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3. 6. 24. 06:00

[퉁화=신화/뉴시스] 중국 지린(길림)성 동북부 퉁화시 지안에서 한 기자가 아이스 와인을 만드는데 쓰이는 냉동 포도를 촬영하고 있다. 2016.12.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00만명이 채 안됐던 몽골인들은 지배층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원나라를 비롯 세계 인구의 반을 통치했다. 특히 대 칸의 직할인 원나라는 한족(漢族)을 혹독하게 통치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남송(南宋) 출신 한인들은 남인(南人)이라 불리며, 사회 최하층 계급인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원나라 인구의 80%에 달하는 6000만명이나 됐다. 갑주(甲主)라 불리는 몽골군 한명이 한인 20가구(약100명)를 관리했다.

원나라 말기, 이에 저항한 한족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홍건적의 난’이다. 이어 홍건적 출신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1368년 원나라 수도 대도를 점령하고 명나라를 건국한다. 원나라 왕실은 몽골 초원으로 쫓겨났다. 고려 공민왕 16년때다. 이후 고려는 ‘북원’(北元)이란 이름으로 20년간 더 존속한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친명정책을 유지한다.

 

명나라는 한족이 건국한 중국의 두번째 통일 왕조다. 소위 ‘중화사상’의 중심은 한족이다. 2020년 중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54개 소수 민족이 포함된 중국인의 91.1%가 스스로를 한족으로 분류했다. 한족이 세운 첫번째 통일 왕조인 한(漢)나라를 그 기원으로 본다. 하지만 유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한족의 근거는 애매하다. 중국과학원도 한족은 혈연적 연대라기보다는 단지 문화적 공동체라고 했다. 한족의 유전자에는 선비, 흉노, 돌궐, 몽골족의 북방계와 베트남, 라오스에 분포하는 남방계 민족의 DNA가 모두 섞여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5000년 중국 역사 중 순수 한족이 세운 왕조가 중국 전체를 지배한 기간은 한나라 405년과 명나라 276년을 합해 681년에 불과하다.

전쟁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기 전인 1358년 이미 금주령을, 1366년 술의 원료가 되는 찹쌀의 재배를 금했다(‘명태조실록, 권6’). 건국 초기에는 술의 양조와 유통을 전면 금지했다. 자신은 술을 좋아했지만, 술에 들어가는 미곡의 소비를 줄여 식량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원나라 시대 곡주의 미곡 소비를 줄이기 위해 와인의 생산을 장려한 것, 고대 로마에서 한때 포도원이 늘어 밀의 경작지가 줄어들자 거꾸로 포도원을 갈아엎었던 것과 비슷한 배경이다. 1373년(홍무제6년)에는 주요 와인 산지인 산서성 태원에서 황제에게 올라오는 와인의 진상을 몸소 금했다(‘속문헌통고 권22, 정각고’). 주원장이 와인을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태원 와인은 북송의 문장가 소동파도 좋아했다. 주원장은 아끼는 장군인 호대해(胡大海)의 아들이 금주령을 범하자 목을 벨 정도로 엄격하게 금주령을 시행했다(‘명사 호대해 열전’).

하지만 금주령은 사회가 안정되자 홍무제 초년(1368년)에 곧 폐지됐다. 대신 주세를 개편했다 (‘대명회전’). 원나라 시절 곡주의 주세는 보통 판매액의 25%였다. 포도주는 6%였는데 나중에 3.3%로 낮추어 우대했다(‘신원사’). 포도주는 ‘계각화’(系榷貨)라는 관청에서 전매하고, 주세는 국세청 격인 ‘대도주사사’(大都酒使司)가 징수했다(‘원전장’).

 

원나라 때는 누룩과 쌀을 사용하지 않은 정통 와인이 가장 성행한 시기였다. 금주령이 해제된 명나라에서는 술에 대한 국가의 전매제도를 폐지하고 민간에서 술을 자유롭게 양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주세도 통합하고 대폭 낮추어 곡주와 포도주 구별없이 판매액의 3.3%를 징수하였다. 누룩에는 2%를 부과했다(‘명사’ ‘식화지’). 술과 양조 방식이 비슷한 식초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탈세하는 자는 곤장 50대와 함께 판매액의 50%를 몰수했다. 또 이를 신고한 자에게는 물품 가액의 30%를 포상했다(‘속 문헌 통고 권28, 정각고’).

이로 인해 우대가 없어진 와인의 유통은 상대적으로 저조해지고 각 지역별로 곡주와 각종 과일주가 번성했다. 명나라 초기 기록에 나오는 술의 종류만 26종이나 된다. 산서성의 소주와 절강성의 황주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북방지역에서는 여전히 와인이 생산됐다. 하지만 신장지역 등 옛날의 서역은 통제를 잃어 와인의 조달이 상당히 위축됐다. 서역의 통제권은 청나라가 들어선 후 다시 회복된다.

원나라 시절 고려에서 와인은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과 몽골의 쌍성총관부가 들어선 국경 부근의 북부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유통됐다. 하지만 원나라의 몰락에 따른 중국사회의 변화, 조선의 정권교체가 일어나자 이후 중국과의 교류 및 소비는 거의 중단된다. 고려시대 말 나타났던 와인 관련 기록이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1500년대 중반까지 다시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 와인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것이다. 고려사는 1451년, 고려사절요는 1452년에 편찬됐다. 또 이색의 목은시고는 1626년, 안축의 근재집은 1740년 간행됐다.

포도를 표현하는 한자는 현재 중국, 일본, 베트남, 우리나라에서 모두 ‘葡萄’로 표기하고 있지만 중국 문헌에는 시기에 따라 ‘蒲桃’ ‘蒲陶’ ‘蒲萄’ 등 각종 다양한 표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서의 경우 고려사에는 ‘蒲萄’로, 고려사절요부터는 쭉 지금과 같은 ‘葡萄’로 표기돼 있다. 중국에서도 16세기 이시진이 펴낸 본초강목(1596년 간행) 이후에는 현재의 표기로 통일됐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문정임입력 2024. 1. 12. 14:15수정 2024. 1. 12. 22:54

서귀포시 하원동 21번지에 위치한 '탐라왕자묘' 전경. 총 3기의 무덤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인 ‘탐라왕자묘’의 주인을 찾기 위한 조사가 시작된다.

