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7-02-20 17:41수정 2017-02-20 20:34

강단 고대사 연구자들, 대중에게 다가서다 : 한겨레 (hani.co.kr)

 

강단 고대사 연구자들, 대중에게 다가서다

한국고대사학회 지난해 시민연속강좌 묶어 1, 2권 출간 낙랑군 강역, 동이족 역사, 홍산 문화 등등 민감한 고대사 현안들 대중에 알리기 꺼렸던 기존 학계 인식과 주장 항목별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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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서설 격인 1강 ‘근대사학의 형성과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최초의 근대역사서인 <독사신론>을 쓴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치열한 역사의식을 계승하되, 고조선 중심부가 시종 요령성 지역에 있었다는 식의 학설은 이미 지식의 정보량이나 현재 여러 역사적 고증 과정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학설 자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의 ‘고고학으로 본 낙랑군’은 1990년대 초 북한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나온 기원전 45년께 낙랑군의 호구수 통계 목간의 세부 내역을 과거 일제강점기 낙랑계 고분 조사를 배경으로 풀어내면서 낙랑군의 한반도 평양 등의 서북지방 재지설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됐다고 단언한다.

중국과 한국에서 자기네의 민족주의 관점에 따라 중국 문명의 뿌리 혹은 고조선의 원류로 재단되어온 중국 동북지방 홍산문화 문명론에 대한 객관적 현상을 짚어본 김정열 숭실대 사학과 교수의 글들 또한 현재 고대사 논쟁에 대한 기존 학계의 견해와 생각들을 명쾌하게 전해준다.

 

 

김봉렬 | 승인 2016.10.18 12:25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조선(단군)의 대륙강역의 열쇠,갈석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어는?'낙랑군 수성현', '진장성 동쪽 끝'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다섯 번째)5. 고조선의 갈석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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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다섯 번째)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제3회)

▲ <그림 1> 각종 갈석산과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 황하 및 해안선의 변화는 Tristram R Kidder(워싱턴대 교수) & Yijie Zhuang(런던대학 연구원)의 공동논문『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을 참조하였다.

 

5.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착오 갈석산’

본래 갈석산은 『서경』「우공」에 기록된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황하 하류의 흐름이 달라지고 해수면의 높이에도 변동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갈석산이 있었다는 ‘황하 하류 해변가’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러한 황하 하류의 위치 변동을 몰랐던 학자들이 자기 시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음으로써 새로운 갈석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의 착오로 인하여 새로운 갈석산이 두 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 하나가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상속의 갈석산이다.

다른 하나는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현재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이들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갈석산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갈석산

앞의 <그림 1>에서 ‘갈석산 2’에 해당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는 BC 602년 ~ AD 15년까지 약 600년 동안 황하 Ⓑ와 같이 천진방면으로 흘렀다. 황하 Ⓑ의 하류 해변가는 허허벌판으로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서경』에 나오는 ‘우공갈석’을 찾던 학자들은 갈석산이라고 부를 만한 산을 찾을 수 없자, 갈석산이 바다 속으로 빠져서 사라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의 사료 E-1, E-2에서 보듯이 『수경주』의 저자 역도원은 왕황과 장절의 말을 근거로 갈석산이 바닷물 속으로 빠져 사라져 버렸다고 하였다. 이 갈석산이 바로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있다’는 갈석산이다(사료 E-2).

하지만 아무리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한들 바닷물이 커다란 산을 삼켜 버릴 수 있겠는가? 이 ‘요서 임유현 물속에 있다’는 갈석산은 황하의 흐름이 바뀐 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갈석산을 찾다가 찾을 수 없자 궁여지책 끝에 나온 ‘착오 갈석산’이다.

이 ‘착오 갈석산’은 바다 속으로 빠져 사라졌다는 상상속의 산이지만 갈석산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훗날 주자학파들에 의하여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한민족의 상고사를 혼란에 빠뜨린 단초를 제공한 갈석산이다.

E-1 “한나라 사공연인 왕황은 말하기를 ‘옛날에 하늘에서 연이어 비가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넘쳐, 서남쪽으로 수백 리를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장절은 말하기를 ‘갈석은 바다 속에 있다. 아마도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어 간 듯하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와 제나라는 요동의 벌판을 나누어 영주를 설치하였다. 지금 성이 바닷가에 닿아 있는데, 바닷물이 북쪽으로 침범하여 성의 절반이 물에 잠겼다. 왕황의 말이 믿을만하니, 갈석이 바다속으로 들어간 것이 증거가 없지 않다.”

漢司空掾王璜言曰:往者, 天嘗連雨, 東北風, 海水溢, 西南出侵數百里. 故張折云:碣石在海中. 蓋淪于海水也. 昔燕、齊遼曠, 分置營州, 今城屆海濱, 海水北侵, 城垂淪者半. 王璜之言, 信而有徵;碣石入海, 非無證矣. 『水經注』卷五, 河水

 

E-2 “항산은 북악으로 중산 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우임금이 그 돌을 뚫어 오른쪽을 끼고 황하를 받아들이게 했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올랐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침범하기를 세월이 흘러 그 산을 삼켰으므로 물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恒山為北嶽, 在中山上曲陽縣西北,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大禹鑿其石, 夾右而納河. 秦始皇、漢武帝皆嘗登之, 海水西侵, 歲月逾甚, 而苞其山. 故言水中矣. 『水經注』卷四十, 禹貢山水澤地所在

E-3 “곽박이 말하기를 ‘지금 제수는 형양군 권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진류를 지나서 잠음 북쪽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흘러 고평에 이르며, 동북쪽으로 흘러 제남을 지나서 낙안군 박창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갈석이다’ 하였다.” 郭璞云 : 今濟水自滎陽卷縣,東經陳留至潛陰北,東北至高平,東北經濟南至樂安博昌縣入海,今碣石也. 『山海經』卷十三, 海內東經


(2)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

앞의 <그림 1>에서 ‘갈석산 3’에 해당하는 ‘착오 갈석산’이다. 황하는 AD 15년 이후 황하 Ⓒ와 같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 방면으로 흘렀다. 그래서 황하 Ⓒ의 하류 해변가에서도 학자들의 착오로 인한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의 사료 E-3는 곽박이 『산해경』에 나오는 제수濟水를 주석한 것인데, 제수는 황하 Ⓒ와 같은 물길이다. 곽박은 제수가 발해로 들어가는 곳에 지금의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이 ‘착오 갈석산’은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성 북쪽 30킬로미터 지점의 발해 바닷가에 위치한다. 옛 이름은 갈석이고, 무체산·염산·마곡산·대산 등으로 불렸다. 해발 63.4M로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드넓은 화북평원에 유일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경남제일산’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산이다.

