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16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 주간경향 (khan.co.kr)

 

[커버스토리]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조선~발해 20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선사시대와 초기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는 크게 3개의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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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고조선~발해 20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

다이내믹한 묘제가 나타난 체르냐치노 5유적의 발굴 당시 모습. <정석배 교수>

선사시대와 초기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는 크게 3개의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유목 문화권, 중국의 중원 문화권 그리고 동북 3성과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한반도를 포괄하는 가칭 ‘환(環)만주 문화권’이 그것이다.

우리의 활동공간이 ‘환만주 문화권’의 중심지인 만주였던 때는 청동기시대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근 2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아마도 청동기시대 이전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에도 ‘환만주 문화권’ 지역은 우리 선조들의 중심 활동공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중심 활동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것은 장구한 역사에서 본다면 불과 1000년 남짓할 뿐이다. 아니, 이 시기에도 간간히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은 역사·문화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활동공간 그 자체였다.
역사시대에 한반도는 중국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우리 문화는 서쪽의 초원지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과 훨씬 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요녕지역과 중국을 포함하여 유공부라는 도끼가 있다. 날이 있고, 등 쪽에 날과 일직선상으로 소켓 모양으로 자루 구멍이 뚫려 있는 도끼다. 이 도끼는 알타이지역에서 발원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에서 기원한다. 기원전 17~15세기에 심을 넣어 대롱 모양의 창과 도끼를 주조할 수 있는 복잡한 모양의 거푸집을 발명한 세이마-투르비노인들은 전사 집단으로서 나중에 서쪽으로 핀란드지역까지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은허에도 유공부가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동쪽지역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 무인들의 투구에 쇠뿔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시베리아 하카시아-미누신스크 분지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 석상에 보면 사람 얼굴에 쇠뿔 모양의 뿔이 머리에 양쪽으로 달려 있는 표현이 많다. 신라의 금관에 보이는 출(出)자 모양의 문양 모티브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동기시대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마제석검의 수수께끼적 현상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한반도, 중국 동북 3성 그리고 연해주지역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 있다. 마제석검이 그것인데, 이 마제석검은 중국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고, 유목 문화권에도 보이지 않는다. 환만주 문화권에만 특징적인 현상이다.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마제석검이 초원 유목민 문화의 청동단검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마제석검은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함께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마제석검이 그 좋은 예다. 청동 단검과 마제석검을 제작한 집단은 두 종류의 단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청동으로 주조해서 비파형 동검만 만들고, 돌을 갈아서 아카나크 식의 마제석검만 만들었을까.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옥저 쪽구들 아궁이. <정석배 교수>

아키나크식 마제석검 이전에는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의 동검과 형태가 흡사하다. 두 가지 계통의 주민들이 한 곳에 거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종류의 단검은 실용적인 기능을, 다른 한 종류의 단검은 의례적인 역할 혹은 상징적인 기능만 가졌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북방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 및 ‘환만주 문화권’은 초원 유목 문화권 및 시베리아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화들은 항상 서쪽에서 동쪽,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전파되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건국의 주체들이 모두 북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첨저 혹은 원저의 토기를 보이는 시베리아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세로보 문화는 한반도의 첨저 빗살무늬토기보다 연대가 오히려 더 늦다. 두만강 가까이에 자리 잡은 연해주 보이스만 문화 인골은 형질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신석기시대 전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주민들의 이동이 있었고, 지금의 에스키모인들은 바로 두만강 유역에서 이주한 보이스만 문화인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7.10.16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 주간경향 (khan.co.kr)

 

[커버스토리]‘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넓은 의미 발해 연안 문화·출토유물… 한반도 고대문화와 밀접한 관계인류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인류의 문명을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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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 발해 연안 문화·출토유물… 한반도 고대문화와 밀접한 관계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원형적석유구. 중국 요녕성 조양시 건평현에 있다. <신동호 기자>

인류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인류의 문명을 말할 때는 신석기시대부터를 가리킨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은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간 최초의 발명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 가버리고, 시베리아·몽골 지역의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와 신석기 시대가 시작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발해 연안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발해 연안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반도, 서부의 하북성 일대, 북부의 요녕성 지방, 북동부의 요동반도와 동부의 길림성, 남부의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발해 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해오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발해 연안 북부의 요서 지방과 요동반도에서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요동반도 영구(營口) 금우산(金牛山) 동굴유적, 본계(本溪) 묘후산(廟後山) 동굴유적에서는 북경원인과 비교되는 곧선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비롯하여 요하(遼河)·압록강·두만강 등지에서 계속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평양의 용곡 동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윗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인류 화석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계승·발전 과정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귀고리 일종 옥결 한반도서도 출토

또한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 사해(査海)문화, 내몽골 흥륭와(興隆窪)문화와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발해 연안 북부의 심양(瀋陽) 신락(新樂)문화, 요동반도 남단의 광록도(廣錄島)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와 압록강 하류 후와문화가 있다. 이들 문화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출토되고 있다. 옥결은 귀고리의 일종으로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옥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함께 발해 연안의 대표적인 문화다. 이들 신석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6000년 또는 3000년께 유행했던 동북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이 시기는 시베리아나 몽고의 신석기 문화보다 훨씬 빠른 연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여명을 맞이하게 된다.

발해 연안에서는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적석총과 석관묘가 출현한다. 이와 같은 돌무덤(石墓)-적석총·석곽묘·석관묘·지석묘 등-은 발해 연안에서 흔히 보이는데 특히 대릉하 유역 요녕성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의 적석총과 석관묘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청동기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에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적석총,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유행하고 있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3500~3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시베리아의 가장 이른 돌무덤의 연대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빠르다.

발해 연안에서는 옥룡(玉龍)이 발견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옥룡은 발해 연안 서쪽으로 내려가 은(殷)나라에서 계승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은민족은 우리 민족과 같은 동이(東夷)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곡옥(曲玉)은 이와 같은 옥룡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남 진주 남강유역 청동기시대 옥방 5지구 원형적석유구. 선문대 박물관 진주남강유적 전시실에 있다. <이형구 교수>

고대 갑골문화도 발해 연안 북부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 내려가 은나라에서 유행하면서 갑골문자가 완성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두만강유역 무산(茂山) 호곡동(虎谷洞), 남해안 일대의 변한 지구, 영산강·금강 유역의 마한 지구 등 철기시대나 삼한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토기의 발명 이래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 연안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유적으로는 발해 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과 내몽골 적봉(赤峯)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이 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순동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는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하량 적석총에서 홍산문화 시기의 청동을 제련할 때 쓰는 도가니와 청동 찌꺼기(slag) 그리고 청동기 조각이 수습되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를 반출하는 우가촌(于家村) 적석총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500~1300년으로 측정된다. 한반도에서도 요동반도와 같이 적어도 기원전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연결시키고 청동기시대의 인류도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연안의 초기 청동기시대의 연대가 기원전 2000년쯤이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가 반출된 유적의 연대도 기원전 1500년쯤이기 때문에 기원전 12~8세기의 카라스크 문화의 연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대릉하지역·한반도 청동기문화 유사

대릉하 유역과 요하 이서(以西) 지역에서 발견되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는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箕子)가 은이 망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자의 동주(東走) 노선과도 부합한다. 이는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주목할 만한 점이다.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와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이른바 하가점 상층문화-필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한다-를 만들어낸다. 남산근문화의 내용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청동기 문화가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라고 하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돌무덤들은 어떤 집단의 상당한 신분을 가진 수장(首長) 급의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용으로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을 부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릉하의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우하량 여신묘에서 소조 여신상이 출토되고 동산취(東山嘴) 제단 유적에서는 소조 임부상이 출토되었는데 여신상과 임부상은 지모신(地母神)을 숭상하는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고대 사회에서 대형 적석총, 제단, 신전 그리고 신상과 옥기가 문명의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탄생을 보았다.

이번 대탐사에서 우리 민족과 문화가 북방에서 온 게 아니라 발해 연안에서 우리가 ‘발해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력 2020. 6. 1. 09:02

요동반도·대동강 주변서 유물 대거 출토되는 원조선..환황해 해륙 교통로 확보하고 말·호피 등 중계 무역 (daum.net)

 

요동반도·대동강 주변서 유물 대거 출토되는 원조선..환황해 해륙 교통로 확보하고 말·호피 등

내가 가끔 부르는 독립군가에는 ‘부평초 신세’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조국을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인간에게 뿌리를 확신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가

v.daum.net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8) 원조선의 해양활동

그런데 기록의 유무와는 관련 없이 한때는 원조선(고조선)의 중심부 또는 근처였을 가능성이 높은 요서지방에서 발전한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등을 고려하고, 요동반도와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수천 기의 고인돌과 토기 등 유물 연대를 보면 늦어도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는 중국의 ‘하(夏)’나 ‘은(殷)’처럼 도시국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원조선은 소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의 몇 단계를 거쳐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와 벌인 전면전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원조선의 흥망성쇠는 해양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핵심 영역인 요동반도 남쪽의 대장산 군도, 압록강 하구인 단둥 근처에서는 5000여 년 전의 해양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이 후시대의 유물인 수백 기의 고인돌과 적석총은 다롄의 강상무덤, 누상무덤 등처럼 해안가나 또는 강가 언덕 등에 많이 있다. 평양 일대에는 수천 개의 고분이 있는데, 고인돌은 황주천 유역에만 1100여 기가 있다.

원조선이 발해와 황해 북부를 공유했다면 해양활동이 활발했어야만 했다. 말, 모피 등 다양한 종류의 무역을 했는데, 기원전 7세기경에는 발해를 건너 산둥반도의 제나라에 문피(文皮·호랑이와 표범의 가죽) 등을 수출하는 해양무역을 했다. 증거물인 많은 유물과 명도전, 오수전 등 중국의 화폐들이 원조선의 영토에서 무수히 발견됐다.

한편 주민들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발해만과 황해의 중국 쪽에는 용산문화 시대를 이어 은나라 때에는 ‘이(夷)’, 주나라 때부터는 ‘동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이 해양문화의 담당자였다는 물증과 기록은 무수히 많다. <삼국지>에 따르면 진시황 때 세상이 혼란스러워 사람들이 준왕에게 도망오자, 서쪽 지역을 줘 살게 했다. 훗날 준왕은 (위)만에게 왕 자리를 빼앗기는데, 지지세력들과 바다를 이용해 충남 해안에 도착해 한왕이 됐다. 이런 상황을 보면 동이인들은 발해와 황해를 건너 원조선의 영역으로 이주했고, 해양문화를 발전시키면서, 환황해 무역권을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 경향신문 (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 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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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치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이 많은 싼줘뎬 석성 안에 있는 원형건축물 흔적. 조상신&middot;하늘신에 제사 지낸 제단일 가능성이 높다.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확인된 치(雉)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삼좌점, 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년).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지난해 발굴이 끝났으며, 이번에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교수(왼쪽)가 성의 규모에 감탄하며 축조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츠펑/김문석기자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 경향신문 (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7)고조선과 청동기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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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기원은 발해연안이며, 그 연대는 BC 3000년(훙산문화 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 시기에는 석성을 쌓고 청동기를 만들었으며, 고대 왕국의 기틀을 쌓은(고조선) 발해연안 사람(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商·BC 1600~BC 1046년)를 건국했다는 점까지.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샤자뎬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청동꺾창의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발해만 연안에서 확인된 청동꺽창. 실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예제용 청동기로 보이며 고조선 시대 수장의 권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훙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훙산문화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샤자뎬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지파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 부분’만 빼고….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이 (훗날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에 있었다(先商文化在渤海灣)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6) 난산건의 비밀 - 경향신문 (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6) 난산건의 비밀

이쯤해서 ‘삼국유사’(제1권 고조선 왕검조선조)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단군 왕검은)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무왕을 뜻함)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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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산건에서 쏟아진 청동무기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 출토된 난산건 유적 전경. 웬일인지 표지석에는 난산건 유적임을 알리는 글자가 훼손돼 있다. | 이형구 교수 촬영

 

1958년, 랴오닝성 닝청셴(寧城縣·지금은 네이멍구 자치구) 쿤두허(坤都河) 상류에 있는 난산건(남산근·南山根)에서 한 기의 무덤이 확인된다. 석곽이 있고 그 안에 목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덤에서는 모두 71점의 청동기가 확인됐다. 5년 뒤인 63년 6월, 한 농부가 그 무덤에서 서쪽으로 120m 떨어진 곳에서 2기의 무덤을 더 발견한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인 9월14일. 조·중 합동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찾는다. 북한과 중국의 합동발굴이었다.(경향신문 2007년 12월8일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랴오허 동서쪽의 적석총들’ 참조)

조사결과는 무척 흥미로웠다.

“전형적인 은말주초의 청동예기는 물론 토착(고조선)세력, 그리고 중국 북방의 영향을 받아 만든 청동기들이 쏟아진 겁니다. 청동솥의 다리가 날씬해지고 길어졌다든지,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항아리(雙聯罐·작은 단지를 이은 항아리), 뼈로 만든 구슬(骨珠), 금으로 만든 고리(金環) 등이 나왔다든지….”(이형구 교수)

두번째 중요한 변화는 무기의 다량 출토이다. 청동투구와 청동꺾창,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도끼 등이 쏟아진 것이다.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 위주의 예기였다면 난산건 유물은 다양한 지역 문화가 융합된 예기와, 전쟁에 쓰인 무기가 공반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난산건 문화(샤자뎬상층문화에 해당)는 BC 9~BC 7세기 사이에 유행한 문화예요.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검토해야죠.”(이형구 교수)

 

난산건 유적에서 출토된 뼛조각. 짐승·사람문양과 함께 2대의 수레 문양이 새겨져 있다.(왼쪽) 그런데 이 수레 문양은 한자(漢字)인 ‘수레 거(車)’자의 원형을 표시하는 상형문자들과 흡사하다.(위)

 

■청동단검의 전통

난산건 출토 청동솥(鼎). 은말주초의 전형적인 청동솥과 비교하면 다리가 길고 날씬한 편이다. 고조선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왕~평왕 사이, 즉 BC 9~BC 8세기 무렵에 대혼란의 시기, 즉 전쟁의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문헌과, 중원(뤄양)은 물론 발해연안(난산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연안 난산건에서 확인된 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바로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른바 비파형 청동단검)이다.

“발해연안식 청동검이야말로 고조선 청동기문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지. 이런 형태의 청동단검은 난산건을 필두로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젠핑(建平)·진시(錦西)·푸순(撫順)·칭위안(淸原) ·뤼다(旅大) 등에서 쏟아집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시 서포동을 비롯해 황해북도 연안군 부흥리 금곡동과 충남 부여군 송국리, 전남 여천시 적량동 등에서도 보입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청동단검이 석관묘와 석곽묘, 그리고 적석총 등 모두 우리의 전통 묘제에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난산건에서 확인된 유물 가운데는 역시 동이의 전통문화의 하나인 복골(卜骨)이 있다는 것이다. BC 9세기부터 시작된 이 청동단검의 전통은 한반도로 이어져 급기야 ‘한국식 세형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낳는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대표격인 이 세형동검이 출현한 시기는 BC 4세기 무렵이다. 결국 발해연안식 청동단검과 세형동검은 샤자뎬 하층문화~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 즉 고조선이라 토대에서 창조된 독특한 문화인 것이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1) ‘연나라 강역도’와 조선 - 경향신문 (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1) ‘연나라 강역도’와 조선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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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연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中역사서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연소공세가)

“연나라는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연나라에 귀속시켜 관리를 설치하고 요새에 성을 쌓았다.”(사기 조선열전)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 강역도. 랴오둥은 물론 한반도 청천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선양 | 김문석기자>

■ 연나라가 한반도까지?

이런 자료를 토대로 역사를 요리하는 중국을 보면 부러움 반 자괴감 반의 복잡한 기분이 절로 든다. 랴오닝성 박물관에 붙어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를 보자. 그 경계가 랴오둥(遼東)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사료를 반박할 그럴듯한 근거를 대라 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사료도 갖추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성을 갖고 보면 그들이 신주 모시듯 하는 사료에 숨어있는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측 자료는 어차피 중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 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따라서 소략하게 취급하거나 폄훼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우리는 이쯤해서 마음을 다잡고 중국 측 사료에 담겨 있는 구절을 일일이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함의에서 진실을 찾을 참이다. 하지만 책장에서만, 그것도 숨은 뜻을 찾고자 하면 그 또한 자기 위주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학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고학적인 뒷받침, 곧 증거를 댈 참이다.

먼저 기자(箕子)조선의 강역 문제이다. 최근 지린대(吉林大) 역사교과서인 ‘동북사’는 “주나라 초기의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周初的箕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이라고 해놓았다.

차오양(朝陽)에서 확인된 춘추시대 청동단검 거푸집과 청동끌 거푸집.

즉 기자가 은(상)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본향, 즉 은(상)나라의 옛 고향인 랴오닝성 서부지역으로 간 뒤 곧바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箕子首先遷到今天的遼寧省西部地區 而後又從這里遷往朝鮮半島) 그러면서 교과서는 랴오닝성 카줘(喀佐) 등에서 나온 ‘기후(箕侯)명’ 청동기 등 각종 은(상)의 청동예기들을 그 증거로 들었다. 청동기 명문인 ‘기후(箕侯)=기자(箕子)’임을 논증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여전히 ‘기자조선의 영역=대동강 유역’설을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요. 이미 살펴보았듯 기자(箕子) 일행이 신주 모시듯 하고 가져왔던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은 랴오허(遼河) 동쪽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이 고고학적 자료들은 기자(箕子)가 랴오허를 결코 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신 기자가 정착한 다링허(大凌河) 일대에서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으로 한 난산건(南山根) 문화가 성행했다.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차오양 십이대영자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豊·지금의 펑이:豊邑)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陝·지금의 허난성 산셴:陝縣)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BC 1042~BC 1021년)이 소공에게 뤄이(洛邑·뤄양)를 건설하게 했고, 나중에는 섬(陝)의 서쪽 지방을 관장하게 하였다”(사기 주본기·사기 연소공세가)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이는 무왕이 소공을 연에 봉했을 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아직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지.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이형구 교수)

■ 연나라의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이 소공에게 분봉했다는 연(燕)은 어디일까.

“처음엔 지금의 허난성 옌스(河南省 偃師)일 가능성이 많아요. 언(偃)은 연(燕)자와 같거든.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上都)과 이셴(易縣·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유적이나 유물들이 ‘하나의 문화’,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규정되려면 유적·유물이 하나의 정연한 세트를 이뤄 일정한 패턴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그냥 한 두 점씩 여기저기 흩어져 나온다면 유의미한 문화라 할 수 없어요.”(이 교수)

만약 춘추시대 연나라가 옌산을 넘어 다링허 유역은 물론 랴오둥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류리허 같은,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유적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옌산 이북부터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 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기자조선)의 문화가 보일 뿐이다.

■ 천하의 유세가 소진(蘇秦)이 남긴 한마디

또 하나 중요한 단서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열전 등 사료에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혀(舌) 하나로 누빈 합종(合從)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蘇秦)의 유세를 보자.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연나라의 전성기

그렇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중국 사료,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에는 한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蠻貊·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일 것) 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사마천의 논평(연소공세가)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BC 316년, 연왕 쾌(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경향신문 4월26일자 참조)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秦),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산동성 핑두셴: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 진개의 침략

그런데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이제 이 문제의 인물인 ‘진개’가 등장한다. 진개는 언제 적 사람인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진개란 인물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를 보자.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AD 233~297년)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2) 천자를 칭한 조선 - 경향신문 (khan.co.kr)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2) 천자를 칭한 조선

ㅃ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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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와 대등했던 고조선의 위세

ㅃ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만리장성 너머 랴오닝성 젠창셴에서 확인된 청동단검. 고조선 문화인 청동단검 문화를 받아들인 연나라 장군 진개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양 | 김문석기자>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년이었다. 왕을 칭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조선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면서 연나라가 동쪽땅, 즉 조선땅을 노리자, 조선이 도리어 주(周)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뜻이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 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 연개소문을 떠올리는 이유

일단 여기까지의 ‘위략’ 내용이 담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다링허~랴오허 사이에 140㎞나 뻗어있는 요택(遼澤). 당나라군이 고초를 겪은 곳으로 유명하다.

“BC 4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 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조선이 ‘감히’ 천자를 뜻하는 ‘왕’을 스스로 칭했잖아요. 연나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게다가 연나라가 조선을 우습게 보고 공격하려 하자, 조선은 ‘주 왕실의 존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 들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조선의 대부 예의 외교로 양국은 충돌을 면했지만, 악감정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당시 기자조선-연나라 관계로 훗날 고구려-당나라 관계를 떠올릴 수 있어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그리고 기자조선의 왕과 그 자손들은 닮은 꼴로 중국과 대립한 것이거든….”

하지만 연나라는 BC 314년 제나라와 중산국의 침략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섰던 터라 조선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중흥군주인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조선 땅 2000리를 공략하고 랴오시(遼西)·랴오둥(遼東), 한반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하는 셈이다. 즉 적어도 BC 280년 무렵까지는 연나라가 랴오둥(요동)은 물론 랴오시(요서)까지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수수께끼 하나. 과연 연나라 진개 장군은 당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 청천강까지 진출했을까.

■ 둥다장쯔 유적의 비밀

지난 2002년 봄, 당시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국장은 마침 선양(瀋陽)을 방문했던 이형구 교수에게 씩 미소를 흘렸다.

“이 선생,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어요. 청동단검이 나왔는데, 이 선생이 보면 아마 고조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농담조였지만 흥미로웠다. 이형구 교수는 마침내 ‘2000년 중국 중요고고발현’이라는 약(略)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중요 유적 24곳에 대한 약보고서였어요. 그런데 만리장성을 넘어 다링허(대릉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에서 전형적인 청동단검(후기형식·BC 4세기 말~BC 3세기 중엽)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었어요.”

마을의 거리와 식당에서 모두 54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서울 풍납토성처럼 이곳도 보존과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확인되었던 터라 학자들의 접근이 무척 껄끄러웠다.

