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식민사학의 왜곡은 한국사의 다방면에 걸쳐있는데 고대 한·일 관계사도 그중 하나이다. 한반도의 남부를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직접(가야), 혹은 간접(백제·신라) 지배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승부를 벌였다는 이른바 '남선(南鮮)경영론'은 임나일본부설과 쌍둥이 꼴이다. 광복 이후 남한과 북한의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의 이런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북한
문화·라이프 |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2016.06.22

1874년 일본 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신궁(神宮)의 창고에서 날 양쪽에 세 개씩 가지가 어긋나게 달려있는 길이 74.9㎝의 칼이 발견됐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이 칼은 두꺼운 쇠녹이 칼날을 덮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금빛 글씨가 보였다. 일본 국학을 공부한 궁사(宮司) 스가 마사토모(菅政友)가 끌로 쇠녹을 갈아내자 앞면 34자, 뒷면 27자
문화·라이프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6.22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서기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에만 있는 용어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임나일본부설(說)은 근대 일본 역사학계가 만들어낸 역사를 가장한 허상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이 4~6세기 무려 200년 동안 백제·신라·가야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근대 식민지같이 경영했고, 그 통치의 중심으로
문화·라이프 |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 2016.06.15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덴무(天武·재위 673~686) 일왕의 명에 따라 680년 무렵 편찬이 시작돼 720년에 완성됐다.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덴무 일왕의 부인이자 후임자인 지토(持統·재위 686~697) 일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일본의 정부 공식 기록, 민간 전승 기록과 함께 외국 역사서도 이용했는데 한국 관계 기록은
문화·라이프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6.15

진(秦)의 중국 통일과 한(漢)의 주변 정복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 중국 중심 천하질서가 처음 확립됐던 동북아시아는 4세기 들어 격동에 빠져들었다. 한나라에 이은 통일 왕조였던 진(晉)은 300년 황족들의 권력 투쟁인 8왕의 난 이후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진의 북쪽과 서쪽 변경지대에 있던 흉노·선비·저()·강(羌) 등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문화·라이프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6.08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해서 기원후 660년에 멸망했다. 도합 678년 동안 왕이 31명 재위했는데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였다. 당시 수도는 한성(지금의 서울)이었고 남쪽으로 남해안까지 영토를 넓히고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제압하며 평양성까지 진격하였다.근초고왕은 바다 건너 중국의 요서 지역에도 군대를 보내
문화·라이프 | 김기섭 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과장 | 2016.06.08

광개토왕릉비는 높이 6.39m, 너비 1.3~2.0m로 위와 아래가 허리 부분보다 약간 넓다. 원석 네 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무게 37t의 거대한 비석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영토가 대부분 다른 민족의 손에 넘어간 후 점차 우리 민족의 기억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비석이 우리 문헌에 등장한 것은 1445년 '용비어천가'였다. '평안도 강계 서쪽에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6.01

414년 고구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비석을 수도 국내성에 세웠다. 그로부터 1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 비는 오늘날 국제적 논쟁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1775자가량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문헌 자료에 없는 많은 역사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중에서도 광개토왕릉비문이 논란의 한가운데에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 2016.06.01

중국의 동북 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과 내몽골 동부, 러시아의 연해주·아무르주·하바롭스크 남부는 오랫동안 중국이나 러시아와 구별되는 역사 공동체를 이루어왔다. 역사적으로 '만주'라 불린 이 지역의 주인은 동호(東胡)·숙신(肅愼)·예맥(濊貊)족이었다. 세 종족은 2000년 넘게 이 지역을 무대로 흥망성쇠와 합종연횡을 거듭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서쪽과 북쪽에서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5.25

중국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몰락에 대응해 중국의 단결을 목표로 한 '신(新)중화민족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이를 체계화하기 위해 중화 민족의 역사 구심력 강화를 위한 '하상주(夏商周) 단대(斷代)공정'과 '중화 문명 탐원(探源)공정'을 추진했다. 그리고 중국 영토 내 이민족들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북방공정(몽골족), 서남공정(티베트족)과 동북공정(조선족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 2016.05.25

 

요하문명은 중국 요하(遼河) 일대에서 성립·발전한 고대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학계에는 요하문명이 중원 지역보다 먼저 문명 단계에 진입하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가 적지 않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홍산(紅山)문화가 있다.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경부터 약 1500년에 걸쳐 내몽골 동부와 요령성 서부의 시라무렌하와 대·소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김정열 숭실대 사학과 교수 | 2016.05.18