제주도는 이달 중 탐라왕자묘 시굴조사 용역을 발주해 2월부터 본격 진행한다고 12일 밝혔다. 기간은 6개월이다.

조사는 지난해 10월 지표 투과 레이더 조사에서 특이신호가 잡힌 7개 지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묘 주변 해당 지점 시굴조사를 통해 땅에 묻힌 석물 등을 발굴해 주인을 유추할 계획이다.

탐라왕자묘는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다. 묘 3기가 남북 방향으로 자리했다. 가로 세로 3~4m 크기의 방형석곽분이다. 판석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관을 넣어 봉분을 만든 형태다.

탐라왕자묘는 이 같은 형태로 미루어 여말선초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돼 왔다. 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탐라왕자묘 2호분. 문화재청 제공


1843년경 편찬된 ‘탐라지초본’에는 ‘왕자묘가 대정현의 동쪽 45리에 있다. 궁산의 두 하천 사이에 3기 묘의 댓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이를 기초로 왕자묘의 주인이 탐라국의 왕자라는 설과 중국 원나라의 왕족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탐라국 왕자 설은 무덤의 주인을 탐라국의 지배계층으로 보는 시각이다.

 

여기서 왕자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 탐라국의 국왕인 ‘성주’ 다음 계급을 뜻한다.

‘탐라지’ 등 옛 문헌을 보면 ‘탐라 왕족(고후·고청·고계 3형제)이 바다를 건너와 조공하니 신라 왕이 기뻐하며 3형제에 성주, 왕자, 도내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무덤의 주인을 왕자 계급을 지낸 남평문씨로 보기도 한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탐라국에서 본래 양씨가 ‘왕자’직을 제수받았는데, 실제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 제주도가 도 기념물로 지정해 관리를 맡기 전까지 남평문씨 문중에서 탐라왕자묘를 관리해왔다.

원나라 왕족 설은 왕자묘에서 가까운 절(법화사) 등에서 원나라 왕궁 유물이 출토됐다는 기록에서 연유한다.

근처 대포포구는 원나라가 탐라를 지배하던 시절 교역로로 이용됐던 곳이다. 원나라 멸망 당시 제주로 유배된 원나라 왕족의 무덤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탐라왕자묘가 처음 발굴된 것은 1914년 일제강점기로 알려졌다. 그에 앞서 도굴이 이뤄졌다. 1998, 1999년 두 차례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지만 주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탐라왕자묘는 제주에서는 흔치 않은 형태”라며 “탐라사의 귀중한 자료인 만큼 시굴조사 결과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탐라(耽羅)는 제주도의 옛 명칭이자, 제주도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이름이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  홍원탁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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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한(漢)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수(隋)-당(唐)나라와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흉노와 위구르 돌궐족은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喝取)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내부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했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군대를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본고향으로 도망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몽골 초원의 늑대가 만주 삼림의 호랑이를 대체

 

몽골족의 원(元)이 여진족의 금(金)을 대체


                                                                 홍원탁 (서울대 교수)

 

북중국에서 만주족의 금나라와 대결하게 된 몽골제국

 

 

한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수-당나라와 (위구르-투르크)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1206-27)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징기스칸이 1206년에 몽골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기 이전의 몽골족은 초원지대의 약소 부족에 속했으며, 대부분의 몽골 고원은 돌궐족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미 7세기 초에 돌궐족의 일부는 당 태종(626-49)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제 몽골 제국과 만주족 (요와 금) 왕조 등, 양쪽에서 밀어오는 압력 때문에, 대부분의 돌궐족들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방향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몽골족의 유라시아 정복 통로를 미리 개척하고, 범-유라시아 몽골제국 출현을 위해 초원의 고속도로를 깔아준 꼴이 됐다.

 

유목정복자들은 정복을 하러 갈 때, 항상 도중에서 마주치는 온갖 유목민들을 자신들의 깃발 아래로 거둬들이려 노력했다. 바투(1227-55)가 (징기스칸의 유언에 의해 바투에게 특별히 할당된) 단지 4,000명에 지나지 않는 순혈(純血) 몽골군을 이끌고 1236-41년 기간 중 유럽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 흑해와 코카서스 북쪽의 초원지대를 포함하는 고대 스키타이 지역 전체를 점령하고 러시아 공국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래 전에 이 지역에 이주 정착한 돌궐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몽골족은 모두 합해 15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족, 한족, 위구르족, 티벳족, 터어키족, 페르시아인 등을 포함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모든 종족들을 되도록이면 전부 다 몽골의 군대와 정부기구에 흡수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예컨대 항복한 송나라의 장수 하나가 몽골족이 하천에서 싸우는 함대를 건조하는 작업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하천과 운하가 많은 남중국 정복을 좀더 빨리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부군(新附軍, 항복한 송군)이 몽골족 혹은 (거란, 여진, 고려인을 포함하는) 북중국 한족 장교의 지휘를 받는 새로운 부대로 조직되거나 기존의 원나라 군대에 편입됐다. 2

 

징기스칸은 유동적인 연합체 형태로 뭉쳤던 부족-씨족의 군대를 전면적으로 재편성하여,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춘 군대조직을 창출했다. 병사의 수가 1,000명이 넘은 부족 또는 씨족은 1,000명 단위로 분할을 하여 몇 개의 맹안(猛安)을 조직했다. 1,000명이 안 되는 맹안은 다른 씨족이나 부족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 심지어는 전쟁포로까지 끌어 모아 채웠다. 15살에서 70살까지의 성인 남자는 모두 전쟁에 필요하면 동원이 될 수 있었다. 각 부대 단위 별로 목초지가 배정됐고, 병사들의 가족은 모두 동일한 지휘체계에 편입됐다. 그러나 세습 지휘관들은 봉건 귀족이라기보다는 장교단을 구성했다. 천인(千人)장들의 수입은 관행적으로 그들이 관할하는 자급자족형의 군인 가족들로부터 징수하는 조세와 전쟁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에 의존했다. 그러나 원나라 수립 이후, 이들 지휘관은 세습적으로 급료를 받는 귀족이 됐다. 3