“지금도 현장은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궈다순씨가 반농담조로 말했듯 한국 학자가 가면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석곽묘와 손잡이를 황금으로 만든 청동단검은 물론 전국시대 후기(연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들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약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흥미로워요. 우선 고조선의 대표문화인 청동단검들이 분포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분의 분포가 광활하고 묘 주인의 신분이 높은 점 등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 시대의 군사장령(軍事將領), 즉 장군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해두었어요.”

이 교수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연나라가 파견한 장군이 이곳에서 현지인, 즉 고조선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뒤 죽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BC 280년 무렵 조선을 공격한 진개 장군이 퍼득 떠오른다.

“무덤의 규모나 문화 양상을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무덤일 수도 있지. 시대와 유물양상 등을 보면….”

앞서 인용한 ‘위략’의 내용, 즉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攻其西方)”는 것과 진창셴 유적을 검토하면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 고조선(기자조선) 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랴오허를 넘지 못한 연나라

그렇다면 진개의 침략(BC 280년 무렵) 이후 연나라는 랴오둥을 건넜을까. 춘추시대 때 만리장성 너머 랴오시(遼西) 지방에서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았듯, 진개의 침입 이후에도 랴오둥 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사기 ‘흉노열전’을 주목한다.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공격, 1000리를 패주시켰다”는 기사.

“이 동호라는 표현이 혹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 기록에 호(胡)=이(夷)라고도 했어요. 또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거든.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했어요. 이 동호가 나는 조선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개는 2000리가 아니라 1000리, 즉 랴오허 동쪽만 점령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BC 222년은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랴오둥 지역으로 피신했던 때였다. 이는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지만 연나라는 60년 가까이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개의 침략 이후 조선은 약해졌으며, 이후 천하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두려워 복속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자존심만큼은 잃지 않았다.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천하를 떨게 한 진시황 치하인데도 직접 가서 무릎을 꿇지는 않은 것이다.

■ 위만의 조상은 동이족?

이제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을 검토해보자.

“(조선에서는) 비왕이 죽고 준왕(準王)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는) 20여년 뒤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조·제나라 백성들이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이 이들을 서쪽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때 연나라 왕으로 책봉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뒤 준왕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망명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한다’고 간청했고, 준왕은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봉했다.”

이것은 위만의 등장에 관한 기사다. 준왕은 ‘조선의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믿고 그에게 박사 벼슬을 내리고 서쪽 100리의 땅까지 내주며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어 세력을 키운 뒤 급기야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병사들이 열길로 쳐들어옵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위만은 돌아가 준왕을 공격했으며, 패배한 준왕은 바다를 건너 한(韓·마한)의 땅에 들어갔다.”

BC 194년의 일이다. 가히 쿠데타였다. 위만은 준왕을 속여 서쪽 변방(아마도 랴오둥 지역이었을 것)에서 세력을 키운 뒤 군대를 이끌고 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로써 BC 1046년 무렵 고조선과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기자조선은 900년 만에 정권을 위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사서에 나온 대로 중국인이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사서를 종합하면 위만은 다른 1만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추결·추結), 호복(胡服·오랑캐의 옷)을 입은 뒤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다. 당시는 진나라 말기 혼란 상황. 옛 제·연·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들었고, 위만도 한나라 초기 혼란기에 수 천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이 어지러울 때 많은 무리들이 옌산을 넘고, 랴오허를 넘어 몰려들었어요. 험준한 옌산과, 폭이 140㎞나 되는 지긋지긋한 요택을 둔 랴오허 유역을 건넌다는 것은 쫓는 무리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을 테니까.“(이교수)

동이계인 중산이 마지막으로 망한 때는 BC 296년. 역시 동이족인 고조선이 진개의 침략으로 랴오시(요서·療西)를 잃었던 것이 BC 280년 무렵. 이후 조·연·진의 영역에서 삶을 부지했던 동이계 사람들 역시 변란이 생겼을 때 같은 종족을 찾았을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과 그 수 천 무리도 ‘믿는 구석’, 즉 동이의 나라, 고조선으로, 고조선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마치 은(상)의 멸망 이후 본향을 향해 총총히 떠났던 기자(箕子)처럼….

 

 

수정 2019-12-08 15:12등록 2019-12-06 05:01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6) 고조선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청동기에 새겨진 고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hani.co.kr)

 

청동기에 새겨진 고조선인은 상투를 틀고 있었다

조상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세계사의 첫 페이지는 돌도끼를 든 무식한 원시인이 장식하지만, 자기 나라의 역사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으로 시작한다. 고대 사람들도 자신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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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사학과 교수

중국 랴오닝성 타완촌에서 발굴된 고조선 청동기 거푸집 뒷면에 새겨진 얼굴
부여 수도였던 지린시에서도 광대뼈 얼굴 출토…조상 외모 미화 반성해야

 

청동기 만들던 기술자의 초상화

1990년 고조선과 고인돌의 중심지였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타완촌이라는 곳에서 농민이 밭을 갈다가 파괴된 옛 무덤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여러 청동기와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을 발견했다. 무덤에서 청동기와 함께 거푸집이 발견되는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청동기 제련 기술을 독점했던 높은 계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동기는 무기와 제사에 필요한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기술 복합체의 결과물이었다. 타완촌 발견 이전에도 고조선과 한반도의 세형동검을 사용한 삼한 지역의 옛 무덤에서 거푸집은 자주 발견되었다. 청동 기술은 바로 그들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했다.

그런데 타완촌에서 출토된 손바닥 남짓한 크기의 작은 도끼 거푸집에는 이제까지 발견된 거푸집과는 달리 놀라운 코드가 숨어 있었다. 바로 거푸집 뒷면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상투를 튼 2명의 얼굴이다. 그 얼굴 형태를 보면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상투를 틀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는 낮고 눈이 작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의 초상화 같은 뭔가 근사한 모습을 기대했다면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푸집에 새겨진 고조선 인물상은 예사롭지 않다. 돌로 만든 거푸집에 도드라지게 얼굴을 새겼다.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주변을 다 파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을 거친 것이다. 이 거푸집 인물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청동 제련 기술을 관장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나 신을 섬기고 청동을 주조하는 의식에 사용한 것이다. 살아생전에 청동을 주조하던 사람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그 주인공이 죽자 무덤에 같이 묻은 것이다.

타완촌에서 발견된 청동도끼 거푸집에 얼굴이 새겨져 있다. 강인욱 교수 제공

 

타완촌 유적과 멀지 않은 선양시에는 대표적인 고조선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정가와자)가 있는데,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여러 청동기 유물은 타완촌 유물과 거의 똑같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그 연대를 대체로 약 2500년 전으로 본다. 타완촌 유물은 1990년대에 발견됐지만 20여년간 유물 창고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2010년 새로 개관한 랴오양시 박물관의 진열실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조선이 세력을 키워가던 기원전 6세기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진열실에는 고조선이라는 설명은 전혀 없이, 전쟁을 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소개하기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타완촌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은 내몽고 츠펑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츠펑 지역은 동아시아로 들어온 초원의 청동기가 전해진 교차로로 꼽힌다. 고조선은 당시 첨단 기술을 받아들여서 무기를 만들고 국가를 이루었음이 그들이 남긴 인물상으로도 증명된다. 그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무기를 소지한 전사 집단, 그리고 청동거울로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들이 있었으니, 상투머리의 이 인물은 바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귀족 무덤인 정자와쯔 6512호 무덤. 이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를 담당했던 증거가 많이 발견됐다. 강인욱 교수 제공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상투를 튼 사람의 모습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송화강 유역에서 나라를 건국한 부여인의 얼굴에서도 보인다. 부여의 수도였던 지린성 지린시의 마오얼산과 둥퇀산 출토의 인면상은 이빨을 드러낸 다소 험악한 모습이지만, 타완촌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지금의 만주와 극동 일대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소 험상궂고 무서운 얼굴인 것은 아마도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한 벽사(辟邪)의 의미인 것 같다.

고조선의 청동 기술은 남쪽으로 전해져 남한에서도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청동기들이 종종 발견된다. 전북 완주 상림리와 경북 청도 예전동 등 청동기 유적들에서는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는 동검들이 한데 묶여서 발견된 적이 있다.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묻은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상투머리를 한 고조선인은 바로 청동기 주조 기술을 보유하고 고조선은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주던, 당시 사회를 선도하던 테크노크라트였던 셈이다.

왼쪽부터 타완촌 출토 청동기 거푸집의 얼굴, 마오얼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둥퇀산 출토 부여의 금동제 얼굴. 모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고 상투를 틀었다. 강인욱 교수 제공

 

타완촌에서 시작해서 부여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특징은 바로 고조선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위만이 고조선으로 귀순할 때 상투를 질끈 매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바로 그러한 고조선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등록 2017-11-01 19:12수정 2017-11-01 21:06

‘고조선 자취’ 본격 논쟁판 열린다 : 한겨레 (hani.co.kr)

 

‘고조선 자취’ 본격 논쟁판 열린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반도 역사상 첫 나라인 고조선을 놓고 국내 고고학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의 자취에 대해 언급 자체를 꺼렸던 고고학계에 최근 불고 있는 변화다. 급기야

www.hani.co.kr

한국고고학회 3~4일 고고학대회 열어
위만조선 왕검성 위치 등 논란에
중견·소장 연구자들 새 논고 발표

 
고조선의 자취와 연관되는 중국 만주, 북한 일대의 유물들. 왼쪽부터 중국 자오양(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
 
중국 자오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나온 청동인물장식.
 
 
중국 랴오양(요양) 탑만촌 유적에서 출토된 선형동부 거푸집. 인물상이 돋을새김돼 있다.
 
 
평양 신성동 유적에서 나온 다뉴경(잔무늬거울).

 

 

입력2017-01-27 11:27:44 수정 2017.01.27 11:27:44

다큐드라마 ‘한국사기’, 설 명절 민족의 조상인 고조선인의 얼굴을 만난다 | 서울경제 (sedaily.com)

 

다큐드라마 ‘한국사기’, 설 명절 민족의 조상인 고조선인의 얼굴을 만난다

서경스타 > TV·방송 뉴스: 조상을 기리는 차례가 있는 설 명절, ‘한국사기’를 통해 민족의 조상인 고조선인의 얼굴을 만난다. 다큐의 명가 KBS 1TV에서 ...

www.sedaily.com

‘한국사기’ 제 4부 ‘국가의 탄생, 고조선’(연출 김진혁) 편에서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서 청동기 문화를 지닌 예맥족이 고조선을 세우고 중국의 왕조들과 세력을 다투며 한민족 최초 국가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먼저 중국 라오양시(??市) 인근의 마을에서 발굴된 청동도끼 거푸집에서 찾아낸 고조선인의 얼굴 조각을 통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민족 조상의 얼굴을 만나본다. 찢어진 눈매와 낮은 코, 튀어나온 광대뼈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위로 틀어 올린 상투(북상투)는 타민족과 구분되는 한민족만의 특징이다.

‘한국사기’ 제작진은 한반도 전역에 고인돌을 남기고 타민족과 구분되는 비파형 청동검을 썼던 고조선인들의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되살려내기 위해 CG와 3D모델링으로 조각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전 연령층의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말로 하는 설명보다 친숙한 애니메이션을 삽입해 교육적인 효과를 더했다.

 

입력 2016. 8. 22. 03:03수정 2016. 8. 22. 04:29
[동아일보]
정인성 영남대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손을 뻗은 사람)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 손을 모은 사람)이 20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 석성 유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위쪽 사진). 이 유적은 초기 청동기 취락으로 성벽과 원형 집터들로 구성돼 있다. 츠펑=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츠펑(赤峰) 시 인근에서 비파형동검이 나오는 걸 보면 여기는 초기 고조선의 석성(石城)이 분명하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 석성은 고고학계에서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규명된 곳이다. 비파형동검 제작 시기보다 무려 500∼1000년이나 앞서는데, 어떻게 고조선 석성이 될 수 있는가.”(정인성 영남대 교수)

20일 오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 시 삼좌점(三座店) 석성(石城). 댐 정상에 올라 경사면을 내려다보자 돌로 쌓은 성벽과 원형의 집터가 여럿 보였다. 절벽을 자연 방어선 삼아 조성된 초기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었다.

 
인적 드문 옛 성벽과 집터의 고요함은 한국에서 답사 나온 강단 및 재야 사학자의 설전으로 한순간 깨졌다. 이날 답사는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으로 고조선 영역과 한군현(漢郡縣) 위치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는 강단 및 재야 사학계가 현장을 함께 고증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벌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양측이 공동 답사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답사에선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삼좌점 석성의 축조 집단이 누구인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소장과 동행한 재야 사학자들은 석성 곳곳에 보이는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를 가리키며 “치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으로 중국 중원(中原)문화와 다르다”며 “고조선 산성”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치는 고구려 산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석성 양식은 산둥(山東) 성 등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강단 사학자들은 석성을 만든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 문화와 동일시하는 재야 사학계의 견해에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하층문화보다 1000년 뒤인 것으로 보이는 하가점 상층문화는 당시 중국 동북지방의 종족인 동호(東胡)나 산융(山戎)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하층문화의 주체는 아직 불명확하다”고 말했다.

삼좌점 석성 관련 논란이 빚어진 것은 요서지역까지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는 재야 사학계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중국 사서인 ‘태강지리지’ 등을 근거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중국 허베이(河北) 성 친황다오(秦皇島) 시에 있는 갈석산 인근까지 이른다고 본다. 이 소장은 “중국 사서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갈석산을 지나면 고조선 땅’이라고 적혀 있다”고 강조했다.

19일 중국 랴오닝성 후루다오시 갈석궁 터에서 답사단 일원이 진나라 시대의 ‘공심 전돌’ 계단(재연품) 앞에 서 있다. 아래 사진은 근처 자료관에 전시된 ‘공심 전돌’. 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와 관련해 19일 랴오닝(遼寧) 성 후루다오(葫芦島) 시 갈석궁(碣石宮) 터에서도 양측은 격돌했다. 1984년 발굴된 이곳에서는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대의 기와와 토기, 벽돌이 대거 발견돼 중국 고고학계는 진시황의 행궁으로 보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제국의 동쪽 끝을 순행하면서 갈석궁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한 명은 “당시 이곳은 진나라의 영토일 수 없다”며 “유적이 (중국 측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갈석궁이 고조선의 영토인 갈석산 동쪽에 있기 때문에 진나라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건물 터 유적에 재연된 사격자 무늬의 공심(空心) 전돌을 보여주며 “진시황 당시 함양궁 전각 터에서도 같은 양식의 전돌이 발견됐다. 오랜 시간 연구된 학술자료를 위조로 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반박했다.

 

답사 내내 의견 대립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후반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 공략 이후 설치했다는 연나라 장성(연장성·燕長城)이 한반도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는 서로 동의했다. 앞서 중국사회과학원이 작성한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연장성이 청천강 부근까지 그려져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정 교수는 “요동지방의 푸신(阜新) 동쪽으로는 연나라 토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장성이 한반도 안까지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츠펑·후루다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입력 2016. 10. 10. 03:03

"中 홍산-하가점하층 문화, 고조선과 연결짓는 건 무리" (daum.net)

 

"中 홍산-하가점하층 문화, 고조선과 연결짓는 건 무리"

[동아일보] 중국 요서 지역의 고대 문화와 고조선의 관계에 관한 학술대회가 8일 열렸다.  한국고고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역사연구회 등 고고학계와 사학계가 함께 구성한 ‘고고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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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학계 요서古代史 학술대회"2500년 시차에 매장방식 달라" 주장.. 재야학계 "곰 장식은 韓민족 유물"2300년전 쇠퇴한 십이대영자문화.. "우리민족과 깊은 관련" 주장도

 

 

수정 2019-10-19 11:23등록 2015-08-10 19:03 기자노형석

돌 성곽 안 암각화, 한반도 유적 닮은꼴 발견 : 한겨레 (hani.co.kr)

 

돌 성곽 안 암각화, 한반도 유적 닮은꼴 발견

처음 보는 초원의 비경이었다. 부슬비 맞으며 올라간 산정상 돌무더기 성곽터 아래로 내몽골 초원의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졌다. 이 장엄한 풍경을 안겨준 산정상부 구릉 수만평에는 제단, 집터

www.hani.co.kr

(하) 하가점문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처음 보는 초원의 비경이었다. 부슬비 맞으며 올라간 산정상 돌무더기 성곽터 아래로 내몽골 초원의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졌다. 이 장엄한 풍경을 안겨준 산정상부 구릉 수만평에는 제단, 집터로 보이는 돌무더기 유적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고조선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는 요서·내몽골 지역의 고대 성곽인 성자산(청쯔산) 산성의 장관이다. 국내 재야학계가 단군신화의 실체, 고조선 문화의 원류로 주목하는 홍산문화의 본산인 내몽골자치구 츠펑(적봉)시 북쪽에 있는 이 산성은 기원전 2000~1500년에 쌓은 것으로 고조선 시기와 겹친다. 축성 방식도 고구려 성 등과 유사해 국내 학계에선 반드시 짚고가는 유적이다.

국사편찬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 답사단은 지난달 16일 오전 살력파향(싸리바향)이란 곳에서 차를 갈아타면서 산성을 찾아 헤매다 여기에 도착했다. 땀투성이가 된 답사단원들은 산성 서남쪽에서 북쪽까지 터를 가로지르며 정상부근에 산재한 집터, 제단터, 성곽터에서 고조선 문화와 잇닿는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2001년 기초조사를 벌였던 유적 주변에는 고운 흙으로 만든 꼰무늬 토기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해발고도 856m, 유적 범위 6.6㎢에 228개나 되는 돌무지 유적들이 가득하고 정상 부근에는 별도로 성을 두르고 땅을 돋운 내성도 있다. 정원철 동북아재단 연구위원은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인 하가점(샤자뎬) 하층문화를 대표하는 성으로, 고조선과 연관된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성곽 취락 유적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청동기 주거터엔 고조선 연결고리
요서~내몽골 일대 고대유적들은여러 민족이 일군 복합문화 도가니교류 자취 뚜렷…단정짓기엔 무리“요서 유적 국내 연구자 육성 절실”

하가점상하층 문화는 60년 츠펑시 하가점촌 유적의 상·하층을 발굴하면서 드러난 청동기 문화로, 고대 요하지역과 고조선의 관계를 푸는 또다른 열쇠다. 고조선 문화의 물증인 비파형동검과 고구려계 성곽·주거지 등과 연결되는 취락, 성터 등이 상당수 나와 국내 주류학계도 관심이 높다. 답사단은 성자산산성이 산 정상부 성곽이며, 돌을 다듬어 축성하는 방식 등에서 후대 요동 고구려 산성과 일부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시기가 2000년 이상 차이 나고, 공간적 거리가 크다는 공백도 있으나, 성에 대한 본격 발굴이 진행된 뒤의 성과를 기약하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다소 풀린 건 다음날 진행된 츠펑 북서쪽 일대의 삼좌점(싼쭤뎬) 석성 답사였다. 옆에 저수댐이 자리잡은 이곳 둔덕에는 수백미터의 야트막한 성곽과 고구려산성에 보이는 돌출된 ‘치’(적을 끌어들여 제압하는 옹성 시설) 등이 드러나, 중원의 토성과 구분되고, 우리 고대 성곽과의 유사성도 좀더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성곽 안의 원형 집터 사이의 바위에는 국내 암각화 특유의 동심원과 마름모꼴 암각화도 보여 답사는 활기를 띠었다. 역시 3000~4000년전 유적이라 국내 암각화·성곽 유적과 시기 공백이 크다는 한계가 있고, 군사용인 고구려 성곽과 달리 주거지를 야수들로부터 지키는 외곽 담장 정도의 구실에 머물렀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박남수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은 “방어성곽 안에 원형 주거지가 넓게 조성된 만큼 마을 성격이 뚜렷하다. 암각화는 동네 장승 구실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이날 오후 찾은 음하(인하) 강변의 지가영자(츠자잉쯔) 유적은 곳곳이 암각화 문양의 밭이었다. 바위 곳곳에 사슴, 늑대 등의 형상과 함께 태양을 상징한 듯한 동심원 등 기하학 무늬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암각문화가 내몽골 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게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의 추정이었다.

요서와 내몽골 일대의 고대 유적들은 고대 한민족인 예맥족은 물론, 선비, 거란, 한족 등 여러 민족이 일군 복합문화의 도가니였다. 답사 틈틈이 돌아본 우한치 박물관, 적봉 박물관의 토기류와 비파형동검 유물들이 이를 증거했다.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빗살무늬 문양과 비슷한 문양의 토기들도 많지만, 어김없이 중원 계통의 다양한 기하·동물문 채색토기가 섞여 있었다. 고조선의 대명사인 비파형동검도 제조 방식이나 함께 나오는 장신구, 무기류 등은 우리 고대문화 양상과 크게 달랐다. 교류의 자취는 뚜렷하지만, 고조선 강역이라거나 한민족이 주도세력이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라는 게 답사단의 결론이었다. 조영광 국사편찬위 연구사는 “요서·내몽골 유적 현장 연구자가 국내에 사실상 전무해 중국 쪽 조사결과만 놓고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사실관계부터 파악할 연구인력 육성이 초미의 과제”라고 지적했다. <끝>

 

 

입력 2015. 8. 27. 03:09수정 2015. 8. 27. 09:34

[단독]中 이번엔 '선사시대 동북공정' (daum.net)

 

[단독]中 이번엔 '선사시대 동북공정'

[동아일보] 16일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시 ‘아오한치 박물관’. 현재 지방정부는 이 박물관을 대신해 더 큰 규모로 들어설 ‘네이멍구 홍산문화 박물관’을 올 1월부터 짓고 있다. 아오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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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 12. 28. 17:29수정 2010. 12. 28. 17:29

<신간> 요하문명의 확산과 동북아 청동기 문화 (daum.net)

 

<신간> 요하문명의 확산과 동북아 청동기 문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요하문명의 확산과 동북아 청동기 문화 =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한 선사고대 문화 중에서도 기원전 1천년대 흥성한 청동기시대 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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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이 문화에 속하는 유적에서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까닭에 특별히 주목한다.

이청규 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필진 5명은 요하 상류와 대릉하(大凌河) 유역에는 하가점하층문화에 도달하는 과정에 어떠한 문화가 있었으며 그것이 주변 지역 문화와는 어떻게 교류했는지 등을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하가점하층문화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적들인 십이대영자(十二台營子)와 위영자(魏營子), 그리고 백금보(白金寶) 문화를 중점 검토했다.