『서경』에 나오는 본래 갈석산인 ‘우공갈석’은 항산의 동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무체현의 ‘착오 갈석산’은 항산의 동남쪽 500여리에 위치하므로 본래 갈석산과 방향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 ‘착오 갈석산’은 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으며, 『산해경』에 나오는 곽박의 주석(사료 E-3)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도 없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 산동성 빈주시에서 이 갈석산이야말로 『서경』에 나오는 진정한 ‘우공갈석’이라고 주장하며 중국 정부에 공식 갈석산으로 지정을 요청하였고, 지난 2005년 7월 22일 공식적으로 갈석산으로 지정을 받았다. 현재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하북성 난하 하류의 갈석산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 등 2개의 갈석산이 존재한다.


6. 하북성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

‘착오 갈석산’들이 황하 하류 흐름의 변화를 몰랐던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반면, ‘가짜 갈석산’들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본래의 갈석산을 동쪽으로 지명 이동하면서 생겨났다.

『회남자』·『태강지리지』 등에 의하면 갈석산은 고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하였으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며 또한 고대의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갈석산의 지명 이동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가짜 갈석산’도 두 개가 있다.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과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이들 가짜 갈석산들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끝없이 왜곡, 축소시켜왔다. 오늘날 한민족의 상고사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것은 모두 이들 가짜 갈석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 가짜 갈석산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생겨났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이다. 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인 중국 요나라(916~1125) 시대에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동쪽으로 1천여 리 지명이동된 것이다. 이 갈석산은 한민족의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갈석산에 얽히고설킨 제반 문제의 핵심은 본래의 갈석산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 어떻게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 갈석산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한민족의 상고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통하여 역사왜곡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12세기경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학파들의 주도로 생겨났다. 갈석산이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책은 『서경』인데, 오늘날 전해지는 『서경』의 주석은 주자의 명을 받아 그의 제자인 채침이 완성한 것이다. 채침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에 대한 주자학파들의 견해를 잘 알 수 있다.

『서경』「우공」(사료 B-1)에서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 구절의 갈석에 대하여 채침은 사료 F-1과 같이 주석하였다.

F-1 “갈석은 『지지』에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 하구의 땅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 평주의 남쪽이다. 기주는 북방에서 공부貢賦를 실어 올 때, 북해로부터 황하로 들어와서 남향하여 서쪽으로 돌 때 갈석이 오른쪽으로 도는 사이에 있으므로 ‘오른쪽으로 낀다’고 한 것이다...(중략)...또 살펴보건대, 역도원이 말하기를 ‘여성의 바닷가에 돌이 돌담과 같은 것이 수십 리가 있으며, 산마루에 큰 돌이 있는데 기둥의 모양과 같아 위소가 이것을 갈석이라 하였다. 이 산이 옛날에는 하구의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공물을 들여오는 황하의 길을 기록한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물에 침몰되어서 바닷물 속에 잠겼으니, 이미 강안과 거리가 5백여 리나 된다’고 하였다. 『전국책』에 ‘갈석이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고 한 것은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인 듯하며, 정씨는 ‘구문현에는 이 산이 없다’고 하였다.”
碣石 地志 在北平郡驪城縣西南河口之地 今平州之南也. 冀州 北方貢賦之來 自北海入河 南向西轉而碣石在其右轉屈之間 故曰夾右也...(中略)...又按 酈道元言 驪城枕海 有石如甬道數十里 當山頂有大石 如柱形 韋昭以爲碣石. 其山 昔在河口海濱 故 以誌其入貢河道 歷世旣久 爲水所漸淪 入于海 已去岸五百餘里矣 戰國策 以碣石在常山郡九門縣者 恐名偶同. 而鄭氏以爲九門無此山也. 『書經』夏書, 禹貢第十‧十一章

F-2 “(상략)... 오직 정씨는 ‘구하 지역이 이미 바다 속에 잠겼다’ 하고는 갈석을 인용하여 구하의 증거로 삼아, ‘지금 창주 지역은 북쪽으로 평주와 접경하여 서로의 거리가 5백여 리이니, 우禹의 구하가 마땅히 이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뒤에 바닷물 속에 잠겼으므로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구하가 바다에 침몰되지 않았을 때에는 지금의 해안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다시 5백 리가 평지이니, 황하가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은 이 5백 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또 상문上文에 ‘오른쪽으로 갈석을 낀다’고 하였으니, 구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갈석이 그 서북쪽 해안에 있었을 것이다. 구하는 물길이 변천하여 미루어 상고하기가 어려우나 갈석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기주 지역에는 이미 이러한 돌이 없다. 평주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있어 창주의 강안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 황하가 지금 바다가 된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흘러가서 비로소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이니, 황하의 물길이 이미 바다로 빠져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의 왕횡은 ‘옛날에 하늘에서 항상 비가 내리고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서남쪽으로 넘쳐서 수백 리를 침몰시켰다’ 하였으니, 구하 지역이 이미 바닷물 속에 잠긴 것이다.

역도원은 또한 이르기를 ‘구하와 갈석이 바다에 둘러싸여 침몰되었다’고 하였다. 후세의 유자들은 구하를 평지에서 찾을 줄만 알고, 갈석이 있고 없음을 찾아서 증거로 삼을 줄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전후의 이설이 끝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구하의 땅이 아닌 곳에서 억지로 천착하여 찾았으니, 당연히 갈피를 잡지 못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다.”
(上略)...惟程氏以爲九河之地, 已淪於海, 引碣石爲九河之證. 以謂今滄州之地, 北與平州接境, 相去五百餘里, 禹之九河 當在其地. 後爲海水淪沒故, 其迹不存. 方九河未沒於海之時, 從今海岸, 東北更五百里平地, 河播爲九, 在此五百里中. 又上文言夾右碣石, 則九河入海之處, 有碣石在其西北岸. 九河, 水道變遷, 難於推考, 而碣石通趾頂皆石, 不應沒, 今冀之地, 旣無此石, 而平州正南, 有山而名碣石者, 尙在海中, 去岸五百餘里. 卓立可見, 則是古河自今以爲海處, 向北斜行, 始分爲九, 其河道已淪入於海, 明矣. 漢王橫, 言昔天常連雨, 東北風, 海水溢西南, 出浸數百里. 九河之地, 已爲海水所漸. 酈道元亦謂, 九河碣石苞淪於海. 後世儒者, 知求九河於平地, 而不知求碣石有無以爲之證. 故前後異說, 竟無歸宿. 蓋非九河之地, 而强鑿求之, 宜其支離而不能得也. 『書經』夏書, 禹貢第十三章

