으로 몰아냈다. 토곤테무르 칸은 응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고, 고려 여인 기황후가 낳은 아들 아유시리다르가 카안으로 즉위하여 근거지를 카라코룸으로 옮겼다.[18]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이때 최종적으로 붕괴했다.[19]

사회 제도[편집]

몽골 제국은 흉노 이래의 몽골 제국 유목 국가의 전통을 따라 지배하던 유목민을 병정일치의 사회 제도로 편성하였다. 몽골에 있어 유목집단의 기본 단위는 천호라고도 불린 천명 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10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유목집단을 다스리는 장군이나 부족장을 그 수장, 즉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 가운데 1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백호, 백호 안에는 1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십호가 설치되어, 각각의 장에는 그 소속 천호장의 근친 가운데 유력한 자가 지명되어 십호 이상의 유목 전사가 몽골 제국의 지배층이었던 유목 귀족(노얀)을 형성하였다. 천호장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는 다수의 천호를 거느린 만호장이 되어, 전시에는 군사령관직을 지냈다.

칭기즈 칸의 씨족인 보르지긴은 황금씨족(알탄 우룩)이라 불리며, 영지 백성(우르스)으로 나뉜 천호・백호・십호 집단의 위에 상급 영주 계급으로써 군림했고, 몽골 황제 즉 대칸은 크고 작은 우르스의 가장 큰 부분을 가진 맹주였다. 대칸이나 왕족들의 막영은 오르도라 하여, 유력한 후비마다 오르도를 갖고 있었다. 각각의 오르도에는 게린 코우(게르 백성)라 불리는 영민이 있었는데 그 관리는 오르도의 수장인 황후가 관리하였다.

행정 제도[편집]

몽골 제국과 지배 땅

몽골 제국의 영토와 속령 그리고 종속국들의 지도.

 

대칸의 궁정에는 케식이라는 측근 관료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칸의 친위대를 맡는 동시에 케식텐이라 불리는 가정기관을 형성하였다. 케식은 코르치(화살통지기), 우르두치(큰칼잡이), 시바우치(매부리), 비치크치(서기), 바르가치(문지기), 바울치(요리사), 다라치(술 담당), 우라치(수레몰이), 모리치(말치기), 스쿨치(옷 담당), 테메치(낙타치기), 코니치(양치기) 등 다양한 직제로 나뉘어 노얀(귀족)의 자녀와 대칸에게 개인적으로 기용된 자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가정제도는 다른 주치 가문이나 툴루이 가문에도 존재하였으며, 이들 직종을 맡았던 케식텐들은 각 왕가의 당주격인 칸을 가까이서 섬기며 우르스의 여러 일들을 맡았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 연합 국가였지만 중앙 정부와 점령지 통치 기관은 대칸 직할지배 아래 두는 것으로 이들은 케식 출신에 의해 형성된. 중앙에서는 케식 내의 몽골 귀족이 임명한 쟈르구치(단사관)이 놓여 행정 실무와 소송을 담당했다. 그 정점에 서는 것이 대단사관(예케・쟈루그치)으로 최초의 대단사관은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의 양자가 되었던 시기 쿠툭이 맡았다. 지방에서는 대부분이 몽골인으로 임명되는 다루가치(감독관)이 도시마다 놓여 점령지 통치를 관장했다.

그리고 실무에서 쟈르구치나 다루가치를 도와 말단 문서 및 재무 행정을 맡아보는 중요한 직책이 비치크치(서기)였다. 비치크치는 현지 점령지의 언어에 통달한 자로 한족이나 서하, 거란, 여진, 고려 등은 한인, 위구르인, 무슬림(이슬람교도) 등의 색목인 출신자가 다수 참가하였다.

대칸을 섬기는 비치크치들은 케식의 일원으로서 군주의 측근에서 피지배자에게 내리는 명령인 칙지(쟐리그)를 기록하고 번역하여 문서로 발급하였다. 중앙에서 나온 명령은 쟈무치라 불리는 역참제도에 따라 하루에 100km 이상의 속도로 제국의 간선로를 따라 신속하게 제국 구석구석에 미칠 수 있었다.

이어 몽골 제국은 대칸뿐 아니라 황족과 귀족, 황후의 오르도에도 케식에 준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 장교와 영민, 출입하는 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그들의 소궁정에도 대칸과 같은 행정기관이 생겨나고, 우게(말)라 불리는 명령을 내릴 권력을 지녔다. 14세기 초까지 왕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분할된 정주지대의 도시나 농촌에 자신의 궁정에서 다루가치와 징세관을 보내 그 지방의 행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군사 제도[편집]

몽골 제국의 군대는 세계사에서 최초로 군인들 간의 계급과 체계적인 군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세계 대전 이후에서나 볼 법한, 오늘날의 대령 · 소령 · 중령 등과 같은 체계적인 계급을 갖춘 제도였다. 중세 시대까지 동서를 불문하고 병사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약탈하기 위해 모인 존재였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그런 군 편제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강점은 심리 전술에 있었다. 중세 시대까지 세계의 군대는 백병전과 같은 즉발적인 전투를 하는 정도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심리 전술을 덧붙였다.