 

 

강동민 이사장 | 기사입력 2008/07/23 [14:14] 

˝中 적봉지역 고조선 유적 계속 발굴된다˝ (breaknews.com)

 

˝中 적봉지역 고조선 유적 계속 발굴된다˝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소윤내현소장을고조선학회회장으로등록을마치고,학회회원교수들과일반회원들이고조선지역인중국의요서지역현장답사를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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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윤내현 소장을 고조선 학회회장으로 등록을 마치고, 학회 회원교수들과 일반회원들이 고조선 지역인 중국의 요서지역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우리일행은 신용하 교수를 단장으로 고고학박사인 복기대 교수와 고인돌박사 우장문 선생, 박용일 변호사, 김경희 지식산업사 사장,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 등 여러 분들이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의지로 어렵고 험난한 길을 마다않고 출발했다.

 

지난 5월 1일부터 7일까지 하루에도 무려 6시간∼8시간 씩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유적지와 유물을 확인하며 강행군을 했다. 우리는 한 곳이라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보고 싶은 욕심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중국 쪽에서 보면 관내와 관외의 접경지역이며 공산당 고급간부들의 휴양소가 있는 북대하와 진황도시의 갈석산 지역부터 답사는 시작됐다. 그곳은 산해관이 버티고 서 있는데,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고 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라고 하였으며 14세기 초 명나라 때 세워진 것이다.

 

북경-조선-일본은 “광명의 땅“

만리장성의 마지막 꼬리부분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 식민사학자들은 만리장성이 북한의 평양까지 있는 것처럼 국사교과서에 기재하였기 때문에 중국정부의 모든 지도에도 북한 평양까지 만리장성을 그림으로 그려 넣고 있다. 여기 인근에 옛날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던 곳이고, 위로는 조양과 내몽고의 동남쪽에 위치한 적봉이 있다.

북경(북평). 조양. 고죽. 조선. 평양. 왜. 일본 등의 한자로 적힌 지명은 우리민족의 고어(옛날 말)로는 “광명의 땅”이라는 뜻이다. 적봉 역시 같은 어원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언어학자 박병식 선생님의 글). 적봉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한웅천왕 때의 첫 수도였던 ”신시(神市)”였다고 타당성 있는 주장을 한다. 한(漢)나라 때의 표현으로는 170년~200년 가까이 매년 조공을 바쳤던 두려움과 원한의 대상이었기에, 이름마저 노예라는 나쁜 뜻이 담긴 흉노족(匈奴族)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우리민족의 일파인 흉노(훈족)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여진, 말갈, 물길, 돌궐(터키국가로 변함) 등도 모두 우리민족의 사촌이 되며 이곳 적봉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 이태리를 망하게 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훈족의 침략과 압박 때문이라고 하니 훈족(흉노족)의 용맹성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흉노의 장수가 적국을 원정하다 죽게 되면 그의 말에다 장수의 칼과 소지품을 실어서 보내는 곳이 여기 적봉이라고 한다(신용하 교수님의 설명). 이 부근 역시 대능하, 난하, 요하가 흐르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자를 만들기 이전의 우리 민족의 글.
 

 

그동안 중원지역 한족들의 기록에는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들만 사는 곳이라고 하더니, 만리장성 밖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7,000년~8,000년 전의 토기와 문화유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고조선의 부족들 중 예, 맥 조선의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여기가 바로 중국 한(漢)족의 기원이며 “중화제1용”의 기원이 발굴된 장소라고 떠벌리며, 중, 고등학교 학생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역사를 정치에 교묘히 이용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현실을 재확인 할 수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용 빈약

반대로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용산 소재)은 명색이 세계5대 규모라고 자랑을 하면서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이 줄지어 많은 견학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빈약하여 한 바퀴 전부다 돌아보고 난 후의 느낌은 매우 허전하다.

“우리민족은 아무것도 아니 구나!” 하는 허탈한 심정과 동시에 자부심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민족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중국으로부터 직수입한 것처럼 꾸며놓았다.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1,000년경부터라고 하며, 그때부터 국가가 성립된다는 일제식민사관을 그대로 인용하여 역사연표를 만들어 놓고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게 되면, 도리어 우리민족이 역사도 없는 보잘것 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참으로 심각한 상황인데도 정작 교육 담당부처와 박물관 측은 모르고 있는 듯하다. 현재의 중국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일반 여행자들은 깜박 잊어버리는 때가 가끔 있다.

 

▲고조선 때의 성곽.

 

사실 공산주의사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으며 직업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을 여행하는 일반 외국 여행객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기를 자유민주주의와 똑같은 사회인 줄로 착각을 하곤 한다. 국가가 정해주고 허용하는 지역은 특구형식으로 많은 혜택과 자유를 만끽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엄청난 제제와 압력이 가해지고 있음을 외부세계 사람들은 알기가 어렵다.

 

예로써 티베트 사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는 수, 당 때 막강한 세력으로 당의 공주를 맞이하여 정치적 혼사를 할 정도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등, 실크로드의 중요 지점에서 더욱 더 문화가 발전하였지만, 그 후 국력이 쇠퇴하면서 중국의 지배하에 종교 지도자도 마음대로 뽑아 받들지 못하는 오늘의 티베트가 되었다.
국내 각 언론사들도 인구대국, 군사대국에 대한 두려움에 다들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일찍부터 중국을 방문하였고 사업타당성 검토와 관광여행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이번 답사여행처럼 여러 가지 걱정으로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는 현장”을 보았다. 그것도 한족의 역사가 아닌 고조선역사를 한족의 역사라고 꾸며서 정치에 이용하고, 중국의 어린학생들에게는 자국의 역사 뿌리가 엄청나게 오래된 것처럼 만들기에 혈안이 된 현장들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학생들은 이것을 보고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갖게 되겠지, 거짓역사를 만들어서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일본처럼 말이다. 거짓역사도 오래두면 나중에는 헷갈리는 역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 단군조선을 부정

내몽고 적봉(赤峰)의 오한기(敖漢旗) 박물관에는 중국역사 이전(以前)의 역사기록과 유물유적을 전시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설명자의 말에 의하면 “연나라” 장성 유적지 강역도 같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본래부터 고조선 단군조선의 중심지역 이었기 때문에 연나라 장성은 있을 수도 없고 있을 곳도 아니다. 고고학적으로도 아무런 발굴된 유물유적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여기는 연나라 장성 유적지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식의 정치광고형식으로 설명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마치 명도전(고조선 돈<화폐>)을 연나라 화폐라고 주장하는 중국이나, 이것을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교육시키는 얼빠진 한국 학자들과 똑 같았다. 또한 홍산문화 유적지와 연결되고 이어지는 하가점 하청문화 유적지의 발굴현장 옆 산에 아주 큰 글자로 “연나라 유적지(燕遺址)”라고 일부러 만들어 놓고 2007년 개통된 고속도로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이곳에도 연나라의 유물유적이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으나 중국정부에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고고학자들의 증언) 이것은 고조선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연나라에서 피난 와서 단군조선의 서쪽변경(기자조선이 있던 곳: 하북성 북경부근)에 거주해 살던 위만을, 위만조선이라고 하며 우리민족의 역사 시작점으로 만들어 놓은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똑같이 이론을 맞추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요서지역, 신석기 문화 발달

요서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원전 5,500년경의 “흥륭와문화(興隆洼文化)” 혹은 “사해문화(査海文化)” 유적지 입구에는 “중화제1촌(中華第1村)”이라고 크게 글씨를 써놓고 중화민족의 용(龍)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용 모양하고 약간 비슷하게 하여 작은 돌들을 1미터 정도 높이로 흙을 돋우어서 유적지를 만들어놓고, 학생들 교육용으로 이용하다가 현재는 현장만 보존한 채 방치해 놓고 있었다.

본래는 용(龍)으로 자기표시를 삼았던 사람은 우리 동이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태호복희(bc 3528~3413)씨이다. 봉황(鳳凰)을 표시로 삼았던 사람은 태호복희씨로부터 한참 후대인 제곡고신(황제 헌원의 증손자)씨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사실 우리민족의 본래 상징이었던 용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명나라에 스스로 신하라고 하며 사대주의를 꽃피웠던 상징중의 하나인, 발이 네 개 달린 용(중국은 발이 5개로 정상)을 표현하는 등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중원유적과 다른 형태의, 고조선 유적으로 확실한 것은 발굴도중 덮어 버리든지 발굴 후 방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요령성 금서시연산구 여아가의 “임둔군 태수장 봉니 출토유적”은 “한사군”의 위치가 요서지역에 설치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중요 유적유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평양을 한사군의 낙랑이라고 하며, 한사군 낙랑을 한반도로 끌어다 놓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중국공산주의는 그 맥과 이익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의 최고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몽고 적봉시 초두랑 지역의 고조선 성터 유적지로서 후에 고구려 성곽기술의 기초가 되는 석성(石城)과 마면이라고 하는 성의 돌출부가 나와 있는 고구려석성의 특징 유적지 여러 곳을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의 중화 유적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발굴도중 한국인 발굴동참 학자에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중국 선생의 묻는 말에 “변소 같지 않습니까?”하고 예사롭게 말하여 마치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며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유적지 보존에 보이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축소-왜곡 덮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민족의 역사 유적지를 한 곳이라도 더 보존 하고자하는 어느 고고학자의 순수한 애국애족정신의 발로가 필자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정치와 힘의 논리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만, 일부러 만들어진 거짓말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연구해보면 저절로 알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축소 왜곡한다고 모두 덮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최고의 지리풍속을 기록한 산해경과 회남자, 사기진시황본기, 사기조선열전, 사기흉노전, 사기송미자세가, 삼국지위지동이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책들엔 우리민족의 풍속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청나라 때 국력을 총 동원 7만9천여권의 책을 엮어서 “사고전서”를 만들었다. 그 책 속에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 날조하려고 해도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강동민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화운동가. 현재는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세계적인 줄자 회사인 코메론의 ceo를 지냈다.

 

 

샤자뎬 하층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샤자뎬 하층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샤자뎬 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 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下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下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xiàcéng wénhuà Lower Xiajiadian culture[*])는 기원전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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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자뎬 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 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下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下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xiàcéng wénhuà Lower Xiajiadian culture[*])는 기원전 2200년부터 1600년경까지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내몽골 자치구 동부, 랴오닝성 동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한 고고 문화를 말한다.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하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같은 지역의 훙산 문화에 이어지며, 그 과도기를 샤오허얀 문화(小河沿文化)라고 한다.

생활의 중심은 잡곡 재배이며, 그 밖에 목축수렵도 행해졌다. 유적에서는 돼지, 개, 양, 소 등이 발견되었다. 정주 생활을 하면서 인구밀도는 높았다. 석기, 골기, 토기가 발견되고 있고, 그 밖에 금, 납, 칠기, 비취, 동기,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동기, 청동기로 만든 귀고리가 많고, 뼈를 이용하여 점도 행해졌다.

집은 둥글고, 흙과 돌로 만들어졌다. 취락은 벼랑이나 경사면에 방어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또는 석벽을 취락의 주위에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그 후, 샤자뎬 상층문화가 퍼졌다.

 

 

샤자뎬 상층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샤자뎬 상층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샤자뎬 상층문화(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上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上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shàngcéng wénhuà)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경, 현재의 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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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자뎬 상층문화(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上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上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shàngcéng wénhuà)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경,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에서 형성된 청동기 문화를 말한다.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상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유라시아 스텝의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또 서주(西周)와 동시대에 이 영향도 있다.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내몽골 자치구 동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영역에서 앞서는 샤자뎬 하층문화보다 약간 넓은 범위에 이르러, 북쪽은 자모론 강의 북쪽에 이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인구밀도는 낮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했지만, 유목 생활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토기는 뒤떨어지지만, 청동기나 석기가 더 우수했다. 청동기에는 검, 도끼, 도, 투구 등이 있고, 동물이나 자연에 대한 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스키타이로 연결된 유라시아 스텝을 통한 밀접한 문화적 접촉을 나타내고 있다. 후기가 되면 주나라(周)양식의 청동기가 출현한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항구적인 건축물이 적어서, 하층 문화의 건축물 또는 그 재료를 유용하는 것이 많아진다. 말과 마구가 많이 발굴되어 말이 중요한 생활 수단이 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축은 돼지를 대신해 양이나 산양이 더 중시되게 되었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해 지배계층의 무덤은 더욱 호화로운 부장품을 가지며, 묘제는 적석총과 분구를 특징으로 한다.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遼寧 十二臺營子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요령 십이대영자 유적(遼寧 十二臺營子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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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의 특징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의견이 주장되었다. 한 쪽에서는, 십이대영자 유적을 중심으로 대 · 소릉하(大 · 小凌河) 유역의 청동기문화는 요서지방 전체로 보았을 때 유물상의 차이점만 보일 뿐, 문화적 특징에서는 차별성을 밝히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대영자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한 지방유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 지역의 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와는 다른 독립적인 문화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이지역 주변에서 발견되는 특징적인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을 공반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청동기문화 · 고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점이다. 비파형동검과 잔무늬거울 등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루 출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이대영자 유적은 축조 주체가 누군가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평양인지, 요서지방인지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이 무덤이 춘추시대 말기 혹은 전국시대에 해당하며, 동호족(東胡族)이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무덤이 처음 보고된 1960년대만 해도 서기전 6∼5세기에 동호라는 북방민족의 유적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는 서기전 8세기 경에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연구자들은 십이대영자문화를 요하 이동, 곧 요동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요동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를 예맥(濊貊)으로 본다.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비파형동검문화와 더불어 예맥청동기문화로서의 성격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문화는 기원전 9세기 요서 서북부에서 처음으로 유물 복합이 형성된 이후 기원전 8세기 요서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서기전 7세기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유하(柳河)유역이 비파형동검문화권에 새로이 포섭되었으며, 서기전 6∼5세기에는 요하 이동으로 직접 확산되는 동시에 객좌(喀左) · 심양(沈陽)으로 분화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4세기에는 요하 양안에 걸쳐 있던 정가와자유형의 매개 역할로 요령 전 지역에 통합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즉 요령 전역이 완전한 하나의 문화 단위를 이루게 되었다. 요령 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길림과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북한의 세형동검문화가 결국 요령 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계문화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요령 정가와자 유적(遼寧 鄭家窪子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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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 정가와자 유적은 중국 요령성 심양시 정가와자에 있는 청동기시대 청동단검·쌍뉴경 등이 출토된 널무덤이다. 이 유적은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래전부터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정가와자 마을에 위치한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요양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물은 비파형 동검이다. 고인돌 분포지역과의 일치 및 서북한 세형동검 문화와의 연계성으로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선양 일대 요양 평원 지역을 관할하던 고조선의 최고지배자 또는 예맥계 정치집단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문헌에서는 당시 요동지역에서 성장한 세력에 대해 ‘조선후국(朝鮮侯國)’이라 표현하고, 이들이 성장하여 ‘왕(王)을 칭’하는 등 ‘교만하고 사납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정가와자유적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비파형 동검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비파형 동검문화는 크게 남동구 유형과 정가와자 유형으로 나누는데, 남동구 유형은 객좌중심으로 북방계 유물군이 다량으로 공반하며, 정가와자 유형은 심양중심으로 토착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남동구 유형은 ‘동호(東胡)’가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정가와자 유형은 요동지방에서 타 문화에 대해 상위교섭관계를 가지는 주도적인 문화로 발전하게 되며, 비파형 동검뿐 아니라 고인돌 분포지역과 겹치고 있고, 서북한 지역의 세형동검문화와 강한 연계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다만, 요하 하구-대릉하하구에 이르는 지역은 ‘동호’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지 않아 동호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족(箕子族)이 대릉하 하구쪽에 모여 살았을 가능성 까지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국가’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은 · 주(殷周) 계열의 유물이 고조선의 영역 내 출토물이 없고, 또 기록을 통해 기자는 동진한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기자와 중국계 유민이 조선으로 들어와 지배계급이 되었다는 ‘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남북한 학계에서 모두 부인되며,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배격하는 주요 논거로 사용된다.

정가와자 유적에 속한 사회는 농경을 주로 하고, 어로와 수렵이 보조가 되는 생활을 하였고, 그 주인공은 동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보이는 동호족의 거주지역과 요령식 동검의 생성배경 등을 고려한다면, 동호족과 같은 유목민족보다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면서 여러 문화요소를 융합할 수 있는 농경민족(예맥 · 숙신 등)의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요령 남산근 유적(遼寧 南山根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요령 남산근 유적(遼寧 南山根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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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근 유적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설정이나 문화를 언급할 때 비파형동검은 어느 유물보다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물의 분포는 내몽고로부터 중국 동북지방,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의 조형(祖型)이 남산근에서 발견되었다. 또 남산근의 돌덧널무덤과 유사한 형식이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부여 연화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나아가서 요령지방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돌널무덤[石棺墓]도 한반도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남산근유적을 통해 요령지방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당시에 문화적 동질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서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주민과 그 성격을 중국학계에서는 동호(東胡) 또는 산융(山戎)이라 보고, 북한 학계와 일부 남한학계는 예맥(濊貊)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요서지방의 청동기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라 통칭하면서, 그 문화의 성격과 주민을 일괄적으로 해명하고자 함은 타당성이 희박하다. 즉 요서의 청동기문화는 노로아호산 이북의 남산근문화와 그 이남 대릉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는 북방계, 십이대영자문화는 요동의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와 연계된 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요령 강상 유적(遼寧 崗上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요령 강상 유적(遼寧 崗上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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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은 구조·형식·매장풍습이 독특한 돌무지무덤으로 인근에 위치한 누상(樓上)유적과 구조가 기본적으로 같으며, 부장품도 서로 유사해 두 유적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두 유적은 순장묘로 보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 유적들은 고조선의 이른 시기의 역사, 구체적으로는 요동반도에서 원시공동체적 관계가 깨져나가면서 고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강상유적의 연대에 대해 보고자들은 동검의 형식과 기타 유물로 미루어 대략 서기전 8∼6세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인근 요령누상유적의 연대를 서기전 3세기 전후 또는 서기전 4∼3세기로 보는 견해도 있어 연대가 더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 그 주체는 누구일까? - Daum 카페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 그 주체는 누구일까?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 그 주체는 누구일까? 대륙문화, 중원내륙문화, 요동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주체가 누구인가는 전문가조차도 추정할 따름이지 쉽게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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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요서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유물과 유골 관련 논문 - Daum 카페

 

요서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유물과 유골 관련 논문

요서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유물과 유골 관련 논문 ◀ ○선 안쪽이 랴오시 지역. BC 2400년경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가 출현한 지역이다. 중국 동북부 지역, 행정상으로는 랴오닝 성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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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서단산자 유적(吉林 西團山子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길림 서단산자 유적(吉林 西團山子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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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단산자 유적은 서단산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길림·장춘지역의 돌널무덤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문화현상을 보여준다. 이들 유적은 길림·장춘지역은 물론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의 청동기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서단산문화의 주체는 고조선 또는 숙신족(肅愼族)의 문화로 이해하기도 하며, 한반도와의 문화적 동질성도 풍부하게 확인되고 있다. 이 유적의 연대에 대해서는 서기전 9세기부터 서기전 6세기 까지 다양한 편년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최근에는 서기전 8세기대로 보는 편년안이 지지를 얻고 있다.

 

분자인류학논단 | 서단산 문화(Xituanshan Culture)를 만든 세력 중 예족 계열 세력의 주요 부계 유전자 명칭에 대한 가설 - Daum 카페

 

서단산 문화(Xituanshan Culture)를 만든 세력 중 예족 계열 세력의 주요 부계 유전자 명칭에 대한 가

길림성 지방에서 약 3200년 전~약 2300년 전에 만들어진 서단산 문화(Xituanshan Culture)의 특징은 예족 계열 세력의 문화 특징을 바탕으로 맥족 계열 세력의 문화 특징이 조합된 경향이 있는 것 같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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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정창교 기자입력 2017. 8. 2. 10:23

"역사냐, 전설이냐" 남창희 군사고고학회 회장 국내 최초 강화도 정족산성 고조선 초기인 4000년전 축조가능성 제기 (daum.net)

 

"역사냐, 전설이냐" 남창희 군사고고학회 회장 국내 최초 강화도 정족산성 고조선 초기인 4000년

군사고고학연구회 회장 인하대(총장 최순자) 남창희 교수는 2일 강화도 정족산성(삼랑성)이 실제 고조선 초기인 4천년 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지난 5년에 걸친 동북아 고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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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고고학연구회 회장 인하대(총장 최순자) 남창희 교수는 2일 강화도 정족산성(삼랑성)이 실제 고조선 초기인 4천년 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지난 5년에 걸친 동북아 고대 산성 비교 연구 과정에서 정족산성의 구조와 위치에 대한 군사학적 검토의 결과라는 것이다.

전등사가 위치한 정족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가파른 외측면 산세를 이용한 천혜의 군사기지로 알려져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위에서 둘러싼 능선에 산성을 쌓아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로 된 것을 말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격퇴할 정도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육군본부 자문위원이기도 한 남창희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정치군사모의분석(PolMil) 기법으로 위치, 지형, 규모 데이터를 입력하여 축성 시기를 추론한 연구 성과이다.

정족산성은 고려사에 고려시대에 처음 쌓았다는 기록이 없고 세종실족 지리지에도 전설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먼 과거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학계에서도 연대미상으로 학설이 분분한데 남 교수팀은 한성백제기와 3500년 이전이라는 두개의 군사학적 가설을 국내에서 최초로 제시했다.

군사지리적 위치와 수용 능력의 데이터를 결합하면 정족산성은 해양력이 발달한 북방 세력의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Base: FOB)로서 효용이 높다.

동시에 한반도 내륙의 전략적 가치 중심을 노리는 적대적 세력의 원정 상륙을 막는 방어기지로서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1866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상륙 당시 수도권 주요 방어거점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방대 권태환 교수(육군 준장)와 남 교수팀은 기원전 8세기부터 한성백제 말기 475년 사이 약 1200년간의 28개 동북아 국제관계 주요 변동 시점에서 정치군사모의분석을 실행했다.