사료 F-1에서 채침의 주석은 세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첫째, 『한서』「지리지」의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 하구의 땅에 있다’는 갈석산을 ‘지금 평주의 남쪽이다’고 한 점이다.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서』「지리지」가 말하는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그런데 채침 당시에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 부근이다.
평주의 위치가 요나라(916~1125) 시기에 본래의 갈석산이 있던 곳에서 난하 하류 쪽으로 지명 이동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주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라 때 평주의 위치가 옮겨진 사실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둘째,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 등이 제기한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을 차용하여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하윤해설’은 당시의 황하 하류가 위치하였던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으로부터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까지 500여리의 바다가 본래는 모두 육지였다는 것이다(<지도 1>의 500리 참조). 그래서 황하 하류가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흘렀는데 이 500여리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황하 하류와 갈석산의 위치가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구하윤해설’은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 등이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나,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의 학설이다. 이 설은 현대과학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설이다.

셋째, 『전국책』에 나오는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고 한 갈석산은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채침은 상산군 구문현의 본래 갈석산을 이름이 우연히 같은듯하다고 평가절하하면서, 정씨의 말을 인용하여 이 갈석산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씨는 3세기경 훈고학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는 정현(鄭玄, 127~200)을 말한다.

위와 같이 채침이 본래의 갈석산인 상산군 구문현 갈석산의 존재를 부정하고, ‘구하윤해설’을 통하여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주장함으로써 본래의 갈석산이 동쪽으로 1천여 리 지명이동하게 되었다. ‘구하윤해설’은 현대과학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나 그 후 주자학이 득세하면서 정설로 되어갔다. 더불어 한민족의 상고사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다음에 계속).
글쓴이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김봉렬 | 승인 2016.10.24 11:39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고대사에서 '요동'은 우리 강역을 밝힐 수 있는 중요지명,그러나 이 지명이 요나라 시대를 기준으로 동으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강단식민사학계는 무시함... 이제 ‘구하윤해설’이 생겨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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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구하윤해설’이 생겨난 배경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서경』「우공 13장」에 ‘구하가 이미 물길을 따른다(九河旣道)’는 구절이 나온다. 구하九河는 황하 하류를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황하가 하류에서 아홉 갈래로 나뉘었다는 뜻이다. 유학자들은 이 황하 하류에 있었다는 아홉 개의 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 아홉 개의 강을 찾을 수 없자, 그 아홉 개의 강물이 흐르던 지역이 바다 속으로 잠겼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구하윤해설’이다.
 
『서경』「우공 13장」의 구하九河에 대하여 채침이 주석한 것이 위의 사료 F-2이다. 구하九河에 대한 채침의 해설이 너무 길어서 앞부분은 생략하였으나, 채침은 이 생략한 부분에서 구하에 대한 여러 사서들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정씨程氏의 주장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씨는 주자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채침은 이 해설에서 정씨와 왕횡 및 역도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아 ‘구하윤해설’을 구체화 하고 있다.
채침의 주장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위에서 사료 E-1, E-2에서 보았듯이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갈석산이 바다 속에 빠져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였다.  황하가 하북성 천진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하 하류 해변가는 모두 벌판으로 갈석산이라 부를 만한 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채침은 왕횡과 역도원 등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갈석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기주 지역에는 이미 이러한 돌이 없다. 평주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있어 창주의 강안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채침이 말하는 평주 정남쪽의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가리킨다. 역도원 등이 주장한 바다 속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상상속의 갈석산이 5백여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1>에서 학자들의 상상속에서 생겨난 ‘갈석산 2’가 채침 등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을 등에 업고 난하 하류의 ‘갈석산 4’로 슬그머니 환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서경』「우공」에 기록된 채침의 주석을 통하여 본래의 갈석산이 부정되고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 배경에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구하윤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이외에도 두 가지 요인을 더 꼽을 수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으로 ‘고구려가 예로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였다.

G-1

“(상략)...배구가 인하여 아뢰기를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으며, 한나라 때 나누어 3군을 삼았고, 진晉나라 역시 요동을 통치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따로 외역外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근심하여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입니다...(하략)’ 하였다.” (上略)...矩因奏狀曰: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 漢世分為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為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下略) 『隋書』卷六十七, 列傳第三十二, 裴矩傳

G-2

“『사기정의』: (朝鮮은) 조선潮仙 이음이다. 『괄지지』는 말하기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 하였다.” 正義潮仙二音. 括地志云:「高驪都平壌城,本漢樂浪郡王険城,又古云朝鮮地也.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사료 G-1은 황문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주장하면서 ‘고구려가 옛날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역사왜곡한 말이다. 또 사료 G-2에서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다.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한다.”고 하였다.
 
『괄지지』는 당태종의 4남인 이태(李泰, 618~652)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장수왕 평양성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2부 4장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참조>.
그리고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은 갈석산(백석산) 부근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였다<『고조선으로 가는 길』제1부 5장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찾아서’ 참조>. 당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보다 1천여 리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괄지지』에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라고 운운한 것은 고구려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역사왜곡에 다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당태종은 서기 645년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요동은 중국 땅이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렇게 명분을 쌓은 후에 마침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사료 G-2에 인용된 『괄지지』의 기록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을 1천여 리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 하류 일대로 오인하도록 만든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료 H-1, H-2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기 801년 편찬된 역사서인 『통전』의 갈석산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H-1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晉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 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通典』卷一百七十八, 州郡八, 古冀州 上

H-2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 『通典』卷一百八十六,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통전』은 북평군 노룡현의 갈석산을 ‘우갈석’으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을 ‘좌갈석’으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통전』은 <그림 1>에서 본래 갈석산인 ‘갈석산 1’을 ‘우갈석’으로, 가짜 갈석산인 ‘갈석산 4’를 ‘좌갈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4.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 갈석산은 동일한 ‘우공갈석’으로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통전』은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상서』의 문구를 엉뚱하게 ‘우갈석’으로 해석하면서 ‘좌갈석’이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괄지지』의 기록대로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을 난하 하류의 고구려 평양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둘째,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난 배경에는 중국 요나라(916~1125) 때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여 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의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때에 갈석산의 지명 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 이동이 일어났다.
 