 

▲ Mongol Empire Black (1999: 68) 출처 : 업코리아(http://www.upkorea.net)

 

일찍이 북송의 태조는 정치적 특권계층의 자제를 포함하는 정예군을 (상호 견제를 위해 독립적인 몇 개의 부대로) 조직해 금군(禁軍)으로 삼아 그 절반을 수도에 주둔시키는 방법으로 영향력 있는 집안의 충성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고 지방의 반란과 왕위 찬탈 기도를 억제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은 충성심이 입증된 지휘관들의 어린 동생이나 자제들, 몽골 전역의 귀족가문의 자제들, 또 항복한 나라의 왕들에게서 받아낸 볼모들로 친위대를 구성해 자신의 호위는 물론 황실의 가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 친위대는 일종의 인질 집단이며, 장래 고위관직에의 임명이 약속된 어린 귀족들을 위한 사관학교이자, 미래의 지배계급을 양성하는 특권적 견습 도제 기관이었다. 또 칸이 귀족들과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고리역할을 하는 동시에 유목 부족장들의 느슨한 연맹체를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로 전환시키는 초기형태의 통치업무 집행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4

 

흉노와 위구르-돌궐은 전통적으로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 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족은 1227년에 서하, 1234년에 금, 1259년에 고려, 1279년에는 남송을 정복하였다 Janhunen(1996: 134)은 “동아시아에서 몽골의 정복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서하와의 전쟁은 20년간(1207-27) 지속되었고, 금과는 24년(1210-34), 고려와는 40년(1219-59), 남송과는 44년간(1235-79) 전투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한족이 선비족의 북위,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과 대치했을 때에는 중국대륙 남쪽에서 그들의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족은 한족 왕조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한족 국가의 영역 전체를 완전히 정복해버린 것은 훗날 만주족 청나라에 의해 모방되는 것이다.

 

몽골족은 신속하게 항복을 받아내고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대량학살이라는 공포작전을 채택했다. 그들은 도시를 불사르고 농토를 파괴하여 목초지로 만들었다. 동(東)이란의 경우, 인구의 5분의 4가 학살되었다. 몽골족의 야만성은 정주(定住)의 문명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1234년에 금나라를 정복할 즈음, 몽골족은 수많은 문명화된 자문관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미 이민족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던 북중국에 제국을 세워 통치하는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1260-94)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8년 전인 1271년에 자신을 원나라의 황제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동 투르키스탄의 위구르-돌궐족은 저항없이 곧바로 항복을 했기 때문에, 징기스칸은 위구르 지배자를 자신의 5번째 아들이라고 불렀다. 몽골은 위구르 문자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다. Ledyard(1983: 348)는 “몽골족의 일상생활에 한족의 습속(習俗)이 침투하기 이전에 이미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았고, 중앙아시아의 행정과 통치 기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흐름이 몽골인의 생활에 침투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역사적인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다양한 서비스와 기술들이 몽골인들에게 이미 제공되었었기 때문에 구태여 한족들로부터 유사한 기술과 서비스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몽골족이 한족 생활 관습에 근접했을 때, 그들이 마주치게 된 높은 수준의 문명이란 것은 한족에게서만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었기에, 한족 문명의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모든 돌궐-몽골족 나라들은 한 개의 제국으로 통합됐다. 만주로부터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대상(隊商)들의 왕래가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철권적 규율의 적용됐다 20만 마리의 말들이 역참(驛站)에 배치되어 제국의 우편 왕래 서비스를 수행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황제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모든 제국을 통괄하는 몽골 제국의 칸으로서, 몽골족에 의한 세계평화 체제가 실현된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쇠퇴

 

쿠빌라이는 1264년에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당시 대도로 불려진) 북경으로 옮기고, 원나라(1206-1368)의 황제가 되었다. 중국대륙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였다. 주요 거점지역에는 몽골족 수비대가 주둔했다. 위구르족, 티베트족, 터키족, 아랍인 및 중국화된 여진족 등을 행정기관에 사용했다.  만주, 몽골, 투르키스탄, 티베트는 만리장성 아래의 중국본토에서 적용된 것과는 다른 행정조직으로 지배했다. 7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몽골 군호(軍戶)의 전투력은 왕년에 떨쳤던 용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8 몽골 수비대 사회에서 유교를 배우고 중국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흔한 현상이 됐다. 몽골 조정과 귀족들은 분열되어 황제 계승 투쟁에 몰입했으며, 각 경쟁자들은, 로마의 친위대와 유사한 역할을 했던, 황실의 친위대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노력했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로 주요 정무를 수행하고, 궁전 마당에 천막을 치고 살며, 몽골 고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피나는 투쟁을 통해 황제를 선택하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중국화 현상을 막으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과의 결혼을 억제하였으며 자신도 몽골 여인만을 후궁으로 들였다. 반면 한족에게는 정복자의 관습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원나라가 망한 후, 몽골의 지배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다. 9 그들은 단순히 군대와 함께 몽골고원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136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도망을 해 온 몽골족은 북원(北元)을 세워, 17세기 초에 만주족 청나라에 정복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북원의 첫 번째 황제가 절반은 한국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왕조의 실체를 보전한 고려

 

고려에서는 1170년에 불만을 품은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많은 수의 거만한 문관들을 처형한 다음,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100여 년에 걸쳐 무단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들은 귀족 가문과 불교 사찰들의 권력남용과 전횡을 허용한 왕을 질책하였다. 무신 지도자들은 후에 몽골 침입의 여파로 몰락하게 된다.