몽골 제국의 군대는 십진법 단위로 편성된 만호(토우만)・천호(민한)・백호(쟈간)・십호(아르반)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천호는 유목민 군의 계급이기도 했는데, 일상에서 각 군은 장의 장막(게르)을 중심으로 휘하 군인 게르가 모여서 둥근 진을 짠 '쿠리엔'이라는 형태로 유목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함께 유목 생활을 하고 때로는 집단으로 사냥 시합을 하여 단결과 규율을 강화하였다.

원정(정복 전쟁)이 결정되면 천호 단위로 일정한 징집 머릿수가 배정되고, 각 병사는 본인 부담으로 말과 무기, 식량, 군수 물자 및 일용품 일체를 자비로 준비했다. 군단은 엄격한 상하 관계에 따라 병사는 소속 십호장에게, 십호장은 소속 백호장에게, 백호장은 소속 천호장에게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었고, 천호장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칸이나 왕족, 만호의 지배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군율 위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했고, 가죽으로 싸인 채 말이 그 위에서 죄인이 죽을 때까지 뛰어 다니게 한다거나 산 채로 가마솥에 삶기기도 했다. 한편, 반역한 여러 무장이 참수되는 사례도 있는 등 일률적인 처형법은 채택되지 않았다.

이렇듯 몽골군은 기본적으로 유목민으로서 유목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방목에 적합하지 않은 남쪽의 다습한 지대나 서아시아의 사막, 수상 전투에서는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러시아나 아나톨리아,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킵차크 초원, 중국 등 피지배 정착민들을 적절하게 징모하는 비율이 그만큼 늘어났다. 이들 피지배 민족의 군대는 원나라의 경우는 세습 농지와 면세 특권을 받은 군호에 속한 자들로 징집됐다. 이는 천호제를 정착민에게 맞춘 것으로, 군호는 백호소 및 천호소로 불리는 집단 단위로 만들어져 한 지방에 존재하는 천호소는 만호부에 총괄되었다. 병사의 군역은 군호 몇 가구마다 한 명이 배정돼 병사를 내지 않은 호에서 아우루크(후방대)가 되어 그 무기와 식량을 충당했다.

편성[편집]

원군은 우익(바르운 갈)・중군(코르)・좌익(쥬운 갈)의 3군단으로 나뉘어 중군 가운데서도 각각의 우익과 좌익이 존재했다. 이는 몽골의 평소 유목 형태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고 중앙의 칸이 남쪽을 향한 상태에서 서부의 유목집단을 우익, 동부의 유목집단을 좌익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의 군단은 아르긴치(선봉대), 코르(중군), 아우루크(후방 보급대)의 세 부대로 나뉘었다.

선봉대는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 중심으로 편성되며 전선에서 조우한 적군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다. 중군은 선봉대가 전력을 무력화한 뒤 전투 지역에 들어가 거점의 제압과 잔존 세력의 소탕, 그리고 전리품 약탈을 맡았다. 전군의 끝에는 후방대가 가축 방목을 하면서 천천히 뒤를 이어 전선을 뒤에서 밀었다. 후방대는 사병들의 가족 등 비전투원을 거느리고 정복이 진행되면 제압이 완료된 지역 후방 거점에 대기하고 몽골 본토에 있던 때와 거의 변하지 않는 유목 생활을 보낸다. 전선의 부대는 일정한 군사 활동이 된다고 일단 후방대의 대기 후방에서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부대 사이에는 기마의 전령이 오가고 왕족, 귀족, 호족이라도 전령을 만나면 길을 양보하도록 규정됐다.

군인들은 모두 기병대이며 속도가 빠르고 사정거리가 긴 복합궁을 주무기로 했다. 유목민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데에 익숙하여 강력한 궁기병이 되었다. 군인은 정복전쟁에서 1인당 7, 8마리의 말을 데리고 자주 갈아타는 방법으로 경이적인 행군 속도를 자랑하였으며, 경기병이라면 하루 70km를 주파할 수 있었다(중세 유럽의 보병의 행군 속도는 하루 20km). 또 쇠약해진 말을 잡아 식량(고기, 내장, 피), 무기(뼈, 힘줄), 의류(모피)로 철저히 이용하는 등 편성과 식량 조달에 오랜 시간을 할애할 걱정이 적었다.

 

 

한국·몽골 고구려국제학술대회에서 놀라운 역사적 사실 발표

왜(일본)는 호태왕의 군국(식민지), 징기스칸은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19세손

2016/12/15 [16:12]

https://youtu.be/E9PIL6GA5zc

 

 

 

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6가지' 업적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6가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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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칭기즈 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Mongols - Wikipedia

 

 

몽골비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몽골의 유라시아 제패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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