그 결과 한반도 강화도에 대형기지를 배치할 전략 및 작전적 소요는 기원전 8세기 이전과 한성백제 시기에 존재했다. 연구팀은 2800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한성백제 시기는 다소 약하다는 잠정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삼국시대 이전 해양력 발전의 지표는 천문기록과 바다 항해인데 두 가지를 만족하는 국가는 고대 동북아에 고조선 뿐이다. 중원 문화에 없는 고인돌의 별자리 새김문화와 신석기 시대 원양 어로(포경) 암각화 존재가 고조선의 앞선 해양력을 시사한다.

고조선 말기에는 제나라, 연나라 등 대륙세력의 위협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고조선의 남측 주변부인 강화도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고조선 세력으로 추정되는 요녕성의 기원전 16세기 조양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는 필리핀, 오키나와와 제주도에서 서식하는 카우리 조개화폐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남창희 인하대 교수 연구팀은 “무덤의 카우리 조개화폐는 쿠로시오 난류를 따라 서해로 북상하며 발해만의 고조선 중심 세력과 교역하는 남양의 이질적인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족산성은 기원전 23세기 경 고조선 초기 세력권이 한반도 남쪽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토착 해양세력과의 갈등의 흔적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 남 교수 연구팀은 “고조선 초기에 서해의 섬 강화도에 군사기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라고 추정했다.

이와 함께 남 교수팀은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요서지역 산성 조사과정에서 한국 산성의 기원이 되는 3500년전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테뫼식 산성을 확인했다.

내몽고 적봉시 홍산은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하가점하층문화(BC22세기-BC15세기)의 상징인데 포곡식 산성 구조로서 능선에서 산성을 발견했으며 방어용 돌출부인 치(작은 雉城)도 발견됐다.

같은 시기, 성자산(城子山) 산성은 평평한 산정상부에 머리띠를 두른 것같은 테뫼식 산성인데 그 모형을 오한기(敖汉旗)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3500년 전의 포곡식 산성은 고구려 환도산성으로 이어지고 백제 공주산성과 사비성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정족산성과 동일한 구조의 산성이 이미 3500년 전에 축조된 사실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다.

김연성 고조선연구소 소장은 “정족산성이 4천년 전에 축조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유네스코 세계역사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남창희 교수는 “초대 단군 때 참성단과 삼랑성을 쌓았다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식 기록을 전설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권태환 교수는 “인천공항과 강화도를 잇는 다리가 개통된다면 동북아 허브공항에서 여행객들이 2시간 안에 즐길 수 있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2014.06.24 01:12

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조개화폐 사실성 입증 27일 발표 < 인천종합 < 인천 < 기사본문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joongboo.com)

 

인하대 융합고고학팀, 조개화폐 사실성 입증 27일 발표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단군세기 창작설을 뒤집을 인하대학교의 논문이 오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족하는 ‘세계환단학회 창립회의’에서 발표된다.이번 논문은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조개화폐 기록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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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성 이리두 유적과 언사상성박물관의 조개화폐.
 

 

단군세기 창작설을 뒤집을 인하대학교의 논문이 오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족하는 ‘세계환단학회 창립회의’에서 발표된다.

이번 논문은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 통해 강화도의 역사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국내 고고학계의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3일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에 따르면 이번 논문을 통해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과 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함에 따라 ‘단군세기’를 근거없이 창착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가 고조선 역사의 실체를 담고 있다고 인정되면 기존의 교과서에 고조선 관련 기술을 채워 넣을 풍부한 검증대상이 확보된다. 또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쐐기를 박는 유력한 근거도 된다.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은 “단군세기의 5세 오사구단군 재위 시(BC 2133) 주조한 원공화폐 기록은 흥미롭게도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와 일치하고 있다”며 “개오지로도 알려진 카우리 조개가 이미 하나라 때부터 화폐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1987년 이후인데 1911년에 간행된 단군세기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개화폐에 둥근 구멍을 뚫어 사용한 사실 역시 하남시 정주 이리두 유적과 내몽고 하가점유적 발굴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단군세기에는 이미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요서지방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 납으로 주조한 조개모양 화폐가 발견돼 단군세기의 금속 조개화폐 주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관홍 인하대 해양학과 교수는 “카우리 조개는 쿠로시오 난류대에 서식하는 아열대성 종으로서 한류가 남하하는 중국 동남해안에서는 채집하기 어려운 것”이라 설명하며 “중국 본토가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면 발해만과 한반도 지역을 주 무대로 하는 해륙문화세력이 이 고대통화를 유통시킨 주체”라고 주장했다.

김연성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은 “발굴 분포와 조개화폐의 출토량을 종합 고찰할 때 명도전이 그렇듯이 이 조개화폐도 고조선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하가점하층의 조개화폐 사용이 중원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을 근거로 북방세력의 초기화폐문화로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기대 인하대 고고학 교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기록 모두가 창작이라는 기존 학계의 입장은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이고 경솔한 감이 없지 않다”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정밀한 검증작업을 통해 ‘단군세기’ 기록 중 의미 있는 사실 기록을 추출해 내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달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범식을 갖는 세계환단학회는 40가지의 각기 다른 전공분야 교수 7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국내 최초의 융합학회로 등록될 전망이다.

라다솜기자/radasom@jooongboo.com

 

 

입력 2017. 11. 9. 03:01

강인욱 경희대 교수 논문서 주장

[동아일보]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3세기 청동 장신구(위 사진)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sim;기원전 15세기 청동 장신구. 두드려서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형태가 서로 닮았다. 강원문화재연구소&middot;강인욱 교수 제공

 

 
한반도 청동기의 뿌리는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학계는 비파형동검의 중국 랴오닝(遼寧)지역 전래설 위주로 한반도 청동기 기원을 논의해 왔다. 이번에 제기된 견해는 지난해 11월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청동 유물을 연구한 결과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최근 발표한 논문 ‘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에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청동 장식은 한반도에 청동기가 들어온 연대를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실제로 돌 반지처럼 얇게 편 고리와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 4점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됐다.

지금껏 남한에서는 비파형동검(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청동유물이 드물어 이른 청동기시대를 놓고 ‘무문(민무늬)토기 시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인 농경 흔적은 확인되는데 정작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라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기원전 13세기의 이른 시기에도 청동기가 사용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아우라지 청동기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를 비교했다.

돌 장신구에 끼울 수 있도록 청동기를 두드려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양식이 서로 일치했다. 그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청동기시대에 국한할 때 중원(中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만 중국 북방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평북 신암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서북지방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방통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곡옥(曲玉)을 모방한 청동기처럼 한반도 고유의 문화 요소도 가미됐다.

 

강 교수는 “석기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고 말했다. 돌 장신구에 끼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아우라지 청동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철기가 도입돼 석기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형동검 단계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청동기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입력 2016. 11. 16. 09:53수정 2016. 11. 16. 19:15

아우라지에 3000년전 귀족이 살았나..희귀 유물 대거 발굴 (daum.net)

 

아우라지에 3000년전 귀족이 살았나..희귀 유물 대거 발굴

[헤럴드경제=함영훈기자] ‘정선아리랑’의 본고향으로 국민에게 익숙한 아우라지 일대에서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토기와 청동제 장신구, 옥(玉) 악세사리, 정교한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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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함영훈기자] ‘정선아리랑’의 본고향으로 국민에게 익숙한 아우라지 일대에서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토기와 청동제 장신구, 옥(玉) 악세사리, 정교한 화살촉, 고인돌 하부구조 추정 석곽 및 석관 등 희귀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사진=각목돌대문토기]

 

또 신석기~조선시대의 장구한 세월의 유적이 다양하게 발견돼, 이곳이 신석기 시대 이후 정치ㆍ사회ㆍ문화ㆍ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 지역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낳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군수 전정환)과 강원문화재단부설 강원문화재연구소(소장 오제환)는 지난 3월부터 최근까지 여량리 아우라지역 일대 2차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같은 성과를 얻었다고 16일 밝혔다.

[사진=옥(玉) 장신구]

 

지난 2006~2007년 있었던 1차 조사에서는 신석기 시대 주거지와 야외노지(爐趾:고대 주거지의 불 땐 자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수혈(지면에서 곧게 내리판 굴)유구, 분묘유구, 철기 시대 주거지 등 총 46기의 유구를 확인한 바 있다. 유구(遺構)는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말한다.

2차 조사는 1차 조사지역 이외의 나머지 구간(4만1218㎡)에서 진행됐는데, 신석기 주거지 1기, 청동기 주거지 42기와 분묘 11기, 철기 시대 주거지 1기, 삼국(신라) 시대 주거지 14기, 통일신라 시대 주거지 8기, 조선 시대 주거지 3기, 수혈유구 23기, 적석유구 1기, 미상유구 2기, 토광묘 3기 등 총 109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특히 조사지역 중앙부 17호 청동기 시대 주거지 내에서는 청동제 장신구가 출토됐다. 기원전 13~11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옥(玉) 장식품(관옥)과 함께 섞여 출토됐다.

[사진=삼각만입 석촉]

 

또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유행하던 것으로 아가리 부분에 덧띠를 덧붙인 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 일명 ‘새김덧띠무늬토기’),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화살촉인 삼각만입석촉(三角灣入石鏃)과 버드나무 화살대, 장방형 돌칼(석도) 등도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청동기 시대 분묘유구는 고인돌을 포함하여 석곽묘 및 석관묘 등 8기가 새로 확인되었다. 상부 개석이 없이 확인된 석곽과 석관의 경우 고인돌의 하부구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곽묘에서는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붉은간토기) 1점, 옥장식품(환옥) 8점, 삼각만입석촉, 일단경식석촉(一段莖式石鏃) 등이 확인됐다.

[사진=청동제 장신구]

 

석관묘 경우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동일하지만 석곽묘보다 규모가 작다. 그중 1호 석관묘 내부에서는 성인으로 추정되는 인골과 함께 귀걸이로 보이는 곡옥(曲玉) 2점, 목걸이로 보이는 환옥(丸玉) 100여 개 정도가 확인됐다.

신석기 이후 수천년 동안 아우라지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문화재청과 강원문화재연구소는 16일 오후 2시 현장설명회를 연다.

 

 

입력 : 2008.08.29 17:34

정선(아우라지) | 이기환 선임기자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 경향신문 (khan.co.kr)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무릇 나흘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도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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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제공>

■ ‘산 첩첩 하늘 한 뼘’ 이고 산 사람들

“정선지역에는 신동읍 덕천리 소골과 운치리·여량리는 물론 영월 쌍굴유적, 횡성 중금리 등 남한강 유역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었어요.”(조 관장)

“신석기뿐 아니라 덕천리 소골과 소사, 운치리, 수동, 정선읍 가수리, 용탄리 등에서 철기시대 유물이 확인됐고, 삼국시대 고분과 산성유적들이 다수 보이고…. 강변을 따라 있는 충적대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얘기죠.”(지현병 강원고고문화연구원장)

■ “강(河)은 선사시대 고속도로”

“신석기~청동기~철기~신라시대 유적이 켜켜이 나왔어요. 특히 청동기 주거지가 무려 28동이 나왔는데요. 그러나 단순히 많이 나왔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윤석인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조사1부장)

그랬다. 아우라지 유적에서 확인된 두 가지는 한국선사고고학을 뒤흔들 핵폭탄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이른바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눈금 같은 무늬를 새긴 덧띠를 두른 토기)의 출현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지난해 초 2007학년도 고교국사교과서에 수정된 청동기 기원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떠올릴 것이다.

아우라지에서 확인된 덧띠새김무늬토기.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개과정의 고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쯤에 중국 랴오닝(遙寧),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께에서 1500년께로 한반도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2007년판 국사교과서)

이 대목은 “신석기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쯤에, 만주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13세기쯤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는 기존 내용과 비교할 때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500~1000년 올려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계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는 등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교과서 내용 중에 있듯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바로 조기(早期) 청동기시대, 즉 가장 이른 시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에 속한다.

한반도 조기청동기의 시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대략 BC 15~13세기 정도이다.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출현하는 등 우리 민족사의 기틀이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달리 보면 우리 역사를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로 국한시키니까 이런 논쟁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마따나 우리 민족문화의 시원을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찾으면 논쟁의 여지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찌됐든 당시 교과서를 쓴 최몽룡 서울대교수가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끌어올리면서 단적인 예로 든 것이 바로 막 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이었다.

“남한강 최상류인 정선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서 조기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런 토기는 정선뿐 아니라 경주 충효동, 진주 남강, 산청 소남리 등에서 숱하게 확인된 바 있어요.”(최몽룡 교수)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발해연안에서부터 일의대수(一衣帶水)로 한반도까지 뻗어 있어요. 발해연안인 다쭈이쯔(大嘴子), 상마스(上馬石)유적에서부터 한반도 신의주 신암리-평북 세죽리-평남 공귀리-강화 황석리·오상리-서울 미사리-여주 흔암리-진주 남강 상촌·옥방까지…. 다 BC 15~13세기 유적들이지. 남한강 최상류(아우라지)까지 그 당시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지.”(이형구 교수)

이 교수는 “도로가 없었던 예전에는 강이 고속도로 기능을 했을 것”이라면서 남한강 최상류까지 선사유물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했다.

“비단 남한강뿐이 아닙니다. 북한강 수계인 최근 홍천 외삼포리 같은 곳에서는 AMS(질량가속분석기) 측정결과 BC 14~13세기로 편년되는 유적에서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나왔는데요. 모두 한강수계라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김권중 강원문화재연구소 원주팀장)

“결국 정선 아우라지 유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지표유적이라 할 만하지.”(조유전 관장)

 

 

2017-05-23

정선 매둔동굴서 청동기 유골 발견…"불로 의식 치른 흔적" - 뉴스1 (news1.kr)

 

정선 매둔동굴서 청동기 유골 발견…"불로 의식 치른 흔적"

(서울=뉴스1) 김아미 기자 | 청동시 시대에 시신을 안치하기 전 불을 이용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굴무덤이 강원도 정선에서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연세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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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둔굴 사람뼈 1호 출토. (문화재청 제공) © News1



청동시 시대에 시신을 안치하기 전 불을 이용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굴무덤이 강원도 정선에서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연세대학교 박물관(관장 한창균)이 발굴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의 매둔동굴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 매장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동굴무덤이 확인됐다고 문화재청이 23일 밝혔다. 

정선 매둔동굴은 2016년 시굴조사 이후 올해 2월5일부터 약 한 달간 동굴 입구 지점의 청동기 시대 문화층을 중심으로 발굴을 시행했다. 그 결과 한국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불과 매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유형의 무덤을 처음으로 확인됐다. 

 

 

매둔굴 동벽단면(문화재청 제공) © News1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동굴무덤에서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 재층(최대 두께 약 18㎝)에서 적어도 네 사람분에 해당하는 사람 뼈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됐다. 재층은 크게 윗부분의 백색 재층과 아랫부분의 회색 계열 재층으로 구분되며, 1호 사람 뼈와 2호 사람 뼈는 백색 재층 바로 위에 잇닿아 안치돼 있고, 나머지 2구로 추정되는 뼈들은 재층 속에 흩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어린이 허벅지뼈로 추정되는 유골. (문화재청 제공) © News1



문화재청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재층은 전체적으로 기원전 12~8세기(중심 연대는 기원전 10세기)에 속하며, 이 연대는 백색 재층 위에 안치된 1호와 2호 사람 뼈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조사결과로 정황을 판단하면, 주검을 안치하기에 앞서 불을 이용한 의식이 먼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빗살무늬토기 앞면. (문화재청 제공) © News1



또한 이 동굴무덤의 회색 계열 재층에서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조각 등을 비롯해 청동기 시대의 돌화살촉이 함께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매둔동굴에 거주했던 청동기인들이 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과거 신석기 시대에 형성된 문화층의 상부 지점에 퇴적되어 있었던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이 청동기 시대의 재층 안으로 뒤섞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며 "추가 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행하는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7-05-24

청동기시대 무덤 안 사람뼈.. 매장의례 단서 찾았다 (daum.net)

 

청동기시대 무덤 안 사람뼈.. 매장의례 단서 찾았다

[서울신문]18㎝의 두터운 재층 바로 위 매장 “시신 묻기 전 불피워 의식 치른 듯”강원 정선에 있는 매둔동굴 안에서 30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 무덤이 발견됐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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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매둔동굴서 4명분 인골 발견

[서울신문]18㎝의 두터운 재층 바로 위 매장
“시신 묻기 전 불피워 의식 치른 듯”

강원 정선에 있는 매둔동굴 안에서 30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 무덤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연세대 박물관이 지난 2월 매둔동굴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두께가 최고 18㎝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재층에서 최소 네 명분의 사람 뼈가 나왔다고 23일 밝혔다. 재층 바로 위에는 매장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인골 두 구가 박혀 있었다. 재층 위의 유골 가운데 1호 인골은 머리를 동굴 안쪽에 두도록 안치됐고 두개골과 등뼈, 갈비뼈 일부가 남아 있었다. 2호 인골은 두개골만 있는 상태였다.

 

한창균 연세대 박물관장은 “재층 속에 있는 목탄의 방사선연대측정 결과 전체적인 시기가 기원전 12∼8세기로 나타났다”며 “두꺼운 재층으로 미뤄볼 때 시신을 묻기 전에 불을 사용한 의식을 치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국내 청동기 시대 무덤에서 불을 쓴 흔적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월 연당리 피난굴도 청동기시대 것으로 확인됐지만, 인골의 상태는 매둔동굴이 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의 재층은 재의 색깔이 하얀색인 위쪽과 재가 회색인 아래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회색 재층에서는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청동기 시대 돌화살촉이 함께 발굴됐다. 조사단은 매둔동굴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이 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과거 신석기시대 형성된 문화층의 뒷부분에 묻혀 있던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청동기 시대 재층 안에 섞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창균 관장은 “매둔동굴의 돌화살촉은 인근에 있는 아우라지 고인돌에서 나온 돌화살촉과 형태가 비슷해 매장 의식에 쓰인 유적일 수 있다”고 했다.

연세대 박물관은 이번에 발굴된 사람 뼈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주검의 성별, 나이, 체질 특성과 무덤의 성격(가족무덤 또는 공동무덤) 등을 밝힐 계획이다.

 

 

 

조종엽 기자입력 2019. 7. 27. 03:00수정 2019. 7. 27. 09:15

테마파크에 묻히는 한국의 스톤헨지.. '문화재 참사' 위기 (daum.net)

 

테마파크에 묻히는 한국의 스톤헨지.. '문화재 참사' 위기

춘천 중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대형 취락 유적의 일부. 둘레 약 400m의 방형 환호를 중심으로 환호 안팎으로 장방형 주거지 유구가 동남향으로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중도에서는 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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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중도 레고랜드 개발과 문화재 훼손 논란
춘천 중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대형 취락 유적의 일부. 둘레 약 400m의 방형 환호를 중심으로 환호 안팎으로 장방형 주거지 유구가 동남향으로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중도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1400여 기가 확인됐다. 환호 주변은 유적공원이 조성되지만 환호 아래의 주거지는 모두 흙을 덮어 매립한 뒤 레고랜드 테마파크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형구 교수 제공
 
 

중도 발굴이 ‘초스피드’로 이뤄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청동기시대 중도는 춘천 일대의 손꼽히는 도시였을 것”이라면서 “이 정도 규모라면 당연히 수십 년을 두고 천천히 조사를 해야 한다”고 썼다. 이번 중도 발굴은 2013∼2017년 5년 동안 진행했다.

2016년 8월 23일 지석묘(고인돌) 19기가 나온 발굴 현장(위쪽 사진). 두 달 뒤인 10월 27일엔 지석묘가 철거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형구 교수 제공
 

 

중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강인욱 교수는 “강원 지역에 살았던 예맥족의 선조”라고 봤다. 이형구 교수는 “나중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라고 본다. 그들을 뭐라고 부르건 간에 중도에 살았던 이들이 한국인의 한 기원을 이룬다는 건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중도 유적은 시대적으로 신석기부터 청동기, 철기까지 우리나라 고대사를 관통한다. 유구 3090기(청동기 환호 1기, 원삼국 환호 1기, 주거지 1423기, 지석묘를 비롯한 분묘 166기 등)를 발견했다. 환호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주거 공간, 생산 공간, 경작구역, 분묘 구역이 질서 있게 분할돼 마치 고대의 기획 도시와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물도 9222점(금 귀걸이, 토기 등)이나 나왔다. 특히 집 자리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을 두고 “동북아 청동기시대 연구에 획을 긋는 자료”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까지 비파형동검은 거의 예외 없이 고인돌 같은 특수한 무덤에서만 발견됐다. 그러나 중도 유적의 발굴로 집에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각종 규제로 개발에서 소외된 이들의 심정은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오동철 사무국장은 “춘천은 상수원 보호 등 각종 규제로 개발에서 소외돼 지역이 낙후했다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라며 “일자리가 1만 개 창출된다고 하니 지역민들이 대단한 사업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꼭 이처럼 가치가 높은 유적지를 개발해야 했을까.

만약 경주의 고분군을 묻어버리고 위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면 어떨까. 이런 발상이 불쾌한 까닭은 한국인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문화재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00년 넘게 한곳에서 사람들이 산 흔적을 간직한 춘천 중도는 ‘청동기시대의 천년고도 경주’라고도 할 수 있다. 영국은 스톤헨지가 있는 솔즈베리 평원을 통째로 보존한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우하량의 홍산문화 유적에 유리돔을 씌웠다. 일본은 중도보다도 규모가 작은 요시노가리 유적의 개발을 중단시키고, 역사 공원으로 보존시켰다.

만약 레고랜드 건설 사업 중단을 결정한다면 강원도가 이미 쓴 돈은 매몰비용이 된다. 계약 해지로 인한 파장도 작지 않을 것이다. 평소 5000년 역사의 문화민족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는 한반도에서 면면히 사람이 살았던 증거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입력 2017.07.12 06:38수정 2017.08.13 20:30

“춘천중도유적, 야만이 벌이지고 있는 야만의 현장...”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춘천중도유적, 야만이 벌이지고 있는 야만의 현장...”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존재 의미 사라져...춘천중도유적, 구석기부터 고대사회까지 역사가 쌓인 곳...유성엽 의원의 절규, "야만이 벌어지고 있는 야만의 현장이야..." 공공의 가치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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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8일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고대유적은 보존해야! (brainmedia.co.kr)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고대유적은 보존해야!