 

13세기 초, 여진족 금나라는 몽골의 거듭되는 침공을 당하고 있었다. 거란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얻고자 하였으나, 금 나라의 수도가 1215년에 함락된 후, 몽골의 압력은 거란족을 고려 땅으로 밀어냈다.10 몽골-고려 연합군은 1219년에 거란족을 쳐 부쉈으나, 이 사건 이후, 몽골은 고려 조정에게 대규모의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려왕은 몇 차례 조공을 거절하여, 1231년 이후, 일련의 몽골 침략을 초래했다. 고려왕은 농민들에게 산성에 올라가 저항을 계속하라고 명령을 한 다음 강화도로 피신하여, 거의 30년 가까이 몽골에 완강하게 저항을 하다가 1259년, 무신 지배자들을 축출한 문신 정권 하에 항복을 했다.

 

Ledyard(1983: 325)는 “원나라의 영토가 금 나라와 송 나라를 모두 흡수하게 되자, 만주 전체가 중국 본토와 합쳐져 동일한 통치권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 고려는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 고려의 북방 영토는 몽골이 빼앗아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열도의 가마쿠라 막부를 굴복시키려고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벌인 몽골의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는 수백 척의 배를 건조하였고 보급물자를 제공했다. 두 차례의 침공을 위해 고려는 900척의 배와 1만5,000의 수군, 5,000-1만명의 병사를 제공했지만, 심한 폭풍우로 인해 모두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11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대해 유화정책을 채택하여, 1274년에 쿠빌라이의 딸을 고려 왕세자에게 시집보냈다. 고집 센 고려 지배자들을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유전자적으로 틀림이 없는 방법으로 정복하려 한 것이다. 그 후, 고려의 왕위 계승자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야만 했다. 12 원나라의 부마(駙馬)국 형태로 고려 조정은 독립 국가의 통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 하지만 유전적으로 보면, 고려왕은 빠른 속도로 순혈의 몽골 왕자에 가깝게 되었다. 일종의 보복이라 할까, 고려의 여인이 1340년에 원나라 마지막 황제(順帝, 1333-1368, 1368년에 북경을 떠나 1370년에 몽골에서 사망)의 두 번째 부인인 기황후(奇皇后)가 되었다. Dardess(1994: 580)에 의하면, 그녀의 새로운 지위가 원-고려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몽골 조정 내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제2황후 추대를 반대했다. 그녀가 낳은 황자가 1353년에 후계자로 옹립되어 1370년에는 북원의 황제가 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기황후의 형제는,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한 1356년 공민왕(1351-74)에 의해 제거됐다. 기황후는 끈질기게 황태자를 졸라, 1364년에 원정군을 보내 고려왕의 교체를 시도했으나 몽골군은 고려군에게 전멸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소멸됐다. 14

 

1356년, 고려는 함경도 쌍성에 있는 원나라의 군 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냈다. 당시 지방의 토호이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의 협조는 고려가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68년, 기황후 일족이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원 나라 피난민들을 모아 일족의 몰락을 복수하고자 하였을 때, "공민왕은, 고려가 옛 고구려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만주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전통적 주장을 새삼 내세워 최영과 이성계 등 두 명의 뛰어난 장수들을 만주로 보냈다. 이성계(1335-1408)는 함경도에서 3대에 걸쳐 천호(千戶)장을 지낸 군인 집안의 5대손이었다. 이성계가 함흥평야 방면으로 쳐올라 갈 때, 최영은 서쪽의 요동으로 쳐들어가 1371년에 요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요하의 동쪽이 모두 자신의 땅이라고 거듭 주장을 해 오던 고려 조정은 정작 그들이 얻은 것을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회군을 시켰다. 곧이어 명나라 군대가 요동 지역으로 진주하여 논쟁의 여지를 영구히 제거시켜 버렸다"고 Henthorn(1972: 129)은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4 (2005. 8. 13)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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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카스피해 부근의 볼가강 하류, 정복한 킵챠크 돌궐족 거주지역 한 복판에 수도를 둔 바투의 킵챠크 칸 제국은 역사책에서 골든 호드(알탄 오르도)라 부른다. 유럽의 이들 몽골 지배자들은 동화되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징기스칸의 제국들이 중국, 페르시아, 투르키스탄 등지에서 모두 축출된 다음에도 계속 명맥을 유지해, 1502년까지 유럽 땅에 진을 치고 존속했다. 테머레인 대제(1336-1405)는 자신을 징기스칸과 차카타이의 후손이며 계승자라고 공언하였으나, 사실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의 돌궐 귀족계급 출신이었다. 그는 1397년에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서 그 위대한 징기스칸 가계의 일원이 된 것이다. 티무르의 장대한 정복 위업은 징기스칸 군대의 규율 속에서 탄생한 돌궐 군사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2. 핵심을 이루는 몽골족 군대에 추가하여, 신부군, 여진군, 거란군, (심양)고려군, 기타의 군대들이 있었다. Hsiao (1978: 15-6, 74, 174) 참조.

元史 卷九十八 志第四十六 兵一 …其繼得宋兵 號新附軍 叉有遼東之糺軍 契丹軍 女直軍 高麗軍 …

3. Hsiao (1978: 14, 25)

4. Hsiao (1978: 33-39)

5. Jagchid and Symons(1989: 19-20)에 의하면, “징기스칸(1206-1227)은 금 나라와 변경교역 및 조공을 확보하여 중국으로부터 필수품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일단 교역과 조공 확보의 길이 막히자, 징기스칸에게는 전쟁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징기스칸이 1213년에 북중국 평원에 진입하여 중도(中都, 북경)를 에워 쌓을 때, 그의 목표가 영토적 혹은 정치적 지배보다는 물자 확보에 있었다는 것은, 그의 행동을 보면 명백하게 나타난다 당시 금나라 조정으로부터 대규모의 선물을 받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다음에,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징기스칸은 영토를 점령할 생각은 없었고, 단순히 전리품을 얻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려 하였다. ... 그러나 1236년, 몽골 조정의 거란족 출신 고문인 옐루추차이(耶律楚材)와 …간의 대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몽골의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옐루추차이는 오고타이 칸에게, 귀족들이 백성들로부터 멋대로 강탈을 하게 내버려 두지를 말고, 조정이 관료들을 임명하여 매년 직접 세금을 걷어 들이고, 연말에 이를 귀족들에게 분배하도록 권고하였다.”