이때 본래의 갈석산이 있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포로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킨 기록을 『요사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요나라는 난하 하류 일대에 평주 요흥군(『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속한 안희현과 망도현의 기록을 살펴보자.

I-1

“안희현은 본래 한나라 영지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안희현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평주 동북쪽으로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安喜縣. 本漢令支縣地, 乆廢. 太祖以定州安喜縣俘户置. 在平州東北六十里. 户五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I-2

“망도현은 본래 한나라 해양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 망도현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해양산이 있다. 현은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望都縣. 本漢海陽縣, 乆廢.太祖以定州望都縣俘户置.有海陽山.縣在州南三十里.户三千).”   『遼史』卷四十 志第十 地理志四, 南京道, 平州, 遼興軍.


위의 기록에서 정주定州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로 본래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보정시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평주 요흥군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위치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의 갈석산 지역의 주민들을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지명도 함께 이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갈석산의 지명도 이때 함께 지명 이동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그림 6> 요나라 때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 요나라 이전 요동의 각종 지명은 필자가 고증한 것이며, 요나라 이후의 요동의 각종 지명은 강단사학계의 통설이다.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과 송나라 주자학파의 ‘구하윤해설’로 인하여, 당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지명 이동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을 두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제작된 중국 고지도들을 보면 1177년 제작된 『기주협우갈석도』와 1209년 제작된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는 본래의 갈석산인 보정시 백석산을 갈석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1136년 제작된 『우적도』와 1177년 제작된 『구주산천실증총도』는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표기하고 있어 갈석산에 대한 당시의 혼란상을 읽을 수 있다.
 
결국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현대과학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로 이론적 존립근거를 마련한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그러나 이후 주자학파들이 득세하면서 정설로 굳어져 갔다.
그리고 본래의 갈석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무려 1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진짜 갈석산 행세를 해오면서 한민족의 상고사를 짙은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집요하게 진행된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판이었다.
 
(2) 한반도 평양의 ‘가짜 갈석산’
 
일제 강점기에 또 하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났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평양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역사왜곡 하면서부터이다.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일대에 있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일본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사학잡지』에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라는 논고를 통하여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며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의 경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나바 이와기치의 설을 이어 1928년 중국학자 왕국량은 『중국장성연혁고中國長城沿革攷』라는 책에서 평양 일대에 갈석산을 표기하고 진나라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연결시켰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 한반도 평양 지역을 한나라 낙랑군 지역으로 만들려 하다 보니 자연히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이곳까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동단이 위치한 갈석산이 어떠한 산인가?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뚜렷한 시‧공간적 좌표가 존재한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위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산이다. 지금까지 여러 갈석산들이 생겨난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하나같이 황하 하류 해변가와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도 그곳으로 황하 하류가 흘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하윤해설’을 만들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갈석산의 본질마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주장하려면 그곳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황하 하류가 한반도 평양으로 흘렀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의 정사 기록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병도의 낙랑군 수성현 주석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J-1

“수성현遂成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산천조에 요동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에 후대소축後代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의 동서행성의 석성(고산자의 『대동지지』에는 이를 패강장성의 유지라고 하였다)이 있고, 또 『진지晉志』의 이 수성현조遂成縣條에는 -맹랑한 설이지만-‘진축장성지소기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48쪽.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만리장성이 있어야 하며, 또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러야 한다. 이병도는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을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하면서 그곳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을 찾을 수 없자, 중국 정사인 『진서』「지리지」의 기록을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로 부정하고 만다.
 
하지만 필자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곳에는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갈석산도 있고, 만리장성의 동단도 있으며, 과거에 황하 하류도 그곳으로 흘렀다. 『진서』「지리지」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이병도는 엉뚱한 곳에서 한나라 낙랑군을 찾으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중국 정사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이런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설은 그러나 강단사학을 장악한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통설로 행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다음회 계속).


김봉렬 | 승인 2016.10.25 13:13

조선(단군)의 대륙은 어디까지 뻗어 갔나...(3)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조선(단군)의 대륙은 어디까지 뻗어 갔나...(3)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중국의 1차사료를 모두 뒤져 본 결과,갈석산은 중원대륙에서 발견되다...북경 동남쪽 하북성 남단 보정시의 백석산으로 추정... 조선(단군)은 최소한 여기까지 뻗어 있었다...고구려 개국 제1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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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 복원의 열쇠이다.

지금까지 역사서에 기록된 5개의 갈석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백석산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는 태행산맥의 머리에 위치하며 상고시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해당하였다. 『서경』「우공」에 기록된 본래의 갈석산인 ‘우공갈석’이며, 『전국책』에서는 ‘상산군 구문현에 있다’고 하였다.

또 『한서』「지리지」는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사기집해』는 ‘항산과 동북쪽으로 갈석산이 접한다’ 하였고, 『한서』「지리지」에서 안사고도 똑같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사기정의』는 ‘황하가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모두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에 대한 기록들이다.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 복원의 열쇠이다.

‘착오 갈석산’은 두 개가 있는데, 고대 황하의 흐름이 바뀌면서 새로운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으면서 생겨났다. 그 하나는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한 갈석산이다. 다른 하나는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위치한 갈석산(해발 63.4M)이다. 이들은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수면의 변화를 몰랐던 학자들의 착오로 생겨난 ‘착오 갈석산’이다.

이 가운데 산동성 무체현의 갈석산은 한민족의 상고사와는 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수경』에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한 갈석산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는 상상속의 산이지만, 훗날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파들에 의하여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이 생겨나게 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황하 하류에 있지 않았던 갈석산은 모두 ‘가짜 갈석산’으로 두 개가 있는데, 역사왜곡을 위하여 본래의 갈석산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을 동쪽으로 지명 이동하면서 생겨난 갈석산들이다.

그 하나는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해발 695.1M)이다. 이 ‘가짜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왜곡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중화 사대사관에 의하여 집요하게 진행된 고대판 동북공정의 결정판이다.