역사를 잃어버린 국민은 희망이 없습니다. 역사 속에는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과 위대한 문화가 녹아있고, 한민족 자긍심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일제가 36년간 식민통치

www.brainmedia.co.kr

 

 

입력 : 2015.01.12 21:26 수정 : 2015.01.12 22:15

[경향의 눈]레고랜드냐 고조선랜드냐 - 경향신문 (khan.co.kr)

 

[경향의 눈]레고랜드냐 고조선랜드냐

춘천 중도는 1967년 의암댐이 들어서면서 의암호 안에 형성된 섬이다. 역사도 짧고 규모도 작지만 명성만은 전국적이다. 한반도 중부지역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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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곳에서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면서 불거졌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 925기, 고인돌 101기, 환호 등 총 1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가 지난해 7월 1차 발굴조사 결과 확인됐다. 지금까지 국내 단일면적에서 발굴된 최대의 유적이라고 할 만하다. 주거지 크기는 평균 31㎡(9평)이고 가장 큰 것은 172.5㎡(52평)에 이르는 등 다양했다. 중심구역 안의 주거지에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청동단검’과 청동도끼 등도 나왔다. 적게는 6000~7000명, 많게는 1만명이 거주한 대도시이고 수장급 지도자가 존재하며 귀족층·생산층·노동자층 등으로 신분이 나눠진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기원전 14~11세기 청동기 시대에 1만명 가까운 인구집단을 형성한 도시라면 국가 수준으로 손색이 없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지난달 23일 결성된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및 개발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이를 고조선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적으로 간주하고 보존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춘천 중도 고조선유적지 학술회의’에서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중도 유적은 고고학상으로는 청동기 시대로 편년되나 역사적 편년으로는 고조선 시대”라면서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고조선의 또 하나의 실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입력2014.07.28. 오후 1:32 수정2014.07.28. 오후 8:47

춘천 '레고랜드' 조성부지서 대규모 선사 유적 발굴 | 연합뉴스 (yna.co.kr)

 
춘천 중도서 발굴된 고인돌 (춘천=연합뉴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만2천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지석묘) 101기 등 총 1천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고인돌 유적지 전경. 2014.7.28 <<문화재청>> &nbsp; rae @ yna.co.kr
 

고인돌 등 청동기 시대 유구 1천400여기 확인

(춘천=연합뉴스) 강은나래 기자 = 강원 춘천시 중도의 개발예정지에서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공동묘지와 2천년 전 조성된 마을 유적 등 선사시대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지난해 10월부터 춘천시 중도에 추진중인 레고랜드 조성사업지에서 시행한 1차 문화재 발굴(면적 12만2천25㎡) 조사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천400여 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춘천 중도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춘천=연합뉴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만2천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천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청동기 시대 주거지 2014.7.28 <<문화재청>>&nbsp;rae@yna.co.kr



이번 발굴 조사에는 한강문화재연구원 외 (재)고려문화재연구원, (재)예맥문화재연구원, (재)한백문화재연구원, (재)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참여했다.

확인된 유구는 고인돌(支石墓)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竪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高床式), 긴 도랑(溝狀遺構) 등이며, 청동기 시대와 삼국 시대 이후의 밭도 일부 확인됐다.

고인돌이 강원도 지역에서 대규모로 확인·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고인돌 묘는 열을 맞춘 것으로 드러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춘천 중도서 발굴된 청동도끼와 청동검 (춘천=연합뉴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만2천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천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청동도끼와 청동검 2014.7.28 <<문화재청>> &nbsp; rae @ yna.co.kr



고인돌은 부지 남쪽에 3열로 길게 축조된 40여 기가 있으며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해있다.

석재를 이용한 원형 또는 장방형의 묘역 시설을 갖췄고, 그 중심에는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석관묘) 위에다 상석을 올린 구조다.

돌널무덤은 묘역 시설과 동시에 축조하거나, 먼저 축조하고 나서 그 위에 묘역 시설을 설치한 것 등 다양한 형식이 확인됐다.

(재)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조사한 집터 40호와 37호 내부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전체 둘레 404m에 이르는 대형 환호(環濠) (춘천=연합뉴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만2천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천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이번에 발굴된 전체 둘레 404m에 이르는 네모난 대형 환호(環濠&middot;&middot;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돌리는 시설물) 전경. 2014.7.28 <<문화재청>> &nbsp; rae @ yna.co.kr



비파형동검은 지금까지 주로 무덤에서 발굴돼왔으며 주거지 출토는 이례적이다.

이번에 출토된 청동도끼는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출토품과 유사해 양 지역 간의 비교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조사 구역에서는 전체 둘레 약 404m(내부 면적 1만㎡)에 이르는 네모난 대형 환호(環濠·마을 주변에 도랑을 파서 돌리는 시설물) 내 집터와 출입구 시설도 확인돼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재)예맥문화재조사연구원이 조사한 집터 20호에서 출토된 '둥근 바닥 바리모양토기'(圓底深鉢形土器)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는 전환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춘천 중도 유적지 전경 (춘천=연합뉴스) (재)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 5곳은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조성을 앞두고 지난해 10월부터 시행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차 발굴지 12만2천25㎡를 조사한 결과 고인돌 101기 등 총 1천400여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사진은 춘천시 중도 유적지 전경. 2014.7.28 <<문화재청>> &nbsp; rae @ yna.co.kr


이번 조사에서 기원전 9∼6세기 시기의 장방형 집터가 다수 확인됐는데, 특히 '돋을띠 새김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가 출토된 집터는 기원전 11세기 이전 청동기 시대의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종래 (재)한강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이번 발굴 조사에서 900기가 넘는 거주지 유구가 확인됨으로써 면적으로나 유구 수로나 단일 유적으로서는 한반도 최대 마을유적으로 기록될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재단법인 한강문화재연구원 등 발굴 기관들은 29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전문가 검토회의와 유적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중도는 198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조사결과 섬 전체가 대규모 주거지로 확인된 곳이다. 당시 8차에 걸친 시·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에 걸쳐 조성된 집터와 고인돌 등이 270여 기 이상 확인됐다.
 
<그래픽> 춘천 레고랜드 조성부지서 대규모 유적 발굴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강원 춘천시 중도의 개발예정지에서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공동묘지와 2천년 전 조성된 마을 유적 등 선사시대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nbsp; jin34 @ yna.co.kr &nbsp; @ yonhap _ graphics (트위터)


하지만 유적 보호를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2011년 레고랜드 조성 사업이 확정돼 지난해부터 대규모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강원도는 문화재청의 권고에 따라 유물이 밀집되고 잔존상태가 좋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지역에 대해 유적 박물관과 야외 유구 전시공간을 만드는 등 보존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결과 중도 섬 전체가 경주를 방불하는 밀집도 높은 유적지로 드러나면서 현장 보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레고랜드 코리아 조성사업은 강원도와 춘천시의 최대 역점사업이자 박근혜 정부의 투자활성화를 위한 5대 현장대기 프로젝트에도 선정된 사업이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시신을 안치하는 나무널(木棺)을 다시 나무로 감싼 나무덧널 무덤이 사용된 시기가 학계의 통설보다 무려 1천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전기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발견이 나왔다.

 

 

2018-02-14

평창 청동기시대 무덤 속 비파형동검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동아일보 (donga.com)

 

평창 청동기시대 무덤 속 비파형동검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국가까지 사회를 이끈 리더는 으레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통념을 뒤집는 청동기시대 문화재가 출토됐다. 여성이 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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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 인골 분석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의 석관묘 내부에서 발견된 사람 뼈와 비파형동검의 모습. 한반도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최초의 발굴이었다. 2년간의 분석 결과 유골 주인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돼 학계의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떠올랐다. 문화재청 제공선사시대부터 고대 국가까지 사회를 이끈 리더는 으레 남성이었을 것이라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통념을 뒤집는 청동기시대 문화재가 출토됐다. 여성이 부족을 이끈 제사장이나 정치체제 수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人骨)이 국내 처음으로 확인됐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2016년 강원 평창군 하리 발굴 현장에서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13일 밝혔다. 청동기시대 여성 인골이 한반도에서 출토된 적은 있으나 당시 지배층의 전유물인 동검과 함께 발견된 것은 사상 최초다.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선 청동기시대의 정치체제에 대한 재접근이 필요할 만큼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하고 있다.

강원 평창군 하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비파형동검. 문화재청 제공이 인골은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이 진행한 2016년 발견 당시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인골과 동검이 따로 발견된 적은 있으나 한반도에서 두 유적이 함께 나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2년 동안의 분석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김재현 동아대 고고미술학과 교수팀이 대퇴골 크기와 근육, 치아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인골의 성별이 여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의 나이는 20대 초반, 신장은 160.4cm로 추정됐다. 초기 철기시대 여성으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늑도 유골보다 10cm 이상 월등히 클 정도로 신체 조건이 좋았다.

청동기시대에 동검과 함께 매장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동검은 제례 의식을 지낼 때 이용되는 제기(祭器)로 제사장이나 정치적 지도자의 무덤 등지에서만 출토된다. 이번에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길이 26.3cm, 폭 3.8cm로 두 동강 난 채로 석관 동쪽 측면에 묻혀 있었다. 출토 동검의 양식은 비파형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의 특징을 지녀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경 인물로 추정된다.

발굴 현장에서 석관묘의 덮개돌을 열기 전 모습.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제공지금까지 한국 선사·고대사에서 여성이 제사장이나 정치 지도자였던 기록은 신라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의 여동생 아로공주(阿老公主)가 가장 빨랐다. 김창석 강원대 중앙박물관장(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은 “삼국시대 초기 여성이 제사를 주관했다는 극히 적은 기록이 있지만 이보다 앞선 선사시대엔 여성 제사장이나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며 “고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성 인골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한 청동기문화의 양상을 새롭게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본에선 청동기시대였던 야요이(彌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 여성 제사장이었던 히미코가 왕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김재현 교수는 “그동안 한반도의 비파형동검 등 물질 중심으로 청동기문화가 일본에 전래됐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 발견을 통해 여성의 사회 참여 등 사회·정치적인 제도 역시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강원대 중앙박물관은 이 같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일부터 평창 하리 일대에서 발굴한 석관묘와 인골, 관옥과 토기 등을 복원한 모습으로 전시한다. 김 관장은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을 맞아 강원도의 유구한 역사와 고대 문화를 널리 알리고 관련 연구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16-09-08

평창 고분서 2천500년 전 인골·비파형동검 동시 출토 (daum.net)

 

평창 고분서 2천500년 전 인골·비파형동검 동시 출토

"청동기시대 인골 보존 사례 드물어…지역사회 유력자 무덤 추정"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강원도 평창의 청동기시대 중기 무덤 유적에서 국내 최초로 피장자의 인골과 비파형동검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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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0

‘양양 출토 고조선 유물’ 북 학계서 주목 < 문화일반 < 문화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kado.net)

 

‘양양 출토 고조선 유물’ 북 학계서 주목

최근 북한에서 발간된 ‘고조선의 유적·유물도감’이란 책자에서 양양군 토성묘지에서 발굴된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과 청동칼인 세형단검이 확인돼 관심을 모은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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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군 토성묘지에서 발굴된 청동거울인 다뉴세문경

▲ 청동칼인 세형단검


 

입력 :2008-08-26 00:00ㅣ 수정 : 2008-08-26 00:00

한반도最古 청동기시대 관개수로 발견 | 서울신문 (seoul.co.kr)

 

한반도最古 청동기시대 관개수로 발견

안동 ‘저전리 유적’서… 기원전 10세기 무렵 건설 추정,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10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견된 경북 안동 저전리 유적에서 같은 시대 농경용 관개수로의 흔

www.seoul.co.kr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원전 10세기 무렵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견된 경북 안동 저전리 유적에서 같은 시대 농경용 관개수로의 흔적이 확인됐다. 청동기시대 수로 유적으로는 처음이자 최고라는 점에서 한반도 선사시대 농경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동양대박물관은 25일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하는 국도 5호선 서호∼평은 구간에 포함된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광평리 일대 ‘저전리 유적’에 대해 제2차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청동기시대에 조성한 저수지 2곳이 계곡 상류와 하류에 서로 잇닿아 조성된 흔적을 확인했으며, 관개용 수로 유적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2005∼2006년에 실시한 제1차 조사에서는 계곡 하류에 위치한 ‘1호 저수지’(너비 15m 안팎, 길이 60m) 외에도 상류 인접 지점에 또 다른 ‘2호 저수지’의 일부 흔적을 확인했다. 당시에는 전체 규모가 밝혀지지 않았던 데다,1호 저수지가 폐기된 직후 그 대용으로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조사단은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이 두 저수지는 같은 시기에 존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저수지 평면 구조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인 것은 “물을 더 많이 가두고 물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수온을 높여 벼의 냉해를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저전리 유적에서는 저수지 외에도 1차조사에서 나무로 만든 절굿공이와 목제 따비 유물이 출토됐으며,1호 저수지에서는 다량의 볍씨가 수습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관개수로가 만들어진 시기를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추정하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권구 계명대 박물관장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기원전 10세기가 아닌, 기원전 6∼4세기 무렵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물을 가두는 보(洑) 형태의 시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입력 2015. 1. 19. 07:56수정 2015. 1. 19. 09:28

 

세형동검 7자루 넣은 2천200년 전 수장 무덤 발굴

충주서 돌무지나무널 무덤 발견, 청동기만 19점 수습(충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와 백제, 가야가 본격 태동하기 직전 기원전 2~1세기 한반도에 집중 등장하는 목관묘가 충북 충주에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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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서 돌무지나무널 무덤 발견, 청동기만 19점 수습

충주서 돌무지나무널 무덤 발견, 청동기만 19점 수습

(충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와 백제, 가야가 본격 태동하기 직전 기원전 2~1세기 한반도에 집중 등장하는 목관묘가 충북 충주에서 발견되고, 그 중 한 무덤에서만 세형동검(細形銅劍) 7점을 포함한 각종 청동기 유물 19점이 쏟아졌다.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은 지난해 8월부터 충주시가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을 추진 중인 호암동 628-5 일원을 발굴조사한 결과 구석기 유물포함층을 필두로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3세기~서력기원 전후) 무덤 3기와 통일신라∼조선시대 무덤 각종 무덤, 그리고 삼국시대 숯가마 2곳 등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초기철기시대 무덤 3기는 땅을 파고 묘광(墓壙)을 만들어 목관을 안치한 것들로서, 그중 하나는 통나무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변으로 강돌을 덮은 돌무지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이고, 나머지 2기는 강돌은 쓰지 않고 목관만 쓴 나무널무덤(木棺墓)으로 드러났다.

이중 돌무지나무널 무덤은 묘광을 상·하 2단으로 파내려가고는 그 바닥에 통나무관을 안치하고 목관 주변과 상부에다가 강돌로 채움한 것으로 조사됐다. 묘광은 평면 형태가 상단이 타원형, 하단은 장방형이었다. 규모를 보면 상단 광이 북동~남서 250㎝, 북서~남동 208㎝, 최대 깊이 25㎝이며 하단광은 길이(장축) 175㎝, 너비(단축) 82㎝, 깊이 175㎝다. 묘광 바닥에 안치한 목관은 대부분 부식됐지만 그 흔적으로 보면 길이 167㎝, 너비 73㎝, 잔존 높이 10∼13㎝였다.

이 고분에서는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 하나로서 한국식동검, 혹은 좁은놋단검이라고 하는 단검인 세형동검(길이 23∼30㎝)만 7점이 출토됐는가 하면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라 해서 가는줄무늬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뒷면에 넣은 가는줄무늬청동거울 1점, 나무 자리를 끼우는 청동창인 청동투겁창 3점, 나무 자루를 묶어서 연결한 청동꺾창(銅戈) 1점, 청동도끼(銅斧)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銅鑿) 2점이 쏟아졌다.

그 외에 이 무덤에서는 검은색이 도는 흑도(黑陶)를 포함한 토기 2점과 칠기편 1점이 수습됐다. 칠기편 1점은 남은 상태가 극히 불량해 구체적인 양상 파악은 어렵지만 그 위치로 보아 묻힌 사람 얼굴을 가린 부채 자루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조사단은 지적했다.

유물은 발견된 지점으로 보아 목관 안과 바깥 부장품으로 각각 나뉘며, 목관 밖 부장품은 다시 묘광 내 돌무지 사이와 목관 상면으로 세분됐다. 흑도 1점과 청동도끼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 2점은 목관 밖에다 넣고 나머지는 목관 안에 두었다고 추정됐다. 토기 2점 중 1점은 목관 안에 넣었고 나머지 1점은 목관 상면에 두었다고 조사단은 판단했다.

 

청동거울을 무덤에 넣을 때 흔히 그런 것처럼 이번에도 일부러 깨뜨려 조각으로 넣은 이른바 파경(破鏡)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 무덤을 만든 시기를 기원전 2∼1세기경으로 추정하면서 "당시 충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세력의 수장(首長) 묘로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돌무지나무널무덤은 주로 전남이나 충남 지역에서 확인됐다.

이처럼 많은 청동유물을 부장한 무덤은 사례가 극히 드문 데다 정식 발굴조사를 거친 것이 아니라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 신고된 사례가 대부분이어서 고분 구조 또한 파악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돌무지나무널무덤은 발견지가 충북이며 유적이 남은 상태가 극히 양호해 무덤의 축조방식과 유물 부장 방식을 명확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세형동검과 잔줄무늬거울 등 7종 19점에 달하는 청동유물은 수량과 종류에서 볼 때 단일 무덤 출토품으로는 국내 최대 수준에 속한다. 1971년 전남 화순군 대곡리에서는 이번에 출토된 것과 같은 세형동검, 잔줄무늬거울, 청동 새기개와 더불어 청동 방울 등이 함께 발견돼 1972년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발굴 또한 이에 준하는 국보급 유물 발굴로 기록될 전망이다.

 

 

입력 2014. 5. 13. 19:30수정 2014. 5. 13. 19:30

교과서 속 '농경문 청동기' 보물 아니었어? (daum.net)

 

교과서 속 '농경문 청동기' 보물 아니었어?

[한겨레]한반도 청동기시대 상징 유물문화재청, 이제서야 보물 지정발가벗은 채 따비 들고 밭을 갈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남성, 그 반대쪽에는 항아리에 수확물을 쟁여넣는 여성이 있다.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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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채 따비 들고 밭을 갈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남성, 그 반대쪽에는 항아리에 수확물을 쟁여넣는 여성이 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상징하는 '농경문 청동기'(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새겨진 남녀 그림은 2300여년전 선조들의 농경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초봄에 남자들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밭을 가는 세시풍속 '나경(裸耕)'의 뿌리를 일러주는 이 유물이 국가지정 보물이 된다.

농경문 청동기는 70년대 대전의 고철상한테서 입수한 것으로 전해지며,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유물이다. 한쪽면의 남녀 농경 모습과, 다른 쪽면의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의 상 등으로 미뤄 풍요로운 수확과 평안한 삶을 비는 의례용기로 추정된다. 청동기, 초기철기 시대 사람들의 생업과 신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윤정입력 2023. 10. 11. 07:55

 

청동유물 대거 출토됐던 '호암동 유적' 재조명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12일 충북 충주시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강당에서 ‘호암동 유적으로 본 충주지역 청동기문화’를 주제로 학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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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호암동 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특히 초기철기시대 적석목관묘에서 청동칼과 청동거울을 포함한 19점의 청동유물이 출토돼 주목받은 바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호암동 유적에 많은 청동유물이 부장될 수 있었던 이유와 충주지역이 가진 청동기문화의 위상을 재조명한다.

 

 

입력 2013. 12. 13. 13:04수정 2013. 12. 13. 13:04

 

 

입력 2017. 3. 13. 03:03수정 2017. 3. 13. 10:11

[단독]한반도 고유의 '검파형 동기' 첫 발굴 (daum.net)

 

[단독]한반도 고유의 '검파형 동기' 첫 발굴

[동아일보] 전북 군산시 선제리에서 발굴 조사된 적석목관묘 내부 모습(위 사진). 목관 주변을 둘러싼 돌들 사이로 검파형 동기와 세형동검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보존 처리를 마친 출토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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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무렵 유물 군산서 출토

[동아일보]

전북 군산시 선제리에서 발굴 조사된 적석목관묘 내부 모습(위 사진). 목관 주변을 둘러싼 돌들 사이로 검파형 동기와 세형동검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보존 처리를 마친 출토 유물들. 칼자루 모양의 검파형 동기 2점(가운데)을 중심으로 양옆에 세형동검이, 그 위로 원형덧띠토기가 놓여 있다. 검파형 동기 사이에 있는 푸른색 목걸이는 환옥이다.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한반도 고유의 청동기로 기원전 4∼기원전 3세기 희귀 유물인 ‘검파형(劍把形·칼자루 모양) 동기(銅器)’가 전북 군산시에서 처음 발굴됐다. 검파형 동기란 청동으로 만든 제의(祭儀)용 도구로 초기 철기시대에 사용됐다.

고분에 묻힌 검파형 동기가 정식 발굴에 의해 출토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껏 대전 괴정동과 충남 아산시 남성리, 예산군 동서리 3곳에서만 확인된 검파형 동기는 발굴이 아닌 주민 신고로 수습돼 정확한 출토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학계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유입된 청동기 문화가 토착화를 거쳐 금강 유역으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12일 문화재청과 발굴기관인 전북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군산 선제리 농가 창고 신축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기원전 4∼기원전 3세기 무렵 지은 적석목관묘(바닥과 나무관 주변을 돌로 쌓은 무덤)를 발견했다. 길이 219cm, 너비 64cm, 깊이 54cm의 무덤 내부에선 검파형 동기 3점을 비롯해 세형동검 8점, 청동도끼, 청동새기개, 청동끌 각 1점 등 다양한 청동 유물이 나왔다. 이 밖에 검은간토기(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와 원형덧띠토기(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 환옥 131점도 묻혀 있었다.