6. Fairbank and Goldman (1992: 122-123) 참조. Hsiao(1978: 3)는 “몽골족은 중국을 전통적인 중국식으로 통치하려 하지 않고, 군사적인 사고방식으로 통치하려 했다”고 말한다.

7. Hsiao (1978: 57-60) 참조. 메마른 중앙아시아에 15만 명의 기병대를 유지시켜야 할 필요는 원나라 재정을 고갈 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8. 남송 멸망 후, 원나라는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사람들은 전쟁을 몰랐으며, 장수들의 후손은 대대로 지휘관직을 세습하였다. Hsiao (1978: 26-7) 참조. 몽골 병사들은 영농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가족은 만성적인 성인남자의 부재와 군 지휘관으로부터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가난해진 군호와 그들 상급 지휘관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졌다. 이전에 북중국에 주둔을 하면서 농토를 배정 받은 금나라 여진족 병사들은, 훗날 청나라의 팔기군들 모양, 비록 힘은 들었지만 영농생활을 하면서 병역의무를 수행하였다. 왜 몽골 병사들은 중국 땅에서 적정 수준의 삶을 전혀 영위할 수 없었을까? Hsiao(1978: 20)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소규모이나마 영농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몽골족은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9. Janhunen (1996: 166) 참조. Ledyard (1983: 326)는 “중국지역에 이주 정착했던 대부분의 거란족과 여진족은 그들의 정복 통치가 끝났을 때 한족에 동화되어 흔적이 없어진 데 비해, 몽골족들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몽골족 그대로 살아 남았다”고 말한다.

10. Lee (1984: 148) 참조. 몽골이 금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209년이고, 수도를 함락시킨 것은 1215년이었으나, 19년이 지난 1234년에 가서야 비로서 금 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11. 두 번째 몽골 원정군의 규모는 중국 남부로부터 출발한 3,500척의 배와 100,000만의 병사들, 고려로부터 출발한 900척의 배와 40,000명의 병사들이었다.

12. 훗날 충열왕(1274-1308)이 되는 고려 왕세자와 몽골 공주와의 결혼은 1274년에 이뤄졌다. 이후 100여 년 동안 7명의 몽골 공주가 고려 왕자와 결혼을 하였으며, 그들 자식 중 세 명이 고려 왕위에 올랐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3. 몽골은 고려 왕실의 지손(支孫)을 데려다 요양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상당한 규모에 달하는 그 지역 고려인 사회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훗날 고려의 군주들은 “심왕(瀋王)”이란 명칭으로 요양 지역에 대한 형식상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 Henthorn (1972: 123) 참조.

14. 元史 卷一百一十四 后妃一 完者忽都皇后奇氏 高麗人 生皇太子愛猷識理達臘…初…進爲宮女…立爲第二皇后 初奇氏之族在高麗者 怙勢驕橫 高麗王怒 盡殺之 [至正] 二十三年 后謂皇太子曰 汝何不爲復讎耶? 遂立高麗王族人留京師者爲王…用兵一萬…過鴨綠水 伏兵四起 乃大敗 餘十七騎而還 后大慚… 二十五年…皇后崩…后宜正位中宮 帝不答…二十八年 從帝北奔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 至正十三年 [1953] 冊立皇太子…太子奇皇后所出也 奇氏高麗人本微賤…皇后兄子奇轍爲大司徒富貴震一時… 十六年 有密告奇轍潛通 雙城叛民謀逆祺殺之 夷其族… 二十三年 皇太子欲爲奇皇后復仇 乃立德興君…爲國王… 發遼陽行省兵送之…祺聞其事…書曰 世祖皇帝… 釐降帝女於忠烈王 且許以不革國俗 以至於今… 二十四年 [1964]…以大兵一萬圍義州爲崔瑩等所敗 一軍皆沒

新元史 卷二十六 本紀 惠宗四 至正二十四年 春正月 [1364] 朱元璋自稱吳王 是月 崔帖木兒與 高麗人戰於定州敗績 … 三十年 [1370] 惠宗崩於應昌 皇太子卽皇帝位… 改元宣光… 宣光元年 明太祖洪武四年也 [1371] 遼陽行省…降於高麗 十月 高麗兵陷五老山寨… 二年 [1372] … 大破明…兵於嶺北自是明兵不復渡漠

 

 

원나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중세 몽골어: ᠳᠠᠢᠦᠨᠶᠡᠬᠡᠮᠣᠩᠭᠣᠯᠤᠯᠤᠰ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2][3] 또는 대원국(大元國, 중세 몽골어: ᠶᠡᠭᠡ
ᠶᠤᠸᠠᠨᠤᠯᠤᠰ 예케 유완 울루스), 약칭 (元)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카안 울루스이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보르지긴 가문의 수장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고비 사막 남쪽, 화북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대몽골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남쪽으로 이전했다. 먼저 카이펑(開平)으로 옮겼다가 훗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를 세우고 다시 그곳으로 이전했다. 대원 울루스라고 불렸으며 아울러 이때부터 중국식 국호로는 대원(大元)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시기를 ‘원 왕조’라고 부른다.[4]

몽골인들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화북 지역을 다스렸는데 1271년에 쿠빌라이 칸이 모든 세력을 모아 원나라를 개창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남진하여 남송을 멸망시키고 정복왕조를 건국하였다.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모두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의 다른 칸국들과 종속 관계를 끊고 독자적으로 현재의 중국과 몽골 지역들을 지배했으며, 일본, 대월, 참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정복왕조 중에 하나이며, 1368년에 명나라의 군대에 밀려 몽골 지역으로 쫓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몽골 지역에서도 원나라 황족들은 북원을 세워 원나라 왕조를 지속해나갔다.