다른 하나는 현 한반도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의 주도로 생겨났으며, 현대판 동북공정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들 ‘가짜 갈석산’들로 인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는 크게 왜곡, 축소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있는 갈석산은 하북성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가짜 갈석산’과 산동성 무체현에 위치한 ‘착오 갈석산’이다. 하지만 중국이 내심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싶어 하는 갈석산은 따로 있는 듯하다. 현 한반도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정체불명의 갈석산이다.

오늘날 중국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부근까지 그려놓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자국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현대판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그 이론적 근거는 안타깝게도 일제 식민사학과 그를 계승한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이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서 꼭꼭 숨기고 싶어 하는 갈석산이 있다.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백석산이 어떤 산인가? 중국의 황산과 장가계, 내몽골의 초원, 용경협의 협곡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중국 비경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이 산이 본래의 갈석산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야말로 관광 수입이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왜 꼭꼭 숨기고 있을까? 본래의 갈석산이 모습을 드러내면 중국의 현대판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1천여 년 전에 벌어졌던 고대판 동북공정마저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이리라!

중국의 갈석산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서경』「우공」에서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인 항산을 지나면 갈석산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집해』와 『한서』「지리지」에서는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인 항산의 위치를 모르는 중국학자는 없을 것이며, 그 항산의 동북쪽에 접하여 있는 산이 백석산이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나 『기주협우갈석도』에도 본래의 갈석산이 잘 나타나있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분명한 시‧공간적 좌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으로도 그 위치를 규명할 수 있으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짜 갈석산’들은 어떤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구하윤해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현 중국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서 하북성 진황도시까지 500여리의 바다가 본래는 육지였는데, 침몰하여 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해야할 갈석산이 지금처럼 황하 하류로부터 500여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의하면 발해 부근의 육지 500여리가 바다 속으로 빠졌다는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발해 주변은 황하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육지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과거에는 ‘구하윤해설’과 같은 허무맹랑한 설이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주장이 통할 수 있겠는가? 난하 하류의 ‘가짜 갈석산’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정체불명의 ‘가짜 갈석산’은 지금 어느 산을 지칭하는지도 알 수 없다.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명제조차 망각한 일제 식민사학의 노골적인 역사왜곡의 산물이다.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식민사학의 설은 일제가 조작한 낙랑유물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유물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구하윤해설’ 보다 더 허무맹랑한 설이 아닐 수 없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현 중국 하북성 북경 일대였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한나라 낙랑군도 모두 하북성 북경 일대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두 번의 커다란 왜곡과정을 겪으면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평양일대로 왜곡되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무려 3천여 리 동쪽으로 왜곡·축소된 것이다. 갈석산(백석산)이 온 몸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중국의 각종 사서에는 갈석산과 관련된 기록들이 매우 풍부하며, 이들 기록을 통하여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의 '감춰진 상자'다(다음에 계속).

 

지금 의무려산이 요하의 요령성에 있는데,

중국 인문지리서인 <대명일통지>에는 현재의 북경 근처 계현으로 나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명이 동쪽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어...

문성재 박사, 중국의 유물조작은 아주 쉬운일이라고 사례까지 들어...

 

 

 

등록 2016-06-21 19:11수정 2016-06-21 21:09

고조선-한나라 국경은? “란하”-“혼하” 팽팽히 맞서 : 한겨레 (hani.co.kr)

 

고조선-한나라 국경은? “란하”-“혼하” 팽팽히 맞서

동북아역사재단 상고사 토론회 김종서 박사 위만조선의 수도 기록물 내세워 ‘국경선 위치는 란하가 맞다’ 주장 박준형 박사 후한기 순열이 쓴 ‘전한기’ 근거로 “혼하가 ‘사기’에 나오

www.hani.co.kr

 

 

 

김봉렬 | 승인 2016.06.08 13:50기사최종수정 : 서기2016.05.10. 10:30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1)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1)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기사최종수정 : 서기2016.05.10. 10:30 일제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의 중화패권주의 사관,동북아 평화 근본적으로 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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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료
A-1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사기색은』

A-2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중략)...수성<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樂浪郡, 漢置 ...(中略)... 遂城<秦築長城之所起>).” 『진서』권14, 지4, 지리 상, 평주 낙랑군

A-3 “노룡현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그 이름을 얻었다. 서진의 태강지지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강역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산이 아니다(盧龍, 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 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권178, 주군8, 고기주 상

A-4 “서진의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강역에 있는 것은 갈석산이 아니다(晉太康地理志云 秦築長城 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碣石山也).” 『태평환우기』권70, 하북도19, 평주 노룡현

현재 위의 사료들을 가지고 진장성의 동단을 비정하는데 있어서 크게 세 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그림 2> 참조).

첫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설로 필자와 심백강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최신의 견해이다.

둘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라는 설로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셋째는 진장성의 동단이 현 한반도 평양 일대라는 설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과 중국 사학계의 통설이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지 위의 각 사료들을 하나씩 검토보기로 한다.(계속)

 

 

 

김봉렬 | 승인 2016.05.10 10:17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중국의 끝없는 영토야욕,결국 스스로 파멸 자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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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이 전해진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기록은 아래의『서경』에 나오는 갈석산을 설명하면서 전해진 것이다.

B-1 :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서경』‘하서 우공 제10장, 11장’

사료 B-1은 역사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일대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인 중국 하나라(B.C. 2070? – 1600?) 우임금 시절에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우공갈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료 B-1은 『사기』‘하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 ‘우공갈석’에 대하여 『사기색은』은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B-2 :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 「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사기색은』

사료 B-2에서 보는바와 같이『태강지리지』(사료 A-1)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구절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는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황하하류 해변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료 B-2에서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다는 갈석산이 ‘우공갈석’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먼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던 ‘우공갈석’이 오늘날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 확인한 후, 그곳에 낙랑군 수성현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황하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우공갈석’의 위치를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서경』에 나온다.

B-3 : “견산에서 물을 인도하여 기산을 거치고 형산에 이르며, 황하를 넘어 호구와 뇌수로부터 태악에 이르며, 저주와 석성으로부터 왕옥에 이르며, 태행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導岍及岐 至于荊山 逾于河 壺口雷首 至于太岳 底柱析城 至于王屋 太行恒山 至于碣石 入于海).” 『서경』 ‘하서 우공 제84장’

▲ <그림 3>『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위의 사료 B-3는 하나라 우임금이 산맥을 따라 황하를 치수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견산岍山에서 시작하여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한 태행산과 항산을 거쳐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서기 1209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고지도인 <그림 3>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푸른색으로 표시한 것은 황하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며, 우임금이 황하를 치수하면서 거쳐 간 산맥들의 지명을 각각 한글로 표시하였다.