가운데가 두 동강 난 검파형 동기들. 사진제공=전북문화재연구원
무덤구덩이에는 널빤지 모양의 석재들이 놓였는데, 나무관이 부식되면서 그 위에 쌓인 돌들이 무너져 내린 흔적도 남아 있었다. 검파형 동기 3점은 세형동검과 함께 무덤 가운데 흩어져 있었는데, 중앙부가 끊어져 두 동강난 상태로 발견됐다. 최완규 원광대 교수(고고학)는 “예부터 제사장이 쓰던 제기는 세습하지 않고 파쇄하기 마련”이라며 “선제리 무덤 내 검파형 동기도 일부러 부러뜨려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검파형 동기 상단부. 테두리를 따라 빗금과 점선무늬가 이중으로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전북문화재연구원
검파형 동기 하단. 새끼줄을 꼰 모양의 원형 고리가 보인다. 사진제공=전북문화재연구원
통상 3점이 한 세트를 이루는 검파형 동기는 마치 대나무를 세로로 쪼갠 듯한 독특한 형태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초기 철기시대 때 제사장들이 검파형 동기를 옷에 매달고 제의를 올린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번에 발견된 검파형 동기 뒷면에는 매듭을 묶을 수 있는 고리 3개가 위아래로 달려 있다. 앞면에는 새끼줄을 꼰 모양의 정교한 원형 고리가 붙어 있다. 검파형 동기는 길이 24.5cm, 무게 205g으로 테두리를 따라 빗금과 점선무늬가 이중으로 새겨져 있다. 최 교수는 “아산 남성리나 예산 동서리에서 확인된 검파형 동기와 크기나 문양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학계는 검파형 동기와 함께 발견된 원형덧띠토기와 검은간토기의 양식이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 정자와쯔(鄭家窪子) 유적 출토품과 닮았다는 점에서 중국 동북지역 청동기 문화가 이곳까지 유입된 걸로 보고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선제리 청동기는 랴오닝 지방의 원형덧띠토기 문화와 연속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정자와쯔 유적에서 발견된 제의용 청동기는 원개형(圓蓋形) 동기 등일 뿐, 검파형 동기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검파형 동기는 한국식 세형동검과 더불어 청동기 문화의 한국화를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라고 말했다.

 
 
 
 
기자입력 2023. 7. 4. 05:00수정 2023. 7. 4. 09:48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2200년전 ‘세형동검 거푸집' 출현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2200년전 ‘세형동검 거푸집' 출현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960년대초 한 골동품상이 국립박물관을 찾아와 유물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제품을 제작하는 틀인 ‘청동거푸집’이었다. 골동품상이 내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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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도로건설 예정지인 전북 완주 갈동유적의 1호 움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청동거푸집. 세형동검과 청동꺾창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2200년전의 제작틀이 확인됐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보고서>(학술조사보고 46책), 2005’에서

1960년대초 한 골동품상이 국립박물관을 찾아와 유물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제품을 제작하는 틀인 ‘청동거푸집’이었다.

골동품상이 내놓은 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등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었다.

이 거푸집으로 세형단검·꺾창·창·낚시바늘·침·소형도끼·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갈동 출토 청동거푸집. 앞면에는 세형동검을 찍을 수 있는 거푸집 1쌍이 오롯이 남아있다. 그러나 뒷면에는 청동꺾창 거푸집이 반쪽만 남아있다. 원래는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흠결이 있지만 국보

박물관 관계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학자들이 뭐라 강변했던가.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적인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다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청동기와 철기 같은 선진문물이 한꺼번에 유입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석기와 금속기가 함께 쓰였다는 ‘금석병용기’ 용어를 끌어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8종 24점이나 되는 청동제품을 제작한 증거(‘거푸집 세트’)가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립박물관은 이 거푸집 세트를 사들이지 못한다. ‘유물구입비’가 한푼도 없다는 어이없고도 기막힌 이유였다. 이 거푸집 세트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박사(1907~1970)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해외로 유출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유물세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정확한 출토지점’을 몰라 학술적인 생명력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세형동검 거푸집 쇳물 주입구의 그을음 흔적. 세형동검을 실제로 주조해서 생산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거푸집에는 짝을 맞추기 위해 새긴 짧은 선 표시가 있다.

이 경우 유물의 가치는 뚝 떨어지게 된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조건(무덤 혹은 집터?)에서, 어떤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는가를 알아야 그 유물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양선 박사 역시 그 유물 세트의 히스토리를 파악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실패했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서 출토됐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는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의 명칭을 얻었다.

그럼에도 1986년 국보로 지정됐다. 기원전 3~2세기 무렵 국내의 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대량 제작’한 정황증거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출토지점’을 모르는 한계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2007년 갈동유적에서 확인된 고운무늬 청동거울. 문양과 기법의 정교함 덕분에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국립전주박물관 제공

■황홀한 유물의 출현

그러던 2002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발굴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갈동마을을 지표조사 하고 있었다.

전주시 관내 국도의 우회도로 건설을 위한 사전조사였다. 그러나 아무런 고고학적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경우 ‘유적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공사를 진행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당시 한수영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현 고고문화연구원장)은 뭔가 찜찜했다. 이 일대는 해발 26~42m의 야트막한 구릉이 쭉 이어진 곳이다. 만경강과 서해로 확 트인 그야말로 비옥한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입지가 아닌가.

아무 징후가 보이지 않은게 오히려 이상했다. 땅 밑에 유구와 유물이 훼손없이 보존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냥 스쳐지나가도 모를 이곳을 정식발굴지역에 포함시켰다. 그 동물적인 감각이 ‘대박 발굴’을 이끌 줄이야.

2007년 갈동의 도로변경노선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기류와 철기류. 고운무늬 거울 2점을 비롯해, 세형동검, 청동창 등과 철도끼, 철촉 등이 확인됐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정식 발굴이 한창이던 2003년 8월1일이었다. 1호 움무덤(구덩이 파고 시신을 묻은 묘)에서 상상도 못할 유물이 출토됐다.

세형동검 거푸집 1쌍이었다. 거푸집 중 한 점은 벽에 붙어서, 다른 1점은 옆으로 기울어진채 확인됐다.

“거푸집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의 거푸집을 제 눈 앞에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황홀한지….”(한수영씨)

그랬다. ‘출토지 불명’인 ‘전 영암출토 거푸집’도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출토지점이 바로 이곳(완주 갈동)인 거푸집이, 그것도 세형동검의 거푸집이라니….

무엇보다도 2200년 전 최첨단 청동기를 찍어내던 하이테크 산업의 제작틀이 나온 것이다.

2003년과 2007년 완주 갈동의 도로건설 부지에서 출토된 기원전 2세기 무렵 초기철기시대의 각종 청동기류.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검게 그을린 거푸집의 의미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이름붙은 청동칼이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후 주로 한반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일컬어진다. 갈동 출토 세형동검은 기원전 2세기 유물로 판단됐다. ‘전 영암 출토 거푸집’이 한반도에 없다던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알리는 ‘정황 증거’였다면 어떨까.

2003년 갈동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및 꺾창 거푸집’은 청동기시대의 존재는 물론이고, 한국 고유의 청동검까지 대량 생산했음을 보여주는 ‘100% 확실한 물증’이었다.

그제서야 일제강점기 무렵 이후 100년 이상 계속된 한국고고학계의 오랜 갈증이 해소된 것이다.

2003년 도로건설예정지로 낙점된 완주 갈동에서 거푸집이 출토되자 노선이 변경됐다. 그러나 그 변경지점에서도 고운무늬 거울과 세형동검 등 기원전 2세기 초기철기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 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에서

이 갈동 출토 거푸집 세트는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을 만드는 ‘한 쌍’(합범·合范)이었다.

짝을 맞추기 위해 새긴 짧은 선 표시가 있다. 세형동검 거푸집은 안쪽 부분이 검게 그을린 상태로 확인됐다.

무덤에 넣기 전에 여러번 사용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한쪽의 뒷면에 청동꺾창(ㄱ자 형태로 나무에 끼워 말에 탄 적병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원래는 ‘청동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완전한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동 출토 거푸집은 엄밀히 말해 ‘세형동검(1쌍)’과 ‘청동꺾창(0.5쌍)’ 등 두 종이었던 것이다. 청동꺾창 거푸집 반쪽도 갈동 유적 어디엔가 묻혀있지 않을까.

전남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 청동거푸집. 이 거푸집으로 세형단검·꺾창·창·낚시바늘·침·소형도끼·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출토지점을 모르는 단점이 있다.|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제공

■단박에 보물이 된 거푸집 및 청동거울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푸집’의 출현으로 도로의 노선이 변경되었다.

2007년 그 변경노선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여기서도 획기적인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즉 5호와 7호 움무덤에서 ‘고운무늬 거울’(정문경)이 1점씩, 14호 움무덤에서 세형동검 1자루가 출토된 것이다. 이 두 점의 고운무늬 거울은 크기가 직경 14.5㎝(448g)와 직경 9.1㎝(142g) 정도여서 중소형에 속한다.

 

이 두 점의 거울(기원전 2세기)은 완형에 가까울 뿐 아니라 뒷면에 새겨진 문양도 가장 널리 알려진 ‘국보경’(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에 버금갈 정도로 정밀하다는 평을 받았다. 14호 움무덤에서는 세형동검(길이 32㎝)이 1자루 확인됐다.

2003년 출토된 세형동검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장인 집단이 생산한 제품으로 추정됐다.

이렇게 갈동 발굴에서 출토된 ‘거푸집 세트’(2003)와 ‘고운무늬 거울 2점’(2007)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완주 갈동 유적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주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류.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국립전주박물관, <고고학으로 밝혀낸 전북 혁신도시>(특별전 도록), 2006’에서

■기원전 2세기 무렵의 도시유적

흔히 고고학 발굴도 유행을 탄다고 한다. 2000년대초 갈동 인근 지역이 전주 혁신도시 예정부지로 선정됐다.

대상 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갈동 유적과 비슷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1세기)의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에서는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또 완주 신풍에서는 무려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군이 노출됐다.

특히 고운무늬 거울이 10점이나 출토됐고, 청동투겁방울(간두령·장대의 머리에 끼운 방울 모양의 청동기)이 한 쌍 확인됐다.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 또 신풍유적에서는 청동기 보다는 철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 역시 청동기-철기의 과도기를 드라마틱하게 증거해주는 무덤 양상이다.

이렇게 갈동·원장동·신풍 등 인근 지역에서 무려 200기가 넘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 갈동유적의 현장책임자였던 한수영씨는 “당대의 도시 유적을 발굴한 느낌이었다”고 밝힌다.

모두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이 확인된 완주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방울.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 유적 Ⅰ- 가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에서

■한 구덩이에서 웬 중국풍 동검 26점

이와같은 초기철기시대 발굴성과가 쏟아지자 새삼 각광을 받게 된 유적·유물이 있었다.

바로 1975년 학계에 보고된 완주 상림리 유적이다.

즉 그해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심다가 수상한 유물더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26점이 묶인 채 발견된 청동검 더미였다. 이상했다.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곳에 덜렁 이 동검 더미만 묻혀있을까.

더욱이 형태나 기법상으로 보아 중국 산둥(山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제나라 동검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완주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청동기와 철기류.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양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 유적Ⅰ-가 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 제작된 제품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중국에서 ‘직구’한 제품은 아닌 것으로 추정됐다. 크기가 일반적인 중국산보다는 다소 작고, 또 두께가 얇아서 비실용적이었다. 사용한 흔적도 없이 달랑 이 26점 꾸러미만 매납해놓았다. 일부 납성분의 산지도 한반도로 추정되었다.

이상하다. 누군가 왜 중국 산둥산을 본떠 청동검을 26점이나 제작해서 고이 묻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상림리 출토 청동검 더미는 ‘중국풍’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이상의 화제를 뿌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갈동 등 전북 지역에서 상림리(기원전 3세기)보다 늦은 시기(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지자 새삼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5년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심다가 발견한 중국풍의 청동검 26점. 왜 한반도에 중국풍의 청동검이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평범한 구덩이에서 출토되었는지 알 수 없다.|‘국립전주박물관, <완주 상림리 청동검>(테마전 도록), 2015’에서

■기원전 3세기 중국판 엑소더스

기원전 3세기는 중국의 대격변기였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기원전 221)했지만 12년만에 죽은(기원전 210) 뒤 단 4년 만(기원전 206)에 멸망한다. 이 무렵 수많은 난민이 살 길을 찾아 한반도로 피란했다.

그중 상림리 동검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산둥 반도에 웅거했던 제나라의 전횡(기원전 250~202) 관련 설화가 눈길을 끈다. 전횡은 진시황(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의 왕족 출신이었던 인물이었다.

전횡은 제나라를 재건하려다가 실패한 뒤 한나라 건국(기원전 202) 후 산둥성 칭다오(靑島) 전횡도에 숨어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 문하의 빈객 500명도 따라 죽었다. 이들을 ‘절개를 떨친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라고 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완주 상림리 출토 중국계 청동검 26자루. 당대 한반도에서 유행한 세형동검과는 완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중국에서 ‘직구’한 게 아니라 현지에서 생산한 제품으로 판단됐다.|필자 촬영

그런데 전북 군산에서 가장 서쪽 섬인 어청도에서 바로 전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전횡과 500의사가 죽지 않고 망명길에 올라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청도 마을의 한가운데는 전횡을 모시는 치동묘(淄東廟)가 자리잡고 있다.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어청도는 산둥반도와 약 300km가량 떨어져 있다.

이 설화는 기원전 3세기 미증유의 혼란기를 겪던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유이민이 한반도로 건너왔음을 상징해준다. 그들이 바로 고향인 산둥풍의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한반도산 재료를 써서….

기원전 3세기 중국의 혼란기에 500명의 유민을 이끌고 군산 앞바다 어청도로 망명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어청도 치동묘(淄東廟).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

그렇다면 갈동 등에서 쏟아진 기원전 2세기 유적·유물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조선은 천하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그 시점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있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고조선이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사가 그걸 말해준다. 진시황의 서슬퍼런 치하였음에도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조선에 망명의사를 타진한 연나라인 위만을 받아준 것이 화근이 됐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 고조선 준왕의 첫 상륙지라는 설화가 있다.|한수영 고고문화연구원장 제공

고조선의 준왕(생몰년 미상)은 “제가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생몰년 미상)은 반란을 일으켰고, 준왕은 결국 망명길에 오른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기원전 194년 무렵)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고 했다. 준왕이 망명했다는 그 시기(기원전 194년 무렵)가 바로 기원전 2세기가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전북 지역에는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설화가 여러편 전해진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는 준왕의 첫 상륙지로 알려져 있다.

그곳의 공주산(公主山)은 망명한 준왕의 공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주산의 건넛마을에는 임금(준왕)이 온 곳이라 해서 어래산(御來山)이라 한다.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을 상설전시중인 국립전주박물관. 완주 갈동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과 고운무늬거울 등 2건의 보물이 출품되어 있다.

또하나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마한’조 등은 “고조선 준왕이 마한에서 왕이 된 후 그 후손이 멸절되었고, 지금은 마한사람이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준왕을 비롯한 고조선의 후손이 오래 가지 못해 끊어지고 토착세력이 다시 임금으로 복귀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갈동을 중심으로 한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화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준왕의 후손이 끊어졌다’는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20년만에 찾아본 완주 갈동 유적. 길가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안내석만 덜렁 두고 방치되어 있다. 2003년 도로공사 예정지로 낙점되었다가 청동거푸집 발굴로 현장보존되고 도로노선까지 변경시킨바 있다. 올해로 발굴 20주년을 맞이했는데, 그 흔한 발굴기념 학술대회도 열리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애써 현지보존한 유적 현장을 ‘그 지경’으로 남겨놓다니…. 그러려면 뭐하러 현장을 보존한걸까.|필자촬영

■방치된 갈동유적 현장

기자는 며칠전 20년 전의 기억을 살려 완주 갈동 유적 현장을 찾아가보았다.

2003년 8월초 탁 트인 현장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막 발굴된 따끈따끈한 청동거푸집 세트와 그것이 출토된 유구를 설명하던 한수영 당시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러나 기자는 현장을 한번에 찾지못했다. ‘완주 갈동 유적 440m’라 적혀있는 고동색 팻말을 보고 차를 몰았지만 쉽게 찾지 못했다. 다시 차를 돌려 느릿느릿 좌우를 살피자 허름한 공터 한가운데 쯤 뭔가 글씨를 새겨넣은 듯한 까만색 돌판이 눈에 들어왔다. 긴가민가 해서 차를 좁은 도로에 세워두고 걸어가 보았더니 아! 맞았다.

‘완주 갈동유적’이라는 안내판이었다. ‘이 지역이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이고, 초기철기시대 연구에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라 새겨져 있었다. 기자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중요한 발굴이 올해로 꼭 20주년을 맞이했는데…. 그 흔한 발굴기념 학술대회도 열리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애써 현지보존한 유적 현장을 ‘그 지경’으로 남겨놓다니….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려면 뭐하러 현장을 보존한걸까.(이 기사를 위해 한수영 고고문화연구원장과 국립전주박물관의 정상기 학예실장, 안경숙 학예연구관, 임혜빈·이기현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전주박물관, <고고학으로 밝혀낸 전북 혁신도시>(특별전 도록), 2006

국립전주박물관, <완주 상림리 청동검>(테마전 도록), 2015

국립전주박물관, <청동기·철기>(박물관 소장품 학술총서>, 2022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학술조사보고 46책), 2005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갈동유적Ⅱ>(학술조사보고 116책), 2009

호남문화재연구원, <완주 신풍유적Ⅰ-가 지구>(학술조사총서 180책), 2016

소재윤, ‘초기철기문화의 전래’, <흙속에서 찾은 역사>, 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한수영, ‘아이언 로드, 철기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문헌과 고고학으로 본 전북가야>(호남고고학보 특집호), 호남고고학회, 2020

 

 

도재기 기자입력 2011. 3. 16. 21:08수정 2011. 3. 16. 21:08

'청동기 거푸집' 실체 보니 일제 식민사관 허구 드러나네 (daum.net)

 

'청동기 거푸집' 실체 보니 일제 식민사관 허구 드러나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 교수)에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뒤엎은 아주 귀중한 유물이 있다. 국보 제231호인 청동기 거푸집(용범)이다.일제는 한반도가 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다가

v.daum.net

국보 제231호인 세형동검 거푸집(왼쪽)과 동과(청동꺽창) 거푸집.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우리 역사를 제대로 쓰게 한 청동기 거푸집들의 실체를 밝힌 도록이 출간됐다. 기독교박물관이 지난 2년간 연구성과를 담아 최근 내놓은 < 거푸집과 청동기 > 이다.

매산 김양선 전 숭실대 교수(1907~70)가 수집해 기증한 8종 14건의 이 거푸집들은 전남 영암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존재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한 고고 유물이 왜, 얼마나 귀중한지 이 거푸집들이 확인시키는 셈이다.

박물관 측은 이번 연구 과정에서 거푸집들이 기원전 3세기 후반~기원전 2세기 초, 기원전 3세기 초 등 두 시기에 사용됐다는 점, 가상주조를 통해 나온 청동기를 추적해 실제 유물을 찾은 결과 전남 화순 백암리 유적의 청동꺽창(동과)과 함평 초포리 유적의 청동도끼(동부)가 이 거푸집에서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확인했다. 

 

 

2011.09.21 01:54

[사진] 국보급 청동방울 ‘간두령’ 완주서 발굴 | 중앙일보 (joongang.co.kr)

 

[사진] 국보급 청동방울 ‘간두령’ 완주서 발굴 | 중앙일보

출토지가 분명한 국보급 간두령(竿頭鈴)이 처음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임영진)은 전북 혁신도시 개발사업부지 내 완주 신풍유적 2차 발굴조사에서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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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지가 분명한 국보급 간두령(竿頭鈴)이 처음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임영진)은 전북 혁신도시 개발사업부지 내 완주 신풍유적 2차 발굴조사에서 기원전 2~3세기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왼쪽)에서 간두령 2점과 세형동검 등 청동기 유물을 수습했다고 20일 밝혔다. 간두령은 쌍으로 된 창촉 모양의 청동기 안에 청동 방울이 달린 유물로 제사장이 사용한 의식구로 추정된다. 한수영 책임조사연구원은 “간두령은 대부분 국보·보물 등으로 지정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만 지금까지 출토지가 명확한 예는 없었다”고 말했다.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예기

고고학자 조유전 토지박물관장(67)과 함께 한국사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절대적 사료의 부족에다 난개발까지 겹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 우리 역사의 편린이나마 복원하고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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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안목 덕분에 고철 위기 벗어난 ‘국보’

 

대곡리 팔주령. 새겨넣은 기하학 문양은 지금도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제정일치의 수장이 흔들어 하늘신과 조상신을 불렀을 것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두차례에 걸쳐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예기들. 한꺼번에 국보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자료이다.

2400년 전 어느날. 전남 화순 대곡리에 큰 일이 터졌다. 이 일대를 다스리던 소국의 왕이 붕어(崩御)한 것이었다.

제정일치의 시대, 즉 세상을 다스리면서 천지를 농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어준 일인독존의 왕이 거한 것이다. 제사장이자 왕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장례를 의논한다. 왕은 본향, 즉 천신이 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보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돌로 파서 무덤을 만드는 한편 그 안에는 굴피나무로 통나무관을 만들기로 한다.

우선 통나무 관 밑에는 청동으로 만든 칼 두 자루를 깐다. 액막이용이다. 그런 다음 통나무관에 시신을 누이고 청동신기(神器)들 즉, 청동검과 거울, 방울, 도끼, 새기개 등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이 모두 생전에 제사장이 하늘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킬 때 쓰던 예기들이다. 통나무관을 구덩이에 내리고 돌과 흙을 채웠다.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가득 쌓은 무덤형식은 훗날 적석목곽분이라 일컬어진다. 소국은 또 새로운 왕(제사장)을 세우고 또 다른 시대를 열어간다.

2400년 만에 현현한 소국의 왕

최초 발견자 구씨의 집은 지금 폐가로 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각설하고 2400년 만에 현현(顯現)한 이 청동예기들을 둘러싼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무령왕릉 발굴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던 그 해 여름, 1971년 8월 어느 날.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씨(당시 67세)가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자기 집 북쪽의 담장 밖에 떨어지는 낙수 때문에 물이 고이자 배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땅 속이 비어있는 듯 텅텅 소리가 났다.