역사[편집]

 쿠빌라이 칸 이전의 몽골 국가는 몽골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 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다. 중국의 경우 한족들은 몽골제국에 대해 한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민족을 4등급으로 나누어 한족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중국 학자 신력건에 의하면 당시 몽골 원나라는 이전 동아시아에는 퍼지지 않았던 후기 불교이며 성적 샤크라를 중시하는 티베트의 라마교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원나라에 있는 모든 몽골인들은 샤크라 라마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군인 1명당 100명의 한족들이 배당되어 한족들이 칼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감시하였고 라마교를 핑계로 한족여성들은 몽골 군인들에게 초야권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당시 한족들은 첫째 아이는 살해하는 풍습까지 생겼다. 이런 초야권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원나라에서의 기록에만 보여지는 특수한 문화로 동아시아에서는 한족에게만 가해지는 지배 방법이였다.[5]

몽골 제국의 재편[편집]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 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 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 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 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아리크 부케의 항복으로 인해 대칸의 지위는 다시 통합되었으나, 중국 서쪽의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에서의 대칸의 위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1269년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차가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 그리고 주치 가문(킵차크 칸국 혹은 금장한국(Golden Horde))의 여러 왕이 탈라스 하반에서 모여 중앙아시아의 대칸령을 분할해 쿠빌라이에 대항해 자립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이윽고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중앙아시아 여러 왕 사이에서 맹주의 지위를 확립하고, 하이두의 반항은 몽골 제국을 동서로 나뉘게 된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하이두의 난)

그 사이 쿠빌라이는 중국식 정치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중국 북부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 지방에는 몽골 제국의 금나라 공략의 과정에서 자립해 몽골에 귀의하여 화북 각지에서 호족 노릇을 하던 한족 현지군벌(한인호족)들을 평정하고 그리고 마침내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6]이라고 하고 기존의 중원을 통일한 왕조의 맥을 잇게 된다. 이로써 칭기즈 칸이 세운 거대한 몽골 제국은, 서부의 여러 칸국들과 중국의 대칸령 사이의 느슨한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몽골의 중국 정복[편집]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원나라가 공격을 하여 조공을 하고 있던 상태였지만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남송을 그대로 두는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賈似道)에게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군을 몰아 후난성과 장시성을 유린하였고 남송은 허페이 지역과 항저우에서 대몽항쟁을 벌였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3번의 원정을 통해 광저우까지 함락시키고 남송에 남은 것은 수도와 항저우 지역뿐이였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켜 남송의 도시들을 차례로 유린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에 수차례 원정 정벌을 하여 남송과의 전쟁은 수십년이나 지속되었다. 몽골인들과 여진족 등은 남송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유린하였고 남송은 그때마다 쿠빌라이와 협정하여 조공을 보냈으나 남송은 점점 약해졌다. 남송의 여러 도시들이 정복되어 함락되었고 남의 한족들은 강이민족 몽골을 몽고라고 폄하하며 한 저항을 했으나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원나라는 군인이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질렀고 특히 항주의 피해는 심각하였다. 1274년 쿠빌라이는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함락되어 남송군이 전멸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지역의 명칭을 모두 개편하였고 남송이 있던 지역을 모두 성(省)으로 나눠 행성을 설치하고 몽골인 통치자들을 보내 각 행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각 지역을 성(省)으로 나누어 불렀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사로잡혀 원나라의 수도로 연행되었고 황족의 여성들은 기생관으로 이동시켰다. 남송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섬길 수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쿠빌라이는 원정 정벌하였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투항한 한족들은 어느정도 벼슬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한족들은 이민족이였던 몽골군에 투항하지 않고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몽골인들은 한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농장들을 만들었고 한족들은 재산을 빼앗겨 흩어졌다. 몽골인들은 계급을 4단계로 나누어 1단계 계급은 몽골인과 색목인, 2단계 계급은 부마국 고려인과 투항한 여진족과 거란족, 3단계는 복속된 화북 한족 그리고 4단계 최하층은 남송인으로 나누었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구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는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쇠퇴기[편집]

몽골은 남송을 정벌했으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일본 공격에 실패하여 많은 몽골인들이 죽자 원나라는 이번엔 복속된 남송인들을 일본으로 보내 1281년 다시 일본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태풍과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남송을 배신하고 투항한 한족들은 그만한 대우를 원했지만 몽골인들의 지배는 가혹하였고 한족들은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군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한족들의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지배에 대한 한족들의 불만과 공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명나라의 건국[편집]

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 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왕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왕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왕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와 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명나라 건국은 단순히 몽골민족의 패배는 아니였다. 원나라를 지나면서 지배층이던 몽골민족의 피가 강제적으로 한족 피지배층에게 주입되었고 피지배층 한족들은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원나라에 충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명나라 건국에도 당시 칼 등을 소지할 수 없었던 한족들을 대신에 몽골 민족들이 주원장에 협력하여 명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몽골민족들은 명나라에서도 군사적으로 지배층에 있을 수 있었다. 즉 화북에서는 먼저 황하의 개수 등에 의해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로 인해 원나라의 구심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지배층에 있던 몽골 장수들의 지원으로 인해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할 수 있어서 당시 군사 부분에서는 명나라 때에도 몽골인들이 지배층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족의 관리 중에는 한족이 피지배층이면서도 몽골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앞에서 나온 가노를 시작으로 원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명나라군과 반란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많았고, 1367년 명나라군에게 붙잡힌 호부상서 장욱은 주원장의 항복권고에 대해 “몸은 강남에 있어도, 마음은 삭북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북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북원입니다.

북원에서는 1388년 토구스 테무르의 자손이 끊어지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대칸 세습이 끝나고, 쿠빌라이 왕조인 원나라는 단절되었다. 차하르 칸국은 나름 힘을 길러 다얀 칸 때에 이르러 대원황제를 다시 선포하며, 명나라에서 오는 한족 이주민들을 시켜 귀화성이라는 중국식 도시를 짓게 하기도 했다.