요하문명과 홍산문화는 한국고대사와 관련해서도 주목받고 있다. 종래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무대를 주로 한반도 안에서 찾아왔는데 1980년대 이후 중국 내몽골과 요령성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한국에 알려지면서 일부 고고·역사학자와 재야 연구자들이 이를 고조선·단군과 연결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주류 고대사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유보적이고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5.18

북한 학계에서 단군은 오랫동안 신화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1993년 9월 28일 북한 학자들이 평양 근처에서 단군릉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며칠 뒤인 10월 2일 북한 사회과학원은 '단군릉 발굴 보고'라는 첫 공식 보고문을 발표했으며, 10월 12~13일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단군은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2016.05.11

고조선에 대한 북한 학계의 연구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월북 학자 도유호가 이끄는 고고학계는 전후 복구에 따르는 발굴을 활발히 전개했고 역사학계는 유물사관적 관점에서 고조선의 사회 성격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모색했다.이런 준비 작업을 바탕으로 1960년대에 들어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전개됐다. 북한의 역사·고고·민속·국문학자들은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5.11

'한사군'이라고 하지만 낙랑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전한(前漢) 시기 낙랑군은 한나라의 군현으로 관할 지역은 물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제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서기 8년 중국에서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우자 낙랑에서도 23년 호족인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신나라를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5.05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군현(郡縣)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런 지배에 대해 토착민이 저항한 결과 기원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요동으로 후퇴했으며, 서기 313년에는 마침내 낙랑군이 멸망했다.군현제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지방관이 군현에 파견돼 중앙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앙집권체제이다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 2016.05.05

중국과 한국의 문헌 자료를 통해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오래전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기록들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 많아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당서(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관찬 역사서들은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성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다르게 기술한 중국
문화·라이프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4.28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1년여의 힘겨운 전쟁 끝에 왕검성을 함락하고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4개의 군현을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는 당시 사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 낙랑군을 제외한 진번·임둔·현도군은 토착민의 반발로 수십 년 만에 통폐합되거나 외곽으로 쫓겨났다. 낙랑군만 서기
문화·라이프 | 오영찬 이화여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 2016.04.28

고조선의 영역에 대한 다양한 학설은 고조선의 주요 지명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은 '패수(浿水)'였다. 패수는 옛 연(燕)나라 땅에 살던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할 때 건넜던 강이고,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 두 나라 군대가 격전을 벌였던 장소였다.'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등 중국 역사서들은 패수를
문화·라이프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4.13

고조선사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료인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연(燕)나라 전성 시기(BC 4~3세기)에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장새(障塞)를 쌓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조선은 요동 바깥의 한반도 서북지방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 책 관자(管子)나 전국책(戰國策) 등에는
문화·라이프 | 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 2016.04.13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단군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 이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이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환단고기(桓檀古記)' 등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들이다. 이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환단고기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던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묶어서 계연수란 인물이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선임기자 | 2016.03.30

언제부터인가 단군(檀君)에 대한 이야기를 '단군신화'라고 하면 '일제 식민사학의 아류(亞流)'로 비난받게 된다. 신화란 허구를 뜻하는데, 일제가 단군조선의 역사를 날조로 돌리고 한국 역사의 유구함을 부정하기 위해 단군신화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일본인들이 단군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부터이다. 대개는 '단군전설'이라고 했다. '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교수 | 2016.03.30 

 
중국 산동반도의 동이와 만주·한반도의 동이(東夷)를 같은 종족으로 보는 견해도 일찍부터 제기됐다. 중국 서북부에서 수렵 생활을 하던 동이가 동쪽으로 이동해서 한 갈래는 산동반도로 들어갔고, 다른 한 갈래는 만주·한반도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역사학자 김상기 교수는 진시황 이전 시대, 산동·회하 유역의 동이와 만주·한반도의 동이(예맥족)가 동족계 또는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이선민 기자 | 2016.03.23

'동이족은 한민족의 조상인가.'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내에 있었나.'고대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조선일보는 우리 고대사의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강래 전남대 교수)와 함께 핵심 쟁점을 짚어보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강좌는 지난 9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최된다
문화·라이프 > 문화 일반 |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 2016.03.23
 

출처;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 조선일보 (chosun.com)

 

 

[진짜고대사]

 

 

‘민족사관’ 아니라 ‘반공-냉전사관’이다

1968년 창간 반공잡지 는 한국 유사역사 뿌리… ‘환국’ 앞세워 공산국가 중국·북한 부정하고 박정희에 러브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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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역사학계가 친일로 보이나요?