‘땅 속에 뭐가 있어서 이렇게 소리가 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씨는 땅을 팠다. 그런데 그 안에 희한한 물건들이 줄줄이 엮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녹 슬고, 흙 묻은 물건들. 하지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마을에 철컥컬컥 소리가 났다. 엿장수의 가윗소리였다. 구씨는 “때마침 잘 됐다”면서 땅속에서 줄줄이 사탕처럼 파낸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건넸다. 이제 엿장수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런데 구씨로부터 무심코 이 철물을 받은 엿장수는 생각할수록 찜찜했다. 온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철물들을 수거하면 그 가운데는 꽤나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들이 우연히 흘러 들어오기도 하지 않는가. 엿장수가 보기에 구씨가 건네준 이 물건들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구씨로부터 들은 바로는 땅을 파니 나온 물건들이라 하지 않는가.

■ 엿장수의 선택

선택의 기로에 선 엿장수는 결국 ‘신고의 길’을 선택하고 전남도청을 찾았다.

“당시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매장문화재는 발견한 즉시 신고해야 하지만 최초 발굴자인 구씨는 매장문화재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야 엿장수가 신고하게 된 거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최초 발견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인 12월24일 조유전 학예사가 청동기 전문가인 윤무병씨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대곡리 현장을 들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유구는 파괴된 상태였다.

“발견 당시의 상황을 구씨로부터 듣고,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고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무령왕릉의 졸속발굴 이후 불과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조유전 학예사 등에 할당된 조사시간은 24일 단 하루, 즉 한나절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빨리빨리 조사’였던 것이다.

여하튼 그때 확인된 청동 잔무늬 거울(정문경·精文鏡) 2점, 팔주령(八珠鈴) 2점, 쌍두령(雙頭鈴)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이듬해 3월2일 한꺼번에 국보(제143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하나같이 획기적인 유물들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국보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하고 신고한 구씨와 엿장수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고자인 엿장수는 사라졌고, 발견자인 구씨는 처음에 신고 없이 엿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 좀 걸리고 해서…. 결국 누구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등록 2008-02-28 21:39수정 2008-02-29 00:38

36년전 못찾은 국보급 청동검 찾았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36년전 못찾은 국보급 청동검 찾았다

자칫 이가 빠질 뻔했던 국보 143호 청동유물 일습이 36년만에 완전한 모양을 갖추게 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은 28일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적석목관묘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 무렵 세형 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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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유물 2자루 재발굴 과정서 발견

청동기 유물 11점(사진 아래 ·국보 143호)

자칫 이가 빠질 뻔했던 국보 143호 청동유물 일습이 36년만에 완전한 모양을 갖추게 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은 28일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적석목관묘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 무렵 세형 청동검 2자루(사진 위)를 공개했다. 이 청동검은 1971년 청동기 유물 11점(사진 아래 ·국보 143호)을 쏟아낸 곳을 재발굴하면서 추가로 찾아낸 것이어서 국보 143호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통영 한산도 망산서 30㎝ 석검 발견…"청동기시대 제사 흔적" | 연합뉴스 (yna.co.kr)

 

통영 한산도 망산서 30㎝ 석검 발견…"청동기시대 제사 흔적"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통영 한산도 망산(해발 293.5m) 정상에서 해상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 간돌검(마제석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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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한산도 망산봉수대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간돌검.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통영 한산도 망산(해발 293.5m) 정상에서 해상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 간돌검(마제석검)이 나왔다.

문화재청은 경상문화재연구원이 한산도 망산봉수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수혈(竪穴, 구덩이) 유적 안에서 가운데에 길게 홈이 나 있는 30㎝ 길이의 돌검 한 점을 찾아냈다고 27일 밝혔다.

홍성우 경상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은 "청동기시대에 풍어와 해상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뒤 돌검을 묻은 것으로 보인다"며 "후대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네 조각으로 분리됐다"고 설명했다.

 

 

[철기유물]

 

입력 :2008-03-27 00:00ㅣ 수정 : 2008-03-27 00:00

한반도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 서울신문 (seoul.co.kr)

 

한반도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한·러 국경서 철기가공작업장 발굴, 한·러 국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70㎞ 떨어진 러시아 바라바시 마을에서 초기철기시대인 BC 7∼5세기의 철기가공작업장이 발굴됐다. 그 동안에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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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국경서 철기가공작업장 발굴

한·러 국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70㎞ 떨어진 러시아 바라바시 마을에서 초기철기시대인 BC 7∼5세기의 철기가공작업장이 발굴됐다.

 
 

그 동안에는 중국에서 BC 5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됐다는 점 때문에 동아시아의 철기문화는 BC 4세기 이전으로 올릴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따라서 이번 발굴 결과는 동아시아의 철기가 중국에서 단선적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비중국적인 또 하나의 철기 전통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국립 부경대 한·러 국경지역 선사유적발굴단은 지난해 6∼7월 연해주 남부 바라바시 마을의 주거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쇠도끼와 쇠화살촉을 비롯한 9점의 철기와 토기를 비롯하여 2000점 남짓한 유물을 찾아냈다.


조사 지역에서 400m와 200m 떨어진 지점에서는 각각 발해유적도 발견되어 이 유적이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라바시 유적에서 돌도끼는 전혀 발견되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반면 철기 유물은 대부분이 쇠도끼와 쇠도끼의 파편이어서 이 시기에 이미 돌도끼의 역할을 쇠도끼가 대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라바시 유적이 속한 얀콥스키문화는 한반도의 고인돌문화와 함께 석검문화권으로 이번에도 석검이 나왔다. 동반 출토된 반월형석도도 동아시아에 폭넓게 분포하는 유물로 한반도와 관련성을 보여 준다.

러시아 고고학계가 연해주지역 철기시대의 기원을 BC 9세기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본 것은 이미 1950년대 후반이다.A P 데레비얀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민족학연구소장은 중앙아시아에는 이른 시기에 철기가 유입되었고, 청동기를 거치지 않은 채 일찍부터 철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남규 한신대 교수는 이번에 출토된 철기가 회주철로 중국보다 적어도 2∼3세기가 빠르다고 보았다. 야철사에서 주철은 BC 5세기에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 정설로, 흑연을 섞어서 철을 만드는 회주철은 백주철보다 발달된 기술로 중국에서는 BC 2세기에 등장하여 BC 1세기에 본격적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에 확인된 철기작업장은 장인들이 단기간 철기를 만들고 시설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뒤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됐다. 이후 이 지역의 발해나 여진의 대장장이들도 자신들의 시설을 완전히 없애고 이동하여 노하우의 유출을 방지했다고 한다.

이번 발굴조사의 단장을 맡은 강인욱 사학과 교수는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 학계의 대응은 중국이 제공하는 자료를 재해석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면서 “연해주 지역의 선사문화 조사는 비중국적인 지역적 전통을 부각시켜 동북공정에 좀 더 발전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경대 발굴단은 올 상반기를 목표로 정식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보고서 발간에 앞서 대략적인 발굴 내용을 고고학 전문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 봄호에 실었다.

 

 

입력 2007. 10. 21. 09:54수정 2007. 10. 21. 10:32

"철기시대 개막 앞당길 획기적 자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제작돼 사용한 것이 확실시 되는 철기 유물이 강원도 홍천에서 출토됐다.

이는 기원전 300년 무렵에 철기가 제작, 사용됨으로써 한반도는 '초기철기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에 일대 의문을 던지게 하는 획기적 성과가 될 전망이다.

강원문화재연구소(연구실장 지현병)는 원주지방국토관리청이 시행하는 국도 44호선 홍천 구성포-두촌간 도로확ㆍ포장 공사구간에 포함된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 1246-16번지 일대 12만6천509㎡(3만8천268평)를 지난해 2월 이후 발굴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한 주거지에서 송곳과 같은 형태의 단조품 철기 1점을 수습했다고 21일 말했다.

 

지현병 실장은 "이 소형 철기는 무문토기가 출토된 58호 주거지에서 유물을 수습한 뒤 바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면서 "주거지 내부에서 수거한 목탄(숯) 시료를 채취해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연구원 AMS연구실에 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640-BC 620년(BP 2540±80, BP 2500±50)이라는 연대를 얻었다"고 전했다.

지 실장은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에 만들었다고 판단되는 주거지에서 철기가 출토된 것은 국내 최초이며, 특히 그 연대가 기원전 7세기로 확인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면서 "이는 철기가 한반도에 출현한 시기를 훨씬 앞당길 수 있는 획기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확립되지 못한 청동기시대의 하한 연대도 결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소 최종모 조사3팀장과 현장책임자 김권중 연구원은 "후대에 만든 철기가 지층 변화 등으로 인해 폐기된 청동기시대 주거지에 휩쓸려 들어갔을 가능성을 두고 유적을 더욱 세밀히 검토한 결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주거지가 활용된 청동기시대 제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철정리Ⅱ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적석 유구(돌무지 흔적) 1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66기ㆍ주구묘(周溝墓) 9기ㆍ지석묘 하부구조 1기ㆍ소형 석관묘 2기, 철기시대 주거지 19기, 삼국시대 석실묘 4기를 비롯한 총 230기 이상의 유구가 확인됐다.

이 중 청동기시대 대형 주구묘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墓制)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구묘란 도랑처럼 땅을 파 사방으로 두른 무덤으로 이번 철정리 유적에서는 이런 주구가 평면형태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장방형이었다.

 

이 중 2호 주구묘는 길이가 무려 43.28m에 이르지만(폭은 3.96m) 훼손된 부분을 감안하면 원래 길이는 45m 가량으로 추정된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이 외에도 철정리 유적에서는 한강 유역 한반도 중부지방 철기시대 문화층에서만 독특하게 출현하는 평면 呂자형과 凸자형인 주거지가 다수 발견되고, 그 중 일부는 벽체 시설과 부엌 아궁이를 비롯한 내부 구조가 완벽하게 남아 있어 당시 가옥 구조 해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 전망이다.

 

 

이슈팀 김희영 기자입력 2012. 10. 31. 17:04수정 2012. 10. 31. 17:04

[머니투데이 이슈팀 김희영기자]

석곽묘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제공

 

충북 청주에서 초기철기시대(B.C. 3~1세기) 석곽묘(石槨墓)와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이 출토됐다.

31일 한국고고환경연구소는 청주 MBC 신사옥과 인접한 충북 청주 가경동 산 51번지 공동주택 신축용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구릉의 정상부와 남쪽 사면 일대로 청동기시대 집자리 7기와 함께 초기철기시대 석곽묘 1기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청동기시대 집 자리를 파괴하고 축조된 석곽묘는 원형(너비 약 3m, 깊이 약 1m)으로 땅을 판 후 그 가운데 길이 23cm, 너비 80cm, 깊이 1m의 관 자리를 다시 판 형태이다. 관 자리 주변에는 약 50cm 높이로 돌을 쌓아 석벽처럼 둘렀으며 목관을 그 가운데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세형동검 1점과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 1점이다. 세형동검은 석곽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발견됐으며 흑색마연토기는 서쪽 모퉁이에서 확인됐다.

조사단은 온전한 형태를 지닌 세형동검이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보고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청주 일대 초기철기시대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유적에 대한 현장설명회는 오는 11월1일 오후 2시 발굴조사 현장에서 개최된다.

세형동검(위)과 흑색마연토기(아래)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제공

 

 

 

중앙일보 입력 2015.10.28 01:26 업데이트 2015.10.28 01:34

신창동 유적서 ‘초기 철기시대 밭’ 국내 첫 확인 | 중앙일보 (joongang.co.kr)

 

신창동 유적서 ‘초기 철기시대 밭’ 국내 첫 확인 | 중앙일보

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장(왼쪽)이 초기 철기시대 생활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사적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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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장(왼쪽)이 초기 철기시대 생활유물들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사적 375호)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조성된 밭 경작지가 국내 최초로 확인됐다.

 광주시와 대한문화재연구원은 27일 “신창동 유적에 대한 16차 발굴조사 결과 BC 3세기~AD 1세기 초기 철기시대에 개간된 밭 경작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삼국시대인 AD 5세기쯤 만들어진 밭이 신창동에서 발견된 적은 있지만 초기 철기시대의 경작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 밭은 완만한 경사의 구릉 하단에 조성됐다. 고랑과 이랑의 수가 10줄로 구성돼 초기 철기시대의 경작 형태와 규모·입지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신창동에서 고대에 조성된 밭이 발견되면서 대규모 농경복합 유적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1963년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고대인들의 분묘와 주거지·가마·저습지 등에 이어 경작지까지 확인됐다. 광주시는 “국내 농업사 연구의 시대적 공백을 메우는 소중한 정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밝혔다.

 

 신창동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생활문화상을 살필 수 있는 유물들이 대량 출토돼 ‘고대사의 타임캡슐’로 불린다.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토기나 공구류·무기류·직물류·발화류·옻칠기술 등 초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창동에서는 1992년부터 저습지와 토기가마·구상유구·주거지 등 고대인들의 생활상이 잇따라 발견됐다. 농경의 기본인 씨앗과 수리시설·목기 등도 발굴돼 선사시대 생활상을 모아놓은 중요 유적지임이 확인됐다. 우리나라 기후 여건상 좀처럼 발굴되지 않았던 목제검과 칼집·활 등 무기류와 괭이·낫·도끼자루 등 농구류가 출토된 점도 관심을 끈다. 유물 대부분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시대의 생활유물들이다.

 이곳에선 청동방울과 현악기·북 등의 악기, 신발골 같은 삼한시대 유물들도 다수 출토됐다. 1997년에는 국내에서 발견된 비단 중 가장 오래된 BC 1세기의 천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BC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칼집 장식품과 AD 5세기에 경작된 밭 유적이 확인됐다. 당시 발굴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개간된 경작지와 관련된 3개의 문화층이 발견돼 시대별 농경생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살펴보는 신창동 고대 문화=신창동 주변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삶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의 역사와 선사시대의 발화 기술을 조명하는 ‘불을 찾아서’라는 테마전을 통해서다. 1995년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우리나라 최초의 발화구를 다음달 22일까지 전시한다. 발화봉과 발화대 세트로 구성된 발화 도구들을 통해 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참나무 발화봉을 느릅나무로 만든 발화대에서 양손으로 비벼 불을 일으키는 회전식 발화 방식을 소개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발화봉을 보관하는 ‘방화봉집’과 불을 보관하고 이동하기 위한 ‘관솔’도 볼거리다. 소나무 가지인 관솔에는 송진이 많이 묻어 있어 불이 잘 붙고 오랫동안 탈 수 있도록 고안됐다. 선사시대의 불씨부터 화약·전기·화력·원자력으로 이어지는 발화 기술의 역사도 보여준다.

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입력 2012-12-27 14:33 최종수정 2012-12-27 16:33 

9大 키워드로 알아본 ‘신창동 유적’ (naver.com)

 

9大 키워드로 알아본 ‘신창동 유적’

국립광주박물관은 25일부터 일반에 공개된 특별전과 신창동 유적의 이해를 돕기 위해 9개의 키워드를 제시했다.1. 우리나라 최초의 저습지 유적 조사 = 영산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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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2000여 년 전 탄화미(위)와 각종 목기(가운데) 및 한국 최고의 비단(아래 왼쪽)과 현악기.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국립광주박물관은 25일부터 일반에 공개된 특별전과 신창동 유적의 이해를 돕기 위해 9개의 키워드를 제시했다.

1. 우리나라 최초의 저습지 유적 조사 = 영산강 변 구릉의 끝자락에 위치한 신창동 유적의 저습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저습지 유적의 조사방법론을 적용해 발굴됐다. 유기물 보존이 양호한 환경인 이곳에서 2000여 년 전 우리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목기와 칠기, 토기류, 동·식물 유체 등 생생한 자료들이 출토됐다.

2. 세계 최대 벼 생산량 = 신창동에서는 벼와 조, 밀, 들깨, 오이, 삼 등의 다양한 재배작물과 155㎝ 두께의 벼껍질 압착층,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이 확인됐다. 특히 밭벼의 재배는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신창동에서 확인된 벼껍질 압착층을 벼의 무게로 환산하면 500여t에 달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신석기시대 농경유적인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 확인된 벼껍질 압착층도 최대 두께 70㎝ (벼 무게로 환산 시 100t 정도)에 불과해 신창동 유적의 벼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조사된 것 가운데 세계 최대의 벼 생산 자료다.

3. 경이로운 목기 =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목기의 수량은 870여 점에 달한다. 무기·농기구·공구·용기·제의구·방직구·악기·수레 부속구·건축부재 및 기타 생활용품 등 종류도 다양하다. 농공구의 자루와 수레바퀴 등은 단단한 참나무를 사용하고 북은 울림이 좋은 버드나무를 이용하는 등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용도에 맞는 적절한 나무를 선정한 것이 특징이다.

4. 칠기의 메카 =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기뿐 아니라 칠기 제작을 알려주는 칠이 묻어 있는 천조각과 칠이 담긴 용기, 칠 주걱 등이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됐다. 이는 2000여 년 전 신창동 일대에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에 유적 주변에 위치한 영산강을 칠천(漆川)이라 칭했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5. 한국 최고의 비단과 베틀 = 신창동 유적에서는 옷감을 짜기 위한 실을 만드는 가락바퀴와 실의 탄력을 일정하게 하기 위한 실감개, 그리고 베를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바디가 출토됐다. 이중 바디는 우리나라 선사·고대 유물 중 유일한 것으로, 이 시기 베틀의 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 자료다. 최근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단의 존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양잠을 알고 옷감을 만들었다’는 마한 관련 기록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6. 최고의 현악기 = 신창동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악기인 슬(瑟)이 출토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삼한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출 때 슬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창동 현악기는 대전 월평동 및 경산 임당 121호분 출토품 및 신라 토우에서 보이는 현악기 등과 유사하다.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바디 등 방직 도구와 발화 도구, 수레바퀴 부속구, 신발골(위부터).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7. 최고의 발화 도구 = 우리나라 최초이자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발화 도구인 발화막대와 발화막대집, 발화대가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됐다. 이와 함께 한쪽에 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는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조각)도 확인됐다.

8. 최고의 수레바퀴 = 신창동 유적에서는 마차와 관련된 바퀴통, 바퀴살, 바퀴축, 가로걸이대 등 수레 관련 부속구가 출토됐다. 전체 크기가 직경 160㎝로 추정되는 나무 수레바퀴의 확인으로,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고 장례에 다 써버린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신창동 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수례 관련 자료로 평양 지역 낙랑의 금속제 수레부속구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9. 세계 최고의 신발골 = 신을 만들 때 사용됐던 틀인 신발골이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됐는데, 이 시기(기원전) 신발을 만들 때 사용된 도구로는 유일한 유물이다. 발등에서 신코가 경사져 있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가죽신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여주=연합뉴스) 강창구 기자 = 경기도 여주군은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공동으로 4일 오후 2시 서울대 박물관 강당에서 '여주 흔암리유적과 쌀문화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학술회의는 1972∼1978년 남한강변인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취락지의 성격과 3천년전 것으로 밝혀진 탄화미(炭化米)를 재평가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주 흔암리유적의 새로운 편년', 안승모 원광대 교수는 '흔암리유적 출토 탄화미 재고', 김장석 서울대 교수는 '청동기시대 흔암리마을의 사회와 경제',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는 '벼농사 전래와 여주 쌍용거줄다리기'를 각각 발표한다.

 

여주 흔암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청동기시대 취락지인 동시에 가장 오래된 탄화미가 발굴된 현장이다.

탄화미는 유적 출토 곡물의 하나로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돼 남아 있는 쌀로 벼농사에 대한 확실한 증거 자료다.

 

 

입력 2016. 9. 1. 16:36수정 2016. 9. 1. 20:56

그 섬은 2000여년전 동아시아의 '홍콩'이었다 (daum.net)

 

그 섬은 2000여년전 동아시아의 '홍콩'이었다

[한겨레] 옛 국제교역항 늑도 재조명한 국립진주박물관의 특별전 늑도에서 나온 한·중·일 교류 유물들 처음 한자리에 성장 배경과 쇠락 이유 등은 여전히 안갯속 “꿈의 섬이었습니다.” 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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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옛 국제교역항 늑도 재조명한 국립진주박물관의 특별전

늑도에서 나온 한·중·일 교류 유물들 처음 한자리에
성장 배경과 쇠락 이유 등은 여전히 안갯속

늑도 전경. 사천시와 창선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꿈의 섬이었습니다.”

김두철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떠올린 ‘그 섬’은 경남 사천시(옛 삼천포시) 앞에 있는 작은 섬 늑도다. 1985~86년 그를 포함한 부산대 조사팀은 섬을 발굴하는 기간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방신문 기자의 제보를 듣고 찾아간 늑도는 조개무지(패총)와 고분, 집터 등으로 가득했다. 유적들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토기조각과 동물뼈, 공예품, 생활도구 등이 쏟아져 나왔다. 김 교수는 “해변에 토기조각들이 모래처럼 깔려 있었고 집들도 토기조각들로 담벽을 쌓을 정도였다. 유물 밀집도가 이렇게 높은 유적들을 평생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늑도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계 토기들이 전시장에 다수 나왔다. 항아리의 모양이나 붙임띠 장식 등이 한반도 토기와 다르다.

 

80년대 발굴에 이어 1998~2003년 추가 조사 결과 늑도에서는 기원전 3~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때까지 토기와 철기, 동전, 공예품 등 각종 유물 수만점이 출토됐고 섬 전체가 패총(조개무지)과 무덤, 건물터로 뒤덮여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운 건 토기 등의 출토품 상당수가 당대 중국과 한반도, 일본 각지에서 온 다국적 유물이란 점이었다. 2000여년 전 늑도가 홍콩처럼 동아시아 굴지의 국제교역항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7월부터 열리고 있는 특별전 ‘국제무역항 늑도와 하루노쓰지’(10월16일까지)는 국내 고고학사상 획기적인 발견 가운데 하나인 늑도 유적과 유물에 얽힌 역사의 뒤안길을 추적한다. 경내 두암관 전시장에는 늑도에서 30년 사이 발굴한 다양한 유물 1000여점과 동시대 비슷한 교역항이던 일본 이키섬 하루노쓰지 유물 168점이 관객을 맞고 있다.