위의 사료 B-3의 내용은 『사기』 ‘하본기’와 『한서』 ‘지리지’에도 각각 실려 있는데, 갈석산에 이르기 직전의 산인 태행산과 항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B-4 : “공안국이 말하기를 ‘이 두 산은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에 접하여 창해로 들어간다.’ 하였다(孔安國曰:「此二山連延,東北接碣石,而入于滄海」).” 『사기집해』

B-5 :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 서북쪽에 있다. 상산은 항산으로 상산군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太行山在河內山陽縣西北. 常山,恆山是也,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 『사기색은』

B-6 : “안사고가 말하기를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의 서북쪽에 있다. 항산은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두 산이 멀리 이어져 동북쪽으로 갈석산과 접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師古曰:「太行山在河內山陽西北. 恆山在上曲陽西北. 言二山連延, 東北接碣石而入于海).” 『한서』 ‘지리지’

위의 사료 B-4와 B-6에 의하면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항산의 위치를 찾으면 갈석산의 위치는 저절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오늘날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항산(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백석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110개에 이르고, 해발 2,000M 이상인 봉우리도 5개나 되는 웅장한 산인데, 해변가에 위치한 좁은 의미로의 갈석산은 백석산의 동쪽 지맥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을 가리킨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을 현 중국 산서성 혼원현에 위치한 현무산을 항산恒山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청나라 순치 17년(1660)에 항산의 명칭이 대무산大茂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그림 4> 참조)

▲ <그림 4> 항산(대무산, 현무산), 백석산, 낭아산 등의 위치

 

그리고 이 갈석산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중국 고지도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그림 5>의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이다. 이 지도는 이름 그대로 기주冀州에 있었던 갈석산을 중심으로 주변을 흐르는 강과 연나라 5군인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연나라 5군의 위치가 표시된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고지도이다. 참으로 한민족의 상고사로 향하는 보물섬 지도라 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들이 가득 담긴 지도이다. 이 지도를 통하여 고대의 요수가 현 중국 북경시 동쪽을 흐르는 조백신하이며, 요서지역이 현 중국 북경지역이며, 고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도에는 다음과 같이 갈석산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도 기록되어 있다.

▲<그림 5> 『기주협우갈석도』및 현대지도에 해석한 지도1

▲ <그림 5> 『기주협우갈석도』및 현대지도에 해석한 지도2

 

B-7 :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사료 B-7에 의하면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등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역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갈석산은 거마하의 하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 분명하다. 참고로『기주협우갈석도』는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으로 그려져 있으므로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같아진다.

이와 같이 ‘우공갈석’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5대 명산 중의 북악北岳인 항산과 동북쪽으로 접하여 있으므로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 중국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갈석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사실인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수면의 높이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과학적으로도 찾을 수 있다.

▲<그림6> 황해와 해안선의 변천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602년 이전의 고대 황하는 그 하류의 흐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흘렀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아서 보정시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위의 <그림 6> ‘황하 및 해안선의 변천도’는 워싱턴대학의 Tristram R Kidder와 런던대학의 Yijie Zhuang이 황하의 변천에 대하여 공동 연구한 논문에서 참조하였다. 푸른색 굵은 선이 하나라 우임금 시대의 황하 흐름과 해안선을 나타낸 것이며, ‘우공갈석’인 낭아산의 위치는 필자가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우공갈석’인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정확하게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동쪽 지맥인 낭아산)이다(3회에 계속).


 

 김봉렬 | 승인 2016.05.1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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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2회차 글을 요약하면 ‘우공갈석’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 낭아산)이라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첫째, 『사기집해』(사료 B-4)와 『한서』지리지(사료 B-6)에 의하면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오늘날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그림 5>의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에 갈석산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기주협우갈석도』(사료 B-7)에 의하면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등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역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갈석산은 거마하의 하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이 분명하다.

셋째, 갈석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사실인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수면의 높이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과학적으로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602년 이전의 고대 황하는 그 하류의 흐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흘렀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아서 보정시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그림 6> 참조). 그러므로 ‘우공갈석’인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정확하게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지금까지 사료 B-1~B-7을 통하여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던 ‘우공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료 B-2는 ‘우공갈석’을 설명한 것인데 다시 한 번 살펴보자.

B-2 :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 『사기색은』

사료 B-2에서는 ‘북평군 여성현’에 위치한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 그리고 ‘요서 임유현’에 위치한 갈석산 등 3개를 인용하면서, ‘아마도 갈석산이 두 개 인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료 B-2에서 언급된 3개의 갈석산 중에서 두 개는 같은 갈석산을 가리키며, 나머지 하나는 다른 갈석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고 하였으므로, ‘북평군 여성현’의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 <그림 7> 우공갈석(낭아산)과 수성현(무수현)과 장성유적

▲ <그림 7> 우공갈석(낭아산)과 수성현(무수현)과 장성유적2

 

그러면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는 구절의 갈석산은 ‘우공갈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갈석산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태강지리지』의 갈석산이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 주변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는지 여부와 그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백석산의 동쪽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과 만리장성의 유지가 지금도 남아있다(<그림 7> 참조). 뿐만 아니라 중국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에는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B-8 :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

사료 B-8의 기록에서 송나라 수성현이자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를 가리킨다. 이 기록을 통하여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 일대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는 구절의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은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사료 B-2에서 말한 ‘북평군 여성현’의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같은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료 B-2에서 ‘요서 임유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백석산(또는 낭아산)과 다른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어떤 산인지 살펴보자.

B-9 : “항산은 북악으로 중산 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대우가 그 돌을 뚫어 오른쪽을 끼고 황하를 받아들이게 했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올랐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침범하기를 세월이 흘러 그 산을 삼켰으므로 물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恒山為北嶽, 在中山上曲陽縣西北,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大禹鑿其石, 夾右而納河. 秦始皇、漢武帝皆嘗登之, 海水西侵, 歲月逾甚, 而苞其山. 故言水中矣).” 『수경주』 ‘우공산수택지소재’

사료 B-9에서 보듯이 ‘요서 임유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속으로 빠져서 사라져버렸다는 갈석산이다. 앞에서 살펴본 ‘북평군 여성현’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갈석산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는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며,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임을 나타내는 사료였다.
 