원나라 시대의 석제 향로

영향[편집]

원나라 시대에는 민족성 다양성에 힘입어 다양한 문화적 발전이 일어났다. 소설과 연극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며, 특히 백화문을 사회 각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 중앙아시아와 중원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며, 동양과 서양 간 교류도 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 몽골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문화권들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고, 수없이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중화권으로 쏟아져 들어옴에 따라 중국의 문화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무역과 경제가 크게 번성하였으며,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에서 뻗어있는 무역로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이 시장 경제를 촉진하였다. 원나라 황실은 불교를 신봉했는데, 특히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원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무슬림들은 중동의 발달한 의학, 약학, 의복, 식품 등을 동아시아에 전파하였으며, 당근, 튤립, 레몬, 멜론, 사탕수수, 목화 등의 고급 작물들도 원나라 시대에 동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서양의 악기들도 도입되어 중국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는 이슬람교에게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아시아 지역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와 로마 가톨릭도 관용적인 원나라의 종교 정책에 힘입어 중국으로 진출했고,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불교도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도교는 원나라의 박해를 받아 세가 주춤하기는 하였다. 유교도 중요시되었다. 원나라는 선대 왕조들의 본을 받아 유교적인 관료제를 채택하였고, 유교적인 과거제를 통하여 관리들을 임용하였다. 이는 금나라 통치 시절 이후 북부 중국에서 단절되었던 유교적 학풍을 되살렸던 것으로, 한족 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실시했던 것이다. 원나라에서는 워낙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보니 탐험 문학도 발달하였고, 지도학, 지리학, 수학, 천문학, 역법 등도 크게 발전하였다.

원나라 대에 중국에서 발명된 물건들도 많이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질산 칼륨, 종이, 도자기, 카드, 의약품 등이 주로 수출되었으며, 중국에서는 활발한 무역에 힘입어 칠보와 유리 공법이 발달하였다. 원나라는 뒤이어 중국을 통치한 명나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초대 황제 주원장은 몽골이 군사적으로 중국을 통치한 방법에 감탄하여 이들의 군사 기지들과 요새들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정도였다.

서양인들이 동양으로 여행을 왔다가 남긴 첫 기록물이 바로 원나라 시대에 나왔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동방견문록이 바로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시대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저서에 '칸발리크'라는 도시를 다녀왔다고 적었는데, 이 것이 바로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였다. 동방견문록은 당시 동방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던 서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국적인 분위기와 생생한 묘사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책 내용을 분석하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다녀온 시기는 1299년으로 보인다. 다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가장 핵심적인 건축물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았고, 전족 등에도 한마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에 의심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동방견문록이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모험에 기반하여 쓴 것이며 대부분이 매우 정확하고 독특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원나라 정부는 다양한 공공 사업을 벌였다. 쿠빌라이 칸의 핵심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곽수경이 있었는데, 그는 원나라가 태음태양력을 정확히 365.2425일로 계산하는 것에 업적을 남겼다. 이는 현대의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것과도 26초의 오차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정확한 수치였다. 원나라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도로와 수로 사업도 활발히 벌였다. 기근을 대비하기 위하여 제국 전역에 곡식창고들이 지어졌고, 수로를 건설하여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량을 늘렸던 것이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에는 거대한 인공 연못, 언덕, 산, 공원들과 함께 거대한 칸의 궁전이 지어졌고, 이 아름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전해진다. 대도는 이 때 대운하의 종착점으로 기능하며 경제적인 부를 누렸는데, 이는 대운하가 원나라 시대에 재정비되어 내지와 해양을 연결하며 중국 내부의 무역, 일본, 고려, 심지어는 유럽까지도 활발하게 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인 여행가들은 이 대운하를 통하여 새로운 작물들, 수수새속, 이국적인 요리법 등을 들여와 중화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원나라는 이전에도 북위 등 많은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 전역을 통치하였고 한족들에게 있어서 이민족 지배자가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흔한 일이였다. 이전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도 중국 중부 지역까지 통치하기는 하였고 그때도 여전히 한족이 세운 송나라가 남부 지역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었으나 금나라에 조공하였다. 몽골 역사학계는 보통 원나라를 몽골 제국의 후신으로 보며, 이 때를 몽골의 최전성기로 보기도 한다. 몽골인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몽골족들은 이같은 세계관에 입각하여 원나라를 '생명, 행복, 평화, 힘의 근원이자 이 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라고 찬양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원나라를 중국의 왕조로 평가하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원나라 시대에 한족이 전혀 절대로 융화되지 못했고 오히려 한족들은 2등 시민으로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황실의 색은 백색이었다. 금속을 상징하는 색깔인데, 이같이 나라의 상징색에 원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나라 시절부터 거슬러 온 것이다. 중국 전통의 용무늬 장식은 일 칸국에게도 전파되었다. 일 칸국에 피지배층인 민족들은 칸들을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불렀다.

정치[편집]

쿠빌라이는 중국식의 행정기구를 완비시켰는데 내각에 해당되는 최고 행정관청인 중서성(中書省), 군사(軍事)를 다루는 추밀원(樞密院), 감찰기구인 어사대(御史臺)는 모두 송대(宋代)의 형태를 답습한 것으로서 이 점에서도 몽골로부터의 이탈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중국 왕조에서 볼 수 없었던 특색도 많았다. 칭기즈칸은 제국(帝國)의 영역이 확대되자,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의 농경문화권에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지 행정관(行政官)을 두어 민정(民政), 징세(徵稅) 등의 정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것이 다루가치로 불리는 관직으로서, 원의 시대가 되자 각 지방 관청 및 군관구(軍官區)에 설치되고 원칙적으로 몽골인을 임명함으로써 감찰기구의 성격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이 다루가치 위에는 이미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 대다루가치가 총괄적으로 설치되었는데, 대다루가치의 관할범위를 하나로 묶어 중서성(中書省)의 출장기관인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시대의 행성은 정토(征討) 등에 수반되는 중앙의 임시 출장기관인 동시에 지방 행정부도 겸했었는데, 원대(元代)에 와서 특히 강남을 통일 한 뒤로는 11행성으로써 중앙 직할지인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산시(山西), 내몽골(內蒙古) 이외를 구획하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지방구획의 단위인 성(省)은 이 때의 원나라 행성(行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각 행성 아래에는 명칭만 송을 계승한 노(路), 그 밑에 주 (州)·현(縣)을 두어 그것을 축(軸)으로 하여 한족(漢族) 통치가 전개되었다.[7]