늑도 유적에서 나온 토제 국자들.

 

늑도에서 나온 사람 가면 토제품으로 시작되는 전시 감상의 고갱이는 고대 한·중·일의 토기 삼국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한반도 동남부의 전형적 토기인 삼각형점토대 토기(아가리에 점토띠를 두른 뒤 삼각모양으로 눌러 마무리한 용기)를 비롯해 풍만한 모양이 특징인 중국 낙랑계 토기들, 허리 부근에 두 줄의 점토대를 두른 일본 야요이계 항아리 등이 각각의 진열장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늑도에서 함께 나온 고대 중국 화폐 반량전, 오수전과 저울추, 거래 기록에 쓰였을 석제 벼루 등도 전시해 기원 전후 국제교역의 실상을 일러주고 있다. 고분 옆에 나란히 묻혔던 온전한 개뼈와 점을 치는 복골로 쓰인 사슴뼈 조각, 인골, 그리고 토제 국자 같은 생활 유물들도 내놓아 애완용 개를 키우며 사슴고기를 즐겨 먹은 늑도인들의 삶도 짐작하게 된다.

 

늑도 발굴 유물들은 30년 만에 처음 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늑도 역사에 얽힌 학계 논의를 재조명한다는 의미도 크다. 두차례 대규모 발굴을 벌였지만, 전모를 밝히는 보고서가 제대로 발간되지 않아 섬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늑도 해상교역 세력의 실체는 무엇인지, 교역항으로 번성한 시기가 낙랑군 성립 이후인지, 늑도는 왜 기원후 1세기 갑자기 쇠락했는지 등은 여태껏 안개에 싸여 있다. 이런 사정 탓인지 박물관이 지난 27일 연 늑도유적 학술대회 분위기는 뜨거웠다. 낙랑군 성립 이전에 늑도가 이미 고조선과 일본을 잇는 철 산물의 교역항으로 번영했다는 일부 소장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돼 낙랑군 이후 교역거점설을 고수해온 주류 연구자들과 모처럼 논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고인돌]

2020-05-05 19:43

청주 월오동서 청동기시대 고인돌 20여기 발굴 | 연합뉴스 (yna.co.kr)

고인돌군 하층에 다른 고인돌군 존재…"전국 첫 사례"

마제돌칼·화살촉·단도마연 토기·청동기인 뼈 출토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청주시 상당구 월오동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고인돌 20여기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청주 월오동에서 발굴된 청동기인 뼈

[독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5일 충북도와 발굴기관인 대한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이 고인돌군은 재난안전체험 복합타운 조성 예정 부지에서 발견됐다.

도는 공사를 앞두고 대한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발주, 이 일대 5천㎡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사업비 270억원이 투입될 재난안전체험관은 9천756㎡ 부지에 5개 체험시설과 3개 기타 시설로 계획됐다.

 
 

발굴 조사 결과 다양한 양식의 고인돌 20여기, 청동기인의 전신 뼈, 마제돌칼과 화살촉, 붉고 반들반들한 단도마연 토기 등 청동기시대 유구·유물이 발굴됐다.

청주 월오동에서 발굴된 고인돌

[독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인돌군 20여기는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다양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지역은 골짜기 상류인데, 발굴된 고인돌군 하층에 또 다른 고인돌군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충북도 관계자는 "고인돌군 위로 골짜기 흙이 무너져내려 쌓였고 그 뒤에 다시 고인돌군이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며 "고인돌군이 상하층으로 존재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고인돌 무덤방에서 출토된 청동기인의 전신 뼈는 부분적으로 조각났는데, 뼈 단면에 윤기가 돈다는 점에서 화석화가 진행된 것으로 발굴기관은 보고 있다.

청주 월오동 고인돌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유물

[독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마제돌칼은 두 동강 났지만, 날이 살아있고, 화살촉 역시 날카로운 모양새다.

이 관계자는 "마제돌칼과 단도마연 토기는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의 하나로 지배층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 성격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문화재연구원은 6일 규모가 크고 양식을 제대로 갖춘 고인돌 1기의 덮개돌을 추가로 개봉할 예정이다.

 

 

 

2019.08.26

서구에도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 인천아이뷰 (incheon.go.kr)

 

 

 

전익진입력 2019. 12. 10. 14:18

[단독]연천 민통선은 숨은 '고인돌 보고'..'별자리 고인돌' 주목 (daum.net)

 

[단독]연천 민통선은 숨은 '고인돌 보고'..'별자리 고인돌' 주목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지역에서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2500∼2700년 전 이상 된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특히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곳에서는 완벽하게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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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연천 민통선은 숨은 '고인돌 보고'..'별자리 고인돌' 주목 - kakaoTV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지역에서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2500∼2700년 전 이상 된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특히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곳에서는 완벽하게 보존된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無支石 支石墓: 돌기둥이 없고 바닥에 작은 돌을 깐 고인돌)’가 국내 처음으로 잇따라 확인됐다. 이와 함께 고인돌보다 드물게 발견되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든 ‘선돌’과 곡식을 가는 데 사용한 현무암 ‘연석’, 돌을 부숴 만든 ‘석검’ 등 청동기 시대 유물도 함께 나와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진명산 까마봉 정상 부근인 해발 266m 산비탈에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무지석 지석묘 1개가 있었다. 가로 3m, 세로 2m, 두께 70㎝∼1m 크기다. 운모편마암으로 된 이 고인돌은 같은 재질의 커다란 바위 위에 잔돌을 깔고 놓여 있다. 주변엔 수풀이 우거진 상태였다. 이곳은 휴전선과 불과 5㎞ 거리다. 이곳과 500m 거리에는 7개의 무지석 지석묘가 일렬로 늘어선 채 반쯤 땅에 묻혀 있는 ‘열석’ 방식으로 조성된 고인돌이 보였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무지석 지석묘'. 지난 2일 이병주 국사편찬위원회 경기연천군사료조사위원이 소개하고 있다. 전익진 기자
 
 
청동기 시대 고인돌 발견. 그래픽=신재민 기자
 


원형 보존된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 잇따라 발견
현장을 안내한 이병주 국사편찬위원회 경기연천군사료조사위원은 “국내에서 발견된 무지석 지석묘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 중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도 보존상태라면 고인돌 아래에 석검·석촉 등 청동기시대 부장품이 그대로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형태로 볼 때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5세기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열석 고인돌은 보기 드문 형태의 고인돌 집단지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300여m 거리의 콩밭 옆에도 비슷한 크기의 무지석 지석묘가 있었다. 지석묘 상석 바깥쪽에는 직경 3∼4㎝, 깊이 2∼5㎝ 크기의 구멍인 ‘성혈’ 5개가 나란히 파여 있었다. 이 고인돌 옆에는 자연석으로 된 어른 키 높이 정도인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선돌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선돌'. 전익진 기자
 

“별자리 의미로 뚫어 놓은 ‘성혈’도 상석에 존재”
이병주 위원은 “고인돌 상석에 성혈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이라며 “성혈은 별자리를 의미하거나 주술적 의미로 뚫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고인돌 옆 운무편마암 절벽에서는 7개의 구멍을 일렬로 뚫어 놓은 성혈도 발견됐다”며 “이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 옆 암석에 파여진 7개의 '성혈'.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이병주씨]
 

이병주 위원은 “선돌이 발견된 점을 볼 때 아늑한 분지 지형을 이룬 이곳에 청동기 시대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곡식을 돌로 가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현무암으로 만든 25㎝ 길이 ‘연석’과 사냥할 때 사용했던 10㎝ 길이 ‘석검’도 발견된 점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주거지임이 분명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선 이와 함께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도 발견돼 학술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무너져 상석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전익진 기자
 

특히 선돌 100m 지점에는 받침돌이 양쪽에 있는 북방식 지석묘도 발견됐다. 하지만 이 고인돌은 받침돌이 쓰러진 상태로 상석이 비스듬히 받침돌 위에 놓여 있었다. 500여m 이내 콩밭 주변에도 땅에 묻힌 무지석 지석묘 5개가 보였다. 콩밭 경계 곳곳에도 밭을 개간하며 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무지석 지석묘 상석 6개가 방치돼 있었다.

마을 상징하는 ‘선돌’과 곡식 가는 청동기 유물 ‘연석’도 나와
이곳에서 1㎞ 거리인 연천군 중면 적거리 민통선 내에서는 지난 2005년 7월 국내 처음으로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무지석 지석묘’가 최무장 전 건국대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됐다. (중앙일보 2005년 7월 23일자 10면)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연석'. 전익진 기자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석검'. 전익진 기자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 전익진 기자
 

임진강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동서로 놓인 이 상석은 가로 2.7m, 세로 2m, 두께 25~60㎝ 크기로 바닥과 주변(길이 5.3m, 폭 2.2m)에 돌을 깨서 만든 길이 10~20㎝의 받침돌이 장방형으로 가지런히 깔려 있다.
매끈하게 다듬은 화강편마암으로 이뤄진 상석 윗면에는 동그랗게 구멍을 파서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한 성혈 7개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당시 주변 300여 m 지점 콩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무지석 지석묘 2개를 발견했다. 이 지석묘 상석에선 성혈이 각각 23개와 2개가 패어 있다. 최무장 전 관장은 “상석에 북두칠성을 뜻하는 일곱 성혈을 새긴 것은 드문 일로 학술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연천군 중면 적거리 민통선 내에서 지난 2005년 7월 발견된 별자리를 의미하는 ‘성혈’이 파여진 ‘무지석 지석묘’. 최무장 전 건국대박물관장이 소개하고 있다. 전익진 기자
 

현장을 확인한 이석우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연천 민통선 지역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인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 100여 개가 집단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북방식 고인돌까지 함께 발견된 점은 학술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는 연천 민통선 지역 고인돌에 대한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실시되고, 문화재 및 고인돌 마을로 지정해 보존 및 관리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북한 ‘별자리 고인돌’과 비슷한 ‘성혈’ 발견된 것 의미”
이와 관련, 임효재(전 서울대박물관장) 동아시아고고학연구회장은 “연천 민통선 지역에서 이번에 발견된 무지석 지석묘와 북방식 지석묘 등은 북한 평양 인근 지역을 방문해 답사해본 고인돌과 매우 유사하다”며 “남방식·북방식 고인돌을 동시에 연구하고 고인돌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원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임 회장은 또 “연천 민통선 고인돌과 북한의 고인돌에서 별자리를 상징해 뚫어 놓은 구멍인 ‘성혈’이 동시에 발견되는 점은 의미가 크다”며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부터 별자리를 관찰했다는 천문학적인 우수성을 보여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에서는 이런 고인돌을 ‘별자리 고인돌’이라 이름 붙여 독보적인 선사시대의 천문학 유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회장은 “이에 따라 원형이 잘 보전되고 다수가 분포해 있는 연천 민통선 지역 고인돌과 북한 평양 지역 고인돌을 연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동시에 추진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고 강조했다.

입력 2018. 5. 23. 05:09수정 2018. 5. 23. 08:56

[단독] 백제 고도에서 웬 청동기시대 고인돌? (daum.net)

 

[단독] 백제 고도에서 웬 청동기시대 고인돌?

[한겨레] “어떻게 백제 왕성터에서 이런 유적이 나왔지?” 현장을 답사한 고고학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눈앞에 돌무더기(적석)를 봉분처럼 쌓아 올리고 뚜껑돌(개석)을

v.daum.net

공산성 부근서 지석묘 5기 발견
천년 뒤 백제 집터 같은 지층서 나와
조성 경위 규명 등 학계 숙제로

 

 

2018-07-13 

나주 전원주택단지 개발 현장서 고인돌 무더기 발견 | 세계일보 (segye.com)

 

나주 전원주택단지 개발 현장서 고인돌 무더기 발견

전남 나주시 도래마을 전원주택단지 개발사업 현장에서 고인돌군이 발견됐다.13일 나주시 등에 따르면 지난 9일 나주시 다도면 도래마을 ‘도래지구 신규마을 정비구역 생활환경정비사업’ 현

www.segye.com

 

 

2018.11.24

고인돌에 고추 말리고 미끄럼 타고…거기가 어디? | 중앙일보 (joongang.co.kr)

 

고인돌에 고추 말리고 미끄럼 타고…거기가 어디? | 중앙일보

현대인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www.joongang.co.kr

 

 

 

김경석 기자입력 2017. 10. 16. 16:21수정 2017. 10. 16. 18:37

춘천 개인묘지 덮개돌만 길이 약 5m 고인돌 방치 (daum.net)

 

춘천 개인묘지 덮개돌만 길이 약 5m 고인돌 방치

(춘천=뉴스1) 김경석 기자 = 강원 춘천지역에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보호펜스도 없이 개인묘지 뒷 편에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시역사문화연구회에 따르면 신매리 한 농가

v.daum.net

춘천서 발굴된 고인돌 중 최대규모 예상
시 "비지정 문화재, 토지 소유자 동의없이 발굴 못해"

해당 덮개돌은 청동기 시대 고인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직경 4~6㎝, 깊이 2.5㎝ 크기의 성혈(性穴)이 10개로 나타났다.

문화연구회는 이 덮개돌을 받치기 위한 받침돌은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16일 강원 춘천시 신매리 한 개인묘지 뒤에서 역사문화연구원 관계자가 덮개돌 위에 표시된 성혈(性穴)을 가리키고 있다. 해당 덮개돌에는 직경 4~6cm, 깊이 2.5㎝ 크기의 성혈이 10개로 나타났다. 성혈은 청동기 시대 제작된 고인돌의 특징으로 알려져있다. 2017.10.16/뉴스1 © News1 김경석 기자

 

 

송고시간2016-01-17 07:35

 

 

장영태입력 2014. 11. 20. 18:06수정 2014. 11. 20. 18:06

동해안에서 청동기시대 탁자식 고인돌 발견 (daum.net)

 

동해안에서 청동기시대 탁자식 고인돌 발견

동해안에서 청동기시대 탁자식 고인돌이 발견됐다.경북 울진군은 우리나라 동해안 최초로 청동기시대 탁자식 고인돌 1기가 발견돼 한국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고 20일 밝혔다.이

v.daum.net

 

 

 

입력: 2008-11-19 18:07:41 수정 : 2008-11-19 18:07:41

[기고]오지에서 잠자고 있는 문화재들 | 세계일보 (segye.com)

 

[기고]오지에서 잠자고 있는 문화재들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연구원일전에 전북 임실군 지사면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집단 고인돌군이 발견됐다고 고인돌사학회에서 알려와 급히 현장을 찾았다. 비교적

www.segye.com

 

 

 

박종호 고문 

 | 기사입력 2016/09/11 [16:44]

고조선의 재발견 천제단 '고인돌 벽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고조선의 재발견 천제단 '고인돌 벽화'

고조선의재발견천제단'고인돌벽화'1).위대한단군고조선의재발견2).석팽(石棚)단어의발음해석3).천부벽화와천부사상과유불선4).단군을부정하는역사단체

www.pluskorea.net

 

 

[한국문화탐방] 거석문화, 고인돌(1) < 투고·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천지일보 (newscj.com)

 

[한국문화탐방] 거석문화, 고인돌(1) - 천지일보

신광철 한국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세계적으로 분포된 고인돌, 그 고인돌 문화의 중심은 고대 한국거석문화는 희귀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지 않다. 이집트와 잉카의 피라

www.newscj.com

 

[한국문화탐방] 거석문화, 고인돌(3) < 투고·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천지일보 (newscj.com)  

 

[한국문화탐방] 거석문화, 고인돌(3) - 천지일보

신광철 한국문화콘텐츠연구소 소장 고인돌의 나라, 한국. 고인돌의 역사는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외국 논문에선 고인돌의 최고 연대를 8000년 전까지 잡고 있

www.newscj.com

 

 

입력 2020. 12. 3. 15:41

의정부서 선사시대 선돌 발견..남근·여근석 쌍에 성혈도 (daum.net)

 

의정부서 선사시대 선돌 발견..남근·여근석 쌍에 성혈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3일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산 중턱에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선사시대 선돌이 확인됐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날 더불어민주당 오영환(의정부갑

v.daum.net

문화재제자리찾기 "제사터도 확인..청동기추정"
기존에 알려진 윗·아랫선돌 찾다가 새 선돌 발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3일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산 중턱에서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선사시대 선돌이 확인됐다.

3일 경기 의정부시 녹양동 산기슭에서 청동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선돌'이 발견되었다. 선돌은 선사시대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돌기둥을 땅 위에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세운 거석을 말한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연합뉴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날 더불어민주당 오영환(의정부갑) 의원과 함께 녹양동 산 중턱에서 이 선돌을 찾았다고 밝혔다. 청동기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돌은 선사시대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돌기둥을 땅 위에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세운 거석(巨石)을 말한다.

그동안 의정부 선돌로 알려진 2개와 다른 거석으로, 높이 4∼5m이다. 남근석과 여근석이 쌍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 표면에는 별자리를 나타내는 구멍 ‘성혈’ 흔적도 100여개 새겨져 있었다. 성혈은 선돌에서만 나타나는 흔적이다. 아울로 선돌 앞에는 제사 터도 발견됐다.

기존에는 가능동(윗선돌), 녹양동(아랫선돌) 2개의 선돌이 의정부에 있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의정부시에 문제를 제기한 뒤 마을 주민들을 탐문해 윗·아랫선돌을 찾던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선돌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2015년 08월 13일

광개토대왕비 유래는 선돌인가? (brainmedia.co.kr)

 

광개토대왕비 유래는 선돌인가?

연구에 따르면 선돌(menhir)은 고인돌을 비롯한 돌널무덤, 둘레선돌(stone cirde), 줄선돌(stone alignment)과 함께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한 유형에 속한다. 함북에서 제주까지 전국적인 분포를 하고 있다

www.brainmedia.co.kr

 

 

 

 

출처; 고인골 자료로 본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의 삶과 죽음 - 인문사회 21 - 인문사회 21 - KISS (kstudy.com)

 

고인골 자료로 본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의 삶과 죽음 - 인문사회 21 - 인문사회 21 - KISS

본 연구의 목적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고인골의 발굴현황과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어 한국인 기원문제와 관련된

kiss.kstudy.com

본 연구의 목적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고인골의 발굴현황과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어 한국인 기원문제와 관련된 고조선 주민들의 신체적 특징을 살펴보는데 있다. 고고학·인류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대상인 고인골 자료는 고고학과 만나 과거 사회의 고인구와 장송의례 등을 밝혀냄으로서 옛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사회조직, 관습 등 과거 사회문화를 복원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고인골 자료는 남한에서 고인골이 출토된 유적으로 황석리 고인돌 유적, 정선 아우라지 유적, 춘천 중도 유적, 진주 대평리 어은지구 유적, 창원 진동리 유적, 영월 연당 쌍굴유적 등이 있다. 북한에서는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유적, 무산 범의구석 유적, 회령군 남산리 유적 등지에서 출토된 고인골들이 있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고인골이 출토된 사례는 매우 소수에 불과하고, 또한 정식으로 인골에 대한 분석연구가 시도된 사례도 드문 편이다. 따라서 이들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인골들은 매우 소중한 체질인류학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들의 생물인류학적 특징은 머리뼈의 계측값을 통해 머리뼈높이·길이 지수에서 보이는 높은머리형과 위얼굴 너비·길이 지수의 가운얼굴형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평균신장은 현대인과 비슷하여 키가 큰 편으로 이전 시기인 신석기시대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고조선 주민들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은 요녕·하북지역에서 출토된 머리뼈의 높이는 한반도와 길림지역에서 출토된 머리뼈보다는 높으며, 현대 한국 남자의 높이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머리 길이·높이 지수에서 볼 때, 요녕·하북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 출토된 머리뼈들은 모두 현대 한국인처럼 높은머리를 나타낸다. 반면에 현대중국과 일본인들은 가운머리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 높은머리는 고조선이래로 한반도 주민들의 머리뼈에서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고고학 유적 출토 고인골 자료의 활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이제서야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의 목표인 과거 사람들의 문화복원을 위해 고인골은 학문연구 자료대상이기 이전에 예의를 갖춰 다루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공유 하고, 다음으로 자료의 효과적인 연구조사와 성과를 높이기 위해 고고학자뿐만 아니라 인류학 여러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유전학자, 생화학자 등의 협력과 인식의 공유를 통한 융·복합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잃어버린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중국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 단군신화의 증거…웅녀 여신상

중국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 단군신화의 증거…웅녀 여신상 by milhoon on 10월 16, 2012 in 한반도의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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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유적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고조선과 유적

고조선과 고고학 고조선(古朝鮮)은 신석기시대의 요하문명(遼河文明)을 계승해서 청동시대로 진입하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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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 고조선 철기 발견 - 중국보다 빠르다. - Daum 카페

 

고조선 철기 발견 - 중국보다 빠르다.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 고조선 시대인 BC 7∼5세기에 철기를 만들던 작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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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뿌리, 상고사를 말하다: 고조선과 고인돌 / YTN 사이언스

 

KBS 역사스페셜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4편, 고인돌왕국 고조선 / KBS 2001.10.27 방송

 

선사시대 비밀의 문 고인돌

 

3천년 전, 한반도가 품은 세계적인 수수께끼 4부 청동기시대를 지배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참고자료>

 

고인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Dolmen - Wikipedia

 

돌무덤(石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대한민국의 세계유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의 청동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청동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Mumun pottery period - Wikipedia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제가문화

 

무산 범의구석 유적(茂山 범의구석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평양 남경 유적(平壤 南京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용천 신암리 유적(龍川 新巖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유적별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정선아우라지유적

 

유적별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춘천중도유적

 

속초 조양동 선사유적(束草 朝陽洞 先史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황석리고인돌

 

부여 송국리 선사 취락지(扶餘 松菊里 先史 聚落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驪州 欣巖里 先史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광주 신창동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울주 검단리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창원 진동리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고남리조개무지

 

진주 대평리 유적(晉州 大坪里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제주 삼양동 유적(濟州 三陽洞 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철기시대(鐵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철기 시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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