 

김봉렬 | 승인 2016.05.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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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서』지리지(사료 A-2)의 기록 검토

A-2 : “낙랑군은 한나라에서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며 3,700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이 있다(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진서』권14, 지4, 지리 상, 평주 낙랑군

서두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槄葉岩吉)와 중국학자인 왕국량, 그리고 오늘날 『중국역사지도집』 등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비정하는데 공통적으로 인용한 것이 위의 사료 A-2의 기록이다. 이 『진서』지리지(사료 A-2)의 기록은 현재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비정하는 여러 사료들 중 가장 핵심적인 사료이다.

사료 A-2의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과연 이 사료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한반도 평양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일까? 그렇지 않다. 이 사료야말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료이다.

관련 사료들을 검토해보자,

C-1 :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ㆍ창려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ㆍ요동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권14, 지4, 지리 상, 평주

사료 C-1은 서진의 평주에 대한 기록이며, 그 평주에 속한 낙랑군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사료 A-2이다. 사료 C-1는 한민족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진의 평주는 함녕 2년(AD 276년) 10월에 설치되었고, 창려ㆍ요동ㆍ현토ㆍ대방ㆍ낙랑 등 5군국이 평주에 소속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고 고조선의 중심부에 설치한 낙랑군은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에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구려 제15대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회복한 이후로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은 요서지역으로 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위의 사료 C-1, A-2는 함녕 2년(AD 276년) 10월에 설치된 낙랑군의 기록이므로 서기 313년 낙랑군이 요서로 이치되기 전의 본래의 낙랑군 관련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진의 평주 낙랑군의 위치를 통하여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와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다.

▲ <그림 9> 서진의 평주와 낙랑군의 위치

 

서진의 낙랑군 위치를 알기 위하여 먼저 낙랑군이 소속된 평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사료 C-1에 의하면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먼저 ‘우공의 기주지역’은 어디를 말하는지 살펴보자. 『사기』‘권2 하본기’에 나오는 우공의 ‘기주冀州’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아래과 같이 주석하였다.

C-2 :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쪽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사료 C-2에 의하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앞에서 살펴본 중국 남송시대인 1209년에 제작된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기주지역이 잘 표시되어 있다(<그림 3> 참조).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료 C-1의 『진서』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에서는 서진의 평주 위치를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엄청난 역사왜곡이다. 참고로 필자가 비정하는 서진의 평주와 낙랑군의 위치 및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을 위의 <그림 9>에 표기하였다.

『진서』지리지(사료 C-1)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평주에 소속된 사료 A-2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도 당연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사료 A-1을 검토하면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으며, 이곳에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사료 A-2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이지, 『중국역사지도집』의 주장처럼 한반도 평양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가 아니다.(5회에 계속)

 

김봉렬 입력 2016.05.16 10:00수정 2016.05.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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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중국과 일본은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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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전』(사료 A-3)의 기록 검토

A-3 : “노룡현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그 이름을 얻었다. 서진의 태강지지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강역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산이 아니다(盧龍, 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 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통전』권178, 주군8, 고기주 상

『통전』의 저자 두우는 사료 A-3에서 노룡현의 갈석산과 『태강지기』에서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갈석산’을 다른 산으로 보고 있다. 『통전』의 또 다른 기록을 통하여 이 두 개의 갈석산에 대하여 살펴보자.

D-1 :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통전』권186, 변방2, 동이 하, 고구려

사료 D-1에서 『통전』의 저자 두우는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잘못해석하고 있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夾右碣石)’라는 문구를 ‘우갈석’으로 잘못 해석하고서 ‘우갈석’이 있으니 ‘좌갈석’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를 통하여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과 『상서』(『서경』과 같은 책이다)에서 말하는 갈석산은 동일한 산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갈석산을 ‘우갈석’과 ‘좌갈석’으로 서로 다른 갈석산으로 본 것은 두우의 착오이다.

따라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으로 주장하는 옳지 않다. 오히려 아래와 같이 『통전』의 또 다른 기록을 통하여 두우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D-2 :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현이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遂城古武遂也. 秦築長城之所起).” 『통전』권178, 주군8, 고기주 상, 역주易州

사료 D-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통전』은 옛 기주의 역주易州 수성현遂城縣을 설명하면서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고 하였다. 『통전』(사료 D-2)의 기록은 앞에서 살펴본 『진서』지리지(사료 A-2)의 “수성현은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遂城, 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통전』(사료 D-2)에서 기록된 기주의 역주 수성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료 D-2와 같이 『통전』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사료의 해석이 불명확한 『통전』의 사료 A-3를 근거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통전』의 기록을 왜곡하는 것이다.

▲ 서기18세기 무렵에 소중화 조선에서 그린, 천하도, 곧 세계지도이다.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빨강색 표시에 보는 바와 같이 바다에 섬으로 그리고 있다. 삼신산이 있는 곳은 우리나라다. 진 장성을 쌓을 때인 진나라 때까지도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바다 가운데 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당시 지리적 개념이 지금의 한땅인 우리나라 지역까지 못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나라를 바로 이은 한나라의 지리적 개념도 현재 우리나라 땅인, 한땅에 미치지 못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지리적 개념이 이런 실정인데도 강단주류사학계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현재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사진 설명: 오종홍).


3. 마무리 글

지금까지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태강지리지』(사료 A-1)와 『진서』지리지(사료 A-2) 및 『통전』(사료 A-3)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사료들은 모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태강지리지』(사료 A-1)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기록은 『사기색은』(사료 B-2)에서 보았듯이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 수성현’과 ‘갈석산’ 및 ‘만리장성의 동단’은 모두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그림 6> ‘황하 및 해안선의 변천도’에서 보았듯이 역사적으로 황하 하류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일대 보다 동쪽으로 흐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갈석산은 반드시 하북성 천진시 서남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고, 고대에는 황하하류가 그곳으로 흘렀으며 갈석산(백석산 또는 낭아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유지도 남아있다. 『태강지리지』(사료 A-1)는 황하 하류의 갈석산을 설명하고 있는데, 황하하류로부터 동쪽으로 무려 3,000여리나 떨어진 한반도 평양에서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찾는 것은 올바른 사료해석이 아니다.