신분 제도[편집]

원나라는 자국인 제일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국족)→색목인→한인(여진(女眞), 발해(渤海), 고려(高麗)를 비롯하여 한인세후(漢人世侯) 아래에 있던 중국인)→남송인(남인)의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하였다.[8] 10 가구의 한인당 한 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몽골족은 이들의 반란이 두려워서, 여러 사람이 만나거나 모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10 가구에 오직 하나의 부엌칼만 가질 수 있게 하는 등 차별 정책이 극심했다. [9]

물론 이러한 조항이 실시된 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송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한족 호족들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태반이었다. 애당초 몽골은 이 차별 정책을 중국 전토에 시행할 만한 행정 역량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는 원나라측에서 갈아엎으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자체 분열로 그럴 여력이 없었다.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철경록 등에서도 나온 것처럼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자들이나 정복 과정에서 얻은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지만 의외로 귀족[10]들이 망했고 양민들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11]

원나라 왕조 아래에서 한족이 몽골인을 노예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중국 학자들은 더 이상 '4계급'(class)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4계층'(rank) 또는 '4지위'(level)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4계층은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권력(social power)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특전(previlege)을 규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몽골인들이 속해 있던 계층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한인' 또는 '남인'으로 폄하된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몽골 정복 이전의 중국 사회에서와 같은 부와 지위에 따른 계층 구분이 계속해서 존재했다. 한때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명성과 특권을 누리던 중국 상류층들에게 있어서 원나라의 제도가 이전보단 현상 유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담보해주지 못했던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몽골 정복 초창기에 노예상태(servitude)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 사회는 일시적인 진통을 겪었을 뿐 영구적으로 변형되지 않았는데, 몽골의 서투른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덕분이었다.[12]

이에 따르면 원나라 통치 시기 '4계층' 구분은 귀족들에게나 적용되는 특전(previlege)의 정도였을뿐 일반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구분짓는 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기했듯 행정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제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한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강남을 아예 한족들의 자치에 맡겨 두고 중앙에만 신경 쓰게 되니, 이로서 동시대 남송인들은 고려인들과 달리 몽골풍을 강요당하지도 않았고,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개최하는 등 사실상 중세 유럽의 봉건 국가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남송 사회가 누릴 수 있었던 이와 같은 특혜의 배경엔 몽골 침략 당시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국가 지도부의 공덕이 있었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투항하는 과 남송의 귀족 및 군벌들에게 영지를 분봉하고, 왕부를 설치해 자치를 실시하도록 했는데, 전체 원 국토의 1/3을 이 왕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며, 왕부의 호족들은 원정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징세권과 징병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몽골인들은 한족들로만 이루어진 군사 조직인 '한군만호부'도 두었는데, 지휘관들은 그 직위와 둔전을 대대로 세습했다. 이러한 토대가 결국 중국이 몽골의 지배를 1세기만에 종식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는바[13], 몽골의 침략에 오랜 기간 항전하며 권리를 관철시켜나간 국가 지도부의 항전 의지와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문화[편집]

몽골제국은 멀리 유럽에 펼쳐진 대제국으로서 참치(站赤) 제도가 정비되자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실크 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도 증가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여행가가 속속 동방 세계를 방문했다. 그리고 송나라의 경제력을 이어받아서 해상무역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중통원보교초, 지원통행보초 등의 지페를 유통시켜서 어음이 사용되고 금융업이 발전했다. 그리고 바닷길과 하천으로는 양쯔강과 대운하, 해안지대의 시박사를, 육지로는 중국 지역에만 1500개나 존재할 정도로 많은 역참을 이용하여 물자의 유통량과 속도를 모두 크게 증가시켜서 원나라의 부는 세계 어디를 봐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서방 문화의 유입 가운데서 중국에 전래한 이슬람 문화는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여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이나 미술에는 주목할 것이 많다. 중국의 전통 문화는 원조(元朝)가 무시했기 때문에 정체했다. 특히 유학의 경시는 학문 발전의 장해가 되었다. 반면 서민 문학은 성행하여 중국 문학사에서 한문·당시(唐詩)·송사(宋詞)와 견주는 대표적인 문학의 하나인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戱曲)이 융성했다. 회화에서는 송의 원화체(院畵體)나 문인화(文人畵)의 화풍을 엮은 명장(名匠)이 배출되었다. 또한 원조의 종교 정책은 극히 관대하여 이슬람교·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퍼졌고, 티베트 불교도 티베트에서 전파돼 중국 불교 역사에 이채를 던졌다.[14]

음악[편집]

원나라 시대의 음악을 호악(胡樂, 오랑캐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원나라 악기가 해금과 태평소다.

미술[편집]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거의 대부분 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 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의 화가들도 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北宋)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15]

문학[편집]

가무(歌舞), 음곡(音曲), 연기(演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원곡, 즉 원잡극(元雜劇)이야말로 바로 몽골 왕조의 지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성숙하여 발전한 것이다. 원잡극은 희극(戱劇) 등(직접적으로는 金의 院本雜劇)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말하고 동작을 보이는 것인데, 대도(大都)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북곡(北曲)이라 불린다.원의 곡은 4막으로 이루어지며 비파(琵琶)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정말(正末), 정단(正旦)을 비롯하여 충말(沖末), 정(淨), 축(丑) 같은 배역이 정해지며, 주역의 말(末)과 단(旦)만이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어(口語)를 한껏 구사하고 과거(科擧)의 문이 막힌 지식인층에서 작자(作者)를 끌어들여 신선한 문예의 한 장르로서 지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북곡이 엄격한 규칙을 갖는 데 반해 원의 중엽 이후 강남(江南) 지방에서 일어난 남곡(南曲)은 자유롭고 무대의 변화가 많고 화려하다. 남곡의 대표작으로는 『비파기(琵琶記)』가 있다.[14]

 

 

<참고자료>

 

원 왕조의 성립 (naver.com)

 

 

원대 서민문화의 발달 (naver.com)

 

 

동서 교류의 확대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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