일제강점기에 오염된 친일사학 바로 세우기에 힘쓴 역사학계 ‘식민사학 극복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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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 ‘국뽕’은 통한다

중국의 ‘고대사 판타지’ 훙산문화, 한국 고대사에 편입시키려는 사이비역사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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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내세우는 ‘가짜’ 프레임

2600기 무덤, 1만5천여 점 유물 등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물증을 무조건 가짜이고 조작이라 말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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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 하는 사이비역사가들 올바른 역사 연구에 전문적 훈련·지식 뒤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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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광개토왕비

19세기 제국주의 일본이 속았다… 광개토왕비에 숨은 5세기 고구려인의 진짜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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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추종 학자 일본에도 없다”

도종환 장관 발언 팩트체크… 학계는 ‘임나일본부는 외교교섭단체’ 관점에서 실체 찾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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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짜고대사 : 기획연재 : 한겨레21 (hani.co.kr)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고여있는’ 민족사 대신 ‘흘러가는’ 고대사

제국적 면모와 족보 강조하기보다 다양한 종족 간 스며듦에서 고대 한반도의 문화적 본질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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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국사’에는 없는 ‘앎의 공동체’의 긴밀함… 일본의 ‘관념적 번국론’이 교류 실체를 가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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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민, 망명지로 왜를 택하다

백제와 신라가 ‘동족’이고 왜국은 ‘이민족’인 국사관에서는 의아하겠으나 660년대 백제인의 혈맹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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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백제와의 친밀도에 외교적 판단 더해 구원 나섰으나 ‘백강 전투’에서 참패… 이후 ‘대륙 불간섭’ 정책 뿌리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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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위해 왜를 이용했던 가야 소국들

왜와의 동맹에서 백제에 밀리며 결국 신라에 병합… 의 일본부는 아라가야의 대왜 관계 전담 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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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뿔 난 사람’의 진실

설화로 채워진 에서 추려본 사실적 ‘알맹이’… 제대로 해석하면 가야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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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 한-일전 ‘임나일본부설’

한국 쪽 기록은 태부족, 일본쪽 기록은 창작물 수준… 민족주의 바탕한 자존심 싸움만 진행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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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선 승려가 무당?

고승대덕 자격 요건이 ‘신비체험’, 통치자도 수용 조건으로 ‘기적’ 내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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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식인의 탄생

변방의 고승 보덕과 ‘평등’ 설파한 의상… 6∼7세기에 유교·불교의 도입과 함께 탄생된 한국 지성사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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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옥소리

정략혼 목적의 여동생 화형쇼와 21세기 간통죄 판결은 여성 억압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웅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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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일어나 신라를 끝장내다

9세기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초적’, 계급투쟁 통해 신라 왕조의 몰락 재촉한 ‘반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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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는 남근석의 나라

선덕여왕 옥문곡 설화와 지증왕의 음경 자랑… 성리학적 엄숙주의가 ‘성’을 지우고 ‘동방예의지국’을 덧씌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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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처럼 ‘반당’이 있었을까

통일신라시대의 ‘미국’ 당나라… 제국이란 살육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시차와 공간을 넘는 문화의 장이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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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에 ‘우리’란

고대국가는 종족적 정체성을 지녔을까… 백제는 계층별로 언어가 달랐고 두 번의 통일 뒤에도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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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바치면 속국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양립 가능해… ‘단순한 허례’로 치부하는 것도 부적절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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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불교국가의 이루지 못한 꿈

승자의 역사 속에서 잔혹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고려의 창립자… 전면적 ‘명예 회복’의 날은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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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는 공포의 전제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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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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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은 무사 집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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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왜인들은 ‘후진 종족’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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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엔 왜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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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발해를 동족으로 생각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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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은 적국으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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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승려에게 국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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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은 철천지 원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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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정말 제국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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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침략자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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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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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보다는 소서노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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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 칼럼 : 한겨레21 (hani.co.kr)

 

 

 

 

드라마 속 ‘국뽕’의 향연

대하소설, 영화 곳곳에 스민 국가주의… 역사 부풀리는 선동 멈춰야

h21.hani.co.kr

 

 

권력과 사이비 역사가 쓴 ‘고대사 침탈사’

도종환 문체부 장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떠오른 ‘유사역사’ 그 ‘위험한 역사’가 손 뻗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의 폐기 전말

h21.hani.co.kr

 

 

<한겨레21>의 '사이비 역사의 역습'은 사실인가?

[기고]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한겨레21> 보도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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