『진서』지리지(사료 A-2)의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기록에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진서』지리지(사료 C-1)의 평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서진의 ‘낙랑군 수성현’은 평주에 소속된 군현이었기 때문에 평주의 위치를 알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서』지리지(사료 C-1)에 의하면 서진의 평주는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 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평주에 속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도 당연히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북성 지역에서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버젓이 남아있고, 그곳에 만리장성의 동단이 있었음은 앞에서 『태강지리지』(사료 A-1)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따라서 『진서』지리지(사료 A-2)의 기록 또한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임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진서』지리지(사료 C-1)에 나타난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그 평주에 속한 ‘낙랑군 수성현’을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지 한반도 평양 일대에 비정하는 것은 명백한 사료왜곡이다.

『통전』(사료 A-3)의 기록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사료의 해석이 불명확하며, 이 기록을 가지고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통전』(사료 D-2)의 또 다른 기록에서 “(역주)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현이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통전』(사료 D-2)에 기록된 역주易州 수성현遂城縣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과 같은 지역이다. 따라서 『통전』의 저자 두우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사료의 해석이 불명확한 『통전』(사료 A-3)의 기록을 근거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해석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표기하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태강지리지』(사료 A-1)와 『진서』지리지(사료 A-2) 및 『통전』(사료 A-3)의 기록들은 모두 낙랑군 수성현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3천 여리나 동쪽으로 왜곡하여 한반도 평양 일대로 그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과연 중국의 학자들이 관련 사료들을 올바로 해석할 줄 몰라서 그럴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평양 일대를 한나라 낙랑군 지역으로 왜곡하여 통설로 확정하였고, 해방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강단사학계가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학계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는데, 중국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까지 왜곡하여 그리는 것이다. 현 강단사학계의 잘못된 통설이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근거가 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하루속히 잘못된 통설을 바로잡아야 한다. <끝>

 

   

플러스코리아 | 기사입력 2010/01/26 [10:03]

揆園史話에 나오는 놀라운 ‘고조선의 강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揆園史話에 나오는 놀라운 ‘고조선의 강역’

민족사서중에유일하게진본의존재가확인되어‘위서론’에서벗어나있는규원사화의기록중에‘고조선의강역’과관련된놀라운기록이있어소개코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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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문]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貐,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 유(貐)자 앞부수가 犭임

[해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알유(猰貐)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淮岱)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으니,

가르침이 점차 퍼져나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중략)

▲ 규원사화 단군기 강역표시 원문 &nbsp; &nbsp; &copy; 플러스코리아



이와 같이 고조선에 대한 강역기록이 동서남북 사방 개념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북쪽 대황(大荒)은 고비사막 북쪽을 연하는 지역,
서쪽 알유(猰貐)는 산서성, 섬서성 지역,
남쪽 회대(淮岱)는 회수와 태산 지역,
동쪽 창해(蒼海)는 황해나 동해 지역을 말한다.

* 알유(猰貐) : 하(夏)나라 때는 훈육(獯鬻), 은(殷)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라 함

이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귀중본실에 보관중인 진본 규원사화의 기록에 의하면 아래 지도에 표시된 땅이 모조리 단군조선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1675년에 북애노인이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자 했던 그 역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이 기록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언젠가는 밝혀야할 그져 놀라운 기록일 뿐이다.
 

▲ 규원사화 단군기에 나타난 고조선의 강역범위 &nbsp; &nbsp; &copy; 플러스코리아

 

▲ '알류-훈육-험윤'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국지도 &nbsp; &nbsp; &copy; 플러스코리아

 

 

   

심제 역사칼럼 | 기사입력 2008/12/09 [17:02

[단독]단군조선 강역은 아래로 하남성까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단독]단군조선 강역은 아래로 하남성까지

현재우리역사교과서에는고조선의강역이너무도축소되어그려져있다.동아시아전체를지배했던대제국고조선의강역이겨우만주와한반도일대로그려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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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조선으로 망명한 연나라 사람 위만이 건넌 강(추수)은 하남성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3/31 [13:19]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

본글은장문이라아래와같이3부작으로게재됩니다.(1)식민사학계의잘못된이론과민족사학자의이론(2)민족사학을사칭하는역사동호인들의엉터리이론(3)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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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요녕성 요하 동쪽은 고구려 때의 요동이 아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21 [14:37]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현 산서성 분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현 산서성 분하˝

본글은원래3부작으로기획되었으나장문이라(5부)로나뉘어연재되겠습니다.(1부)식민사학계의잘못된이론과민족사학자의이론(2부)역사동호인들의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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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과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에 명기되어 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30 [13:36]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안시성, 환도산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

본글은아래5부작의제(4부)입니다.(1부)식민사학계의잘못된이론과민족사학자의이론(2부)역사동호인들의이상한요동.요서이론(3부)요동과요서를구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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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고구려의 도읍이 있는 핵심강역으로 산서성 남부의 동쪽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5/19 [17:08]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당태종이 빠진 요택으로 본 '요수'는 어디?

본글은아래5부작의마지막(5부)입니다.(1부)식민사학계의잘못된이론과민족사학자의이론(2부)역사동호인들의이상한요동.요서이론(3부)요동과요서를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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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택은 황하와 심수가 만나는 하남성 일대의 습지대

        

 

[이덕일의 한국통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2020. 3. 26.

https://youtu.be/us9g14OnjvY?list=PLRAmvpNm4pmmRSyCOBUipzw4lmxC6bFH- 

 

 

 

[공유] 고조선의 강역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고대사 |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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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대륙영토 고조선은 대륙의 태행산맥 동쪽 화북평야지역도 영토로 하고 있었는데 사서의 기록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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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고조선의 핵심강역발견 - Daum 카페

 

고조선의 핵심강역발견

고조선의 핵심강역발견고조선의 유물분포지역이다. 누가봐도 고조선의 핵심강역은 지금의 대릉하일대로 보인다. 일부 돌팔이 학자들은 지금의 요녕성 요하동쪽이 핵심강역이라고 하고 일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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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위치

자료로 정리해본 한국고대사 |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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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요서(遼東 遼西) 사서의 요동은 연나라의 동을 말하며 요(遼)는 한(韓)민족국가와 화하족국가(장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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